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7 17:47

기도학2

3204 0 0
?

단축키

Prev

Next

크게 작게 댓글로 가기
?

단축키

Prev

Next

크게 작게 댓글로 가기

제5장 신  구약에 나오는 기도의 예

 

1. 구약에 나오는 간절한 기도의 예

 

(1)아브라함의 기도-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기도 (창18:23-33)

(2)야곱의 기도-얍복강가에서의 기도 (창32:22-29)

(3)모세의 기도 (출8:12-13, 출8:30, 출15:22-25, 출17:11-16, 출32:7-14, 출33:8-11, 민11:1-2, 민12:9-14, 민16:20-24)

(4)여호수아의 기도-태양을 중천에 머물게 한 기도 (수10:12-14)

(5)한나의 기도-사무엘을 얻기까지의 기도 (삼상1:10-20)

(6)다윗의 기도-밧세바를 범한 죄에 대한 회개기도 (시51:1-19),

하루 세 번씩 기도 (시55:17)

(7)솔로몬의 기도 -지혜를 구하는 기도 (왕상3:4-14)

(8)엘리야의 기도-갈멜산에서의 기도 (왕상18:16-46)

(9)히스기야의 기도-여호와께 심히 통곡 기도함 (왕하20:1-11,

대하30:17-20)

(10)에스더의 기도-죽으면 죽으리이다. (에4:16)

(11)다니엘의 기도-예루살렘을 향한 하루 3번씩의 기도 (단6:1-28)

(12)욥의 기도-욥의 회개기도 (욥42:1-6)

(13)요나의 기도-요나의 회개와 서원기도 (욘2:9)

 

2. 신약에 나오는 간절한 기도의 예

 

(1) 초대교회 제자들의 기도

행1:12-14 (전혀 기도에 힘씀)

행4:23-31 (박해 속에서의 기도)

행6:4,6 (사도들의 가장 중요한 직무인 기도)

행12:5-12 (베드로를 위한 합심기도)

행13:1-3 (안디옥 교회의 금식기도)

행14:22-23 (각 교회에서 장로를 택하여 금식기도)

행16:14-15,40 (바울을 위한 루디아집 형제들의 기도)

행20:36-38 (에베소교회 장로들의 기도)

행21:5 (두로 바닷가에서의 합심기도)

 

(2) 초대교회 제자들의 기도와 태도

행3:1 : 베드로와 요한의 규칙적인 기도(제9시/ 성전에서)

행7:59-60 : 스데반의 간절한 기도 (부르짖어 무릎을 꿇고)

행9:40 : 도르가를 위한 베드로의 무릎 꿇은 기도

행10:2-4, 9, 31 : 고넬료의 규칙적인 기도 (항상/ 제9시에)

행10:9 : 베드로의 규칙적인 기도 (제6시에, 지붕에서)

행16:13, 16 : 제자들이 기도처를 찾아가서 기도

행22:17 : 바울이 성전에서 기도

 

(3) 제자들의 기적을 일으키는 기도

행3:1-10 : 앉은뱅이(지체장애인) 된 자를 고치는 베드로와 요한

행9:36-42 :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도르가)를 살림

행12:5-17 : 옥에 갇힌 베드로를 구출함

행14:8-10 : 바울이 나면서 지체장애인(앉은뱅이) 된 자를 고침

행16:16-18 : 바울과 실라가 귀신을 쫓아냄

행16:19-34 : 옥터에 큰 지진이 일어남 (바울과 실라의 기도)

행20:9-12 : 유두고를 살린 기도 (바울)

행27:21-25 : 폭풍우를 만난 사람들을 구한 기도

행28:3-6 : 독사가 바울을 상하게 하지 못함

행28:8 : 열병과 이질에 걸린 보블리오의 부친을 바울이 기도로 낫게함

 

(4) 바울의 기도

① 로마서

롬1:8-12 : 로마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와 감사찬양

롬9:3, 10:1, 11:26 : 동족의 구원을 위한 기도

롬12:12, 15:5-7 : 인내와 희망, 성도의 교제에 대한 기도

롬16:20, 24-27 : 사탄을 이기는 기도

② 고린도전서 (고전1:4-7)

 

 

 

 

 

 

 

 

 

 

 

 

 

 

 

 

 

 

 

제6장 성경에 나타난 기도의 시간, 장소, 그 모습들

 

1. 기도의 시간들.

1) "새벽에" 기도하였다. (시57:8, 막1:35)

2) "아침에”기도하였다. (시5:3, 시88:13)

3) "제6시에" (정오)기도하였다. (행10:9)

4) "제9시에" (오후3시) 기도하였다. (행3:1,행10:3, 31)

5) "밤에"기도하였다. (사26:9)

6) "밤이 맞도록" (밤새도록) 기도하였다. (눅6:12)

7) "밤낮"기도하였다. (애2:18)

8)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기도하였다. (시55:17, 단6:10)

9) "항상"기도하였다. (눅18:1, 롬12:12, 골4:2, 살후1:11, 눅21:36)

10)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살전5:17, 골1:9, 딤후1:3)

11) "운명하는 순간까지" 기도하였다. (눅23:46, 행7:60)

 

2. 기도의 장소들

 

1) "성전에서" 기도하였다. (대하20:9, 눅2:37) (행3:1)

2) "산에서" 기도하였다. (출17:9, 눅6:12, 마14:23, 눅9:28-29)

3) "광야에서" 기도하였다. (마4:1-2)

4) "바닷가에서" 기도하였다. (행21:5)

5) "지붕"에서 기도하였다. (행10:9)

6) "집에서" 기도하였다. (행10:30, 행12:12, 행9:11)

7) "구덩이에서" 기도하였다. (렘3:55)

8) "감옥에서"기도하였다. (행16:24-25)

9) "물고기 뱃속에서"기도하였다. (욘2:1)

10) "십자가 위에서"기도하였다. (눅23:46)

11) "기도처에서" 기도하였다. (행16:13, 16)

12)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였다. (마6:6, 6:18, 막1:35, 눅5:16)

 

3. 기도의 모습들

1) "서서" 기도하였다. (대하20:9, 눅18:9-14, 막11:25)

2) "손을 들고" 기도하였다.(딤전2:8, 눅24:50)

3)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하였다. (요11:41,요17:1)

4) "앉아서" 기도하였다. (삼하7:18)

5)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행9:40, 행20:36, 눅22:41-42, 슥9:5-6)

6) "땅에 엎드리어" 기도하였다. (슥10:1, 막14:35)

7)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기도하였다. (단9:3, 에4:1-3, 슥9:5)

8)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였다. (겔27:30-31, 시6:8, 히5:7)

9) "낯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하였다. (왕하20:2)

10) "가슴을 치며" 기도하였다. (눅18:13)

11)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기도하였다. (시6:6)

12) "속으로 말하며" 기도하였다. (삼상1:13, 시4:4-5)

 

이상과 같이 살펴볼 때 기도의 시간이나 장소 그리고 그 모습들은 너무나 다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언제든지, 어디서나, 어떤 모습으로든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맞는 시간과 장소, 모습으로 항상 기도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제7장 침묵과 고독의 훈련

 

한국 기독교의 치유는 우리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무속적이고 기복적인 부분을 깨뜨려야 합니다. 기도로부터 시작하여야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지속적으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모여서 하는 기도보다 개인적으로 하는 기도, 말은 많지 않아도 중심으로 하는 기도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문제가 없어도 습관적으로 생활의 일부분으로 개인적인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말을 많이 하고 기도에 시간을 많이 써야 기도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야 합니다. 침묵은 말을 하지 않고 주님을 계속 찾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로 기도하려고 하지 맙시다. 말이 기도를 끌고 나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침묵과 고독의 훈련은 이 소란하고 바쁘고 혼탁한 시대 속에서 우리의 정체감을 회복함에 필수적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찾아야 만이 우리의 정체감을 찾을 수 있습니다.

 

2) 현대교회는 말을 너무 잘하고 많이 합니다.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교인사이에 적지 않은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너무 말을 많이 하고 살며 말을 많이 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혼잡함과 시끄러움, 소음, 기계에 둘러싸여서 생활을 하고 집에 와서도 가족의 문제, TV의 포로가 되어서 진정한 의미의 휴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어느 누구도 이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혼탁, 혼잡, 시끄러움, 복잡하고, 짜증내고, 분노하고, 혼돈과 무질서가 우리 사회의 성격이 되었고 이것이 다시 인간의 성품에 젖어들게 됩니다. 현대인과 사회에서 정서와 낭만, 평안함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마귀는 이처럼 인간과 사회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3) 그러면 그 대책은 무엇입니까?

현대사회로부터 밀려오는 이러한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킴으로 이 영향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자신을 분리시킬 것인가? 장소가 아니라 내면입니다. 영혼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잠자는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잠을 자더라도 육신은 쉴지 몰라도 마음은 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무거운 것은 아무리 잠을 자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명상이며 영적기도입니다.

 

4) 타 종교의 명상은 마음을 비우는데 있으나 기독교의 명상은 마음을 비우고 그리스도로 채우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의 명상은 채우기 위해서 비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묵상, 명상을 통하여 믿음의 선진들, 족장들, 다윗은 생명력을 얻고 마음의 평온함과 마음의 치유를 얻었습니다.

 

5) 우리의 삶에서 슬쩍 지나가면서 보는 것, 듣는 것까지도 우리의 영혼을 더럽히고 상처를 줍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매일매일 처리하지 못하고 마음에 쌓아놓으며 살고 있으므로 성품과 건강 그리고 영적상태에 영향을 커다란 피해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러한 것들을 치우고, 씻어내고, 치유하시는 분이며, 기독교의 명상은 이러한 것들을 씻어내고 치유하는 절차입니다.

 

6) 명상은 단지 육체적 활동만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정신활동을 쉬고 그 대신 아직까지 쉬고 있던 마음을 활동시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명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가장 실제적이며 효과적인 휴식이 됨과 동시에 또 가장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며, 또 가장 효과적으로 성숙에 이르게 하는 훈련입니다.

명상은 하나님에 대한 다른 어떤 배움보다 더 하나님을 알게 배우게 해줍니다.

 

7) 눈을 뜨고 무엇을 보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생각이 흐르게 됩니다.

눈을 감으면 이러한 활동으로부터 해방됩니다. 눈을 감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성령님께 의지하고, 뇌의 활동을 죽이고, 마음의 활동, 영의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때 얻는 평안함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함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자꾸 이런 시간을 가져서 마음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받아야 합니다.

 

8) 우리는 말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정작 해야 할 말, 마음의 말을 하지 못하며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중요한 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너무 많은 사물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가 보이지 않으며, 많은 것을 보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자신 자신의 영적상태를 보지 못하고 삽니다. 군중속의 나, 사물속의 나, 환경속의 나를 보지 말고 하나님 앞의 나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발견함으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람 저사람 따라가다가 헤매고 살지 맙시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중속의 나, 사람들 뒤를 따라가는 어리석은 길로 가지 맙시다.

깊은 기도로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갑시다.

 

9) 조용히 있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곧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우리가 진정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휴식의 개념을 오락이나 잠자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휴식은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복잡하게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나아감으로 새롭게 발견하는 행위입니다.

 

10) 침묵과 묵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들을 수 있는 것은?

침묵과 묵상은 눈을 감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눈을 감고 나를 보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본질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눈을 뜨면 길을 잃고, 눈을 감으면 길을 발견합니다. 눈을 뜨면 걸어온 길을 못 보나 감으면 보게 됩니다. 눈을 감고 마음의 귀로 들으면 됩니다.

 

(1)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밖으로 가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지성소로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2) 침묵 속에서 어제와 내일 사이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면 시간의 개념이 없어지게 됩니다.

과거를 새롭게 할 수 있고, 미래도 새롭게 건설하는 사람이 됩니다. 시간 속에서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적존재가 되는 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내일을 착실하게 준비하고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3) 높은 하늘과 땅 사이에의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현실에서는 사람사이에서의 나밖에 볼 수 없습니다.

시간 속에서 또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의 나, 역사 속에서의 나, 하나님의 사명과 하나님의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나, 자신을 보지 못하고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헤매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말도 필요 없는 시간 그냥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5)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으며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말을 하며 사물을 통해서 깨닫지 못하는 진리를 깨달으며 거울로 볼 수 없는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6) 침묵은 하나님께 접근하는 첫걸음입니다.

(7) 침묵은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8) 침묵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입니다.

영적 공간, 무한한 공간, 무한한 에너지로 가득한 공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 가장 가까운 영적 공간, 에너지 공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 영이 활동하는 공간, 이것이 바로 4차원의 공간입니다. 눈에 보이는 공간 현실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공간 무한한 에너지 공간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라. 은혜의 공간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그 공간에서 누려 보시기 바랍니다.

(9) 침묵에서 새로운 말을 배운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10) 침묵은 기도이며 평화이며 자유 함이 있습니다.

(11) 침묵은 가장 효과적인 휴식시간 입니다.

(12) 침묵은 우리를 온전케 하는 오솔길로 인도합니다.

세상은 피곤케 하나 침묵은 휴식케 합니다.

(13) 침묵은 인간의 시야를 넓혀줍니다.

즉, 하나님의 시야를 가지게 해줍니다. 하나님을 가지게 해줍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 봄으로 시야를 좁혀줍니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은 더욱 자기중심적 고집스러워집니다. 새로운 것을 아이들은 수용하나 어른들은 수용하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전부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으면 새로운 세계를 봄으로 시야가 넓어집니다. 영적인 세계는 무한히 넓습니다.

하나님과 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 다음으로 좋은 특권인 이 영적 은혜를 훈련으로 풍성하게 누리는 사역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14) 침묵할 때 마음의 소리가 떠오릅니다.

(15) 침묵은 침묵으로만 이해됩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기도로만 이해됩니다.

 

 

 

제8장 기도의 구분

기도에 관한 고정관념을 벗어나라. 깨뜨려라. 믿는 것과 아는 것,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단지 하나님을 믿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수준에 이른 사람입니다.

 

1. 구도(口禱)

생각, 머리, 입에서 나오는 말로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문 제목에 의한 기도, 특정한 목적을 위한 기도, 대표기도, 합심기도가 이에 해당합니다.

 

2. 심도(心禱)

마음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형식이나 의식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을 밝히 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영에 있는 것이 마음에 전달되고 마음에 있는 것이 생각에 전달되고, 생각에 있는 것이 다시 말로 전달되어 표현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상실되어 버립니다. 최종적으로 말로 표현되는 것으로는 마음에 있는 것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린 아기의 마음을 읽는 엄마처럼 엄마에게 말이 아니라도 자신을 표현하는 아기처럼 하는 것이 심도입니다. 오랜 시간 하는 구도보다는 짧은 심도가 더 중요합니다. 심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간단한 말 단순한 말로 합니다. 생각을 섞지 말고 마음을 아주 간단한 말에 담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하나님의 성품인 영성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로 말미암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크리스천들은 바로 이 영이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영성이 충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시 오신 성령님을 흙으로 된 우리 몸에 충만하게 담아야 합니다.

구원을 얻을 때는 성령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속에 오신 성령님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론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에게 그동안 때가 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때를 벗기기만 하면 지금도 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성장 프로그램 같은 것으로는 이제 안 됩니다. 건물이나 성도의 숫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내적인 성장이 더 중요합니다. 초대교회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사도 같은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마냥 달라고만 하는 부르짖는 기도에서 영적기도로 돌아서야 합니다.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도를 목회자의 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목회사역의 생명력입니다. 앞으로 기도로 영적세계에 대하여 뚫지 못하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풀어줄 영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머리는 기능적인 부분입니다. 모든 일을 머리로만 기능적인 부분으로만 살려고 하지 맙시다. 그럴수록 머리가 아파집니다. 기도를 통하여 마음을 훈련시켜 마음으로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마음을 활동시켜야 합니다. 마음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귐의 장소입니다. 묵상을 통하여 침묵의 기도를 통하여 마음을 살려야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묵상과 침묵을 통하여 내면을 치유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이를 훈련합시다. 마음이 내 삶을 지배하게 합시다. 심령이 내 삶을 지배하게 되면 하나님이 내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전에는 마귀가 내 삶을 지배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다스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솟아오르고 능력이 넘쳐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단계에만 머무르지 맙시다. 그 다음의 화평의 단계에 이르려고 노력합시다. 그리고 다시 거기서 일치의 단계에까지 이르려고 나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평의 단계에서 일치가 아니라 일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일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 교제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르다는 주님과 일을 통하여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랑의 관계를 가지려는 마리아를 더 사랑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이 또한 바리새인들의 문제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일의 관계 행위의 관계를 가지려고 하였지 사랑의 관계를 가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런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마지막에 주님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깨뜨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일을 맡기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주님을 깊이 알기 전에 일하려고 하지 맙시다. 주님과의 관계를 일의 관계로 맺으려고 하지 맙시다. 사랑의 관계 주님이 없으면 못사는 관계, 주님이 나를 믿는 관계, 이런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잘못된 관계에 머무르지 맙시다. 적당한 수준의 관계에 머물러 있지 맙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관계, 하나님과 사랑으로 손잡고 일하는 관계로 나아갑시다.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손잡으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깊은 교제가 우선입니다. 이를 위하여 기다리라. 관계를 위하여 먼저 시간을 보내고 노력합시다. 하나님을 알려고 합시다. 이를 위하여 기다릴 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일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범위를 초월하는 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생명력이 넘치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열매를 맺어야 참 열매가 됩니다.

외부적인 환경과 분리되고 평안을 느끼고, 그 중에 짧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깊은 은혜를 느끼게 됩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씀을 듣는 차원은 너무 낮습니다. 귀로 듣고 이성으로 듣습니다. 그리고 머리로 분석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영은 눌려 있고 잠자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영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영을 깨우는가? 입술의 기도, 말의 기도가 아니라 영적기도로 깨운다.

영이 잠든 상태로 드리는 예배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이러한 예배는 굳은 신앙 죽은 신앙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을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영이 질식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심도를 통해서 영을 활성화시켜야 합니다. 영을 활성화시켜야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영이 잠자고 있으면 성령님도 잠잘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맙시다. 성령이 활동하지 않으면 마귀가 이성을 통해서 본능을 통해서 우리를 우겨 싸고 덤벼듭니다.

1) 일반적 심도

묵상(Q.T) - 명상 - 침묵기도를 말합니다.

이 단계를 넘어가면 깊은 영적 기도인 신비적 심도의 단계로(수도원에서 7-8년의 수련으로 가능한 수준) 들어갑니다.

 

2) 신비적 심도

능동적 관상기도와 수동적 관상기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대하고 하는 기도입니다.

(1) 능동적 관상기도

하나님을 독대하는 심도로써 내가 주님을 찾아가는 기도를 말합니다. 이 단계를 넘어가면 수동적 심도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2) 수동적 관상기도

주님이라고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느낄 수 있고,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수준의 심도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주 가까움으로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나의 한 부분이 되고, 호흡처럼 나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완성입니다. 이 땅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수준의 기도입니다. 이정도 수준이면 영-심리-현실적인 모든 부분에서 윤택해지고, 자유해지고 풍성하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하게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바로 이러한 심도를 함으로 순교까지도 기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이 땅과 천국은 바로 문하나 건너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들에게는 조직도 없었고, 목회자도 없었지만 강한 능력으로 신앙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계속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면 어느 순간에 묵상-능동적 관상-수동적 관상 순으로 단계를 하나씩 넘어가게 됩니다. 이 단계가 되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분으로 밤을 새우더라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치유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면 바로 이 단계로 들어갑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입니다. 이 수준이 되면 사랑하는 분과 함께 교제하는 시간이므로 기도하는 시간이 즐겁습니다. 이러한 시간이 있어야 풍성하게 받게 됩니다.

하나님과 독대합시다. 이것이 진짜 기도이고 이것이 진짜 보화입니다. 그 속에서 많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되며 내가 주님 품에 푹 안기게 됨으로 세상과 내가 간곳이 없게 되고 그 기쁨이 터질 것 같으며 시간을 초월하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신앙이 바로 서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면서 점점 하나님의 것이 내게로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로 흘러들어오고, 이것이 다시 내게서 사람들에게로 흘러 나가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3년 공백이 바로 이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도는 진정 귀한 보배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관상기도를 했기 때문에 생명을 던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묵상기도

1) 단순묵상

언어나 다른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기도로써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세상은 육체의 본능과 이성을 자극함으로 자연히 이 부분이 활성화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쪽이 활성화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기도로 이 벽을 넘어야 합니다. 묵상기도는 절대로 시간낭비가 아닙니다. 묵상기도는 비록 제목기도가 아니라도 절대로 시간낭비가 아닙니다. 잠자는 것이 시간낭비가 아니듯 묵상기도에서 제목기도를 아니했더라도, 오히려 우리의 영을 강하게 하는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묵상기도, 영적기도, 관상기도 이 모든 것이 매우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머니 품안의 갓난아이들은 잠을 많이 자면서 순진하고 맑게 자립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린 아이가 되라고 하십니다. 순수해지고 단순해지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영향을 받지 말고 복잡해지지 말며 혼잡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의 훈련을 받아야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을 수는 있으나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순 묵상 기도 속에서 하는 대부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사랑의 기능이 없습니다. 사랑은 심령이 하는 것입니다. 굳어진 심령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내면이 깨어나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할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이 많은데 그것을 어떻게 받을까? 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냥 수박 겉핥기식의 관계였는데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그 동안의 많은 스트레스와 고정관념들 불안들이 치유가 됩니다. 전에는 내 차원에서 다 해결하려고 함으로 힘이 들었지만 이제는 더 깊은 차원에서 해결함으로 자연스럽게 됩니다.

 

2) 추리묵상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상상을 통해서 머릿속에서 영상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차츰 상상한대로 좋은 상황이 일어납니다. 나의 변화된 모습을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정결해져 있는 모습,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포용해주는 모습, 하나님께 헌신하는 모습,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그 모습을 영상화하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에서 하나님을 만나 보십시오. 이러한 기도는 진실로 보물창고입니다. 이러한 묵상기도의 바다는 깊고 넓습니다. 들어갈수록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꺼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할 경우

(1)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시는 예수님.

(2) 수모 당하시는 예수님.

(3) 베드로의 나타남과 3번 부인.

(4) 빌라도의 궁전 - 채찍 맞아 괴로워하시는 예수님.

