2014.02.17 16:24

강해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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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 설교학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하자]

 

정 성구박사(칼빈대 석좌교수)

 

1. 설교와 구속사적 해석

 

개혁은 강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설교는 목회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권이며 축복이며 은혜이다. 기독교는 설교의 종교이며 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교회의 강단은 성경적 설교에서 한참 멀어져 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 설교의 복원이 한국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지름길이다. 필자는 불타는 가슴으로 한국 교회의 강단의 정화와 정상화가 가장 급선무로 생각한다. 글을 써 가기에 앞서 필자의 개인적인 배경과 경험을 몇 줄 적어볼까 생각한다. 나는 금년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지 39년째이며 그동안 총신대학교에서만 35년을 그리고 대신 대학교에서 5년을 가르쳤다. 특히, 나는 칼빈주의와 개혁주의 설교학을 교수해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각종 강연회에서 한국 교회는 개혁되어야 하며 그 개혁은 강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을 언제라도 힘 있게 외쳤다. 그리고 강단의 개혁은 바로 목회자 자신이 성경적 설교로 돌아가서, 엉망진창이 되어 잃어버린 강단을 성경적․복음적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진정 성경적으로 돌아가고 복음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구속사적 강해설교가 설교 중에는 가장 성경적이며 안전한 방법이다

 

일찍이 리챠드 리스쳐(Richard Lischer)는 말하기를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이다”라고 했다. 결국 설교도 신학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두말할 필요 없이 강해설교의 지지자이다. 하지만 강해설교도 그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성경관과 신학의 내용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강해설교를 설교방법 중에 제일 안전한 방법으로 생각하면서도 거기다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한다. 필자가 만든 용어이지만「구속사적 강해설교」라야 성경적이며 복음적 설교를 바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구속사적인 안목은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려지게 한다

 

그런데 혹자들은 질문하기를 그러면 구속사적 강해설교 이외의 것은 모두 비성경적이며 적절치 못한 것인가? 라고 공격하는 이도 있다. 또 어떤 이는 구속사적 설교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등한시 하고, 너무 빨리 설교자의 판단에 의해서 본문의 뜻이 결정되는데 대하여 염려와 근심을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첫째 질문은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설교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보는 눈이 먼저 띄어져야 한다는 뜻이고 특히 역사적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역사의 배후에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와 섭리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 설교나 예증적 설교는 모두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님을 먼저 밝히고 싶다. 또 둘째 질문도 역시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문법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충분히 사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문법이나 문장의 전후관계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저자가 그 말씀을 통해서 정작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과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구속사적 설교를 말하기 전에 구속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풀어져야 한다. 성경은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다른 종교의 경전도 인간의 삶에 대한 유익한 교훈이며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구원의 진리도 아닐뿐더러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 불경이나 명신보감은 성경과는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므로,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신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부터 성경적 설교니 구속사적 강해설교니 하는 말과는 상관이 없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의 말씀이고 하나님 자신이 인생을 구원하기 위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하신 구원운동을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에 개입하시고 선지자들을 간섭하여 구원사역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계시 ․ 역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신약과 구약은 통일성이 있고 계속성이 있다는 말이다. 성경신학은 항상 성경의 통일성과 역사성, 특히 계시의 역사성을 바닥에 깔고 있다. 즉 하나님은 태초부터 자신을 계시하시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어두워졌을 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풍성하게 발전되면서 계시되었다. 그런데 이 계시의 중심이 우리의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의 중심점을 보며 역사의 중심점과 목적도 발견하게 된다. 구약성경 전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결국 신약의 계시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약시대에 감추어졌던 계시가 더 명백하게 드러났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의 일반적이고 자연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역사이다. 그래서 구속사적 연구의 초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신․구약의 통일성과 점진성이 전제된다. 즉 구속사란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역사의 축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의 역사에 개입하시며, 그들을 통해 메시야가 오도록 하신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읽고 깊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감동을 받아 체험적임 설교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영적 감동을 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성경의 구조를 잘 이해하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흐름을 먼저 깨닫는 것이 설교자의 몫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라고 한다면 성경의 내용을 가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내 방식대로, 내 느낌대로, 내 체험대로의 해석은 위험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설령 정확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했다고 해도 그 말씀이 성경 전체의 구조 속에서 잘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려는 것은 성경의 구조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명심보감이나 사서삼경과 같은 것이 아니고, 인격적이며 창조주이시며 구속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실 것을 작정하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친히 개입하셔서 그 백성들을 통해서 구속 주이신 메시야가 오시고, 유월절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내다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며 간섭하고 계신다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져야 한다.

 

마태복음 1:1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했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아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마태의 복음은 아브라함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위대한 구속의 역사의 끈을 이어주고 있다. 즉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오게 하기 위함이고 또 그 가운데 다윗 왕통을 통해서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웅장한 메시지이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의 구조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며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이라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고 구속사적으로 해석하고 구속사적으로 설교한다는 표현은 어떤 신학이나 어떤 교파나 교단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사상체계이다. 구속사적 접근은 어느 학자의 의견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구조 자체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구속사적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또 구속사적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예컨대 요한복음 1:45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했다. 이는 당시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이 구약에 대한 해석이자 당시 사람들의 의식구조였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도하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병 고치는 이적을 베푸는 것을 말할 때 <율법에 기록하였고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라고 말함으로 구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스라엘 역사의 향방이 그냥 일반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임을 아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성경해석을 구속사적으로 하고 있다. 즉 요한복음 5:39에 “너희가 성경에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했다. 위의 성경구절에서 보듯이 구약성경 전체의 흐름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음을 확실하게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구속사적인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이자 성경의 구조이며 성경의 요구이다. 설교 중에서도 가장 성경 자체의 뜻을 바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문법적, 역사적, 실존적 해석을 하면서도 구속사적 큰 산맥을 짚어, 구속사적 흐름의 광맥을 캐어들어 갈 때 비로소 성경 저자가 본래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보다 극명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2. 구속사적 설교의 근원

 

설교자의 각오-생명을 걸고 경외심을 가지라

 

앞서 필자는 구속사적 설교가 바로 성경에 근원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성경 그 자체가 그리스도 중심이며 하나님 중심이며 구속의 역사라는 것도 밝힌바 있다. 그래서 성경을 갖고 설교하는 것은 일반적인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고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주어서 그리스도의 은총의 포로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 강단은 어느 때 보다 풍성한 것이 사실이지만 대게 설교자들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교훈을 주거나 웰빙을 강조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이 기독교 신앙인 듯이 보일 때도 있다. 물론 그러한 메시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종교와 기독교는 구별되어야 한다. 종교적인 것이 모두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고, 기독교적이라고 해서 모두 성경적인 것도 아니다. 마땅히 설교자는 자기의 설교에 생명을 걸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역사적 사건을 하나님의 구속사 안목으로 볼 줄 알아야 설교가 된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는 말 그대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과 능력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전한 것이다. 사도행전 7장을 구약의 총론 또는 구약신학의 요약으로 볼 수 있는데 스데반은 구약의 역사적 사건을 하나님의 구속사로 보고 있다. 사실 사도행전을 쓴 의사 누가의 핵심은 베드로나 바울의 위대함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울과 베드로 등의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는지, 주님의 몸된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으며, 어떻게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했는지를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사람이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길과 성령의 능력이 이 성경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사적 설교는 어떤 신학자들의 발상이 아니라 이른바 성경의 맥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만약 설교자들이 이렇게 철저하게 성경에 접근한다면 성경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히브리서를 구약의 강해설교와 구속사 시각의 해석으로 본다

 

그리고 히브리서도 구약의 총론이며 구약신학이라고 할만하다. 특히 히브리서 11장은 구약 전체의 역사를 구속사적으로 보는 눈을 뜨게 한다. 그 중에서도 11:24-26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다. 이 성경은 구약의 강해설교로 볼 수 있는데 철저히 하나님의 구속사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있다. 모세가 애굽의 금은보화를 마다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고난 받기를 원한 이유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봄이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삶과 골고다를 연결시키고 있다. 모세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자기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는 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 중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한 것이로다(요5:39)”라고 했다. 즉 구약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는 예수님 자신의 증거가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해야 할 이유이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구속사 해석의 길이 열렸다

 

사실은 종교개혁 전까지도 이런 성경의 구조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나 칼빈에 와서 성경을 구속사적 시각에서 보는 눈이 열렸다. 칼빈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말하기를 “사도바울은, 성경은 의심할 바 없는 진리이지만 모세가 위대한 웅변가였다거나 이사야가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라고 했다.(Corpus Reformatoium 79:783) 다시 말하면 칼빈의 입장은 구약을 가지고 설교하던 신약의 인물들, 특히 바울은 구약이 인물과 사건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과 존귀를 돌릴 뿐 인간은 다만 성령이 쓰시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생각하기를 설교자의 임무는 인간의 기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한 세기 동안 교회는 16세기까지 잃었던 강단을 다시 찾았다. 종교개혁은 곧 성경의 재발견이자 강단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종교개혁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눈을 뜨게 했다. 종교개혁이 되기까지 로마 카톨릭은 약 1천년 동안 말씀의 종교를 의식적 종교 그리고 형식적 종교로 전락시켜버렸다. 종교개혁은 루터와 칼빈 등 개혁자들을 통해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확신을 갖게 하고 중세시대의 풍유적(allegorical) 해석에서 벗어나서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

 

18세기의 자유주의가 교회를 쇠퇴시키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정착되고 각 나라마다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이 정착되었을 때 18세기 초 구라파에는 이른바 계몽주의 사상이 일어났다. 계몽주의 사상은 곧 합리주의 사상이며 인간의 자율주의 사상을 예찬했다. 인간 이성에 맞는 것이 진리이고 인간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배척했다. 그런데 18세기와 19세기에 창궐했던 계몽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서 신학은 자유주의가 되어버렸다.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의 이적을 믿지도 않고 성경의 초자연을 모두 거부했다. 그래서 신학의 자유주의는 교회의 쇠퇴를 가져왔고 중심을 잡지 못했다.

 

개혁주의자들은 구속사적 설교를 했다

 

한편 복음적인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발언권을 잃어버리고 극소수의 보수주의자로 따돌림을 받았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교회에는 여러 가지 반성이 있었다. 1935년에 화란의 칼빈주의 철학자 헬만 도예베르트(H.Dooyeweerd, 1894-1977)와 볼렌 호번(Th.D.H.Vollenhoven, 1892-1977) 박사 등이 칼빈주의 철학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칼빈주의 철학회에 속한 사람들은 철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경은 무오의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과 삶의 유일한 포준이라고 확신했다. 특히 성경을 설교할 때 종래의 풍유적 설교를 버리고 신구양약의 통일성과 계시의 충족성을 강하게 믿을 뿐 아니라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구속운동의 최종목표인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섭리하시며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개혁은 바로 강단의 개혁이며, 강단의 개혁은 바로 구속사적인 설교에서 찾고자 했다. 물론 이런 구속사적 설교에 대해서 기존의 제목설교나 주제 설교자들로부터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구속사적 설교자는 제목설교나 주제설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었고 어떤 형식의 설교이기 전에 성경을 보는 바른 시각이 열려져 있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한국교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나 논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속사적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확신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은 구속사적 설교 자체를 할 수 없다. 홍수가 났을 때 정작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설교의 홍수시대이다. 정보의 홍수시대에 설교자료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옳게 증거 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구속사적 강해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3. 예증적인 설교에 대한 반성

 

교회사는 곧 설교사이다

 

일찍이 미국의 설교학자 찰스 다간(E.C.Dargan)은 말하기를 ‘교회사는 곧 설교사’라고 했다. 교회의 흥망성쇠는 바로 설교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옳게 설교되어진 때가 바로 교회의 성장기였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증거 되지 못하고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종교가 되었을 때는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이 왔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어떤 때는 설교가 사건을 만들기도 했고, 때로는 사건이 설교를 만들기도 했다. 예컨대 바울, 베드로,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암브로스, 버나드, 위클립, 루터, 칼빈, 낙스, 에드워드, 화이트 필드, 웨슬레, 카이퍼 등의 설교는 그들의 조국과 민족에게 영적부흥과 도덕적인 방면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설교가 그 시대의 거짓된 사상과 윤리에 감염되어 순수한 복음이 훼손되거나 변질된 경우도 많았다. 더구나 신학적 입장과 설교방법 또는 성경관에 따라서는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구속사적 설교방법은 가장 성경적이다

 

필자는 설교방법 중에 구속사적 설교 또는 구속사적 강해설교의 방법이 성경을 가장 성경대로 증거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또 개인적으로 나는 평생토록 강단에 설 때마다 구속사적 성경이해를 통한 진리의 확신이 내 가슴을 뜨겁게 했고 또 그것을 힘 있게 증거 할 수 있었다. 앞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지만 구속사적 설교방법은 성경적인 방법이며 사도들과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과 그리고 개혁주의자들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설교가 편의주의나 세속주의 또는 풍유적(allegorical) 해석방법 등에 의해서 변질되기도 했다. 더구나 최근에는 교회성장을 지상으로 생각한 나머지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말처럼 무슨 방법, 무슨 수를 쓰든지 교회의 부흥만 되면 된다는 생각이 모든 교역자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만을 신학과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는다면, 설교자는 성경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진리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증거 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구속사적 설교는 예증적(모형적) 설교의 반성에서 나왔다

 

구속사적 설교를 말하고자 할 때 대두되는 말은 예증적 설교(例證的 說敎, Exemplary Preaching)이다. 즉 구속사적 설교는 예증적 설교 또 모형적 설교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예증적 설교는 전 세계 모든 설교자들이 공통으로 늘 쓰고 있는 설교의 방법이다. 즉 본문설교나 제목설교를 막론하고 연역적 설교나 귀납적 설교나 이야기식 설교 등 어떤 형태의 설교에서도 예증적 설교를 하고 있다. 예증적 설교 또는 모형적 설교방법은 그 기원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독교 초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늘 하던 설교방법이었다. 미국 칼빈 신학교의 그레이다누스(Greidanus) 박사의 말대로 우리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과거 사건의 의미를 찾아서 현실에 적절하게 적용하고자 할 때는 대개 이러한 예증적 접근방법을 쓰기 쉽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클레멘트(Clement)는 성경을 “윤리적 모범을 보여주는 책”(a book of ethical models)이나 “모형전시장”(picture gallery)으로 생각했다. 또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주장하기를 “설교가들은 역사적 본문을 즐겨 선택하고 청중들로 하여금 그것을 좋은 본보기로 제시하여 따르도록 한다”라고 했다. 이처럼 성경에 대한 예증적 설교 또는 모형적 설교 방법은 중세를 거쳐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졌다.

 

예증적 설교는 윤리 도덕적인 것에 그쳤다

 

특히 역사적 본문을 갖고 설교할 때 이야기 식 설교를 전개하면서 청중들을 매료시키고, 또 성경의 사건내용을 청중들로 하여금 삶의 거울로 받도록 설교했다. 즉 성경의 사건과 인물들을 하나의 모델로 설정하고 그 사건에 나오는 인물의 장․단점, 성공과 실패, 신앙과 불신앙, 순종과 불순종, 사랑과 미움, 아름다움과 추함 등을 설교함으로써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윤리적․도덕적 결단을 내리고 결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를 단순히 윤리적․도덕적인 메시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이 교파를 막론하고 모든 설교자들이 즐겨 쓰는 예증적 설교방법이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삼손, 사무엘, 기드온, 바울, 베드로, 마리아, 빌립 등등, 그들의 삶의 여정, 신앙의 여정, 그들의 내면세계를 분석하고 그들의 성공이유와 실패이유, 그들의 영적상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과 거기에 따른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예증적 설교방법이다. 또 대개의 설교학자들이나 일선 목회자들도 여기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설교는 본시 그렇게 하는 것으로 굳어져 있다. 필자가 총신대에서 설교학과 설교연습을 가르칠 때 학생들의 설교작성 레포트를 보면 거의 100%가 예증적 설교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한국교회 강단의 패턴은 역시 예증적 설교가 그 대종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예증적 설교는 성경의 그리스도 중심의 구조를 잘 전하지 못한다

 

필자는 예증적 설교가 모두 잘못되었다거나 불필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기는 개혁주의 학자들 중에 헤이져(Ph.J.Huijser)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도 예증적 설교자가 많으며, 교회사적으로 예증적 설교의 사례를 자세히 논하고 있다. 또 예증적 설교의 적극 지지자인 다우마(J.Douma)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말했다. 즉, ‘우리 조상들은 구속사가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통일된 구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을 심리학적으로 묘사하고 성경의 인물들이 가졌던 갈등과 시련, 그리고 신앙생활의 강약을 말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성도들의 경험과 오늘날 성도들의 영적 싸움과를 비교하면서 설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성격을 모든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실 다우마의 이런 생각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른바 강해설교에도 강조되고 있다. 즉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 성경본문의 메시지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물을 때 자연히 예증적 설교의 타당성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증적 설교자들은 성경을 읽고 설교함에 있어서 그저 성경내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적용을 하려면 객관성 뿐 아니라 주관성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인간의 반응을 동시에 전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또 앞서 말한 헤이져는 설교학자 상스터(Sangster)의 말을 빌려서, ‘예증적 설교는 복음을 명쾌하게 만들고 주의를 집중시키며 진리를 인상 깊게 심어주고 설교를 흥미 있게 한다’고 주장했다.

 

예증적 설교-인간 중심적인가, 성경적인가?

 

그런데 예증적 설교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지지를 받으며 많은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예증적 설교가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증적 설교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순전히 인간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역사적 사건, 곧 전기적 설교(Biographical Preaching)를 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성격과 특성, 내면세계를 깊이 고찰해서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고자 할 때 그것이 정말 성경적인가 하는 의문이 남게 된다. 모든 교훈적인 것은 아름답고 귀하다. 그리고 모든 교훈적인 것은 인간에게 유익하고 삶의 지표가 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한 분 하나님이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중보자를 주시기로 약속하시고,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메시야를 구주로 세상에 보내시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서삼경이나 명심보감과 비할 수 없고 성경의 인물을 논할 때 마치 세익스피어의 작품 중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고 무슨 교훈을 얻는 식으로 할 수 없다. 성경을 성경으로 보고 하나님의 계시를 계시로 보는 눈이 띄어져야 복음적 설교를 할 수 있지, 성경의 인물들의 장․단점, 신․불신, 선악을 분리해서 어떤 모델을 얻고자 하는 예증적 설교가 과연 합당한가를 묻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예증적 설교문제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구속사적 설교의 확신을 갖게 한다.

 

4. 예증적인 설교의 함정

 

세속사적인 설교를 경계하라

 

앞서 우리는 예증적 설교에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예증적 설교가 모두 틀렸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구속사인데 마치 세속사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고 장단점을 깊이 묵상해서 교훈을 얻고자 할 때는 자칫 성경말씀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계시의 내용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지적하고 싶다. 예컨대 성경의 역사적 본문(historical text)을 갖고 설교할 때 제목을 <아브라함의 신앙>, <이삭의 신앙>, <백부장의 신앙>, <마리아의 신앙>, <삭개오의 신앙> 등으로 정한다. 그리고 성경의 인물들의 삶을 실존적으로 깊이 고찰하고, 그들의 장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의 모범으로, 그들의 실패와 불신앙의 삶이 있다면 버려야 될 것으로 모범을 찾아보는 것이다. 가령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떠나는 것을 용기 있는 결단으로 거창하게 말하고, 그의 신앙과 삶을 조목조목 들어 그의 삶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신앙의 결단의 모범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또 설교자의 예민한 적용을 통해서 큰 교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패턴이 우리 모든 설교자들의 공통적이고 일반화된 설교방법이다.

 

예증설교는 성경의 인물의 장단점을 조사해서 윤리적인 교훈을 얻고자 한다

 

이런 방법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반응으로 적절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대함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대개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귀중성을 증명하고 또 적용하기 위해서 아브라함 링컨을 예화로 끌어오고 그러다가 죠지 워싱턴을 들먹이고, 좀 더 지나면 죠지 부시의 신앙을 말하고, 지미 카터의 신앙을 예로 든다. 그리고 그들이 받았던 용기 있는 신앙과 삶의 모범을 열거하면서 우리도 그와 같이 신앙생활을 함으로 땅 위에서 영육 간에 복 받고 잘 살아야 된다는 식이다. 이는 전형적인 예증적 설교의 방법일 뿐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 강단의 일반적인 추세이다. 이런 설교패턴은 우리의 헌신적 삶을 강조하고 매우 교훈적이고 윤리적인데다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이해하기 쉽다는 큰 장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거의 모든 설교자들이 이 방법을 설교의 정석으로 이해하고 있다.

 

구속사의 주역과 그에 대한 사역을 강조하라

 

하지만 일찍이 대 설교학자 훅스트라(T.Hoekstra)가 그의 책 개혁주의 설교학(Gereformeerde Homiletiek)에서 지적한대로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베드로나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경에 나타난 성경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들은 모두, 한 분 하나님이 한 분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는 중에 사용되었던 하나님의 도구이며 하나님의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찾아오시고 그를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그의 교회를 세우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설명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셉을 설명할 때 요셉의 신앙과 순결한 삶, 그리고 그의 꿈과 비전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 내려가게 하시고 큰 민족을 이루어 고난과 고통 중에 400년 동안 기다리게 하시다가 모세를 앞세워 이스라엘로 하여금 출애굽하도록 하셔서,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시며 심판 주라는 사실을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그토록 웅장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대 드라마에 요셉은 다만 조그마한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신앙과 고결한 삶과 꿈도 본받을 만하더라도 그것이 메시지의 핵심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야곱의 신앙에 대해서 설교한다고 하자. 대개 에서는 먹는 것을 탐하는 육체적인 사람이었으나 야곱은 장자권을 귀중히 여겼던 사람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너무나 소중한 것을 안 나머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기어이 천사와 씨름을 해서라도 복을 받는 야곱의 삶을 본받고자 한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했던 방법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열정을 예찬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도 이 땅에 살면서 야곱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소중히 여겨 악착같이 살아서 믿음의 성공자가 되고 사업의 성공자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큰 은혜와 복을 받자는 식으로 결론이 난다. 이런 설교들은 모두가 희망적이고 교훈적이며 은혜로운 설교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좀 더 살펴보면 앞서 말한 대로 성경은 야곱의 신앙의 위대함을 그리려는 것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스토리를 전하지 말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선포하라

 

창세기 50장 중에 꼭 절반인 25장에서 50장까지 야곱과 관련된 기록이다. 그의 모태에서부터 무덤까지 기나긴 생애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고 그의 마음의 상태까지 자세하게 기술했다. 이에 반해 에녹에 관한 기사는 불과 4절로 간단히 기록되었다.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고 했다. 이렇게 성경은 위대한 인물의 역사를 너무도 간명하게 처리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문제투성이, 허물투성이, 실패투성이, 이중인격자, 그 사람 야곱을 이토록 길게 기록했을까? 우리는 에녹이 삼백년 동안 그토록 깨끗하고 순결하게 하나님과 동행한 삶, 곧 믿음의 삶을 산 것에 대해 알고 싶으나 성경은 오히려 침묵하고 있다. 그저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며 자녀를 키우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 들림을 받았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에녹과 비교해볼 때 야곱은 형편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찌하여 깨끗하고 순결하게 삼백년을 신앙의 승리자로 살았던 에녹에 대한 언급은 극히 간단히 취급하고 허물투성이 야곱에 대해서는 저렇게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그의 생애를 기록했을까? 사실 성경은 야곱의 일대기를 기록해서 야곱의 승리적 삶을 기록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실패하고 넘어지고 연약한 그 사람 야곱을 하나님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사랑하셔서 이스라엘의 족장을 삼으시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위한 준비를 했던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성경은 야곱의 스토리라기보다는 볼품없고 연약한 자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자,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운동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즉 야곱의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필자가 이 시리즈를 이어가면서 여러 차례 강조한 것은 바로 성경을 보는 눈이 띄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도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봐야 보이기 시작하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봐야 이해되어진다. 단순히 성경에 나타난 인물의 장단점을 발견해서 그 사람의 신앙의 결단과 삶을 본받자는 수준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본질에서 멀어지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할 때에도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예증적 설교가 도덕적 설교, 윤리적인 설교, 교훈적 설교로 전락해서 다른 종교가 구별이 어려워지는 경우도 있다.

