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8 13:45

내적 치유 사역

3193 0 0
?

단축키

Prev

Next

크게 작게 댓글로 가기
?

단축키

Prev

Next

크게 작게 댓글로 가기

내적 치유 사역

 

 

제1장 성경이 말하는 치유

 

성경은 치유(healing)란 말을 다양한 단어로 사용한다.

 

1. 치유와 관련된 단어들

 

◈ 세라퓨오

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육체적인 병을 치유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마 4:23; 8:7,16 등).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 이아오마이

육신적인 병은 물론(마 15:28), 마음이나 영적인 병은 물론 축사로 치유하는 것을 말한다(마 13:15; 눅 4:18; 요 12:40; 행 10:38; 히 12:3; 벧전 2:24; 약 5:16 등).

“(수르보니게 여인의 딸)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5).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 소조

‘구원하다’(마1:21; 18:11), ‘위험에서 건져내다’(마 8:25; 14:30), ‘치유하다’ 또는 ‘온전하게 하다’(막 5:23; 6:56), ‘귀신 들린 자가 깨끗함을 받다’(눅 8:36).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회당장 야리로의 딸)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막 5:23).

 

◈ 구약의 라파

‘원 상태로 회복하다’(창 20:17; 시 6:2; 렘 17:14), ‘사람의 병’(출 15:26; 왕하 2:22), ‘나라의 죄악이 치유 받다’(대하 7:14; 호 6:1; 렘 3:17),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2. 성경이 말하는 치유

 

이상 단어 연구에서 본 바와 같이 성경은 치유라는 말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치유는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영적 치유(spiritual healing)

죄인이 구원 받아 영혼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마 1:21; 13:15;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시 41:4).

 

◈ 육신 치유(physical healing)

육신의 질병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마 4:23; 고전 12:9;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 심령 치유 또는 내적 치유(emotional healing, inner healing)

사람의 마음이 치유 받는 것(사 61:1-3; 눅 4:18-19; 마 12:20).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사 61:1-3),

육체의 질병의 70%가 마음의 질병에서 기인하는 심인성 질병임을 감안할 때 내적 치유는 육체의 치유 못지않게 중요하다.

 

◈ 축사 또는 축귀(deliverance)

귀신을 쫓는 것(막 16:17; 눅 10:19; 행 10:38)도 치유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 16:17).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귀신 들린) 딸이 나으니라.”(마 15:28).

 

◈ 죽은 자를 살림

성경에는 죽은 자를 살린 기록이 가끔 나온다.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왕상 17:22), 직원의 죽은 딸을 살리시고(마 9:18-24),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요 11:43-44), 죽은 도르가를 살린 베드로(행 9:36-40 ),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린 바울의 경우(행 20:9-10)를 들 수 있다.

 

오늘날의 경우, 영국의 배관공 출신의 능력 사역자인 스미스 위글워쓰 목사는 그의 집회에 오랫동안 참석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할 때 죽은 자를 최소 10명이상은 살렸다고 하며, 인도네시아에 임한 부흥기간 중, 죽은 사람의 시신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을 드렸을 때 그 사람이 살아났다고 증언한다.

 

 

 

 

 

 

 

 

 

 

 

 

 

제2장 내적 치유란 무엇인가?

 

 

내적 치유는 과거에 발생했던 좋지 못한 사건의 기억이나 어린 시절에 우리가 당한 상처 혹은 과거에 지은 특정한 죄 등이 감정적 혹은 정신적인 병의 원인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적 치유'를 '과거의 상처의 치유'(Healing of Past Hurts)혹은 '깊은 차원의 치유' 또는 '기억의 치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쓰라린 과거 기억을 포함한 정서적 심리적인 상처들은 우리 자신이 저지른 죄악 또는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생기게 된다. 이러한 과거 상처들이 치유되면 속사람(Inner Man)이 과거의 감정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때 회복된다. 따라서 과거에 받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신체적이고도 가시적인 치유와 축사사역과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으나 분명하게 구별되는 개념으로써 일반적으로 내적 치유(Inner Healing)라고 불리고 있다.

 

지금은 내적 치유 사역으로 널리 알려진 내적 사역자들이 말하는 내적 치유의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데이빗 시멘즈(David A. Seamands)는 “내적 치유란 상처받은 감정과 치유되지 못한 기억들을 목회적인 차원에서 돌보아 주고 그 치유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내적 치유에 대해 "성령의 치유 능력을 특정한 형태의 감정적 영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기독교 상담과 치유 기도의 한 가지 형태이다. 내적치유사역은 그러한 사역 중 하나의 사역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사역의 유일한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지나친 강조는 과장과 오용을 낳기 때문이다" 이라고 했다.

 

그 분야의 또 다른 선구자인 존(John)과 폴라 샌포드(Paula Sandford)는 'The Transformation of the Inner Man'에서, 내적 치유 사역을 속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속사람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사역으로 이해하고 있다.

베티 탭스코트(Betty Tapscott)는 내적 치유를 이렇게 정의한다. "내적 치유는 속사람 즉 마음, 감정, 괴로운 기억, 꿈 등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를 통한 과정으로써 그것을 통해 우리는 원망, 자기 부정, 자기 동정, 우울, 죄책감, 두려움, 슬픔, 미움, 열등감, 정죄, 무가치 등의 감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적 치유의 권위자인 찰스 H. 크래프트( Charles H. Craft)는 "내적 치유 사역은 전인적인 치유를 목적으로 하여 성령의 능력을 통한 사역이다. 인간의 질병은 대체로 감정적 영적인 부분에 입은 상처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내적 치유는 그곳에 초점을 맞춘다. 이 사역은 그러한 상처의 근원이 되는 부분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적용하려 한다. 흔히 내담자의 기억에는 이러한 근원적인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에, 내적 치유는 때로 '기억의 치유'라고 불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내담자를 치유하면서 흔히 당면하게 되는 구체적 문제는 용서하지 않음, 분노, 원망, 거부, 자부심의 결여, 두려움, 걱정, 성적인 문제 등이다"라고 말한다.

리타 베네트(Rita Bennett)는 "내적 치유란 간단히 말해서 성령의 역사를 저해하고 있는 요인들을 치유함과 동시에, 그것들을 우리의 심리적인 본성으로부터 제거해 버리는 일을 주님과 협력하여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세계적인 치유사역자인 존 윔버(John. Wimber)는 "내적 치유란 손상된 감정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죄와 용서와 정서적인 회복을 이루어 주시는 과정으로서, 곤경에 빠져있는 우리의 존재와 삶의 영역에 복음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적 치유는 속사람의 치유로서 정신(Mind), 의지(Will), 마음(Heart)과 관련된 모든 부분의 영역의 치유를 포함한다.

또한 우리의 감정(Emotions), 영혼(Psyche, Soul or Spirit)과 관련된 부분의 영역의 치유도 포함한다. 한편 영적인 병은 우리가 행한 것에 의해 기인하지만, 감정적인 병은 우리가 당한 것 혹은 일어난 사건에 의해 발생한다. 즉 과거에 우리가 이러한 상처는 나쁜 추억 혹은 연약한 혹은 상처받은 감정의 형태로써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또한 이러한 상처는 우리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문제 가운데로 몰아넣는다.

 

지금까지의 내적 치유 정의를 종합적으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내적 치유는 해방되는 것이다. 과거의 마음의 상처로부터 해방되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둘째, 내적 치유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 내적 치유란, 상처받은 사람들이 받는 상처에 대해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도록 성경적이고 영적인 통찰력을 갖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셋째, 내적 치유는 과거의 사건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재조명이란,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을 말한다.

 

넷째, 내적 치유는 바꾸는 것이다. 내적 치유 사역에서는 환자의 과거의 부정적인 결과를 제거해주시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예수님께 기도한다. 여기서 과거의 사건 자체를 변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결과를 바꾸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다섯째, 내적 치유는 보통 한 사건 이상의 과정이다. 우리의 기억들은 마치 양파 껍질처럼 여러 겹으로 형성되어 있다, 양파의 겉껍질을 벗기면 다음 껍질이 있듯이 우리의 기억들은 겹겹이 연결되어 한 단계의 치유가 끝나면 다음 단계로 이어지게 된다.

때때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릇을 꺼내려면 먼저 찬장문을 열어야 하듯 내적 치유에서도 문제에 맞는 과정을 잘 파악해야 한다. 예들 들면 상처받은 사람에게 내적 치유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각각 개인의 시간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내적 치유는 기억의 치유이다. 보통 사건 자체는 한 번의 상처를 입히지만 그 사건이 계속 상처를 주게 된다. 실로 기억은 강한 힘이 있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어느 정도 기억의 고통을 무디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그것을 완전히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일곱째, 내적 치유는 용서를 적용하는 것이다. 많은 영적 훈련들이 우리가 미처 인격의 깊은 부분을 변화시키기도 전에 급히 진행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예수님의 임재와 용서와 무한한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상처받은 자아상에 새겨진 아픔의 흔적들을 치유 받은 경험의 과정은 고백과 용서이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내적으로 체험할 충분할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내적 치유의 참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여덟째, 내적 치유는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과거의 시간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그 때 엎질러졌던 우유까지도 해결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시며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분이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와 은혜를 받아들인다면, 과거의 고통스런 사건은 더 이상 현재의 우리를 속박하거나 상처를 주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적 치유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역사 하시는 주님의 원동력이며 적용 방법이다. 원동력은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적용 방법은 실제 사역 현장에서 성령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치유란 주 예수님이 과거의 상처들을 해결하시도록 그 분께 의탁 드리며 그 상처의 부정적인 결과들을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1. 내적 치유란?

"그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마 8:17)

과연 여기서 '연약한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오는 말씀이다. 그 중 특히 "자신도 모르는 잘못된 굴레"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1) '상처 난 감정' 의 증거

• 지나친 완전주의자 (Perfectionist Complex) "나는 이것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저것을 할 수 있었는데, 내가 좀 더 잘 해야 하는데..." 즉, 계속 노력하고 이루지만 결코 목표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 지나친 예민감 (Supersensitivity) 다른 이들로 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고(남의 말에 지나치게 의존함), 잘못된 것에 지나치게 자신을 결부 시키며 결국 상처를 받는다.

•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따라서 아주 간단한 돌파구를 찾는데 바로 경주에 절대 나가지 않고 옆자리에만 앉아 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할 일이 있다.

• 문제를 똑바로 직시해야 된다. 문제를 혼자만을 생각으로 풀려고 하면 안 되고 무엇이 문제인지 직시해야 된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약 5:16)

• 어떤 문제이든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 자신의 책임을 시인하기 전엔 상한 감정의 치유가 시작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 고침을 받기 원하는지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 문제 가운데 연관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야 된다.

• 자신을 용서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죄를 잊어 버리셨다.

•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 또한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을 성령님께 구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할 것을 아시고 기도해 주실 것이다.

 

2. 성령과 치유

신유의 정의

신유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은혜를 말한다. 순간의 치유와 점진적 치유가 있다.

① 신유는 의약적 치료(Medical Cure)가 아니다.

② 신유는 최면술적 치료나 정신력 또는 기(氣)에 의한 치유가 아니다.

③ 신유는 무당의 신통술이나 강신술이 아니다.

④ 신유는 믿음이나 기도 그 자체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⑤ 신유는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⑥ 신유는 돈을 목적으로 한 의학적 직업이 아니다.

신유의 약속과 비전

① 치유의 다양성을 인정하자.

하나님께 열린 마음으로 상황, 대상, 질병의 종류에 따라 어떻게 사역을 해야 할지 하나님께 음성을 들으면서 치유사역을 행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성령께서 직접 치유하실 수 있도록 하며, 우리는 그 보조자로서 사역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방법을 제한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② 신유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소유하자.

[출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신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 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막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약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행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제3장 능력치유(Power Healing)

 

하나님은 치유능력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치유 은사가 있는 이가 있어서 삶 가운데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치유사역을 하시길 원하십니다. 실제로 특별한 은사가 없어도 전도할 수 있는 것처럼 특별한 치유 은사 없어도 치유사역은 할 수 있습니다. 치유의 기도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시길 바랍니다. 치유사역자가 되려는 소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치유 사역자가 되어 병자의 형편을 듣고 병자를 위하여 간구하고 치유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1.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주님이 부여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동기를 두었습니다. 사역은 오락이 아닙니다. 병자에게 어떤 깊은 인상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Show가 아닙니다. 치유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고 감동받아야 합니다. 치유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2.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할 것을 모두 배우십시오.

배울 것이 많습니다. 기도는 간단한 것 같으나 기도해보면 그것이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고로 치유사역을 위하여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공부합시다. 성경 전반에 걸쳐 치유의 내용을 깊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의 치유사역을 공부합시다. 그리고 최근의 믿을 만한 학자들의 책자들을 통하여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 들 중에 프란시스 맥너트의 "Power to heal",

존 윔버의 "능력전도" "능력치유"

켄 불루의 "치유사역"

M.T 겔시의 "치유와 기독교"

“능력전도” 끝부분에 신유사역의 성공적인 역사가 나와 있고 능력치유에 그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3.훈련 받을 기회를 많이 찾고 구하십시오.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훈련하셨습니다.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만 훈련가운데 얻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절로 치유사역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사역자는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훈련받을 기회가 있으면 어떤 기회이든지 최선을 다하여 참석하여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여 훈련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4.성령께서 매일 매일 새롭게 하시길 기도하십시오.

치유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병을 우리가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고로 그분이 어떻게 계속 역사하시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치유를 경험합니다.

매일매일 치유를 위하여 당신은 성령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인도함을 느낍니까? 음성을 듣고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능력과 은사를 경험하여도 보혜사로 인도받고 그 같은 경험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느끼고 인도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5.나서서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위험을 감수하십시오. 큰 대적은 불신앙입니다. 두려움입니다. 불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막습니다. 두려움은 주어진 은사를 막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느냐? 하십니다.

믿음이 있으면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막9:23) 믿음을 가지고 실제로 나가서 그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병자를 고치는 것은 열정이 담긴 사랑 입니다.실로 구원과 치유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포로 된 자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구원이 주님의 사역이십니다. 공생애시 치유사역의 대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12제자와 70명의 제자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행하시길 원하십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이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있습니다. 누가 일군입니까? 바로 당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고 죽은 자를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시간부터 더욱더 하나님의 음성을 감지하시고 병자의 형편을 이해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열정을 가지고 치유사역에 임하시길 바랍니다.

 

받아들이라!

 

'받아들이라' 여러분 어떻습니까? 지금 만나는 중에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 그 상황들, 나와는 다른 기질의 사람들, '하나님, 난 이런 사람과는 일 못해요' 하는 사람들, '난 그곳은 가지 못해요'하는 사역지들 나와 다른 면을 지닌 사람들을 한국 사람들은 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외국에 나가보면, 다인종 사회라 다른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용인이 쉬운데, 한국은 단일민족의 획일적인 문화 전통이 있어 이 받아들임이 참 어려운 환경입니다.

 

그래, '다른' 것이야 주의 이름으로 용납한다지만, 그럼 '틀린'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앙인의 양심 상 틀리다고 판단된 것, 그렇다고 배운 건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처음으로 맞은 여리고 성, 그 성을 점령한 방법은 그저 도는 것이었죠. 하나님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전략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여 성이 무너진 것이죠.

그런데 바로 다음 아이 성 전투는 어떠합니까? 아간의 죄로 인하여 패배당하고 맙니다. 그는 '틀린', 틀려먹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이스라엘 전체가 받아들일 공동의 문제, 공공의 죄로 알게 하십니다. 그런 틀려먹은 것도 역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간은 갑자기 나타난 인물이 아니죠. 애굽 노예 때도, 출애굽 때도, 광야 때도, 이스라엘 안에 그와 같은 성향은 계속 있었습니다. 다름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알았다면, 틀림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했듯이 성도는 세상과 구별된 자들입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세상과의 구별, 성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는 소극적 의미의 거룩입니다. 거룩의 본질은 그렇게 구별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상과 구별된 삶이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는 삶이 될 때, 거룩의 적극적 의미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룩한,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세상은 어떠합니까? 세상 속의 우리들은요? 세상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지고, 기준점이 흔들려 양 갈래로 왔다 갔다 합니다. 그것이 애굽의 노예근성과 바로의 폭군 근성입니다. 보상 심리와 보복 조치입니다. 프로이드의 ‘에로스’(성 본능)와 ‘타나토스’(공격성, 자기 파괴)입니다. 자살심리와 적대 심리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무슨 일을 하면, 세상 사람들은 보상을 바라거나, 보복이 두려워 일을 합니다. 자기를 부정해서 죽거나, 남을 부정해서 죽이거나 입니다.

 

제4장 속사람의 치유

욥기 17장 1절에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 되었구나!”고 했습니다. 성경 원어에 보면 ‘내 영이 상했다. 깨졌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난 정말 죽고 싶다. 나의 날이 다 하였다.’ 이것은 정말 실제적인 경험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한 심령 속에 살게 되면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상한 심령이 우리 안에 오게 됩니까? 잠언 15장 13절에“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어떤 때 슬픔을 느낀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상한 심령은 나쁜 뿌리가 자라게 하는 기반입니다. 상한 심령은 바닥이 없는 컵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상한 심령을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여신다면 그 과정이 아주 빠르게 될 수 있습니다.

시편 62편 8절에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5절에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토한 것뿐이오니”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다 토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물 쏟듯 하나님 앞에 쏟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아픔을 하나님 앞에 물 쏟듯 쏟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픈 마음을 치유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상한 마음일지라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약물로 치유할 수 있지만 속사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료 행위로는 치유하기 어렵다. 속사람 즉 마음의 치유는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려는 정신적 또는 영적인 행위인 것이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도, 한 부류의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 속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영적인 성장을 지속해 나가는 반면, 다른 한 부류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고, 믿음을 갖기 시작한 이후 어느 정도는 잘 자라가다가 어느 시점에 가서는 성장을 멈춰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이들은 한 때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겼고, 신앙 체험도 하였지만, 이상하게 의기소침해지고 특별한 이유 없이 영적 침체에 빠진다. 이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것은 오히려 공로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며, 다른 교인들과 목회자에게 상처를 주고, 심지어 교회의 분열의 주동자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해결되지 않은 상처는 그를 불행하게

만들고, 다른 교인들과 목회자와 교회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문제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성경공부 잘하고 열심히 기도만 하면 이런 정서적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쓴 뿌리가 되어 본인은 물론, 그가 속한 가정과 교회를 병들게 한다.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목회자들이 속사람 치유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목회 현장에서 속사람 치유 사역을 행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코자 하며, 이를 위해 먼저 속사람 치유의 일반적 이해를 살펴보고, 속사람 치유가 목회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고자 한다.

 

1.속사람 치유에 대한 일반적 이해

 

1)속사람 치유의 정의

속사람 치유는 어떤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관념적인 개념일 수 있다.

속사람 치유 사역자마다 그것에 대한 정의와 강조점이 다르다.

“단순히 과거에 받은 상처를 위로하거나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성령과 복음의 능력 안에서, 성경적인 원리와 방법들을 통해서,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사건으로부터 해방되고 회복되며, 마음이 새롭게 됨으로써 점점 성화되어 가는 것을 돕는 치유 사역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2)속사람 치유의 목적

속사람 치유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3가지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과거의 고통스럽고 어두운 기억이나 사건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된 아픔과 억압에서 해방되어,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는 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속사람의 상처로 인한 가장 흔한 결과는, 특히 그것이 어린 시절에 받은 것이라면, 정서적인 성장이 멈추는 것이다.

우리는 신체적으로, 지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지만, 우리 정서적인 발전의 어떤 부분은 여전히 미성숙한 상태로 묶여 있을 수 있다.

속사람 치유를 통해 이런 정서적 성장의 장애 요인들을 제거함으로 정서적인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창세기 1:27에 나온 대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내면에서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계신다.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곡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그의 눈이 바로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모습이 결코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이루어 질 수 없다. 속사람 치유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막고 있는 마음의 상처들을 제거해 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일을 도와준다.

마지막으로, 속사람 치유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영역 주권을 회복시키는 건강한 도구가 되도록 속사람을 옥토 밭으로 가꾸는 작업인 것이다.

속사람 치유를 통해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 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딤후 2:3)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속사람 치유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상처로 인한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어 정서적인 회복을 가져오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막고 있던 상한 마음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며, 우리의 속사람을 건강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기여하게 하는데 있다.

한 마디로, 그 목적은 영적 성숙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3)속사람 치유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감정을 치유하시는데 관심을 갖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두움에 숨겨진 것을 아시고(시 139:11-12, 단 2:22) 사람의 영혼과 마음에서 나오는 것(막 7:21-23)을 아신다.

그 분이 그렇게도 애타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는” 것이다(사 25:8). 그 분은 “상한 심령을 고치시려고”(사 61:1, 눅 4:18)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던(사 53:3,4) 분이다.

그 분은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그 분은 우리를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시리라고 약속하셨다(시 34:4).

이것을 잘 알았던 바울 사도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고 권면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은 예수님의 사역과 생애에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들이나 죄인, 부정하고 버림 받은 사람들을 대하실 때 육체의 질병뿐 아니라 감정적인 상처들도 치유해 주셨던 것을 볼 수 있다. 문둥병자는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있을 때 “부정하다!”고 외침으로 다른 사람이 근접치 못하도록 하였으며, 그로 인한 감정적 상처는 분명 육체적 아픔 만큼 심했을 것이다. 문둥병자는 부정(不淨)한 자로 간주되어 버림받음, 거부, 미움, 분노, 조롱, 학대 등을 견뎌야만 했으므로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자기 증오, 열등의식, 절망 그리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깊은 분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문둥병자들의 육체 뿐 아니라 깊은 내면의 상처들도 치유하기 원하셨기 때문에 그를 만져 낫게 하시고 제사장에게 보내어 그 병이 치유된 것을 증명하게 하심으로 앞으로 사회생활에 온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이다(막 1:40- 45).

이와 같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당신의 백성들의 상처 난 마음이 온전히 치유받기를 원하시는지, 즉 속 사람 치유에 대한 주님의 열심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뜻이며, 오늘날 목회의 현장에서도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2.속사람 치유가 목회에 미치는 영향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이웃, 환경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는 이러한 관계들을 왜곡시키고 막고 있는 상한 마음을 치유함으로써 각각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그 회복된 관계들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영적 성숙을 가져오게 한다.

 

1)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상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의 결여를 가져온다. 왜곡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그의 눈이 바로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모습이 결코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다. 입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깊은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인상은 심히 부정적이다.

또한,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은 영적 삶에 있어서 심한 굴곡과 침체를 겪는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신앙의 태도가 항상 주변의 상황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심한 굴곡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신앙 연수가 오래되었는데도 생활 속에 어려움이 생기면 항상 근본적인 회의에 빠져서 하나님이 계신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등의 유아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은혜와 체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에 묶여 있고, 하나님에 대해 왜곡된 생각을 하게 된다거나, 삶 속에서 고쳐지지 않는 죄의 습관을 지속해 나가는 부분이 공존한다. 가장 무섭고 심각한 것은 불신이다. 죄로 인해 상한 마음 중에서도 버림받은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끊임없는 욕심으로 세상을 향해, 우상을 향해 달려간다. 결국 하나님을 불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마음의 상처는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일으켜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키게 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차단하여 개인의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철저히 방해하는데, 이는 바로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물론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과의 친밀감 있는 교제가 가능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 개인의 영적 성숙을 가져오게 한다.

 

2)자기 자신과의 관계 회복

죄로 인해 깨지고 상한 마음의 내적 질병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참 자아를 잃어버리게 한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한다. 계속적인 근심과 걱정을 안고 있으며 자신을 부적합하게 여기며 열등감을 갖게 된다. 자기에 대한 올바른 자아 개념을 갖지 못하면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신앙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마음의 상처로 인한 이러한 현상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 결여로 나타난다. 자존감의 결여에는 두려움, 의심, 분노, 악심, 걱정 그리고 죄책감 등이 해당된다.

이러한 자존감 결여는 열등감과 부족하게 느끼는 것과 자신의 가치를 무시하는 감정들을 갖게 하여 놀라운 영적 경험과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속박한다. 그 결과 우리의 생활을 실패와 패배로 이끌어 간다. 자존감이 결여는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키고, 꿈과 이상을 파괴시킨다.

상하고 포로 된 마음이 더 심한 병적 상태로 빠지게 되면 갇힌 마음이 된다. 이는 내적 질병의 최종적인 상태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우리의 영혼과 영적 자아가 억눌림과 자기 학대를 통해 갇혀지는 것이다. 이 갇힌 마음의 외적 증거의 하나가 완벽주의이다. 지나친 완벽주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평강의 누림을 빼앗아 가고, 무엇인가에 쫓기며 많은 패배감을 경험하게 한다.

이렇듯 상한 마음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면에서도, 한 개인을 병적인 상태가 되게 하여 무기력하게 만들고 철저히 속박하여,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삶에서 누리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속사람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되면,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과 인식의 확장 현상이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사랑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신의 존재 인식과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의 양식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의 성숙과 직결된다.

