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8 13:50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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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학

임 원택박사(백석대 교수)

 

 

율법, 그 황홀한 은혜 (시 19:7-14)

 

1. 율법 ≠ 율법주의

 

율법주의(legalism)는 매우 악한 것임.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은혜에서 시작하기에.

 

‧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 성경의 사랑의 화살: 하나님 → 우리.

 

롬 5:8 & 10a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相距)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율법주의는 악한 것이지만 율법주의가 율법은 아님.

‧ 그런데 왜 율법조차도 부정적으로 볼까? 율법주의를 정죄하면서 율법까지 덩달아 경시함.

 

2. 율법이란?

 

‧ 율법: ① 제사법(ceremonial law), ② 시민법(civil law), ③ 도덕법(moral law)

‧ ① & ②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폐지되었다는데 이견이 없음.

‧ ③의 준수가 문제였음. 참조) 반율법주의 논쟁(the Antinomian controversy).

‧ 도덕법이 신약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쓸모없는 것인가? 아님.

‧ 그러면 어떤 용도인가? 지켜서 구원받기 위함인가? 아님. 그것은 율법주의임.

‧ 그러면 어떤 용도인가? 칭의는 법정적‧단회적인데 반해 성화는 지속적임.

불신 칭의 성화

→ → ↴ ┃ ↗

↓ ╋ ↗

← ← ↵ ┃ ↗

‧ 율법의 용도:

① 형벌적 용도(political use) - 죄를 제지함.

② 교육적 용도(pedagogical use) - 그리스도께로 이끔.

③ 규범적 용도(normative use) - 그리스도인의 행위 규범.

 

3.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기 위해 율법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율법 행함

 

‧ 율법의 핵심 - 십계명(출20:1-17). 가장 중요한 부분 서문(序文). 계명 준수 동기 부여.

‧ 십계명을 주신 시기? 출애굽(=구원) 후. 그 이유? 구속받은 백성의 삶의 지침서로!

‧ 이제 우리는 ‘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으로부터’ 행함.

‧ 참고) 찬송가 “성자의 귀한 몸”(356장): 은혜 감사 → 주 위해 삼. 그 지침서!

 

4.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서가 계명

 

‧ 계명 = FM(field manual).

‧ 구원 받도록 복음을 전하지만 구원받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함은 가르치지 않는 문제.

‧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롬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 버림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은혜의 원리로 율법을 준수하라는 명령]

‧ ‘사랑 안에서’라는 원리를 오해해서는 안 됨. ‘은혜’ ≠ ‘무법.’

‧ 흔히 오용하는 말: “은혜롭게 합시다.” = “불법도 덮어줍시다.”

‧ 은혜 & 율법 준수가 상반된 것인가? 아님. 그 관계를 오해한 것.

 

5. 계명 준수는 참 제자의 표

 

‧ 은혜로 의롭게 된 것은 죄인이지 그의 죄가 아님. 은혜 ≠ 죄 용납 / 은혜 = 죄인 용서.

‧ 예) 잘못 저지른 자녀.

‧ 그러므로 은혜 받고 구원 받았으니 불법을 저질러도 ‘은혜로 덮힌다.’ (×)

‧ 오히려 신자의 율법 준수는 구원 받은 증거임.

‧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6. 최고의 영성은 계명 준수를 즐기는 삶에 있음

 

‧ 요8:3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죄에서의 자유(34-36절).

‧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순종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불순종으로부터의 자유’임.

‧ 순종할수록 더 자유로운 이유는 하나님을 섬김이 완전한 자유이기 때문임.

‧ 참된 은혜 받음 → 계명에 적극적으로 순종.

율법주의 → 교만 ∽ 겸손 ← 은혜 받음.

은혜 받음 ≒ 열렬한 사랑 ≒ 철 듦.

‧ 시19:10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명령받기를 즐기는 삶, 그것이 최고의 영성임.

‧ 은혜를 감사하며 성령님 안에서 주님 계명을 즐거이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17세기 영국의 도덕법 논쟁

 

가. 들어가는 말

 

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은 독일과 스위스에서 일어난 종교개혁과는 달리 종교적인 동기에서보다는 정치적인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교회는 종교적인 대립으로 인한 국론의 분열을 피하고 국민들을 하나로 단합시키려는 군주를 교회의 수장으로 하였으므로 종교개혁을 지향했으면서도 철저한 개혁을 하지 못하고 로마 가톨릭적 요소를 다분히 보유한 교회로 발전했다. 이에 대한 불만에서 조금 더 철저한 개혁을 지향하는 청교도 운동이 일어났다. 청교도주의를 교회 의식의 철저한 개혁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즉 교회 조직과 관련된 용어로서 이해할 때, 청교도 운동의 시간적 무대는 1559년과 1662년의 두 통일령들 사이의 세기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청교도 사상의 형성과 만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청교도 시대는 17세기라고 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일명 반율법주의 논쟁(反律法主義 論爭, the Antinomian controversy)이라 불리기도 하는 도덕법 논쟁은 17세기 영국 청교도들의 삶과 신앙 전체에 관련된 매우 중대한 논쟁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신자들에게는 도덕적 행위 규범인 도덕법(moral law)이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는 반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있었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신약시대 신자들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도덕법과 전혀 무관하기에 신자들에게 도덕법은 전혀 구속력을 갖지 않고 전적으로 폐지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청교도 주류는 창조와 더불어 주어진 자연법과 동일한 도덕법은 신약시대에도 폐지되지 않았고 여전히 구속력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도덕법은 구원받은 신자들의 행위 규범이라는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가 있었다.

도덕법 논쟁을 통해 청교도 주류는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와 신율법주의(Neonomianism) 양 극단을 거부하고 신자가 도덕법을 영속적으로 준수해야 함을 확고히 밝혔다. 반율법주의는 그리스도께서 도덕법을 폐지하셨기에 신약시대 신자들에게는 도덕법이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며, 신율법주의는 그리스도께서 도덕법을 수정하시고 새로운 법을 제시하셨기에 신약시대 신자들은 완화되고 경감된 도덕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는 서로 전혀 다른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창조 때 주어진 자연법의 재 반포로써 모세를 통해 주신 도덕법이 신약시대 신자들에게도 여전히 구속력이 있음을 부정한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에 맞서 청교도 주류는 그리스도께서 도덕법을 확립하셨으므로 신약시대 신자들이 완화되거나 경감되지 않은 원래의 도덕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17세기 말에 제2차 반율법주의 논쟁 혹은 신율법주의 논쟁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도덕법 논쟁의 제2차 발발이 있었으나 그때 논쟁의 중심이 된 저작들은 17세기 중엽의 반율법주의 논쟁에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을 더한 것이 없고 앞선 논쟁의 파생적 성격이 강하므로, 본 논문에서는 17세기 중엽에 있었던 반율법주의 논쟁을 중심으로 17세기 영국의 도덕법 논쟁을 고찰할 것이다.

청교도 혁명 초기에 의회파 군대의 병사들 가운데 반율법주의가 두드러지게 확산되기 시작했으므로 의회에 의해 소집된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에서 우선적으로 다룬 과제들 중 하나가 반율법주의를 억제하는 것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행해진 반율법주의에 관한 토의 내용은 반율법주의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청교도 주류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낸다. 1640년대 초 반율법주의자들의 발흥과 이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총회 신학자들의 공격은 17세기 중엽 반율법주의자들과 청교도 주류 신학자들 간에 있었던 저작들을 통한 반율법주의 논쟁과 대응하는 것이었다.

본 논문에서는 반율법주의자들과 청교도 주류 저자들의 저작들을 근거로 반율법주의자들의 도덕법 폐지 주장의 내용과 근거를 고찰하며 이에 대한 청교도 주류의 비판을 바탕으로 반율법주의의 몇몇 심각한 오류들을 밝힐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신자의 삶의 윤리적 지침으로서 도덕법의 준수를 주장하는 청교도 주류의 논증을 고찰할 것이다.

 

나. II. 도덕법 폐지 주장과 도덕법 준수 주장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온 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주신 율법은 제사법과 시민법, 그리고 도덕법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제사법(ceremonial law)은 제사장직과 제사에 관한 레위기의 제도들과 관련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통해 완전히 준수하셨으므로 신약시대 신자들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사회적 법률이었던 시민법(judicial law) 또한 신자의 삶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 하지만 도덕법은 신자의 삶에 여전히 구속력을 갖고 있으며 유효하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일반적 입장이다. 신약시대 신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제사법적․시민법적 면들의 폐지에 대해 이견이 없으므로, 신약시대 신자의 ‘율법 준수’는 바로 도덕법적 면의 율법 준수를 의미한다. 이런 경우, ‘율법’이라는 말은 ‘도덕법’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며 본 논문에서도 그러하다.

청교도 저자들 중 상당수가 십계명 주해를 썼는데, 도덕법이 십계명에 완전히 진술되었다는 청교도들의 생각을 이해하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러한 저작들의 존재는 바로 계명들, 달리 말해 도덕법이 여전히 구속력이 있다는 그들의 전제를 보여준다. 안식일에 관한 청교도 저작들도 모든 계명들이―따라서 제4계명도― 도덕적 구속력이 있다는 전제에 바탕을 둔 것이다.

청교도 주류의 도덕법 준수 주장과 상반되게 반율법주의자들은 신약시대 신자들에게는 도덕법이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도덕법에 대한 이런 상반된 주장의 바탕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법, 즉 모세법(the Mosaic law)에 대한 상반된 이해가 있다. 그런데 이 모세법의 의미 규정 혹은 자리매김은 청교도 신학의 골간을 이루는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의 중요한 논쟁점 중 하나였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언약 사상과 비교할 때 17세기 언약신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둘로 구분하는 이중언약 체계이다. 어떤 이들은 셋으로 나누는 이들도 있으나 둘로 나눔이 일반적이며, 두 언약에 대한 이름도 저자들에 따라 매우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라 부른다. 이 두 언약의 정체성에 대한 17세기 저자들의 이해는 더욱 다양한데, 모세법의 자리매김도 이와 관련되어 있기에 논란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청교도 주류를 포함한 17세기 개혁신학자들 중 다수는 행위언약은 타락 이전의 언약으로, 은혜언약은 타락 이후의 언약으로 이해했다.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본래부터 심어두신 도덕법을 기초로 인간과 행위언약을 맺으셨고, 인간의 타락으로 깨어진 행위언약을 복구하고 영생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다시 은혜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이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 이렇게 이해되면, 모세법을 포함하고 있는 시내산 언약 혹은 모세언약은 타락후 언약들 중의 하나로 은혜언약 중 하나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비를 일체 포함하지 않고 있으면서 모든 이에게 강제된다는 점에서 때로는 ‘행위의 법’(the law of works)이라 불리기도 하는 모세법이 외견상 은혜언약이 아니라 행위언약에 가까워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청교도 주류 내에서조차도 모세법 혹은 모세언약의 본질에 관해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 그러한 견해들은 대체로, 모세언약을 행위언약이라 보는 견해와 은혜언약이라 보는 견해, 둘로 나눌 수 있다.