(5)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시는 예수님.

(6) 힘에 부쳐서 쓰러지는 예수님.

(7)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히시는 예수님.

(8) 인간들을 보면서 죄 용서를 구하시는 예수님.

(9) 군중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시는 예수님.

단순히 사건만을 묵상하지 말고 나와의 관계 이유 삶의 적용 사건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를 찾아야 합니다.

 

3) 대화묵상

부부나 친구가 마주 앉아서 대화하는 것처럼 묵상 중에 주님과 대화하는 기도입니다. 진실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이 지금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계심을 믿고 진실하게 고백하고, 회개하며 마음으로 그분의 반응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일을 가지고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 하나님의 의견, 하나님의 뜻을 받게 됩니다. 그 일과 나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3자의 위치에 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뜻을 받게 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결정은 감정으로 처리하지 않고, 깊은 묵상 중에 하나님의 뜻을 받은 후에 내린 것입니다. 깊은 묵상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게 해줍니다.

 

4) 복음 묵상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에 깊이 잠기어서 말씀의 참뜻과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입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깊이 음미할 때 같은 단어를 여러 가지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그 내용을 나의 마음에 자꾸 더 확실하게 심어주고 새겨주는 것입니다.

 

 

 

 

 

 

 

 

 

 

 

제9장 청원기도

 

청원기도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청원이 기도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청원기도는 많으나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의미는 우리 마음대로 청원하고 마지막에 예수의 이름을 뒤에 붙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도하는 것처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원기도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청원기도를 하셨고 하나님은 그 청원기도를 다 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청원기도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왕에 기도하는 것은 반드시 받아야만 하겠다는 자세가 되었을 때에 청원기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1. 청원기도의 모형 (눅11:5-7)

1) 정당한 것 필수적인 것을 간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자기주장의 발표나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2) 상대방과 나의 관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끈질기게 믿음으로 청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상대방과의 관계부터 정상화시켜야 합니다. 떡보다 관계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분에 대한 신뢰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무시되고 그냥 빌면 된다는 개념은 버려야합니다. 관계만 잘되어 있으면 구하지 않아도 주십니다.

떡을 강조하기보다 친구를 깨우는 일, 즉 관계성에 집중해야 합니다.

3) 먼저 성령님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요청하십시오. 문을 두드리십시오.

4) 청원하는 물질에 집중하지 말고 청원대상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5) 항구적(변하지 않고 오래가는 것)으로 간구하기 바랍니다.

이 말은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붙잡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장시간 똑같은 기도를 계속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지 않고, 짧지만 지속적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되어 있기만 하면 나의 청원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두드리면 일어난다는 신뢰를 가지고 있으면 계속 두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구적이라는 말은 짧지만 자주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는대로 응답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2. 계속 기도하라.

1) 구한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는 항구적인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2) 기도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그 대가로 말미암아 가치 있는 것을 그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3. 먼저 구해야 할 것

무엇을 달라고 하는 청원기도에서도 가장 먼저 간구해야 하는 것은 역시 성령의 임재, 충만, 교통함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이것은 생명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길이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전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안에 계신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것이 응답받는 기도 바른 기도의 조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내안에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 이것이 모든 기도의 기본입니다. 우리가 주의 마음을 가지는 이것이 기도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기적인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이것만 되면 아무리 짧은 기도라도 응답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나를 주님에게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데 내가 무엇을 구하겠나이까? 나를 드리겠나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간구야말로 응답받는 기도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 그 자체를 원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무엇을 주고 안주고가 나의 관심이 아니라 나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전부입니다. 내가 더 무엇을 간구하겠나이까? 나를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드리는 기도를 하는 사람이 됩시다.

얻어 내려고 애쓰지 맙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는 기도를 하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짧게 간구내용을 붙이면 됩니다.

기도의 핵심은 ‘내가 주안에 주께서 내안에’ 로 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하는 부연기도에 청원내용을 담으면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이 나를 믿지 못하심으로 나에게 무엇을 주시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를 믿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고 싶은 마음에서 무엇을 주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팔을 비틀지 말고 하나님이 주고 싶어서 못 견디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될 것인가?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그분에게 드리고 그분의 마음을 내가 가지고 그분과 내가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을 내가 알고 내 마음을 그분이 알게 되는 것 父子(부자)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만나면 그렇게 됩니다.

자꾸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자꾸 접촉해야 합니다.

이성이 아니라 마음으로 만나야 합니다. 내 심령과 하나님의 영이 만날 때 진실한 만남이 됩니다. 이성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지식이요,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있는 지식은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우리의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머릿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이 마음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머릿속의 지식을 마음의 지식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기도의 역할입니다. 믿음을 마음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느껴야 하나님을 마음으로 만나야 진정 그분을 위해서 살리라는 결단, 용기, 신뢰, 사랑, 능력이 나오게 됩니다. 삶이 나오게 됩니다. 산지식이 됩니다. 기도는 머릿속에서 나와서는 안 됩니다. 실생활 삶에서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마음의 기도로만 가능합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오직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실제적인 문제는 머리나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고통의 집합장소, 능력의 집합장소, 하나님의 은혜의 장소, 변화의 장소, 구원의 장소가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을 치유하고 마음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살 수 있습니다.

현실의 삶이 고통 하는 내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마음의 평강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안에 우리가 거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것 주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힘을 빼고 목말라 해야 합니다. 바짝 마른 스펀지가 되기 바랍니다. 가난한 아이가 되십시오. 그분이 도와주셔야만 사는 존재가 되십시오. 그래야 내가 강하고, 그래야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긍휼 쪽으로, 연약한 쪽으로, 빈 마음 쪽으로, 겸손한 마음, 가난한 마음, 빈 그릇 쪽으로 흐릅니다.

이 마음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담을 수 있는 빈 그릇으로 만들어 놓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습니다.

 

4.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기도는 응답받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에게 열심히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한 것으로 원망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1) 이기적으로 정욕에 쓰려는 기도

2) 인간 중심적 기도

3) 조건부 흥정 하는 기도

제10장 기도해야 할 문제들

 

우리가 믿음으로 변화 받지 못하면 세상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로 성품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기도 속에서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없으면 영적인 힘을 잃습니다. 세상에게 밀리게 됩니다. 기도를 통한 성령 안에서의 사역만이 세상을 이깁니다. 믿음생활의 모든 부분이 기도와 연결됩니다.

영적인 생활과 성품 그리고 대인관계 등 모든 인격적인 부분이 기도로 변화됩니다.

 

1)원수와 핍박하는 자, 모욕하는 자 : 마5:44 눅6:28

이것은 나의 자유를 위한 것입니다. 내가 미움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이러한 기도가 없으면 내 마음에 저주와 미움의 쓴 뿌리가 나고 꽃피게 됩니다. 계속 나를 괴롭히게 됩니다. 이들을 위한 공격적인 기도를 해야 승리합니다. 내 마음에서 저주와 미움을 쫓아냅시다.

2) 하나님의 집 : 마21:13

우리의 마음 우리의 몸이 바로 성령님이 계시는 곳이요, 기도하는 집입니다.

내 마음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 속을 강도의 굴혈 마귀의 굴혈로 만든 것입니다. 그 속에서 늘 더럽고 쓴 물이 올라오게 내버려두는 것이요, 아픔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3) 시험에 들지 않도록 : 마26:41

누구나 자기의 약한 부분을 잘 압니다. 그 약한 부분에 시험이 찾아온다는 것을 압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그 약점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약한 부분을 위해 미리미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4) 용서 : 막11:25

용서를 습관화 시켜야 합니다. 사람들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로 사람들을 묶어놓지 맙시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결국 나를 묶어놓는 것입니다.

기도를 막고 영적 기도를 막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애쓰기보다 기도를 방해하는 요소인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5)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 것 : 눅18:1

사람의 심성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점점 예민해지고, 수용력이 약해지고, 부정적으로 되어갑니다. 기도가 잘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6) 될 수 있으면 멀리 있는 것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눅21:34

미리 기도합시다. 멀리보고 화살을 쏘기 바랍니다. 예수님 앞에 서 있을 나의 모습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7)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 눅22:32

믿음은 내버려두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고 밑으로 자꾸 떨어집니다.

기도로 주님을 자꾸 만나고, 체험하고, 내안으로 주님을 자꾸 이끌어 들임으로 믿음을 밑에 묻어두지 말고 삶속으로 끌어 올려야 합니다. 기도로 보이지 않는 내면에 묻혀있는 믿음을 나의 삶 영-혼-육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이렇게 삶으로 올라오는 것이 바로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이를 위해서 나의 내면이 활성화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믿음이 굳은 내면으로 말미암아 밑에 갇혀 있으면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파묻어 놓고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것만 붙잡고, 살면 믿음은 점점 갇히고, 파묻히고, 굳어집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기도로 믿음이 올라올 통로를 확보해 놓아야 합니다. 심령은 내안에 있는 또 다른 인격체입니다. 심령을 자꾸 살리면 심령이 살아서 계속 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자꾸 만나게 됩니다. 성령의 힘을 얻게 됩니다. 믿음을 끌어 올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믿음이 떨어지면 다 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다 있는 것입니다. 이성과 육성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성장이 멈추지만 영성은 성장에 한계가 없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기도로 영성을 계속 성장시켜야 합니다. 믿음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점점 나에게 임하게 되고, 심령을 살리게 되고, 영-혼-육-삶이 새롭게 되고 강건하게 됩니다.

8) 성령 충만을 위하여 : 행1:14

이를 위하여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9) 회개 : 행8:22

회개를 위하여 늘 깊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미움과 증오는 항상 깊은 곳에 숨어 있으므로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무의식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깊은 차원에서 해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야만 가능합니다.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깊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깊은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과 함께 그런 부분을 공격합시다.

10) 성령 안에서 : 엡6:18

성령으로 기도하라. 이를 간구하라. 사모하라. 목말라하라.

11) 염려 : 빌4:6

염려 속에서 기도하면 안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를 반복하는 기도를 합시다. 어휘를 자꾸 바꾸어 가면서 반복해서 기도합시다. 염려 속에서 하는 기도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염려할 일이 다가와도 염려 속에 빠지지 맙시다. 빠지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하여 평소에 기도해 놓아야 합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 화를 잘 냅니다. 상처받기가 두려움으로 방어본능으로 화를 내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염려하고 있는 염려의 생각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안이 찾아오고, 그 다음에 염려할 일이 사라집니다. 염려할 일이 문제가 아니라 염려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염려하기 쉬운 마음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으로부터 사건을 먼저 공격하고 마음으로부터 먼저 승리해야합니다.

‘내면의 평안을 주세요. 담대함을 주세요.’ 늘 그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2) 감사 : 골4:2

감사는 우리의 마음을 담대케 만들어주고,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에 채워놓게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좋은 것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기초석입니다.

13) 거룩 : 딤전4:4

기도로 자꾸 하나님을 만남으로 자연히 거룩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내 안으로 내 심령으로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전하는 거룩한 설교는 설교와 함께 하나님의 은총과 거룩함이 성도들에게 흘러들어갑니다. 기도로 채워진 것은 자연히 밖으로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꽃향기가 흘러나와서 다른 사람의 코로 들어가 기분 좋게 하고, 온몸을 순화시키는 것과 같이 안에서 흘러나오는 거룩한 것이 영의 생명력이 되어 전달되고, 그것이 다시 혼-육을 거쳐 삶의 생명력이 됩니다. 그러면 깨어난 심령이 점점 삶을 주관하고 다스리게 됩니다.

기도하면서 자게 되면 영은 잠들지 않고, 계속 기도함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영이 주님의 마음으로 가득하게 되며 주님과 내가 마음으로 하나가 되고 주님과 내가 마음으로 합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14) 고난당하는 자, 병든 자, 형제를 위하여 : 약5:13-17, 눅22:32

이들을 위하여 간절히 정말 간이 저리도록 깊게 기도합시다. 자꾸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훈련을 합시다. 그러면 점점 신유의 능력이 생깁니다.

병든 사람에게 주사약이 들어가듯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함으로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능력이 그 사람에게 흘러들어가 그 사람속의 아픈 곳을 찾아 들어갑니다. 이것이 신유의 능력입니다. 기도함으로 이러한 은사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신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도를 쉬는 것이 죄요, 기도를 그치는 순간에 죄가 바로 들어옵니다.(삼상12:23)

15) 성령을 위하여 : 유1:20 눅11:13

성령의 임재 충만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성령을 자꾸 찾고 간구합시다.

16) 시험에 들지 않게 : 벧전4:7 막14:38

시험에 든 것 가지고 고통하지 말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하여 기도합시다.

누구나 시험에 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시험을 이길 수 있기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됩니다. 약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기도하면 됩니다. 강점도 교만의 시험이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기도는 예방주사와 같이 약점이나 강점이라는 시험을 위해 미리 준비해 놓는 것입니다. 기도로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만 할 뿐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기도는 시간의 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래를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영적인 사람은 미래를 얼마든지 지금 건설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기도로 내 인생길을 만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꿈을 이루어주시는데 그 꿈을 이루는 길이 바로 영적인 기도입니다. 영적인 기도로 환경을 지배하고 변화시킵니다.

기도로 충분히 준비된 사람을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십니다.

17) 추수할 일군(눅10:2) : 성령사역을 할 수 있는 더 많은 사역자를 보내달라고 기도합시다.

18) 황무한 땅과 환경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대하7:14)

19)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마26:39)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는 결코 내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나를 향한 아버지의 뜻을 받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내 뜻을 하나님께 알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받아들이기 위하여 기도합시다.

20) 인자 앞에 서기 위하여 기도합시다. (눅21:36)

인생의 마지막 목표는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목표 기도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에 우리가 받은 물질, 시간, 삶, 은사, 이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보여드려야 합니다. 이 땅에서 내가 무엇을 더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 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는 것,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땅에서 무엇을 더 가지고자 함이 아니라 인자 앞에 서는 것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기도로 우리를 잘 다듬읍시다. 우리 삶을 변화시킵시다.

기도로 성령의 은혜를 많이 받읍시다. 기도로 복된 삶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갑시다. 죽으면 다시는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제11장 기도와 마음

 

1. 기도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기도는 부족한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좋지 않은 것을 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능력을 담는 내면이라는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근심, 욕심, 불안함, 시기, 질투, 염려, 야망등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들을 비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쓰레기통으로 만들지 맙시다. 배설물 통으로 만들지 맙시다.

비움 후에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를 위해 자꾸 자기 성찰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 주님의 평강을 중심에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묵상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여 마음에 가득한 것,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빈 손 빈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으로 채워집니다. 기도에 기합이나 감정을 넣지 맙시다. 내려놓읍시다. 편안하게 내려놓읍시다. 무릎 꿇으려고 애쓰지 맙시다.

기도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만나고, 그분이 주시는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사모하고 속을 비워야 합니다.

기도는 겸손한자가 할 수 있으며, 기도하는 자는 더욱 겸손해져야 합니다. 겸손한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겸손과 기도는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고 들어 쓰십니다. 영적으로 깨어난 사람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기능적인 능력만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기능적인 것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습니다. 성품으로 말합시다. 겸손한 성품을 추구합시다.

기도는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종의 자리에서 하는 것이며, 나의 중심에서 내려오고 주님을 자신의 중심에 모시고, 그 발 앞에서 겸손히 그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분과 내가 일체가 되고, 더 깊이 그분을 섬기고, 따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떻게 그분을 모시고 있는가?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신비한 체험이고 접점입니다.

신비와 현실, 이성과는 거리가 아주 멀리 있습니다. 그 거리를 좁혀주는 것이 체험입니다. 체험은 믿음의 기도로부터 옵니다.

체험은 하나님에게 접근하려는 사람에게 옵니다. 체험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며 신비입니다. 이론이 실제의 경험이 되며, 상상이 현실화가 되며 신앙의 활력을 주며 전환점이 됩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가장 보편적인 체험은 평안입니다.

기도 속에서 많건, 적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체험해야 합니다.

기도에서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이 체험이고 신비입니다.

이러한 만남을 위하여 속을 비워야 하고, 하나님을 만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아픔과 고통과 부족함을 가리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드러내고, 내려놓고, 맡길 때 주님은 우리를 만나고, 그것들을 빼내시고 좋은 것을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주님과의 교제를 통한 은혜, 만남의 은혜, 교제의 은혜, 기도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2. 기도는 비운 마음에 그리스도로 채우는 것이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기도는 우리 속에 채워진 좋지 않은 것을 비워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좋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마음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즉 성령님을 품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품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많이 찾읍시다. 입술로 찾지 말고 마음으로 찾읍시다. 안으로 찾읍시다. 그러면 차츰차츰 성품과, 행동과, 생각과, 삶이 변화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른 기도를 한 것입니다.

기도의 열매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점점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는 마음에 심겨진 잘못된 감정과 상처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비우고, 지우는 것이며 거기에 하나님의 성품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안정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러한 부분이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외부의 안정 환경의 안정이 아니라 마음의 안정감을 찾게 됩니다. 이러한 기도는 영적인 기도입니다. 영적인 기도는 영적 상태에서 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자꾸 찾으면 성령님이 나타나시며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의식에서 영적 상태로 바뀌게 됩니다. 이때 생각하는 것은 의식(두뇌)이 아니라 무의식(영 마음)입니다. 마치 눈을 감고 고향을 떠올리는 것처럼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상태가 마음의 상태 영적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성령님에게 묻고, 간구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됩니다. 치유를 받읍시다. 간단하게 그러나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하면 됩니다.

이처럼 영적 상태에서 마음으로 하는 한마디가 그냥 입으로 하는 수천마디보다 더 강하게 역사합니다.

인간의 주체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영적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세상을 이기는 에너지입니다.

기도와 찬양 기도와 성품은 서로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찬양이 마음의 상태를 이끌고 나갑니다. 찬양에 강한 힘이 있습니다.

시대를 알려면 노래를 알아보면 됩니다. 어떤 가사 어떤 감정인가?

초신자는 보혈, 죄사함을 찬양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찬양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찬양도 발전해야 합니다. 찬양도 변해야 합니다. 예배와 섬김이란 그 대상의 성품을 닮고, 그 대상의 운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 대상에게 나아가는 것이며 만나는 것이고, 그 대상의 것이 내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대상과 내가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제12장 자기 성찰의 기도

 

인간은 높아지고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액세서리에 관심을 가지면서 진정 내 자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가꾸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아무리 계급장을 붙여도 내면을 살피고 가꾸지 않으면 나중에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내 자신을 살피고 가꾸는 것이 기도 중에 일어납니다. 성령의 임재 중에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진정 자신은 가난한데 부요한 줄로 알고, 보잘 것 없는데 위대한 줄로 착각합니다. 남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판단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남에게 속지 않고 자신에게 속습니다. 남은 잘 다스리나 자신은 못 다스립니다. 남은 잘 가꾸려고 하지만 자신은 가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자동차를 늘 정비하고, 점검하고, 깨끗이 세척해야 하듯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얼굴을 가꾸듯 마음을 가꾸어야 합니다. 꽃밭을 가꾸듯 마음을 가꾸어야 합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더러운 것이 자꾸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의 안을 더럽힙니다.

내면을 가꿉시다. ‘성령님 나의 부족한 부분, 잘못된 부분을 깨닫게 해주세요.’ 하고 늘 요청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일하실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성찰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투자입니다. 시간과 정력을 여기에 투자합시다.

이러한 자기성찰은 성령님이 기뻐하시면서 함께 일하러 나서시는 사역입니다. 우리 내면은 말할 수 없이 더럽고 일그러져 있습니다. 이것을 꼭 치유해야 합니다. 내면의 일그러진 부분 상처, 감정, 죄악, 허물을 바로잡아 주려고 나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이를 위해서 오신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과 함께 높은 부분을 낮추고, 낮은 부분을 높입시다.

세례 요한처럼 왕이 오실 길을 준비합시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길을 준비합시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는 기도생활로 마음-언어-성품-실생활의 순서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합시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내면을 지속적으로 성찰하고 치유함을 받읍시다.

교육은 환경과 다른 사람을 비판, 판단, 관찰, 분석하는 능력을 주지만 기도는 영적으로 자기 자신을 보게 합니다. 교육은 눈을 밖으로 돌리게 하지만 기도는 안으로 눈을 돌리게 합니다. 교육받은 이성은 다른 사람을 비교 분석할 수 있게 함으로 정작 중요한 자신을 볼 수 없게 합니다.

자기 성찰의 기도는 자신의 영적 현주소(하나님과 자신, 세상 물질을 대하는 태도) 위치상태, 궁핍, 불안정, 무질서, 독선, 양심 상태를 인식하게 하고, 이 때문에 통회 자복 회개하게 합니다.

이러한 통회가 진정한 통회입니다. 자신의 양심, 신앙심, 감정, 의지로 통회하려고 하면 깊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의 도움을 받고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야 제대로 통회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남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죄성과 나의 부족함을 보게 하시는 분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가 보이고, 부족한 부분이 보이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먼저 자신을 보게 하신 후에 남을 보게 합니다. 영적 현상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남을 보기보다는 먼저 나를 봅시다.

남을 고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고칩시다.

자식을 고치려면 부모가 먼저 자신을 고쳐야합니다. 자신을 보고 진솔하게 고쳐달라는 마음의 부르짖음이 바른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계속하면 당연히 우리는 변합니다. 우리는 환경의 변화가 급하지만, 하나님의 급선무는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변화되면 하나님은 환경을 당연히 고쳐주십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내적치유이고, 이러한 내적치유는 지속적으로 계속되어야 합니다.

자기성찰은 희미해진 양심의 등불을 밝혀서 옳고 그름을 더 예리하게 분별하게 해주며 마음을 질서를 찾게 해주고, 자신의 나약하고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여진 본질적인 모습을 보게 하며, 점차적으로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때 나를 알게 되며 하나님 안으로 이끌려 들어갈 때 나의 허물과 죄를 깨닫게 되며, 하나님을 내 안으로 이끌어 들일 때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성찰의 역할입니다.

회개는 자기성찰을 통해야만 가능합니다. 목욕으로 더러워진 몸을 씻고 청결하게 하여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이 회개는 지나간 삶과의 관계에만 있지 않고, 건강한 내일을 위한 교량의 역할을 합니다. 긴 시간 내가 회개하는 것보다 성령이 도우심으로 짧게 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러한 회개에는 위력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요청해도 성령님의 역사가 없는 것은 내안에 성령님을 막고 있는 요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빼내어야 합니다. 이 때 두리 뭉실해서는 성령께서 역사하지 못합니다.

