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8 13:46

사도신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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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

 

사도신경은 주기도문과 더불어 모든 교회에서 암송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반면 사도신경은 성경 가운데서 자구적으로 일치하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도 신경이 교회 역사 가운데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암송되며 사랑받는 것은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진리가 함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도신경은 인간 구원과 관련된 성경의 진리를 요약하여 구원의 주체이신 삼위 하나님의 사역별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이 성경 자체와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성경에서 구원의 진리를 추출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성경적인 것이다.

한편 사도신경이 언제부터 고백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전설적인 이야기로는 예수께서 승천하신지 열흘이 되던 날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앞으로 그들이 전파할 복음의 내용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요강을 만들었는데 이때 사도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말한 내용을 엮은 것이 사도신경이란 것이다. 이는 사도신경에 12번의 '믿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과 조화를 이루며 사도신경의 기원을 사도에게 둠으로써 권위를 갖게 하려는 의도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사도신경은 A.D 710-724년에 작성된 문서에서 비로소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사도적 권위를 갖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활동하던 초대교회 당시부터 성도의 신앙 고백으로 사도신경이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이는 사도들의 바른 신앙이 전승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계속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방대한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간결한 형태로 정리하여 일관성 있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교육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기독교의 순수성을 해치는 이단의 그릇된 견해를 분별하는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성도들로 하여금 항상 바른 신앙을 고백케 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신앙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성경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역사성을 지닌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인간 구원을 이루시는 삼위 하나님의 역할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별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본서에서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자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원 사역을 구분하여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성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바 이에 대하여는 성자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과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나누어 해설하고자 한다. 실로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을 깊이 음미한다면 큰 신앙의 성장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장 신앙고백의 주체선언-각개인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즉 "내가 믿습니다.(I believe in)"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시작되는 사도신경의 서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개인적인 것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신경 암송자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먼저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에 가입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사도신경에 진술된 진리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신앙의 토대 위에서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여 사도 신경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교회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성경에 계시된 동일한 진리를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신자들은 교회에 나아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이지 않을 것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겠는가?"(고후 6:15). 그러므로 신자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신앙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미 말하였거니와 사도신경은 먼저, 교회 각 회원의 개인적 신앙의 표현이었기에 그들의 것이다.

이 진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분명히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신앙생활은 단지 종교적인 관습에 지나지 않게 되고 이러한 관습적 종교 행위는 조만간 따분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다. 십대들은 교회 학교가 따분하기 때문에 거기서 떨어져 나간다. 성인들도 설교가 자기들의 분명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교회에서 멀어진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 내용이 지적된다. 청중은 그 설교 내용을 이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시편 10편에 나오는 악인과 흡사하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 10:4)고 한다. 분명히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들도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단순히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미래가 보장받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 없는 자들은 형식상 교인일 뿐이며 실상은 교인 자격을 박탈당하고 교회에서 쫓겨난 자처럼 교회 안의 잃어버린 자이다.

구원은 복음의 진리를 체득하고, 자기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 한사람, 한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씀에 깊이 주의한다면, 진실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장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주의 시작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구원 역시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인간 구원에 대한 성경의 진리를 요약 기술하는 사도신경이 구속 사역의 주체이신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합리성을 지닌다. 여기서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하나님 존재에 대한 증명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실 수 있는 근거로서 전능하신 분이심에 대해 각각 구분하여 다룬다.

 

1. 하나님의 살아 계심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때때로 우리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막 9:24)라고 외친 사람의 갈급한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을 깊이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진정 믿는 자이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서, 또는 과학 시대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미신이 아닐까 의심하면서 하나님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 그리고 사도신경으로 이러한 바른 신앙을 표현한다.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논리적으로 밝혀 내지 못했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만이 필요하다(시 42:2).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키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 가능성을 입증해 주는 증거는 분명히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실재를 확신한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증거를 무시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믿기를 거부한데 대한 명확한 변명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증거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우주의 합리성을 생각해 보자. 거대한 우주가 질서 있게 존재한다는 것은 사려 깊고 합리적인 창조주가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여 준다. 흔히 신학자들은 네 가지 표제로써 우주의 합리성을 논한다.

 

첫째는 우주론(Cosmology)이다.

우주론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우주의 기원과 특성을 연구하는 형이상학의 한 분야"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이러한 우주론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우주를 만드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둘째는 목적론(teleology)이다.

목적론이란 현존하는 "자연 속에는 목적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하는 학설이나 신념"이다. 인간의 한계를 갖는 사고로는 자연의 목적은 너무 복잡해서 그 생성과 발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 활동이 질서 있게 합목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바 그 배후에는 지혜로운 창조주가 계심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인류학(anthropology)이다.

이것은 인간의 체질이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이란 우주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그리스도인은 믿는다. 또한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만이 그 계획을 이해할 수 있다. 창조주처럼 인간은 지적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또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우발적으로나 우연의 일치로 생겨났다고 믿는 사람은 실로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비인격적인 근원에서 진화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임이 분명하다.

 

넷째는 존재론(ontology)이다.

존재론이란 "존재와 실체에 대한 학문으로서, 존재의 본질이나 그 핵심적 특성 및 관계성을 탐구하는 지식의 한 분야"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존재론의 주장에 따르면, 완전해지려는 인간의 노력은 완전함의 근원, 즉 완전하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증거라고 한다.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다. 우리가 완전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어디서 그 개념을 얻었겠는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완전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 139:1, 시 139:13).

 

위에서 살펴 본 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어떤 지적인 주장보다도 더 나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체험이다. 다윗은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아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7-18).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한 공동으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다.

 

2.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추상적인 영향력으로 믿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사도신경은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라고 진술한다. 이 말은 무슨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가? 탕자의 이야기(눅 15:11-32)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그 대답이 주어진다.

탕자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어느 집이라고 "탕자 같은 아들"이 없겠는가? 아마 탕자 같은 딸도 있을 것이다.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작은 아들은 어떤 부랑자보다도 더 망나니였다. 그는 대단히 반항적이었으며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가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은 영혼이 병든 징후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뉘우치고 그렇게 매정하게 저버렸던 자기의 늙은 부친에게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한 젊은이의 영적 방황기 이상의 것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 사상은 오히려 부친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아버지가 아들 기다림을 멈추지 않았던 사실과 또한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기꺼이 맞이했던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어느 가정에나 방탕한 아들은 있지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사랑이 풍부하며 철저히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는 흔치 않다. 이 아들은 문학 비평가들이 전형적인 인물(archetype, 즉 전기나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일컬을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문학가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 가운데 이와 같은 인물은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맞으러 달려가는 아버지와 흡사한 분이다. 오히려 그 이상이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가 하나님, 즉 자기 품으로 돌아오는 죄인들을 환영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가장 귀한 진리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바로 자비가 풍부하신 우리 아버지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고백은 두 가지 의미에서 분명한 사실이다.

첫째 만물을 창조하심으로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되시며, 죄인을 구속하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되신다. 여기서 후자가 보다 중요한 구분이다. 따라서 구속함을 입지 못한 불신자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 즉 그들의 창조주로서 만의 아버지이시다.

 

둘째 구속적인 의미에서도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성경은 이 진리를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시켜서 말한다. 바울은 "우리는 그의 소생이라"(행 17:28)고 한 어느 시인의 말에 찬동하며, 그것을 인용한다. 에베소서에서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엡 3:14-15)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탕자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극화시켜서 나타내 준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제 갈 길로 간 그의 자녀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두 팔 벌리고 기다리신다.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안기게 된다.

이처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개념은 신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벌써 나타난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그는 전혀 새로운 무엇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과 부자 관계 맺기를 기뻐하셨다는 내용이 구약 성경에 나타난다. 그 관계가 인간의 범죄 함으로 인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 관계를 맺으려 하셨다.

그것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대화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성전 건축의 특권을 허락하시지 않았다고 하며 자기 대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찌라 저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저의 아비가 되어..."(대상 22:9-10).

일찍이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기를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다윗이 메시아를 내다보며 쓴 시에서,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 89:26)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다윗이나 다른 그 누구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참으로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구약에는 많지 않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아도나이(Adonai)나 여호와(Jehovah)로 불렀고, 아버지라고 부른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홀로 그러한 관계를 바라셨지만 패역한 이스라엘은 그것을 거절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굳은 마음에 호소하였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 그 후에, 하나님은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 하고 물러갔도다."(사 1:4)라고 슬퍼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고 하셨다. 이 말이 주님의 탕자 비유의 근거일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자식으로 삼아 사랑으로 양육한 옛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사야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 아버지시라...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사 63:16 참고, 사 64:8).

예레미야는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와 같았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를 대단히 슬프게 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으로 인하여 슬퍼하셨다.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 중에 아름다운 산업인 이 낙토를 네게 주리라'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렘 3:19).

그러나 그 백성은 이 말씀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 됨에 응했는가? 응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 되시기를 원하시지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나아가기 전에는 그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실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자녀가 된 후에야 여러분도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전능하심

 

사도신경을 만든 사람들은 세상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를 구별하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에 대해 '전능자'(Almighty)라는 단어를 덧 붙여 놓았다. 전능자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음"을 뜻한다. 실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신약 성경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히 7:25),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신다(고후 9:8).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없게" 하신다(유 1:24). 그는 "[우리를] 능히 든든히 세우시는" 분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시다(엡 3:20).

간략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시는"(히 7:25) 분, 또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엡 3:20)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못하실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는 일은 비길 데 없이 논리적인 일이다. 무력한 하나님을 상상해 보라. 누가 그런 시시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겠는가?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인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가? 물론이다. 그 사실은 '아버지'라는 이름에 암시되어 있다. 전능자라는 말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을 뜻하며, 아버지라는 말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시려 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진정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시는 분임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진리를 증명해 보이셨다.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그리고 나서 바울은 웅변적으로 질문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정말 멋진 질문이 아닌가? 바울은 스스로 그 질문에 대답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이처럼 하나님은 아버지가 자녀를 위함같이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사실을 분명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이 전능자의 손을 움직인다. 전능자의 능력은 냉정하고 빈틈없지만,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거룩하신 아버지, 즉 자상하신 창조주의 마음에 의해 이것이 조정된다. 예를 들면, 시편 기자는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2)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라고 했다. 또한 밤에 여호와의 전을 지키던 자들이 부른 놀랄 만한 노래 말들을 살펴보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시 134:3).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표현일 것이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28-31).

땅 끝까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가 그의 백성을 자녀와 같이 대하시며 극진히 돌보고 계신다. 천지를 만드신 전능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성경의 증거를 무시하고 세상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묻고 대답하는 여러 사상들이 있다. 다신교(Polytheism)는 창조의 주체로서 여러 신들을 말하며, 유물론(Materialism)은 세상이 우연히 생기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자연신교(Deism)는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창조활동을 하신 것은 인정하지만 곧 세상을 제멋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범신론(Pantheism)은 하나님을 그가 지으신 세상에 가두어 버리고, 그 세상과 하나님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다고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재적(세상 속에 계심)이시지만 또한 초월적인 분으로(세상을 떠나 계시며 그것을 다스리신다)계속 피조 세계와 관련을 맺고 계신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땅 위에서 가장 마음씨 좋은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세상에 있는 가장 사랑 많은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비교하면 사랑이라 할 수 조차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요한은 간결하고도 아름답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낸 것을 우리가 보았고..."(요일 4:14). 하나님께서는 사업 여행이나 휴가차 그의 아들을 보내시지 않으시고,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 선교하러 보내셨다. 만약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이 세상 어디에 사랑이 있으랴.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었으며,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아버지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제3장 성자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구원 사역의 주체이신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간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성취되었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구속 사역의 성취자이신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 뒤따르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셨으나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생활하시다가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는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대표로서 죽음을 당하셨다. 성경은 이와 같은 구속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 되었는바 사도신경 역시 이를 반영하여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 상대적으로 길게 나와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앞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을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Lord)되심에 대해 각각 구분하여 다룬다.

 

1. 믿음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의 사도신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내용의 심오함에 비해 놀랄 만큼이나 간결한 사도신경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내용을 80개의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성부에 대해 9단어, 성령에 대하여 3단어, 성자에 대해서는 68단어이다. 어느 작가가 표현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계시의 중심이며...기독교의 초점(Focus)과 충만(Fullness)이며...다른 모든 사실과 진리에 생명력을 부여해 주는 진정한 사실(Fact)이며 진리 (Truth)"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7가지 중요한 진술을 하고 있다. 그것들은 각각 위대한 진리를 암시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무죄성은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수태 사실에 의해 암시된다. 우리의 위대한 제사장으로서 그의 중보 사역은 승천 사실에 의해 암시된다. 사도신경은 이러한 내재된 의미를 해설하지 않고 그저 사실들만 기술할 뿐이다.

사도신경의 사실 진술에 나타난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그리스도의 인격과 또한 그리스도와 성부 및 성도와의 관계의 표현인 "그 외아들 우리 주..."에 대해 살펴보자. 둘째는 성육신, 즉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에 대해서, 셋째는 그의 고난과 죽음, 즉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에 대해서 살펴보자. 넷째는 그리스도의 영이 3일 동안 보내심을 받은 장소에 대해서, 다섯째는 부활에 대한 선포,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에 대해서, 여섯째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지위의 회복, 즉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려고 다시 오심, 즉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한편 사도신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첫째, 고난과 영광이 병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당시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지내어지는 고난 가운데 처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또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셨으며, 때가 되면 자기를 거부한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영광된 모습을 취하실 것이다.

둘째,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고 있으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은 부각시킨다는 사실이다. 성육신은 그리스도가 본래 누구인가를, 즉 하나님의 죄 없으신 아들이심을 말해준다. 이 사실에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사신 삶의 성격과 죽음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거룩하신자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다른 인간과 같이 죄에 대한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대속의 필요성, 즉 당신과 나를 위한 대속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런 필요성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신앙이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분한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다같이 유일신교이며 예수님을 하나의 선지자로 알고 있지만 예수님의 신성과 구주되심을 부인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 이상이신 분이다. 그가 곧 하나님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것을 증거 하는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첫째, 그리스도는 무죄하시다.

그리스도는 원수에게 자신의 죄를 찾아보라고 하셨다. "너희 중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 그의 제자들은 원수들이 그리스도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침묵했던 사실을 잊지 않았다. 후에 베드로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 2:22 참고, 사 53:9)라고 기록했다.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자"(고후 5:21)라고 했다. 예수님의 무죄성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만이 지닌 유일성을 입증하는 도덕적 기적(moral miracle)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무죄성을 지닌 존재는 자신에 대하여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라 주장한 그리스도는 바로 무죄한 하나님이셨거나 아니면 제자들이 완전한 사람이라고 믿어왔던 것보다 훨씬 못한 거짓말장이였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그리스도를 대적한 자들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주장이 그리스도에게 사형을 선고할 법적 근거가 되었다. 그들이 사형을 요구 하면서, 예수님을 빌라도 앞에 데려가서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 19:7; 요 5:17-18; 요 10:30-33)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결국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주장하였기 때문에 죽었으나 죽음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소멸치 못했음은 부활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셋째, 초인적인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그는 물 위를 걸을 수도, 바람을 다스릴 수도,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있었다. 그를 비판하던 어떤 자들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을 목격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믿게 되었다(요 11:44).

넷째,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예배를 받아들이셨다. 만약 그가 단지 인간이었다면 그에게 예배한 자들에 대한 그의 승인은 죄악이었을 것이다(요 9:38).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인간인 동시에 초인간적인 분으로 묘사한다. 기독교는 예수라는 인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하나님이란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말한다. 서신서에서는 인사와 축도시에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가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엡 1:2) 은혜와 평강이 그의 독자들에게 있기를 기원했다. 그 다음 구절에서 그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양했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이며 그리스도는 예수의 직함이다. "구세주"(Savior)라는 뜻을 가진 "예수"란 이름은 그가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를 가르쳐 주며,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도"란 직함은 그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말해준다. 즉 그리스도란 말에서 보여 지듯이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란 말에서 보여 지듯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흔히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아들에게 있어서 그 이름은 새로운 의미를 지녔다. 천사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에게 나타나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사도신경에서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 그 이름은 역사적 사건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터무니없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에 살았던 분이심을 보여 준다.

둘째,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의 선교 사역을 분명히 나타내 준다. 예수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여호수아'란 이름에서 연유 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Messiah)에 해당되는 헬라어이며 그 의미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 예식상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직임에 취임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언젠가는 선지자, 제사장 및 왕의 직임을 겸할 어떤 이가 오리라는 소망이 싹텄다. 그것이 곧 메시야 대망 사상이라 불려진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그 소망이 실현되었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급히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요 1:41)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자기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고백이었다. 이제야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바로 인식되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날에 동의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이 절대 과장일 수 없다. 예수께서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한 옛 모든 예언의 완전한 성취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이시며(신 18:15; 행 7:37), 아론보다 큰 제사장이시며, 영원한 보좌에 앉으신 왕이시다.

 

이상이 바로 우리가 사도신경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신앙 고백을 할 때에 내포되어 있는 주요 내용이다.

 

2.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어느 바리새인과의 대화중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마 22:42)라고 질문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답변해야 할 그 대답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저항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에는 이 질문에 대한 완전한 대답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천명한다. 즉 예수의 질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정의를 요구한 것이고 이에 대한 사도신경의 대답은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의 첫 번째 조항은 이 부분에 나오는 성자에 대한 조항의 예비적인 성격을 띠는데, 그 까닭은 아버지와 아들과는 필연적 관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면 그 아들이 있어야 함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예수께서는 자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말씀하셨다. 그는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23). 이 말을 생각하면서 사도 요한이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도 요한은 어느 대적 자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부자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 하는도다.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9)고 대답하셨던 것을 기억했을 수도 있다.

한편 하나님과 예수님의 부자관계에 대해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실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첫째, 그 관계는 영원한 것이며, 둘째 유일한 관계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남으로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부자관계는 영원한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셨고, 땅 위에 있는 아들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고 말씀하셨다. 시 2:7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등의 구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니라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행 13:3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라고 기도하기를 배웠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아들이기는 하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아버지 되심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도인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으로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은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다. 그가 바로 "독생자"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3:16).

부활하신 후에,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고 하신 명령 속에서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시라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아닌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함께 "우리" 아버지라 하지 않았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일 수 없는 측면에서 그의 아버지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미에서 성도로 부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그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이 특권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님을 주로 알게 되는 것이다.

 

3.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또한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독특한 분이시다. 이런 독특함은 하나님과 인간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사도신경은 먼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하나님의] 외아들" 즉 독생자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어 우리와 그의 관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직함에 의해 나타난다. 예수님의 친구들이 그를 "주"자 불렀고, 그는 그 명칭을 받아들이셨다. 성만찬을 제정하신 그 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선생과 주"라 했던 것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라고 하셨다. 이처럼 사도신경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로 단언한다.