모세언약을 행위언약이라 보는 이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타락전 아담과 맺으신 언약과 동일한 언약이 시내산에서 갱신되었는데, 그것은 은혜언약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은혜언약에 복종하고 시중드는 것으로서 은혜언약에 추가되었다. 죄를 깨닫게 하는 용도 때문에 모세언약은 매우 가혹하며, 이스라엘을 그리스도께로 몰아가는 역할을 다 한 후에는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은혜언약과 무관한 이들에게는 여전히 행위언약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청교도 주류의 다수는 모세언약을 은혜언약으로 본다. 그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와 더 이상 행위언약을 맺지 않으시기에, 타락후 맺은 모든 언약은 은혜언약이다. 청교도들은 모세언약 즉 모세법이 자연법(the law of nature)과 본질상 동일하다고 봤다. 내용적으로 자연법과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모세법 즉 도덕법이 굳이 시내산에서 다시 반포된 이유는 타락으로 자연법이 철저히 지워짐으로 타락한 인류 가운데 그것에 대한 지식을 새롭게 할 필요 때문이라는 데 청교도 모두가 동의한다. 그러나 행위언약은 아담에게 생명을 목적으로 주어졌으나, 타락한 인류에게 모세법을 주심은 더 이상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즉, 모세법은 칭의를 위한 처방이란 의미에서의 ‘행위의 법’이 결코 아니었다. 모세법의 엄한 형태도 은혜의 목적에 따른 것으로, 모세법을 대표하는 십계명은 하나님의 독특한 호의와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복음적 반포였다. 모세법은 그 역사적 시행으로는 유대인에게, 하지만 체험적으로는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교사의 역할을 하는 은혜의 도구로 은혜언약의 일부라는 주장이다. 모세법은 효과를 위해 행위언약의 형태 가운데 주어진 은혜언약으로, 끝내 그리스도에게로 오지 않는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의도 때문에가 아니라 그들의 부패 때문에, 명백히 행위언약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모세언약이 은혜언약의 한 형태라는 청교도 주류의 이러한 견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반율법주의자들은 모세언약과 은혜언약이 전적으로 상반된다고 보았기에 모세언약을 행위언약으로 보는 전자의 입장에 섰다. 또한 그들은 모세법을 주심에 있어서 은혜를 깨달을 수 없었기에 모세법이 복음적 의도로 주어졌음을 부정했다. 따라서 반율법주의자들은 모세법을 은혜의 도구로 설교함에 대해서도 ‘율법주의적’ 설교라고 비난했다.

모세언약을 은혜언약으로 보는 청교도 주류는 모세법 즉 도덕법이 신약시대에는 어떤 의미로는 폐지되었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여전히 구속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구약시대 역사적 시행의 일부로서 그 시대에 독특한 도덕법은, 약속되기만 했지 아직 성취되지는 않은 그리스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확립된 새 언약에 의해 폐지되었다. 하지만 자연법의 재선포로서 혹은 그 내용과 본질상의 규범으로서 도덕법은 새 언약 아래서도 폐지되지 않았고 여전히 구속력을 갖는다. 이에 반해, 모세언약을 행위언약으로 보는 반율법주의자들은 신약시대 신자들에게 모세법 즉 도덕법이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않으며 전적으로 폐지되었다고 주장한다. 도덕법의 언약적 이해에 있어서 반율법주의자들의 실수는, 비록 새 언약과 달리 제시되었지만 모세법 즉 옛 언약도 참 은혜언약이고, 옛 언약과 새 언약 아래 신자들의 상태―도덕법의 구속을 받는―가 동일함을 몰랐다는 것이다.

도덕법과 관련하여 청교도 주류와 반율법주의자들 사이에 또 다른 큰 차이는 칭의관에서 나타난다. 터바이어스 크리스프(Tobias Crisp)는 『그리스도께만 영광』에서 구원의 믿음은 영원에서 이미 일어난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칭의의 시간 내에서의 실현이라고 주장했다. 크리스프는 실제로 3중적 칭의를 주장하는데, 영원한 칭의(eternal justification)는 하나님께서 택자들의 죄를 성자에게 넘기시므로 영원에서 택자가 이미 의롭다함 받은 것이며, 실질적 칭의(virtual justification)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을 때 이루어졌으며, 실제적 칭의(actual justification)는 택자들이 시간 내에서 자신들이 이미 칭의 받았음을 발견했을 때 누리는 칭의라는 것이다.

반율법주의자들에 따르면, 의롭게 된 사람 즉 칭의 받은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고 무가치하게 먹거나 마시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이 그를 가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를 대속하셨으므로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의 것이 된다. 칭의 받은 사람은 죄짓는 위험으로부터, 따라서 율법에서 해방되기에,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은혜의 길은 자유분방하고 즐거운 길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으로 칭의 받은 신자들에게는 절대적 자유가 주어지며 신자들은 어떠한 의무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교도 주류는 반율법주의자들의 칭의관의 가장 큰 문제가 칭의의 범주를 성화에 그릇 적용한 데 있다고 보았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죄인이 모든 법적 죄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음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한다. 이에 비해 성화는 신자의 삶이 점점 더 경건한 양식으로 바뀌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칭의와 성화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질문 77) 칭의와 성화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답) 비록 성화가 칭의와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으나,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다르다. 칭의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키시지만, 성화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은혜를 주입하셔서 그것으로 실행이 가능하게 하신다. 전자에서는 죄가 용서받으나, 후자에서는 죄가 굴복된다. 전자는 모든 신자들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동일하게 자유하게 하며, 이 생에서 완전히 이루어져서 그들로 하여금 결코 다시는 정죄 받지 않게 한다. 후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지도 않고, 이 생에서 어느 누구에게 있어서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으며, 다만 완전을 향해 자라간다.

 

칭의는 법정에서의 최종 선고처럼 단회적 행위인데 반해, 성화는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지속적 행위인 것이다. 칭의는 성화에로의 길을 열지만 그 자체는 성화가 아니다. 그런데 반율법주의자들은 단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칭의에 속하는 완전의 특성을 성화에 그릇 적용한 것이다. 칭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 받는 것은 인간이지 그 행위가 아니다. 죄인과 더불어 그의 행위에도 칭의의 완전성을 그릇 적용하여 신자의 행위를 정당화함이 반율법주의자들의 오류의 뿌리다. 반율법주의자들은 민수기 23:21과 예레미야 50:20을 즐겨 인용하며, 자신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죄라고 부르지 않고 질병(disease) 혹은 연약(infirmity)이라 부르기를 좋아하는데, 청교도 주류는 신자의 잘못 역시도 죄라고 하며, 새로운 죄에는 새로운 회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율법주의자들의 칭의․성화관은 그들의 언약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크리스프에 따르면, 새 언약에서 인간 편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행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 담당하시고 스스로 그것들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만약 믿음이 언약의 조건이라면 깨어진 언약의 잘못은 행하시는 하나님 편의 것이지 신자들 안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주장이다. 크리스프가 언약의 조건성을 부정하는 또 다른 근거는 언약의 영원성이다. 만약 언약이 인간에 의해 성취되는 어떤 조건들 위에 선다면 그것은 영원한 언약이 될 수 없다고 그는 본다. 인간이 의에 매우 확고하게 서있어 자신의 역할에 있어서 결코 실패하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매일 실패하고, 매일 언약을 깨뜨린다. 그러므로 언약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청교도 주류는 조건성이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 생각한다. 행위언약은 물론이고 은혜언약도 비록 그 기초와 확립에 있어서는 무조건적이나 그 책무에 있어서는 조건적이다. 청교도 주류는 하나님의 은혜의 우선성을 확고하게 고백하는 한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은혜언약에서 인간에게 요구된다고 본다. 비록 은혜언약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성취되지만 인간의 책무로 믿음이 요구된다. 여기서 은혜와 믿음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없음은 둘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때문에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시고, 우리의 순종이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 신실함을 보시고 용납하신다. 은혜언약의 조건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감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 은혜의 영광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청교도 주류는 언약에 나타난 은혜를 강조한다면서 언약의 모든 조건들을 철저히 부정하는 반율법주의자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이라 보았다. 은혜언약에 있어서 신자의 책무는 바로 믿음과 더불어 믿음에 어울리는 올바른 삶이며, 그러한 삶의 지침은 도덕법이다.

신약시대 신자에게 도덕법이 구속력을 갖는가와 관련하여 해석의 논란이 많았던 구절 중 하나가 로마서 10:4이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흠정역 성경에는 “For Christ is the end of the Law for righteousnes to euery one that beleeueth”로 번역되었다. 이 구절에서 “law”와 “end”가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전후 문맥에 따라 일반적으로 전자는 제사법이 아니라 도덕법을 의미한다고 본다. 문제는 후자의 의미인데, 도덕법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주장으로 나뉜다.

“end”는 그리스어 원문의 τέλος를 번역한 것인데, 반율법주의자들은 그것을 ‘종식’으로 해석해 도덕법의 폐지 혹은 폐기를 주장한다. 크리스프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의 마침이며, 또한 율법의 생명의 마침이다. 신자가 율법을 어겨도 그에게 아무런 저주도 내리지 않으며, 신자가 율법에 순종한다 해도 아무런 생명을 기대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생명과 저주의 마침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숨기었기 때문에, 아들을 가진 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고 아들을 갖지 않은 자는 생명을 갖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대할 수 있는 생명은, 그것이 생명 자체이든 아니면 그것의 위안에 관련된 것들로 이끌음이든, 이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기대할 것이지, 율법의 어떠한 순종으로부터 기대할 것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어느 때든지 율법을 범했을 때 자신에 대한 저주가 있다고 판단하고 감히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인정해 버린다면, 그 범함에 관한 한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율법의 마침이 아니다.

 

크리스프의 논리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종식시켰기 때문에 신자는 율법을 어겨도 그에게 아무런 저주도 내리지 않는다. 만약 신자가 율법을 범했다하더라도 그것을 종식시킨 그리스도를 붙들면 그 율법은 신자 자신에게 저주가 되지 않지만, 그렇지 않고 그리스도를 붙드는 대신에 율법을 범한 자기 스스로에 매이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종식이 그에게 유효하지 않아 율법이 그에게 저주가 된다는 것이다. 율법 혹은 도덕법을 범한 신자가 그리스도를 붙들므로 그 잘못을 용서받아야 함은 신자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붙들기만 하면 신자가 범한 도덕법의 위반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지나친 궤변으로 보인다. 또한 율법을 범한 자기 스스로에 매이지 말고 그리스도만 붙들어야 한다는 크리스프의 논리에서 한 발만 더 나가면, 신자가 자기 죄를 고백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반율법주의자들의 극단적 주장이 가능한 것이다.

τέλος를 ‘종식’으로 이해해 그리스도께서 도덕법의 요구를 종식시키셨다고 주장하는 반율법주의자들과 달리, 청교도 주류는 τέλος를 ‘실현’ 또는 ‘성취’로 이해해 그리스도께서 도덕법을 확립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말을 로마서의 조금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목적이신 것이다. 로마서 10:4의 “law”를 ‘도덕법’으로, “end”를 ‘목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에 의해 도덕법을 성취하셨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성부를 기쁘시게 하는 삶 가운데 행하신 적극적 순종(active obedience)과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행하신 수동적 순종(passive obedience)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혜택이 신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이 전가(imputation)라는 데는 청교도들이 모두 동의했지만, 이 전가에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뿐만 아니라 능동적 순종도 포함되는가에 대해서는 견해의 차이가 있었다. 반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의 전가 교리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가 반율법주의자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청교도 저자들 대부분의 견해였다. 하지만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전가에 의한 칭의 교리는 인정하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의 직접적 전가에 의해 되어짐은 부정한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작은 꾸러미들로 나눔은 세밀함의 남용이다. 혜택들의 조건은 행하신 일 전체일 뿐임에도 불구하고.......그들은 이 꾸러미는 나에게 이런 용도로 전가되고, 저 꾸러미는 저런 용도로 전가된다고 말하며, 어떤 것에 의해서는 그분이 이런 공덕을 얻으시고, 다른 것에 의해서는 저런 공덕을 얻으셨다고 말한다.