 

5.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이다

 

리차드 리스쳐(Richard Lischer)는 말하기를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Preaching is final expression of Theology)이라고 말한바 있다. 즉 어떤 설교자는 말하기를 자기는 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다만 받은바 은혜대로 설교한다고 한다. 또 어떤 분은 신학은 좀 자유롭게 하고 신앙은 보수적인 신앙을 갖는다는 사람도 더러 있다. 하지만 이는 이만저만 모순이 아니다. 모든 설교자들의 설교에는 반드시 신학이 포함되어 있고 결국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반드시 설교로 표현된다. 이단의 사상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이단의 설교가 나오고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설교에 자유주의 사상이 나오도록 되어있다. 그런 면에서 리스쳐의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이라는 말은 옳다.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란 것도 결국 설교자의 신학적 입장과 궤를 같이 한다. 설교는 그냥 즉흥적이고 받은바 은혜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과 인간, 중보자 그리스도, 구원 성경관 등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신학적 입장이 있고서야 바른 설교를 할 수 있다. 구속사적 설교는 곧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을 갖는 사람들이 잘 할 수 있는 설교이다. 물론 그것은 성경적 설교이다. 구속사적 설교의 주창자는 모두가 칼빈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인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홀베르다(B.Holwerda), 스킬더(K.Schilder), 베인호프(C.Veenhof) 같은 학자들이다. 물론 그 위로는 요한 칼빈(J.Calvin)을 들 수 있다. 결국 성경을 성경으로 보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속사역을 믿으면 구속사적 설교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의 강조점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 중심사상

 

하나님 중심사상은 단순히 신학적 논리나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설교의 방법론에도 나타나야 하리라고 본다. 구속사적 설교를 하는 사람은 항상 역사적 본문을 취급할 때 인간 편에서의 접근보다는 하나님 편에서의 접근을 최우선으로 시작한다. 즉 어떤 본문을 읽든지 하나님께서 성경의 인물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와 뜻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향해 던지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니만큼 내 쪽에서의 입장으로 도덕적 윤리적 교훈을 얻는 정도의 설교는 성경을 옳게 증거한다고 볼 수 없다. 성경은 명심보감과 비슷한 것도 아니고 사서삼경과 동격의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일차적으로 하나님 중심 시각에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려져야 하리라고 본다.

 

성경의 핵심적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밝혀라

 

화란의 캄펜 신학대학의 창설자이신 기독교 변증학자요, 설교가인 끌라스 스킬더(K.Schilder) 박사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즉 “설교자들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보다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 주된 관심을 갖고 설교하는 사람이 많다. 예컨대 유다, 베드로, 빌라도, 헤롯, 마리아들에게 관해서 설교한다. 특별히 설교자들은 성경인물의 내적인 갈등과 위로, 때로는 완악한 마음 등의 이야기를 부각시키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에게 무엇을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주변인물을 통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확실히 설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스킬더는 구속사적 설교의 의미와 방법을 위의 글에서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이므로 당연히 하나님 중심의 것이어야 하며 하나님 우선의 시각으로 성경을 접근하는 것이 옳다. 물론 성경 기록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를 보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세상에 살도록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 앞에 살도록 했으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저주 아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고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방법을 계시해 주셨다. 그 후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핵심적 구속사역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 자체를 증거 하라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의 구속사에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이 있다. 이를 두 극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속사에는 늘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성경의 골격이며 축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 운동에 대해서 인간의 반응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즉 어떤 사람은 믿음, 용기, 신뢰 또 다른 사람은 불신앙, 불순종, 화, 복 등이다. 사실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중심해서 어떤 모델이나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의 설교 형식이다. 또 그것은 최근에 유행하는 강해설교의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살펴서 윤리적 교훈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도덕적 설교, 율법적 설교에 머물고 만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항상 앞서가시며 전적으로 그의 주권과 의지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단순히 개인이 전기나 국가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사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역사적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당연히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말해야겠지만 하나님 중심사상으로 성경을 보는 눈이 띄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적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자 하는 구원의 의미를 명쾌하게 먼저 드러내야 한다. 그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잘 묘사되고 또 인간적인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구약성경에서 역사적 본문을 갖고 설교할 때 먼저 질문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셨나?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의도하셨는가? 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인간의 반응을 잘 적용함으로서 설교를 할 수가 있다. 이런 원리는 신약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복음서들에는 예수님과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과 그의 사역, 그리고 그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나타내었으며 어떻게 구원을 성취하셨는가를 먼저 앞세워야 한다. 주변 인물의 성격과 행동반응, 신․불신, 순종 또는 불순종에서 어떤 교훈을 배우려는 것은 이차적으로 해도 좋을 것이다. 성경기록의 목적이 하나님이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면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우선적이고 핵심적으로 다루어야 마땅하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의 역사적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어떤 인물의 성격이나 성공적 삶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인물을 통해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 사건에서 삼위 하나님이 우선이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구속사적 설교의 의미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칼빈은 말하기를 “사도 바울은 성경을 의심할 바 없는 진리이지만 모세가 위대한 웅변가였다거나 이사야가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Coupus Reformatioum, 79:783) 즉 칼빈의 입장은 구약을 가지고 설교하던 신약의 인물들 특히 바울은 구약의 인물과 사건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과 존귀를 돌릴 뿐 인간은 다만 성령님이 쓰시는 도구로 이해했다. 그래서 칼빈의 주장은 설교자의 임무가 인간의 무슨 기호나 기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설교를 이끌어내는 방법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Thoecentric) 신학의 틀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다시 요약하면 구속사적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역사적 사건을 설교할 때 삼위 하나님을 항상 우선순위로 놓는 설교방식이다>

 

② 역사적 점진성의 원리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구원사역은 하나님이 하신다

 

구속사적 설교를 하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운동을 구체적인 역사 가운데 진행시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속 역사까지도 그의 구속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구속사는 그 본질적 요소로서 역사성(歷史性)을 가진다. 구속사란 하나님께서 역사의 배후에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며 간섭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역사 속에서 더불어 전개되는 구원의 사역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의 구속의 계획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신다. 그렇기 때문에 구속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주의자는 구속사적 설교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생각할 것이 있다. 역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역사를 강조한다고 해서 필자가 말하는 ‘구속사적’이라는 말과 그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18세기와 19세기 헤겔의 역사주의와 슈라엘마허의 자유주의 감화를 받은 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구속사’와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진다. 그들의 역사 이해는 상대주의(相對主義)였고 역사 비평적 방법이었다. 이 사람들의 태도는 이성(理性) 만능주의자로서 초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모조리 거부하여 기독교의 본질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그래서 이런 역사 비평적 방법으로는 성경의 구속사를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의 초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제거하는 자유주의 또는 현대주의 신앙을 가진 설교자들은 ‘구속사적 설교’가 불가능하다.

 

신정통주의자들의 초역사적 방법론은 기독교를 공중누각의 초월 종교로 바꾸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그것은 칼 빨트(K.Barth)를 중심으로 한 초역사적 방법론이다. 칼 빨트의 초역사적 방법론은 실제로 앞서 있었던 합리주의와 자유주의 역사적 방법의 반동으로 생겨났다. 하지만 빨트는 이른바 Historie와 Geschichte를 구분하면서 Historie는 객관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과거의 역사를 가리킨다면, Geschichte는 실존적 역사를 의미한다고 했다. 바로 이것이 이원론적 방법이며, 빨트의 초역사적 방법론은 구속사를 역사 위에 분리시켜 기독교를 구름 위에 세워진 공중누각 같은 초월종교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칼 빨트의 방법론을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답습하고, 강단에서 그런 생각이 마치 정석인 듯이 설교하고 있다. 하기는 칼 발트의 이런 논리가 매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성경 속에 나타난 20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이 오늘날 나의 실존적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묻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적용의 편의를 위해서 그들은 구속사적 성경진리의 핵심을 부셔버리거나, 객관적 진리를 자기의 체험적인 주관주의로 격하시키는 꼴이 되기 쉽다. 그래서 설교신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게 된다.

 

성경 계시의 사건을 실존적, 체험적으로만 해석하면 주관적으로 격하시키는 꼴이 된다

 

최근에 한국 교회에서 난다 긴다 하는 대설교가들 중에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운동의 역사적 사건을 소홀히 다루면서 흔히 말하는 <적용>과 <실제>를 강조하면서 성경계시의 모든 사건들을 실존적으로 파악해서 나름대로의 교훈을 주려는 사람들이 많다. 거기다가 설교자들은 자기 인기관리나 영웅 주의적 발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성경의 진리가 일반종교의 윤리나 도덕과 비슷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하고 그 말씀이 삶의 실제(praxis)에 관련되어야 하는 것은 설교의 상식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역사 속에 자기를 계시하신 사건 그 자체를 소홀히 다루면서 실존적으로 어떤 교훈만을 받고자 한다면 유일무이한 기독교의 진리를 일반종교로 바꾸는 꼴이 되기 쉽다.

 

성경은 역사성을 지니면서 통일성과 점진성이 있다

 

우리가 성경역사를 살펴볼 때, 역사에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사건들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창조했다. 그러나 그것은 없어져버렸다. 첫 세계는 홍수로 멸망되었다. 이런 수많은 성경의 사건들은 우리가 그런 상황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단지 우리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과거의 사건을 살피면서 그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물어볼 뿐이다. 예수의 탄생은 되풀이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어떤 설교자가 말하기를 오늘날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속에 태어나야 한다고 설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탄생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결정적 사건이 된다. 그러므로 성탄절 설교는 그리스도가 탄생한 일이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설명해야 하겠고 또 의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해야 구속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성경의 구속사는 통일성과 점진성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속사적 설교를 하는 사람은 항상 신구약 66권의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성을 띄면서도 동시에 통일성과 점진성을 가지고 있음을 믿는 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무수히 많은 역사적 사건의 조립이나 편집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역사 즉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역사의 중심에서 구속운동의 통일성을 갖는다

 

여기에 대해서 화란의 캄펜 신학대학의 설립자이고 대 변증학자이면서 설교자인 스킬더(Schilder) 박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즉 구속사의 통일성의 문제는 항상 설교와 연관되어 있다. 개혁주의 성도들은 믿기를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의지로 모든 것을 계획하셨다. 그리고 그 계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구속하셨다. 그러므로 역사는 하나의 통일성을 가지는데 그 통일성은 구속사의 통일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사의 중심에 서 있다. 즉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가 있고 그것은 알파와 오메가로 창세기 첫 장에서 계시록의 마지막장까지 일관된 하나님의 구속 운동의 통일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구속사의 통일성 문제를 교리적으로 또 신학적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실제로 강단에서 설교할 때는 전혀 응용이 안되는 데서 오늘의 설교신학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Schilder, Reformatie Ⅺ, 1931, p.365)

 

구속사는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구속사는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동반하면서 점진적(漸進的)으로 발전되어간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성을 깨닫는 것은 성경신학의 중요한 과제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통일성과 점진성을 전제하고 학문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성경신학이라고 한다. 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장 클라우니(Ed. Clowney) 박사의 말과 같이 “계시의 발전을 연구할 때에 성경신학은 성경 원저자의 단일성과 하나님의 구원과 계시사역의 유기적 연속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구약의 성도들은 메시아의 날을 갈망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던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구속사적 설교방법이란 다른말로 성경신학적 방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성경신학적 설교방법은 설교본문을 설교할 때 이런 원리들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즉 구속사적 설교방법은 성경본문의 의미를 명확히 해줄 뿐 아니라 그 중심메시지를 강조하고 건전한 적용을 가능케 도와준다. 그래서 성경 신학은 구속사적 접근을 전제하고 성경의 통일성과 점진성을 포함하는 것이다

 

③ 구속사적 설교란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역사의 축(軸)으로 보는 것이다

 

성경은 역사를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한 기록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역사적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의 선포, 구원의 계획, 구원의 성취를 핵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건 기록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을 계시의 수용자로 삼고 그들에게 역사를 통해서 구원의 길을 제시한 기록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구원운동의 말씀이고 그것이 성경을 관통하는 중심이다. 예컨대 원시계시인 창세기 3장 15절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하였다. 이 본문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원계시는 더욱 확장되고 풍성하여져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족장들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피 흘리는 제사를 통해서 메시야가 올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피 흘리는 제사를 통해서 속죄함을 받을 수 있음을 계시하였다. 하나님은 다윗 왕통을 통해서 메시야가 올 것을 선언하고,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도록 백성을 가르쳤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과 약속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의 성취자로서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속을 위해 역사 속에 오셨다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유익하고 좋은 말씀의 기록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우리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역사에 함께 하시어 한 분의 중보자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신 역사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씀에서 유대인들의 세계관이 구속사이며, 그 구속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또 요한복음 1장 45절에서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하였다. 이는 구약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정확히 기술하였다. 사도행정 8장 35절에도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고 했다. 집사 빌립의 구약이해는 이사야서에 고난의 종은 바로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시요, 예수가 복음 그 자체라고 했다. 그것이 당시 사람들의 성경관이자 신앙관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 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구약 성경 전체가 자신을 위한 것임을 내외에 천명했고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의 틀 가운데 이해하였다. 그 외에도 모세가 이미 그리스도를 내다보고 애굽의 금 은 보화를 마다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에 동참했으며(히 11:26), 다윗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했다고 썼다.(행 2:25-31) 성경의 구조는 한 결 같이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역사의 축(軸)으로 보고 있다.

 

역사의 축은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진행 된다

 

그리고 그 역사의 한가운데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필자가 다시 한 번 성경의 구속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설교자가 가진 성경관이 옳아야 바른 설교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설교자가 성경에서 단지 권선징악에 대한 문제를 다루거나 윤리적 도덕적인 표준을 얻기 위한 설교만을 한다면 성경의 본질에 접근하기 어렵다. 즉 성경 전체의 넓은 조망 속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성경이 본래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을 현대인들에게 가감 없이 증거해야 한다. 산에 올라가면 동네가 보이고 비행기에서 보면 도시가 다 보이듯이 설교자는 언제나 성경 전체의 넓은 조망 속에서 성경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구속사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가 덮어놓고 천편일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구속사적 설교방법은 어떤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든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명백히 드러내야 할 것이다. 설교자가 이런 접근을 시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어 가졌는가를 확실히 깨닫게 된다.

 

구속사적 선포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동시에 있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말은 단지 죄의 용서나 영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죄가 영혼에만 국한되지 않고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인 것처럼, 구원도 기독교인의 생활의 전 영역에 나타나야 한다. 설교자가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꼭 알아야 될 것은,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욘 2:10) 그러니만큼 설교자가 구원을 설명할 때에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더불어 선포해야 한다. 이런 태도가 설교학자 훅스트라(T. Hoekstra) 박사의 주장처럼 개혁파 설교의 두 가지 원리인 “오직 성경”(Scriptura sola) "성경전부“(Scriptura tota)이다. 성경의 중심축인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아는 사람은 설교할 때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선포한다. 즉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증거하려는 자는 또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도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구원의 말씀을 듣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미워 하시면서도 인간을 구속해 주셔야 하겠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정미소에 가 보면 크고 작은 각종 기계들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것들은 또한 각각의 벨트에 매여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반드시 중심 되는 축이 있다. 이처럼 성경의 역사적 사건 그리고 위대한 메시지들이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축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을 깨닫고 설교하는 것이 구속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6. 구속사적 설교 작성 시 착안 사항

 

설교학적으로 볼 때 설교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방법에는 나름대로의 특색과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 방법만 절대적이고 다른 방법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필자는 앞의 글에서 여러번 ‘모든 설교의 방법 중에서도 구속사적 설교 또는 구속사적 강해설교만이 성경을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설교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임을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필자가 여기서 주장한 구속사적 설교와 지금까지 한국교회 대개의 목회자들이 행하고 있는 제목설교 또는 본문설교와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에 앞서서 구속사적 설교를 할 때 몇 가지 착안사항을 생각해보자.

 

구속사적 설교 작성 시의 착안 사항

구속사적 설교를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전제를 먼저 바닥에 깔아야 한다.

 

①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다

 

첫째, 성경은 언제라도 하나님의 자기 계시(De Openbaring Gods)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계시하셨는가를 먼저 찾고, 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찾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성경 인물의 행위의 잘잘못만을 취급해서 그것으로부터 무슨 교훈적인 것을 얻어낸다면 성경기록의 본래 목적에서 멀어질 수가 있다. 성경에는 많은 사건의 기록이 있지만 모두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계시하고 있다. 즉 성경 기록의 모든 사건 중에 나타나는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구속주로 보여주시고, 그의 구속의 모든 사역은 성경의 모든 사건마다 계시되고 있다.

 

스토리의 주인공의 이야기 보다 그 주인공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을 봐야한다

 

예컨대 우리는 구약성경 가운데 요셉의 이야기를 많이 설교한다. 이 때 이 사건의 초점을 요셉의 꿈에 두고 그것을 주제로 “위대한 비전을 가지라”는 등의 설교를 한다. 또는 요셉과 악한 형들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기도 한다. 이렇게 설교하면 성경 기록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소홀히 다루게 된다. 결국 요셉을 전후한 모든 사건들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다. 이 내용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중심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요셉보다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구속사적 설교를 하는 기초적인 이해이다. 지금까지 한국 강단의 설교 스타일은 성경의 인물을 연구하고 그의 행위, 그의 신앙, 그의 실수와 범죄를 통해서 삶의 지혜와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간증과 설교를 구별할 수 없게 되고 설교가 위인전기처럼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 때 이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가 되시며 창조주요 심판주이심이 명백히 증거 되지 않는다면 비록 멋지고 아름다운 교훈을 준다 해도 성경을 바르게 설교했다고 하기 어렵다. 물론 성경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도 필요하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그 성경의 인물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말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반응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 기록된 인물의 삶과 신앙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요셉에 관해서 설교할 때에도 요셉의 일생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위대함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S.G.De Graaf, Verbonds Geschiedenis(언약사), Baker, Geschiedenis der Openbaring(계시사) 참고)

 

②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한 자기계시

 

둘째로, 구속사적 설교를 할 때의 착안사항은 중보자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함에 있어서, 인간은 죄로 인해 전적으로 부패했으므로 중보자를 통한 은혜의 계시(Openbaring van Genade)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신구양약의 계시의 내용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구속자이심을 계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중보자를 통한 구속이 성경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계시의 점진성을 말한 바 있지만, 그 뜻은 늘 새로운 것이 덧붙여진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과 원리는 언제나 동일하다는 뜻이다. 구약의 모든 사건 속에는 구속의 씨(seed)가 내재되어 있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해야 할 일은 신구약 성경을 살피면서 그 구속의 씨를 밝히 드러내어주는 것이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의 사역은 신약 시대에 와서 시작 되었다기 보다 실은 이미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그의 백성 가운데 자기 자신을 계시할 목적으로 그림자처럼 활동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사건은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고, 구약의 역사는 그의 영이 이루신 위대한 기적이라고 할 만하다.

 

중보자를 통한 인간의 구속이 성경의 중심이다

 

예컨대 우리가 에스더를 가지고 설교한다고 하자. 이 성경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많은 자유주의학자들은 이 성경의 정경됨을 의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단 이 책의 처음부터 중보자가 어떻게 계시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된다. 또 다른 예는 신약 성경 중에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삭개오의 용기 있는 믿음의 열정과 죄의 회개를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삭개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기계시라는 사실을 명백히 할 때 바른 설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설교할 때 삭개오와 같은 성경 인물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자기 몸에 향유를 부은 베다니 마리아의 행위를 “복음이 전파되는 온 세상에 전하여지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녀의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행위를 말하기에 앞서서 마리아의 마음 속에 그렇게 큰 사랑을 불러일으킨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설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리아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투영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우선적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인물에 대해서 설교할 때 주로 그 인물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즉, 그 인물의 신앙과 삶을 통해서 죄는 경고의 본보기로, 그리고 선한 일은 권장사항으로 이른바 권선징악(勸善懲惡)적인 교훈만을 말하기 쉽다. 이것이 예증적 설교 또는 모형적 설교의 함정이며, 제목 설교를 즐겨 사용하는 모든 설교자들이 직면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인물에 일차적인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선포해야 할 것이다.

 

③이스라엘의 언약 속에 자기계시

 

셋째는 구속사적 설교를 할 때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계시는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 속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중보자일 뿐만 아니라 언약의 머리(Hoofd in het Verbond)가 되신다. 설교자들은 설교할 때 예수와 그 주변 인물에 대해서 단순한 이야기를 찾을 경우가 있다. 이 때 자칫하면 실제로는 성경과는 무관한 설교가 될 수도 있다. 가령 앞에서 요셉을 예로 든 바 있지만, 그 이야기의 초점은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 보다는, 요셉을 통한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이 섭리적 목적이 무엇인가를 문제 삼아야 한다. 또 다윗을 말할 때에도 성경이 한 개인으로서의 다윗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은 개인으로서가 아닌 백성의 머리로 묘사되고 있다.

 

다윗보다 요셉보다 하나님이 성경의 중심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윗의 파란만장한 삶 보다 다윗을 다윗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또한 백부장이 자기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을 때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하셨다. 이 말에는 ‘언약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의문에 대한 답이 포함되어 있다. 백부장의 대답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언약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즉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으니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로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5-9)고 했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간청을 들어주셨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언약의 인정을 요구하신다. 우리도 설교할 때 이 언약이 강조되어야 한다. 언약 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들이 가진 것이 특권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임을 깨달아야 한다. 위의 이런 몇 가지 착안사항들은 구속사적 설교를 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7. 구속사적 설교와 일반 설교와의 실제적 비교

 

<예 1>

앞에서 필자는 구속사적 설교를 작성할 때의 착안사항이 무엇인지를 논했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늘 상 하는 제목설교와 구속사적 설교가 어떻게 다른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한국교회의 저명한 부흥사요 목회자로서 교파를 초월해서 한국교회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K 목사의 설교를 생각해보자.

 

그의 대표적 설교 가운데 「사막의 생수」가 있다. 이사야 35:1-7 을 읽고 정리한 「사막의 생수」라는 제목의 대지는

 

1. 사막에는 생수가 없다

2. 사막에는 화초가 없다

3. 사막에는 길이 없다

4. 사막에는 여관이 없다

 

비평-보편적 한국강단의 설교로서 뜨거운 열정, 풍성한 예화, 감화 감동이 있었다.

그러나 그냥 종교적, 도덕적 수준에 머무르는 문제가 있다.

설교자의 튀는 아이디어, 인기전술, 뛰어난 화술로 복음이 가리어진 것이다.

종교적인 것이 모두 복음적이거나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이 4개의 대지로 나누었다. 어떤 평자는 이 설교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 설명과 해석은 본문을 분해한 내용으로서 영감에 찬 표현이라고 했다. 결론은 헤매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주 예수를 믿으면 그 마음에 생수가 솟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실존의 문제이고 구원의 문제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 설교에 대한 위와 같은 평가는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의 공동된 인식인 듯하다. 그러나 K 목사의 이 설교는 전편을 읽어 봐도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은 단 두 줄 뿐이고, 그 다음의 모든 말은 사막과 물에 대한 이야기로서 그 두 단어를 통해서 많은 종교적 교훈을 얻고저 했다. 그리고 청중들이 알아듣기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것이 모두 복음적이라고 할 수 없고, 모든 종교적 감화나 교훈이 성경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강단은 그 풍성한 예화나 그 뜨거운 열정적인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냥 종교적이며 윤리적이며 도덕적으로 머물러 있는데 문제가 있다. 그 보다도 설교자의 튀는 아이디어, 인기전술, 뛰어난 화술로 말미암아 정작 복음이 가리어진 경우도 적지 않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이라 해서 복음적인 것이 아니다

 

하루는 필자가 우연히 라디오 다이얼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어떤 분의 참으로 논리 정연한 설교를 들었다. 아주 매혹적이고 지성인들에게 다가가는 실존적 문제를 다루었다. 예화도 동서고금을 넘나들면서 논리정연하게 엮어갔다. 그런데 마지막 멘트는 이라고 했다. 나는 그 분의 말이 요즘 목사님들의 방송설교와 너무나 흡사해서 잠깐 착각을 일으킨 것이었다. 필자가 이런 경험을 여기 쓰는 것은 오늘의 한국 교회 강단이 논리적이며 윤리적이며 도덕적이어서 흠잡을 데가 없긴 하지만 그것이 스님들의 설법과 구별이 어려운 설교 형태를 지적하고자 함이다. 사실 앞서 말한 <사막의 생수>라는 설교에서 사막의 특징, 사막에 있음직한 상황, 생수의 역할, 생수와 인간과의 관계 등, 여러 가지 인간의 삶, 특히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막이나 생수라는 단어를 갖고 설교자의 한없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여러 가지 유익한 교훈을 설명해 주고 있다. 물론 성경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유익한 교훈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보다는 생명을 주고, 구원을 주고 중보자이며 구속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확신을 주어야 한다.

 

의미-본문, 이사야 35:1-7의 구속사적 진정한 의미

1. 약속의 일깨움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약속을 다시 깨우는 소망

2. 메시지 구조 : “너희 하나님이 오사”“그(예수 그리스도)가 오사”

“너희(인류)를 구하시리라”

특징-메시아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뤄진 변화와 축복을 내다본다.

 

그렇다면 이사야 35장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본문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650여 년 전에 이사야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계시이다. 특히 이 본문은 예언서이긴 해도 문장은 시적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중보자이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보면서, 그 메시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엄청난 기적적인 사건들과 변화를 바라보는 예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다시 일깨워주심으로 큰 소망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영접할 것을 요구한다. 이사야의 메시지는 다름 아닌 “너희 하나님이 오사”,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사35:4)고 하심으로 장차 오실 메시야는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가 곧 그리스도이며 그가 오사 우리를 죄 가운데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이런 메시지는 이사야 53장에 와서 고난의 종 메시아를 예언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마치 갈보리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듯 또는 사진 촬영을 하듯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이 본문의 메시지는 사막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변화와 축복을 이처럼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약속을 바라보는 것은, 택한 백성들에게 실로 가슴을 뛰게 하는 웅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사막이나 물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는 변화와 축복을 보여준다

 

이사야는 광야, 메마른 땅, 사막이 변해서 레바논과 갈멜과 샤론의 아름다움으로 꽃피울 날이 오는데, 이런 변화는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사35:2) 즉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 나올 때 위대한 변화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일찍이 요한이 증거한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는 말씀과 어쩌면 그렇게도 절묘하게 맞는지 알 수 없다.