그러면 이 칭호는 무엇을 뜻하는가? 적어도 두 가지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이시며, 둘째, 그는 주권자이시다. 불신자는 이 주장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믿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예컨대, 바울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9)고 했다. 같은 문장에서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다.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로다."(사 45:23). 또한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장엄한 문장으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처럼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를 분명히 하나님으로 믿었다고 주장한다. 그를 선한 사람으로 믿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이시거나 아니면 아무 젓도 아니다. 훌륭한 도덕 선생은 존경을 받을 만하기는 하지만 우리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을 구하실 수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믿는 바로 그 신앙의 내용이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주권(sovereign)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 개념은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주권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통치(reign)라는 단어는 "왕권(royal authority), 지배권(dominion), 세력(sway)"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의 동사형은 "왕이나 군주로서 통치한다."는 의미이다. 주권(sovereign)이라는 단어 의 접두어는 "위의"(above)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super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이 단어에서 supreme(최고)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래서 supreme(최고)와 reign(통치)를 합치면 sovereign(주권)이 된다. 따라서 엄정한 의미에서 주권(sovereign)이라는 단어를 왕이나 군주에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떤 통치자도 진정한 지도자(supreme)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영 제국이 주권을 지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 세계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유일하고 진정한 주권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완전한 의미에서 통치자요, 지도자이시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그는 자신의 절대적 주권을 선언하셨다. 그 위대한 주권의 선언을 근거로 하여 그는 제자들을 땅 끝까지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고, 또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을 위임하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자신의 우주적인 주권을 선언하셨을 때, 사도 바울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주권자로 인식했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반복해서 이 진리를 강조했다. 바울이 말한 내용을 예를 들어보자.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고전 15:25). 또 다른 곳에서는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빌 3:21) 라고 말했다.

이러한 구절들은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 즉 그리스도께서 현재 최고의 주권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범죄 하여 사망의 권세 하에 있는 인간이 그 권위에 반항하는 것을 내버려 두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계시고, 때가 차면 그 권위를 완전하게 행사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주(Lord)로서만 아니라 또한 사도 신경의 표현대로 "우리 주"(Our Lord)로 믿는다. 왜 우리(our)라는 소유격 대명사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믿는 사람과 그러기를 거절하는 사람을 명확히 구분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자세 때문이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그를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약 2:1)라고 부르는데 익숙해 있었다. 베드로는 그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벧전 1:3)라고 불렀으며,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벧전 5:11)라고 했다. 요한은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한 놀라운 광경을 기록하였다.

만약 도마가 이 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두 구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태도를 분명하게 요약해서 말한다.

첫째 그는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입으로 신앙을 고백해야 하며, 도마가 믿었던 그 내용을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 즉,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과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어야 한다.

둘째,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러한 구절들은 예수님을 주로 단언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알지 못하는 신앙은 옳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앙과도 위배된다.

"우리 주(Our Lord)"라는 말의 소유격 대명사가 복수임도 유의해 보자. 그것은 믿음으로 인한 성도의 교제를 나타내 보여 준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내가 믿고 또한 여러분이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함으로, 그는 사도 공동체의 친교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사도 신경으로 개인적인 신앙("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을 고백하고, 또한 공동적 신앙("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도 고백한다.

이보다 더 위대한 신앙 고백이 있을 수 있을까? 만약 여러분이 진실하게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참된 일원이 되는 것이다. 세계 도처에 있는 모든 신자와 더불어, 여러분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제4장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는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은 구속 사역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본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완성 하실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원래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탄생을 통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장차 이땅에 다시 오셔서 죄인을 심판하시고 믿는 자를 구원하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의 구속 사역에 대한 진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성경의 중심 내용인바 사도신경은 비교적 깊고 자세하게 이를 다루고 있다.

 

1.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로 제기하는 것이 동정녀 탄생이다. 그러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대해 어느 누구도 죤 피어슨(John Pearson) 주교가 <사도신경 강해> (Exposition of the Creed)라는 제목으로 1867년에 출판한 책에서 설명한 것보다 더 잘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의 잉태 사실에 대하여 그가 쓴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가 있다.

 

(1) 그리스도는 성령의 역사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셨다.

(2) 그리스도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없으며, 단지 요셉의 아들이라 일컬어졌을 뿐이었다.

(3) 우리는 잉태의 과정, 즉 처녀가 성령에 의해 잉태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

(4)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누구가 아닌, 그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실제적인 인물을 통하여 인간이 되심을 안다.

(5) 그 어머니를 통해서 예수님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셨다.

(6)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완전 무죄 성을 믿기 위해 우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믿어야 한다. 피어슨 주교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방법은 이렇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여자의 몸에 잉태되었지만, 인간의 방법으로나 육체적 결합으로나 일반적인 인간의 수태 방법으로 잉태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성령의 독자적이며 능력 있고 불가시적이고 직접적인 사역에 의해 잉태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처녀가 잉태를 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그에게서 잉태되신 분은 본래부터 거룩하신 분이었다.

동정녀 탄생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지니시고 행하신 초자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반복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실험하는 것과 같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취급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교리가 논리를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방법으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수 있음을 왜 의심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을 임신케 하시며, 남자의 도움 없이도 처녀를 잉태케 하실 수 있는 실로 전능 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데에는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성경의 증거이며, 둘째로는 그의 무죄성이다. 원죄를 지닌 아담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악 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성은 흠이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의 생애가 그것을 입증했다. 이것은 혈통적으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므로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탄생 사실 이외의 어떤 다른 말로서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와 같이 그리스도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으나, 우리와는 달리 처녀에게서 나셨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기사는 그리스도의 실제 탄생이 기적적이었음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가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태어났다고 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또한 그 기사는 단지 그리스도의 잉태만이 초자연적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다른 두 사람의 성경 인물도-이삭의 어머니와 세례 요한의 어머니-초자연적으로 잉태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탄생만이 갖는 고유한 의미로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은 항상 "성령으로 잉태하사"라는 상대되는 구절과 결합해서 생각해야 한다.

엄격히 말해서, 동정녀 탄생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나 이 교리가 사도들의 가르침 중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아마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까지도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신적이거나 맹신적인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알지 못하면서도 동정녀 탄생은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탄생으로보다는 부활에 의해 입증된다. 그래서 여러 사도들은 부활 사실을 중점적으로 증거 했던 것이다(롬 1:4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그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실 때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아기로 나시지 않고 성인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그의 몸에는 두 가지의 인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두 인격을 지니신 것이 아니었다. 한 인격에 두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을 지니고 계셨다. 신학자들은 한 인격 속에 두 본성의 연합을 "위격의 연합"(the hypostatic union)이라 부른다.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우리 중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상이 우리가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고백할 때마다 인정하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

 

2.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 대한 기록은 생략하고 그의 탄생에서 바로 고난으로 건너뛴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택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신앙의 주제가 부각되어 있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신앙의 귀감이며 사단의 세력과의 투쟁으로서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강조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강조한다. 주님께서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태어나셨다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구원 사역의 핵심임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을 주님께서는 꾸짖으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5-26).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이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에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기사에 삼분의 일을 할애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요한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술하는 데에 거의 반을 할애한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정신적 고통이나 고난 주간 이전에 겪은 어떤 고통도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 주님은 생애 중에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셨다. 그 중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버리실 것이라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사단에게 고난 받았으며 그를 죽이려 하던 악한 자들에게서도 고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이런 고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난, 그 자체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었다.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 중의 상당 부분은 단순한 인간의 경험일 것이며, 그런 것은 그리스도의 본래의 거룩하심을 더 강화시켰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백성을 구원하시도록 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고 박해 당하시던 당시에, 로마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언급에 주목해 보자. 왜 빌라도라는 인물이 언급되는가?

피어슨 주교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주장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시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과 확실한 사망의 외적 증거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기 위해서이다.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에 대한 한 사람의 증인이었으나 그는 그리스도를 핍박자들에게 넘겨주었고 죽음을 인정했다.

셋째, 예언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빌라도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된 사도신경의 기사에 대한 피어슨 주교의 보충 설명을 살펴보자.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사 사람들의 죄를 위해 고통을 받게하시니, 이때는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가 즉위한지 15년이 지난 때요,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하던 때라, 빌라도는 유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자신이 무죄하나고 선언한 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성경의 예언에 따라 그를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 형벌에 내어 주었더라.

 

피어슨은 이러한 해석은 빌라도에 대한 언급이 갖는 세 가지 요점을 잘 지적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를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날짜를 말해 줄 뿐 아니라 그 사건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로 일어났었고, 또 세속 세계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세푸스(Josephus)나 타키투스(Tacitus)와 같은 역사가들은 빌라도가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님이 그에게 고난 받았다는 복음서의 내용을 인정한다.

 

빌라도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 내포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 간과 되어서는 안 된다.

 

첫째,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언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고 빌라도는 거듭 말했다(요 19:4, 6). 예수님이 법률적으로 무죄하였다면 왜 사형을 선고 받았는가? 특히 죄인들을 위하여 메시아가 고난 받으리라는 구약의 예언들에 비추어서 그것을 생각해 보라.

둘째,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고난당하게 한 장본인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채찍질하도록 하였고(요 19:1-3), 그를 사형집행인에게 넘겨주었다(요 19:16). 그리하여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세속적인 힘이었던 로마 정부의 대행자가 영광의 주를 박해했던 것이다.

 

시편 2편을 포함한 성경의 여러 구절은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시 2:2).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께서 웃으신다고 같은 시편이 말하고 있다(시 2:4).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은 즐거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격노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노 속에서 빌라도[와 그를 비롯한 세상의 수많은 통치자]가 저버린 메시아에 대한 그를 보내신 목적을 선언하신다고 시편은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에 대해 경고하시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찌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11-12).

 

빌라도는 이 경고와 권유를 무시함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가?

 

3.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은 노예나 흉악범을 죽이던 로마의 처형법이다. 그것이 너무 수치스런 형벌이기에 예수님을 일개 선지자로 간구하는 모슬렘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믿기를 거절한다. 그 대신 단지 "예수는 그리스도와 흡사한 인물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십자가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데 가장 큰 장애 물이 된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탈무드는 그리스도인을 "나무에 달린 자를 예배하는 사람들"이라고 조롱한다.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가장 잔인한 것". "최후의 것". 또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는 이 제도가 너무나 잔인하며 비인도적이기 때문에 폐지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러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선언가고 있다.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상상만하여도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성경대로"(고전 15:3) 죽으셨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죽음 사실 뿐 아니라 그 죽음의 방식까지도 구약 성경에 의해서, 또 주님 자신에 의해서 예언되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자기를 정죄하고 이방인(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주어 조롱당하게 하고 채찍에 맞게 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리라고 말했다. 그 전에,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려는 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 역시 자신이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를 분명히 예언한 것이다(마 16:21, 24).

시 22:16도 이미 그의 손과 발이 못 박히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18절에서 시편 기자는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사건이 없었다면 이 구절들은 엉뚱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시편 기록의 의미가 분명해지고, 그 구절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직접적인 기사 이외에도 구약은 여러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로 모형(type) 혹은 예표라고 불린다. 모리아 산에서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아브라함의 기사를 살펴보다. 그들이 제사 장소에 도달할 때까지 이삭은 자신이 죽는데 사용될 나뭇짐을 지고 갔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친히 못 박히실 십자가를 지고 가심을 예시해 준다(창 22:6).

그리스도의 죽음은 출애굽 기사에서도 암시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기 전날 밤에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고 제사 드려야 한다는 명령이 주어졌다. 나중에 요한은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사실에서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발견했다(요 19:36).

또 다른 모형은 놋 뱀 사건에서도 보여 진다. 불 뱀이 나타나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게 되자, 모세는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도록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 놋 뱀을 보고 낫게 되었다.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사건을 이렇게 언급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에 대한 이 언급은 아주 분명한 것이다(요 3:14 참고, 민 21:49).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비굴한 사형 방법이었던 십자가의 형벌은 그 희생자들에 대한 로마인의 경멸감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최고의 고통과 최대의 모욕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으시려 선택했던 죽음의 방법-십자가의 죽음-이었다(빌 2:8).

신 21:23은 나무에 달린 모든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를 생각하기를 그토록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저주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핵심적인 이유이다. 그 저주야말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셨음이라"(갈 3:13). 그러므로 십자가가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방식은 우리 모두에게 몇 가지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신 27:26;갈 3:10, 13).

둘째, 그는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골 2:14)이다.

셋째, 그는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비결을 보여주셨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에서 얻을 수 있는 이 세 가지의 핵심적인 신학적 교훈 외에도, 그리스도의 죽음은 최소한 다른 두 가지의 교훈을 가르쳐준다.

 

첫째,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즉 "내가 목마르다"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견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가 당한 것보다 더 혹독한 고통을 당하며 죽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나 그리스도는 이를 하나의 부족함도 없이 잘 감당하셨던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 평가해 주는 영구불변의 표준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어떤 마음을 품었는가?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8).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자체이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자는 높이 들리어야 했는데,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3:15). 그 결과 우리 그리스도인 들이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단순한 말 속에 내포된 영생의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라고 했다.

 

4. 그리스도 죽음의 영향력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언어생활에도 대단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토론할 때에 우리는 결정적인(crucial) 문제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은 라틴어 crux(십자가)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중심이듯이, 토론의 중심 되는 문제를 "결정적"(crucial)인 문제라고 일컫는 것이다.

십자가의 그림자(The Shadow of the Cross)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유명한 그림은 십자가의 중심점을 잘 설명해 준다. 하나는 팔을 벌리고 있는 어머니의 품으로 어린 예수가 달려가는 것을 그려 놓았다. 그 달려가는 모습에 의해서 십자가의 그림자가 생긴다. 흘만 헌트(Holman Hunt)가 그린 또 하나의 그림은 아버지의 목공소에서 일하는 소년 예수를 보여 준다. 그가 팔을 뻗을 때에 그 몸이 십자가의 그림자를 만들게 된다.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낸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스도는 앞으로 자기가 죽을 줄을 완전히 알고서 그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는 구절들을 연구해 보면,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 그는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즉 온전한 순종의 생애에 있어서 절정의 행위로 간주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정들에게 검을 빼어들고 대항하자 예수님은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요 18:11; 마 26:39; 요 12:27-2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원하셨으므로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진해서 죽으신 분이시다. 땅의 기초도 놓이기 전에 준비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그는 꾸물거리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일을 수행했다. 바울은 장엄한 어조로 이렇게 썼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요 10:17-18; 요 17:1; 요 19:30; 눅 24: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순종의 행위였지만 그것은 주인에 의해 강요된 것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노예의 순종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등하지만 죽기 위하여 인간의 유한성을 스스로 받아들인 분의 자발적 순종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다각도로 살펴보자.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이 시간(time)과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성경은 적어도 세 구절에서 그 대답을 하고 있다.

첫째, 죽음은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는 창세 전 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벧전 1:20)라고 했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기를 단번에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히 9:26)

시간 속으로 나타나셨다. 그의 죽으심은 모든 시간 가운데 최고의 사건이었다. 끝으로 그의 죽음은 영원까지, 즉 시간이 더 이상 존재치 않을 때까지 기억될 것이다. 언젠가는 시간이 끝이 나고 밤과 낮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은 영원히 기억되며(계 22:3) 어린 양 그리스도는 영원히 경배 받으실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주(universe)와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광대한 우주에 비해서는 너무나 미미한 지구라는 조그마한 항성에서 일어난 보잘 것 없는 사건이었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로 우주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고 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고 바울은 말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우주는 그 죽음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진리는 여러 서신에서와 요한계시록에 거듭 강조되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미래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만한 때에 그를 믿기를 거부한 자들은 장차 불 못에 던져질 것이다. 반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성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만약 그리스도가 죽으시지 않았다면, 인류에게 천국은 결코 주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죽으시고 또 그 죽음으로 미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자(계 20:11-15; 계 21:1-8; 계 19:30; 계 22:3).

 

5.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 성부와 사단의 역할

 

성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재판관의 오판이나 무고한 자에 대한 살인처럼 그것을 엄청난 실수로 여기시지 않으시는가?

원칙적으로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 하나님의 생각을 전부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 중의 일부는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자기 생각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대언 자였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참으로 엄청난 실수이며 재판관의 오판이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직후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무리들에게 베드로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 줄 아노라"(행 3:17)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같은 설교 중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알리셨던 계획의 성취였다고 했다.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인간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모든 사건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도 전지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미래 예언하신 일들을 이루셨던 것이다. 사건들이 아무리 혼란해 보여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쓰시고, 그 후에 인간을 꼭두각시로 조종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즉 하나님은 악한 목적으로 시험하시거나 못된 일을 하도록 강요함으로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시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일을 할 능력을 주시거나 그것을 하고 싶어 하는 성향을 주셔서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신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에게 선한 마음을 불어 넣으셨다(출 12:31-3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국을 향해 애굽을 떠나자, 하나님은 바로에게 왕권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잔인한 마음을 허락하셨다(출 14:1-9). 이처럼 각 사람이 개인적 성향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일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나 그의 장인 안나스 같은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그들은 사악한 무리들이었으며 자기들의 정치적, 종교적 특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그들의 결정은 그들의 사악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들의 양 어깨에는 무거운 책임이 지워져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언급할 때, 그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다(행 2:23).

분명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실수나 오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성취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포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히 7:25).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충분한 근거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죄와 타협하지 않고 그것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진리는 여러 구절에서 나타나지만 사도 바울의 주장보다 더 심오한 것은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배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19-21)

 

이 위대한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무죄성 및 그의 대속적 죽음을 밝히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안에" 그가 계시다는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지 않았다. 이는 그리스도-아버지와 동등하시나 그와 구분되신 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라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죄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에는 사악한 생각이 없었고, 그 입에는 거짓된 말이 없었으며, 언제 한번 그릇된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그는 우리처럼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이와 완전히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는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실 충만한 근거를 만들어 드렸다.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거나 또는 우리 죄를 간과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만족시켜 드렸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이다. 입법자이신 하나님은 죄에 대한 형벌로서 죽음을 요구하시는데 그리스도는 그 형벌을 완전히 치르셨다.

우리가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가 고백하는 내용 가운데는 위의 설명과 같은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공의의 시행자인 동시에 사랑의 실천자가 되셨던 것이다.

또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진리를 강조한다. 왜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셨는가?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피려 하심"(요일 4:9)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가 되기 위함"(요일 4:10)과 또한 "세상의 구주가 되기 위해"(요일 4:14)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고 했다. 요한이 말했던 것처럼, 그 아들이 죽지 않고는 화목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죽게 하기 위해 보내셨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아 죽으실 때, 하나님은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계획했으며, 그 계획의 목표는 우리의 구원이었다. 요한이 말한 대로 아버지는 세상의 구주가 되시도록 아들을 보내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드라마에서 사단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사단이 어떤 책임을 지니고 있는가? 그는 그 죽음을 기뻐했는가?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주어질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그리스도가 마귀의 일을 멸하는데 성공하셨는가? 성공하셨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마귀를 멸하셨는가? 바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4-15).

 

우리를 거스리는 권세는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파괴되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려고"(히 2:14)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단의 패배이다. 그러나 사단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패배 당하였으며, 그의 능력은 파괴되고 있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를 묶어 불 못으로 던져 넣으실 것이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 사단의 패배를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는 것을 아셨으며, 사단도 또한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 사실은 사단이 예수님의 생애 중에 그에게 극심한 적대 행위를 한 것과 예수님의 죽으실 기간이 다가옴에 따라 증오로 광분 하는 모습이 더 분명해지는 사실을 잘 설명해준다. 사단은 십자가를 지러가는 예수님의 길을 바꿀 수 없게 됨을 알자, 그 길을 대단히 고통스럽게 하고, 죽음의 고난을 더욱 쓰라리게 하려 했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사단이 배신자 가룟 유다를 충동질했으며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노 심을 선동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단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파괴되었다. 그래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다음과 같이 사단과 죄에 대한 승리가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잔인한 흑암의 왕자, 우린 그를 두려워 않네. 그의 진노도 능히 견디네. 자, 그에게는 진노만 있나니, 이 한 마디 그에게 있을 뿐이네.