 

반율법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므로 그것이 칭의 교리의 범위를 넘어 성화 교리에 까지 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인지 전가된 의의 교리에 대한 백스터의 반감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백스터의 경우 반율법주의에 대한 지나친 반감 때문인지 적어도 도덕법에 관한 한에서는 반대편 극단으로 가버렸다는 점이다. 율법의 변화 가능성을 가정함으로 백스터는 다음과 같이 법들을 구분한다. 크게는 타락전의 자연법과 타락후의 은혜의 법으로 나뉘며, 자연법은 창조의 법, 무흠법(the law of innocency), 그리고 행위언약이라고도 부른다. 은혜의 법은 다시 (1) 타락한 본성의 법, (2) 구속받은 본성의 법, 그리고 (3) 신법(new law) 혹은 그리스도의 법으로 나뉘는데, (2)와 (3)은 각각 믿음의 법의 1판과 2판이다. 백스터는 그리스도에 의해 무흠법이 완전히 성취되었음은 인정하나 신자들이 이것만을 근거로 칭의 받음은 부정한다. 은혜의 법과 무흠법의 차이는 용서의 가능성과 형벌의 완화에 있다. 용서의 가능성은 믿음과 회개에 달려 있으며, 형벌의 완화는 일부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또 일부는 율법의 융통성(the flexibility of law)에 달려 있다. 새로운 은혜의 법은 그 범위가 만인에 공통된 것이며 타락 때 전 인류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은 무흠법에 대한 적극적 부가물을 담고 있다. 타락한 인간이 첫 법을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요구를 타락한 인간이 이행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기 위해 의무에 있어서 약간의 변경이 필연적이게 되었다. 마지막에 죄인들은 이 은혜의 법에 의해 심판받을 것인데, 그것은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는 율법과 동일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의 결과, 의는 더 이상 영원하지도 불변적이지도 않고 단지 상대적이게 된다. 백스터에 의해 상술된 원리들에 따르면, 신자의 궁극적 칭의는 신법에 대한 순종에 있어서 신자 자신의 선행이 그리스도의 공덕에 결합함에 의해 성취된다. 두 형태의 의가 있는데, 하나는 형벌로부터의 자유고, 다른 것은 행동에 있어서의 자유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전자만을 받고, 후자는 그 자신이 성취해야만 한다.

백스터는 반율법주의의 도덕법 폐지 주장을 신랄히 비난했으나, 그 자신도 결국은 도덕법의 폐지를 주장한 셈이 되어버렸다. 그 자신은 수정이 폐지와 다르다고 강변할지 모르나, 어떤 것이 수정되게 되면 수정 전의 그것은 결코 원래대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서로 전혀 다른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원래의 도덕법이 여전히 구속력이 있음을 부정한 점에서 반율법주의자들과 백스터가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백스터 당시의 몇몇 청교도 저자들이 그를 반율법주의자라고 한 것도 전혀 근거 없는 비난은 아니었다. 하지만, 신법에 대한 강조 때문에 백스터의 견해는 신율법주의라고 부른다. 원래의 도덕법의 지속에 대한 부정을 제외한다면 도덕법 이해에 있어서 반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 사이에는 공통된 요소를 찾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백스터는 반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가장 신랄한 공격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반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변경된 의무들을 가진 신법에 대한 백스터의 견해도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청교도 주류는 그리스도께서 도덕법을 폐지하셨다고 주장하는 반율법주의나, 그리스도께서 도덕법을 수정하시고 신법을 제시하셨다는 신율법주의를 단호히 거부한다. 인간의 타락이 도덕법을 폐지하지도 않았고,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이 도덕법의 의무를 소멸시키지도 않았다. 도덕법의 지속은 하나님의 권위와 묶이어 있다는 것이 청교도 주류의 확신이었다. 역사적 시행으로서의 창조언약 즉 행위언약은 파기되었으나, 행위언약의 규범적 내용인 도덕법은 여전히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타락이 도덕법을 폐지하지 않는다면, 그 회복도 도덕법을 폐지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도덕법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도덕법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의무를 강화하셨다. 신자가 준수해야 할 의무로서의 도덕법은 본질적으로 옛 언약 즉 모세법과 동일하다. 언약은 율법의 우연적인 것이기에, 언약이 어떠하든 율법 즉 도덕법은 항구적이다. 이 도덕법의 지속적 권위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도덕법은 모두를, 즉 칭의 받은 사람들도 다른 이들처럼, 그것에―그 안에 포함된 내용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에 관해서도 또한― 복종하도록 영원히 구속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복음 안에서 이 의무를 해제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훨씬 강화하셨다.” 청교도 주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도덕법 확립은 신자들이 도덕법을 영속적으로 준수해야 할 가장 확실한 근거였다.

 

다. III. 신자의 삶의 윤리적 지침으로서의 도덕법

 

신약시대 신자들에게도 도덕법이 여전히 구속력을 갖는다는 청교도 주류의 생각은, 몇몇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을 포함하여 당대의 뛰어난 저자들 상당수가 적극 추천한, 토마스 빈센트(Thomas Vincent)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주해서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질문 2) 도덕법은 복음의 시대에도 여전히 순종의 규칙인가?

(답) 도덕법은 처음에 인간의 순종 규칙으로 계시되었으므로, 그것은 각 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지속적으로 그러하다.......

(질문 4) 도덕법에 순종함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나?

(답) 만약 도덕법에 완전히 순종한다면 그에 따라 생명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죄가 있으므로 완전한 순종은 불가능하며 그에 따라 생명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의 타락 후에는 생명을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질문 5) 그것에 의해 의와 생명이 얻어질 수 없다면 율법은 도대체 왜 주어졌나?

(답)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그분께로 이끄는 선생이 되도록 주어졌다.......

(질문 7) 사람들이 이끌리어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합하고 나면 도덕법은 그들에게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나?

(답)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하여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그 아래 있었던 도덕법의 저주와 정죄, 가혹함과 노여움으로부터는 해방되지만, 도덕법은 신자들에게 여전히 독특한 용도가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 대신에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키고, 비록 이 생에서는 그 규칙에 대한 완전한 순종에 이를 수는 없지만, 가능한 한 그것에 따라 자신들의 마음과 삶을 정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규칙이 된다.

 

종교개혁직후기(post-Reformation) 개신교 신학에서는 루터파 신학자들과 개혁신학자들 모두가 도덕법의 용도를 셋으로 구분했다. 첫째는 죄를 제지하는 형벌적 용도(usus politicus), 둘째는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교육적 용도(usus pedagogus), 그리고 셋째는 신자의 행위를 결정하는 규범적 용도(usus normativus)다. 위의 (질문 5)에 대한 답은 도덕법의 둘째 용도며, (질문 7)에 대한 답은 도덕법의 셋째 용도다. 이것은 신약시대 신자의 도덕법 준수에 대한 청교도 주류의 주장이 개혁신학 전통에 바탕한 것임을 보여준다.

루터파 신학자들과 개혁신학자 모두가 도덕법의 용도를 셋으로 구분함에는 일치하나 규범적 용도에 대한 입장에는 차이가 있다. 개혁신학자들은 믿음이 싹터 나와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가정 위에 도덕법의 제3 용도(tertius usus legis)를 매우 강조하지만, 루터파 신학자들은 이 규범적 용도에 행위의 의(works-righteousness)의 위험이 있다고 보고 규범적 용도는 궁극적으로 신자를―의인인 동시에 죄인인― 교육적 용도로 돌려보내어 거기서 다시 구원의 유일한 근원인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혜로 가게 한다고 주장한다. 루터파에게 있어서 도덕법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궁극적 규범이 결코 될 수 없으며, 그것은 유일하게 의로우신 그리스도께로 항상 이끄는 역할을 감당해야만 한다. 도덕법의 규범적 용도에 대한 시각의 이러한 차이는 개혁신학자들이 동일한 은혜언약 내에서 옛언약과 새언약의 단순한 구분으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루터파는 율법과 복음을 상당히 대조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데 따른 것이다.

도덕법의 제3 용도에 대한 루터나 루터파의 경시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은 도덕법의 규범적 용도를 매우 강조한다. 칼빈은 규범적 용도를 “율법의 본래 목적과 더욱 밀접히 관련된 주된 용도”라고 묘사하며 그것을 자신의 성화 교리의 기초로 삼았다. 칼빈은 신자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알려주며 그들로 하여금 거룩함과 순결을 열망하도록 일깨움이 율법의 기능이라고 한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십계명과 관련하여 신약시대 신자들에게 있어서 도덕법의 필요성과 의미를 상세히 설명한다. 도덕법의 제3 용도에 대한 칼빈의 이러한 강조와 더불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모든 회원들이, 비록 교회정치 체제에 대해서는 교파에 따라 입장을 상당히 달리했지만, 신학적으로는 정통파 칼빈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규범들에 나타나는 도덕법 준수에 대한 일관된 표명의 이유를 드러낸다.

팀 쿠퍼(Tim Cooper)는 17세기 영국의 반율법주의자들을 칼빈주의 전통 속에, 그것도 거의 중심에 자리매김하면서도 반율법주의자들이 루터 신학의 한 면을 또한 계승했다는 주장을 한다. 쿠퍼가 반율법주의자들을 칼빈주의 전통의 중심에 자리매김함은 잘못이지만, 반율법주의자들이 루터 신학의 ‘일면’을 계승했다는 그의 주장은 귀 기울일 만하다. 쿠퍼는 구원론에서 유사점을 발견하는데, 양쪽 다 구원 과정에 있어서 신자의 수동성과, 개심에 있어서 신자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구원에 있어서 신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그에게는 무한한 의이신 그리스도와 동일한 의가 전가되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성취하신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율법은 더 이상 없다. 예정된 시간에 오셔서 그는 율법 전체를 폐지하셨다.” 루터의 이런 ‘반율법주의적’인 가르침에 반율법주의자들의 신학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쿠퍼가 17세기 영국의 반율법주의 교리가 루터의 가르침과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변하실 수는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택자들을 의롭다고 보셔야만 한다는 영원한 칭의 교리는 루터의 가르침을 훨씬 넘어간 것이다. 반율법주의자들이 루터를 그들 편으로 완전히 끌어올 수 없는 더 중요한 이유는 구원론적 강조에 있어서 루터의 초기 입장은 반율법주의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 같지만, 루터의 후기 입장은 오히려 반율법주의자들을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청중이 바뀐 것이 그러한 변화의 주된 이유였다. 이전에는 그들이 율법이 아니 은혜에 대해 들어야 했으나, 이제는 그들이 하나님 은혜의 경이를 발견했으므로 그들의 행동을 자제시키기 위해 율법의 목소리가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루터의 초기 입장을 붙든다는 점에서 17세기 영국의 반율법주의자들은 루터 신학의 ‘일면’을 계승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터바이어스 크리스프도 도덕법의 용도에 대해 청교도 주류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크리스프는 갈라디아서 3:19(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의 본문을 가지고 “율법의 용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어떤 이들은 자기가 율법을 폐지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이해하나 자신은 신자에게 율법이 어떻게 쓰이는 지를 보여주겠다고 한다. 크리스프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새롭게 반포하시되 이전에 인간의 양심에 새겨주신 것과 달리 돌 판에 새겨주신 것은 그것이 영구히 새롭게 지속되도록 하기 위함인데, 그 용도 한 가지는 바로 “인간에게 그의 죄를 보임”이다. 이것은 도덕법의 첫째 용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크리스프는 율법의 두 번째 반포 때 저주의 용도는, 심지어 은혜언약에 속한 이들이라도, “자기 자신에게서 나와 급히 그리스도께로 가게 함”이라고 한다. 이것은 도덕법의 둘째 용도에 해당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크리스프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또 한편, 율법의 규칙들과 명령들은 그것들이, 우리를 불결함으로가 아니라 성결함으로 부르신 그리스도의 벗에 걸맞는 생활양식으로, 삶을 꾸밈으로 그리스도께 매우 도움이 된다(very subservient unto Christ). 그런데,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지시를 받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기보다는 괴물이 될 것이다. 율법은 그 규칙들에 있어서 거룩하고 선하므로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어울리는 일부를 유지한다.