‘내 속에 무엇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누가 불행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을 고쳐주세요.’

이런 기도가 되어야 하는데 이런 기도는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무릎 꿇고는 하지 못합니다.

영혼의 의사 앞이라 생각하고 편안한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의 의사 앞에 다 들어 내놓읍시다. 그리고 치유함을 받읍시다. 기도 시간 속에서 실제적으로 나를 치유하고 정돈하고 세웁시다. 기도 속에서 내가 세워져야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1) 미움

미움은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한 반응입니다. 우리는 감정이 약함으로 상처를 쉽게 받습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함으로 내 속에 있는 미움을 뽑아내야합니다. 현대인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자꾸 먹는 것이 아니라 몸 안의 좋지 않은 것을 빼내고, 태워버려야 하는 것처럼 현대인의 기도도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내 속에 있는 불순물을 배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남을 짓밟고, 남의 불행을 기뻐하고, 불안해하고, 화내고, 무안 주고, 의심하고, 복수심을 품는 것과 같은 마음을 빼내어야 합니다.

기쁨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미움, 아픔, 슬픔이 기쁨을 억누름으로 나에게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빼냅시다. 미움, 슬픔, 고통은 마귀가 우리 마음에 뿌려준 나쁜 씨앗입니다.

이것은 나 혼자서는 빼어내지 못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꾸 빼내야 합니다. ‘성령님 내 안에 아픔들, 고통, 미움이 있어요. 이것들을 빼내어주세요. 치유해주세요. 나를 자유롭게 해주세요.’ 이렇게 늘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적치유입니다. 이런 시간을 짧게라도 많이 가집시다.

 

2) 두려움

힘든 일을 만나면 물러서려는 마음, 일을 하다가 쉽게 피하려는 마음, 귄위자나 높은 사람 앞에서 주눅이 드는 것과 다른 사람과 있기보다 혼자 있기를 더 좋아하는 것,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 등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러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 이러한 두려움이 나타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러한 두려움을 우리 속에서 미리미리 빼내어 두어야 합니다.

 

3) 죄의식

죄는 회개해도 죄의식은 남아있습니다.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는 생각,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자포자기적인 생각은 오직 기도로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이성은 기억하고 있지 않아도 감정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정은 엄청난 기억으로 우리를 붙잡고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은 좋은 감정을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마귀는 불안과 미움과 두려움과 시기, 질투, 좌절감, 우울의 감정을 넣어주어 여기에 빠지게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늘 감정을 정돈해둬야 합니다. 기도로, 내적치유로 좋지 않은 감정을 청소해 버립시다. 좋은 감정으로 우리 안을 채워 놓읍시다. 좋은 감정이야 말로 성공하는 삶의 자본입니다.

 

4) 열등감

사람들 앞에서 너무 긴장하거나 자신의 의사 표시를 못하는 것, 심하게 내성적인 성격, 다른 사람의 비평과 충고에 쉽게 열등감을 느끼는 것, 쉽게 실망하는 것,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열등감 때문입니다.

경쟁사회에서 누구에게나 있는 감정입니다.

 

5) 자기연민

자신이 인정받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해하는 것, 자신보다 우수한 사람과 자주 비교하는 것, 환경조건에 관하여 심하게 불평하는 것은 자기연민 때문입니다.

 

6) 교만

이러한 좋지 못한 감정은 자꾸 빼내야 합니다. 내면을 정돈해야 합니다.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감정적 표현을 너무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감정에 찬 설교는 전혀 은혜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변하지 않습니다. 설교에서 감정을 빼야 합니다. 감정적 표현은 관계를 파괴합니다. 감정을 빼고 의사소통을 해야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감정으로 일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살지 않고, 하나님 지혜로 살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해야합니다

 

 

 

 

 

 

 

 

 

 

 

제13장 간구의 기도는 믿음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면하는 모든 일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기도를 통해 채워주실 준비를 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도가 얼마나 절실한지요?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교회, 개인, 가정, 기업, 나라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기도를 대신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간구의 기도

(마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기도는 간구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마태복음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간구의 기도는 믿음의 기도여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필요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 간구의 기도를 할 때 받은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구할 때 구한 그것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관심이 있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영적인 축복 이상의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재정적으로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병을 제하시겠다고 말씀하셨고 그들에게 장수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출 23:25-26)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치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하나님은 또 그의 백성들이 그의 계명을 지키면 땅의 좋은 것으로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 1: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하나님은 오늘날도 그 때와 똑같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당면하는 모든 일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요한삼서 1: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우리는 우리의 필요들이 - 영적, 육신적, 그리고 물질적 - 충족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기도를 꼭 “만일 당신의 뜻이라면 이루어 주세요.”라는 말로 끝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한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꼭 한번 뿐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만일 이것이 당신의 뜻이라면”이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그리고 그는 나사로를 향하여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요 11:41-43)

나사로를 일으킨 기도는 뭔가를 변화시키는 기도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무엇을 변화시키기를 기도한다면 “만일”이라는 단어를 써선 안 됩니다. “만일”이라는 단어를 쓴다면 우리는 잘못된 규칙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고 받은 것을 믿어야 합니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만일”이라는 단어를 쓰신 예수님의 기도는 성별의 기도였습니다.

▶성별의 기도

(눅 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 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기도는 순종, 성별, 그리고 헌신의 기도입니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 든……. 내 원대로 마옵시고…….”

예수님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원하시는 일들을 하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간구의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을 얻는다든지 무엇을 변화시키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별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디를 가라시든지, 무엇을 하라 시든지, 우리의 삶을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기 원하실 때 우리는 이런 종류의 기도를 합니다. 성별과 헌신의 기도에서 “만일 이것이 당신의 뜻이라면…….”이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변화시키기를 원한다거나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만일 당신의 뜻이라면…….”이라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벌써 하나님의 말씀에 이것에 관한 것이 있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이 그분의 뜻인 것을 압니다.

암송구절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4)

배운 것을 행하십시오. :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1:22)

 

 

 

 

제14장 성령 안에서 방언으로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성령님이 우리를 통하여 기도할 수 있게 허락하여 우리의 기도생활을 돕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서 놀라운 응답을 볼 것입니다.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위의 성경구절을 보면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한 가지 이상이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그렇게 않았다면 그냥 항상 기도하라고만 말씀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도가 얼마나 절실한지요? 교회, 개인, 가정, 기업, 나라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기도를 대신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 성령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합니다.

(롬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고전 14:14-15)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나 마음으로 기도하지만, 다 영으로(방언으로)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그들의 무지로 인하여 방언은 이미 지나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신령한 것을 사모하고 방언말하기를 금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고전14:39).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전 14:18, 5)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노라”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고 또 방언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6:17절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처음으로 행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고, 두 번째로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방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안의 성령님에 의해서 우리의 영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탄식이 우리를 통하여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기도 중에 마음에 너무 무겁고 답답해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는 경우입니다. 무겁고 답답한 상황에 대하여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 말씀에 보시는 바와 같이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을 도우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알아서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 때 성령을 의지하면 성령께서 도우시는 것입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울 때는 특별히 방언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답답함과 무거움이 떠나갈 때까지 방언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의 영,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도록 허락하고, 믿음으로 그 분을 따라간다면 우리의 기도는 놀라운 응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 학비를 위해서, 질병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쉽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우리의 앞으로의 진로에 대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기도가 방언기도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힘입고 기도할 때 강한 중보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롬8:26)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중보의 기도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될 때에 때때로 강력한 중보의 기도가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힘입고 다른 사람의 구원과 치유, 부흥을 위하여 중보적인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상황에 관한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그런 기도의 단계에 들어가면 중보적인 기도 대상자의 상태가 우리의 영에 그대로 와 닿아 전달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기도를 드릴 때, 성령님이 그 현장에 그 사람의 영에 강력하게 임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힘입고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을 세워나가게 됩니다.

(유 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고전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우리가 성령을 힘입고 기도할 때, 타인을 위한 중보적인 기도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세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강한 사람, 준비된 사람으로 세워 가십니다. 우리가 강한 사람, 준비된 사람이 되어있지 않으면 타인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타인을 세워줄 수 없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우리의 속사람이 더욱 더 강건하게 세워지고, 더욱 더 온전하게 세워져 나간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령의 내재하심의 첫 증거일 뿐만 아니라 남은 생애를 통해서도 계속 누릴 수 있는 복된 경험입니다. 방언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더욱 더 복되고 기름진 삶으로 바꾸어 갈 것입니다.

암송구절 :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배운 것을 행하십시오. :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1:22)

 

 

 

 

 

 

 

 

 

 

 

 

 

 

 

 

 

 

 

 

 

 

 

제15장 용서해야 응답이 옵니다.

 

기도는 용서하지 않는 심령에서는 역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네가 믿으면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지 “네가 소망하면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응답받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받은 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았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밤새껏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알고, 침실에서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잠잘 수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일입니다. 우리 주위는 온통 소동일지라도 그 와중에도 우리는 평안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믿음의 기도를 하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십시오.

(요 16:23-24)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때 응답을 받게 되고, 응답의 결과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직장도 잃고 아이들도 배가 고픈 상태라면 우리는 기쁨이 충만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몸이 아프면 기쁨이 충만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 가정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기쁨이 충만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무엇이든지’ 주셔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고 응답을 누리므로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받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법칙에 따라 일하십니다.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삽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기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먼저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응답을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도한 것을 받았다고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로 항해 할 때 큰 폭풍이 왔습니다. 배는 침몰될 위기였기에 선원들이 짐을 바다에 버림으로 배를 가볍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폭풍은 며칠 동안 밤낮으로 계속 되었습니다. 모두가 소망을 잃어버렸을 때,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행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우리도 어떤 환경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형통케 된다고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3. 기도할 때 용서해야 됩니다.

(막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히 12:14-16)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기도는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는 역사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마음에 다른 사람에 대한 적대감이 있으면 기도가 효율적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미움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마음에 복수심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적개심이 있으면 그것이 당신을 방해합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을 때, 응답의 주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속사람을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쓴 뿌리나 질투나 복수심이 우리 안에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영적인 삶이 훼손됩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에 진전이 없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흠집을 내고, 결국은 우리를 파괴하고야 말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순간순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형통의 은혜를 받음으로 결국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그를 죽이려고 했고, 그를 이방의 노예로 팔아버린 그의 형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저주하는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가 그런 자리에 서서 형들을 용서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그 심한 스트레스와 원수마귀의 개입으로 우울증이나 암과 같은 무서운 질병으로 그의 인생이 파괴되는 결과를 만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용서했고 축복했습니다. 권좌의 자리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고, 죽임을 당하게 될까봐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그의 형들을 향하여 요셉이 한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창 45:7-8)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 자를 삼으셨나이다.”

(창 50:19-21)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과 같이 용서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귀가 자신에게 어떤 문제도 가져오지 못하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마귀가 자신에게 어떤 문제도 가져오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마귀가 어떤 문제도 우리에게 가져오지 못하도록 기도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마귀 위에 우리의 권세를 사용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가지고 접근하는 마귀를 대적함으로 그 문제가 우리와 상관없게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약 4:7)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때 원수 마귀가 자리합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면전에서 우리에게 상을 베푸십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역사하는 바로 그곳에 서 계십니다. 의심과 절망의 적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승리와 구원의 상에 예수님과 함께 앉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역경 앞에서도 우리는 받은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암송구절 :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배운 것을 행하십시오. :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1:22)

 

 

 

 

 

 

 

제16장 기도응답의 열쇠 “예수”이름을 누리십시오.

 

예수의 이름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자동차의 문을 열고 시동을 거는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열쇠가 없다면 자동차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늘의 문을 열어서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기도응답의 열쇠가 있습니다. 그 열쇠가 무엇입니까?

(요 16:23-24)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예수님께)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하늘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게 하는 열쇠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인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기쁨입니다.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재정적인 문제도, 건강의 문제도, 인간관계의 문제도, 그것이 어떤 문제이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했으면 응답을 받은 줄로 믿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의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기쁨이 충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 이름이 응답의 근원이요, 예수 그 이름이 능력의 근원이요, 예수 그 이름이 치유의 근원이요, 예수 그 이름이 부흥의 근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행 3:6-8)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그 사람이 치유 받고 일어난 것은 베드로와 요한 사도의 특별한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행 3:12,16)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우리의 능력이 있다거나, 우리가 거룩하다거나, 우리가 어떤 믿음의 공력을 쌓았다거나 해서 기도의 응답과 치유와 회복과 부흥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의 근원은 예수 이름 때문입니다. 기도응답의 열쇠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막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행하는 모든 일들의 능력과 권세는 예수이름이 있기에 가능한 것들입니다. 70명의 주님의 제자들이 예수 이름으로 선포했을 때 귀신들도 그들에게 항복했습니다. (눅 10:17)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사도바울도 예수 이름으로 귀신에게 명령하자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행 16:16-18)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利)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리라”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권세가 있습니다. 새 방언을 말할 자유가 있습니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할 권리가 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충분한 믿음이 있으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내 이름으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더 큰 믿음을 가지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히 우리의 권리를 알고 주장하며 담대히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은 내 손이나 내 발처럼 내게 속한 것입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 주님께 일어나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냥 내 발이 있고 내 손이 있으므로 그냥 일어나서 걷고 뜁니다. 내 손과 발이 내 것인 것처럼 예수 이름도 내 것이므로 나는 그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시다. 예수 이름으로 걸어갑시다. 예수 이름으로 잡으십시다. 예수 이름으로 기적을 요청합시다. 나에게 발이 있으므로 그냥 일어나 걸으면 걷게 되듯이, 나에게 예수 이름이 있으므로 그냥 일어나 믿음으로 행하면 그것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막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아래의 글은 그리스도인의 권세와 치유라는 책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중국의 목사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자신들이 갖게 된 권세를 잘 알고 있다.

데니스 발콤(Dennis Balcom)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중국에서 지하교회의 목사들을 상대로 사역을 하고 있었다.

중국인 목사들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지고 있는지 간증을 하였다. 데니스는 그 간증을 듣고 놀라서, "당신들이 죽은 사람들을 일으킨다구요?"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아연실색하는 침묵이 흘렀다.

지도자들은 데니스를 자신들의 목사로 의지하였는데, 그가 그런 질문을 해서 놀란 것이다.

드디어, 목사 중 한 명이 "왜 그러세요. 목사님은 모르세요? 우리는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명령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데니스는 자신이 잘못된 신학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오, 저도 죽은 자들을 어떻게 일으키는지 알고 있는데, 하지만 목사님들이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라고 재빨리 대답했다.

물론 그렇다.

데니스는 죽은 자 가운데서 그 누구도 일으킨 적이 없었으나, 이 중국인 목사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권세를 알고 있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결코 실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들에 대하여는 베드로와 요한의 경우처럼 기적이 나타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이 응답의 열쇠, 기적의 열쇠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며 전진합시다.

 

암송구절 :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배운 것을 행하십시오. :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1:22)

 

 

 

 

 

 

 

제17장 기도의 정의

 

1. 주님이 제자들에게 시키신 기도훈련

(마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기도는 훈련입니다. 믿음과 구원은 거저 주시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모두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예배, 찬송, 봉사, 헌신, 기도 등등 이 모든 일들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중에서도 기도의 훈련은 모든 크리스천에게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나 찬송은 늘 하는 것이 아니지만 기도는 영혼의 호흡으로써 늘 하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흡이 잘못되면 몸의 어느 한 부분도 강건할 수 없는 것처럼 기도가 잘되지 못하면 믿음생활의 어느 부분도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문제는 기도가 잘못된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무속신앙에 근거한 기도, 돌무더기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손 비비며 기도하던 그대로 무릎을 꿇고 손 비비며 그저 자꾸 무엇인가만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가 바로 외식하는 자의 기도요, 이방인의 기도입니다.

돌무더기가 사람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돌무더기와 사람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고, 마음의 통함도 없고, 감정도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허리만 굽히고 손만 비벼 무엇을 얻어내려는 것 이것이 바로 외식하는 자의 기도요 이방인의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하여 무엇을 얻어내려고 하는 자세로부터 교회의 모든 문제가 생깁니다.

삶이야 어찌되었든 복만 받으면 된다는 기복신앙, 질질 끌려 다니는 수동적 믿음, 권위주의, 교권 신앙과 생활의 분리 등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기도는 많이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히 5:13-14)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제대로 된 기도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1) 아버지에게 하라.

기도는 어린 자녀가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품에 안겨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에 형식이나 틀에 박힌 언어나 표정이 있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19:14에서 천국 즉 하나님의 임재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계급이나 높낮이가 없습니다. 함께 뒹굴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나아갈 때 중요한 것은 마음이지, 외모, 외형, 표정, 목소리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인정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편한 자세로 기도하면 됩니다.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기도가 자꾸 막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무겁고 두렵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참 사랑의 아버지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세상의 아버지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잘못된 개념으로 나를 이용하고 일을 시키고 부려먹는 아버지의 개념을 버려야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에 따라 기도가 틀려지고 삶이 틀려지고 설교가 틀려집니다.

두려운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는 정죄하는 메시지, 두려워하는 기도, 두려워하는 삶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하나님 상입니다.

하나님 상이 잘못되었으므로 기도가 막히고 믿음생활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두려운 하나님 개념을 가지면 아무리 기도해도, 성격이 거칠게 되는데 그 이유는 평안하지 못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은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입니다. 끝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용서하시는 분, 보살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아버지의 개념을 넣어주시는 분입니다.” 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도 속에서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를 만남으로 평안함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평안한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이를 위한 기도 훈련의 첫 단계는 좋으신 아버지를 자꾸 부르는 것입니다.

왜 좋은지 그 이유를 자꾸 발견해서 그 이유를 입에 담아 고백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되셔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병을 고쳐주시는 분 머리털 까지도 헤아리시는 분입니다. 산성처럼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품안에 안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2) 하늘에 계신 분에게 하라.

여기서 말하는 하늘이란 대기 중의 하늘이 아니라, 물건이 아닌 하늘 문제와 어려운 현실이 아닌 곳을 말합니다.

즉 지금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문제 속에 갇히거나 환경 속에 갇히신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문제와 어려움의 현실을 벗어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신 그 하늘은 어디인가?

(눅 17:21)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이 계신 하늘은 바로 나에게 접촉한 곳 즉 나의 속입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부터 문제와 답답함을 분리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어려운 현실이 주는 걱정, 근심, 두려움, 답답함을 씻어내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즉 우리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깨끗하고 평안한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계신 깊은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밖으로 하지 말고 안으로 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치시는 기도는 구약 선지자들의 기도처럼 하늘을 향하여 외치고 부르짖는 기도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향하여 안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내 영혼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내 영혼 속에 하나님의 임재,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내 영혼 안에 계신 하나님과 만나고, 연합하고 도움을 받으면 그것이 즉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되는 것이며,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손을 잡고, 점점 밖으로 나가서 현실 속에 문제 속에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멀리 밖에서부터 높은 하늘에서부터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기 때문에 기도가 어려운 것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단지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믿음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귀신도 이를 믿고 떨기 때문입니다.(약2:19) 그러면 어떤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이 바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와 같은 실제적인 관계, 만남의 관계로 만들어 가는 것이요, 이런 믿음이 주가 내안에 내가 주안에 있는 관계로 이끌어 가는 것이요, 그럴 때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 안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내안에서 살아가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될 때 내가 주안에 즉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만나고, 발견하지 못하게 되면 보좌에 계신 하나님도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를 하지 못하면 그런 훈련을 받지 못하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요, 삶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내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내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바로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내안에 계신 하나님이 일하실 때 내가 일하는 것이요, 내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나도 덩달아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그냥 막연하고 피상적이기만 하면 나의 삶도 역시 막연하고 피상적입니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뜬구름 잡다가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피상적인 하나님은 피상적인 나의 삶을 구체적인 하나님은 구체적인 나의 삶을 만드는 것입니다.

피상적인 하나님 체험은 피상적인 나의 삶의 체험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하여 내안에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만나고, 느끼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성도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살아계심을 믿고, 교제하고, 만나고, 느끼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3) 중언부언하지 말라.

말을 많이 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지 맙시다. 과대 광고하지 맙시다. 말만 많이 하다가 기도를 끝내지 맙시다. 말로 하나님을 이해시키고, 하나님과 따지려고, 하지 맙시다. 아버지는 구하기전에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십니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깊은 곳(4차원의 세계, 영의 세계)에 계시는 분임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인식은 이성 감각으로 하지만 깊은 곳에 늘 함께 하시는 아버지는 이성이나 감각이 아닌 마음으로 만나야 합니다.

아무리 이성이 바쁘게 회전하더라도, 세상이 바쁘더라도 복잡하더라도, 마음이 깨어있으면 우리는 마음으로 늘 아버지와 대면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를 하도록 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말로 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으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적기도를 해 보세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마음으로 하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 훈련을 합시다. 하나님은 마음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듣고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에 담긴 마음을 보시고 응답하십니다.

유창하지 못해도, 길지 않아도, 마음이 담긴 기도를 합시다.

마음의 기도가 아닌 기도는 아무리 말이 유창해도 성경을 많이 인용해도 허공을 치는 기도입니다.

(시 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영혼으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사모함을 고백합시다. 마음으로 송축하고 찬양합시다.

육체의 접촉과 생각이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과 마음도 분리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생각, 느낌, 감정, 의지, 상상이 아닙니다. 이런 것 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언부언하는 말이나, 생각이나, 느낌이나, 감정이나, 상상과 같은 것들을 최대한으로 중지시켜 봅시다.

분리시키고 가라앉혀 봅시다.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느끼려고 하지 말고, 오직 마음 속 깊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려고 시도해 봅시다. 그 하나님을 느낄 것을 사모하고 기다리면 됩니다.

감사함과 사랑의 고백을 합시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더라도 계속 훈련을 하면 됩니다.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리하면 무엇인가 새로운 평강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그 어떤 응답보다 더 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면 됩니다. 기뻐하세요. 그리고 계속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4) 드리는 기도를 하라.

(마 6:8) “구하기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구하는 것을 기도의 주제로 하지 맙시다. 구하다가 시작하고 구하다가 끝내는 기도를 하지 맙시다.