 

"전능하신 방패는 우리 하나님"

 

5.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단히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성경은 그 의미를 설명하는데 적어도 여섯 개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째는 화목(propitiation)이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일 4:10; 요일 2:2) 라고 했다. 조금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바울도 그 단어를 사용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3-25).

 

이러한 화목이라는 단어는 화해(reconciliation), 속죄(expiation), 변상(satisfaction) 및 보상(atonement) 등과 같은 부류의 단어들 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감정이 상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라는 사전적인 뜻이 있다. 이것이 성경에서 사용된 바로 그 용법이다. 신학자들은 때때로 이 단어를 하나님 편에서 본, 주님의 죽음의 양상이라 설명했다. 화목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 및 공의로우심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인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아무런 장애 없이 일하시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근거로 하나님은 아무런 장애 없이 그의 원하시는 바를-죄인을 구원 함-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룩하심을 조금도 타협치 않으신다. 화목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인들을 구원하시도록 하는 의로운 기초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성격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못 본 척 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충분한 형벌을 요구하셨고, 또 그것은 십자가에서 충분히 지불되었다. 화목을 이루어 오신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죄인들을 용서 하신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이 쉽게 만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하나님은 독생자의 죽음이란 방법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화목케 하시며 인간은 수동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는 데에는 또 다른 다섯 개의 단어가 사용된다. 그것은 희생(sacrifice), 제물(offering). 대속물(ransom), 구속(redemption), 화해(reconciliation) 등이다. 마지막 단어 화해는 "관계의 변화", '서먹서먹함의 마무리" 및 "우정의 회복"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의어로는 "재연합"(reunion), 또는 "조화"(harmony) 등이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 죽음과 관계된 설명들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개념을 가져다 줄 뿐이지 거기에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누가 누구에게 화해되는가? 화해(화목과 마찬가지로)는 "감정이 상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이러한 표현은 화목되어지는 대상이 하나님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그렇다면 사전적인 이해는 잘못된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화목 되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화목 되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올 성경 말씀이 이 사실을 설명해 준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라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19-22).

 

이 구절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사실이 명확히 밝혀진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교제의 장애물을 제거하심으로 자신과 세상을 화목케 하셨으며,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 화목을 받아들이시려고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받아들이실 계획을 세울 뿐 아니라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지금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화해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분명 역사상의 한 사건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그 이상의 영원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에 대한 거룩하신 적대감을 타협하지 않고도 죄 많은 백성의 구원을 가능하게 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타협치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의롭게 여기다(justify), 또는 칭의(justification)라는 단어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인간은 의롭지 못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의롭지 못한 자를 의롭게 여기시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증거였다고 바울은 말한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이니라"(롬 3:26).

 

칭의란 무엇이며 또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사전적 설명에 의하면, 칭의란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거나 의롭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거나 또는 인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구원받을 만한 가치"라는 구절을 제외하고는 잘못된 설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구원받을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된 그리스도의 가치와 밀접히 연관시켜서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 하시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만한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칭의가 가치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사전적 설명의 마지막 부분, 즉 "하나님께 인정되는 것"이란 말은 아주 훌륭한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여기에서는 "되어지는"(made)이라는 단어를 강조 하는데, 이 단어는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것이다(makes).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지은 일이 없었던 사람으로 간주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의로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나로서(what I am) 아심을 뜻하며, 과거에 무엇을 했으며, 미래에 무엇을 할 것 인가를 아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양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신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자의 공식적인 자격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말과 같이, 모든 사람들은 죄를 범했으며 다 함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롬 3:23)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롬 3:26)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를 어떻게 의롭게 하시는가? 이 문제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옛날 욥의 한 친구도 이와 똑같은 의문을 품었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욥 25:4). 욥의 친구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가능한 것이라고 했으며,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신다고 말했다(롬 3:26).

첫째,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칭 의의 의로운 기초를 이루어 놓으셨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이 의롭게 하시는 모든 자들에게서 분명한 반응을 요구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기만 요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은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있어서 그것은 실로 값비싼 것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성육신과 뒤 이은 그의 독생자의 죽음을 요하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단히 방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누구도 그 깊이를 측량치 못한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보면 몇 가지 분명한 사상이 드러난다.

첫째,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증거 해 준다.

둘째,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엄정성을 입증해 준다. 개인적으로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우리 죄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죽으셨던 것이다.

셋째,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용서의 근거가 된다.

 

이 마지막 대목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벌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 사람의 잘못된 행위의 결과를 용납해 준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빛을 면제시켜 준다면 그는 그 빛의 액수도 저절로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만약 어떤 때에 모욕이나 허풍 떠는 것을 용납한다면 다른 경우에도 그 무례함을 용납해주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용서는 자신의 희생을 치르고 잘못된 행동을 없는 일처럼 여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죄를 지은 사람 대신에 무죄한 사람이 고통당하는 이 원리가 구속의 기본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모든 용서의 행위는 진정 속죄의 행위임이 강하게 역설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용서는 하나님의 속죄의 필요성을 없이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밝혀주고 그것을 정당하게 해주며 그것을 꼭 필요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용서는 정의의 원리를 가장 먼저 충족시키는 자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용서 하심을 가능케 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그의 사랑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용서의 근거가 된다는 이러한 주장은 신약 성경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으리만큼 분명한 것 이다. 회개가 과거를 원상태로 회복시킬 수는 없으며 다만 미래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또한 구원으로 시작되지 않는 종교는 교육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성숙에 관해서 뿐 아니라 죄로 인한 부패성에 대해서도 말씀하셨고 또 그것을 취급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는 값싸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거기엔 적어도 두 가지가 요구된다. 죄인은 심판대에 서야 하며, 그 죄인의 자리에 적합한 대리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갈보리 산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이다. 그리스도는 죄인의 대리자로 자신을 내어주셨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대리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쏟아 부어졌다.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과 앞으로 살게 될 모든 죄인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셨기에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야만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는 근거가 된다. 적어도 두 개의 성경 구절이 이 주제와 연관되어 진다.

첫째, 에베소서 1장 6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 거하도록 받아주셨다고 했다(KJV 참조), 필립(J.B.Phillips)은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 대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환대하셨다." 라고 번역했다.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환대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 "이는 내 사랑 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말씀을 생각하고 이 서신을 썼음이 분명하다.

또한 받아들이심은 관계를 기초로 한 말이다. 더 나아가 "사랑하는 자 안에"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과의 연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 관계를 떠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된다. 바울은 용서받지 못할 자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멀리 떠나"-하나님께로부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골 1:21). 이사야도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가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떼어놓았다고 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셨고 그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모든 특권도 얻게 된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를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과 "그 안에"라는 말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어보라. 그리고 거기에 기록된 특전을 헤아려 보라.

 

두번째 구절은 롬 8:33-34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자를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어떤 설명도 하나님의 받아들이심의 완전성을 이 구절보다 더 잘 설명하지는 못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 편이시다. 그런데 누가 감히 우리를 고소하겠는가? 하나님은 아니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의롭다 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는가? 어느 누가 하나님보다 더 큰 자인가?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지금 "사랑하시는 자" 안에 받아들여졌음을 확실하게 믿는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하여야 하는가?

 

첫째 자세는 믿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자들조차도 그의 죽음 사실을 믿었다. 그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면 장사지내라는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간 믿음이란 그가 죽으신 목적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 15:3). 누구든지 "우리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고 그것을 개인적으로 마음에 받아들인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두번째 자세는 확신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 아무리 어두운 길이나, 아무리 고통스러운 경험, 아무리 깊은 고뇌, 혹은 아무리 강렬한 고통을 당할지라도 그것은 십자가의 고통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세 번째 자세는 그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바울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시는도다."(고후 5:14). 바울은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렇게 잘 표현하였다. 반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보잘 것 없으며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를 모르는 체하며 그를 섬기는 일에 무관심한 경우 많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또한 특권적인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대해서도 교훈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나 성육신하심으로 하나님으로서의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는 우리도 모든 특권을 필요하다면 희생시켜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자진해서 인간되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우리는 순종하고 있는가? 필요하다면 죽기까지, 주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다소의 손해를 보더라도 그들의 필요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교훈 중의 하나이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위대한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관심사에 시선을 돌리도록 만든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남을 위해 죽으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인 우리는 기꺼이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빌 2:3-4)

 

6. 장사되신 그리스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을 믿습니다."라고 반드시 고백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사도신경은 왜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기록하고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생략한 채 바로 부활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지 않는가?

그 이유는 성경 자체가 주님의 장사되심을 묘사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각 복음서는 모두 이것을 언급하는데, 복음서 기자는 각기 다른 사람이 빠뜨린 사항을 추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태만이 무덤을 제공한 요셉이 부자였다고 말한다. 또 마가 혼자만이 그가 존귀한 공회원이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에 대해서는 서신서들에도 언급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적인 항목에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을 포함시켰다.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다.

 

왜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의 기사가 이처럼 중요한가?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었음을 확증해 준다. 회의론자는 그리스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현기증을 일으킨 것뿐이며, 그러므로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의식을 다시 회복한 것뿐이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가 죽었으며 그를 박해한 자들이 그의 죽음을 확인했으며, 또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시체를 장사 지내도록 허락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죽은 몸을 잘 돌봐야 한다는 교훈을 줌으로 중요하다. 사람들은 가끔 자기들이 죽을 때, 자기 몸이 땅에 묻히든 쓰레기 더미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지든 상관없다고 경솔히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시체를 중시하고 있다. 스데반이 순교 당했을 때, 경건한 사람들이 그의 몸을 장사지냈다. 도르가의 몸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씻어져 장사되기 위해 다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죽은 몸보다 더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시체는 없었을 것이다.

로마 제국 내에 기독교의 영향력으로 인해 화장 제도가 없어지고 매장 제도가 행해졌음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방 세계에 살았던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장사되었던 방식대로 장사되기를 바랐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부활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는 극적인 방법으로 믿었다.

그러나 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장사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몸이든지 분해된다. 상어에게 잡아먹힌 사람도 납으로 만들어진 관 속에 넣어져 흙에 묻힌 사람과 똑같이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장차 부활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일을 가능케 하는지 우린 알지 못한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행하는 분이 누구인지 아는 것으로 족하다.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몸소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을 위해 성취하신 구속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성취하신 일이 무엇이었는가? 여러 가지 중에서도 그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자기 몸에 짊어진 일이다. 모든 죄는 그리스도에게 치워졌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죄는 심판받았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이라고 했다. 여기서 죄를 "지고가는"이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의식에서 예시되었다. 대제사장은 속죄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와 백성의 죄를 자백하고 그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었다. 레 16:22은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 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분명히 그 염소가 실제로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극적인 형태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만드셨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광야에 놓여진 속죄 염소는 묵묵히 죄를 "지고 가는"그리스도의 사역을 묘사하며 그의 장사되심과 상통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죄에 대한 마지막 처분은 그의 장사되심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에 바쳐진 대속 제물로서 무덤에까지 들어가셨다. 그리고 죄의 짐과 전혀 상관없이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오셨다. 이것이 "장사한지 사흘만에..."라는 구절의 교리적 중요성이다. 광야에 놓여진 속죄 염소의 생명과 존재를 규명하지 않듯이 무덤에서 성취된 죄에 대한 처분도 규명할 수 없다. 믿는 자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한 양상이었던 장사되심 속에는 자신에 게 주어진 죄의 심판에 대한 처분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글이 좀 어렵게 느껴진다면, 죤 번연의 작품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에서 번연은 등에 짐을 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결국 그것을 벗어버리게 되는 방법을 말해준다. 그 짐은 그의 죄와 죄의식을 상징한다. 그 사람이 갈보리라고 부르는 언덕에 올라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자기를 위해 거기 달리신 구세주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눈에 고이게 된다. "복되도다, 십자가여"라고 그는 말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고친다.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이여 다 복되시도다."라고 소리친다. 그 후에 그는 자기 등에 있는 무거운 짐을 묶고 있던 밧줄이 끊어지는 것을 꿈에서 보았다. 그 짐은 언덕 아래로 굴러 내려가 빈 무덤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서 다시는 그가 그 짐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때때로 이 진리를 나타내 주는 다음과 같은 합창을 하게 된다.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하신 주님, 죽으셔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 장사되셔서 내 죄를 씻으신 주님.

-월버 챔프맨의 "어느날"

 

그리스도는 지옥에 내려가셨을까?

 

사도신경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지옥에 내려가셨다가"라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실제로 죽은 영들의 장소에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이다 믿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지옥(hell)이라는 말은 사도신경이 처음 영어로 번역될 때 의미했던 그 의미가 아니다.

지옥(hell)이라는 영어 단어는 "보이지 않는", 또는 "덮여진" 장소라는 뜻의 앵글펄 색슨어인 "Hellan"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수 백년 전에는 이 단어가 히브리어 스올(Sheol)이나 헬라어 하데스(hades)와 똑같은 의미의 단어였다. 그래서 그것은 죽음 이후의 모든 영혼이 가는 장소를 의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단어는 악인들이 형벌 받는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그 뜻이 죄인이 사후에 가서 영원히 거하는 비탄의 장소로 한정되었다. 그래서 현대 영어 지옥 (hell)은 성경의 단어 스올이나 하데스와는 다른 뜻이며, 또 사도신경에도 적당치 않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라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그는 분명히 지옥으로 가시지 않았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어디로 가셨는가? 분명한 것은 명확한 사실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사실을 기록한 구절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 2:24-31절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가 한 첫 설교이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내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것임이로다.

여기서 베드로는 시편을 해석하고 있다. 그는 다윗을 선지자라고 하면서, 그가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시편에서 인용된 이 말씀의 의미는 시편 본문처럼 분명하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영이 음부에 내려가셨음을 뜻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도신경 기사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두 세 개의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한 번 의문을 제기해 보자. 그리스도의 영이 과연 음부에 내려 가셨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있었던 장소는 명확히 알고 있다. 그는 못 박히시던 근처에 있는 동산 안의 새로 만든 무덤 속에 계셨다. 그러면 그의 영은 어디로 가셨는가?

주님께서는 친히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주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그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셨다.

그 낙원이란 어디인가? 어떤 학자는 그것을 하늘로 믿는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다시 두 번 사용되는데, 각기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장소를 말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은 생명나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다고 한다(계 2:7; 계 22:2). 이 해석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 주님은 죽으실 때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거기서 몸의 부활을 기다리셨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이런 해석은 분명히 가능성이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용된 본문이 원래 뜻하는 바가 아니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기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한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구약의 헬라어 번역에는 신약의 "낙원"(Paradise)에 해당하는 단어가 "동산"(garden)이나 "숲"(grove)으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면, 에덴동산이 하나의 낙원이었다(창 2:8 ; 느 2:8; 전 2:5; 아 4:13). 따라서 이 말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복되게 죽은 자들의 장소를 묘사하는 시적인 표현인 "아브라함의 품"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기간 동안 어디에 계셨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문제가 된다면 성경은 그것을 보다 더 분명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3일 동안을 어디에서 보내셨는가 하는 장소가 아니다. 성경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가 머문 장소가 아니라 제자들에게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가 말했던 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혼이 음부에 갔었다고 믿어야 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정작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그의 영혼이 음부에 버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육체적, 영적 모든 면에서 죽음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장사지낸 지 사흘만에 그는 육체와 영혼을 그대로 지닌 채로 무덤에서 나오셨다.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하여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만약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심으로 인성을 완성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중의 하나와 같이 되셨다. 그는 태어나시고 자라나셨으며 또한 이 땅에서 사시다가 죽으셨으며 몸이 장사되어졌으며 그의 영혼은 부활을 기다리기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가셨다. 그리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신 사실만이 우리와 다를 뿐 다른 것은 다른 인간의 경험과 동일한 것이다.

 

웨스트코트(B.F.Westcott)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그 사실은(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교리는) 주님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하게 해준다. 죽음이란 영과 육의 분리이다. 이런 개념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서 우리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셨다. 그의 몸은 무덤에 놓였고 그의 영혼은 앞으로 우리들이 들어가리라 생각되는 그 나라로 들어가셨다. 그는 인간의 모든 상태를 다 겪으셨고 하나님을 위하여 승리하셨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나 그가 계셨던 곳이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우리 의 상태에 참여하셨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의 거처에 계시게 되는 일을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경험을 다 맛보셨다. 그래서 그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히 2:17). 그러나 인격적으로나 경험하신 바에 있어서는 우리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었으며, 죽음이 그를 매어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덤에서 승리를 거두고 부활, 승천하셨다.

여러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부활하신 구주께서 복되게 죽은 자를 음부에서 풀어주시고 그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셨다(엡 4:8;히 11:40;히 12:18, 23을 보라). 만약 그렇다면 음부는 복되게 죽은 자들의 거처는 아닌 것이다. 그곳은 영원한 형벌을 기다리는 악인만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곳이다. 음부가 지옥이 되는 곳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의 영혼은 그들이 죽을 때에 즉시 천국으로 올라간다. 그들은 결코 음부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올라간다" 바울이 노년에 로마 감옥에서 그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졌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천국에서의 재 연합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것이 "더욱 좋은 것"이 되는 것이다(빌 1:23).

따라서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이 사실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의심스런 마음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이 사도신경의 위대한 기사 속에 포함되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장사한지 사흘 만에..."라는 사도신경 기사는 구세주가 고난당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구원 사역에 대한 신앙을 확인하는 것이다.

 

7.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사도신경보다 훨씬 후에 생겨난 여러 신조들과 신앙 고백문들은 보다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더 길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성공회의 39개 조항의 신앙 고백 중 제2조는 이렇게 표현된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살과 뼈와 그리고 사람의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을 구비한 신체를 다시 취하셨다."

이 조항은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부활 사실이다("그리스도는 진정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둘째는 몸이 다시 부활했음을 확인한 것이다.

셋째는 부활한 몸의 변화이다.

여기에 피가 빠져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보자.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소생이 아니라 진짜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나사로나 다른 어떤 사람이 생명을 다시 얻었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진리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브룬너 (E.Brunner)의 견해에 의할 것 같으면 "모든 것은 부활 사건에 의존하고 있다." 또 프로이드 필슨(Floyd Filson)은 "신약 성경 전체가 부활 사건을 감안하여 기록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말들은 매우 대담한 주장이지만 어떤 학자도 이것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부활의 중요성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살펴볼 때 매우 정확하다. 고전 15:3-4절, 고전 15:3에서 그는 복음을 이렇게 요약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렇게 쓴 후에 이어서 바울은 주님께서 사도들과 자기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11)라고 했다.