 

이 주장은 도덕법의 셋째 용도와 방불하다고 본다. 만약 이 설교가 크리스프의 것이 아닌 청교도 주류 신학자들 중 한사람의 것이라면 그 내용이 도덕법의 규범적 용도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누구라도 생각할 것이다. 여기에 인용한 크리스프의 주장만 두고 본다면, 그도 신자들에게 있어서 도덕법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반율법주의자들이 도덕법의 폐지를 주장한다는 지적은 옳지 못할 것이다. 또한 ‘반율법주의’라는 이름부터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적으로 반율법주의자들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도덕법의 용도에 대한 이해에서 청교도 주류와 반율법주의자들의 차이는 규범적 용도에 대한 강조와 경시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키번에 따르면, 반율법주의자들 대부분이 율법의 내용의 영원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은 계명이 그렇게 명했기에 하나님을 섬기면 그것은 율법주의적(legalistic)이라고 주장한다. 키번은 이러한 계명으로서의 율법 거부가 가장 반율법주의적인 특성이라고 본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신자는 은혜 아래 있기에 “더 이상 모세는 필요 없다”(no Moses now)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모세가 언약을 의미한다면 청교도 주류도 여기에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반율법주의 논쟁 당시에는 반율법주의자든 청교도 주류든 많은 이들이 계명으로서의 율법과 언약으로서의 율법을 구분하지 못했다. 청교도 주류는 당연히 반율법주의자들의 그런 주장은 율법 폐기이며 의무 폐기라고 비난했다. 반율법주의자들과 청교도 주류 사이에 상당한 오해가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반율법주의자들이 잘못에 빠져있었음은 분명하며, 청교도 주류가 그러한 잘못을 드러냄은 참된 경건을 위함이었다고 키번은 지적한다.

반율법주의자들과 달리, 청교도 주류는 율법에 대한 순종의 의무가 은혜와 상반된다고 여기지 않았다. 죤 볼(John Ball)에 따르면, 신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어떠한 정황에서도 항상 거룩함과 의 가운데 “아무런 강제됨 없이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구원자와 구원받은 자의 관계가 신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 대한 의무를 낳는다. 이때, 그 동기가 복음적이라고 해서 의무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 은혜에 의해 순종의 의무가 오히려 점증된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삶의 규칙으로 사용함에 극도의 혐오를 가졌기에 신자의 삶을 위한 유일한 규칙은 신자 자신의 마음의 경향을 통하여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충동이라고 주장했다. 키번은 이 점에 있어서 청교도 주류와 반율법주의자들의 대비는 죤 버년(John Bunyan)의 『천로역정』에서 주인공인 ‘크리스천’이 ‘형식주의자’와 ‘위선’에 대해 반박하는 다음의 말에 잘 표현되었다고 본다. “나는 내 주인님의 규칙에 따라 행하지만, 당신들은 자신들의 망상의 조잡한 작용에 따라 행한다.” 결국 반율법주의자들에게는 행위의 객관적 지침이 없다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령님께 대한 의존과 자기 자신의 체험은 중시하면서도 다른 이들에 의해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 진리는 적대하는 반율법주의자들의 급진파적 성향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에 반해, 청교도 주류에게는 율법이 “거룩한 경계”를 이루며 안전한 규칙이 된다. 신자가 누릴 특권인 성령의 인도가 “그들로 하여금 도덕법의 인도를 받지 못하도록 막지 않는다.”

신자가 율법을 삶의 규칙으로 삼는다고 할 때 그것이 자칫 율법주의로 오해받을 수 있다. 하지만 프란시스 로버츠(Francis Roberts)는 신자의 선행은 공덕과는 무관하며 다만 그들의 칭의의 결과적 조건(consequent condition)이라고 한다. 죤 볼에 따르면,

 

조건은 두 종류가 있는데 선행적(antecedent)이거나 결과적이다. 조건이, 하나 대신에 다른 것이 주어지는 일반의 법정적 계약들에서처럼, 약속되거나 주어진 것의 원인일 때 그것은 선행적이다. 조건이 신민(臣民)의 자격과 같이 약속에 수반되거나 약속된 것에 반드시 수반하는 부속물일 경우 그것은 결과적이다. 그런데 계명들에 대한 순종은 이 후자의 의미에 있어서 약속의 조건이었다. 즉, 약속된 것이 허용되어지는 원인이 아니라 유능한 신민의 자격이나 거저 주어진 큰 자비의 결과인 것이었다.

 

결과적 조건은 어떤 것의 결과로서 반드시 따라오는 조건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법에의 순종은 신자가 받은 구원의 은혜의 결과적 조건이다. 즉, 참된 칭의에는 그 결과로서 반드시 선행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청교도 주류에게 있어서 신자의 선행은 그것이 신자로 하여금 칭의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받은 칭의의 증거라는 가치가 있다. 선행은 능동적이며 생동력 있는 믿음의 증거가 된다. 즉 경건한 삶이 믿음의 증거이며, 성화가 칭의의 증거가 된다. 또한, 신자의 선행은 신자 그 자신에게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칭의와 성화를 확신케 하는 증거가 된다. 이에 반해, 반율법주의자들은 선행의 증거적 가치를 율법주의적이라고 부정한다. 반율법주의자들도 신자의 선행이 다른 사람들에게 신자의 상태에 대한 증거의 기능을 제공함은 인정한다. 하지만 확신에 있어서 신자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충분하고 분명한 증거를 주시는 성령의 증언에서 확신을 얻어야 하지 성화의 열매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확신은 증거의 모둠보다 더 깊은 것이기에 반율법주의자들이 그것을 지향했던 것 같다. 성령의 증언이 새로운 삶의 내적 증거이기에 그것은 신자의 삶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선행 외에는 새로운 삶의 외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반율법주의자들이 선행의 증거적 가치를 부정함은 잘못된 것이었다.

신자가 행하는 최고의 행함도 하나님 앞에서는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가장 거룩한 사람들도 그들의 최상의 순종에 있어서 항상 실패한다.” 신자의 순종이 약하고 불완전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꺼이 받으신다. 신자가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순종할 수 없어, 신자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 불완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것을 기꺼이 받아주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신자의 불완전한 순종을 기꺼이 받으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 자신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아들여짐과 같이 그들의 선행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진다. 그것들이 이 생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전적으로 흠이 없고 비난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그것들을 보심으로 비록 많은 약점들과 결점들을 동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함을 기꺼이 받으시고 상주시기 때문이다.

 

청교도 주류는 신자의 율법에 대한 순종에 있어서 완전함 대신에 진실함(sincerity)이 받아들여짐을 강조한다. 하지만, 백스터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진실함이 바로 완전함이라고 확언하는 잘못을 범한다. 로버츠는 진실함을 성실함(integrity)으로 묘사한다. 진실함은 신자의 갈망과 의도의 진실함으로 그 자체가 완전함은 아닌 것이다.

칭의의 증거가 되는 신자의 선행은 또한 성화의 증거도 된다. 하지만 반율법주의자들은 신자의 순종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부정한다. “우리의 모든 의는, 비록 성화의 의라 할지라도, 더럽고 얼룩져 불결한 넝마와 같다.” 크리스프는 신자 자신의 “최고의 흠없는 행위”도 다만 “실패며 똥”이라고 말한다. 키번은 신자의 선행에 대한 반율법주의자들의 반대가 칭의와 성화에 대한 그들의 혼동 때문이라고 본다. 그들이 신자의 성화의 원천과 능력이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한 것은 옳으나 그리스도의 은혜가 신자에게 실제가 되었다고 주장함에 문제가 있다. 칭의에 속한 법정적 범주와 성화에 속한 경험적 범주를 구분하지 못하고, 칭의에만 돌려야 할 전가의 방식을 칭의와 성화 둘 다에 적용시키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전가의 방식을 성화에까지 적용하다 보니 신자 자신의 능동적 순종이 부정되었다. 따라서 반율법주의자들은 신자에게 있어서 참으로 칭찬할 만한 무엇은 성령의 직접적 사역으로 여기고 신자 자신은 전혀 보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청교도 주류는 신자의 성화가 하나님 보시기에 능동적이며 또한 점진적이라고 주장한다. 반율법주의자들이 신자의 삶에서의 칭찬할 만한 것을 모두 성령의 직접적 사역으로 돌림은 얼핏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극대화하는 듯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전가된’ 성화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삶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잘못된 행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고, 앞서 말한 대로, ‘질병’ 혹은 ‘연약’이라며 얼버무리고 만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도덕법 자체가 변경되었다는 백스터의 주장과는 달리, 청교도 주류는 바뀐 것은 도덕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신자들의 방식이라고 본다. 신자들을 종처럼 구속함은 도덕법의 의도와 다른 것이다. 신자들은 노역으로서나 혹은 종의 방식으로 의무를 행함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복음의 자유가 도덕법 준수에 있어서 노예성을 제거한 것이다. 죤 볼은 “순종은 지루한 봉사나 죽어있는 행위의 조각이 아닌 지극한 복으로의 길이요 영광의 관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변화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신자는 매우 기쁘게 도덕법을 지킨다. 즉, 법이 바뀐 것이 아니라, 법에 대한 신자의 태도가 바뀌었다. 신자는 이제 “하나님의 범이 자신의 요소”임을 발견한다. 이미 신자와 일체가 된 법은, 불신자들의 경우와 달리, 그의 안에 죄를 유발시키지 않는다. 이러한 자발적이며 기꺼운 순종을 가능케 하는 신자의 영적 능력의 갱신은 성령의 사역에 따른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자유는 율법에 대한 순종의 면제라는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불순종에서의 자유다. 죄로 향한 방종이 아닌 옳은 것을 행할 자유이기에 이것은 옳은 것을 명하는 율법 안에서의 자유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율법에 대한 반감 때문에 율법의 계명과 은혜의 자유가 공존할 수 없다고 부정했지만, 청교도 주류는 신자의 자유가 계명 때문에 제한받지 않는다고 보았다. 청교도들은 도덕법 준수와 관련하여 도덕법의 남용과 도덕법의 폐기라는 두 가지 극단적 입장에 맞서야만 했다. 도덕법의 남용은 성화를 도덕으로, 심지어는 율법주의로 환원시켜 버린다. 반대로 도덕법의 폐기는 성화를 감정주의(emotionalism)로 몰아간다. 성화를 도덕 혹은 감정으로 전이시키는 잘못에 빠지지 않기 위해 청교도들은 도덕법이 복음적이며 영적인 동기에 의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덕법 준수 의무의 지속은, 완화된 도덕법의 준수를 내세우는 신율법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경감되지 않은 도덕법의 준수를 의미했다. 변화된 것은 도덕법의 불변적 요구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준수하는 신자 자신의 자세였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신자의 자유가 “노예적인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어린애 같은 사랑과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굴복하는 순종”에 있다고 했다. 청교도들은 최고의 영성이 명령받기를 즐기는 삶에 있다고 믿었다.