기도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고,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것이며 교제를 하는 것이고,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고,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내 마음을 드리고, 내 목숨을 드리고, 내 뜻을 드리고, 내 힘을 드리는 것이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라이 임하옵시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고 뜻이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지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드려야 합니다.

무엇인가 있는 것 강한 것을 드리기보다는 없는 것 연약함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 받으려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 받기 위한 드림, 이것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단지 이러한 드림은 하나님의 것을 담을 수 있는 거룩한 드림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하나 거룩한 심령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연약하나 거룩한 몸, 성별된 몸을 드릴 때 강건함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의 생명은 거룩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요도 거룩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가난하지만 거룩한 심령을 드립시다. 거룩하고 청결한 마음을 드립시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심 받읍시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시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받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그릇이 바로 우리가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드리는 곳에 하나님의 마음 평강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를 드리는 곳에 감사할 조건이 임하고, 찬양을 드리는 곳에 찬양할 조건 즉 승리가 임하는 것입니다.

 

2. 기도란?

기도는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성령의 교통하심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사랑의 고백, 찬양, 감사, 예배, 봉헌, 순종, 신뢰, 통회, 간청 등의 심정을 구체적으로 표명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마음을 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마음의 채널 영적채널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채널에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기도는 좋으신 하나님,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위로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등등 자꾸 이 좋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기도가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자꾸 부릅시다.

하나님, 좋으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 나의 아버지……. 그러면서 심령의 변화가 무엇인가 어떤 변화가 있는가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기도는 안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깨닫고, 그분이 좋으신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에게 향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향하여 사랑의 고백, 찬양, 감사, 예배, 봉헌, 순종, 신뢰, 통회, 간청 등의 심정을 구체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분을 향한 찬양이 기도이고, 그분에게 드리는 예배가 기도이고, 봉헌도 기도의 한 표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를 나타내는 것, 나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변해야 이 모든 것 찬양도 예배도 변하게 됩니다.

 

1) 마음으로 하고 영으로 하는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

 

2) 하나님과의 친교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우리의 믿음생활은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가가 중요합니다.

부모와 친한 자녀는 결코 탈선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 생명의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 기도의 목표, 신앙의 목표요, 신앙의 핵심입니다.

 

3) 하나님을 향하여 애정으로 가득한 움직임이며 자녀가 부모를 찾고 안기는 사랑의 행동입니다.

 

4)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자꾸 입술로 시인하고,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려고 노력하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초대교인들은 늘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위협을 이기고 신앙을 지키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5)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느끼고 만나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6) 세상과 분리되어 현세적인 것은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기도의 모습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 앞에 오직 하나님만을 만나는 것이 제1계명이며 이것이 바로 기도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만나는 것은 은혜요, 은사입니다. 이러한 은사는 사모해야합니다.

사모하지 않고 그것을 향하여 열려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임하지 않습니다.

 

7)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무슨 일을 하려고 하지 맙시다. 그냥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8)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의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기도 할 때 이러한 고백을 반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에서 감사와 사랑을 반복의 주제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핵심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9) 기도는 의무로 하기보다 흥미와 기쁨으로 즐겨야 합니다.

억지로 하는 노동은 피곤하게 하나, 즐거이 하는 운동은 힘이 나게 합니다.

기도를 즐거운 운동을 하듯, 호흡하듯, 몸에 익혀야 하며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마치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듯,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호흡이 힘들면 병자입니다.

 

10)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를 아시고, 이해하시며, 염려하시고, 응답하시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목전에 우리와 다른 사람의 무력함과 약함을 펼쳐놓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드리려하지 말고 우리의 연약함을 드리면 됩니다. 기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11)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하나님을 찾는 영혼의 숨결이요 헐떡임입니다.

 

12)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억지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기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고 받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주시게 만드는 받아내는 기술입니다.

하나님이 주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게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꾸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자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됩니다. 기도를 통하여 무엇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려고 하시기 바랍니다. 드리려고 하는 기도를 합시다.

 

13) 하늘의 영광가운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훌륭하고 웅장한 하나님의 방송,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내 뜻을 하나님에게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본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광야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귀신 쫓는 능력을 간구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기도였으며 육신을 입으심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욕망을 끊어내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담는 기도였고, 세상에서 삶으로 말미암아 더러워지는 심령의 때를 씻어내는 기도입니다.

내 방송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끌어들이려고 하지 맙시다.

내가 그분에게 말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게 합시다. 내 뜻을 자꾸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자꾸 받아들이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쉽기도 하고 또 어렵기도 합니다.

내 주장을 하려면 어렵지만 하나님의 뜻을 받으려면 아주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파수는 무엇입니까?

오직 믿는 사람만 하나님의 주파수를 알고 맞출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가진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은 하늘에서 오는 것을 받아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는 것이며, 나의 무력함을 그분에게 내어놓고 그분의 강건함을 받는 것입니다.

나의 답답함을 내어놓고, 은총을 받는 것이며 짐을 가지고 가서 그분 앞에 내려놓고 그분의 평안함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가고, 하나님이 내게로 오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참으로 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쓰시려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는 사람은 기도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도에 있어서 바른 방향을 잡아야합니다.

깊은 차원의 기도 하나님과 연합되는 기도를 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붙드시고 쓰십니다. 기도로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되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들어 쓰시며 이러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기도의 맥을 놓지 맙시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바른 기도로 시작해서 바른 기도로 끝냅시다.

기도로 살다가 기도로 끝마치는 사람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지혜, 능력, 평안, 담대함 등 모든 좋은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기도하다가 나중에는 기도가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도록 기도의 훈련을 합시다.

 

 

 

 

 

 

 

 

 

 

 

 

 

 

 

 

 

 

 

제18장 성령의 도우심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님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기도하려고 하기보다 먼저 기도에서 나를 도우시는 성령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기도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내 입술을 사용하여 나를 위하여 기도하게 해야 합니다.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 교통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영적차원의 일입니다. 영적인 일을 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야말로 기도의 생명력입니다. 매일 밤 ‘성령님 도와주세요. 기도를 도와주세요.’ 하고 수백 번씩이라도 반복해 봅시다. 바르게 기도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뜻을 주시고, 그 뜻에 따라 기도하게 하심으로 그 뜻을 이루십니다.(빌2:13)

바로 이일을 위해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시고, 그 뜻대로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 대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교통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전달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교통하심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은혜도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로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님을 구하고 찾읍시다. 우리의 기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의 도우심 교통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부터 기도합시다.

 

1. 성령님의 사역

 

1)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있음(요14:16)

 

2) 우리 안에서 예수를 증거하심(요15:26)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은 감정적 지식적으로 받는 것이므로 여기에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그 은혜가 우리의 영, 마음, 생명에 흐르지 못합니다. 즉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는 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늘 찾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늘 예수님 곁에 있어야만 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늘 성령님을 찾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기도할 때 성령님의 도우심 임하심은 절대적입니다.

 

3) 성령 하나님을 내안에 모신 크리스천에게 성령 충만은 위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의 깊은 곳에서 부드럽게 올라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내안에 불순물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역사가 아름답게 나타납니다. 내안에 불순물이 있으면 나에게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가 아름답지 못하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려면 내 안이 성령이 역사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성령이 역사할 수 있는 상태로 준비해 드려야합니다.

 

성령님은 자율신경계통으로 활동하는 내부기관과 같이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40일 기도로 성령님을 어떻게 해보려는 것은 마치 심장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애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심장의 건강을 위해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것처럼 나는 오직 그분이 역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미움을 자제하고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찾고 요청하고, 간구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주제입니다. 이것은 오직 지속적인 훈련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령 충만을 위하여 성령의 활발한 활동을 위하여 내 심령을 준비하는 것이고, 영적정서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4)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되면 삶에서도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삶의 변화를 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성령을 의지하는 습관 훈련을 받아야 삶에서 성령의 인도와 도움을 받게 됩니다.

 

2. 기도하기 전에 해야 할 준비

 

1) 성령님께 성령님의 감동 감화 인도함을 받도록 간구하고 요청해야합니다.

(유 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성령님과 함께 기도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하고 성령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간구합시다. 기도는 성령으로 성령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기도와 성령을 일체화시켜야 합니다.

 

2) 기도에서 가장 먼저 간구해야 하는 것은 성령의 임재와 충만 교통함입니다.

성령의 임재가 기도의 생명이고, 믿음생활의 생명입니다. 내 이성이 기도하고 내 감정이 기도하고 분위기가 기도하면 기도를 돕기 위해서 오신 성령님이 외면당하시고, 슬퍼하시며 외로워하십니다. 성령님의 임재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장소를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가 성령님에게 일할 수 있는 환경과 장소를 만들어 드릴 때 나타납니다. 우리의 마음을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드리면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3) 기도의 초기단계에서는 내 영혼이 성령님의 임재를 대부분 느끼지 못합니다.

부정적 인식 믿음의 부족, 인식부족, 필요성에 대한 무지 하나님과의 거리감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못 느껴도 성령님은 지속적으로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정합시다. 그러므로 성령을 느끼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지속적으로 노력합시다. 이 방식대로만 하면 하나님이 활동하고 역사하십니다. 단지 내가 둔해서 느끼지 못하지만 지속적으로 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느끼고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더 사모하고, 더 사모합시다. 내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더 높고, 넓게, 깊은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보화를 캐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4) 기도 자는 자신의 심령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해야합니다.

이것이 진정 참된 기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드디어 그런 사람 즉 성령님과 교통하는 사람을 쓰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의 기본원칙입니다. 이를 위해서 간구하고 목말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나를 드리고, 기적을 체험하는 차원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밖에 있는 것에 관심 갖지 말고, 오직 안에 있는 분에 대하여 목말라 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끊이지 않는 생수가 되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끊이지 않는 샘물을 주십니다.

 

 

 

 

 

 

 

 

 

 

 

 

제19장 기도의 발전

 

기도훈련은 단기간으로는 안 됩니다.

지속적으로 자꾸 젖어져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수 없습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현대의 복잡한 사회는 우리에게서 점점 기도의 환경을 빼앗아 버리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기도를 점점 멀리하게 됩니다. 점점 시간을 빼앗기고 삽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양상입니다. 무조건 기도하라고 강요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4차원의 영적기도가 유일한 대안입니다.

각자가 영적으로 깊어지고 늘 성령님과 교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한 시간과 장소에 모여서 기도하게 하는 것은 이제 점점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무 곳에서라도 깊은 기도를 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성령님과 깊이깊이 교통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누구의 간섭이나 강요 또는 감독 없이도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체질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현대는 기도의 결핍시대요, 기도의 질식시대입니다.

오염된 공기와 물과 같이 물질문명이 기도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현대문명은 우리에게 간편하고 빠르고 물질의 부요를 주나 영적으로는 그만큼 많은 것을 빼앗아 버림으로 현대는 영적 빈곤의 시대입니다. 무질서, 산만함, 기계화, 도덕적 불감증, 양심의 마비, 허공을 치는 부르짖는 기도, 감정 발산의 기도 등등 이러한 곳에 사단의 무서운 흉계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쫓아내고 물질과 세상을 집어넣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단의 근본적인 작전은 하나님이 계셔야 할 곳에 세상의 것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 읽는 것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실용주의와 상업주의적 사상에 의해 의미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즐거움이나 신앙의 기본이 아니라 부담이 되어버리고 있습니다.

 

1. 기도에 대한 무지

 

1) 기도의 의미를 상실함.

2) 필요는 알고 있으나 기도하지 않음.

3) 기도는 하는데 바르게 기도할 줄을 모르는 것은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기도가 곁길로 가면 다른 모든 부분이 곁길로 갑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바른 기도소리와 함께 시작됩니다. 정말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른 기도만이 위로 올라갑니다. 새로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보다 낡은 것 잘못된 것을 빼어버리는 일이 급합니다. 기도에 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영성이 깊어지고 메시지가 깊은 곳에서 나오고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은혜에 젖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보화를 찾게 됩니다.

 

2.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인식

 

1) 기도에 쓰는 시간이 아까움

호흡하는 시간이 아깝습니까? 기도는 생명줄입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넘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2) 기도가 별로 나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기도를 밖으로 하지 말고 기도로 나를 채워야 합니다.

3) 꼭 기도를 해야 하는가?

 

3. 기도의 초보자

 

1) 기도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

2) 기도에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

3) 기도의 내용이 기도문을 외우듯이 늘 내용이 같은 사람

4) 기도를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

5) 기도를 하나님과 협상 테이블로 착각하는 사람

6) 기도를 물질의 축복 건강 행복을 가져오게 하는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

 

4. 기도의 단계

 

1) 빈말의 단계 : 대상에 관심 없이 감정 없이 일방적으로 주문 외우듯 염불 외우듯 하는 기도입니다.

 

2) 독백의 단계 : 상대는 상관없이 혼자서 독백하듯 감정은 있으나 하소연하듯 하는 기도입니다.

 

3) 대화의 단계 : 상대를 의식하고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 속에 감정을 느낍니다. 대부분 기도한다고 하는 사람의 수준이 이 수준입니다.

 

4) 들음의 단계 : 마음을 하나님에게 쏟는 단계 체험의 단계입니다.

 

5) 교제의 단계 :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의 평강을 느끼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하는 기도로써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진정 좋은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교제하는 영적인 것인데 이것을 기도로 얻는 단계입니다.

마귀가 보여주는 세상과 영광은 영적인 눈으로 볼 때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수준입니다.

 

5. 바른 기도와 바르지 못한 기도

 

바른 기도란 삶의 변화, 성품의 변화로 이어지는 기도입니다.

순수하고 올바르며 건전한 삶, 예수 사랑 이웃 사랑이 나타나는 기도입니다.

기도에서의 깨달음이 삶에 반영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에게 연결되는 기도는 삶의 변화가 나타나는 기도입니다. 바르지 못한 기도란 기도는 많이 하지만 삶에 변화가 보이는 않는 기도입니다.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기도의 모범생들이었으나 삶은 독선, 교만, 아집, 정죄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이들 앞에 왔으나 하나님을 몰라보았으며 하나님을 오히려 괴롭히고 핍박했습니다.

기도가 삶으로 연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른 기도의 줄을 잡아야합니다.

기도에서 단순해지고 부드러워집시다. 기도를 통하여 세상일에 대해서 한 템포 늦춥시다. 형식적인 기도, 이기적인 기도는 우리를 교만하고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존재로 만듭니다.

 

 

 

 

 

 

 

 

 

 

 

 

 

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 마더테레사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우려고 애쓰면 애쓸수록우리는 하나님이 채우실 방을 마련하는 것입니다.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정녕 아무것도 없다면아무것도 아닌 것 자체를 드리기로 합시다.부자들이 물심양면으로 그 부를 제대로 쓰지 못할 때우리를 매우 답답하고 힘들게 만듭니다.가능하면 당신 자신을 비워두십시오.그래야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하나님 자신도 이미 채워져 있는 곳은 더 이상 채우실 수가 없습니다.그분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밀어 넣진 않으십니다.우리가 내어줄 것을 얼마만큼 갖고 있느냐보다는우리가 얼마만큼 자신을 비울수가 있느냐가 문제입니다.비워야만 가득히 받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당신 자신에게서 눈을 떼고 당신이 아무것도 아님을,아무 가진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기뻐하십시오.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기도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대신해서 기도해야 합니다.우리는 모두 기도의 전문가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

 

1. 기도드리기 전의 3단계

 

1)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단계2) 그 원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살피는 단계3) 그 내용을 종이에 기록하는 단계

 

2. 기도드리는 중의 3단계

 

1) 당신의 마음을 잠잠케 하는 단계2) 하나님과 대화하는 단계3) 기도가 응답되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일에 헌신하는 단계

 

3. 기도드린 후의 3단계

 

1) 기도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무조건 감사하는 단계2) 하나님의 응답이 어떤 것이 되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단계3) 기도드린 대로, 응답받는 대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단계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면, 그 뜻을 실행하는 것이 순종이다. 믿음과 순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영적 본질이다. 타락의 본질이 불신앙과 불순종이라면 구원의 본질은 신앙과 순종이다. 기도는 믿는 것이요, 순종하는 것이다. 간구하고 믿고 그리고 끝까지 인내하는 기도 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될 것이다.

 

 

 

 

제20장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태는 다양하다. 크게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NGSG로 요약된다. 즉 아니다(No), 성장하라(Grow), 기다리라(Slow), 가라(Go)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1. 조건이 맞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니다(No)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실 때에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더욱 감사하고, 다른 기도를 드려야 한다. 아니다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셔야 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일방적인 요구이다. 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소원성취가 아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뜻의 성취이다.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소원을 아뢰었지만 결국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결론을 내리셨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2. 기도하는 우리가 올바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 성장하라(Grow) 라고 말씀하신다.

 

기도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가 필요한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시도록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준비되지 않을 때에는 역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가 받을 만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임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가 어디든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했을 때 주님께서는 더 시간이 필요함을 경고하셨다. 아직 베드로가 주의 뜻을 이루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주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큰소리 친 직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수치를 당하였다. 그러나 더 성장했을 때 베드로는 결국 주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절대 헌신을 보일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을 탓하지 않으신다. 그 부족함까지도 쓰시기 위해서 우리를 연단시키고 훈련시키신다. 영적성장이야 말로 진정한 기도응답이다.

 

3. 시간적으로 때가 좋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 기다리라(Slow)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이유와 때를 통제하신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시간이 적절하지 않으면 연기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연기가 곧 하나님의 부정이 아니다.(Gods delays are not Gods denials) 그것은 진정한 긍정이다. 하나님의 시간은 가장 완전하다. 우리는 그 완전한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를 가져야 한다. 인내야 말로 모든 기도자와 중보자의 필요충분조건이다. 한두 번 기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그러나 응답이 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기도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포기하지 않을 때 반드시 성공한다. 모든 인간의 실패 중 85퍼센트가 진짜 실패해서가 아니라 인내하지 못하고 포기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 실패는 포기하는 것이요, 성공은 인내하는 것이다.

 

4. 모든 것이 올바를 때 하나님께서는 그래, 가라(Go) 라고 말씀하신다.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갑자기 기회의 문이 크게 열릴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고, 희망의 사건이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의 필요를 따라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아니다, 더 성장하라, 더 기다리라.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응답이지만, 가라고 하는 긍정적인 응답이야말로 우리의 기도생활을 힘 있게 하는 체험이다. 기도생활에 재미를 붙이는 중보자일수록 하나님의 긍정적인 기도응답의 체험을 한 자이다. 그러므로 중보자는 가급적 올바른 조건에서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성경말씀과 신앙상식에 벗어나는 기도를 떼쓰듯 하는 자세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심이 아니라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욕심과 필요를 구별할 줄만 알아도 우리의 기도생활은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제21장 거짓된 중보의 현상들

 

중보기도는 영적전쟁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중보기도를 훼방하기 위해서 잘못된 중보를 하게 한다. 사탄은 그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되는 속임수로 부흥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부흥을 위한 기도, 특히 영혼을 위한 중보기도로부터 사람들이 멀어지게 하기 위해 중보기도의 잘못된 모습을 유도한다. 그 결과 사람들이 중보기도를 기피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 같은 잘못된 중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성경적인 기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거짓된 중보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두 가지를 유의해야 한다. 첫째는 영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다. 자기가 기도한 것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에 대해 판단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중보사역을 교회의 감독과 통제 하에 두고 보호를 받아야 한다. 둘째는 정결한 영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시 51:10)' 라고 시편 기자는 기도했다. 중보자는 마음의 내적 동기가 거룩해야 한다. 중보사역을 자신들의 지위를 얻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마음의 쓴 뿌리와 상처가 중보사역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신디 제이콥스는 중보자가 잘못된 동기를 가지는 것을 압살롬의 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쁜 짓을 해서라도 아버지의 관심과 인정을 받으려는 압살롬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중보자는 지도자들이 받은 비전이 기도를 통하여 실현되도록 돕는 것이 사명이다. 영의 세계에서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떠벌리는 것은 이미 중보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중보자들이 지나치게 율법적이거나 항상 심한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도 수상한 것이다. 설사 심판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해도 판단이 아니라 탄식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올바로 들은 것이라면 자신의 기도실로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그러한 메시지가 지도자에게 깨달아지도록 혹은 다른 사람을 보내어서 알게 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중보자라고 해서 모든 기도와 그 기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쳐서 죽이라는 심판의 기도라든가, 자신이 다른 사람의 병고를 지고 있다는 동일시 형태의 고백이라든가, 자신의 의도대로 조정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 등은 사이비적 중보기도일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악령에 사로잡혀서 혼돈과 무질서와 고통을 야기 시키는 중보자도 있을 수 있다. 내가 기도해 보니 당신은 이런 저런 저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식의 무당식 마술 기도를 쉽게 표현하는 거짓 중보자도 존재한다. 이런 사이비 중보사역의 폐해를 극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른바 말씀으로 기도하기(praying the Word)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각종 상황에 적합한 성경말씀을 많이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기록된 말씀(로고스)이 성령께서 적용하시는 살아있는 말씀(레마)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대개 중보자는 은사가 강한 자들이다. 그러다 보면 신령한 세계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마치 자신이 영적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착각과 교만에 빠지기 쉽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말씀으로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고 끊임없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으로 무장해야 한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 마귀의 전략을 파악하면 잘못된 중보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올바른 중보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제22장 자유형 기도

1. 정의 기도는 아이가 우는 것처럼 영적인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자유형 기도는 영혼의 외침(cry)이고, 하나님과의 대화(conversation)이며, 그분과의 교제(communion)입니다. 자유형 기도는 문자 그대로 자유롭게 드리는 기도(free-style prayer)입니다. 이 기도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특별한 격식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방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회개, 찬양, 감사, 간구 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하나님께 아뢰고 기도합니다. 2. 방법론 및 사례자유형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솔직하고 단순하며 겸손한 마음이 중요합니다. 3. 마음을 토로하는 기도 자유형 기도를 배우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솔직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법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하나님께 아뢸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 답답하면 답답한 마음 그대로, 기쁘면 기쁜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 감정을 아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슬픔과 기쁨을 하나님과 나누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미사여구로 우리 기도의 언어를 장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종종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와 이 시간 함께 해 주세요.” 또 마음이 울적하고 짜증이 날 때도 그 상태도 주님께 그대로 아룁니다. “주님, 제 마음이 몹시 슬프고 괴롭습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을 알고 계시죠?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주세요. 저를 도와 주셔야 합니다. 저를 꼭 도와주세요.” 이러한 기도를 드릴 때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지배하시고 나와 함께 임재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4.어린아이와 같은 기도 솔직한 자유형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진실성이 있기 때문에 힘이 있습니다. 어느 목회자가 기독교 지도자들의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대화는 매우 진지했고 그 목회자는 거기서 논의되는 신학적, 철학적 주제들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임을 느꼈습니다. 점심시간에 몇 명의 참석자들과 근처 레스토랑에 모였습니다. 그들 중 한 신학교 교수가 식사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목회자는 머리를 숙이면서 기도가 마치 신학강의처럼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교수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살아있는 것이 행복합니다. 저의 형제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지요! 당신께서 이 테이블에 함께 계시니 저는 기쁩니다.” 그 신학자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고어 체를 쓰거나 고상한 표현을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화려한 언어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아십니다. 우리의 지혜나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전혀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기를 원하십니다. 루소는 “좋은 연애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무엇을 쓸 것인가 생각하지 말고 펜을 잡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끝낼 때에는 무엇을 썼는지 기억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유형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분과 교제하고 대화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 어떤 기도의 형식이나 방법보다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형 기도는 형식은 없지만 기도의 본질을 살리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5.에이도와 기노스코오 우리는 주일날 교회에 다니고 교회 모임에 참석하기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직접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내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 안다고 해서 이명박 대통령이 나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교제를 해야 그를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때 ‘기노스코오’라는 헬라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안다는 의미의 ‘에이도’와 구분이 됩니다. ‘기노스코오’는 인격적이고 직접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자유형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위한 기도의 좋은 모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내어놓는 진지하고 사랑스러운 행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잘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단지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C.S. 루이스는 “우리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과의 진솔한 교제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至高(지고)의 축복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일보다 더한 축복은 하늘 위에도 땅 위에도 없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일에 하루 종일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영혼이 전적으로 주님을 향하면 우리의 생활은 기도가 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대화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래 출석하였지만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결혼식을 올렸지만 부부가 대화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대화가 없는 부부 사이에 관계의 발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님께 항상 모든 마음을 드리라”는 것은 기독교의 격언 중의 하나입니다. 편안하고 자유롭게 주님과 대화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 되게 하십시오.