또 다른 성경에서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 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했다. 이 두 구절을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죽는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그 진리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사도들은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한 것으로 믿었다. 또한 그들은 부활에 대한 신앙이 구원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는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사도신경으로 재확인한다. 분명한 증거가 그리스도 부활 사실을 지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부활을 믿는 확실한 이유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면, 기독교 변증이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소개하는 책들을 통해서 부활 신앙에 대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활 신앙을 지지하는 여러 증거들 중에 예수님의 생애와 인격이 그 중의 하나이다. 분명히 참 인간이셨던 예수께서 자신의 부활을 분명하게 예언하셨다. 만약 그가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그의 진실성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증거는 빈 무덤과 시체가 사라진 사실이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시체를 도둑맞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만약 시체를 도둑맞았다면 누구의 짓인가? 그의 대적 자들인가? 그들이 시체를 가져갔다면 사도들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왜 그 시체를 내보이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제자들이 그것을 가져갔는가? 그럴 수 없다. 시체가 있던 무덤은 육중한 돌로 박혀 있었으며, 인봉되었고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들 중 누가 분명한 비 진리의 메시지를 옹호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예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은 사실상 부활에 대해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 몇몇 여인들도 부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체가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려고 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가 점차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믿기를 싫어한 제자들이 많았다. 그들의 마음이 부활을 확신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부활 사실을 강력히 지지해 준다. 제자들이 부활을 믿었음은 불신자들까지도 인정했다. 분명히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훔치지 않았다.

부활에 대한 불신앙적인 비판자조차 빈 무덤과 시체가 없어진 사실을 성공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의 이러한 침묵이 그리스도의 친구들의 부활 증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바울의 회개가 부활에 대한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초대 교회의 그 오만한 박해자가 예수님을 믿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학문과 재능을 겸비한 그는 예수님의 이름에 철저히 대적했었다. 그러나 그도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의심을 풀기 위하여,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셨던 그 체험을 이야기했다. 다메섹 도상의 경험이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아그립바왕 앞에서 그는 자기의 회심을 이야기했으며, 또한 부활 사건의 요점을 말하자 베스도는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고 하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바울의 회심은 그리스도 부활을 증거하는 참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들은 바를 아그립바 왕에게 증거하면서, "이 일은 한 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라고 했다(행 26:25-26).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보다 우리에게 더 큰 부활의 확신을 주는 증거는 아마 없을 것이다.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단순히 복음서의 기사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 차례의 나타나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부활에 대한 초기교회의 신앙을 설명해 준다. 제임스 데니(Jamas Denny) 는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복음서 기자가 쓴 부활 기사는 우리가 취급해야 할 많은 중요한 증거들 중에서 가장 작은 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범위(복음서) 밖에 놓여 있는 사실을 토대로 하여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복음서 자체에 나타난 사실을 근거하여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여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부활에 대한 보다 확고한 역사적 증거는 이렇다. 부활은 믿어졌고, 전파되었고, 퍼져나갔으며, 또한 그 열매를 맺어 복음이 기록되기 오래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교회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복음서를 무시하려는 것이거나 복음서가 말하는 내용을 과소평가하려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복음서 내용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아니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신약의 어느 성경도 기록되기 전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으며 대단히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두 장소를 배경으로 나타나셨는데, 하나는 예루살렘이며, 다른 하나는 갈릴리이다. 이것 또한 부활이 실제로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피스 토마스(W.Griffth Thomas)는 <기독교와 그리스도>(Christianity is Christ)라는 작은 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지하는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여러 가지 증거들은] 따로따로 살펴보면 확고한 내용이며, 함께 모아보면 그 주장은 중복적이고 충족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비판의 망치가 두들겨도 하나의 파편도 내지 못했던 반석인 것이다.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부활을 지지해 주는 이런 압도적인 증거를 논박하는 일에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주로 기적이란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자기의 불신앙을 변호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믿는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같은 목소리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개인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8. 승천하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사도신경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옹호하는 것이 사도신경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이를 생략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사실만을 간략하게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때인 유월절(Passover)과 승천하신 때인 오순절(Pentecost) 사이에는 50일의 간격이 있다(현대 교회에서는 유월절과 오순절 대신에 부활절과 성령 강림절이라고 부른다).

누가는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행 1:3)라고 말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주님께서는 부활하신지 40일 후, 즉 오순절 며칠 전에 승천하셨다고 결론 내린다.

주님께서 왜 부활 후 40일간 이 땅에 머무셨는가? 적어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40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데 그것은 주로 "시련"이나 "시험"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한 예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생활 40년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단에게 시험받으신 40일과 그 기간이 일치한다.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사람 중 몇몇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기록 외에는 그 40일간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부활이 그의 존재 양식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주님은 십자가 지실 것을 예상하시면서 굶주림과 목마름과 피곤함, 그리고 슬픔 등과 같은 한계를 스스로에게 가하셨다. 그러나 부활 후에는 모든 상황이 변하였다.

 

하몬드(Canon T.C.Hammond)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주님은 육체와 영으로 새로운 실존에 들어가셨다. 그러나 주님은 이전 비하의 상황 하에 있었던 자신을 완전히 탈피하지 아니하시고, 오류 없이 실재적인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하여 인간들에게 찾아오셔서 필연적 관계를 재개하셨다. 이와 같은 부활이후 그리스도의 "현현"하심은 "많은 증거"를 요구하는 우리의 요구를 응하시는 사랑과 고귀한 겸손을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땅 위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셨다. 그들은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을 지나서 감람산이라는 산등성이에 올라가서 베다니 동쪽에 머물러 있었다. 잠시 담소하신 후에 주님은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들리우셨다. 누가는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9)고 기록했다. 그들이 자세히 구름을 쳐다볼 때, 횐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하늘로 올리 우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그들에게 약속했다(행 1:10-11).

이처럼 그리스도의 승천 기록은 놀랄 만큼 단순한 것이다. 어떤 수식도 덧붙지 않았고, 의심하는 사람을 확신시키기 위한 어떤 시도도 없다. 제자들은 그들이 본 바만을 말하고 있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직접 보지 못했다. 제자들은 오직 부활의 결과, 즉 부활 하여 살아계신 주님만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승천에 있어 서는 그 결과가 아니라 승천 그 자체를 보았다. 그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하늘에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또한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승천하셨다"(히 4:14).

둘째, 그는 "참 하늘로 들어가셨다" (히 9:24).

 

첫째 구절은 아마 그리스도께서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영원한 실재 속으로 들어가신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천국이 "저 밖에"나 "저 위에" 있을 수 없다고 궤변 하는 자들의 반대는 헛된 것이다. 성경은 불가피하게 천국을 "위의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다른 방도로는 땅에 매어있는 사람들에게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구절, 즉 그리스도께서 "참 하늘로 들어가셨다"는 구절은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이 존재함을 보증해 준다. 실로 성경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말씀하고 있다. 솔로몬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늘"(왕상 8:27)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 곳"(왕상 8:43)으로서 하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하늘은 관념이나 꿈, 혹은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장소이며, 지금도 예수께서 계시는 곳이다. 그는 승천하셨으며 하늘로 들어가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셨다(히 9:14). 바울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는 하나임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고 말한 것은 조금도 무리가 아니다.

 

사도신경은 신앙의 다른 사실, 즉 주님의 죽음이나 부활에 대해서처럼 승천에 대해서도 똑같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로 보아 사도 신경을 만든 사람들은 승천의 중요성을 믿었음이 분명하다.

성경 역시 그리스도 승천의 중요성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사실 신약 성경의 중요한 한 부분인 히브리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히브리서는 부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피스 토마스(W.Griffith Thomas)는 그것을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 주님께서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승천하심에서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주님의 제사장 직임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는 히브리서의 교리적 입장이 승천 사실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승천에 대하여 적어도 12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확실한 말씀을 기록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 요 1:51; 요 3:13; 요 13:3; 요 17:11; 요 20:17).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을 당시 제자들은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나중에 그 말씀을 이해했으며 그래서 승천이 진정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동의하며 글을 쓴 것이다.

승천은 몇 가지의 뚜렷한 유익을 가져다준다.

첫째, 그것은 믿는 자로 하여금 진정한 기쁨의 원인이 되었다.

주님께서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요 14:28)고 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였다. 누가는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던 때(승천시)에 "저희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눅 24:52)고 했다.

승천은 또한 강한 신앙심을 고취시켜 제자들로 하여금 역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였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 널리 부르던 찬송가는 아마도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딤후 2:12) 등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통치와 하나님으로서의 신분의 회복인 승천과의 관계는 매우 분명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기"를 촉구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 하신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히 4:14) 때문이라고 했다.

승천을 떼어놓고 그리스도의 부활 그 자체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베드로는 자신의 첫 설교를 부활로 시작하여 승천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 2:32-33).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리우셨다. 이 두 사건은 실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승천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우리를 위해 훨씬 더 활발하게 일하신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약 주님께서 승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어디에 계실 것인가? 또한 무엇을 하고 계실 것인가?

만약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그의 처소는 어느 한 지방에 제한받게 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예루살렘, 때로는 다른 곳에 계시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심에 대하여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셨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18:20; 마 18:20).

만일 승천하지 않았다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교회에 주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령과 성명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주신 이는 승천하신 주님이셨다(행 2:32-33; 엡 4:5-12),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우리의 큰 대 제사장이 될 수 있었을까? 땅에서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이기는 했지만 제사장은 아니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히 8:4). 그가 참 하늘에 들어가심으로 비로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제사장이 되셨던 것이다(히 9:24).

우리는 제사장을 필요로 한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죄와 연약함을 지니고 있는 땅 위의 제사장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하늘의 제사장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그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9.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시작되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구절은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이라는 말로 끝맺는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에서 수행하고 계시는 역할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신학자들은 가끔 이 말을 그리스도의 "개정"(session)이라 일컫는다. 재판관이 재판관석에 앉으므로 재판이 진행됨을 뜻하는 개정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세속적 용도와 밀접히 연관시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영적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히 8:1).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신분으로 앉아 있는 일이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개정이다.

흔히 우리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승천하신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셨고, 또 지금도 여전히 하고 계시는 일들을 쉽게 헤아려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는 유월절에 성령을 보내셨고(행 2:4), 교회에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셨으며(행 2:47), 앉은뱅이를 고치셨으며(행 3:16), 다소 사람 바울에게 나타나셨고(행 9:5),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시며(히 2:18),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일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며(히 7:26), 우리의 대언자(advocate)이시며 (요일 2:1),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고 계신다(히 10:13).

이 기록들이 완전치는 못하나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개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렇게 요약될 두 있을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들어가심으로 주로 인정되셨다.

둘째, 사람들에게는 성령을, 교회에는 은사를 주셨고 또 주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그는 제사장의 기능을 수행하셨다.

이러한 일들이 끊임없는 그의 사역으로서 지금 행하시며, 교회가 없어질 때까지도 계속하실 사역이다(엡 4:8; 살전 4:17; 히 2:9; 벧전 1:21; 벧전 3:22).

이상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구절이 암시하는 내용인가? 그렇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은유적 표현은 우리에게 "위엣 것을 찾으라"(골 3:1)고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은 죄 씻음이 이루어졌음과 그 사역이 완성되었음(히 7:3; 히 8:1)을 우리에게 보증해 준다. 그래서 거룩하게 된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면전에 초대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중보로 인해 팔을 넓게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신다.

 

10. 다시 오실 그리스도

 

"다시 오시리라"라는 말은 중요한 성경 교리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 신앙을 나타내기에 부족한 신조는 불완전한 것이며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약 300번 가량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30절마다 한 번씩 언급하는 비율이다. 성경학자들은 다른 교리와 비교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주제가 중요함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주제들에 대한 성경의 언급을 수치로 나타낸 바 있다.

세례에 대해서는 7개 서신서에서 19회 언급되며, 14개 서신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성만찬은 3, 4회 정도만 분명하게 언급될 뿐이며, 20개의 서신서는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의 재림은 신약의 거의 모든 책에서 발견되며 그 수효에 있어서도 300여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재림 진리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에 너무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은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신자들에게는 신앙의 일개 조항일 뿐이다. 성경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어야 한다고 단조롭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신 하나의 사건을 믿지 않는 것은 그와 그의 말씀에 대한 참 신앙을-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는-막는 일이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5).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재림에 대해 분명하게 예언하신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이 복된 소망에 대한 신앙이 사도신경과 그 후의 여러 신조에 분명히 기록된 것이다.

재림의 시기 등과 같이,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은 재림에 관한 세부 사항에 관해서는 불일치한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 신앙에 관한 사도신경의 고백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사도신경은 세부 사항을 밝혀내려 하지 않고, 단순하게 "다시 오시리라"고 말할 뿐이다.

우리 주님의 재림은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성령에서 그리스도인 속에 거하심과 같은 영적 "오심"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 자신이 "내가 다시 오리라"(요 14:3)고 하셨으며, 승천하실 때 두 천사가 나타나 제자들에게 떠나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했다(행 1:11).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문자적 재림을 바라며 기다렸었다(살전 1:8-10).

이것이 성도의 소망이다. 우리가 죽게 되지만 죽음을 기다리지 않으며, 영적 경험을 하게 되지만 그것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 바울의 설명대로,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 (딛 2:13)을 기다리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 사실에 대해서는 매우 분명하게 말하나, 그 시기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학자 들간의 해석은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는 자신의 협소한 체계에 흠뻑 빠져 있거나, 또는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 입장을 너무 변호함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져다주는 축복을 망각할 위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진리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며 고양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에서 벗어난 사소한 문제에 대해 논쟁에 빠져들어 진리의 본질이 주는 기쁨을 잃어버린다면 그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재림은 적어도 두 가지의 축복을 의도하고 있다. 첫째, 복된 소망은 참된 위로를 가져다준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두 번째 축복은 거룩한 삶이다.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희망은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자극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며, 또한 우리가 그를 보게 되고, 그와 같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 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고 말한다. 그 의미는 분명하다. 예수께서 다시 오심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악한 일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함을 지닌 남자와 여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11.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4세기에 그 기원을 두는 사도신경을 비롯하여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모든 신조들은 그리스도의 최후 재림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면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

사도신경은 그냥 단순하게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라고만 고백하고 있다. 사도신경의 표현, 그 자체만 보면 심판이 그리스도 재림의 유일한 목적인 듯이 보여 진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표면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함축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 심판이 그리스도 재림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다른 목적들을 생각해 보자.

 

첫째, 그는 자기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맞아들이시기 위해 재림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영혼이 이미 천국에 있는 자들의 몸을 소생시키실 것이며, 살아있는 신자들의 몸은 변화시키실 것이다. 죄가 인간의 육체와 본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그리스도께서 파괴시킨다는 의미에서 재림은 "심판"일 것이다(고전 15:51-58).

둘째,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맺으신 모든 약속을 그리스도께서는 성취하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은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로 인하여 "영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롬 11:1과 같은 중요한 성경 구절은 그 옛 약속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사 60:1). 그 약속들은 심판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메시야를 거절한 사실로 인하여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마 19:28).

재림의 세번째 목적은 세상 질서 그 자체를 종결짓기 위해서이다. 베드로는 그 때나 되면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했다.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하여 세상은 파멸될 것이다(벧후 3:10-13; 히 1:10-12). 하나님은 만물을 다시 만드시지 않으시나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만드실 것이다. 새 창조의 분자구조는 지금의 일반적인 체계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사단과 그의 통치권을 파괴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죽은 영들에 대한 심판이 있기 전에 이미 사단은 불 못에 던져져서 땅 위의 사람들을 다시 괴롭히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원수인 죽음까지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환상 중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았던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고전 15:26; 고전 15:51-57; 계 20:10; 계 21:3).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려 다시 오신다는 사도신경의 표현은 심판에 대한 몇 가지 진리를 요약해 놓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구주 이상의 어떤 분, 즉 심판자이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요 5:27). 후에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고 했다(롬 2:16; 행 17:31).

그 심판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심판의 공정함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양심 그 자체가 심판을 요구한다. 바울은 십계명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조차도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5)고 했다. 바울이 로마 관리(벨릭스)에게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해서 말했을 때 그 사람은 심판을 두려워했다. 그의 양심이 심판의 합당함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행 24:25).

사도신경이 의미하는 심판의 두 번째 진리는 성경이 심판의 등급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여 심판하지는 않음을 보여 준다. 심판의 대상과 관련하여 사용된 "산 자와 죽은 자"라는 구절은 성경적 가르침을 따라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의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시점을 기준으로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같은 구절이 영적으로 산 자들과 또한 육적으로는 살았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구분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두 가지 해석 모두가 옳은 것이며 성경적인 것이다. 전자의 견해는 살아있는 자와 죽어 어딘가에 묻혀 있는 자가 있음을 보아 분명한 것이다. 후자의 견해는 회개치 않은 자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고 묘사한 엡 2:1과 같은 구절에 의해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회개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신자와 불신자를 모두 심판하실 것이다. 그는 신자의 삶을 평가하고 거기에 따라 상급을 주실 것이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영생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순간에 이미 획득하여 영원히 고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에 대한 심판은 실로 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고 하였다. 바울은 그것을 믿었다. 바울은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말했다(행 17:31), 천하를 심판하실 이가 누구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바울이 말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주재하시는 원리(principles)가 하나님의 공의임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는 또한 하나님을 "공의로운" 재판관이라고 했다(살후 1:5-6; 딤후 4:1; 계 16:5-7).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천사들과 구원받은 백성들이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한다(계 19:2).

아브라함은 소돔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한 것임을 알았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의심할여지 없는 진리라고 생각되는 바를 질문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심에 있어 심판받는 자가 지녔던 여러 가지 특권, 기회 및 책임의 정도를 참작하신다. 심판자 스스로가 말씀하시기를 심판 날에 타락한 두로와 시돈의 도성이 하나님의 수많은 이적을 보았던 가버나움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다(마 11:22-23).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라고 했다.

 

이와 같은 성경 구절들은 가끔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의 운명이 어떠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야기 시킨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복음을 듣고도 신앙을 갖지 못하였으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 염려해야 할 불신자들이다. 심판 날이 될 때까지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을 어떻게 다루실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고도 거기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명확히 알고 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서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은 그들의 운명이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의 장중에 있다는 것이며, 그 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무한히 공정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그들 모두를 위해 죽게 하셨으니 이것은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임을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거룩하시며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심판의 광경은 엄숙하다.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심판의 무서움을 환기시켰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

 

이 구절이 사도신경 기사의 근거가 된다. 우리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는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앞으로 직면하여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판가름하게 될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을 연상해 보게 된다.

 

 

 

 

 

 

 

 

 

제5장 성령 및 성령이 교회와 개인에게 적용시킨 구원에 대한 신앙 고백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인간 구원의 계획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구원의 성취자이신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과를 교회와 각 개인에게 적용시키는 성령과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에 대한 신앙 고백이 이어진다. 이처럼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으로 이루어지되 마지막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구원의 사역이 비로소 각 개인에게 주관적이고 체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구원의 적용자이신 성령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생겨난 구원받은 자의 모임인 거룩한 공회와 구성원으로서 성도의 상호 교통함과 성도의 자격으로서 죄 용서함과 구원받은 자가 장차 경험하게 될 육체의 부활 및 영생에 대한 신앙 고백을 각각 다룬다.

 

1. 구원의 적용자이신 성령

 

사도신경의 세 번째 부분은 삼위 하나님 중 제3위이신 성령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영어로 된 사도신경에는 "성령"이 "성신"(HoIy Ghost)이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신(ghost)이라는 말은 앵글로 색슨어로서 지금은 고어로 취급되고 있다. 따라서 성령(Holy Spirit)이 보다 바른 말이다. 사도신경의 셋째 부분을 언뜻 보면, 성령과 그 외의 5가지 교리에 대한 신앙을 포괄하여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의 이면에는 심오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 직후에 나타나는 다섯 가지 축복의 기사는 그 축복이 성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 즉 전능하신 성부와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및 성령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분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사도신경이 전적으로 성경적인 것임을 안다. 실은 여러 성경 구절에서 삼위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나타나지만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위대한 축도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우리가 성령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음을 의미한다. 사도신경만큼이나 오래된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는 성령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성령은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그에게 관하여는 이미 선지자들이 예언 하였느니라."