 

성경의 초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그가 바로 구원의 주이시고 메시야가 되심을 선포하는 행위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오실 메시야를 기뻐하는 것이었다. 이 성경의 내용은 상징적인 시어(詩語)들로 가득찬 시적 표현이다. 하지만 이 성경의 초점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적 축복으로 충만해 있다. 그리고 구원은 인간의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 곧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되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거룩한 길을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해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사35:8) 여기에 복음의 핵심이 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의 교리를 만날 수 있다. 구약성경의 구절이 어느 한 사건의 단독적 파편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약속 가운데 진행되고 그 설교자는 생명을 내어 건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속사적 안목과 신앙생활 교훈으로만 아는 설교와의 간격이 크다

 

필자는 위에서 이사야 35장에서 메시지의 내용을 대략적인 스케치로 살펴보았다. 성경을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보는 사람과 성경을 단순히 무슨 신앙생활에 필요한 교훈 정도를 주는 것으로 알고 자기식대로 제목설교를 하는 사람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만약에 앞서 예를 든 K 목사님의 설교처럼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하는 설교는 신앙생활에 유익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교훈적인 설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가슴을 적시는 구속의 감격을 주고,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에는 너무도 부족하다. 그래서 필자는 이 지면에서 여러번 여러번 구속사적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예 2>

실정-현재, 한국교회 강단 대다수가 풍유적, 예증적 설교로 일관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강해설교가 강조되는 것은 크게 고무적이다. 강해설교의 방법이야말로 성경을 성경대로 해석하는 데 가장 알맞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강해설교도 그 설교자가 가진 성경관과 신학적 입장 또는 선입견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 형식은 강해설교라고 해도 실제로는 대게 풍유적(Allegorical)이며 또는 예증적 설교(Examplary Preaching)가 대부분이다. 설교자가 가진 의식과 목적에 따라서 자의적으로 성경을 끌고 다니면서 하고 싶은 말을 메시지로 담아내는 형국이다. 물론 비록 메시지의 내용이 모두가 기독교적이며, 교훈적이며 또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이라고 할지라도, 그 본문에서 말하는 진정한 복음의 내용을 놓치거나 또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큰 흐름을 간과해 버린다면 곤란할 것이다.

 

분석-본문, 마2:1-12/ 제목, 성탄에 대한 3가지 태도

1. 성탄에 대해 적대적 사랑-헤롯

2. 성탄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종교지도자

3.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사람-동방박사들

비평-완벽한 강해설교의 모델이지만, 구속사적으로 본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본뜻을

증거 하는데 소홀함.

 

그러면 시중에 나와 있는 설교집 중에 어느 분의 설교를 살펴보자. 본문, 마태복음 2:1-12을 읽고 「성탄에 대한 세 가지 태도」라는 설교를 했다. 이 설교의 흐름은 ‘성탄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행태를 알 수 있음’을 전제한다. 이 설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탄에 대한 세 가지 태도를 알게 한 후, 오늘날 우리가 어떤 바람직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이끄는 말로는 ‘오늘날 성탄은 기독교인들만의 명절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명절이 되었기에 모두다 들떠있고 분주하나 이들이 성탄에 대해 갖는 태도를 보면 주로 세 가지로 요약 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은 성탄에 대해 적대적인데 그 사람들의 모형이 바로 헤롯왕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고 에돔 족속이며, 로마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으므로 왕위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던 차에 왕중 왕이 탄생했다는 소문을 들으니 불안하고 당황하고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오늘날도 헤롯과 같은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의 성품을 분석해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성탄에 대해 무관심한데 이런 사람들의 대표는 종교지도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헤롯의 질문에 ‘예수가 베들레헴에 나시고 다스리는 목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들을 말했다. 그리고 성경에 박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경배하지 않는 이유는 무관심 때문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관심하기에 예수를 영접지 못한다. 그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을 몰라서거나 거리 때문이나 날씨가 아니라 무관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고, 내 영혼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보다는 온갖 세속적인 관심에만 집중되어 있기에 정작 예수에는 무관심한 것이 현대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경배한다. 이들의 태도를 바로 동방박사의 태도로 보았다. 동방박사들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으며 먼 거리를 여행하여 귀한 예물을 드렸다. 그러니 오늘날의 성도들도 동방의 박사들같이 믿고 예수를 영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도덕적, 윤리적 설교가 율법주의적 설교로 흐름으로 기복적 설교가 되기 쉽고 생명의 구속적 진리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해 성경적 삶으로 인도하지 못함.

 

위의 설교 요약은 강해 설교가들이 흔히 하는 설교 스타일이다. 이 설교는 매우 복음적이면서도 본문의 전후관계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작성한 완벽한 강해설교의 모델이다. 이 설교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없을 뿐더러, 한국교회 강단에서 늘상 통용되는 설교이므로 모범적 설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위의 설교를 필자가 늘 주장하는 구속사적 설교의 방법과 비교해 보려고 한다. 앞서 예를 든 설교의 방법과 접근은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설교방법이며, 특히 본문 강해설교의 모델이다. 그러나 모든 예증적인 설교에서 그러하듯이 이 설교에서도 본문의 사건 속에 나타난 인물들의 행동과 말, 그리고 그들이 생각했을 것 같은 내용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고자 한다. 이런 교훈적인 설교는 설교자나 듣는 청중이나 다같이 쉽게 이해할 수도 있고 내용도 분명하다. 누구는 이렇게 하다가 저주를 받았으나, 누구누구는 저렇게 하다가 큰 은혜와 복을 받았다는 식이다.

 

예증적 설교를 하다보면 경험에서 얻은 진리가 많아 진다

 

그래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서 복 받게 된 아무개처럼 살아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이는 예증적 설교의 강조점이자 특징이다. 그런데 이런 형식의 설교를 하다 보니 자연히 성경의 예와 유사한 우리의 삶 또는 역사적 인물의 성공적 신앙담을 많이 수집해서 삶의 모범으로 제시하게 된다. 어떤 집사, 어떤 장로는 이러이러한 신앙의 모범을 보이다가 크게 축복받아 잘 살았고, 또 다른 사람은 주님을 배신하고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고 교역자를 멸시하다가 패가망신했다는 식이다. 이런 예는 성도를 교훈하고 지도하는데 퍽 유익하다. 하지만 이런 설교의 문제는 성경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본뜻을 증거 하는데 소홀하고 이른바 도덕적 설교, 윤리적 설교를 함으로써 이른바 율법주의적 설교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설교자가 성경을 읽으면서 오늘의 삶과 연결시켜 적용해 볼 때 동방박사의 열심과 헤롯 등의 반응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속사적 맥락의 이해가 필요하다

-초자연적 사건을 계시/ 나 같은 죄인 사랑 위해 성육신 증거

 

그러나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각할 것은 이 성경의 사건은 동방박사나 별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 보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적인 전체 맥락 속에서 먼저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은 우리의 구주로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오셨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구속운동이 그의 단독적이며 특수한 방법임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인간을 위한 구속운동은 하나님이 준비하셨을 뿐 아니라, 초자연적이며 우주적 사건임을 계시하고 있다. 가령, 별의 출현,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찾아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우주적이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구속 행위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본문의 주인공은 별도 아니고 동방 박사도 아니고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본문의 주인공은 별도 아니고 동방박사도 헤롯도 아니다. 그 본문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나 별이나 제사장이나 헤롯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엑스트라이며 배경이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에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줄거리를 추출하는 것도 귀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어떻게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더 힘 있게 증거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성경의 케리그마를 발견하고서야 설교자의 가슴은 뜨거워질 것이다. 설교자의 가슴이 복음과 진리로 뛰기 전에는 생명 있는 설교가 될 수 없다.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수님께 드린 헌신의 행동도 귀하지만, 동방의 박사들을 베들레헴까지 불러들인 하나님의 웅장한 계획과 섭리를 소리 높여 설교해야 할 것이다.

 

<예 3>

필자는 앞서서 두 차례에 걸쳐 구속사적 설교와 한국교회 강단에서 통용되는 설교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점(点)으로 보지 않고 선(線)으로 볼 줄 아는 눈이 띄어져야 성경이 바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위대한 구속사역을 위해 섭리하시며 간섭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먼저 보고자 했다. 필자는 이번에 다시 한 번 다른 예를 들고자 한다.

 

목회자들이 많이 설교하는 성경본문 중에 창세기 22:1-19까지를 예로 들어보자. 이 본문에 대한 설교자들의 일반적인 접근은 대개 다음과 같다. 제목은 거의 “아브라함의 신앙”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는 의도도 있지만, 아브라함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으로 제사하게 된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허락하실 메시아 탄생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예표하신 어린양을 잡아서 드린 특수한 제사였다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Ⅰ. 아브라함의 신앙의 순종 ① 순종의 자세 ② 순종의 방법 Ⅱ. 하나님의 축복의 응답 ① 이레의 축복 ②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시는 뜻 ③ 아버지의 신앙에 맞는 아들의 순종 Ⅲ. 순종의 결과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강해설교의 기준에도 맞고 본문설교로서도 손색없는 설교이다.

 

또 해방 전 임사순 목사는 “온전한 제물이 되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이 설교도 비슷하다. 그의 설교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이삭은 제물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통해서 신령한 교훈을 받을 수 있는데, 한국에도 어디든지 제단을 쌓을 곳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덧붙이기를 문명퇴치, 교사, 새마을운동, 농촌 지도자로 나가면 그것이 곧 우리의 제단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이 필요한데 그 불은 곧 성령의 불이라는 것이다. 120명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 놓았을 때 그 불은 제단 위에 붙었다는 것이다. 그 불이 웨슬레의 제단으로 한국의 서문 밖 교회로 붙었다는 것이다. 제물이 누구냐?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제물이라는 것이다. 논리의 비약이 많기는 하지만 한국교회의 초기부터 있어온 설교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 초기 교회의 최지덕 목사는 “제물은 어디 있나이까”라는 제목설교를 했다. 그는 ① 아브라함은 복잡한 가정문제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②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③ 제물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등의 대지로 설교하고 있다. 그리고 희생의 제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묻고 “내가 사랑하는 물질을 내가 쓰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내어놓을 때 희생이 되는 것이다. 또한 시간을 바치는 것, 선한 일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는 것,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등이라”고 했다.

 

위에 열거한 창세기 22:1-19에 대한 세 가지 설교는 지금까지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설교의 내용이다. 또 위의 세 가지 유형의 설교들은 매우 보수적이며 복음적인 설교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모든 교파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설교의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설교할 때 설교자가 성경에 대해서 어떤 태도로 임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앞에서 여러번 지적한대로 설교자의 신학과 세계관 그리고 성경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구속하시기 위한 역사로서의 성경을 깊이 깨닫고 연구할 때 성경에 대한 태도는 좀 더 특별해질 것이다. 즉 성경을 읽되 성경신학적으로 또는 구속사적인 시각에서 성경을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의 구속운동-아브라함의 믿음이 최우선이 아니다

 

그러면 이 본문에 대해서 구속사적인 접근 방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최우선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물론 하나님의 구속 운동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을 제외할 필요는 없지만 그 초점을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을 해석하고 깨달음에 있어서 먼저 성경 중 어떤 사건의 인물로부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교훈을 얻어내기에 앞서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속하기로 작정하시고 그것을 역사 속에서 진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사역과 섭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만이 성경의 깊은 진리가 풀려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잘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가신다

 

이 본문의 요점은 아브라함이 드리려는 제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사의 모방이었을 뿐이다. 아브라함이 산을 오르면서 분명히 이삭에게 말했다.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시느니라”(창 22:8) 이 말은 아들의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이 말은 진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친히 제물을 준비하신 것이다. 좀 더 이 본문의 특별한 의미를 좀 더 살핀다면 하나님 스스로가 희생되셨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아들을 제물로 삼으셨던 것이다. 이 아들은 그가 말씀으로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아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아들이다. 궁극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 자체를 희생시킨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할 때 이삭의 희생은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의 모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삭의 희생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를 위해서 그의 독생자를 희생시키신 것이다. 이삭은 다름 아닌 약속의 씨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브라함 개인의 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단순히 하나님의 행위를 모방하였을 따름이다. 하나님이 친히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결과적으로 보면, 한 마리의 수양이 이삭을 대신해서 죽은 것이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신앙 그 이상으로 관심이 옮겨져야 한다. 아브라함은 이미 영적으로 이삭을 바쳤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신앙의 행위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데 인간의 행위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완전한 제물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두 요소 즉,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대속의 방법을 통해서 친히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대속의 원리를 제사제도를 통해서 나타내신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삼고 모든 구원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진실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그가 홀로 이루시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 성경의 본문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만족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를 믿도록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들의 행위로써 축복과 구원을 만들어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완전히 다른 한 제물을 통해서 그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이시려는 계시였다. 위에서 우리는 창세기 22장을 통해 재래식 설교와 구속사적 설교의 방법이 무엇이 다른가를 대강 살펴본 셈이다.

 

글을 마감하면서

 

“교회 역사는 곧 선교 역사이다”/ “설교 없이 구원 없다“

“설교로서 교회의 성패가 갈린다”

 

앞에서 챨스 다간(C.Dargan)이 말한 대로 ‘교회의 역사는 곧 설교의 역사’ 라는 대전제를 그대로 받는다면, 다우마(J.Douma)의 ‘설교 없이 구원 없다’는 말이나, 포사이드(P.T.Forsyth)의 ‘설교로서 교회의 성패가 갈린다’는 말은 다 같은 뜻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성장지상주의에 빠진 나머지 성경적이거나 신학적인 관심보다는 실용적인데만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른바 거룩한 실용주의를 내세워서 목적이 좋으면 수단과 방법은 어떠하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식이 되어버렸다. 이론을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어디까지나 잘 먹혀들어가는 이른바 프락시스(Praxis), 곧 실제적 효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목양의 현장을 성경적인 설교로 되돌려 놓으려는 하나의 시도로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강조해왔던 것이다.

 

성경은 새 생명과 구원을 주고 삼위 하나님을 믿게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설교는 과연 성경의 진리에 보다 철저한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해왔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것은 무오의 말씀이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택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것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면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섭리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그 구원의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어떠하며 구원의 방법은 어떠한 것을 이스라엘의 역사와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을 명심보감이나 사서삼경처럼 인생을 살아가는데 유익하고 보람된 지침을 주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곤란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 교훈을 주는 교과서가 아니고, 새 생명과 구원을 주고 삼위 하나님을 믿게 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한다.

 

예증적 설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속사적 안목에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예증적 설교(例證的 說敎)에 대해서 재고해야 될 것이다. 물론 예증적 설교가 모두 잘못되었다거나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좀 더 능력 있고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을 바로 깨닫게 하는 데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예증적 설교의 특징 중에는 성경에 나타난 인물의 성품과 삶, 그리고 신앙의 유무를 잘 살핀 후에 그의 성품과 신앙과 삶을 오늘날 우리의 삶의 모델로 제시하고자 애쓰는 것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오늘의 청중들에게 크게 유익하고 귀감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경우에는 성경의 인물이나 오늘날의 성도의 삶과 묘하게 연결되면서 많은 간증거리도 낳게 하고, 실제적으로 적용이 용이하다. 또한 설교자 자신도 이런 형식의 설교를 선호하고 아주 쉽게 성경본문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신앙, 이삭의 신앙, 사무엘의 신앙, 백부장의 신앙 등등 성경의 모든 인물의 장점과 단점을 구별해서 그들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고자 한다. 그리되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설교는 설교로되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인 해결을 주려는 데 그칠 염려가 있다. 또 설교자 자신도 그것을 기점으로 해서 자기가 편한 대로 성경이 말하지도 않은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결국은 율법주의적인 설교가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는 - 성경의 방법이요, 종교개혁자들의 방법이며,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방법이다

 

그와 같은 약점을 뛰어넘기 위해서 필자는 끊임없이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제창했다. 구속사적 설교는 필자의 독창적 생각이 아니고 이미 성경의 방법이며 종교개혁자들의 방법이며 근자에 이르러 모든 칼빈주의자들, 아니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설교방법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성경적 설교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려면 설교자의 눈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하나님 중심(God-center)으로 성경을 봐야 성경이 바로 보이고 바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등 모든 인물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의 구속운동과 그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먼저 살피는 것이 핵심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베드로나 삭개오, 마리아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다. 즉 구속사적 성경연구란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를 자연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특별한 구원의 역사이다. 그래서 구속사적 연구의 초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신구양약의 통일성과 점진성이 전제된다. 즉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역사의 축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을 단순히 점(点)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선(線)으로 보는 것이다. 성경은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의 전기나 역사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이므로 구속사적 시각에서의 강해설교가 한국 교회 강단을 더욱 풍요하게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붓을 놓는다.

강해 설교학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하자]

 

정 성구박사(칼빈대 석좌교수)

 

1. 설교와 구속사적 해석

 

개혁은 강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설교는 목회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권이며 축복이며 은혜이다. 기독교는 설교의 종교이며 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교회의 강단은 성경적 설교에서 한참 멀어져 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 설교의 복원이 한국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지름길이다. 필자는 불타는 가슴으로 한국 교회의 강단의 정화와 정상화가 가장 급선무로 생각한다. 글을 써 가기에 앞서 필자의 개인적인 배경과 경험을 몇 줄 적어볼까 생각한다. 나는 금년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지 39년째이며 그동안 총신대학교에서만 35년을 그리고 대신 대학교에서 5년을 가르쳤다. 특히, 나는 칼빈주의와 개혁주의 설교학을 교수해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각종 강연회에서 한국 교회는 개혁되어야 하며 그 개혁은 강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을 언제라도 힘 있게 외쳤다. 그리고 강단의 개혁은 바로 목회자 자신이 성경적 설교로 돌아가서, 엉망진창이 되어 잃어버린 강단을 성경적․복음적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진정 성경적으로 돌아가고 복음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구속사적 강해설교가 설교 중에는 가장 성경적이며 안전한 방법이다

 

일찍이 리챠드 리스쳐(Richard Lischer)는 말하기를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이다”라고 했다. 결국 설교도 신학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두말할 필요 없이 강해설교의 지지자이다. 하지만 강해설교도 그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성경관과 신학의 내용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강해설교를 설교방법 중에 제일 안전한 방법으로 생각하면서도 거기다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한다. 필자가 만든 용어이지만「구속사적 강해설교」라야 성경적이며 복음적 설교를 바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구속사적인 안목은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려지게 한다

 

그런데 혹자들은 질문하기를 그러면 구속사적 강해설교 이외의 것은 모두 비성경적이며 적절치 못한 것인가? 라고 공격하는 이도 있다. 또 어떤 이는 구속사적 설교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등한시 하고, 너무 빨리 설교자의 판단에 의해서 본문의 뜻이 결정되는데 대하여 염려와 근심을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첫째 질문은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설교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보는 눈이 먼저 띄어져야 한다는 뜻이고 특히 역사적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역사의 배후에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와 섭리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 설교나 예증적 설교는 모두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님을 먼저 밝히고 싶다. 또 둘째 질문도 역시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문법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충분히 사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문법이나 문장의 전후관계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저자가 그 말씀을 통해서 정작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과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구속사적 설교를 말하기 전에 구속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풀어져야 한다. 성경은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다른 종교의 경전도 인간의 삶에 대한 유익한 교훈이며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구원의 진리도 아닐뿐더러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 불경이나 명신보감은 성경과는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므로,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신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부터 성경적 설교니 구속사적 강해설교니 하는 말과는 상관이 없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의 말씀이고 하나님 자신이 인생을 구원하기 위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하신 구원운동을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에 개입하시고 선지자들을 간섭하여 구원사역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계시 ․ 역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신약과 구약은 통일성이 있고 계속성이 있다는 말이다. 성경신학은 항상 성경의 통일성과 역사성, 특히 계시의 역사성을 바닥에 깔고 있다. 즉 하나님은 태초부터 자신을 계시하시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어두워졌을 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풍성하게 발전되면서 계시되었다. 그런데 이 계시의 중심이 우리의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의 중심점을 보며 역사의 중심점과 목적도 발견하게 된다. 구약성경 전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결국 신약의 계시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약시대에 감추어졌던 계시가 더 명백하게 드러났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의 일반적이고 자연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역사이다. 그래서 구속사적 연구의 초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신․구약의 통일성과 점진성이 전제된다. 즉 구속사란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역사의 축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의 역사에 개입하시며, 그들을 통해 메시야가 오도록 하신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읽고 깊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감동을 받아 체험적임 설교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영적 감동을 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성경의 구조를 잘 이해하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흐름을 먼저 깨닫는 것이 설교자의 몫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라고 한다면 성경의 내용을 가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내 방식대로, 내 느낌대로, 내 체험대로의 해석은 위험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설령 정확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했다고 해도 그 말씀이 성경 전체의 구조 속에서 잘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려는 것은 성경의 구조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명심보감이나 사서삼경과 같은 것이 아니고, 인격적이며 창조주이시며 구속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실 것을 작정하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친히 개입하셔서 그 백성들을 통해서 구속 주이신 메시야가 오시고, 유월절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내다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며 간섭하고 계신다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져야 한다.

 

마태복음 1:1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했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아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마태의 복음은 아브라함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위대한 구속의 역사의 끈을 이어주고 있다. 즉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오게 하기 위함이고 또 그 가운데 다윗 왕통을 통해서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웅장한 메시지이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의 구조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며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이라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고 구속사적으로 해석하고 구속사적으로 설교한다는 표현은 어떤 신학이나 어떤 교파나 교단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사상체계이다. 구속사적 접근은 어느 학자의 의견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구조 자체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구속사적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또 구속사적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예컨대 요한복음 1:45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했다. 이는 당시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이 구약에 대한 해석이자 당시 사람들의 의식구조였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도하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병 고치는 이적을 베푸는 것을 말할 때 <율법에 기록하였고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라고 말함으로 구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스라엘 역사의 향방이 그냥 일반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임을 아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성경해석을 구속사적으로 하고 있다. 즉 요한복음 5:39에 “너희가 성경에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했다. 위의 성경구절에서 보듯이 구약성경 전체의 흐름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음을 확실하게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구속사적인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이자 성경의 구조이며 성경의 요구이다. 설교 중에서도 가장 성경 자체의 뜻을 바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문법적, 역사적, 실존적 해석을 하면서도 구속사적 큰 산맥을 짚어, 구속사적 흐름의 광맥을 캐어들어 갈 때 비로소 성경 저자가 본래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보다 극명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2. 구속사적 설교의 근원

 

설교자의 각오-생명을 걸고 경외심을 가지라

 

앞서 필자는 구속사적 설교가 바로 성경에 근원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성경 그 자체가 그리스도 중심이며 하나님 중심이며 구속의 역사라는 것도 밝힌바 있다. 그래서 성경을 갖고 설교하는 것은 일반적인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고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주어서 그리스도의 은총의 포로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 강단은 어느 때 보다 풍성한 것이 사실이지만 대게 설교자들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교훈을 주거나 웰빙을 강조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이 기독교 신앙인 듯이 보일 때도 있다. 물론 그러한 메시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종교와 기독교는 구별되어야 한다. 종교적인 것이 모두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고, 기독교적이라고 해서 모두 성경적인 것도 아니다. 마땅히 설교자는 자기의 설교에 생명을 걸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역사적 사건을 하나님의 구속사 안목으로 볼 줄 알아야 설교가 된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는 말 그대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과 능력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전한 것이다. 사도행전 7장을 구약의 총론 또는 구약신학의 요약으로 볼 수 있는데 스데반은 구약의 역사적 사건을 하나님의 구속사로 보고 있다. 사실 사도행전을 쓴 의사 누가의 핵심은 베드로나 바울의 위대함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울과 베드로 등의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는지, 주님의 몸된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으며, 어떻게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했는지를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사람이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길과 성령의 능력이 이 성경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사적 설교는 어떤 신학자들의 발상이 아니라 이른바 성경의 맥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만약 설교자들이 이렇게 철저하게 성경에 접근한다면 성경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히브리서를 구약의 강해설교와 구속사 시각의 해석으로 본다

 

그리고 히브리서도 구약의 총론이며 구약신학이라고 할만하다. 특히 히브리서 11장은 구약 전체의 역사를 구속사적으로 보는 눈을 뜨게 한다. 그 중에서도 11:24-26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다. 이 성경은 구약의 강해설교로 볼 수 있는데 철저히 하나님의 구속사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있다. 모세가 애굽의 금은보화를 마다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고난 받기를 원한 이유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봄이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삶과 골고다를 연결시키고 있다. 모세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자기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는 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 중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한 것이로다(요5:39)”라고 했다. 즉 구약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는 예수님 자신의 증거가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해야 할 이유이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구속사 해석의 길이 열렸다

 

사실은 종교개혁 전까지도 이런 성경의 구조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나 칼빈에 와서 성경을 구속사적 시각에서 보는 눈이 열렸다. 칼빈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말하기를 “사도바울은, 성경은 의심할 바 없는 진리이지만 모세가 위대한 웅변가였다거나 이사야가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라고 했다.(Corpus Reformatoium 79:783) 다시 말하면 칼빈의 입장은 구약을 가지고 설교하던 신약의 인물들, 특히 바울은 구약이 인물과 사건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과 존귀를 돌릴 뿐 인간은 다만 성령이 쓰시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생각하기를 설교자의 임무는 인간의 기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한 세기 동안 교회는 16세기까지 잃었던 강단을 다시 찾았다. 종교개혁은 곧 성경의 재발견이자 강단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종교개혁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눈을 뜨게 했다. 종교개혁이 되기까지 로마 카톨릭은 약 1천년 동안 말씀의 종교를 의식적 종교 그리고 형식적 종교로 전락시켜버렸다. 종교개혁은 루터와 칼빈 등 개혁자들을 통해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확신을 갖게 하고 중세시대의 풍유적(allegorical) 해석에서 벗어나서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

 

18세기의 자유주의가 교회를 쇠퇴시키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정착되고 각 나라마다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이 정착되었을 때 18세기 초 구라파에는 이른바 계몽주의 사상이 일어났다. 계몽주의 사상은 곧 합리주의 사상이며 인간의 자율주의 사상을 예찬했다. 인간 이성에 맞는 것이 진리이고 인간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배척했다. 그런데 18세기와 19세기에 창궐했던 계몽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서 신학은 자유주의가 되어버렸다.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의 이적을 믿지도 않고 성경의 초자연을 모두 거부했다. 그래서 신학의 자유주의는 교회의 쇠퇴를 가져왔고 중심을 잡지 못했다.

