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8 13:46

목회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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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신학(Pastoral Theology)

 

제1편 서 론  

목회는 여전히 우리에게 새로움을 주는 분야이다. 이 강의의 목적은 우리의 현 목회를 더욱 풍성하게 함으로써, 가장 높은 차원의 목회수준에 이르게 하고자 함이다. 이 강의를 통하여 우리 자신들의 현 목회를 스스로 비추어보며,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에 각자에게 주시는 목회에의 접근을 이루고자 함이다. 목회란 사람들과 사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이 강의는 목회적이며 신학적인 양자가 조화를 이루는 접근이 시도될 것이다. 1. 목회란?

(1) 목회사역에 있어서는 섬김의 측면(Servant hood)이 중요하다.

사역에 있어서의 사람들의 모임으로써의 교회학(Ecclesiology)으로 목회라는 개념에 우리는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설교와 가르침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러나 섬김의 모습(Servant hood)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섬김의 자세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5장에서 섬기는 종으로서의 자세를 지향하는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며, 목회자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자세는 바로 이 종으로서의 섬김의 모습인 것이다. (2) 목회는 목회자 자신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의 영적, 정서적 그리고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모든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고전 9:22에서와 같이 여러 사람 곧 모든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어 봉사하는 것이 우리의 이상적 목회의 모습이다. 그리고 목회란 영혼과 마음과 육체 전체에 대한, 곧 전인(全人)적인 것이다. (3) 목회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것(sharing)’이다.

교회는 사랑을 나누는 곳이며, 서로 서로를 그리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곳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있어서의 전략적인 협동의 모델이다. -사람들을 세우고 준비시킨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in the world), 세상적인 존재(of the world)는 아니다.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사역에 참여하며 포함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4) 모든 성도가 교회의 사역에 참여하는 만민제사장적 성격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재정적인 역할로 참여한다. -지체 서로가 협력하여 서로를 섬기는 봉사자로 세워 나가라. -교회의 지도자는 지도자의 권위를 위임받은 자들이어야 한다.

-목회자는 목자이므로 양떼의 상태에 민감해야 한다.

성도 스스로가 목회자에게 자신의 은사를 따라 봉사할 분야를 선택하여 이야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목회자가 성도에게 봉사의 분야나 혹은 지도자의 위치를 선택하여 시켜야 하는가? 이 점에 있어서 교회는 사람들의 은사를 잘 관찰하여 각기 은사를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의 지체들을 섬기고 봉사하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 역시 이 점에 있어서도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말씀이 해당된다. -큰 교회들은 반드시 교회의 지도자들을 스스로 훈련해 낸다.

그들은 절대로 교회 밖에서 자신들이 모르는 사람들을 그 교회의 지도자가 되도록 데려오지 않는다. 큰 교회들은 자신들의 성도들을 잘 훈련하는 것이다.                                    (5) 목회자는 종으로 섬기면서도 지도자이다.(Servant-Leaders)

목회자는 성도들을 다음과 같은 5중 사역을 통하여 세워 가는 사람들이며, 이런 점에는 목회자는 교사이면서 목회자인 것이다.  -목회자는 세우는 사람(equipper)이면서 교사(teacher)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사역자이다.(relief ministry)  -목회자는 목회 상담자이다.(pastoral counseling ministry)  -목회자는 목회적 교육자이다.(pastoral education)  -목회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각자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는 사역이다. 곧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의 사역에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참여하도록 모집하여 훈련하는 것이다.  (6) 목회는 성례전적인 사역인데 이는 곧 그리스도 중심적 사역을 의미한다. -목회는 복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밖으로 뻗어나가는 것으로써 아주 흥미 있는 사역이다.  -그러나 실제 책임 있는 사역자 곧 목회자는 소수이며, 선교사들도 소수이다.  -그러므로 모든 목회자는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 ① 이러한 목회는 이상적 목표이다. ② 목회에는 고후 10:1-2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의 진지한 마음이 필요하다. ③ 지도자들 간의 오해는 그들 중심의 초점이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져 있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④ 모든 사람에게 밖으로 뻗어 나간다는 것은 곧 선교로써, 국제적인 개념이다. ⑤ 목회는 아주 흥미 있는 사역이다. 그러나 단지 감정적 흥미만은 아니다. ⑥ 성도들이 그리스도 중심적이기만 하다면, 교회 안의 문화적 차이들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2. 목회에서의 갈등(contradiction)과 스트레스

(1) 목회에 있어서의 갈등요소  신뢰(trust) - 신뢰하지 못함(mistrust)  자발성(initiative) - 죄의식(guilt)  친밀감(intimacy) - 거리감(strangeness)  정체(stagnation) - 성장(generativity)  성실(integrity) - 불성실(bad faith) (2) 이를 극복하기 위해 ① 나는 나 자신의 역사이다.(I am my history.) 목회자 자신의 인생여정을 돌아보고, 먼저 자신이 받은 상처들을 점검하라. ② 내가 나 자신의 상황을 만들었고 책임이 있다.(I am my situation)  ③ 내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I am my choices.) 내가 문제해결을 위한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영성의 부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항상 자신의 문제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갈등과 어려움 속에서 이미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고, 바로 그 어려움과 광야와 같은 환경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라.                                       (3) 육체와 스트레스 사역에서 평안이 없고 좌절을 느끼는가?

좌절감은 장애물들로부터 온다. 곧 우리가 목회에서 장애를 만나게 될 때 그 결과 좌절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스트레스는 갈등의 산물이다.(Stress is the reaction of conflict.) 우리는 사회적인 갈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목회에서의 교회 내적인 갈등도 가지고 있다. -스트레스는 압박과 부담(pressure)의 결과이다. 

그래서 낚시, 운동, 영화보기 등으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한다. -스트레스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의식에서 오는 결과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식에 스트레스로 반응하는 것이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스트레스에서 휴식을 얻는 데는 3주가 걸린다고 한다. -이러한 스트레스가 술을 마시게 하거나 죄를 짓게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전문적인 상담가에게 상담을 해야지, 절대로 스트레스가 과다한 상태로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

 

(4) 지각, 혹은 기대(perception)와 스트레스 무엇을 지각하고 기대한다는 것(perception)은 필요(needs)에 대한 반응에 크게 의존한다. 여기서 지각이란 곧 기대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자신의 결혼이 완벽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목회자에 대한 부분에서도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목회자는 그 자녀들도 영적으로 아주 순종하는 자녀들일 것이라고 기대한다. 결국 부정적인 스트레스도 있고 긍정적인 스트레스도 있는데, 이러한 양자의 스트레스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잘 조화된 인격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이러한 상태가 ‘샬롬’ 곧 하나님과의 평화,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와 목회자 안에서의 평강인 것이다.(5) 목회자들의 특징은 사람들을 다루면서, 많은 일에 치어 허덕이는 것처럼 보인다.

고린도후서는 은혜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보여준다. 곧 목회자가 은혜를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만 지식적으로 담고 일하게 될 때, 사역에 스트레스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하기 전에, 믿음으로 누리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시간과 장소를 먼저 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사역해야만 한다. 은혜가 없고 일에만 매달리게 될 때, 목회자는 심지어 은혜로 얻은 칭의(justification) 조차도 실제적인 경험으로 가지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는 것이다. (6) 목회자 자신의 자기인식(정체감, identity)의 위기 -사람들은 자기인식의 갈등을 가지고 있다.

곧 ‘실제의 나’와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나’와의 갈등, 다른 말로 ‘우리가 실제 누구인가’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로 인정받는가?’ 하는 갈등이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성만 부르든지, 성 빼고 이름만 부르든지, 아니면 이름 전체를 부를 때, 아마도 그 반응이 각기 다를 지도 모른다. -목사, 박사 같은 호칭이 명예를 나타내는가? 어떤 사람은 자신이 박사라도 그저 이름만 불러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 바로 그것이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진정한 ‘기대와 자기인식’이다. -자기인식은 목회자의 꿈(마음먹음, mind-set)과 큰 관련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목자(shepherd)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회중의 아버지라는 의미에서 ‘아빠(dad)’라고 부르기도 한다. -목회자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어떤 사람들은 목회하는 사역자 곧 ‘목회자(pastor)’라고 불리 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굳이 안수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직위상의 ‘목사(Rev)'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것이 목회자들의 ‘자기인식의 위기(identity crisis)’가 아닌가?  ‘내가 누구인가’를 정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하는 점도 분명해질 것이다. (7) 목회자의 목회자로서의 인물됨

사유적인 목회자인가 아니면 감정적인 목회자인가? -목회자이기 전에, 사유적인 사람인가 감정적인 사람인가? -목회자가 목회에 적합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심리학적 인성검사가 목회에 있어서 중요하다. -목회자 상담도 중요하고, 목회자들을 위한 정신의학적 체크도 필요하다. -목회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목회사역에 들어서게 되면, 스트레스 위에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고 마침내 그는 목회자가 아니라 괴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목회에서 변화를 시도하면, 어떤 것을 잃어버림이 따라오고, 그것이 근심이 된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헌금함의 위치를 변경시키면, 어떤 불만들이 나오고, 목회자는 근심하게 된다. 곧 목회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근심의 사역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8) 동전의 양 면 - 중년 목회자의 자화상

신체가 늙어가면서 무엇인가를 잃어가는 느낌을 갖게 된다. 목회자라도 늙고 살이 찌고 등의 신체변화를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머리가 희어져 가면서 그것이 죽어가고 있는 양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도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목회자는 ‘상처받은’ ‘치유자’인 것이다. -예수님도 상처받은 분이셨다. -많은 간음하는 사람들도 상처받고 거부당한 경험의 결과이다. -성직자의 마음 : 우리 자신이 우리의 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를 비난하든, 변명하든, 목회자들은 상처받은 사역자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처들이 우리를 더욱 효과적인 목회자요, 상담자로 성숙시켜 준다. 3. 관계-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

기회가 주어졌을 때 모험을 해야 한다.

목회의 모든 기회를 활용하면 성취되어 가는 것이다. (1) 진정한 인간됨, 개인됨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믿음은 미래를 향한 거대하고도 급진적인 열림이다.

미래에는 권위 있는 확실함이 있다. 그러므로 미래를 향하여 나아감은 곧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2) 진정한 인간됨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다. 참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지기 때문이다. 

                                      (3) 선택은 항상 가능하다. 목회에 있어서 현재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어도, 소망이 있는 것이다. 소망을 향해 준비하는 선택이 있는 것이다. 어떤 목회자들은 과거를 은사로 활용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과거를 단지 허비해 버린 것으로만 간주한다.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과거의 하나님이시기도 한 것이다. 확실성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존재하는 우리의 참 모습, 실상에 근거하는 것이다.     (4)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은 원래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가난해지신 분이시다.(고후 8:9) 신약의 구속은 우리를 완전히 자유케 하셨다.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스도의 은혜로써 이야기하였다. 십자가 말씀의 최고의 선언은 ‘은혜’이다. 1)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는 놀라우신 역사이다. 2)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적으로 값없이 받는 것이다. 3)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능력이다. 4)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는 기독교인의 축복을 나타낸다. 이는 무한한 자유를 의미하며, 은혜로부터 나오는 용서함이다. (5) 찬양, 목회, 설교에 관하여 ▶ 성경의 권위로써 서신서에 나타난, 찬양과 목회에 대한 바울의 모델을 따르라. ▶ 설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구체적인 개념을 가지라. -설교는 항상 본문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왜 그 본문을 택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설교에서 역사적 본문 맥락을 잡으라. -많이 조사하고 깊이 연구하라 -문법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라. -핵심 용어(key term)들과 핵심 단어(key word)를 파악하라. ▶ 단어 연구(word study) 단어연구에 있어서의 일치로부터 출발하라. 본문의 구절들과 문맥과 연관하여, 그리고 저자가 성경의 다른 책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경우들을 연구하라. ▶ 성경적-신학적 문맥(Biblical-Theological Context) -여러 부분들이 당신의 설교를 지원하도록 하라. -설교는 적용이다. -해석학적 원리들(성경을 해석하는)에 의거하여, 당신이 설교하고자 하는 부분의 주석(exegesis)이나 강해(expository)를 실시하라. 그리고 그 설교가 어떤(so what) 적용을 가지게 될 것인가를 살피라. -그래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라.  -더 많은 주석을 활용하라 -그러나 주석책의 Outline을 당신 설교의 Outline으로 사용하지는 말라. -설교에 있어서의 중심내용과 부수적 요소들을 구분하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내용은 반드시 하나님께 로서 온 말씀이어야 한다.  -당신 설교는 얼마나 긴가? 너무 무리한 준비를 하지 말라. -설교준비는 서로 간의 나눔(sharing)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제2편 牧會學 原論 -에드워드 투르나이젠, 박근원 역-제1부 목회 기초이론제1장 신학과 교회의 문제로서의 목회1. 서론

목회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개개인에게 전달하는 그 본질이다. 교회의 모든 정통적인 기능과 마찬가지로 목회도 교회에 주어진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전달되어야 한다.(1) 목회의 장소목회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2) 목회의 바탕목회는 하나의 신학적인 문제이며 동시에 교회의 문제로써 대두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목회의 이론을 정립하려할 때, 그 바탕을 살펴보아야 한다.

(3) 목회의 위치목회의 근거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신학과 교회 안에 자리할 목회학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냐 하는 점을 먼저 규명해야 한다.

(4) 목회의 중심말씀의 선포 즉 설교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목회의 중심이 된다. 선포하는 행위 즉 설교가 모든 실천신학의 본질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2. 설교

(1) 신학의 전반적인 과제는 말씀을 다루는 일이다.a. 역사신학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증언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석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교리사 및 교회사로 범위가 좁혀질 경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이다.b. 조직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 즉 하나님의 말씀 속에 깃들어 있는 기독교의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과 견주어 발굴하고 다시금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c. 실천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인간의 선포와 그것을 인간이 듣는다는 사실과 그것이 바로 학문의 대상이며, 또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문제시하는 것이 곧 실천신학이다.(2) 교회의 설교교회의 설교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잡한 목회행위이다. 설교는 여러 가지 신학 분야들이 취급하는 수많은 기능들을 다 내포하고 있는 선교행위이다. 그 중에서도 선포하는 행위를 본질적인 의미에서 설교라 한다. 이 설교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을 설교학이라 부른다. 이 설교학에는 필연적으로 성례전과 기도가 포함된다.

a. 예배학교회의 행위인 기도하는 방법, 설교로 표현되는 말씀과 관련하여 연구하고 가르쳐야 하며, 또 그것이 개개인의 생활 속에 적용되며,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예배를 총괄적으로 다루는 ‘예배학’이다.b. 교회교육학말씀이 진정으로 선포되기 위하여 넓은 의미에서 아직 말씀을 듣기에 미숙한 신자들에게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 속에 담겨진 용어들과 진리의 표현들을 가르치고 설교를 들을 수 있도록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이것이 실천신학에서의 ‘교회교육학’이다.c. 선교학교회의 설교와 세례 그리고 성찬으로 대표되는 지금까지의 교회의 선포활동이 아직도 공동체 삶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일 그것들이 교회의 설교 및 공동체로써의 특성과 긴밀한 관계만 지속된다면 국내선교의 장애물인 세속화를 극복할 수 있으며 그러한 행위가 선교로써의 특성을 갖게 된다고 본다. 교회가 이러한 사역으로부터 탈선하지 않도록 지속적인 연구와 함께 자선행위까지 포함된 포괄적인 의미로써 ‘선교학’을 말할 수 있다.d. 교회학(목회학)설교, 교육과 국내외 선교활동을 포괄하는 공동체를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여기에 교회의 기능과 건축 그리고 확장을 등이 포함된 것을 ‘교회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궁극적으로 ‘목회학’이라 할 수 있다. 목회학이란 회중을 향해 선포된 메시지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특별하게 전달하는 것이란 뜻이다.3. 목회

(1) 목회의 정의a. 목회가 설교와 성례전을 대치(代置)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필연적으로 동반(同伴)한다. 목회는 설교와 세례 및 성찬을 받음으로써 야기되는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교회가 갖추어야할 부차적인 기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b.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되, 개인을 중심으로 한 형태로 하는 것이다. 소위 선각자들 가운데서도 루터파 소속인 ‘뢰에’가 목회와 설교의 상호관계를 아주 명확하게 잘 다루었다.(2) 목회의 본질a. 설교를 하고 교리 문답을 가르치고 예배를 인도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흔히 사용되어지는 일반적인 수단만을 견지하는 한 그것은 목회를 협소한 의미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그것들은 ‘개인목회’라는 이름으로 별도로 첨가될 성질의 것이다.b. 목회를 담당하는 사람은 꼭 안수 받은 설교자만은 아니다. 확실히 말해 그것은 안수 받은 설교자의 특수한 임무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면 교회전체가 다 목회에 참여하며 또 그것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이다.c. 목회의 영역과 그 구분에 대한 모호성교회라는 영역 안에서 꼭 있어야 할 사건이라는 사실과 이론의 신학적 배경에 대한 설명은 없다. ‘뢰에’는 설교와 예식을 중심한 예배만을 대상으로 하여 목사의 역할을 아주 협소하게 정의 내린 사실을 예로 들 경우 그는 정말 설교, 예식, 그리고 순수한 경험적 바탕 위에서 본 성례전 등에 목회를 첨가시키고 있지 않다. ‘뢰에’는 목회의 한계성을 분명히 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목회를 일반적인 것으로 보고 설교, 교리문답, 예식이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크리스찬 파머’는 19세기 부르조아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처럼 설교를 “위대한 왕을 모신 식탁에서 교우들이 모여 만찬을 베풀면서 행하”는 일종의 탁상 담화와 비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스무센’도 목회대화를 세례준비, 결혼준비, 병자방문의 경우에만 한정시켜 설명한다. 그렇다면 결혼이나 세례나 장례가 아닌 경우에도 내적 고민을 상담하기 위하여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3) 목회의 영역a. 아스무센(Asmussen)그는 말씀을 선포한다는 의미를 목회 말고 ‘영적지도’란 큰 영역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교육’이란 말과 다를 바 없으며 나아가 결혼식, 세례식, 장례식 등과는 관계가 없는 모든 영역을 다 포함하고 있다.b. 베노아(Benoit)그는 실절적인 목회 즉 결혼식, 세례식, 장례식 등과 ‘영적지도’를 구별하면서 전자는 결코 목회라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스무센은 개인목회와 말씀의 선포를 강조한 반면에 베노아는 말씀 선포보다는 오히려 교훈과 윤리생활 즉 도덕적, 지적, 변증적 또는 종교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영적지도자로서 갖추어야할 정서적인 역량이 중요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입장을 거부하는 점에서는 아스무센과 견해를 같이 한다.c. 휠마르(Vilmar)그는 목회를 목사의 직책과 교회 장로들의 직분으로 한정시켜 목회를 가정과 교회 전반에 걸친 훈련을 증진시켜주는 행위로 설명한다.d. 슈타인마이어(Steinmeyer)그는 퉁명스럽게 개인 가정의 공기는 성직의 영광을 펼칠 분위기를 조성하지 못하며 그런 점에서 목사가 개인 가정을 심방할 때에는 엘리야가 입던 두루마기가 어깨에서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4) 개인목회1) 뢰에(Wilhelm Lohe)a) 설교를 통한 목회를 실시했다.b) 성만찬 이전에 회개를 요구했다.c) 영적으로 완숙된 강력한 기도를 드리도록 요구했다.

2) 하름스(Claus Harms)a) 그는 목회의 세 요소로 설교자(Prediger), 제사장(Priest), 목사(Pastor)를 언급한다.b) 목사의 역할에서 그는 설교와 성례전 집행이라는 역할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약세에 있다면서 그는 목회의 범위를 “슬픔이나 기쁨을 만나 특별한 격려를 필요로 하거나 또는 기대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라고 한정시켜 주장한다.

 

3) 경건주의 목회a) 경건주의는 “개인목회”를 끈질기게 추구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리고 목사와 교회의 직책 역시 이러한 목적으로 지향한다고 본다. 경건주의는 심지어 설교와 성찬을 그것이 개개인을 상대로 한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하여 평가한다. 뢰에와 휠마르에게 있어서는 교회란 하나의 포괄적인 개념 즉 개개인마다 개성을 가지고 있으나 한 지체로서의 개인들이 모인 장소이다. 개인은 오직 교회 공동체의 지체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b)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경건주의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깨우침을 받고 회개한 개인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깨우침을 받고 세례 받는 개인이 아닌, 깨우침을 받은 개인이다. 이처럼 교회는 깨우치고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의 총화(總和)를 뜻한다. ‘개인목회’라 할 때 ‘개인’이란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화나 개인적인 설득을 통하여 개개인의 양육과 성장을 중심으로 목회운동을 벌렸던 스펜서, 프랑케, 특히 진센도르프의 경건주의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4) 경건주의가 강조한 목회a) 심방b) 개인적 대화c) 구역집회 및 서신왕래

5) 루트비히 호파커(Ludwig Hofacker)는 위대한 설교자였다.a) 그의 설교는 각자가 속히 각성하고 회개하라는 강렬한 호소를 담고 있다.b) 그는 설교 말고도 개인목회에 깊이 심취되어 있었다.c) 그는 자신의 영혼구원을 위해 일하는 경건주의적 목사의 한 전형이었다.d) 그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자기 자신은 물론 하나님과 내적인 대화(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어디서 끝나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는 항시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를 통하여 영적 생활을 깊이 터득하며, 그것을 항시 일기장이나 비망록에 기록해 두었다. 이러한 스스로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자기반성의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장해 나갔다.

6) 휘마르(Vilmar)그는 그의 저서에서 “경건주의에 흡입된 많은 목사들은 특히 젊은 목사들은 자기들 스스로의 영적 체험을 토대로 불편부당하게도 자기들의 체험과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편견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교인들의 신뢰를 얻기에 열을 올린다. 그들은 개인의 체험을 기쁘다는 듯 내 뱉는다. 이것이야말로 목사의 영적 생활을 말장난과 거짓말로 손쉽게 해소시키려든다”고 공격을 퍼붓고 있다.

7) ‘뢰에’와 ‘휠마르’ 그리고 ‘하름스’a)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혼을 먹이고 살찌게 하며, 일깨워주고, 또 영혼의 생명을 보존해 주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b) 그러나 경건주의 목회에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가치가 훼손을 당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c) ‘뢰에’는 “전통적 수단”에의 충성이나 현대인에게는 별로 관심거리가 못되는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이 무슨 뜻을 가질 수 있겠는가를 비난하고 있다.

8) 경건주의 목회의 본질a) 경건주의는 성경을 새롭게 발견하고 성경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원천으로 생각하고 신앙의 한 복판에 갖다 놓음으로써 합리주의와 투쟁을 벌인 바도 있다.b) 다만 경건주의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학생이 선생님 앞에 서듯, 그것을 읽는 학생이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두지 못한 점이다.c)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는 방법을 가르치며, 그렇게 하도록 도와주며, 그럴만한 능력을 길러 줄 수 있다는 것이다.4. 결론

말씀과 그 내용을 소유함으로 인하여 영적 생활을 확보하고 또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교회에 맡겨진 말씀이 ‘알파와 오메가’가 아니라, 오히려 개개인의 영적 생활, 즉 말씀으로 일깨움을 받는 개개인과 그 개인적인 경건이 아주 중요시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여기에서 말씀의 독자성이 변질될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들이 이런 경건주의 과오를 지적하며 또는 경건주의를 부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이러한 비판이 경건주의적 목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경건주의적인 형태의 목회가 문제일 경우 목회자체까지도 문제가 될 수 는 없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의 객관성을 전제로 하는 종교개혁의 교회는 목회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고 실천하지도 못한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 자체가 영혼구원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고 그러한 점에서 종교개혁은 일종의 목회운동이다.그렇다면 목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양립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목회는 목회대로 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인간적인 경건을 압도하여 유일한 가치를 지니는 목회, 그리고 인간은 항상 그 말씀의 학생이 되는 그러한 목회여야 한다.제2장 교회훈련으로써의 목회목회란 하나님은 개개인을 결단코 포기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믿음 안에서 각 개개인들을 설교와 성례전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어 주고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며. 교회 안에 삶을 보존시켜 주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목회는 교회를 형성하고 생존하게 하며 개개인을 영적인 타락과 부패에서 건져내어 삶을 보존시켜 주는 성화와 훈련의 행위이다.1. 교회훈련에 대한 고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탕으로 삼고 있는 목회의 목적과 본질을 분명히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교회훈련의 개념과 실상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뢰에(Lohe)와 휠마르(Vilmar)를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과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경건주의(Pietismus)를 포함하여 우리 교회의 디딤돌인 교부들까지 고찰해 보아야 한다.(1) 개혁교회의 창시자들 칼빈은 슈트라스부르크(Straburg)에 체재하는 동안 부처로부터 배운 말씀과 성례전으로 뭉쳐 있는 교회는 순수하고 생동력을 갖출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고 믿었다(기독교강요 제4권, 1559). 교회 훈련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이기 때문에 교회에 있어서 훈련은 커다란 동경의 대상이 된다. 훈련은 몸의 지체로 하여금 서로서로 묶어져 살도록 역할을 하며 각자의 위치를 올바르게 설정해 준다.(2) 교회훈련의 정의교회훈련은 개개인들에 대한 인격적 권면과 같다는 말이다. 이것은 칼빈이 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고 설교(성례전을 포함한)라고 생각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설교와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곧 교회의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훈련이 “교회의 연륜이 깊어지는 정상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뢰에의 주장 역시 칼빈의 주장에 버금간다.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훈련에는 개개인을 향한 권면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칼빈은 이러한 개개인을 향한 권면이 결핍되어 있으면 교회는 즉각 파멸되고 만다고 주장한다. 교인들간의 전체적인 조화뿐만 아니라, 그것이 말씀에 깊이 뿌리박고 있지 않으면 개개인을 향한 권면, 즉 목회가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칼빈은 당시 교회가 이러한 훈련이 결핍되어 있음을 직감하고 절실한 구원의 손길을 호소한 것이다.

a. 교회는 가시적 질서요, 가능한 한 순수성을 지닌 공동체교회는 가시적 질서요, 가능한 한 순수성을 지닌 공동체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칼빈의 주장을 눈여겨보면서 우리는 직선으로 행진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선연하게 그려볼 수 있다. 교회가 실제로 말씀과 은혜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목회 즉 교회훈련이 말씀을 대체할 수는 없다. 목회는 말씀의 일깨움을 받으며, 그 말씀을 뒷받침하고 효율적으로 작용하게 만들어 주며, 각 개개인이 스스로 말씀 아래 서서 그 말씀에 복종함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도록 말씀을 강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결코 이러한 가시적인 행진이나 훈련을 바탕으로 하는 가시적인 질서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부르셨고, 또 항상 새롭게 불러 모으신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자의에 따라 선택했다는 사실에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머릿돌이 되신다. 루터는 칼빈보다 더 강경하게 그리고 쯔빙글리 보다도 더 강경하게 그리고 이 둘 보다도 훨씬 더 일방적으로 하나님만이 교회를 세우신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말씀과 신앙만이 교회의 바탕이요, 유일한 내용이라고 한다. 그러나 칼빈은 교회의 바탕을 말하는 가운데 그와 마찬가지로 강경하고 분명한 어조로 교회는 “신앙을 통해서만” 항상 새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 말씀과 설교를 통한 신앙만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신앙을 지니고 살게 하는 가시적 조직 또는 기관으로써의 교회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루터는 철두철미한 교회의 불가시성 즉 하나님의 말씀이 태양 광선처럼 하늘로부터 아래로 꿰뚫고 들어오며 바로 그런 현실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참된 교회에 대하여 말씀과 은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b. 교회를 대표하는 공동체설교자와 성례전의 집행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수립되어야 한다. 교회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베풀며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고 마시게 하는 성만찬을 드는 이 모든 행위가 다시금 반복된다는 사실은 곧 교회가 존재한다는 말임과 동시에 말씀이 역사하고 인간이 그로부터 부름을 받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하여 설정된 설교와 상례전의 확증과 어떤 규범을 갖추어야한다.(3) 교회훈련의 위치교회훈련이란 말씀과 성례전으로부터 출발하는 능력이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 구체적으로 역사 한다는 사실을 교회가 깨달아 알게 하는 행위이다. 말씀과 성례전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구체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모른 채 단순히 말씀과 성례전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바라보며 유유자적할 수는 없다. 말씀과 성례전이 어떻게 삶으로 이어지는 가를 눈여겨보지 않은 채 말씀과 성례전이 존속한다는 사실만을 바라다 볼 수 없으며 교회의 지체들이 교회란 공동체와는 떨어져 살고, 구체적인 삶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도 방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삶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교회훈련을 시켜야 한다.

a.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7장신자들의 모임이며 동시에 그들 가운데서 복음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거룩한 성례전이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집전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이며, 그 교회는 계속하여 존속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b. 칼빈ㄱ) 정당한 신앙고백을 할 것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할 것ㄷ)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 설교는 물론 성만찬을 통하여 항상 새롭게 강건해질 것 등이다.

c. 마틴 루터하나님은 은혜가 풍부한 분이다.

첫째로, 쓰여진 말씀을 통하여 죄의 용서를 세계 속에 선포하며 둘째로는 세례를 통하여, 셋째로는 제단의 성스러운 성례전을 통하여, 넷째로는 열쇠의 힘을 통하여 그리고 형제의 상호교제와 위로를 통하여 이룩하신다고 했다.(4) 교회훈련(목회)의 역할

a. 카톨릭교회ㄱ) 목회를 본질적으로 고해의 형태로 이해하고 이것을 제도화 시켜 놓았다.ㄴ)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이 성례전이며, 이 성례전은 미사 제물과 대등한 중요성을 지니며, 설교는 성례전이 아니라는 점에서 크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ㄷ) 카톨릭의 목회는 교회 자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ㄹ) 이러한 목회의 역할은 개신교가 말하는 교회훈련과 그 성격이 다르다. 참된 회개 즉 진정한 구원의 행위는 절대적으로 말씀과 성만찬의 성례전을 바탕으로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b. 칼빈복음 설교를 “교회의 혼”이라 하고 교회훈련을 몸의 지체가 함께 모여 공동의 삶을 이어가게 하는 “고리”와 같은 것으로 지칭한 사실을 기억한다.

c. 루터슈발칼트 신조에서 열쇠는 잘 알고 있는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만이 아시는 즉 모르고 진 비밀에 쌓인 죄까지도 매고 풀 수 있도록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부여한 직책이요, 능력이라고 말한 사실도 기억한다. 동시에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에서 교회를 정의할 때, 열쇠의 위력이 말씀과 성례전에 버금가는 강력한 요소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 사실도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말씀과 성례전 속에 열쇠의 능력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d. 뢰에와 휠마르목회는 설교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들은 교회에서 개인을 상대로 한 대화를 제외시키려는 의도보다는 오히려 교회 전체에 전달된 말씀을 강조하고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한 말이다.(5) 열쇠의 직분인 교회훈련

a. 루터루터는 열쇠의 직분이 교회훈련이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다고 본다. 목회 자체가 결단코 설교나 성만찬과 대등한 위치와 가치를 점할 수는 없다.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할 때 들려지는 곳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며 그것은 동시에 열쇠가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표징인 것이다.

b. 칼빈기독교강요 3장(1536)의 “거짓 성례전의 고해에 관하여”라는 항목에서 회개는 철두철미하게 개인적인 성례전적 행위이며 동시에 그것 자체가 죄의 용서를 이루어낸다는 주장에 강력하게 반격을 가하고 있다. “그는 의사이다. 그에게 우리의 상처를 보이자. 그는 상해를 입었고 찔림을 당했다. 그에게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자. 그는 마음을 찾으시며 모든 생각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 그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모두 쏟아 놓자. 그가 죄인을 부르고 계신다. 지체 말고 그에게 가까이 가자”

c. 종교개혁자들목회적인 교회훈련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한 어느 모로든지 구체적인 형태를 띠는 질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루터는 이것을 “죄와 악한 양심을 누르고 도움과 위로”를 베푸는 것이라고 규정하며 칼빈은 교회훈련의 목적을 분명하게 악을 행하는 자는 교회에서 추방하고 선한 지체들은 멸망에서 건져주며 죄인들을 부끄러움과 후회 속에 몰아쳐 넣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칼빈은 어느 정도의 한계성을 제시한다고 본다. 그는 교회훈련이 항상 세심하게 그리고 한계를 명확히 지키면서 이루어져야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말씀과 성례전을 완전히 기능화 시킴으로써 위태로운 궁핍과 부패를 치료해주는 역할로서가 아닌, 교회의 일탈을 방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6) 목회의 성격목회의 성격을 논함에 있어서 교회 내지는 회개훈련의 위력에 대하여 확대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본다. 교회훈련과 목회가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할 때 목회는 결코 죄를 용서하거나 거부할 권한이 없음을 분명히 못 박아야 하며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하는 것으로 만족을 삼아야 할 것이다. 믿거나 아니면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할 때 생기는 일이다.

불링거(Billinger)가 기초한 “제2 헬베틱 신앙고백서”에도 나타나 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천국열쇠를 두고 많은 설왕설래가 있어 왔다. 사람들은 그 열쇠를 가지고 칼, 창, 검, 왕관을 연금하여 몸과 혼을 다스림은 물론 가장 위대한 하나님나라 까지를 좌지우지 하려든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철두철미하게 우리 주님의 말씀 위에 서서 교회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천국열쇠를 소유하고 있으며 복음을 전할 때마다 이 열쇠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말하려 한다.” 죄를 용서하거나 마음을 강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말씀 자체에 있을 뿐이다. 설교자는 다만 이 말씀을 전달하는 자일뿐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하여 열쇠의 위력을 발휘할 뿐이다. 교회훈련은 이것과는 다르다. 교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섬기는 종으로서의 기능을 행사할 뿐이다. 3. 결론

(1) 교회훈련종교개혁자들의 경우 말씀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모이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고대와 중세기 교회의 언어를 사용하는 ‘교회훈련’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것이 무언가 모자라는 우연적인 것으로 생각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모자람이 없는 필연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교회훈련이 없는 곳에는 진정한 교회도 없는 것이다. 교회가 왕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백성으로서 말씀과 성례전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 교회훈련이라고 하면 교회가 갖는 외적인 형태 즉 교회의 모습을 바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2) 개인별 대화개인별 대화의 형태로 계속하여 탐구되고 연구되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개인별 대화는 교회가 설정한 질서를 개개인이 책임적으로 수호한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자는 그가 진정으로 죄를 용서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그러한 처신을 할 수 있는 복종의 자세가 마련되어 있는지를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3) 목회의 개념‘목회’라는 개념을 ‘교회훈련’이란 개념으로 정의하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훈련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목회가 전적으로 교회훈련이란 각도에서 이해되어야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교회훈련은 목회가 의미 있게 수행되는데 필요한 여건을 제공해 준다. 목사와 교인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과 그에 속한 것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목회라고 보기 쉽다. 그러나 방금 전에 내린 정의대로 하면 이런 식의 대화가 목회의 정당한 성격을 대변해 주지 못한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목회의 바탕은 바로 교회훈련이다.

목회를 현대 심리학이나 일반상식을 바탕으로 하는 ‘영혼치유’와 혼동해서도 안 된다. 목회는 ‘영혼’이 무엇이며, ‘돌본다.’는 말이 영혼의 경우 무엇을 뜻하는 가를 분명하게 드러내야 한다.(4) 목회훈련목회훈련이라고 말할 때, ‘훈련’이란 개념을 얼핏 보아 목회의 개념과 무관한 듯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실은 ‘학교’라는 뜻의 'discipline'에서 왔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말한다. 그러나 학생을 가르치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아 주는 선생은 바로 성경이다. 이것이 처음부터 좀 도덕화 된 의미의 ‘훈련’이란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훈련에 관한 가르침(discipline)이 성경을 바탕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사사롭게 그리고 공중을 향한 선포를 통하여 개인들을 부르셨다는 말을 규명하면서 항상 성경을 말한 사실을 기억한다.(5) 목회의 내용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특수한 형태로 전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목회는 다름이 아닌 사죄를 선포하고 하나님을 위해 인간을 성화(聖化, Heligung)시키는 일과 관계되어 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와는 달리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목회는 결코 성례전적 성격을 지닐 수 없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는 목회가 카톨릭 교회적인 성격을 지닐 수 없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는 목회가 카톨릭 교회적인 고해성사의 성례전을 다시 수입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죄를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자격은 목사가 아닌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으며 그의 말씀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하신다. 그런 점에서 목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도하는데 따라 섬기는 것이요 설교와 성만찬을 통하여 그 말씀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6) 목회의 영역결국 목회는 ‘교회’라는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 말씀에서 출발하여 말씀으로 되돌아간다. 목회는 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전제로 하며 동시에 목적으로 삼는다. 그 목회는 임명을 받은 자의 선포행위로 이루어지며 그것은 곧 목회자의 필수적인 의무인 것이다. 그러나 목회는 교회 안의 지체들끼리도 이루어 질 수 있다. 왜냐하면 직책을 맡은 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교회란 몸의 직책만이 아닌 한 지체로서도 목회의 전제가 충분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형제 된 입장에서 다른 형제에게 실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목회가 모든 지체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은 교회의 표징들 가운데 궁극적인 전제가 되는 것은 역시 하나님의 영이요, 이 영만이 말씀을 생동력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갖는 목표는 역시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에 있는 그의 교회를 위하여 사람들을 얻어 들이는 일인 것이다.제3장 목회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영혼목회는 인간의 영혼을 돌보아 주는 일이다. 그런데 목회가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영혼은 인간 속에 있는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마련인 몸과 “영혼”과 정신이 하나가 된 인격적인 전인(全人)으로서의 영혼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인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목회는 하나님을 위한 전인(全人)의 성화(聖化)를 과제로 삼는다.1. 서론

(1) 목회는 인간의 영혼을 돌보아주는 일이다.인간의 영혼이라고 할 때, 영혼의 개념은 물론, 이 영혼이 돌보아 진다고 하는 점에서 그것이 갖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가 목회라는 입장에서 인간의 영혼을 문제시할 때,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생물학적인 또는 심리학적인 측면에서의 자연 과학적 인간학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유물론적인 이상주의적인 측면에서의 철학적 인간학도 아니며 오직 순수한 신학적 인간학을 말한다.(2) 영혼의 개념창 2:7을 중심으로 하여 신학적 인간학이 말하는 영혼의 개념을 파악하려고 한다. 루터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그랬더니 사람이 살아있는 영혼이 되었다.” 여기서는 바로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혼의 사람을 현재의 모습이 되게 했다는 단순하고 본질적인 사실이 부각되어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즉 한 육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아직도 “살아있는 영혼”으로써의 인간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좀 더 특별한 하나님의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작업을 말한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살아있는 인간이 된 것이다. 루터의 번역대로 “살아있는 영혼”이 된 것이다. 인간은 실제로 계획된 대로의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서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이제 육과 영이 이미 주어진 대로의 하나님의 전인(全人)으로서의 삶을 누리게 된 것이다.2. 본론

(1) 인간의 영과 육이 하나로 통일된 존재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영과 육의 구별과 이 둘이 하나로 통일된 존재라는 점은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영혼은 육과 대립되는 독자적인 주권적인 실체이다. 영혼은 단순한 육의 기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육도 역시 인간의 본질을 형성하는 부분이지 결코 종속물이 아니다. 즉 부속품도 아니며, 기생(寄生)하는 것도 아니고 영혼을 감싸고 있는 감옥도 아니다. 영과 육은 똑같이 서로 의존하는 관계이다. 인간의 본질은 모든 특성과 본능이 하나님의 행위에 의하여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만드신 존재이다.(2) 살아있는 영혼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생기는 곧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이다.하나님의 행위란 곧 “하나님이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를 통하여 인간은 육과 영을 함께 지닌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행위는 인간에게 영을 불어넣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인간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빌림 받은 삶”을 살아간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의 ‘피조성’(被造性)이라 한다.

(3) 인간만이 유일한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커다란 피조물의 공동체 즉 ‘자연’속에 함께 몸담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주의 손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특별한 존재이다.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29-30)라고 하신 것처럼 인간도 성경적으로 보면 육과 영혼을 함께 지니고 있는 하나의 “육”(Fleish)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다른 존재로 창조되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것이다(창 2:7).

a. 하나님의 형상형상이란 우리의 노력의 바탕이 되는 이상이나 내가 지켜야할 법이나 내가 완성해야할 목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선 존재이다. 즉 형상이란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신분이며, 이 신분과 일치된 나의 태도인 것이다. 이러한 신분과 태도는 결코 자연적, 생물학적, 역사적 또는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는 신분이요, 태도이며 원상태(原狀態)이다. 이것은 하나의 실재이며 인간이 현재의 인간으로 만들어진 실재이다. 또한 신분이나 태도가 가진 내용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은 존재이며,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받은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에게 복종할 수 있는 인격을 지닌 존재 곧 “나”가 된 것이다.

b.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와 악용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특성과 하나님과 그 자신에 대하여 아는 지식을 가리켜 ‘자유’라고 부른다. 이 말은 자유가 있으므로 우리 스스로 작은 하나님이 되어 뜻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자유를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자유를 남용하고 악용한다고 한다면, 그는 그 자유를 잃을 것이며, 그를 이러한 악용에서 생기는 곤경에서 구해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새롭게 개입해야할 운명에 처한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창조가 필요한 것이다. “제2아담”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타락한 인간을 다시 창조하셔야 할 것이다.

c.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창조는 결코 기계적인 생산이 아니다. 또한 유출(流出)도 아니다. 단순한 고안이나 상상이 아니다. 그의 창조는 바로 그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위하여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도록 창조되었음을 알게 된다.

d. 하나님 앞에 선 책임적인 인격제3용어인 "Pneuma"(영, 靈)란 말은 곧 영(Geist)이란 뜻이다. 이 "Pneuma"란 하나님이 부르심에 대한 존재를 뜻하며 그 부르심 속에서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는 인간의 위치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영혼이란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일어나는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에서 보면 인간의 실존을 이처럼 세 가지 양상으로 나누어 설명한 구절을 많이 볼 수 있다(살전 5:23; 고전 2:14).

여기서는 인간의 “영혼(Seele)”적 존재와 "Pneuma"적 존재를 구분하여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이 사는 하나님의 "Pneuma"에 의해서 이끌려 살아가지 못하는 단순한 육적 생활을 영위할 뿐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Seele”란 말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으로 "Pneuma"와 같이 쓰여진 곳도 있다.