 

라. IV. 맺는 말

 

17세기 중엽 영국에서 있었던 도덕법 논쟁은 신약시대 신자들에게는 도덕법이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는 반율법주의자들과 신약시대 신자들이 여전히 도덕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는 청교도 주류 사이에 오랜 기간에 걸쳐 전개된 논쟁이었다. 이 논쟁의 결과 드러난 반율법주의의 몇몇 심각한 오류들과 이와 관련하여 제기된 청교도 주류의 도덕법 준수 주장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약시대 신자들에게 있어서 도덕법의 폐지를 주장하는 반율법주의자들은 옛언약과 새언약 아래 있는 신자들의 상태가 동일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신약시대 신자들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도덕법과 전혀 무관하기에 신약시대 신자들에게 있어서 시내산에서 주어진 도덕법은 전적으로 폐지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청교도 주류는 도덕법은 태초부터 주어진 자연법의 재선포로서 신약 시대에도 폐지되지 않았고 여전히 구속력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청교도 주류와 반율법주의자들의 도덕법의 지속 혹은 폐지에 관한 상반된 입장은 대륙의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들 모두의 신학 작업의 틀과도 같았던 17세기 언약신학에 있어서의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모세언약 혹은 모세법을 반율법주의자들은 행위언약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청교도 주류는 타락 이후의 모든 언약은 은혜언약이라고 생각했기에, 모세언약을 은혜언약의 한 시행으로 보았다. 옛 언약인 모세언약은 새 언약과 마찬가지로 은혜언약의 한 시행인 것이다. 청교도 주류에 따르면, 시내산에서 주어진 도덕법이 신약시대에서는 어떤 의미로는 폐지되었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여전히 구속력을 갖는다. 구약 시행의 일부로서 그 시대에 독특한 도덕법은, 약속되기만 했지 아직 성취되지는 않은 그리스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확립된 새 언약에 의해 폐지되었다. 하지만 자연법의 선포로서 혹은 그 내용과 본질상의 규범으로서, 도덕법은 새 언약 아래서도 폐지되지 않았고 여전히 구속력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반율법주의자들의 또 다른 잘못은 칭의와 성화를 혼동한 것이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죄인이 모든 법적 죄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음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행위이고, 성화는 신자의 삶이 점점 더 경건한 양식으로 바뀌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런데 반율법주의자들은 단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칭의에 속하는 완전의 특성을 성화에 그릇 적용한 것이다. 청교도 주류와 반율법주의자들의 칭의․성화관의 차이는 그들의 상반된 언약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언약의 영원성을 강조하며 새 언약에는 인간 편에 아무런 조건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청교도 주류는 조건성이 언약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 생각한다. 행위언약은 물론이고 은혜언약도 비록 그 기초와 확립에 있어서는 무조건적이나 그 책무에 있어서는 조건적이다. 은혜언약에 있어서 신자의 책무는 바로 믿음과 더불어 믿음에 어울리는 올바른 삶이며, 그러한 삶의 지침은 도덕법이다.

반율법주의자들의 도덕법 폐지 주장이나 신율법주의자들의 도덕법 수정 주장에 맞서서 청교도 주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도덕법이 확립되었으며 그 도덕법이 구원받은 신자들의 삶의 윤리적 지침 즉 행위 규범의 역할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 드러내었다. 도덕법 논쟁과 관련하여 해석에 많은 논란이 있었던 구절이 로마서 10:4인데, 반율법주의자들은 그 구절의 “end”를 종식으로 해석해 그리스도의 사역이 도덕법을 폐지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들과 반대 극단에 섰던 신율법주의자들은 그 구절을 그리스도께서 도덕법을 수정하신 것으로 해석했다. 타락한 인간이 첫 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요구를 타락한 인간이 이행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의무에 약간의 변경이 필연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교도 주류는 이들 양쪽 극단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도덕법이 확립되었다고 주장했다.

신약시대 신자들에게 도덕법이 여전히 구속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청교도 주류는 도덕법의 세 용도 중에서 특별히 제3 용도를 강조했다. 즉, 도덕법은 구원받은 신자들의 삶의 지침으로서 행위 규범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성화에 있어서 도덕법의 제3 용도를 강조한 칼빈의 견해를 계승한 것이기도 했다. 반율법주의자들은 도덕법을 삶의 규칙으로 사용함을 극도로 혐오했기에 신자의 삶을 위한 유일한 규칙은 신자 자신의 마음의 경향을 통하여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충동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반율법주의자들에게는 행위의 객관적 지침이 없다. 이에 반해 청교도 주류에게는 도덕법이 행위의 안전한 규칙이 된다. 신자가 도덕법을 삶의 규칙으로 삼는다고 해도 그것이 율법주의가 아님은 신자의 선행은 공덕과는 무관하며 다만 그들의 칭의의 결과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신자의 선행은 신자로 하여금 칭의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받은 칭의의 증거라는 가치가 있다.

신자가 행하는 최고의 행함도 하나님 앞에서는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비록 신자의 순종이 불완전할지라도 그리스도 때문에 신자의 진실한 순종을 기꺼이 받으신다. 칭의의 증거가 되는 신자의 선행은 또한 성화의 증거도 된다. 그런데 반율법주의자들은 신자의 선행을 완전히 부정하고 신자 안의 선한 모든 것을 성령의 사역으로 돌린다. 얼핏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극대화하는 듯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반율법주의자들이 칭의에만 돌려야 할 전가의 방식을 칭의와 성화 둘 다에 적용시킴으로 그런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율법주의자들은, 그들의 주장대로 ‘전가된’ 성화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삶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잘못된 행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고 ‘질병’이나 ‘연약’이라는 모호한 말로 얼버무리고 만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도덕법 자체가 변경되었다는 신율법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청교도 주류는 바뀐 것은 도덕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신자들의 방식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신자는 매우 기쁘게 도덕법을 지킨다. 법이 바뀐 것이 아니라 법에 대한 신자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이러한 자발적이며 기꺼운 순종을 가능케 하는 신자의 영적 능력의 갱신은 성령의 사역에 따른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는데, 이 자유는 율법에 대한 순종의 면제라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불순종에서의 자유를 의미한다. 도덕법의 남용은 성화를 율법주의로 환원시킬 위험이 있으며, 반대로 도덕법의 폐기는 성화를 감정주의로 몰아가기에 청교도들은 이 두 극단적 입장에 동일하게 맞서야만 했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도덕법을 준수하되 복음적이며 영적 동기에 의해 그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교도들은 최고의 영성이 명령받기를 즐기는 삶에 있다고 믿었다.

 

 

 

 

 

 

 

 

 

 

 

 

 

 

 

 

 

 

 

 

 

 

 

 

 

 

 

 

 

 

 

종교개혁의 필연성

 

1. 종교개혁 493주년

 

← 루터, 1517. 10. 31(만성절 전야),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95개조.

 

2. ‘개신교인’(改新敎人)의 Identity 문제

 

(참조) 제임스 C. 기번즈, 「교부들의 신앙」, 장면 역 (서울: 가톨릭 출판사, 1993)

[1964년 초판 이후 13판 3쇄] 기번즈는 1887년에 추기경에 임명됨. 「교부들의 신앙」이 1876년 미국에서 초판 나온 이래 1927년에 83판, 현재까지는 백 수십 판 찍힘.

- 분열된 개신교회에 머물러 있지 말고 로마 가톨릭 교회(RCC)로 돌아오라는 내용.

 

3. 제네바 ‘흔들기’

 

이와 유사한 상황이 1539년 제네바에서도 있었음.

․칼빈이 제네바를 떠나 있는 시기에 프랑스 남부 까르빵뜨라의 주교 사돌레토 추기경이 제네바 시민들에게 ‘교회의 평화와 하나됨을 강조하며 RCC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냄.

․우여곡절 끝에 이에 대해 칼빈이 공개답서를 씀.

 

4. 하나님의 말씀 부재

 

사돌레토의 근본 문제 = 왜곡된 교회관: 성령님의 역할에 관한 치우친 강조만 있고 / 하나님 말씀은 교회 정의(定義)에서 아예 빠져 있음.

․칼빈도 catholicity와 unity를 지향하나 사돌레토와는 말씀의 역할 이해가 전혀 다름.

․복음적 가르침이 사라짐이 RCC의 가장 심각한 문제.

말씀 부재 ⇒ 진리 왜곡.

․schism이라는 비판에 대해:RCC → schism = RCC에서 떠남.

칼빈 → schism = 하나님 말씀에서 떠남.

교회일치의 참 끈 = 하나님 말씀.

 

5. 초대교회의지지

 

RCC의 규칙 ≠ 초대교회의 규칙.

․개혁자들은 교회를 초대교회 형태로 되살린 것.

․하지만 초대교회를 절대시하지 않음. ∵ 성경 > 교부들․공의회들.

․하지만 초대교회에 호소 가능함은 개혁자들의 교회가 초대교회의 전통에서 가장 좋은 부분을 갖고 있기 때문. [개혁자들의 교회 = 참 “가톨릭” 교회]

 

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교회일치

 

․개혁자들은 교회 자체에 맞선 것이 아니라, 거짓된 교회 지도자들에 맞섰음.

․하나님의 진리 〉 평화․일치.

․전체로 볼 때 RCC는 참 교회가 아님. 더 이상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님.

․참된 평화와 일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하나님의 말씀 & 총체적 그리스도가 교회 하나 됨의 올바른 지침.

 

7. ‘종교개혁의 필연성’의 이중적 의미

 

① 성직매매② 성자숭배/마리아 숭배 ③ 면죄부 판매

④ 성 베드로 성당 건축 ⑤ 말씀의 오염 ⑥ 교회 분열의 문제

 

8. 우리 자신 말씀․기도․교제의 훈련을!

 

 

 

 

종교개혁의 필연성

― 교회 하나임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

 

I. 들어가는 말

 

교회 역사를 공부하기 전부터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교회 하나임(the unity of the Church)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이었다. ‘종교개혁’이라 할 때 종교는 16세기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이르는 것이며, 그 교회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나온 새 교회가 개신교회(改新敎會)다. 개신교회가 생긴 과정을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개신교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해나간 교회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에게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름만 교회일 뿐 참 교회가 아니었기에, 개신교회는 분리해나간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으로 회복된 참 교회였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수 백년 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가졌던 교회관을 되짚음은 개신교회가 또 다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대치하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다만 선배들의 신앙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아 굽어지고 흐트러진 오늘날 개신교회의 모습을 바로 잡기를 바라서이다. 16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를 향한 개혁자들의 준엄한 꾸짖음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에 다시금 경종이 됨은 아프지만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꾸짖음을 겸허하게 새겨듣고 우리 스스로를 개혁함에 적용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부패와 타락에 빠질 위험이 항상 있음을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끊임없는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되새겼기 때문이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방대한 저작 중 야코포 사돌레토(Jacopo Sadoleto, 1477~1547)에게 쓴 1539년 9월 1일로 날자가 적힌 공개 답서에 교회 하나임에 대한 칼빈의 생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 해 3월에 프랑스 남부의 까르빵뜨라(Carpentras)의 주교인 사돌레토 추기경이 제네바의 행정관들과 시민들에게 교회의 평화와 하나임을 강조하며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도시의 중심적 개혁가들인 칼빈과 파렐(Guillaume Farel)이 1538년 4월에 예전에 관한 시당국의 결정에 따르기를 거부하므로 추방된 상황이었기에, 제네바 시가 로마 교회로 되돌아오도록 만들기에 아주 적당한 때로 보였다. 적절한 답변을 할 사람이 제네바에 없었기에, 그들은 그 편지를 베른 시로 보냈다. 베른 시당국은 다시 그때 스트라즈부르에 머물던 칼빈에게 답장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엔 망설였으나 친구들의 간청에 따라 칼빈이 답장을 썼다. 이 답장을 사돌레토의 편지와 더불어 1539년 9월 스트라즈부르의 방들랑 리엘(Wendelin Rihel)이 출판했다.