 

개혁주의자들은 구속사적 설교를 했다

 

한편 복음적인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발언권을 잃어버리고 극소수의 보수주의자로 따돌림을 받았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교회에는 여러 가지 반성이 있었다. 1935년에 화란의 칼빈주의 철학자 헬만 도예베르트(H.Dooyeweerd, 1894-1977)와 볼렌 호번(Th.D.H.Vollenhoven, 1892-1977) 박사 등이 칼빈주의 철학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칼빈주의 철학회에 속한 사람들은 철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경은 무오의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과 삶의 유일한 포준이라고 확신했다. 특히 성경을 설교할 때 종래의 풍유적 설교를 버리고 신구양약의 통일성과 계시의 충족성을 강하게 믿을 뿐 아니라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구속운동의 최종목표인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섭리하시며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개혁은 바로 강단의 개혁이며, 강단의 개혁은 바로 구속사적인 설교에서 찾고자 했다. 물론 이런 구속사적 설교에 대해서 기존의 제목설교나 주제 설교자들로부터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구속사적 설교자는 제목설교나 주제설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었고 어떤 형식의 설교이기 전에 성경을 보는 바른 시각이 열려져 있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한국교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나 논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속사적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확신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은 구속사적 설교 자체를 할 수 없다. 홍수가 났을 때 정작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설교의 홍수시대이다. 정보의 홍수시대에 설교자료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옳게 증거 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구속사적 강해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3. 예증적인 설교에 대한 반성

 

교회사는 곧 설교사이다

 

일찍이 미국의 설교학자 찰스 다간(E.C.Dargan)은 말하기를 ‘교회사는 곧 설교사’라고 했다. 교회의 흥망성쇠는 바로 설교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옳게 설교되어진 때가 바로 교회의 성장기였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증거 되지 못하고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종교가 되었을 때는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이 왔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어떤 때는 설교가 사건을 만들기도 했고, 때로는 사건이 설교를 만들기도 했다. 예컨대 바울, 베드로,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암브로스, 버나드, 위클립, 루터, 칼빈, 낙스, 에드워드, 화이트 필드, 웨슬레, 카이퍼 등의 설교는 그들의 조국과 민족에게 영적부흥과 도덕적인 방면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설교가 그 시대의 거짓된 사상과 윤리에 감염되어 순수한 복음이 훼손되거나 변질된 경우도 많았다. 더구나 신학적 입장과 설교방법 또는 성경관에 따라서는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구속사적 설교방법은 가장 성경적이다

 

필자는 설교방법 중에 구속사적 설교 또는 구속사적 강해설교의 방법이 성경을 가장 성경대로 증거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또 개인적으로 나는 평생토록 강단에 설 때마다 구속사적 성경이해를 통한 진리의 확신이 내 가슴을 뜨겁게 했고 또 그것을 힘 있게 증거 할 수 있었다. 앞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지만 구속사적 설교방법은 성경적인 방법이며 사도들과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과 그리고 개혁주의자들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설교가 편의주의나 세속주의 또는 풍유적(allegorical) 해석방법 등에 의해서 변질되기도 했다. 더구나 최근에는 교회성장을 지상으로 생각한 나머지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말처럼 무슨 방법, 무슨 수를 쓰든지 교회의 부흥만 되면 된다는 생각이 모든 교역자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만을 신학과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는다면, 설교자는 성경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진리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증거 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구속사적 설교는 예증적(모형적) 설교의 반성에서 나왔다

 

구속사적 설교를 말하고자 할 때 대두되는 말은 예증적 설교(例證的 說敎, Exemplary Preaching)이다. 즉 구속사적 설교는 예증적 설교 또 모형적 설교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예증적 설교는 전 세계 모든 설교자들이 공통으로 늘 쓰고 있는 설교의 방법이다. 즉 본문설교나 제목설교를 막론하고 연역적 설교나 귀납적 설교나 이야기식 설교 등 어떤 형태의 설교에서도 예증적 설교를 하고 있다. 예증적 설교 또는 모형적 설교방법은 그 기원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독교 초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늘 하던 설교방법이었다. 미국 칼빈 신학교의 그레이다누스(Greidanus) 박사의 말대로 우리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과거 사건의 의미를 찾아서 현실에 적절하게 적용하고자 할 때는 대개 이러한 예증적 접근방법을 쓰기 쉽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클레멘트(Clement)는 성경을 “윤리적 모범을 보여주는 책”(a book of ethical models)이나 “모형전시장”(picture gallery)으로 생각했다. 또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주장하기를 “설교가들은 역사적 본문을 즐겨 선택하고 청중들로 하여금 그것을 좋은 본보기로 제시하여 따르도록 한다”라고 했다. 이처럼 성경에 대한 예증적 설교 또는 모형적 설교 방법은 중세를 거쳐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졌다.

 

예증적 설교는 윤리 도덕적인 것에 그쳤다

 

특히 역사적 본문을 갖고 설교할 때 이야기 식 설교를 전개하면서 청중들을 매료시키고, 또 성경의 사건내용을 청중들로 하여금 삶의 거울로 받도록 설교했다. 즉 성경의 사건과 인물들을 하나의 모델로 설정하고 그 사건에 나오는 인물의 장․단점, 성공과 실패, 신앙과 불신앙, 순종과 불순종, 사랑과 미움, 아름다움과 추함 등을 설교함으로써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윤리적․도덕적 결단을 내리고 결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를 단순히 윤리적․도덕적인 메시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이 교파를 막론하고 모든 설교자들이 즐겨 쓰는 예증적 설교방법이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삼손, 사무엘, 기드온, 바울, 베드로, 마리아, 빌립 등등, 그들의 삶의 여정, 신앙의 여정, 그들의 내면세계를 분석하고 그들의 성공이유와 실패이유, 그들의 영적상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과 거기에 따른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예증적 설교방법이다. 또 대개의 설교학자들이나 일선 목회자들도 여기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설교는 본시 그렇게 하는 것으로 굳어져 있다. 필자가 총신대에서 설교학과 설교연습을 가르칠 때 학생들의 설교작성 레포트를 보면 거의 100%가 예증적 설교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한국교회 강단의 패턴은 역시 예증적 설교가 그 대종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예증적 설교는 성경의 그리스도 중심의 구조를 잘 전하지 못한다

 

필자는 예증적 설교가 모두 잘못되었다거나 불필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기는 개혁주의 학자들 중에 헤이져(Ph.J.Huijser)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도 예증적 설교자가 많으며, 교회사적으로 예증적 설교의 사례를 자세히 논하고 있다. 또 예증적 설교의 적극 지지자인 다우마(J.Douma)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말했다. 즉, ‘우리 조상들은 구속사가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통일된 구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을 심리학적으로 묘사하고 성경의 인물들이 가졌던 갈등과 시련, 그리고 신앙생활의 강약을 말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성도들의 경험과 오늘날 성도들의 영적 싸움과를 비교하면서 설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성격을 모든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실 다우마의 이런 생각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른바 강해설교에도 강조되고 있다. 즉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 성경본문의 메시지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물을 때 자연히 예증적 설교의 타당성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증적 설교자들은 성경을 읽고 설교함에 있어서 그저 성경내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적용을 하려면 객관성 뿐 아니라 주관성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인간의 반응을 동시에 전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또 앞서 말한 헤이져는 설교학자 상스터(Sangster)의 말을 빌려서, ‘예증적 설교는 복음을 명쾌하게 만들고 주의를 집중시키며 진리를 인상 깊게 심어주고 설교를 흥미 있게 한다’고 주장했다.

 

예증적 설교-인간 중심적인가, 성경적인가?

 

그런데 예증적 설교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지지를 받으며 많은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예증적 설교가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증적 설교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순전히 인간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역사적 사건, 곧 전기적 설교(Biographical Preaching)를 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성격과 특성, 내면세계를 깊이 고찰해서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고자 할 때 그것이 정말 성경적인가 하는 의문이 남게 된다. 모든 교훈적인 것은 아름답고 귀하다. 그리고 모든 교훈적인 것은 인간에게 유익하고 삶의 지표가 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한 분 하나님이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중보자를 주시기로 약속하시고,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메시야를 구주로 세상에 보내시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서삼경이나 명심보감과 비할 수 없고 성경의 인물을 논할 때 마치 세익스피어의 작품 중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고 무슨 교훈을 얻는 식으로 할 수 없다. 성경을 성경으로 보고 하나님의 계시를 계시로 보는 눈이 띄어져야 복음적 설교를 할 수 있지, 성경의 인물들의 장․단점, 신․불신, 선악을 분리해서 어떤 모델을 얻고자 하는 예증적 설교가 과연 합당한가를 묻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예증적 설교문제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구속사적 설교의 확신을 갖게 한다.

 

4. 예증적인 설교의 함정

 

세속사적인 설교를 경계하라

 

앞서 우리는 예증적 설교에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예증적 설교가 모두 틀렸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구속사인데 마치 세속사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고 장단점을 깊이 묵상해서 교훈을 얻고자 할 때는 자칫 성경말씀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계시의 내용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지적하고 싶다. 예컨대 성경의 역사적 본문(historical text)을 갖고 설교할 때 제목을 <아브라함의 신앙>, <이삭의 신앙>, <백부장의 신앙>, <마리아의 신앙>, <삭개오의 신앙> 등으로 정한다. 그리고 성경의 인물들의 삶을 실존적으로 깊이 고찰하고, 그들의 장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의 모범으로, 그들의 실패와 불신앙의 삶이 있다면 버려야 될 것으로 모범을 찾아보는 것이다. 가령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떠나는 것을 용기 있는 결단으로 거창하게 말하고, 그의 신앙과 삶을 조목조목 들어 그의 삶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신앙의 결단의 모범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또 설교자의 예민한 적용을 통해서 큰 교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패턴이 우리 모든 설교자들의 공통적이고 일반화된 설교방법이다.

 

예증설교는 성경의 인물의 장단점을 조사해서 윤리적인 교훈을 얻고자 한다

 

이런 방법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반응으로 적절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대함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대개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귀중성을 증명하고 또 적용하기 위해서 아브라함 링컨을 예화로 끌어오고 그러다가 죠지 워싱턴을 들먹이고, 좀 더 지나면 죠지 부시의 신앙을 말하고, 지미 카터의 신앙을 예로 든다. 그리고 그들이 받았던 용기 있는 신앙과 삶의 모범을 열거하면서 우리도 그와 같이 신앙생활을 함으로 땅 위에서 영육 간에 복 받고 잘 살아야 된다는 식이다. 이는 전형적인 예증적 설교의 방법일 뿐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 강단의 일반적인 추세이다. 이런 설교패턴은 우리의 헌신적 삶을 강조하고 매우 교훈적이고 윤리적인데다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이해하기 쉽다는 큰 장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거의 모든 설교자들이 이 방법을 설교의 정석으로 이해하고 있다.

 

구속사의 주역과 그에 대한 사역을 강조하라

 

하지만 일찍이 대 설교학자 훅스트라(T.Hoekstra)가 그의 책 개혁주의 설교학(Gereformeerde Homiletiek)에서 지적한대로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베드로나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경에 나타난 성경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들은 모두, 한 분 하나님이 한 분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는 중에 사용되었던 하나님의 도구이며 하나님의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찾아오시고 그를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그의 교회를 세우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설명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셉을 설명할 때 요셉의 신앙과 순결한 삶, 그리고 그의 꿈과 비전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 내려가게 하시고 큰 민족을 이루어 고난과 고통 중에 400년 동안 기다리게 하시다가 모세를 앞세워 이스라엘로 하여금 출애굽하도록 하셔서,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시며 심판 주라는 사실을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그토록 웅장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대 드라마에 요셉은 다만 조그마한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신앙과 고결한 삶과 꿈도 본받을 만하더라도 그것이 메시지의 핵심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야곱의 신앙에 대해서 설교한다고 하자. 대개 에서는 먹는 것을 탐하는 육체적인 사람이었으나 야곱은 장자권을 귀중히 여겼던 사람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너무나 소중한 것을 안 나머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기어이 천사와 씨름을 해서라도 복을 받는 야곱의 삶을 본받고자 한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했던 방법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열정을 예찬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도 이 땅에 살면서 야곱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소중히 여겨 악착같이 살아서 믿음의 성공자가 되고 사업의 성공자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큰 은혜와 복을 받자는 식으로 결론이 난다. 이런 설교들은 모두가 희망적이고 교훈적이며 은혜로운 설교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좀 더 살펴보면 앞서 말한 대로 성경은 야곱의 신앙의 위대함을 그리려는 것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스토리를 전하지 말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선포하라

 

창세기 50장 중에 꼭 절반인 25장에서 50장까지 야곱과 관련된 기록이다. 그의 모태에서부터 무덤까지 기나긴 생애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고 그의 마음의 상태까지 자세하게 기술했다. 이에 반해 에녹에 관한 기사는 불과 4절로 간단히 기록되었다.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고 했다. 이렇게 성경은 위대한 인물의 역사를 너무도 간명하게 처리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문제투성이, 허물투성이, 실패투성이, 이중인격자, 그 사람 야곱을 이토록 길게 기록했을까? 우리는 에녹이 삼백년 동안 그토록 깨끗하고 순결하게 하나님과 동행한 삶, 곧 믿음의 삶을 산 것에 대해 알고 싶으나 성경은 오히려 침묵하고 있다. 그저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며 자녀를 키우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 들림을 받았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에녹과 비교해볼 때 야곱은 형편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찌하여 깨끗하고 순결하게 삼백년을 신앙의 승리자로 살았던 에녹에 대한 언급은 극히 간단히 취급하고 허물투성이 야곱에 대해서는 저렇게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그의 생애를 기록했을까? 사실 성경은 야곱의 일대기를 기록해서 야곱의 승리적 삶을 기록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실패하고 넘어지고 연약한 그 사람 야곱을 하나님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사랑하셔서 이스라엘의 족장을 삼으시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위한 준비를 했던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성경은 야곱의 스토리라기보다는 볼품없고 연약한 자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자,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운동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즉 야곱의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필자가 이 시리즈를 이어가면서 여러 차례 강조한 것은 바로 성경을 보는 눈이 띄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도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봐야 보이기 시작하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봐야 이해되어진다. 단순히 성경에 나타난 인물의 장단점을 발견해서 그 사람의 신앙의 결단과 삶을 본받자는 수준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본질에서 멀어지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할 때에도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예증적 설교가 도덕적 설교, 윤리적인 설교, 교훈적 설교로 전락해서 다른 종교가 구별이 어려워지는 경우도 있다.

 

5.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이다

 

리차드 리스쳐(Richard Lischer)는 말하기를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Preaching is final expression of Theology)이라고 말한바 있다. 즉 어떤 설교자는 말하기를 자기는 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다만 받은바 은혜대로 설교한다고 한다. 또 어떤 분은 신학은 좀 자유롭게 하고 신앙은 보수적인 신앙을 갖는다는 사람도 더러 있다. 하지만 이는 이만저만 모순이 아니다. 모든 설교자들의 설교에는 반드시 신학이 포함되어 있고 결국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반드시 설교로 표현된다. 이단의 사상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이단의 설교가 나오고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설교에 자유주의 사상이 나오도록 되어있다. 그런 면에서 리스쳐의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이라는 말은 옳다.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란 것도 결국 설교자의 신학적 입장과 궤를 같이 한다. 설교는 그냥 즉흥적이고 받은바 은혜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과 인간, 중보자 그리스도, 구원 성경관 등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신학적 입장이 있고서야 바른 설교를 할 수 있다. 구속사적 설교는 곧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을 갖는 사람들이 잘 할 수 있는 설교이다. 물론 그것은 성경적 설교이다. 구속사적 설교의 주창자는 모두가 칼빈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인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홀베르다(B.Holwerda), 스킬더(K.Schilder), 베인호프(C.Veenhof) 같은 학자들이다. 물론 그 위로는 요한 칼빈(J.Calvin)을 들 수 있다. 결국 성경을 성경으로 보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속사역을 믿으면 구속사적 설교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의 강조점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 중심사상

 

하나님 중심사상은 단순히 신학적 논리나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설교의 방법론에도 나타나야 하리라고 본다. 구속사적 설교를 하는 사람은 항상 역사적 본문을 취급할 때 인간 편에서의 접근보다는 하나님 편에서의 접근을 최우선으로 시작한다. 즉 어떤 본문을 읽든지 하나님께서 성경의 인물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와 뜻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향해 던지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니만큼 내 쪽에서의 입장으로 도덕적 윤리적 교훈을 얻는 정도의 설교는 성경을 옳게 증거한다고 볼 수 없다. 성경은 명심보감과 비슷한 것도 아니고 사서삼경과 동격의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일차적으로 하나님 중심 시각에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려져야 하리라고 본다.

 

성경의 핵심적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밝혀라

 

화란의 캄펜 신학대학의 창설자이신 기독교 변증학자요, 설교가인 끌라스 스킬더(K.Schilder) 박사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즉 “설교자들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보다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 주된 관심을 갖고 설교하는 사람이 많다. 예컨대 유다, 베드로, 빌라도, 헤롯, 마리아들에게 관해서 설교한다. 특별히 설교자들은 성경인물의 내적인 갈등과 위로, 때로는 완악한 마음 등의 이야기를 부각시키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에게 무엇을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주변인물을 통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확실히 설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스킬더는 구속사적 설교의 의미와 방법을 위의 글에서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이므로 당연히 하나님 중심의 것이어야 하며 하나님 우선의 시각으로 성경을 접근하는 것이 옳다. 물론 성경 기록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를 보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세상에 살도록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 앞에 살도록 했으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저주 아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고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방법을 계시해 주셨다. 그 후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핵심적 구속사역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 자체를 증거 하라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의 구속사에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이 있다. 이를 두 극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속사에는 늘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성경의 골격이며 축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 운동에 대해서 인간의 반응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즉 어떤 사람은 믿음, 용기, 신뢰 또 다른 사람은 불신앙, 불순종, 화, 복 등이다. 사실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중심해서 어떤 모델이나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의 설교 형식이다. 또 그것은 최근에 유행하는 강해설교의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살펴서 윤리적 교훈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도덕적 설교, 율법적 설교에 머물고 만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항상 앞서가시며 전적으로 그의 주권과 의지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단순히 개인이 전기나 국가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사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역사적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당연히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말해야겠지만 하나님 중심사상으로 성경을 보는 눈이 띄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적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자 하는 구원의 의미를 명쾌하게 먼저 드러내야 한다. 그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잘 묘사되고 또 인간적인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구약성경에서 역사적 본문을 갖고 설교할 때 먼저 질문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셨나?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의도하셨는가? 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인간의 반응을 잘 적용함으로서 설교를 할 수가 있다. 이런 원리는 신약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복음서들에는 예수님과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과 그의 사역, 그리고 그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나타내었으며 어떻게 구원을 성취하셨는가를 먼저 앞세워야 한다. 주변 인물의 성격과 행동반응, 신․불신, 순종 또는 불순종에서 어떤 교훈을 배우려는 것은 이차적으로 해도 좋을 것이다. 성경기록의 목적이 하나님이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면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우선적이고 핵심적으로 다루어야 마땅하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의 역사적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어떤 인물의 성격이나 성공적 삶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인물을 통해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 사건에서 삼위 하나님이 우선이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구속사적 설교의 의미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칼빈은 말하기를 “사도 바울은 성경을 의심할 바 없는 진리이지만 모세가 위대한 웅변가였다거나 이사야가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Coupus Reformatioum, 79:783) 즉 칼빈의 입장은 구약을 가지고 설교하던 신약의 인물들 특히 바울은 구약의 인물과 사건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과 존귀를 돌릴 뿐 인간은 다만 성령님이 쓰시는 도구로 이해했다. 그래서 칼빈의 주장은 설교자의 임무가 인간의 무슨 기호나 기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설교를 이끌어내는 방법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Thoecentric) 신학의 틀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다시 요약하면 구속사적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역사적 사건을 설교할 때 삼위 하나님을 항상 우선순위로 놓는 설교방식이다>

 

② 역사적 점진성의 원리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구원사역은 하나님이 하신다

 

구속사적 설교를 하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운동을 구체적인 역사 가운데 진행시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속 역사까지도 그의 구속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구속사는 그 본질적 요소로서 역사성(歷史性)을 가진다. 구속사란 하나님께서 역사의 배후에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며 간섭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역사 속에서 더불어 전개되는 구원의 사역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의 구속의 계획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신다. 그렇기 때문에 구속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주의자는 구속사적 설교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생각할 것이 있다. 역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역사를 강조한다고 해서 필자가 말하는 ‘구속사적’이라는 말과 그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18세기와 19세기 헤겔의 역사주의와 슈라엘마허의 자유주의 감화를 받은 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구속사’와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진다. 그들의 역사 이해는 상대주의(相對主義)였고 역사 비평적 방법이었다. 이 사람들의 태도는 이성(理性) 만능주의자로서 초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모조리 거부하여 기독교의 본질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그래서 이런 역사 비평적 방법으로는 성경의 구속사를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의 초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제거하는 자유주의 또는 현대주의 신앙을 가진 설교자들은 ‘구속사적 설교’가 불가능하다.

 

신정통주의자들의 초역사적 방법론은 기독교를 공중누각의 초월 종교로 바꾸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그것은 칼 빨트(K.Barth)를 중심으로 한 초역사적 방법론이다. 칼 빨트의 초역사적 방법론은 실제로 앞서 있었던 합리주의와 자유주의 역사적 방법의 반동으로 생겨났다. 하지만 빨트는 이른바 Historie와 Geschichte를 구분하면서 Historie는 객관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과거의 역사를 가리킨다면, Geschichte는 실존적 역사를 의미한다고 했다. 바로 이것이 이원론적 방법이며, 빨트의 초역사적 방법론은 구속사를 역사 위에 분리시켜 기독교를 구름 위에 세워진 공중누각 같은 초월종교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칼 빨트의 방법론을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답습하고, 강단에서 그런 생각이 마치 정석인 듯이 설교하고 있다. 하기는 칼 발트의 이런 논리가 매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성경 속에 나타난 20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이 오늘날 나의 실존적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묻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적용의 편의를 위해서 그들은 구속사적 성경진리의 핵심을 부셔버리거나, 객관적 진리를 자기의 체험적인 주관주의로 격하시키는 꼴이 되기 쉽다. 그래서 설교신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게 된다.

 

성경 계시의 사건을 실존적, 체험적으로만 해석하면 주관적으로 격하시키는 꼴이 된다

 

최근에 한국 교회에서 난다 긴다 하는 대설교가들 중에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운동의 역사적 사건을 소홀히 다루면서 흔히 말하는 <적용>과 <실제>를 강조하면서 성경계시의 모든 사건들을 실존적으로 파악해서 나름대로의 교훈을 주려는 사람들이 많다. 거기다가 설교자들은 자기 인기관리나 영웅 주의적 발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성경의 진리가 일반종교의 윤리나 도덕과 비슷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하고 그 말씀이 삶의 실제(praxis)에 관련되어야 하는 것은 설교의 상식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역사 속에 자기를 계시하신 사건 그 자체를 소홀히 다루면서 실존적으로 어떤 교훈만을 받고자 한다면 유일무이한 기독교의 진리를 일반종교로 바꾸는 꼴이 되기 쉽다.