마 16:24-26 가운데 인간 영혼(Seele)의 무한한 가치를 말씀하시면서 “Seele”가 전체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으로’ 살아가고 나아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성실하게 응답하지 못하면 생명을 잃게 되고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임을 아는 인간을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성경적 및 그에 바탕을 둔 신학적 인간학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존재를 육과 영혼, 외적 존재와 내적 존재의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는 점에서는 자연적, 생물학적, 심리적, 인간학과 견해를 같이하지만 전자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인간이 내적, 외적, 존재 및 영혼, 육의 복합체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고 있느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점에서 후자와는 달리 새로운 특이한 입장을 견지한다. 성경적・신학적・인간학은 인간의 본성을 구별하기는 하나 전혀 다른 구별 즉, 인간이 전체적인 삶으로 맞이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라는 위대한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놓고 영혼과 육, 영과 본능, 신적인 영역과 악마의 영역으로 구별해 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 존재라 할 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이중성과 모순성뿐만 아니라 항상 피조물을 불러 세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바탕으로 인간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말한다.자연과학적인 인간이해는 인간을 인간 스스로에서부터 이해하고 설명하려 든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도 없이 영혼과 육을 구별하고 동시에 그런 인격적 구조의 자동적인 통일을 주장하는데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인간 본성이란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은 ‘피조성’이라는 한계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 스스로의 인간이해는 불가능한 것이다.(4)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a. 단절된 관계의 회복본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운명에 빠져버린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으며, 하나님을 등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간은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상실되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다. 은혜는 그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존재로서 서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또한 그의 고통도 종식될 것이며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한 번 부름 받은 것이다.

b. 인간인식 곧 은혜의 인식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그 은혜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즉 죄인인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 내가 그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서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생각해 내어 아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알게 된 것이 자신 사색도 아니며, 꿈도 아니며, 인간의 상상도 아니며, 그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인식인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육을 입고 오심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참된 본래적인 형상”(골 1:15)이 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분이기에 그는 제2아담이 되셨고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를 악용하는 것을 보시고, 우리를 그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신학적・인간학은 항상 그리고 철두철미한 “그리스도론적 인간학”(Christologische Anthropologie)인 것이다.3. 결론

(1) 목회는 인간의 참된 이해를 바탕으로 가능해 진다.인간이 목회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런 인간을 다룰 수밖에 없다. 이런 인간을 자세히 다룬 이유는 그 인간의 바탕, 본질, 성취에 따라 목회가 결정되고 실행되는 것이며 목회의 대상으로 분명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는 참된 인간이해를 바탕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즉 인간을 바르게 안다는 것이 곧 목회학의 출발점이다. 인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와 부르심의 위대함, 그리고 심각한 인간의 타락, 타락한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그것은 바로 우리를 항상 새롭게 경악시켜 갈 것이다. 만일 목회활동이 이러한 경악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른 목회활동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2) 이러한 진정한 목회이해는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진정한 인간이해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그것은 동시에 신앙의 눈으로 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해되는 것이다. 진정한 목회는 성경을 통하여 목회의 대상인 인간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은 말씀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말씀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목회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열려질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a. 말씀선포인간을 돌보는 일은 곧 말씀을 인간에게 먹여준다는 뜻이다. 말씀선포는 곧 목회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말씀 선포는 곧 대중을 상대로 하는 동시에 개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b. 목회대화목회대화는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임을 내용으로 한다. 그러므로 목회가 하는 선포의 내용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인 것이다. 목회에서는 해방을 주시는 하나님 은혜가 강조되는 것이어야 한다. 목회대화는 ‘투쟁적 대화’요, 목회자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그리고 인간의 문제해결을 위한 투쟁자가 된다.

c. 목회의 과제 목회학은 이런 대화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것을 설명해 주어야 할 과제가 있다. 그러므로 목회의 과제는 인간의 육적, 영적 본질과 용서의 말씀이 죄와 죽음과 투쟁을 벌이는 영적 전쟁을 진지하게 염려해 주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목회학의 과제는 인간생활을 중심한 ‘심리학과 병리학’과의 대립되는 관계이다.

(3) 그리스도의 용서의 영역으로 복귀하는 성화인간이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용서의 영역으로 복귀하는 일을 성화란 개념으로 파악한 바 있다. 성화란 인간이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실존 전체가 하나님의 요구에 마주 서는 삶이 된다는 뜻이다. 즉 인간은 성화를 통하여 죄 가운데 있지 않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죄의 결과로부터의 해방은 물론 새로운 생명체가 된다. 이 새로운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에 대해 투쟁을 위하여 불러주신 계명을 받아들이는 삶이다. 이렇게 목회란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하고 그 명령에 인간을 복종케 하는 일을 뜻한다. 결국 목회학은 회개와 하나님의 명령을 통해 이루어지며 목회대화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을 본질로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목회는 목회의 대상인 인간을 참되게 인식하는 데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제4장 목회에 있어서 인간이해를 위한 노력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해의 노력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성경에 의한 인간 이해는 세속적 인간 이해와는 대립관계에 있다. 그런데 목회의 이론과 실제는 전제되어 있는 인간 이해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형태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해의 성격이 목회의 본질을 결정해준다.1. 경건주의 인간이해

(1) 경건주의 이해a. 경건주의란 16, 17세기를 풍미하던 정통주의에 대항하여 여러 갈래로 그리고 여러 지도자들에 의해 추진된 각성운동을 총칭한다.b. 경건주의가 역사적으로는 복잡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나 어떻게 보면 하나의 통일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c. 경건주의는 같은 시대에 일어났던 합리주의 운동과는 달리 정통주의 이론 자체를 문제시 하지는 않았다.d. 정통주의의 핵심은 바로 ‘의인론’이었다. e. 여기에서 경건주의는 사죄의 진리를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바탕으로 새롭게 부각시켜 합리주의의 홍수 속에서도 진리의 변질을 막는 데 기여했다.정통주의는 의인론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해방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심판행위를 바탕으로 하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라고 생각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셨고 그를 재창조하셨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가 이루지 못할 일을 우리를 위하여 대신 행하신 것이다. 즉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삼일 만에 다시 사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다고 한다.(2) 경건주의 문제a. 하나님에 의한 해방을 문제로 삼지 않으며 오히려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b. 방향을 새롭게 바꾸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를 그 행위가 나타나는 인간에게로 강조점을 옮긴다.c. 은혜가 갖는 유일한 효율성과 자유가 중심에서 밀려나는 대신 이 은혜를 받는 인간이 중심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d. 관심의 방향이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되고 성별 된다는 의인행위(義認行爲) 이상으로 성화(聖化)에 그리고 이것을 인간이 받아들인다는 사실로 향하고 있다.e. 인간이 참회하고 회개하는 인간의 역할이 오직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의 소산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받는데 있어서의 인간의 역할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는 말이다.f. 성화가 독자적인 대상이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행위에 덧붙여지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있다.g. 실상 의인(義認)은 인간의 삶 전체를 휘어잡아 회개와 참회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은 강조하지 않으면서 그 의인과 함께 인간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행위, 즉 의인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추가해야 할 어떤 새로운 행위(=성화)를 들추어 강조하는 것이다.(3) 경건주의 운동a. 경건주의 운동은 ‘경건 내지는 신앙’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로와 대등하게 그리고 심지어 그보다 우월하게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b. 경건주의는 조잡하고 냉엄한 정통주의 이론에 새롭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려고 생각한 것이다. c. 그러나 경건주의가 일깨우려 한 것이 실은 진정한 의인의 내용과는 성격이 다른 것 그러니까 안 하니 만도 못한 것이다.(4) 경건주의 목회a. 경건주의목회란 성화와 관계를 맺고 있다.b. 목회가 설교와 성례전을 통한 말씀의 선포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선포자체를 가장 강요한 점에서 특징이 있다.c. 그들은 성화가 하나님과 똑같이 되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으나 이것은 인간의 영을 통해서만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곧 아주 다듬고 다듬어진 인간의 역사란 모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d. 은혜를 받는 데에는 인간의 역할이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말해서 성화가 인간적인 측면을 지닌 것도 사실이다.e. 성화란 바로 은혜의 역사에 인간이 완전히 참여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은혜를 받고 내가 그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그 결과 내가 회개하고 참회한다는 것이다.2. 성화

(1) 인간의 성화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

a. 하나님의 영으로 창조되고 다시금 창조되는 인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화는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나 안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된 것이다.b.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역사가 한 순간이라도 잃어지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진실이 되는 것이다. c. 그는 바로 내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는 주체자로서 행동하는 곳에 와 계시다.d. 내 죄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한다.(2) 경건주의 목회가 성화를 인간행위에 중심을 둔 것은 위험한 주장이다.

a. 인간과 인간행위를 중심으로 하여 강조점을 옮겨 잡게 되면 결국에는 치명적인 운명에 처하고 말 것이다.b. 죄를 용서하는 능력과 죄를 짓는 능력이 서로 맛 붙어 싸운다는 사실 말고는 달리 성화를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c.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등의 왜곡된 투쟁으로 설명하고 말 것이다.(3) 성화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

a. 성화는 은혜를 통한 인간 자체 내의 투쟁이다. 즉 위에 있는 것과 아래 있는 것, 정신과 본능, 선과 악, 영과 육의 투쟁이다.b. 이러한 투쟁은 은혜의 결과로 필연코 인간 속에 일어나고 만다.c. 성화는 죄와 싸우고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벗어나는 일은 인간 자체 내에서 일어나는 투쟁이라는 형식 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4) 성화를 위한 인간의 투쟁

a. 투쟁은 실제로 위에 있는 것과 아래 있는 것의 투쟁이다.b.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결전을 벌인 투쟁이다.c. 예수그리스도와 암흑의 세력과의 투쟁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도저히 기피할 수 없는 투쟁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d. 본질적인 투쟁 즉 인간 내부에서 벌어지는 투쟁은 골고다 언덕과 부활의 아침에서 결판 또는 투쟁의 반영일 뿐이다.(5) 경건주의 목회의 위험성a. 인간 내부의 투쟁과 똑같다고 여긴다.b. 십자가와 분리시켜 생각함으로서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에서 몰아내는 것이다.c. 그리스도와 그의 행위를 인간의 행위와 동일시하고 있다.d. 십자가상에서 일어난 위에 있는 것과 아래 있는 것의 투쟁을 아래 있는 것끼리의 투쟁과 혼동해 버리는 결과가 된다.e. 용서받은 것을 심리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그것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망각하게 된다.(6) 종교개혁사상a. 죄인이 사죄 받았다고 해서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b. 오히려 항상 새롭게 사죄를 받음으로써 다시금 죄인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c.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이 발전을 이루고 정화 속에 성장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항상 죄인임을 좀 더 깊게 그리고 실감 있게 의식하나 그것을 은혜의 능력 속에서 인식한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d. 성화는 죄가 강력해지나 은혜는 이보다 훨씬 더 강력해지는 현실이 나에게 이루어지고 나의 영역 속에 들어와 나를 바탕으로 성취된다는 인식이 구체화된 현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7) 루터의 요리문답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a. 나는 죄인이고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나는 오직 은혜만 먹고사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b. 인간은 죄와 투쟁하는 존재이므로 필연코 앞서 말한 투쟁이 일게 마련이지만 이 투쟁은 결단코 사죄 다음에 따라 앞서 나와 완성을 기해주는 식의 부차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다.c. 투쟁 자체에 사죄가 내포되어 있는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결단코 투쟁과 용서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d. 내가 이러한 투쟁을 감수한다는 말은 곧 내가 은혜를 힘입어 복종한다는 말이다.(8) 정통주의신학이 경건주의 목회를 거부한 이유a. 성화란 유일한 성별의 역할을 하는 사죄의 은총을 점진적으로 얻기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계속하여 사죄를 누림으로써 죄를 피하고 미워하는 길이다.b. 이것은 다시 구체적인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길도 된다. 이 승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죄를 사함 받았다는 표징인 것이다.(9) 테르스테겐의 신비주의와 카톨릭교회의 목회가 아주 밀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a. 영혼을 인간 속에 스며드는 심층으로 보았다.b. 심층 속에서 인간이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한다는 것이다.c. 이것은 은혜와 전혀 다르다.d. 심층이 바로 인간의 낮은 감각적 본성과는 반대인 진정한 본성인 것이다.e. 이러한 심층적 본성이 하층의 감각적 본성과 싸울 때 투쟁이 생긴다.3. 카톨릭의 인간관과 목회관

(1) 인간관a. 은혜가 위에서 꼭 닫아 놓고 있는 이상 아래에 있는 인간이 마음대로 열 수가 없는 것이다.b.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는 않고 하나님에게 복귀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창조 받을 때 그리고 지금도 죄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는 사실이 바로 카톨릭 신학이 종교개혁 신학과 성격을 달리하는 요인이다.c. 카톨릭의 신관과 인간관은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하여 인간에게 임한다.(2) 카톨릭의 목회a. 인간 속에 잠자고 있는 이 능력을 일깨워 준다.b. 인간의 이 영혼의 불길을 불붙여 준다.c. 인간의 영적 능력을 활용하여 내면적 투쟁을 이끌어 간다.d. 육과 죄와 결전을 벌려 자신의 “영혼”을 일깨워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향하여 전진하도록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3) 루터와 칼빈의 인간이해a. 인간은 “육과 영혼, 죽음과 삶을 함께 지닌” 존재로 보고 그 인간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도 없으며 오직 철두철미하게 죄에 타락한 존재라 보고 있다.b. 그들은 죄라는 말과 그것으로 대표하는 모든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모두 출구가 차단되어 있으며 오직 하나님과 단절된 영원히 피할 수 없는 무서운 암흑만이 남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시킬 만한 다리도 능력도 접촉점도 없는 것이다.

(4) 카톨릭이 본 인간의 본질a.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음으로써 그 앞에서 책임지는 존재이다.b.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저주를 받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비극과 죄로 인한 고통의 심연이 있는 것이다.4.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

(1) 하나님의 말씀a. 인간을 해방시킨다.b. 그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닌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흘리신 보혈로 인간의 죄를 사하신 것이다.c. 모든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말씀이다.(2) 하나님의 뜻a. 하나님은 결코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인간과 접촉되지 않으신다.b. 마리아도 그 어떤 성인도 제 나름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접촉할 수 없다.c.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없다.5. 정신치유

(1) 현대인과 그들에 대한 이해a. 현대인은 교회와 한 번도 접촉해 보지 않았다 할지라도 목회에 대한 개념만은 나름대로 지니고 있다.b. 현대인이 알고 있는 목회 개념과 목회에 대한 기대를 알아야 한다.c. 현대인의 욕구를 바르게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도 그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2) 정신치유의 도입과 위험a. 목회자는 대화를 위하여 정신치유 방법을 목회에 도입하는 경우가 있다.b. 정신치유는 진정한 목회를 이룰 수 없다. c. 세속적인 형식을 갖춘 상식, 인격발전 또는 심리학이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d. 현대인의 생활을 이야기하면서 전혀 각도가 빗나가는 형식을 취해왔다.e. 목회상담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채 인간사회의 모습을 개진해 왔다.(3) 현대인은 인간의 정신생활과 영적 생활에 무관심하다.a. 현대인은 대중사회 속에서 대중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b. 19세기 초엽까지는 가정, 학교, 교회, 사회가 개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c. 그러나 19세기 이후 급격한 도시화는 인간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에서 대중의 문제로 바뀌어 갔다.d. 인간의 관심사는 생활철학과 생활방식이 유물주의로 치닫게 되었다.

(4) 효과 잃은 교회의 노력a. 인간의 정신생활의 타락 물결을 뒤바꿔 보려고 계속된 노력을 기울였다.b. 현대인의 관심은 집단화 내지는 물질주의화 되어 가는 마당에서 전례 없이 교회생활에 파탄이 거세게 일어났다.c. 교회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불일 듯 일어남을 계기로 교회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말았다.(5) 목회상담의 요청a. 인간의 내면생활에 대한 좀 더 깊은 지식 즉 목회상담에 대한 요청이 일기 시작했다.b. 이것은 오늘날까지 침묵을 깨고 소리를 발한 것은 그 자체가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c. 목회와 상담을 갈구하는 영혼의 문제를 새롭게 발견한 셈이다.d. 다시는 병든 상태에 돌아가지 않기 위하여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6) 현대인의 정신적 토대의 결핍a. 현대인의 정신생활의 결핍b. 노이로제c. 철학적 혼돈과 방황d. 곤혹스러운 혼란(7) 유물주의적 세계관과 자연주의적 세계관의 물결이 퇴보하면서 나타난 증거유물주의적 세계관과 자연주의적 세계관의 물결이 퇴보하면서 인간의 영혼문제에 대한 강한 부르짖음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a. 현대 심리학b. 정신 병리학c. 정신 치유법 6. 인간의 이원성

(1) 하나님을 깨달아 알고

(2)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능력a. 잠재되어 있어서 어떤 교육이나 신비적인 몰입b. 지적인 집착이나 도덕적인 순화작용을 통하여 재생될 수 있는 신적 본질로 설명된다.

7.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는 목회

(1)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는 목회여야 한다.

(2) 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실제로 대면케 하신다.

(3) 항상 하나님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시고 인정해 주신다.

(4) 현대인의 특징a. 자기 안에 있는 신적인 요소로써의 영혼이 일깨움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제 나름대로의 이해를 지니고 있다.b. 자기 스스로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정신생활의 양식을 갈구하는 것뿐이다.c. 그들은 믿어주고, 그들의 정신적 자원과 능력을 믿어주고 또 방향을 바꾸어 우리들에게 자기들에 대한 진리를 일깨우고 강화해 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d. 은혜를 통하지 않는 방법을 원하는 것이다.(5) 목회자의 의무a.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해주는 영역으로 바꿔 놓기 위하여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b. 그들을 성경과 기도로 인도해야 한다.8. 성경과 반대되는 인간이해

(1) 자연신학a. 자연신학은 계시와 이성, 성경과 인간의 능력을 동일시하는 사상이다.b. 그에 따른 신앙이다.c. 인간을 은혜 없이 이중성으로 보는 인지학(人知學)의 형태이다.d. 이러한 자연신학은 교회의 사상적 신앙적인 적(敵)이라고 규정되었다.e. 자유주의 신학과 자연신학은 동일한 것이다.f. 자연신학적인 목회는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말씀이나 성경과는 전혀 연루되어 있지 않은 일종의 신비주의적 또는 도덕적 목회 방식으로써 진정한 목회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2) 현대교회가 할 일a. 자연신학과 자연신학적 인간 이해를 최선을 다하여 막아야 한다.b. 뢰에, 휠마르, 하름스 및 두 형제 블룸하르트를 소개한 바 있다.

이들은 모두가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의 가치를 높이 들고 엄밀한 성경적 입장을 따라 목회의 영역을 추구하고 확정한 점에서 오늘날에 있어서도 중요한 참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3) 목회분야에서의 자유주의신학a. 자유주의 신학의 정신이 크게 압도를 이루어 왔다.b. 19세기 초엽에 “슐라이에르마하”와 같은 신학자가 위세를 떨치며 등장했다.c. 19세기 중엽에 나타난 성경에 바탕을 둔 신학을 약화시킨 채 그의 적수로 등장한 “알브레히트 릿츨”도 동일하다.d. “슐라이에르마하”는 교인들의 경건한 의식과 경건한 생활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e. 교회의 정신 상담이 증가일로에 있었다.f. 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저명인사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강론이나 설교나 목회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복음 선포에 거의 영향을 받지 못한 흔적을 뚜렷이 엿볼 수 있다.9. 결론

목회는 이제 오로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는 교회 안에서 다시 이루어 져야 한다.

 

(1) 인간을 세례의 관점에서 보는 목회자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2) 왜냐하면 세례는 인간이 이중성 전체 안에 있고 또 그것과 함께 존재하며 나아가 의식과 무의식 속에 그리고 그것과 함께 존재한다.

(3) 우리는 육과 영혼, 삶과 죽음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실한 우리의 구세주 예수그리스도에 속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표징이기 때문이다.

(4) 목회자는 개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의 생활 속에 구체적으로 심어주며 이것을 교회의 설교를 통하여 선포하는 일 이것이 복음주의적 목회의 과제이다.

 

 

 

 

 

 

 

 

 

 

 

 

 

 

 

 

 

 

 

 

제3편 목회에 대한 이해 Ⅰ. 서론21세기를 맞이한 현대교회는 목사로 하여금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능들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목사의 직무에 있어서도 리더십이 필요로 하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목사의 리더십은 필요로 했던 것은 사실이나 현대에는 다양하고 전문화된 목사의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다.목회사역과 리더십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목사와 그 직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목사의 자질에 대하여 논할 때 리더십의 문제가 다루어져야할 것 같다. 목사에 대한 이해는 곧 그 위치와 그에게 주어진 권위 그리고 그에 따른 직무와 그 역할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목사와 그의 직무에 대한 역사적 배경 그리고 목회의 원리와 그 요소들을 찾아봄으로써 목회사역의 분명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이러한 목회사역의 분명한 이해는 곧 그 사역에 따른 지도자를 발견하는데 중요한 원리가 될 수 있다. 목사로서의 자질은 곧 목사로서의 지도력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의 자질이란 지도력에 대한 겸비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목사의 자질을 위한 자기훈련과 계발은 곧 지도력의 계발과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자기훈련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지도자에 대한 이해와 함께 지도자의 자질을 위한 훈련들은 다음세대를 위한 지도자의 교체와 재생산을 위한 노력과 시도에도 좋은 영향과 그 기초가 되었으면 한다.Ⅱ. 목회에 대한 이해1. 목회의 의미

(1) 목회의 정의목회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일이며, 이를 위하여 목회자가 수행하고 있는 모든 행동영역을 포함한다. 즉 설교, 세례전과 그 시행, 심방과 상담, 교육과 훈련, 교회의 관리와 운영 등을 말한다.성도의 근심과 걱정, 불안과 연약함을 돌보는 것이며 상처 입은 심령을 치유하고 그리스도의 은혜가운데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성숙한 성도로 양육하는 일이다.목회자의 양육 목적은

첫째, 성도의 영적 성장을 돕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후 10:3-8, 13:5-10) 목회자 개인의 야심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의 영적 성숙을 위한 양육의 목적이 시행되어야 한다. 만일 목회자의 야심에 의하여 눈에 보이는 교회의 건물이나 숫자에 고정된다면 진정한 교회 구성원인 성도 개개인의 영적 성장과 전도(선교)활동에는 해로운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한다.(롬 12:4-5; 고전 10:17) 교회는 믿는 성도가 같은 신앙과 고백에 의하여 모인 곳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성도가 하나 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만일 이러한 고백이 일치 되지 못할 때 분열의 위험을 겪게 될 우려가 있다. 또한 신앙은 같으나 그 생활의 규준이 달라 분열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되지 않도록 언제나 같은 신앙을 고백토록 하여 생활의 규준이 일치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게 해야 한다.(롬 11:36, 롬 12:1-2)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거룩한 예배의 삶이 되도록 양육해야한다. 이러한 양육을 위해서는 ①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난 생활(롬 12:1-13) ②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준(롬 12:14-21)이 좋은 교재가 될 수 있다. (2) 목사와 그의 직무 목사는 누구인가?

또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가?

목사에 대한 성경의 명칭들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은 곧 목사의 직무와 그에 따른 봉사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본다.

1) 목사란 말의 어원기독교 대사전에서는 목사(牧師, Pastor)란 '목자'라고 말한다. 한문(漢文)에서는 일찍부터 목민, 목백(牧伯) 등의 말이 있어서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을 의미했으나 목사란 말은 기독교와 관련되어 번역된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그 현대적인 의미로써 그 차이는 다소 있으나 목사로 안수 받은 자와 조직된 교회의 교역자를 지칭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가페 성경 낱말사전에서는 성도를 보호하고 가르치는 뜻을 가진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교회의 교역자를 가리켜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교인들을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격려하며 지역 내에 다른 목사들과 공동으로 복음사역을 감당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엡 4:11).지금까지 살펴본 목사의 의미는 한국적인 배경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어원을 찾아본다면 목사란 Pastor로서 '보호한다'(to protect)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헬라어 '포이멘'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이것은 곧 목자(shepherd)를 의미한다. 라틴어'pasture'에서 유래된 '꼴을 뜯어 먹인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목사란 양떼를 먹이는 사람인 목자와 같은 개념과 함께 푸른 초장을 찾아 양들을 안내하는 목자의 역할로서 순전한 양들을 인도하며 꼴을 먹이며 보호하는 목자로서 성도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직무를 지닌 하나님의 사자이다. 양을 치는 '목자'(shepherd)란 말이 신약성경에서 열여덟 차례 나온다. 구약성경까지 합치면 모두 여든 두 번 나온다. 그 중에 신약성경에서 여덟 번에 걸쳐 직접 양을 치는 목자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을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로는 일곱 번 나온다. 예수님을 가리켜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히 13:20)라 했으며,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자 되신 이'(벧전 2:25)라고 기록된 곳이 한군데 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목사'(pastor)로 번역된 곳이 한번 나타나 있다.(엡 4:11)

2) 목사란 용어에 담긴 뜻'목사' 또는 '목자'라는 직무와 함께 긴밀하게 연관된 성경구절은 사도행전에 있다.(행 20:28) 이것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행 20:17)에 대하여 권고하신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 "너희는 자기(장로:elders)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overseers 또는 bishop)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목자로 세우셔서 먹이고 돌보도록)하셨느니라"(벧전 2:25, 5:1-4)빌 1:1의 말씀을 보면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라"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는 성도와 구별된 '감독들'과 '집사들'이 있다. 이것은 빌립보 교회에 여러 가지 직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 사이에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한 결 같이 각각 '교회의 사자'에게 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교회의 사자'는 곧 '목사'를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감독은 여러 사람들을 통괄하고 지도할 수 있도록 기름 부어 세운 것이다. 목사는 여러 가지 포괄적인 임무를 총괄하는 목자의 개념에서 지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목사는 감독이나 장로가 지닌 직책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넓은 영역에서의 상담자와 행정가로서의 직책도 수행하게 되었다.

3) 목사직에 내포된 요소들① 교사(teacher)의 기능도 포함되어 있다.

목사와 교사는 한직임에 속한다. 가르치는 직임은 일정한 교회를 담임하지 않고 여러 곳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evangelists)'와는 달리 지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에게 한 결 같이 그 중요성이 요청되고 있다.② 성직자로서의 임무도 포함되어 있다.

minister라는 말은 라틴어 minuere에서 유래되었다. 본래 그 말은 '가장 작다', '저하시키다', '감소시키다', '일과'(lesson) 등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동사로는 ministrare로 쓰여져서 섬기는 것(to serve), 종속되어지는 것(to be subordinate)이란 뜻으로 통용되어 minister란 말이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minister란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 가지의 서로 다른 헬라어로 번역되어 있음을 찾아보게 된다.

첫째는 '디아코노스'로 노동자(laborer), 종(servant), 또는 집사(deacon)라는 뜻이다.

둘째는 '레이투르고스'라는 말인데 공중(公衆의 종 : public servant), 일군(worker)의 뜻을 가지고 있다.

셋째는 '후페레테스'라는 말로써 배에서 노를 젓는 사람(under-rower), 또는 보조자란 뜻이다.이러한 말들은 각각 교역자(minister)나 목사(pastor)로서의 직임과 그 기능의 본질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4) minister의 종류와 그 직무 - 신약성경을 근거로 minister의 직무를 다섯으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① 사도(Apostles)이다.

사도라는 명칭은 신약성경에 81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이 사도에 대하여 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 명칭은 다만 예수그리스도의 12제자와 바울에게만 적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바울을 도와 복음에 수종 들었던 사도적인 사람들과 사도직의 은사와 은혜가 아울러 부여된 사람들까지 일컬어진다.사도들은

첫째, 하나님께로부터 또는 예수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적으로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막 3:14; 눅 6:13; 갈 1:1)

둘째,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그의 부활에 대한 증인들이었다.(요 15:27; 행 1:21-22; 고전 9:1)

셋째, 그들의 모든 가르침이나 입으로 말하는 것이든지 글로 쓴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영감 되어진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행 15:28; 고전 2:13; 살전 4:8; 요일 5:9-12)

넷째, 기적을 나타내는 때라든지 그들의 메시지를 비준하는 경우에 비상한 권능을 가지고 행사했던 것이다.(고후 12:12; 히 2:4)

다섯째, 그들의 수고에 하나님이 표적이 따랐고 그들의 직무에 풍성한 은혜가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고전 9:1-2; 고후 3:2-3; 갈 2:8) ② 선지자들(Prophets)이다.

신약성경에서도 선지자들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③ 복음전하는 자들(Evangelists)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 밖에도 성경은 복음전하는 자들에게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행 21:8; 엡 4:11; 딤후 4:5; 딛 1:5; 3:10)④목사(장로)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minister하면 그것은 거의 목사의 대명사가 되었다.⑤교사이다.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minister)로서의 직무 중에 교사의 직무 역시 중요한 사역이다.이와 같이 minister의 종류는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이행해야하는 minister의 임무로는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이다.

둘째는 모든 봉사의 일을 하는 것이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넷째는 믿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 되게 하는 일이다.

다섯째는 진리(성경 교의)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일이다.

여섯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일곱째는 모든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3) 목사의 자격(자질)목사는 직업인이 아니라 사명인이다.

하나님의 사신이며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자이며, 진리의 해석자이다. 그러므로 그 직분은 고귀하고 거룩하다.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목사의 직분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무려 5번이나 그 이유를 들면서 사양한 것에서 잘 이해할 수 있다.

① '그는 사명자로서 적합하지 못하다'(출 3:11), ② '권위가 없다'(출 4:1), ③ '입술이 둔하다'(출 4:10), ④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출 4:13), ⑤ '메시지가 없다'(출 3:13) 등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를 발하시면서 그를 사명자로 세우셨다. 목사가 목사 됨에 있어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야 된다는 사실은 절대적이지만 그 외에도 갖추어야할 요소가 많이 있다. 성경은 교회 지도자들의 자질을 중요하게 강조하여 거룩한 지위를 얻고자 하는 자들이 갖추어야할 자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목사의 자질을 언급하면서 자신과 관계, 가정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 등 제반문제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1) 영적인 자질바울은 영적 지도자들의 자격 요건을 열거하면서 업무 능력보다는 성품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떤 사람의 자격은 그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 보다는 그가 어떤 인물이냐에 의해 결정된다. 만약 누가 죄를 지어 그로 말미암아 인격에 손상이 오면 그는 전체 회중 앞에서 징계를 받아야 한다. "범죄 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왜냐하면 교회는 그 거룩한 직분을 소중히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 지도자들의 영적 자격에 관한 요건에는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신학교는 사람에게 사역을 위한 준비를 시켜줄 수 있고, 교회는 그에게 봉사의 기회를 확대시켜 줄 수 있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사역에 합당한 자질을 부여하실 수 있다.그러면 이러한 자격 요건들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교인들은 자연히 지도자를 닮기 때문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눅 6:40).

이러한 목사의 '영적인 자질'을 딤전 3:1-7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a. 책망할 것이 없는 자"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딤전 3:2)라는 말씀 중 '책망할 것이 없으며'(아네피렘프토스)는 본문과 딤전 5:7, 그리고 딤전 6:14에 등장한다. 아네피렘프토스는 체포당할 여지가 없는, 붙들어 둘 수 없는, 비난받을 것이 없는,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또한 "책망할 것이 없고"(딛 1:6),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딛 1:7)에서 '책망할 것이 없고'(아넹클레토스)는 아무 죄가 없는, 무죄한, 비난 할 수 없는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① 다시는 범행을 못하도록 어떤 범죄자를 붙들어 두거나 붙들어 둘 수 없다는 뜻이다. ② 그를 고소할 만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③ 그는 책망들을 일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인격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교회의 지도자는 그의 태도나 습관, 행위 등이 모두 깨끗해야 한다.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의 성품에 결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의 설교나 생활에 있어서 모순이나 위선을 가지고 사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지도자는 경건의 본이 되어야 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빌 3:17)고 했던 것처럼 지도자는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한다.

청교도 목회자 백스터(Richard Baxter)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자신의 설교에서 금하라고 외치는 죄에 당신 스스로가 빠지지 않으려면 또 당신이 매일 정죄하는 죄에 스스로 빠지지 않으려면 당신은 늘 조심해야 한다. 당신은 애써 하나님을 높이고 나서 다시 하나님과 다른 성도들을 창피 주려하느냐? 당신은 애써 그리스도의 주관하시는 능력을 선포하고 나서 이를 능멸하고 스스로 거역하려 하는가? 당신은 그의 율법을 선포하고 나서 또 이것을 고의로 범하려 하는가? 죄가 나쁜 것이라면 왜 당신은 그 안에서 살려하는가? 만약 죄가 나쁜 게 아니라면 왜 당신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설득하는가? 죄가 위험한 것이라면 왜 당신은 죄를 짓는 모험을 하는가? 만약 죄가 위험하지 않다면 왜 당신은 사람에게 경고하는가? 하나님의 경고가 진실이라면 왜 당신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가? 만약 그것이 거짓이라면 왜 당신은 쓸데없이 그것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공연히 겁을 먹게 만드는가? 당신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그런 일을 계속 행하고자 하는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술 취하지 말라, 탐욕 부리지 말라고 하면서 당신 스스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이 무슨 일인가! 악을 금하라고 하는 그 입에서 악이 나올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경고하는 그 입이 이웃을 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헐뜯을 수 있는가? 당신도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당신이 경고하는 그 죄에 삼킴을 당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죄를 정복하라고 말하면서 당신은 죄에 절하고 그 노예가 될 수 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니라" 오 형제들아! 죄를 꾸짖는 것은 쉬워도 죄를 극복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감독에게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말할 때 사도 바울은 그가 완전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감독의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말의 의미는 사람의 평판을 더럽히거나 품위를 손상시킬만한 죄의 병폐가 그에게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b. 한 아내의 남편목사는 "한 아내의 남편"(딤전 3:2; 딛 1:6)이어야 한다. '한 아내의 남편'이란 '한 여자로 만족하는 그런 남자'를 말한다.이것은 ① 동성결혼(창 19:7; 레 18:22; 롬 1:26-27; 고전 6:9; 딤전 1:10)을 배제하는 사상이다. ② 교회와 결혼하는 소위 독신주의를 배제하는 사상이다. ③ 일부다처제를 배제하는 사상이다. ④ 재혼 금지설을 배제하는 사상이다. 따라서 일부일처주의, 부부일신주의, 성결주의, 경건주의를 주장하는 사상이다.불규칙한 일과 그 계획, 많은 유혹에 직면한 목회 현장, 다양한 유혹들로부터 목회자는 도망쳐야 한다.

c. 절제하는 자"절제하며"(딤전 3:2; 3:11; 딛 2:2)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말하며, 비유적인 의미로써는 중용을 지키다, 냉정하다, 용의주도하다 등의 뜻이 있다. 포도주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좋게 하고(삿 9:13), 위장병 등의 약으로 사용되기도 하며(딤전 5:23), 마음에 근심하는 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도 하지만(잠 3:16), 종종 폐해를 가져오게도 한다.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잠 20:1)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잠 23:29-35) 영적 지도자는 명석한 생각과 건전한 판단을 흐리게 하는 과도한 일을 생활 속에서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① 영적 지도자는 세속주의에 동화되지 않고 ② 세속에 깨어 있으며 ③ 명석한 판단을 소유한 자인 것이다. 일이든, 음식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도에 지나쳐서는 안 됨을 알려 주고 있다. 어떤 때는 과식도 죄가 될 수 있으며 그런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늘 절제하고 균형 있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d. 근신하는 자"근신하며"(딤전 3:2; 딛 1:8, 2:2, 5)란 마음이 건전한, 자기의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는, 자제하는, 삼가는, 절제하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강한 마음, 정직한 마음을 뜻한다.귀신들렸던 자가 정신이 온전해진 경우가 근신에 대하여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눅 8:35)절제력 있는 사람은 과도함을 피하고 사물을 명확히 볼 수 있게 되며 그러한 명확한 사고는 다시 질서 있고 규율 있는 삶으로 이어진다. 그는 무엇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지를 알고 진지하게 대처한다. 박윤선 박사는 '근신하며'란 마음의 욕심을 절제하며 깨어 있음을 가리키는데 이는 '외부적 행위에는 절제하면서도 마음속 욕심의 동작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는 그의 생활에 영적 은혜가 없으며 기쁨이 없고 고민이 있으며 신앙의 성장이 없다'라고 했다.석원태 목사는 「'근신'이란 건전한 마음가짐, 분별력 있는 지성, 자제력, 정절, 욕망의 자기 통제, 부단한 자아성찰, 그리고 일관된 심지를 내포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e. 아담한 자"아담하며"(딤전 3:2)란 잘 정돈된(well-arranged), 예절에 맞는(seemly), 정숙한(modest)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아담한 삶을 사는 자는 예의범절이 있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영적 지도자의 외적인 유덕미(遺德美)를 말한다. 품위를 나타내는 의상이나 교양미, 규모 있는 행동, 그리고 품행의 단정함을 의미한다.

f.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자"나그네를 잘 대접하며"란 나그네를 친구처럼 사랑한다는 뜻이다. 즉 나그네의 필요를 공급해 준다는 말이다."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게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눅 14:12-14)"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는 자라야 할 것이요"(딤전 5:10)"손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벧전 4:9)'나그네를 대접하며'라는 말이 가르치는 기본원칙은 자신과 자신이 가진 자원을 자기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쓰라는 것이다. 그런고로 영적 지도자는 후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이익을 사랑하기는커녕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줄 것이 자기에게 없는지 살펴야 한다.

g. 가르치기를 잘하는 자"가르치기를 잘하며"(딤전 3:2)란 가르치는데 재능이 있고 능숙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영적 지도자는 그의 목회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다양한지에 관계없이 가르치는 일에 목회의 비중을 크게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목사는 여러 가지 사역 중에 중요한 교사로서의 사역이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에는 설교뿐만 아니라 성경의 해석과 가르침의 기술에 있어서도 교인을 감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라는 말씀 가운데에서도 교사는 은사 중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르침에는 필수적인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① 가르침의 내용이 복음 자체이어야 한다. 다른 교훈이나 다른 복음이 아닌 바른 교훈을 가르쳐야 한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그 자체를 가르쳐야 한다.

② 전달방식에 있어서 지적요소가 수반되어야 한다. 좋은 교사는 효과적으로 의사 전달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숙련된 방법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가르치는 은사'를 통해서 그 자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③ 정확한 표현과 설득력(감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능력과 자신들의 가르침이 신뢰성이 있게 하는 정직성을 가져야 한다. 효과적인 가르침의 강력한 원동력은 신뢰성이다."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과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 4:12)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딤후 2:24)"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딛 1:9)

h. 술을 즐기지 않는 자"술을 즐기지 아니하며"(딤전 3:3), 지도자는 술을 즐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술은 방종 하는 생활의 자극제이며 향락생활의 첩경이다. 이것은 사탄이 즐겨 쓰는 타락의 도구이다(계 17:2). 술에 취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10)"투기와 술 취함과 ...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21) 영적 지도자가 술 취함으로 인하여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영적 지도자라 할 수 없다. 술에 취하여 자제력을 잃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무책임한 행동을 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될 것이다.

i. 구타하지 아니한 자"구타하지 아니하며"(딤전 3:3; 딛 1:7), 구타는 때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뜻은 손과 혀로 타인을 때리는 자, 치는 자를 말한다. 영적 지도자는 성질이 급하여 물리적인 폭력에 의존하면 안 된다. 어떤 분쟁을 해결할 때 주먹이나 다른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j. 관용하는 자"오직 관용하며"(딤전 3:3; 빌 4:5; 딛 3:2; 약 3:17; 벧전 2:18)라고 했다.

관용이란 알맞은, 공정한, 온화한, 온순한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즉 범죄 한 자를 용서하고자 책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적으로 관용이란 선을 기억하고 악을 잊어버리는 능력을 말한다. 사람들의 허물을 보지 않고 좋은 것만을 보고자하는 마음가짐이다.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영적 지도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영적 자질이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 11:24), 바나바 외에도 아브라함(창 13:8-9), 이삭(창 22장, 26:12-22), 요셉(창 50:15-21), 모세(민 12:3), 요나단등이 관용의 개념에 가장 근접하는 인물로 성경에 그 이름이 빛나고 있다.

k. 다투지 아니한 자"다투지 아니하며"(딤전 3:3; 딛 3:2)란 저항 받지 않는, 정복할 수 없는, 싸움을 삼가는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투지 않음은 관용의 결과로 주어진 화평을 말한다. 이것은 진리를 위한 다툼이 아닌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 문제에 얽힌 다툼을 의미한다.

딤후 2:24에는 주의 종이 갖추어야할 덕목을 말씀하고 있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다투지 아니함이란 지도자의 평화로운 인간상을 나타내고 있다. 아집이나 배타성, 독존성이나 우월감은 많은 사람을 놓치는 독소가 될 수 있다. 만일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목사가 되기 전에 그런 성향을 죽일 수 있어야 한다. 목사는 먼저 자기제어, 자기 정복에 명장이 되어야 한다.

l. 돈을 사랑하지 아니한 자"돈을 사랑치 아니하며"(딤전 3:3)란 낱말 그대로 돈을 사랑치 아니함을 말한다. 돈을 사랑하면 목사의 사역이 돈을 버는 도구로 보이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6-10).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곧 세상의 향락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라고 하셨다(골 3:5).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는 정당한 수입과 이를 선용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m.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딤전 3:4)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다스림은 ‘감독하다’, ‘관장하다’, ‘보호하다’, ‘도움을 주다’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신의 집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영적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주어진다. 여기에는 자기 집을 다스린다는 것은 곧 사람과 물질적인 재산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의 선택에 있어서도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입증되어야 한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딤전 5:17)라고 하셨다. 교회를 돌봄에 있어서는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으로 행하여야 한다(눅 10:34-35).

n. 성숙한 자딤전 3:6에 보면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라고 했다. "새로 입교하다"말은 ‘새롭게 씨를 뿌린’이란 뜻으로 최근에 개종하여 교회가 받아들인 자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감독은 바로 나무를 심어서 뿌리를 내리지 않고 열매(체험)도 없는 자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미숙한 자는 감독이 될 수 없다.

모세는 40년간을 일하기 위하여 80년을 준비했고, 바울은 부름을 받았을 때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한 자기보다 먼저 사도 된 자를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가서 3년간을 머물렀다. 바울은 14년 후에 교회의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다(갈 1:14-2:1). 예수님의 12제자들은 3년 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다. 역사상 유능한 감독들은 오랫동안 영적 경험과 다듬어진 식견의 과정을 밟았다.

감독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는 감독으로 피택 되었을 때 도망간 일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 병자를 위하여 자기 재산을 다 바친 후 주의 일에 전념했다. 에브라임(Ephraim)은 감독으로 임명을 받았을 때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미친 사람처럼 했다. 밀란의 감독 암부로시우스(Ambrosius)는 자기의 전 재산을 기울여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밤새워 가면서 기도하던 자인데 감독으로 임명을 받았을 때 두려워 일시 피한 일이 있다. 어거스틴(Augustine), 루터(Luther), 칼빈(Calvin)이 모두 그러했다. "교만하여지다"란 '연기로 휘감다', '부풀어 오르다'라는 의미로써 교만으로 흐려진다는 말이다.