 

3)이웃과 환경과의 관계 회복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대인 관계의 영역에 있어서도 큰 어려움이 있다. 지배하려거나 소유하려는 태도가 있을 수 있고 반면에 극도로 의존하는 경향도 있다. 지배하는 사람의 경우, 모든 상황을 자신이 왕처럼 지배하려 하고 모든 것을 간섭하려고 한다. 지나친 의존의 모습의 경우에는, 자신의 뜻과 생각은 아무 것도 없고, 지극히 피동적인 삶을 나타내게 된다.

또한, 감정이 오랫동안 억눌려 있음으로 해서 상한 마음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마음에 벽이 생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감정을 주고받지도 못하고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신 안에 들어 있는 감정을 스스로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어려운 시절을 보낸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바로 감정이 속으로 숨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 결과 깊이 잠재해 버린 감정이 다시 살아나지 않아 상담도 불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마음의 상처로 인해 감정이 죽어버린 사람은 말하거나 행동할 때 생명력도 없다. 감정은 상호작용하면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은 감정이 죽어 버려서 누구와도 감정적인 상호 작용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속사람이 병든 사람은 사회생활과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랑을 주고받는데 큰 장애를 일으키며 사회 공동체와 사회 구조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그 곳을 병들게 하며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또한 자연 생태계에 대한 바른 지식의 결여로 자연 생태계까지도 병들게 하여 결국 그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게 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속사람 치유는 존재와 생활양식에서의 자신과의 관계성 회복을 가져오는데, 이것은 다시 이웃사랑의 관계로 발전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섬길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기쁨으로 헌신하는 성숙한 삶이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성도 개인에게 있어 속사람 치유는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그리고 이웃 및 환경과의 관계에서의 회복과 성장을 가져오게 되어, 결과적으로 성도 개인의 영적 성숙을 돕게 된다.

 

3.가정 회복과 속사람 치유

 

가정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와 함께 시작된 기관으로 하나님께서 결혼을 통하여 허락하신 기관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자연을 다스리는 삶에 축복하시기 위하여 가정을 만드셨다(창 1:28-29).

시 133편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가정에 대하여 선하고 아름답다고 찬양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영생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정이 오늘날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가정 폭력, 자녀 학대, 이혼율 증가 등으로 날로 상처로 얼룩져 있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가정도 속사람 치유를 통해 회복될 수 있다.

 

1)역기능 가정의 치유

오늘날 상처투성이인 가정을 한 마디로 ‘역기능 가정’(dis-functional family)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역기능 가정’이란 사람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체적인 욕구와 정서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가정을 말하는데, 이것은 역기능적 결혼에 의해 만들어진다. 비정상적 부부관계는 병적인 부모 자녀 관계로 나타나는 것이다.

역기능 가정이란 원래 알코올 중독자 가정에만 적용되었던 말로써, 이제는 도박꾼, 과식 및 거식으로 나타나는 섭식 중독자, 이단이나 병적인 신앙생활에 심취하는 종교 중독자, 분노 중독자, 성 중독자, 충동구매 중독자, 일 중독자가 있는 가정에도 적용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상호 복종적인 동반자 부부관계(엡 5:21)보다는 가부장적 가족 문화에서 충효를 절대 가치로 가르치며 남존여비를 근간으로 삼았던 수직 윤리의 유교 문화, 일제 36년간의 억압, 6.25전쟁의 상흔, 그리고 고질적인 가난은 갖가지 역기능적 요인을 잉태하여 가정과 사회 전체를 역기능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역기능 가정의 특징은,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며, 감정표현이 제한되며, 명백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놓고 말할 수가 없고, 자녀들로 하여금 부정적인 역할을 하게 만들며, 자녀들의 성장을 위해서 적절한 보살핌을 제공하지 못하고 바깥 세상에 대해서 폐쇄적인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는 역기능 가정을 속사람 치유 개념을 기초로 한 여러 가지 치유 모델들을(예를 들면, 가족 치유 등) 통해서 치유함으로써, 각 가정이 창조 당시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정상적인 가정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2)성인 아이의 치유

앞에서 살펴 본 역기능 가정은 ‘성인 아이’(adult child) 낳게 된다.

성인 아이란 역 기능 가정의 산물로써 성인의 문제를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하게 다루어야 하는 ‘성인화 된 아이’(adultified child)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해소되지 않은 어린 시절의 문제(unfinished business: 미완성 과업)를 아직 처리하고 있는 18세 이상의 성인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다.

성인 아이들은 가정에서 가족들 간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지 못했으며, 어린 시절의 가정에서 위로 받거나 충족 받지 못한 결과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감정과 행동들 가운데는 많은 부분이 유년기 흔적이 남아있다. 그 결과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증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성인 아이에게 나타나는 증상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소외감’을 들 수 있다. 성인 아이는 항상 자신이 남과 다르다고 느끼며 무엇이 정상적인 행동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며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둘째, ‘자기 정죄’로써, 자신을 무자비하게 비판하고 끊임없이 인정과 칭찬을 원하며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도 충성한다.

셋째, ‘긴장감’을 들 수 있는데, 재미있는 시간을 갖는데 어려움을 느끼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추구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넷째, ‘불신’이다. 병이나 퇴직과 같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변화에 과민 반응을 보이며 아무런 대책 없이 결과를 고려하지도 않고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마지막으로, ‘지나침’을 들 수 있다. 성인 아이들은 ‘지나침’과 익숙하여서 지나치게 성취하려 하고, 지나치게 먹고, 지나치게 일하고, 지나치게 운동하며, 지나치게 소비한다. 그들은 섹스, 고통, 음식, 신앙, 권력, 돈, 소비 등 무언가에 중독이 되려한다. 성인 아이의 더 큰 문제점은 그가 성장하여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었을 때, 그는 다시 역기능 가정을 만들 수밖에 없고 그 역기능 가정을 통해 다시 성인 아이를 배출하게 됨으로써 역기능의 고리가 계속 연결된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이런 성인 아이도 속사람 치유를 통해 치유 받음으로써 성인 아이 본인이 회복됨을 물론, 회복된 그를 통해 그의 가정도 역기능의 고리를 끊고 온전히 회복되어 창조 당시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가정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3)교회 성장과 속사람 치유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마 28:19-20)을 교회에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교회 성장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며, 목회사역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인 것이다.

속사람 치유 사역은 교회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3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다.

 

a)구원받은 백성의 증가와 속사람 치유

속사람 치유는 구원받은 백성을 증가시키는 사역이라는 점에서 교회성장을 돕는다. 인간 역사의 왜곡과 영혼의 본질적 그릇됨은 죄의 결과이며, 그 주역은 사단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사단의 지배 아래 있으며, 이 사단의 권세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상을 총체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상의 상처와 이로 인해 파생되는 질병은 사단적인 특성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 M. Green은 질병과 사망은 마귀가 자기의 유혹에 응해 준 대가로 인간에게 준 사악한 선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사람은 누구든지 정신적인 문제에 연관되어 있으며 영혼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자신의 정신적인 생활을 먼저 개선하지 아니하면 육신의 개혁을 기대할 수 없으며, 영혼이 치유되지 않는 한 정신의 개혁은 일어날 수 없다.

터너(John Turner)는 육체적 질병의 50%가 감정적, 정신적, 영적, 내적 스트레스와 긴장에서 온다고 하였고, 맥너트(Mcnutt)도 우리의 육체와 정신, 영적 건강 사이에는 깊은 상호 관련성이 있으며 어떤 질병은 근심과 고뇌의 뿌리가 기도를 통해 제거될 때 깨끗이 사라진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인간 이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몸과 마음과 영으로 구성되는 분리할 수 없는 전인(살 5:23, 히 4:12)으로서 영과 육과 마음이 서로 연관성을 가진 뿌리인 상한 마음에 대한 속사람 치유는 왜곡된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런 상태보다 더욱 나아지는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치유 대상을 단순히 육체적 질병으로만 국한시켜서는 안 되며 왜곡된 내면의 세계와 영혼 전체를 포함하는 전인적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 성장이 내적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날마다 더하게 하는 것이라면 온전케 되는 전인적인 인간을 날마다 더하게 하는 속사람 치유 사역이야말로 교회 성장을 위한 사역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속사람 치유는 치유 자체에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자아, 온전한 영혼을 지향하는 전인적인 구원을 그 목표로 삼고 있으며, 이 사역을 통한 치유가 계속될 때 날마다 구원받은 백성을 더하게 할 것이므로, 교회 성장을 돕는 사역인 것이다.

 

b)복음 증거의 주역들의 역동성 강화와 속사람 치유

이는 복음을 증거하는 주역들의 역동성을 강화시켜 주므로, 이것은 교회 성장에 도움을 준다.

건강한 사람만이 일을 할 수 있다. 마음이 유약한 사람, 열등감에 시달리고 낮은 자존감으로 방황하는 사람은 복음의 자신 있는 전파자는 될 수가 없다. 또 이런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가 부흥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실제로 부흥하는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 복음의 뜨거운 열정과 복음에 관한 한 높은 자존감이 가득찬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복음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는 신학적인 훈련의 미숙에도 그 원인이 있지만 전도자의 인성에도 적지 않은 요인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소극적인 자신감의 결여는 많은 요인이 과거에 입은 내면의 상처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데이빗 A. 씨맨즈 박사는 그의 책 『상한 감정의 치유』에서 낮은 자존감은 자신의 잠재력을 마비시킨다고 말했다.

이것은 복음전파를 위해 역동성을 강화시킴에 있어서 속사람 치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충분히 보여 주는 것이다.

과거에 받은 내면의 상처들, 죄책감과 열등감에서 해방되지 못한 마음은 결코 교회 성장을 위한 사역자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위대한 전도자, 선지자, 그 외의 많은 복음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부름에 앞서 죄책감과 열등감에서 자유 함을 받는 경험이 바로 이 점을 증명해 주고 있다. 교회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에 앞서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 부분은 상한 심령의 치유라고 생각한다. 즉 상한 심령의 치유야말로 교회 성장의 역동성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속사람 치유는 교회 성장의 주역들의 역동성을 강화시켜 줌으로써 교회 성장에 도움을 준다.

 

c)사역자 양성 훈련과 속사람 치유

속사람 치유 사역은 진정한 사역자를 양성하는 훈련이라는 점에서 또한 교회 성장을 돕는다.

우리는 앞에서 치유 사역이 구원 받은 백성을 증가시켜 교회를 성장케 하는 역동성을 강화시켜 주는 사역임을 역설하였다.

그렇다면 이 사역을 수행하는 요원을 양성한다는 것은 보다 더 근본적인 목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목적 중의 하나는 혼자 건강하여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가는 군사와 병기가 되는데 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치유를 받게 되면 반드시 사역에 관심을 갖고 헌신하게 된다. 그래서 이는 어떤 측면에서는 헌신자들을 위한 사역 프로그램일 수도 있다. 이를 위해 더 깊은 치유의 경험이 필요하고 또 치유의 강도가 깊어질수록 사역에 대한 헌신도가 높아지게 된다. 다시 말해 이는 스스로 치유를 경험한 사람이 또 다른 치유 사역자를 배출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 치유 능력의 최대 승리로 간주한다. 즉, 상처 입은 자신의 상태를 치유의 원천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을 변화시켜 치유 받은 사역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데이빗 A. 씨맨즈 박사는 이 과정을 가리켜 ‘재생하는 은혜’(recycling grace)라 하였다. 건강한 속사람 치유 사역자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이해하고 용납하는 온유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이 치유를 경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장 위대한 치유자인 것은 이 모든 것을 경험하신 온유한 치유자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상처와 아픔과 연약함으로 손상된 속사람을 재생시켜 그 경험을 사용하여 또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치유 사역자로 재생산하여 나가는 과정이 속사람 치유 사역의 종착점이다. 그러므로 유능하고 훌륭한 치유 사역자를 많이 배출하는 교회는 더 빨리 성장하는 교회로써 부흥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속사람 치유는 구원받은 백성을 증가시켜 주고, 복음을 증거하는 주역들의 역동성을 강화시켜 주며, 그리고 진정한 사역자를 양성하는 훈련이라는 점에서 교회 성장에 큰 유익과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렇게 한 개인이 속사람 치유를 통해 상한 마음이 치유되고 영적 성숙을 가져올 때, 그가 속한 가정도 치유와 회복을 가져오게 되며, 이것은 결국 그 가정이 소속된 교회의 건강과 성장을 가져오게 되어 교회의 사명을 다하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속사람 치유 사역이 목회에 꼭 필요한 이유가 있다.

 

4)결 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 병든 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 인간관계, 정치, 사회, 교육, 그리고 자연 생태계의 측면에서 볼 때 건강한 삶을 누리기가 불가능하다.

급진전하는 산업사회를 인간의 정신은 따라갈 수가 없는데, 서양에서는 800년 동안에 일어난 변화가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30년 동안에 일어났다. 게다가 최근에는 최첨단 과학의 발달, 물질주의 가치관의 팽배, 사회 경쟁의 심화 등으로 인해 인간은 더욱 소외되고 정신이 황폐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각종 마음의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또한 가정은 가정대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가정 폭력, 이혼율의 급상승 등으로 인한 역기능 가정의 증가로 가정은 이제 상처 난 문제아들을 생산하는 공장처럼 되어 버렸다.

사회와 가정에서 양산된 상처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는데,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이들의 상한 마음을 싸매고 치유해야 함에도, 교회는 치유 기능을 상실한 듯하다. 오히려 교인들 상호간에 혹은 교인과 목회자간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있으며, 많은 교회들이 이로 인해 중병을 앓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 교회가 물량적인 부흥과 외형적인 양적 성장에만 치중한 나머지, 예수님의 3대사역(가르침, 설교, 치유) 중의 하나이기도 한 치유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21세기에 들어선 한국 교회가 새로운 목회적 접근 방법, 특히 속사람 치유 사역을 목회 현장에 도입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상처 난 사람들을 치유하여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들을 회복시킴으로써 영적 성숙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성인 아이를 양산하는 역기능 가정을 회복시킬 수 있으며, 이것은 결국 교회의 성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속사람 치유야 말로 21세기에 들어선 한국 교회가 목회 현장에 도입해야 할 가장 필요한 사역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제5장 쓴 뿌리

 

에베소서 3장 16-19에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뿌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계획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는 것입니다. 뿌리는 기반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면 놀라운 기반이 채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씨앗처럼 우리 안에 박힙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심겨지면 그것이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삶이 사랑 안에 뿌리가 박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어떤 사람은 그 뿌리가 우리 안에 자라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다른 뿌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뿌리들이 우리의 행복하지 못한 가정으로부터 왔습니다. 거절의 뿌리, 쓴 뿌리, 그런 뿌리들이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우리 안에 심겨졌을 때 옛날 뿌리와 새로운 뿌리들이 마치 전쟁이 있는 것처럼 뿌리들이 자라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체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까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18,1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알 수 있습니다.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아는 것, 이것은 정말 우리의 삶을 깊이 있게 변화시키는 그러한 경험입니다.

 

로마서 5장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다고 했지, 우리 정신에 부은바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말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신으로는 생각합니다. 마음으로는 느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바 된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은 “예, 저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느낄 수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알겠는데 그런데 제 가슴으로는 느낄 수는 없습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4절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의 이시요, 우리의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서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을 이번에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아주 독특하게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 26,27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하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어떠한 동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얼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돌아보십시오. 다 얼굴이 틀리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다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습니까?

하나님은 삼위일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세분이 다 하나님이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 영과 혼과 육이 하나가 되게 만드셨습니다. 어떤 동물도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으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영은 우리의 한 부분인데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영이 우리가 영원토록 영생하는 그 영과 동일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에게 혼이 있습니다.

혼은 우리의 정신과 감정과 의지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혼적인 부분에서도 회복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혼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에게 몸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몸에 거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죄악 된 속성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이고 그것은 묶여버린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길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죄는 용서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악을 이기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이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역시 이런 세 가지가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시고 우리도 그렇게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일시적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완전한 몸을 갖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몸입니다. 끝이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나이에 대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아주 완전해 질 것입니다. 흠도 없고, 우는 것도 없고, 죄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천국에서 완전하게 영원히 가질 몸입니다.

 

예수께서 처음으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이 땅에서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목적과 계획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셨습니다.

이사야 61장이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이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내가 여기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61장 1-3에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죄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의의 나무가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나무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열매가 많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좋은 나무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려고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말씀하신 것이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여기서 어떤 우선권과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를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소식은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받은 것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없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너무 먼 것같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죄책감이 있으면 하나님과의 어떤 관계를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사람의 소리만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가 씻김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간은 결코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시간은 결코 우리의 문제를 다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치유하십니다. 용서함을 받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 죄악을 다 소멸시키시고 씻어버리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용서한 다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것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위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의 전 인격, 영과 혼과 육의 모두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처음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마지막 부분은 어떤 것입니까? 이사야 53장 3-7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 다 끝냈다. 모든 것이 다 처리되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 일들을 다 해결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의 죄의 대가를 십자가에서 대신 치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의 대가를 우리가 치룰 필요가 없고 우리의 죄는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아주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여기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예수님께서 고통, 고난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감정적인 고통, 영적인 고통,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아주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고 우리의 고통이 우리의 아픔의 짐이 더 가벼워졌고, 그것이 없어질 수 있고, 우리가 주님 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채찍을 맞으신 것이 그냥 몸에 맞은 것, 그것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으로 인해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몸과 영과 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 인격이 나음을 입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굉장히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격이 치유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 각자는 각기 제 길로 가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계획대로 세우고 우리의 삶을 멋대로 조정해 가면서 주님이 십자가에 가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주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계획이 우리에게 최고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획하신 길이 최선의 길(Best way)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갈 때 거기에만 온전한 성취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뜻 가운데 살아가지 않으면 진정한 충만함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길로 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뿌리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자랄 수 있는 흙이 필요합니다. 흙이 없으면 뿌리는 자랄 수 없습니다. 또 흙에 심겨질 씨가 필요합니다.

 

잠언 18장 14절에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누가 일으키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심령이 상한 것, 그것이 바로 나쁜 뿌리들이 자랄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흙입니다.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긴다고 말씀합니다.

육체적으로 약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몸에 병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그 병으로 고통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주 사랑하고, 육체적으로는 아주 좋지 않았지만 그렇지만 그 분은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심령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상한 심령을 갖게 되면 누가 그것을 일으키겠느냐? 심령이 상하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하기 원하시는 멋있는 좋은 일들을 보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한 심령을 갖게 되면 우리 삶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자라기가 힘이 듭니다. 변하기가 힘이 듭니다. 성경 말씀에 우리는 변화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우리는 자라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상적인 단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상한 심령을 갖게 되면 굉장히 힘들게 됩니다. 영광에서 영광이 아니고, 문제에서 문제로, 위기에서 위기로, 낙망에서 낙망으로, 실망에서 실망으로,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상한 심령을 갖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결과입니다. 우리의 삶에 희망이 없어져 버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지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우리가 모임에 오지만 언제나 마음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료하기 원하십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1. 혼적인 질병의 기원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후로 인간의 영이 죄로 인하여 죽고, 영의 지배를 받는 혼도 질서를 잃고 질병에 걸리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죄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는 대신에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회피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뿐만 아니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스스로 수치를 극복하려는 자력종교인의 모습도 띠게 된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부모의 죄로 인한 영향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기뻐하시자, 질투심으로 가인은 하나님께 반발하였고, 나아가서 자신의 혈육인 동생 아벨을 들판으로 불러내어 돌로 쳐서 죽이고 말았고, 그 죄를 책망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는 대신에 뻔뻔스럽게 하나님께 대들었다. 아담과 하와의 마음속에 죄책을 회피하는 쓴 뿌리, 가인의 마음속에 동생에 대한 미움의 쓴 뿌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2. 혼적인 기능의 마비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자, 아담은 아내인 하와와의 관계에, 가인은 동생인 아벨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죄책감과 두려움에 시달리게 되었고, 시기심과 질투심, 미움, 불안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건강하지 못한 혼의 기능으로 인하여 인간은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처를 지니고 살게 되었고, 잠언 17:22절에서 “심령의 근심을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에 말씀하신 것처럼, 육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대신,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계획을 좇아 살게 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신본주의 대신 인본주의가 지배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마귀의 뜻이나 생각을 좇아 살아가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바벨탑 사건은 인본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게 된 것이다. 인본주의와 사탄주의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성경적인 믿음, 영적인 믿음이 사라지고, 나아가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본주의적 믿음, 이신론, 무신론, 다신론, 범신론, 우상숭배, 사탄숭배 등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3. 혼적인 질병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용어

학자들에 따라서 상한 감정의 치유, 내적치유, 기억의 치유, 인격 장애의 치유, 상한 마음의 치유, 혼의 치유, 쓴뿌리 치유 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4. 혼적인 질병과 창조질서의 파괴

하나님이 세우신 원래의 질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영-혼-육-환경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영이 죽은 상태에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됨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여 혼이 육을 지배하고 환경을 지배하거나 오히려 환경과 육의 지배를 받는 상황도 생기게 되며, 나아가서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음속의 우상이나 현실속의 우상들을 만들어내고, 우상들을 숭배하고 심지어 사탄을 숭배하게 되는 것이다.

 

5. 혼적인 질병인 쓴 뿌리

쓴 뿌리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나타난다. 신명기 29:18절에서는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자,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서 동산을 망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패역하게 되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따르게 되는 모습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12:15-17절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게 될 때 마음의 상처와 좋지 못한 기억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사람들의 삶속에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이렇게 해서 쓴 뿌리로 인하여 스스로 신앙의 길에서 떨어져 나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되고, 에서와 같이 세속적이고 순간적인 이익에 눈이 멀어 하늘에서 내리는 축복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변절하여 세상과 간음하는 자와 같이 된다는 것이다.

 

6. 타락한 세상과 삶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쓴 뿌리들

사람은 태아기에 모태에 있을 때부터 모태의 영혼육의 상태나 모태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가정의 상황이나 사건이나 언어전달 등에 의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자라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도 태교가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적치유를 할 때 태아가 태중에 있는 상태를 기간별로 점검하고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 존 샌포드와 폴라 샌포드와 같은 내적치유와 축사사역의 전문가들 역시 이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고 있고, 의학적으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성장과정에서도 유아기와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치면서 받게 된 상처를 통하여 내적인 쓴 뿌리가 형성이 되고 그것이 삶속에서 온갖 악하고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체벌의 경험이나 부모나 배우자나 가족이나 친척이나 애인이나 친구나 심지어 애완동물의 죽음에도 상처를 받게 된다. 교통사고나 천재지변이나 성폭행을 비롯한 폭력의 문제, 도박이나 술, 담배, 마약, 따돌림과 같은 일들을 통해서도 거절감정이나 소외, 고독, 중독현상 등의 쓴 뿌리가 생겨나서 삶을 고통스럽게 하며, 정서적으로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문제가 생각게 함으로 단계별로 점검하는 가운데 내적인 상처와 쓴 뿌리를 치료받아야 하는 것이다.

쓴 뿌리로 인하여 가정적으로 부모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비정상적인 가정, 즉 역기능가정에서 자람으로 인하여 내적인 상처와 쓴 뿌리가 배태되거나, 어린시절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육체는 성장하였으나 정서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는 성인아이현상이 나타나, 자신뿐만 아니라 직장이나 모임이나 교회와 같은 공동체 생활을 할 때 장애나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 당한 성폭행, 성희롱, 강간, 근친상간, 동성애, 애완동물 등의 문제로 인하여 이성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든지, 결혼 이후에 부모로서의 정상적인 역할이나 배우자로서의 정상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생기기고 한다.

또한 강도나 도둑맞음, 직장해고, 부도, 전쟁, 국가의 변란, 교통사고, 안전사고, 강제 이혼, 이사, 이민, 천재지변과 같은 일들을 통하여 스트레스나 상처를 입게 됨으로 해서 쓴 뿌리가 생겨나 삶의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7. 쓴뿌리의 치유방법

Michael Scanlan은 우리의 기억을 표면기억(Surface memories-의식속으로 불러낼 수 있는 기억)과 뿌리기억(root memories-무의식속에 깊이 파묻혀 있는 기억)로 구분하여 치료가 전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한복음 14:26)라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성령님께 태아 때부터 유아기, 유년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삶의 과정 속에서 알게 모르게 혼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쓴 뿌리와 상처들을 생각나게 해 달라고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단계별로 생각나게 하시거나 가르쳐주시거나 떠오르게 하신 상처와 쓴 뿌리나 좋지 못한 기억에 대해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 상처를 준 사건과 상처를 준 현장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상처에 대해서 토설하는 일을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주어 미움과 쓴 뿌리를 나게 한 이들을 무한히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용서하고 축복하며, 자신에게 있는 모든 쓴 뿌리와 잘못된 기억과 상처들을 예수님의 보혈을 적용하여 깨끗이 씻어내고,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상처와 쓴 뿌리를 끊어내고, 성령의 불로 태워달라고 요청하며, 성령의 기름을 발라 그 상처를 온전히 치유 받도록 한다.

 

 

 

 

 

 

 

 

 

 

 

 

 

 

 

 

제6장 관계

하나님은 참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 승리함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과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히브리서 12:14,15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했습니다.