 

성경은 역사성을 지니면서 통일성과 점진성이 있다

 

우리가 성경역사를 살펴볼 때, 역사에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사건들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창조했다. 그러나 그것은 없어져버렸다. 첫 세계는 홍수로 멸망되었다. 이런 수많은 성경의 사건들은 우리가 그런 상황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단지 우리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과거의 사건을 살피면서 그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물어볼 뿐이다. 예수의 탄생은 되풀이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어떤 설교자가 말하기를 오늘날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속에 태어나야 한다고 설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탄생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결정적 사건이 된다. 그러므로 성탄절 설교는 그리스도가 탄생한 일이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설명해야 하겠고 또 의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해야 구속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성경의 구속사는 통일성과 점진성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속사적 설교를 하는 사람은 항상 신구약 66권의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성을 띄면서도 동시에 통일성과 점진성을 가지고 있음을 믿는 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무수히 많은 역사적 사건의 조립이나 편집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역사 즉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역사의 중심에서 구속운동의 통일성을 갖는다

 

여기에 대해서 화란의 캄펜 신학대학의 설립자이고 대 변증학자이면서 설교자인 스킬더(Schilder) 박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즉 구속사의 통일성의 문제는 항상 설교와 연관되어 있다. 개혁주의 성도들은 믿기를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의지로 모든 것을 계획하셨다. 그리고 그 계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구속하셨다. 그러므로 역사는 하나의 통일성을 가지는데 그 통일성은 구속사의 통일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사의 중심에 서 있다. 즉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가 있고 그것은 알파와 오메가로 창세기 첫 장에서 계시록의 마지막장까지 일관된 하나님의 구속 운동의 통일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구속사의 통일성 문제를 교리적으로 또 신학적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실제로 강단에서 설교할 때는 전혀 응용이 안되는 데서 오늘의 설교신학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Schilder, Reformatie Ⅺ, 1931, p.365)

 

구속사는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구속사는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동반하면서 점진적(漸進的)으로 발전되어간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성을 깨닫는 것은 성경신학의 중요한 과제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통일성과 점진성을 전제하고 학문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성경신학이라고 한다. 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장 클라우니(Ed. Clowney) 박사의 말과 같이 “계시의 발전을 연구할 때에 성경신학은 성경 원저자의 단일성과 하나님의 구원과 계시사역의 유기적 연속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구약의 성도들은 메시아의 날을 갈망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던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구속사적 설교방법이란 다른말로 성경신학적 방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성경신학적 설교방법은 설교본문을 설교할 때 이런 원리들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즉 구속사적 설교방법은 성경본문의 의미를 명확히 해줄 뿐 아니라 그 중심메시지를 강조하고 건전한 적용을 가능케 도와준다. 그래서 성경 신학은 구속사적 접근을 전제하고 성경의 통일성과 점진성을 포함하는 것이다

 

③ 구속사적 설교란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역사의 축(軸)으로 보는 것이다

 

성경은 역사를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한 기록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역사적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의 선포, 구원의 계획, 구원의 성취를 핵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건 기록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을 계시의 수용자로 삼고 그들에게 역사를 통해서 구원의 길을 제시한 기록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구원운동의 말씀이고 그것이 성경을 관통하는 중심이다. 예컨대 원시계시인 창세기 3장 15절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하였다. 이 본문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원계시는 더욱 확장되고 풍성하여져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족장들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피 흘리는 제사를 통해서 메시야가 올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피 흘리는 제사를 통해서 속죄함을 받을 수 있음을 계시하였다. 하나님은 다윗 왕통을 통해서 메시야가 올 것을 선언하고,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도록 백성을 가르쳤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과 약속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의 성취자로서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속을 위해 역사 속에 오셨다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유익하고 좋은 말씀의 기록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우리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역사에 함께 하시어 한 분의 중보자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신 역사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씀에서 유대인들의 세계관이 구속사이며, 그 구속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또 요한복음 1장 45절에서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하였다. 이는 구약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정확히 기술하였다. 사도행정 8장 35절에도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고 했다. 집사 빌립의 구약이해는 이사야서에 고난의 종은 바로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시요, 예수가 복음 그 자체라고 했다. 그것이 당시 사람들의 성경관이자 신앙관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 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구약 성경 전체가 자신을 위한 것임을 내외에 천명했고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의 틀 가운데 이해하였다. 그 외에도 모세가 이미 그리스도를 내다보고 애굽의 금 은 보화를 마다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에 동참했으며(히 11:26), 다윗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했다고 썼다.(행 2:25-31) 성경의 구조는 한 결 같이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역사의 축(軸)으로 보고 있다.

 

역사의 축은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진행 된다

 

그리고 그 역사의 한가운데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필자가 다시 한 번 성경의 구속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설교자가 가진 성경관이 옳아야 바른 설교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설교자가 성경에서 단지 권선징악에 대한 문제를 다루거나 윤리적 도덕적인 표준을 얻기 위한 설교만을 한다면 성경의 본질에 접근하기 어렵다. 즉 성경 전체의 넓은 조망 속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성경이 본래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을 현대인들에게 가감 없이 증거해야 한다. 산에 올라가면 동네가 보이고 비행기에서 보면 도시가 다 보이듯이 설교자는 언제나 성경 전체의 넓은 조망 속에서 성경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구속사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가 덮어놓고 천편일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구속사적 설교방법은 어떤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든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명백히 드러내야 할 것이다. 설교자가 이런 접근을 시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어 가졌는가를 확실히 깨닫게 된다.

 

구속사적 선포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동시에 있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말은 단지 죄의 용서나 영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죄가 영혼에만 국한되지 않고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인 것처럼, 구원도 기독교인의 생활의 전 영역에 나타나야 한다. 설교자가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꼭 알아야 될 것은,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욘 2:10) 그러니만큼 설교자가 구원을 설명할 때에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더불어 선포해야 한다. 이런 태도가 설교학자 훅스트라(T. Hoekstra) 박사의 주장처럼 개혁파 설교의 두 가지 원리인 “오직 성경”(Scriptura sola) "성경전부“(Scriptura tota)이다. 성경의 중심축인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아는 사람은 설교할 때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선포한다. 즉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증거하려는 자는 또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도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구원의 말씀을 듣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미워 하시면서도 인간을 구속해 주셔야 하겠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정미소에 가 보면 크고 작은 각종 기계들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것들은 또한 각각의 벨트에 매여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반드시 중심 되는 축이 있다. 이처럼 성경의 역사적 사건 그리고 위대한 메시지들이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축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을 깨닫고 설교하는 것이 구속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6. 구속사적 설교 작성 시 착안 사항

 

설교학적으로 볼 때 설교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방법에는 나름대로의 특색과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 방법만 절대적이고 다른 방법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필자는 앞의 글에서 여러번 ‘모든 설교의 방법 중에서도 구속사적 설교 또는 구속사적 강해설교만이 성경을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설교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임을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필자가 여기서 주장한 구속사적 설교와 지금까지 한국교회 대개의 목회자들이 행하고 있는 제목설교 또는 본문설교와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에 앞서서 구속사적 설교를 할 때 몇 가지 착안사항을 생각해보자.

 

구속사적 설교 작성 시의 착안 사항

구속사적 설교를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전제를 먼저 바닥에 깔아야 한다.

 

①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다

 

첫째, 성경은 언제라도 하나님의 자기 계시(De Openbaring Gods)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계시하셨는가를 먼저 찾고, 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찾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성경 인물의 행위의 잘잘못만을 취급해서 그것으로부터 무슨 교훈적인 것을 얻어낸다면 성경기록의 본래 목적에서 멀어질 수가 있다. 성경에는 많은 사건의 기록이 있지만 모두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계시하고 있다. 즉 성경 기록의 모든 사건 중에 나타나는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구속주로 보여주시고, 그의 구속의 모든 사역은 성경의 모든 사건마다 계시되고 있다.

 

스토리의 주인공의 이야기 보다 그 주인공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을 봐야한다

 

예컨대 우리는 구약성경 가운데 요셉의 이야기를 많이 설교한다. 이 때 이 사건의 초점을 요셉의 꿈에 두고 그것을 주제로 “위대한 비전을 가지라”는 등의 설교를 한다. 또는 요셉과 악한 형들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기도 한다. 이렇게 설교하면 성경 기록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소홀히 다루게 된다. 결국 요셉을 전후한 모든 사건들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다. 이 내용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중심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요셉보다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구속사적 설교를 하는 기초적인 이해이다. 지금까지 한국 강단의 설교 스타일은 성경의 인물을 연구하고 그의 행위, 그의 신앙, 그의 실수와 범죄를 통해서 삶의 지혜와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간증과 설교를 구별할 수 없게 되고 설교가 위인전기처럼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 때 이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가 되시며 창조주요 심판주이심이 명백히 증거 되지 않는다면 비록 멋지고 아름다운 교훈을 준다 해도 성경을 바르게 설교했다고 하기 어렵다. 물론 성경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도 필요하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그 성경의 인물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말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반응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 기록된 인물의 삶과 신앙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요셉에 관해서 설교할 때에도 요셉의 일생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위대함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S.G.De Graaf, Verbonds Geschiedenis(언약사), Baker, Geschiedenis der Openbaring(계시사) 참고)

 

②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한 자기계시

 

둘째로, 구속사적 설교를 할 때의 착안사항은 중보자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함에 있어서, 인간은 죄로 인해 전적으로 부패했으므로 중보자를 통한 은혜의 계시(Openbaring van Genade)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신구양약의 계시의 내용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구속자이심을 계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중보자를 통한 구속이 성경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계시의 점진성을 말한 바 있지만, 그 뜻은 늘 새로운 것이 덧붙여진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과 원리는 언제나 동일하다는 뜻이다. 구약의 모든 사건 속에는 구속의 씨(seed)가 내재되어 있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해야 할 일은 신구약 성경을 살피면서 그 구속의 씨를 밝히 드러내어주는 것이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의 사역은 신약 시대에 와서 시작 되었다기 보다 실은 이미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그의 백성 가운데 자기 자신을 계시할 목적으로 그림자처럼 활동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사건은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고, 구약의 역사는 그의 영이 이루신 위대한 기적이라고 할 만하다.

 

중보자를 통한 인간의 구속이 성경의 중심이다

 

예컨대 우리가 에스더를 가지고 설교한다고 하자. 이 성경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많은 자유주의학자들은 이 성경의 정경됨을 의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단 이 책의 처음부터 중보자가 어떻게 계시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된다. 또 다른 예는 신약 성경 중에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삭개오의 용기 있는 믿음의 열정과 죄의 회개를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삭개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기계시라는 사실을 명백히 할 때 바른 설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설교할 때 삭개오와 같은 성경 인물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자기 몸에 향유를 부은 베다니 마리아의 행위를 “복음이 전파되는 온 세상에 전하여지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녀의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행위를 말하기에 앞서서 마리아의 마음 속에 그렇게 큰 사랑을 불러일으킨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설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리아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투영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우선적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인물에 대해서 설교할 때 주로 그 인물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즉, 그 인물의 신앙과 삶을 통해서 죄는 경고의 본보기로, 그리고 선한 일은 권장사항으로 이른바 권선징악(勸善懲惡)적인 교훈만을 말하기 쉽다. 이것이 예증적 설교 또는 모형적 설교의 함정이며, 제목 설교를 즐겨 사용하는 모든 설교자들이 직면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인물에 일차적인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선포해야 할 것이다.

 

③이스라엘의 언약 속에 자기계시

 

셋째는 구속사적 설교를 할 때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계시는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 속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중보자일 뿐만 아니라 언약의 머리(Hoofd in het Verbond)가 되신다. 설교자들은 설교할 때 예수와 그 주변 인물에 대해서 단순한 이야기를 찾을 경우가 있다. 이 때 자칫하면 실제로는 성경과는 무관한 설교가 될 수도 있다. 가령 앞에서 요셉을 예로 든 바 있지만, 그 이야기의 초점은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 보다는, 요셉을 통한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이 섭리적 목적이 무엇인가를 문제 삼아야 한다. 또 다윗을 말할 때에도 성경이 한 개인으로서의 다윗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은 개인으로서가 아닌 백성의 머리로 묘사되고 있다.

 

다윗보다 요셉보다 하나님이 성경의 중심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윗의 파란만장한 삶 보다 다윗을 다윗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또한 백부장이 자기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을 때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하셨다. 이 말에는 ‘언약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의문에 대한 답이 포함되어 있다. 백부장의 대답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언약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즉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으니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로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5-9)고 했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간청을 들어주셨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언약의 인정을 요구하신다. 우리도 설교할 때 이 언약이 강조되어야 한다. 언약 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들이 가진 것이 특권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임을 깨달아야 한다. 위의 이런 몇 가지 착안사항들은 구속사적 설교를 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7. 구속사적 설교와 일반 설교와의 실제적 비교

 

<예 1>

앞에서 필자는 구속사적 설교를 작성할 때의 착안사항이 무엇인지를 논했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늘 상 하는 제목설교와 구속사적 설교가 어떻게 다른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한국교회의 저명한 부흥사요 목회자로서 교파를 초월해서 한국교회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K 목사의 설교를 생각해보자.

 

그의 대표적 설교 가운데 「사막의 생수」가 있다. 이사야 35:1-7 을 읽고 정리한 「사막의 생수」라는 제목의 대지는

 

1. 사막에는 생수가 없다

2. 사막에는 화초가 없다

3. 사막에는 길이 없다

4. 사막에는 여관이 없다

 

비평-보편적 한국강단의 설교로서 뜨거운 열정, 풍성한 예화, 감화 감동이 있었다.

그러나 그냥 종교적, 도덕적 수준에 머무르는 문제가 있다.

설교자의 튀는 아이디어, 인기전술, 뛰어난 화술로 복음이 가리어진 것이다.

종교적인 것이 모두 복음적이거나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이 4개의 대지로 나누었다. 어떤 평자는 이 설교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 설명과 해석은 본문을 분해한 내용으로서 영감에 찬 표현이라고 했다. 결론은 헤매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주 예수를 믿으면 그 마음에 생수가 솟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실존의 문제이고 구원의 문제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 설교에 대한 위와 같은 평가는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의 공동된 인식인 듯하다. 그러나 K 목사의 이 설교는 전편을 읽어 봐도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은 단 두 줄 뿐이고, 그 다음의 모든 말은 사막과 물에 대한 이야기로서 그 두 단어를 통해서 많은 종교적 교훈을 얻고저 했다. 그리고 청중들이 알아듣기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것이 모두 복음적이라고 할 수 없고, 모든 종교적 감화나 교훈이 성경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강단은 그 풍성한 예화나 그 뜨거운 열정적인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냥 종교적이며 윤리적이며 도덕적으로 머물러 있는데 문제가 있다. 그 보다도 설교자의 튀는 아이디어, 인기전술, 뛰어난 화술로 말미암아 정작 복음이 가리어진 경우도 적지 않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이라 해서 복음적인 것이 아니다

 

하루는 필자가 우연히 라디오 다이얼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어떤 분의 참으로 논리 정연한 설교를 들었다. 아주 매혹적이고 지성인들에게 다가가는 실존적 문제를 다루었다. 예화도 동서고금을 넘나들면서 논리정연하게 엮어갔다. 그런데 마지막 멘트는 이라고 했다. 나는 그 분의 말이 요즘 목사님들의 방송설교와 너무나 흡사해서 잠깐 착각을 일으킨 것이었다. 필자가 이런 경험을 여기 쓰는 것은 오늘의 한국 교회 강단이 논리적이며 윤리적이며 도덕적이어서 흠잡을 데가 없긴 하지만 그것이 스님들의 설법과 구별이 어려운 설교 형태를 지적하고자 함이다. 사실 앞서 말한 <사막의 생수>라는 설교에서 사막의 특징, 사막에 있음직한 상황, 생수의 역할, 생수와 인간과의 관계 등, 여러 가지 인간의 삶, 특히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막이나 생수라는 단어를 갖고 설교자의 한없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여러 가지 유익한 교훈을 설명해 주고 있다. 물론 성경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유익한 교훈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보다는 생명을 주고, 구원을 주고 중보자이며 구속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확신을 주어야 한다.

 

의미-본문, 이사야 35:1-7의 구속사적 진정한 의미

1. 약속의 일깨움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약속을 다시 깨우는 소망

2. 메시지 구조 : “너희 하나님이 오사”“그(예수 그리스도)가 오사”

“너희(인류)를 구하시리라”

특징-메시아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뤄진 변화와 축복을 내다본다.

 

그렇다면 이사야 35장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본문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650여 년 전에 이사야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계시이다. 특히 이 본문은 예언서이긴 해도 문장은 시적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중보자이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보면서, 그 메시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엄청난 기적적인 사건들과 변화를 바라보는 예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다시 일깨워주심으로 큰 소망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영접할 것을 요구한다. 이사야의 메시지는 다름 아닌 “너희 하나님이 오사”,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사35:4)고 하심으로 장차 오실 메시야는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가 곧 그리스도이며 그가 오사 우리를 죄 가운데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이런 메시지는 이사야 53장에 와서 고난의 종 메시아를 예언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마치 갈보리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듯 또는 사진 촬영을 하듯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이 본문의 메시지는 사막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변화와 축복을 이처럼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약속을 바라보는 것은, 택한 백성들에게 실로 가슴을 뛰게 하는 웅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사막이나 물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는 변화와 축복을 보여준다

 

이사야는 광야, 메마른 땅, 사막이 변해서 레바논과 갈멜과 샤론의 아름다움으로 꽃피울 날이 오는데, 이런 변화는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사35:2) 즉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 나올 때 위대한 변화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일찍이 요한이 증거한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는 말씀과 어쩌면 그렇게도 절묘하게 맞는지 알 수 없다.

 

성경의 초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그가 바로 구원의 주이시고 메시야가 되심을 선포하는 행위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오실 메시야를 기뻐하는 것이었다. 이 성경의 내용은 상징적인 시어(詩語)들로 가득찬 시적 표현이다. 하지만 이 성경의 초점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적 축복으로 충만해 있다. 그리고 구원은 인간의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 곧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되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거룩한 길을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해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사35:8) 여기에 복음의 핵심이 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의 교리를 만날 수 있다. 구약성경의 구절이 어느 한 사건의 단독적 파편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약속 가운데 진행되고 그 설교자는 생명을 내어 건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속사적 안목과 신앙생활 교훈으로만 아는 설교와의 간격이 크다

 

필자는 위에서 이사야 35장에서 메시지의 내용을 대략적인 스케치로 살펴보았다. 성경을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보는 사람과 성경을 단순히 무슨 신앙생활에 필요한 교훈 정도를 주는 것으로 알고 자기식대로 제목설교를 하는 사람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만약에 앞서 예를 든 K 목사님의 설교처럼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하는 설교는 신앙생활에 유익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교훈적인 설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가슴을 적시는 구속의 감격을 주고,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에는 너무도 부족하다. 그래서 필자는 이 지면에서 여러번 여러번 구속사적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예 2>

실정-현재, 한국교회 강단 대다수가 풍유적, 예증적 설교로 일관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강해설교가 강조되는 것은 크게 고무적이다. 강해설교의 방법이야말로 성경을 성경대로 해석하는 데 가장 알맞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강해설교도 그 설교자가 가진 성경관과 신학적 입장 또는 선입견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 형식은 강해설교라고 해도 실제로는 대게 풍유적(Allegorical)이며 또는 예증적 설교(Examplary Preaching)가 대부분이다. 설교자가 가진 의식과 목적에 따라서 자의적으로 성경을 끌고 다니면서 하고 싶은 말을 메시지로 담아내는 형국이다. 물론 비록 메시지의 내용이 모두가 기독교적이며, 교훈적이며 또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이라고 할지라도, 그 본문에서 말하는 진정한 복음의 내용을 놓치거나 또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큰 흐름을 간과해 버린다면 곤란할 것이다.

 

분석-본문, 마2:1-12/ 제목, 성탄에 대한 3가지 태도

1. 성탄에 대해 적대적 사랑-헤롯

2. 성탄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종교지도자

3.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사람-동방박사들

비평-완벽한 강해설교의 모델이지만, 구속사적으로 본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본뜻을

증거 하는데 소홀함.

 

그러면 시중에 나와 있는 설교집 중에 어느 분의 설교를 살펴보자. 본문, 마태복음 2:1-12을 읽고 「성탄에 대한 세 가지 태도」라는 설교를 했다. 이 설교의 흐름은 ‘성탄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행태를 알 수 있음’을 전제한다. 이 설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탄에 대한 세 가지 태도를 알게 한 후, 오늘날 우리가 어떤 바람직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이끄는 말로는 ‘오늘날 성탄은 기독교인들만의 명절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명절이 되었기에 모두다 들떠있고 분주하나 이들이 성탄에 대해 갖는 태도를 보면 주로 세 가지로 요약 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은 성탄에 대해 적대적인데 그 사람들의 모형이 바로 헤롯왕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고 에돔 족속이며, 로마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으므로 왕위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던 차에 왕중 왕이 탄생했다는 소문을 들으니 불안하고 당황하고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오늘날도 헤롯과 같은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의 성품을 분석해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성탄에 대해 무관심한데 이런 사람들의 대표는 종교지도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헤롯의 질문에 ‘예수가 베들레헴에 나시고 다스리는 목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들을 말했다. 그리고 성경에 박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경배하지 않는 이유는 무관심 때문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관심하기에 예수를 영접지 못한다. 그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을 몰라서거나 거리 때문이나 날씨가 아니라 무관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고, 내 영혼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보다는 온갖 세속적인 관심에만 집중되어 있기에 정작 예수에는 무관심한 것이 현대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경배한다. 이들의 태도를 바로 동방박사의 태도로 보았다. 동방박사들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으며 먼 거리를 여행하여 귀한 예물을 드렸다. 그러니 오늘날의 성도들도 동방의 박사들같이 믿고 예수를 영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도덕적, 윤리적 설교가 율법주의적 설교로 흐름으로 기복적 설교가 되기 쉽고 생명의 구속적 진리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해 성경적 삶으로 인도하지 못함.

 

위의 설교 요약은 강해 설교가들이 흔히 하는 설교 스타일이다. 이 설교는 매우 복음적이면서도 본문의 전후관계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작성한 완벽한 강해설교의 모델이다. 이 설교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없을 뿐더러, 한국교회 강단에서 늘상 통용되는 설교이므로 모범적 설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위의 설교를 필자가 늘 주장하는 구속사적 설교의 방법과 비교해 보려고 한다. 앞서 예를 든 설교의 방법과 접근은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설교방법이며, 특히 본문 강해설교의 모델이다. 그러나 모든 예증적인 설교에서 그러하듯이 이 설교에서도 본문의 사건 속에 나타난 인물들의 행동과 말, 그리고 그들이 생각했을 것 같은 내용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고자 한다. 이런 교훈적인 설교는 설교자나 듣는 청중이나 다같이 쉽게 이해할 수도 있고 내용도 분명하다. 누구는 이렇게 하다가 저주를 받았으나, 누구누구는 저렇게 하다가 큰 은혜와 복을 받았다는 식이다.

 

예증적 설교를 하다보면 경험에서 얻은 진리가 많아 진다

 

그래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서 복 받게 된 아무개처럼 살아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이는 예증적 설교의 강조점이자 특징이다. 그런데 이런 형식의 설교를 하다 보니 자연히 성경의 예와 유사한 우리의 삶 또는 역사적 인물의 성공적 신앙담을 많이 수집해서 삶의 모범으로 제시하게 된다. 어떤 집사, 어떤 장로는 이러이러한 신앙의 모범을 보이다가 크게 축복받아 잘 살았고, 또 다른 사람은 주님을 배신하고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고 교역자를 멸시하다가 패가망신했다는 식이다. 이런 예는 성도를 교훈하고 지도하는데 퍽 유익하다. 하지만 이런 설교의 문제는 성경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본뜻을 증거 하는데 소홀하고 이른바 도덕적 설교, 윤리적 설교를 함으로써 이른바 율법주의적 설교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설교자가 성경을 읽으면서 오늘의 삶과 연결시켜 적용해 볼 때 동방박사의 열심과 헤롯 등의 반응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속사적 맥락의 이해가 필요하다

-초자연적 사건을 계시/ 나 같은 죄인 사랑 위해 성육신 증거

 

그러나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각할 것은 이 성경의 사건은 동방박사나 별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 보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적인 전체 맥락 속에서 먼저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은 우리의 구주로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오셨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구속운동이 그의 단독적이며 특수한 방법임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인간을 위한 구속운동은 하나님이 준비하셨을 뿐 아니라, 초자연적이며 우주적 사건임을 계시하고 있다. 가령, 별의 출현,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찾아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우주적이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구속 행위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본문의 주인공은 별도 아니고 동방 박사도 아니고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본문의 주인공은 별도 아니고 동방박사도 헤롯도 아니다. 그 본문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나 별이나 제사장이나 헤롯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엑스트라이며 배경이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에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줄거리를 추출하는 것도 귀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어떻게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더 힘 있게 증거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성경의 케리그마를 발견하고서야 설교자의 가슴은 뜨거워질 것이다. 설교자의 가슴이 복음과 진리로 뛰기 전에는 생명 있는 설교가 될 수 없다.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수님께 드린 헌신의 행동도 귀하지만, 동방의 박사들을 베들레헴까지 불러들인 하나님의 웅장한 계획과 섭리를 소리 높여 설교해야 할 것이다.

 

<예 3>

필자는 앞서서 두 차례에 걸쳐 구속사적 설교와 한국교회 강단에서 통용되는 설교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점(点)으로 보지 않고 선(線)으로 볼 줄 아는 눈이 띄어져야 성경이 바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위대한 구속사역을 위해 섭리하시며 간섭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먼저 보고자 했다. 필자는 이번에 다시 한 번 다른 예를 들고자 한다.