새 신자는 헛된 우월감으로 들떠서는 안 된다. 그들의 마음이 교만한 마음으로 흐려져서는 안 된다. 마치 자만심의 연막(smoke screen of pride)에 휩싸이는 것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새 신자가 영적 지도력 없어서도 아니다. 훌륭한 교사로서 가르치는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또한 좋은 지도자가 아니어서도 아니다. 도리어 강력한 지도자일 수도 있다. 단지 그가 영적 지도자가 되는 순간 성숙한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교만과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싸움은 영적 지도자의 자격 요건을 갖추기 위한 훈련의 과정에서 나타난다. 즉 책망할 것이 없는 지도자, 한 아내의 남편, 절제하고, 근신하고,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고, 술을 즐기지 아니하고, 구타하지 아니하고,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딤전 3:2-5)로서 훈련과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o. 외인에게도 선한 증거를 받는 자"또한 외인에게도 선한 증거를 얻는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7)고 했다. 감독은 비 기독교인으로부터도 존경을 받아야 한다. 여기에서 "선한"이란 내적, 외적 선함도 포함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한 성품에 대하여 증거를 가져야 한다. "외인"이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즉 불신자를 말하는 것이다. 감독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그 지역사회로부터 온전한 인격과 사랑과 친절과 관대함과 양선과 평판을 얻어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그의 신학적인 사항에 동의해야 한다. 실제로 그의 기독교신앙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인품으로 존경받아야 한다. 이로서 그의 지역사회에 경건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빌 2:15).

p.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는 자"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딛 1:7) 여기에서 '자기 고집'은 자기만족(self-pleasing), 제 멋대로(self-willed), 거만한(arrogant), 독단적인(arbitrary)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결국 자기 생각(긍정)에 도취하여 다른 사람의 생각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신의 이기심이나 공명심이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잘못된 자기 사랑은 곧 교만이다.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은 곧 남을 무시하는 행위가 된다. 오직 자기만의 길과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감독에게는 금물이다(빌 2:3).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의 특징을 보면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에서 거리가 먼 사람이다.

q. 급히 분내지 아니한 자"급히 분내지 아니하며"(딛 1:7)라는 말씀 중 "급히 분냄"이란 '화내기 쉬운', '성을 잘 내는'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은 분을 발하는 경향이 없어야 한다. 물론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성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고 교훈하고 있다(엡 4:26-27). 그러나 문제는 분을 내는 일에 거의 상습적인 사람들에게 있다. 이러한 고질적인 사람은 갑자기 분을 발할 뿐만 아니라 분노의 용광로에서 분을 폭발시키고 그분을 계속 끌고 간다. 분노는 영적인 일에 가치 있는 것을 하나도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세운 사람은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노하지 않으며, 적개심을 품지도 않으며, 다투지도 않으며, 분노를 품고 살 이유도 없다. 그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약 1:19-20; 잠 22:24-25)

r.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아니하는 자"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딛 1:7)란 '부끄러운 돈벌이', '부정한 이윤' 등을 말한다. 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사람을 말한다.(벧전 5:2; 딤전 3:3; 딤전 6:10) 돈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과 타협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으려 한다. 영적 지도자는 자기가 쉽게 타락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고 탐욕을 품거나 자신을 방임해서도 안 된다.바른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은 엿새 동안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대로 힘써 일하여 돈을 버는 것이다. 그리고 이레 되는 날은 그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것은 도적질하는 것이다. 즉 부끄러운 돈벌이에 해당한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8-9)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 4:3)"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s.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자"미쁜 말씀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딛 1:9) 여기에 "미쁜 말씀"은 신실한 말씀, 참된 말씀의 의미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전해진 복음을 뜻한다.

“말씀”은 그리스도시요(요 1:1),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것은 신실하여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복음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감독은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파수할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그 가르침대로 행해야 한다.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복음의 말씀을 철두철미하게 지킬 때 비로소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바로 책망할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은 입으로 복음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

2) 지적인 자질바울은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딤후 4:13)고 했다. 인생의 마지막 길에 서 있는 전도자의 한 면이 결국 책으로 돌아가는 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나이 많은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머지않아 죽음에 이르게 될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기록해 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도록 권면하고 있다(딤후 3:14).

a. 목사가 될 자는 먼저 학문을 전수해야 한다.지식은 자연을 정복하고 행복을 창조하는 힘이 있다. 지식을 얻기 위해 목사가 될 사람은 학문적 기초를 닦아야 한다. 언어학, 인문학(문학, 심리학, 논리학, 철학), 교육학, 역사학, 과학, 정치학, 사회학, 천문학, 지질학, 경제학, 생물학, 수학, 컴퓨터공학, 유전공학 등의 다방면에 이르는 학문들을 개괄적으로 전수해야 한다. 이러한 일반 학문들은 신학 입문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필요하다. 다방면에 대한 일반학문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계시(성경)를 접하는데 필요한 도구들이다. 결코 선지자와 사도들은 무식한 자가 아니었다. 저들은 당대의 학문 사조를 통달한 자요, 또한 하나님의 직접적 간섭을 받은 자이었다.목사가 평소 학문적 열성이 없이는 결코 뜻 깊은 메시지를 전할 수 없다. 목사가 현대의 사상과 생활에 대한 상당한 지식과 이해가 없이는 그 속에 우리의 신앙을 침투시킬 수가 없다. 목사는 그 사회 영역뿐만 아니라 지적 지도자이기 때문에 현대 사상과 생활에 이지적이면서 권위 있는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보다 높고 넓은 지적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목사의 수준이 교회의 수준을 판가름하기 때문에 목사가 될 사람은 이러한 일반학문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b. 신학을 전수해야 한다.하나님께 부름 받은 목사는 그의 사명을 위해 이미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가? 아니면 그는 특별한 혹은 전문적인 훈련을 필요로 하는가? 일반 대학교육으로 완벽한 준비가 되는가? 아니면 그 이상의 신학교육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이다.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신학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중세에 있어서 신학은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 일컬어졌다는 점에서 신학은 단연 모든 학문 가운데 최고봉이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목사는 신학적 배경이 든든해야 한다. 신학이 나름대로 확립되지 않고서는 결코 좋은 목사가 될 수 없다. 신학의 전문적인 기초가 없이 목사가 되려는 것은 마치 콘크리트를 하지 않고 맨 땅에 고층 빌딩을 지으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겠다. 의과대학이 의사를 위해 있고 법과대학이 법률가를 위해 있듯이 신학대학은 목사의 사명에 대한 보다 효율적이고 진보된 훈련을 위한 학교이다. 그러므로 포괄적이고 통일성 있고 체계성 있는 신학교육은 정규과정에서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등의 신학 전반의 정규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a) 성경신학 - 성경언어(히브리어, 헬라어), 신약학, 구약학, 성경해석학, 성경주석학 등이 있다.b) 조직신학 - 교리학, 기독교 윤리학, 변증학, 신조학 등이 있다.c) 역사신학 - 교리사, 교회사, 성경고고학 등이 있다.d) 실천신학 - 교회정치, 교회행정, 기독교 교육학, 예배학, 전도학, 목회학, 설교학, 목회 상담학, 교회음악, 심방학, 선교학 등이 있다.이러한 교과과정은 단순한 지식이 단편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서로 의존되는 자료의 통일된 프로그램이다. 즉 기독교 신앙의 성경적, 교리적, 역사적인 표현에 대한 이해증진과 목회실천에 필요한 실천적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c. 임직 후에도 계속 배워야 한다.부지런히 학문을 추구하는 학생이 되지 않고서는 성공적인 목회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목사는 결코 그의 연구하는 모습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목사가 그의 연구를 중단하면 그의 사역이 빛을 잃게 되며 또한 효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목사 자신이 초기에 연구한 것과 신학교에 있을 동안에 수집한 자료를 계속해서 의지하여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목사는 항상 새로운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독서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고 권고하고 있다. 독서는 목사로 하여금 주의 일과 세상일에 있어서 행해야 할 것에 대하여 익숙하게 인도해 준다. 독서는 예화 자료의 무한한 지원을 제공하며 그의 설교에 있어서 생동하는 생명력과 창의력을 개발시키는 큰 원동력이 된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독서와 연구에 게으른 목사들에게 말하기를 "설교에 있어서 당신의 능력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7년 전에 행하던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생기에 넘치는 것이라고는 하나 깊이가 없는 것이며 변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사상이 결여된 것이다. 이것을 공급해줄 수 있는 길은 오직 독서이다. 당신은 그것이 없이는 완전한 기독교인 그 이상의 깊이 있는 설교자가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목사는 학생이다. 계속해서 배우는 사람이다. 생각하고,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설교하는 일정한 시간을 조정해야 한다. 그는 독서하면 연구한다. 성문학, 전통, 역사, 언어학, 신학, 철학, 정치, 경제, 예술 등 모든 면에서 항상 여러 사람과 만나고 교제하면서 자기를 성숙시키는 자이다. 그래서 목사의 서재는 곧 기도실이요, 교수실이요, 바로 나타나지 않는 강단이요, 영적교통의 밀실이요, 영력의 보고이다.

3) 건강의 자질목사는 육체가 건강해야 한다. 신체건강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귀중하다. 목사는 육체적인 건강을 책임져야할 그 범위까지 이르도록 자신의 몸을 돌보아야 한다. 건전한 정신, 건전한 생활은 건전한 신체로부터 출발한다. 건강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지만 인생의 기본조건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건강이라는 자본이 없으면 목사직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의 건강(Physical Welfare)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웬만한 과로와 어려운 일에도 능히 견딜 수 있는 건강한 신체를 가져야 한다.

a. 몸에 대한 바른 지식이 필요하다.ㄱ) 몸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시 100:3)"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사 43:1)"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고전 6:19)이러한 성경구절들은 모두 다 한 결 같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몸은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목사는 이러한 몸의 기원을 통해 몸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잘 관리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ㄴ) 값으로 사신 것이다."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여기에서 '산 것이 되었으니'라는 어원을 보면 헬라어 'agorazo'라는 말에서 유래된 'egorasdete'이다. 이것은 당시 노예시장이었던 'agora'에서 값을 주고 산 것('agorazo' : 값을 주고사다)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바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사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것이다. 결국 매매행위와 같은 방법을 통하여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이다.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값으로 사신 바 된 것을 깨닫고 주님의 소유가 된 이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ㄷ) 새로운 피조물이다."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여기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중생한 사람이며(요 3:3) 새 사람이다(엡 4:23; 골 3:3).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ktisis'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 몸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ㄹ) 성령이 거하는 전이다."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구약시대 성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도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각 성도들 안에 내주하심으로 각 성도는 하나님의 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몸의 주인이신 성령의 뜻대로 쓰임 받아야 한다. 결코 쾌락의 도구가 되어 그 몸이 상함을 입거나 학대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ㅁ) 그리스도의 지체이다."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여기에서 '지체'란 헬라어 'melos'이며, '몸의 일부, 사지, 팔다리' 등의 뜻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엡 1:23, 4:16, 5:30; 골 1:18). 즉 교회는 곧 성도들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이다.ㅂ) 의(義)의 병기이다."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여기에서 '병기'란 헬라어 'hoplon'이며, 전쟁이나 공장 등에서 쓰이는 도구를 나타내는 고대어로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① 무기(weapon)이다. - 신자의 몸은 신령한 전쟁에서 병기(무기)와 같다는 뜻이다. 죄를 대적하고 죄와 더불어 싸우고 마귀와 접전하는데 필요한 거룩한 병기와 같다는 말이다.

② 그릇(vessel)이다. - 하나님의 집에는 여러 가지 그릇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릇의 종류를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쓰임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주인의 합당한 그릇만이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③ 악기(instrument)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악기의 종류가 아닌 그 악기를 누가 연주 하는가에 있다.이처럼 신자의 몸은 신령한 전투를 위한 몸이요, 주인이 쓰시는 그릇이요, 악기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목사는 자신의 몸이 의의 병기가 되도록 잘 다듬고 준비하여 주님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예비 되어 있어야 한다. ㅅ) 하나님께 드릴 산 제물이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다. 여기에서 '몸'은 재창조함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의의 병기(롬 6:13), 성령이 내주 하시는 성령의 전(고전 6:19)을 말한다. 그리고 '산제사'란 죄로 죽었던 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하나님을 향하여 바르게 사는 헌신된 삶을 말한다. 즉 비록 거듭난 사람이 완전하지는 못하나 그 방향과 목적이 하나님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ㅇ)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몸이다."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그의 보혈로 우리를 사셔서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성도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요 주님의 것이 된 것이다. 이제 성도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요(롬 14:8),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야 한다(고전 10:31).ㅈ) 영광의 씨앗이다."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2-44)고 했다. 바울은 현재의 육체는 썩고 욕되며 약한 것이나 부활 후의 몸은 영원히 썩지 아니하며 영광스럽고 강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현재의 몸은 병들고 신음하고 결국 죽는 욕된 것이나 부활의 몸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말이다."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b. 주께 합당하게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목사는 자신의 몸이 신령한 하나님의 전임을 기억하고 적절히 관리하고 보호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목사의 몸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하나님의 일을 다루듯이 자신의 몸을 잘 간수하고 보존해야 한다.ㄱ) 연구시간을 조정해야 한다. 규칙적인 습관은 사역의 효과를 가져 올 뿐만 아니라 건강보호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침식시간을 정하고, 기도, 성경 읽기, 설교준비, 심방, 상담, 행정, 교육 등의 규칙적인 시간표를 만들되 주간 및 월간, 연간으로 만들어 시행하면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교회성장에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교회의 특성상 돌발적인 사고(환자, 사고, 장례 등)가 있을지라도 원칙적인 계획에 큰 차질이 없는 범위 내에서 시간을 조정해야한다. ㄴ) 충분한 휴식과 오락이 있어야 한다.목사가 건강을 유지하려면 쉬는 날이 필요하다. 물론 이 때 약간의 적절한 오락을 곁들이면 더욱 효과가 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오락 그 자체가 보다 효과적인 휴식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 날의 피로는 그 날에 풀어야 한다. 이것은 충분한 수면으로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잠이란 것은 누구나 필요하지만 특히 목사들에게 더욱더 요구되어지는 휴식의 한 방편이다.ㄷ) 일정한 운동과 산책이 있어야 한다.목사는 적당한 종류의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만약 그러한 운동이 없다면 그의 사역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는 문제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때로는 나태해 지기 쉽다. 의기소침해지고 또한 지루함을 느끼는 많은 순간들을 만날 때마다 산책을 하거나 다른 종류의 운동을 한다면 새로운 마음자세를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육체를 단련하여 건강함을 가지는 것은 목사에게는 너무 중요하고 또 목사의 사역만큼 힘든 사역도 없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건강을 위하여 꾸준히 연습하는 것은 절대적이다. 자신의 형편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운동을 선택할 줄 아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ㄹ) 건강에 필요한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비타민 등을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 이 중 하나라도 부족하거나 과중할 경우 건강을 해치게 된다. 따라서 편식이나 과식은 피해야 한다. 또한 분주한 일정일지라도 식사는 규칙적으로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ㅁ) 건강의 첩경이 되는 유쾌한 마음을 배양해야 한다.심리적 조건은 육체에 큰 영향을 끼친다. 마음이 상하면 허약한 육체를 만든다. 그러므로 목사는 항상 유쾌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유쾌한 마음은 건강에 유익한데 이는 심리적 조건이 육체에 큰 관련을 가지고 있다. 비록 절망적인 난관에 봉착할지라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전지전능하심을 의지할 때 난관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근심이나 염려는 건강을 해치는 나쁜 습관이다. 항상 주안에서 감사와 평안을 누리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ㅂ) 건강관리에 호젓한 주택이 수반되어야 한다.목사의 건강은 그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만일 건강을 잃는다면 그의 모든 사역은 중단될 것이며 그의 모든 꿈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택환경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렇다고 주택이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워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목사의 육적, 심적, 영적인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환경상태가 되면 족하다.

c. 육신적인 장애가 있다면 공인으로서 목회활동에 부적합하다.구약의 제사장의 직분은 그 자손에게 세습이 되었으나 육신적인 장애자는 그 직책을 받지 못했다.물론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과는 다르지만 그러나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신체가 강건한 자라야 한다. 사도 바울도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고 했다. 그러나 특수 분야의 선교적인 사명이 있다면 그들과 같은 형편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욱 효과가 있을 것이다.2. 목회에 대한 역사적 배경

(1) 어원적(語源的) 배경목회(Pastoral)라는 단어의 어원은 목자(Shepherd)에서 유래되었다.

1) 구약에서의 명칭a. 보켈가축을 치는자(a herdsman)로 아모스가 소명 받기 전의 직업을 의미한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암 7:14)라고 했다.

b. 노케드가축의 소유주(cattle owner, owner of flocks)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왕하 3:4; 암 1:1). 특히 아모스의 직업을 확인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어 졌다.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암 1:1)고 했다.

c. 로에가축을 먹이는 자(to feed flock), 가축에게 풀을 먹이는 자(to pasture), 가축을 돌보는 자(to tend)로 흔히 목자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창 13:7-8)고 하였고,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창 26:20)라고 했다.

2) 신약에서의 명칭

a. 보스콘테스광의적 의미로 가축을 치는 자(a herdsman)로 이 단어가 쓰여지고 있다(마 8:33; 막 5:14; 눅 8:34).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마 8:33)라고 했다.

b. 포이멘협의적 의미로 양 무리를 먹이고(to feed), 돌본다(to protect)는 의미를 가진 낱말로써, 목자(a shepherd)로 쓰여지고 있다. 신약에 이 말이 18회 사용되어졌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8회는 양의 목자에게 언급되었고(마 9:36, 25:32; 막 6:34; 눅 2:8, 15, 18, 20; 요 10:2), 7회는 상징적으로 예수에 대해 사용되어졌다(마 26:31; 막 14:27; 요 10:11-12, 14, 16). 또 1회는 양의 대 목자이신 예수(히 13:20), 목자와 감독이라는 이중 명칭(벧전 2:25), 목사(엡 4:11)로 사용되어졌다.이러한 어원에 나타난 목자의 역할은 ① 가축을 비옥한 목초지로 몰고 가는 일(인도), ② 가축에게 꼴과 물을 먹이는 일(양육), ③ 가축을 짐승과 도둑 떼들로부터 지키는 일(보호=구원)이었다(렘 31:10; 겔 34:12; 암 3:12). 그러나 목자는 풍성한 초원을 가져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초원이 없는 목자, 초원이 없는 양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목회(Pastoral)란 명칭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레미야는 "목자가 그 양 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렘 31:10), 에스겔은 "내가 내 양을 찾아서"(겔 34:12)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목자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를 가리켜 목자라고 불렀다(출 3:1; 민 27:17; 왕상 22:17; 렘 2:8, 10:21, 23:1; 겔 34:23). 예수님도 자신도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a Good Shepherd)로 표현하고 있으며(요 10:11),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실 때에도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요 21:15-17).(2) 성경적 배경

1) 구약시대

a. 홍수시대 - 노아는 일종의 목자로서의 성격을 지닌 사역자였다. 하나님께로부터 방주계시(말씀)를 받아 방주사역에 가담한 자들에게 그 계시(설계, 내용, 목적)를 가르치며 인도하였다(창 6장).

b. 족장시대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목자성의 역할을 감당하게 했다. 특히 족장들은 친히 제단을 쌓고 그 자녀들의 신앙을 지도하였다. 또한 요셉도 야곱의 후손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목자성의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c. 출애굽시대 - 민족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목자의 역할을 잘 감당한 이들은 모세와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를 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한 목자적 공권을 허락하셨다(출 3:1-10).

그리고 모세로 하여금 여호수아를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도록 하셨다(민 27:18-23).선민 이스라엘 사회에는 제사장(Priest)제도가 있었는데 족장시대와 출애굽시대의 제사장들은 우림(Urim)과 둠밈(Thummim)을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신의(神意)를 전하는 매체로 사용하였다(신 33:8-11).

d. 사사시대 전·후기사무엘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사역했다. 특히 사무엘 시대에는 백성들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조언을 얻기 위하여 선지자(The Prophet), 혹은 선견자(The Seer)를 찾아가 영적인 문제를 해결 받았다(삼상 9:9).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중심으로 백성들을 견책하고 충고하였으며 때로는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는 개인 신상 문제에서부터 국가의 장래 문제를 다루기도 하였다. 나단은 다윗에게(삼하 12장),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좋은 목자였다(사 36장).e. 선지자시대왕정시대가 시작되면서 전문성을 띤 신학교, 즉 권위 있고 노련한 선지자들의 지도와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선지학교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엘리야와 엘리사의 선지학교로써 여리고, 벧엘 동편, 요단강 등지에 있었다(왕하 2:1-18). 이러한 선지학교는 사실상 사무엘 시대부터 시작한 듯이 보여 지고 전문성을 가진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포로시대를 맞이하여 선지학교는 없어지고 말았다.

f. 포로시대 전·후기포로시대를 전후하여 많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백성들을 지도하였다. 이들 예언자들은 사명 수행 시에 따라오는 죽음과 환난 때문에 매우 어려운 형편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불충실한 거짓목자(The Unfaithful Shepherd)와 신실한 충성된 목자(The Faithful Shepherd)와의 구별이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였다. 에스겔 34장을 보면 사랑 없는 이기심의 목자는 양(백성)들을 강탈했고, 무시했고, 짓밟았고, 병든 자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반대로 선한 목자는 양(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돌보았다. 여기서 목자는 이스라엘의 왕들(Kings)과 지도자들(Leaders)을 의미하고 있다. 슥 13:7에는 목자의 사명이 얼마나 귀중한 지를 말씀하고 있다. 곧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목자(지도자)의 신분과 위치와 사명은 실로 중대하다. 특히 환난 날에 사탄은 언제나 교회의 지도자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2) 신약시대

a. 예수님 시대 복음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목자적인 사역에 대한 좋은 지식과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마 5-7장, 10장, 눅 10장, 15장, 요 10장은 예수님의 유명한 목자론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 큰 목자, 목자장이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참 목자상과 거짓 목자상을 비교하여 알려주고 있다.① 참 목자상 ⓐ 참 목자는 초원을 소유하고 있다(요 10:1-10, 요 6장). 참 목자는 꼴(요 10:9)과 생명의 떡(요 6:35, 48), 참된 음료(요 6:55)를 소유하고 있다. 예수 자신이 바로 생명의 초원이었다.ⓑ 참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있다.참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알고(요 10:3, 27), 자기 양의 연약을 알고 있다. 또한 참 목자는 목자를 치면 양떼가 흩어지는 것도 알고 있다.(슥 13:7) 그리고 참 목자는 자기 양이 한번 길을 잃으면 목자 없이 되돌아오지 못할 것도 알고 있으며(요 10:5), 자신의 양의 수도 알고 있다.(렘 33:13; 눅 15:4)ⓒ 참 목자는 양들을 차별하지 아니한다.(요 10:3)참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낸다. 이것은 개인 개인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불러내는 참 목자상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개인 구원운동을 하였다. 인간 창조가 개인 개인이듯이, 그리고 인간타락이 개인적이듯이 인간구원도 개인적이었다.ⓓ 참 목자는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요 10:4)참 목자는 앞서 행하는 솔선수범하는 목자이다. 뒤에서 따라가는 목자가 아니다. 그는 앞서가면서 양들을 따라오게 했다.ⓔ 참 목자는 변칙을 사용하지 않는다.(요 10:7-8)참 목자는 반드시 양의 문을 통해서만 양들을 인도한다. 결단코 편법을 사용하거나 변칙을 사용하지 않는다. 정확히 양의 문을 통과하도록 인도한다.ⓕ 참 목자는 생명을 풍성히 한다.(요 10:9-10, 28)참 목자는 항상 푸른 초장을 준비하여 양들이 배부르도록 한다. 꼴(생명)을 얻어 만족한 상태에 이르도록 애쓰는 목자상을 보여주고 있다.ⓖ 참 목자는 잃은 양을 찾는다.(눅 15:4-6)참 목자는 잃은 양을 찾도록 찾아다닌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았을 때에 그 기쁨을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 참 목자는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는 목자이다.(눅 10:30-37; 겔 34:16)상한 자를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강하게 하는 선한 목자이다.ⓘ 참 목자는 희생하는 목자이다.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이다. 그리고 양들을 위하여 주는 목자요 희생하는 목자이다.(요 10:11, 15, 17)ⓙ 참 목자는 지키는 목자이다.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눅 15:4), 악한 자가 만지도 못하게 하고(요 10:28), 세상 끝 날까지 지키며(마 28:20), 영원히 보호하는 궁극적 안전보장의 목자이시다(요 10:28).ⓚ 참 목자는 자기 양이 아니면 단호히 버리는 목자이다.자기 양이 아닐 때에는 믿지 않는다(요 10:26). 결국 자기 양이 아니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목자로서 예수께서는

첫째, 사랑의 힘으로(power of love) 양들을 이끌고 설득한다.

예수께서는 결코 폭력이나 강압이 아닌 사랑의 힘으로 힘을 발휘하시는 참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언제나 개별적인 방법으로 모든 영혼을 각기 일대일의 사랑으로 대하셨다. 예수님은 많은 군중 속에서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자신의 겉옷에 손을 댈 때 그 여인을 이미 알고 계셨다(막 5:31). 그리고 가난한 자, 피곤한 자, 상처받은 모든 영혼들이 화술에 능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사 50:4) 예수님은 자기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임과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오는 자를 자기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에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요 6:47). 예수님은 또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끌어 안으셨지만 그를 배척할 때 고통가운데서 슬퍼하셨다(눅 9:41). 그뿐만 아니라 부자 청년이 구원받기를 진심으로 원하였지만 거절할 때 그를 포기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하였다(막 10:17-24). 둘째, 정죄는 구원으로 해결하였다(구원).

예수님은 정죄 보다는 용서하심으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참 해결자요 참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죄는 정죄하지만 죄인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간음한 여인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끌려왔을 때(요 8:1-11), 여리고에 살고 있던 삭개오를 주님이 찾아오셨을 때(눅 19:1-10), 저들은 모두 다 한 결 같이 자기들의 불의를 인식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관용성이 없었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가득 찼던 분이었다. 예수님은 우물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를 보셨고, 동시에 그녀를 불쌍히 여겨서 그 영혼을 구원하셨으며, 그녀의 생을 바로 잡기 위해 열정을 다하셨다.(요 4:1-26) 그 뿐만 아니라 정통적인 관례를 깨뜨리기까지 하면서 죄인들과 접촉하셨다.(눅 15:2, 19:7) 주님은 결코 거만한 태도를 취하시지 않았으며 죄인들과 가까이 했고 마침내 두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 형벌을 받고 운명하시기까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분이시다.(눅 23:39-43) 셋째, 영혼의 구주인 동시에 육신의 불행에도 관심을 가지셨다.(축복) 예수님은 사람들의 육신에 대한 문제도 결코 가볍게 여기시지 않았다. 소위 '전인적인 목회'(ministry for whole being)의 실례를 보여주신 것이다. 주님은 중풍병자가 고침을 원할 때 먼저 그 병을 고치시기 전에 "소자여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1-2)고 함으로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육체적임 질병이 아니라 죄로 인한 것임을 예수님은 아신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근거로 하여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물물을 길으러 왔던 사마리아여인에게도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임을 알려 주셨다.(요 4:10) 그렇다고 해서 영적인 문제만 지나치게 생각하셨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인간이 육체와 영혼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아셨다. 그러므로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 주셨던 것이다. 말하자면 주님은 우리의 죄만 짊어지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도 짊어지셨다(마 8:17; 사 53:3).② 거짓 목자상ⓐ 거짓 목자는 가짜이다(요 10:3, 4, 5, 27; 딤전 1:19-20; 딤후 2:18).양은 참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음성을 알지 못한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다.ⓑ 거짓 목자는 절도요 강도이다.(요 10:1, 8, 10)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간다.ⓒ 거짓 목자는 삯군이다(요 10:12, 13).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한다. 위급한 상황이 되면 삯군은 양을 버리고 도망한다.ⓓ 거짓 목자는 이리이다(요 10:12).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해치는 것처럼 거짓 목자는 양을 해친다.ⓔ 거짓 목자는 도둑이다(요 10:10).거짓 목자는 양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할 뿐이다.ⓕ 거짓 목자는 살인자이다(요10:11).참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지만 거짓 목자는 양을 죽는데 내어준다.ⓖ 거짓 목자는 도망치는 자이다(요 1:12).위급한 상황이 되면 양을 버리고 도망한다.ⓗ 거짓 목자는 소경이다(요 9:39).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하므로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b. 사도시대① 베드로사도 베드로는 목자로서 천국열쇠를 받았다(마 16:13-20). 이는 베드로가 목자적 공권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 즉 목회신학의 권세요, 목회신학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 선포권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도에 낙심하여 이를 포기했으나 예수께서 재임명해 주셨다(요 21:15-24). 예수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목자로서의 자격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목자장이신 예수께로 말미암아 부여된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요구하시는 목자의 자격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말씀하셨다. 바로 목자로서의 생명은 사랑임을 배우게 하시는 말씀이다.베드로는 그의 서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의 목자로서 또 다른 목자를 권면하기도 했다(벧전 5:2). 목자의 사명은 길 잃어버린 양을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시는 예수께로 되돌리는 일이라고 했다(벧전 2:21-25). 그러나 이러한 일에도 무수한 고난이 수반되고 그 고난은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권면하였다(벧전 4:12-16).그 뿐만 아니라 거짓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교회의 무질서를 책망하고 널리 퍼진 도덕 폐기론(Antinomianism)에 대하여도 경고하였다(벧후 2:1-3:18). 그 당시 거짓교사들은 성도는 윤리적인 삶을 살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베드로는 이러한 독소가 가득한 이단 사설을 물리치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성도의 도덕성을 촉구하였다(벧후 1:1-21). 구원받은 성도는 반드시 도덕적인 실천을 행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여 신앙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베드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확신의 권면도 빠뜨리지 않았다(벧후 3:1-18). 주님 재림 직전에는 희롱하는 이가 일어나지만 주님의 재림은 약속대로 이행될 것이기 때문에 간절히 사모해야 함을 강조하였다.② 바울바울은 행 20:28-35에서 목자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에베소교회를 향한 부탁을 통하여

첫째, 피로 사신 교회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하여 감독된 자들은 자신을 지키고(각성), 이단과 거짓교사들로부터 양떼를 지켜야한다고 권면하였다.

둘째,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양떼를 부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개인적인 어려움이나 궁핍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목자였다. 바로 빌레몬서에 나타난 바울의 오네시모를 향한 관심은 개별적인 목자로서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주인 빌레몬에게 약하고 비천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환영해줄 것을 간청하는 목회자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향해 대속의 사랑을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그리고 그는 신자들의 생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문제를 막론하고 목자적인 충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신자간의 불신 법정 소송에 관한 반대(고전 6:1-11), 결혼과 이혼문제(고전 7장),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고전 8장), 부모와 자녀간의 문제(엡 6:1-4), 사회 생활문제(엡 5장; 골 4장), 그리고 서로 짐을 지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고(갈 6: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가 우리를 영접하듯이 서로 영접해야 할 것(롬 15:7)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충고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의 목자와 같은 모습은 디모데와 디도를 향한 목회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은 이를 통하여 신약교회의 목회신학을 수립하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가르치고 경책하며 경계하여 전하기를 힘썼다(딤후 4:2). 그리고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했다(딤전 4:12-13). 한 마디로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목회의 골자는 바른 교훈을 지킬 것(딤후 1:1-18), 가르칠 것(딤후 2:1-26), 바른 교훈에 거할 것(딤후 3:1-7)과 전파할 것(딤후 4:1-22)을 명시하고 있다.③ 요한사도 요한은 그의 말년(70-100년경)에 에베소를 중심한 소아시아 지역 여러 교회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이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목자와 같은 사역을 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특히 그가 기록한 요한 서신에는 이단의 거짓된 가르침을 막는 일(요일 2:26)과 믿는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요일 5:13)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단의 거짓된 가르침은 소위 영지주의(Gnosticism)를 말하는데 초대교회 이단들 중에서 가장 위험했던 사상이다.영지주의 중심 사상은 영혼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육체는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성경적인 이원론에서 나온 오류로써 도덕적 타락을 야기 시켰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러한 이단을 논박함에 있어서 그들의 부도덕성을 지적하였다.(요일 3:8-10) 그리고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사역으로 그는 그리스도를 목격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서 성육신에 대한 믿음을 확증시키는 목회사역을 감당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목회핵심은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요일 1:5)과 하나님은 의로우시며(요일 2:29),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요일 4:16)을 밝히는데 있었다.(3) 교회사적 배경

1) 교부시대신약시대가 지난 후 목회의 역할은 복잡하게 발전되었다. 교회는 핍박받는 소수로부터 시작하여 초기시대의 말기에는 로마제국의 공인된 종교로써 문화를 주도해 나가는 존재가 되었다.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갑(Polycarp)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가운데 성직자의 바람직한 자질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그리고 장로들도 모든 사람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고 딴 길로 간 양들을 되돌아오게 하며 약한 자들을 돌아보고 과부나 고아나 가난한 자를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고귀한 것을 제공해야 한다. 심술궂거나 편견과 편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것은 용의주도하게 피해야 한다. 그리고 돈을 밝히는 것은 그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죄악에 대한 말을 지나치게 잘 믿어서도 안 되며 그들을 나무라는 일을 지나치게 서둘러서도 안 된다. 우리 모두는 죄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친히 계명을 내리신 분과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도들과 주의 오심을 미리 선포한 선지자들과 같이 두려움과 경외심을 다하여 주를 섬기자.”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의 강력한 필치는 목회자의 지위에 관한 초대교회의 이해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그는 사역의 본질에 대해 성경적인 진술로 우리를 매료시키고 있다.“잘못된 길을 간 후에 이것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과 길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곧 말씀의 강력한 적용이다. 이것이 유일한 수단이요 가장 좋은 상황이다. 이것은 의술과 뜸질과 절단의 지위를 차지하며 만약 태우고 자르기 위해 필요하다면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사용해야할 방법이고 만약 소용이 없다면 버릴 수밖에 없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잠자는 영혼을 깨우고 격앙된 영혼을 침잠(沈潛)케 한다. 이것으로 지나친 것을 잘라내고 부족한 것을 채우며 영혼의 건강에 필요한 다른 모든 수술을 시행한다.”(On the Priesthood; 성직론)여기에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려는 소원을 가지고 본이 되는 생활을 할 필요를 덧붙이고 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35년 동안의 바쁜 목회생활에서 394편의 설교를 남겼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설교 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감독으로서의 책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목회자였다. 그의 서품 기념일의 설교에 이러한 내용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분쟁을 선동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것, 용기가 없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 약한 자의 편을 드는 것, 반대자들에게 논박하는 것, 함정들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무지한 자를 가르치는 것, 나태한 자를 흔들어 깨우는 것, 사고 팔려는 사람들을 단념시키는 것, 주제넘은 사람들에게 분수를 알게 하는 것, 싸우기를 좋아 사람을 진정시키는 것, 선한 일을 격려하는 것, 악을 견디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 설교하며, 논박하며, 훈계하고, 교화하며, 모든 사람의 가까이에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무거운 짐이며 내게 육중하게 부과된 것이다.”이상과 같이 속사도와 교부들의 목회를 살펴보았는데 그들의 목회의 중심은 한마디로 말씀의 봉사(천국열쇠)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을 제일가는 목회적 치유약으로 보았기 때문이다.'정해진 치유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말씀을 강력하게 적용하는 것이다.'(성직론 : Chrysostom)

2) 중세시대유명한 교회사가 라토렛(K. S. Latourette)은 중세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명했다. 그러나 중세에 첫발을 내디딘 목회자는 그레고리 대제(Gregory the Great, 540-604)로서 그의 목회지침서(Book of Pastoral Rule)로 인하여 잘 무장되어 있었다. 그레고리는 교황이 되어 교회를 정치개입과 부패에 깊이 빠뜨리게 한 결과를 초래했으나 성직자들의 목회사역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는 목회지침서에서 목회자의 자격과 의무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는 36가지의 대조적인 유형이 있으며 각 유형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각각의 경우에 나타난 특별한 장점과 단점들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예기치 못한 함정들에 대해서 잘 밝혀 놓고 있다. 또한 가난한 자들과 슬픔에 빠져 있는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과 병든 자들과 거만한 자들과 변덕스런 자들과 그 밖의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설교했다.그레고리 대제로 말미암아 출발된 교황제의 등장은 교황들이 갈수록 세속사업에 몰입해 가면서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어 철저한 부패를 낳게 되었다. 중세동안에 유럽에는 500여명의 주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지주로서 사업에 관여했고, 재판관과 입법자로서 법을 관리하였으며, 정치적 고관으로서 군사행정에도 관여했다. 특히 교황권의 권력은 그레고리 7세(Gregory Ⅶ)때와 인노센트 3세(Innocent Ⅲ)때 정점에 이르렀다.중세는 목회적 측면에서 볼 때 경건에 대한 주목할 만한 것이 몇몇 있지만 오늘날의 목회사역과 관련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자유교회로 분류되는 교회들에서 성경적인 목회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알비파(Albigenses), 왈도파(Waldenses)같은 집단들은 성경적 목회로 순결한 교회를 향한 강한 열정을 과시했다. 그리고 성경적 목회를 가장 큰 목소리로 외친 사람들은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이었다.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그의 책 '목회 직분에 관하여'(on the Pastoral Office)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목회자의 신분에 따라야할 두 가지가 있다. 즉 목회자는 거룩해야 하고 그의 가르침은 온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덕에 강건하여 죄를 짓고 그리스도의 진리에서 떠나기 전에 온갖 인간접촉을 버리며 이 세상의 모든 현세적인 것들을 버리고 심지어 죽을 목숨까지도 버려야 한다. …또한 양 무리 앞에 가르침의 의로 빛나야 한다.'그리고 후스(John Huss)도 위클리프의 성경적 목회를 강조한 것을 본받아 순결한 교회와 목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중세시대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교황에 의해 성립된 시기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바로 중세시대의 천국열쇠는 교황권이었던 것이다.

3) 종교개혁시대종교개혁은 목회사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교회의 중요한 사명은 말씀의 봉사이고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영혼을 치유하기 위함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자유를 주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께서 개인의 영혼을 자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한다고 보았다. 말씀과 성령의 봉사야말로 저들에게는 천국 열쇠였던 것이다. 먼저 대표적인 종교개혁자들을 통하여 이 시대의 목회적 관심을 살펴보고자 한다. 루터(Martin Luther)에게 있어서 목회의 제일 관심은 말씀선포였다. 그는 영혼의 질병 치유를 위하여 말씀선포에 중점을 두었으며 로마 카톨릭교회에 대항하여 교회의 권위보다 말씀의 권위와 개인적 신앙의 자율권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만인 제사장직의 사상을 고취하여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하였다. 그의 목회적인 관심은 죄인에게 말씀을 선포하여 죄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영혼구원에 목회의 중심을 두었다. 칼빈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과 말씀의 선포는 그의 목회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는 천국 열쇠의 권능을 수행하기 위한 교회의 의무를 강조하였다(the duty of Church to exercise the Power of the Keys of the Kingdom of Heaven). 즉 천국열쇠의 첫 번째 기능인 하나님의 말씀선포뿐만 아니라 교회의 권징도 강조하였다. 권징은 교회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또한 성례시행에 강조를 두고 있다. 교회에서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지 못할 때 그 교회는 거짓된 교회요 잘못된 교회라고 생각했다. 칼빈은 성례와 말씀을 불가분의 관계로 보았던 것이다. 칼빈의 목회는 말씀사역과 성례시행, 권징, 그리고 개인적인 관심과 교회의 조직 및 행정적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4) 근세 및 현대종교개혁시대를 지나 근세로 접어들면서부터 목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다양한 형태로 목회신학이 발전되어왔다. 즉 이제까지는 목회신학은 동기와 태도에 중점을 두었으나 18세기 중엽부터는 목회신학이 신학의 한 부분으로 신학계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바로 클라우스 하름스(K. Harms)가 목회신학에 관한 저서를 출판할 때부터이다. 유럽의 목회신학은 독일 중심으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왔는데 특히 바르트(Barth)학파의 위기신학의 공헌이 컸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19세기 중엽부터 60여 년 간 현저한 발전을 이루어 많은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실용주의와 자연과학의 발달이 목회신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초기부터 심리학적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정신위생학, 종교심리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신학적인 면보다 기술적인 임상적인 목회가 현저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이에 관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왓슨(John Watson)과 보이슨(Anton Boisen)등이다. 반대로 네레모어(C. Narramore), 아담스(J. E. Adams)등은 성경과 성령을 중심으로 한 목회신학을 강하게 주장하여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현재에 와서는 다양화된 목회적 관심은 두 가지의 대조적인 양태로 구분되어 있다. 즉 신본주의적인 목회적 접근방법과 인본주의적인 목회적 접근방법이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천국열쇠로 해결하려는 신본주의 목회신학과 지상열쇠로 해결하려는 인본주의 목회신학은 계속해서 양립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인본주의의 대표격인 자유주의에서는 인간 이성이라는 열쇠로 해결하려고 한다.(4) 목회신학적 배경교회사에 나타난 목회신학적 배경 종교개혁시대부터 찾아보는 것이 좋다. 물론 종교개혁 이전에도 목회신학과 관계되는 학술적인 근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6세기경의 그레고리 대제는 그의 저서에서 '목회'라는 단어를 처음 기록하였고 '목사'(Pastor)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목회신학은 종교개혁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 쯔빙글리(Zwingli)스위스의 개혁자인 쯔빙글리는 개혁주의자로서는 처음으로 체계적인 목회 이론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1524년에 펴낸 '목자'(The Shepherd)라는 논문을 통하여 목회의 학술적인 이해를 돕고자 노력했다.그는 이 논문의 전반부에서 목자의 사역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을 하기보다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의 악행을 폭로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여 많은 사람들을 개혁자의 편에 서도록 설득하였다. 논문의 후반부에서는 목자들이 그들의 양떼가 병들거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지켜야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목자들은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보았고 양들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으로 먹일 때 가장 건강하다고 주장하였다.

2) 마틴 부처(Martin Bucer)프로테스탄트(Protestant)교회의 '최초의 목회신학 형성자'라고 찬사를 받는 부처(Martin Bucer)는 쯔빙글리와 함께 목회신학의 기초를 쌓은 사람이다. 그는 목회자의 직분과 사역을 발전시키는데 포괄적인 일을 감당한 개혁자였다. 그는 그의 생애에 대부분을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의 개혁을 위해 헌신했는데 거기서 칼빈(John Calvin)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그는 1538년 '영혼의 병 치유'(On the Care of Souls)라는 책에서 교회와 교회사역 그리고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경우들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첫째, 그리스도인들 간의 교제를 강조하여 참된 교회는 연합하는 특징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엡 4:1-6, 15, 16; 고전 1:18-27, 8:1-13, 12:12, 13; 롬 12:4-6; 행 4:32, 34, 35; 살후 3:11-13; 렘 23:5, 6).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있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주권적으로 다스리시지만 목사를 통하여 그 사역을 행하신다고 했다(고전 3:5-17, 4:1; 고후 3:2-6; 살전 1:4-5, 2:13). 그러므로 권세는 언제나 그리스도께 속한 것으로 어떤 목사도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목사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갖고 행동하고 있으므로 그의 직무를 얕보거나 그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얕보고 무시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했다. 셋째, 장로의 자격에 대하여 장로는 회중들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아야 하며 은사와 열심히 있어야 하고 거룩하고 스스로 단련하며, 자기 가족을 훈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목회서신에 나타난 자격들을 중심으로 열거하고 있다. 특히 장로들을 다수 뽑아야 한다는 주장을 여러 번 되풀이하며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에 의해 유지되며 은사들은 다양하기 때문에 또한 장로들도 많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그가 강조하는 영적 치유를 위한 목사의 사역에 대한 다섯 가지를 보면, ① 그리스도를 떠나 방황하는 자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② 그들을 회복시키며 ③ 교회 안에 머물면서 죄에 빠진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④ 교회 안의 약하고 병든 자들을 건강하게 하며 ⑤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전진하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또한 목회자의 임무에 대하여 4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① 근면한 성경교사 ② 성례의 집행자 ③ 교회 권징의 참여자 ④ 궁핍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했다.