성령은 성경의 둘째 절에 나올 만큼 일찍 언급되었다. 창조 당시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다"(창 1:2).

성령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시함으로 시작되었다.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사실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자, 천사는 성령이 그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실 것이라고 말했다(눅 1:34-35).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의 사역이었던 것이다.

그 때,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성경을 보면, 성령께서 그에게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후에 성령이 시므온을 감동시켜 성전에 들어가게 했으며, 그 때에 요셉과 마리아는 거룩한 아기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만나게 되었고 시므온에 대한 성령의 약속은 이루어졌으며, 시므온은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다(눅 2:25-27).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중에는 성령께서 이면(background)에 머물러 계셨다. 이 시대는 삼위 하나님 중 제2위께서 돋보이셨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날 때가 다가오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순응할 준비를 시키셨다. 다락방의 담화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로서 부터 성령이 오실 것과 그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과 죄에 대하여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6:7-15).

주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날 준비를 하시면서, 세례 의칙(baptismal formula)을 통하여 성령을 성부와 성자에게 연관시키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

신약 성경에서 성령은 하나님과 주로 불리워지신다(고후 3:18).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큰 실수와 엄청난 희생을 통하여 배웠다. 베드로는 소유를 산 돈 일부를 감추고서도 전부를 바쳤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성령과 하나님께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꾸짖었다(행 5:3-4).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나 그리스도께서 탄생 하실 때 우리 중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심으로 우리는 그를 알게 되었다(요 16:14-15). 그 뿐만 아니라 성령은 우리 심령에 구속의 모든 은혜를 적용해 주신다. 만약 이것이 성령의 사역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무도 신자가 될 수 없었으며 중생도, 죄용서도, 교회의 설립도, 성도의 교제도 없었을 것이다(요 3:6-8; 엡 2:10; 엡 2:22; 엡 4:30).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 다음에 기록된 다섯 가지 축복들은 모두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수여되는 것이다. 먼저 "거룩한 공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킴으로 우리를 그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로 만드시는 것이다(고전 12:13; 엡 1:22-23),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축복은 "성령의 교통하심"이다(고후 13:13; 빌 2:1). 사도 바울은 육체의 부활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사도신경을 만든 사람들이 다섯 가지 중요한 축복에 앞서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을 위치시킨 이유가 이러한 설명으로 분명해진다. 기독교 고유의 축복들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이러한 축복들을 현실화시키는 거룩하신 이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하시는 성령을 믿으면서, 사도신경의 유서 깊은 구절인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2. 구원받은 자의 모임인 거룩한 공회

 

개신교 신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거룩한 공회"라고 말하는 것을 언짢게 여기는데, 그것은 공회(catholic)라는 말이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과 동의어로 해석되지 않는가 하는 우려에서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에 사용되어진 공회(catholic)라는 단어는 로마 가톨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어 단어는 "우주적"(universal)임을 뜻하는 헬라어 형용사와 거의 동의어이다. 이 단어는 본래 세계 도처에 널리 퍼진 기독교의 지리적 범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언젠가 어떤 권위 있는 학자는 "문장 속에서 '우주적 신앙' (catholic faith)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것은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는 교리의 순수성과 완전성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교회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있는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과 우주성(universlity)은 지리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로 세워지게 된 교회는 그리스도께 연합된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고 있다. 어느 지교회나 특정 종파가 아무리 영향력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가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 내에 있는 어떤 종파도 그 시대의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다 포함하고 있다.

교회의 우주적인 면은 에베소서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물론 우리 주님께서도 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였다(마 16:18). 바울은 교회의 정의를 내리고 이에 대해 묘사했다. 예를 들어 보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중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엡 1:22-23). 바울은 교회를 보통 건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엡 2:21-22)과 같다고 했다.

 

가끔 우리는 이렇게 노래한다.

 

만민 가운데서 선택받았으나 땅 위에 교회는 하나이며, 구원의 헌장도 하나이고, 주도 하나. 신앙도 하나, 출생도 하나이며, 교회를 축복하는 거룩한 이름도 하나이며, 하나의 성찬에 참여하며, 부여 받은 모든 은혜로 나아가는

소망도 하나이로다.

-사무엘 스톤(Samuel J.Stone)의 "교회의 한 기초"-

 

교회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 세워져 가고 있는 건물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마다 한 개의 산돌이 그 벽에 더 쌓이는 것이다. 언젠가 이 교회는 완전해지게 될 것이며, 그 때에는 "승리를 거둔 위대한 교회여, 영원토록 안식하리라"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4세기에 만들어진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나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니케아 신조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한 공회(보편적인 교회) 라는 표현에 하나와 사도적이라는 단어를 덧붙임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이 속해 있는 하나의 교회를 확인해 주는 네 가지 수식어로써 참된 교회의 네 가지 표시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라는 단어는 진정한 교회의 연합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도들이 살던 시대에는 조직적인 연합이 없었다. 신약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연합이란 영적 연합이다.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된"(롬 12:5) 것이다. 따라서 어떤 교단에 속해 있든지 간에 신자들은 한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어느 한 조직이나 한 공동체가 바로 그 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거룩(holy)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신성한(sanctified)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의 앵글로 색슨어이다. 이 단어의 근본 개념은 "구별"(separation)이다. 성경에서는 산이나 기타 장소가 거룩한 곳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구별된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도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는 기도 가운데서 이 말을 사용 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앞으로 하시게 될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있는 것을 뜻한다(요 17:19), 따라서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교회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정결하게 된다는 의미에서의 거룩이다. 따라서 완전히 정결치 못한 이 지상의 조직 교회는 언제나-과거에도 지금도-"거룩"이란 칭호를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회란 칭호는 이미 하늘에 있는 성도를 포함하는 전체로서의 교회에 해당되는 말이다. 하늘에 계신 신랑 그리스도는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엡 5:25-27)고 하신다. 따라서 완전한 의미에서는 이 지상의 어떤 교단도 이 칭호에 적합하지는 못하다.

마지막으로 참된 교회는 사도적이어야 한다. 만약 사도에까지 교회의 계보를 추적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 교회는 사도성을 분명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일은 불가능하다.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부차적인 시험(test)이 요구되는데, 가르침과의 일치 여부이다. 이러한 가르침의 일치 여부를 추적하는 것만이 사도적 교회인지의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유일한 시험이다. "사도적"이라는 말은 분명히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엡 2:20) 교회라는 바울의 묘사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유일한 사도적 교회는 한 곳에 함께 모일 수 없는 교회이다. 이 교회의 회원은 여러 나라에 살고 있으며, 또한 수많은 사람들은 이미 본향인 천국으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파들은 자기들이 신약 성경의 전통을 바르게 계승한 교회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교파의 회원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1세기의 사도적 교회의 신자들과 제일 비슷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상, 어떤 단체이든지 자기 자신에 대해 올바로 주장할 수 있는 최대의 한계는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한 부분이라는 주장 정도일 뿐이다.

그리하여 그리피스 토마스 박사(Dr. W. H. Griffith Thomas)는 이 점을 분명히 밝혔다. "만약 그리스도의 몸이 어느 것인가라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이 어디 있는 가라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이 이루어진 모든 곳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하나의 가시적 교회나 교회의 단체만을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사도신경에서는 부분적으로, 니케아 신조에서는 전체적으로 설명된 이 표현은 신약 성경에서는 참되고 유일한 교회로 나타난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은 그 교회를 "한 몸"과 "온 몸"이라고 했다(엡 2:16; 엡 2:16; 엡 4:16). 그것은 하나님께서만 보실 수 있는 교회이다.

그러나 부분은 전체의 어떤 특징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모든 교회는 참된 거룩의 특성을 지녀야 하며 가능한 한 "사도적"인 교회가 되도록 성경을 알고 이해하기를 쉼 없이 힘써야 한다. 어떤 모임이 사도성을 지녔는가 라는 궁극적인 시험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여부에 달려 있다(갈 5:22-23).

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또한 사도적이다.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고 암송할 때의 고백되어지는 바로 그 교회이다.

그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는 한 장소에 모여 질 수 없는 그리스도의 온 몸이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미 하늘에 가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세계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온 몸이신 그리스도의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사랑하며 자기의 삶과 행위로 이것을 증거하는 사람들은 참 교회라고 불리어져도 무방할 것이다.

 

3. 구원받은 성도의 교통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순서상 두 가지의 예비적 고찰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사도신경의 이 구절은 다른 구절보다 후 시대의 것이다. 둘째, 이 구절은 몇 가지로 상이하게 해석되어져 왔다. 예를 들면,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것을 "거룩한 공교회"라고 정의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강조점은 "성도"라는 단어에 있으며 그러므로 "거룩한 공교회"는 성도의 회합으로 정의되었다. 여기서 성도란 하나님께 구원받을 것으로 택하심을 입어 그리스도 보혈로 구속함을 얻은 교회에 속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교통(communion)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게 되면, 루터의 해석은 흔들리게 된다. 교통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koinonia)로 번역되는 라틴어 코뮤니오(communio)는 어떤 일반적인 은혜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교회를 뜻하지 않고, 오히려 그 회원들이 누리는 것, 즉 축복에의 참여를 말하고 있다.

본인의 판단에 의하면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이 구절 바로 앞에 있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나이다." 라는 구절은 모든 참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구절은 앞의 구절과 동일한 내용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성도의 연합에 대한 부가적 사상, 즉 연합된 성도는 서로 교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는 것을 뜻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서로가 각기 연합되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또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연합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우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 관심사와 공동의 기쁨을 지니게 된다. 성도의 교통은 연합됨의 의미를 바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발전한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더불어 서로간의 연합의 의미를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교제를 누리게 된다. 그들의 공동의 기쁨과 공동적 관심과 서로에 대한 성숙한 의존심을 알게 된다. 성도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과 나 및 모든 진실한 신자들은 타인에게서 분리된 개인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고독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통"을 믿고 또 그것을 누리고 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는 이 위대한 진리를 표현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찬송가들이다.

 

일의 수고를 마친 모든 성도들, 세상에서 믿음으로 주를 고백한 그들을 보라. 오 예수여, 당신의 이름이 영원히 영광받으소서. 할렐루야.

얼마나 복스러운 교제이며, 거룩한 사귐인가. 우리는 헛되이 싸우지만, 그들은 영광중에 빛난다. 그러나 만물이 주 안에서 하나이니, 이는 만물이 주의 것임이로다. 할렐루야.

 

- 월리암 월샴 하우(William Walsham How)의 "모든 성도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그리고 그 분과 교제하며 그 분과 함께 걷는 성도,

또한 땅 위에 있거나 하늘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하는 성도는 다른 친구가 필요 없으리. 성도들의 연합은 지혜롭고 안전하며 기쁜 연합이며, 내 마음이 낙심되고 괴로울 때, 그 연합됨이 나를 따뜻하고 밝게 다시 일으키리.

 

- 리차드 박스터 (Richard Baxter) -

 

이러한 찬송 속에 우리가 "성도의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의미하는 내용이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어떤 신앙 고백문은 이 개념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었다.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모든 성도들(즉, 진실한 모든 신자들)이란 "거룩한 교제와 연합을 유지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한다.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그리스도인이란 다른 사람의 영적, 육적 복리를 추구할 의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성도의 교통은 자기가 속한 교단의 사람들과의 교제로만 제한되지는 않는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로 그 범위가 확장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원리가 실행되어진다면 잘못된 종파주의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어떤 교단에 가입하는 일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기 교단에 속하지 아니한 그리스도인들을 배척하는 종파적인 생각을 일소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파주의를 반대한자. 그러나 복잡한 교회 규칙이, 원리적으로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를 종파주의자로 만들고 있다. 폐쇄적인 종파주의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성만찬에 참여하는 범위를 자기 교단의 회원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론상으로 그것은 불순자가 거룩해야만 하는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인의 교통을 막는 결과가 된다.

 

해리 아이론사이드(Harry Ironside) 박사는 종파심을 벗어나는 일을 해냈다. 그가 어떤 교단에 소속하라는 종용을 받았을 때에 그는 자신이 시편 기자의 교단에 속해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이론사이드 박사는 시편 119편 63절을 인용했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 얼마나 멋있는 교단인가! 이 교단에 속한 사람들은 "나는 성도의 교통을 믿습니다."라고 진실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4. 죄의 용서

 

죄용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첫째 되는 축복들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것이 핵심적인 기독교 진리를 축약한 사도신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써 죄 용서에 대한 신앙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용서란 "범죄자에게 벌 내리기를 포기 하는 것, 또는 형벌을 면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forgiveness)와 사면(pardon)은 같은 말이다. 영어 단어 pardon은 "완전히 포기하다" (즉, 철저히)라는 뜻의 프랑스어 합성어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를 용서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범죄자인 우리에 대한 처벌을 포기하신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범죄자를 징계할 칼을 내려놓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벌을 부과시킬 자기의 권리를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완전히 포기하시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죄에 대한 가장 간단하지만 원천적인 정의는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차적인 의미에서 죄란 인간적인 법의 위배이다. 사도신경에 사용된 바와 같이 이 단어는 하나님의 법과 관계되는 것이나 또한 인간의 법을 거슬리는 모든 형태의 죄를 포함시켜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는 신앙을 확인한다.

이 사상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려 했다는 것을 큰 소리로 외쳤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그리스도)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고 했다(행 5:31).

기록상의 바울의 첫 설교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을 갖춘 설교가 아니었다. 그는 회당에서 자기 동포와 진지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용서가 선언된다고 외쳤다(행 13:39). 또 다른 곳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라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죄 용서를 믿는다.

만약 마틴 루터(Martin Luther)나 다른 개혁자들이 사도신경을 기록 했다면, "나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대신 "나는 죄를 깨끗케 사시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왜 그럴까? 루터나 다른 개혁자들은 죄 용서를 믿지 않았다는 말인가?

성경의 가르침을 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개혁자들도 죄 용서를 믿었다. 우리 마음은 용서를 바라고 있으며, 또한 성경은 용서를 말하고 있다. 성경 중 가장 귀한 구절 중의 하나는 미가서 7장 18절이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 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죄악을 용서하시고 사면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죄용서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용납(acceptance)을 필요로 한다. 즉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보증하는 것과 또한 장차 지을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지 않으시겠다는 보증을 필요로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거룩케 한다는 칭의(Justification)라는 의미의 모든 것을 필요로 한다.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 면전에 서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칭의란 죄의 결과를 바꾸어 놓으며, 에덴동산에서 상실한 하나님과 인류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선물이다.

신학자들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대표 아담이 범한 죄의 세 가지 결과를 죄책, 정죄, 하나님과의 분리라고 말한다. 칭의란 이런 세 가지 사실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첫째, 그는 우리를 덮고 있는 정죄를 벗겨주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신다. 둘째, 그는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킴으로 우리의 죄책을 없애주신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킴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분리를 종식시키신다.

이러한 일들은 분명히 용서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의인으로 취급하시며, 또한 그의 "가족"으로 이끌어 주신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바울이 제기한 일련의 질문들에서 얻을 수 있는 칭의와 관련된 진리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송사하리요?"(롬 8:33). 그 대답은 아무도 송사할 수 없다. 죄책은 없어졌다. "누가 정죄하리요?"(롬 8:34). 그 대답은 정죄는 벗어졌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그 대답은 끊을 수 없다. 분리는 끝나고 회복이 이루어졌다.

이 모든 일들은 칭의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은 용서보다 더 광범위한 것이다. 그리피스 토마스 박사(Dr. W.H. Griffith Thomas)는 칭의와 용서, 이 두 가지 은혜를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그러므로 칭의는 용서 이상의 것이며, 이 둘은 바울에 의해 분명하게 구별되었다(행 13:38-39). 죄인은 용서받는다. 그러나 그가 의롭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칭의는 우리의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며 우리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용서받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용서는 하나의 행위이며 행위의 연속이다. 그러나 칭의는 용서를 일으키는 행위이나. 용서는 삶 전반에서 반복되지만 칭의는 완료된 것이며,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 자세와 관련되는 것이며, 우리의 삶 즉 과거, 현재, 미래 전반의 삶을 다루는 것이다. 용서는 소극적인 것이며 정죄를 없애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칭의는 적극적인 것이며 하나님 앞에 완전히 서게 되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칭의는 회복을 뜻한다.

이러한 설명들로써 만약 종교 개혁자들이 사도신경을 변경시켰었다면 왜 그렇게 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을 그렇게 다시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용서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죄를 사하려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완전한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5. 육체의 부활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우리는 육체 부활에 대한 신앙을 확고히 하게 된다. 인간이 죽게 될 때에 인간의 몸은 분해되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나면 흙으로 변하며, 그리하여 매장된 몸의 성분과 흙은 사실상 구분할 수 없게 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바로 죽어 흙으로 변하여 형체를 잃어버린 그 몸이 다시 부활할 것이다.

바울은 우리 육체가 부활할 것이라고 명백히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그 후에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믿는 자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고 한다. 바울의 사상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으로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 몸의 부활의 가능성을 부인한다면 그는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전 15:13, 16).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신경에 육체의 부활에 대한 기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는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하면서 사도신경은 계속하여 우리의 부활에 대한 신앙도 확고히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둘 중의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의 진리도 무너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이루어질 사실에 대한 모형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하나님)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고 말했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부활한 우리 육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같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낯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고 말했다.

우리는 인간의 육체가 중요하며 내세에도 육체가 있음을 믿는다. 이 두 가지 사상은 인간 육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와는 어긋난다. 그리스인들은 정신과 물질을 아주 날카롭게 구별했는데, 이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즉 그리스인들의 견해에 의하면, 간음이나 간통은 육체의 죄악이며 영혼은 그것에 의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육체는 무덤에 들어가게 되며 다시는 무덤에서 나오지 못한다.

성경도 정신과 물질을 구분했지만, 육체와 영혼의 관계는 긴밀하며 영구적인 것이다. 인간은 절대로 육체의 감옥에 갇힌 정신은 아니다. 육체를 벗게 되면 우리의 흠이 드러나게 된다. 말하자면,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부활할 때 그 흠을 가리워 주시는 것이다(고후 5:1-4).

또한 육체는 중요한 것이다. 육체는 인간의 몸의 한 부분일 뿐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범죄 할 수도 있는 수단이다. 악한 것들은 속에서 나온다는 것이 진리이며 이것들에 의해 육체가 더렵혀질 수 있다(막 7:14-23). 그럴 경우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체도 심판 시에는 지옥으로 던져지게 된다.

바울은 육체가 인생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몸을 "쳐서"그 몸이 자신을 파멸시키는 죄의 수단이 되는 것을 막았다. 아마 그것은 온유적인 표현일 것이다. 바울이 실제로 자기 몸을 채찍질하거나 누더기를 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육체적 욕망의 힘을 알았고 그래서 그 힘이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했다(고전 9:24-27).