 

 

 

제23장 하나님과의 관계와 기도

1. 파파기도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P:자신을 꾸밈없이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라(present). 진실하라. 당신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든지 간에, 파악 가능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 말씀드리라. A: 당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예의주시하라(attend). 다시 말하지만, 꾸미지 말라.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 보라.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당신에게 하나님은 자동판매기인가, 인상 찌푸린 아버지인가, 아니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냉랭한 어떤 힘인가? 아니면 엄청나게 강하면서도 친근한 파파이신가?P: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쏟아놓으라 (Purge). 당신이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으려 할 때,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 있다면 말로 표현해 보라. 당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보다 당신에게 만족을 주는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지는 않는가?A: 하나님을 당신 인생의 ‘1순위’로 여기고 다가가라(approach). 하나님을 당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 당신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분으로 삼으라. 지금 당장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들을 더 중요시 한다는 걸 인정하되, 그래도 하나님을 가장 사모하기를 원하며 다른 좋은 것들은 모두 ‘2순위’로 여기기를 바란다고 아뢰라.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관계형 기도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내 기도 생활의 정확한 중심에 있음을 본다. 이 점에서 본다면, 나의 영적 여정 전체의 중심이라 해야 할 것이다. 관계형(relational) 기도가 간청형(petitionary) 기도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응답받지 못한 간구들에 대한 혼동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먼저 관계를 맺고, 그 다음에 간청하라. 먼저 하나님을 누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것들을 누리라. 하나님께 간청하는 능력은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깊이에 달려 있다. 파파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얻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지고, 키워 나가는 면에서 내가 이제까지 발견한 방법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관계형 기도는 성령께서 가장 하고 싶어 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는 기회를 활짝 열어 준다. 바로, 나를 아버지의 마음과 생명 속으로 이끌어주고 내가 좀 더 아들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일말이다.생애 처음으로 나는 기도를 좋아하게 되었다.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이제 관계형 기도, 즉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아는 그런 기도야말로 간청형 기도(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와 감사기도(내가 받은 모든 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참된 열정의 근원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제24장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성도가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귀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소원을 아뢰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뜻에 따라서 중보하기도 하며,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로 결단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한 것이 이루어질 것을 또한 믿을 것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기도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①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동행하는 비결이다. ②기도는 영적 건강을 유지시키는 호흡이다. ③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표현이다. ④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이다(출 32:11-14, 수 10:12, 렘 33:3). ⑤기도는 영적 싸움이며, 헌신이다. ⑥기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주신 특권이다(롬 8:32. 히 4:16). ⑦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최선의 길이다(행 1:4-5,

행 2:1-4, 렘 29:10-14). 1. 기도의 중요성과 내용 1)기도의 중요성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기도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직접 기도하는법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생활에서 항상 본을 보였다. 사도들 또한 기도가 사역에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알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 기도(명사형) 구약 62회사용, 신약 25회사용-복음서 3회, 서신서 22회  기도하라(동사형) 구약 85회사용 신약 88회사용-복음서 48회, 서신서 50회 ①하나님의 명령이며, 약속이기 때문이다. 마 7:7-8, 마 6:33, 요 14:13, 15:7 ②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사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엡 6:12, 약 4:7 ③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 오직 기도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요일 1: 8, 잠 28:13 ④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이다. 행 2:1-4, 행 4:31 ⑤불가능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며, 축복의 열쇠이다. 마 6:11(일용할 양식), 빌 4:18(물질축복), 빌 4:6-7(심령의 평안),

약 5:14-16(질병의 치유) ⑥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기 때문이다(마 26:41). ⑦기도는 우리에게 전도와 선교의 능력을 주기 때문이다(골 4:3-4). ⑧기도는 환란을 극복하게 하기 때문이다(눅 21:36, 시 50:15). ⑨기도는 성화의 길이며,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다(행 10:2, 딤전 4:5-8). 2)기도의 내용  찬양(adoration) 찬양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축복하심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구원해 주심에 대한 감사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돌보심과 필요한 것을 값없이 채워 주심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찬양한다. –구약의 찬양 : 모세의 찬양(출 15:1-18), 미리암의 찬양(출 15:21), 드보라의 찬양(삿 5:1-31), 다윗의 찬양(시편) –신약의 찬양 : 제자들의 찬양(마 26:30-35), 마리아의 찬양(눅1:26), 바울과 실라의 찬미(행16:18-34) a)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찬양은 최선을 요구한다. b)찬양은 고난당할 때에 큰 힘을 준다(욥1:20-22). c)찬양이 삶의 양식(life style)이 되어야 한다. d)힘을 다하여 주님을 찬양하여야 한다. 찬양할 때 큰 소리로 소고 치며, 춤추며 적극적으로 찬양할 것을 요구한다.  자백(confession) 자백은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고백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죄를 시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며, 이 죄를 스스로 정결케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만 정결케 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죄에 타락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 스스로 죄를 회개할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회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가 떠올라 죄를 회개한다 하더라도 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죄를 온전히 처리될 수 있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대로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님께 죄를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을 간구해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서 우리는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가계(家系)의 죄 및 선조의 유전된 죄에 이르기까지 회개해야 한다.  감사(thanks giving) a)자기 삶의 모든 여건 속에서 감사한다(빌 4:6-7). b)내 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한다(롬 1:8-10). c)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한다(시 103:1-5).  간구(supplication) 우리 자신의 특별한 간청과 소원을 하나님에게 아뢰는 것이다. 마음에 떠오르는 지속적인 소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소원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므로 이를 간구함으로써 응답 받게 된다.

a)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구하라(마 7:7-12). b)성급한 태도를 버리라. c)전적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라(성령의 인도).  도고(intercession) 도고는 중보기도라고 하는 것으로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중보 기도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정보를 얻어야 한다. 막연한 기도는 응답을 얻을 수 없다. a)성령님의 중보기도(롬 8:26-27) b)예수님의 중보기도(요 17:15, 요일 2:1) c)중보기도에 대한 권면(딤전 2:1, 마 5:44. 엡 6:18)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된 결과 얻어진 권리이자 의무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것을 예수께서 친히 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응답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진 것이다.

(요 15:24, 요 14:13-14).  아멘 a)소망의 표현(엡 3:21, 계 22:20) b)동의와 확신의 표현(신 27:26, 고후 1:20) c)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표현(계 18:4) d)그리스도의 이름의 표현(계 3:14) 그 밖에 대상에 따라 분류하면,  영적 지도자들을 위한 기도내용 a)진리의 말씀을 담대하게 증거하도록(엡 6:19-20) b)하나님의 보호하심을(행 15:5, 살후 3:1-2) c)사역의 문이 열리도록(롬 15:30-32, 골 4:3, 살후 3:1-2)  성도들을 위한 기도내용 a)질병의 치유를 위하여(행 28:8, 약 5:16) b)영적 개발과 성숙을 위하여(엡 3:14-16, 골 4:12, 살전 3:10-13, 살후 1:11, 벧전 5:10) c)일치와 연합을 위하여(요 17:9, 11, 20-22) d)하나님의 보호와 사단을 이기기 위하여(눅 22:31-32, 요 17:15)  자신을 위한 기도내용 a)물질적 필요(마 6:11, 잠 30:7-8) b)하나님의 인도하심(시 27:11, 31:3, 렘 33:3, 단 2:17-19, 골 1:9-10, 약 1:5) c)유혹을 이기기 위하여(마 6:13, 눅 22:40) d)지혜를 얻기 위하여(왕상 3:5-12, 잠 2:3, 약 1:5) e)죄의 용서를 위하여(민 5:6-7, 왕상 8:47-50, 스 9:15, 10:1, 시 25:11, 32:5, 단 9:4-5, 골 1:9-10, 약 1:5) f)질병의 치유(삼상 1:5, 왕상 13:4-6, 왕하 20:1-6, 시 30:2, 약 5:14, 마 8:2-3) 2.기도의 원칙 1)먼저 회개의 기도를 하라. 기도는 거룩한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먼저 회개하여 우리를 정결케 해야 한다(사 58:1-2, 렘 5:25, 요일 1:8). 근본적인 죄(가계의 죄, 조상들의 죄, 민족적인 죄, 장소적인 죄 등)가 회개된 이후 우리는 일상에서 저지르는 불순종의 죄와 죄얼 및 허물을 매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죄를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결단하고 죄의 습관인 악습을 처리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2)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라.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으로만 세상을 다스리신다.

우리의 기도는 그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가기 위한 통로이다(마 26:38-42, 약 4:3).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를 면밀히 살피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이다. 3)은밀하고 개인적으로 기도하라(마 6:5-6, 14:13, 막 1:35, 6:46, 왕상 4:32, 행 9:40). 홀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은밀한 대화가 기도이다. 예수님도 기도하기 위해서 자주 한적한 곳으로 나가셨다. 4)믿음으로 기도하라(마 21:22, 막 11:24, 히 11:6, 약 1:5-7, 5:15). 기도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이는 허공을 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다. 5)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막 14:32-36, 요 15:7, 롬 8:27,

요일 5:14-15). 기도는 내가 시작하지만 그 기도를 이끄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성령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에 몰입하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기도를 이끄신다. 6)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이다(마 6:6-8, 눅 8:7). 7)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엡 6:18, 롬 8:26-27). 8)하나님께서 듣고 계신 줄 믿고 기도하라(요일 5:14-15, 시 65:2). 9)받은 줄 믿고 기도하라(막 11:24, 요 14:13-14). 10)용서한 후에 기도하라(막 11:25, 마 6:12). 11)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구하라(눅 11:5, 요14:14, 요일 3:22). 12)전심으로 끝까지 끈질기게 구하라(잠 8:17, 렘 28:13, 눅18:1-7, 갈 6:8). 3.예수님의 기도 생활 1)일을 하기에 앞서 기도부터 하셨다(마 4:2, 눅 6:12). 2)새벽에 기도하셨다(막 1:35). 3)예수님의 철야기도(산상기도: 눅 6:12, 마14:23, 막 6:46,

눅 8:28-29). 4)예수님의 금식기도(눅 4:1-2, 마4:2, 막 1:12). 5)예수님의 중보기도(눅 22:32, 요 17장). 6)예수님의 어린이를 위한 기도(마 19:13). 7)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마 26:36-46, 막 14:36, 눅 22:42). 8)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기도(눅 23:46, 마 27:46, 막 15:34). 9)비유를 통하여 기도를 가르치다(눅 11:5-13, 눅 18:1-8). 4.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종류a)개인기도 b)공중기도(대표기도) c)새벽기도(막 1:35) d)금식기도(욜 2:12-14) e)철야기도(눅 6:12) 야곱(창 24:32), 사무엘(삼상 3:3-14), 나단(삼하 7:4), 다윗(시 6:6), 솔로몬(대하 1:7), 바울(행 16:9-10) f)산기도(출 24:18) g)합심기도(마 18:18, 행 1:14) h)통곡기도(히 5:7, 시 6:6) i)통성기도(렘 33:3, 행 12:5) j)방언기도(고전 14:14-15) k)대화식 기도 l)윤번기도 m)중보기도(마 5:44) n)안수기도(마 18:13) o)축복기도(레 9:22, 눅 24:50, 고후 13:13, 창 27:27-29) p)찬송기도(시 34:1-3, 엡 5:18, 골 3:16) q)돌림기도 r)집중기도 s)제목기도 t)짝기도 u)그룹기도 v)묵상기도 w)세족기도 x)신유기도(사 53:5, 마 8:16-17) y)예언기도(사 41:22-23, 고전 14:3) 5.효과적인 기도의 6가지 결정적인 요소들 마태복음 6:9-15은 주기도로 불리지만 예수께서 무엇을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가르쳤다. 여기서 기도를 위한 기도가 아닌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들을 보이셨다. 1)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찬양으로 시작한다(9절). 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주님 나는 주님에게 집중하기 원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만약 기도가 자신과 자신의 필요한 것에 먼저 초점을 맞춘다면 그 기도는 힘을 잃게 된다. 대신 먼저 주님에게 초점을 맞추면 주님을 볼 수 있게 되고 자신이 염려하던 것이 작게 보이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인가?

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그의 인격)를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첫 번째 효과적인 기도의 결정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인격이다. 하나님의 인격은 응답 받는 기도의 기초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에게 응답한다. ②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시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일을 찬양한 노래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하신 하나님의 일을 잊지 않고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2)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자신과 자신의 삶을 내맡긴다(10절).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이 자신의 뜻과는 다르거나 따르기가 쉽지 않아도 결단하고 행할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3)하나님께 자신을 위해 예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여쭈어야 한다(11절).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므로 우리의 필요를 구해야 한다(빌4:6). 기도는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얻어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4)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한다(12절). 죄의 용서에는 4가지 단계가 있다. ①성령께 모든 죄를 보여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시편 139:23에서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라고 하였다. 성령께서 죄를 드러내 주실 것을 구해야 한다. ②구체적으로 모든 죄를 자백해야 한다. “주여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함으로써 대충 넘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개별적으로 구체적으로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개별적으로 구체적으로 고백해야 한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③필요하다면 배상을 해야 한다(마 5:23-24). 양심이 가책이 되어 계속 불편하면 실제적으로 배상하여 그 관계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 ④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요일 1:9). 하나님께 고백한 죄는 용서를 받았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 죄로 인하여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다. 5)쓴 뿌리나 원한을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13절).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용서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된 줄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원한이나 쓴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응답 받을 수 없다.

요일 3:21은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라고 말씀하신다. 시편 66:18은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신다. 6)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13절). 우리는 매일 사단과 영적 싸움을 치러야 한다. 우리는 순간순간마다 세상의 유혹에 직면한다. 그러므로 새벽 일찍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공급 받아야 한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것들이다. 그러므로 시험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그 힘을 하나님에게 구해야 한다(고전 10:13).

 

 

 

 

 

 

 

 

 

 

 

 

 

 

 

 

 

 

 

 

 

 

 

 

제25장 특별한 기도들

 

1.신유기도 1)성경적 근거 : 사 53:3, 마 8:16-17 2)예수께서 병을 고치신 실례 3)제자들이 병을 고친 실례 행 3:1-11, 9:32-35, 14:8-10, 16:16-18, 20:9-12 4)신유기도의 필요성 하나님의 명령이며 약속인 까닭에(약 5:13,16)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기 때문에(요 11:4) 사단의 저주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5)신유기도에 임하는 바른 태도 죄를 자백하고 버려야 한다(요일 5:14). 치유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이지만 모든 병을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후 12:7-9). 의사나 의약품은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님의 뜻이다(사 38:21, 딤전 5:23). 하나님의 치유사역은 하나님에게 완전히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2.금식기도 “예수께서는 요단강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고 돌아오신 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사십일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사십 일이 지났을 때에는 몹시 시장하셨다.”(눅 4:1-2) 금식은 구약시대부터 신약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연스럽고도 중요하게 실시해 온 기도의 한 방법이며 수련 방법이다. 금식의 방법에는 부분적인 금식, 보통금식, 절대금식, 개인적인 금식, 정기적이고 공동체적인 금식 등이 있다. 금식의 올바른 자세로는 금식의 동기와 목적이 영적이고 순수해야 하며, 금식의 방법이 개인의 영성 생활의 진보 과정과 건강에 알맞은 것이어야 한다. 또한 자기의 죄를 바로 보고 회개를 하기 위한 금식이어야 하며, 잘못된 습관이나 습관적으로 빠지는 죄에서의 해방을 위한 금식이어야 한다. 금식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섬김으로 열매 맺는 것이 더욱 아름답다. 1)신약성경이 말하는 금식 ①예수의 제자들에게는 요구되지 않았다(마 9:14, 눅5:33). ②금식할 때가 있다고 했다(마 6:16-18, 마 9:14-15). 2)성경이 말하는 금식의 지침 ①겸손히 그리고 은밀히 할 것(마 6:16-18, 눅 18:9-14) ②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기도에 전념할 것(삼상 1:6-8, 17-18, 느 1:4, 9:1-3) ③온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한다. 온전한 금식의 예(신 9:9,18, 스 10:6, 스 4:16, 행 9:9, 27:33,)-40일간 물도 마시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은 완전한 금식 부분적인 금식의 예(왕상 17장, 단 10:3) ④집단 또는 개인금식 집단금식의 예(삼상 7:5-6, 대하 20:34, 스 8:21-23, 느 9:1-3, 욜 2:15-16, 욘 2:5-10, 행 27:33-37) 개인적 금식의 예(삼하 12:15-16, 22-23, 왕상 21:27-29, 시 35:13, 단 9:3, 눅 2:36-37, 행 9:9) ⑤금식 자체는 아무런 영적 가치가 없다(사 58, 렘 14:12). –올바른 동기로 해야 하나님에게 영광이 된다(사 58, 스 7:5-6, 마 6:16-18, 눅 18:9-14). –식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 4:7).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다(고전 3:16, 6:19). –우리의 몸이 극심한 훈련을 견딜 수 있도록 단련되어야 한다(고전 9:27). –마지막 날에는 혼인을 폐하고 식물을 금하라고 거짓으로 가르친다. 이를 분별해야 한다(딤전 4:1-3). –육체의 욕구를 부인함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들을 수 있다(신 9:18, 25). 3)얼마나 오래 금식해야 하나? 성경적인 인물들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열성적으로 하나님께 구해서 얻었다(한나-삼상 1:6-8, 바울-행 9:9, 17-19). 단순하게 구하면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다윗의 예-삼하 12:15-23). ①하루 밤(단 6:18) ②하루(삼상 7:6, 삼하 1:12, 3:35, 삿 20:26) ③사흘 밤과 낮(에 4:16, 행 9:9, 17-19) ④7일(삼상 31:13, 삼하 12:16-23) ⑤21일(단 10:3-13) ⑥40일 모세(2회 출 24:18, 34:28, 신 9:9, 18, 25-29, 10:10) 엘리야(왕상 19:8), 예수(마 4:2, 막 1:13, 눅 4:2) 4)언제 금식해야 하나? ①장로 임직과 사역자의 파송(행 13:3, 14:23) ②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출 24:18, 신 9:8-9, 12-20, 23-27, 스 10:6, 단 9:3-4, 욜 2:12-24, 욘 3:5-10) ③자신을 겸손케 하려 할 때(왕상 21:27-29, 시 35:13, 69:10) ④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삿 20:26-28, 대하 20:3, 스 8:21-23) ⑤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삼상 7:6, 왕상 21:27-29, 스 10:6, 느 1:4, 9:1-3, 렘 36:6-10, 단 9:3-5, 20) ⑥치유를 구할 때(삼상 1:5-11, 18-20, 삼하 12:15-16, 22-23, 사58-8, 행 9:9, 17-19) ⑦심판의 팔을 거두기를 구할 때(신 9:18, 25, 사 58:9) ⑧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할 때(신 9:18, 25 사 58:9) ⑨영적 싸움에서(사 58:6, 막 9:29, 마 17:21) ⑩두려울 때 도움을 구하면서(대하 20:3) ⑪다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며(삼하 1:12, 3:35, 단 6:18, 에 4:3, 9:1-3) ⑫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할 때(스 8:21-23) ⑬물질이 필요할 때(고후 11:27) ⑭금식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응답 받는 통로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렘 14:12, 삼하 12:15-18) 5)금식기도의 필요성 ①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사 58:6) ②하나님을 섬기는 일(행 13:2) ③육신과 싸우는 일(고전 9:27) ④회개하는 일(욘 3:5, 삼하 12:15-17) ⑤기도에 전념하는 일(시 35:13) ⑥더 큰 축복과 사명을 감당하는 일(눅 4:1-2,14) 6)금식에 임하는 바른 태도 ①반드시 기도로 행하라(눅 2:37). ②죄를 자백하라(느 9:1-12). ③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라(욜 2:12, 마 5:4). ④겸허한 마음과 태도를 가지라(대하 7:14). ⑤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금식(시 58:3-5)에 주의하라. 7)금식기도의 결과 ①하나님의 인도하심(삿 20:26) ②사단의 시험에서 승리(마 4:1-11) ③능력 충만을 받음(막 9:29) ④감사생활(고후 11:27) ⑤섬기는 생활(눅 2:37) 8)금식 후의 유의점 ①사단의 시험이 있음을 주의 ②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할 것 ③건강에 특별히 주의할 것(고전 3:16) 8)금식 훈련 목적 : 금식 기도를 통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한없는 안락을 원하는 몸의 요구들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결의를 다진다. 또한 금식으로 인해 모아진 음식을 굶주린 이웃과 나눔으로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그들과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맺어진 형제, 자매임을 깨닫고 확인하여 공동체 의식을 높인다. 성경 본문 / 마태복음 6:16-18, 이사야 58:6-7, 마태복음 25:40, 고린도전서 9:27. 대상 /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인원 : 20 - 30명 또는 인원 제한 없이 교회 단위로 할 수 있다. 소요시간 : 사순절 기간과 나눔과 섬김을 위해 하루의 시간을 미리 정한다. 장소 : 각자 자기 집이나 삶의 자리에서  기대되는 효과 a)사순절 동안, 특히 성스러운 주간의 금욕과 금식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 b)금식하는 동안 기도를 지속적으로 드림으로 기도를 생활화 한다. c)몸의 요구를 스스로 제어하는 힘을 기른다. d)습관적인 악행을 끊을 수 있다. e)금식으로 모은 음식비로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f)어려운 이웃 안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를 찾아 섬길 수 있다.  진 행 a)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예배 후에 담당 목회자가 사순절의 뜻을 설명하고 사순절 동안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의의를 설명한다. b)주님의 고통에 동참하고 우리 죄를 구체적으로 참회하기 위해 수요일이나 금요일에 금욕과 금식할 것을 권면한다. c)금욕과 금식의 기준을 교회의 현실에 맞게 정해서 알려 준다(예: 사순절 동안 매 수요일과 금요일에 한 끼씩 금욕, 금식하고 성금요일에는 하루 온종일 금식한다). 이때 노약자나 병자, 어린이들에 대한 금식 기준은 보통 어른들과 다르게 해야 한다. d)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이나 부활절 전야예배 혹은 부활 예배 때, 그 동안 금식으로 모은 음식비를 함께 모아 어려운 이웃과 나눌 것이라는 사실을 광고한다. 이때 도울 대상을 분명히 밝히면 참여도가 높아질 수 있고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금식의 열매를 나누는 봉사의 날을 미리 알려 준다. e)금욕이나 금식이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거나 타인의 신앙을 재는 자가 되지 않게 해야 됨을 일깨워 준다. f)사순절 동안의 공중집회에서 금식의 뜻과 성실한 실천을 고무시킬 수 있는 권면의 말을 전해 줄 필요가 있다. g)정해진 날 금식의 열매를 함께 모아 어려운 이웃을 찾아 나눈다. h)교회 단위로 할 때는 대표나 원하는 참가자들이 음식을 실제로 만들어서 주거나, 그들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쌀 등을 직접 사서 주는 것도 좋다. i)조별로 할 때는 회원들이 모여 어려운 사람을 직접 찾아 가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된다. 3.안수기도 1)안수기도의 의미 : 기도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몸이나 머리에 손을 얹거나 대고 기도하는 것 2)안수 받는 사람에게 믿음을 증진시키고 위로나 안위를 준다. 3)안수 받는 자는 안수하는 사람으로부터 성령의 다양한 증상들(몸이 뜨거워지거나 전기가 흐르듯 따끔거리거나 진동 등)을 느끼게 됨으로써 확신을 가지게 된다.  신구약에 나타난 안수의 예 1)구약에 나오는 안수의 예 –축복을 빌 때 안수하며 기도(창 27:1-29, 48:8:22) –제사를 드릴 때 제물에 안수(출 29:10, 레 1:4) –성직을 임명하거나 위임할 때(민 27:1-8, 신 34:9) 2)신약에 나오는 안수의 예 –어린아이에게 안수하여 축복함(마 19:13-15, 막 10:16)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칠 때(마 8:3, 막 7:32, 눅 13:11-13, 행 28:8) –집사와 성직을 임명할 때(행 6:6, 9:17-18, 딤전 4:14) –성령의 은사를 받기 위해 기도할 때(행 8:15-17, 9:17-18, 19:6-7) 3)안수에 대하여 주의할 점 안수하는 사람이 주의할 점(딤전 5:22) –먼저 자신의 신앙이 바른지를 살필 것 –안수 받을 자의 신앙 정도와 태도를 살필 것 –교회의 덕이 되는지를 살피고 특히 이성간에는 각별히 주의할 것 –안수할 때 때리거나 무리한 힘을 가하지 말 것