3)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백스터는 '개혁교회 목사'(The Reformed Pastor)라는 저서를 통해 17세기 목회신학에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개혁교회 목사'는 행 20:28에 대한 확대 주석으로 성직을 맡은 목사의 자아성찰과 양떼들을 보살피는 목회의 본질, 태도, 동기 그리고 목회의 실제를 취급하고 있다. 특히 그는 목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목사가 해야 할 의무를 일곱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①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회심할 수 있도록 하는 중생사역 ② 죄를 자각하고 탐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 주는 훌륭한 상담 ③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을 세우기 위한 연구 ④ 가족에게 마음을 쓰고 신앙을 보살피는 것 ⑤ 병든 자를 방문하는 것 ⑥ 범죄자들을 견책하고 훈계하는 충실성 ⑦ 조심성 있고 양심적인 교회의 권징을 시행할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4) 18, 19세기목회학이 목회신학이란 술어로 쓰여진 것은 1749년 자이델(C. T. Seidel)이 저술한 '목회신학'(Pastorale Theologie)이 처음이다. 그 이후 독일의 할므스(Klaus Harms)가 1830년에 '목회신학'(Pastorale Theologie)이란 책을 펴내기 전까지는 목회신학이란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1827년 퀘스터(F. B. Koster)는 목회학을 4가지로 분류하여 예식학, 영혼의 병 치유학, 설교학, 교리 문답학으로 나누어 목사의 직능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1847년 밴고(Bangor) 신학교의 폰드(Enoch Pond)가 처음으로 목회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목회신학 강의'(Lectures on Pastoral Theology)에서 목회학이란 '교인들과 좀 더 친근하게 지내려고 하는 목사의 관심을 취급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1867년 어번(Auburn)과 유니온(Union) 신학교의 쉐드(W. G. T. Shedd) 교수는 그의 저서 '설교와 목회신학'(Homiletics and Pastoral Theology)에서 목회신학을 심방, 교리문답, 기도, 지성적 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보았고, 실천신학은 이외에 설교학, 예식학을 부가시켜 놓은 것이라고 했다. 프루머(Willam. S. Plumer)는 1874년 '목회신학의 암시와 도움'(Hints and Helps in Pastoral Theology)을 저술했다. 1880년 베델(Gregory T. Bedell)은 '목사; 목회신학'(The Pastor; Pastoral Theology)에서 목회신학은 '자기가 처한 장소와 시간의 특수성을 묘하게 감지하는 힘과 기본적인 이론을 찾아낸 학문적인 배경을 목사와 교인들을 신통하게 조화시키는데 있다.'고 했다. 글래든(Washington Gladden)은 1901년 '목사와 일하는 교회'(The Christian Pastor the Working Church)를 저술하였는데 이는 19세기말에 목회신학이 도달한 발전 상태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책이라고 하겠다. 그는 이 책에서 목회신학이 실천신학의 한 갈래이며 현재 활동하고 있는 목사와 교회가 그 주제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그는 다소 독단적으로 설교와 예배 등은 단지 부수적으로만 목회신학과 관련되어 있으며 목양과 훈련이 중심이라고 했다. 특히 목사가 교인들을 위하여 많은 목회사역을 하는데 그의 주된 사역은 장년남녀, 청소년과 어린이들의 영혼이 구원을 얻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사역이라고 못 박고 있다.

5) 20세기20세기 초기에는 목회신학분야에서 특별한 발전은 없었고 다만 '요령과 도움'을 주는 실제적인 지침들만 요란하게 많았다.

그 중에 큐러(Tholor L. Cuyler)는 1890년 '목사가 되는 길'(How to be Pastor)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목회자의 자질, 품성, 소명, 의식(儀式)등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목회활동을 가리켜 한마디로 열정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목사들에게 교인들을 직접 만나 접촉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권했다. 제퍼슨(Charles F. Jefferson)은 '섬기는 목사'(The Ministry as Shepherd)에서 목사의 할 일이란 잘 살피는 것, 구제하는 일, 먹여주는 일, 사랑해 주는 것 등 7가지로 나누었다. 왓슨(John Watson)은 '영혼의 병 치유'(The Cure of Souls)라는 유명한 저작을 남겼지만 그 역시 체계적인 이론에는 빗나갔다. 20세기에 이르러 목회신학 형성의 학적인 토양을 만든 사람은 미국사람인 보이젠(Anton T. Boisen)이다. 그는 성직에 임상훈련을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신학간의 관계에 대한 수많은 창조적 개념들을 제안했다. 그는 위대한 선지자들 및 신비주의자들의 영적 체험과 모종의 형태의 정신병 사이에 유사점이 있음을 관찰했으며, 이러한 사람들의 체험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적절한 접근법을 주장했다. 이러한 보이젠의 견해들은 후에 힐트너(Seward Hitner)에 의해 체계적으로 발전되었다.

보이젠 이후 4명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가렛신학교(Garrett Theological Seminary)의 캐롤 와이즈(Carol Wise), 보스톤 대학(Boston University)의 폴 죤슨(Paul Johnson), 남침례교 신학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웨인 오츠(Wane Oates), 그리고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에 있다가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로 간 힐트너(Seward Hiltner)이다. 이 네 사람 중 힐트너는 목회신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도입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영향력이 컸었다. 그는 1958년에 간행된 '목회신학 서설'(Preface to Pastoral Theology)에서 목회신학을 '목양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목사와 교회의 작용들을 연구한 결과 생겨난 신학적 이론'으로 정의하고 있다.힐트너 이후, 윌리암스(Daniel Williams)는 '목사와 영혼의 돌봄'(The Minister and Care of Souls)을 썼는데, 거기에서 그는 은혜에 대한 기독교적 설명과 받아들임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간의 관계에 대해 논했다. 브라우닝(Don Browning)은 '속죄와 정신요법'(Atonement and Psychotherapy), 렙슬리(James Lapsley)는 '구원과 건강'(Salvation and Health), 그리고 오덴(Thomas Oden)은 '케리그마와 상담'에서 모두 다 신학과 심리학의 상관적 접근을 논하고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적 신학의 입장에 서있는 학자들이 나타났는데 대표적으로 네레모어(Narramore), 제이 이 아담스(Jay E. Adams)등이다. 네레모어는 '목회상담심리'(The Psychology of Pastoral Counseling, 1979), 아담스는 '목회상담학'(Competent to Counsel, 1970)등 여러 책을 저술하여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적 목회상담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외에도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카이퍼(R. B. Kuiper), 클라우니(Edmund P. Clowney)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의 목회신학은 1901년 개교한 평양신학교에서 36년 간 목회학을 교수한 곽안련(C. A. Clark)박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저술한 '목회학'은 지금까지 한국교회 목회의 지침이 되어왔다. 해방 후에는 1946년에 설립한 고려신학교와 1948년에 설립한 장로회신학교(오늘의 총신대)를 중심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목회의 본질

1) 봉사의 직무목사는 근원적으로 섬기는 직분이다. 그러므로 목회의 본질은 섬기는 일이며, 이것을 봉사라고 한다. 봉사는 신약에 34회 사용되어 섬기는 것(고후 8:4, 11:8; 롬 12:7, 15:31; 히 1:14; 계 2:19), 봉사(행 21:19; 엡 4:12), 직분(고후 3:7, 8, 9, 4:1; 딤전 1:12), 직무(눅 1:17, 24; 고후 9:12, 13; 딤후 4:5)등으로 번역되고 있다.이 단어는 노예로서 섬기는 것이나, 품삯을 받기 위해 섬기는 것이나, 공적인 봉사를 행하는 것과는 기본적으로 구별되는 개인적 섬김의 뉘앙스를 지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을 섬기는 직무이다. 마치 먼지 같은 죄인 가운데를 통과하는 직무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기까지 하면서 봉사의 본을 보이셨다(요 13:14). 마찬가지로 목회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대가도 없이 봉사 그 자체에 보람을 느끼며 수고하는 것이어야 한다.2) 예배의 직무예배와 관계되는 단어로 신약에는 '라트레이아'와 '레이투르기아'가 대표적이다. 라트레이아는 신약에 꼭 다섯 번 사용되었는데 섬기는 예(요 16:2; 히 9:6), 섬기는 예법(히 9:1), 예배(롬 9:4, 12:1)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동사는 신약에서 21회 사용되었는데 모두 종교적 의미로 예배를 함축하고 있다. 어원은 '보상, 삯, 봉급'을 의미하는 명사 '라트론'에서 왔으며 '보상을 위해 일하다, 혹은 섬기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라트론'의 '라트'는 '기뻐하다'라는 뜻이다.레이투르기아는 신약에 6회 사용하여 직무(눅 1:23), 봉사(고후 9:12; 빌 2:17), 섬기는 것(빌 2:30; 히 9:21), 직분(히 8:6)으로 번역되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눅 1:23)나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선행(고후 9:12; 빌 2:30)과 같은 공공적인 봉사를 나타낸다. 목회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명을 위하여 백성 중에서 공적으로 봉사하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흙탕물 속 같은 곳에서도 기쁘게 일하고 있는 사역을 뜻한다. 즉 대중을 이끌어서 기쁨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역이다. 그러므로 목회사역은 하나님도 섬기고 사람도 섬기는 사역인데 그 사역은 공적이고 또한 고통 속에서 감당하는 것이지만 기쁨 중에서 이루어지는 사역이다. 무엇보다도 목회사역은 사적인 직무가 아닌 공적인 직무임을 알아야 한다(눅 1:2; 행 5:42, 6:4, 13:14-41, 20:24; 롬 10:14-15; 고전 1:21, 9:14, 23, 25, 15:1-2; 갈 1:7-8; 엡 4:11; 딤전 5:17; 딤후 4:7-8).3) 수종의 직무신약 성경에는 '휴페펠레테오'(수종하다)라는 단어가 세 번 기록되어 있다."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행 13:36)"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행 20:34)"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행 24:23) 원래 '휴포'(아래, 밑에서) + '엘레테스'(노 젓는 사람)의 합성어로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하급 노잡이를 의미했다. 즉 노 젓는 층이 여러 개 있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군용 갤리선(Galley)의 아래층에서 노 젓는 자들을 '휴펠레테스'라고 불렀다.그러므로 이는 비상한 군사 술어로 사령관(선장)이요 왕이신 예수의 명령을 받고 드러나지 않는데서 사력을 다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신령한 방주요, 주님은 선장이요, 목사는 그 안에서 노를 젓는 자라고 하겠다.4) 중보의 직무제사장은 히브리어로 코헨인데 구약에 741회 언급되어 있다. 제사장은 제단과 그 외의 의식적 행사를 주관하는 공인된 사역자로 희생적, 제의적, 중개적인 직임을 수행한다. 무엇보다도 제사장은 하나님께로 드려지고 받쳐진 하나님의 헌제적(獻祭的) 존재이다. 잘 받쳐짐이 될 때 제사장의 제사장 된 의미와 제사장 된 목적을 느끼게 된다.신약에 언급된 제사장은 ① 전도(복음전파)사역을 감당하는 신령한 제사장(롬 15:16)으로 ② 신령한 제사인 예배사역을 감당하는 신령한 제사장(벧전 2:5)으로 ③ 영적 주권의 축복(다스림)사역을 감당하는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묘사되고 있다."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5-16)고 했다.목회의 본질은 섬김(봉사), 하나님을 향한 예배사역의 공직, 노를 젓는 수종, 복음의 제사장이 됨에 있고 이 모든 성격은 희생적인 섬김이다.4. 목회의 제(諸-모든)요소

(1) 목회의 주체목회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목회의 주체가 되신다. 하나님이 자기 양들을 먹이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요이 1:4)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명대로 그의 자녀들은 행하여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없는 자기 백성, 아버지가 없는 그의 자녀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배제한 목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또한 목회의 근원은 하나님의 구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신자의 신자 됨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와 성자 예수님의 구속과 보혜사 성령님의 부르심으로 인침 받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죄 중에 빠져버린 하나님 자신의 창조물인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자 예수께서 값을 대신하여 지불하셨고, 성령께서는 이를 예수에게로 초청하셨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목사는 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부름 받은 봉사자이다. (2) 목회의 내용목자가 자기 양을 위하여 무엇을 먹일 것인가? 즉 목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한마디로 목자는 양들에게 꼴을 먹여야 한다. 이는 목회의 내용이 '복음'임을 알려주고 있다. 복음은 예수그리스도 자신이다. 그것은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마 1:21). 예수그리스도 자신은 그 생명의 말씀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말씀, 즉 말씀하신 말씀(Spoken Word)으로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에 의해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 말씀은 지금도 성령으로 기록된 말씀(딤후 3:16; 히 3:7; 벧후 1:21)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검이요(엡 6:17),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히 4:12)이다. 그 말씀은 우리를 중생케 하고(약 1:8; 벧전 1:23), 살리고(시 119:50, 93), 밝히고(시 119:130), 영혼을 소생케 하고(시 19:7), 지혜롭게 하고(시 19:7), 깨끗하게 하고(요 17:17; 엡 5:26), 믿음을 낳게 하고(요 20:31), 소망을 낳게 한다(시 119:49; 롬 15:4), 그리고 확신에 거하게 하고(행 20:32), 정결케 하고(요 15:3), 마음을 뜨겁게 하고(눅 24:32), 영생을 얻게 한다(요 5:39).그러므로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 가서는 안 된다(고전 4:6). 기록된 말씀을 넘어 가는 것은 독초를 먹는 것과 같다.(3) 목회의 전달방법목자가 양들에게 꼴을 먹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그 꼴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욱 중요한 것이다. 목회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는가? 하는 전달방식도 중요하다.

1) 성경을 읽게 해야 한다.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은 목회의 전달방법에 있어서 최고의 방법이며, 최선의 방법이다. 성경을 읽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 17:19)"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지니 곧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신 31:11-13)"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는데"(느 8:3)"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을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느니라."(사 34:16)"너는 들어가서 나의 구전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 일에 여호와의 집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유다 모든 성에서 온 자들의 귀에도 낭독하라"(렘 36:6)"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 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행 13:15)

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게 해야 한다.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순종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는 지침서요, 안내자이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이며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밖에 없다."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3) 날마다 상고하게 해야 한다."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2)

4) 깨닫도록 잘 해석하여 가르쳐야 한다.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께서 친히 성경을 깨닫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가르치실 때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5) 믿게 해야 한다.(히 4:2)"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은 그 약속의 말씀을 성취케 하는 인간의 최소한의 책임이며 의무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복음에 우리가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으면 그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한다.

6)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한다."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 10:17)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한다.

7) 하나님의 시민으로 지키어 살게 해야 한다.(계 1:3; 엡 4:22-32)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민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의 삶을 살아가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8) 새 생활을 열매로 하는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해야 한다."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목사 자신이 계시의 영으로 충만한 기도 속에서 확신과 뜨거움에 불타고 있어야 한다. 성경신학, 교의신학, 역사신학 등 풍부한 기초에 근거하고 있어야 한다.(4) 목회의 대상목회의 대상은 인간이다. 즉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목회의 대상이다.

1)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완전한 인간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고유한 피조물임을 말한다.(창 1:26-28, 2:7) 그것은 전인(全人)으로서의 피조물이다(영+육). 창세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지음 받았고(창 1:26),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행위의 결과였다(창 1:26, 2:7, 18).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창 1:26), 영생할 수 있는 피조물로 지음 받았다(창 2:7, 16-17).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 세계의 최절정이며 영광이다.

2) 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인간은 죄로 인하여 완전 타락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고 전적으로 부패했다. 이것은 전혀 의(義)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 결과 심령에 비참이 왔으며(창 3:7-8), 육체적 비참이 찾아와 땀 흘림(창 3:17-19)과 사망(창 3:19)과 영생의 상실을 당했고(창 3:22-24), 심지어 땅이 저주를 받는(창 3:18) 물질의 세계까지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3)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인간"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궁극적으로 선택되고, 소명되고, 중생되고, 회개와 신앙을 힘입고, 의인의 확증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고(양자), 양육을 받고(성화), 보존(견인)을 입으며, 완전한 영화의 삶을 목표하고 움직이는 새사람이다.

a. 구속의 경륜가운데 있는 인간임을 알아야 한다."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롬 5:6)"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b. 인간은 한 개인으로서의 독립적인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단순한 수(數)에 불과하다. 그 존재 위치가 무시되고 있다. 즉 다수라는 대중 속에서 자기 자신을 파묻고 살아가고 있다. 그 결과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고 인간은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영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도 개인의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인간은 각각 독립적인 존재이다. 그 한 존재는 천하 보다 귀하다(마 16:26, 18:5, 6, 10, 12, 14; 막 8:36-37; 눅 15:4, 8, 10, 22-24). 그리스도는 한 마리의 잃은 양을 귀중하게 여기셨고, 예레미야는 개인적인 보살핌을 주장했다(렘 31:33-34). 하나님은 각각 개인적으로 만나시고 상대하신다. 그러므로 믿음도 개인적이다. 각 개인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c. 유기체적인 인간임을 알아야한다.각각 독립적인 인격을 지닌 존재이면서 인간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해야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죄인인 인간은 상호간의 유기적이기보다는 분열과 파멸로 향하는 불안전한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구원받은 인간은 교회라는 유기적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독립된 인격을 지닌 인간이 독처함이 선하지 못하다 하시면서 두 사람이 합하여 하나가 되는 연합체로서의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창 2:17, 25; 마 19:4-8; 엡 5:22-23).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저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므로(마 18:20) 교회라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d. 인간은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e.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을 '양'이라고 부르고 있다.목회는 목자인 하나님과 그의 양인 하나님의 백성간의 문제이다. 이처럼 목양의 대상인 인간은 하나님의 구속과 그 경륜 속에 들어 있는 한 독립적인 인격체인 동시에 유기체적인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그의 기르시는 '양'이다.(5) 목회의 동기와 목적

1) 목회의 동기와 목적은 곧 구령운동 때문이다.(요 10장, 21:15-17)구령운동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 내 어린양을 먹이라"(요 21:15), "... 내 양을 치라"(요 21:16), "... 내 양을 먹이라"(요 21:17)고 하셨다. 구령운동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인 동시에 숭고한 목적이 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일이요, 구속사역의 목적이다. 이것은 영혼의 치유, 곧 영혼의 돌봄이다. 그리고 이것은 목양의 동기인 동시에 목적이다(마 9:35; 막 3:13-19; 눅 10:1-2).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인 구령운동은 새 창조운동이요, 근본적인 새사람 운동이다.(고후 5:17)

2)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다.(엡 4:11-13)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구원운동의 공로를 성취시킴에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위함이다. 이러한 하나님나라 건설을 위하여 예수께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떠나서는 목양을 생각할 수 없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롬 11:33-36)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경륜의 성취가 목회사역의 목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야 했고, 십자가를 지셔야 했으며 무덤에서 부활하셔야 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구속 경륜의 시작과 진행 그리고 성취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 11:36)5. 목회의 목적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바울은 영감을 통하여 디모데전서를 기록한 목적을 여기서 밝히면서 “하나님의 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디모데에게 알려주고 있다. 즉 디모데에게 올바른 목회지침을 주기 위함이다. 에베소서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마땅히 가져야할 바른 교회관을 심어주고 있다.(1) 바른 교회관(믿음 - 신앙관)

1) 교회란 하나님의 집이다.하나님의 교회는 건물이 아닌 성도들의 집합체를 말한다. 목회자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화평을 누리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의 모임이 되지 못하면 그곳은 참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사교장이이나 공회당이나 강의실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2)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이다.교회는 영원토록 살아 계셔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 부르심을 받아 형성된 신앙의 공동체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이방종교의 우상과 대조시킨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모든 일을 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무리 곧 백성들을 의미한다.

3)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진리의 기둥과 터'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교회와 동격으로 교회를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이다. 교회는 진리를 전파하고 떠받드는 기관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 되는 진리, 곧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한 정통교리의 수호와 전파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실상 '진리의 기둥과 터'란 예수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 그 '진리의 기둥과 터'에 대한 설명은 딤전 3:16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진리란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 보좌 우편에 앉으심이다. 이 진리가 하나님의 집의 기초요, 그 집을 받드는 기둥이 되는 것이다.

4) 교회는 '피로 값 주고 사신 집'이다.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이다.(행 20:28)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터가 되고 기둥이 되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들이 모이는 곳이다.(2) 바른 교훈(교리-구원론)

1) 바른 교훈이란 무엇인가?'바른'이란 목회서신에 나타난 독특한 표현이다. '바른'이란 '건전한 것'을 말한다. 즉 '거짓이 없는', '진실한'것을 말한다.목회서신에서는 바른 교훈(딤전 1:10; 딤후 4:3; 딛 1:9, 2:1), 바른 말(딤전 6:3; 딤후 1:13) 및 바른 믿음(딛 1:13, 2:2)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른 교훈이란 ①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구원의 소식, 곧 복음을 의미하고 ②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의미한다.사도 바울은 바른 복음과 다른 교훈에 대하여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딤전 1:1-11)

첫째, 그 교훈이 우리를 믿음 가운데로 인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가르침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온전한 믿음가운데로 인도하는가? 믿음을 더하는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기뻐하신 뜻으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 그 교훈이 변론만을 일삼는가? 아니면, 우리를 삶의 변화와 덕을 세우는 일로 인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성경의 교훈을 단순히 지식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변론의 방법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인간의 구원문제와 삶의 변화를 동기로 접근해야 한다.

셋째, 그 교훈이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을 통하여 일어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교훈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떤 교훈이 개인이나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고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도록 한다면 일단 그 가르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우리를 이탈시킬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경이란 무엇인가?"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4-17)

a. 성경은 각 개인을 상대로 말씀하고 있다.(딤후 3:14-15)성경은 모든 이 세상의 인류 중에 나 하나를 상대하며 찾아온다. 이처럼 나 하나를 상대하고 독립적으로 찾아오는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이 각 개인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범죄의 타락도 각 개인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도 각각 개인적인 것이다.

b. 성경은 우리의 현주소이다.(딤후 3:14)이미 배운 성경진리를 떠나지 말고 그곳에 머물라고 하셨다. 그리고 확신가운데 거하도록 명하고 계신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베웠다(딤후 1:5). 또한 바울에게서도 배웠다.(딤후 3:10-11) 성경은 배움의 현주소요 확신의 근거지이다. 성경은 인생이 머물 수 있는 안전한 곳이다. 성경을 떠난 인생은 방랑자요, 탕자인 것이다.

c.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딤후 3:15)믿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의 결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 믿음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지혜가 바로 성경이다.(요 10:21) 이것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생명(핵심)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요 5:39)

d.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딤후 3:16)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고 선언한다. 그 확실하고 명백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친히 영감을 통하여 기록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책은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다"(사 34:16)라고 했으며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들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고 하셨다.

e. 성경은 교훈과 선행의 표준이 된다.(딤후 3:16-17)이 세상에는 인간교육을 위한 수많은 책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만큼 인간교육을 위한 위대한 책도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진리가 샘솟는 보고이다. 먼저 우리 자신을 교육시켜 그리스도인으로 완성시키며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의 교훈을 실천케 하는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배우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그리스도인은 경건함 가운데 성장할 것이며 가장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3) 이단이란 무엇인가?이단이란 '당파'(행 5:17), '파'(행 15:5, 26:5, 28:22) 또는 '이단'(행 24:5, 14)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이단자(이단에 속한 사람)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한번 나타나고 있다(딛 3:10). 본래의 뜻은 '스스로 선택한 것' 혹은 '견해'의 뜻을 지녔으나 점차 당파나 학파 혹은 종파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본래 '이단'이란 단지 사람이 속하려고 택한 '당파'라는 의미가 있다. 이것이 점차 나쁜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어떤 사람들이 교회의 가르침과 약속과 전통에 대하여 개인적인 견해를 세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파적인 사람이란 정당한 이유 없이 분파를 일으켜 교란시키는 자를 말한다.그리고 '이단'이란 학술용어로는 '다른 이견'으로 신약성경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바른 의견' 즉 '정통'의 반대어인 것이다. 결국 이단이란 본래 당파, 학파, 종파를 가리켰으나 후에는 '정통'의 반대를 가리키는 의미로 바뀌었다. 목회서신에 나타난 대표적인 '이단'은 '그노시스'주의이다.

4) 신조의 가치성바울서신에 의하면 신앙이란 인격적인 것으로서 사랑과 신뢰와 순종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신앙은 신조에 대한 신앙으로 변하였다. 즉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였다.목회서신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단의 책동 때문에 신조의 확립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① 어떤 사람들이 신앙에서 떠나서 악령들의 교리에 미혹되었다.(딤전 4:1) ② 선한 일군은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으로 양육 받지 않으면 안 된다.(딤전 4:6)

③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다.(딤후 3:8)

④ 디도는 신앙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꾸짖었다.(딛 1:13)

⑤ 디모데는 부탁 받은 선한 것을 지킬 것을 권고 받고 있었다.(딤후 1:14)는 것에서 잘 나타나 있다.무엇보다도 교회제도는 교회에 대한 진정한 사도적 신앙의 기초를 제공해 줄 전통을 확립함으로써 교회의 예배에서 신앙고백으로 사용되었고 교회제도는 사도권의 계승에 적용되었다.

(3) 바른 신앙생활(윤리-행위론)

1) 믿음과 행함의 관계목회서신에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교리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여러 곳에 진술되어 있고 또한 암시되어 있다. 즉 선택(딤후 2:10),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딤전 1:14; 딤후 1:9; 딛 3:5), 그리스도의 신성(딛 2:13), 그리스도의 인성(딤전2:5) 등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그리고 이러한 믿음에 대한 선행은 필수적이었다(딤전 2:10, 6:12, 18; 딤후2:22, 3:17; 딛 1:16, 2:7, 14, 3:1, 8, 14). 그 뿐만 아니라 선한 행위는 신자 안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로 간주되었다(딛 2:11-14, 3:4-8). 이처럼 거듭 강조된 선한 행위는 신자에게 은혜로 주어진 구원이 실제 삶의 현장에서 경건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목회서신은 '믿음의 열매' 즉 '선한 행위'가 강조되었다.그러나 신앙의 윤리적이며 실천적인 '선한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와 균형을 이루어야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딛 2:14) 말씀(믿음)과 실천이 조화되는 삶이야말로 온전한 성도의 삶인 것이다.(약 2:14,17) 그 행위는 하나님께 돌리는 실제적 영광이다. 루터주의(Luther)는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강조하였으나, 개혁주의는 이신득의(以信得義) 위에 행함을 강조하였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2) 회중, 개인, 가정, 사회와의 관계바울은 그레데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회중, 개인, 가정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에서 성결 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데 필요한 지침들을 주고 있다. 특히 그레데 사람들은 평판이 좋지 못해 회중, 개인, 가정 그리고 사회생활의 완전한 성화의 필요성이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강조되어야만 했었다.회중생활에서는 자격이 잘 갖춰진 장로들이 각 성에 세워져야 했다.(딛 1:5-9) 왜냐하면 그레데에는 엄히 꾸짖어야할 질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딛 1:10-16) 개인과 가정생활에서는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로 말미암아 그들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했다. 남녀노소 모두 다 개인적으로는 물론 가정적으로도 경건과 사랑과 인내와 거룩함과 복종과 근신함에 있어 온전해야 했다(딛 2:1-8; 딤전 3:1-5). 심지어 종들도 상전들에게 순종과 충성으로 일관해야 했다(딛 2:9-10; 딤전 6:1-2).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든 사람에게 세속적인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고, 구주의 영광스런 재림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딛 2:11-14).사회생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한 시민으로서 사회법규에 순종하고(롬 13:1-7; 딤전 2:2; 딛 3:1), 비기독교세계에 대해서도 온유와 관용으로 모범을 보여야 했다(벧전 2:22; 딤전 3:7; 딛 3:2).

3) 비행자에 대한 권징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관한 어리석은 논쟁이나 족보이야기 등의 허탄한 주장을 일삼는 무리들과 이단에 속한 자들에게 취해야할 일차적인 태도는 먼저 그들을 훈계하는 것이다. 영적인 오류에 빠진 자들도 회개하여 주께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두 번 훈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훈계를 듣지 않거든 관계를 끊고 멀리하라고 명령하고 있다(딛 3:10; 요이 1:10). 그것은 마 18:15-17에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예수님의 교훈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이단자나 비행자에 대한 처신은 한두 번 훈계, 즉 경고 내지는 충고하고 그 다음에는 절대로 기회를 주지 말고 교회에서 내보내야 한다(딤후 2:23; 벧후 2장). 왜냐하면 그들이 존속하면서 교인들을 유혹하고 잘못된 길로 가게 하여 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4) 바른 목양(행정-관리론)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밝은 윤리적 생활을 위하여 교회는 어떻게 그들을 관리할 것인가? 에 있다.

1) 공중예배에 대한 지침

a. 공중예배의 기도교회를 영적으로 번창하려면 공중예배가 크게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예배가 순조롭게 그리고 고요하고 아무런 방해 없이 진행될 수 있으려면 교회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어두움 속에서 비추이는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공중예배를 위해 모이는 경우에는 반드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소위 위정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한다(딤전 2:1-2). 우리는 여기서 공예배시에 나타나는 목회기도를 볼 수 있다.

b. 공 예배시의 남자와 여자의 바른 태도(딤전 2:8-15)교회에서 공 예배를 드릴 때, 그리고 기도를 할 때, 어떤 모양으로 기도하고 어떤 차림을 하며, 그리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먼저 남자는 노여움과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한다. 물론 자복과 참회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여자는 겸손하고 정숙하도록 모든 면에서 사치스럽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어울리는 복장으로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몸가짐과 단장이 중요하다. 그리고 여자는 교회에서 예배를 주관해서는 안 된다."여자는 일정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딤전 2:11-12)"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 14:34-35)이처럼 여자는 아담한 모습으로 공 예배에 참여할 것과 예배 시 남자의 가르침에 일절 순종함으로 배우는 질서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녀차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교회의 덕과 질서를 위함이었다.

2) 바른 지도자

a. 목회자의 자질목회자는 직업인이 아니라 사명자이다. 목회자는 인간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신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이며, 진리를 해석하는 고귀하고 거룩한 직분을 가진 자로서, 교회의 제1선에서 사역하는 지도자이다. 그리고 동시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종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올라가는 길을 걷는 사람이므로 도중에 멈추거나 뒤로 돌아 설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자질이 있다.① 영적인 자질이 있어야 한다.목회자는 일생동안 영적인 일을 위하여 봉사하는 자이다. 감격적인 속죄의 경험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명의식이 분명해야 하며, 영혼을 사랑하는 구령의식에 충만한 자라야 한다.② 목회자는 지적인 자질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는 인생을 배우는 자이며, 가르치는 자이며, 그 책임을 다하려는 학문적이고 지적인 자세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지적인 자질을 위하여 그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③ 영과 육의 건강한 자질이 있어야 한다.신체적인 건강은 물론 정신적인 건강도 함께 지녀야 한다. 목회자가 건강하지 못하면 그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없다. 과로와 어려운 일에도 견딜만한 체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건강한 체력을 위해서는 규칙적인 운동이나 적당한 휴식 등을 통하여 강건한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b. 존경할 만한 감독(장로)초대교회 내에서의 감독은 교회의 생활과 사업을 감찰하는 직능과 더불어 교인들의 신앙생활 전반을 보살펴 주는 책임을 맡고 있다. 그리고 연로하고 경험이 있는 교회 지도자를 가리키는 장로와 동일한 직책으로 사용되었다(행 14:23, 20:17; 벧전 5:1-2). 그러므로 이러한 중요한 감독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감독을 열거하고 있는데 ① 훌륭한 인격과 덕성을 지녀야 한다(딤전 3:2-3; 딛 1:6-7). ② 가정생활에 모범적이어야 한다(딤전 3:4-5; 딛 1:6) ③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이 있어야 한다(딤전 3:7) ④ 물질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처신이 따라야 한다(딤전 3:3). ⑤ 영적인 면에서도 장성한 자가 되어 남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딤전 3:6).

c. 양심적인 집사집사의 본래의미는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 '수행원', '종', '일군' 등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집사 외에 다른 직임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고 있다. 청지기(눅 12:42, 16:1; 딛 1:7; 벧전 4:10), 하인(요 2:5,9), 섬기는 자(고전 16:15), 일군(롬 16:1; 엡 3:7)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이처럼 여러 기능으로 표현되는 집사는 교회를 섬기며 봉사하는 직책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단정해야 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며,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한다(딤전 3:8). 더 나아가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믿음의 비밀을 가지며 시험에 합격하여야 책망할 것이 없고 경건한 가정생활을 하여야만 양심적인 집사가 될 수 있다(딤전 3:9-12). 그리고 여자들도 품행이 단정하고 참소 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한다(딤전 3:11).

3) 상담자로서의 자질목회상담을 필요로 하는 노인들을 목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할머니들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젊은 남자들의 경우는? 젊은 여자들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부자들의 경우에 목회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목회상담과 교정(矯正)을 필요로 하는 여러 종류의 교인들에 관하여는 연령과 성별에 따라 다루어야 한다(딤전 5:1-16). 노인들을 권면할 때는 아버지를 대하듯이, 할머니들에게는 어머니를 대하듯이 해야 하며, 젊은이를 대할 때는 형제에게 하듯이, 젊은 여자들을 대할 때는 일체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이 대해야 한다.재물이 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교만하지 않도록 하고, 재물의 소유주가 하나님임을 알도록 하여 선한 일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게 하고 나누어주도록 권면해야 한다(딤전 6:17-18).

4) 구제를 위한 일가난한 자를 돕는 구제사업의 일차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선적으로는 그들과 가장 가까운 인척관계에 있는 자들에게 구제의 책임이 있다. 이는 도덕적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실제적으로도 필요하다. 교회는 분주하고 여러 가지 일들이 많기 때문에 교회에 구제의 모든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딤전 5:16).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부양할 수 없을 때는 교회가 도와야 한다. 만일 모든 자들이 자기 몫을 감당해 준다면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은 훨씬 쉬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짐들은 서로 나눠져야만 하기 때문이다(갈 6:2). 결국 교회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게 하여 그 짐 때문에 교회가 가라앉게 해서는 안 된다.Ⅲ. 지도자를 발견하는 원리1. 인간의 야심

인간의 야심이란 고상한 정신이 피해야 하는 고약한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야심을 가진 사람에게 직책을 맡긴다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도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렘 45:5)라고 경고하고 계신다.단지 지위만을 추구하는 자들과 협잡꾼들은 낙심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나 고난을 감수해야 하면서 끝까지 감당해야하는 심각한 임무를 전혀 갈구하지 않을 것이다.오늘날의 문제는 지도자에 대한 명예와 특권만을 생각하고 무가치한 야심이 작용하여 '자기추구'의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비 영적인 사람들이 이 직분을 갈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충고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레미야는 단순히 야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야심' 곧 '자기를 위한 대사'를 계획하고 행하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 본래 야심(ambition)이란 '자신을 높이기 위해 자기를 선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인정받으며, 인기를 얻고, 자신의 동료들 중에서 뛰어나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요인들이 야심가운데 내포되어 있다. 보통 야심가들은 돈이나 권세가 가져다주는 힘을 즐기고 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속적인 야심을 호되게 꾸짖고 계신다. 참된 지도자는 결코 자신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자기를 선전해서는 안 된다."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2-44) 예수님은 이기적인 야심의 가면을 벗기시고 진정한 야망의 참된 성격을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시며 그의 임박한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는 무관심한 채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옵소서"(막 10:37)라고 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영광의 면류관은 구하면서 고난의 면류관을 위해서는 전혀 준비되지 못한 것이다. 자신들의 일시적인 진보를 획득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어머니까지 이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세속적인 야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참된 영적 지도자의 길을 걸을 수 없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막 10:38)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무모하고 무지한 자의 대답이었다. 예수님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자의 대답이었다. 이 세상의 가치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는 정 반대되는 것이다. "내 좌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였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막 10:38-40)는 말씀 속에서 그들의 준비되지 못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된 자'만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서게 될 것이다.2. 지도자의 발견

하나님과 인간은 기독교사역의 여러 영역에 있어서 끊임없이 지도자를 찾고 계신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유형의 사람을 계속하여 찾고 계신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아닌 한 사람을, 집단이 아닌 한 개인을 찾고 계신다."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삼상 13:14)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렘 4:25)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 5:1)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겔 22:30).

하나님은 일군을 불러 세우실 때 그의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용하시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모세, 기드온, 다윗, 마틴 루터(Martin Lether), 존 웨슬리(John Wesley),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등 많은 지도자들이 모두 결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인간적(자연적 또는 육신적)인 지도자는 아무리 능력이 있고, 매력적인 지도자라 할지라도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영적, 도덕적으로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다. 따라서 지도자는 영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지도자는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 오도록 본을 보여주어야 하며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신 주님의 생애를 본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 양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신 것처럼 영적 지도자 역시 양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3. 참된 지도자

오늘날 한국교회는 지도자의 교체 때문에 많은 갈등과 상처를 입고 있다. 그것은 곧 권위적인 지도력에 익숙한 교인과 민주적인 성향의 지도자와의 갈등과 교인간의 상호대립으로 인하여 분열이 조장되고 있다. 과거에는 권위적인 지도력에 따라 발생되지 않던 것들이 민주적인 지도력에 의하여 상호간 이해와 협력을 위한 의사소통의 훈련이 전혀 전무한 상태에서 상호간의 이견은 해결되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불신과 대립으로 인하여 지도력의 공백이 발생된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참된 지도자를 발견하고 상호간의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는 지도력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마 20:28) 한국의 신학교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신학교들의 교육 상황도 유사하리라 본다. 다름이 아니라 신학생을 교육하는 모범적인 모델 역시 당대에 성공한 목회자일 것이다. 모두다 대형교회를 목표로 훈련받게 되고 그것을 목표로 사역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20~30%만이 성공한 목회자의 모델에 유사한 결과를 얻게 되거나 대형교회에 부임하여 사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다수 목회자는 200명 미만의 중・소형교회를 사역하게 될 텐데 그동안의 교육과 훈련과정은 대형교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 자신의 사역에 대한 회의와 자신의 무능력으로 인한 상처들을 입고 있는 현실이다. 목회의 성공이 과연 대형화된 교회를 사역하는 것일까? 그것만이 하나님의 뜻이요 부흥하지 못하고 200명 전후의 교인을 양육하는 목회자는 실패하거나 능력 없는 종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인가? 성경 어디에서도 참된 지도자의 평가가 목회사역의 크기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있다. 교회, 사업, 가정이 그 규모가 크고 작든 간에 그것이 우선될 수 없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위임하신 능력과 자원을 어떻게 극대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예수님은 특이한 재능을 지닌 자에게 특별상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경은 분명히 많이 받는 자에게는 많이 찾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오직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재능과 자원에 대해서만 말씀하심으로써 보다 중요한 것은 신실한 청지기가 되어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재능과 은사와 인격을 각 개인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한 가지 유형의 지도력은 불가능한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양들을 주께로 인도했다. 여호수아 역시 모세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다 섬기는 지도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와 인격으로 봉사했던 지도자였다.Ⅳ. 지도자의 동기와 다양한 지도자 상1. 지도자의 동기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빌 2:5,7)대부분의 목회자는 교회와 교인들을 자기의 힘으로, 또는 자기의 지혜로 이끌어가려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때 에야 비로소 자신을 이끄시는 주님을 보게 될 것이며, 그분의 임재와 권능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목회사역임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분명히 준비된 지도자는 섬김의 지도자이다. 이제 섬김의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① 어떻게 섬기는 지도자가 될 것인가?

②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③ 누가 우리를 가르치며 그 방법을 보여주실 것인가?

④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과 함께 섬김의 지도자 상을 찾고자한다.(1) 예수님의 지도력예수님은 인간의 형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셨지만, 그 점을 내세워 특권을 누리려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인간의 구원하시고자 자기를 비어 무명자가 되기까지 낮아지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셨다. 즉 하나님이 인간의 종이 되신 것이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만일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분처럼 되겠다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그분께 의탁해야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깨닫고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고 있다(고전 15:32). 우리는 스스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우리의 출발점은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주님으로 모시고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인도, 그리고 간섭하심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되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께 순복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하여 그분이 행하시도록 해야만 한다.(2) 광야 경험을 통한 지도력 배양(培養)이스라엘 백성을 훈련시켰던 광야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광야경험'이라 부를만한 어떤 쓴 경험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신다. 모세도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려했을 때 히브리 노예를 때리던 애굽의 감독관을 죽이게 된다. 그러나 히브리 노예들은 모세에게 감사하기는커녕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출 2:14)고 따져 물었다.

모세는 그 후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이드로의 집에 머물게 되었고, 그의 딸과 결혼하여 이드로의 큰 목자로서의 삶을 보내게 된다. 그는 바로의 궁전에서 영화롭게 자랐으나, 이제 광야의 한 구석에서 양을 치는 목동의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모세의 광야 경험은 새로운 과업을 부과 받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힘으로 백성을 이끌겠다하거나, 자기의 생각대로 행동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된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종이 된 것이다.모세만이 '광야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을 광야에서 보내셨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사울에게 쫓길 때 수개월동안 광야에 숨어있어야 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거둔 놀라운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을 피해 광야로 도망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광야 경험'을 했다. 이처럼 '광야 경험'은 그들의 인격과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단련시키셨다. (3) 섬기는 지도력섬기는 지도자라는 개념은 대부분이 말하는 훌륭한 지도자에 대한 책이나 강사의 강연을 통해 제시된 지도력과는 다르다.

1) 성경적인 섬김의 지도자는 현실세계와 모순된다."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 20:25-26)라 말씀하신 것처럼, 섬기는 지도자는 우리의 논리적 사고와 역설(逆說)을 이루고 있다. 표면상으로 납득되지 논리이다. 사람들의 종이나 노예가 된다면,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악의와 경쟁, 권력의 남용으로 만연된 '이 현실 세계'에서 먹혀들 수 있는 지도자 상이 될 수 있겠는가? 이 역설에 대한 이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른 구절에서 가능하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이 말씀은 곧 예수께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며 통치자이심을 나타내고 계신다.

2) 섬김의 길은 나의 길이 아닌 예수님의 길이다.정직한 지도자일수록 그 자신이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나에게 책임이 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며 어떻게 가야할지 스스로 결정해야한다. 나는 나를 이끌고 내가 즐기는 것에 내 몸을 맡긴다. 즉 성취할 어떤 것이나 나를 이롭게 하는 어떤 것을 향하여 가고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길이다. 예수님은 오셔서 이러한 것이 그분의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길은 다르다. 우리가 그분을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같이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막 8:34). 우리는 섬김을 받기보다 섬겨야 한다. 우리는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뜻과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4) 신실한 지도력

1) 사울 왕의 행적을 통하여 '신실한 지도력'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뿐만 아니라 '왜'우리가 그런 일을 하는가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이 진리에 대하여 그의 행적을 통하여 그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즉 섬김의 지도자로서 백성을 이끌지 않았으며 그는 자기의 원하는 대로 백성을 다스렷다. 그는 '자기의 일'을 '자기 방식'대로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권력을 남용하였다. 이러한 그의 심성은 아각과 아말렉 족속을 물리쳤을 때(삼상 15장), '좋은'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하여 숨김으로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였다.하나님은 사무엘을 보내어 그에게 물으셨다. "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나이까?" 그리고 이런 선언을 그에게 내렸다.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삼상 15:26).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의 마음대로 하는 자는 신실한 지도자라 할 수 없다.