즉 바울은 자기 육체가 죄로 더럽혀지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들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아느냐고 물었다. 같은 곳에서 드는 또 그들의 몸이 "성령의 전"임을 아느냐고 질문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다(고전 6:15-20).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일반적 인간이 갖는 육체적 한계를 초월하셨다. 육체를 지녔으나 그것은 다른 육체였다. 그는 벽을 뚫고 나오듯이 갑자기 "육체적으로 나타나실 수"있었다. 그는 또한 공기로 변하듯이 곧 사라질 수도 있었다. 실제적인 몸을 지니고 계셨지만 피곤하시거나 졸리지 않았다.

장차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을 경험한 후 그런 육체를 지니게 될 것이다. 바울은 육체의 부활에 대해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8-49)고 했다. 우리 몸이 무덤에서 부활하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게 될 것이다.

부활이 성취될 때, 즉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요한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요일 3:2). 죄와 죄의 영향력은 벗어져 없어져서 그것은 영원히 무덤에 남겨진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와 영혼은 모두가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하여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라고 고백할 때 이러한 복합적인 우리의 신앙을 천명하는 것이 된다.

 

6. 영생

 

"육체의 부활"과 "영생"과는 매우 깊은 관계를 지닌다. 우리 몸이 부활하게 된다면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 목적은 성경 여러 곳에서 설명되어 있는데, 그것은 육체와 영혼의 재결합을 위해서이다. 이렇게 하여 완전해진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죽음에 반대되는 개념은 생명이다. 죽음이란 분리이다. 따라서 영적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다. 이사야는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다"(사 59:2)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허물과 죄로 죽은"(엡 2:1)자로 묘사 하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로 인하여 인간은 그에게서 멀어지고 분리하게 된다고 말했다(엡 4:18; 골 1:21).

그리고 육체적 죽음은 몸에서 영혼을 분리시킨다. 사실 죽음과 관계된 모든 언어가 이러한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임종 시에 친구들이 임종을 지켜보며 "그는 갔다"라고 말한다. 그 후에도 "가버렸다". "돌아갔다"라고 죽음을 묘사한다. 숨을 거둔 후에도 인간의 육체적인 부분은 남는다. 그러나 비록 육체가 남아있다 할지라도 영혼이 없는 육체는 죽은 것이다.

한편 둘째 죽음은 영원한 죽음, 즉 하나님으로부터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분리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영원한 죽음을 경험하는 자는 성경에 가장 무서운 말로 표현된 형벌을 당하게 된다. 성경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불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계 20:11-15).

영생은 죽음에 반대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생의 근본 사상은 분리와 대조되는 연합이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대신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며 그 결과로 영생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 대신에 그리스도인은 "살게 된다." 바울의 말대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 2:4, 5).

육체적 죽음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차 그 육체를 다시 살리심으로 죽음의 영향력을 파기하실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다시 오실 때에, 육체와 영혼은 부활로 다시 연합할 것이다. 이 위대한 진리가 밝혀지는 곳에서 바울은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우리 영혼은 육체와 다시 연합하게 되며, 이전과는 전혀 달리 완전해진 우리는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계획이기 때문이다. 시편 16편은 아름다운 신앙 고백을 기록하고 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다니엘은 그 날을 이렇게 예언했다. "땅이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다니엘은 영생과 그것의 반대인 치욕과 무궁한 부끄러움을 함께 예언했던 것이다.

사도신경은 불신자들이 당할 "치욕과 무궁한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사도신경은 신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진리에 대한 적극적 진술이며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핵심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한 신앙은 내용적으로는 그 반대되는 멋을 배제하지 않는다. 성경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영원한 심판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분명히 믿을 것이다.

요한복음서 3장에 나오는 두 개의 성경 구절은 이 점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먼저 요 3:16을 보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다음에는 요 3:36을 보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두 구절은 영생과 영벌에 대한 선택이 우리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생명을 제시하시며, 또한 생명을 택하도록 우리를 권유하신다.

 

나는 여러 해 전에 생명을 선택했다. 만약 재삼, 재사 다시 선택해야 한다면 다시 생명을 택하겠다. 그러나 선택은 한번이므로 나는 영원토록 안전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이 선택하심에 대해 증거 하는 일 뿐이다.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우리는 이것을 증거 하는 것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홀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서 "아멘"이라는 마지막 단어는 "틀림없습니다.", 혹은 "그렇습니다."라고 번역해야 하는 히브리어이다. 그래서 "아멘"은 사도신경 전반을 훑어보고 나서 "옳습니다. 이것은 진리이며 내가 진정으로 믿는 내용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사도신경 전체 내용에 대해 진정으로 "아멘"할 수 있는가?

 

 

 

 

제6장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요 1:1-3, 14, 18, 요 14: 26, 15;26, 16:13-15 ]

 

이단에 빠지지 않고 바른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좋은 길의 하나는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공교회의 신앙에 충실한 것인지를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공교회의 신조 가운데서 가장 보편적인 신조는 2세기 로마 교회의 세례 때에 신앙 고백문으로 사용된 이래로 많이들 사용되어 온 사도 신조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내용을 잘 정리해 주고 있는 사도 신조의 내용을 하나하나 더듬어 가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도 신조의 내용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작성자들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즉, 성부와 우리의 창조에 대한 부분, 성자와 우리의 구속에 대한 부분, 그리고 성령과 우리의 성화에 관한 부분으로 나누는 것입니다(제 24 문답). 다른 말로 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사도 신조를 삼위일체적 구조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도 신조 자체가 삼위일체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하는 것도 그렇게 무리한 것은 아닙니다.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터툴리안이 처음 사용하고 그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해서 교회 안에서 일반화된 "삼위일체"(trinitatis)라는 말로서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먼저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의 제 25문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한 하나님이 있을 뿐인데, 왜 당신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에 대해서 말합니까?" 그리고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대답이 주어져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말씀 가운데서 당신님을 계시하신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구별되는 위들이(these three distinct Persons) 하나의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제 25문답).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렇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으로 드러내신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참되고 영원하신 한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단번에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계시하여 오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한 분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들이라 칭하는 것들이 많은 상황 가운데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강조하는 것이 아주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마다 암송하는 소위 "쉐마"(shema)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shema Israel),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라고 해서 하나님의 하나이심을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계속되는 가르침이어서 이 한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거나 그와 더불어서 다른 것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 구약의 중요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오직 하나이신 이 여호와는 그가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분이심에 걸맞게 절대적인 관계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즉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아주 필수적인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심은 신약에서도 명백히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딤전 6:15-16). 다른 모든 것보다도 이 선언 속에 하나님이 홀로 한 분이신 분으로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이 잘 드러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계시

 

그런데 신약에서 가장 현저하게 계시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이 한 분이신 하나님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 분이 있다고 하면 그에게 하나의 인격(person)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한 인격이 한 사람, 즉 한 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계시의 빛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와는 좀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 한 신성이 세 위격(three persons, three hypostasis)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본질(ousia, essentia)은 하나이지만, 이 본질이 구현되어 있는 위격(person)은 셋이시라는 것입니다. 칼빈이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위격들의 삼위일체가 있다"(in the one essence of God there is a trinity of persons)는 말입니다.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런 용어의 사용을 통해서 말을 절약해서 표현하기 위함이며,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지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이를 표현해야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신약에서 어떻게 계시되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치심을 신약 성경을 통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자신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나님, 그리하여 자신과 아버지를 구별하시면서도 또 자신을 그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시하시기도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요 10:30)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죄의 선언을 하심으로써 자신이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드러내십니다(막 2:1-12). 그리고 그를 신적인 분으로 인정하는 고백을 받아들이시기도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의 말한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고백을 포함한 신앙고백에 대해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하시면서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도마의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는 고백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나님과 자신을 구별하시면서도 자신을 그 아버지와 동일시하시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그가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시나, 또 아버지와는 구별되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이것이 잘 이해되지는 않아도 하나의 사실로서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사역을 마치실 즈음에 그는 후에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하셨습니다(요 15:26; 요 16:7-14). 과연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오셔서 교회를 인도해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지도해 가시는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였습니다(행 5: 1-11).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를 계시하시자 사람들은 난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전부터 하나님으로 섬겨 왔고 예수께서 아버지라 부르신 그 분과 자신을 그의 독특하신 아들로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아버지께서 이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의 관계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난제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일까요?

 

3. 두 가지 잘못된 해결책

 

교회가 처음 이 난제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교회 안에는 이에 대해서 두 가지 대립되는 잘못된 이해가 발생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이제 세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삼신론적 이단). 그러나 이는 앞서 살펴본 구약과 신약의 명확한 증거, 즉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와 명백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을 수 없는 견해이고 아주 명확한 형태의 삼신론을 교회 안에서 찾기는 좀 힘듭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에 근접하는 오해로, 성부 하나님만을 온전하신 하나님으로 말하고, 성자와 성령은 좀 못한 하나님, 제 2의 하나님이나, 제 3의 하나님으로 말하는 이들은 많았습니다. 이런 이해도 성경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은 교회에서 이단적인 생각으로 정죄된 것입니다.

이런 오해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들자면 그것은 아리우스(Arius)와 그를 추종하던 이들(Arians)의 생각입니다. 아리우스는 성자는 영원에서 창조된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하나님의 온전한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원에서는 성자가 "있지 않던 때가 있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자는 성부보다는 좀 못한 하나님, 선을 선택하여 불변성을 얻고 신성에 이른 존재이고,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영광을 받으시기에는 합당하나 우리의 경배의 대상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위는 더 격하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런 생각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따로 계시되, 성부만이 온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부차적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하심과 심지어 하나이심을 강조하다가 잘못된 사상도 있습니다.

소위 역동적 군주론(dynamic monarchianism)은 예수님을 그저 사람으로 보고, 성령을 신적인 영향력으로만 보았고, 양태론(modalism)으로 알려진 이단은 성부, 성자, 성령이란 한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시기에 자신을 드러내신 세 가지 양태(three modes of manifestation)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가 성자이고, 그가 성령인데, 그것은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형태를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시하신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자의 수난이 곧 성부의 수난이 되고 (성부 수난설, patripassianism), 결국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뚜렷이 구별되어 계시되어 있다는 것과, 또 때로는 성부, 성자, 성령이 동시에 나타나신 사건들 (예수님의 수세, 변화산 사건 등)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해는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 됩니다.

이 두 가지 오해는 아주 명확한 형태로 나타난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비록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지니더라도 그런 경향에로 나아가는 모든 것도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터툴리안(Tertullian)도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듯이 말을 한 일이 있고, 오리겐(Origen)은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고, 성령은 성자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표현하여 소위 종속론(subordinationism)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점들은 과거의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기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성부에 비해서 성자와 성령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자의 인간되심에 충실 한다고 하면서 그의 신성을 무시하거나 이를 완전히 감취어진 것으로 여기는 현대의 경향이나, 성령을 향해서 명령하듯이 말을 하는 풍조나 성령의 인격성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언사와 행동이 위에서 말한 첫 번째 오해와 연관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을 설명하면서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세 양태와 관련해서 설명하는 것(예를 들어서, 물질의 삼태(三態)에 따라서 물이 수증기, 물, 얼음으로 될 수 있으나 다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든지,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지위와 관계로 [아버지, 남편, 교사 등] 설명하든지 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두 번째 오해와 관련될 수 있는 것입니다.

 

4. 우리의 바른 삼위일체 이해는?

 

그러면 우리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데, 그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과도 유비되지 않으시는 아주 독특한 존재 방식을 가지셔서 그 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three persons)로 존재하신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그 존재와 영광과 권세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동일 본질을 가지고 계시어서 한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각 위간에는 종속적인 면이 없고, 위격적 엄위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 분들에 계시하실 때 아버지, 아들의 용어를 써서 계시하시므로 우리는 그 계시를 따라서 성부(아버지 하나님), 성자(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고, 또 이 용어들이 지시하는 관계성과 성경의 표현에 근거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낳으시고(generate),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낳아지시며(is generated),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proceed, spiratio, 요 15:26)는 표현을 써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관계를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점진적으로 계시하신 것에 근거해서 신약에서야 비로소 온전히 인식할 수 있지만, 이 삼위의 관계는 구약에도 있던 것이고 때때로 비록 그림자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그런 시사가 있는 계시도 있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관계는 사실상 하나님이 계시면서 계속해서 있어 온 관계입니다. 이렇게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때때로 본체론적 삼위일체, 존재론적 삼위일체라고 하며, 그 하나님이 자신을 역사적 경륜 가운데서 드러내신 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본체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이 삼위일체적 존재이심을 경륜과 계시 가운데서 드러내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삼위일체적 존재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게 섬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제7장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 [마태복음 6:25-33]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창조의 사실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창조의 사실을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창조 신앙을 다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창조의 사실을 성경에 기록한대로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창조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창조 사실은 성경에 기록한대로 믿지 않으면서 창조의 의미를 강조하고 그것은 믿으려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현대의 신학적 정황 가운데서는 창조 사실을 성경에서 기록한 그대로 받아들이며 믿는 일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창조 사실을 나 자신과 연관시켜서 생각하고 그 일에 나의 존재를 던져 넣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26문을 따라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할 때 당신이 믿는 바는 무엇입니까?"에 대한 대답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흔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 유신론적 의미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일반적 유신론의 입장에서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과는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 유신론적 의미에서의 창조 신앙은 사실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모두 믿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무(無)로부터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로서 지금도 그것들을 붙드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창조와 섭리에 대한 신앙) 둘째로, 그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며(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그리고 셋째는, 그런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시라는 것을 내가 믿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다 믿는 이가 기독교적 창조 신앙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첫 번째 것은 유대교도들이나 이슬람교도들도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 내용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믿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와 섭리를 믿는 것도 그저 유신론을 가진 이들이 창조와 섭리를 믿는 것과는 그 성질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창조와 섭리에 대한 믿음'은 어떤 점에서 독특한 것입니까? 그것은 결국 이 창조와 섭리를 해 나가시는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데에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영원 전부터 가지신 경륜을 따라서 하나님의 뛰어나신 지혜와 크신 능력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지금도 그리고 영원까지 이 피조계를 창조의 능력과 동일하신 능력으로 유지하시며, 통치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성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말한 후에,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고 말하여(히 1:3), 지금도 온 세상을 섭리해 가시는 일을 하고 계심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 여기서도 그의 창조의 능력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오래 전에 있었던 어떤 일을 믿는다는 것 정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그의 창조적 능력의 붙드심이 없이는 이 세상이 존재하지도 못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인정하는 것이 창조주를 믿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을 그의 창조적인 손길과의 대화 가운데 서 있는 것이 참으로 창조주를 믿는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를 그저 과거의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참된 창조 신앙에 못 미치는 것입니다. 이 순간도 하나님의 창조적인 손길의 어루만짐이 있어서 이 세상이 존재하며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창조주를 믿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창조 신앙은 역동적 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에 동일한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그 분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서 살며 가르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또한 성령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아주 친근하게 "아빠"(αββα)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성부와 성자의 아버지 아들 관계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만 있거나, 그 때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고, 로고스[말씀]께서 성육신하시기 이전부터도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는 영원부터 성부(God the Father)요, 성자(God the Son)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God the Holy Spirit)과 함께 영원한 삼위일체로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창조자는 "알라"가 아니고,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신적인 존재가 아니고,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적 존재(the Ultimate)에 대해 돌려 드릴 수 있는 수많은 이름들 가운데 하나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제 나의 하나님이요,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까지를 믿어야 창조 신앙을 제대로 가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해서 내가 창조의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나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존재론적 기초를 마련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었다면 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 가운데 있지 않았을 텐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내가 창조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까지를 믿는 이가 기독교 유신론적인 의미의 창조 신앙을 가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2. 창조자를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창조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가 나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공급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 3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공중의 새보다 귀하며, 들의 백합화보다 귀하므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1).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로서 우리를 돌아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셨다고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 하나님이 전혀 관계하지 않는 듯이 생각하는 것은 결국 창조 신앙도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자상한 돌보심을 이처럼 믿어야 창조 신앙을 바로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의 아름다움과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바라보면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 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하실까를 생각하고 믿는 이가 창조 신앙을 가진 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가진 이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수 없습니다 (마 6:25,31).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자들은 주어진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 나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성도는 그 모든 것의 해결을 자신이 다 해야 하거나, 다 할 수 있는 듯이 노심초사하거나 안절부절못하지 않습니다. 또 그런 문제에 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염려함으로 그 목숨을 한자라도 더할 수 없음을, 오히려 사실상 그것을 단축할 뿐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히려 상당히 초연한 자세로 모든 것을 잘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모든 문제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빌 4:6). 그렇게 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입니다(빌 4:7). 그러므로 참된 창조 신앙을 가진 이는 삶에 대해서 초연한 태도를 가지고,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일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염려하는 것이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그의 아버지께서 창조하셔서 그에게 잘 보살피도록 맡기신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인은 이 세상을 피하여 가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명상만 하거나, 또 어떤 곳에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잘 살겠다고 하지 않고, 이 세상 전체의 과정과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삶의 모든 문제에 다른 어떤 이가 그럴 수 없을 만큼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다 할 수 있는 듯이 생각하지 않기에 거리를 두고 초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한 가지를 끊임없이 추구해 가고 그것을 위해서는 그야말로 노심초사하고 그것이 이루기까지는 쉬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한 추구로 그는 이 땅에 살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있어서 그 나라의 온전한 의가 우리를 하루 속히 지배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 전에라도 그 나라의 의에 조금이라도 근접하는 것이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만 그의 이 세상에서의 힘쓰는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뜻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상)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구하다, 추구하다"(ζητ?ω)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가 계속 추구해야(keep seeking) 할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이 우리가 구하고 추구하고 염려할 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신앙을 가진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에 더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을 소망하고 살아가며, 이 세상에서의 구체적인 삶에서도 그 나라의 의를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왕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슬픈 세상에서 그 어떤 역경을 네게 보내시더라도 [그것이] 결국은 나의 선을 위한 것임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는 결국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모든 일이 그것이 자신의 죄에 의해서 자초되는 것이 아닌 한 자비하신 아버지에 의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그의 삶과 관련해서는 모든 일이 잘되리라고 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욥과 같이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수도 있으며, 때로는 예수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고난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도 아는 이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시며 지켜 주시는 것을 잊지 아니하며, 그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굳게 믿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손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우리 아버지이시므로 현세에서나 심지어는 죽어서라도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실 분이심을 바울은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3. 창조 신앙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믿는 것이지만, 특히 다음의 두 가지 속성을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라고 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의 어떤 힘이 능가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힘에 대한 생각이 사무쳐야 합니다. 그 전능하신 힘으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만드시고, 지금도 그것을 유지하시고 통치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경륜해 나가시며, 나를 그 나라 백성으로 삼으셔서 다스리시고 구체적으로 돌보시는 것입니다. 무(無)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전능한 힘으로 나를 돌아보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실존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전능은 그저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다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문제와 관련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얼마나 강한 것으로 믿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연약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는 그야말로 크신 힘을 가지신 강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와 같으신 이가 온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강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 분의 강력하나 자애로운 손길을 매 순간마다 의식하며 사는 이가 창조 신앙을 가진 이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참으로 믿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큰소리치고, 다른 이들을 이용하고, 윽박지르고, 자신의 힘을 나타내 보일 때만 무엇인가 있는 듯이 돌아보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입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이 세상적인 방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 같은데도,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서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온유하게 부드럽게 세상의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갚으며 살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참으로 믿는 이들은 그 하나님과 그의 전능을 의존하기에 그의 방식에 따라 부드럽고 조용하게,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주장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는 이들은 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연약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은 강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전능의 발휘가 있습니다. 그 전능은 우리의 사적인 욕망이나 개인적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사용(私用)해 보려고 하는 생각은 사실 하나님의 전능성에 반하는 생각인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믿음직스러우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약속하셨다면 그는 이 약속을 어떤 상황에서도 신실하게 지켜 나가십니다. 그는 그야말로 신실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으십니다. 그는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진리의 하나님이시므로 참으로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온 세상이 변해도 그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야고보는 "그는 변함이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약 1:17 하). 이렇게 하나님 자신이 변하지 않으시므로, 따라서 그의 말씀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는 말씀도 결국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전적으로 믿을 만한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무엇을 믿겠습니까? 그 믿음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좋은 일이 나타날 때만이 아니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불행의 순간에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그 분께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자상하신 돌보심에 대한 우리의 최후의 고백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리하실 수 있고. 그는 신실하신 아버님이시므로 그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제8장 섭리(攝理)란 무엇입니까? [히 1:3; 시 104편]