 안수 받는 자의 주의할 점 –안수하는 사람의 신앙 태도와 그 사람의 영을 분별할 것–공개적인 장소에서 받도록 할 것 –충분히 기도하여 준비한 상태에서 기도를 받도록 한다. –안수기도는 오직 믿음으로 받을 것이며 사명 감당을 위하여 받도록 한다. 4.예언기도 1)성경에 나타난 예언의 특성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심(사 41:22-23) –성경의 완성을 위하여 특별 계시로 주신 예언(벧후 1:21)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 됨(벧후 1:20, 계 22:18-19) –신자들의 올바른 생활을 위해서 주시는 은사적 예언(고전 12:10, 14:3)

2)예언의 목적(고전 14:3) –덕을 세우기 위해서 –권면하기 위해서 –안위하기 위해서 3)잘못된 예언 –전문적인 예언기도 –말씀의 분별이 없이 예언을 행하는 것 –교회의 덕을 생각하지 않고 예언하는 것(고전 14:2) –자기 생각대로 임의로 하는 예언(신 18:22, 겔 13:2-3) –예언을 자기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 –예언을 마치 점치는 식으로 하는 사람 4)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 주의할 점 –질서를 따라 덕을 세우며 할 것(고전 14:3, 14:40, 14:31-32) –예언의 은사(감동)가 없는데 억지로 예언하지 말 것 –예언을 사용하거나 점치는데 쓰지 말 것 –예언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말 것 5.대표기도 공적인 예배에 회중을 대표하여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중보기도로써의 기능 –공동기도로써의 기능 –사랑의 실천으로써의 기능 –경건한 예배의식으로써의 기능 –기도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기능 –책임감 있는 봉사로써의 기능 –논리적 사고와 발표력을 기르는 기능 대표기도는 개인기도와 차이가 있다. 그 점들을 살펴보면, –기도의 범위 –기도의 형식 –중보기도적 특성 –시간과 공간의 제한성 –기도를 위한 준비성 대표기도를 할 때 아래와 같은 점들에 주의해야 한다. a)대표 기도자는 회중의 감사하는 마음을 헤아려 잘 반영되도록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빌 4:6). b)대표 기도자는 회개와 용서를 구함으로 회중의 누적되어 있는 감정의 나쁜 요소들을 제거하도록 하여야 한다. c)대표 기도자는 기도의 내용이 주관적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하며 너무 지루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d)대표 기도자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 되도록 간구해야 하며 위로와 힘이 되는 내용으로 간구해야 한다. e)대표 기도자의 음성은 모든 사람이 다 잘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음량을 고려해야 하며 표준어를 써야 하고 비속어나 은어는 배제해야 한다. 대표 기도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식으로 하여 듣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며 온유와 겸손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f)대표 기도자는 미사여구나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하며 솔직하고 담백하게 기도해야 한다. g)대표 기도자는 태도와 옷차림이 남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대표기도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a)준비 –기도하는 곳이 어디이며 언제인지를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회중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파악하여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공중의 요망사항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 기도해야 한다. b)형식과 내용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 경배, 회개, 믿음의 헌신 –자신과 이웃에 대해 청원, 연민, 신뢰 –찬양과 아멘 - 하나님께 찬양하고 신뢰에 대한 확신으로 아멘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대표기도의 예는 a)예수 그리스도(요 17:1-26) b)느헤미야(느 1:3-11) c)엘리야(왕상 18:36-37) d)솔로몬(대하 6:14-42)

 

 

 

 

 

 

 

 

 

 

제26장 기도의 네 가지 향

 

본문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출 30:34∼38)성막의 성소 안에는 등대와 진설상, 금향단이 있습니다.

등대는 빛 되신 하나님을 가리키며, 진설상의 떡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며, 금향단의 향은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유향을 똑같은 분량으로 섞어서 그것을 아침저녁으로 향을 피우게 됩니다.

이 향은 성도의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는 네 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기도는 소합향입니다.

이 향은 시리아의 '소합'이라는 나무에서 나는 액체인데 치료제로 사용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소합향의 기도는 내 몸과 마음 영혼을 치료해 줍니다.

슬픈 마음이 있을 때 기도하면 기쁨을 얻게 되고, 불안하고 고통 중에 있을 때 기도하면 평안을 얻게 됩니다. 병든 자가 기도할 때 고침을 받습니다. 기도는 보약이요, 예방약이요, 치료약입니다.둘째 기도는 나감향입니다.

나감 향은 바다의 조개류를 빻아서 만듭니다. 사향 냄새가 납니다.

기도는 내 자신을 부수어 가루로 만드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버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내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을 버리고 겸손히 주님께 나를 내려놓는 것이 기도입니다.

껍질이 가루로 부서지듯 내 자아가 부서지고 깨어지고 씻기는 기도를 말합니다. 셋째 기도는 풍자향입니다.

풍자 향은 인도의 고무나무에서 나는 액체로 짐승들과 독벌레들이 아주 싫어합니다. 풍자 향은 소독제로 사용됩니다. 기도는 영적 풍자향입니다.

기도하는 심령에 죄악이 들어오지 못하고 마귀가 물러갑니다.넷째 기도는 유향입니다.

약방의 감초같이 모든 것에 들어가는 것이 유향입니다. 유향은 독을 제거하는 해독제로 사용됩니다. 기도할 때 내 마음의 모든 독을 제거해 깨끗하게 됩니다. 거룩하게 됩니다. 옷이 더러워지면 빨아야 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더러워지면 빨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며 깨끗하게 합니다. 이 네 가지를 모두 묶어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더욱 건강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제27장 기도에 대한 몇 가지 교훈 - 요약 (제임스패커)

 

나는 “나의 기도의 길”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크게 충격을 받았던 일을 기억한다.

내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그 주제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로봇 머레이 맥케인(Robert Murray McCheyne)의 “한 사람이 홀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했다. 맥케인과 마찬가지로 나도, 기도가 사람들에 대한 유일한 영적 척도 방법이므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믿는다. 나의 충격은 기도에 대해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주제는 내가 상당히 자주 글을 썼던 것이었다.

또한 교사인 내가 그런 주제를 오랫동안 다루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을까? 바로 ‘나의’라는 말이었다.

요구된 주제는 ‘나의 기도의 길’이었다. 그들은 내가 기도를 잘할 것이니까 당연히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내가 어떻게 기도하는지 묘사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어느 누구도 내가 나의 기도에 대해 느끼는 것처럼 유약하고 변덕스럽고, 서툴게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내가 기도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은 내가 내 아내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세상에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은밀한 일들을 과시하는 것은 내 편에서 생각할 때는 불쾌한 노출 행위이고,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경험들을(오늘날 불행하게 만연되어 있는) 몰래 훔쳐보는 비영적인 취미에 영합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나의 영혼을 위해 하신 일을 이야기하는 시편 기자(시 66:16)와 같이 하는 것과 나의기도 실행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른 일 - 흥미를 줄지는 모르나 분명히 유익을 주지는 못하는 일종의 스트립쇼 - 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쓰기로 - 즉 내가 기도할 때 실제로 내가 얼마나 잘 이행하고 있는지, 또는 잘못 이행하고 있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따르려고 애쓰고 있는 길에 대하여 쓰기로 - 결정했다.

 

나는 각 그리스도인의 기도 생활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공통요소들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기도 생활에서는 짝을 찾을 수 없는 독특성이 있다는 자명한 이치로 시작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 자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시들을 따르기만 하면 우리가 잘못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목공 기술 독습서나 요리책과 같이 우리가 공부할 수 있는 기도 설명서는 없다.

 

기도는 목수 일이나 요리와 같지 않다.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개인적 관계, 친밀한 교제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를 하는 방법은 우리가 지배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더 많이 지배하신다.

결혼 지침서들과 마찬가지로 기도서들은 마치 완벽한 기술이 모든 난제들의 해답인 것처럼 미신적인 맹종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기도서의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라 노력해야 하는 일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른 친밀한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기도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에게 알맞은 방법들을 시행착오에 의해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에 의해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모함으로 어떤 사람들은 보다 많은 말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보다 적은 말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계속하여 소리를 내어 기도하고, 어떤 사람들은 침묵의 기도를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에 몰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방언 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대로 기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일한 기도 법칙은 성경의 지침 내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돔 존 채프먼(Dom John Chapman)이 말한 바와 같이 이 성경의 지침 내에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도할 수 있고, 우리가 할 수 없는 방법으로 기도하려고 애 쓸 필요가 없다.”

 

1. 기도의 원리

 

성경의 기도 지침은 두 종류, 즉 원리와 모범이다.

여기에서 나는 몇 가지 신학적 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를 통한 교통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성부와 성령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은혜를 통해 응답하는 믿음의 실행이다. 이 믿음의 실행은 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에 의해 조장되고 촉진된다.

곧 ⑴ 감사와 찬양, ⑵ 고백과 간구와 중보를 불러일으키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부족한 것들에 대한 인식, 그리고 ⑶ 모든 중생한 심령에 존재하는, 하나님께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성경이 하나님을 칭송하는 것, 또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으로 칭하는 기도로 이어지는) 열망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목표는 우리의 뜻을 행하도록 하나님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서도 자신의 뜻을 더 넓게 행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약속에 근거하는 간구는 이러한 기도의 진수로, 하나님께서 즐겨 고취하시고,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기도이다.

어떤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부르짖는 것은 성령께서 그의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 본능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행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기도는 언제나 혼란과 낙심을 대적하여 싸우는 전투이며, 사단과 우리의 죄악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비록 자발성이 기도의 본질을 이루지만, 우리는 끈기 있게 기도의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러한 집요한 기도의 훈련이 없을 때 기도는 혼잡스러워질 것이다. - 사단은 그렇게 되는 것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한다!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집중과 하나님의 은사들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열망이 없는 현식적인 기계적이고 상투적인 일이 될 때, 그것은 절대로 진정한 기도가 아니다.

기도가 솟아나는 깨달음과 열망을 주시고, 기도의 말과 생각들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끈질김을 주시는 성령, 오직 이러한 힘을 주시는 성령을 통해서만 기도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모든 것이 된다.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명하는(엡 6:18, 유 20절)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과거에 나는 대화로써의 이 기도의 원리가 잘 알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나는 내가 과연 옳았을까 생각한다. 오늘날 복음주의 전통을 제외하고는, 간구적인 기도 개념보다는 명상적인 기도 개념이 유력한 것으로 보이며, 복음주의 내에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라는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 17세기의 신비주의적 신앙운동) 사상의 물결이 꾸준히 흐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다음의 존 그린리프 휫티어(John Greenlef Whittier)가 지은 찬송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악전고투가 끝날 때까지 주님의 고요하고 은밀한 이슬들을 맺으소서, 우리의 영혼에서 긴장과 압박을 제하시고 우리의 정돈된 삶으로 고백하게 하소서, 주님의 평안의 아름다움을...’

이럴 때에 기도는 본질에 있어서 평온을 구하는 요청이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루터교의 경건주의자 할레스비(O. Hollesby)의 (기도)(Prayer)라는 책을 즐겨 읽고 추천한다. 이 책에 대해서는 도날드 블로에쉬(Donald Bloesh)가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기술한 바 있다.

‘기도 생활에 존재하는 투쟁에 대한 할레스비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생에는 복음주의적 요소보다 정적주의(quietism)의 신비주의적 요소가 더 지배적이다. 그에게 있어서 투쟁은 괴로운 부르짖음이 아니라 고통 없는 굴복이었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너무나 종종 나타난다. 성령의 역사가 너무 강조되다 보니 인간의 노력은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할레스비에게 있어서 기도는 끝없는 전투라기보다는 우호적인 대담이다. 비록 기도의 씨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세상의 혼란과 씨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낸다.’

할레스비에게 있어서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의 자세”, “거룩한 수동성”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지 스스로 의롭다고 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시도들만 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로워지고 자신의 권리를 얻으려는 모든 노력까지도 버리라고 요구하시며, 긴장을 푸는 응답이 항상 하나님과의 참된 친교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길이라는 사상이 오늘날 매우 일반적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사상이 심히 걱정스럽다고 고백한다.

1940년대 중반에 나는 초심자 그리스도인으로 당시에 유행하는 정적주의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면서 이 사상이 전혀 비실제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내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거의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그때에 나는 성공회 신자 라일(J.C.Ryle),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 그리고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의 저서들과 접하게 되었고, 그 책들은 나에게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적극적인 전투 - 내적으로는 육체와 싸우는 전투이고(갈 5:16, 24), 외적으로는 세상과 싸우는 전투이고(롬 12:1-2, 요일 2:15-17), 이 두 싸움 모두에 있어 마귀를 대적하고 있는 전투(벧전 5:8) - 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이 전투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영적 진정성과 활력을 판단하는 척도이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로마서 7장 하반부의 내용에서 면제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다고 위의 저자들은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실천적인 표준의 한 진리를 제시해 주었고, 그 후에 폴시트(P. T. Forsyth)가 그의 작지만 위대한 저서(기도의 정신)(The Soul of Prayer)에서 나를 위해 이 진리를 신학적으로 다루어 주었다.

그 진리는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저항하시는 수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저항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의 저항을 극복하여 결국 하나님을 더 깊게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더 부요함을 얻는 자리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라는 진리이다(야곱의 씨름과 욥의 외침과 불안한 재판관의 비유를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이제 나는 수동성 - 지적인, 감정적인, 또한 의지적인 수동성 -을 조장하는 가르침을, 믿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그릇되게 이해한 비영적이며 불건강한 가르침으로 거부한다. 나는 모든 진정한 순종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기도란 우리가 여러 가지 반대와 싸우며 나아가는 부단한 전투라고 본다.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가 발전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자신의 불완전과 미완성을 깨달으며, 아무리 멀리 나아갔다고 할지라도 또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반세기 동안 이 진리를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진리가 소수의 생각으로 잔존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2. 성경에 나타나는 기도의 모범들

 

성경은 수많은 기도의 모범들 - 150편의 시편들, 주기도문, 그리고 아브라함에서 바울에까지 이르는 성도들의 기도들을 수록하고 있다.이 모범들을 고찰하며 우리는 성공회의 기도서가 마치 부모들이 자녀들이 성장하기를 바라며 사는 큰 의복과 같다고 말한 토마스 플러(Thomas Fuller)를 생각한다. 똑같은 말을 이 성경의 기도들이 제시하는 행동하는 거룩한 심령들의 표현들에 대해 훨씬 더 큰 진리로써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주기도문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따라야 하는 목표들과 열망들의 귀감을 보여준다. 나 자신의 기도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자문을 반복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의 기도는 주기도문에 제시되는 바를 모두 말하고 있는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가 하나님에게 내가 말하는 일들의 요지가 되었는가?’ 또한 내가 하나님에게 하는 모든 말이 공허하고 무의미하다는 느낌에 의해 당혹감에 빠지거나, 말문이 막힐 때, 주기도문의 각각의 절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주기도문을 되짚어 보는 것이(청교도들이 “가지를 분기하는 것”이라고 칭했고, 루이스는 “꽃 줄을 잇는 것”이라고 칭한 일) 기도를 다시 시작할 때 절대로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시편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시편들을 적용하는 방법을 찾는 데 항상 흥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회심한 후에 시편들에서 평안함을 얻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내가 앞에서 말했고 시편들이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삶을 전투로 보는 견해가 내 머리에는 뿌리를 금방 내렸으나 나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데는 오래 걸렸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질서 정연, 자의식의 균형, 그리고 자제가 경건의 필수 요소들이라고 생각하는 중산 계급의 그릇된 의식, 대부분의 시편들을 세련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오해가 나의 머리와 나의 마음을 훨씬 더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차츰 시편 기자들의 도움의 요청, 그들의 불평, 죄의 고백, 침체, 의기소침, 하나님에 대한 찬양,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외침, 하나님께 대한 도전과 헌신, 그리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두는 소망은 내 기도의 감정이 되었다. 지금 나는 이 감정이 모든 사람의 기도의 감정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내가 따르기 위해 애쓰는 기도의 모범은 다음과 같이 목록화 될 수 있다.

첫째로, 기도는 대화이다.

나는 인간으로 창조주에게, 종으로 주님에게, 아들로 아버지에게, 친구로 친구에게(요 15:13-16, 20:17을 보라), 하나님에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다.

둘째로, 기도는 삼위일체적인 실행이다.

나는 성자의 중재와 성령의 능력 주심을 통해 성부에게 기도를 드린다.

나는 적절할 때, 즉 성경이 성자, 또는 성령의 직접적인 관심사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일들에 대해 기도할 때에는 성자와 성령께 직접 기도를 드릴 수도 있다.

셋째로, 기도는 양방의 교제 방식에 있어 인간 쪽의 응답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고 섬기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편지(성경)로 뜻을 전달하시고, 우리는 전화(기도)로 대답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 주님을 직접 뵙고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하나님과의 교제 관계는 이렇게 진행된다.

넷째로, 기도는 송영, 즉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리는 일이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고 높여 드리기 원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열망은 기도의 핵심이다.

다섯째로, 기도는 두 색조의 언어 형태를 취한다.

즉 기도에서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께서 누구이시고, 어떤 일을 행하셨고, 또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에 의해 유발된 찬양은 부족함의 깨달음에 의해 일어나는 간구와 교차한다.

여섯째로, 기도는 성령의 분발시키는 작업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절대로 기도를 드릴 수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조금도 어렵지 않게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로 높여, 하나님에게 집중하도록 도우신다. 통성 기도는 유익하다. 기록들은 청교도들, 감리교인들, 그리고 챨스피니(Charles Finney)와 같은 지도자들이 목소리를 높여 기도했다고 한다. 한 청교도 목사에게 기도실이 딸린 농원이 있었는데, 그 기도실에서 그는 매우 큰소리로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농원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가 자신들에 대해 하나님께 하는 말을 다 들을 수 있었고, 이 기도가 그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기도를 따르기를 주저한다. 은밀한 기도는 은밀하게 드려야 한다(마 6:5을 보라).