 

목회자들이 많이 설교하는 성경본문 중에 창세기 22:1-19까지를 예로 들어보자. 이 본문에 대한 설교자들의 일반적인 접근은 대개 다음과 같다. 제목은 거의 “아브라함의 신앙”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는 의도도 있지만, 아브라함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으로 제사하게 된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허락하실 메시아 탄생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예표하신 어린양을 잡아서 드린 특수한 제사였다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Ⅰ. 아브라함의 신앙의 순종 ① 순종의 자세 ② 순종의 방법 Ⅱ. 하나님의 축복의 응답 ① 이레의 축복 ②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시는 뜻 ③ 아버지의 신앙에 맞는 아들의 순종 Ⅲ. 순종의 결과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강해설교의 기준에도 맞고 본문설교로서도 손색없는 설교이다.

 

또 해방 전 임사순 목사는 “온전한 제물이 되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이 설교도 비슷하다. 그의 설교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이삭은 제물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통해서 신령한 교훈을 받을 수 있는데, 한국에도 어디든지 제단을 쌓을 곳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덧붙이기를 문명퇴치, 교사, 새마을운동, 농촌 지도자로 나가면 그것이 곧 우리의 제단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이 필요한데 그 불은 곧 성령의 불이라는 것이다. 120명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 놓았을 때 그 불은 제단 위에 붙었다는 것이다. 그 불이 웨슬레의 제단으로 한국의 서문 밖 교회로 붙었다는 것이다. 제물이 누구냐?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제물이라는 것이다. 논리의 비약이 많기는 하지만 한국교회의 초기부터 있어온 설교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 초기 교회의 최지덕 목사는 “제물은 어디 있나이까”라는 제목설교를 했다. 그는 ① 아브라함은 복잡한 가정문제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②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③ 제물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등의 대지로 설교하고 있다. 그리고 희생의 제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묻고 “내가 사랑하는 물질을 내가 쓰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내어놓을 때 희생이 되는 것이다. 또한 시간을 바치는 것, 선한 일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는 것,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등이라”고 했다.

 

위에 열거한 창세기 22:1-19에 대한 세 가지 설교는 지금까지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설교의 내용이다. 또 위의 세 가지 유형의 설교들은 매우 보수적이며 복음적인 설교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모든 교파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설교의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설교할 때 설교자가 성경에 대해서 어떤 태도로 임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앞에서 여러번 지적한대로 설교자의 신학과 세계관 그리고 성경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구속하시기 위한 역사로서의 성경을 깊이 깨닫고 연구할 때 성경에 대한 태도는 좀 더 특별해질 것이다. 즉 성경을 읽되 성경신학적으로 또는 구속사적인 시각에서 성경을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의 구속운동-아브라함의 믿음이 최우선이 아니다

 

그러면 이 본문에 대해서 구속사적인 접근 방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최우선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물론 하나님의 구속 운동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을 제외할 필요는 없지만 그 초점을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을 해석하고 깨달음에 있어서 먼저 성경 중 어떤 사건의 인물로부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교훈을 얻어내기에 앞서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속하기로 작정하시고 그것을 역사 속에서 진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사역과 섭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만이 성경의 깊은 진리가 풀려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잘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가신다

 

이 본문의 요점은 아브라함이 드리려는 제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사의 모방이었을 뿐이다. 아브라함이 산을 오르면서 분명히 이삭에게 말했다.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시느니라”(창 22:8) 이 말은 아들의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이 말은 진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친히 제물을 준비하신 것이다. 좀 더 이 본문의 특별한 의미를 좀 더 살핀다면 하나님 스스로가 희생되셨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아들을 제물로 삼으셨던 것이다. 이 아들은 그가 말씀으로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아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아들이다. 궁극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 자체를 희생시킨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할 때 이삭의 희생은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의 모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삭의 희생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를 위해서 그의 독생자를 희생시키신 것이다. 이삭은 다름 아닌 약속의 씨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브라함 개인의 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단순히 하나님의 행위를 모방하였을 따름이다. 하나님이 친히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결과적으로 보면, 한 마리의 수양이 이삭을 대신해서 죽은 것이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신앙 그 이상으로 관심이 옮겨져야 한다. 아브라함은 이미 영적으로 이삭을 바쳤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신앙의 행위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데 인간의 행위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완전한 제물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두 요소 즉,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대속의 방법을 통해서 친히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대속의 원리를 제사제도를 통해서 나타내신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삼고 모든 구원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진실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그가 홀로 이루시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 성경의 본문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만족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를 믿도록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들의 행위로써 축복과 구원을 만들어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완전히 다른 한 제물을 통해서 그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이시려는 계시였다. 위에서 우리는 창세기 22장을 통해 재래식 설교와 구속사적 설교의 방법이 무엇이 다른가를 대강 살펴본 셈이다.

 

글을 마감하면서

 

“교회 역사는 곧 선교 역사이다”/ “설교 없이 구원 없다“

“설교로서 교회의 성패가 갈린다”

 

앞에서 챨스 다간(C.Dargan)이 말한 대로 ‘교회의 역사는 곧 설교의 역사’ 라는 대전제를 그대로 받는다면, 다우마(J.Douma)의 ‘설교 없이 구원 없다’는 말이나, 포사이드(P.T.Forsyth)의 ‘설교로서 교회의 성패가 갈린다’는 말은 다 같은 뜻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성장지상주의에 빠진 나머지 성경적이거나 신학적인 관심보다는 실용적인데만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른바 거룩한 실용주의를 내세워서 목적이 좋으면 수단과 방법은 어떠하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식이 되어버렸다. 이론을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어디까지나 잘 먹혀들어가는 이른바 프락시스(Praxis), 곧 실제적 효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목양의 현장을 성경적인 설교로 되돌려 놓으려는 하나의 시도로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강조해왔던 것이다.

 

성경은 새 생명과 구원을 주고 삼위 하나님을 믿게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설교는 과연 성경의 진리에 보다 철저한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해왔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것은 무오의 말씀이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택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것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면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섭리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그 구원의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어떠하며 구원의 방법은 어떠한 것을 이스라엘의 역사와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을 명심보감이나 사서삼경처럼 인생을 살아가는데 유익하고 보람된 지침을 주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곤란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 교훈을 주는 교과서가 아니고, 새 생명과 구원을 주고 삼위 하나님을 믿게 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한다.

 

예증적 설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속사적 안목에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예증적 설교(例證的 說敎)에 대해서 재고해야 될 것이다. 물론 예증적 설교가 모두 잘못되었다거나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좀 더 능력 있고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을 바로 깨닫게 하는 데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예증적 설교의 특징 중에는 성경에 나타난 인물의 성품과 삶, 그리고 신앙의 유무를 잘 살핀 후에 그의 성품과 신앙과 삶을 오늘날 우리의 삶의 모델로 제시하고자 애쓰는 것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오늘의 청중들에게 크게 유익하고 귀감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경우에는 성경의 인물이나 오늘날의 성도의 삶과 묘하게 연결되면서 많은 간증거리도 낳게 하고, 실제적으로 적용이 용이하다. 또한 설교자 자신도 이런 형식의 설교를 선호하고 아주 쉽게 성경본문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신앙, 이삭의 신앙, 사무엘의 신앙, 백부장의 신앙 등등 성경의 모든 인물의 장점과 단점을 구별해서 그들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고자 한다. 그리되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설교는 설교로되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인 해결을 주려는 데 그칠 염려가 있다. 또 설교자 자신도 그것을 기점으로 해서 자기가 편한 대로 성경이 말하지도 않은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결국은 율법주의적인 설교가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는 - 성경의 방법이요, 종교개혁자들의 방법이며,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방법이다

 

그와 같은 약점을 뛰어넘기 위해서 필자는 끊임없이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제창했다. 구속사적 설교는 필자의 독창적 생각이 아니고 이미 성경의 방법이며 종교개혁자들의 방법이며 근자에 이르러 모든 칼빈주의자들, 아니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설교방법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성경적 설교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려면 설교자의 눈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하나님 중심(God-center)으로 성경을 봐야 성경이 바로 보이고 바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등 모든 인물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의 구속운동과 그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먼저 살피는 것이 핵심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베드로나 삭개오, 마리아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다. 즉 구속사적 성경연구란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를 자연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특별한 구원의 역사이다. 그래서 구속사적 연구의 초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신구양약의 통일성과 점진성이 전제된다. 즉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역사의 축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을 단순히 점(点)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선(線)으로 보는 것이다. 성경은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의 전기나 역사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이므로 구속사적 시각에서의 강해설교가 한국 교회 강단을 더욱 풍요하게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붓을 놓는다.

강해 설교학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하자]

 

정 성구박사(칼빈대 석좌교수)

 

1. 설교와 구속사적 해석

 

개혁은 강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설교는 목회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권이며 축복이며 은혜이다. 기독교는 설교의 종교이며 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교회의 강단은 성경적 설교에서 한참 멀어져 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 설교의 복원이 한국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지름길이다. 필자는 불타는 가슴으로 한국 교회의 강단의 정화와 정상화가 가장 급선무로 생각한다. 글을 써 가기에 앞서 필자의 개인적인 배경과 경험을 몇 줄 적어볼까 생각한다. 나는 금년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지 39년째이며 그동안 총신대학교에서만 35년을 그리고 대신 대학교에서 5년을 가르쳤다. 특히, 나는 칼빈주의와 개혁주의 설교학을 교수해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각종 강연회에서 한국 교회는 개혁되어야 하며 그 개혁은 강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을 언제라도 힘 있게 외쳤다. 그리고 강단의 개혁은 바로 목회자 자신이 성경적 설교로 돌아가서, 엉망진창이 되어 잃어버린 강단을 성경적․복음적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진정 성경적으로 돌아가고 복음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구속사적 강해설교가 설교 중에는 가장 성경적이며 안전한 방법이다

 

일찍이 리챠드 리스쳐(Richard Lischer)는 말하기를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이다”라고 했다. 결국 설교도 신학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두말할 필요 없이 강해설교의 지지자이다. 하지만 강해설교도 그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성경관과 신학의 내용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강해설교를 설교방법 중에 제일 안전한 방법으로 생각하면서도 거기다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한다. 필자가 만든 용어이지만「구속사적 강해설교」라야 성경적이며 복음적 설교를 바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구속사적인 안목은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려지게 한다

 

그런데 혹자들은 질문하기를 그러면 구속사적 강해설교 이외의 것은 모두 비성경적이며 적절치 못한 것인가? 라고 공격하는 이도 있다. 또 어떤 이는 구속사적 설교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등한시 하고, 너무 빨리 설교자의 판단에 의해서 본문의 뜻이 결정되는데 대하여 염려와 근심을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첫째 질문은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설교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보는 눈이 먼저 띄어져야 한다는 뜻이고 특히 역사적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역사의 배후에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와 섭리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 설교나 예증적 설교는 모두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님을 먼저 밝히고 싶다. 또 둘째 질문도 역시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문법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충분히 사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문법이나 문장의 전후관계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저자가 그 말씀을 통해서 정작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과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구속사적 설교를 말하기 전에 구속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풀어져야 한다. 성경은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다른 종교의 경전도 인간의 삶에 대한 유익한 교훈이며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구원의 진리도 아닐뿐더러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 불경이나 명신보감은 성경과는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므로,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신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부터 성경적 설교니 구속사적 강해설교니 하는 말과는 상관이 없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의 말씀이고 하나님 자신이 인생을 구원하기 위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하신 구원운동을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에 개입하시고 선지자들을 간섭하여 구원사역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계시 ․ 역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신약과 구약은 통일성이 있고 계속성이 있다는 말이다. 성경신학은 항상 성경의 통일성과 역사성, 특히 계시의 역사성을 바닥에 깔고 있다. 즉 하나님은 태초부터 자신을 계시하시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어두워졌을 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풍성하게 발전되면서 계시되었다. 그런데 이 계시의 중심이 우리의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의 중심점을 보며 역사의 중심점과 목적도 발견하게 된다. 구약성경 전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결국 신약의 계시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약시대에 감추어졌던 계시가 더 명백하게 드러났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의 일반적이고 자연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역사이다. 그래서 구속사적 연구의 초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신․구약의 통일성과 점진성이 전제된다. 즉 구속사란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역사의 축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의 역사에 개입하시며, 그들을 통해 메시야가 오도록 하신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읽고 깊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감동을 받아 체험적임 설교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영적 감동을 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성경의 구조를 잘 이해하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흐름을 먼저 깨닫는 것이 설교자의 몫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라고 한다면 성경의 내용을 가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내 방식대로, 내 느낌대로, 내 체험대로의 해석은 위험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설령 정확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했다고 해도 그 말씀이 성경 전체의 구조 속에서 잘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려는 것은 성경의 구조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명심보감이나 사서삼경과 같은 것이 아니고, 인격적이며 창조주이시며 구속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실 것을 작정하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친히 개입하셔서 그 백성들을 통해서 구속 주이신 메시야가 오시고, 유월절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내다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며 간섭하고 계신다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져야 한다.

 

마태복음 1:1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했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아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마태의 복음은 아브라함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위대한 구속의 역사의 끈을 이어주고 있다. 즉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오게 하기 위함이고 또 그 가운데 다윗 왕통을 통해서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웅장한 메시지이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의 구조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며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이라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고 구속사적으로 해석하고 구속사적으로 설교한다는 표현은 어떤 신학이나 어떤 교파나 교단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사상체계이다. 구속사적 접근은 어느 학자의 의견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구조 자체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구속사적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또 구속사적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예컨대 요한복음 1:45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했다. 이는 당시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이 구약에 대한 해석이자 당시 사람들의 의식구조였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도하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병 고치는 이적을 베푸는 것을 말할 때 <율법에 기록하였고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라고 말함으로 구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스라엘 역사의 향방이 그냥 일반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임을 아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성경해석을 구속사적으로 하고 있다. 즉 요한복음 5:39에 “너희가 성경에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했다. 위의 성경구절에서 보듯이 구약성경 전체의 흐름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음을 확실하게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구속사적인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이자 성경의 구조이며 성경의 요구이다. 설교 중에서도 가장 성경 자체의 뜻을 바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문법적, 역사적, 실존적 해석을 하면서도 구속사적 큰 산맥을 짚어, 구속사적 흐름의 광맥을 캐어들어 갈 때 비로소 성경 저자가 본래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보다 극명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2. 구속사적 설교의 근원

 

설교자의 각오-생명을 걸고 경외심을 가지라

 

앞서 필자는 구속사적 설교가 바로 성경에 근원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성경 그 자체가 그리스도 중심이며 하나님 중심이며 구속의 역사라는 것도 밝힌바 있다. 그래서 성경을 갖고 설교하는 것은 일반적인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고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주어서 그리스도의 은총의 포로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 강단은 어느 때 보다 풍성한 것이 사실이지만 대게 설교자들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교훈을 주거나 웰빙을 강조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이 기독교 신앙인 듯이 보일 때도 있다. 물론 그러한 메시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종교와 기독교는 구별되어야 한다. 종교적인 것이 모두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고, 기독교적이라고 해서 모두 성경적인 것도 아니다. 마땅히 설교자는 자기의 설교에 생명을 걸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역사적 사건을 하나님의 구속사 안목으로 볼 줄 알아야 설교가 된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는 말 그대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과 능력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전한 것이다. 사도행전 7장을 구약의 총론 또는 구약신학의 요약으로 볼 수 있는데 스데반은 구약의 역사적 사건을 하나님의 구속사로 보고 있다. 사실 사도행전을 쓴 의사 누가의 핵심은 베드로나 바울의 위대함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울과 베드로 등의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는지, 주님의 몸된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으며, 어떻게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했는지를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사람이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길과 성령의 능력이 이 성경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사적 설교는 어떤 신학자들의 발상이 아니라 이른바 성경의 맥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만약 설교자들이 이렇게 철저하게 성경에 접근한다면 성경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히브리서를 구약의 강해설교와 구속사 시각의 해석으로 본다

 

그리고 히브리서도 구약의 총론이며 구약신학이라고 할만하다. 특히 히브리서 11장은 구약 전체의 역사를 구속사적으로 보는 눈을 뜨게 한다. 그 중에서도 11:24-26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다. 이 성경은 구약의 강해설교로 볼 수 있는데 철저히 하나님의 구속사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있다. 모세가 애굽의 금은보화를 마다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고난 받기를 원한 이유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봄이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삶과 골고다를 연결시키고 있다. 모세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자기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는 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 중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한 것이로다(요5:39)”라고 했다. 즉 구약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는 예수님 자신의 증거가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해야 할 이유이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구속사 해석의 길이 열렸다

 

사실은 종교개혁 전까지도 이런 성경의 구조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나 칼빈에 와서 성경을 구속사적 시각에서 보는 눈이 열렸다. 칼빈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말하기를 “사도바울은, 성경은 의심할 바 없는 진리이지만 모세가 위대한 웅변가였다거나 이사야가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라고 했다.(Corpus Reformatoium 79:783) 다시 말하면 칼빈의 입장은 구약을 가지고 설교하던 신약의 인물들, 특히 바울은 구약이 인물과 사건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과 존귀를 돌릴 뿐 인간은 다만 성령이 쓰시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생각하기를 설교자의 임무는 인간의 기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한 세기 동안 교회는 16세기까지 잃었던 강단을 다시 찾았다. 종교개혁은 곧 성경의 재발견이자 강단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종교개혁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눈을 뜨게 했다. 종교개혁이 되기까지 로마 카톨릭은 약 1천년 동안 말씀의 종교를 의식적 종교 그리고 형식적 종교로 전락시켜버렸다. 종교개혁은 루터와 칼빈 등 개혁자들을 통해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확신을 갖게 하고 중세시대의 풍유적(allegorical) 해석에서 벗어나서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

 

18세기의 자유주의가 교회를 쇠퇴시키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정착되고 각 나라마다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이 정착되었을 때 18세기 초 구라파에는 이른바 계몽주의 사상이 일어났다. 계몽주의 사상은 곧 합리주의 사상이며 인간의 자율주의 사상을 예찬했다. 인간 이성에 맞는 것이 진리이고 인간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배척했다. 그런데 18세기와 19세기에 창궐했던 계몽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서 신학은 자유주의가 되어버렸다.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의 이적을 믿지도 않고 성경의 초자연을 모두 거부했다. 그래서 신학의 자유주의는 교회의 쇠퇴를 가져왔고 중심을 잡지 못했다.

 

개혁주의자들은 구속사적 설교를 했다

 

한편 복음적인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발언권을 잃어버리고 극소수의 보수주의자로 따돌림을 받았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교회에는 여러 가지 반성이 있었다. 1935년에 화란의 칼빈주의 철학자 헬만 도예베르트(H.Dooyeweerd, 1894-1977)와 볼렌 호번(Th.D.H.Vollenhoven, 1892-1977) 박사 등이 칼빈주의 철학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칼빈주의 철학회에 속한 사람들은 철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경은 무오의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과 삶의 유일한 포준이라고 확신했다. 특히 성경을 설교할 때 종래의 풍유적 설교를 버리고 신구양약의 통일성과 계시의 충족성을 강하게 믿을 뿐 아니라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구속운동의 최종목표인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섭리하시며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개혁은 바로 강단의 개혁이며, 강단의 개혁은 바로 구속사적인 설교에서 찾고자 했다. 물론 이런 구속사적 설교에 대해서 기존의 제목설교나 주제 설교자들로부터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구속사적 설교자는 제목설교나 주제설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었고 어떤 형식의 설교이기 전에 성경을 보는 바른 시각이 열려져 있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한국교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나 논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속사적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확신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은 구속사적 설교 자체를 할 수 없다. 홍수가 났을 때 정작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설교의 홍수시대이다. 정보의 홍수시대에 설교자료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옳게 증거 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구속사적 강해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3. 예증적인 설교에 대한 반성

 

교회사는 곧 설교사이다

 

일찍이 미국의 설교학자 찰스 다간(E.C.Dargan)은 말하기를 ‘교회사는 곧 설교사’라고 했다. 교회의 흥망성쇠는 바로 설교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옳게 설교되어진 때가 바로 교회의 성장기였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증거 되지 못하고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종교가 되었을 때는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이 왔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어떤 때는 설교가 사건을 만들기도 했고, 때로는 사건이 설교를 만들기도 했다. 예컨대 바울, 베드로,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암브로스, 버나드, 위클립, 루터, 칼빈, 낙스, 에드워드, 화이트 필드, 웨슬레, 카이퍼 등의 설교는 그들의 조국과 민족에게 영적부흥과 도덕적인 방면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설교가 그 시대의 거짓된 사상과 윤리에 감염되어 순수한 복음이 훼손되거나 변질된 경우도 많았다. 더구나 신학적 입장과 설교방법 또는 성경관에 따라서는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구속사적 설교방법은 가장 성경적이다

 

필자는 설교방법 중에 구속사적 설교 또는 구속사적 강해설교의 방법이 성경을 가장 성경대로 증거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또 개인적으로 나는 평생토록 강단에 설 때마다 구속사적 성경이해를 통한 진리의 확신이 내 가슴을 뜨겁게 했고 또 그것을 힘 있게 증거 할 수 있었다. 앞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지만 구속사적 설교방법은 성경적인 방법이며 사도들과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과 그리고 개혁주의자들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설교가 편의주의나 세속주의 또는 풍유적(allegorical) 해석방법 등에 의해서 변질되기도 했다. 더구나 최근에는 교회성장을 지상으로 생각한 나머지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말처럼 무슨 방법, 무슨 수를 쓰든지 교회의 부흥만 되면 된다는 생각이 모든 교역자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만을 신학과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는다면, 설교자는 성경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진리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증거 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구속사적 설교는 예증적(모형적) 설교의 반성에서 나왔다

 

구속사적 설교를 말하고자 할 때 대두되는 말은 예증적 설교(例證的 說敎, Exemplary Preaching)이다. 즉 구속사적 설교는 예증적 설교 또 모형적 설교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예증적 설교는 전 세계 모든 설교자들이 공통으로 늘 쓰고 있는 설교의 방법이다. 즉 본문설교나 제목설교를 막론하고 연역적 설교나 귀납적 설교나 이야기식 설교 등 어떤 형태의 설교에서도 예증적 설교를 하고 있다. 예증적 설교 또는 모형적 설교방법은 그 기원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독교 초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늘 하던 설교방법이었다. 미국 칼빈 신학교의 그레이다누스(Greidanus) 박사의 말대로 우리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과거 사건의 의미를 찾아서 현실에 적절하게 적용하고자 할 때는 대개 이러한 예증적 접근방법을 쓰기 쉽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클레멘트(Clement)는 성경을 “윤리적 모범을 보여주는 책”(a book of ethical models)이나 “모형전시장”(picture gallery)으로 생각했다. 또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주장하기를 “설교가들은 역사적 본문을 즐겨 선택하고 청중들로 하여금 그것을 좋은 본보기로 제시하여 따르도록 한다”라고 했다. 이처럼 성경에 대한 예증적 설교 또는 모형적 설교 방법은 중세를 거쳐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졌다.

 

예증적 설교는 윤리 도덕적인 것에 그쳤다

 

특히 역사적 본문을 갖고 설교할 때 이야기 식 설교를 전개하면서 청중들을 매료시키고, 또 성경의 사건내용을 청중들로 하여금 삶의 거울로 받도록 설교했다. 즉 성경의 사건과 인물들을 하나의 모델로 설정하고 그 사건에 나오는 인물의 장․단점, 성공과 실패, 신앙과 불신앙, 순종과 불순종, 사랑과 미움, 아름다움과 추함 등을 설교함으로써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윤리적․도덕적 결단을 내리고 결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를 단순히 윤리적․도덕적인 메시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이 교파를 막론하고 모든 설교자들이 즐겨 쓰는 예증적 설교방법이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삼손, 사무엘, 기드온, 바울, 베드로, 마리아, 빌립 등등, 그들의 삶의 여정, 신앙의 여정, 그들의 내면세계를 분석하고 그들의 성공이유와 실패이유, 그들의 영적상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과 거기에 따른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예증적 설교방법이다. 또 대개의 설교학자들이나 일선 목회자들도 여기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설교는 본시 그렇게 하는 것으로 굳어져 있다. 필자가 총신대에서 설교학과 설교연습을 가르칠 때 학생들의 설교작성 레포트를 보면 거의 100%가 예증적 설교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한국교회 강단의 패턴은 역시 예증적 설교가 그 대종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예증적 설교는 성경의 그리스도 중심의 구조를 잘 전하지 못한다

 

필자는 예증적 설교가 모두 잘못되었다거나 불필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기는 개혁주의 학자들 중에 헤이져(Ph.J.Huijser)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도 예증적 설교자가 많으며, 교회사적으로 예증적 설교의 사례를 자세히 논하고 있다. 또 예증적 설교의 적극 지지자인 다우마(J.Douma)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말했다. 즉, ‘우리 조상들은 구속사가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통일된 구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을 심리학적으로 묘사하고 성경의 인물들이 가졌던 갈등과 시련, 그리고 신앙생활의 강약을 말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성도들의 경험과 오늘날 성도들의 영적 싸움과를 비교하면서 설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성격을 모든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실 다우마의 이런 생각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른바 강해설교에도 강조되고 있다. 즉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 성경본문의 메시지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물을 때 자연히 예증적 설교의 타당성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증적 설교자들은 성경을 읽고 설교함에 있어서 그저 성경내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적용을 하려면 객관성 뿐 아니라 주관성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인간의 반응을 동시에 전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또 앞서 말한 헤이져는 설교학자 상스터(Sangster)의 말을 빌려서, ‘예증적 설교는 복음을 명쾌하게 만들고 주의를 집중시키며 진리를 인상 깊게 심어주고 설교를 흥미 있게 한다’고 주장했다.