14절은 기본적으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를 생각해 봅니다. 십자가는 수직으로 되어있고, 수평으로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하나의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많은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가장 강력한 능력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중에 한 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수직으로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길이 되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십자가는 역시 수평으로 되어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또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화해할 수 있습니다. 치유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런 종류의 좋은 관계를 할 수 없다면 15절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14절에 말하기를 우리는 정말 조심해야 되고 관계에 있어서 반드시 이대로 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너희는 이러 이러함과 두려워하면서 돌아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프게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은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쓴 뿌리가 나서 우리 삶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쓴 뿌리와 거절감의 뿌리는 서로 같이 연결되어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쌍둥이 같이, 여기에 그런 뿌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도 만약에 우리가 제대로 된 올바른 관계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잘못된 관계 속에 들어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것도 할 수 있고, 삶에서 충실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15절을 중심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 마음 안에 뿌리가 있다면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 속에 이것은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멋있는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아주 꼭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왔을 때는 너무너무 아름다워 깜짝 놀랐습니다. 굉장히 좋은 그림입니다. 여기 나무 그림이 있습니다. 나무뿌리가 있죠?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뿌리는 볼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뿌리는 땅속에 있습니다. 비가 오고, 태양 빛이 빛치고, 뿌리는 땅속에 있는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계속해서 자라게 됩니다. 역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뿌리가 있으면 거절감의 뿌리, 쓴 뿌리, 어떤 뿌리이든지간에 뿌리들은 영양분을 먹고 자라게 됩니다. 어떤 영양분을 먹게 되죠? 그 뿌리는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먹고 자랍니다. 그것이 바로 뿌리들이 자라는 방법입니다.

 

뿌리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자랍니다.

첫 번째 뿌리는 땅속으로 자라서 더 많은 영양분을 빨아들이려고 밑으로 자랍니다. 땅위 표면으로 자라는 뿌리가 있습니다. 땅 속에 있는 세균들이나 벌레들을 보면서 자랍니다.

만약 우리 안에 뿌리가 있으면 그것이 바로 뿌리가 자라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밑으로, 밑으로 깊게 깊은 곳까지 자랍니다. 어쩌면 마음 가운데 둥그렇게 꽈배기를 틀듯이 자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꽉 눌러 짭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줍니다. 우리를 마음을 점점 단단하고 굳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의 쓴 뿌리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아픔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밖으로 자라는 뿌리가 있습니다. 15절에 말씀하시기를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곤란을 준다는 것입니다. 위로 올라와서 첫 번째 문제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 관계에 문제를 줍니다. 만약 우리 안에 올라오는 뿌리가 있다면 정말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하기가 너무나 힘이 듭니다. 모든 사람이 기도하면 우리도 똑같이 함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사생활 가운데서는 이런 뿌리가 안에 있으면 기도하려고 하는데 안 됩니다. 어쩌면 생각만 할지 모릅니다. 어떤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경읽기입니다. 모임에 오면 쉽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어디에 펴야 할지 압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으려고 하면 이런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덮어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아무런 말씀도 못 듣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과 대화가 단절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내 안에 역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뿌리들이 자기 속사람에서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영역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져 가는 것입니다. 아주 나의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도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그렇게 됩니다. 너무 쉽게 관계가 깨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 가운데서 그런 쓴 뿌리들이 다 제거되기를 원하십니다. 정말로 많은 뿌리들이 우리 관계들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만약 그 뿌리들을 땅속에 놔두면 언젠가는 이 뿌리가 위로 올라와서 자라서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가운데 뿌리가 있다면 어느 날인가 그 뿌리가 우리 삶 밖으로 나올 것입니다.

뿌리가 나오는 통로들 - 부정적인 말들, 비판하는 말들, 수군수군 대고 남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들, 바로 이것들이 뿌리가 나오는 통로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들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손상을 줍니다.

만약 한 사람에게 쓴 뿌리가 있어서 그것이 입을 통해서 네 사람에게 나간다면 네 사람 다 밑으로 침체시켜 버립니다. 한 사람은 거절감에서 나온 뿌리로 말하고 다른 사람들을 죄의 그물에 걸리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입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뿌리를 제거할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땅 속에서 뿌리를 뽑기를 원한다면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한 가지 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뿌리를 뽑기를 원하면서 위의 것들의 가지를 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위를 잘라서 나무를 손상 입히게 됩니다. 정말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뿌리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다시 자랍니다. 그렇게 위를 아무리 치는 것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일입니다.

첫 번째는 힘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온유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뿌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조심스럽게 그 나무를 뽑아 올릴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뿌리가 있는 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가 잘 빠져나올 수 있도록 흙을 파헤칩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어떤 뿌리가 잘라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뿌리가 부러지게 만든다면 그 속에 남아서 또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먼저 그 뿌리를 흔들고 흙을 파헤쳐서 뿌리가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뿌리를 느슨하게 한 다음 모든 뿌리를 위로 끌어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흙 들은 흔들어서 밑으로 떨어지게 하고, 뿌리는 다른 곳에 버립니다. 다시는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 있는 뿌리도 똑같이 합니다. 만약 우리 안에 뿌리가 있으면, 성령은 능력 있고 강하지만 또한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뿌리가 있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시도록 초대합니다. 그 어린 아이가 있을 것 같은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 성령님을 초대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그 어린 아이를 끄집어 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 어린 아이는 나가버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부터 그 뿌리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많은 종류의 뿌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것들은 이것이 무슨 뿌리인지조차 모르는 것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뿌리를 제거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 10:12에 보면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자 여기에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묵은 땅을 기경하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땅을 공개해서 그 땅을 기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그 땅을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공개해야 합니다. 농부가 가까이에 있는 땅을 발견하면 먼저 농부가 땅을 파헤칩니다. 아주 보기에 좋습니다. 그런데 산 밑에 있는 땅은 한 번도 갈아 본적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좋은 것만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뭔가를 할 수 있고, 보기 좋게 꾸밀 수도 있고, 사람들이 그런 것만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묵은 땅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공개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묵은 땅 거기에 뿌리가 심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묵은 땅, 숨겨져 있는 땅을 하나님 앞에 공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로써 열어놓고, 그래서 그 뿌리들을 다 공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 묵은 땅 속으로 들어가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뿌리들을 다 제거해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첫 번째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보통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정말 안에서 무엇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눈에서 눈물이 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은 가끔가다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정말 그것이 뿌리가 나오면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삶 가운데 아픔이 많기 때문입니다. 너무 너무 아프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고통에 대해서 표현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있는 아픔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아마도 기도할 때 그런 아픔을 느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아픔을 느끼시면 스스로 그 아픔을 삼키고 자꾸 밑으로 누르려고 하지 마세요. ‘나는 괜찮아’하면서 삼키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그것을 꺼내도록 허락하십니다. 성령께서 그것을 전부다 뽑아가 버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들은 영원토록 가버릴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몇 번밖에 못 보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사람은 무엇인가가 입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이 쓴 뿌리이든, 거절감이든지, 교만이든지, 어린아이가 안에 있는 것이든지, 모든 것이 다 나오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먼저 기도하여야 합니다. 보통 손을 가슴에 얹고 기도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만약 여러분 안에 뿌리가 없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 기도해 주십시오. 만약 뿌리가 있다면 기도하시면서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성령님께서 그 뿌리들이 아주 쉽게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바로 우리 삶 안에서 뽑혀 나올 수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뿌리가 나온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굉장히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함을 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래서 믿기는 이 뿌리가 쉽게 나오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아픔을 느끼시면 두려워하지 마시고, 그 아픔이 나오도록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우리가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쏟아 부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계십시오. 이것은 너무 깊은 치유입니다. 뿌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삶을 치유해 주고 계십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뿌리가 나왔다는 것을 느낀다면 이제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감사하기 시작하십시오. 만약 여러분 중에 지금도 뿌리가 계속 나오고 있다고 느끼시는 분은 계속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치유하시고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정말 어떤 갈등과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너무 너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통과 아픔들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쓴 뿌리들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거절감 같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계속해서 상처받아왔던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쓴 뿌리들이 우리 삶 가운데 떠나간 후에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겠습니까?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성경말씀은 무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2:1-5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 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 말씀을 하시는가를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만약에 첫째, 둘째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순서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여기서 아주 분명히 첫째, 둘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통 2절 말씀은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 보면 2절은 1절 말씀 다음에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1절 말씀에 이야기하기를 모든 나쁜 태도를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이런 나쁜 열매를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을지라도 자랄 수가 없습니다. 먼저는 나쁜 열매가 사라져버려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여러분 안에 많이 갖고 있는 것, 그것은 정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 대해 많이 배우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많은 성경지식이 결코 우리를 성숙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들이 삶은 성숙하지 못합니다. 굉장히 안 좋은 일을 하고 쉽게 화를 내고 사람들과 죄악 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많은 성경지식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반응할 때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게 할 때 그렇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회복시키고 그렇게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를 성숙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항상 1절이 2절 앞에 옵니다. 그 다음 3절에 주의 인자하심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주의 깊게 봅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세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에게 버림받은 바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보배로운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너희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버림받았죠?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보배로운 분이십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버림받았죠? 거절한 사람들은 우리가 거절감을 받은 것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절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보배롭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사람에게 의해 버림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듯이 여러분도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롭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보배로운 것을 믿으세요? 아마도 평생 동안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보배로운 분이라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여러분은 보배롭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하기가 힘든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정말로 보배롭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보배롭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를 보겠습니다. 2장 10절에 “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로 영어 번역으로는 한국말로, 중국말로 다른 많은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는데 좀 잘못 번역되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어에 보면 이것이 진짜 의미입니다.

‘Poiema'(포이에마) 이것이 어원이 되어 영어에서 poem 시(詩)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시'(詩)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이 이 의미를 제대로 번역할 수 없었습니다. 헬라 원어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詩)입니다.

여러분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시'(詩)입니다. 아주 여러분만의 독특한 ‘시'(詩)입니다. 아주 특별한 ‘시'(詩)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시를 써 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행복할 때 시를 쓰실 것입니다. 시는 여러분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여러분의 안에 있는 것들을 자기 자신이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시'(詩)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시를 통해서 표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를 통해 표현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시'(詩)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Poiema'라는 것 중에는 창조된, 걸 작품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갤러리에 한 번 가보십시오. 비싼 미술품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걸 작품이고 그것이 포이에마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창조하신 걸 작품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걸 작품이다."

처음부터 이야기한 것을 다시 말해 봅시다. “나는 하나님께 선택받았다." “나는 하나님께 보배로운 자다" “나는 하나님의 시이다." “나는 하나님의 걸 작품이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여러분은 보배롭고 하나님의 시이고 하나님의 걸 작품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다른 말을 많이 듣죠? 우리는 부정적이고 비난하는 말을 들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친절이 결핍된 말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이것이 진리입니다.

만약 우리가 승리 가운데 살기를 원하신다면 첫 번째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믿으세요. 한 가지 더, 제발 여러분에게 가까운 특별한 친구에게로 가지 마십시오. 친구에게 가서 이야기 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말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로 가서 그분들을 축복해 주십시오.

 

 

 

 

 

 

 

 

 

 

 

 

 

 

 

 

 

 

 

제7장 쓴 뿌리와 거절감으로부터 승리하는 삶의 방법 (용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가 받을 것이다”라는 말이 성경에 나와 있는데 그것이 단지 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해 다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나누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주십니다. 에베소서 1:7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중의 하나가 ‘용서함’이었습니다. 모든 분들이 알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하나의 기반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용서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어떤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용서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남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 4:30,32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서로 용서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4:13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했습니다. 피차 서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뿌리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굉장히 큰 열쇠가 됩니다.

여러분에게 용서에 대해 잘못된 개념 두 가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에 따라 해야 된다는 개념입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용서는 사실 그것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다릅니다. 얼굴도 다르고 성격도 다릅니다. 여러분 중에 상처를 입거나 누가 나를 대적하거나 하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더 깊은 상처를 냅니다. 그리고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나서 다시 기도하고 자유롭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마치 영웅 같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냥 삼켜버립니다. ‘나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어, 나는 괜찮아, 문제없어’ 그리고 속으로 다 삼켜버리고 ‘나는 영웅이다’라고 느낍니다. 이 사람들은 문제를 이렇게 다루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나는 용서할 필요가 없어’라고 말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적절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것은 그냥 속으로 삼켜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만약 내가 그런 영웅같이 느낀다면 몇 년 후에는 그 문제들이 다시 더 발전이 될 것입니다. 삼켜버린 문제들이 이 속에서 쌓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안에 있는 것이 점점 차 올라오기 시작해서 아주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굉장히 성질이 급해지고, 그 사람의 첫 번째 문제로써 야기됩니다. 두 번째 문제는 그 마음 안에 있는 감정적인 문제들이 육체에 영향을 주기 시작합니다. 소화기관, 근육, 뼈 같은 곳에도 병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리 감정이 우리 육체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생각하기를 육체의 질병이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준다고 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만약 우리가 영웅이라면 우리 삶 가운데 직면할 수 있는 위험스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굉장히 쉽게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안에 소화기관에 문제가 있거나 근육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 감정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감정의 정도가 다릅니다. 용서는 그 일어난 일에 바탕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 나는 용서해야 되겠다.’ 그 다음 잘못된 개념은, 어떤 사람은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용서할 수 없다 이것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다른 것입니다. 만약 내가 말하기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묶어버리는 맹세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맹세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이 맹세를 깨뜨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하기를 거절한다면 ‘아니 나는 절대로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어’ 이렇게 된다면 그것은 굉장히 심각해집니다. 그것은 우리 감정을 감옥 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용서를 아주 많이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에게 아주 조금 빚진 사람을 찾아가서 그 사람이 목덜미를 잡았습니다. 28절에 보면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동관이 엎드려서 간구하고 간구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동관이 빚진 돈은 갚기 쉬운 금액이었습니다. 30절에 보면 그 사람이 말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고 라고 했는데 영어 성경에 보면 용서하기를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번역에 보면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33절-35절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감옥으로 가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짜 의미는 우리가 감정적으로 묶인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가 평강을 잃어버리고 기쁨을 잃어버리고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맹세를 하셨다면, ‘나는 용서할 수 없어’라고 하는 감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나는 그것 때문에 너무 상처받고 너무 아파서 정말 용서할 수 없어’라고 느낍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감정을 이해하십니다. 여러분이 ‘나는 용서할 수 없어’라고 할 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용서하고 싶은 우리 감정이 나는 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만약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영혼을 주시고, 영혼은 지  정  의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의 의지가 우리의 감정보다 더 강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만약 감정이 의지보다 더 강하다면 우리는 벌써 병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을 때는 의지가 감정보다 더 강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실입니다.

우리의 감정이 우리 속 안에 있는 느낌이 ‘나는 용서할 수 없어’라고 이야기할지라도 우리는 주님 앞에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에베소서에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함을 벌써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함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그 진실이 있습니다. 바로 그 용서함으로 우리는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감정은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나는 용서하겠다.’ 그렇게 결정하면, 그리고 그 결정한 대로 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감정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용서는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용서할 때 첫 번째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통해 이 일들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하면 먼저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맹세한 것이 있다면 그것부터 하나님 앞에 깨뜨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구하기를 “주님, 그 모든 맹세를 다 깨끗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그런 잘못된 맹세를 할 때 우리 안에 있는 판단과 쓴 뿌리로부터 그런 맹세가 나옵니다.

두 번째,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누구를 용서하는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간에, 그 사람이 살았든 죽었든지 간에, 그 사람이 한 사람이든지, 그 사람이 남자이든, 그것이 다른 나라 종족이든지, 그것이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 앞에 누구를 용서한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 아버지에게 우리가 왜 그들을 용서하는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내가 이 사람을 용서하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한 것에 대해 용서합니다.’라고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셔야 합니다.

네 번째, 그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서 이 사람을 향해서 혹시 나쁜 태도나 잘못된 태도를 취한 것이 있다면 그런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꼭 기도해야 합니다.

1. 맹세를 깨트리라.

2. 누구를 용서하는지 말하라.

3. 왜 용서해야 하는지 말하라.

4. ‘나를 용서하십시오.’라고 기도하라.

이것이 바로 용서함에 대해 기도할 때 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18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15절에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형제들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형제들에게 이야기했다는 의미는 바로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가까운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함께 자라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보통 우리들과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관계가 깨어졌다면 우리는 화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놀라운 능력이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화해할 수 있습니까?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서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황을 나쁘게 할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그 사람에게 가서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에게 대해 미운 감정이 있었던 것에 대해 사과할게요!”라고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올 것을 기다리지 마세요.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가세요. 여러분이 먼저 그 사람에게 가세요. 남편과 아내이든지, 형제와 자매이든지, 기독교 공동체 안이든지,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있든지 화해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용서에 대해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21,22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진짜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했으니까 됐어 끝났어!” 이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용서했는데 다시 생각하면 물론 생각이 기억이 납니다. 영어 속담에 “용서하고 잊어버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잊어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가다가 생각이 납니다. 어떻게 우리가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절대로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잊어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습니까? 가끔씩 그 기억들이 살아납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다시 보면, 만약 그 사람과 같이 사는 상황이라면, 아니면 꿈을 꾼다면, 정말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끔가다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 사실 자체가 우리가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용서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이 나면 다시 용서하십시오. “나는 용서했는데 지금도 용서하고 미래에도 계속 용서할 것이다.” 이게 바로 진짜 용서입니다.

절대로 성경에서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인데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용서는 그런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를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만약 여러분 안에 분명히 용서해야 될 사람이 있는데 기억이 안 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보여주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있을 때 용서함도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제8장 내적 치유와 용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해코지 한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내 힘으로 보복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실제로는 나를 고문하고 학대하는 것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어떤 의사는,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들 중에서 용서만 제대로 한다면 약 50% 정도는 금방이라도 퇴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해코지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보다 실제로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용서의 최대의 수혜자는 용서하는 사람 자신이다. 남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가슴에 대못을 박는 사람이다.

1. 용서와 회개가 내적 치유의 양대 축이다

용서는 회개와 함께 내적 치유의 양대 축이다. 용서 없이는 회개가 있을 수 없고 용서와 회개가 없는 내적 치유는 불가능하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

비록 신자이지만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죄를 지었으면 회개를 해야 한다. 회개란 쉽게 말하면,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은 죄는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나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가 회개할 때 그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는 조건으로 용서해 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옥가야 마땅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우리는 당연히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2. 무자비한 종의 비유

우리의 죄 용서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와 그런 큰 은혜를 입고도 자기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이 처분하시는가에 대해서는 마태복음18장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 18:21-35)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죄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옥졸들에게 붙여져서 고통을 받는다(마 18:34-35).

“옥졸들에게 붙이셨다”는 말은 옥졸들의 처분에 맡겼다는 말이다. 인권이 최고로 발달한 미국이나 한국의 교도소에서도 때로 간수들은 죄수를 무자비하게 다룬다. 하물며 인권 사상이 거의 전무한 당시의 옥졸들이 무자비한 종을 어떻게 가혹하게 다루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핵심적인 의미는 무엇이냐? 그렇게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도 자기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크나 큰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다.

일만 달란트, 6,000만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나 되는 엄청난 빚을 공짜로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윽박지르며 용서하지 않는 이 종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고슴도치같이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죄인이다. 알게 찌르고 모르게 찌른다. 문제는 내가 남을 찌른 것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남이 나를 찌른 것은 쉽게 잊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앙심을 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복한다.

많은 사람들은 누가 나를 괴롭히고 해코지를 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방을 미워하면 할수록 내 자신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증오심이 지나치면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뛴다. 오래 되면 화병이 나서 몸져눕는다. 신체적인 병의 70%는 마음에서 오는 병이며 분노에서 오는 병들이 대부분이다. 어느 사람은 ‘세월이 약이다. 잊어버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간단한 것은 쉽게 잊어버릴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심령 깊숙이 박혀 있는 증오심은 세월이 간다고 잊혀 지지 않는다.

잊혀 진 것 같지만 깊숙이 박혀 있다가 짜증나는 일이나 언짢은 일이 생기면 온갖 형태의 추한 몰골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상대방의 사소한 잘못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극도의 자기보호 본능 때문에 정상적인 부부 관계나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다. 이것들이 바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한 무자비한 종이 옥졸들에게 붙여져서 당하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힘입은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를 해코지한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지은 죗값은 아무리 크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100 데나리온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수님을 대신 희생시키신 값은 6,000만 데나리온이다.

여러분은 어떤 죄 값을 갚겠는가? 100데나리온인가, 6,000만 데나리온인가? 성경은 원수를 용서하고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축복까지 해 주라고 말한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8).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병은 이 세상의 어떤 약(藥)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 미워할수록 내 가슴에 굵은 대 못을 망치로 쾅, 쾅 박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것을 치유하는 약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는 일이다.

나를 저주하고 나의 신세를 망친 사람을 축복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 심령 깊숙이 박혀 있는 증오의 가시를 뽑아내는 유일한 약이다. 나의 원수를 축복할 때 나를 괴롭히던 증오의 가시가 뽑히고 내 심령에 평강과 안식이 임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3. 용서하지 않았을 때 받는 불이익들

형제를 제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불이익이 있을까? 그 반대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마 6:14-15; 막 11:25; 롬 12:19-21; 요 20:23).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내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있으면 그 화살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날아간다.

➭영, 혼, 육의 고통을 당한다(롬 2:9-10; 8:6; 사 48:22; 57:21).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 2:9-1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하나님이 예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마 5:23-25; 호 6:6; 암 5:21; 사1:11-18).

예수님은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씀하신다(마 5:23-25).

➭마귀의 궤계에 놀아난다.

용서 않고 금방 분을 삭이지 않으면 마귀의 궤계에 놀아난다.(고후 2:10- 11; 엡 4:26-27).

죄 지은 형제를 제 때―해가 지도록 즉 하루가 지나기 전―에 용서하지 않으면 마귀에게 공격할 팔 발판(foothold)을 주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통해, 분노. 증오, 배신감, 죽음과 자살의 영이 역사 하여 이후에 용서하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4. 남을 잘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이런 불이익들의 많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용서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나는 잘 했고 남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 폭행이나 어른의 폭행 등과 같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사적인 보복은 절대 금물이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이 고난을 당하셨지만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다(벧전 2:22-23).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당했다기보다는, 상대방의 허물은 보지만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기 전에 나의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만한 마음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감히 내가 누구라고 나를 이렇게 대해’라면서 복수의 칼을 가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죄 지은 형제를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야 한다(엡 4:32).

➭용서해준 것 같은데 기도 중 용서해 주지 않은 것같이 생각된다.

사역을 할 때 이런 간증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표면적으로는 용서한 것 같지만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았을 경우에 성령이 다시 중심으로 용서하게 하시는 경우이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마 18:35).

내가 죄 지은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했나를 알려면, 그 사람이 잘되었거나 잘못되었다는 소문이 들릴 때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잘 되었을 때 배가 아프고 잘못 되었을 때 고소한 마음이 생기면 중심으로 용서했다고 할 수 없다.

➭보상 심리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보상 심리가 있다. ‘내 원수의 빚은 공짜로 탕감해 주면 내가 받을 빚은 누가 갚아주는가? 내 원수를 누가 갚아 줄 것인가?’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이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가해자가 먼저 사죄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먼저 용서하셨고(롬 5:8), 간음한 여인이 회개하기 전에 먼저 용서하셨다(요 8장). 특히 고의적으로 해를 가한 가해자일 경우 가해자 먼저 용서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때 주님의 사랑으로 먼저 용서하는 자가 승리하는 사람이며 가해자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다.

5. 누구를 용서할 것인가?

우리는 용서라고 하면 얼른 나에게 죄 지은 사람만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용서의 대상은 하나님, 나에게 죄 지은 형제 및 자기 자신이다.

➭하나님

충격적인 사건이나 뜻밖의 재앙을 당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why me?)라면서 무엇보다 먼저 이런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을 원망한다. 욥이 재앙을 당했을 때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는 악담을 했다.

➭다른 사람들

나에게 고통과 상처를 준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본인 자신

자신이 죄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연민의 정과 함께 피해자가 된 그 사실을 증오하여 자신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완벽주의, 율법주의, 부당한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이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의지하여 자신마저 용서하고 축복할 필요가 있다.

6. 용서하는 방법

용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신자는 누구나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할 권세가 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

그러므로 용서는 직설적이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 아버지 저는_____죄를 지은 _____를 용서합니다.”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_____를 용서하기를 원합니다.”“하나님 제가___를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이 땅에서 용서할 때 매인 것이 풀린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가능하면 가해자 본인에게 직접 용서를 해주면 좋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가해자의 사망, 원거리에 거주, 행방불명 등―으로 가해자를 직접 용서하기 힘들거나 가해자가 아직 용서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유의할 사실은 마음으로 지은 죄는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할 것이며, 성적인 죄를 배우자에게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고백하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용서할 때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아 내적 치유가 주는 심령의 평강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전 2:24)

 

 

 

 

 

 

 

 

 

제9장 거절감과 쓴 뿌리로부터 자유

첫 번째는 영적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은 항상 기도하면서 사단을 대적하면서 하는 그런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항상 그렇게 한다면 피곤하고 지쳐버릴 것입니다.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 전쟁은 잘못된 영을 하나님의 영으로 대체시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7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권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의 우선권을 제 위치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올바른 우선권은 첫 번째,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두 번째는 가족과의 관계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멤버들과의 관계입니다. 네 번째는 사역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우선권의 순서입니다. 좋은 사역은 올바른 관계 속에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이 우선권이 바뀌어 버리면 우리는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고 입히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역을 우리의 관계보다 더 우선권으로 둔다면 우리는 정말 관계 속에서 많은 상처를 주게 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우선으로 둔다면 우리가 또한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선권을 정해 두셨습니다. 첫 번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그 다음 가족과의 관계입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양식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그 다른 관계는 다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남편과 아내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그 밑에 있는 관계들은 제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으면 우리가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없고 효과적으로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참으로 단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들을 따른다면 우리는 정말 축복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우선권을 제 위치에 둔다면 우리는 항상 승리를 맛볼 것입니다.