그러나 분명히 통성기도는,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곱째로, 기도는 활력의 수단이다.

영적 각성, 활기, 확신은 어떤 제목에 대한 진지한 기도의 불변의 부산물이다. 청교도들은 기도를 영혼이라는 기계에 기름을 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상급이다.

왜냐하면 기도에 대한 확실한 응답은 다른 무엇도 주지 못하는 기쁨과 격려를 주기 때문이다.

 

3.기도의 실용성

매우 실재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에 도움을 주는 몇 가지 사항들이 있다.

첫째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할 수 있다.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요청을 해야 하며, 성령의 우리의 기도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역들에 더하여 우리로 주님 앞에서 진실을 진술하도록 인도하는 것도 성령의 임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종종 우리는 특별한 인도를 받지 않고 단지 일반적인 말로 필요한 소망을 일으키시고, 우리로 비범한 확신을 가지고 요청하도록 인도하신다.

여기에서 두 가지 개인적인 실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내가 교장으로 있던 신학 대학이 감독의 명령에 의해 문을 닫아야 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 공동체는 이 문제를 놓고 하루를 기도하기로 정했다. 그날 두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정확하게 무엇을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인가를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다른 대학과의 합병을 구체적으로 구하는 것이었는데 너무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요청이었다. 당시 나는 이 기도 제목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비전을 철저하게 고수하였고, 일 년이 안 되어 내가 기도하도록 인도받은 일이 이루어졌다. 할렐루야! 또 한 가지 예는 검사하는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한 친구를 위해 기도한 일이었다. 암의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위해 기도했다.

나는 상황을 하나님 앞에 아뢰며, 내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확신 있게 치유의 기적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도록 이끌림을 받는 것을 발견했다(그렇게 확실하게 치유의 기적을 구한 것은 나의 생애에 있어 단 한 번뿐이었다). 주일 아침에 교회에서 집으로 걸어오며 그 기도를 다시 드리고 있을 때, 나는 그 기도가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계속 조를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내가 듣고 있음을 느꼈다.

월요일 아침의 수술은 암의 흔적이 전혀 없다고 판명됐다. 다시 할렐루야! 우리는 항상 우리가 기도드리며 구하는 일들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 의식적으로 마음 문을 열고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묵상과 기도 간의 연결에서도 유익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며 내가 사용하는 말인 묵상은 하나님께 직접 말씀을 드리는 것을 준비시켜 주는 유용한 수단이며, 우리에게 정기적으로 필요한 수단이라고 생각된다.

이 세상에서 유명 인사들과 면담할 때 어떤 의식 절차가 있는데, 그 의식 절차는 그 명사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면담에서 가장 큰 유익을 얻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은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죄악 됨과 초라함을 잠시 깊이 생각함이 없이 하나님에게 돌진하여 마구잡이로 우리의 생각에 대해 지껄여대는 것은 곧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를 천박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기도를 시작하기에 앞서 성경을 읽고, 내가 읽은 내용이 나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나타내는지 충분히 생각하고, 그 비전을 찬양으로 바꿈으로 내가 필요한 것에 대한 기도의 실마리를 여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입을 열어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 잠깐 경건한 생각을 하는 것은 이어지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질적으로 크게 다르게 한다. 하나님께서 누구이신가를 기억하고 다시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시간 낭비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 극히 중요한 수단이다.우리는 상상으로 응답 못 받은 기도의 문제에 의해 낙심할 필요가 없다.

내가 “상상으로”라고 말하는 이유는 상상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응답이 항상 쌀쌀맞은 “안 돼”라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의 진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곧 신자가 하나님 앞에 어떤 필요한 상황을 말씀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항상 긍정적으로 행동하신다. 그러나 구하는 것에 대해 항상 동일한 방법으로, 또는 동일한 속도로 행동하시지는 않는다. 그 필요한 것을 충족시킴에 있어 하나님께서는 가장 선하다고 생각하실 때에 가장 선하다고 알고 계시는 일을 행하신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이 탄원하는 응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기다리다”는 것임을 보여준다(눅 18:1-8). 따라서 다른 간구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치유해 주시기를 구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바울에게 하신 말씀은(고후 12:7-9) “안 돼”라는 의미였지만, 단순히 “안 돼”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말씀은 바울이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바울이 구했던 치유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약속이었다. 우리도 하나님께 상황들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하는 것 대신으로 행하신 바가 우리에게 변하지 않은 상황들을 감당할 힘을 주신 것임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이 응답은 단순히 “안 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도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답이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기억한다. 나의 열한 번째 생일이 다가올 때, 나는 부모님에게 내가 성인용 자전거를 원한다는 사실을 노골적인 암시들로 알렸다. 그러나 부모님은 성인용 자전거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시고, 타이프라이터를 선물하셨는데, 그 타이프라이터는 실제로 가장 좋은 선물이었고, 나의 소년 시절에 가장 소중한 소유물이 되었다. 그것은 훌륭한 부모님의 배려였고, 자전거라는 나의 요구에 대한 가장 동정적인 응답이었다. 우리의 구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닐 때, 우리의 요구를 더 나은 것으로 바꾸신다.

존 뉴턴(John Newton)은 이렇게 기술했다.

나는 주님께 구했다.믿음과 사랑과 모든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주님의 구원을 더 많이 알고,주님의 낯을 더 많이 찾게 되기를 주님께서 즉시 어떤 은혜로운 때에 나의 요청을 응답하실 것으로 나는 생각했다.그리고 주님의 강권적인 능력으로, 나의 죄를 정복하고 평안을 주실 것으로,

주님은 그렇게 하는 대신 나로 내 안에 감춰진 악을 느끼게 하시고, 무서운 지옥의 세력들이 사면으로 나를 공격하게 하셨다.

“주여, 왜입니까? 당신의 벌레를 죽이시렵니까? “나는 떨며 외쳤다.”“이것이 나의 방식이다” 주님은 대답했다“나는 은혜와 믿음을 구하는 기도에 응답한다.”

“이 내적인 시련들을 사용하여, 자아와 교만으로부터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리고 너의 모든 땅의 기쁨을 꺾음으로, 내 안에서 네 모든 것을 자유하게 하리라.”

우리는 항상 우리의 기도들에 대한 응답을 감사하는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협력 기도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기도회와 같은 보다 넓은 교제(그런 모임이 성경적이고 바람직한 것은 분명하지만)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료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헌신적인, 같은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함께 드리는 기도의 특별한 유익이다. 청교도들은 “가슴속에 간직하는 친구”(bosom friend)의 필요성과 가치에 대해 자주 말했다. 곧 우리가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고 실제로 나누는 친구, 그리고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친구를 말하는 것이다. “가슴속에 간직하는 친구”와 함께 기도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청교도들이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안다.

이런 동반자를 얻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동반자를 전혀 찾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많은 다른 활동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도에 있어서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여행하는 것이 유익하다.

 

 

 

 

제28장 기도의 참된 의미 20가지

 

1. 믿음은 내게 속한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맡기는 일이다.- 그 결과는 주님의 뜻에 맡기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기도할 때 병든 자를 구원하여 주신다고 하였다. // 김의환 <성경적 축복관>

 

2. 어려움 가운데 기도로 매달리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능력이 무한정으로 자라게 되는데, 결국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보배인 것입니다. // 김서택 <하나님만 기다리는 시간>

 

3.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기도는 머리로 믿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게 합니다. - 머리로 믿는 것만으로는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슴으로 믿을 때 전인격적으로 반응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기도로 씨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 김서택 <감사로 드리는 제사>

 

4. 우리의 기도는 서투를 수 있다.- 우리의 시도는 연약할 수 있다. 하지만 기도의 능력은 그것을 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듣는 분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놀라운 효력을 가져 올 수 있는 것이다. // 맥스 루카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5.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추적하는 작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충만해지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방황하지 않는 직선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전병욱 <새벽무릎 >

 

6.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가장 좋은 신앙의 무기이며 기도할 수 있다는 자체가 은혜이고 기도하는 자체가 능력입니다. // 이병희 <성산순례>

 

7. 기도로 말미암아 연약한 우리들을 변화시켜 강력한 하나님의 도구로 만드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기도할 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그런 일꾼이 됩니다. // 전병욱 <파워 로마서>

 

8.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실망하며 불평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대해 '예스'로만 응답하시지 않고 'No'로도 응답하신다. Yes라고 응답하실 때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No라고 응답하실 때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 김득중 <무엇이 삶을 아름답게 하는가>

 

9. 믿음은 기도로 성장합니다. - 능력을 이미 받았어도 기도하지 않으면 그 능력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능력은 한 번 믿음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기도로 보존해야 합니다. 기도로 준비하지 않고 능력을 행하겠다는 시도 자체가 무익한 것입니다. // 이성희 <장별구역 성경공부>

 

10. 때때로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 믿음을 향상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에 대한 무관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의 간구가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가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 이성희 <예수님의 치유 >

 

11. 말씀을 이루심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계17:17)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일이 기도입니다(요일5:14-15) // 이병희 <전능하신 목자 >

 

12. 하나님이 내 편이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될 때에 우린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이성희 <예수님의 기도 >

 

13. 신뢰의 기도는 내 뜻을 세워 놓고 하나님께서 굴복하기를 기다리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켜 나가는 기도입니다. // 이성희 <예수님의 비유 >

 

14. 우리의 믿음에 불평이 일어나면 찬송을 부르십시오. 불만이 생기면 감사할 일을 찾아보십시오. 미움이 일어나면 사랑으로 미움을 몰아내도록 합시다. 기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일이나 감사하는 일은 거저 되는것이 아닙니다. 억지로라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전주석 <제3일의 새 역사>

 

15. 나는 암을 예방하는 제일 근본적인 것이 새벽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생기고 마음이 막 부글부글 끓는 일이 생기면 "내일 새벽에 두고 보자 "라고 말하며 모든 문제를 다음 날 새벽으로 미루어 버립니다. 누가 나를 공격해도 영적인 문제로 보고 그 사람과 다투기 보다는 기도로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 원종수 <너는 내 것이라>

 

16. 응답받는 기도 원칙 5가지

1) 축복에 대한 모든 주권의 유일한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 하는 것을 전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요 14:13-14, 15:16).2) 알고 있는 모든 죄로부터 완전히 떠나는 것이다(시 66:18).3) 하나님 자신의 서원에 의하여 확증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믿음을 보이는 것이다(히6:13-20, 11:6)4)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간구하는 것이다(약 4:3, 요일 5:13).5) 계속 끈질기게 간구하는 것이다 (눅 18:1-8, 약 5:7).// 홍일권 <오만 번 응답받은 뮬러의 기도비밀 >

 

17.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법 3가지

1) 말씀을 통해 응답하십니다.2) 성령님께서 깨달음을 주십니다. 꿈이나 환상 그리고 직감 또는 영감을 통해 나타납니다.3) 사람을 통해 권면하십니다. // 윤성호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

 

18. 남편과 나는 하나님의 손이 우리 아이들의 삶을 주장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아이들 또한 그것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기도할 때 아이의 삶에 스며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 스토미 오마샨 <자식의 장래는 부모의 무릎에 달려 있다>

 

19. 기도를 어려워하지 말고 그것을 즐기십시오. 누리십시오, 기도를 기뻐하십시오, 기도의 기쁨을 경험할수록 당신은 기도에 대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 정원 <기도 업데이트>

 

20. 다른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무엇인가 뜨거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중간에 새로운 불이 붙는 것 같은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그 때가 갑자기 새로운 능력이 임하고 새로운 감격이 임하는데 본인은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습니다. // 김서택 <여호와는 나의 목자>

 

 

 

 

 

 

 

 

 

제29장 왜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영적 호흡!!!

공기 중의 산소를 취하고, 내 속에 있는 탄산가스를 버리듯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고, 내 속에 있는 죄성을 꺼내어 놓는 것 기도의 7 Step이 있습니다.

 

1. 무엇을 기도할 지 결정합니다.(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의 마음 안에서 가장 소원하는 바를 찾으십시오.)

 

2. 기도 제목에 해당되는 성경의 약속을 찾으라(롬 10:17, 수 1:8).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만약 내가 치유를 원한다면(사 53:5, 마 8:17, 벧전 2:24), 부요를 원한다면 그의 약속의 말씀인(고후 8:9, 빌 4:19, 시 34:10, 사 1:19)을 찾으십시오.

 

3.원하는 것을 구하라(마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4.구한 것을 받은 줄로 믿으라(막 11:24, 약 1:6-8).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5.의심을 거절하라(약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6.약속의 말씀을 묵상하라(잠 4:20-22).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7.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려라.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다가 믿음을 갖게 되면 구체적인 기도응답이 현실적으로 오지는 않았어도 응답받은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감사하고 찬양하며 기다리십시오. 기도응답은 예비하신 기간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기도의 응답은 성도에게 주신 너무나 당연한 기업입니다. 하나님은 늘 생활가운데 누릴 수 있도록 기도 응답을 우리에게 예비해주셨습니다.

 

 

 

 

 

 

 

 

 

 

 기도의 본질

기도의 본질은 뭔가를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마음을 열고, 주님과 대화하며,

영원한 교통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기도는 주님 앞에서 끊임없이 포기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주님만을 소유하고자 하는 열정이다. 진정한 기도의 영은 축복을 요청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복의 공급자이신 주님을 모시고 그 분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 선다 싱 -

 

 

 

 

 

 

 

 

 

 

 

 

 

 

 

 

 

 

 

 

 

 

제30장 기도생활의 유익 (딤전2:1-3)

 

성경은 기도의 결과 성도들의 삶이 이전보다 나아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에게 기도의 유익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2:1-3)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소개한 유익한 점을 나열하면 경건, 단정, 고요, 평안한 생활, 성도의 생활에 없어서는 아니 될 내용들이 기도의 결과로 가능케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생활에 영육 간에 유익을 줍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신앙의 성장(약5:17)신앙은 성장하여야 합니다. 강하고 담대한 신앙으로의 성장을 위하여서 기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자세는 하나님의 실존을 인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도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살아 역사 하시고 도우시며 축복하여 주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갈멜산의 기도는 가뭄의 땅에 비를 내리게 하는 기적을 가능케 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5:17-18).

기도는 하늘의 은혜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이루기도 하지만 성도로 하여금 성령에 이끌리는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깨닫게 되며 작고 여린 믿음의 소유자들의 믿음이 큰 믿음으로 성장하게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구약성경을 통틀어 기도에 힘쓴 사람이 큰 믿음을 소유하였고, 기독교 이천 년 역사 속에서도 존 낙스나 조지 뮬러, 디 조엘 무디나 한국의 최 봉석 목사 같은 이들이 한결 같이 기도에 힘쓰던 인물로서 믿음의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기도는 신앙 성장에 기폭제가 됩니다.

 

2. 영적 평화(빌4:6,7)

 

예수께서는 성도가 누릴 영적 평화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시인들이 고해와 같다고 표현한 이 험한 세상에서 성도가 하늘에 속한 평화를 소유하는 길은 기도하는 신앙에서만이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에 기록하기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기도함으로 평화를 누리게 되면 환난과 풍파 많은 환경에서도 성도의 마음에 예수님이 거하게 되며(엡3:17) 영적 능력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영혼의 성화(엡4:13)

 

복음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할 때에 순간적으로 죄에서 해방되어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됨과 동시에 영생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령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롬10:9-10).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역사는 영원히 이루어지는 신령한 역사의 출발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영혼과 육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성화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성경은 그 내용을 지적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라고 가르칩니다. 이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1) 회개를 이루기 때문임기도하는 성도는 자기의 결함이나 회개의 조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훌륭한 신앙의 인물들 가운데는 흉악한 범죄의 소유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철저히 기도를 통하여 회개를 이룬 이들입니다. 특별히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이는 범죄 이후 철저히 회개함으로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기도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는가 하면, 야곱은 얍복 강변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신앙의 사람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의 베드로나 사도 바울도 기도를 통하여 회개를 이루고 영혼의 성화를 이루어 크게 쓰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됩니다.

(창 32:22-26, 시 51편, 마 26:60-75, 갈 1:17, 딤전 1:12-16)

그리고 참회록을 쓴 어거스틴도 회개의 기도를 통하여 영혼의 성화를 이루어 성자로서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2) 신령한 지식을 얻기 때문임기도하는 심령은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에의 지식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거룩한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는 심령이 되어 영혼의 온전한 성화를 날마다 이루어 가게 되며 마지막 영화로운 자리에 참여케 되는 것입니다(벧후 1:20-21, 3:14-16).

 

4. 하나님의 인도하심(욥 8:5-6)

기도하는 심령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을 나의 편으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 하시는 은혜의 자리를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욥 8:5-6).

하나님은 기도하는 믿음의 심령을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로 인도”(시 23:1-2)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의 종인 엘리에셀의 기도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창 24:48).

기도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31장 이렇게 기도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고 그 말씀을 통해 진리의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늘 함께 동행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을 받아 자신이 주인이었던 옛 생활을 청산하고 모든 삶이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성령 충만함을 누리며 살아야합니다. 그러한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생활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기도란 기도 이상의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기도란 기도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기도를 통해 연결되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기도는 기도 이상이다”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대화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 대화가 어떤 대화이며, 누구와 하는 대화인가에 따라서 그 대화의 중요성은 결정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분과의 대화요.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완성시켜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며, 우리는 기도로써 하나님께 응답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영적 싸움은 기도를 통해서 승리할 수 있고, 기도를 통해서 내재하신 그리스도께 더욱더 순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신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것이며, 보다 더 능력 있는 생활을 살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주로 불신앙 때문에 이러한 능력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시도하는 방법을 알았고,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현대의 신자들은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그런 능력 있는 생활을 살지 못할까요? 오늘날 신자들은,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능력 있는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았는데 신자들의 신앙이 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기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1.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 받는 자녀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란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와 대화하는데 어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기도를 어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한테 이야기하는데 “사랑하는 아버지여 제가 내일은 학교를 좀 일찍 가는데 만일 원하신다면 한30분 정도 일찍 학교에 데려다 주실 수 있겠나이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아버지 내일 학교에 좀 일찍 가는데 30분 먼저 데려다 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아버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히 4:14-16). 그러면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좀 더 정확히 알기 위해 우리들이 기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공부해 봅시다.

 

1) 기도는 자기 혼자서 하는 참선이나 명상이 아닙니다.

또한 멀리 떨어진 분께 외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기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 나와 함께 계신 그 분께 드리는 것입니다.(골 1:24-29) 그분은 우리 속에 함께 계십니다.(갈 2:20) 구약에는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지금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만나러 오셨습니다. 하지만 신약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류의 모든 죄악의 짐을 다 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 속에 거하십니다.(고후 13:5). 사실상 이것이 신약과 구약의 주된 차이점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엡3:14-21)

우리는 기도할 때 항상 이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2)기도는 나의 소원을 일방적으로 아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는데 있습니다(요 15:7).

자녀들이 부모님께 무엇인가를 항상 요구하기 위해서만 대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그런 것들을 요구합니다. 자녀가 요구하기 때문에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에 들어주십니다. 요구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행해지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요구 때문에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때문에 요청합니다.

 

3)기도는 일이 아니라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그리스도인이 해야 될 일로써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로써 주셨습니다.

특별한 모임이나 예배 때만 드리는 것은 일입니다.

하루 중 정해진 어떤 시간에만 기도하는 것은 일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생활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항상 기도하기를 원하셨지(데살로니가 5:17), 특별한 때만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과 나누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7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은 원래 원어의 의미로 “줄 기침한다.”는 뜻입니다. 기침은 내가 원할 때만, 그리고 정하진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때나 시간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때나 어디서나 항상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자녀와 항상 대화해도 특별한때, 특별한 시간에 집중적으로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때때로 우리들은 집중적으로,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때에(예를 들어 수련회나 금식기도 등)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4)기도는 종교적인 말의 의미 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신 분입니다. 이미 그 분은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마 6:7-8). 이 말은 기도를 한 번만 하고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반복하여 기도할 때 응답하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확실한 믿음은 우리의 기도를 계속적으로 반복하거나, 중언부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기도의 결과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들어주시든 안 들어 주시든 모든 결정은 그분이 합니다. 다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말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단지 믿음을 원하십니다. 믿음이 클수록 말은 줄어듭니다. 그러나 말이 줄어든다는 것이 기도의 횟수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2.기도란 무엇인가 ?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이다 1) 하나님께서 먼저 역사(役事)하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말씀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에게 응답하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와 같이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2) 예수님께서 먼저 초청(招請)하셨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 이니라”(마 7:7-8) 예수께서 먼저 우리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심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며, 우리가 찾는 것을 찾게 하여 주시며, 문을 두드릴 때에 열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를 동등한 인격체로 예우하시며, 사랑하시며, 응답해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지극하신 사랑의 초청인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던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15:16) 3)성령님께서 먼저 간구(懇求)하셨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시느니라 (롬 8:26-27)

성령께서는 우리 사람들의 연약함을 미리 아시고, 우리를 도우사, 우리가 기도할 줄 알지 못할 때에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 기도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친히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고 계신다.