 

예증적 설교-인간 중심적인가, 성경적인가?

 

그런데 예증적 설교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지지를 받으며 많은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예증적 설교가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증적 설교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순전히 인간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역사적 사건, 곧 전기적 설교(Biographical Preaching)를 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성격과 특성, 내면세계를 깊이 고찰해서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고자 할 때 그것이 정말 성경적인가 하는 의문이 남게 된다. 모든 교훈적인 것은 아름답고 귀하다. 그리고 모든 교훈적인 것은 인간에게 유익하고 삶의 지표가 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한 분 하나님이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중보자를 주시기로 약속하시고,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메시야를 구주로 세상에 보내시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서삼경이나 명심보감과 비할 수 없고 성경의 인물을 논할 때 마치 세익스피어의 작품 중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고 무슨 교훈을 얻는 식으로 할 수 없다. 성경을 성경으로 보고 하나님의 계시를 계시로 보는 눈이 띄어져야 복음적 설교를 할 수 있지, 성경의 인물들의 장․단점, 신․불신, 선악을 분리해서 어떤 모델을 얻고자 하는 예증적 설교가 과연 합당한가를 묻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예증적 설교문제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구속사적 설교의 확신을 갖게 한다.

 

4. 예증적인 설교의 함정

 

세속사적인 설교를 경계하라

 

앞서 우리는 예증적 설교에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예증적 설교가 모두 틀렸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구속사인데 마치 세속사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고 장단점을 깊이 묵상해서 교훈을 얻고자 할 때는 자칫 성경말씀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계시의 내용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지적하고 싶다. 예컨대 성경의 역사적 본문(historical text)을 갖고 설교할 때 제목을 <아브라함의 신앙>, <이삭의 신앙>, <백부장의 신앙>, <마리아의 신앙>, <삭개오의 신앙> 등으로 정한다. 그리고 성경의 인물들의 삶을 실존적으로 깊이 고찰하고, 그들의 장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의 모범으로, 그들의 실패와 불신앙의 삶이 있다면 버려야 될 것으로 모범을 찾아보는 것이다. 가령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떠나는 것을 용기 있는 결단으로 거창하게 말하고, 그의 신앙과 삶을 조목조목 들어 그의 삶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신앙의 결단의 모범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또 설교자의 예민한 적용을 통해서 큰 교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패턴이 우리 모든 설교자들의 공통적이고 일반화된 설교방법이다.

 

예증설교는 성경의 인물의 장단점을 조사해서 윤리적인 교훈을 얻고자 한다

 

이런 방법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반응으로 적절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대함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대개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귀중성을 증명하고 또 적용하기 위해서 아브라함 링컨을 예화로 끌어오고 그러다가 죠지 워싱턴을 들먹이고, 좀 더 지나면 죠지 부시의 신앙을 말하고, 지미 카터의 신앙을 예로 든다. 그리고 그들이 받았던 용기 있는 신앙과 삶의 모범을 열거하면서 우리도 그와 같이 신앙생활을 함으로 땅 위에서 영육 간에 복 받고 잘 살아야 된다는 식이다. 이는 전형적인 예증적 설교의 방법일 뿐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 강단의 일반적인 추세이다. 이런 설교패턴은 우리의 헌신적 삶을 강조하고 매우 교훈적이고 윤리적인데다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이해하기 쉽다는 큰 장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거의 모든 설교자들이 이 방법을 설교의 정석으로 이해하고 있다.

 

구속사의 주역과 그에 대한 사역을 강조하라

 

하지만 일찍이 대 설교학자 훅스트라(T.Hoekstra)가 그의 책 개혁주의 설교학(Gereformeerde Homiletiek)에서 지적한대로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베드로나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경에 나타난 성경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들은 모두, 한 분 하나님이 한 분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는 중에 사용되었던 하나님의 도구이며 하나님의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찾아오시고 그를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그의 교회를 세우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설명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셉을 설명할 때 요셉의 신앙과 순결한 삶, 그리고 그의 꿈과 비전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 내려가게 하시고 큰 민족을 이루어 고난과 고통 중에 400년 동안 기다리게 하시다가 모세를 앞세워 이스라엘로 하여금 출애굽하도록 하셔서,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시며 심판 주라는 사실을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그토록 웅장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대 드라마에 요셉은 다만 조그마한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신앙과 고결한 삶과 꿈도 본받을 만하더라도 그것이 메시지의 핵심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야곱의 신앙에 대해서 설교한다고 하자. 대개 에서는 먹는 것을 탐하는 육체적인 사람이었으나 야곱은 장자권을 귀중히 여겼던 사람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너무나 소중한 것을 안 나머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기어이 천사와 씨름을 해서라도 복을 받는 야곱의 삶을 본받고자 한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했던 방법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열정을 예찬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도 이 땅에 살면서 야곱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소중히 여겨 악착같이 살아서 믿음의 성공자가 되고 사업의 성공자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큰 은혜와 복을 받자는 식으로 결론이 난다. 이런 설교들은 모두가 희망적이고 교훈적이며 은혜로운 설교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좀 더 살펴보면 앞서 말한 대로 성경은 야곱의 신앙의 위대함을 그리려는 것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스토리를 전하지 말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선포하라

 

창세기 50장 중에 꼭 절반인 25장에서 50장까지 야곱과 관련된 기록이다. 그의 모태에서부터 무덤까지 기나긴 생애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고 그의 마음의 상태까지 자세하게 기술했다. 이에 반해 에녹에 관한 기사는 불과 4절로 간단히 기록되었다.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고 했다. 이렇게 성경은 위대한 인물의 역사를 너무도 간명하게 처리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문제투성이, 허물투성이, 실패투성이, 이중인격자, 그 사람 야곱을 이토록 길게 기록했을까? 우리는 에녹이 삼백년 동안 그토록 깨끗하고 순결하게 하나님과 동행한 삶, 곧 믿음의 삶을 산 것에 대해 알고 싶으나 성경은 오히려 침묵하고 있다. 그저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며 자녀를 키우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 들림을 받았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에녹과 비교해볼 때 야곱은 형편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찌하여 깨끗하고 순결하게 삼백년을 신앙의 승리자로 살았던 에녹에 대한 언급은 극히 간단히 취급하고 허물투성이 야곱에 대해서는 저렇게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그의 생애를 기록했을까? 사실 성경은 야곱의 일대기를 기록해서 야곱의 승리적 삶을 기록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실패하고 넘어지고 연약한 그 사람 야곱을 하나님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사랑하셔서 이스라엘의 족장을 삼으시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위한 준비를 했던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성경은 야곱의 스토리라기보다는 볼품없고 연약한 자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자,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운동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즉 야곱의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필자가 이 시리즈를 이어가면서 여러 차례 강조한 것은 바로 성경을 보는 눈이 띄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도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봐야 보이기 시작하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봐야 이해되어진다. 단순히 성경에 나타난 인물의 장단점을 발견해서 그 사람의 신앙의 결단과 삶을 본받자는 수준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본질에서 멀어지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할 때에도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예증적 설교가 도덕적 설교, 윤리적인 설교, 교훈적 설교로 전락해서 다른 종교가 구별이 어려워지는 경우도 있다.

 

5.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이다

 

리차드 리스쳐(Richard Lischer)는 말하기를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Preaching is final expression of Theology)이라고 말한바 있다. 즉 어떤 설교자는 말하기를 자기는 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다만 받은바 은혜대로 설교한다고 한다. 또 어떤 분은 신학은 좀 자유롭게 하고 신앙은 보수적인 신앙을 갖는다는 사람도 더러 있다. 하지만 이는 이만저만 모순이 아니다. 모든 설교자들의 설교에는 반드시 신학이 포함되어 있고 결국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반드시 설교로 표현된다. 이단의 사상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이단의 설교가 나오고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설교에 자유주의 사상이 나오도록 되어있다. 그런 면에서 리스쳐의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이라는 말은 옳다.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란 것도 결국 설교자의 신학적 입장과 궤를 같이 한다. 설교는 그냥 즉흥적이고 받은바 은혜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과 인간, 중보자 그리스도, 구원 성경관 등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신학적 입장이 있고서야 바른 설교를 할 수 있다. 구속사적 설교는 곧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을 갖는 사람들이 잘 할 수 있는 설교이다. 물론 그것은 성경적 설교이다. 구속사적 설교의 주창자는 모두가 칼빈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인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홀베르다(B.Holwerda), 스킬더(K.Schilder), 베인호프(C.Veenhof) 같은 학자들이다. 물론 그 위로는 요한 칼빈(J.Calvin)을 들 수 있다. 결국 성경을 성경으로 보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속사역을 믿으면 구속사적 설교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의 강조점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 중심사상

 

하나님 중심사상은 단순히 신학적 논리나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설교의 방법론에도 나타나야 하리라고 본다. 구속사적 설교를 하는 사람은 항상 역사적 본문을 취급할 때 인간 편에서의 접근보다는 하나님 편에서의 접근을 최우선으로 시작한다. 즉 어떤 본문을 읽든지 하나님께서 성경의 인물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와 뜻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향해 던지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니만큼 내 쪽에서의 입장으로 도덕적 윤리적 교훈을 얻는 정도의 설교는 성경을 옳게 증거한다고 볼 수 없다. 성경은 명심보감과 비슷한 것도 아니고 사서삼경과 동격의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일차적으로 하나님 중심 시각에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려져야 하리라고 본다.

 

성경의 핵심적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밝혀라

 

화란의 캄펜 신학대학의 창설자이신 기독교 변증학자요, 설교가인 끌라스 스킬더(K.Schilder) 박사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즉 “설교자들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보다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 주된 관심을 갖고 설교하는 사람이 많다. 예컨대 유다, 베드로, 빌라도, 헤롯, 마리아들에게 관해서 설교한다. 특별히 설교자들은 성경인물의 내적인 갈등과 위로, 때로는 완악한 마음 등의 이야기를 부각시키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에게 무엇을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주변인물을 통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확실히 설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스킬더는 구속사적 설교의 의미와 방법을 위의 글에서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이므로 당연히 하나님 중심의 것이어야 하며 하나님 우선의 시각으로 성경을 접근하는 것이 옳다. 물론 성경 기록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를 보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세상에 살도록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 앞에 살도록 했으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저주 아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고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방법을 계시해 주셨다. 그 후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핵심적 구속사역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 자체를 증거 하라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의 구속사에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이 있다. 이를 두 극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속사에는 늘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성경의 골격이며 축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 운동에 대해서 인간의 반응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즉 어떤 사람은 믿음, 용기, 신뢰 또 다른 사람은 불신앙, 불순종, 화, 복 등이다. 사실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중심해서 어떤 모델이나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의 설교 형식이다. 또 그것은 최근에 유행하는 강해설교의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살펴서 윤리적 교훈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도덕적 설교, 율법적 설교에 머물고 만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항상 앞서가시며 전적으로 그의 주권과 의지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단순히 개인이 전기나 국가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사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역사적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당연히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말해야겠지만 하나님 중심사상으로 성경을 보는 눈이 띄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적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자 하는 구원의 의미를 명쾌하게 먼저 드러내야 한다. 그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잘 묘사되고 또 인간적인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구약성경에서 역사적 본문을 갖고 설교할 때 먼저 질문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셨나?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의도하셨는가? 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인간의 반응을 잘 적용함으로서 설교를 할 수가 있다. 이런 원리는 신약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복음서들에는 예수님과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과 그의 사역, 그리고 그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나타내었으며 어떻게 구원을 성취하셨는가를 먼저 앞세워야 한다. 주변 인물의 성격과 행동반응, 신․불신, 순종 또는 불순종에서 어떤 교훈을 배우려는 것은 이차적으로 해도 좋을 것이다. 성경기록의 목적이 하나님이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면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우선적이고 핵심적으로 다루어야 마땅하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의 역사적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어떤 인물의 성격이나 성공적 삶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인물을 통해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 사건에서 삼위 하나님이 우선이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구속사적 설교의 의미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칼빈은 말하기를 “사도 바울은 성경을 의심할 바 없는 진리이지만 모세가 위대한 웅변가였다거나 이사야가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Coupus Reformatioum, 79:783) 즉 칼빈의 입장은 구약을 가지고 설교하던 신약의 인물들 특히 바울은 구약의 인물과 사건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과 존귀를 돌릴 뿐 인간은 다만 성령님이 쓰시는 도구로 이해했다. 그래서 칼빈의 주장은 설교자의 임무가 인간의 무슨 기호나 기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설교를 이끌어내는 방법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Thoecentric) 신학의 틀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다시 요약하면 구속사적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역사적 사건을 설교할 때 삼위 하나님을 항상 우선순위로 놓는 설교방식이다>

 

② 역사적 점진성의 원리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구원사역은 하나님이 하신다

 

구속사적 설교를 하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운동을 구체적인 역사 가운데 진행시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속 역사까지도 그의 구속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구속사는 그 본질적 요소로서 역사성(歷史性)을 가진다. 구속사란 하나님께서 역사의 배후에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며 간섭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역사 속에서 더불어 전개되는 구원의 사역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의 구속의 계획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신다. 그렇기 때문에 구속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주의자는 구속사적 설교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생각할 것이 있다. 역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역사를 강조한다고 해서 필자가 말하는 ‘구속사적’이라는 말과 그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18세기와 19세기 헤겔의 역사주의와 슈라엘마허의 자유주의 감화를 받은 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구속사’와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진다. 그들의 역사 이해는 상대주의(相對主義)였고 역사 비평적 방법이었다. 이 사람들의 태도는 이성(理性) 만능주의자로서 초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모조리 거부하여 기독교의 본질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그래서 이런 역사 비평적 방법으로는 성경의 구속사를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의 초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제거하는 자유주의 또는 현대주의 신앙을 가진 설교자들은 ‘구속사적 설교’가 불가능하다.

 

신정통주의자들의 초역사적 방법론은 기독교를 공중누각의 초월 종교로 바꾸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그것은 칼 빨트(K.Barth)를 중심으로 한 초역사적 방법론이다. 칼 빨트의 초역사적 방법론은 실제로 앞서 있었던 합리주의와 자유주의 역사적 방법의 반동으로 생겨났다. 하지만 빨트는 이른바 Historie와 Geschichte를 구분하면서 Historie는 객관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과거의 역사를 가리킨다면, Geschichte는 실존적 역사를 의미한다고 했다. 바로 이것이 이원론적 방법이며, 빨트의 초역사적 방법론은 구속사를 역사 위에 분리시켜 기독교를 구름 위에 세워진 공중누각 같은 초월종교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칼 빨트의 방법론을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답습하고, 강단에서 그런 생각이 마치 정석인 듯이 설교하고 있다. 하기는 칼 발트의 이런 논리가 매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성경 속에 나타난 20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이 오늘날 나의 실존적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묻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적용의 편의를 위해서 그들은 구속사적 성경진리의 핵심을 부셔버리거나, 객관적 진리를 자기의 체험적인 주관주의로 격하시키는 꼴이 되기 쉽다. 그래서 설교신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게 된다.

 

성경 계시의 사건을 실존적, 체험적으로만 해석하면 주관적으로 격하시키는 꼴이 된다

 

최근에 한국 교회에서 난다 긴다 하는 대설교가들 중에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운동의 역사적 사건을 소홀히 다루면서 흔히 말하는 <적용>과 <실제>를 강조하면서 성경계시의 모든 사건들을 실존적으로 파악해서 나름대로의 교훈을 주려는 사람들이 많다. 거기다가 설교자들은 자기 인기관리나 영웅 주의적 발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성경의 진리가 일반종교의 윤리나 도덕과 비슷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하고 그 말씀이 삶의 실제(praxis)에 관련되어야 하는 것은 설교의 상식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역사 속에 자기를 계시하신 사건 그 자체를 소홀히 다루면서 실존적으로 어떤 교훈만을 받고자 한다면 유일무이한 기독교의 진리를 일반종교로 바꾸는 꼴이 되기 쉽다.

 

성경은 역사성을 지니면서 통일성과 점진성이 있다

 

우리가 성경역사를 살펴볼 때, 역사에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사건들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창조했다. 그러나 그것은 없어져버렸다. 첫 세계는 홍수로 멸망되었다. 이런 수많은 성경의 사건들은 우리가 그런 상황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단지 우리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과거의 사건을 살피면서 그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물어볼 뿐이다. 예수의 탄생은 되풀이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어떤 설교자가 말하기를 오늘날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속에 태어나야 한다고 설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탄생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결정적 사건이 된다. 그러므로 성탄절 설교는 그리스도가 탄생한 일이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설명해야 하겠고 또 의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해야 구속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성경의 구속사는 통일성과 점진성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속사적 설교를 하는 사람은 항상 신구약 66권의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성을 띄면서도 동시에 통일성과 점진성을 가지고 있음을 믿는 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무수히 많은 역사적 사건의 조립이나 편집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역사 즉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역사의 중심에서 구속운동의 통일성을 갖는다

 

여기에 대해서 화란의 캄펜 신학대학의 설립자이고 대 변증학자이면서 설교자인 스킬더(Schilder) 박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즉 구속사의 통일성의 문제는 항상 설교와 연관되어 있다. 개혁주의 성도들은 믿기를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의지로 모든 것을 계획하셨다. 그리고 그 계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구속하셨다. 그러므로 역사는 하나의 통일성을 가지는데 그 통일성은 구속사의 통일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사의 중심에 서 있다. 즉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가 있고 그것은 알파와 오메가로 창세기 첫 장에서 계시록의 마지막장까지 일관된 하나님의 구속 운동의 통일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구속사의 통일성 문제를 교리적으로 또 신학적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실제로 강단에서 설교할 때는 전혀 응용이 안되는 데서 오늘의 설교신학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Schilder, Reformatie Ⅺ, 1931, p.365)

 

구속사는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구속사는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동반하면서 점진적(漸進的)으로 발전되어간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성을 깨닫는 것은 성경신학의 중요한 과제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통일성과 점진성을 전제하고 학문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성경신학이라고 한다. 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장 클라우니(Ed. Clowney) 박사의 말과 같이 “계시의 발전을 연구할 때에 성경신학은 성경 원저자의 단일성과 하나님의 구원과 계시사역의 유기적 연속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구약의 성도들은 메시아의 날을 갈망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던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구속사적 설교방법이란 다른말로 성경신학적 방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성경신학적 설교방법은 설교본문을 설교할 때 이런 원리들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즉 구속사적 설교방법은 성경본문의 의미를 명확히 해줄 뿐 아니라 그 중심메시지를 강조하고 건전한 적용을 가능케 도와준다. 그래서 성경 신학은 구속사적 접근을 전제하고 성경의 통일성과 점진성을 포함하는 것이다

 

③ 구속사적 설교란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역사의 축(軸)으로 보는 것이다

 

성경은 역사를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한 기록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역사적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의 선포, 구원의 계획, 구원의 성취를 핵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건 기록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을 계시의 수용자로 삼고 그들에게 역사를 통해서 구원의 길을 제시한 기록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구원운동의 말씀이고 그것이 성경을 관통하는 중심이다. 예컨대 원시계시인 창세기 3장 15절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하였다. 이 본문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원계시는 더욱 확장되고 풍성하여져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족장들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피 흘리는 제사를 통해서 메시야가 올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피 흘리는 제사를 통해서 속죄함을 받을 수 있음을 계시하였다. 하나님은 다윗 왕통을 통해서 메시야가 올 것을 선언하고,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도록 백성을 가르쳤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과 약속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의 성취자로서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속을 위해 역사 속에 오셨다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유익하고 좋은 말씀의 기록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우리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역사에 함께 하시어 한 분의 중보자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신 역사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씀에서 유대인들의 세계관이 구속사이며, 그 구속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또 요한복음 1장 45절에서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하였다. 이는 구약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정확히 기술하였다. 사도행정 8장 35절에도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고 했다. 집사 빌립의 구약이해는 이사야서에 고난의 종은 바로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시요, 예수가 복음 그 자체라고 했다. 그것이 당시 사람들의 성경관이자 신앙관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 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구약 성경 전체가 자신을 위한 것임을 내외에 천명했고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의 틀 가운데 이해하였다. 그 외에도 모세가 이미 그리스도를 내다보고 애굽의 금 은 보화를 마다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에 동참했으며(히 11:26), 다윗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했다고 썼다.(행 2:25-31) 성경의 구조는 한 결 같이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역사의 축(軸)으로 보고 있다.

 

역사의 축은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진행 된다

 

그리고 그 역사의 한가운데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필자가 다시 한 번 성경의 구속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설교자가 가진 성경관이 옳아야 바른 설교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설교자가 성경에서 단지 권선징악에 대한 문제를 다루거나 윤리적 도덕적인 표준을 얻기 위한 설교만을 한다면 성경의 본질에 접근하기 어렵다. 즉 성경 전체의 넓은 조망 속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성경이 본래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을 현대인들에게 가감 없이 증거해야 한다. 산에 올라가면 동네가 보이고 비행기에서 보면 도시가 다 보이듯이 설교자는 언제나 성경 전체의 넓은 조망 속에서 성경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구속사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가 덮어놓고 천편일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구속사적 설교방법은 어떤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든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명백히 드러내야 할 것이다. 설교자가 이런 접근을 시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어 가졌는가를 확실히 깨닫게 된다.

 

구속사적 선포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동시에 있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말은 단지 죄의 용서나 영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죄가 영혼에만 국한되지 않고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인 것처럼, 구원도 기독교인의 생활의 전 영역에 나타나야 한다. 설교자가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꼭 알아야 될 것은,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욘 2:10) 그러니만큼 설교자가 구원을 설명할 때에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더불어 선포해야 한다. 이런 태도가 설교학자 훅스트라(T. Hoekstra) 박사의 주장처럼 개혁파 설교의 두 가지 원리인 “오직 성경”(Scriptura sola) "성경전부“(Scriptura tota)이다. 성경의 중심축인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아는 사람은 설교할 때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선포한다. 즉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증거하려는 자는 또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도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구원의 말씀을 듣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미워 하시면서도 인간을 구속해 주셔야 하겠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정미소에 가 보면 크고 작은 각종 기계들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것들은 또한 각각의 벨트에 매여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반드시 중심 되는 축이 있다. 이처럼 성경의 역사적 사건 그리고 위대한 메시지들이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축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을 깨닫고 설교하는 것이 구속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6. 구속사적 설교 작성 시 착안 사항

 

설교학적으로 볼 때 설교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방법에는 나름대로의 특색과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 방법만 절대적이고 다른 방법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필자는 앞의 글에서 여러번 ‘모든 설교의 방법 중에서도 구속사적 설교 또는 구속사적 강해설교만이 성경을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설교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임을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필자가 여기서 주장한 구속사적 설교와 지금까지 한국교회 대개의 목회자들이 행하고 있는 제목설교 또는 본문설교와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에 앞서서 구속사적 설교를 할 때 몇 가지 착안사항을 생각해보자.

 

구속사적 설교 작성 시의 착안 사항

구속사적 설교를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전제를 먼저 바닥에 깔아야 한다.

 

①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다

 

첫째, 성경은 언제라도 하나님의 자기 계시(De Openbaring Gods)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계시하셨는가를 먼저 찾고, 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찾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성경 인물의 행위의 잘잘못만을 취급해서 그것으로부터 무슨 교훈적인 것을 얻어낸다면 성경기록의 본래 목적에서 멀어질 수가 있다. 성경에는 많은 사건의 기록이 있지만 모두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계시하고 있다. 즉 성경 기록의 모든 사건 중에 나타나는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구속주로 보여주시고, 그의 구속의 모든 사역은 성경의 모든 사건마다 계시되고 있다.

 

스토리의 주인공의 이야기 보다 그 주인공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을 봐야한다

 

예컨대 우리는 구약성경 가운데 요셉의 이야기를 많이 설교한다. 이 때 이 사건의 초점을 요셉의 꿈에 두고 그것을 주제로 “위대한 비전을 가지라”는 등의 설교를 한다. 또는 요셉과 악한 형들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기도 한다. 이렇게 설교하면 성경 기록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소홀히 다루게 된다. 결국 요셉을 전후한 모든 사건들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다. 이 내용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중심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요셉보다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구속사적 설교를 하는 기초적인 이해이다. 지금까지 한국 강단의 설교 스타일은 성경의 인물을 연구하고 그의 행위, 그의 신앙, 그의 실수와 범죄를 통해서 삶의 지혜와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간증과 설교를 구별할 수 없게 되고 설교가 위인전기처럼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 때 이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가 되시며 창조주요 심판주이심이 명백히 증거 되지 않는다면 비록 멋지고 아름다운 교훈을 준다 해도 성경을 바르게 설교했다고 하기 어렵다. 물론 성경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도 필요하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그 성경의 인물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말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반응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 기록된 인물의 삶과 신앙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요셉에 관해서 설교할 때에도 요셉의 일생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위대함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S.G.De Graaf, Verbonds Geschiedenis(언약사), Baker, Geschiedenis der Openbaring(계시사) 참고)

 

②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한 자기계시

 

둘째로, 구속사적 설교를 할 때의 착안사항은 중보자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함에 있어서, 인간은 죄로 인해 전적으로 부패했으므로 중보자를 통한 은혜의 계시(Openbaring van Genade)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신구양약의 계시의 내용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구속자이심을 계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중보자를 통한 구속이 성경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계시의 점진성을 말한 바 있지만, 그 뜻은 늘 새로운 것이 덧붙여진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과 원리는 언제나 동일하다는 뜻이다. 구약의 모든 사건 속에는 구속의 씨(seed)가 내재되어 있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해야 할 일은 신구약 성경을 살피면서 그 구속의 씨를 밝히 드러내어주는 것이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의 사역은 신약 시대에 와서 시작 되었다기 보다 실은 이미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그의 백성 가운데 자기 자신을 계시할 목적으로 그림자처럼 활동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사건은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고, 구약의 역사는 그의 영이 이루신 위대한 기적이라고 할 만하다.