또한 영적 전쟁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사랑이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게 하고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사랑은 굉장히 능력이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다 내어 쫓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 가운데 가득 차게 하시기 바랍니다. 가족들 안에 가득 차게 하고, 교회 안에 가득 차게 하고 그럴 때 이 죽음과 두려움의 영은 깨어져 버릴 것입니다.

또한 영적 전쟁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찬양 노래들이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줍니다. 또한 찬양과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그 안에 있는 나쁜 영의 세력들을 묶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했던 우리의 정신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능동적인 생각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수동적인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만약 우리가 수동적인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정에 항상 순종하고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수동적인 생각을 가지면 우리가 이것을 하기를 원하지만 결국 그것을 하지 못합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수동적인 생각을 하고 살아갔을지 모릅니다.

한국어 성경이 마음과 정신을 제대로 구별해서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성경 원어에서는 우리의 정신, 생각과 마음에 대해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너희 정신을 능동적으로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을 받으면 우리의 모든 생활이 변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우리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정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능동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게끔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정신을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승리함 가운데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여러분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생각 안에 여러 가지 압력과 부담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스트레스를 이기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어쩌면 지금 스트레스 가운데 살아가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데 그것을 또 터뜨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 머리가 폭발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제발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우리가 어떻게 정신을 다루어갈 것인가 정말 중요합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의 생각을 컨트롤하는 것입니다.

 

 

 

 

 

 

 

 

 

 

 

 

 

 

 

 

 

 

 

 

제10장 상처란 무엇인가?

세상에는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더욱 많다. 그 훌륭한 다윗은 왜 어느 날 갑자기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범했을까? 창녀와의 섹스 스캔들 때문에 추락한 미국의 유명한 텔레비전 부흥설교가 이고 학교도 세웠던 지미 스와거트(Jimmy Swaggart)나 동성연애와 간통과 성폭행의 의혹 속에서 공금횡령으로 8년간의 감옥살이 하였던 짐 베이커(Jim Bakker)는 처음부터 문제가 많은 사기꾼이었을까?

 

빈야드(Vineyard)의 다음 세대를 맡았던 목사가, 그 훌륭한 찬양을 많이 작곡한 그가 알코올 중독자였고, 포르노 무비 중독자였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 더구나 은혜롭게 설교하고 집회를 인도한 날 밤이면 더욱 심하게 술과 포르노에 빠져들었다는 것에 대하여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는가?

 

교회에서 기도 많이 한다는 권사님 중에서 온통 사람들과 부딪히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며, 평생을 성공적으로 목회한 목사님이 말년에 소유와 집착 때문에 추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은 무슨 연유인가? 이런 이야기를 열거하려면 수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병이 있다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는, 그리고 어렴풋이 그것이 상처라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일 어떤 병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정작 그 병의 원인도 그리고 치료법도, 심지어 병명조차 정확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괴질’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상처는 일종의 괴질이었다.

병이라는 것의 사전적 정의가 “생물체의 전신 혹은 일부분에 생활 기능의 장애로 변화가 생겨 고통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 때, 상처도 분명히 병의 범주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장애’ 와 ‘고통’이 상처의 주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상처의 치유는 목회와 복음 사역의 주요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치유를 위해서는 상처가 무엇인지? 그 원인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1. 내면이 중요합니다.

 

내적 치유 사역을 하면서 보니 상처의 치유를 위해 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바로 우리의 내면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의 삶의 질은 외적 환경보다는 내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잠언 4장 23절에 보면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오는데도 사람들, 심지어 신앙인들조차 외적인 환경을 만들면 삶이 행복해 지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의 질은 외적인 부분보다는 내적인 부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면이지 결코 외적 환경이 아니다.

 

둘째로 내적인 건강이야말로 진정한 건강이기 때문이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시며”(엡 3:14-16).

 

세기의 결혼이라고 했던 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 때 주어졌던 말씀이 바로 이 에베소서 말씀의 바로 뒤 이은 부분인 17절부터였다고 한다.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부분 말씀보다는 그 앞에 있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 겉은 멀쩡했으나 내면이 건강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참 비참한 결론을 내고 만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외적 건강과 안녕에는 몹시 예민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정작 내면적 건강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물론 몸이 아프면 참 많이 고통스럽고, 삶의 모든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이 사실이다(간혹 아픈 가운데에서도 큰 기쁨을 누리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다 보니까 하나의 착각이 자리 잡게 된다. 그것은 몸이 건강하기만 하면 그 기쁨과 행복이 삶 가운데 오는 것으로...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배고플 때 밥 한 그릇은 우리를 매우 행복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또 한 그릇을 더 먹었을 때 행복이 두 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거기에다가 또 한 그릇을 더 먹으면 이제는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몸의 건강이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는 데 차지하는 비중은 부분적이다. 훨씬 많은 부분을 내면의 건강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은 안다고 하는데도, 실제로 그들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몸은 조금만 아파도 그것을 고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면서도, 마음의 건강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방치하기 때문이다. 내면에 관심을 기울여야한다. 왜냐하면 중요한 건강은 내면적 건강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에 관심이 많으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4장 13절을 가훈처럼 액자를 해서 걸어 놓은 집들이 많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그렇게 해 놓고 바라보는 그 말씀의 본뜻은 그것이 아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실 그 앞에 있는 12절 말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라는 말씀과 함께 봐야 그 뜻이 정확해지는 말씀이다. 즉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은 상황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능력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을 다 바꾸실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해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보다는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그 방식을 택하신다. 성경 도처에 나오는 증거들을 읽어보면 이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주께서 네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3서 2절)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방법이 주로 내면을 통해서이고, 또 동시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의 중점이 마음을 고치는데 있었으므로(“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 사 61:1 ), 모든 목회적이고 영적인 관심과 적용이 우리의 내면으로 향해야 함은 당연하다.

 

2. 상처란 무엇인가?

 

먼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고 나면, 그 다음에 풀어야 할 이야기는 바로 그 내면을 건강하지 못하게 망가뜨리고 뒤틀리게 한 ‘상처’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이다. ‘알아야 치유를 하든지 할 것 아닌가?’라는 아주 상투적인 이유에서라도…

 

첫째, 상처란 상처 난 감정이다

‘상처’라는 말을 정확히 제대로 말하면, 그것은 ‘상처 난 감정’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내면을 지, 정, 의 세 부분으로 본다면, 그 가운데서 상처를 받는 부분은 ‘감정’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 정, 의 가운데 가장 쉽게 다칠 수 있고, 또 가장 예민한 부분이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살아가면서 감정에 상처를 안 받으며 살 수 있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대부분의 인생이라는 것이 상처를 다 주고 받으며 살되, 그것을 지성과 의지를 사용해서 적절하게 해소하고 아물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적절하게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문제이다. 여기서 적절하게 해결이 안 되는 (혹은 안 된) 상처란 그 상처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받아서 그것을 부적절하게 처리한 것이든지, 아니면 상처 위에 세워진 가치관이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내면이 그렇게 상처 가운데 자리를 잡은 경우, 그리고 현실적으로 아직도 피가 흐르는 상처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기에 처리가 안 되고 있는 경우 이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것은 주로 어릴 때 받은 상처를 말하는 것이다. 나 자신처럼 태아 때에 받은 상처까지 포함해서 어떤 버림받은 사건이나 관계, 환경, 언어를 통하여 상처를 받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에 주로 망각이나 부정, 투사 등의 방어로 부적절하게 덮게 되고 그것이 나중에 부적절한 상황에서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것, 그래서 고통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상처의 가장 일반적인 전형이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특별하게 불우한 환경이나 부당한 상황에 있지 않았는데도 내면이 심히 허약한 사람들을 많이 보는 데, 그 이유는 그들의 경우 대부분 어떤 사건이나 환경을 통해서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라 상처가 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영향력으로 상처가 자리 잡은 경우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줄 때 정말 순도 100%의 사랑만을 줄 수 없다. 거기에는 그의 상한 감정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전달되는 것이고, 그것을 자녀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받아먹게 되기에 상한 감정이라는 내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잉보호에 의한 상처 이야기가 이것의 가장 두드러진 예이고, 유전적인 분노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하고, 심한 두려움을 가진 내면도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과거가 지금 현실에 부적절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또 한 가지, 현실적으로 상처를 너무 심하게 받고 있기에 처리가 안 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엄청난 배신을 경험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처리되지 않은 상처 가운데서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지난날의 부적절하게 처리된 상한 감정 위에 이것이 더해지면 그 고통은 더 엄청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상처란 내면의 평강을 빼앗는다.

상처는 감정에 받는 것이기에 상처받은 사람의 경우 내면에 평강이 없다. 상처는 감정의 문 가운데 음부의 문(The Gates of Hades, 마 16:18)을 열어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은 순식간에 지옥이 된다. 이사야 11장 6절부터 9절까지에 보면 소위 낙원의 회복(Paradise Regaining)이라고 하는 회복된 낙원의 모습이 나오는데, 거기에 나오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라는 대단히 황당하고 이상한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그 마지막에 이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기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평강’(Shalom)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일어난다면, 어느 사회, 국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마음에서 일어날 것이다(천국은 원래 한 개인의 삶의 변화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사회 제도나 조직의 변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니까…).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주의 말씀이 덮이면서, 그 미움과 적대감, 자기 스스로를 죽이는 생각들, 느낌들, 바르지 않은 자기 평가, 이런 모든 것이 주의 말씀으로 바로잡아지면서,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그런 모습이 내면에 일어나게 되고 바로 그것이 상처가 치유된 모습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처가 우리에게 있음으로 우리 가운데 주는 가장 큰 고통, 피해는 바로 우리의 내면에서 이 평강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여기서 ‘평강’ 이라는 말을 ‘아무 느낌이 없음’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곤란하다. 오히려 상처가 많은 경우 망각이나 억압이라는 방어를 사용해서 감정적으로 무감각해져서 고통이나 아픔을 느낄 수 없는 내면이 되는 경우가 있는 데, 이것을 평강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셋째, 상처는 관계의 장애를 가져온다.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있는 가장 심각한 현실적 문제는 관계의 장애이다. 어떤 여자 집사님이 와서 하는 말이 자기는 결혼하기 전에는 자기에게 상처가 전혀 없었는데, 결혼하고는 상처가 많아 졌다고 말하면서 이 모든 책임을 결혼과 남편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사실은 상한 감정이 잠복되어 있었던 것인데, 결혼 전에는 그렇게까지 깊은 관계가 맺어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몰랐다가 도망갈 수도 없고 적당히 거리를 둘 수도 없는 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 상처가 위력을 발휘한 것이 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두드러진 특징은 ‘이기적’인 것과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닌 것 같아도…, 그러므로 상처가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상처를 가지고 계속 살게 되면 결국은 ‘생명력’(Vitality)을 잃게 된다.

‘생명력’은 우리의 삶의 질을 재는 척도인데, 상처는 바로 이 생명력을 감소시킨다. 생명력은 다른 말로 하면 건강한 삶의 의욕이고, 이것은 적절한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때 내면에 느끼는 느낌이 평강(Shalom)인데 나는 이것을 ‘감동 있는 평강’이라고 표현하기를 즐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조심스러운 정의이지만, 바로 영적 능력이란 이런 상태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닌가 한다.

〈생명력 = 건강한 삶의 의욕 = 적절한 자존감 = 감동 있는 평강(행복감) = 영적 능력〉

 

상처는 바로 이런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질병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음에 의한 치유가 일어날 부분은 바로 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며, 목회의 중점은 바로 이 부분에 모아져야한다고 믿는다.

 

 

 

 

 

 

 

 

 

 

 

 

 

 

 

 

 

 

 

 

 

 

 

 

 

 

 

제11장 과거의 상처, 치료 받을 수 있다.

 

잠언 17:22“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과거 상처를 치료 받아야 한다. - 치료 받지 못하면 가정이 편하지 않고, 자신부터 원인 모르고 근심 걱정과 우울증과 불면증과 스트레스(stress)로 참된 평강이 없고, 불안하며, 상한 심령으로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 상처가 너무 깊으면 기도생활이 잘 안되고,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잘 못 받게 되고, 도리어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왜, 나는 전도가 안 되고 다락방 기도가 잘 안되는가? 도리어 상처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 복음의 메시지를 계속 듣게 되면 어느 날 치유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상처(문제)들의 종류

1. 들어난 상처(문제)

2. 깊이 숨겨진 상처(문제) - 한국 사람은 은폐의식이 심하다.

3. 남은 아는데 자기도 모른 상처(문제, 쓴 뿌리가 깊이 박혀있음) - 문제가 있는데 없다고 한다.

4. 하나님만 아는 병(病)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출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사58: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렘30: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히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롬 3:14〕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욥4:8〕“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잠22: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 무엇이 악의 뿌리가 되는가?

〔딤전6: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돈을 사랑하는 것이 온갖 악의 뿌리가 됩니다. 이것을 가지려고 열망하는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고통을 당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한번 웃으면 면역이 6시간 올라갑니다.

한번 화내면 면역이 6시간 뚝 떨어집니다.

 

◆ 분노의 정의

hm;je 헤마 또는 am;je헤마(단 11:44) '열', 상징적으로 '분노'(그 '노기'에서), '독'(분, 심한, 불만, 노하여, 열, 분노, 독(毒), 격노, 노한, 격한 불쾌감, 분개, 화, 병)

〔잠14:30〕“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잠14:30〕“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질투를 하면 뼈까지 썩는다.”

〔잠14:30〕“마음이 평안하면 육신도 건강하나 시기하면 뼈마디가 썩는다.”

〔시112:10〕“악인(惡人)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消滅)하리니 악인(惡人)의 소욕(所欲)은 멸망(滅亡)하리로다”

 

◆ 의사들도 말을 한다.

“분을 내면 모든 질병을 싸워야 하는 면역이 떨어진다.”

⇨암(癌)에 걸릴 확률이 많다.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분노는 마음의 등불을 꺼버리는 바람이라” 하였습니다. 분노의 진원지는 마음 안에 있는 상처입니다. 친절은 쉽게 잊혀 지지만 상처는 잘 잊혀 지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잊혀졌다할지라도 덮여 있는 것이지, 아물어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는 언젠가 건드려지면 아파 오며, 그로 인하여 분노의 바람이 일어 상대방을 찌르며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의 상처는 마음의 평강을 해치는 요인이며, 흑암의 세력이 파고드는 통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과거의 상처는 반드시 그 뿌리를 알고 치유 받아야 합니다.

〔잠15:4〕“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5:13〕“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1. 과거 상처의 뿌리를 알고 캐내어야 합니다.

 

(1) 본래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존재로서 상처받을 요인이 없었고 벌거벗었으나 항상 자랑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완전한 보호막인 선악과의 언약만 굳게 붙들고 있으면 만물을 다스리고 축복하며 영생하는 존재였는데, 사탄이 뱀을 통해 사람을 미혹했습니다(창3:1-6).

(2) 미혹 받아 보호막을 깨트려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마귀와 악령들에게 사로잡혀 버린 사람은 결국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상실하고 만물을 통해 묶이고 상처받는 존재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구나 영적인 배경을 알지 못하니 눈에 보이는 것에 상처를 많이 입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하는 존재가 이길 힘도 없이 홀로 몸부림치며 살다보니 서로 상처들을 주고받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 간에, 학교에서, 대인관계와 어려운 환경들을 통해 상처들은 쌓여갑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악령들의 세력은 영적문제를 일으키며 특수한 질병과 우상 숭배와 그 결과인 정신병 등으로 묶어갑니다.

 

2. 그러므로 우리를 속이는 영적인 배경을 알아야 됩니다(계12:7-9).

 

특별히 초 신자는 믿음생활을 잘 시작하고자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배경 때문에 벽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1) 좋은 일이 있는 것처럼 속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11:14)

(2) 거짓말로 속입니다(요8:44).

어릴 때부터 이 존재들에게 속아 살아왔기에 보통 사람들의 생각들은 거짓으로 사상화 되어있어 거의 모든 판단들을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눈에 보이지 않게 정사와 권세를 움직이며 세상의 왕 노릇합니다.

(엡6:12-20)

사실 하나님 만나서 함께 하지 못한 사람이 어느 분야에든 깊게 들어가 성공단계에 이르렀다면, 분명한 사실은 흑암세력에게 단단히 얽매여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 분들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살펴보면 그 증거를 분명히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4) 우상숭배로 계속 얽매이게 합니다(고전10:20).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사 멸망치 않고 본래 상태를 회복하여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언약대로 직접 육신을 입고 인간 세상에 오셨습니다.

 

3. 해방 받아 본래의 축복된 상태를 회복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알고 믿어야 됩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세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1)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요14:6).

(2) 죄와 저주,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문제까지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막10:45).

(3) 이 지구상의 원수, 마귀의 세력을 꺾으셨습니다(요일3:8).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전히 이루시고, 이 구원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영적 문제의 통로(사단이 나를 옭아매는 통로)가 되는 과거의 상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맡기면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 주님이 치유해 주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는 순간, 우리의 모든 과거는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앞으로의 모든 삶도 보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과거의 모든 문제들은 해결되었고, 앞으로 어떤 상황이 와도 괜찮습니다. 노예로 가도 괜찮고, 감옥에 가도 괜찮고 죽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미래라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회복하지 못 하면 사업도 안 될 것이고, 선교도 안 될 것이고, 신앙생활도 안 될 것입니다. 더 더욱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끌려가게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도 우리를 속이며 공격해오는 영적 세력(마귀와 악령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안다면 우리는 모든 부분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다 벗어 주 예수님께 맡기고 이제는 온 세상 살리는 일에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 완전한 치유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될 수 있다.

 

 

 

 

 

 

 

 

 

 

 

 

 

 

 

 

 

 

 

 

 

제12장 대인 공포증

 

대인 공포증은 "사회 공포증" 및 "사회 불안 장애"라고도 불린다. 불안이 특수하게 대인관계나 사회적 상황에서 남을 의식하여 생긴 창피한 감정을 중심으로 형성될 때 이를 "사회적 불안"이라고 한다. 낯선 사람과 얘기하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 등을 두려워해서 이런 상황을 피하려고 하는 것, 심해지면 공황장애, 알코올중독 등이 생긴다.

 

예를 들면 혹시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이나 아닐까, 경멸당하고 있지는 않나 두려워하는 것으로 대인공포증이라기보다는 대인관계공포증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한 표현이다.

신경증의 하나로 분류되며 적면공포(赤面恐怖)·시선공포(視線恐怖)·정시공포(正視恐怖)·체취공포(體臭恐怖) 등도 모두 유사한 공포의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열증이나 울증(鬱症) 등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대인공포증 환자는 신경증에 비해 사람을 혐오하는 경향이 강하다. 치유를 위해서는 불안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에 따른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공황장애는 그럴 만한 이유나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공황장애의 주요 증상은 공황발작이다. 공황발작은 호흡이 가빠지거나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며 어지럽고, 손발이 저리거나 몸이 떨리는 등의 신체적 증상과 함께 공포·불안·두려움 등의 심리적인 증상을 동반한다. 심한 경우 이러한 증상으로 곧 죽거나 미칠 것 같은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공황발작으로 인해 환자는 다음 발작에 대한 예기불안(아직 벌어지지 않은 위험에 대한 예상 불안)을 갖게 되어 행동이나 생활에 더욱 무능력하게 된다. 공황장애는 보통 20대에 가장 많이 발병하고, 남자에 비해 여자가2배 정도 많다. 발병 원인은 생물학적 요인, 유전적 요인, 심리적 요인으로 나누어진다. 생물학적 요인은 발병 원인을 뇌전달물질의 기능 이상으로 본다. 여기에는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전적 요인은 공황장애를 가진 사람의 직계 가족 중에서 공황장애를 겪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점을 든다. 심리적 요인은 어릴 때 부모와 사별하거나 이별한 충격 등을 발병 원인으로 본다. 공황장애는 간혹 약물치료 없이 낫는 경우도 있는데, 정신치료 등과 같은 비약물 치료를 실시한다. 중증일 경우에는 약물치료가 꼭 필요하다. 커피나 술, 담배 등은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삼가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에서는 증세가 심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 탓이다. 이런 사람은 성취 지향적이며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많다. 부딪치면 별일이 아닌데도 다른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 특정 상황을 회피하고 이 때문에 증세가 악화되는 것이다. 중증이 아닐 경우 상황에 부딪치면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 한 번 자신감이 붙으면 극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 대인공포증 진단

 

(1) 사회 활동과 상황에서 현저하고 지속적인 두려움을 느낀다.

친밀하지 않은 사람들하고 있을 때와 다른 사람에게 주목받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수치스럽거나 당혹스럽게 행동할까봐 또는 불안 증상을 보일까봐서 두려워한다.

 

(2) 두려운 사회적 상황에 노출되면 언제나 예외 없이 불안해지며, 이는 상황과 관계가 있거나 그 원인이 되는 공황 발작으로 나타난다.

 

(3) 공포가 너무 지나치거나 비합리적임을 인식한다.

 

(4) 공포스러운 사회 활동과 상황을 피하려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강한 불안과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5) 공포스러운 사회 활동과 상황에 대한 회피, 미래를 예기치 못하는 불안, 이로 인한 고통이 정상적인 일상생활, 직업적(학업적) 기능 또는 사회적 활동이나 관계 형성을 심각하게 저해하거나 공포로 인해 심하게 고통 받는다.

 

(6) 18세 이하에서는 기간이 6개월 이상이 되어야 한다.

 

2. 사회공포증의 원인

 

(1) 가족배경

부모나 친척 가운데 이 장애가 많다는 것이 확증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공포증의 부모는 광장 공포증의 부모에 비해서 사회적 대인관계가 제한되어 있으며, 남들의 의견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편이고, 가족과의 친밀한 관계가 비교적 없는 편이다. 또 부모의 돌봐줌이 부족하거나 거절적이며 반대로 지나치게 과잉 보호적일 때 사회공포증이 더 발생한다.

 

(2) 고통스런 외상의 경험

자신이 처음 남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몹시 불안하여 고통스러웠던 사건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 사건이 원인이라고 믿게 되고, 그때의 고통스러웠던 경험 때문에 사회적 상황이나 타인 앞에 서는데 대한 공포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3) 타고난 소질과 환경의 스트레스

어떤 아이들은 생소한 스트레스에 대해 지나치게 위축되는 성품을 가지는데 이로 인하여 억제적인 행동을 보인다. 그러다가 아이가 부모의 사망, 부모와의 이별, 부모와 형제들로부터의 학대, 가정 내 폭력 등의 스트레스가 만성적으로 가해지면, 어떤 시기가 되면 증상이 나타난다고 본다.

 

 

 

 

 

 

 

 

 

 

 

 

 

 

 

 

제13장 우울증의 오해와 이해-영적 차원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슬픔·절망·비관·자기비하·자기비난·식욕감퇴·수면장애·불면증과 일상생활의 보람·흥미가 감소 또는 상실되고, 열정·활력이 감소되며 사고·행동이 느려지는 등의 증상을 경험한다.

우울증은 소중한 사람이나 물건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슬픔이나 비통과는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 불행을 초래한 사건이 있을 경우, 우울한 기분이 그 사건에 걸맞지 않게 심하거나 오래 계속된다면 우울증으로 간주된다. 조증(mania)과 번갈아 나타나는 경우를 조울증(躁鬱症)이라 한다.

우울증은 가장 흔한 정신질환이며, 히포크라테스가 울증(melancholia)이라는 이름으로 증상을 기술해 놓았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증상이 나타나는 형태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데 일시적이거나 항구적인 경우, 가볍거나 심한 경우, 급성적이거나 만성적인 경우 등이 있다.

우울증은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욱 흔한데, 발생빈도는 남성의 경우 나이가 들면서 점차 늘어나며, 여성의 경우 35~45세 사이가 가장 높다. 우울증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나타난다. 부모를 잃는 것과 같은 어린 시절의 상처나 고난은 나이가 든 후에 우울증에 걸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강력한 원인이기는 하지만, 사회심리학적인 원인과 생화학적 원인 또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가장 유력한 생화학적 원인으로는, 대뇌에서 생성되는 모노아민 가운데 특히 노르에피네피린이나 세로토닌 분비과정의 결함을 들 수 있다. 이 화학물질들의 양 또는 활성도가 낮아서 우울한 기분을 유발시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울증의 치료에는 주로 3가지 방법이 쓰이고 있는데, 정신치료와 약물요법이 가장 중요하다. 정신치료는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도록 도와주면서 우울증을 유발시켰다고 보여지는 내면적인 충동들을 풀어서 순화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약물치료는 환자 대뇌 속의 화학성분의 불균형상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항우울제 약물을 사용함으로써 증상의 개선을 꾀하는 것이다. 삼환계 항우울제는 체내 신경전달물질인 모노아민의 분해를 억제함으로써 효과를 나타낸다고 믿어진다. 분해억제작용의 결과, 이들 신경전달물질들이 대뇌에서 많이 생성되거나 축적되어 신경세포에 오래 작용하도록 함으로써 우울증을 개선할 수 있다. 반면에, 모노아민 산화효소 저해제들은 노르에피네피린과 세로토닌의 분해를 촉진하는 데 관여하는 산화효소를 저해하여 효과를 낸다.