2) 사무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에서 신실한 지도자가 누구인가를 찾을 수 있다.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새 왕에게 기름을 붓기 위하여 이새의 집에 당도한다. 그는 큰아들 엘리압을 보고 그의 외모에 반하여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아님을 말씀하셨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은 그 마음이 그 분의 마음에 합한 자를 지도자로 쓰신다. 경건한 사무엘 조차도 사울과 엘리압의 외모에 좋은 인상을 받고 그에게 마음이 쏠렸던 것을 볼 수 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품은 동기를 보고 계신다.하나님은 인간의 외모를 넘어 그 마음중심을 보고 계신다. 우리가 하는 일뿐만 아니라 왜하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외적 행위와 행동을 꿰뚫어 보고 계신다. 마음이 바르다면 그 행동도 역시 바를 것이다.인간의 동기는 그 마음 중심에서 시작된다. 자기 욕심에 의하여 출발되는 동기는 이기적이다. 곧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의 마음에 있는 동기를 말씀하고 계신다. "속에서 곧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막 7:21-22)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이 다스리게 될 때, 새로운 삶을 살아갈 능력을 허락하신다. 그분의 동기가 우리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그분의 동기는 언제나 사랑이시다. 섬김의 지도자의 동기 역시 십자가의 사랑에서 출발되어야한다. (5) 지도력의 핵심인 사랑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목적이나 욕망을 성취시킬 능력을 주시지 않으셨다. 그분의 능력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덕목이다. 그리고 사랑은 섬김의 지도자에게 필요한 지도력의 원천이다. 사랑이 동기가 될 때 지도자의 태도와 행동에서 사랑의 열매들이 맺히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사랑의 삶을 살게 될 때, 모든 사람들로부터 예수의 제자임을 인정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예수님은 "자기를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분이시다. 섬김의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사랑하신 대로, 복종하신 대로, 섬기신 대로 해야 한다.

1) 섬김(사랑)의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성령의 권능을 입어야 한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사랑과 능력이 동시에 언급되었고 이것이 우리 마음에 동시에 주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라는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권능은 성령이 임하신 자만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성령이 임하신 자만이 사랑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역시 계속하여 인간의 욕심을 따라 썩어질 것을 계획하고 행동할 것이다.

2) 사랑의 지도력은 성령의 내주와 다스리심으로만 가능하다.성령께서 내주 하시며 우리를 다스리실 때, 성령의 열매들은 우리 생활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 자체를 위하여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 능력을 주신 까닭은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나라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곧 능력은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주신 것이지 그 능력을 행하는 자의 영광을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3) 사랑의 지도력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과 우리가 이끄는 모든 사람의 삶을 견고하게 세우는 일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학대하거나 혹사시키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는 '일회용' 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호사스러운 종이컵이나 일회용 접시들을 마구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물건들을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고 버린다. 자동차도 3~4년 정도 타고 다른 차로 바꾸는 시대에 살고 있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안에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대인관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친구나 연인관계에서도 필요할 때 만나고, 필요 없으면 쉽게 버린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교회를 버리고 저 교회로 가버린다. 단지 인간의 기호나 입맛을 위하여 사는 인생들이다. 이 시대는 일회용품을 쓰고 버리듯이 살아가고 있다.이제 사랑의 지도력은 사람을 세우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환경이나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그분이 원하시는 일(하나님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살도록 인도해야한다. 사랑과 진실한 의사소통은 인간을 세울 수 있으나 인스턴트식품처럼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는 인간 중심적인 기호나 입맛을 찾아 떠도는 하루살이 인생으로 전락시키게 될 것이다.이기적인 지도력은 인간을 파괴할 것이며, 사람을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릴 것이며, 인간을 혹사시키며, 사람을 세우기보다는 인간을 욕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소비하고 말 것이다. 그들에게 공급하기보다는 무엇인가 그들에게서 빼앗는 자가 될 것이다.

 

 

 

 

 

 

 

 

 

 

 

제4편 목회자 탈진의 신학적 원인

 

2000년 12월 의사들은 수입과 권위의 감소에 위기감을 느끼며 파업을 강행하였다. 수많은 의대 졸업생들이 해마다 쏟아져 나오고 시민들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의사들이 과거에 누렸던 부와 영광을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그와 비교될 수 없이 열악한 형편이다. 신학교에서는 수많은 졸업생들이 해마다 쏟아져 나와 포화상태를 넘어섰으며, 과거의 존경과 권위는 실추되고 많은 목회자들이 힘겹게 한주 한주를 버티어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파업도 할 수 없다. 교단의 핵분열로 야기된 신학교의 난립과 급격한 신학생 증가는 이미 오늘날의 심각한 문제를 예고하고 있었다. 더욱이, 십년마다 배로 증가하던 한국교회 성장이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체를 보이자 많은 신학교 졸업생들이 청빙을 받지 못하였고, 따라서 개척교회 밖에 진로가 없었으나 그것도 성장정체의 벽에 부딪쳐 존립의 위기 속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매일 새벽을 적시고 있다. 더욱이, 자동차의 보편화와 교회의 대형화로 교인들은 크고 화려한 교회로 몰리고 개척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어서 교회에도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 신세대의 등장과 함께 구세대 목회자들은 적지 않게 조기은퇴의 압력을 받거나 교회유지에 힘들어하고 있다. 오직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소수의 인기 있는 목회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불만에 시달리며, 심지어 상당수는 직간접적인 사임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회자의 탈진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이 길에 들어선 목회자는 일단 안수를 받으면 뒤돌아 설 수 없다. 전후좌우가 다 막힌 절망적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으며 전업할 수 없다. 이러한 배수진 때문에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욱더 안간힘을 쓰지만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현대는 고도의 경쟁적인 시대로써 전문직은 모두 탈진의 위험을 가지고 있으나,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죄책감이 더 가중된다. 탈진(脫盡, burnout)은 과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달리, 자신감과 희망을 상실하는 현상이다. 기대와 현실의 심각한 차이가 반복되면 자신감을 상실하게 된다. 전력투구하여 그토록 헌신하고 노력했는데 아무런 결과도 없을 때, 심지어 최소한의 기대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리고 아무 보람도 정당한 보상도 주어지지 않을 때, 자신의 무능을 절감하게 되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래도 다시 힘을 내어보지만 이제 더 이상 의욕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면 탈진되었다고 말한다.

영어로는 타버렸다는 뜻이다. 물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목회를 포기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혹은 위장된 방식으로 목회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오늘날 교회성장의 실패가 탈진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지만, 그 뒤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숨어있다. 흔히 거론되는 원인들로는 완전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자기에게 초인적 능력과 성자적 모범을 요구하는 정체성의 문제, 자기가 모든 것을 해야 되고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자기를 혹사하며, 동역자들과 원만한 업무분담과 협조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모든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행동방식의 문제, 분명한 근무시간이나 업무내용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직책상의 문제, 그리고 부부관계나 자녀문제로 인해 자괴감을 가지게 되는 가정적인 문제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가운데 신학적인 원인들이 있다.

신학무용론 인류 역사상 종교지도자는 정치지도자와 함께 인류사회를 이끌어온 엘리트로서 고도의 훈련과 자질이 요구되었다. 특히, 기독교 지도자는 신학교육이 필수화되었으며, 신학은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 군림해 왔다. 더욱이, 현대는 전문화의 시대로써 모든 직종에 전문성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에서 목회자는 보다 더 우월한 교육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은 가장 전문적이어야 하는 목회자들 사이에 학문의 필요성을 경시하고 목회의 성공이 신비한 영적 능력이나 성장술 모방에 의존한다고 생각하는 비합리적인 신학무용론이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신학적 불신은 일부 신학교육에도 기인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신학교의 저질화에 있다. 수많은 신학교에서는 전문성이 없는 목회자들이 교수를 자처하고 있으며, 신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적 수준에 미달한 지원자들이 대거 입학하여 교육수준을 끌어내리고 있다. 다른 학문수준이 크게 상향되고 있는 오늘날, 이런 현상은 목회자의 사회적 위상을 크게 떨어뜨리고, 그 대가는 목회자들 자신이 치르게 된다. 물론, 신학에 대한 경시와 신학무용론은 교회분열에 그 근본적 원인이 있다. 만일 분열이 없었다면, 신학교육은 크게 발전하고 적당히 목사안수를 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교회성장주의에 있다.

방법 여하에 관계없이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가 인정받고 있는 현실에서, 그릇된 가르침이나 윤리적 문제는 중시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학교육은 형식적 과정이 되고 교회 성장술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신학의 경시는 원칙을 무너지게 만들고, 무원칙한 성장주의는 교회내외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며, 급기야는 교회의 부정적 인식이 성장의 중단과 감소를 야기한다.

장로교단의 경우, 79년까지는 신학교육이 어느 정도 통제되어 왔으나, 분열 이후 신학교의 수없는 난립과 상업적 팽창은 신학교의 위상과 신학교육을 철저히 저질화 시키고 목회자를 폭발적으로 양산하였다.

본래 신학교육은 일반교육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일반적으로 대학졸업이 전문직에 요구되는 교육수준이었으나, 목회자는 대학원 석사과정보다도 1년이 더 많은 전문석사의 교육수준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영세 분열과 신학교의 수준저하는 전반적으로 대학수준에도 못 미치는 학력에 머무르게 만들어 목회자의 사회적 위상이 급격히 추락하였다. 이러한 교육미비는 자연히 사회적 무시와 목회자 자신의 열등감을 초래하고, 이는 적지 않게 목회자의 탈진을 가져오는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

설교에 대한 불만 개신교 목회자에게 있어서 설교는 매우 중요하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청종되며 교회생활과 예배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교인들은 설교에 집중한다. 따라서 설교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목회자와 교회에 실망하게 된다. 교인들에게 목회자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88.3%가 설교를 잘할 때 만족한다고 답변하였으며, 따라서 목회자도 우선순위의 88%를 설교에 두었다. 교회를 떠나는 이유 조사에서도 이사를 제외하고는 설교에 대한 불만이 가장 높았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목회자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 설교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따라서 목회자가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탈진에 빠지는 근본적인 원인이 설교의 실패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교육은 주로 설교를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설교는 종합예술로써, 성경 신학뿐 아니라 조직신학, 윤리학, 교회사의 훈련을 필요로 하며, 설교를 작성하고 전달하는 설교학이 결합되어 한 편의 위대한 설교가 탄생한다. 미국이나 유럽의 목회자들이 한 주에 2편의 설교만 준비하면 되는데 비해, 한국의 대다수 목회자들은 매주 10편 이상의 설교를 준비해야 된다.

따라서 서구의 목회자들보다 더 설교준비에 유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설교는 오늘 여기 설교를 들으러 모여든 청중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그러나 마치 바울서신이 바울의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듯이, 설교는 인간의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도 사도들도, 그리고 선지자들도 더 이상 우리 곁에 있어 우리의 질문에 직접 답변해주지 않기 때문에, 과거 2천년 혹은 3천년 전에 당시의 특정 교회나 특정 공동체에게 주셨던 성경말씀으로부터 현재 당면한 문제에 대해 자기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내야 하는데, 그것은 실로 난해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선포하는 이 위대한 직무는 결코 기계적으로나 신비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설교자의 노고와 헌신을 통해 이루어진다. 오늘 여기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으로부터 추출하여 설교문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통전적이고도 심오한 이해가 필요하며, 현실의 정황에 정통하기 위해서는 현실세계와 사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심층적 분석능력이 요구된다. 더욱이, 설교는 한 주제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몇 마디가 아니라, 장시간 설득력 있게 설교해야 되기 때문에 문학과 수사학적 능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여기에 성령의 감화가 추가되어야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교인들의 마음에 전달하고 변화와 결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도의 신학적 훈련과 폭넓은 지식이 없이는 성공적인 설교를 창조할 수 없다. 설교의 형식과 내용에서, 본질적인 것은 내용이지만 그것을 담아 전달하는 형식 또한 성공 여부에 결정적이다.

칼빈이 지적한 대로, 진리는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로만 전달될 수 없다. 그래서 설교자의 형식과 청중의 형식이 일치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설교자와 청중의 형식 사이에 괴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인들의 설교 만족도가 갈수록 떨어지고 설교자에 대한 불만으로 연결되면서, 목회자들은 점점 더 무력감과 열등감에 빠져 탈진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청중의 교육수준이 급격히 상승한 반면, 목회자의 교육수준은 상대적으로 하락하면서 발생한 언어형식의 괴리현상이다. 대졸이상이 75년에 25세이상 인구의 5.8%였으나 95년에는 19.7%로 급증하였으며, 사실상 오늘날의 청년들은 거의 반수가 대학교육을 받고 있다. 한편, 동일한 기간에 목회자 교육수준은 급격히 하락하였다. 교인들의 수준은 올라가는데 목회자의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아지면서, 언어와 사고의 형식이 맞지 않고 따라서 상당수의 지성적인 교인들은 설교자를 찾아 방황한다.

일례로, 요즘 모두 정보화시대를 맞아 영어와 컴퓨터를 배우느라 열심이지만, 목회자들은 큰 관심이 없다. 국민의 반수가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는 오늘날, 인터넷을 제대로 이용하는 목회자는 반의반도 되지 못한다. 물론 모든 문화를 추종할 필요는 없지만, 문화적인 형식을 거부하면 효과적인 의사전달에 성공할 수 없다. 교회의 주인의식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인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당수의 목회자들은 경쟁적인 상황에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그릇된 교회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신학적 혼란이 목회자의 탈진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자기 자금을 가지고 건물 보증금을 주고 개척하여 교회당을 애써 건축하고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의 분신이며 전부이어서 무의식적으로 교회의 주인 의식을 가지게 되며 그 권리를 사수하게 된다. 그러지 않은 경우라도 일생을 바쳐 목회한 교회에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치 사장이 회사를 건설해 나가듯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교회를 이루어 나간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을 부인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실제로는 강한 소유의식과 주인의식을 가진다. 주님에게 충성하는 것과 교회의 주인의식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주인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주인의 말에 복종하지만, 주인은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된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다른 종들과 협조하지만, 주인은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주인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주인의 소유에 욕심을 가지지 않지만, 주인은 자기의 것에 대해 강한 집착을 가진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의식은 끝없는 경쟁을 유발시키고 경쟁자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쉬지 않고 뛰게 만든다.

이런 현상을 일 중독증(workaholic)이라고 부르는데, 소유의 증대와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과도하게 일에 집착하는 정신병적 증상으로서, 주인의식을 가진 목회자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주인의식은 교회행정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며, 인간관계의 실패와 행정에 대한 반발로 목회자의 탈진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교회를 떠나는 이유 가운데 설교 다음은 교회행정에 대한 불만이었다. 주인의식은 자연히 권위주의와 독재를 결과하며, 민주의식이 강한 현대인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게 된다.

칼빈은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키는데 있다고 보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온유한 태도와 인내하는 마음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직분자와의 평등성과 주님의 뜻을 공동적으로 추구하는 교회관과 목회자의 역할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만 가능하다. 올바른 교회관은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경 등이 고백하는 대로 하나의 우주적 교회이며, 개 교회는 교회의 지체에 불과하고 모든 개 교회들은 한 몸을 형성하는 동료지체이며 형제교회들이다. 그러나 현대의 경쟁체제는 이웃에 있는 교회를 경쟁상대자, 나아가서 적대자로 인식하는 중대한 오류를 결과하였다. 그에 따라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교회의 하나 됨이 후퇴하고, 그 대신 개 교회의 독립성과 배타성이 부상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목회자의 주인의식이 있다.

교회에는 여러 직분자가 있으며 각자에게 위임된 사역들이 서로 다르다. 심지어 사도들도 교회업무가 확장되자 합리적으로 집사들을 세워 재정과 구제를 위임하였다. 물론 목회자가 교회의 전체적 지도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상하의 개념은 성경적이 아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교회전통에 없는 서리집사 제도를 대거 도입함으로서 카톨릭과 같은 직분의 계급제도가 정착되었으며, 이는 목회자를 자연스럽게 최고책임자로 부상시켰고 교회의 주인의식을 가지도록 조장하였다. 이런 지배적 위상과 경쟁체계는 자연히 쉴 수 없는 책임감과 과중업무로 시달리게 만들 수밖에 없고, 자연히 탈진을 유발할 수 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신화적 성장은 많은 목회자들의 부러움이 되었고, 교회의 분열로 인해 신학적 통제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교회성장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목회자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은사운동에 합류하였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성장에 한계를 느끼던 때 신체적 고통을 당하자, 그동안 신비주의 비판에 앞장섰던 입장을 버리고 갑자기 은사파로 돌변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유혹을 받고 신유와 안수를 도입하였으나 대부분 성장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이나 성장에 성공한 교회들은 전혀 은사운동과 관계없이 성장하였으며, 오늘날 은사운동은 쇠퇴하고 주변으로 물러났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론에 대한 신학적 혼란을 본다. 과거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던 은사운동의 혼란에서 보는 것처럼, 은사를 신비적 은사로 제한하고 사랑과 믿음과 소망과 같이 더 좋고 귀한 은사를 무시하는 풍조가 일어났으며, 정상적인 성령의 열매보다 은사의 능력에 매달린 나머지 교회의 건전한 발전과 건설보다 분파적이고 부정적인 시위를 결과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혼란스러운 존재로 오해하고, 성령님을 우리가 섬겨야 될 인격적 하나님이라기보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로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은사운동은 한국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일으키는데 공헌하였으며, 정상적인 성경적 목회방식보다 비정상적인 목회자를 양산하여 사회적 거부감을 확산시켜 교회의 정체를 가져오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성령님은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믿어야 하는 분이다. 왜냐하면 그가 교회를 인도하고 자라게 하며 힘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그분의 인간 사역자이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한주에 한번밖에 보지 못하며 그것도 개인적으로 모두 만나지 못하지만, 성령님은 일주일 내내 그리고 24시간 항상 개인적으로 함께 하며 지도하고 위로하고 자라게 하고 도와주신다. 교인과 교회의 성장과 발전은 목회자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성령님이 거의 모든 목회를 하시며, 목회자는 극히 일부를 담당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진실로 믿고 의지하는 목회자는 마음 편하게 그리고 여유 있게 목회에 임할 수 있는 것이다. 염려하는 것은 불신의 결과이며, 스스로 모든 짐을 지고 혼자서 목회를 좌우한다고 생각할 때는 쉬지 못하고 노심초사하게 되며 결국 탈진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역사의식의 결여 이 세계의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구속사의 방향으로 진행하며, 목회자는 그러한 역사를 이루는 거대한 사역의 지휘관들이다. 개 교회의 부흥도 중요하지만, 거시적 역사관을 가져야 그 임무를 올바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만일 어떤 교회가 스스로의 목표를 가지고 독자적인 결정에 의해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역행하는 반역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소부대를 지휘하는 목회자는 항상 상부의 전략과 전투명령을 기다리고, 그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이러한 거시적 역사의식의 결여는 목회자로 하여금 자기에게 모든 결정권과 책임이 있다는 중압감을 가지게 되고, 자기가 실패하면 모든 희망을 상실한 채 좌절에 빠질 수도 있다. 완성의 관점에서 현재를 보는 종말론적 사고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지게 만든다. 그리고 역사의 주인이 그리스도이며, 이미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종말론적 확신은 부분적 실패를 전부로 생각하지 않는 자신감과 믿음을 준다. 하나님은 악도 선으로 바꾸고 실패도 성공으로 전환시키는 분으로서, 우리에게는 궁극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또한 역사의 진행에 따라 때를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유다와 같이 배신하는 제자가 있었으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하물며 목회자가 모든 일에 성공할 수 없으며, 역사의 흐름과 사회적 변화에 역행하는 무리한 기대를 버릴 필요가 있다. 노력한 대로 성공의 열매가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기계론적 사고이다. 역사는 보다 복잡한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 경건한 노력에는 십자가와 고난이 있으며, 거룩한 작업에는 사단에 상응하는 역공이 있기 마련이다.

목회자는 고난과 좌절을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궁극적인 승리의 구도에서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고난 속에서도 기뻐해야 한다. 목회자의 섬김이 중요하지만, 역사를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의 순종과 노력을 이용하지만, 개 교회의 성장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 그릇된 소명 이해 목회자의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주관적인 느낌은 교회를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목회자를 찾고 있는 교회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기에 소명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지만, 교회가 검증하여 한 사람만을 선택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소유로써 아무나 교회를 위해 일할 수 없고 오직 위임된 자만이 감히 교회를 봉사할 수 있다. 주님의 뜻은 성령의 역사로 교회를 통해 나타난다고 믿기 때문에, 주의 종은 항상 주인의 인사명령에 따라 움직일 각오를 가지고 봉사해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가 교회나 기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목회자를 선택하고 기간을 정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위임된 기간 동안 충성하면 되는 것이다. 교인들의 과반수가 원하지 않는데 교회에 남아 있으려고 고집하는 것은 더 심한 자괴감을 줄 수 있으며 치명적인 탈진에 빠질 수도 있다. 한편, 목회의 소명만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이해하는 것도 큰 문제를 결과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교회의 소명 외에 가정, 국가, 사회단체 등 다양한 조직에서 감당해야 될 여러 가지 소명들이 있으며, 모두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소명에만 치우쳐 다른 소명에 불충실하게 되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된다.

목사의 소명에만 치우쳐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소명을 등한히 하면 가정의 실패로 심한 고통을 유발시켜 목회에 대해서도 자격이 없다는 자책과 함께 치명적인 탈진을 결과할 수도 있다. 통계적으로 많은 목회자의 탈진이 가정적인 문제에서 발생한다. 실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공동체를 주신 의도는 상호 보완작용을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다 확고하고 건실하게 이루어나가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목회에서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가정의 위로와 행복이 있으면 극복할 수 있으나, 가정의 실패는 어느 정도 목회에서 성공적이라 할지라도 결국 탈진을 유발하게 된다.

탈진연구의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개인적 후원그룹을 가지라고 권고한다. 감정적으로 또는 전문적으로 의논하고 격려를 받을 수 있는 일단의 적극적 후원자들이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휴식을 거부하는 목회자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정신과 육체의 휴식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창조 시에 안식일의 명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휴식의 의무를 부과하였다. 인간은 매일 충분한 수면과 여가를 통하여, 그리고 매주일 하루의 철저한 안식을 통하여 영혼과 육체가 피로를 해소하고 새로운 활력을 얻어 힘차게 살아갈 수 있으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할 경우 피로가 누적되어 결국 질병과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목회자의 탈진은 충분한 휴식을 거부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자연적 형벌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새벽기도 제도로 인해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한다. 조사에 의하면, 평균 5-6시간의 수면을 취할 뿐인데, 의학적으로 성인은 8시간 정도의 수면을 필요로 한다. 수면부족은 자연히 피로를 누적시키고 효과적인 활동을 어렵게 만들며 만성피로에 지치게 된다. 더욱이, 매주 목회자의 휴식일인 월요일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분주하며 상당수는 목회를 계속한다. 그뿐 아니라, 일 년에 한번 주어지는 휴가를 제대로 즐기는 목회자도 소수에 불과하다. 탈진을 방지하는 방법으로 적극 권장되는 방안은 취미생활이다. 목회자는 스포츠나 건전한 게임, 예술, 등산 등의 취미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정신적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으며, 자연을 즐기고 한가한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취미생활을 즐기는 가운데 목회에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새로운 활력을 얻어야 한다. 상당수의 목회자들은 취미생활에 죄책감을 느끼고 휴식을 나태나 불충으로 생각하여 거부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제한성을 거부하는 잘못이다. 아무리 일하고 싶어도 인간에게는 24시간밖에 주어져 있지 않으며, 충분히 휴식하지 못하면 더 오래 일하지 못하게 된다. 자기를 초인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성경의 인간관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우리가 가능한 한계 내에서 충성할 때, 더 오래 그리고 더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다.

현대의 경쟁적 사회에서 목회자가 가는 길은 험난하고 피곤하다. 자기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지 말고 성실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과 체력과 능력의 한계 내에서 충성하며 절제하는 것이 절실히 요청된다. 무한경쟁에 자기를 투기하지 말고 자기를 절제하며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마음에 평화와 감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성장에만 진력하지 말고, 올바른 신학적 성찰과 윤리적 실천이 목회에서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마 7장에 보면 일단의 선지자들이 나온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선지자의 정도를 걷지 않고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능력 있는 종이었으나 주님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형벌을 받았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올바로 했느냐가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목회의 실패라는 심판을 받게 된다.

교인들에게 말씀의 순종을 요구하는 목회자들 자신이 휴식의 명령에 순종하고, 자기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며,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염려하거나 불안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경쟁적인 사회에서 다른 목회자와의 비교의식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에게만 충성하는 자세가 요청된다. 그리고 자기 시간과 능력이 허용하는 선에서 계속적인 연구와 학습을 유지하여 변화하는 시대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올바로 정립된 신학은 정확한 지도와 같아서 목회자의 길을 올바르고 안전하게 걸어가는데 필수적이다.

 

 

 

 

 

 

 

 

 

 

 

 

 

 

 

제5편 목회현장에서의 갈등분석과 치유방안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많은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프로이드가 인간은 초자아와 원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라는 심리학적 답변을 내놓은 이래로 인간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라는 해석을 많이 해왔다. 사실 인간은 살아가면서 갈등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모든 철학과 종교의 기본 가르침이기도 하며,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특별히 목회자들은 목회현장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많은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갈등은 부정적인 요소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갈등으로 오는 위기는 오히려 한 단계 더 성숙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으며, 생에 대한 더욱 깊은 통찰력을 가져다주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만약 갈등의 도전이 없다면 변화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들이 갈등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고 이를 잘 극복하게 될 때에는 목회를 더욱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겠지만, 이 갈등을 극복하지 못할 때에는 목회에 많은 어려움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목회현장에서 목회자들이 겪는 다양한 갈등의 요인들에 대한 조사를 하고,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심리학적, 성경적 입장에서 분석을 해보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치유 방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해 목회를 하는 모든 이들이 자신이 겪는 갈등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 목회의 삶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I. 갈등의 여러 요인들 목회자가 가질 수 있는 여러 갈등들을 목회자의 심리내적 갈등, 교회구조에서 오는 갈등, 가정에서의 갈등으로 나누어서 제시해 본다.

 

1. 목회자의 심리내적 갈등들 목회자는 보통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많은 내적심리 갈등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개인적인 고민과 갈등을 가족들이나 동역자들, 혹은 교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나누는 자기 개방적인 목회자들도 있지만, 많은 목회자들은 자신의 갈등을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표현을 하던 하지 않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다음과 같은 내적심리 갈등들을 경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그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삶과 실제적인 삶의 모습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갈등을 들 수 있다.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설교하는 그 내용은 많은 경우 자신이 삶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성도들에게 그 말씀에 따라 살라고 외치지만 막상 자신이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고, 자신이 기대하는 삶의 수준은 높은 반면 실제적인 삶은 훨씬 못 미치게 될 때 좌절감과 우울감, 수치감 그리고 죄책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 외식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책감이 들면서 또다시 더 높은 수준의 기대를 설정하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 기대치에 더욱더 미치지 못해 다시금 악순환적인 삶을 살게 되는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목회자들은 이 같은 갈등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이 설교하는 삶과 실제적인 삶이 완전히 분리된 이중적인 삶을 사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양심의 가책마저도 느끼지 못하고 목회를 하기도 한다. 이것은 갈등으로 인해 변화가 올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서는 더 큰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인간으로서 목회자는 인간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에서 갈등을 경험할 수 있다. 보통 목회자들에게 돈과 명예와 성을 조심하라고 한다. 재물욕과 명예욕, 그리고 성욕은 인간이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욕구들이다. 이 같은 욕구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본능의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고 초자아(superego)는 그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고 규제할 때 목회자의 자아(ego)의 능력이 강하지 않으면 목회자는 그 두 가지 소리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 같은 욕구들 이외에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 성공하고 성취하고 싶은 욕구(보다 높은 학위, 보다 좋은 차, 보다 큰 교회) 등이 있는데 이 같은 욕구들이 어느 정도 채워지지 않을 때 삶에서 불만족하게 되며,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죄책감과 수치감을 느끼게 된다.

셋째, 목회자는 자신감과 무능력 사이에서 갈등할 수 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라는 말씀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신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하는데도 교인의 수는 늘어나지 않고 정체 상태가 지속되거나 오히려 줄어들 때 무능력 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때로는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열등감을 느끼며 비교 의식을 갖게 되지만 그것을 누구에게도 잘 이야기하지 못하는 내적 갈등을 목회자들이 경험할 수도 있다. 동역자들과 만날 때나 동기 목회자들을 만날 때에도 자신의 내적인 갈등은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고 좋은 모습만 보여 주려고 할 때가 많다. 이것은 특히 목회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현장에 나올 때 많이 경험하게 된다. 막상 목회자로서 자기 임무를 수행해 갈 수 있는 내면성이 하나도 차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한계에 부딪치는 데서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갈등 때문에 대부분 무엇인가를 붙잡아 보려고 이런저런 성경공부 방법도 배워보고 세미나도 참석해 보는 다급함이 생기고, 이 다급함으로 생기는 내면적인 갈등이 열등감과 함께 복합되어 목회자에게 찾아오게 된다.

넷째, 목회의 특성상 목회자는 소속감과 소외감, 혹은 고독감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한다. 교인들과 친밀해지려고 하지만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 아예 교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목회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교인들과 교회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소속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아무도 자신의 깊은 속마음을 나눌 상대가 없다는 고독감과 외로움을 경험하며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교인들에게 너무 가까이하지도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는 선배 목회자들의 충고를 따라 살다보면 막상 자신의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다.

다섯째, 목회자들도 신앙의 삶에서 회의를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있어 확신에 차있고 성령 충만할 때도 있지만 어떤 때에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며 의무적으로 설교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회의의 과정을 거의 드러내지 못한 채 혼자 고민하거나 아니면 억압하며 부인하거나 회피하는 식으로 갈등을 처리하려고 할 때 문제는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

 

2. 교회구조에서 오는 갈등들 교회의 구조 자체가 목회자들에게 다양한 모습의 갈등들을 갖게 만들 수 있다.

 

첫째, 교회 조직이 커지고 다양화되면서 오는 갈등이다. 교인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교회에 나오는 동기도 다양하다. 위로나 도움을 받기 위해, 복을 받기 위해, 치유 받기 위해, 삶의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사회에서 누리지 못하는 지위나 권력을 교회에서 대용으로 누려보기 위해, 그리고 사회운동의 기반이 필요하여 교회에 출석하기도 한다. 교인의 교회출석 동기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들의 요구도 그만큼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교인이 좋아하는 설교의 주제도 죄의 용서, 치유와 축복, 성령체험, 내세의 소망, 가정의 평화, 교회생활, 이웃사랑, 사회적 책임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교회출석 동기와 요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상대로 목회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여기에서 상반된 욕구들 사이에서 갈등은 언제나 일어날 소지가 있는 것이다.

둘째로, 역할갈등의 문제이다. 목회자가 수행해야하는 역할은 매우 다양한데, 여기에서 역할갈등이 생겨날 수 있다.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보면, 공식적 예배를 집행하는 예배 수행자(ritualist), 어려움 가운데 있는 개인에게 도움을 주는 상담자(counselor),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심신의 병을 고치거나 적응할 수 있게 하는 치유자(healer), 교인들에게 신앙적 규정과 내용을 가르치는 교사(teacher),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preacher), 성경 지식을 연구하는 학자(scholar), 교회조직을 이끌어 가기 위한 계획과 그것의 집행을 책임지는 행정가(administrator), 교회조직을 대표하는 최고의 책임자로서의 교구 책임자(rector), 다른 대사회적 관계에서 보여 지는 성직자(cleric)의 역할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러한 모든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중압감과 불안감, 그리고 이런 수많은 역할을 감당하기에 부족한 시간 때문에 갈등을 겪게 된다. 목회자의 역할 갈등은 특히 교인들이 그에게서 기대하는 요구가 서로 상반될 때, 그리고 그들의 종교 참여 동기가 상이할 때도 생겨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 교인들은 목회자가 예언적인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는 데 반하여, 다른 교인들은 그가 제사장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어떤 교인들은 목회자에게서 강력한 지도력을 기대하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그에게서 민주적인 지도력을 요청하기도 한다. 또는 목회자는 영혼 구원에 목적을 두며 이것을 가르치려고 하는데, 교인들은 물질적인 복이나 성공, 출세와 같은 사적인 이익에 더 관심이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목회자가 자신들을 위해 축복을 빌거나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면, 목회자는 당혹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목회자가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르다고 느끼는 신도들이 그 교회를 떠나가는 것이다. 이때 교인 확보를 위해 잘못된 기대나 욕구일지라도 충족시켜 주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서로 상반되는 기대가 갈등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된다.

셋째, 가치관 갈등의 문제이다. 우선 신학과 목회현장 사이의 괴리 문제가 있다.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이 목회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 목회현장에서 나오고 있고, 목회현장에서의 실천이 신학적으로 볼 때 비기독교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비판이 신학 영역에서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목회구조에 있어서 신학과 목회적 실천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것도 하나의 과제가 되고 있다. 가치관과 관련된 또 다른 딜레마는, 사회적 가치관에 있어 교회의 보수화와 사회의 자유화 사이의 갈등이다. 여러 가지 사회적인 가치와 규범이 교회 안에서는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는 반면에, 사회에서는 점점 개방적이고 자유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혼이나 혼전 성관계와 같은 도덕적 문제에 있어 일반인들과 목회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가치관이 사회에서는 더욱 자유화되는 것이 현대적 추세이고, 그것은 젊은 층일수록 더욱 그러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가치와 규범에 있어 개방화를 할 것인가, 아니면 이에 저항하고 금욕적인 가치를 고수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갈등이 생겨날 수 있다.

 

3. 가정생활에서 오는 갈등들 "목회자들의 부부생활 만족도"에 대해 연구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응답자의 58.4%가 이혼을 고려한 적이 없다고 대답한 반면에 37.5%의 응답자들이 이혼의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한 적이 있다고 대답하였다("간간이 생각되나 진지하게 생각한 적은 없다" 22%, "2-3회 정도 진지하게 생각" 6.5%, "심적으로는 충동을 느끼나 목회자로서 그럴 수 없어서 참고 산다." 7.4%)

 

결혼생활은 그 자체가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삶이며, 따라서 목회자들도 역시 결혼 생활을 할 때 부부간에 갈등을 겪게 된다. 성격 차이와 살아온 삶의 환경의 차이, 의사소통 방법의 차이, 자녀 양육의 스트레스, 경제적인 안정성 여부, 사회 문화적인 영향, 환경적 영향 등의 이유로 결혼 생활을 하다보면 예기할 수 있는 혹은 예측치 못한 갈등을 겪는다. 그 갈등들 중에는 비교적 정도가 약한 것들도 있지만 어떤 갈등들은 매우 심각하며 치명적일 수도 있다. 많은 목회자의 문제 중에는 그들이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한 배경에서 오는 것들이 있다. 이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부모들의 결혼 생활에서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하기보다는 여러 형태의 방어기제들을 사용하여 억압, 부인, 회피, 투사, 합리화하거나 폭력을 사용하거나 알코올을 사용하는 식으로 갈등을 해소하는 모습을 은연중 배운다. 물론 부정적인 것을 보면서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갈등을 건강하게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있지만, 많은 이들은 그들의 부모들의 결혼 생활에서의 갈등 해소 방법을 반복한다. 따라서 배우자와 직접 대면해 대화하며 갈등을 해결해 나가기보다 신앙으로 해결한다고 하나님 앞에 기도로 호소하는 수준에서 간접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며칠씩 침묵하며 회피하거나 혹은 신체적인 싸움을 통해 갈등으로 인한 불안을 해소하려고 한다. 부모들로부터 갈등은 무조건 부정적인 것이라고 학습한 목회자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갈등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며,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큰소리 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무조건 자기가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는 식으로 갈등을 해소하는 이들도 있다. 또 어떤 목회자들은 갈등이 생기면 무조건 배우자를 비난하며 투사하는 식으로 갈등을 처리하기도 하고, 혹은 감정적인 반응은 거의 보이지 않고 상대방이 잘못한 부분을 마음속에 다 기록해 두었다가 한꺼번에 지나간 일까지 다 끄집어내어 폭발시키는 수동-공격성 행동(passive-aggressive behavior)을 보이는 목회자들도 있다. 혹은 갈등을 해결할 때 핵심을 빗나가는 대화를 함으로써 상대방의 힘을 분산시키고 소진시켜서 포기하게끔 하는 건강치 못한 전략을 사용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이러한 갈등 해소의 패턴은 부부 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자녀들과의 갈등을 처리할 때도 동일하게 사용되며 가족 이외의 대인 관계에서, 그리고 교회 내에서의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똑같이 사용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II. 갈등의 심리학적, 신학적 이해 갈등 문제를 극복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하고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갈등에 대한 분명한 이해이다.

 

자신이 겪는 갈등의 원인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큰 틀에서 보고 이해하게 된다면, 그 갈등을 이겨나갈 수 있는 심리적인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갈등에 대해 말하는 여러 심리적 이론들과 성경적 이해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심리학적 이해 일반적으로 갈등이 생겨나는 이유는 구체적인 이슈, 감정, 태도 그리고 의사소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갈등은 쌍방 간에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점들이 있기 때문에 생기기도 하며 감정적인 상태 때문에 야기되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등에서 오는 태도의 차이와 원활하지 못한 의사소통으로 인해 오해가 될 때 갈등이 빚어진다. 여기서는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심리학의 여러 이론들의 관점에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첫째, 프로이드를 중심으로 한 고전적 정신분석학에서는 심리내적인 역동성에 관심을 가지는데 인격의 기능을 크게 초자아, 자아, 원본능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자아의 기능은 욕구를 표현하려고 하는 원본능의 충동성과 사회적, 양심적, 규범적인 초자아의 통제하려는 힘 사이에서 현실을 염두에 두고, 두 상반된 욕구를 조정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갈등을 경험하게 되며 특히 조정해 내기 힘들수록 갈등은 심화된다고 본다. 또한 프로이드는 삶의 욕구인 에로스(Eros)와 죽음의 욕구인 싸나토스(Thanatos) 사이에서 인간이 갈등을 경험한다고 보았다. 목회자들의 경우에 적용한다면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선을 행하려는 욕구와 자신과 타인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욕구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할 때 이 개념으로도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둘째, 아들러(Alfred Adler)는 프로이드와는 달리, 자아는 약하고 손상되기 쉬운 존재가 아니라 보다 능동적이고 통합성이 있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으며, 또한 전체로써의 인간의 성격을 초자아, 자아, 원본능의 갈등 구조가 아닌 자아중심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인격형성에 있어서 사회적 영향을 강조하였는데 비교의식에서 오는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데서 인격이 발달하며 성공을 지향하는 동기에서 인격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갈등이란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월성을 지향하려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되는 것이며 인간의 삶에서 필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갈등이란 현재 상태에서 어떤 변화를 시도하게 될 때 생겨나는 것이며 갈등의 과정을 겪지 않고서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실존주의-인본주의 요법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이에 따르는 책임성을 강조한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책임성이라는 관점에서 갈등을 이해할 때 인간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갈등을 겪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결정해야 할 때 결단하지 못하고 계속 미루면서 갈등하거나 타인이 대신 결정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 같은 행동은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과 책임지기 싫어하는 마음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실존주의-인본주의 요법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미래에 대한 염려 사이에서 갈등하는 태도를 버리고 '지금-여기'(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의 갈등을 벗어나는 길은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에서 자각하고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삶을 요구한다.

넷째, 엘리스(Albert Ellis)가 대표 이론가인 합리적 정서요법(Rational Emotive Therapy)의 관점에서 보면, 비합리적이고 왜곡된 사고에서 갈등이 생긴다고 볼 수 있다. 합리적 정서요법을 ABC모델과 DEF모델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선행사건(Antecedent events)에 대한 신념(Beliefs)은 감정적인 결과(emotional Consequences)를 가져온다고 보는 것이다. 치료적인 측면에서는 잘못된 신념을 논박하여(Disputing) 보다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신념(Effective rational beliefs)을 형성시켜 새로운 긍정적인 감정(new positive Feeling)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목회적 상황 속에서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당회에서 장로들 중 몇 사람이 자신의 견해에 반대했을 때 담임목사는 그 장로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하여 그들을 '반대파'라고 규정하게 되면,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어 그들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하려면 자신의 견해에 한 번 반대했다고 해서 그들을 '반대파'라고 규정짓는 생각이 비합리적이며 지엽적인 생각임을 논박하는 과정을 통해 보다 효과적이며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생각을 갖고, 그 장로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 긍정적인 감정을 가짐으로써 대인 관계의 회복을 꾀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섯째, 가족체계이론(family systems theory)의 관점에서 갈등을 이해할 때 여러 가지 개념을 들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평형성(equilibrium) 개념과 경계선(boundary) 개념을 이용할 수 있다. 목회자의 갈등과 연결시켜 설명해 본다면 교회라는 시스템 속에서 목회자가 어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게 될 때 교회 시스템은 새로운 변화를 지향하는 힘에 대응하여 기존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힘이 생겨나게 되어 갈등을 빚게 된다. 이 갈등이 건강하게 처리되면 새롭게 변화된 모습 속에서 평형성을 유지하게 되겠지만 건강치 못하게 처리되면 시스템은 불안정하게 된다. 따라서 안정시키기 위한 온갖 노력을 통해 과도한 힘을 소모하게 된다. 때로는 다시 원점의 상태로 돌아가서 평형성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분리되어 평형성을 유지하게 된다. 한국교회 상황에서 비교적 보수적 성향을 띠는 연령층에 속한 장로들과 새로운 변화를 요청하는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자주 목회자들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혹은 어떻게 그 요구들을 절충할 것인지를 놓고 갈등하게 된다. 경계선의 관점에서 갈등을 설명한다면 목회자가 갖고 있는 개인적인 경계선과 목회자 가정이 갖고 있는 경계선, 그리고 교회가 갖고 있는 경계선이 서로서로 존중되고 인정되지 않을 때 목회자는 갈등을 경험할 수 있다. 경계선이 너무 경직되어 있거나 너무 흐려지면 건강한 삶을 살기가 힘들다. 교회의 사역과 가정생활을 구별하지 않고 교회의 업무를 집에 가지고 와서 밤늦게까지 처리하게 되면 가족들과 갈등을 경험하기 쉽다. 그리고 목회자의 권위라는 경계선이 경직되거나 무시되고, 당회나 제직회가 갖고 있는 권리의 경계선이 경직되거나 무시될 때 그곳에서는 경계선의 충돌이 일어나며 따라서 갈등 상황을 야기할 수 있다. 갈등 상황이 발생하면 자주 역기능적인 교회 시스템은 희생양을 만듦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나 상대방에게 잘못을 투사하고, 비난하며, 합리화하며, 회피하며, 억압하며, 부인하는 방어기제를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성장과 치유보다는 상처를 덮고 봉합하는 수준에서 갈등을 해결하려 한다. 그래서 때로는 교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2. 갈등의 성경적 이해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하기 이전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담과 하와 사이에,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 사이에 갈등이 없는 완벽한 조화와 평화의 상태였다.