 

중보자를 통한 인간의 구속이 성경의 중심이다

 

예컨대 우리가 에스더를 가지고 설교한다고 하자. 이 성경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많은 자유주의학자들은 이 성경의 정경됨을 의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단 이 책의 처음부터 중보자가 어떻게 계시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된다. 또 다른 예는 신약 성경 중에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삭개오의 용기 있는 믿음의 열정과 죄의 회개를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삭개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기계시라는 사실을 명백히 할 때 바른 설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설교할 때 삭개오와 같은 성경 인물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자기 몸에 향유를 부은 베다니 마리아의 행위를 “복음이 전파되는 온 세상에 전하여지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녀의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행위를 말하기에 앞서서 마리아의 마음 속에 그렇게 큰 사랑을 불러일으킨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설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리아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투영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우선적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인물에 대해서 설교할 때 주로 그 인물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즉, 그 인물의 신앙과 삶을 통해서 죄는 경고의 본보기로, 그리고 선한 일은 권장사항으로 이른바 권선징악(勸善懲惡)적인 교훈만을 말하기 쉽다. 이것이 예증적 설교 또는 모형적 설교의 함정이며, 제목 설교를 즐겨 사용하는 모든 설교자들이 직면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인물에 일차적인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선포해야 할 것이다.

 

③이스라엘의 언약 속에 자기계시

 

셋째는 구속사적 설교를 할 때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계시는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 속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중보자일 뿐만 아니라 언약의 머리(Hoofd in het Verbond)가 되신다. 설교자들은 설교할 때 예수와 그 주변 인물에 대해서 단순한 이야기를 찾을 경우가 있다. 이 때 자칫하면 실제로는 성경과는 무관한 설교가 될 수도 있다. 가령 앞에서 요셉을 예로 든 바 있지만, 그 이야기의 초점은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 보다는, 요셉을 통한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이 섭리적 목적이 무엇인가를 문제 삼아야 한다. 또 다윗을 말할 때에도 성경이 한 개인으로서의 다윗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은 개인으로서가 아닌 백성의 머리로 묘사되고 있다.

 

다윗보다 요셉보다 하나님이 성경의 중심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윗의 파란만장한 삶 보다 다윗을 다윗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또한 백부장이 자기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을 때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하셨다. 이 말에는 ‘언약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의문에 대한 답이 포함되어 있다. 백부장의 대답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언약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즉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으니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로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5-9)고 했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간청을 들어주셨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언약의 인정을 요구하신다. 우리도 설교할 때 이 언약이 강조되어야 한다. 언약 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들이 가진 것이 특권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임을 깨달아야 한다. 위의 이런 몇 가지 착안사항들은 구속사적 설교를 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7. 구속사적 설교와 일반 설교와의 실제적 비교

 

<예 1>

앞에서 필자는 구속사적 설교를 작성할 때의 착안사항이 무엇인지를 논했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늘 상 하는 제목설교와 구속사적 설교가 어떻게 다른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한국교회의 저명한 부흥사요 목회자로서 교파를 초월해서 한국교회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K 목사의 설교를 생각해보자.

 

그의 대표적 설교 가운데 「사막의 생수」가 있다. 이사야 35:1-7 을 읽고 정리한 「사막의 생수」라는 제목의 대지는

 

1. 사막에는 생수가 없다

2. 사막에는 화초가 없다

3. 사막에는 길이 없다

4. 사막에는 여관이 없다

 

비평-보편적 한국강단의 설교로서 뜨거운 열정, 풍성한 예화, 감화 감동이 있었다.

그러나 그냥 종교적, 도덕적 수준에 머무르는 문제가 있다.

설교자의 튀는 아이디어, 인기전술, 뛰어난 화술로 복음이 가리어진 것이다.

종교적인 것이 모두 복음적이거나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이 4개의 대지로 나누었다. 어떤 평자는 이 설교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 설명과 해석은 본문을 분해한 내용으로서 영감에 찬 표현이라고 했다. 결론은 헤매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주 예수를 믿으면 그 마음에 생수가 솟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실존의 문제이고 구원의 문제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 설교에 대한 위와 같은 평가는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의 공동된 인식인 듯하다. 그러나 K 목사의 이 설교는 전편을 읽어 봐도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은 단 두 줄 뿐이고, 그 다음의 모든 말은 사막과 물에 대한 이야기로서 그 두 단어를 통해서 많은 종교적 교훈을 얻고저 했다. 그리고 청중들이 알아듣기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것이 모두 복음적이라고 할 수 없고, 모든 종교적 감화나 교훈이 성경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강단은 그 풍성한 예화나 그 뜨거운 열정적인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냥 종교적이며 윤리적이며 도덕적으로 머물러 있는데 문제가 있다. 그 보다도 설교자의 튀는 아이디어, 인기전술, 뛰어난 화술로 말미암아 정작 복음이 가리어진 경우도 적지 않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이라 해서 복음적인 것이 아니다

 

하루는 필자가 우연히 라디오 다이얼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어떤 분의 참으로 논리 정연한 설교를 들었다. 아주 매혹적이고 지성인들에게 다가가는 실존적 문제를 다루었다. 예화도 동서고금을 넘나들면서 논리정연하게 엮어갔다. 그런데 마지막 멘트는 이라고 했다. 나는 그 분의 말이 요즘 목사님들의 방송설교와 너무나 흡사해서 잠깐 착각을 일으킨 것이었다. 필자가 이런 경험을 여기 쓰는 것은 오늘의 한국 교회 강단이 논리적이며 윤리적이며 도덕적이어서 흠잡을 데가 없긴 하지만 그것이 스님들의 설법과 구별이 어려운 설교 형태를 지적하고자 함이다. 사실 앞서 말한 <사막의 생수>라는 설교에서 사막의 특징, 사막에 있음직한 상황, 생수의 역할, 생수와 인간과의 관계 등, 여러 가지 인간의 삶, 특히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막이나 생수라는 단어를 갖고 설교자의 한없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여러 가지 유익한 교훈을 설명해 주고 있다. 물론 성경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유익한 교훈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보다는 생명을 주고, 구원을 주고 중보자이며 구속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확신을 주어야 한다.

 

의미-본문, 이사야 35:1-7의 구속사적 진정한 의미

1. 약속의 일깨움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약속을 다시 깨우는 소망

2. 메시지 구조 : “너희 하나님이 오사”“그(예수 그리스도)가 오사”

“너희(인류)를 구하시리라”

특징-메시아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뤄진 변화와 축복을 내다본다.

 

그렇다면 이사야 35장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본문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650여 년 전에 이사야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계시이다. 특히 이 본문은 예언서이긴 해도 문장은 시적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중보자이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보면서, 그 메시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엄청난 기적적인 사건들과 변화를 바라보는 예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다시 일깨워주심으로 큰 소망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영접할 것을 요구한다. 이사야의 메시지는 다름 아닌 “너희 하나님이 오사”,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사35:4)고 하심으로 장차 오실 메시야는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가 곧 그리스도이며 그가 오사 우리를 죄 가운데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이런 메시지는 이사야 53장에 와서 고난의 종 메시아를 예언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마치 갈보리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듯 또는 사진 촬영을 하듯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이 본문의 메시지는 사막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변화와 축복을 이처럼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약속을 바라보는 것은, 택한 백성들에게 실로 가슴을 뛰게 하는 웅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사막이나 물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는 변화와 축복을 보여준다

 

이사야는 광야, 메마른 땅, 사막이 변해서 레바논과 갈멜과 샤론의 아름다움으로 꽃피울 날이 오는데, 이런 변화는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사35:2) 즉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 나올 때 위대한 변화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일찍이 요한이 증거한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는 말씀과 어쩌면 그렇게도 절묘하게 맞는지 알 수 없다.

 

성경의 초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그가 바로 구원의 주이시고 메시야가 되심을 선포하는 행위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오실 메시야를 기뻐하는 것이었다. 이 성경의 내용은 상징적인 시어(詩語)들로 가득찬 시적 표현이다. 하지만 이 성경의 초점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적 축복으로 충만해 있다. 그리고 구원은 인간의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 곧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되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거룩한 길을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해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사35:8) 여기에 복음의 핵심이 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의 교리를 만날 수 있다. 구약성경의 구절이 어느 한 사건의 단독적 파편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약속 가운데 진행되고 그 설교자는 생명을 내어 건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속사적 안목과 신앙생활 교훈으로만 아는 설교와의 간격이 크다

 

필자는 위에서 이사야 35장에서 메시지의 내용을 대략적인 스케치로 살펴보았다. 성경을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보는 사람과 성경을 단순히 무슨 신앙생활에 필요한 교훈 정도를 주는 것으로 알고 자기식대로 제목설교를 하는 사람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만약에 앞서 예를 든 K 목사님의 설교처럼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하는 설교는 신앙생활에 유익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교훈적인 설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가슴을 적시는 구속의 감격을 주고,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에는 너무도 부족하다. 그래서 필자는 이 지면에서 여러번 여러번 구속사적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예 2>

실정-현재, 한국교회 강단 대다수가 풍유적, 예증적 설교로 일관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강해설교가 강조되는 것은 크게 고무적이다. 강해설교의 방법이야말로 성경을 성경대로 해석하는 데 가장 알맞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강해설교도 그 설교자가 가진 성경관과 신학적 입장 또는 선입견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 형식은 강해설교라고 해도 실제로는 대게 풍유적(Allegorical)이며 또는 예증적 설교(Examplary Preaching)가 대부분이다. 설교자가 가진 의식과 목적에 따라서 자의적으로 성경을 끌고 다니면서 하고 싶은 말을 메시지로 담아내는 형국이다. 물론 비록 메시지의 내용이 모두가 기독교적이며, 교훈적이며 또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이라고 할지라도, 그 본문에서 말하는 진정한 복음의 내용을 놓치거나 또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큰 흐름을 간과해 버린다면 곤란할 것이다.

 

분석-본문, 마2:1-12/ 제목, 성탄에 대한 3가지 태도

1. 성탄에 대해 적대적 사랑-헤롯

2. 성탄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종교지도자

3.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사람-동방박사들

비평-완벽한 강해설교의 모델이지만, 구속사적으로 본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본뜻을

증거 하는데 소홀함.

 

그러면 시중에 나와 있는 설교집 중에 어느 분의 설교를 살펴보자. 본문, 마태복음 2:1-12을 읽고 「성탄에 대한 세 가지 태도」라는 설교를 했다. 이 설교의 흐름은 ‘성탄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행태를 알 수 있음’을 전제한다. 이 설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탄에 대한 세 가지 태도를 알게 한 후, 오늘날 우리가 어떤 바람직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이끄는 말로는 ‘오늘날 성탄은 기독교인들만의 명절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명절이 되었기에 모두다 들떠있고 분주하나 이들이 성탄에 대해 갖는 태도를 보면 주로 세 가지로 요약 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은 성탄에 대해 적대적인데 그 사람들의 모형이 바로 헤롯왕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고 에돔 족속이며, 로마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으므로 왕위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던 차에 왕중 왕이 탄생했다는 소문을 들으니 불안하고 당황하고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오늘날도 헤롯과 같은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의 성품을 분석해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성탄에 대해 무관심한데 이런 사람들의 대표는 종교지도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헤롯의 질문에 ‘예수가 베들레헴에 나시고 다스리는 목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들을 말했다. 그리고 성경에 박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경배하지 않는 이유는 무관심 때문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관심하기에 예수를 영접지 못한다. 그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을 몰라서거나 거리 때문이나 날씨가 아니라 무관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고, 내 영혼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보다는 온갖 세속적인 관심에만 집중되어 있기에 정작 예수에는 무관심한 것이 현대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경배한다. 이들의 태도를 바로 동방박사의 태도로 보았다. 동방박사들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으며 먼 거리를 여행하여 귀한 예물을 드렸다. 그러니 오늘날의 성도들도 동방의 박사들같이 믿고 예수를 영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도덕적, 윤리적 설교가 율법주의적 설교로 흐름으로 기복적 설교가 되기 쉽고 생명의 구속적 진리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해 성경적 삶으로 인도하지 못함.

 

위의 설교 요약은 강해 설교가들이 흔히 하는 설교 스타일이다. 이 설교는 매우 복음적이면서도 본문의 전후관계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작성한 완벽한 강해설교의 모델이다. 이 설교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없을 뿐더러, 한국교회 강단에서 늘상 통용되는 설교이므로 모범적 설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위의 설교를 필자가 늘 주장하는 구속사적 설교의 방법과 비교해 보려고 한다. 앞서 예를 든 설교의 방법과 접근은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설교방법이며, 특히 본문 강해설교의 모델이다. 그러나 모든 예증적인 설교에서 그러하듯이 이 설교에서도 본문의 사건 속에 나타난 인물들의 행동과 말, 그리고 그들이 생각했을 것 같은 내용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고자 한다. 이런 교훈적인 설교는 설교자나 듣는 청중이나 다같이 쉽게 이해할 수도 있고 내용도 분명하다. 누구는 이렇게 하다가 저주를 받았으나, 누구누구는 저렇게 하다가 큰 은혜와 복을 받았다는 식이다.

 

예증적 설교를 하다보면 경험에서 얻은 진리가 많아 진다

 

그래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서 복 받게 된 아무개처럼 살아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이는 예증적 설교의 강조점이자 특징이다. 그런데 이런 형식의 설교를 하다 보니 자연히 성경의 예와 유사한 우리의 삶 또는 역사적 인물의 성공적 신앙담을 많이 수집해서 삶의 모범으로 제시하게 된다. 어떤 집사, 어떤 장로는 이러이러한 신앙의 모범을 보이다가 크게 축복받아 잘 살았고, 또 다른 사람은 주님을 배신하고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고 교역자를 멸시하다가 패가망신했다는 식이다. 이런 예는 성도를 교훈하고 지도하는데 퍽 유익하다. 하지만 이런 설교의 문제는 성경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본뜻을 증거 하는데 소홀하고 이른바 도덕적 설교, 윤리적 설교를 함으로써 이른바 율법주의적 설교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설교자가 성경을 읽으면서 오늘의 삶과 연결시켜 적용해 볼 때 동방박사의 열심과 헤롯 등의 반응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속사적 맥락의 이해가 필요하다

-초자연적 사건을 계시/ 나 같은 죄인 사랑 위해 성육신 증거

 

그러나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각할 것은 이 성경의 사건은 동방박사나 별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 보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적인 전체 맥락 속에서 먼저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은 우리의 구주로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오셨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구속운동이 그의 단독적이며 특수한 방법임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인간을 위한 구속운동은 하나님이 준비하셨을 뿐 아니라, 초자연적이며 우주적 사건임을 계시하고 있다. 가령, 별의 출현,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찾아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우주적이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구속 행위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본문의 주인공은 별도 아니고 동방 박사도 아니고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본문의 주인공은 별도 아니고 동방박사도 헤롯도 아니다. 그 본문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나 별이나 제사장이나 헤롯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엑스트라이며 배경이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에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줄거리를 추출하는 것도 귀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어떻게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더 힘 있게 증거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성경의 케리그마를 발견하고서야 설교자의 가슴은 뜨거워질 것이다. 설교자의 가슴이 복음과 진리로 뛰기 전에는 생명 있는 설교가 될 수 없다.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수님께 드린 헌신의 행동도 귀하지만, 동방의 박사들을 베들레헴까지 불러들인 하나님의 웅장한 계획과 섭리를 소리 높여 설교해야 할 것이다.

 

<예 3>

필자는 앞서서 두 차례에 걸쳐 구속사적 설교와 한국교회 강단에서 통용되는 설교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점(点)으로 보지 않고 선(線)으로 볼 줄 아는 눈이 띄어져야 성경이 바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위대한 구속사역을 위해 섭리하시며 간섭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먼저 보고자 했다. 필자는 이번에 다시 한 번 다른 예를 들고자 한다.

 

목회자들이 많이 설교하는 성경본문 중에 창세기 22:1-19까지를 예로 들어보자. 이 본문에 대한 설교자들의 일반적인 접근은 대개 다음과 같다. 제목은 거의 “아브라함의 신앙”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는 의도도 있지만, 아브라함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으로 제사하게 된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허락하실 메시아 탄생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예표하신 어린양을 잡아서 드린 특수한 제사였다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Ⅰ. 아브라함의 신앙의 순종 ① 순종의 자세 ② 순종의 방법 Ⅱ. 하나님의 축복의 응답 ① 이레의 축복 ②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시는 뜻 ③ 아버지의 신앙에 맞는 아들의 순종 Ⅲ. 순종의 결과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강해설교의 기준에도 맞고 본문설교로서도 손색없는 설교이다.

 

또 해방 전 임사순 목사는 “온전한 제물이 되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이 설교도 비슷하다. 그의 설교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이삭은 제물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통해서 신령한 교훈을 받을 수 있는데, 한국에도 어디든지 제단을 쌓을 곳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덧붙이기를 문명퇴치, 교사, 새마을운동, 농촌 지도자로 나가면 그것이 곧 우리의 제단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이 필요한데 그 불은 곧 성령의 불이라는 것이다. 120명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 놓았을 때 그 불은 제단 위에 붙었다는 것이다. 그 불이 웨슬레의 제단으로 한국의 서문 밖 교회로 붙었다는 것이다. 제물이 누구냐?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제물이라는 것이다. 논리의 비약이 많기는 하지만 한국교회의 초기부터 있어온 설교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 초기 교회의 최지덕 목사는 “제물은 어디 있나이까”라는 제목설교를 했다. 그는 ① 아브라함은 복잡한 가정문제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②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③ 제물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등의 대지로 설교하고 있다. 그리고 희생의 제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묻고 “내가 사랑하는 물질을 내가 쓰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내어놓을 때 희생이 되는 것이다. 또한 시간을 바치는 것, 선한 일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는 것,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등이라”고 했다.

 

위에 열거한 창세기 22:1-19에 대한 세 가지 설교는 지금까지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설교의 내용이다. 또 위의 세 가지 유형의 설교들은 매우 보수적이며 복음적인 설교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모든 교파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설교의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설교할 때 설교자가 성경에 대해서 어떤 태도로 임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앞에서 여러번 지적한대로 설교자의 신학과 세계관 그리고 성경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구속하시기 위한 역사로서의 성경을 깊이 깨닫고 연구할 때 성경에 대한 태도는 좀 더 특별해질 것이다. 즉 성경을 읽되 성경신학적으로 또는 구속사적인 시각에서 성경을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의 구속운동-아브라함의 믿음이 최우선이 아니다

 

그러면 이 본문에 대해서 구속사적인 접근 방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최우선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물론 하나님의 구속 운동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을 제외할 필요는 없지만 그 초점을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을 해석하고 깨달음에 있어서 먼저 성경 중 어떤 사건의 인물로부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교훈을 얻어내기에 앞서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속하기로 작정하시고 그것을 역사 속에서 진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사역과 섭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만이 성경의 깊은 진리가 풀려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잘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가신다

 

이 본문의 요점은 아브라함이 드리려는 제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사의 모방이었을 뿐이다. 아브라함이 산을 오르면서 분명히 이삭에게 말했다.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시느니라”(창 22:8) 이 말은 아들의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이 말은 진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친히 제물을 준비하신 것이다. 좀 더 이 본문의 특별한 의미를 좀 더 살핀다면 하나님 스스로가 희생되셨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아들을 제물로 삼으셨던 것이다. 이 아들은 그가 말씀으로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아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아들이다. 궁극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 자체를 희생시킨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할 때 이삭의 희생은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의 모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삭의 희생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를 위해서 그의 독생자를 희생시키신 것이다. 이삭은 다름 아닌 약속의 씨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브라함 개인의 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단순히 하나님의 행위를 모방하였을 따름이다. 하나님이 친히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결과적으로 보면, 한 마리의 수양이 이삭을 대신해서 죽은 것이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신앙 그 이상으로 관심이 옮겨져야 한다. 아브라함은 이미 영적으로 이삭을 바쳤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신앙의 행위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데 인간의 행위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완전한 제물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두 요소 즉,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대속의 방법을 통해서 친히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대속의 원리를 제사제도를 통해서 나타내신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삼고 모든 구원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진실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그가 홀로 이루시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 성경의 본문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만족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를 믿도록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들의 행위로써 축복과 구원을 만들어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완전히 다른 한 제물을 통해서 그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이시려는 계시였다. 위에서 우리는 창세기 22장을 통해 재래식 설교와 구속사적 설교의 방법이 무엇이 다른가를 대강 살펴본 셈이다.

 

글을 마감하면서

 

“교회 역사는 곧 선교 역사이다”/ “설교 없이 구원 없다“

“설교로서 교회의 성패가 갈린다”

 

앞에서 챨스 다간(C.Dargan)이 말한 대로 ‘교회의 역사는 곧 설교의 역사’ 라는 대전제를 그대로 받는다면, 다우마(J.Douma)의 ‘설교 없이 구원 없다’는 말이나, 포사이드(P.T.Forsyth)의 ‘설교로서 교회의 성패가 갈린다’는 말은 다 같은 뜻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성장지상주의에 빠진 나머지 성경적이거나 신학적인 관심보다는 실용적인데만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른바 거룩한 실용주의를 내세워서 목적이 좋으면 수단과 방법은 어떠하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식이 되어버렸다. 이론을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어디까지나 잘 먹혀들어가는 이른바 프락시스(Praxis), 곧 실제적 효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목양의 현장을 성경적인 설교로 되돌려 놓으려는 하나의 시도로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강조해왔던 것이다.

 

성경은 새 생명과 구원을 주고 삼위 하나님을 믿게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설교는 과연 성경의 진리에 보다 철저한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해왔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것은 무오의 말씀이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택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것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면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섭리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그 구원의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어떠하며 구원의 방법은 어떠한 것을 이스라엘의 역사와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을 명심보감이나 사서삼경처럼 인생을 살아가는데 유익하고 보람된 지침을 주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곤란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 교훈을 주는 교과서가 아니고, 새 생명과 구원을 주고 삼위 하나님을 믿게 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한다.

 

예증적 설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속사적 안목에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예증적 설교(例證的 說敎)에 대해서 재고해야 될 것이다. 물론 예증적 설교가 모두 잘못되었다거나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좀 더 능력 있고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을 바로 깨닫게 하는 데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예증적 설교의 특징 중에는 성경에 나타난 인물의 성품과 삶, 그리고 신앙의 유무를 잘 살핀 후에 그의 성품과 신앙과 삶을 오늘날 우리의 삶의 모델로 제시하고자 애쓰는 것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오늘의 청중들에게 크게 유익하고 귀감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경우에는 성경의 인물이나 오늘날의 성도의 삶과 묘하게 연결되면서 많은 간증거리도 낳게 하고, 실제적으로 적용이 용이하다. 또한 설교자 자신도 이런 형식의 설교를 선호하고 아주 쉽게 성경본문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신앙, 이삭의 신앙, 사무엘의 신앙, 백부장의 신앙 등등 성경의 모든 인물의 장점과 단점을 구별해서 그들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고자 한다. 그리되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설교는 설교로되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인 해결을 주려는 데 그칠 염려가 있다. 또 설교자 자신도 그것을 기점으로 해서 자기가 편한 대로 성경이 말하지도 않은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결국은 율법주의적인 설교가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는 - 성경의 방법이요, 종교개혁자들의 방법이며,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방법이다

 

그와 같은 약점을 뛰어넘기 위해서 필자는 끊임없이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제창했다. 구속사적 설교는 필자의 독창적 생각이 아니고 이미 성경의 방법이며 종교개혁자들의 방법이며 근자에 이르러 모든 칼빈주의자들, 아니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설교방법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성경적 설교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려면 설교자의 눈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하나님 중심(God-center)으로 성경을 봐야 성경이 바로 보이고 바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등 모든 인물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의 구속운동과 그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먼저 살피는 것이 핵심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베드로나 삭개오, 마리아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다. 즉 구속사적 성경연구란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를 자연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특별한 구원의 역사이다. 그래서 구속사적 연구의 초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신구양약의 통일성과 점진성이 전제된다. 즉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역사의 축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을 단순히 점(点)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선(線)으로 보는 것이다. 성경은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의 전기나 역사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이므로 구속사적 시각에서의 강해설교가 한국 교회 강단을 더욱 풍요하게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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