우울증의 증세가 심하여 빠른 치료가 필요한 경우 전기충격요법이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방법은 환자의 뇌에 전류를 흐르게 하여 경련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우울증의 치료는 정신치료와 약물요법 또는 전기경련요법을 같이 사용할 때 좋은 치료효과를 얻을 수 있다.

 

우울증을 신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1) 우울증 환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2) 우울증 환자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3) 우울증 환자에게 사단은 어떻게 개입하는가?

 

1. 우울증 환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 기쁨입니다.

▶죄로 에덴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 아픔입니다.

▶하나님은 아파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살리실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 그것은 구원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기쁨을, 죄를 지어서 타락했을 때에 아픔을

그들을 다시 살리시기를 원하는 구원의 소망의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애타게 일을 하셨습니다.

즉, 병들어 있는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계속해서 메시지를 주십니다.

- 성경 신구약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해라. 이웃과의 관계도 사이좋게 회복해라. 자연과도 친환경적으로 관계로 회복하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그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 우울증 환자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우울증 환자가 겪는 현실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들의 심리는

1) 현실이 고통스런 사람은 그 자리를 도피하고 싶어 합니다.

도피하는 길은 두 방향입니다.

하나는 몸으로 도피하고, 또 다른 하나는 정신으로 도피합니다.

 

2) 현실이 고통스런 사람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원합니다.

양면성 때문에 드러내고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합니다.

그는 무기력감, 절망감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때론 도움도 요청 못합니다.

 

우울증 걸린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이와 같은 심리를 갖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내 힘든 것을 아시고, 나를 쉽게 고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평소 믿음 생활을 제대로 못한 사람은 죄책감으로 고쳐달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눈치만 봅니다.

셋째 우울증에서 회복되지 못하면 자책을 하면서 하나님에게 분노하기도 합니다.

 

3. 우울증 환자에게 사단은 어떻게 개입하는가?

 

어떤 사람은 우울증은 사단이 끼여서라고 말합니다.

즉, 사단이 들어와서 우울증이 생겼다고 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닙니다. 너무 쉽게 귀신들렸다고 진단내립니다.

분명한 것은 우울증이 생기면 사단의 개입은 있습니다.

그러나 증상 자체가 귀신들린 것인지 아니면 증상이 아닌 다른 것에 공격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우울증이 귀신들린 것인가?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우울증을 주지 않으신다! 는데 나에게 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니 약 없이도 나를 회복시킬 수 있지 않은가?

- 맞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당신의 우울증을 확실히 치유 하실 수 있습니다.

 

 

 

 

 

 

 

 

 

 

 

 

 

 

 

 

 

 

 

 

 

 

 

 

 

 

 

 

 

 

제14장 내적 치유란 무엇인가?

1. 내적 치유란 무엇인가?

인간의 영적 문제, 심리적인 마음의 문제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성경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가는 것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내면적인 상처의 치유이며 영성의 회복이다.

 

1) 하나님과 나

2) 나와 나

3) 나와 환경

총체적인 인간 구원의 목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까지이다. 이것은 이미 타락해 버린 우리 마음의 전반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은 뇌와 연결되어 있고 뇌는 컴퓨터와 같은 기억장치를 가진다. 어떤 특정한 일은 우리 안에 깊은 상처를 내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 그 상처받은 마음 중에서 의식 속에 감지되는 것은 해결할 수 있으나, 어떤 것은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 버려 감지되지 못하기에 치료되지 않고 발병이 시작된 감염 부위처럼 계속적인 영향을 우리의 현재의 삶에 미치기도 한다. 그러기에 성령은 우리 마음의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상처들을 치료하시는 일을 하신다. 이것은 계속적으로 되어져야 하는 과정이나 내적 치유 사역을 통하여 가장 주된 문제가 드러나고 치료가 시작될 수 있도록 돕게 된다.

 

2. 상처받은 마음

상처받은 마음은 외부적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반드시 삶 속에 그 상처로 인한 결과가 나타난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원인 모르게 화가 나고 우울하며 심난한 상태가 계속된다.

기도를 해보고 Q.T도 하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 사실은 기도하고 Q.T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다만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다. 만사가 귀찮고 의욕이 없어서 억지로 살아간다. 몸도 아프고 피곤하다.

 

2) 반복적으로 짓는 죄(술, 담배, Sex, 오락, 도박 등등에 중독된 것, 남을 험담하고 정죄하는 습관 등)에서 벗어나올 수 없다. 이제 다시는 안 하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그 결심을 하는 순간에도 나는 결코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3) 늘 무엇인가 나쁜 일이 일어 날것만 같은 두려움이 있다. 가족이 조금만 늦거나 연락이 안 돼도 불길한 생각이 든다. 남들이 다 붙는다는 시험도 나는 안 될 것만 같고 그래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지가 않다. 언젠가 내 자신이 만천하에 낱낱이 다 공개 될 것 같은 두려움, 그래서 지금 이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이 심하다.

4)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바쁘게 나를 몰아간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무슨 큰일이 닥칠 것 같고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난다. 신앙생활도 사실 두려움 때문에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주일을 빠지거나 기도를 조금만 게을리 해도 금방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쉬고 싶지만 조금만 쉬고 있어도 이내 불안해서 쉴 수가 없다.

5) 예수를 꽤 오래 믿고 열심히 믿었는데도 확신이 없다. 잠깐 잠깐 감동도 있고 기쁨도 있었지만 이내 사라지고 여전히 나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확신 있게 선포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더 깊이 헌신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세상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내가 밉고 신경질 난다. 솔직히 예수 안 믿고 신나게 사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잘못된 성격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아픔의 결과이며 죄의 결과이다. 이것은 반드시 치료되어야만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성격은 새롭게 되고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

3.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온전히 치유하실 수 있는 이유

1) 인간에게는 네 가지 마음의 영역이 있다.

- 내가 알고 남도 알 수 있는 부분,

- 나만이 알고 남은 모르는 부분,

- 나는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아는 부분, 그리고

-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부분이다.

그중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잠재의식의 부분이 인간의 70% 이상을 차지하는데, 이 잠재의식 속에 성격을 형성하게 만든 뿌리가 들어있다. 그러므로 잘못된 성격과 마음이 온전히 치료되기 위해서는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상처들의 치유가 필수적이다. 잠재의식의 형성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 영역은 자신이 인식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실 수 있다.

2)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는 부모의 여러 영역이 유전되기도 한다. 이것은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처음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까지 연결된다. 이러한 문제의 구체적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3)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잠재의식 속의 문제를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추론하고 진단을 내렸을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치유이다. 지나간 내 인생의 과거 문제까지를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4. 내면의 치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하신 가장 중요한 사역은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병든 인간의 마음(성격)을 치유하시는 것이었다. 그분은 우리의 내면적인 상처들이 치유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마 9:12-13, 사 53:5, 사 61:1-3)

5. 인간이란 무엇인가?

1)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습니까? (살전5:23)

2) 몸(body) :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드신 그것 (창 2:7) 동물과 동일한 부분이 많다(창2:19).

3) 영 (spirit) :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호흡 (창 2:7)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고전 2:12, 요 6:63)

4) 혼 (soul) : 몸과 혼이 만나면서 생긴 것 (창2:7)

- 생령이 된지라. living being 혹은 living soul

- 지, 정, 의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격'이라는 말로 어느 정도 대치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인간을 대표하는 것은 이 '혼' 이다.

 

6. 상처란 무엇인가?

1) 상처는 원칙적으로 '감정'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심한 감정의 상함을 입었을 때에 그것이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거나, 잘못된 방법으로 처리되면 (예 : 망각 속으로 처리), 그것이 상처로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나는 상처도 있을 수 있고, 기억은 나지 않으나 어떤 순간에 감정으로 터져 나오는 경우의 상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지 않는 것을 미리 상상하여 분노하거나 염려하고 때로 부적절한 감정을 보이고는 당황하게 됩니다.

2) 상처라는 것이 감정에 국한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이란 '통전적(holistic) 존재'이므로 감정에 남아 있는 그 상처가 인간의 전 존재에 심각한 장애로서의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 입니다.

⇨지적인 장애, 의지적인 장애, 영적인 장애, 육적인 장애

3) 이 상처들이 우리의 내면에 있을 때 여러 가지 장애들을 일으키는데 특히 관계에 있어서 어려움을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적 치유란 관계 회복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성령의 역사 가운데 중요한 부분입니다.

4) 상처란 비 신앙인(Non-Christian)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인에게 더 심각할 수 있습니다. 사역자가 되어서도 상처를 주고받으며 갈등과 괴로움 속에서 허덕일 수 있으며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죄 가운데 빠지기도 합니다. (예: 사도바울, 마틴 루터, 고든 맥도날드)

5) 상처는 나름대로 고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더 상처에 민감하며, 그래서 더 많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상처의 악순환)

- 내면적으로 하나의 상처가 다른 상처를 불러일으킨다.

- 자신의 상처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반응하여 주변에게 상처를 주고 그러므 로 본인이 다시 상처를 받는다.

- 주변의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어렵게 가져가고 분위기를 힘들게 한다.

 

6) 상처란 하나의 세력입니다. 물리적인 상처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한번 치유 받았다고 해서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7. 상처의 종류들 (아픈 마음의 증상들)

상처의 종류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내면이나 경험을 대입하며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봅시다.

1) 아픈 마음의 증상들

 

⇨거절감 (버림받음) 창 3:23-24, 욥 6:4

- 모든 상처의 출발

- 거절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아감

- 사람과 깊은 관계를 갖지 못함

- 삶이 점점 폐쇄적이 되어 감

이제 이러한 거절감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단은 이러한 거절감을 극대화시켜 슬픔, 자기 연민, 자기혐오, 낮은 자화상, 열등감, 의욕상실 등을 갖고 살게 하여 건강한 인생을 파괴한다. 이제 이러한 거절감과도 아름답게 작별하자. 그리고 대신 그 강한 손으로 끝까지 붙잡아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분이 베푸시는 은혜의 깊은 강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핍 (굶주림) 창 3:17-19, 암 8:11-13

- 무엇엔가 집착하게 됨 (일, 사람, 물건, 쾌락 등등)

-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지나치게 애씀

- 사람을 독점하려 하여 결국 관계를 망가뜨림

- 분노가 자주 일어남

 

 

⇨두려움 창 3:10, 4:14

- 우상 숭배에 빠짐

- 악에 집착함

-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 불안감

- 문제가 있으면 바로 과거로 회귀

- 결정을 내리지 못함

 

⇨열등감 출 4:13-14, 렘 1:6

- 앞에서 열거한 상한 마음의 증상이 다 나타남

- 자존감(Self-Esteem)이 낮음 - 매사에 자신 없어 함

a. 낮은 자존감은 잠재력을 마비시킨다.

b. 낮은 자존감은 꿈과 이상을 파괴시킨다.

c. 낮은 자존감은 대인관계를 망가뜨린다.

d.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의 부름 (Calling)을 거부하게 한다.

- 무책임함 - 일을 중도에 그만두고 도피함

⇨죄의식 롬7:24, 눅 15:18-21

- 불안감 -언젠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다.

- 완전주의 증상들 - 지나친 희생과 봉사

- 다른 사람을 향한 정죄, 강요

-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생활을 못함

 

3) 상처의 원인들

⇨불행한 가정환경

문제가 있는 부모, 너무나 무섭기 만한 아버지, 술주정이 심한 아버지, 부모님의 부부싸움 무관심한 부모, 화만 내고 잔소리가 심한 어머니, 부모의 일관성 없는 태도 etc.

- 결손 된 가정

⇨과잉보호

- 과잉보호는 자녀에게서 선택을 통한 자신감을 박탈하고 결국 열등감을 갖게 한다.

- 과잉보호는 자녀에 대한 불신감의 표현으로 열등감을 갖게 한다.

⇨조건적 행위

- 네가 무엇을 해야 내가 이것을 해주겠다는 식의 교육

⇨비교

- 비교는 강한 거절감의 표현입니다.

- 비교는 언제나 열등감으로 끝이 납니다.

⇨원죄처럼 유전되는 상처

- 내리 분노

- 자기 좌절감 : 배변 훈련

 

8. 상처들로 인하여 오는 장애들

1) 인간의 전 존재에 걸쳐 일어나는 장애들

⇨육체적인 장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마 4:23-24, 왕상 19:4)

- 여러 가지 신체적 질병

마음의 상처가 육체의 신진 대사에 영향을 미치므로 식사 습관, 수면 습관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 무력증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치유를 언제나 내면적 치유와 함께 하셨습니다. (요 5:14)

⇨인격적인 장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렘1:6, 삼하 11:1-4, 창 4:5-6, 창 32:7)

- 정서 불안 (장애)

- 대인관계 장애-가족 관계 장애

(성적(性的) 장애, 자폐성 장애) 공동체 적응 실패

⇨영적 장애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삿 11:30-31, 창47:9, 갈4:9)

- 왜곡된 신앙 - 조건적 신앙

-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함-구원의 감격이 없음

-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거부

- 구원의 확신은 있으나 구원받은 자가 누릴 권리인 `평강을 누리지 못함

 

2) 인간은 네 개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 하나님과의 관계

- 자신의 내면과의 관계

- 이웃과의 관계

- 자연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상처가 장애를 일으키는 영역은 이 네게의 관계 전체 다입니다.

a. 상처로 인하여 오는 육체적인 장애는 우리의 어떤 관계를 어렵게 하는 것입니까?

b. 상처 때문에 겪는 인격적인 (혼적인) 장애는 우리의 어떤 관계를 어렵게 합니까?

c. 영적인 장애는 어떤 관계를 어렵게 합니까?

 

결국 상처는 "보이지 않는 변화 (소속의 변화)"에서 "보이는 변화 (삶과 인격의 변화)"에로의 전환을 어렵게 합니다.

그러면 이런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습니까?

어떤 공식이나 절차에 의하여 치유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다만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가능할 뿐입니다.

 

I. 다음에 나오는 성경의 인물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원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 가인은 왜 동생 아벨을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창 4:3-8)

-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으시지 않은 이유(창 4:7)

- 거절감의 폭발-거절감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 죄의 소원이 있으나 그것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2.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거절한 이유는? (출 2:14, 4:13)

-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민 20:10, 시 106:32-33)

 

3. 사울왕

- 처음에 나타난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10:22)

- 그러나 그것은 열등감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삼상 9:1-2, 9:21).

-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제사를 드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삼상 13:11)

-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열등감은 그를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삼상18:7-9)

(1) 스스로 자신감을 일고 평강을 잃었습니다.

(2) 모든 결정이 그런 열등감에서 나온 부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예 : 딸의 혼사).

(3)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점점 어려워져 가게 되었습니다.

(아들, 딸, 사위, 신하, 제사장, 백성)

(4) 다윗을 쫓는데 온 정력을 낭비하고 결국 블레셋에게 전사당함

 

4.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이유는? (시 51:11)

- 다윗은 사랑 받지 못하는 잊혀 진 아이였습니다. (삼상 16:11)

- 다윗은 형제들에게서도 따돌림 받는 아이였습니다. (삼상 17:28)

 

5.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한 이유는? (욘1:2,4:1,4,8-9)

-요나는 분노의 사람이었습니다.

 

6. 사도 바울이 마가 요한 문제로 바나바와 다툰 이유는? (행전15:37-39, 딤후2:4-5)

- 바울은 엄격한 아버지와 엄격한 교육 환경 속에서 상처받으며 성장했습니다. (행전22:3) -바울은 분노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 바울은 자기 자신을 늘 괴롭히는 완전주의자적 증상이 있습니다.

- 바울은 내면적인 갈등이 많던 사람입니다.(롬7:24).

 

II. 상처 있는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평강이 없었습니다.

 

1. 히 11:32-34

- 기드온 : 삿 8:24-27

- 바락: 삿4:8

- 삼손: 삿16:16

- 입다: 삿11:35

- 다윗: 삼하18:33

- 사무엘: 삼상8:5-6

 

2. 딤후 4:6-8, 9-12, 21

- 6 절 : 삶의 마지막에 서 있는 사도의 입장

- 7- 8 절 : 영적인 확신과 자신감이 넘치는 부분

- 9-12 절 : 다 자신의 주변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외로움이 깊이 배여 있는 부분입니다.

- 21 절 : 내면적으로 추위를 느끼는 상태

 

III. 그러나 성경의 인물들은 예배를 통해서 다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 예배를 통한 치유의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아봅시다.

- 야곱 : 창 28:10-22, 32:22-32

- 모세 : 출 3:5 - 4:17 (참조 민 12:3)

- 다윗 : 시 23:1 (참조: 삼상 16:14-23)

- 예레미야 : 렘 1:4-10

- 사마리아 여인 : 요 4:3-26

- 사도 바울 : 행전 18:9-11 (참조: 고전 1:23-24, 갈 2:20, 6:14)

 

 

 

제15장 내면의 상처와 치유

 

1. 내면이 중요합니다.

1) 사람의 삶의 질은 외적 환경보다는 내면에 의해 결정된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 사람들은 외적인 환경을 만들면 삶이 행복해 지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정작 그들의 삶의 질은 외적인 부분 보다는 내적인 부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2) 내적인 건강이 진정한 건강이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시며”(엡 3:14-16).

- 사람들은 외적 건강과 안녕에는 몹시 예민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정작 내면적 건강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건강은 내면적 건강이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에 관심이 많으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신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주께서 네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경의 모든 것을 다 바꾸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지만, 자녀인 우리의 삶을 인도하기 위하여 환경이나 외적인 요인보다는 마음을 인도하시고, 생각을 지키시는데 중점을 두신다.

 

4) 예수님의 사역의 중점은 마음을 고치는데 있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사 61:1).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은 ‘Preaching, Teaching, Healing’ 이 세 가지의 사역인데, 이 사역의 핵심은 물론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영적으로는 ‘대속’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그 구원은 ‘마음을 고치는 것’, 즉 ‘마음에 있는 상처를 고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2. 상처란 무엇인가 ?

1) 상처란 상처 난 감정이다.

- 감정에 상처를 받고 그것이 적절하게 해소가 되지 못했을 때 나는 이것을 덮기 위한 방어기제를 갖게 되고 그것이 나의 감정을 왜곡시키고 뒤틀리게 하며, 원치 않는 증상들이 나오며, 나의 전 존재를 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2) 상처란 내면의 평강을 빼앗는 것이다.

- 상처는 감정에 받는 것이기에 상처받은 사람의 경우 내면에 평강이 없다. 혹시 감정적으로 무감각해져서 느낌이 없는 쪽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할 수 있는 데, 이것은 평강이라고 말할 수 없다.

 

3) 상처는 관계의 장애를 가져온다.

-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있는 가장 심각한 현실적 문제는 관계의 장애이다.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두드러진 특징은 ‘이기적’인 것과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① 하나님과의 관계 장애 : 영적이지 못하거나 건강하지 못한 신앙

② 자신의 내면과의 관계 장애 : 자학, 자고 등등의 잘못된 자아 인식

③ 다른 사람과의 관계 장애 :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회피하는 것과 건강하지 못한 관계

④ 자연과의 관계 장애 : 일이나 건강에 문제가 있음.

 

4) 상처를 가지고 계속 살게 되면 결국은 ‘생명력(Vitality)’을 잃게 된다.

-‘생명력’은 우리의 삶의 질을 재는 척도인데, 상처는 바로 이 생명력을 감소시킨다.

생명력 = 건강한 삶의 의욕 = 적절한 자존감 = 감동 있는 평강(행복감) = 영적 능력

 

3. 상처의 원인들

1) 근원적 원인 : 원죄

모든 인간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잠재적으로).

-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면서 모든 상처를 모든 인간이 다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

- 그러나 주변 환경의 영향이나 문제로 이 상처가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 치유 방법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거듭남)

2) 간접적인 원인

- 자연적인 주변 환경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세상에 가난과 질병, 그리고 각종 고통이 들어 왔다. 환경적 고통은 그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특히 어린 시절에 더욱 치명적이다.

▶ 치유 방법 : 그 열악한 환경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이 아님을 성령 안에서 깨닫고, 이 고통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음을 체험하여 아는 것.

- 가계에 흐르는 저주(조상의 유전) : 조부나 그 이상의 선대에서 영적이나 반인륜적인 죄를 범한 경우 그것이 그 후손에게 저주가 되어 내려간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태어난 사람은 상처를 받을 수 있는 환경 가운데 태어난 것이다. 유전적인 질병이 있어서 그것이 상처가 된다.

원인 모를 열등감이나 정신적 질환, 그리고 각종 중독에 시달릴 수 있다. 그러면서 이것이 상처가 된다.

▶ 치유 방법

①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결코 숙명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써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야 한다.

- 성격의 차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의 성격이 아닌 다양한 성격으로 만드셨다.

(시 139:13-14).

이 다양성은 축복이지 결코 저주나 죄의 결과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이기심)가 다른 사람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상처를 주고받게 되었다.

▶ 치유 방법

① 성격이 서로 다른 것이지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아는 것.

② 나하고 다른 그 성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는 것(성령의 역사).

3) 직접적인 원인

- 상처 있는 부모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상처를 주는 것은 상처 있는 부모이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자식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가깝고, 힘이 없는 상태에서 받은 상처는 그대로 깊은 상처가 된다(태아기, 영아기, 유아기, 학령기).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유전적으로 전이되는 상처도 있다.

▶ 치유 방법

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상처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

② 성령의 능력 가운데 부모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③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은혜 체험).

- 주변 사람들(형제, 친척, 친구)

우리에게 있는 상처를 가중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나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일 경우 더욱 그렇다.

비교를 통한 상처를 내게 줄 수 있다.

언어를 통하여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다.

폭력적이거나 폭압적 행동으로 상처를 줄 수 있다.

▶ 치유 방법

① 그들의 행동이 상처에서 나온 것이고,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 나의 상처 때문임을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 배우자, 혹은 자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현실에서 보다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상처 많은 배우자이다. 혹은 자녀이다. 배우자가 상처가 많아서 나의 상처를 불러일으킬 경우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가 훨씬 심각하게 되어 나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배우자는 때로 치유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지 못할 때는 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게 된다.

▶ 치유 방법

① 배우자를 통해 얻으려는 잘못된 기대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② 성령의 능력 가운데 배우자의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이 그를 위한 치유 자가 되어야 한다.

③ 진정한 가족이고 배우자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은혜 체험).

- 기타 (교회, 직장 동료, 친구, 이웃 등등)

이들은 우리에게 있는 상처를 자극하는 일종의 환경과 같은 것이다. 본질적인 상처의 원인이 될 수 없다.

▶ 치유 방법 :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치유를 경험하고 그들을 용납해야 한다.

 

4. 상처의 종류들

1) 거절감

- 모든 상처의 출발이다.

- 관계의 장애를 가져온다.

2) 굶주림(결핍)

- 관계에 장애가 생기면서 오는 상처로서 애정 결핍이다.

- 집착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3) 분노

- 채워지지 않는 데서 오는 상처이다.

- 분노에 대하여 억압이 시작되는 데 이것이 계속적으로 내면을 망가뜨린다.

4) 두려움

- 분노가 표출되거나, 혹 내면에서 표출했을 때 두려움이 엄습한다.

-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하여 온갖 두려움을 느낀다.

▶ 이러한 상처들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자존감(Self-Esteem)’을 낮게 만들고, 이로 인해 다음의 두 가지 뚜렷한 상처 있는 내면을 갖게 된다.

 

5) 열등감

- 자존감이 낮은 상태에서 가장 심하게 느끼는 상한 감정이다.

6) 죄책감

- 자존감이 낮은 상태에서 자신을 정죄하며 더욱 자신의 자존감을 끌어내리는 상한 감정이다.

▶ 상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상처가 다른 상처를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더욱 나쁜 쪽으로 몰고 간다.

 

5. 상처의 발전 과정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사 61:1).

여기에서 주님의 복음의 사역이 ‘마음이 상한 자(broken hearted)’를 고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이 상한 자는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① 상한 마음

- 상처받은 모든 감정을 가진 마음들을 말한다. 자각 증세가 있으나 갈등하면서 지내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 치유 방법

이상한 마음에 대하여 잘 정리해 준다(상처의 거품을 제거해 준다).

상처받은 반대쪽의 영향을 주도록 한다. 특히 치유의 능력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지속적으로 덮어주면 치유가 일어난다.

② 포로 된 마음

- 상처를 올바르게 해결하지 않고 방어 기제(defence-mechanism)를 사용하여 그 상처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상태이다.

- 마귀의 영향을 심하게 받고 있는 상태이며, 각종 집착 등이 나타나고 있다.

▶ 치유 방법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됨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집착에서, 잘못된 자기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움을 선포해야 한다(to proclaim).

③ 갇힌 마음

- 이미 정서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장애 상태에 와 있는 상태이다.