 

그러나 죄를 범한 뒤로 인간의 삶에는 부조화와 적대감, 깨어짐과 부분성으로 인하여 남녀 간의 차이가 갈등을 유발시키며 인간과 자연 사이에 갈등이 생기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내적으로도 진정한 평화를 경험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갈등을 해결하며 화목, 화해하게 하는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찾아오셨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주셨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더불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역사가 '이미' 임했다. 하지만 재림과 더불어 이루어질 영원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나라는 '아직'도 대망해야 하는 긴장과 갈등 구도 속에 성도들은 '지금 여기서' 결단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번째 아담으로서 새로운 창조 질서를 회복하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땅 위에서, 옛사람의 모습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모습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실존적 모습이며, 이 과정에서 변화되며 성숙해 가는 삶을 살아갈 것을 요청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갈등을 부정적으로 뿐만 아니라 긍정적으로도 이해함으로써 갈등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수 자신이 이 땅에 오셔서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갖고 있던 율법적인 삶의 태도와 상반되는 가르침으로 변화를 촉구함으로써 많은 갈등을 야기 시켰던 것을 본다. 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눅 12:51)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화평의 주로 우리에게 찾아온 동시에 갈등하게 하는 분으로서 찾아오셨다. 만약 현상 유지만 하려고 한다면 갈등은 발생하지 않으며 저항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와 변혁을 시도할 때 갈등과 저항은 나타난다. 우리는 그것을 교회 역사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갈등은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써 나타난 현상과 증상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 자체를 죄라고 규정할 수 없고, 다만 그 갈등을 잘 처리하지 못할 때 갈등은 죄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의 구조는 여러 틀의 모습으로 성경에서 발견되어진다. 성령의 법과 육체의 법, 은혜와 율법, 억압과 해방, 매임과 자유함, 사랑과 공의 등의 주제들 속에 긴장과 갈등이 존재한다. 이런 심리내적 갈등은 바울의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1-24). 그러나 이런 갈등에서 온전함을 향해 나가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III. 갈등에 대한 목회적 치유 방안 위의 심리학적, 성경적 이해에서 보듯이, 무엇보다 목회자들은 갈등 자체를 죄로 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보아 회피하려고 하거나 억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갈등이 없는 삶을 살면 좋겠지만 성화의 삶을 사는 과정에서는 갈등이란 필수적이다. 신앙적인 갈등 없이 신앙이 성장하지 않고, 심리내적인 갈등 과정 없이 건강하며 균형 잡힌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힘들다. 이와 같이 갈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 내적으로 이미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이 내적인 힘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과 태도, 그리고 감정을 가지고 갈등 상황이나 대상을 두려워하며 회피하거나 도망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직면하여 해결하는 자신감을 의미한다.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안은 이런 내적 힘과 함께 영적 힘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갈등 상황 속에서 목회자들은 종종 무력감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힘을 공급받고 갈등을 해결하며 그 갈등을 통해 오히려 한 단계 더 성숙하며 변화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영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 이제 갈등에 대한 이런 기본적 전제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해 본다.

 

1. 목회자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부모들이 결혼 생활 속에서 어떤 식으로 갈등을 해소하려 했으며 그 갈등 속에서 자신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심리역동적인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

 

건강치 못한 부모들은 갈등 상황 속에서 위협과 달램, 언어폭력, 신체 폭력, 혹은 알코올 중독의 형태로 갈등을 진압하며 처리함으로써 건강한 학습 모델이 되어 주지 못한다. 그 같은 환경에서 성장한 목회자들은 그 아픔을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건강하게 갈등을 해결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갈등은 당사자들 간에 직접적으로 해결하도록 해야 하며 삼각 구도를 형성하거나 희생양을 만드는 것과 같은 역기능적인 대안을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같은 행동은 자기 패배적인 행동임을 인식하고 탈 학습할 필요가 있다. 성도들 중에도 이 같은 삶을 살아온 이들이 많기 때문에 특히 권위자에 대한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그 같은 모습을 보이는 목회자에게 반항적이 되거나 집단적으로 힘을 형성해서 반대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2. 인간을 보다 폭넓게 이해함으로써 남성과 여성의 차이, 노인과 젊은이의 사고 차이, 성격 유형의 차이, 관심의 차이, 철학의 차이, 신앙의 차이 등으로 인하여 불필요한 갈등을 겪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에 대한 보다 깊고 넓은 이해를 토대로 타인들을 보다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다양성 속에서도 통일성을 발견하고 보다 균형 잡힌 갈등 해결책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문화를 허락하셨다. 목회자는 자기중심적인 틀 속에서 모든 사람들을 자기의 틀 속에 끼워 맞추려는 자기애적 인격 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로부터 치유되어야 한다.

 

3. 경직되거나 불분명하지 않으면서도 유연성이 있는 경계선을 자신의 삶에서 그을 줄 알아야 한다.

 

거절해야 할 때는 거절할 수 있어야 내적인 갈등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으며, 결정해야할 때는 결정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상대적으로 갈등의 강도는 줄어든다. 가정생활에서도 가정의 울타리를 개방적이면서도 분명하게 칠 줄 알고, 부부간에도 보다 자유롭게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갖추게 될 때 갈등을 훨씬 쉽게 해결해 낼 수 있다.

 

4. 목회자 자신이 갖고 있는 권위관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성장한 가정환경이나 한국문화의 가부장적 구조의 권위를 성경적인 권위관으로 잘못 이해하고, 섬김에서 오는 권위적인(authoritative) 모습보다는 주장하는 태도에서 오는 권위주의적인(authoritarian) 모습은 보다 자유로운 인간관계와 보다 평등한 관계를 요청하는 젊은 세대들과 갈등을 야기 시킬 수 있으며 가정에서도 배우자나 자녀들과 갈등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리고 교회 안의 동역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억압적이며 고자세적(高姿勢的)인 태도를 유지하여 그들에게 수동-공격적 행동(passive-aggressive behaviors)을 유발시켜 갈등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

 

5.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 목회자는 자신의 삶에서 치유적인 경험을 하고 인격의 장애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

 

여러 부분에서 인격의 기능이 고장 나 있는 목회자는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할 수 있는 성숙한 사고력과 성숙한 감정능력, 성숙한 의지력, 그리고 성숙한 대인관계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갈등을 긍정적으로 이용할 줄 모르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회피하려고 하거나 무모하게 갈등을 해결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할 수 있는 목회자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갈등 해결의 좋은 학습 모델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경우, 자신의 삶에서만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침으로써 교회공동체가 전체적으로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실어주는 사역자가 될 수 있다.

 

6. 우리의 현실 상황은 이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갈등 해결에 실패도 있음을 수용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때로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으며 또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완벽하지 못한 목회적 삶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고 두려워하지 말고 직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보다 큰 뜻을 품고 있을 때 지엽적인 부분에서 갈등을 해결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게 된다.

 

7. 갈등 구도 속에서 역설적으로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때로는 원수 같은 자라 할지라도 그를 사랑해야 할 윤리적 의무가 목회자에게 주어져 있음을 인식하고 갈등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오리를 억지로 가자고 하는 이에게 자발적으로 십리를 동행해 주며, 겉옷을 달라고 하는 이에게 속옷까지 내어 주는" 희생적인 사랑이 결국에는 서로가 동등하게 사랑(equal regard)할 수 있게 되는 기독교적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8. 마지막으로, 갈등 상황 속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 어려움을 갖는 목회자들은 분노 표현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다시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분노의 치명적인 결과를 경고하는 말씀들도 많이 있지만, 예수 자신도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하셨다.

에베소서 4장 26-27절에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분노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지적하고 있다. 이 분노는 목회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분노를 쉽게 표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적절히 다룰 줄 아는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분노의 감정은 매우 흔할 뿐만 아니라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감정이다. 분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완벽하지 못한 세계에 살기 때문에 분노의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누구에게 표현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분노가 올바로 다루어지지 못할 경우, 그것은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들을 파괴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분노에 대해 이해해야 할 몇 가지 요소들이 있는데, 첫째는 남성 지배적인 생각이 분노를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인 목사들은 인간감정에 대한 민감성과 책임성, 이웃과의 협동성, 타인을 돌보는 능력, 친밀 관계에 대한 책임성의 가치를 중시하고 배울 기회가 없었다. 오히려 남성들에게 지나치게 개발된 가치들과 능력들은 경쟁, 정복, 다른 사람을 지배함, 합리성, 지배, 분석, 기술적인 통제력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가치 차이가 여성에 비해 남성들이 쉽게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성들의 가치와 능력들은 목사들로 하여금 성공의 쳇바퀴를 돌게 하며, 성취에 따라 좌우되는 자존감의 노예로 만들며, 스스로가 성공의 대상으로 전락해서 자기 몸으로부터 소외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목회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방어적 성생활로 성적으로 소외되기도 하고, 목사 특유의 경건성으로 인한 부드러움과 장난기 있는 순수한 측면의 가능성을 억압하며, 한 여자를 부속물과 지주대로 삼으려고 애쓰는 자기 정체성, 끊임없는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건강을 잃기도 한다. 남성적 경쟁에서 일어나는 힘의 잘못된 사용과 무력감, 상대방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소외감, 메마른 남성 지배적인 영성 등으로 목사 스스로의 전인성을 해치기도 하며, 결국은 자기도 모르는 '좌절과 적대감, 지배하려는 분노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또한 타인을 '지배하려는' 분노와 관계된 고질적인 적대감과 교만은 영적인 성장에 필요한 겸손의 태도와 대조가 된다. 바울은 크리스천들에게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도록"(엡 4:27) 분을 속히 풀 것을 권면하고 있다. 습관적으로 분을 내는 사람은 사탄의 시험에 빠질 위험이 더 크다.

둘째로, 분노를 억제하는 목회사역이 목사를 쉽게 탈진하게 만든다. 목사들은 업무 특성 때문에 분노와 갈등을 밖으로 표출해서는 안된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 두려움은 갈등의 해결보다는 회피를 가져오게 되며, 이러한 분노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목사들은 드디어 탈진(burn-out)에 빠져, 왜 분노하고 있는지, 왜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고, 권태롭고 의미 없는 목회를 반복적으로 계속하게 된다. 그리하여 목적과 정열과 삶과 일에 기쁨을 잃고 스트레스에 빠진 느낌을 갖는다. 이처럼 탈진으로 무기력과 분노에 빠진 목회자들을 한국교회 상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건전한 분노 처리로 갈등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에 대한 대처의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부인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왜 화가 나고 있는지를 인식해야 하며, 그 상황을 해석하게 한 자신의 사고형태를 다시 한 번 냉철하게 분석해 보아야 한다. 자신의 분노를 수용하고 경험하면, 우리는 그 분노를 통해 문제가 무엇인지, 또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 분노 저변에는 다른 감정들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노를 무조건 억제하거나 표출을 습관화하는 극단에서 벗어나, 건전한 분노 처리를 통해 성숙된 인격과 영성을 지닌 목회자, 건강한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목회 갈등들이 표면화될 때 그 초기에 갈등을 정직하고 진지하게 직면할 뿐 아니라, 그 갈등의 본질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파악하고 싸워나간다면, 이 갈등은 목회자를 성숙시켜 가는데 오히려 창조적인 힘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갈등의 문제를 솔직하고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즉 문제를 자신과의 관계에서 보고, 문제의 영적 본질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채 문제의 책임을 장로들이나 교인들에게 떠넘긴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목회상황이 나빠서 그런 것이며 프로그램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쉽게 결론을 내리거나, 모든 원인을 자학적으로 자신의 탓으로만 쉽게 돌리려고 한다면, 갈등은 창조적 힘을 가질 수 없다. 목회자는 목회의 본질과 그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눈에 보이는 현실을 뛰어넘는 여유를 갖고 있어야 한다. 영원한 가치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련 속에서 목회를 하지 않고, 세상적인 가치로 목회를 하게 될 때 점점 조급해지고 또 자꾸 조잡해지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심리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하여 목회자의 정신이 건강하게 될 때, 목회자의 영성도 더욱 깊어지고, 교회도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오늘날 수많은 문제를 갖고 있는 교인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먼저 갈등을 잘 극복할 수 있는 심리적, 영적 힘을 기르는 것이 현대 목회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제6편 개혁주의 목회신학 요약 (황성철저/총신대학교 출판부)

 

제1장 목회신학이란 무엇인가?

 

1. 목회신학의 정의

 

목회신학에 대한 첫 번째 정의는 초대 교회사를 연구한 실천신학자들인 영국의 린드세이(T. M. Lindsay), 스트리터(B. H. Streeter), 커크(K. E. Kirk)를 통해서 목회신학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는 “교회의 질서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초대교회의 본질과 형태를 연구하는데서 나왔다.

두 번째 정의는 목회신학을 “목회상담과 동일한 학문이라는 견해이다” 목회신학이 전문적인 학문과 기술로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돌보는 유익이 있다. 특히 훈련을 통한 상담의 기술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 목회자의 역할에 대한 균형 잡힌 성경 적인 견해는 아니다.

세 번째 정의는 목회신학을 “사역에 있어서의 목회경영과 지도력의 문제를 연구하는 하나의 학문으로 본다.” 엥스트롬(T. W. Engstrom)과 쉘러(L. Schaller)의 견해들이다. 이들의 견해는 오늘날의 교회들은 현대 경영학의 원리를 도입하여 교회에서 업무의 위임, 변화와 갈등의 관리, 성장을 위한 계획의 수립, 의사소통, 그룹역학 등 실제로 중요한 목회적 주제들을 다룬다. 그러나 성경은 경영학의 교과서가 아니다. 또한 현대적 의미에서 쓰여진 것도 아니다. 이러한 견해는 신학적인 기초가 부족하다.

네 번째는 시워드 힐트너(Seward Hiltner)의 목회신학의 정의이다.

그는 1958년에 발표한 [목회신학 서론(Preface to Pastoral Theology)]에서 “교회와 목사의 모든 기능들을 목양적 관점에서 관찰하여 하나의 신학적 질서를 갖고 있는 결론들을 이끌어내는 신학적 연구의 한 분야이다.” 라고 정의한다.

 힐트너의 이론중 몇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① 목회신학이 하나의 신학임을 확실히 한 점

② 신학과 목회적 경험 간의 밀접한 상호작용과 목회경험은 반드시 신학적 각성을 이끌어내야 한 점

③ 목회신학의 본질은 목회의 어느 특정한 기능이 아니라 전체 목회적 과업에 대한 인식과 그 과업이 수행되는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목양적 관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목회신학은 관찰자가 자신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협소한 관점에 제한에 묶인다. 신학에 대한 무관심이 제거된다. 목회신학은 기껏해야 임기웅변 식의 신학으로 전락하고 만다.

다섯째로, “목회신학이란 목사의 직무와 기능들을 다루는 신학의 한 갈래”로 보는 토마스 오덴(Thomas C. Oden)의 정의다. 그는 그의 저서 결론 부분에서 목사의 ‘은사들’을 포함시켰다. 그의 목회신학은 “성경이 증거하고, 전통을 통해 전달하며, 비판적인 추론을 거쳐 묵상하고, 개인적 사회적 체험에서 구체화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관한 숙고를 추구한다.” 그는 목회신학에서 목회사역을 위한 목회적 요소들인 목회자의 정체성, 소명과 안수, 예배, 설교, 성례, 심방, 위기목회 등에 완벽한 성경적인 토대를 제공한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제도적 목회에 너무 매여 있고, 하나는 목회사역의 기능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제한된 목회신학이 되었다.

여섯째로, 에드워드 투르나이젠(Edward Thurneysen)의 목회신학의 정의는 “목회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개개인에게 전달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 그는 목회의 현장을 강조하다보면 목회가 온갖 실용주의적 유혹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2. 목회와 신학과의 관계

 

한국교회는 세계 선교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급격한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목회상황이 목회자의 목회신학의 결핍 내지는 부재에서 비롯한다. 오늘날의 목회현장은 그릇된 목회사상인 실용주의 목회철학과 세속적 목회경영이라는 두 영향력이 깊숙이 침투해 있다. 오늘날 교회의 심각한 한 증상인 “목회 성공병”이다. 목회자들은 신학적인 검증과 공증도 없이 시장 지향적 사역에 열중합니다. 목회자들은 신학과 실천의 서로간의 관계를 거의 무시하거나 절연시킴으로 말미암아 목회현장에는 거의 처리할 수 없는 주요한 문제들, 고난, 부흥, 성공, 희생, 권위, 봉사, 야망 등이 생겨났다. 오늘의 목회현실은 신학적인 접근보다는 실용주의적인 접근에 이르렀다. 목회의 현장에서 목회자는 성도들의 삶 속에 “왜”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또는 “무엇을”이라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먼저 목회신학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에 가장 염려되는 신학이 목회방법론에 치우치고 있다. 목회자에게는 충성뿐이지 성공이라는 말은 없다.

   

제2장 목회신학의 성경적 근거

   

1. 구약

     

(1) 성부 하나님의 사역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인간의 목회자가 수행하는 모든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역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 목회자는 하나님의 사역을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원형과 그 기초로 삼아야한다(요 17장 참조). 인간 목회자는 사역의 출발점을 자신의 그 무엇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두어야 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에서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이미지는 세 가지 면에서 고찰한다.

첫째는 목자로서의 이미지이다(시 23편; 겔 34장)

 둘째는 부모로서의 이미지이다(아버지, 호 11:1; 말 1:6), (어머니, 사 49: 15)

 셋째로는 치유자의 하나님이다(출 15:26; 렘 30:17). 치유의 목적은 하나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체적이고도 내적인 완전함에 이르도록 하는데 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완전한 복지와 기쁨을 누리는데 있다.

 

(2) 모세의 사역

첫째로 모세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첫째 이유는 철저한 준비에 있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구원되어 애굽의 궁정에서 자랐다. 모세는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의 훈련소 생활을 했다. 하나님을 향한 소명의식은 하나님의 일군이 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일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둘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의 지속에 있었다.

셋째는 유한한 자기 능력의 한계를 인식한 점이다.

넷째로 하나님의 신실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에 있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과업수행에 대한 타협 없는 도전에 있다. 그에게도 사역자로서 긍정적인 면만 있지 않고 부정적인 면도 그에게 있었다.

첫째로는 모세의 소극성(출 3:11-44:17)이다.

둘째는 모세의 인간적 한계성이다.

 

(3) 사무엘의 사역

첫째로 그는 경건한 삶이었다.

둘째로 그의 경건한 삶이 기도로 표현되었다(삼상 12:23).

셋째로 투명하고 정직한 삶이었다.

그의 두드러진 사역의 특징은 하나는 그의 순회 사역이며 또 하나는 대각성 부흥집회이다.

 

(4) 다윗의 사역

첫째로 성전에 대한 사모함이었다.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셋째로 범죄 하였을 때에 회개한 사람이다.

그는 가정 목회는 실패했다. 목회자의 건강한 가정이 중요하다.

 

(5) 예레미야의 사역

첫째로 뚜렷한 소명의식.

둘째로 선지자의 선포내용에서 오늘의 목회자들이 전할 메시지를 잘 알고 있다.

셋째로 고난 받는 목회자 상을 보여준다.

 

(6) 느혜미야의 사역

첫째로 기도이다.

둘째는 동기부여이다.

셋째는 역할분담이다.

넷째는 개혁적 용기이다.

 

(7) 호세아의 사역

첫째로 목회지의 선택.

둘째는 삶을 통한 모범.

셋째는 자신의 신학을 가장을 통해서 표현한 가정 사역자.

넷째로 끊임없는 용서와 사랑의 목회.

다섯째로 진정한 문화 사역자.

 

(8) 하박국의 사역

자신의 지식, 힘, 실력, 지위, 명예, 돈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면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삶이 바로 의인의 삶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9) 아모스의 사역

첫째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담대히 선포했다.

둘째로 백성들을 위한 사랑의 중보기도를 했다.

셋째로 그는 국제사회에서 신의를 저버린 이방나라에 대해 심판을 선언했다. 아모스의 목회신학은 목민 신학이다. 그는 이방나라의 인권 유린에 대한 아모스의 목회적 관심은 우리의 목회적인 관심과는 비교가 된다.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책망하며 심판을 외쳐야 한다.

 

2. 공관복음과 사도행전

 

(1) 마태복음

초대 교회에서 가장 대중적인 복음서이며 ‘교회의 복음서’로 특징지어져 왔다.

첫째로 가르침의 목회관심이다.

산상수훈을 포함한 예수의 가르침들이 마태복음에서는 교회가 당면하고 있었던 교회적 상황은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또 하나는 기독교적 교제를 나누는 ‘제자들’과 교회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 교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무리’ 들 사이에 혼합된 교회이며 또한 교인들 간에 가치관이 혼동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마태의 교회는 정체성을 상실한 교회이다. 이에 대하여 마태는 첫째로 교훈을 통해서 기독교인들의 존재근거와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한다. 둘째로 교회의 당면한 가장 큰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율법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셋째로 핍박을 염두에 두고 제기되는 문제는 예수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필요성이다. 넷째로 제자도의 본질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제자들의 공동체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징계의 문제에 대하여 “구속적 출교”를 해야 한다. 다섯째로 특별히 교회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정신적인 자세에 관심을 갖고 있다.

 

(2) 마가복음

로마에 있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의 위급한 상황에 대한 ‘목회적 반응’이다.

첫째로 마가는 제자의 삶은 희생이 동반되는 삶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미리 말씀하시고 또한 그의 삶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셨다.

둘째로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는 달리 보다 뚜렷한 주제의식을 갖고 예수의 생애를 보도하고 있다. 예수의 인성은 종으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예수의 모습은 섬기는 종, 고난 받는 종, 승리의 종으로 나눈다. 이 세 모습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역의 목적에 일치한다.

셋째로, 선교에 대한 강조를 보여준다. 예수의 삶처럼 종으로서의 예수를 제시하면서 신자들은 이 예수를 끝까지 본받아야 할 것을 제시했다.

 

(3) 누가복음-사도행전

첫째로 누가의 목회적인 관심에 대한 기록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 선교적인 관점에서 기록했다.

둘째로 두 책이 예수의 탄생과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언이다.

셋째로 예수 사역의 계속성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누가의 교회론은 첫째로 ‘선교하는 공동체’라는 관점이다. 둘째는 ‘하나 된 공동체’이다. 누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회는 ‘분열 안에서도 삶으로 일치 된 교회’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여러 문제들을 신앙으로 극복한 것이다. 어떤 분열도 하나 된 교회를 깰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한국교회는 분열을 거듭한 교회로 보고 한국교회의 특성이 제도나 지위가 중요하고 맡은 역할이 중요한데, 바로 교회나 교단의 영역이 중요한 실정이다. 교회의 일치점은 ‘선교하는 교회’이였기에 하나가 되었다고 본다. 선교하는 교회로써의 역동성, 복음의 역동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 됨의 기초는 선교에 있다.

누가의 목회방법을 살피면 단지 예수의 사역과 교회의 성장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고 그것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분명한 교훈을 이끌어 내지도 않고, 명백한 본보기를 제시하지 않았다.

둘째로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와는 달리 다양한 계층들을 목회 대상자로 취급했다. 목회자는 모든 이들의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도 사람을 차별하여 부르시지 않았다.

셋째로 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이후 사도들과 초대 교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본 것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삶이었다.

넷째로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삶인 선교와 기적의 역사와 함께, 세례, 예배, 교제의 중요성도 역시 가르쳐준다.

결론적으로 초대 교회는 고도로 조직화 된 구조보다는 인격적인 관계들로 구성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로운 영역과 새로운 상황으로 이동시키심에 따라 그것에 맞춰서 적응하여 갔던 자유롭고 자발적인 선교 공동체로 이해한다.

다섯째로 누가복음은 총체적인 목회신학의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복음 전도적이고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문서이다. 또한 목회적인 문서이다.

 

3. 요한 문헌

 

(1) 요한은 사랑의 목회자이다.

그의 목회신학을 알아보기 위한 배경을 살펴보자.

첫째로 요한은 디아스포라들에게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임을 밝히는 데 있다.

둘째로 기독교의 급격한 성장과 교회 내의 여러 문제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겪는 갈등들과 박해들에 대한 변론이다.

셋째로 그리스도를 목격했던 인물들이 점차 사라진 상황에서 유대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이러한 목회적 상황에 대한 요한의 대답은 기독론적이다.

이외에도 요한복음서에는 몇 가지 목회적 교훈들이 있다. 하나는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신자들의 믿음을 유지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결점을 두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첫째 방법은 원(原) 목격자들의 증거의 신빙성을 강조한다. 진리인 말씀으로 성육신의 사건이다.

둘째는 성령의 계속적인 내주를 강조했다. 요한은 민감한 목회자 임과 동시에 위대한 복음 전도자임이 입증되었다.

 

(2) 요한복음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첫째로 ‘이상적인 목자 상’의 제시이다(요 10:1-21)에서 비유로 설명했다.

둘째는 양떼와 참 목자와의 친밀한 관계이다.

셋째는 보편주의적 강조(요 10:16) 이다.

넷째로 양들을 위한 생명을 건 희생이다. 목회자는 슈퍼스타가 아니다. 목자이며 종이다. 교회 지도자의 특징은 섬김에 있다.

다섯째로, 요한복음 17장에서 ‘대제사장의 기도’처럼 기도의 사역이다.

여섯째로, 요한복음 21:15-23에서 목회자의 재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곱째로,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목회사역을 보여준다.

 

(3) 요한서신

첫 번째 서신은 목회적 가르침의 본보기이다. 

당시 1세기 교회가 직면한 주된 문제는 박해가 아니라 유혹이었다. 요한서신 어디에서도 교회가 박해를 받고 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즉, 요한공동체가 항거하는 문제는 기독교 신앙을 박멸하려는 사람들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서 온 내부적인 문제였다. 그것은 기독교를 지적 체제로 만들려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었으며, 당시의 지적인 동향과 조류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과 철학사상으로 기독교를 설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또한 기독교도 세속의 철학이나 시대사조에 합치시켜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요한서신에 등장하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은 교회의 내부에 있었다. 곧 나가버린 사람들이다(요일 2:19). 그들이 교회를 떠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기들의 가르침을 교회 내에 퍼뜨리려 했으며, 교인을 참 신앙에서 미혹하려고 노력하였다(요일 2:26). 또한 그들은 스스로를 선지자라고 주장할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요일 4:1).

요한은 이들이 교회의 신앙과 삶을 위협하는 최대의 암적 요소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들에게 대응하기 위해 서신을 기록했다.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회적 관심을 보인다. 그는 자신의 영적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넘치는 사랑으로 이 편지를 쓴다. 서신을 통해 교회 안에 나타난 거짓 교사들을 경고하고 나아가 적극적인 목적으로써 거짓 교사들의 유혹으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그들을 참된 신앙과 생활 가운데 견고하게 세우기 위한 목회적인 목적을 충실히 이행한다.

 

(4) 요한계시록

목회적 상황은 네 가지로 살피고 있다.

첫째 과거의 강렬한 핍박보다는 이제는 산발적인 핍박이 있지만 오히려 영적인 타락의 상태에 놓여있다.

둘째 유대교와의 계속적인 심각한 관계에 놓여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했다.

셋째로 교회 안에 거짓 교훈의 유입이었다.

넷째로 이교(異敎) 사회와의 타협을 시도하려는 노력의 증대 속에 “민간의식과 이교적 사회관습들에 대해 과연 그처럼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요한의 대답은 영적인 하락을 막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격려할 뿐만 아니라 배교를 방지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계시록의 목회신학은 요한의 이전 책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기독론적이다. 이 책의 기독론적 목회신학은 요한이 환상가운데 보게 된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로부터 시작된다(1:9-18). 계시록은 초대 교회의 공동생활의 구조에 대해 명시적으로는 거의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지도력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모든 신자들이 왕과 제사장들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서 기인하기 때문일 것이다(1:5, 5:10, 20:6).

 

4. 바울서신

 

바울 서신은 기록 동기가 교회들의 목회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 어느 성경에서보다 실천과 교리와의 관계, 즉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 진리와의 관계에서 보여준다.

 

(1) 바울의 자기이해-사도직 논쟁

바울의 권위는 그의 삶과 사역이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그리고 그리스도와 거의 같은 겸손과 죽음,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부활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바울의 사도권 권위에 대한 주장은 거듭되어진다.

 

(2) 바울의 자기이해-목회자적 관점에서

첫째로 바울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인식했다.

둘째로 바울은 자신을 종, 일군, 청지기로서 이해했다.

셋째로 자신을 부모로 이해했다.

넷째로 자신을 교사로 인식했다. 교육목회는 물론 하나의 힘든 목회 패러다임이다. 하지만 이것은 목회자 자신에게 가장 유익할 뿐만 아니라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목회임에는 틀림이 없다.

 

(3) 사역의 본질

목회 초기에 바울은 목회자란 진리에 확고하게 헌신하며, 오래 참는 온유한 교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자의 삶이 더욱 심오하며 복잡다단한 목회상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첫째로 주의 종은 언제나 칭찬과 존귀를 받을 수만은 없고 진리는 도전을 받는다.

둘째로 고린도후서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능력과 연약함 사이에서 자신의 연약함이 참된 신임장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과 함께 계속해서 자신의 정직성을 보여주려는 진지한 면을 갖고 있다.

 

(4) 사역의 목적과 목표

바울은 골 1:28에서 사역의 목적을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영적인 회심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원했다. 그의 목표는 개인적이고 공동적이며 사회적인 거룩함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5) 사역의 동기

첫째로 하나님의 부르심.

둘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소망.

셋째로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한 인식이었다.

 

(6) 사역의 전략과 전술

첫째로 가능한 모든 곳에서 긍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고전 1:4-9, 11:2).

  둘째로 바울은 실천적인 것을 교리 적인 것에 항상 주의 깊게 관련시켰다. 셋째로 교회 일을 하는데 회중들에게 가급적 자주권을 많이 주려고 했다. 바울의 목회전략은 격려, 가능성 부여, 설명, 본보기, 권고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과 봉사에서 성숙하도록 힘썼다.

 

(7) 사역에 있어서의 권위문제

첫째로 복음에 관한 한에서만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로 부모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했다면, 그는 자녀들의 유익을 위한 권위를 가졌다. 그는 실제로 목회자로서 영적인 존경을 받지 않는다면 자격의 상실로 보았다.

 

(8) 사도행전 20:17-36에 나타난 바울의 목회관

첫째로 교인들을 사랑하는 목회적 마음이다.

둘째로 자신의 삶에 대한 투명성이다.

셋째로 목회에서 오는 유혹의 극복이다.

넷째로 하나님 중심의 메시지이다.

다섯째는 목회자의 우선순위에 대한 이해로써 “온 양떼를 위해서”이다.

여섯째로 공동 목회에 관심이다.  

 

5. 목회서신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실제적인 목회사역을 언급하고 있으며, 교회의 목회사역에 관한 원리들과 자질에 관하여 오늘날에도 변함없는 진리들을 실제적으로 교훈하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 말씀(성경) 중심의 사역이었다.

둘째로 그리스도교 정통교리를 수호하는 사역이었다.

셋째로 영적인 은사와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행하는 사역이었다.

넷째로 경건한 사역이었다.

다섯째로 가정을 중시하는 사역이었다.

 

6. 공동서신

 

(1) 히브리서

목회방법을 첫 번째로 간헐적인 권면이다(히 13:22).

둘째로 영적인 길에 대한 분명한 경고(2:2-3, 6:1-8).

셋째로 부드러운 격려와 격려가 되는 많은 본보기들의 제시(히 11:1-12:1) 목회적 방법 가운데 적용인데 사랑과 손님 대접, 수감자와 결혼, 돈에 대한 문제(13:1-6).

 

(2) 야고보서

목회적 전략으로써 첫째로 위선(1:21-27, 2:14-16).

둘째 부와 가난에 대한 교회 안에서의 편견(1:9-11, 2:1-13, 4:13-15).

셋째로 언행일치가 없는 선생들(3:1-12).

넷째로 성도간의 형편없는 교제였다(3:13-18, 4:11-12).

다섯째는 응답되지 않는 기도(4:1-12).

여섯째 고난(5:7-12).

일곱째로, 질병의 시험(5:13-20). 야고보서는 실용주의 목회철학과 세속적 목회경영의 현실에서 검증하는 중요한 책이다.

 

(3) 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는 목회적 정신을 담고 있는 책으로써 목회의 책임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다. 베드로전서의 독자들의 상황을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불같은 핍박을 당하고 있다.

둘째로 이제 곧 세례를 받아야 할 초 신자들이다.

셋째로 사회적 및 경제적인 이방인들로서 이 세상에서 고향이 없기 때문에 영적인 고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첫째로 신 중심적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말한 후에는 죽음에 따르는 ‘영광’을 강조한다(1:11). 셋째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목자장’으로 본다(2:25, 5:4). 목자장의 모습에 따라서 자원함과 즐거운 마음으로, 겸손함으로 섬긴다.

 

제3장 목회신학의 역사적 개관

 

1. 초기 기독교시대

 

(1) 사도이후시대

초기 문서인 디다케(The Didache)는 순회교사들이 참 교사인지를 가리는 지침을 규정하고 있다.

첫째로 3일 이상 머물러 있으면 수상이 여기라.

둘째로 순회교사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의 예언의 타당성을 확인한다.

셋째로 돈을 요구하면 사기꾼으로 알고 추방해야 한다.

초대교회에서 목회적 역할의 진정한 발전은 칼타고와 로마에서 일어났다. 칼타고에서 키프리안(약 200-258년)은 데시안 황제가 박해를 하고 그에 따라 교회가 분리된 혼란스러운 때에 목회를 했다. 그는 교회의 연합과 감독이 가지고 있는 성직 특권주의적 권위에 대한 가르침과 이단을 다시 세례 해야 한다. 그는 교인들이 기도하도록 촉구하며 실제적인 구호조직을 만들어서 기금을 조성하고 희생자들을 간호했으며 사망자들은 모두 매장해주었다. 목양의 모본을 보이는 사역이었다.

 

(2) 콘스탄틴 이후 시대

①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4-407)

안디옥에서 출생하고 능변의 설교가로서 영향력이 있는 설교자이었다. 그는 398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되었으며,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영성과 외교적 고지식함 때문에 수많은 불화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서 그는 주교직에서 면직 당하고 말았다. 그는 목사를 왕과 대비시키며 목사의 직무는 군주의 직무를 능가한다고 주장했다. 후에 그는 감독을 택하는데 필요한 주의 사상을 군사적 고관이나 상선의 선장을 뽑을 때의 주의사항과 비교하기도 했다. 그의 목회적 치유 방법은 강력한 말씀의 적용에 두었다. 그러므로 모든 목사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신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려는 야망을 지녀야 하며, 그렇게 해야지만 목사가 효과적으로 사역을 할 수 있다. 그는 설교는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고 설교자가 되는 것은 고생길로 접어드는 길이라 했다. 설교에는 항상 주의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 어떤 목회자도 설교에서 면제될 수 없다. 그는 강단에서 천부적인 능력을 가진 목회자들은 더욱 이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써야 한다. 이것이 목사의 시험하는 표준이다. 그는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칭찬이나 비난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지 말라. 회중들의 기호에 맞추는 설교는 설교자를 파멸케 한다. 그는 목회사역에서 여자들로 말미암는 유혹과 명예를 얻으려는 시험과 재물에 관심을 경계하며 “성직자의 영혼은 태양광선 자체보다도 더 순수해야 한다.”

② 암브로스(Ambrose, 399-397)

그는 귀족적인 로마인의 특성을 가진 탁월한 설교자이며 행정가이다. 그는 목회자의 미덕으로 미덕적인 지혜, 정의, 꿋꿋함, 절제에다가 소망, 사랑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미덕을 추가했다. 그는 엘리야, 나단, 예레미야의 예를 들어 불의와 죄악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는 것은 극도로 중대한 직무태만으로 보았다.

③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첫째로 검소한 모범적인 생활자이었다.

둘째 포괄적인 목회이었다.

셋째로 그의 목회의 특징은 신실함이다.

넷째로 설교 사역이었다.

그의 설교방식은 강해 설교이다. 성경본문이 그의 설교의 주제와 방향을 결정했다. 성경은 설교의 충분한 교과서이었다. 설교의 삼중 목적이 설명, 교화, 설득이다. 뛰어난 목회신학자이다. 그의 하나님의 도성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의 경험, 자신의 갈등과 사람들의 필요 사이에 통합시키려는 역작이다.

④ 그레고리 대제(Gregory the Great, 540-604)

로마의 최후의 교부이며, 중세 최초의 교황이었던 그레고리 대제는 탁월한 도덕 신학자인 동시에 능숙한 목회자였다. 그는 고대 교회와 중세 간 다리 역할을 한 가장 뛰어난 교황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레고리는 590년에 교황이 되었다. 그레고리 목회는 정치와 행정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목회관이었다. 특히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영성 개발에 힘을 기울이었다. 가난한 자를 사랑으로 도와주며, 아리우스 이단자들을 돌이키며, 도나티스주의자[이들이 처음 출발할 땐 ‘배교했던 주교의 안수는 효력이 없다.’라는 교회의 규율 문제로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편을 드는 국가와 황제에 대해 거부하며 싸우는 것으로 확대된다. 이들이 처음에는 국가의 반대를 피하다가 나중에는 반 정부운동으로 과격하게 확산된다.

그리하여 황제가 앞장서서 핍박함은 물론이고, 이들을 반대하는 세력도 함께 가세하여 괴롭히게 된다. 이들은 자기들만이 참 교회라는 영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다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력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당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성례전의 유효성 문제에 관한 너무 지나친 주장은 또 다른 반대 주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즉, 도나티스트와 논쟁을 한 어거스틴은, 성례전은 예전을 베푸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과는 무관하다고 하였다. 심지어 어거스틴은, 마귀의 편에 선 사람이 실시하는 성례전도 거룩하다고까지 하였다. 이 같은 주장이 다음에 오는 맹목적인 성례전주의로 카톨릭교회로 하여금 의식을 더 중요시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성례전을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할는지 모르나 예전의 유효성(efficacy)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어거스틴의 약점이었다.]들로 인한 교회의 분열을 치유함으로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본을 보였다. 특히, 그의 선교사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목회노력과 동시에 정치적이며 행정력이 함께 한 목회의 열매이었다. 그의 목회는 신학과 함께 언제나 실제적이었으며 삶과 연결된 실천적인 목회 관이었다.

 

2. 중세교회

 

목회사역에 있어서의 영적 영향력은 최악의 상태로 쇠퇴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충심에서 일어난 개혁을 위한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3. 종교개혁과 그 유산

 

(1)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루터는 목회자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올바르게 전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1515년 비텐베르그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설교사역을 시작했다. 아침 5-6시에는 바울서신을 중심으로, 9-10시에는 복음서를 중심으로, 오후에는 오전의 주제나 요리문답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요리문답, 수요일에는 마태복음,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사도의 서신, 토요일 밤에는 요한복음을 설교했다. 이 사역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한 그룹의 직분 자들이 함께 하였다. 루터의 설교는 교회력과 각 주일에 맞추어 오래 전부터 정해진 교훈에 따라 순서가 짜여졌다.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바울서신보다 주로 복음서를 중심으로 설교했는데, 남아있는 설교가 2,300편이 된다.

루터의 설교관을 살펴보자.

첫째로 본문에 입각해서 설교한다. 설교자는 본문에서 벗어나지 않고 앞에 있는 본문을 주목시켜서 청중을 이해시키고자 했다.

둘째로 설교는 평이 하고 단순했다.

셋째로 그는 훌륭한 설교자의 아홉 가지 자질과 덕을 말해준다.

① 조직적으로 가르치는 것, ② 항상 위트가 있는 것, ③ 능숙하게 말하는 것, ④ 목소리가 좋아야 하는 것, ⑤ 기억력이 좋아야 하는 것, ⑥ 언제 끝을 맺어야 할지 잘 아는 것, ⑦ 자신의 교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 ⑧ 몸과 피와 돈과 명예를 말씀에 내던지고 몰두해야 하는 것, ⑨ 모든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할 수 있어야 하는 것.

넷째로 하나님 면전에서 설교한다.

다섯째 설교는 인간이 하지만 그 역사는 하나님이 하신다.

그는 설교사역과 함께 루터는 회중들을 양육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 첫째로 예배의 갱신과 찬송을 통한 교육의 시도였다. 둘째로 요리문답을 통한 교육이었다. 셋째로 성경을 통한 교육이었다.

 

(2)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

그의 생애 대부분을 스트라스버그의 개혁을 위해 헌신하면서 존 칼빈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538년에 그의 저작인 영혼의 돌봄(On the Care of Souls)에 관하여는 교회와 교회의 사역, 그리고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경우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달고 있다. 이 책에서 마틴 부처는 교회를 그리스도인들 간의 친밀하고 깊은 영적인 교제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교제의 특징을 지녀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참된 교회는 연합하는 특징을 나타내야만 한다. 그는 교회에서는 설교자와 장로와 교사와 집사 네 가지 직분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책에서는 오직 목자인 교사들(장로들)과 구제금 대행자(집사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장로의 자질에서 회중들에게서 신뢰와 사랑을 받는 사람, 은사와 열심이 있는 사람, 거룩하고 스스로를 단련하는 사람, 자기 가족을 훈계할 수 있는 사람, 결혼한 사람으로 포함했다. 그는 대부분의 저술에서는 다섯 가지의 특정한 종류의 사람들을 사역하는 목회적 기술을 다루고 있다. 겔 34:16에 기초해서, 첫째로 죄나 잘못으로 인해 방황하는 사람들, 둘째 타락한 사람들, 셋째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죄에 빠진 사람들, 넷째교회 안에 있는 연약하고 병든 사람들, 다섯째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목사는 이들을 유지시키고 안정시켜야 한다고 마틴 부처는 주장했다.

마틴 부처의 목회적 관심은 공동체의 건강한 구성원뿐만 아니라, 연약한 사람들, 이교도들, 유대인들 심지어 터키 사람들까지 포함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목회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를 통해서 초대교회의 목회신학의 재발견과 개혁의 목회신학을 보여준다.

 

(3)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칼빈이 보는 목사의 직무는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훈계하며 권고하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견책하고, 성례를 거행하고, 장로들과 함께 교인들을 바로잡도록 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목사는 거룩한 생활과 일정한 교리기준에 따라 살아야 했으며 어느 경우에도 피해야 할 두 종류의 범죄 목록이 있었다.

첫째 목록은 이단, 분파, 형사죄, “춤 및 이와 유사한 방탕한 행동들”에 해당하면 추방을 당했으며, 둘째는 주로 목사의 직무를 게을리 하는 것과 헛된 문제들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것을 어기면 동역 자들로부터 훈계를 받았다. 둘째로 교사의 직무는 복음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진리에 충실한 사람들을 가르칠 책임이었고, 셋째로 장로의 직무는 회중들 가운데 선택된 고참 평신도로서 목사와 함께 징계를 시행하는 것이었다. 칼빈의 목회 관을 요약하면, 첫째로 성경을 강조했다. 둘째로 교리에 치중했다. 셋째로 성례의식에서 모든 비 복음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간소화시키면서 동시에 예배의 의식을 회중 화하려고 했다. 넷째로 교인들의 신앙훈련을 위한 권징의 시행에 힘쓴 것이었다. 다섯째로 교회의 정치문제에 있었다. 그의 교회 정책의 근본 착안점은 첫째로 하나님의 선택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되어야 하고, 둘째 사도적 초대교회의 본을 따라야 한다.

 

(4) 리챠드 박스터(Richard Baxer, 1615-1691)

첫째로 철저한 사명감이 있는 자이어야 한다.

둘째로 교만을 배척했다.

셋째로 겸손해서 독선적 의견을 버리고 욕망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목회자는 태만하지 말고 세속적인 일과 돈에 대하여 초연해야 한다.

박스터는 목회자의 의무와 그 대상을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로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회개하도록 전력하는 일이다.

둘째로 죄를 자각하고 목회자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담해 주는 일이었다(목회상담).

셋째로 진심으로 회심한 사람을 세워주는 일이었다(양육).