교회 하나임에 대한 칼빈의 사상에 관한 논문들은 많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 주제를 다루며 칼빈 저작 전반을 가지고 접근하다 보니, 이 답장에 좀 더 각별한 관심을 쏟지 못했다. 몇몇 학자들이 이 답장을 인용하거나 언급하긴 했으나, 교회 하나임에 대한 칼빈의 사상을 이 편지와 관련하여 떼어서 다룬 논문은 보지 못했다. 헷셀링크(I. John Hesselink)의 논문 역시 그 주제에 대한 칼빈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다루었다. 스타인멧츠(David C. Steinmetz)가 쓴 논문은 본고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교회 하나임을 주제로 다룬 것은 아니지만, 스타인멧츠가 논문의 삼분의 일을 칼빈의 답장의 주된 내용을 분석하는데 쏟았기 때문이다.

본고는 교회 하나임에 대한 칼빈의 사상 전체를 다 다루지 않고, 사돌레토에게 쓴 답장에 나타난 그 주제에 관련된 칼빈의 생각만을 다루었다. 이런 한계는, 역으로, 그 당시의 상황을 적절히 고려하면서 사돌레토에게 쓴 칼빈의 답장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것을 토대로 교회 하나임에 대한 칼빈의 사상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이 연구의 의미도 된다.

사돌레토에게 쓴 답장에서 칼빈은 하나님 말씀과 총체적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개혁자들은 분파주의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서 있으며 초대 교회의 지지를 받는 참 교회의 대표자들이다.

 

II. 하나님 말씀에 기초를 둔 교회의 참 하나임

 

1. 참 교회의 분명한 표지인 하나님 말씀

 

사돌레토의 편지에서 칼빈은 뒤틀린 교회관을 발견한다. 사돌레토가 교회를 정의하면서, 그 분명한 표지인 하나님 말씀을 빠뜨리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런 경시는 교회를 다스리시는 성령님의 역할에 관한 치우친 강조에서 비롯한다. 칼빈도 성령님께서 교회를 다스리심에 동의하지만, 교회 다스림이 애매하거나 불안정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성령님으로 말씀을 동반하게 하신다고 덧붙인다. 칼빈에 따르면,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속한 이들은 하나님 말씀과 다른 이들의 말을 분별한다고 말씀하신다[요10:27]. 같은 이유로, 성령님께서는 바울의 입을 통해 교회의 기초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선포하신다[엡2:20].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은 교회 갱신이나 그것을 전 세계로 확장함의 첫 자리를 항상 말씀에 돌린다[슥14:8; 사2:3]. (60-61)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빠뜨림은 사돌레토의 교회관의 중대하고 본질적인 결함이다.

밀너(Benjamin C. Milner)는 이것을 칼빈이 하나님의 비상한 일, 특히 교회에서 성령의 사역을 제도화(institutionalizing)하는 데 반대하는 것으로 본다. “교회의 좋은 질서는 비상한 것들로 구성되거나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설교하고 들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칼빈이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치우친 강조가 당시 로마 교회의 심각한 무질서를 낳았다고 본다는 밀너의 지적은 옳다.

사돌레토가 말씀은 빠뜨린 채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고 뻐기는 것을 칼빈은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반적 교회관이라 한다. 로마 교회 자체가 성령님을 말씀에서 떼어 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칼빈은 교황을 제세례파(Anabaptists)와 거의 같다고 여긴다. 그 둘 다 성령님을 지나치게 자랑하지만, 자기들의 그릇됨의 자리를 내려고 하나님 말씀을 끌어내리고 묻어버리기 때문이다. 성령님께서는 교회에 앞서 가시며 교회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도록 밝히시며, 말씀은 모든 교리를 판단하는 시금석과 같기에, 칼빈은 “성령님 없이 말씀 자체만을 펼침이 어리석은 만큼이나, 말씀 없이 성령님을 자랑함도 합당치 못하다”고 한다. (61)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 간에 균형을 유지하기를 바라며, 칼빈은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것보다 더 참된 교회의 정의를 차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앞으로는, 그것을 성도들의 모임, 즉 온 시대에 걸쳐 온 세계에 뻗쳐, 한 교리와 그리스도의 한 영(the one doctrine and the one Spirit of Christ)으로 묶이어 믿음의 하나임과 형제의 일치를 기르고 유지하는 모임이라 하라. 이 교회와 더불어 우리에게 불일치란 없다. 아니, 오히려, 우리의 어머니로 받들기에, 그 품속에 남기를 갈망한다. (61-62)

 

칼빈이 이 정의를 통해 보편(Catholic) 교회를 지향함은 분명하다.

헷셀링크는 이러한 교회 정의가 교회의 하나임(unity)과 보편성(catholicity) 둘 다에 관한 칼빈의 확신을 보여준다고 본다. “거룩한 보편 교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에 그들은 서로 서로와 더불어 하나이다.” 헷셀링크는 한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스타인멧츠는 칼빈의 정의의 또 다른 측면에 좀 더 주목한다. 스타인멧츠가 지적하듯이 레렝스의 벵상(Vincent of Lérins)은 “보편적 진리는 모든 곳에서(ubique), 항상(semper) 그리고 모두가(ab omnibus) 가르치는 교리”라 했다. 스타인멧츠는 칼빈이 사돌레토가 교회를 정의하면서 벵상의 규범을 사용하는 것은 존중하고 받아들이나, 그의 정의 자체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돌레토의 정의는 교회와 성령님만 언급할 뿐, 그것에 의해 그리스도의 영이 교회를 형성하고 다스리는 말씀에 대한 모든 언급을 빠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칼빈과 사돌레토가 교회 하나임과 보편성을 지향함은 같으나, 교회 가운데 하나님 말씀의 역할 이해에서 그 둘은 전혀 다르다.

칼빈의 이러한 교회 정의는 우리로 하여금 초판 「기독교 강요」에서 사도신경의 넷째 부분에 대한 칼빈의 설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서 칼빈은 이러한 성도의 모임을 보편 교회(the Catholic Church)라 한다. 유일한 차이는 그가 성도들이 “영원한 생명의 유업으로 부르심을 받아, 한 신앙과 소망, 사랑 안에서, 그리고 동일한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함께 사는 참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곳에서 발견된다. “한 교리”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1538년 판 교리문답서에서도 거의 동일하다. 그러한 차이에 대해 칼빈이 그의 답신에서 교회를 정의할 때는 사돌레토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차이가 이 답신에 나타난 칼빈의 교회 개념이 그 전 저작들의 그것과 다름을 의미하진 않는다. 1536년 판 「강요」에 덧붙인, 프란시스(Francis) 왕에게 쓴 편지에서 칼빈은 교회의 표지가 “하나님 말씀의 순전한 설교와 성례의 적법한 시행”이라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교리문답서 “교회” 부분에서 칼빈은 “교회의 가장 확실한 구분 표지와 특징”은 “주님 말씀을 순전하고 충실하게 설교하고, 듣고 또 지키는 곳에, 성례가 적법하게 시행되는 곳에” 있다고 썼다. 반면에, 그는 “복음을 설교하지 않거나 듣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곳에 어떠한 형태의 교회도 없음을 안다”고 한다. 그러므로 1536년 판 「강요」나, 1538년 판 교리문답서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다는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 말씀을 교회의 참 표지로 보는 점에서는 사돌레토에게 보낸 답장과 동일하다.

사돌레토에게 보낸 답장에서 칼빈은 교회 안전이 교리와 권징, 그리고 성례, 이 셋 위에 기초한다고 또한 말한다. 이것들에 의식이 넷째로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63) 비록 이 모든 것들이 뗄 수 없도록 엮여 있지만, 칼빈은 선지자적 복음적 교리의 진리가 사라짐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근본적이고 가장 심각한 문제라 여긴다. 로마 교회의 설교의 전반부는 학파들의 현학적 질문들을 다루는데 쓰이고, 후반부는 달콤한 이야기나 철학적 사변으로 채워져, 정작 하나님 말씀에선 거의 몇몇 표현만 따오는 것이다. (65)

하나님 말씀이 사라지니,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진리들이 당연히 왜곡되고 경시된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경시된 교리들 중 하나로 칼빈은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든다. (66-70) 믿음으로 의롭게 됨은, 선행의 공덕으로가 아니라 믿음만으로,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가운데 하나님께로 화목케 됨을 의미한다. (66-67) 이 교리에 대해 칼빈은 “이것에 대한 지식이 사라진 곳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끊어지며, 신앙이 없어지고, 교회는 깨지고, 구원에 대한 소망은 아주 뒤집어 엎어진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66) 하지만 로마 교회는 이 이신칭의 교리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그 자리를 행위와 고해, 그리고 고행으로 대치했다. (66-69) 이런 식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사람이 지어낸 교리가 하나님 말씀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반면, 개혁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설교했으며 자신들의 교리를 성서 위에 세웠다. (64-65) 칼빈이 볼 때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참 교회의 가장 분명한 표지인 하나님 말씀이 없었다.

 

2. 교회 분열: 하나님 말씀에서 떨어져 나감

 

하나님 말씀을 교회와 관련하여 그렇게 이해함은 칼빈으로 하여금 교회 분열(schism)과 이단(heresy) 사이에 밀접한 관련을 발견케 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전통을 통해 받은 교의들에 대항함을 이단이라 규정한다. 하지만 칼빈은 개혁자들이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가지고 로마 교회에 대항하는 반면, 로마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 말씀 대신에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교리를 교회에 끌어들인다고 본다. 그런 그릇된 지도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일반 신자들은 말씀을 받들어 모시면서도 읽거나 순종하지 않았다. (82)

일반인들은 물론 성직자들 가운데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런 경시와 무지는 로마 가톨릭 교회 모든 구석구석을 유해한 실수와 거짓 그리고 미신으로 채웠다. 하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이라 하면서도 성자들 상을 만들고 숭배했다. 성자들 무리 가운데 그리스도는 가장 하잘 것 없는 이들 중 하나처럼 무시되었다. 하나님 말씀이 명하고 그 말씀 위에 서 있는 구원에 대한 확신 있는 소망은 거의 사라진 반면, 선행에 대한 확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덕을 말살하고 무익하게 만들었다. (82-83) 이 모든 그릇됨은 하나님 말씀이 교회에서 끊어진 결과였다. 칼빈은 이런 그릇됨을 동반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 하나님 말씀이 끊어짐을 바로 이단의 표지라 여긴다. 그러므로 이 이단적 교회에서 분리는 교회 분열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이 교회의 가장 분명한 표지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교회 분열은 로마 교회에서 분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로마 교회 자체가 하나님 말씀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82) 로마 교회가 하나님 말씀 위에 서있지 않기에, 로마 교회에서 분리함이 분열에 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마 교회 자체가 하나님 말씀에서 떠났다는 점에서 분열이다. 이런 교회 분열관을 가지고 있기에 칼빈은 교황과 재세례파를 성령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희생시키는 두 “분파들”(sects)이라고 부른다. (61) 그러므로 칼빈의 분열 개념은 유형(有形)적 로마 교회에서 분리함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참 교회에서 분리함이다. 방델(Francois Wendel)이 말하듯, 참 교회는 로마 교회가 아니라, 초기와 같은 순전한 복음을 설교하는 개혁자들의 교회다. 로마 교회 자체가 참 교회의 유일한 기초인 하나님 말씀에서 떠난 분파다.