- 심한 우울이나 강박관념 등에 잡혀있을 수 있다(마귀의 영향을 심하게 받을 수 있다).

- 영적으로 귀신들림이 있을 수도 있다.

▶치유 방법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치유의 빛을 그 내면에 비추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모든 속박을 풀어야 한다(to release from darkness).

 

 

 

 

 

 

 

 

 

 

 

 

 

 

 

 

 

 

 

 

 

 

제16장 거절감과 분노

 

【 거절감 】

 

1. 거절감(rejection)이란 무엇인가?

 

1) 거절감이란 과거에 거절 받은 아픈 감정이 부적절하게 작용하는 마음이다. 과거 부당하게 거절당하거나 버림받은 경험이 감정의 형태로 속에 남아 있어서 유사한 상황이나 혹은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부적절하게 튀어나오는 것이 거절감이다.

 

2) 모든 상처의 출발은 이 거절감인 경우가 많다.

거절감은 상한 마음이 되는 첫 출발이다. 어떤 형태든지 감당할 수 없는 거절이나 버림받음을 경험했을 때, 그것이 내면의 상처가 되면서 다른 상처를 불러일으킨다.

 

3)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더 쉽게 거절을 느끼고 그로 인해 더 많은 거절감에 시달린다.

상처가 나름대로 악순환하는 이유는 이 거절감 때문이다. 상한 마음의 소유자는 더 많은 거절감을 느끼고 그것이 더 심한 상한 마음의 상태로 몰아가게 된다.

 

2. 거절감을 갖게 되는 원인들

 

1) 원죄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이 거절감의 시작이다(창 3:23-24).

-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거절당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지만, 인간은 거절당했다는 자체만으로 거절감을 느낀다.

- 어린 시절부터 모든 인간은 소외되고 버림받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

- 부모가 거절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 자녀에게 유전된다.

 

2) 경쟁적인 환경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우리에게 시작된 것이 경쟁이고, 이 경쟁은 모든 사람에게 거절감을 안겨 주었다.

- 형제간의 경쟁과 따돌림, 부모의 편애가 거절감을 갖게 한다.

- 사회에서의 경쟁이 거절감을 갖게 한다(경쟁에서 이기든 지든지 관계없이 경쟁 자체가 거절감을 갖게 한다).

 

3) 상처(거절감)를 가지고 있는 부모

부모는 자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있든지, 없든지). 그러므로 상처가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거절감을 줄 수 있다.

① 원하지 않는 임신과 남녀 차별 - 태중의 거절감과 출생시의 거절감.

② 부모의 부적절한 거절 -일관성 없는 행동 - 지나치게 권위적인 아버지,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어머니

③ 부모의 잘못된 배변 훈련

④ 부모의 과잉보호

⑤ 부모의 편애(편애를 받는 쪽이나 받지 못하는 쪽 모두 다 거절감을 가질 수 있다. )

⑥ 부모의 조건적인 태도 -‘하면’ 보다는 언제나 ‘하지 못하면’이 더욱 깊은 상처를 준다.

▶부모와의 이별은 자녀에게 깊은 거절감을 준다(사별, 이혼에 의한 헤어짐, 환경적인 헤어짐, 등등).

 

4) 주변 사람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거절을 했을 때 우리는 심한 거절감에 시달리게 되고 상처를 입는다.

- 이 경우에 대부분은 원죄와 어린 시절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거절감이 심하게 다시 느껴지는 것이다.

- 거절감 가운데 가장 심한 거절감은 배신감이다.

 

3. 거절감의 증상들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벽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내면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마음의 벽이다(개성, 자아). 사람들은 이것을 의지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마음의 벽이 하나님의 다림줄로 재어 보면 많이 기울어져 있어서 어느 날 무너지기도 하고, 또 그것에 의해 삐뚤어진 반응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암 7:7-9).

이 삐뚤어진 마음의 벽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파괴하기 위하여 숨어서 노리고 있는 가장 위험한 곳이며, 이것은 마치 집안에 벽에 손을 대었다가 뱀에 물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암 5:19).

이렇게 우리의 마음의 벽이 삐뚤어진 이유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권위의 존재(Authority Figure)가 잘못된 영향을 우리에게 주고 바르지 못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유아기) 잘못 되어진 이 관계는 그의 평생을 힘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겔 18:2).

→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권위의 인물로는 누가 해당되겠습니까?

 

【 거절(Rejection)】

 

1. 감정적인 경우(Emotional)

 

1) 슬픔 - 슬픈 상태가 반복적이고 돌발적으로 나타남

- 슬픔은 누적된 거절감에서 오는 아픔을 대치한 감정이다.

- 슬픔은 일종의 감정의 순환기능 장애이다.

 

2) 자기 연민(Self-Pity)

- 자기 연민은 나쁜 습관이면서 동시에 죄이다.

- 거절을 경험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나 도망치는 하나의 방어기제이다.

- 타인을 조작하여 스스로 자기 연민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든다.

 

3) 자기 증오(Self-Hatred)

- 타인에게 거절당한 상처 때문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거절하는 것이다.

- 또 다른 거절감을 맛보지 않으려는 방어 기제이다.

-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자신을 포함해서 자기와 연관된 모든 것을 증오한다.

 

4) 실의(Depression)

- 사회적인 활동에서 움츠러들면서 모든 관계에서 스스로 단절된다.

- 모든 것이 슬프고 희망이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우울한 사고만을 한다.

- 죄의식, 자기 비하, 자기 평가 절하 등이 나타난다.

- 때때로 불면증이 나타나며 의욕이 상실된 상태가 지속된다.

5) 무관심

- ‘정열이 없이 존재함, 정신적인 나태함, 또는 감정의 부재’라고 표현될 수 있다.

- 거절과 실패의 기억 때문에 나타난 일종의 방어 기제이다.

 

2. 지적인 면(Mind)

 

1) 열등의식

- 삶의 현장에서 여러 번 거절당한 상처는 지적인 영역에서 스스로를 열등하게 인정하게 한다.

- 자기가 열등한 여러 가지 이유들을 늘 수집해 쌓는다.

- 열등의식은 이러한 상태가 오래 방치되면서 굳어진 상태이다.

 

2) 불안정

- 사랑의 결핍과 어린 시절에 경험하는 거절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이다.

- 한곳이나 하나의 사고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고의 방황상태이다.

 

3) 실패 의식

- 권위 있는 부모나 교사 등으로부터 지속적인 무가치한 대접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고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4) 죄의식

- 내면이 상처로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경고등이다.

- 어떤 기준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한 경험이 누적되면서 나타난 내면의 상태이다.

- 심한 자책감에 시달릴 때가 많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죄의식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3. 영적인 면(Spiritual)

 

1) 침침함, 죽어감, 꺼짐

- 영적인 부분에 대하여 스스로 관심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 반복적인 거절감의 상처가 자기 존재 속에서, 특히 영적인 면에서 문제를 일으키면서 하나님과 단절을 해 나가는 과정이다.

 

2) 낙심

- 신앙생활 가운데 자주 낙심을 하는 것은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영적 장애이다.

- 영적 생활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간헐적으로 계속되는 장애이다.

 

3) 실망

- 영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버림받은 자로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 영적인 패배상태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이다.

 

4. 성경에 나오는 거절감을 가진 사람들

 

1) 모세

- 모세는 환경적으로 거절감을 갖게 된 사람이다.

출생시의 거절감 - 유아시절의 경험(3개월간 숨겨짐, 나일 강에 버려짐)

바로의 궁궐에서 소외를 심하게 경험 - 다른 민족 속에서의 갈등

- 40세 때의 사건은 그의 거절감을 심하게 강화 시켰다(출 2:14).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대인 공포증이 있었다(출 4:10).

- 이스라엘에게 받은 거절감은 분노로 발전했다

(민 20:10, 시 106:32-33).

▶ 두 가지 중요한 사실

- 대부분의 거절감은 출생시와 유아시절에 갖게 된다.

- 상처의 치유는 상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일하지 못하도록 은혜로 덮어놓은 것이다. 언제고 다시 튀어나올 수 있다.

 

【 분노하는 마음 】

 

1. 분노하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

 

1) 분노하는 마음이란 마음속에서 부적절한 분노가 자주 일어나는 마음으로서 그것 때문에 내면적으로, 관계에 있어서 고통 받는 마음이다.

- 권위의 존재로부터 부적절한 대우를 받았을 때에, 혹은 권위의 존재와 잘못된 관계 속에 있을 때, 이에 대하여 반항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분노이고 이것은 부적절한 분노가 된다.

그러므로 분노는 상한 마음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표출로써 자신의 내면과 관계에의 어려움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2) 분노하는 마음은 분노를 억압했을 때 갖게 되는 것이다.

- 자신보다 힘센 대상에 대하여 분노할 때 억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억압은 분노를 자신의 내면에 쌓아두는 것일 뿐, 적절한 처리가 되지 못한다.

 

3) 분노하는 마음에는 반드시 두려움이 뒤따른다.

- 억압되었던 분노를 발하거나 혹은 속으로 분노했을 때 이제 이 분노에 대한 벌을 받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뒤따르고 그러므로 분노하는 마음은 필연적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2. 분노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원인들

 

1) 원죄

죄의 결과로 하나님과 단절되면서 인간은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마음을 계속 갖게 되고 이것은 인간에게 있는 지속적인 죄와 분노의 원인 된 것이다.

-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갖게 된 버림받은 마음과 굶주린 마음이 분노의 원인이 되었다(가인의 경우).

- 원죄의 유전 가운데에는 분노의 유전이 뚜렷하게 들어가 있다(가인의 후예-창 4:23-24).

 

2) 가정환경

① 분노하는 부모 : 분노는 내리 분노이다. 왜냐하면 억압된 분노는 자기보다 힘센 대상에게 가졌던 분노의 감정을 억압한 것이기에 자기보다 약한 대상인 자녀에게 표출하게 되고, 자녀는 역시 그 분노에 의해 분노를 갖게 되지만, 어쩔 수 없이 억압하면서 분노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② 결손 가정 : 부모가 없음으로 인해서 오는 어려움을 겪을 때, 막연한 대상에 대하여 분노를 품게 된다. 그러나 그 상황이 분노할 상황이 아니기에 억압을 하게 된다.

③ 사랑을 주지 않는 부모 : 부모가 사랑을 주지 않으면 굶주림이 오고 필연적으로 분노를 갖게 된다. 그러나 부모이기에 억압하거나 망각 속에 넣을 수밖에 없다. 특히 부모가 편애를 하는 경우 분노가 심하게 된다.

④ 왜곡된 사랑 : 왜곡된 부모의 사랑은 대부분 자녀를 무시하고 자기 식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자녀의 마음속에 직접적인 분노가 있을 뿐 아니라 거절감과 굶주림에서 발전한 분노를 갖게 된다. 그러나 부모가 힘이 있으므로 억압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분노하는 마음이 된다.

 

3) 망상

- 자기기만이 심화될 경우 나타나는 것으로 영적인 장애이기도 하다.

- 일어나지도 않고 단서도 없는데 상상 속에서 단정해 버리는 그런 내적 문제 상태이다.

- 피해망상, 의처증, 의부증 등이 여기에서 발전해 나간다.

 

4) 분개 및 쓴 뿌리

- 용서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 분개이다.

- 이것이 우리 속에 자리 잡을 때 쓴 뿌리가 된다.

 

5) 비판적 성향

- 비판적 성향은 자기 연민의 공격적 변형이다.

- 타인을 비참하게 만듦으로써 자기 비하를 감추려는 방어기제로 영적인 피해를 가져온다.

 

6) 지배욕과 소유욕

- 심한 거절감에서 온 상처에 대한 공격적인 반응으로써 지배욕이 소유욕을 유도하고 소유욕이 지배욕을 부추긴다.

- 자기 인생에 대한 비하에서 나온 상처 난 감정으로 남의 인생을 대신 살려는 상한 감정의 표출이다.

 

7) 조작

- 사랑을 흉내 내지만 오히려 사랑을 말살시키는 악의가 있는 반응이다.

- 심한 두려움과 거절감의 상처에서 온 것으로 거짓을 통하여 배후를 감추려고 한다.

- 제한된 자기 시각 속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며 다른 사람의 설명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 자기가 모든 것을 통제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어떠한 대가를 주고라도 상황을 주물러야 한다는 생각에 잡혀 있다.

- 조작자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불신감을 가지고 있다.

 

3. 성경에 나오는 분노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1) 가인 (창 4:3-8)

-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으실 수 없었던 이유는 가인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소원’ 때문이었다(창 4:7).

죄의 소원이란 ‘상한 심령’을 말하는 데 이것이 일종의 ‘반항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못하신 것은 그 상처 때문이었고, 결국 분노는 또 다른 거절을 경험하게 만드는 사실에 이르게 된 것이다.

- 거절감이 분노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가인을 죄에 의해 타락한 세상 사람의 대표로 볼 때, 죄의 본질은 ‘상처’인 것이다.

▶ 두 가지 중요한 사실

- 분노의 희생자는 반드시 소리를 지른다(창 4:10).

- 상처는 자신의 내면속에서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내고, 상처가 많은 사람은 또 다른 상처의 사람을 만들어 내어서 세상에 상처(죄)가 증폭된다.

 

2) 요나

-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행 배를 탄 것은 분노하는 마음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분노가 솟았지만, 하나님이기에 항거할 수 없고, 또 사랑하시는 것이 당연하기에 불평할 수 없어서 도망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가 배를 타자마자 배 밑으로 내려가 깊이 잠든 것은 분노 이후에 오는 두려움 때문이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이 폭풍은 나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

- 니느웨가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에 분노한 것과 박 넝쿨이 말라죽은 것에 분노한 것은 억압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 세 가지 중요한 사실

- 분노가 있는 사람은 은혜를 쉽게 잊는다(쏟는다). - 물에서 구원받은 후 요나의 분노

- 분노하는 사람은 분노 때문에 자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 - 죽는 것이 낫다.

- 분노를 맞대응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을 때 분노는 힘을 잃는다. - 하나님의 사랑

 

 

 

 

 

 

 

 

 

 

 

 

 

 

 

 

 

 

 

 

 

 

 

 

 

 

제17장 굶주림과 두려움

 

【 굶주린 마음 】

 

1. 굶주림이란 무엇인가 ?

 

1) 굶주린 마음이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상처가 아니라 지속적인 애정 결핍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 거절감은 순간의 경험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굶주림은 지속적인 결핍상태에 의해서 형성되는 상처이다.

 

2) 굶주린 마음은 그 결핍감 때문에 느끼는 불안과 그 굶주림을 채우려는 잘못된 노력에 의한 관계 파괴, 그리고 채우지 못하는데서 오는 분노 등에 의해 고통 받는 마음이다.

- 인간은 굶주림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굶주림을 채우려고 애쓰게 되는데, 그 과정 전반에서 또 다른 거절감과 이로 인한 분노와 불안, 두려움 등의 문제가 나타난다.

 

2. 굶주린 마음을 갖게 되는 원인들

 

1) 원죄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면서 인간에게 찾아온 것이 굶주림이다(창 3:18-19).

-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후에 인간이 겪게 된 고통은 육신적으로 배고픈 환경만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데서 오는 굶주린 마음의 고통이었다.

- 인간은 근본적인 배고픔 속에 살고 있다(암 8:11-13). 이 근본적인 배고픔을 다른 것으로 채우고 살려고 하지만 결국 삶의 어느 시점에 가면 그것으로 채울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2) 가정환경

인간의 근본적인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밖에는 없다. 가정은 그런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도록 막아주는 울타리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거절감을 갖게 함으로써 사랑의 공급이 끊어지고 이로 인해 굶주림의 고통에 더욱 시달리게 한 경우에 심한 굶주린 마음을 갖게 한다.

① 결손 가정 : 부모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모든 경우는 다 굶주린 마음을 갖게 만든다.

② 사랑을 주지 않는 부모 : 부모가 상처에 의해 사랑을 주지 않을 때에는 굶주린 마음을 갖게 된다. (무관심, 편애에 의한 소외).

③ 왜곡된 사랑 :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하는 방식이 자기중심적이어서 자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굶주림을 경험하게 된다.

 

3) 주변 사람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배우자 포함)에 의해서 굶주린 마음이 생긴다기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굶주림을 채우지 못하거나 더 심하게 느끼게 하는 경우가 있다.

- 굶주린 마음은 이미 상한 마음이기 때문에 쉽게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순간적으로 채워지는 것 같은 만족감이 있다가 곧 사라진다. 그러므로 더욱 치유가 쉽지 않다).

 

3. 굶주린 마음의 증상들

 

1) 내면의 상태

-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인한 우울함이 있다. 언제나 이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 속에 살아간다.

-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또 그렇게 갈구하는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비하한다.

- 시기심과 경쟁심에 스스로 시달리고, 그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 남에 대하여 속으로라도 우월감을 가져야 편하다.

 

2) 관계의 장애

-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갈구한다. 처음에는 굉장히 좋은 것 같으나 나중에는 사람의 진을 뺀다.

-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고 주목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받을 수 없을 때에는 무리한 행동을 하게 되고 이것이 관계를 힘들게 한다.

- 사람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굉장히 공격적이 되고 비난을 하게 된다.

- 여러 사람이 더불어 친한 그룹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때로 심한 경쟁과 시기의 관계로 끌고 간다. - 이기적인 모습 (욕심이 많은 사람)

- 사람들 앞에서 위선과 교만을 통해 우월감을 나타내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갖게 한다.

- 공격적인 사람

- 질리게 하는 사람

- 되지 못하게 교만한 사람

 

3) 영적인 장애

- 이단이나 건강하지 못한 신앙 형태에 빠질 수 있다.

- 이적이나 현상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신앙 스타일을 가질 수 있다(기복적인 신앙).

-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 신앙의 성장이 어렵다.

- 영적인 교만이나 우월감을 과시하는 신앙 행태를 보일 수 있다.

 

4) 포로 된 상태

- 굶주림을 채우기 위한 잘못된 집착이 일어날 수 있다(사람, 일, 돈, 명예, 물건 등등).

- 심한 경우에는 ‘중독’이 일어날 수 있다(일, 술, 담배, 마약, Sex, 도박, 오락, Shopping, 등등).

 

중독 현상

 

- 몸이 피곤하고 건강을 해쳐도 계속한다.

-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 가족이나 주변과의 관계를 망가뜨리면서도 계속한다.

- 그것에 대한 생각이 항상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 그것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심심하고 불안하고 어쩔 줄 모른다.

- 잠시는 의지로 끊는 것 같으나 곧 그런 상황을 찾아가고 거기에 빠져든다.

 

1. 성경에 나오는 굶주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

 

1) 야곱

- 야곱이 굶주린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 이삭이 장자인 에서만을 편애한 것 때문이었다.

- 야곱이 장자권과 축복에 대단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아버지 이삭의 축복, 얍복 나루에서의 축복 간구).

- 야곱이 라헬과 그의 소생인 요셉을 사랑한 것은 일종의 굶주림에서 오는 집착이다.

- 야곱이 주변의 사람들과 경쟁관계에 있던 것은 굶주린 마음 때문이다.

-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한 것은 굶주린 마음으로 살아온 삶 때문이다(창47:9).

 

▶ 세 가지 중요한 사실

- 아버지의 편애는 자녀에게 굶주린 마음을 갖게 한다.

-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무리한 집착을 하게 되고 그것이 인생과 관계를 망가뜨린다.

- 벧엘과 얍복 나루에서의 예배의 체험이 그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체험들이었다.

 

2) 다윗

- 다윗은 막내로 태어나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났고, 이것이 그에게 굶주린 마음을 갖게 했다.

- 다윗은 부인에게 집착을 했다(미갈, 아비가일, 밧세바).

- 다윗의 자식에 대한 집착은 모두 굶주린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암논, 압살롬, 밧세바 사이에서 난 아이).

- 다윗이 밧세바와의 사건을 저지르게 된 것은 내면에 있던 굶주린 마음 때문이었다.

 

▶ 두 가지 중요한 사실

- 굶주림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고 있을 때에는 치유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성이 사라질 때는 그 상처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 굶주린 마음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면 갈망하는 마음이 되고 그 굶주림이 하나님의 사랑의 채워지는 것이 은혜의 체험이다. - 다윗의 시편은 모두 이런 은혜 체험의 산물이다.

 

 

【두려워하는 마음】

 

1.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

 

1)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마음속에 부적절한 두려움이 자주 엄습하는 것으로 그것 때문에 내면적으로 평강이 없고, 관계에 있어서 고통 받는 마음이다.

- 억압되었던 분노를 발하거나 혹은 속으로 분노했을 때 이제 이 분노에 대한 벌을 받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뒤따르고 그러므로 분노하는 마음은 필연적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 그러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분노 다음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실 상처가 많은 내면의 사람은 다 이러한 두려움에 자주 잡힌다.

 

2) 두려움은 내면을 지탱하는 어떤 것이 무너져 내릴 때 느끼는 감정이다.

- 사람은 자아를 지탱하고 있는 의지나 열정 등이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부담이나 실패, 좌절, 거절감등에 의해 내면이 무너질 때가 있다. 이때 매우 심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2.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는 원인들

 

1) 원죄

죄의 결과로 사망이라는 엄청난 벽을 모든 인간은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지속적인 실패와 좌절을 맛보면서 인간은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나무 그늘에 숨은 것은 두려운 마음 때문이었다.

- 원죄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두려움의 부분이다.

 

2) 가정환경

① 상처를 자주 주는 부모 : 부모가 자주 상처를 주는 언사를 하게 되면 자녀는 거기에서 어떤 버림받음과 상처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특히 부모가 분노를 자녀에게 퍼 부을 때에는 자녀는 내면적으로 동일한 분노를 느끼면서 동시에 그 분노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② 심한 싸움이 잦은 부모 : 부모가 서로 심하게 싸울 때, 자녀는 상당한 공포를 느끼고, 특히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데서 오는 두려움이 심하게 된다.

③ 불안정한 가정환경 : 가정이 여러 가지 이유로 안정감이 없을 때(아빠의 장기간 출장과 이로 인한 별거, 잦은 이사로 인한 전학, 부모의 사망이나 이혼 등에 의한 격심한 가정환경의 변화 등은 두려움을 갖게 하는 원인이다.

④ 왜곡된 사랑에 근거한 자녀 교육 : 왜곡된 부모의 사랑은 자녀 교육에서 두 가지로 드러난다. 하나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체벌이 심한 경우이다. 또 하나는 너무 과잉보호하는 경우이다. 이 두 가지 경우 다 두려운 마음의 상처를 갖게 만드는데, 특히 전자의 경우는 더 그렇다.

 

3) 주변 사람들

성격적으로 강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심하게 책임 추궁을 당한 경우 이것이 상처가 되어 두려운 마음의 상처를 계속 갖게 된다. 갑자기 책임 추궁을 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리게 된다.

 

3. 두려워하는 마음의 증상들

 

1) 내면의 상태

- 무엇인가 정리되지 않은 내면적인 불안함에 시달린다.

- 갑자기 두려워지면서 불안해진다.

- 어떤 일이 일어나면 필요이상으로 놀래고 두려워한다.

-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2) 관계의 장애

- 강한 사람이나 심한 이야기를 들은 경우 그 사람이나 그곳에 가기를 꺼려한다.

- 문제가 생기면 책임 추궁을 두려워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 전가를 하려고 한다.

- 모든 종류의 훈련(Discipline)을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

- 새로운 일에 대하여 부정적이거나 추진력이 없이 중도에 그만두고 싶어 한다.

 

3) 영적인 장애

-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신뢰가 늘 흔들린다.

- 신앙생활이 기쁨이라기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 영적인 진보가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적인 Up & Down을 경험한다.

-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 두렵고 멀기만 하다.

 

4) 포로 된 상태

- 심한 불안감을 이기기 위해 약물에 집착하거나 물질에 매어 달린다.

- 피해 망상적인 감정에 시달린다(건강 염려증).

- 안전하게 자기를 표출할 수 있는 술 중독, TV 등에 빠진다(두려워하는 마음 때문).

 

4. 성경에 나오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1) 여호수아

- 모세의 사망 이후 그가 느낀 것은 심한 두려움이었다.

모세라는 존재가 없다는 사실 자체에서 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모세 없이 하나님과 직접 만난다는 것에 대하여 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모세 없이 인도해야하는 백성에 대하여 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 아이 성의 가벼운 패배 이후에 그가 느낀 두려움은 정도를 넘어선 것이었다(수 7:5-9).

 

▶ 하나님의 전폭적인 돌보심과 함께 하심은 이런 두려움의 사람을 용사로 만드셨다. 하나님 안에서 두려움이 치유된 모델이 바로 여호수아이다. 그가 마지막에 백성 앞에서 신앙의 선언을 담대하게 하는 순간 그는 두려움에서 완전히 치유된 사람이었다(수 24:15).

 

▶ 세 가지 중요한 사실

-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새로운 상황에 대하여 특히 못 견뎌 한다.

-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사람이나 물건, 제도 등을 심하게 의지하려고 한다.

-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작은 실패도 너무나 크게 받아들인다.

 

 

 

 

 

제18장 열등감과 죄책감

 

【 열등의식 】

 

1. 열등감이란 무엇인가 ?