이와 같이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 하나님, 삼위 일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하여 먼저 기도하시며,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사랑의 법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찾으심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기다리심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 할 지어다” (잠 23:26)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역대하 16:9상)

 

 

 

 

 

 

 

 

 

제32장 중보 기도와 영혼 구원 1. 서론 하나님의 뜻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 하시느니라"(벧후 3:9)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더욱이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중보기도자로 부르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5만 번 응답받은 기도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조지 뮬러 목사님은 자신과 매우 친한 친구 5명을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한지 5년 만에 그중 한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0년 후 두 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남은 두 친구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25년이 지난 후 네 번째 친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조지 뮬러 목사님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마지막 남은 그 친구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가 죽은지 몇 달 안 되어 이 친구도 마침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중보자는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중보기도는 전도할 대상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며 그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야말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진정한 방법이며 전도하는 노고는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초대 교회가 전도에 성공한 비결이 중보기도에 있었음을 사도행전 4:29절-31절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29-31)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하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을 중보기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의 기도를 통하여 롯의 가정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로 멸망의 선고를 받았을 때 모세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멸망의 위기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22장에서는 무너지는 담을 막아서는 중보 기도자 한 사람이 없어서 이스라엘이 멸망케 된다고 했습니다. 예언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멸망의 위기 가운데 서 있는 도시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한 사람의 중보 기도자를 찾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보기도를 통한 영혼구원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함께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본론 1) 중보기도 ①중보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어떤 사람을 대신해 내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중보기도는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계신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다리가 되어주셨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둘 사이에 다리가 되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기도가 중보기도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딤전2:5-6)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보자는 유일하신 예수님 뿐입니다. 그는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신 후 지금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기도 사역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기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남을 위한 기도자로서 중보기도를 우리들도 하게 되었습니다. 중보기도라는 것은 유일한 중보자의 차원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차원에서 말합니다. 중보기도는 모든 사역의 우선성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라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엇보다도 중보기도의 사명자가 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여기서 첫째라는 것은 두 번째를 전제한 순서상 첫째가 아닙니다. 우선적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사역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위한 사역을 감당하는데 중보기도가 우선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중보기도는 가장 고상한 형태의 기도 유형임을 깨닫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의 모든 형태 가운데 가장 비이기적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기도는 자신과 가정에 관련된 기도일 뿐입니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서로의 짐을 짊어지는 기도입니다. 중보기도는 가장 구체적인 이웃사랑의 실천의 장이요. 하나님 나라 사역의 가장 권세 있는 방편이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사역입니다. 이 사역은 주님께서 보이신 가장 값진 사역의 본을 따르는 방법이기에 중보기도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②중보 기도자란 누구입니까? 중보기도자란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면서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중보 기도자는 다른 사람들의 죄 사함을 얻게 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중보자는 권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입니다. 이 권리는 죄 사함과 하나님의 자녀 됨에 있습니다. 용서를 받아 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 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 수 있고,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조건 없는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중보자는 다른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보자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어떤 조건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조건 없이 사랑을 받았기에 조건 없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중보기도자입니다. ③영혼구원을 위하여 중보기도는 왜 중요합니까? 전도를 위하여 말씀이 영적 싸움을 위한 폭탄이라면 기도는 뇌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터지고 폭발하려면 기도라는 뇌관이 먼저 터져야 합니다. 기도의 불꽃이 터져야 다이너마이트는 터집니다. 폭탄을 터뜨리기 위하여 뇌관을 먼저 터트려야 하듯이 전도의 말씀이 터지려면 먼저 기도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위하여 말씀도 암송하고, 전도 전략도 연구하여 완벽하게 준비하지만 막상 전도에 불이 붙지 않습니다. 전도의 중요성도 잘 압니다. 전도의 방법도 잘 압니다. 전도할 때 해야 할 말씀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기도의 열심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위하여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을 잊고 시작합니다.

먼저 기도로 불을 붙여야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권능을 입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히게 된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고 영혼 구원의 일을 위하여 귀신들린 여종의 병을 고쳐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혀 귀중한 영혼 구원의 사명을 방해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찬양과 기도로 영적으로 묶인 사단의 권세와 싸웠을 때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간수장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중보기도 사역의 중요한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고(요일 3:8), 잃어버린 자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중요한 사역임을 깨달아야 합니다(눅 19:10, 요 10:11-12). 이를 위하여 전략적으로 중보기도의 사역을 교회 안에 바로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 중보기도의 효과 1) 중보기도는 전도자를 준비시킵니다. ①예수님은 기도로 전도를 준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전도인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역을 두고 공통적으로 그가 보여준 모범은 무엇입니까? 그가 병고치고,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 바쁜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한적한 곳에 가서 새벽기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가복음 1:35-39절을 보면 예수님은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신 후에 전도를 나가셨습니다. 누가복음 4:42-44절에도 보면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후에 전도를 나가셨습니다. 전도의 일군을 택할 때도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직접 중보기도의 참 모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인 영혼 구원을 위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었습니다. ②기도는 인간적인 방법보다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게 합니다. 전도는 영적 전투입니다.

불신의 권세를 물리쳐야 하는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이에 무엇보다도 중보기도가 중요합니다. 구약에서 승리한 전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한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300명의 기드온 군사가 수십만의 미디안 족을 물리칠 수 있었던 비결도 하나님의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던 비결도 하나님의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승리하였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일도, 연합군에 맞서 찬양단을 앞세워 승리했던 여호사밧의 승리 역시 하나님의 승리였던 것을 깨닫습니다. 산 위에서 아론과 훌의 부축을 받으며 두 손을 들며 기도했던 모세의 아멜렉 전쟁도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불신의 권세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인 전투적인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③기도는 성령 충만으로 전도하게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위하여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이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처음 두 장은 기도와 권능 받는 일에 대한 사례를 제공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증거자가 되기 이전에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능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순종했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 쓰니라."(행 1:14).

이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할 때 어떤 능력이 나타났습니까?

이 약속의 응답은 그들이 다락방에서 한 곳에 모였을 때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이 임하였습니다(행2:1-4). 그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을 때 베드로와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하루에 삼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송하시기 전에 먼저 기도하기를 원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먼저 체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애굽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기 전에 먼저 가시떨기에 붙는 불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먼저 체험했습니다. 이사야를 보십시오. 그도 역시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누가 나를 위해 갈꼬"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때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하고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파송은 하나님의 임재를 먼저 경험하고 나서 주어집니다. 누구든지 전도자가 되기 전에 먼저 기도자로서 하나님의 임재,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할 때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④기도는 부정적인 환경에서도 용기 있게 전도하게 합니다. 전도를 하려고 할 때 여러 가지 부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환경이 주어질 때가 많습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디에서든지 핑계 댈 만한 이유들이 많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마음을 준비시켜 줍니다.

초대교회 당시 핍박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며 성령을 받았을 때 그들에게 담대함이 주어졌습니다(행 4장).

반대가 올 때 주저앉으면 그 사람은 패배자가 됩니다. 자신을 잃지 않고 증거의 삶을 용기 있게 살아 나갈 때에 그는 어느 사이에 전도를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를 즐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라고 했습니다.

버스나 전철에서 외판원들이 장사할 때 부끄러움도 모른 채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판매하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세상적인 것에도 이처럼 열심인데 영생을 전하는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⑤기도는 전도대상자의 필요를 알게 합니다. 사람의 필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면 약방에서든, 빵집에서든, 문방구에 가든, 어디를 가든지 전도를 할 수 있습니다.

행 3:1-10을 보면 정한 시간에 기도하려고 성전에 들어가던 제자들은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거지를 만납니다. 그 거지의 당장의 필요는 먹는 빵이었습니다. 이것을 얻기 위하여 그는 자신의 지혜를 총동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좋은 자리를 택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근면했습니다. 날마다 미문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혜와 근면도 그의 삶, 거지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거지를 그곳에 데려다 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훌륭한 자선 사업가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근본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돈을 던져주며 구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주었던 자들은 누구입니까? 요한과 베드로입니다. 이들은 이 거지의 진정한 필요는 돈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금과 돈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는 일군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를 안고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상담도, 돈도, 격려도 필요하나 근본적으로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이 시대에 지치고 혼미한 영혼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전도할 대상의 긴급한 문제가 무엇이며 그들의 부족함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지혜로운 복음전도자로 준비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중보기도는 전도할 대상을 변화시킵니다. ①중보기도가 살인마들을 전도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지존파의 구원사건을 통하여 지속적이고, 간절한 기도야말로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존파를 구원한 이재명집사님이 간증하실 때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회에서 지탄받는 대상인 지존파들을 구원시키기 위하여 사전에 많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악독했던 지존파, 독일에서는 광주사태 보다 더 충격적으로 대서특필 되었던 사건이라고 했던 주인공들을 한 집사님이 전도했다는 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온 국민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공 뉴스 시간에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하여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찔려 죽이지 못하고 잡힌 것이 한이 된다."고 했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인육을 먹었던 그들은 스스로 사람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토록 잔인했던 그들이 마지막 사형장에서 사형당할 당시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당시 두목이던 김기환은 목에 밧줄이 걸리고 마지막 몸이 공중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가 마지막 외친 소리는 "할렐루야"였다고 합니다. 김현양을 잘 알 것입니다. 여자의 유방을 칼로 잘라내어 질겅질겅 씹었다던 그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감옥 안에서 30명의 영혼을 전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가 신고 다니던 운동화를 벗어 놓았는데 운동화 신발 양쪽에는 성구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1-2).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도 역시 마지막 죽는 순간 "할렐루야"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백병옥이라는 또 한 사람은 원래 말이 어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행 당시 방언을 받아 방방 뛰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행관이 있을 수도 없던 형 집행을 잠시 연장했답니다. 이 때 그는 그곳에서 "소장님, 저는 천국에 올라갑니다. 소장님. 스님, 의사님, 보안과장님 예수 믿으십시오. 하면서 10분 동안 복음을 전하고, 마지막 찬송을 부르다가 마지막 "할렐루야"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전도의 대상을 두고 중보기도 하는 능력은 지존파와 같은 악한 사람들에게까지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전도 대상자를 두고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능력 있는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②중보기도는 전도할 지역을 변화시킵니다. 중보기도와 복음 전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개인적 단계에서 시작하여 어려움이 커 가는 단계로 상승합니다. 개인과 가족, 교회, 더 나아가 교단과 도시, 국가, 세계로까지 이릅니다. 특별히 전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이 살고 있는 도시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영적 전쟁의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도시 거주자가 더 높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한국 역시 도시집중화 현상에 따른 과도기적인 아픔과 문제들을 겪고 있습니다. 인구의 사분의 삼이 도시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도시야말로 중보기도의 대상이요,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선교 중심지역이 되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렘29:7) 우리 크리스천 선교의 새 비전은 도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열방에 전하고자 한다면 도시의 복음화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도시들은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로써 그 나라의 신화를 대부분 보관하고 있는 곳입니다. 성경에서 시작되는 인간의 이야기도 동산에서 시작해서 도시에서 끝납니다.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도시가 우는 사자와 같은 사탄에게 속임을 당하여 묶여있는지 모릅니다. 도시야말로 하나님의 축복된 동산으로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의 소망입니다. 전도할 대상인 도시의 성문을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할 대상인 도시를 위해 중보 기도할 때 도시의 성문을 분별해야 합니다. 전쟁터로 달려 나가기 전에 전체적인 상황판단을 한 다음 임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침노자요, 강탈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셨지 귀신들에게 우리의 도시를 다스릴 권위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치 바로 왕이 노예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렸듯이 사단은 지금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습니다. 사단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세는 도적질한 것뿐입니다. 많은 도시와 사람들이 사탄의 거짓에 속아 흑암 속에 갇혀 있고 이러한 거짓들이 어떤 특정한 문화형태의 받침돌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도시가 다시금 수축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중보 기도자 들을 사용하시기를 원합니다. 병들어 있는 도시와 지역을 구원하기 위해 도시를 연구하고 지역의 악한 영을 알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과 사탄의 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악한 영의 가장 견고한 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감싸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이것을 영적 圖解(도해)라고도 합니다. 영적 도해라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도시를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세도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정탐꾼을 통해 그 지역을 탐지하도록 하였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남방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의 어떠함을 탐지하라 곧 그 땅 거민의 강약과 다소와 그들의 거하는 땅의 호 불로와 거하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의 후박과 수목의 유무니라 담대하라. 또 그 땅 실과를 가져 오라 하니 그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민 13:17-20). 존 도우슨은 하나님의 중보의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알아야 할 필수적인 다섯 가지 요소를 말하였습니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모든 것을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a)당신의 나라의 교회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b)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교회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c)당신이 목표로 사는 전도대상을 위해 과거에 어떤 사역이 행해졌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d)당신이 참여하고 있는 사역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e)당신이 참여하고 있는 신앙운동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상 다섯 가지를 종합할 수 있는 질문으로 "우리 도시의 성벽은 어디가 무너져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도시나 교회 내에 어떤 실패의 패턴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는지를 물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전쟁은 진공상태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복음 전도와 중보기도 역시 가능한 모든 정보를 이용하여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먼저, 도시의 지도를 준비하여 연구해야 합니다. 노인들, 집 없는 사람들, 학생, 어린 아이들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 어디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도해를 위해서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여리고성처럼 강력한 적들의 진영가운데서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장래에 대한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과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③도시의 강력한 진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중보 기도자가 먼저 준비되어야 합니다. 먼저 영적 전쟁을 알리는 찬양과 경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대부분 사단은 원망과 불평하는 죄 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빼앗고 분위기를 해치며 죽음과 실패를 가져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환경문제, 교통문제 등 사소한 문제까지 불평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선 갖춰야할 자세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경배하는 태도입니다.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둘째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요 8:47).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말씀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 10:27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 마귀의 전략을 알게 되고 그들을 패배시킬 수 있는 전략도 알게 됩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세 번째로, 적들이 침투할 수 있는 도시와 나의 약점인 죄를 막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사람을 중보기도자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고 말씀합니다. 먼저 깨끗해야 능력이 따릅니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수 3:5).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뢰하실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시 139:23-24). 우리가 갖는 가장 큰 적은 귀신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악한 마음을 씻어 주셔야만 구원을 이루는 중보기도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도시의 벌어진 틈을 보수하기 위해 중보기도를 하려면 성령님께서 진리의 빛을 심령 깊은 곳까지 비추시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죄와 이기주의적인 정체를 파악하고 남보다 나를 낫게 여기는 교만의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육적인 음란과 영적 음란을 포함한 우상 숭배하는 죄를 극복해야 합니다. 고질적으로 버리지 못하는 악한 습관들도 있습니다. 분노하는 죄가 있습니다. 자만하는 죄가 있고 이기심도 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도록 해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님께서 나의 약함을 고쳐주시고 깨끗하게 하시도록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④전도할 지역을 위하여 여리고 기도작전으로 기도행진을 실행합니다. 중보기도 사역은 전도하려는 대상과 지역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전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수동적으로 우리의 이웃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교회적 복음화 사역을 준비하며 기도 경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중보 기도자의 한 가지 임무이지만, 때로는 우리가 더욱 적극적으로 기도를 통하여 적진으로 들어가서 침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중보기도의 능력을 교회 건물의 벽안에 제한하지 않고, 밖으로(세상 속으로) 끌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리고 기도 작전'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이 기도행진은 영적 전투를 선포하고 영적 군사들을 모집하여 항오로 진군합니다. 여리고 기도 작전은 어떤 지역을 그냥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행진에 대한 훈련을 시킨 후에 기도행진을 통하여 적의 땅, 사단이 역사하고 있는 곳을 되찾는 거룩한 전쟁임을 깨닫게 합니다. 걸으면서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이 땅, 이 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에 속했음을 선포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수 6:3).

4. 영혼구원을 위한 중보기도 사역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전도자와 대상자들을 위한 중보기도 모임이야말로 영적으로 최전선에서 전투하는 특공대들입니다. 이들의 영적인 승리가 전도인의 마음을 불 일 듯하게 만들 것이며, 전도 대상 지역과 불신자들의 마음을 옥토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따라서 영혼구원을 위한 중보기도 사역은 전략적으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보통 교회마다 기도 팀을 운영한다고 하지만 일시적이거나 부정기적이고, 비체계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마다 기도에 대한 운동이 보다 체계적으로 세워지지 않고 훈련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마다 기도 팀들에 의한 영적인 위험과 교회의 여러 문제들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기도도 사역이라는 차원에서 훈련된 중보기도 사역자들을 세워서 교회 내에 영적 분위기를 최대화시킬 수 있도록 중보기도사역을 전략적으로 운영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죄’라고 번역한 단어에 대한 원어는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표현이 ‘죄’와 ‘죄악’과 ‘죄얼’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가 주로 사용되는데 우선 ‘죄’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하타아트’는 모세 오경에서 주로 언급하고 있는 ‘살인죄’와 같은 중한 죄를 의미합니다.특히 십계명에서 금하는 죄를 언급할 때 이 ‘하타아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죄를 지은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추방되거나 그 생명이 끊기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죄로 번역되는 또 다른 단어 ‘아샴’이 있는데 이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죄를 의미합니다. ‘하타아트’는 중범죄이기 때문에 이런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살인, 절도, 간음 등과 같은 사회적으로 영향을 주는 죄가 발생했을 때는 그 집단 전체가 죄에 대해서 회개해야 하지요. 단순한 개인적인 살인이라기보다 집단의 문화와 구조로부터 생기는 죄로 보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쟁과 재난의 경우에 발생하는 집단적인 살상과 약탈행위는 ‘하타아트’의 본질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것입니다.하타아트보다는 다소 경미하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죄악으로 번역하고 있는 ‘라’라는 단어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죄입니다. 이 죄의 유형으로는 인간관계를 비롯해서 상거래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신의문제를 배반하는 죄는 오늘날 형사와 민사에서 다루는 것들이지요. 이런 죄 가운데 의도적이고 사악한 죄를 ‘아온’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복되는 죄와 의도적으로 행하는 죄는 죄질을 나쁘게 보아 가중 처벌하듯이 ‘아온’은 그 죄로 인해서 오는 징벌이 무겁습니다. 이런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요.‘라’나 ‘아온’에 해당하는 죄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쉽게 지을 수 있는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죄의 영향은 무척 강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처리가 간단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대중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죄는 사실 ‘하타아트’나 ‘라’가 아니라 죄얼이라고 번역한 ‘아쉬마’ 또는 ‘페샤’입니다. ‘아쉬마’는 경미한 죄 또는 고의성이 전혀 없거나 실제적으로 죄의 의도가 전혀 없는 죄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성경은 이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낯선 땅 이집트에서 아브람은 그곳 왕을 만나게 됩니다. 왕이 아리따운 아내 사라에게 반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접근합니다. 두려움에 쌓인 아브람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아내라고 말하면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아내는 빼앗길 것이 뻔하기 때문이지요.처녀인 사라에게 반해서 왕은 그녀를 자신의 왕비로 삼고자 합니다. 아브람은 왕의 처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처남에게 많은 제산을 내어줍니다. 이 일로 인해서 바로는 많은 재앙을 당합니다(창 12:10~20). 아무런 죄도 없는 바로는 아브람 때문에 화를 당합니다. 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에서 네겝 지역으로 옮겨가서 그랄에 잠시 머물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서도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사람들에게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런 걸 보면 그는 상습범인 것 같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서 사라를 데리고 갑니다. 그날 밤에 아비멜렉의 꿈에서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저에게 이 여인은 자기 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이 여인도 아브라함을 오라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깨끗한 마음으로 떳떳하게 이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라를 돌려보내라고 명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왕에게 속한 사람들을 다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다음날 아브라함에게 “내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나와 내 나라가 이 크나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라고 호통을 칩니다(창 20:1-11). 아브라함이 버릇처럼 해온 그 일로 인해서 아비멜렉은 큰 화를 당할 뻔했습니다.성경은 “네가 정신없이 무역을 하다가 남을 억울하게 하는 일을 넘치게 저질렀다”(겔 28:16)라고 적고 있습니다. 성경은 “억울하게 하거나 빼앗아서는 안 된다”(겔 45:9)고 적고 있습니다. “네 집을 부유하게 하려고 부당한 이득을 탐하는 자는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재앙을 피하려고 하지만 너는 망한다.”(합 2:9)

 

우리가 불로소득으로 얻은 것 가운데 얼마를 전 주인에게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억울하게 하는 일을 없게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을 때 전 주인에게서 발생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자신은 죄얼이 없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우리는 고의가 아니지만 타인을 억울하게 만드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 일은 본인이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당하게 이득을 얻었다면 그 이득을 잃게 된 사람의 억울함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하지도 못하고 내 뱉은 한 마디가 다른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는 경우를 봅니다. 별 죄의식도 없이 괴롭히기를 했는데 그 아이는 그로 인해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교제하던 여자가 절교를 당하고 나서 자살했습니다. 이 여자의 일기가 인터넷에 실리면서 상대방 남자는 직장에서 쫓겨나고 사회활동을 전혀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네티즌들의 무자비한 글로 인해서 사회에서 매장되었던 내용이 추적 60분에 보도되었습니다. 인터넷에 글을 올려 그를 정죄한 많은 사람들은 여자의 글만 읽고 일방적으로 남자를 매도했습니다. 이 죄얼로 인해서 한 남자가 폐인이 되다 시피 했습니다. 그 남자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소개한 추적 60분을 보면 자신들의 일방적인 행동이 한 개인을 돌이키기 어려운 파멸로 몰고 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언론 보도로 밝혀진 것이지만 밝혀지지 않은 채로 묻어지는 죄얼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런 일로 인해서 까닭 모를 저주가 임하게 되지만 까닭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우리는 이런 죄얼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행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해서 없는 일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있고, 더욱이 마귀가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참소하는 자이므로 이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고하면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한 처벌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오는 까닭 모를 징벌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불행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하고 의문하는 배경에는 자신을 비롯해서 자신과 연관된 인과관계에서 발생하는 죄얼로 인해서 야기된 죄의 문제가 숨겨져 있으며, 몰라서 그 죄얼을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미국 남부에 사는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과거에 발생했던 수많은 억울한 죄얼에 대한 집단적인 회개를 하지 않은 채로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의 죄의 효과가 사라진 것이 아니며, 이번 재앙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죄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과거 반세기 전에 처참한 살육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분단의 아픔이라는 고통의 세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죄얼을 집단적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한 개인의 삶에 얽히고설킨 죄의 문제를 제대로 처리해야 우리가 비로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26 2015년 여름학기 강의안 file 관리자 2015.07.16 2616
25 2012년 계절학기 교재 file 관리자 2014.02.18 2871
24 누가복음 file 관리자 2014.02.18 3051
23 치유 상담학 관리자 2014.02.18 2689
22 치유사역 연구 관리자 2014.02.18 2700
21 조직신학/구원론 관리자 2014.02.18 3160
20 장로교회란? 관리자 2014.02.18 3418
19 예식서 관리자 2014.02.18 3586
18 예배학 관리자 2014.02.18 3206
17 영적 리더십 관리자 2014.02.18 5030
16 역사신학 관리자 2014.02.18 3196
15 개혁주의와 언약신학 관리자 2014.02.18 3255
14 성찬과 성례 관리자 2014.02.18 4869
13 성령론 관리자 2014.02.18 3316
12 설교학 관리자 2014.02.18 3333
11 새로운 설교학 운동 관리자 2014.02.18 3073
10 사도신경 강해 관리자 2014.02.18 3135
9 목회 신학 관리자 2014.02.18 3299
8 내적 치유 사역 관리자 2014.02.18 3192
» 기도학2 관리자 2014.02.17 3204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