 

3. 하나님 말씀: 교회 일치의 참 끈

 

비록 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행실이 비정상적이고 저열하다할지라도 개혁자들이 거룩한 교회 안에 분리를 일으킬 이유는 없었다는 비난에 대해 칼빈은 먼저 그 교회 안에 있는 악행들을 열거한다. 무자비함, 탐욕, 무절제, 거만, 무례, 육욕 등등. (74) 하지만 칼빈은 이것들 중 어느 하나도 개혁자들이 그 교회에 항의한 필연적 이유는 아니라고 덧붙인다. 단순한 부도덕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이 그릇됨이 개혁자들이 정화를 시도한 진실로 필연적인 이유였다. 다시 말해, “신성한 진리의 빛이 끊어지고, 하나님 말씀은 파묻히고, 그리스도의 덕은 까마득히 잊혀진 채, 성직자의 직무는 파괴된” 것이다. (74-75) 하나님 말씀이 끊어짐이 모든 문제들 중에 가장 첫째요 중요한 것이다. 그 결과 “신앙에 관한 거의 모든 교리가 혼합되어 순전함을 잃고, 의식들은 오류에 빠지고, 거룩한 예배의 매우 사소한 부분까지도 미신에 더럽혀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75) 로마 교회 지도자들의 그릇됨을 간과할 수 없음은 그런 잘못이 교회의 기초인 하나님 말씀의 순전성에까지 뻗쳤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 말씀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문란하게 오염되었기에 개혁자들이 그 교회에 대항하여 전쟁을 선언했다고 한다. (75) 사돌레토는 편지에서 교회에 복종함으로 이어지는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교회에 복종함을 구원과 연결시킨다. 하지만 칼빈에게는 하나님의 엄위가 무시되는 교회에 무조건 복종함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경외를 희생시킴으로 사람에게 행해지는 무례한 겸손을 의미할 뿐이다. 스타인멧츠가 적절히 말하듯,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복종이지 가톨릭 교회나 그 성직자단(團)이 내는 모든 의견에 수동적으로 복종함이 아니다.” 따라서 칼빈은 개혁자들이 교회를 존중하나 그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며, 그들이 교회의 상급자들에게 귀기울이나 그들의 지고한 관심은 하나님 말씀을 숭상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75)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에 굴복할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칼빈은 성도가 사탄의 공격에 대적해 싸울 유일한 검이 하나님 말씀임을 되새긴다[엡6:17]. 하나님 말씀을 뺏기면 영혼은 무기가 없어 악마에게 져 파멸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은 사람의 증언이나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거기에서 진리와 거짓을 분간하는 교회의 힘이 나온다. (78-79)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교회가 사탄에게서 떨어져 있으며 그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유일한 길이다.

칼빈에게 하나님의 진리는 일치의 가장 강하고 중요한 끈이다. 그러므로 그는 로마 교회와 개혁자들 양쪽이 한 마음으로 합쳐 하나님 나라를 확립하기 위해서 모든 논쟁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제의한다. (86) 칼빈은 교회 일치의 참 끈인 하나님 말씀 위에서 일치를 추구해야 함을 확신하고 있다.

 

III. 초대 교회 형태로 교회를 개혁함

 

1. 보편 교회의 모범인 초대 교회

 

교회 단일성 개념에서 하나님 말씀의 자리를 확고히 하면서, 칼빈은 또한 사돌레토가 교회 전통에 호소하는 것에 주의를 둔다. 사돌레토는 하나님께 잘못 경배함보다 영혼에 더 유해한 것은 없으며,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경배의 최고 규칙은 교회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교제로부터 분리는 교회에 대한 명백한 반역이기에 교회 하나임을 침해하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 (53-54) 여기서 사돌레토는 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하는 이유가 교회에서 규정한 하나님 경배를 위한 규칙을 거부하기 때문이라 암시하고 있다.

칼빈은, 개혁자들이 사람들을 가톨릭 교회가 항상 준수한 하나님 경배 방법에서 끌어내려 한다는 사돌레토의 가정이 그릇됨을 지적한다. (59-60) 이것은 칼빈에게 하나님 경배를 위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규칙은 초대 교회의 규칙과 다름을 의미한다.

칼빈이 초대 교회를 교회의 참된 형태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참 교회의 유일한 모범은 사도들이 제정한 형태에만 있으며, 누구든 그것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칼빈은 교회가 사도 교회의 형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교회의 대안인, 적어도 초대 교회 형태로 돌아가야 함을 주장한다. (62) 워커(G. S. M. Walker)가 그 이유를 적절히 댄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이제는 끊어졌기에 “신약은, 비록 교리를 위한 영구적 규범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을 위한 일반적 규범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칼빈이 실제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초대 교회의 시기를 헬라 교부들 가운데서는 크리소스톰과 바실의 시기로, 그리고 라틴 교부들 가운데서는 키프리아누스와 암브로시우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기로 제한한다. (62)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하나님 경배를 위한 최고 규칙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낸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 규정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사돌레토가 1500년 이상 신자들의 한결같은 동의로 받아들여진 모든 것을 개혁자들이 찢고 파괴했다고 비난함은 근거 없는 것이라 한다. 더 나아가 칼빈은 초대 교회와 일치함에는 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보다 훨씬 더 가까우며, 개혁자들이 시도한 모든 것은 로마 교황과 그 무리가 거의 파괴한 교회의 초기 형태를 갱신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62) 개혁자들은 교회를 그 초기 형태로 되살린 것이다.

 

2. 개혁자들에 대한 초대 교회의지지

 

사돌레토에게 보낸 답신에서 칼빈은 개혁자들과 초대 교회의 유사성을 자주 언급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칼빈은 개혁자들이 교리와 관련해서 초대 교회에 호소하기를 주저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교리상 유사성은 그 두 쪽 모두가 성서에 바탕한 교리를 주장하기 때문임이 확실하다. (64) 이신칭의, 선행, 선택과 양자됨에 관한 중요한 교리들에서 칼빈은 개혁자들과 초대 교회 사이에 차이가 없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두 쪽과는 매우 다른 교리를 가르침을 발견한다. (66-70)

칼빈은 초대 교회에 보상(satisfaction) 개념이 있었음을 인정하나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죄인의 속죄의 본질적 효력을 겨냥함은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대신에 그것은 그들이 고백한 참회가 꾸며낸 것이 아님을 증명하며, 그들의 죄가 일으킨 추문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한 방법이라 여겨졌다. 보상이 누구나 모두에게 규칙적으로 처방된 것이 아니라 몇몇 지독한 사악에 빠진 이들에게만 처방되었기 때문이다. (70)

칼빈은 개혁자들의 권징이 초대 교회가 고백한 그런 것은 아님을 또한 인정한다. (64)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초대 교회 주교들이 행했던 참되고 거룩한 권징의 흔적을 칼빈은 찾을 수 없었다. (63) 따라서 그는 권징을 완전히 폐지한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이 개혁자들이 권징을 뒤엎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64)

성찬론의 경우, 칼빈은 초대 교회가 개혁자들과 더불어 화체설을 정죄한다고 말한다. 비록 그리스도의 현존에 관한 장소적 제한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이 지상적 요소로 격하되어선 안 된다. (71) 그래서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다르다누스에게 보낸 서신(Epistle to Dardanus)에서 “동일하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 신성의 광대함으로 하늘과 땅을 채우고 남음에도 그 인성을 따라서는 모든 곳에 흩어져 계시진 않음”을 설명한 것을 보라고 사돌레토에게 말한다. (70) 따라서 교회의 세 표지―교리, 권징 그리고 성례―와 관련하여 칼빈은 초대 교회가 로마 교회가 아니라 개혁자들을 지지한다고 확신한다.

칼빈에 따르면, 고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적도 없고 초대 교회가 행하지도 않았다. 교회 역사의 이른 시기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초대 교회 교부들의 증언을 봐도 마찬가지다. (71-72) 이에 더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은 그릇됨에 대해서도 초대 교회가 분명히 개혁자들 편에 서서 로마 교회를 대적한다고 확신 있게 말한다. 목회를 뒤집어엎고, 신자들에게서 성찬의 절반을 훔쳐가고, 성상들을 숭배하며, 면죄부를 팔아먹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파괴함이 그것들이다. (74)

연옥 문제는 칼빈이 개혁자들을 지지하도록 초대 교회에 호소하기에는 약간 껄끄러운 주제다. 하지만 칼빈은 연옥에 관해서 “초대 교회의 기도 가운데 죽은 이를 언급한 것이 몇 있지만 아주 드물며 단지 몇 마디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는 “그것은, 간단히 말해, 죽은 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함을 입증하는 언급일 따름이다”라고 덧붙인다. (73)

칼빈은 초대 교회 때 복음의 순전성을 손상시킨 몇몇 미신의 씨가 뿌려진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맞서 싸우는 불경건의 괴물들이 태어난 것, 혹은 적어도 그 같은 크기로 자란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고 덧붙인다. 따라서 칼빈은 로마 가톨릭 왕국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는데 개혁자들은 “신성한 말씀의 힘은 물론이요, 거룩한 교부들의 도움으로 또한” 무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73) 개혁자들이 모든 것을 다 초대 교회에 호소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초대 교회는 로마 교회에 대적하는 개혁자들을 지지함에 하나님 말씀과 함께 한다. 여기서 칼빈은 참 가톨릭 교회는 로마 교회가 아니라 개혁자들의 교회임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개혁자들의 교회가 초대 교회 전통에서 가장 좋은 부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초대 교회가 개혁자들을 지지하는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 말씀만이 판단의 영역 너머에 있으며, 교부들과 공의회들이 말씀의 규칙과 일치하는 한에서만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공의회들과 교부들에게 그리스도 아래서 그(것)들이 지키기에 적합한 그런 지위와 존경을 표한다.” (92) 칼빈은 교부들과 공의회들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들이 하나님 말씀에 일치하는 한에서만 인정한다. 비록 칼빈이 교부들과 초대 공의회들에서 개혁자들에 대한 지지를 모색하지만, “그는 그들을 존경할 만한 성서 해석가들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비록 교부들과 공의회들이 적절한 성서 이해를 위한 긴요한 조력자들이지만, 성경은 교부들과 공의회들 둘 다를 초월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궁극적 권위는 오직 하나님 말씀이다.

 

IV.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교회 일치

 

1. 참된 교회 일치를 위한 분리

 

개혁자들은 교회 자체에 대항해 싸운 것이 아니라 거짓된 교회 지도자들과 싸웠다. 칼빈은 로마 교회의 구성원들 모두를 비난하진 않으며, 다만 로마 교황과 그 거짓 주교들의 온 무리를 “지금까지 유일한 궁리 거리가 그리스도 왕국을 흩고 짓밟아 파멸과 황폐로 채우기인 광포한 늑대들”이라고 한다. (75) 더 나아가, 칼빈은 로마 교황을 “다른 곳도 아닌 하나님의 성소 중앙에 자리 잡은” 적그리스도에 빗댄다[살후2:4]. (76) 칼빈은 교황이 “그리스도를 대신해 다스리는 자로, 베드로의 계승자로, 그리고 교회의 머리로” 숭배를 받고 있지만, 그가 “하나님 말씀에 의해 교회의 머리로 지명되거나 교회의 적법한 행위에 의해 임명된 것이 아님은 확실하며, 다만 자진해서 제 자신을 뽑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89) 로마 교황의 폭정이 기승을 부리는 곳에 교회들은 거의 묻혀 있다. 거짓된 교회 지도자들의 불법 행위가 그 극에 달했기에 더 이상 참을 수도 고칠 수도 없다. (76)

그런 거짓된 교회 지도자들과 관련해서 칼빈은 교회 안에 목자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를 숨기고 있는 이들보다 하나님의 교회에 더 해를 끼치는 적은 없을 것이라고 사도들이 선포한 것을 상기한다[마7:15; 행20:29; 벧후2:1; 요일2:18].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우리에게 그런 광포한 늑대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라고 주의시키셨다. 따라서 칼빈은 “그분들이 나에게 적들로 여기라고 미리 경고하신 이들에게서 떠나기를 주저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85)

여기서 칼빈은 구약 선지자들의 예를 언급한다. 그들이 종교를 되살리기를 바라 그 당시 성직자들 그리고 선지자들과 유사한 싸움을 하였지만, 그들은 동일한 교회 가운데 여전히 있었으며, 오늘날 어느 누구도 그들을 분파주의자들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들의 예를 통해 확신을 갖고 칼빈은 비록 자신이 교회에서 이탈한 이라는 비난을 받는다할지라도 목자라는 자격으로 불경건한 폭정을 행해 하나님 교회를 황폐시키는 이들에 대적함을 결코 단념하지 않을 것이라고 외친다. (85-86)

칼빈에게 교회 하나임은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고백한다.