 

1) 모든 종류의 상한 감정은 공통적으로 열등감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원죄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은 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2) 열등감은 자기 자신에 대해 평가 절하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마음이다. 실제 능력이 있고 없고 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자신 없어하는 것이 열등감이다.

 

2. 열등감을 갖게 되는 원인들

 

1) 원죄

죄의 결과로 눈이 밝아져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본 것은 바로 인간 스스로가 자기 열등감속에 빠지기 시작했음을 말한다.

- 인간은 원래 조물주 하나님에 비해서 열등하게 지어졌다. 그러나 그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에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을 가지고 하나님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죄에 빠졌고 그것이 열등감을 갖게 만든 것이다.

- 죄 때문에 자기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더 깊이 열등감을 갖게 된다.

2) 가정환경

① 결손 가정(고아, 편부모, 결손 가정, 떨어져 사는 가정) : 결손 가정은 자녀에게 깊은 열등감을 준다. 왜냐하면 그것이 상한 감정을 주기 때문이다.

② 문제가 있는 부모(사회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모, 인격적 장애가 있는 부모, 부부 싸움, 바람피우는 아버지) : 부모는 자녀에게 모델이다. 그런데 부모가 문제가 있을 경우 자녀는 심각한 자기 비하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③ 편애와 비교가 심한 가정 : 편애와 비교는 결국 모든 자녀를 열등감속에 몰아넣는다.

3) 자기의 내적인 상태

모든 종류의 상처는 열등감을 일으킨다.

① 버림받은 마음(거절감) : 거절 받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편 거절당한 자기에 대해 스스로 비하하고 열등감을 갖는다(나는 버림받아 마땅한 존재이다).

② 굶주린 마음 :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애쓰는 경우 스스로가 비참해지고 열등감을 갖게 된다.

③ 분노하는 마음 : 분노를 억압하는 것은 내적으로 분노하는 것이고 이것은 심한 열등감을 갖게 한다.

④ 두려워하는 마음 : 두려워하는 마음은 벌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 소외당함에 대한 두려움 등인데 결국 이런 두려움에 떠는 자신에 대하여 열등감을 갖게 된다.

4) 자기의 외적 조건 : 심각한 이유는 아니지만 자신의 외모적인 특성이나 이름, 학력 등이 열등감을 갖게 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비교에서 나온 상처이다.

 

사단이 가장 치명적인 무기로 생각하며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낮은 자존감이다.

낮은 자존감은 열등감, 자신을 부족하게 느끼는 것, 자신의 가치를 무시하는 감정들이다.

자신을 스스로 무시하며 비하하며 학대하며 스스로 고통을 받는 감정들이다.

개인적으로 놀라운 영적 경험과 믿음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감정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억압하고 있다.

그러면 낮은 자존감은 어떤 파괴력을 갖고 있는가?

① 낮은 자존감은 잠재력을 마비시킨다.

② 낮은 자존감은 비전, 꿈을 파괴한다.

③ 낮은 자존감은 대인관계를 해를 끼친다.

④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방해한다.

각자의 자존감을 형성시켜 주는 것은 외부의 세계와 내부의 세계로부터 온다. 외부에서 우리를 평가해 주는 것이 낮은 자존감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준다. 가족들에게 반사된 자기 모습과 평가가 내가 누군가라는 자존감을 형성한다. 그래서 부모의 태도가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어렸을 때 자녀들을 귀하게 키우지 않는 자녀들은 평생을 낮은 자존감으로 고생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주 중요한 타자(very significant others)이다. 세상에 자녀들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만나서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할 때 자녀들은 당연히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된다. “사랑받고 있다.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라는 것들이 말없이도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녀들에게 부모가 언어로 폭력을 행사하고 저주와 욕으로 비하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낮은 자화상을 갖게 된다. 그래서 나중에 누가 자신을 사랑해주어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 “부모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는데 누가 나를 사랑하겠어? 어떻게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겠어?” 하면서 사랑을 주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한다. 또한 자기를 비하하기 때문에 결혼을 할 때에도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해서 아주 형편없는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 문제가 있는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결혼도 한다. 자신도 가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고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편하게 생각한다.

또한 우리의 자존감은 잘못된 자신의 내부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아담의 자손으로서 유전된 죄의 뿌리가 우리들 자신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낮은 자존감은 어떻게 치유 받을 수 있는가?

낮은 자존감은 개인의 가치와 평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때만이 회복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이렇게 질문해보아야 한다.

▶무슨 권한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깊이 사랑하는 존재를 비하하고 멸시하는가?

▶무슨 권한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높이 대우해주신 존재를 비하하고 멸시하는가?

▶무슨 권한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높이 가치를 부여한 존재를 비하하고 멸시하는가?

▶무슨 권한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완전하게 필요를 채워주시는 존재를 비하하고 멸시하는가?

▶무슨 권한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심하게 계획하신 존재를 비하하고 멸시하는가?

▶무슨 권한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존재를 비하하고 멸시하는가?

▶무슨 권한으로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값진 존재를 멸시하고 비하하는가?

▶무슨 권한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훌륭한 예술품으로 만든 자신을 비하하고 멸시하는가?

우리 자신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없다. 만일 계속 자신을 비하하고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솜씨에 대하여 비하하고 무시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길을 배워야 한다. 자신에 대하여 소중한 존재, 가치 있는 존재, 창조적인 예술품으로 대하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남을 귀하게 여기고 남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길도 배워야 한다.

낮은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칫 겸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것은 겸손과 다르다. 진정으로 겸손한 자들은 자기에 대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점수를 주며 사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의 외모는? 나의 학벌은?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근거해서 점수를 준다. 하지만 낮은 자화상을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점수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잘 하느냐? 외모가 어떠하냐? 우리가 얼마나 가졌느냐? 에 따라 평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점수를 주는 것은 자녀에 대한 존재에 대한 점수이다.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존재에 근거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생명에 근거한 것이다. 생명에는 값이 다를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을 평가하는 것도 이렇게 하나님이 존재와 생명에 대하여 주시는 점수로 평가해야 한다. 그럴 때 나 자신이 얼마나 귀한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귀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 자신을 볼 때만이 낮은 자화상은 치유된다. 또한 자신에 대하여 낮은 자화상을 갖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풀어놓아주어야 한다. 또한 낮은 자화상을 갖게 한 환경들도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감사함으로 수용하고 받아드려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로 다시 서는 것이 인생을 파괴하지 않고 값지게 살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

 

3. 열등감의 증상들

 

1) 내면적인 문제 - 두려움, 불안, 자기 학대

- 작은 실수나 문제에도 심하게 불안해하고 자기 비하와 자책을 한다.

- 열등감이 많은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 포기한 것 같으나 굶주림에 의해서 오히려 내적으로는‘욕심’을 많이 갖고,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

- 열등한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데서 오는 완벽 주의적 증상이 있다.

2) 관계의 장애

- 지나치게 겸손하고 희생을 자처하여 겉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는 좋아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감사가 없고 불만이 언제나 상존한다.

- 이유 없는 분노를 느끼며,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같은 피해 의식이 늘 있다.

3) 영적인 장애

-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받지 못하고 ‘나 같은 것이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 가운데 있게 된다.

-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오히려 큰 부담으로 가지거나 뒤로 후퇴한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이 매우 늦다.

4) 포로 된 상태

- 의존적 자아를 갖게 되어 사람에게 종속된다.

- 부담을 주는 일은 다 포기하게 되어 결국 무능력하고 소용없는 자로 전락한다.

- 모든 정상적인 관계가 불가능해지고 대인 기피증을 갖게 된다.

 

4. 성경에 나오는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

 

1) 사울

- 처음에 나타난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다(삼상 10:22).

- 열등감에서 나온 겸손

- 그는 출신도 훌륭하고 인물도 좋았으나 자신은 열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삼상 9:1-2, 21).

-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제사를 드린 것은 열등감에서 나온 두려움 때문이었다(백성이 자기를 버리고 다 떠날 것 같은 생각,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자신이 없다).

- 다윗을 향해 갖게 된 열등감은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삼상 18:7-9).

스스로 자신감을 잃고 평강을 잃었다.

모든 결정이 열등감을 감추려는 부적절한 것이었다(딸의 혼사).

주변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점점 어려워졌다(아들, 딸, 사위, 제사장, 백성).

다윗을 쫓는 데 온 정력을 낭비하고 결국 블레셋에게 전사당했다.

▶ 두 가지 중요한 사실

- 열등감은 때로 겸손으로 나타날 수 있다(드러내어 인정하고 적절히 처리되면).

- 열등감을 감추려는 모든 행위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한다.

2) 베드로

- 베드로는 깊은 열등감의 소유자이다.

그가 계속 장담하고 큰소리친 것은 열등감을 감추려는 행위였다.

물 위를 걷다가 파도를 보고 빠진 것은 그의 내면의 열등감 때문이었다.

-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고, 결국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고기나 잡으러 가련다”(요 21:3)라고 말한 것은 이 실패의 기억으로 더욱 강화된 그의 열등감 때문이었다.

- 주님 앞에 솔직히 자기의 사랑이 한계가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한 후, 성령을 받고 나서야 그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두 가지 중요한 사실

- 열등감의 소유자들 중 외향적인 사람들은 그것을 감추려고 큰소리를 잘 친다.

- 성령께서 역사 하시면 열등감이 강한 사람도 담대해지고 능력을 갖게 된다.

 

【 죄의식 】

 

1. 죄책감이란 무엇인가 ?

 

1) 모든 종류의 상한 감정은 공통적으로 열등감과 함께 죄책감을 일으킨다. 이 가운데 열등감은 막연히 자기를 비하하는 것이고, 죄책감은 어떤 기준을 제시하고 그것에 미달된 부분을 놓고 자기를 정죄하는 감정이다.

2) 죄책감은 부적절하게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죄의식에 시달리는 상한 감정이다.

- 실제 상황으로는 넘어갈 수 있는 것을 혼자 상한 감정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이 죄책감이라는 상한 마음이다.

3) 죄책감은 자기 자신 및 남에 대해서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 죄책감은 자기 뿐 아니라 남에 대해서도 심한 정죄 속에 고통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용서를 통한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정죄를 통한 두려움을 많이 느끼는 내면을 갖게 된다.

 

2. 죄책감을 갖게 되는 원인들

 

1) 원죄

타락의 결과로 죄인 되어 낙원에서 추방당한 후 모든 인간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 원죄가 꽉 찬 세상은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를 지키는 방법으로 남에게 죄책감을 강요하는 세상이 되었고,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계속되어 결국 사람들이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게 만들었다.

 

2) 가정환경

① 결손 가정 : 가정의 결손은 부모의 마음 뿐 아니라 자녀에게도 깊은 죄책감을 넣어 준다. 특히 부모가 결손의 책임이나 문제를 자녀에게 조금이라도 전가한다면 상태는 더욱 심해진다(너 때문에…).

② 상처가 있는 부모 : 상처가 있는 사람은 모든 문제를 본인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남에게 전가를 하게 된다. 그런데 그 대상으로 자녀가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자녀는 죄책감을 갖게 된다.

③ 율법주의적인 가정 : 스스로 높은 기준과 신앙적 열심을 갖는 부모(두려움과 굶주린 마음, 버림받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의 도덕적 신앙적 기준 제시는 자녀에게 죄책감을 심하게 넣을 수 있다.

 

3) 삶에 있어서의 실패의 경험

삶 가운데 심한 실패의 경험은 인간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데, 특히 이 실패가 배신에 의한 것이어서 용서의 문제가 걸려 있을 때에는 더욱 심하다.

→ 죄책감의 문제는 용서의 문제와 밀접하다.

 

3. 죄책감의 증상들

 

1) 내면적인 문제

- 언젠가 나쁜 일이 닥칠 것 같은 불안감 속에 산다.

- 심각한 죄책감이 작은 실수에도 찾아와 내면을 뒤흔들어 놓는다.

-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는 것이 좋으면서도 그것을 잃을까하는 두려움에서 자기를 계속 정죄 한다(더 기도하고 더 잘해야 돼!).

- 정죄 받지 않기 위하여 자기를 계속 자아 비판하면서 학대해 나간다.

- 감추기 : 자기를 감추려고 노력하지만 잘 감추어지지 않을 때마다 심한 고통을 느낀다.

 

2) 관계의 장애

- 지나친 희생과 봉사 : 남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자기희생을 하려고 함(일에 열심)

- 죄에 대하여 민감 : 죄나 스캔들에 대하여 아주 민감하고 심하게 정죄함.

- 정당한 비판도 받지 못하고 심하게 반발함. 그리고 본인은 그것 때문에 혼자 괴로워 함.

 

3) 영적인 장애

-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함.

- 습관적인 회개로 신앙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함.

- 마귀에게 공격을 받아 자주 넘어짐.

 

4. 성경에 나오는 죄책감을 가진 사람들

 

1) 사도 바울

- 사도 바울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특히 죄책감의 문제는 그에게 심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랑으로 이 죄책감을 극복한 사람이다.

로마서 8:31-39를 보면 그의 죄책감과 이것을 극복하는 치유의 장면이 다 나온다.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공개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딤전 1:15-16).

- 바울이 이런 죄책감을 갖게 된 것은 엄격한 부모, 율법 주의적 환경에서의 성장 때문이었다.

2) 다윗

- 시편 51편에 나타난 다윗은 심한 죄책감과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한 사람이다.

3절: 심각한 죄의식

4절 : 사람들의 정죄에 시달리기를 거부하는 모습

5절 : 자기가 근원적으로 죄인임을 인정

7-12절 : 죄로 인한 버림받음의 두려움

16-19절 : 죄 용서의 체험

 

 

 

 

 

 

 

 

 

 

 

 

 

 

 

 

 

 

 

 

 

 

 

 

 

 

제19장 상처와 영적 전쟁

 

1. 상처는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온 것이고 그 거짓 선지자는 사단의 영향과 조종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2. 우리 안에 있는 상처를 이용해서 우리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고 우리의 삶을 파괴하려는 마귀의 공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것이 영적 전쟁이다.

▶ 영적 전쟁에서 중요한 세 가지는

- 원수의 전략을 간파하는 것(Recognizing)

- 그들의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것(Refusing)

- 그것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는 것(Resisting)

 

♦ 간파하는 것 (Recognizing)

 

1. 마귀가 하는 일의 세 가지 속성(요10:10)

- 도적질하고(steal)

- 죽이고(kill)

- 멸망시키는 것(destroy)

→ 이것이 상처가 인간 속에서 역사하는 경우의 삶의 모습이다. -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속성(요 10:10)

- 생명을 얻게 하고,

- 이것이 가득 차게 하는 것이다.

 

2. 마귀가 우리에게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 권위(Authority)

이 권위란 원래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일부를 위임해 주신 것이다(사랑하시므로). 이것을 자유 의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사탄 마귀는 이 권위를 갖기 위하여 인간을 유혹했고, 인간의 동의하에 이 권위를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이 타락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바로 이 인간이 빼앗긴 권위를 되찾아 주시는 일이었다(골 2:14-15).

 

3.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마귀의 공격을 받는가?

→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잃었던 권위를 되찾았지만, 우리의 권위를 다시 빼앗으려는 마귀의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면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기에 더 심하게 공격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4. 마귀가 우리를 공격할 때 주로 공격하는 네 부분은 어디인가?

1) 생각 (Mind)

2) 마음 (Heart) - 태도(마음가짐), 감정

3) 입(Mouth) - 언어

4) 관계 (Relationship) - 일치됨을 파괴하고 갈등을 유발하려 함.

 

♦ 거부하는 것(Refusing)

 

1. 모든 사람에게 있는 두 개의 문이 무엇입니까?

- ‘음부의 문’(The Gate of Hades - 마 16:18)

- ‘천국의 문’(The Gates of Heavenly Kingdom - 마 16:19)

 

2.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주님의 사람이 된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 천국의 열쇠(마 16:19)

 

3. 천국의 열쇠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 매는 것(Binding)

- 푸는 것(Loosing)

이 매는 것과 푸는 것은 수동적으로 할 수도 있고 공격적으로 할 수도 있다. 이 중에서 수동적으로 하는 것을 ‘거부’(Refusing)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거부입니까?

- 생각 속에서 마귀가 주는 생각은 잘라내고(Binding), 하나님이 주신 생각은 받아드린다 (Loosing).

- 마음속에서 마귀가 주는 감정과 태도는 거부하고(Binding), 하나님이 주신 느낌과 마음가짐을 붙잡는다(Loosing).

- 말을 할 때 마귀가 주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고(Binding), 하나님이 주신 언어를 사용한다(Loosing).

- 관계를 깨고 단절시키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Binding), 일치를 이루기 위한 부분을 노력 한다(Loosing).

 

♦ 물리치는 것(Resisting)

 

1. 영적 전쟁에서 우리는 무엇을 통해 음부의 문을 닫고 하늘의 문을 열 수 있습니까?

- 기도 (Praying)

- 언어 (Speaking)

- 삶 (Living)

 

2.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영적 전쟁을 수행할 수 있습니까?

- 우리에게 있는 모든 영적 장애들을 제거할 수 있다. 두려움, 의심, 불순종하는 마음들.

- 우리 자신의 의지를 주님께 내어 드릴 수 있다. 주님께 마음을 여는 것 이다.

- 성령님에 의해 인도 받을 수 있다 - 영적 깨달음, 영적 감동, 영적 계시

- 성령님에 의해 힘을 공급받을 수 있다. 영적 영향력, 성령님이 흘러넘치는 것이다.

 

3. 말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영적 전쟁을 수행할 수 있습니까?

- 마귀의 세력을 향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므로

- 마귀의 세력을 향해 십자가의 공로를 선포함으로

- 마귀의 세력을 향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선포함으로

 

4. 삶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영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습니까?

→ 경건 생활

 

♦ 상처를 방어 하면서 우리가 쓸 수 있는 도구들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의 무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는 다음 두 가지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예수 이름은 그의 능력을 의미한다. 모든 악한 것들을 내어 쫓고 병든 것들을 치유하는 능력이다. 모든 염려와 불안, 근심, 두려움 등이 계속 엄습할 때, 이 이름을 사용하여 이 능력으로 내어 쫓을 수 있다.

 

-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 있는 공로이다. 우리를 향해 끝없이 정죄해 오는 영적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의의 흉배이다. 죄책감이 들고 열등감에 시달릴 때 이 이름의 공로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통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 분이 우리의 주되심의 선포이다.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은 예수님이심을 선포하고 우리는 그의 사람임을 선포함으로 우리의 내면을 자기의 영역으로 삼으려는 모든 공격을 막는 것이다. 조상의 모든 잘못된 상처의 유전을 이 이름의 다스림으로 막을 수 있다.

 

2.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이 죄 문제에는 상처의 문제도 들어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공로)는 치유를 위한 강력한 도구이다. 특히 상처가 우리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있을 때, 그것을 방어(blocking)해 주는 능력이 있다.

 

- 감추임에서의 해방(드러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감추임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계속 감추려고 하고 숨기려고 할수록 더욱 더 그 상처에 잡히게되는데, 본인이 그것을 알면서도 그 감춤에서 벗어날 수 가 없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벌거벗은 채 그대로 다 드러나신 분이다. 그 십자가의 능력이 감추어야 한다는 공격을 막아 준다.

 

- 권리 포기

십자가에서 주님은 완전한 버림받음을 경험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능력이다. 우리의 상처가 계속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은 우리가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잡혀서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랑과 관심, 물질, 명예 등을 잃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상처에 지속적으로 잡혀있게 된다. 십자가는 다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을 줌으로 이 지속적인 상처의 공격을 막아 준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치유하는 능력의 도구이다. 주님은 단순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보혈을 흘려주심으로 우리 가운데 온전한 치유를 선포하셨다.

 

- 모든 허물(부끄러움)을 가리는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허물을 가리는 능력이 있다.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가죽옷이 지어졌을 때 흘린 피가 보혈을 의미한다. 레위기에 속건제를 드릴 때 흘린 제물의 피가 보혈을 의미한다. 자기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아프고 추한 기억들이 자기를 계속 힘들게 할 때 우리는 이 보혈을 사용하여 덮을 수 있다.

 

- 깨끗하게 하는 능력

예수님의 보혈은 죄를 씻는 능력이 있다. 더러운 죄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죄를 씻어 준다. 온갖 유혹과 욕심, 음란, 도박, 교만 등 굶주림에서 오는 상처를 통하여 공격해 들어오는 것들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를 깨끗이 씻어 새롭게 함으로 이런 생각들에서 우리를 지키신다.

 

- 의심을 사라지게 하는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언약의 피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아니하신다는 사랑의 언약을 의미한다. 마음에 의심이 들고 두려움이 있을 때 이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그 지속적인 불신을 막을 수 있다.

 

→ 어떻게 사용하여 Blocking하는가?

 

1. 열린 문을 통하여 상처의 세력들이 밀려 들어와 우리를 공격할 때 직접 사용할 수 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게 하옵소서!

-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를 지켜 주옵소서!

 

2. 기도할 때마다 근원적으로 Blocking할 수 있다.

 

3. 상처가 많은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적인 기도할 때 사용할 수 있다.

- 개인을 위하여

- 가정을 위하여

- 공동체를 위하여

- 사회를 위하여

 

4. 찬양을 하면서 사용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 보혈 찬양,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는 찬양

 

 

 

 

 

 

 

 

 

 

 

 

 

 

 

 

 

 

 

 

 

 

제20장 하나님의 형상 회복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치유

 

1. 하나님의 형상(창 1:26-28)

-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을 처음 지을 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설계의 원본이다.

-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다음과 같은 삶을 산다.

전제 : 하나님께 복을 받는 삶

내용 : 열매있는 생활(Fruitful), 상승되고 증가하는 삶(Increasing), 가득 찬 삶(Full), 다스리는 삶(Ruling)

- 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예배의 회복’이다.

 

2. 예배는 세 가지 타입이 있다.

1) 성전 뜰 예배 - 육적인 예배

→ 이곳에서는 예배의 모양만 있을 뿐 어떤 속죄나 만남의 경험이 없다(양 잡고, 버리고, 태우고 등등).

 

2) 성소의 예배 - 혼적인 예배

→ 이곳에서는 지적, 감정적, 의지적 터치가 있고, 어느 정도의 영적 감동도 있다(상-진설병, 등대, 분향단).

 

3) 지성소의 예배 - 영적인 예배

→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과의 만남

캄캄한 곳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성이나 감정을 초월한 곳이다.

속죄소 앞에서의 체험- 죄 용서의 체험한다.

‘시은좌’- 은혜의 체험 : 있는 그대로가 받아들여지는 체험한다.

 

3. 지성소 예배의 경험 - 이사야의 경험(사 6:1-8)

1) 상한 심령(1절 상, 시 51:17)

웃시야 왕의 죽음은 이사야의 모든 상처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2) 하나님과의 만남(1절 하-4절)

주님은 보좌에 계심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함

스랍 천사가 찬양함

문지방 터가 요동, 연기가 가득

- 이 모든 것은 그의 전 존재가 완전히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3) 회개(5절, 욥 42:5-6)

왜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하다고 했는가?

 

4) 치유(6-7절)

제단의 핀 숯불로 입술에 대는 체험은 독특한 Touch의 체험이다.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해 졌다.”는 말의 의미는?

 

5) 하나님의 음성이 들림(8절)

하나님의 탄식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치유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Calling).

강압적인 형태의 부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형태임- 요나서

 

6) 부르심에 응답(8절)

부르심에 대해 거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헌신하게 되었다.

 

4. 지성소 예배의 경험이 어떻게 치유를 하는가?

 

1)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간의 고유의 정체성 회복

① ‘왕’ 같은 존재 - 제사장, 선지자(벧전 2:9 - 왕 같은 제사장) -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고, (창 1:26-28)

→ 이것은 치유 받은 자의 삶의 모습이다.

② 특징 : 다른 피조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 흙으로 지어졌다는 부분은 아니다.

- 지, 정, 의라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면-그러면 그것이 창조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나님의 호흡’이 그 대답

Spirit - Soul - Body의 온전한 모습을 가진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특징이다.

2)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회복 하는가 ?

- 지적이거나 감정적인 자기발견(성소 예배)

- 예배의 체험 - 영이 꽉 찬 상태에서 영이신 하나님과 만나면서 내면의 질서가 다시 회복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자기 정체를 회복함.

 

5. 지성소 예배의 경험을 통해 치유된 내면의 상태(사11:6-9)

 

1) 서로 회복된 상태- 갈등과 적대적인 모든 것이 사라진 상태이다.

- 해가 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상태이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상태이다.

-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상한 감정이나 이기적인 죄악이 내면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꽉 차 있는 상태이다.

 

♦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7

 

1. 상처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옛 사람에 머물러 있을 때 만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치유는 죄의 몸이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이다(롬 6:6-11, 갈 5:24).

그러나 거듭난 우리를 아직도 옛 사람에 묶어두려는 것이 있다.

- 치유의 빛이 온전히 비추지 않은 내면

- 우리 살아가는 죄 된 환경들(상처를 자극하는 것들)

- 마귀의 영적 공격, 속임수 - 아직도 너는 죄인이다.

- 옛 습관 : 예수를 믿고 내면은 변했는데 습관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이것이 마귀 공격의 빌미를 주고 자신을 옛 사람에 계속 묶어 두고 있다.

→ 로마서 6:12-19를 읽어 봅시다.