넷째로 가정지도, 다섯째로 환자심방, 여섯째로 무례하고 완고한 사람을 나무라고 훈계하는 일이었다(훈계). 일곱째로 교회의 성도들을 징계하는 일이었다. 박스터는 설교를 목회의 전부가 아니라 목회수단의 한 방편으로 말하지만 그것은 목회자의 삶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교자의 삶이 설교자의 설교보다 더 설득력 있는 설교이어야 한다는 점을 보았다. 박스터의 설교관은 한 마디로 “설교자의 삶이 곧 설교”이었다. 그는 “기교를 부리는 설교”를 거부했다. 그는 설교에 있어서 엄격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되어야 하고 진실 되고 바른 마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처럼 공손하게 설교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무력한 설교에 대하여 질타했다. 요리문답식 교육목회는 박스터에게 있어서 설교사역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그는  목사가 본질적으로 교사라고 생각했으며 가르치는 것을 위해 그의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가정목회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가정의 변화가 없이는 전반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제4장 현대 목회신학의 동향

   

1. 슐라이마허(F.D. Scheirermacher, 1768-1834) : 학문적 정립

그의 저서인 The Brief Outline of the Study of Theology에서 철학신학(변증학과 논증법)과 역사신학, 그리고 실천신학이다. 철학신학과 역사신학은 목회사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결정해 주는 학문이고, 실천신학은 그러한 개념들을 실천하는 법과 그러한 내용을 특정한 목회적 상황에 적용하도록 돕는 절차들을 정하는 법을 말해주는 학문이라 해석했다. 그의 실천신학에 끼친 공헌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2. 18, 19세기의 목회신학

 

18세기 계몽주의, 19세기 낭만주의를 유산으로 하여 인간 중심의 신학 내지는 내재주의 신학을 전개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감정, 인간의 가치, 인간의 역사, 인간의 종교철학, 인간의 현실성 속에 있다고 하여 신이라는 명제가 인간의 종교성의 차원, 인간의 계시경험, 종교심, 신체험, 신인식 등과 동일한 것으로 서술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론이 다른 신학적 주제에 가려 부록화 혹은 일식(日蝕)화 됐지만 20세기에 들어와 그것이 재발견되고 하나의 큰 신학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개신교에서는 18세기 중엽에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K. 하름스가 목회신학에 관한 책을 출판함으로써 ‘목회신학’이 하나의 학문으로써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미국에서는 1847년에 목회신학에 관한 책이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독일에서는 19세기에 들면서 목회신학을 크게 발전시켰는데, 특히 슐라이어마허는 “목회신학은 교회를 보존하고 완전하게 하는 학문의 방법”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쾌스터는 1827년에 목회신학을 의식학 · 영혼배려 · 설교학 · 교리문답 등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한국 교회에서는,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면서부터 선교사들이 신학교를 건립하고 신학도들에게 소명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목회학 · 설교학 · 목회상담학 · 예식서 · 헌법 · 교리문답서, 학습과 세례문답서 등 다양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하였다.

 

3. 20세기의 동향-비약적인 발전

 

20세기 목회신학에 새로운 변화는 목회신학과 심리학 간에 새로운 협력관계가 생겼다. 새로운 목회신학의 일인자로 등장한 시워드 힐트너(Seward Hiltner)는 미국 내에서의 변화를 첫째는 종교교육 운동의 활성화, 둘째는 심리학에서 임상연구의 발전, 셋째로 광범위한 사회적 주체들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 넷째로 보이슨(Anton T. Boisen)의 저술에 기인되었다. 20세기 목회신학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보이슨은 성직에 임상훈련(Clinical Traing)을 도입했다. 그는 심리학과 신학의 관계에서 수많은 창조적인 개념들을 제안했다. 그런 견해를 힐트너가 후에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2차 대전에 종군 목사들에 의해서 상담심리학이 크게 활용되었으며 특히, 칼 로저스(Carl Rogers) 영향이 급속히 퍼져갔다.

 

(1) 시워드 힐트너(Seward Hiltner)의 목회신학

그는 1958년 목회신학서설(Preface to Pastoral Theology)에서 목회신학의 정의를 “목양적 관점에서 교회와 목사의 모든 활동과 기능을 관찰하여 거기서 하나의 신학적인 지식이나 연구의 한 갈래 또는 분야이다. 그는 목회신학을 기능중심의 목양으로 본다. 그는 목회신학이 활동을 중심으로 한 신학이요, 신학적인 문제성에서 출발하여 신학적인 해답으로 끝을 맺는 학문인데 기독교의 목양의 문제를 내포하는 한도 내에서 목사와 교회의 활동과 행동을 검토하는 조직화된 신학이다. 그는 목양신학의 체계를 세 기능인 치유(Healing), 지탱(Sustaining), 인도(Guiding)가 바로 목회의 기능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폴 틸리히의 상관적인 접근법을 적용시켰다. 그의 목회신학은 목회상담이나 목회심리학을 의미한다. 목회신학을 상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는 특정한 인간 상황들 속에 개입하여 그 상황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모든 학문의 도움을 받아 신학적 통찰력을 끌어내려고 애썼다.

 

(2) 토마스 오덴(Thomas Oden)의 목회신학

그는 심리요법의 전체과정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특정한 가정들과 분리되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이 가정들은 기독교적이라는 것이다.

① 성육신, 공명, 자기 이해 ② 신적 조화, 치료적 조화, 자기 일치 ③ 용서, 수용, 자기 수용 ④ 은혜, 관계지속, 자기지시 ⑤ 신의 사랑, 무조건적이며 긍정적인 관심. 그는 심리학을 기독론이 없이 구원론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과 창조주와의 심오한 관계를 간과했다. 그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치료적인 권위’를 강조했다.

 

(3) 에드와드 투르나이젠(Eduard Thurneysen, 1888-1974)의 목회신학

1968년에 발간한 목회학원론(A Theology of Pastoral Care)에서 그는 목회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개개인에게 전달하는데 그 본질에 있다. 교회의 모든 정통 기능과 마찬가지로 목회도 교회에 주어진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목회의 본질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목회대화란 죄의 용서를 가져오는 ‘아무런 조건 없이’ 전달될 때에 비로소 효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의 목회신학은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에 기초로 해서 철저하게 문화적인 상황이나 사회적인 추이를 배타적인 입장에서 본다. 그래서 그의 목회학은 상황이나 변화와 상관없이 교회에서 개인이나 집단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담에 있어서 심리학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목회의 용서라는 문제를 불필요하게 제한을 두었다. 한편 힐트너는 미국적 경험주의와 목회임상적인 차원을 살려 심리학과 사회학 등을 주축으로 한 인문과학적 인접학문들과 두터운 제휴를 하면서 목회신학을 형성해 나갔다.

 

제5장 결 론 - 목회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1. 목회신학의 회고

 

우리 목회신학의 정체성을 재정립한다. 탁월한 목회사역의 원리, 교회사의 풍부한 경험과 전통, 수많은 영적인 유산들에서 자양분을 흡수하여 새로운 도전과 개척을 한다.

   

2. 자유에 대한 단상(斷想) - 현대 목회의 위기 분석

 

(1) 거룩한 야망인가? 타락한 욕망인가?

(2) 세속적 기업인가? 복음적인 교회인가?

(3) 실용주의인가? 성경적 진리인가?

(4) 경쟁의 상대인가? 복음의 동역자인가?

 

현대교회의 목회적 대안 - 십자가 위에 ‘성공’을 못 박으라!

(1) 마케팅의 원리, (2) 사회학의 원리, (3) 청지기 직무의 원리, (4) 경건의 원리, (5) 설교의 원리, 목회사역에서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3. 목회신학의 전망

 

(1) 21세기 목회신학의 실천적 지평분석

첫째로 인간이 세계를 인지하고 해석하는 틀이다.

둘째로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이다.

셋째로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계상이다. 21세기의 목회신학의 ‘삶의 자리’는 변화 속에도 진정한 목회의 정체성을 지켜가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는 사역의 총체성의 연구 발전을 요한다.

 

(2) 21세기 교회교육에 대한 제언

첫째로 지혜의 훈련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지속적인 양육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개별화된 교육, 넷째로 공동체 교육, 다섯째로 선교를 위한 교육이다.

 

(3) 21세기의 교회 미디어 활용에 대한 제언

첫째로 교회 안에 미디어 환경개선을 위한 심도 있는 논의를 요한다.

둘째로 미디어 환경개선을 위한 전략적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로 미디어 활용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넷째로 미디어 환경의 개선은 광범한 시너지 효과를 산출해야 한다.

다섯째로 교회의 미디어 환경개선에는 반드시 성경적인 목회철학이 반영되어야 한다.

 

(4) 21세기의 교회윤리에 대한 제언

첫째로 교회는 신앙과 윤리의 통합적 시각을 회복해야만 한다.

둘째로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절대가치를 선포해야 한다.

셋째로 교회는 그리스도 교인의 정체성에 관한 부단한 모델링 작업을 실시해야 한다.

넷째로 목회자 자신이 먼저 정직하고 투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

다섯째로 목회자 스스로 코이노니아(친교)의 본을 보여야 한다.

 

(5) 21세기의 교회봉사에 대한 제언

첫째로 교회가 확보하고 있는 사회봉사의 자원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둘째로 지역사회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셋째로 수혜자를 중심으로 하는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로 지역교회들과의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섯째로 국가의 사회복지 정책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천적 연계가 필요하다.

 

(6) 21세기의 교회 평신도 사역에 대한 제언

첫째 교회들은 ‘구비사역’(성도들이 사역의 일을 하도록 목회자가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충족될 수 있는 필요가 아니다. 다른 한편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인다운 정중한 태도로 목회자의 목을 조이면서 자리를 지켜 달라고 요구하기 쉽다.)에 눈을 떠야 한다.

각자의 은사대로 교회 사역에 배치하여 삶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둘째 지역교회는 평신도 훈련의 실제적 장(場)이 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훈련장인 교회는 첫째로,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는 장소이다. 둘째 인간관계를 배운다. 셋째 성도들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와 연결된다. 넷째 지역교회에는 그리스도 안에 성도들이 온전해지는데 필요한 모든 신령한 은사들이 존재한다. 다섯째 교회는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로써 구성된 하나님의 한 가족이다. 여섯째 교회의 훈련은 지식이 아니라 성숙한 성품이다. 일곱째 교인들의 성품 계발과 그들의 사역을 위해서 많은 시간과 투자가 필요하다.

 

 

 

 

 

 

 

 

 

 

 

 

 

 

 

 

 

 

 

 

제7편 목회자상에 관한 연구

 

제1장 서 론

 

A. 연구의 의의와 목적

 

한국교회에서 ‘목회자 상’은 다분히 구약적이며 특히 제사장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제단’, ‘제사’, ‘제물’ 이라는 말을 상징적인 의미로써가 아니라 예배용어로 사용하며, 또한 제사장적인 역할과 그 권위를 지나치게 내세우고 몇몇 목회자들은 제사장들이 했던 병자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일을 지나치게 행사함으로 거기에서 야기되는 부작용들을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목회자들이 가장 성별되어야 할 제사장의 모양은 있고, 사모하지만 실제생활에 있어서는 제사장적인 규범에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세속적이고 비성경적인 자태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중심, 성경중심의 목회를 하지 않은 결과라고 여겨진다. 물론 목회자의 인식이 나빠지는 데는 일반교인들의 목회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 일반 세상 사람들의 무시나 불 신앙적 비판, 질시도 그 원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목회자가 무엇보다도 ‘바람직한 목회자 상’ 을 정립한다는 것은 시기적절하며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람직한 목회자상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 답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성경에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치며 다스리는 영적목자와 감독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바람직한 목회자 상’ 이 무엇인가를 성경을 중심으로 밝혀보려는 것이다.

  성경에서 본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 상’ 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제시하신 목회자의 자격을 온전히 구비하고 그의 직무를 생명 바쳐 수행하며, 하나님이 주신 리더십을 끊임없이 개발하여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목회는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보아 온전히 구원 얻게 하는 것’ 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목회자가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로서의 소명 의식이 투철해야하고, 성경에 제시된 목회자의 자질들을 모두 갖추어야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기 위하여 목회자에게 필요한 리더십을 주셨다. 따라서 목회자는 이것을 잘 개발하므로 그의 목회사역은 더욱 성숙해지고 더 풍성한 열매들이 맺혀지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연구를 통해서 1) 목회자란 누구인가? 2) 목회자의 자격은 어떠한가? 3) 목회자의 직무와 수행방법은 어떠한가? 4) 목회자의 리더십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를 밝히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성경적인 참 목회자 상’ 은 ‘이것이다.’라고 분명히 제시하는 것이 본 연구의 의의와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연구방법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상을 신·구약 성경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종 - 지도자’ 로서의 목회자의 모범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섬기는 자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도 으뜸이 되고자하면 남의 종이 되며,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마 20:26-27).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써 희생적 죽음을 죽는 것이듯이(막 10:45), 그의 일생전체가 섬기는 종으로서의 삶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섬기는 종으로서의 삶이 그가 구세주임을 증거 하였으므로 그는 ‘종 - 지도자’ 로서의 좋은 본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서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종과 지도자로서의 여러 자질을 목회자의 자질로서 적용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종과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한 사람들을 대표적으로 두 사람만 택하라고 하면 구약에서는 모세와 신약에서는 바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종-지도자(Servant-Leader)’ 의 목회자상을 우리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종들이었다.

 

본 글은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서론에서는 연구의 의의와 목적 그리고 연구방법과 범위 등을 논하였다.  

제2장은 본 논문의 주제인 ‘목회자 상’ 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목회자가 누구인가를 고찰하되, 목회자의 어원적 의미와 성경적 의미 및 성경에 나타난 Minister의 종류와 특성을 다루었다.

 

제3장은 목회자의 자격을 밝히기 위해서 목회자의 소명과 증거에 대하여 그리고 신·구약성경에 나타난 목회자의 자질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제4장은 목회자의 직무를 설교자, 교사, 상담자, 행정가로 나누고 이 직무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4가지로 구분하여 신·구약을 중심으로 논하였다.

제5장은 목회자의 리더십 개발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하되, 이것을 목회자의 ‘내적 리더십’ 과 ‘외적 리더십’ 으로 분류하여 고찰 하였다.

 마지막 제6장은 전체의 연구결과를 종합 정리하고 제언함으로써 본 글의 결론을 삼았다.

 

제2장 목회자란 누구인가?

‘목회자’ 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먼저 목회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목회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목회라는 말은 목사(牧師)의 ‘牧’자와 교회(敎會)의 ‘會’ 자가 연결된 단어로써 ‘목회’ 는 목자가 양을 치는 것같이 목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신자들을 진리로 가르치며 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란 목자가 목장에서 양을 치고 기르며 다스리고 보살피듯이, (영적인 목자인 목회자가) 영혼의 목장인 교회에서 양 같은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지도력으로 설교하고 교육하고 지도하며, 보살피고 다스리고 양육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요 봉사자인 것이다.

 

Thomas C. Oden은 목회자가 목회의 정의를 내리려고 할 때에 만약 그리스도의 목회와 무관하게 정의한다면 이는 가지에서 잘려 말라버린 나무 잎과 같게 될 것이며(요 15:1-5)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될 것이라(마 15:14)고 하면서 목회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목회자는...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부름 받아 안수 식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하나님의 자기노출에 전적으로 응답 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양육하도록 따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된 하나의 구성원이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목회자란 말의 어원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A. 목회자의 어원적 의미

 

목회자란 말은 한국교회의 독특한 사용어로써 영어에는 Minister, Pastor, Bishop등 세 가지의 낱말이 있다. 그러면 이 낱말의 어원적 의미를 하나씩 구분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1. Minister

 

이 용어는 라틴어 Minuere에서 비롯된 것으로써 본래 그 말은 ‘가장 적다, 저하 시키다, 감소시키다, 일과(Lesson)' 등의 뜻을 나타내며 그 말이 동사 Ministrare로 쓰여서 ‘섬기는 것’(to serve), ‘종속 되어지는 것’(to be Subordinate)이란 뜻으로 통용되어 거기서 Minister라는 말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신약에서 세 가지의 다른 헬라어 어휘를 번역한 것인데 첫째는 διακονοs(Diakonos)로서 ‘노동자, 집사’ 뜻이 있고, 다음은λειτουργοs(Leitourgos)로서 ‘공공 봉사자, 일하는 사람’ 이라는 뜻이며, 그 다음은υπηρετηs(Huperetes)로서 ‘제 2인자, 보조자’ 란 의미가 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러한 말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1) Diakonos는 그 유래가 확실치 않다.

로버트슨(A. T. Robertson)은 그것을 Dia(통해서)와 Konis(먼지)의 합성어로, 봉사 하기위해 서두르느라고 먼지를 뒤집어쓰는 사람으로 본다.

테이어(Thayer)는 이를 거부하는데, 그는 이것을 Diako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Diako는 Dioko와 동류어인데, 과제나 목표를 추구하는데 근면하고 신속한 것을 암시하는 뜻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Diakonos를 주인격인 다른 사람의 명령을 이행하는 사람으로서 “일하는 봉사자를 대표한다.” 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이 말의 최종적인 의미는 사실상 똑같다. 예수는 명예나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봉사하는 일, 그 자체가 기쁨이기에 바로 그 기쁨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란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셨다(마 20:26). 같은 본문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교역을 말 하는데 Diakoneo라는 동사를 쓰셨다(마 20:28, 참조 5:8). 또한 이 말은 보통 ‘종’에 대해서도 씌어져있는 말로 ‘하인’(요 2:5,9), ‘섬기는 자’(마 20:26, 23:11; 막 9:35,10:43, 요 12:26) 등으로 쓰이고, 특별히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일군을 가리키는 말로 이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롬 16:1; 고후 3:6, 6:4, 11:15,23; 엡 3:7, 6:21; 골 1:7,23,25, 4:7; 딤전 4:6).

 

(2) Leitourgos는 신약성경에서 이 말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으로 쓰였다(롬 13:6, Diakonos로 롬 13:4). 또한 하늘의 성전에서 사제직을 맡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용 되었다(히 8:6, 1:7). 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 이라고 이 말을 한번 썼다(롬 15:16).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은 공중예배와 복음의 공중선포를 인도하는 두 가지 개념을 내포한다.

 

(3) Huperetes는 ‘아래’를 가리키는 헬라어 υπο(hupo)와 ‘노 젓는 사람’ 을 말하는 ερετηs(eretes)의 합성어로써, “아래의 노 젓는 사람” 을 뜻한다. 따라서 시중드는 종이나 하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다른 사람 밑에서 시중드는 하인이나 공무원에 적용되어 왔다(마 5:25, 26:58). 그리스도인 이라는 의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 으로서 자기와 아볼로를 가리키는데 썼다(고전 4:1). 더욱이 이 말속에는 종속의 의미가 들어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밑에 있는 일꾼들이거나 ‘양의 위대한 목자’ 이신 우리 주 예수 밑에 있는 하층 목자이다(히 13:20). 게다가 바울은 Huperetes를 “청지기:οικονομοs”(딛 1:7; 벧전 4:10), 또는 “하나님의 신비를 돌보는 사람”(House Manager)과 같은 말로도 사용했다.

  그러므로 Minister란 말 속에는 하나님의 종, 일군, 청지기 등으로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발견케 된다. 구약에서는 Minister란 말의 의미를 내포하는 용어 중에 폭넓게 쓰이고 있는 ‘Ebed’ 는 “남을 섬기고 쓰이는 일에 종사하는 자를 총칭” 하는 말로서 구약에 799회 씌어 있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사 4:8), 아브라함(창 26:24), 모세(출 14:31), 여호수아(수 24:29), 다윗(삼하 3:18; 왕상 3:6), 선지자 아히야(왕상 14:18), 선지자(왕하 9:7, 21:10), 욥(욥 1:8), 이사야(사 20:3), 스룹바벨(학 2:23), 바울(빌 1:1), 야고보(약 1:1), 베드로(벧후 1:1), 유다(유 1:1), 요한(계 1:1) 등 하나님의 일의 대행자로 택함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고 있다(시 105:42).

이처럼 Minister로서의 목회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본이 되어야함을 이 말의 어원적 고찰을 통하여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Minister로서의 목회자는 성찬을 집행하는 자 곧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교인들에게 상징적으로 공급하는 봉사자이기도 한 것이다.

 

2. Pastor

 

이 용어는 ‘보호한다.’(to Protect)는 의미의 어원에서 유래된 헬라어 ποιμην (Poimen)에서 번역한 말인데, 기본적으로 ‘목자’를 뜻한다. 또한 이 용어는 ποιμην과 같은 뜻인 라틴어 Pastores에서 유래 되었다. 그리고 이 용어는 신약에서 18회나 사용되었는데, 8회는 양의 ‘목자’와 관계되는 것으로(마 9:36, 25:32; 막 6:34; 눅 2:8,15,18,20; 요 10:2), 7회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마 26:31; 막 14:27; 요 10:11-2,14,16), 1회는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말하는 것으로(히 13:20), 또 한 번은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쓰였고(벧전 2:25), 이 용어가 ‘목사’ 로 번역되어 유일하게 쓰이는 것은 신약 전체에서 단 한번 나타나는 엡 4:11이다. 그러나 이 용어의 동사형인 ποιμαινω(Poimaino-포이마이노/‘목자로 된다’)는 신약에 11회가 나타나는데 4회는 다스린다는 뜻으로(눅 2:6; 계 2:17, 12:5, 19:15), 1회는 양을 친다는 말로(눅 17:17; 고전 9:17), 또한 한번은 자기의 양을 먹이시는 어린양으로(계 7:17), 그 외에는 유다서 1장 12절을 제외하고 “그리스도의 무리를 먹이시는 영적목자”(요 21:16; 행 20:28; 벧전 5:2)로 쓰이고 있다.

 

구약 성경에는 ‘목자’ 란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1) ‘ (Anshe Miqneh-안셰 미크네)’ : 이 말의 의미는 “가축의 사람들” 인데 “목축업으로 사는 자”(Keepers of Cattle)로 개역되어 있으며, 요셉이 친형제를 바로에게 소개할 때 사용한 표현이다(창 46:32,34).

 

(2) ‘ (Boqer-보케르)’ : 이 말은 ‘묻다, 구하다, 찾다’ 는 뜻의 ‘ (Baqar)’ 에서 유래된 것으로 ‘목자’((herdsman)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아모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그가 가졌던 직업을 가리키는 말로 단 한번 사용되었다 (암 7:14).

 

(3) ‘ (Noqed-노케드)’ : 이 말은 아카이어의 ‘Neqidu’ 에서 온 것으로 ‘양 사육자’ , ‘양 관리자’(감시인), ‘목자’ 등의 의미가 있다(왕하 3:4; 암1:1). 그리고 이 말은 ‘목자’(Shepherd)로 번역되어 아모스의 직업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고 또 한 번은 모압왕 메사에 대하여 “양을 치는 자”(Sheep Breeder)로 번역 되어있다.

 

(4) ‘ (Roeh-로에)’ : 이 말은 ‘돌보다, 기른다, 풀을 먹게 한다, 친다.’ 등의 뜻이 있는 동사 ‘(Raah)’ 의 분사인데 명사로써 취급되며, ‘목양자’를 의미한다. 이 말은 구약에 인용되어 있는데 한글 개역에는 ‘목자’ 로 거의 번역되어 75회나 쓰이고 있다. 또한 이 말은 형용적으로 지배자에 대하여 쓰였다(사 56:11; 렘 3:15; 겔 34:2; 슥10:3, 11:5, 13:7).

 

위를 정리하면 Pastor라는 말은 목자가 양을 치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양을 먹이고, 치고, 다스리시는 영혼의 큰 목자로서 지칭하는데 대부분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엡4:11에는 목사로 번역되어 유일하게 쓰이는데, 이를 통해서 목자로서 큰 목자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주님의 양 무리를 먹이고, 치고, 다스리는 목회를 하는 자임을 깨닫게 된다. 특히 예수께서 양들을 위해서 희생제물이 되어 그들을 구원 하시려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자기의 양을 먹이시는 분으로 묘사될 때에도 이 용어가 써졌음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계 7:17). 곧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 혹은 일군 및 청지기로서 뿐만 아니라 양을 보살피는 목자로서의 직능이 있으신 분이심을 알 수 있다.

 

3. Bishop

 

이 단어는 교회 곧 양떼를 인솔하여 다스리는 ‘감독’ 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헬라어인 ‘επισκοποs(Episkopos)’ 와 라틴어인 ‘Episcopus’ 의 대응어이다.

  70인 역은 이 말을 교회, 국가, 군대의 ‘감독권’, ‘감찰’, ‘조사’ (민 4:16, 31:14) 등의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고전적 헬라어에도 나타난다. 또한 이 단어는 사도시대 이후 교회의 성직의 지위에 있어서 성직자의 최고의 지도자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현재 감리교회에서는 최고의 지도자를 ‘감독’ 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 용어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보다는 교회를 다스리는 감독으로서의 목회자의 의미로 지칭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신약 성경에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벧전 2:25)” 라고 그리스도 자신에게 적용되어 쓰이고 있으며 바울서신에는 ‘장로(Presbuteres)’의 의미로 자주 언급된다. 이렇듯 ‘목회자’ 란 말을 영어의 Minister, Pastor, Bishop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이나 사용할 수 있고, 또 그 셋을 한꺼번에 사용해서 나타내는 삼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살펴본 바와 같이 Minister는 하나님의 종이요, 일꾼이며 봉사자인 동시에 ‘성찬을 집행하는 자를 의미’ 하는데 이처럼 목사는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으로 공급하는 신령한 봉사자라는 의미에서 ‘목회자’란 단어 속에는 얼마든지 Minister라는 말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Pastor는 ‘목자’ 라는 뜻인데 ‘목회자’ 는 목자가 양을 치는것 같이 목회자도 교회를 진리로 가르치며 기르는 영적인 목자인고로 Pastor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Bishop은 교회를 다스리는 감독으로서 ‘목회자’ 가 하는 일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니 ‘목회자’ 란 칭호는 우리만의 기쁨이요 자랑이라 하겠다.

   

4. 목자(牧者), 목양자(牧羊者)

 

직업으로 양떼를 지키고, 돌보는 사람이다.유목생활을 한 히브리인에게 있어서는 아주 친근미 깊었던 직업이다. 아벨이 목자였고(창 4:2),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그 아들들도 목자였다(창 13:1-7, 26:20, 37:12). 이 밖에도 신・구약에 목자에 대한 언급은 많이 있는데, 특히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목자(시 23:1; 사 40:11), 또는 백성의 지도자로 목양자로 그려져 있다(렘 23:4, 25:34; 겔 34:2,5, 8). 신약에서는 예수는 선한 목자(요 10장), 또한 제자들도 특히 목회상의 직무에 관하여 목자로서 불리고 있다(요 21:15; 엡 4:11). 목축생활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하는 전통은 이스라엘의 인심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의 직업으로서는 목축은 안일한 생활이 아니고, 그 노고는 야곱이 술회한 대로이다(창 31:40). 그들의 야한 옷은, 그 조야한 생활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가축의 떼는 대체로 소유자의 아들들에 의해 목축되었다(창 29:9; 출 2:16, 17; 삼상 17:15). 때로는 소유자 자신이 치는 경우도 있었으나, 부유한 사람은 고용자를 두어 목축케 했다(삼상 21:7; 요 10:12). 목축자는 새로운 목초지를 구하려 서늘한 달 밝은 밤에 원격의 땅으로 이동치 않으면 안 되는 일, 적의 불의의 내습에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등, 상당한 노고도 있었으나, 만사 호조일 때에는 충분히 휴식할 시간을 가지고 잡담이나 수면으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때로는 떼를 지켜보면서, 낮에는 나무그늘에서 쉬고, 묵상하며 밤에는 별과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 광대한 아름다움에 마음으로 경탄하기도 했다. 시편 23편은 이러한 목축 생활을 통하여 체험한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한 것이다. 여호와를 목자로 보고(시 74:1, 77:20, 78:52), 그 목자에게 인도되는 양인 작자의 행복을 노래한 가장 아름다운 시는 이런데서 온 것이다. 신뢰와 신실로 충만 된 마음에 아무런 걱정도 공포도 없이, 고요한 행복과 환희가 넘쳐있는 모습은 다윗의 작으로 보아 가장 어울리는 데가 있다.   예수는 선한목자로, 그에게 인도되는 자는 어떠한 고난 중에서도, 이런 행복에 관여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가축의 떼는 부단의 파수(감시)를 필요로 한다. 건조하고 서기(署氣) 심한 팔레스티나에서는, 가축에게 매일 이것을 우물가로 인도하여 물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창 24:20, 29:3, 8; 출 2:16). 그래서 물의 이용을 둘러싸고 분쟁이 생기는 일도 있었다(창 21:25, 26:20, 출 2:17). 야수(출 22:13; 삼 상17:34; 사 31:4; 암 3:12), 도적(창 31:39; 요 10:8)등의 내습에서 떼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목자는 길이 1.7m-2m, 그 한 끝이 굽은 지팡이를 가지고, 떼에서 떠난 양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썼다. 또 길이 75cm 정도의 한끝이 굵은, 절굿공이 같은 모양에, 못을 박은 곤봉을 가지고서, 떼에 달려드는 야수를 격퇴하는데 썼다. 때로는 멀리서부터의 맹수를 격퇴하기 위해 물 맷돌을 썼다(삼상 17:40, 50). 이것은 가죽, 동물의 힘줄, 털로 짠 끈인데, 중앙은 조금 폭이 넓고, 우묵해져 있는 것으로 거기에 매끄러운 돌(잔돌)을 놓고 끈의 양끝을 손에 잡고서, 머리 뒤에서 돌리다가, 끈의 한 끝을 빨리 놓아 돌을 날리게 한 것이다. 그 명중률은 높아, 병기로서도 이용되었다(삿 20:16). 맹수 및 약탈자에게서 떼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자는 때로 피를 흘리고, 생명을 버리는 일마저 있었다(요 10:11). 저녁에는 양을 동굴 혹은 돌담으로 만든 우리에 수용한다(민 32:16, 대하 32:28). 그리고 목자들은, 양 우리의 입구에 나뭇가지로 만든 오두막에 유숙한다(미 2:12). 떼를 우리에 넣는 때, 목자는 우리의 입구에 서서, 막대기(지팡이)로 양의 수를 조사한다(렘 33:13; 겔 20:37; 레 27:32). 야수에 찢긴 것 이외는, 잃은 양의 책임이 목자에게 책임 지워졌지 때문이다(출 22:10-13; 창 31:38, 39; 암 3:12). 동일지역의 목자들은, 종종 그들의 떼를 야간에 동일한 우리에 함께 넣어, 교대로 파수한다(눅 2:8). 아침이 되면 양은 각각의 목자에게 인도되어 목장으로 향한다. 양은 목자의 소리를 알고 있어, 이름을 부르면 이것을 분별한다(미 2:12, 요 10:2-5). 양떼의 양은, 각각 그 이름을 가지고 있어 보통은 꽃 또는 과실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목양견(牧羊犬 욥 30:1)은, 뒤떨어진 양(羊)을 몰면서 떼에 따라온다.양과 염소는 보통 함께 목장에서 방목된다. 염소는 초식 잘하는 가축이어서, 양이 먹다 남긴 목초라든가 나무의 싹을 먹기 때문에, 양과 염소는 공존이 쉬운 것이다. 양은 푸른 풀밭(목장)에서 풀을 먹고, 염소는 바위틈에 올라가 목초를 찾는 풍경도 보여 진다. 양과 염소는 최후의 심판에 있어서의 인류의 운명을 표현하기 위해 인용되어 있다(마 25:32). 양(羊)이 구원된 자를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양의 상업적 가치가, 염소보다도 낫기 때문이다. 특히 양이 염소보다도 유화하기 때문이라는 학자도 있다. 양떼는 비교적 적게(왕상 20:27) 50-200마리를 일군으로 했다. 훌륭한 기술을 가진 자는 200마리를 혼자서 목양하는 일도 있었으나, 보통은 보조자를 썼다.     목자와 양의 친밀한 관계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와의 이성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말로서 지배자를 [목자]로 불렀다(렘 23:1; 겔 34:2). 목자의 양에 대한 몰아적(沒我的)인 사랑, 양의 목자에 대한 절대의 신뢰와 순종, 서로의 친애감, 이들 목축생활의 체험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고도 관계의 설명으로써 심원한 의미를 가지기에 이르렀다(겔 34:8; 눅 15:3-7; 요 10:1-18).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라.’(요 21:15)는 초대교회에 있어서의 성직의 사명감,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함 열망(벧전 5:2-4)은 목축생활을 표현형식으로 하고, 그 내용을 다시 정신화 한 것이다.

 

B. 牧會者의 성경적 의미와 명칭

 

앞에서 우리는 목회자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목회자의 어원적 의미를 고찰해 보았다. 이런 목회자의 어원적 의미를 성경에서는 ‘목자와 양’ 의 관계 속에서 찾게 된다. 또한 목회자의 이런 직능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그의 양 무리를 보살피는데 필요한 것들이다. 따라서 목자와 양과의 관계는 상호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양’ 이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인간’ 을 비유해서 하는 말이다. 또한 양 무리는 교회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목자와 양’ 과의 관계성을 말할 때 요한복음 10장과 시편 23편을 빼 놓을 수가 없다.

먼저 요한복음 10장을 퀘일 감독(Bishop Quyle)이 “신약에 있는 목자 시편(The Shepherd Psalm)의 대헌장” 이라고 주장 했듯이 이 말씀은 하나님의 종 된 모든 목회자들의 모델로서 ‘선한 목자 상’ 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다음으로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이다. 그는 아버지의 양떼를 지키는 목자로서(삼상 16:11)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능력을 행하기도 했던(삼상 17:34-6), 하나님의 종이요,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다(삼하 2:1-4,11). 그런데 그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 라고 찬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카일과 델리취는 시편 23편을 “압살롬의 치하에서 반란이 있었던 때에 속하는 것” 이라고 했는데 그런 상황 하에서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다윗이 여호와를 찬양한 것은 과연 여호와께서는 양을 만족시켜 주시는 완전하신 목자이시며 그는 여호와께 속한 양으로서 선한 목자의 모든 은택을 받아 누리며 모든 면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모든 목회자의 모범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며 또한 그의 보살핌과 인도하심을 받는 행복한 양을 바라보게 된다.

 

더욱이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자기들만 위하고 양들을 괴롭히며 파멸의 길로 몰아넣었던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고 명령 하시면서(겔 34:1-10),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모아 좋은 꼴로 먹이고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리라” 고 말씀하셨다(겔 34:11-16). 여기서도 우리는 여호와께서 선한 목자이심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다윗이 여호와를 가리켜 ‘목자’ 라고 한 말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확증 되었는데, 그가 하신 말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 선한 목자는 양을 알고(요 10:14), 양과 함께 있으며(눅 22:27), 양 무리보다 앞서가며 인도하고(요 10:3-4), 양을 보호하고(요 10:10), 양들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한다(요10:11,15,17,18).

뿐만 아니라 선한 목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 하셨으며 그의 양들을 인도하는 목회자(牧會者) 들이 되게 하셨다. 특별히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요 21:15)”, “내 양을 치라(요 21:16)”, “내 양을 먹이라(요 21:17)”고 세 번이나 목양을 명령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목양을 명령받은 베드로는 ‘장로’ 들에게 다음과 같이 교훈 하였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하나님의 뜻을 쫓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고 세움을 받아 그의 양들을 목양 하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영혼의 목자임을 명심하여 선한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본받아 목회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바쳐 우리를 충성 되이 여겨 맡겨주신 그의 양 무리를 두렵고 떨리는 심정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다스리고 먹이고 보살피고 양육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성경적 목회자가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에서 목회자의 진정한 의미를 간략하게나마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목회자와 관련된 다른 많은 명칭들이 나타나 있는데, 이 명칭들을 목회자란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양떼를 보살피고 치리하는 목자와 감독으로 정리 할 수 있다. 또한 이 목회자는 교사, 전도자, 청지기로서의 사명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명칭들을 7가지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하는 자 이므로 그리스도의 종 혹은 그리스도의 일군(고전4:1; 고후3:6; 빌1:1).

(2) 주님의 양떼를 보살피는 자 이므로 목자(벧전 5:2-4).

(3) 그리스도의 교회와 교인들을 치리하는 자이므로 장로 혹은 감독(벧전 5:1-3; 딤전 3:1-2).

(4) 하나님께서 보낸 자 이므로 복음의 사신(使臣) 혹은 사자(계2 :1; 고후 5:20). 

(5) 교훈하고 가르치는 자 이므로 교사(딛 1:9; 딤전 2:7).  

(6) 복음을 전하는 자 이므로 전도자(딤후 4:5).  

(7) 주인의 위임을 받아 일하는 자이므로 청지기(눅 12:42; 딛 1:7; 벧전 4:10).

 

이상의 명칭들을 요약하면, 목회자란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양떼를 보살피고 치리하는 목자와 장로 혹은 감독이며, 또한 그는 교사, 전도자, 청지기 등의 사명이 있음을 알게 된다. 특히 목회자와 관련된 다른 명칭들 중에서 “청지기 : οικονομοs(오이코노모스)” 란 명칭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가 있는데, 그것은

1)수탁자로서의 청지기

2)수호자로서의 청지기

3)사도적 가르침의 전승자로서의 청지기

4)경영자로서의 청지기이다.

청지기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수탁자이다(고전 4:1). 또 청지기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움을 지키라” 는 수호자이다(딤후 4:8,13). 그리고 청지기는 사도바울이 선한 청지기로서 그가 가르친 바를 디모데가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사도적 가르침의 전승자’ 인 것이다(딤후 2:2). 더욱이 청지기는 예수님께서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집 종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의 복” 이 있으며,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고 하신 것처럼(눅 12:42,44), 청지기는 경영에 참여하여 효율적으로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적 창조주시며 만물의 소유주이시다(창 1:1; 시 24:1; 학 28:8; 요 1:3).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서 언젠가 결산할 날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고(롬 14:12), 몸, 시간, 봉사, 재물, 복음 등의 청지기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여야만 한다.

   

C. 성경에 나타난 Minister 의 종류와 특성

 

구약시대에 나타난 목회자상은 시편 23편에서 제시된 목자로서의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 선지자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복음서에 나타난 ‘종-지도자’ 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님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12제자들, 특히 베드로와 그 후 바울에게서 발견 할 수 있다. 그런데, Minister 곧 하나님의 종 혹은 일군으로서의 직분들을 보면 구약에서는 족장들, 민족 지도자들, 사사들, 왕들, 제사장들을 들 수 있고 신약에 와서는 사도들, 선지자들, 복음 전하는 자들, 목사와 교사를 들 수 있다.

 

1. 구약

 

구약의 Minister, 곧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적 직분들은 신약의 목회자와 동일시 할 수는 없으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의 일면들을 살피면서 목회자의 그 특성을 밝혀보려고 한다.

 

a. 족장들

하나님의 택한 자손에게 하나님의 종 또는 지도자로서 목자의 역할을 한 족장은 아브라함(창 18:19)과 요셉(창 37:2) 등을 들 수 있다. 족장들은 가정의 ‘재판관’(창21:, 22:, 27:)이며 하나님과 종족들 사이의 제사장으로서의 직권이 주어졌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고 예배했으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을 각기 자기 가문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의 하나님이 되시며, 하나님은 족장을 축복하시고 그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축복을 받게 된다(창 12:2-3, 18:18, 26:4, 28:14).

 

b. 민족의 지도자들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지도자로서 Minister의 역할을 한 지도자는 모세와 여호수아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출 3:1-10)와 여호수아(민 27:18-23; 수 1:1-9)를 그 백성들의 지도자요 목자로 세우셨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는 임무가 주어졌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c. 사사와 왕들

사사들은 하나님의 영이 주어지고, 그 힘에 채워져 활약한 사람들로서, 주위에 있는 나라들의 압박에 의한 위기에 처하여 군사적 지도를 한 군사 지도자이고, 평시에는 백성을 다스려 인도한 정치적 지도자이다. 그들의 기능은 첫째, 자기 민족을 원수들의 압박으로부터 영웅적으로 구원했다는 점과 둘째, 왕국을 세우지 않고 죽기까지 집정관으로서 지배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시편 2:10에 보면 이들은 왕과 대등한 권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호 7:7).

  다음으로 왕직은 제사장 직분, 선지자 직분과 아울러 봉사 직이었다. 그들은 백성을 다스리고 통치하며 관리하고 보호하는 사명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최초의 적극적인 왕인 다윗은 하나님의 권위와 지도력을 소유한 자로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태도와 뛰어난 통치에 의한 나라의 번영으로 인해, 그는 후에 이스라엘 왕의 이상상(理想像)으로 되었다.

 

d. 제사장, 선지자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회중이 바로 하나의 교회였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들을 지도하고 보호하는 것이 곧 목회였기 때문에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구약 시대에 나타난 목회자들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과 하나 되어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로서

그의 직무는

1)여호와 앞에 있는 성소와 재단에 쓰이는 일(민 16:40, 18:5),

2)하나님의 율법을 백성에게 가르치는 일(대하 15:3; 렘 18:18; 겔 7:26; 미 3:11),

3)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우림과 둠밈에 의해, 출 28:30; 스 2:63), 이 밖에도 소송을 취급하고 전쟁 시에는 양각 나팔을 불고 언약궤를 메는 일, 또는 문둥병자를 식별하는 일 등을 임무로 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직분을 행하게 하셨다(출 18:1).

또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외에 선지자들을 세워서 백성들을 돌보게 했다. 선지자(豫言者)들은 사람들을 회개의 길로 불러 모으고 구속 주의 강림을 선포함으로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다.

특히 이사야 선지자는 범죄 한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사 1:8). 또한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는 선지학교를 세우고 목회학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나단과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왕들(예 :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을 위한 특별 목회를 했다. 더욱이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께 잘못된 제사를 드리는 당시의 백성들의 그릇됨을 지적해 주고 올바른 제사를 드리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양들을 지도하게 하셨다(말 1:7-14).

 

2. 신약

 

신약 성경에 있는 Minister 의 종류는 첫째로 사도, 다음은 선지자, 셋째는 복음전하는 자, 넷째는 목사, 끝으로 교사라고 부른다(엡 4:11). 이 중에서 끝에 있는 둘만이 교회내의 평상직이요, 처음 셋은 주께서 그의 나라의 초창기에 세우셨고 필요에 따라 가끔 부활시키신다.

 

a. 사도들(Apostles)

사도란 명칭은 엄격하게 구분하면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선택된 열 두 제자와 사도바울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 교수가 지적하듯 사도는 바울을 도와서 복음에 수종 든 사도적인 사람들과 사도직의 은사와 은혜가 아울러 부여된 사람들까지도 일컬어진다. 그리하여 사도들은 보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바나바와 다른 동역 자들을 포괄하여 지칭한다.

사도들이 하는 일의 성격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것이다(마 28:19; 막 16:15). 주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자기를 본받아 그의 몸과 피의 거룩한 상징인 떡과 잔을 분배하라고 명령 하셨다(눅 22:19-20). 여기서 “사도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신성불가침의 영원한 법이 부과되었고, 이 법에 의해서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며 성례를 집행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우신 사도들은 온 세상에 복음의 교리를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며 그리스도의 나라를 건설하는 직분을 가진 자들이었다.