 

항상, 말과 행동으로, 하나임을 내 자신 얼마나 간절히 바라며 주장했나? 하지만 내가 열망하는 교회 일치는 주님께로부터 비롯하고 주님 안에서 마쳐야만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와 일치를 자주 명하셨던 만큼 동시에 주님께서는 주님만이 그것을 유지하는 유일한 끈이심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만약 내가 스스로 교회의 머리들이요 믿음의 기둥들이라고 거만을 떠는 이들과 더불어 화평하기를 갈망한다면, 나는 그 대가로 주님의 진리를 부정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그런 극악한 계약에 굴복함은 다른 무엇보다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주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이께서도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으리라고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4:35]. (85)

 

비록 평화와 일치가 중요하다할지라도 칼빈은 결코 그것들을 하나님의 진리 위에 둘 수 없었다. 교회 수장직(首長職)을 침해한 이들과 화평함은 참된 교회 일치가 아니며 하나님의 진리를 희생해 얻는 거짓된 일치일 뿐이다.

교회 단일성에 대한 칼빈의 이런 태도에 관해 헷셀링크는 “일치가 아무리 고귀하고 바람직하다 할지라도 진리를 희생하여 그것을 얻어서는 결코 안된다”고 말한다. 만약 하나님의 진리가 희생된다면, “그런 일치는 교회가 아니라 괴물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어떤 값을 치르고라도 일치를 이루려하지만, 그 일치는 하나님의 진리 위에 서있는 일치다. 라이드(W. Stanford Reid)는 칼빈에게 일치는 그것이 성서에 대한 복종 안에 있을 오직 그때만 교회의 타당한 표지라고 한다. 만약 하나님의 진리를 고수하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은 될 지 몰라도 더 이상 교회는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칼빈은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을 부정하지도 않고, 심지어 어떤 로마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전체로 볼 때 로마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칼빈은 거짓된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분리함은 참된 교회로 더 가까이 가게 한다고 말한다. (85-86) 실제로 그 분리는 교회 하나임을 깨뜨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개혁자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분리함을 의미하지 않고, 그들이 저들 거짓된 교회 지도자들과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85) 칼빈은 “교회 분열과 교회가 전염된 잘못들을 바로잡음은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가”를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개혁자들은 “교회를 고귀하다 하며, 일치 배양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고 말한다. (88-89) 거짓을 바로잡음은 교회 분열이 아니라, 참된 교회 일치로 더 가까이 나아감이다.

교회를 저버렸다는 비난에 대해서 칼빈은 “병사들이 참패하여 흩어져 대오를 이탈하는 것을 보고 지휘관의 군기를 세워 그들을 자기들의 위치로 되모으는” 이를 “이탈자”라고 여길 수 있는가 반문한다. 개혁자들은 흩지 않고 오히려 거짓된 교회 지도자들 아래에서 이미 흩어진 참 교회를 모은다. 그렇게 흩어진 이들을 한자리로 모으기 위해 개혁자들이 세우는 군기는 낯선 것이 아니고 그들이 따라야만 할 하나님의 진리라는 고귀한 깃발이다. (84) 칼빈은 말한다, 누가 잘못인가는 주님께서 판단하실 것이라고. (85) 교회를 그릇 이끈 이들이 잘못인가, 아니면 그런 거짓된 교회 지도자들을 거부하기를 결단한 이들이 잘못인가? 개혁자들이 행한 일은 참 교회를 확립하기 위해 거짓된 교회에서 떠난 것뿐이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에서 분리함은 교회 분열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 위해 필연적인 것이다. 칼빈에게 참된 교회 일치는 그리스도께서 그 하나임의 끈이 되신 바로 그때만 가능한 것이다.

 

2. 참된 교회 일치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 있음

 

답신 마지막에서 칼빈은 개혁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를 찢으려 했다는 가장 심한 비난에 맞선다. 만약 그 비난이 옳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개혁자들을 지독하게 여김이 당연할 것이라 한다. (92) 하지만 칼빈은 다음과 같이 논박한다.

 

그리스도의 신부를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기를 바라며, 그리스도를 위해 그녀를 흠 없이 보전하려는 거룩한 열망으로 고무되어, 비열한 유혹자들이 그녀를 오염시키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부부간의 정절을 환기시키고, 그녀의 순결을 깨뜨리기 위해 덫 놓기를 모색하는 모든 간부(姦夫)들에 대항해 주저함 없이 싸우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를 찢는 것임을 당신이 증명하지 않는 한 나는 그 비난을 인정할 수 없다. (92-93)

 

개혁자들은 교회를 찢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순결을 회복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오히려 칼빈은 거짓된 교회 지도자들 무리가 이상한 교리로 교회의 순결을 짓밟았다고 비난한다. 교회가 무수히 많은 미신들로 강간당하고, 가장 혐오할 간음인 성상 숭배로 더럽혀졌다고 덧붙인다. (93) 개혁자들이 교회를 찢었다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비난하지만, 그들 거짓된 지도자 자신들은 교회를 파괴하고 폐허로 만들었다.

이것을 이해하는데 스타인멧츠의 역사적 배경 설명이 도움이 된다. 실제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개혁자들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심각하게 깨져 있었다. 교황과 공의회, 프란시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스코투스주의자와 알베르투스주의자, 그리고 스콜라 신학자들과 인문주의자들 사이에 불화로 찢겨져 있었다. 스타인멧츠는 그것을 “교회의 부수어짐,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할 교리의 일치를 상실함으로, 그래서 종교개혁을 촉구한 것”으로 본다. 개혁자들이 몹시 조각난 중세 말의 교회를 성서의 가르침으로 하나 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교회의 그런 비참한 모습을 그리스도와 관련시켜 명료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에게 그릇되게 떠넘기는 그 찢어짐은 당신들 가운데서 또렷이 볼 수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 찢어짐은 교회뿐만 아니라, 비참하게 토막 내어진 그리스도 자신의 찢어짐이다. 만약 교회가 그 신랑을 무사히 모시고 있지 못하다면 어찌 그 배우자에게 충실할 수 있을까? 만약 그리스도의 공의와 거룩함, 그리고 지혜의 영광이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면, 그리스도의 안전이 어디에 있는가? (93)

 

칼빈이 볼 때 로마 가톨릭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니다. 만약 그녀가 그리스도의 배우자라면, 그녀는 자기 배우자를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자신이 그곳에 본래대로 계시지 않고, 찢어지고 토막내졌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에서 분리함은 “교회”에서 분열함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거기에 완전하게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당시 즈음해서 일어난 많은 분파들과 관련해서 칼빈은 “우리가 그 때문에 혐오를 받아 마땅하다면, 그리스도인이란 이름 또한 초창기에는 불신자들로부터 그런 혐오를 받아 마땅했다”고 한다. 따라서 칼빈은 “이 문제로 우리에게 성가시게 구는 것을 중지하든지, 아니면 세상에 그토록 많은 소란을 일으킨 그리스도교 신앙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내어놓고 선포해라!”고 외친다. (94) 분파들 문제는 교회 역사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칼빈은 개혁자들이 투쟁의 불을 지피기 전에 평화와 평정이 있었던 것은 다만 그리스도께서 침묵하셨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복음의 부흥 때문에 이전에 조용했던 곳에 큰 분쟁이 일어남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개혁자들을 “더도 말고 신앙 되살리기와, 불화가 흩뜨려 놓은 교회들이 참된 하나임으로 함께 모이기만을 갈망하는” 이들이라고 묘사한다. 개혁자들은 이미 흩뜨려져 있는 교회들을 모아 참된 교회 일치를 이루려 애썼다. 이것을 뒷받침하고자 칼빈은 그 당시 있었던 교회 일치를 위한 개혁자들의 노력을 언급한다. (93) 맥닐(John T. NcNeill)은 사돌레토가 칼빈과 대결한 것이 반동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의 주목할 만한 첫 도전이라 본다. 하지만 칼빈의 편지나 사돌레토의 편지 모두가 반동 종교개혁의 대표라 할 트렌트 회의(Council of Trent, 1545-1563) 전에 쓰여진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이(Eric G. Jay)는 그 회의의 교리문답서(1566)에서 ‘교회의 하나임’이란 제목 아래 교황의 가견적 수장직이 논의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나뉘어진 교회를 다시 하나되게 하려는 개혁자들의 노력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되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서기 전까지만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참된 교회 일치가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에 칼빈은 편지 제일 끝에 “우리를 성부 하나님과 화목시키신 주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가 흩어져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그분의 몸의 교제 속으로 모으심에 교회 일치의 유일한 참 끈이 존재하며, 그럼으로써 그분의 한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가 한 마음과 한 영으로 연합할 수 있음을 주님께서 당신과 당신 무리가 마침내 깨닫도록 해주시기를”이라는 자신의 기도를 피력한다. (94) 이 기도에서 라이드는 칼빈이 죄가 그리스도인을 여전히 속박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교회의 완전한 외적 일치가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있다고 추론한다. 하지만, 비록 칼빈이 이 땅에서 이런 하나임이 완전히 성취되리라고 기대하진 않고 있다할지라도, 여기서 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 하나임을 강하게 고수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런 평화와 일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진리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V. 맺음말

 

칼빈이 사돌레토에게 보낸 답신에 나타난 교회 하나임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주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칼빈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참 교회의 가장 분명한 표지인 하나님 말씀이 결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개혁자들이 로마 교회에서 분리함은 교회 분열이 아니다. 도리어 로마 교회 자체가 참 교회가 서 있어야 할 기초인 하나님 말씀에서 떠난 분파다. 칼빈은 하나님 말씀이 교회 일치의 참된 끈임을 강조한다.

둘째, 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함은 하나님 말씀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지지를 받는다. 이것은 초대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강조함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규칙을 규정함에서 로마 교회가 아닌 개혁자들과 뜻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은 교회를 초대 교회 형태로 되살렸다. 그러므로 참된 가톨릭 교회는 로마 교회가 아니고 개혁자들의 교회다. 후자가 초대 교회 전통 중 가장 좋은 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초대 교회의 권위도 하나님 말씀의 권위 앞에는 복종한다. 교회의 궁극적 권위는 오직 하나님 말씀뿐이다.

셋째, 칼빈이 볼 때 참된 교회 일치는 교회는 물론 그리스도까지도 찢고 부수어 버린 거짓된 교회 지도자들과 화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참된 교회 일치는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 계시지 않기에, 그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신부라 여겨질 수 없다. 그 결과, 그것에서 분리함은 교회에서 분열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거짓된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그들과 맞서 싸움이 개혁자들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참된 일치로 더 가까이 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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