 

앞장에서 창조 사실과 창조 신앙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이 우주와 심지어 보이지 아니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이 되는 창조의 사실을 믿고 전능하신 창조자를 생각하는 일은 피조된 이성적(합리적) 존재들에게는 당연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창조와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을 바로 믿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17세기말부터 영국에서 시작되어 유럽 대륙과 당시의 신대륙인 미국에까지 번져간 이신론(理神論, deism) 또는 자연신론(自然神論)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는 이 세상이 그 나름의 법칙에 따라 움직여 나가게끔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신론자들은 피조계를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정교한 우주를 디자인(design)하신 창조자를 생각하고 그에 대한 경이를 느끼고, 그가 자연계에 부여하신 법칙을 애써 찾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 피조계와 어떤 직접적인 관련을 갖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능력과 동일하신 능력을 발휘하셔서 이 세상과 역사의 과정에 관여하고 계셨고, 또 지금도 관여하고 계십니다. 이를 전통적으로 섭리(攝理, providentia, providence)라고 불러왔습니다. 섭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하였던 이신론자들은 창조는 믿되 섭리는 믿지 않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신론자들은 "가슴속에 종교에 대한 깊은 갈망을 지닌 합리주의자들이었다."고 표현한 드라이든(Dryden)의 표현은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만 믿고 섭리를 믿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 대해서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종교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믿으라고 하신 것을 다 믿지 않는 것 또한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섭리 교리에 대한 근대의 오해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의 또 하나는 섭리의 과정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과정을 동일시하려는 헤겔(Hegel)의 사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은 범신론(pantheism)일 것입니다. 이는 이신론과는 달리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 같으나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섭리를 이해하지 않고, 섭리의 과정이 하나님의 존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 세상 역사의 과정이 하나님 자신에게도 매우 형성적인 과정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견해에 의하면 창조와 섭리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며, 사실상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개념도 사라질 정도로 역사의 과정을 하나님 자신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섭리 개념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아마 현대에 들어 와서 가장 심각하게 왜곡되는 교리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섭리 교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섭리의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27문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문답은 다음과 같이 묻는 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로써 당신이 이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섭리 개념의 이해

 

섭리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일이 "전능하고 항존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그의 본유적인 능력, 특히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사용하셨던 그 능력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창조의 능력과 동일하신 능력으로써 섭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은 "항존적인" 능력이라는 또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에 섭리에 작용하는 능력이 항존적인 능력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능력은 항존적인 것이므로 우리로 하여금 전혀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합니다. 우리는 넉넉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붙드시는 손길을 믿고 우리의 길을 걸으며,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섭리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는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믿음이 그 배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이런 섭리가 발생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되어 지는 일들을 당연시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 전능하고 항존적인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일은 다음 두 가지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유지 또는 보존"(preservation, conservatio, sustentatio)이라는 말이고, 또 하나는 "통치"(government, gubernatio)라는 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도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일은 지극히 거룩함과 지혜와 권능으로써 모든 창조물과 그 모든 행동을 보존하시며 통치하시는 일입니다."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제 11문답). 이 둘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그 개념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지 이 과정들이 결코 떨어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보존과 통치, 그리고 후에 말할 협력이 모두 하나의 섭리적 사역의 여러 측면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유지, 또는 보존하신다는 말은 "모든 피조물을 붙드신다."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도 성자께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의 존재가 유지될 수 있도록 돌보아 주심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께서 당신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붙드시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면, 이 피조계는 결코 계속해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은 그 존재의 시작에서만이 아니라 그 지속에 있어서도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께 의존해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결코 자족적인(self-sufficient)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리스가 그의 히브리서 주석에서 잘 설명하고 있듯이, "성자의 유지시키시는 활동의 범위에서 배제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존재도 그 하나하나의 움직임도 다 하나님의 우리를 붙드시는 손길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님과 관련을 가지지 않고 있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깨달은 시편 기자는 피조계 전체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습니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 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 104:27-29).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 있는 존재 전체가 하나님께 감사를 표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의 붙드시는 손길 때문에 이 순간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하신 태양이 없어지면 자신들이 그 존재를 계속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그 태양을 창조하시고 유지시키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그를 인정하지도 않는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한 상황입니까? 우리는 이런 현실에 대해서 깊은 통분함을 느껴야만 할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와 붙드시는 손길을 유의하고 그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나아와 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회개하면서 찬양을 드리는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아주 바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해야 할 것을 천명한 후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8:6). 온 세상의 피조물들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데도, 그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심한 통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 세상을 그저 유지해 나가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님께서 영원 전부터 가지신 목적을 향하여 이 세상이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세상을 운영해 나가십니다.

이를 하나님의 경영 또는 경륜(oiconomia, economy)이라고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統治, gubernatio, government)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며 통제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의 역사와 민족들의 흥망성사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를 잘 깨달은 다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단 2:21)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아야만 한다고 말입니다(단 4:25). 이 세상에 되어지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손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체적 통치 행위에서 그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이시라는 것이(엡 1:11) 잘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소에도 이런 사실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아주 잘 나타나는 것은 때로는 이 세상의 죄악을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심판하시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최후의 심판에서는 더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말로 다음과 같은 아모스의 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둥머리를 쳐서 문지방으로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셔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육하리니 그 중에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의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눔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그 칼을 명하여 살육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아모스 9:1-4).

 

이런 심판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섭리가 나타나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심판만이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에는 가장 사소한 것도 포함되고(마 10:29-31),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포함되며(잠 16:33; 왕상 21:19-24; 왕상 22:17, 34-36), 선한 일도(빌 2:13), 악한 일도(욥 1:11, 12; 2:4-6), 자원해서 나타나는 자유스러운 일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보존과 통치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유지하시는 것이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을 향해 잘 다스려 나가시는 과정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시려고 하는 것은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며, 모든 피조계가 기꺼이 하나님께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루어 나가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 나라의 형성을 위하여 온 세상을 지금도 유지하시며 다스려 나가시는 것입니다.

 

2. 섭리의 구체적인 과정은? - 기적의 경우 외에는 동시 발생, 혹은 협력(concurrence)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는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책임지셔야 하며, 다른 존재들은 다 그의 조종에 의해서 놀아나는 꼭두각시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섭리에 대한 심각한 오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일반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원인과 결과의 연관 관계를 무시하고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강요와 억압을 부여하여 피조물들의 작용과 의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원인 결과의 관계를 넘어 서서, 즉 제 2의 원인들을 사용하지 않고, 또는 그 과정에 역행하여(contra media), 즉 자연 법칙으로 일어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수단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직접 일으키기도 하시고, 관여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이적들(miracles)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비상 섭리(extraordinary providence, providentia extraordinaria)인 것입니다. 이 말 자체가 말하고 있듯이 이는 참으로 비상(非常)한 일로 늘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바다 가운데에 내신 길로 가게 하신 일이나,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신 일이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행하신 이적들이나, 사도들의 선포의 확증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도들로 하여금 일으키도록 하셨던 소위 "사도적 이적들"(apostolic miracles)과 같은 이적들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셔서 일을 하신 비상 섭리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또 보편적으로는 대개 이 세상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사용하셔서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는 제 2의 원인(the second cause, causa secunda)을 사용하셔서 섭리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벌써 이 세상에 되어지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다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중세 때 스콜라 신학자들이 즐겨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만물의 "제 1의 원인"(the prima causa)이십니다. 그러나 이 말이 모든 것의 직접적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말이 아님에 유의해야 합니다. 제 1의 원인이신 하나님은 제 2의 원인들을 무시하고서 사역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 2의 원인들을 사용하셔서 사역하시되 그 제 2의 원인들의 성격을 잘 활용하셔서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과 제 2의 원인들이 협력하여(a concurrence of the first Cause with the second causes) 일이 이루어진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협력(co-operatio, cooperation) 또는 동시 발생(concursus, concurrence)라고 우리 선배들이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제 2의 원인의 원인으로서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섭리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셔서 어떤 일을 하도록 하실 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주관하심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의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하시지는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바울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 13)라고 말할 때, 이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우리의 소원을 두고 행하는 일의 연관성을 잘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이 우리의 소원을 두고 행하는 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과 경영이 우리의 의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는 자동 기계나 로봇과 같아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책임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어서 하나님의 뜻의 작용이 간접적으로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우리의 의지의 활동,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제 2의 원인이 동시 발생적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섭리 교리의 실천적 의미는?

 

이러한 섭리 교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매우 실천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세상에 우연히(by chance)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과 관련하여 일어난다는 것이 섭리 교리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에서 말했던 이적들과 같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관련되는 일도 있으나, 대개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등 하나님과 간접적으로라도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일어나든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관장 아래에 있으므로 이 세상에는 "우연히 일어났다"고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점을 확언해 주고 계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라도 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섭리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우연에 근거하거나, 요행을 바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개혁자들이 카드놀이를 금한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연이나 요행을 바라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오락으로 카드놀이 등을 즐길 수는 있습니다마는 기본적으로 요행이나 우연을 기대하는 태도는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문제시해야 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각국마다 유행하고 있는 복권 제도입니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한국이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고 열심히 복권을 사고 있습니다. 그런 일에 따르는 다른 문제점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복권제도 배후에 있는 우연에 근거한 생각, 즉 이 세상에 우연히 요행히 되는 일도 있다는 생각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진화론이 옳을 수 없는 것도 이 생각이 기본적으로는 우연에 근거하여 생물의 발생과 진화를 설명해 보려고 하려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지 우연에 근거하여 무엇을 설명해 보려는 태도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섭리 교리의 첫 번째 실천적 의미입니다.

 

둘째로,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손길에서 우리에게 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좋은 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적인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들의 아버지의 손길에서 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의미 있게 생각하면서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제 27 문에서는 "꽃잎이나 풀잎, 비나 가뭄, 풍년이나 흉년, 음식이나 음료, 건강이나 병, 번영이나 가난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손길에서 우리에게 온다는 것입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따라서 섭리의 대상에는 신자나 불신자, 피조계 전체, 심지어 천사들과 타락한 천사들인 악한 영들(귀신들)이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존재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섭리는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계 일반보다는 인간들에게, 또 인간들 일반보다는 당신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더 특별한 섭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들에게 미치는 섭리를 특별 섭리라고 하고, 그 중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미치는 섭리를 "아주 특별한 섭리"(특 특별 섭리, a very special providence, providentia specialissima)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이들은 그저 세상만사를 하나님께서 다 섭리하신다는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 자녀 된 자신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섭리하시는 줄 알고서, 그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고 그 인도하심에 잘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이들과 그 섭리 아래 있으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큰 차이인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다 섭리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식론적으로는 오직 성경적으로 바르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섭리를 인정합니다. 그들은 섭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구체적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음 말씀을 실천적으로 체험하며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마지막으로 바른 섭리 교리를 배운 이들에게 오늘의 신학적 상황 가운데서 요구되는 하나의 이론적인 요구가 있다면 그것은 섭리를 하나님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본 범신론에 대한 모든 비판을 염두에 두고서 그것을 교묘하게 변형시킨 만유재신론(pannentheism) 극복의 과제라는 것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과정신학, 몰트만과 융엘의 새로운 십자가의 신학, 큐피트 등의 비실재론적 신학, 심지어 이전 시대의 바르트의 신학에도 등 오늘날 신학계에 상당히 펴져 있는 심각한 문제의 하나입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도 섭리 교리를 오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20세기말과 21세기 초에서도 전통적 신학을 유지하려는 이들에게는 이 만유재신론에 대한 극복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신학적 논의의 주제(agenda)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섭리 개념을 성경적으로 바로 정립하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9장 창조와 섭리 신앙의 유익 [창세기 45장, 50장]

 

창조를 믿는다는 것과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그저 과거에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었고, 또 지금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 이상의 실천적인 함의(含意)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창조와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창조와 섭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이런 분명한 사실들에 대해서 맹목적이게 되고, 그 사실들을 아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전혀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로(엡 2:12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창조와 섭리의 사실을 알고 인정한다고 해도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전혀 생각해 보지 않는 이들은 이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의 유익에 의미 깊게 동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섭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 이들인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시간을 내어서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관심을 가지고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28문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태가 우리에게 불리할 때 인내할 수 있으며, 사태가 잘 되어 갈 때 감사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해서도 우리를 그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우리의 신실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선한 신뢰를 둘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온전히 그의 손에 있어서, 그의 뜻이 아니면 그들이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여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설명을 따라서 믿는 이의 태도를 찬찬히 생각해 가면서 창조와 섭리의 유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는 인내할 수 있는 이이다.

 

여기에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하다가 이 세상의 복잡한 삶의 과정 가운데서 모진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 있게 되었다고 해봅시다. 이런 상황 가운데 잇는 그는 이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과연 어떻게 생각해고 행동해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일까요? 어려움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하거나, 하나님이 계셔도 자신을 돌보아 주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는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이가 아니거나, 적어도 그 순간에는 불신앙의 태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는 그 순간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믿지 않거나,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를 나타내 보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탄회(坦懷)하신 일이 있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사 40:27-28). 이처럼 모든 것이 자신이 생각한대로 잘 될 때만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역경도 모두 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욥의 상황과 같이 그런 어려움이 우리게 임하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 없는 경우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도 참으로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어떤 경륜 가운데서 내게 임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그 어려움을 참고 인내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참된 신앙인들은 모두 다 이같은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에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들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巖穴)과 토굴(土窟)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이 자신들에게 임하는 제2의 원인(the second cause, causa secunda)이 된 다른 사람들이나 상황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와 섭리를 믿으며 인내하는 이의 바른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인내하는 이는 다른 이들을 참으로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들이 관여되어서 우리에게 어려움이 임하여 왔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그들보다는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우리에게 잘못 행하는 것을 관대히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 가운데서 섭리를 믿기 때문에 자신에게 잘못한 이들을 참으로 용서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을 들자면 우리는 구약에서는 요셉을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물리치고 (따라서 통역도 물리치고) 아마도 그의 모국어로 그의 형들에게 그가 했던 다음 말을 잘 생각해 보십시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4-5, 8).”

 

많은 이들은 "요셉 기사 전체에서 핵심이 되는" 이 말이 하나님의 "섭리적 통제에 대한 고전적 진술의 하나"라고 말합니다.3 이 일에 사람들의 잘못과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음을 보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만 눈을 집중시키는 그것에 섭리에 바른 이해와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4 비록 형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자신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서 자신을 아비에 집에서 떠나게 하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 과정 가운데서 자신이 모진 고생을 하였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요셉이었지만, 그는 또한 이 모든 어려움이 그저 형들의 죄악과 미움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결국 궁극적으로 따져 올라가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통해서 자신에게 임하였다는 것을 그는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 이야기 전체의 본질, 주제, 또는 큰 구조(macrostructure)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어려운 과정이 결국은 자신의 모든 가족을 보존하고, 결국은 이스라엘 족속을 보존하며 번성시키기 위한 것임을 그는 인정하면서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가 정확히 언제 이런 인식을 확연하게 가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고, 본문도 그런 시사를 전혀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명확히 이런 인식 가운데서 움직여 나갔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가 이 과정을 겪어 가면서 점점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백을 하는 요셉도 이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런 섭리적 통제를 깨닫고 고백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깨닫게 된 후에 요셉은 자신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판, 형들이나 자신은 그 집안일을 최선을 다해 잘 돌아보았음에도 자신을 유혹하고 누명을 씌워 옥에 넣도록 한 보디발의 아내나, 상황을 잘 알아보지 않고 자신에게 모질게 대한 보디발이나, 꿈을 잘 해석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돌아 볼 시간을 갖지 못한 관원장에게 대한 원망의 마음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기에 참으로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악 된 사람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하시는 목적을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참으로 믿는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원인이 되어서 당하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라도 그 원인이 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원한을 표하거나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믿으면 다른 이들을 얼마든지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고, 또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식이나 빈말이 아니었음을 야곱이 죽은 후에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요셉이 복수할까봐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말하는 요셉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19-20).”

 

이 말씀을 포함한 요셉의 대답에 대한 가장 좋은 정리와 언급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데렉 키드너의 요약적인 그러나 풍성한 분석을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의) 삼중의 대답의 각 문장은 구약(과 신약)의 신앙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대해 행해진 악행들에 대해서 모든 일이 바르게 되는 것을 다 하나님 손에 맡기는 것(19절, cf. 롬 12:19; 살전 5:15; 벧전 4:19), 사람의 악함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찾는 것(20절; 창 45:5), 그리고 악에 대해서 용서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애호와 돌봄으로 갚는 것 (창 45:21절; 눅 6:27) 이 모든 것들은 '기독교적인' 아니 심지어 '그리스도와 비슷한'(Christlike) 태도를 선취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요셉의 태도, 이와 같이 관대한 마음은 모두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주관하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는 섭리에 대한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 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한편에서 생각해 보면 신성을 가지신 주님이시기에 하시는 말씀이시지만, 또 한편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음을 분명하고도 확실히 믿는 믿음으로부터도 나오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런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신다고 해서 죄악을 범하는 사람들이 책임이 없거나, 그들이 아무런 죄책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결과만 좋으면 그것으로 다 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경우에 있어서도 잘못을 행한 형들과 보디발의 아내 같은 이들의 죄와 죄책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섭리를 인정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참고 인내하며, 용서한다고 해서 그것이 죄와 책임에 대해서, 그리고 정의에 대해서 맹목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나 다름 모든 이들이 분명히 의식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죄에 대해서 판단하시고 공의롭게 처리하실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들도 창조와 섭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서 역경과 환난 가운데서도 잘 인내하여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 특히 억울함과 원한을 십자가의 구속의 빛에서 다 주께 맡기고서, 따라서 자신은 그로부터 참으로 벗어나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빛에서 생각해 보면 억울함, 원한, 한(恨)에 묶여 사는 이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 사상 중의 하나인 한(恨)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그 인식에 근거해서 그 한(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풀이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미 십자가가 한의 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극복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섬기는 이들의 선을 위해 선으로 인간들의 악을 이기실 수 있음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2. 창조와 섭리를 믿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섭리를 믿는 이들이 역경(逆境) 가운데서는 이와 같이 어려움을 인내하며 견디어 나갈 수 있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가는 순경(順境) 가운데서는 그 모든 일이 자신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서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엄격하게 따져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왜냐 하면 되어지는 모든 일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이는 오직 섭리를 믿는 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섭리를 참으로 인정하는 이는 순경(順境) 가운데서 만이 아니라, 역경(逆境)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되어지는 모든 일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모리스가 잘 말하는 바와 같이, "모든 정황 가운데서 감사하는 것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리스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기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하는 일은 참으로 섭리를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매우 자연스럽고 마땅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근원적 원인은 참 신자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의 구원에 대해 감사하면서 우리는 모든 정황 가운데서도 그 구원을 이루신 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잘 알다시피 쉽게 되어지는 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살전 5:18). 그는 "모든 정황 가운데서" 감사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역경 가운데서의 상황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말입니다. 감사하는 일이 쉽게 되어지는 일이라면 교우들에게 이를 명령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기에 이를 명령한 바울 사도는(그가 명령한 다른 것들도 염두에 두면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렇게 감사해야 하는 근거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기만 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그대로 행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바라시는 바의 하나가 분명히 명시(明示)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겠

습니까?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우들에게도 같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감사의 최종적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이루신 구속의 행위로 주신 유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믿는 성도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무엇이 잘 되었을 때 그것이 자신의 선행이나 애씀과 노력의 결과로 그리되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물론 그 자신이 노력하지 않거나 애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의 노력과 애씀으로 좋은 결과가 왔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따지면 자신이 이렇게 애쓰고 노력할 수 있는 그 동기와 힘과 마음과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가능하게 하신 것이며,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정황을 이루셔서 좋은 열매가 있도록 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리면서 하나님께 참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자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이는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레미아서 9:23-24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을 여러 번 하는 것입니다(고전 1:31; 고후 10:17).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연합 가운데서"라는 뜻을 전달하는 이 "주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주안에서 무엇을 자랑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해주신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신자에게는 자랑할 것이 주님뿐이시라는 말입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강하게 말하듯이, 그들이 가진 것 가운데 주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고전 4:7),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3:21). 이를 제대로 깨달은 이들은, 칼빈이 잘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신들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 전체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증진시키는 데 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이가 참으로 감사하는 이인 것입니다. 창조와 섭리를 참으로 인정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실재적인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에게는 그 자신이나, 자신이 이룬 일이나, 자신의 옷이나 부나 명예나, 학식이나, 자신의 힘이나, 자신의 노력이나, 자신의 자녀나, 심지어 자신의 교회나 자신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자랑거리로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자랑의 근거요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만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창조와 섭리를 믿는 사람은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이다.