 

b. 선지자들(Prophets)

신약성경에서도 선지자들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교회의 덕을 위하여 말하는 은사는 크게 발전되어 졌었다. 그리고 그들은 때때로 비밀을 계시하거나 미래의 사건을 예견하는 도구로 쓰였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단지 예언자들로 불리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때때로 어떤 특별한 계시를 받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는 현재 없거나 아니면 옛날같이 흔히 볼 수 없다. 그들의 일은 교회에 있어서 다만 어떤 하나의 신분이지 ‘직분’은 아니었다. 여기서 비밀을 계시하는 것은 교회 안에 영속하고 있으며 이는 개혁교회에 의해서 명백하게 승인되어 졌다.

성경은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요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고 했다.

 

c. 복음 전하는 자들(Evangelists)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을 새로운 곳에 전하는데 그들을 선교사들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에서 첫 번째로 복음을 전한 빌립(행 8:6-14)은 가이사랴 해안을 따라 복음을 전했다(행 8:40). 그리고 그 다음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 에바브라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골 1:7, 4:12). 또한 마가, 디모데, 디도등 적은 수의 사람들이 이같이 복음전하는 자들로 알려 졌는데 그들은 사도들과 동행하면서 때론 특수선교를 위해 파송되기도 했으며 더욱이 그들은 말씀을 가르치고 세례도 주었으며 장로들을 세우고(딤전 5:22; 딛 1:5),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도 했던 것이다(딛 3:10). 이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움직였던 힘은 그들과 동행하시는 주님의 선물(은사)과 성령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d. 목사와 교사

목사와 교사는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직책들이다. 칼빈은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믿는다고 한다.

교사들은 제자훈련이나 성례집행이나 경고와 권면하는 일을 맡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 만을 맡았다. 이는 신자들 사이에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목사직은 이 모든 의무를 겸한다.

따라서 목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딛 1:9)”, 참된 경건을 가르치며 거룩한 성례를 위해서 사역하는 일을, 목사들은 각각 자기가 맡은 양떼를 위해서 일 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받은 직분이다.

이상과 같이 목회자란 누구인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목회자의 어원적 의미와 성경적 의미 그리고 이와 관련된 다른 명칭들을 살펴보았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목회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에게 맡겨진 주님의 양 무리를 목자와 감독의 위치에서 진리로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며 다스리는 직능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는 주님의 양떼를 보살피고 다스릴 때에 부득이 함이나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종-지도자로서의 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참된 목자의 본을 보여 주셨듯이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즐거운 뜻으로, 또는 ‘종’ 의 정신으로 항상 양 무리의 본이 되어 그들을 다스려야 하며, 더욱이 목회자는 양떼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는 이것이야 말로 성경에서 본 하나님의 종, 혹은 지도자로서 목회자 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성경의 지도자들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모두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 양떼를 다스리는 지도자로서 그들 위에 군림할 수 없고 하나님의 종의 위치에서 그들을 섬기고 자기의 몸을 그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바람직한 목회자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이러합니다. 그는 양떼를 섬기려하고 자기 몸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대속 물로 내어주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목회자상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막 10:45).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모든 지도자와 목회자들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으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상을 발견할 수 가 있고, 또한 그 모델을 제시할 수 가 있다고 본다.

 

다음으로 이런 목회자의 자격이 어떠한가를 성경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제3장 牧會者의 資格

 

목회자의 자격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라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목양해야 하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증과 사람들 앞에 인정받음이 없이는 도저히 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소명 받은 목회자들의 소명에 대한 확신과 증거가 잘 나타난다. 또한 소명 받은 목회자는 성경에 규정된 목회자의 자격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그가 목회자의 자격을 모두 갖출 때 그는 그의 사명을 틀림없이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이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성취되어지는 하나님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소명에 대하여 살펴보고자합니다.

   

A. 昭 命

 

소명에는 일반적 소명(General call)과 특별 소명(Specific call)으로 구분해 볼 수가 있는데 일반적 소명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을 부르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특별소명은 목회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 목회자의 소명을 말한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는가? 이 질문 앞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비록 그가 훌륭한 외적인 자질과 자격조건을 구비했다 해도 목회자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 직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닌 것이며, 또 타의에 의해서 억지로 하는 일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노력과 행동으로 훌륭한 자질과 자격요건을 고루 갖추는 일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따르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만일 소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목회자로서의 외적인 요건이 잘 갖추어졌다고 해서 목회자가 된다면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방해하거나 교회의 부흥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지식이나 세상의 무엇을 따라 목회를 하여, 참 목회자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존 C. 디쎈은 소명을 받지 못한 자들의 특성은, 그들의 사역을 하나의 직업으로 여기고 사람들의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을 지상 과업으로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무오성과 영감을 자주 부인할 뿐 아니라, 설교할 때에 설교문은 다른 사람들의 설교 집에서 취하며 성경은 단지 그들의 설교본문에 필요한 구절 들을 찾아내기 위해서만 인용하며 설교 사역에 자주 환멸을 느끼고, 그들의 수입에 낙심하며 그 사역을 떠나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에게(밝히 말씀 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1-23)는 공의로우신 선고를 내릴 것이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명을 무시하고 목회하는 자는 그분의 뜻을 무시하고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날에 받을 심판을 두려워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명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어야 하고 사람으로 부터 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으며, 또한 이 소명은 근본적으로 교회나 특별한 지명에 의해서 올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내적 감화에서 올 때 그러한 소명이야말로 ‘효과적인 소명’ 인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소명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으로 알아 그 소명에 기쁨으로 응답해야 될 것이다.

   

1. 일반적 昭命(어원적 고찰)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부르실 때 우선적으로 일반적 소명을 먼저 하시고 그 다음에 특별한 소명을 통하여 목회자로 세우신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 있는 특별한 소명을 받은 목회자들은 소명 받은 많은 성도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특별히 골라서 따로 뽑아 세우신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모든 신자들의 본이 되어야할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사도로 부르시는 일반적 소명에 모범적으로 응답하여야 한다. 그러면 잠시 소명이란 말의 어원적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昭命이란 말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본문에 20단어 이상 나와 있다. 그 중에서 주된 단어는 히브리어 동사 ‘카라’ 인데 이 용어는 자주 ‘부르다, 외치다’ 라는 일반적 의미로 쓰였고(삿 9:7; 사 6:4), 또한 ‘초대하다(삼상 16:3), 소환하다(삼하 1:15), 이름을 부르다(창 11:9)’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어 ‘카라’ 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칼레오:καλεω’ 인데, ‘부르다, 초대하다, 소환하다, 이름을 부르다.’ 라는 뜻이며, 또한 이 용어는 신약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사람을 부르시는 행동을 가리키는 특수한 의미로 쓰였다. 더욱이 이 용어는 사도의 직분 같은 특별한 직책으로서의 하나님의 부르심(롬 1:1), 선교(행 13:2, 16:2), 제사장직분(히 5:4) 등에 적용되어 사용되었다.

 

루이스 뻘콥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소명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것은 먼저 성부의 사역이다(고전 1:9; 살전 2:12; 벧전 5:10). 그러나 성부는 일들을 성자를 통해 수행 하신다. 따라서 이 소명은 역시 성자에게 돌려진다(마 11:28; 눅 5:38; 요7:37).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부르신다(마 10:20; 요 15:26; 행 5:31,32).

이처럼 일반적 소명은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나와서 그리스도께서 수행 하시는 사역인데,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 택한 자들을 부르신다.

칼빈은 “소명은 선택에 의존하며, 따라서 전적인 은혜의 사역이라” 고 했다. 즉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 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교회 안에서 내적인 확신과 증거를 나타내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서로 사귐을 갖게 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 소명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되어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몸(교회)에 의해 확증된 내적인 확신” 이라 정의 할 수 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일반적 소명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소명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서 그가 창조하신 자녀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시며, 성도의 이름으로 부르신다. 성경은 “내 아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 43:6,7) 고 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녀들을 부르시는 것이다(계 14:1; 눅 19:5; 요 11:43).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게 하시려는 것이다(벧전 1:15). 더욱이 하나님은 야곱(이스라엘)을 부르실 때에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사 43:1)라고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도의 이름을 부르신다.

  둘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주님을 섬기라는 부르심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소명은 십자가로의 소명이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의 소명이다. 하나님의 소명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 그의 멍에를 메고 그의 제자가 되어야만 한다(마 11:28-30). 주님의 멍에는 인류 구원을 위한 모든 고난을 의미하며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이 멍에의 최고봉이다. 그리스도께로 부름 받은 신자가 마땅히 주님과 함께 이 멍에를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메야함은 부활의 영광에 참예 하는 자가 되기 위함인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 짐은, 지는 자에게 무거운 것이 아니라 날수 있는 날개가 된다.” 고 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그리스도께로의 소명은 “십자가로의 소명” 이다. 또한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즉 우리는 주님의 멍에와 짐을 지고 그를 따르는 제자로 부름 받은 자이다. 그런즉 주님의 제자들은 과실을 많이 맺어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한다(요 15:8). 과실을 많이 맺으려면 썩는 밀알이 되어야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함이라”(막 10:45) 고 하셨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 하리라”(요 12:24-25) 고 말씀하셨다. 그러기에 주님의 제자 된 우리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쫓아야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으로 구원 얻는 자가 되어야한다(막 8:34,35).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름은 순교의 부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도록 부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셔서 그 영광의 보좌로부터 성령을 통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많은 선물(은사)를 주신다. 그 은사의 분량은 각 사람의 사역의 분량과 일치한다. 그런데 그 은사는 다양하나 그 은사를 주시는 성령님은 한 분이시다(엡 4:4).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은 “한 소망 안에서의 부르심” 인 것이다(엡 4:4하). 그러므로 우리에게 각양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엡 4:1,3,7). 더욱이 이 은사는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기에 그 은사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전 12:31, 14:1). 그리고 “몸”(교회)은 각 지체의 유기적인 상호 의존을 통해서 성장하며 또한 “각 마디를 통해서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엡 4:16)”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사를 나눔으로서 우리의 소명을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고 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며(살전 5:23; 고전1:9),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사를 힘입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섬기는 종으로서 응답하여야 한다. 그리할 때 그는 일반적 소명에 뒤따라오는 특별한 소명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2. 목회자의 특별 소명

 

특별소명은 일반적 소명 다음에 오는 사역에로의 소명인데, 목회자는 이 소명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셨다는 내적 확신과 외적 증거를 가지고 그의 직분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으며 또한 그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혹은 사도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의 직분을 주신 것이라고 했다(엡 4:7,11,12).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직분들은 한마디로 오늘날의 목회자의 다양한 기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다양한 기능을 가진 목회자는 자기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택하시고 또한 부르심으로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참된 목회자는 자기 자신을 과신하여 자기의 뜻대로 사역에 임할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에 의해서 소명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응답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목회자가 모든 그리스도인들 위에 군림하려 든다면 그는 결국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양 무리위에 군림하는 주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는 어떤 권력 자리도 마련되어있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는 분만이 보좌에 앉으셔서” 그의 권위로서 양 무리를 다스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웟치만니는 “하나님의 활동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며,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의 권위 위에 세워진다. 만물이 하나님의 권위를 통해서 창조되며, 우주의 모든 물리법칙이 하나님의 권위로 유지 된다” 고 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을 그의 권위의 능력으로 붙드시며(히 1:3), 이와 같은 하나님의 권위로서 목회자를 특별한 소명의 자리로 부르시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의 권위를 가장 으뜸으로 섬기는 목회자에게 위임하여 양 무리를 치고 다스리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목회자에게 주신 직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기능과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목회자를 부르실 때, “모든 믿는 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갖도록 그리고 십자가를 지도록” 부르시며, 또한 “사람들을 주님의 왕국으로 모으도록” 부르실 뿐만 아니라 이 부르심은 “전도자로서 혹은 목사와 교사로서 그의 위치를 특정 짓는 특별한 은사들에 의해 강화되게 하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목회자를 부르시는 특별한 소명은 “전적인 부르심” 인 것이다. 사도바울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 1:21)라고 말한 것처럼 이러한 소명을 받은 목회자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응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목회자의 특별한 봉사는 그가 받은 은사(선물)의 분량대로 충성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가 주님께 받은 은사(선물) 의 분량에 따라서 봉사하게 된다는 말이다(롬 12:3-8). 그러니까 “그가 받은 은사가 크면 클수록 그의 책임도 커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그가 받은 은사를 항상 불 일 듯하게 해야 한다(딤전 4:14; 딤후 1:6). 만약, “믿음의 헌신 없이 그리고 순종하는 생활이 없이 목회하는 자가 있다면 어느 누구도 그를 바람직한 목회자라 말할 수 없고 오히려 목회직을 일찌감치 떠나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할 것이며, 스펄전의 말을 빌린다면 “돌아가서 제 나름대로의 분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 옳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그가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그에게 무서운 화가임하고야 말 것이라는(고전 9:16,17; 골 1:25) 느낌이 있어야 한다. 또한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뼛속의 불과 같아야 할 것이다(렘 20:9).

 

이상과 같이 목회자의 특별한 소명은 분명하고 독특한 부르심이며,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부르심인 것이다. 그러면 계속해서 소명에 대한 증거에 대하여 고찰 하고자 한다.

  

B. 소명에 대한 증거

   

목회자는 하나님으로 부터 그 목양의 일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 할 때 사명감에 넘치는 목회자가 될 수 없고, 죽도록 충성하는 목회자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부르신 자의 부름을 의식하지 못 할 때 그에 대한 충성심이나 그를 부르신 목적을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처럼 목회자는 자기가 하나님으로 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후 4:1). 곽 안련 목사는 목사 되기에 합당한 부르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부르심은 반드시 하나님께로 온다.  

(2) 부르심은 직접 각 개인에게 온다.

(3) 객관적으로만이 아니라 주관적으로도 부르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4) 부르심은 안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로 부터의 소명을 받을 때에 개인적으로 부르심을 확신해야하며 그에 따른 증거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면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내적, 외적 증거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내적 증거

 

목회자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내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죤 칼빈은 목회자의 소명을 “외적소명”과 “내적소명” 으로 구분하여 설명 하였는데, 내적 소명은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아는 일이며 교회는 증인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그는 이 직책을 받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려는 소원 때문이라는 것은 우리의 속마음이 잘 증거한다.” 고 했다. 이와 같이 소명을 받은 목회자는 그 확신이 성령의 내적 운동 가운데서 틀림없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증거는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겸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길목에 있음을 가르쳐준다. 사람을 어둠에서 부터 빛으로, 영적인 죽음에서 삶으로 부르시는(마 11:28-9;요 6:4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 중에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 로 주시고(엡 4:11), 그들이 성장하고 봉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되게 하신다(엡 4:12-16). 더욱이 성령님께서는 온 양떼들 가운데서 목회자로 세우신 자들을 감독자로 삼아 교회를 치게 하셨다(행 20:28).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교역에 종사케 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적 확신을 가졌다(딤전 1:12). 더욱이 그는 주께서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 9:14; 민 18:8-20; 고전 9:1-19)고 명하셨다는 성경적인 원칙을 선포함으로서 영적인 봉사를 위해 물질적 추구를 떠나야함을 암시 하였는데, 이것은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내적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곧, 주님에 의해서 공급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목회자의 삶 자체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결과이며, 특히 성령의 개인적인 내적 체험은 “가장 숭고하고 축복받은 기독교 생활의 본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분명한 내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2.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외적 증거

 

목회자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내적 확신과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가시적인 신앙 공동체의 확증이 또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요구되는 은사와 자질들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그런데 주께서는 목회자의 소명을 주신 자들에게 우선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는 무기를 주셔서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파견 하실 때 그들에게 필요한 무기와 도구를 주셨는데, 그것은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口才)와 지혜”(눅 21:15)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되는”(막 16:16-8)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말 하는데(행 1:8; 눅 24:49),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사명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주시는 영적 은사와 천래적(天來的)으로 타고난 자질들이 과연 내게도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 그 외적증거를 인정받아야할 것이다.

   

a. 교회의 인정과 任命

주께서는 친히 목회자로 부르시고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신다(엡 4:11). 그러나 주께서는 교회를 통한 소명이라는 규율을 이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 하셨지만, 행 13:2에 보면 안디옥 교회가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께서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심으로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었던 것이다. 또한 맛디아를 선택 했을 때도(행 1:23) 두 사람을 세워 그 중 한 사람을 제비뽑게 했다. 이와 같이 “이 선택은 하늘의 명백한 확인을 얻었지만 조금도 교회 질서를 무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딤전 4:14에는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라고 했고, 딤후 1:6에는 “그러므로 내가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나게 하나니” 라고 하였으니 과연 하나님께서 그를 목회자로 부르셨다면 거의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강한 지지를 받으며 안수를 받게 될 것은 확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성령께서 그를 목회자로 세우셨고 또한 동일한 성령께서 교회 앞에 인정받고 임명 받도록 섭리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3.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성경적 증거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은 목회자들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부르셨지만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셨으므로 그들 자신이 분명히 알았다. 또한 소명 받은 목회자는 그 소명에 응답함으로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었는데, 그들 중에 때론 곁길로 피하려는 자들도 있었으나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 하였으며 명하지 아니 하였나니 그들이 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렘 23:32)” 고 하신 말씀을 보면, 목회자의 소명은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소명 받은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전 생애를 바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소명은 분명하고도 독특한 부르심인 것이다.

   

a. 구약에서 소명 받은 목회자들의 증거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소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 그러면 그들 중에서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이렇게 세 사람을 택하여 고찰하려고 한다.

 

(1) 모세의 증거

하나님은 모세를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2-4)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에는 이미 애굽에서 학문을 익히고 난 뒤 목회자의 과정을 밟고 있었으며, 세상의 아름다운 모든 문명을 버린 상태에 있는 그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이유는 그를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족속, 아모리족속, 브리스족속, 여부스족속의 지방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었다(출 3:8,10).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 그는 무려 5번이나 이유를 들면서 사양했다.

 

1) 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라고 겸손하게 사양하였다.

그가 일찍이 자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도우려고 했을 때에는 온전히 실패 하였었다(출 2:11-15). 그는 실패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겸손하게 사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나설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주기위하여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출 3:12)” 라고 하신다.

 

2) 모세는 아직도 용기를 얻지 못하고 또 하나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제기하는데, 그것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고 물을 때에 답변이 곤란하다는 것이다(출 3:13).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여 말씀 하신다(출 3:14,15).

 

3) 모세는 또 하나님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나타나지 아니 하셨다 하리이다”(출 4:1) 라고 했는데, 이는 모세가 아직도 자신을 가지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약점을 깊이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세 가지의 표적을 통해서 그의 신앙을 강화시키고, 그의 백성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게 하셨다.

 

4) 모세는 또 다시 말이 능치 못하다는 이유로 사양한다(출 4:10).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양하는 이유에 대하여 해결책을 말씀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입” 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니 모세의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시겠다는 것이다(출 4:11-2).

 

5) 모세는 이제는 아무 이유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사양한다(출 4:13). 하나님은 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다시 대책을 세워 주셨는데, 그것은 그의 형 ‘아론’ 을 그의 대언자로 세워주신 것이다(출 4:14-16). 그리고 모세에게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적을 행하라고 하셨다(출 4:17). 이렇듯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사양하는 모세에게 끝까지 사랑과 인내하심으로써 그가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 말씀하시고 표적을 보여 주신대로 모세와 함께하셨고 권능을 주셨으며, 모세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동안에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였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삶을 살았다.

   

(2) 이사야의 증거(사 6:)

이사야는 예언자들 중 가장 전형적인 예언자로 간주되어진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택하시고 선지자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사 6:8) 그때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자원하는 심령이 되어 응답하였다. 이 응답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의 가장 모범적인 답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면 그의 소명을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1) 神의식에 뒤따르는 罪의식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이사야는 주권자이시고 전능자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1-4절). 하나님을 본 것은 이사야로 하여금 예언자가 되게한 모든 것의 기초였다. 이 환상, 즉 이 하나님 의식은 곧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결과에로 다다르게 되는데 곧 죄의식이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사야는 하나님의 빛 안에서 자신위에 있는 빛을 보았고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데서 그의 생명과 그의 길을 보았다. 하나님 인식에 기초한 罪의식은 하나님의 예언자 즉 그리스도의 목회자들의 삶과 사역에 근본적인 것이다.

 

2) 罪의 고백 후에 따르는 罪 씻음(5:7)

이사야에게 있어서 죄를 의식하는 것은 바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장 죄를 고백하는 일에 그의 영혼을 쏟아 놓았다. 그는 부정한 입술에 관하여 그 자신이나 국가가 실패한 것을 알았다. 만군의 주인 되시고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환상이 전과 달리 이 사실들을 명백히 드러냈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는 것은 곧 죄 씻음을 받는 것이었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 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사 6:6,7).

이사야는 즉각적이고도 완전하며 확실하게 죄 씻음을 받은 것을 경험하였다. 하나님의 불이 단번에 그리고 철저히 그 일을 행하셨다. 이사야가 이렇게 죄 사함을 받았을 때 하늘의 진정한 모습이 분명하게 보였다.

   

3) 하나님의 昭命에 뒤따르는 하나님께로의 獻身  

이와 같이 죄를 깨닫고 죄사함을 받은 예언자 이사야는 이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더 깊은 계시를 받기에 영적으로 적합하게 준비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있었고(1절), 민족의 죄악이 하나님의 행위를 불러 들였다(5절). 우리가 하나님을 뵙고 우리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용서을 받고 그 용서를 알 때만이 우리는 소명을 깨닫고 그 소명에 응답하며 전심으로 헌신을 하게 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는 이제껏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과 죄를 지은 백성들 중에 거하였다는 인식이 분명히 그로 하여금 이때까지 앞으로 나와서 그 백성에 대한 심판을 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깨끗케 하시고 사명을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게 하셨으므로 이제 이사야는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었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즉각적으로 응답할 수 있었다. 이사야는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하였던 것이 이제는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응답하는 사명자가 되었다.

 

4) 하나님의 위탁 후에 오는 하나님과의 영교(9-11)

보내심을 받을 준비가 되자 곧 하나님의 위임이 따랐다. ‘가서 말하라’ 는 하나님의 위탁을 받은 이사야는 “주여 어느때 까지니이까?” 라고 질문하며 하나님과 영교 하는 자가 되었다. 이사야는 이처럼 神의식에 뒤따르는 罪의식, 죄의 고백 후에 따르는 죄 씻음, 하나님의 소명에 뒤 따르는 하나님께로의 헌신, 그리고 하나님의 위탁 후에 오는 영교라는 독특하고 분명한 소명을 받은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그대로 예언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응답하는 그의 순종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3) 예레미야의 증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소명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내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자리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 1:4-10)

   

예레미야가 예언하기 전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초자연적으로 주어진 임명의 말씀은 그의 선지자직의 신적 기원과 그의 예언의 신적 권위를 확증해 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영적 무력함을 고백하였다(6절). 그러나 하나님은 손을 그의 입에 대시며 강권적으로 그를 부르셨다(9절). 이것은 그에게 주어진 예언의 내용과 방법과 그 성취가 하나님에 의해 직접 이루어질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명이 중차대하며 매우 촉급하다는 사실을 두 환상을 통해 보이셨다. 하나는 살구나무 가지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시겠다는 것이며(11-12절), 또 하나는 그 면이 북에서 부터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보이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게 하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섬긴 유다백성들을 치게 하며,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13-16). 이어서 하나님은 사명을 수행하는 그에게 함께하시며 보호해 주시겠다는 격려와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17-19).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예레미야는 소명의 확신을 가지고 모두 50년의 예언활동 기간을 하나님께 신실하게 헌신했다. 그는 거짓 선지자들이 만연한때에 하나님께 세움을 입어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함으로서 그가 참 선지자임을 보여주었다. 이로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증거를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b. 신약에서 昭命받은 목회자들의 증거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소명은 먼저 세례요한의 부르심으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제자들을 부르시는 소명’ 을 보여주고 있으며,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이후에도 계속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사도와 설교자들을 부르셨다. 신약적 소명의 특징은 몇몇 특별한 직접적인 소명을 제하고는 은사 및 교회의 요구, 그리고 내적 확신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명 받은 자들 가운데서 세례요한, 베드로, 바울, 이렇게 세 사람을 택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 세례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예수 그리스도보다 6개월 먼저 이 땅에 보내시고(눅 1:57), 그에게 성령이 임하여 말씀 전파자로 나서게 하셨다. 여기에서 성령의 임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상징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이 출생하기 전에 그의 부친 사가랴에게 주의 사자를 보내셔서 세례요한을 특별한 사명자로 보내실 것을 예언하셨다. 하나님은 세례요한과 함께 계셔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서 사역을 준비하게 하셨다. 그리고 나서 그를 부르셨는데, 요한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요단 계곡으로 나가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때가 가까 왔음을 선포하였다(막 11:32; 마 14:5).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책에 쓴바와 같이,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는 사명을 훌륭히 수행하였는데, 그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모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증거 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6-17)

또한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고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 하였으며, 결국 그는 목 베임을 당하는 순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다. 이로서 그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

 

(2) 베드로의 증거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베드로를 부르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그를 쫓았다(마 4:20). 베드로는 예수님의 주권적이며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에 응답하였으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그렇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다시 찾아주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조심스레 대답했고, 이에 예수님은 그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고, 치라”고 목양의 사명을 부여하셨다. 그리스도의 소명을 받고 목양의 사명을 부여받은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 권능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으며, 강하고 담대한 설교자가 되어 수많은 양떼들을 주께로 인도하고 지도한 위대한 목회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소명에 대한 확신은 불변했고, 이로서 소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

   

(3) 바울의 증거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극적인 소명은 사도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유대교에 속해있으면서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고(행 7:58), 그 후에는 예수 믿는 자를 진멸하려고 유대교의 공문을 받아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리스도의 소명을 받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부르실 때에, 하늘에서 빛이 저를 둘러 비취게 하여 그의 눈을 보지 못하게 하였고 “사울아 사울아 내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고 말씀하셨으며 사흘 동안을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게 하셨다(행 9:3-9,11).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 아나니아를 환상 중에 부르시고 바울에게 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고 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부르신 이유를 설명하셨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그에게 가서 안수할 때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고 세례를 받으며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졌다(행 9:17-19). 그 후 그는 곧바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행 9:20) 하였으며 주님께서 소명하사 말씀하신대로 그리스도를 위해 온전히 바쳐진 삶을 살았다. 이로서 그는 그리스도의 소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 바울은 대부분의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의 소명을 지적하는 말을 그의 개인적인 이름에다 하나, 혹은 둘 이상의 서술적인 구(句)로 첨부했다.

 

로마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롬 1:1) 라고 했고, 고린도전서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고전 1:1)이라고 했고, 갈라디아서에서는 “사도된 바울”(갈 1:1),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엡 1:1; 골 1:1)이라고 했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도’ 로 부르셨음을 누누이 그의 서신들을 통해서 강조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르시고 맡겨주신 사명을 생명을 바쳐 수행하였으며,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이상과 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소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

목회자가 특별소명을 받고, 그 증거를 보여준다는 것은 목회자의 자격에 있어서 절대적인 요소가 된다. 이처럼 소명 받은 목회자가 성경에서 제시하는 자격을 모두 갖추고,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더 없이 귀한 일임엔 틀림없다. 이것 역시 목회자의 자격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 요소이다. 그러면 먼저 구약성경에 나타난 목회자의 자격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C. 구약 성경에 나타난 牧會者의 資格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족장으로서 하나님의 종의 역할을 한 아브라함을 시험 하셨다(창 22:1). 그 시험은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는 것이 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 하였다(창 22:2-12).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조상” 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기대 하셨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 하는 신앙 이었던 것이다. ‘경외’ 라는 것은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을 정서적으로 두려워하는 것만 아니라, 실상 하나님의 무한히 크신 권위 밑에서 안식하며 순종하는 태도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는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권위아래서 안식하며 순종하는 태도를 지닌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목회자의 자격을 가장 구체적으로 언급한 구절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명령으로 모세의 영적, 국가적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보조역할을 할 70인의 장로 선택과 자격이 기록되어 있고, 또 하나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제안에 따라 모세를 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고 다스릴 지도자의 자격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출 18:13-25). 이 출애굽기 18장의 사건을 다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모세를 도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지도자를 뽑는 이야기가 신명기 1장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모세는 말하기를 “그런즉 나 홀로 어찌 능히 너희의 괴로운 것과 너희의 무거운 짐과 너희의 다툼을 담당 할 수 있으랴 너희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자를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두령을 삼으리라...”(신 1:12-13).

  모세가 여기서 세우려는 지도자는 “단순히 백성들의 송사를 재판만하는 자가 아니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괴롭고 힘든 문제들을 해결하고 인도 해줄 지도자” 였다. 출애굽기 18장과 신명기 1장에서 제시하는 목회자인 지도자의 자격은 다음과 같다.

 

1. ‘智慧’ 가 있는 사람

 

모세가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택하라고 한 지도자의 첫 번째 자격조건은 “지혜” 가 있는 사람이었다(신 1:13).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혜란 다음 과 같이 3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기술적인 재능을 가리킨다.

금이나 은으로 어떤 물건을 잘 만들 줄 아는 장인을 가리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 한다. 예로서, 광야교회에서 성막을 만들 때 금과 은과 놋으로 여러가지 공교한 것을 만든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 불렀다(출 31:1-11).

  둘째, 사물에 대한 올바른 통찰력, 판단력, 혹은 처리능력을 가리켜서 지혜라고 한다(전 8:5,7; 호 14:9). 그러므로 이러한 지혜를 가진자는 왕의 고문이 되었고(삿 5:29), 또한 솔로몬은 이러한 지혜를 갖기 위해 하나님께 특별히 간구하였다(대하 1:10).

  셋째로 가장 중요한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구약에 있어서 모든 지혜서의 가장 핵심 되는 내용 중에 하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는 말씀이다(잠 9:10, 15:33; 욥 28:28; 시 110:10). 그러므로 출 18:21에는 “지혜로운 자” 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자”를 지도자의 첫째 조건으로 말한다. 즉, 모세를 도울 지도자의 자격 중 제일 중요한 조건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이다. 따라서 잠언기자가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며 악을 떠나나..”(14:16) 라고 했듯이 지도자로 선출될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에서 떠난 자가 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셨던 “하나님을 경외” 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창 22:12). 그리고 모세를 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며 그들의 제반 문제들을 해결해 줘야하는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사물에 대한 올바른 통찰력, 판단력, 혹은 처리 능력을 가진 ‘지혜’ 의 사람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솔로몬 왕도 하나님께 이러한 지혜를 간절히 구하여 얻으므로 왕이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직분을 훌륭하게 수행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대하 1:10,11).

   

2. ‘知識’ 이 있는 사람

 

모세가 제시한 지도자의 자격조건 중에 두 번째는 “지식” 이 있는 사람이다(신 1:13). 여기서 말하는 ‘지식’ 은 “타고난 재능이라 할 수 있는 이해력이나 판단력과는 달리 배워서 아는 것들을 가리키는 것” 으로 생각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로 택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물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진 자들” 이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지식을 소유한 지도자가 선출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문제들과 사건들을 올바르게 처리 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잠 1:7에는 “여호와를 경외” 하는 신앙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기 위하여 지혜를 구할 뿐 아니라 지식도 구하였던 것이다(대하1:10-12). 그런 까닭에 목회자 또는 지도자는 ‘지식’ 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3. ‘有名한’ 사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릴 지도자의 자격 중에서 세 번째로 “유명한 자” 가 되어야 함을 말했다(신 1:13). 출 18:21에는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자 를 지도자의 세 번째 자격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러니까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기적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자를 미워할 뿐만 아니라 물질 관계에도 깨끗한 자가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을 지도자로 뽑으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진실하며 이기적이 아닌 즉 도덕적인 자격을 갖춘 유능한 사람들을 지도자로 선택하여 백성들을 정의로 다스리는 일을 맡겨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지혜와 지식이 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적자격을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불의한 이(利)를 탐하지 않아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神’ 을 받은 사람

 

민수기 11장에 보면 모세는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인도하는 책임이 너무도 무거워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민 11:14-15). 그때 여호와께서는 70인의 장로를 뽑아 모세와 함께 짐을 나누어지도록 섭리하셨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장로 70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임한 신을 70인 장로들에게도 임하게 하셨던 것이다(민 11:16,24,25). 따라서 지도자는 하나님의 신(神) 곧 성령을 소유한자가 되어 능력을 받아 맡겨진 직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세운 목회자들에게 여호와의 신을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바르게 성공적으로 이끌게 하셨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령을 받고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적자격을 구비해야 하며, 또한 진실하고 이타적인 생활을 하여 모든 사람들로 부터 좋은 평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도덕적 자격을 갖춘 유능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5. 거룩한 사람

 

牧會者는 거룩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요구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며 더욱이 牧會者의 자격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거룩하다” 는 말은 여호와께서 어떤 특별한 목적을 두고 구별 선택한 것이나 여호와께 바쳐짐으로 여호와의 소유가 된 모든 것에 대해서 쓰여지는 선택 용어(Election term)이며, 상관어(Relationship term)이다. 성경에 보면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린 자를 일컬어 나실인이라고 했는데(민 6:2),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자(민 6:8) 가 된다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기 몸을 구별하여 드려진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거룩한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 이니라” 는 말씀을 많이 강조하셨다(레20:8,15,23, 22:16,32).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내게 거룩 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 하였음이니라(레20:6)” 고 하셨다. 그러기에 모든 신자의 모범이 되어야하는 牧會者는 신자중에서도 또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이니 더더욱 거룩한 자가 되어야함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함께 네게로 나오게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직분을 행하게 하되...(출 28:1)” 라고 하셨는데, 민 3:2-3에 보면 “이는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그들은 기름을 발리우고 거룩히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받은 제사장들이다” 라고 말함으로서 제사장들이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 있어서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총으로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다. 곧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셨기에 거룩한자요, 구별하시고 선택하시고 그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에 구별된 자, 선택된 자,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제자들에게 대하여 거룩하다는 말을 쓰셨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거룩한 자가 되어야하며, 그러한 자격을 갖출 때 바람직한 목회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D. 신약 성경에 나타난 牧會者의 資格

 

신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목회자의 자격요건을 말씀하셨다. 그중 가장 구체적으로 제시된 말씀을 보면 딤전 3:1-7; 딛 1:5-9; 벧전 5:1-3, 이다.

 

게츠(Getz) 박사는 위의 성경 구절들을 (中心) 하여 목회자의 자격에 대하여 20가지를 제시하였다.

1)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딤전 3:2).

2) 한 아내의 남편(딤전 3:2).

3) 절제(딤전 3:2).

4) 근신(딤전 3:2; 딛1:8).

5) 아담함(딤전 3:2).

6) 나그네를 대접함(딤전 3:2; 딛 1:8).

7) 가르치기를 잘함(딤전 3:2; 딛 1:9).

8) 술을 즐기지 아니함(딤전 3:3; 딛 1:7).

9) 제 고집대로 아니함(딛 1:7).

10) 급히 분내지 않음(딛 1:7).

11) 다투지 아니함(딛 1:7).

12) 관용함(딤전 3:2-3).

13) 돈을 사랑치 않음(딤전 3:11-3).

14) 구타하지 않음(딤전 3:3).

15) 자기 집을 잘 다스림(딤전 3:4).

16) 외인에게 선한증거를 얻음(딤전 3:7).

17) 선을 행하기 좋아함(딛 1:7,8)

18) 의로움(딛 1:7,8).

19) 경건함(딛 1:7,8).

20) 새로 입교한자가 아닌자(딤전 3:6).

 

그리고 김 득룡교수는 성경의 내용들을 1)하나님께 대한 자질 2)자기 자신에 대한 자질 3)교회에 대한 자질 4)가정에 대한 자질 5)대인관계에서의 자질로 구분하여 다루었다. 그러면 이 다섯 가지 구분에 의한 목회자의 자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논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 대한 資格

 

a. 근신하는 사람  

“...근신하며...(딤전 3:2; 딛 1:8)”  

목회자는 모든 일에 ‘근신’ 해야 한다(딤후 4:5). ‘근신하며’ 란 말은 모든 일에 “근신하며 깊이 생각하는 심적 자세” 와 “건전하고 균형 있는 판단”으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근신’은 사색에 있어서 순전하고 단정함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자기 마음속을 잘 단속하며 단정히 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근신’ 이란 말을 마음의 욕심을 절제하며 깨어있음을 가리키는바 외부적 행위에는 절제 하면서도 마음속 욕심의 동작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는 1) 그의 생활에 영적은혜가 없고 2) 그에게 기쁨이 없고 고민이 있으며 3) 신앙의 성장이 없는 것이다.

 

스펄전은 “사색은 그 능력을 개발하고 가꾸는 영혼의 단련” 이라고 했는데, 죠지 폭스(George Fox)는 예리한 칼을 가지고 승마용 가죽바지를 한 벌 찢어서 이 세상의 유행을 등진 채 아름드리 나무속에 숨어사는 동안 한 달 내내 생각만 했다. 그 결과 그는 책을 가진 사람들을 뺨칠 정도로 생각이 많은 사람으로 자랐다. 그는, 당대의 카톨릭 고위 성직자, 장로교 뿐 아니라 미국교도들 사회에서도 명성을 날렸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영적인 깊은 사색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수많은 유혹으로 부터 지키고 늘 깨어있는 근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b. 의로운 사람

“...의로우며...”(딛 1:8)

목회자는 의로워야 하는데 ‘의로우며 : δικαιοs(디카이오스)’ 는 신적인 재판관 곧 주님의 법적 승인을 받은 행동을 의미하는데 이는 오직 주님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 ‘의인 : δικαιοs’ 이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 곧 구속을 받은 자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으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고후 5:21). 이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의로워야 하는 것이다.

   

c. 거룩한 사람  

“...거룩하며(οσιον-호시온)...” (딛1:8).

이 자격조건은 앞서 구약에서 제시한 목회자의 자격 조건에서도 언급했다. 성경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자 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6) 라고 했다.

사도바울은 이점에 있어서 특히 모범적이었다. 그는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 한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살전 3:10)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부르셨을 때는 거룩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주를 박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거룩은 스스로 노력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몸을 주시므로 인해서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효력으로 친히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7) 라고 기도하셨다. 실로 우리의 거룩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살전 2:13)이라고 말씀하심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감히 목회자로서 세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목회자는 먼저 하나님께 근신하는 사람이 되어 언행을 삼가고,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하신 말씀을 항상 기억하면서 의롭고 거룩한 목회자가 되어 주와 더불어 영교하며 성별된 자답게 겸허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d. 主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요 21:15-7).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세 번이나 자기를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주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세 번이나 물으셨다. 주님께서 이렇게 세 번씩이나 물으신 참뜻은 베드로로 하여금 자기가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으나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있는 것을 스스로 깊이 깨달아 앞으로 과거의 일 때문에 구애받지 말고 일할 수 있는 용기를 복 돋아주기 위함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참마음으로 고백하는 그에게 주님은 그의 양을 맡기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연약해서 누구나 실수 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날도 주님은 그의 양을 맡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보다도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구약에서 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혜자의 마음속에 우러나오는 한 심성이라 생각 할 수 있다.

   

2. 자기 자신에 대한 資格

   

a.온전한 인격의 사람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의 가장 탁월한 덕목인 겸손으로 구체화 되신 것 같이 목회자의 온전한 인격은 목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목회사역은 목회자의 인격으로 부터 출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고 했다(잠 4:23). 따라서 목회자의 마음은 주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필립스 부룩스(Phillips Brooks)는 인격에 대하여 말하기를 목회를 준비하는 것은 “사람을 만드는 바로 그것” 이라고 했는데 결국 우리의 삶으로 부터 우리가 하는 일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온전한 인격을 갖추어야 하며 바로 그의 갖추어진 인격은 목회적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 튼튼한 기초가 된다. 더욱이 목회자의 인격은 지식을 뒷받침해 주어야하고 그래야 참된 지식이 되며 또한 그 지식은 인격이 성숙하게 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다간(E. C. Dargan)은 영국 청교도 역사에 있어서 전형적인 지도자였던 리챠드 백스터가 전향적인 지도자가 된 것은 “지성이나 혹은 학문적 탁월성 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덕스러운 그의 인격에 의한 것이었다.” 고 했다. 온전한 인격자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는 생활이 되어야만 한다. 목회자는 선한 목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기 위하여 날마다 경건의 시간을 갖고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열심히 하여야 한다.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또한 마음속 깊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뿐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그 말씀을 순종하는 진실한 삶이 될 때 훌륭한 인격을 갖추게 되어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b. 靈的 能力이 있는 사람

이미 구약에서 제시한 목회자의 자격 요건 중 성령을 받은 사람을 논했다. 사도바울은 목회자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성령의 능력임을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고린도 교우들에게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행했다고 한다(고후 2:4). 또한 가르칠 때도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므로 오직 성령의 인도를 통해 가르쳐야 할 것을 강조한다(고후 2:13).

 

곽 안련 목사는 “교육은 받았으나 신령하지 못한 목사가 있고 무식하더라도 신령한 목사가 있을 때 양자 중에 하나를 택한다면 물론 무식하더라도 신령한 목사를 택하여야 한다.” 고 했다(고전 21:14). 그러나 유, 무식을 막론하고 신령한 능력을 받았을 때는 유식한자가 더 좋은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오순절에 예루살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 충만은 이제껏 무지하고 이기적이며 비겁하고 무기력하던 제자들을 능히 변화시켜 전무후무한 능력 있는 목회자들로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성령은 인간의 힘으로, 능력으로, 할 수 없는 모든 일들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슥 4:6). 따라서 목회자는 성령 충만을 지속하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더욱이 목회자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놀라운 신비적인 체험을 가졌으나 육신의 생각과 정욕을 쳐서 끊임없이 영적생활의 향상에 힘쓴 것처럼”(고전 9:24-7; 빌 3:11-6) 성령 충만 해야 한다. 목회자가 영적능력을 지속,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첫째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둘째는 열심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목회자는 건강한 생활을 통하여 영적능력을 지속하고 향상시킬 수 있다. 몸이 병들면 주의 일을 힘 있게 끝마칠 수 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내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2)라고 했다. 건강을 위해서 목회자는 먼저 “성령의 전” 이 되는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날마다 끊임없이 드려야 한다. 그리고 절제하는 생활을 함으로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을 피하여야 한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책은 아론 자손들에게 맡기어졌으나 몸이 상한 자나 불구자는 그 직책을 계승하지 못하였다(레 21:16-24). 사실인즉, 목회자가 건강하지 못하면 목회를 제대로 감당할 수 가 없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항상 자기 몸을 돌봐야 하는 것이다.

 

에딘버러의 유명한 알렉산더 화이트(Alexander Whyte) 는 “너의 생명을 낭비하라 그러나 너의 건강을 유의하라”고 했다. 이 말은 목회자가 비 이기적인 목회에는 그의 생명을 아낌없이 투자해야 할 것이나 더욱 온전하고 지속적인 투자를 위하여 그의 건강을 보존해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건강할 때 영적능력을 유지하며 더욱 힘차게 그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전진을 할 수 있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c. 實力(知的, 學的)을 갖춘 사람

바울은 목회자의 자격으로 “가르치기를 잘하며”(딤전 3;2),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할 수 있는자”(딤전 1:9)여야 함을 말한다. 더욱이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을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 할 것이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권면했다(딤전 4:13,15). 따라서 목회자는 제일 먼저 성경학자가 되어야 한다. 구약에서도 모세는 목회자의 자격으로 ’지식 있는 자’ 여야 함을 지적했다(신 1:13). 많은 목회자들이 여기에서 실패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목회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목회자는 신학의 전문적 기초 없이 목사가 되려는 것은 콘크리트를 하지 않고 그냥 맨땅에다 고층건물을 짓는 것과 다를 바 없기에 신학적 기초를 튼튼히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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