 

2. 옛 습관을 바꾸기 위한 훈련 - 경건 훈련

→ 경건 훈련이란 옛 자아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써 완전히 변하기 위한 삶의 완결 훈련이다.

그러므로 경건의 훈련을 통한 습관의 변화가 없이는 온전한 치유가 유지 될 수 없다(딤전4:7-8).

 

▶ 옛 습관 - 시간 사용-갈 5:19-21

1) 음행, 더러움, 방탕의 습관 :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습관들

2) 우상 숭배, 마술의 습관 : 세상의 멋과 가치를 추구하는 습관들

3) 원수 맺음, 다툼,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 세상의 정치, 사람 사이의 갈등에 참여하여 열을 내는 습관

4) 술 취함과 흥청거리는 연회 : 세상의 오락, 문화에 몰입하는 습관

 

▶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습관

1)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평강)의 열매가 있을 수 있는 습관 : 내면의 상태

2) 인내와 자비(친절)와 양선(선함) 있을 수 있는 습관 :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모습

3) 충성(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히는 습관 : 성숙한 인격의 모습

→ 이런 열매를 얻기 위한 습관들을 확립해야 한다. - 시간 사용

→ 이런 경건의 훈련은 마귀의 유혹과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

 

3. Q.T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치유를 유지하는 비결이다.

1) Q.T는 다음 세 가지의 유익이 있다

- 하나님과의 교제

-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 하나님의 공급

2) 이것은 모두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다.

- 하나님과의 교제 : 버림받은 마음, 열등감, 죄책감의 치유

-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 두려워하는 마음, 열등감의 치유

- 하나님의 공급 : 굶주림, 분노하는 마음의 치유

3) Q.T를 통해서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에로의 분명한 전환을 맛볼 수 있고 유지 할 수 있다(출 19:5-6).

 

4.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부수고 세움’이라는 복음의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1) 옛 삶의 모습을 부수자.

- 사람 :

- 장소 :

- 오락 :

- 습관 :

2) 새로운 삶의 모습을 세우자.

- 사람 : 하나님께서 맺어 주신 사람들과만 만남(가족, 신앙의 동역자들).

- 장소 :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장소만 거함(집, 교회, 일터, 자연)

- 오락 : 주님께서 함께 기뻐하실 오락만을 행함(유익하고 삶을 살리는 오락)

- 습관 : 경건의 훈련을 받는 습관(예배, 성경 읽기, 기도 등등)

 

 

 

 

 

 

 

 

 

 

 

 

 

 

 

 

 

 

 

 

 

 

 

 

제21장 내적 치유의 실제 방법론

 

내적 치유라는 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고통과 감정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내적인 치유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내적치유 사역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적치유의 신학적인 근거는 해방에 있습니다. 내적치유는 해방되는 것이며, 바르게 하는 것이며, 과거의 사건을 재조명 하는 것이며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며, 은혜의 수단이며, 생활의 원동력을 일으키며 올바른 적용하는 방법입니다. (교회든지 사회든지 어디서나 치유된 사람을 원하고 있다.)

그러면 치유의 실제적인 방법론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여러 가지의 방법들이 내적치유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접근방법론

 

①신체적 접근 (행동적 접근)

사람의 내적인 심리문제를 생각하다보면 사람의 신체적인 문제를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적인 문제도 정신적이며 심리적인 문제에 많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각종 운동요법을 통하여 정신적인 면을 치료하려는 방법입니다. 유희와 운동, 레크리에이션, 무술, 좌선, 기, 단전호흡, 태극권, 요가 등등의 방법을 통하여 접근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이 완전한 변화와 치유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일부에는 사탄적이며 뉴에이지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운동 요법이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며 이런 것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사단이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내적치유의 기초적인 요소로서는 될 수 있으나 안정적이지는 않습니다.

 

②인지적, 심리적 접근

치유를 원하는 환자의 사고의 영역과 인지의 영역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사고방식의 전환을 주된 치료의 방법으로 다룹니다. 환자의 비합리적인 생각을 합리적으로 바꾸어 주는 것에 목표를 둡니다.

 

③영성적 접근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는 이유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신체적인 접근방법과 인지적이며 심리적인 접근 방법으로는 완전하고 근원적인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지정의적인 차원과 신체적인 접근과 함께 영적인 부분에 대한 접근으로 인하여 완전한 치유에 도달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견해입니다. 영성적인 접근은 다른 영역의 한계적인 방법을 보완한 것입니다.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탐구에만 의존하여서 인간이 완전한 치유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는 영성적인 요소에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치유자입니다.

 

2.치유의 방법

 

①분석

사람의 심리와 정신을 분석하는 방법입니다. 적용하는 방법은 현재의 삶에 있어서 그들의 기능과 능력을 제한시키며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은 인식하고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환자 자신은 자신을 제한하고 억압하는 요소에 대하여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개인의 능력과 기능을 제한하는 요소를 무의식적인 요소로 인식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하는 방법을 활용합니다.

 

②행동

행동상의 결함에 초점을 두고 대화와 관계훈련의 방법을 이용합니다. 인간관계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는 방법입니다. 인간관계에 자신이 없거나 성격적인 단점을 고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역할훈련, 모델링 훈련, 웅변, 강연 등을 통한 주장훈련 등을 통한 실천하는 훈련입니다.

 

③인지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한다고 보고 낙관적인 사고방식과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게 하는 데에 치유의 초점을 둡니다. 무슨 이유로 인하여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④정서

반복적으로 가지게 되는 자신의 실패와 과거에 대한 잘못된 사고방식을 개선하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반복성을 고치게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이 주어져도 계속하여 그 상태가 반복이 되고 발전하지 못합니다. 자신도 그것을 인식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을 개선하거나 고치지를 못하는 경우입니다.

 

⑤영성적 치유법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그분의 능력으로 치유를 얻는 방법입니다. 대부분 내적치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불완전성과 조건적인 사랑에 매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임하는 치유의 길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성장과정 중에서 거부된 사랑을 체험하고 자라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엄격하고 거부하는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들어도 그것을 쉽게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⑥의학적 치료법

정신병적인 심각한 단계까지 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히스테리나 노이로제 신경증의 단계입니다. 내적으로 치유되지 않는 상처는 언제든지 사람의 정신세계를 파탄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약물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3.영성치유의 과정

많은 과정들이 필요합니다. 치유의 과정은 광범위하고 하나의 방법에만 국한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죽는 날까지 치유의 과정입니다.

 

①문제를 인정하고 의지를 갈망하라.

치유를 받으려면 의지와 믿음을 심어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문제를 직시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가셔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런 질문을 한 것은 그의 소원을 주님께서 몰라서 물어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속에 믿음과 의지를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치유되기를 바란다면 내가 이런 마음의 쓴 뿌리에서 진정으로 해방되기를 원한다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고치고 싶다. 나의 성격을 바꾸고 싶다. 내 마음의 질병이 개선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소유해야 합니다.

 

②낙심을 버리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치유를 갈망하는 가운데 낙심하지 않으면 그 것은 언젠가는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의 내면의 심각한 문제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가 연약함으로 넘어짐을 인정해야 합니다. 넘어짐을 인정할 줄 모르면 우리는 계속하여 낙심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낙심치 않고 주님께 치유를 간구해야 합니다.

 

③과거로 돌아가라.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에게 고통을 준 인물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쓴 뿌리의 근원을 추적해야 합니다. 근원을 추적해 나가면서 그 고통의 현장가운데 화해의 주님을 모셔드려야 합니다. 과거의 기억을 묻어 두려고 하거나 도피하려고 하면 더욱더 힘들어 집니다. 과거의 문제와 마음의 고통이 되살아날 때에 극도의 혼란과 불만을 느끼게 됩니다. 과거의 고통을 재 경험 하는 과정을 매우 아프지만 피해서는 안 됩니다.

 

④이해와 용서

내적 치유의 핵심은 용서에 있습니다. 용서하는 모든 과정이 내적치유의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과거로 돌아가서 용서하는 과정에 이르기 까지 주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용서의 현장 가운데 주님을 모셔드려야 합니다.

 

⑤고백과 맡김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과 스스로의 아픔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마음의 쓴 뿌리와 아픈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치유를 위해서는 솔직함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감정을 숨기느라 많은 힘이 소모됩니다. 시간이 흘러도 저절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우리는 고백이라는 개방의 방법을 내놓아야 합니다. 고백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될 때에 우리는 큰 해방감과 치유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쉽게 고백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자신의 이런 문제를 공감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여유가 없다면 전화상담의 방법도 좋습니다. 먼저는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문제를 나누십시오. 나누는 순간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합니다.

 

⑥완벽주의와 욕심을 버리라.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고 불완전하게 하는 부분이 완벽주의입니다. 완벽주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완벽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일 뿐입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완벽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의지할 때에 인간은 완전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완벽주의에 대한 생각으로 인하여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완벽주의는 성급한 성격, 열등감의 주된 원인이 됩니다. 치유에 대해서도 급속하고 빠른 치유를 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빠른 치유의 길은 빨리 치유하려는 욕심을 버리는 길입니다.

 

4.기타방법(다른 차원에서 본 내적치유 방법)

신앙적인 방법 중에서 내적치유에 도움을 주는 요소들입니다. 다음 요소들을 내면 치료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①독서요법

상담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간의 일입니다. 따라서 신중하고 조심스럽습니다. 자신의 은밀한 문제를 상담을 할 때에는 안면이 있는 사람과 상담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담가도 있습니다.

 

어느 자매의 사례입니다. 자신의 성적인 타락의 부분을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과 상담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는 상담을 한 후에 많은 위로를 받았지만 다른 부담이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자신의 과거를 안다는 부담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일 후에 교회를 떠나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상담의 부작용입니다.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독서요법이라는 것은 이런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상담 요법입니다. 독서를 통하여 저자와 상담을 나누는 방법입니다. 자신을 노출해야 하는 부담감을 줄이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②음악(찬양)요법

찬송을 듣는 것과 부르는 것만으로도 많은 내적치유의 효과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찬양을 통한 치료와 승리의 기적의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요즈음에는 음악치료사라는 직업이 등장해서 인기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의사 이상으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음악을 통하여 저능아, 자폐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현대인들의 정신을 치유하는 직업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③운동과 휴식요법

신체적인 문제와 정신적인 문제를 별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운동과 휴식이 결여된 인생을 살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안식하셨다는 것이 창세기에 처음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휴식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④공동체 요법

좋은 사람들과 건전한 사람들을 사귀라는 것입니다. 교제를 통하여 자신에 대한 문제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장점이 많은 사람과 함께 지내고 교제하며 그와 함께 나누는 삶 속에서 자신의 문제가 발견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혼자 있으며 혼자서 많이 사색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람의 영적인 영향도 모임을 통해서 많은 유익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⑤전도를 통한 내적치유

전도하는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자신의 성격적인 단점들이 수정이 되고 용기가 없는 사람이 담대함을 얻게 되며 내성적인 사람이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⑥중보기도를 통한 내적치유

아픔을 같이 공유하며 함께 아픔의 상처를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치료가 임하는 것입니다.

 

결 론

 

모든 치유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자신에 맞는 치유법을 적절히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치유된다는 것도 좋지만 내적치유는 많은 노력과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치유자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과 함께 특별 은총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치유하심을 소유 하십시오.

 

 

제22장 왜 내적치유가 필요한가?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어느 지방에서 나이가 수백 년이 된 나무 한 그루가 마침내 쓰려졌다. 식물학자들이 그 나무를 잘라본 결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나무는 나이를 알려 주는 나이테뿐만 아니라 산불이 나고 한해가 나서 성장이 일시 멈추었던 것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컴퓨터에는 모든 기록이 입력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자료를 언제나 불러 올 수 있다. 그러나 쓸데없는 자료도 많다. 쓸데없는 자료가 많이 저장되어 있으면 컴퓨터의 작동이 느리고 프로그램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새로운 자료를 입력할 공간이 제한된다.

 

▶ 기억의 70%가 잠재의식에 저장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과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비록 나는 잊은 것 같지만 그것은 나의 의식수준에서 잊어버린 것이고 내가 의식하지 않는 잠재의식 속에 과거의 모든 것이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다.

사람의 기억은 사건의 내용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정까지 기억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과거에 누가 나를 즐겁게 했거나 괴롭혔다면 그 사건과 함께 즐거웠거나 괴로웠던 감정까지 기억되어 있다.

문제는 과거의 나쁜 기억이나 상한 감정이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잠재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서 쓴 뿌리가 되어 독을 내뿜는다는 사실이다. 이 독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 그 사람의 현재의 생각이나 행동을 통제하고 더 나아가서 인간관계나 자신의 운명에까지 심각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의 30%는 의식수준의 영향을 받지만 나머지 70%는 잠재의식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즉, 나라는 사람은 '지금의 나'가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계속되어 온 지금의 나'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과거사는 잊어버리고 오직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전진만 하면 문제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내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신분—의롭다 칭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과 실제로 내가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구분하지 않은 데서 생긴 오해이다.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죄와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신분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방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과거의 나쁜 성격이나 습관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묻혀 있는 나쁜 기억과 상한 감정을 처리하는 것은, 옥토에 섞여 있는 여러 가지 이 물질을 제거하는 작업과 같다. 좋은 말씀의 씨앗이 내 마음 밭에 아무리 많이 뿌려져도 내 마음의 밭에 온갖 이 물질이 섞여 있으면 씨앗이 제대로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하나님이 자녀 된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축복을 부어주시더라도, 먹구름이 밝은 태양빛을 가로막듯, 축복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있으면 우리는 그 축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과 재앙을 당한다.

 

▶ 어두움에 감추 인 것들

이 장애물은 무엇인가? 이들은 나도 모르게 나의 잠재의식 속에 쌓여 있는 상한 감정과 나쁜 기억들이다. 성경은 이런 것들을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이라고 한다. 본인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신다.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고전 4:5).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6:2).

또한 쓴 뿌리라고도 한다. 내 속에서 독을 품어 내는 쓴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내 자신이 괴로울 뿐만 아니라 남을 더럽힌다.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히 12:15).

어떤 사람은 과거에 이런 사정을 이야기 해보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사는 잊어버리고 성경 말씀 많이 보고, 기도 많이 하고, 회개생활 하다 보면 자연히 없어진다고 충고해 왔다. 또 어떤 사람은 성령 세례 받고 귀신 쫓으면 해결된다고 가르쳤다. 물론 과거의 나쁜 기억이나 상한 감정의 상당 부분이 이런 식으로 해결된다.

그러나 뿌리가 깊고 독성이 강한 것—심한 충격이나 적은 충격이라도 반복적으로 오래 계속 된 것들—은 이런 식으로 잘 해결되지 않는다. 나의 의식 수준에서는 잊어버린 것 같지만 나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현재의 나의 생각이나 행동에 막대한 영향—대부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 내적치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

정상적인 설교, 기도, 제자훈련, 회개생활을 열심히 하는 신자들 중에서도, 본인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나쁜 기억과 상한 감정 때문에 인간관계가 개선되지 않고, 하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도 잘 모르는 증오심, 거부감, 우울증, 죄의식, 두려움, 외로움, 열등감 등의 원인은 대부분이 본인의 잠재의식 깊숙이 숨겨져 있는 과거의 나쁜 기억과 상한 감정 때문이다. 이런 나쁜 기억과 상한 감정의 원인을 찾아내어 치유하고 용서와 회개를 통해 우리의 속마음을 치유한다고 해서 "내적 치유 (Inner healing)라고 부른다.

베티 탭스콧은 내적 치유를 이렇게 정의한다. "내적 치유는 속사람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즉 마음과 감정과 고통스러운 기억과 꿈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내적 치유는 기도를 통해 증오심, 거부감, 자기 연민, 우울증, 죄의식, 두려움, 슬픔 등의 감정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입니다. 내적 치유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추한 것을 자세히 파헤치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 치유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기억하고 있나를 점검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적 치유는 그곳에 있는 쓰레기를 말끔히 청소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러한 상처와 고통스러운 기억을 숨겨둔 암흑세계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빛을 비추게 하는 것입니다. 내적 치유는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에 걸어가게 하셔서 불쾌한 상황이 있던 그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 [내 마음속에 가득한 주님의 평강] ).

데이빗 씨맨즈는 내적 치유란 "상한 감정과 치유되지 않은 기억을 위해 사역하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 [상한 감정의 치유 에서])

마이클 스캔란은 내적 치유를 이렇게 정의한다. "내적 치유란 속사람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란 사람의 지성적이고 의지적이고 감정적인 분야를 말하는데 이는 통상 생각, 의지, 감정과 심리와 영혼과 영을 포함하는 마음이라 불리워지는 것들을 포함합니다. 내적 치유는 이런 점에서 신체의 병을 치유하는 외적 치유와 구분됩니다.

내적 치유란, "성령의 도우심을 얻어 용서와 회개를 통해 심령 속에 쌓여 있는 영적 쓰레기를 제거하여 그리스도 안의 온전한 자로 서는 과정"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내적치유 사역자로 인기를 끄는 조이스 마이어나 미국 유명 TV Talk Show의 명 사회자인 오프라 윈프리가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대중의 호평을 받는 것도, 이들 자신이 어린 시절에 성폭행과 가정폭력의 희생자로서 그런 고통을 겪는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누구 보다 잘 이해하고 동류의식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치유 받은 사람은 자연히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형제, 자매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다 잘 전할 수 있다.

 

▶ 내적 치유의 범위

내적 치유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사역자에 따라 본인 당대의 치유까지만 취급하는 사람도 있고, 본인 당대는 물론 뱃속의 태아 때까지 치유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본인 당대는 물론 가계에 흐르는 저주 까지 치유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용서하고 회개하는 내적 치유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에 더하여 반드시 축사—귀신 쫓는 것—를 겸하는 사람들도 있다. 죄 짓는 자는 곧 마귀에게 속하기 때문이다(요일 3:8). 또 다른 분들은 본인 당대는 물론 태아 시절에 이어 가계에 흐르는 저주의 치유 및 축사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내적 치유 방법을 택하고 있다. 전인 치유를 위해서는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내적 치유의 여러 방법들

같은 병이라도 의사에 따라 치유하는 방법이 다소 다르듯 같은 내적 치유라도 사람에 따라 방법의 차이가 있다. 이해의 편의상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보았다.

 

▪ 상담심리학적 방법

심리학과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내적 치유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기독교 정신과 의사들이 이런 방법을 택한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시에 본부를 둔 미너스-마이어 클리닉 의 프랭크 미너스 박사와 폴 마이어 박사를 들 수 있다.

또한 '다림줄 이론'을 전개하는 예수전도단의 부루스 탐슨도 굳이 분류하자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주로 좁은 의미의 내적 치유에 치중하며 가계 치유나 축사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오늘날 한국에서 내적 치유를 하는 강조하는 사람들 중 이런 방법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 성경 교육학적 방법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신자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기도와 성경 말씀에 의해 상담하고 교육하고 치유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상한 감정의 치유] , [치유하시는 은혜]의 저자로 잘 알려진 데이빗 씨맨즈나 [속박의 사슬을 풀고](The Bondage Breaker)의 저자인 탈봇신학교 교수인 닐 앤더슨도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데이빗 씨맨즈는 좁은 의미의 내적 치유만 하지만, 닐 앤더슨은 가계 치유와 축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오히려 닐 앤더슨은 축사 사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내적 치유를 가미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슬픔 대신 기쁨의 화관을] 쓴 조이스 마이어는 설교식 강의를 통해 감정 치유 및 기억의 치유사역을 하고 있다.

 

▪'믿음의 그림 그리기'(Faith Picturing) 방법

믿음의 그림 그리기' 방법이란, 믿음으로 예수님을 사건의 현장으로 초청하여서 그 당시 내담자가 당한 상처나 충격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을 말한다(벧전 5:7).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히 13:5), 내담자의 과거에도 예수님이 계셨다는 믿음 아래,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사건 당시로 초청하여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말한다.

내적 치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아그네스 샌포드는 '행복한 환상보기'(happy visioning)란 용어로 이 방법을 최초로 소개했으며 데이빗 씨맨즈는 이를 '성화된 상상'(sanctified- imagination)이라고 부른다. 풀러신학교의 찰스 크래프트 박사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에서는 C.C.C에서 비록 '믿음의 그림 그리기'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런 방법으로 치유하고 있는 것이 [엄마 가지마]에서 소개되고 있다. 이들은 좁은 의미의 내적 치유와 축사를 겸하고 있다. 그러나 C.C.C에서는 축사를 부정하는 듯하다.

 

▪ 은사적 방법

내적 치유의 관건은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와 마찬가지로 증상의 원인을 정확하게 찾는데 있다. 앞에서 말한 상담심리학적인 방법 성경 교육학적 방법 및 '믿음의 그림 그리기' 방법은 내담자와의 상담을 통한 증상의 분석 및 원인 발견을 통해 치유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기도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만 본인이 수치스럽게 여기는 은밀한 사건이나 기억이 희미한 1세에서 5세 때 일어난 일들, 태중에 있을 때 생긴 일들 및 먼 조상이 저지른 구체적인 죄악을 내담자가 자백하거나 기억해 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방법들로 치유를 받았지만 원인도 모르게 풀리지 않는 다른 문제로 고통을 겪는 수가 있다. 이런 경우, 고린도 전서 12장에 나오는 '기적 행하는 은사들'(miraculous gifts), 특히 그 중에서도 과거의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를 사용하여, 내담자도 잘 모르거나 밝히기를 꺼리는 문제의 원인을 직접 알아내어 치유할 수 있다.

이 방법을 좁은 의미의 은사적인 방법이라 부른다. 이런 은사를 가진 사역자가 내적 치유를 하면 내담자 본인도 잘 모르는 문제의 원인은 물론 그 죄악을 타고 침입한 악령의 종류까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효과적인 치유사역을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베티 탭스콧( [내 마음속에 넘치는 주님의 평강] ), 치유사역의 세계적인 귄위자인 프랜시스 맥넛 박사(Francis MacNutt, Deliverance from Evil Spirits), 존 및 마크 샌포드 부자(John &Mark Sandford, Deliverance and Inner Healing)를 들 수 있고, 영국에 본부를 두고 캐나다에 지부를 둔 세계적인 치유사역원인 엘렐 사역원(Ellel Ministires)에서도 이런 방법으로 치유하고 있다. 오늘날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주로 이런 방법으로 치유하고 있다.

이들은 좁은 의미의 내적 치유는 물론 가계 치유와 축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 종합적 방법

사실 이 모든 방법을 적시 적소에 활용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 내담자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당연히 그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증상을 분류하고 그 원인을 대충 파악한다. 때로는 이야기를 듣는 중에, 지식의 말씀의 은사나 영분별의 은사가 작동하면, 내담자에게 확인하고 원인을 진단해 준다.

 

어느 형제는 공부하는 중에 정신 집중이 잘 되지 않고 혼미하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는 중에, 그의 옆에 불상이 보이고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신 혼미나 심한 경우 착란 현상은 일반적으로 불교와 같은 우상을 숭상한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형제는 자신은 물론 부모들이 우상 숭배한 죄를 회개한 결과, 상태가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또 어떤 형제는 자기와 아들 및 나이 어린 손자의 3대에 걸쳐 자기들도 모르게 죽음을 생각하고 걸핏하면 "죽고 싶다," "나는 언제 죽을 꺼야"라는 말을 했다. 기도한 결과 조상의 잔인한 행위로 인해 가계에 흐르는 죽음의 영 이 죽음을 충동질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조상의 잔인한 행동을 회개한 결과 상태가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증상을 진단한 후에, 실제 치유사역에 들어가면, 성경의 원칙에 의해 기도를 하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내담자의 마음속에 '믿음의 그림 그리기'를 요청한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사건 당시로 예수님을 초청하여 모든 고통과 상처를 예수님께 맡기면, 마음속으로 반드시 그림을 그리지 않더라도, 동일한 치유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으므로(벧전 5:7), 보는 것에 너무 집착하거나 강요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종합적인 방법으로 내적 치유를 하면, 이전에 미처 알아내지 못했던 원인이나 증상을 찾아내어 보다 효과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   

                                     


List of Articles
26 2015년 여름학기 강의안 file 관리자 2015.07.16 2616
25 2012년 계절학기 교재 file 관리자 2014.02.18 2871
24 누가복음 file 관리자 2014.02.18 3052
23 치유 상담학 관리자 2014.02.18 2689
22 치유사역 연구 관리자 2014.02.18 2700
21 조직신학/구원론 관리자 2014.02.18 3161
20 장로교회란? 관리자 2014.02.18 3419
19 예식서 관리자 2014.02.18 3586
18 예배학 관리자 2014.02.18 3206
17 영적 리더십 관리자 2014.02.18 5031
16 역사신학 관리자 2014.02.18 3196
15 개혁주의와 언약신학 관리자 2014.02.18 3255
14 성찬과 성례 관리자 2014.02.18 4870
13 성령론 관리자 2014.02.18 3316
12 설교학 관리자 2014.02.18 3333
11 새로운 설교학 운동 관리자 2014.02.18 3074
10 사도신경 강해 관리자 2014.02.18 3136
9 목회 신학 관리자 2014.02.18 3299
» 내적 치유 사역 관리자 2014.02.18 3193
7 기도학2 관리자 2014.02.17 3204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