 

창조와 섭리를 믿는 것은 이렇게 과거와 현재와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와도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손길 안에 있는 것만큼이나, 미래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28문답의 마지막 부분이 분명히 말하듯이 "모든 피조물들이 온전히 그의 손에 있어서, 그의 뜻이 아니면 그들이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여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섭리를 믿는 이는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사망이나 ...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는 바울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이는 그 불변하는 사랑을 믿기에 장래를 과감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는 이는 장래에 대해서 쓸데없는 걱정과 불안을 가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상황 가운데서의 우리의 불안과 걱정을 제거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해서 공연한 불안에 사로잡히고 걱정하는 이는 마치 그에 대해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는 실천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가 참으로 이런 상황 가운데 있다면 그는 실천적 무신론자(practical atheist)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상황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데도, 그 자신은 마치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와 돌보심이 전혀 없는 듯이 생각하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한다니 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불신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성도는 미래에 대해 고민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 6:25, 32상).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우리는 이런 염려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하). 그러므로 창조와 섭리의 주가 되신 천부께서 "이 모든 일 것을 [우리]에게 더하시리라"는 것입니다(마 6:33하). 따라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불안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벧전 5:7) 베드로가 권면하지 않습니까? 또한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빌 4:6) 권면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는 이는 미래 일을 생각하고 계획할 때 하나님을 배제하고 생각하거나 계획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어리석은 농부는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수확에 대한 생각을 하고 계획을 세웠고(눅 12:16-21), 이것 때문에 예수님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또한 야고보가 예를 들고 있는 사람도 하나님은 전혀 배제한 채 장래의 계획을 세웠으나(약 4:13-17), 야고보는 그에 대하여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가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도시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산중이나 농촌에서 새벽에 안개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이들은 이 말의 의미를 직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 같은 존재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물을 사람들을 위해서 야고보는 친절하게 대답하여 주기를 우리는 도리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주의 뜻이면"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고대 희랍어에 자주 등장하여 나중에는 그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기는 하나, 야고보가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그저 희랍적인 경건을 편입시키거나 일반적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참으로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서 계획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장래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하는 일을 해야 하나, 이 때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서 이 일을 하며, "주의 뜻이면" 이런저런 일들을 하리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로 야고보는 그가 이전에 강조한(약 4:7)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을 모든 삶에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획할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적 통제를 믿는 사람다운 모습을 나타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온 천하를 참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은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을 깨달은 이는 그와 같이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주님의 뜻 안에서의 미래에 대한 계획도 언제나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과 연관되어야 합니다(마 6:33). 우리의 모든 계획은 주께서 크신 힘으로 세우시는 그 나라의 진전과 그의 의의 온전한 실현을 위한 계획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그 의(義)를 위해 사는 이들만이 미래를 참으로 창조와 섭리의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와 우리의 미래조차도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경영하시고 세우시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의를 위해 사는 존재들이니 말입니다.

 

4.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가 현세의 삶을 살면서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역경(逆境)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인내할 수 있고, 순경(順境)과 번영(繁榮) 가운데서도 자만(自慢)하지 않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해서 쓸데없이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믿고 염두에 두면서 그의 뜻을 따르는 계획을 세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바로 아는 이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있었으며, 지금도 있고, 또 있게 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울과 같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말하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living), 기동하며(moving), 있느니라(being)". 부디 우리 모두는 이런 것을 잘 알기만 하지 말고, 그것을 잘 아는 사람답게 그 모든 유익을 잘 얻어 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미래를 포함하여 우리 전체를 주께 맡기고서, 우리의 모든 정황 가운데서 참으로 인내하며, 주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10장 그리스도의 칭호(1)-예수라고 불리우시는 하나님의 아들 [마 1:18-21] 이제 성자 하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이 때 전제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이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고백했던 바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그 본질과 존재와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온전히 동등하신 하나님이시어, 역시 동일 본질의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그 고백입니다. 사도 신경에서는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창조와 섭리에 대해 말할 때 일반적으로 성부 하나님을 그 일의 대표로 내세워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 때문에 마치 창조와 섭리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그래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이런 일에는 관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신경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말한 후에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고백할 때에도 아버지 하나님을 삼위일체적 창조의 대표자로 인정하는 터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부터의 우리의 논의는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과 그의 지상 사역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아들이신 그 분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 계십니다. 성자가 계시니 성부가 계시고, 성부가 계시니 성자가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영원한 관계성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계셨고, 지금도 무한한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대제사장적 기도(요 17장) 가운데서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7:5). 이 말씀 가운데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라는 말은 그가 영원 전에 삼위일체적 영광 가운데 계셨음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 가운데 계시던 성자께서 그 하늘 영광을 떠나셔서 인간성을 취하셔서 이 땅에로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그 분에게 붙여진 이름이 "예수"였습니다. 오늘은 왜 그 분에게 예수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를 살펴보면서, 이 "예수"라는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계시된 이름 "예수"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그 부모나 조부모들께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 이 세상의 관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부모가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이 구약의 언약 백성에게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름을 지어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로 주어진 이삭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웃음이란 뜻의 이 이름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웃음과 사래의 웃음[창 17:17, 창 18:11-15], 그리고 할머니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에 대한 동네 사람 등의 웃음, 그리고 사래의 기뻐하는 웃음[창 21:6] 등) 삼중의 웃음을 빗대어서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 주신 이름입니다(창 17:19). 세례 요한의 이름도 그가 잉태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그 아버지인 사가랴에게 지시해 준 이름입니다(눅 1:13, 59-64). 또 어떤 이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삶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바꾸어주신 일도 있습니다. "높은 아버지"(high father)라는 뜻의 '아브람'에서 "많은 무리의 아비"(father of the mutitude)라는 뜻의 이름인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주신 경우나(창 17:5), "발꿈치를 잡은 자"(heel-holder)라는 뜻의 야곱에서(창 25:26) "하나님과 겨룬 자"(God's fighter)이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고 고쳐 주신 경우가(창 32:28)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이런 이름의 변화는 그들의 역사 가운데서의 성격이나 특성의 변화를 나타내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예수라는 이름도 이렇게 하나님께서 미리 지어 주신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 자체는 이전에는 없던 아주 독특한 이름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라는 이름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이름의 하나입니다. 구약의 예를 들면,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을 인도한 "여호수아"는 그 이름이 "예수"와 같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예수아"(느 7:7)라는 이름은 신약에서 예수라고 쓴 것과 정확히 같은 이름입니다. 신약에는 "바예수"(즉, 예수의 아들)라는 이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행 13:6) 예수라는 이름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주 붙여지던 이름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직 여호와께서만이 자신들의 구원이 되심을 믿고, 그들의 자녀에게 그런 믿음을 표현하는 이름을 붙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의 "예수"라는 이름을 얻으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라는 청년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고 말씀한 것이 이 아이에게 예수라는 이름이 언급된 근본적 이유입니다. 또한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이 마리아의 수태 사실을 알고서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를 근심하며 가만히 끊고자 할 때, 주의 사자가 그의 꿈속에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 1:20-21). 이렇게 이 아이의 이름은 그 법적인 인간 부모 될 이인 마리아와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주의 사자의 말씀 속에서 계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시고, 붙여 주신 이름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오고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는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 그 아기의 법적인 아버지가 된 그 요셉이 그 아이의 이름을 주께서 계시해 주신대로 "예수"라고 하였습니다(눅 2:21; 마 1:25).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를 법적으로 입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요셉이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legal father) 또는 "양부"로 행동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 아이가 요셉의 계열을 따라서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인정되게 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이름의 기원입니다.

정리하자면, 그 이름은 1세기 중반까지는 일반적인 이름이었지만, 예수님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와 같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붙여졌고, 그 의미도 독특했던 것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후에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는 이 이름이 너무나 악명 높은 이름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나 고귀한 이름이 되어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자녀들에게 붙여주지 않아 2세기부터는 희귀하게 된 이름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하면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주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아이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친히 붙여 주신 것일까요? 마태복음에 나오는 요셉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그 이유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마 1:21).

이스라엘 중에 예수라고 이름 하는 사람이 여럿 있을 수 있지만, 그 때에는 그저 그 부모 되는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기대하고 바라면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는 그저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마치 노아의 아버지인 라멕이 아들을 낳고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라고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안위함"이라는 뜻의 "노아"라고 하였듯이 말입니다(창 5:29). 이와 비슷하게 여호와께서만이 우리의 구원이심을 고백하면서 주께서 그 구원을 속히 가져다주실 것을 기원하는 것이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붙일 때의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이 아이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보내셔서 이름을 지어 주시면서 그 이유까지를 밝혀 주셨는데,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예수라고 하는 분은 기본적으로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시사해 줍니다.

여기 아주 포괄적인 용어 하나가 나왔습니다. "구원" 이 구원이란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으로부터의 회복과 온전하게 함을 의미합니다. 물리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 회복과 온전하게 됨 이것이 구원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포괄적인 뜻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이 구원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이 본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시편 130:8은 "저가[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 하시리로다."라고 말하여 이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아주 강조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잘 살펴보면, 사람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인 영적인 데에 있으므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물리적, 정신적 회복은 참되고 궁극적인 의미의 구원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사역의 일차적인 의미는 구속적이고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이름을 설명하면서도 "이는 ...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영적인 문제만을 해결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는 영적인 문제로 시작하지만, 이는 결국 정신적 문제, 도덕적 문제, 그리고 물리적 문제까지를 낳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그로부터 오는 비참함이란 문제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총체적인 인간 문제의 해결도 결국 궁극적인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그로부터 물리적, 도덕적, 정신적 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온전하게 될 때에야 인간의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예수라고 하는 분은 일차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궁극적으로 이렇게 온전한 의미의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라고 불린 아이는 우리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유일하신 구원자로서 말입니다. 그래서 후에 사도들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공언하였습니다(행 4:12). 예수라는 그 이름이 무슨 신비한 마술적인 효과를 발휘해서 구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오셔서 구원의 사역을 다 이루셨으므로 오직 그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샬이 잘 말하고 있듯이, 이로부터 "하나님께서 예수를 구주라고 선언하셨다면, 그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시는 구원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종의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그가 구원을 이루시려고 한다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과 같이 어린아이로 세상에 오셔서 자라나는 과정을 가지셨던 것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이루신 구원의 과정을 먼저 간단히 살펴보면, 그는 다른 아이들과 같이 모든 면에서 자라나셔서(눅 2:52), 기본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사역의 의미를 말씀과 행위로 가르쳐 주시고, 그 가르침에 따라 우리의 영적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후에 부활 승천하셔서 그 하늘에 계시다가 그 하늘로부터 구원의 궁극적 완성을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적인 구원을 가져다주신 것의 온전한 성취, 즉 물리적, 정신적, 도덕적 회복과 완성의 온전한 드러남은 그가 자신의 사역을 종국적으로 마치실 때에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그는 이미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또한 다시 오실 때에 온전한 구원자가 되신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다중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둘째로, 그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특한 의미에서 이 예수님의 백성인 이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과연 그의 백성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의 혈연적 백성인 유대인들이 그의 백성입니까?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백성의 일부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자신이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요 1:11)는 말씀은 유대인들의 이런 배척도 포함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의 백성입니까? 예수님께서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모든 종류의 사람이 다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 스스로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구원을 이루신 이들이 다 예수님의 친 백성이고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유대인들이 반발하고 나오자 사도 바울은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행 18:6)고 선언하고, 디도 유스도라고 하는 이의 집에서 따로 모임을 가질 때에 주께서 밤에 환상 가운데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10). 고린도 도시 가운데 주의 백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아직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백성이 될 자들을 하나님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에서 "백성"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데 사용된 데 비해서, 여기서는 새롭게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독특합니다. 이들을 이렇게 미리 "백성"이라고 부르신 이유는 칼빈이 말하는 대로 "그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서 곧 가족에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미리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신" 것이고, 데이비드 윌리엄스가 말하고 있는 대로, "주께서는 그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을(행 13:48; 요 10:16)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그들이 다 나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주의 백성으로 인정하시면서 사도의 사역이 필요하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믿고서 1년 6개월을 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미리 정하신 예수님의 백성인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말씀하신 모든 족속 가운데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다 지키는 사람들인 것입니다(마 28:19). 예수님께서는 결국 그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는 누가 예수님의 백성인지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백성, 즉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의 존재와, 그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그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는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 말을 우리가 그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만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오해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그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 예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이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정한 수준의 것을 이루어야 예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헛될 뿐만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말도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은 당연히 그 나라에 백성다운 열매를 내게 되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런 열매는 우리가 예수님의 백성임을 확증해 주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을 너무 강조하여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되고, 스스로도 너무 내성(內省, self-reflection)에 빠져서도 안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여 예수님의 백성을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의 확신이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제 29문은 예수라는 이름의 이런 뜻을 잘 정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 "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즉 구원자라고 불립니까?" (답) "왜냐 하면 그는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다른 데서 구원을 추구하거나 찾을 수 없습니다."3. 예수님만을 구원자로 믿는다는 것의 함의 예수님만을 구원자로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위해 다른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말로는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하고서 실상 다른 것도 의지하는 것은 예수님을 참된 구원자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 시대에는 천주교회에서 전통적으로 그렇게 해 오던 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의 도움도 얻으려 하고, 자신들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위도 의지하는 식의 신앙이 과연 참된 신앙인가, 과연 예수님을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개혁자들이 문제시하였습니다. 일반 신도들이 이에 대해서 분명한 가르침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30문에서도 "그렇다면 그들의 구원과 지복(至福)을 성인들과 자신들이나 다른 것에서 찾는 이들은 유일하신 구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라고 묻고서는 이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고 단호한 대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자랑할지라도, 그들은 사실상 유일하신 구주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 온전하신 구원자가 아니시든지, 아니면 참된 신앙으로 이 구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야만 하겠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 안에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 이들, 즉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성인들의 도움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든지, 예수를 믿는 믿음과 함께 구원 얻을 만한 공로가 되는 행위와 삶이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온전하신 구원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점은 아주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속한 이들은 자신들이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라고 주장해도, 다른 성인들이나 자신들의 공로도 의지하려고 하는 천주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면 예수님을 참된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시대의 예수님에 대한 다른 가르침 가운데서도 그를 믿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하려 한다면, 그것도 예수님이 참된 구원자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인들이 예수님을 자랑 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판단 기준이 아니고, 그들의 가르침을 잘 살펴서 과연 그들이 예수님을 온전한 구원자로 제시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디 우리의 가르침과 믿음이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바로 믿고 따르는 것이 되고, 이 판단 기준을 가지고 모든 것을 살펴 나가기를 원합니다. 이 시대에도 우리는 예수님만을 유일한 구주로 생각하고, 그분에게만 의존하며, 우리의 삶을 그의 가르침을 따라서 정돈해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이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대로 참으로 그 귀하신 이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11장 그리스도의 칭호(2)-"기름 부음을 받은 자"(그리스도) [눅 2:8-14, 9:18-22] 1. "그리스도"라는 칭호의 기본적 의미와 용례들 우리 주님의 "예수"라는 이름을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이 "예수"라는 이름에 붙여지는 다른 칭호를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라는 칭호입니다. 이 칭호는 어원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예수"라는 이름이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이름이듯이, "그리스도"라는 호칭도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가운데서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던 칭호입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는 이 칭호의 단순한 형, 즉 단순히 '메시아'라는 호칭은, 게르할더스 보스가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다음의 논의를 따라 가야 합니다. 왜냐 하면 구약에서 '메시아'라는 말은 항상 자격을 나타내는 속격이나 접미사와 같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즉, "여호와의 메시아"(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나 "나의 메시아"(나의 기름부음 받은 자)와 같이 말입니다. 이런 것은 이 칭호의 원의(原義)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중요한 구절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기름 부음을 받은 자와 그런 칭호의 적용을 받던 자들은 구약에 많았습니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 가운데서는 "기름 부음"을 받아 일정한 직임에 봉사하던 이들을 모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가운데서 제사장을 세울 때 "관유를 가져다가 그 머리에 부어 바르는" 일이 그 위임식의 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출 28:41, 29:1, 7, 21; 레 8:10-13, 30). 그래서 제사장들을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모든 제사장들이 다 기름 부음을 받아 제사장이 되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수동태 분사형으로 "마슈아흐"로 표현한 데 비해서(출 28:41, 30:30, 40:15; 레 7:36, 10:7; 민 3:3), 특별히 형용사형 명사라고 할 수 있는 "마쉬아흐"로 나타날 때는 일반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the priest, the Messiah" or "the Messiah-priest")이라고 옮기며 이는 대제사장을 가르치는 것입니다(레 4:3, 5, 16, 6:22). 그러나 대제사장들만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아니고, 제사장들은 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가운데 왕을 세울 때에도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는 일이 사울이나 다윗을 비롯하여 계속되는 규례였습니다(시 89:20 참조). 그리고 이는 이스라엘 가운데 왕 제도가 있기 전에도 이해되는 관례였음을 사사기 9장에 나오는 요담의 우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중의 왕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언급되곤 하였습니다(삼상 24:6, 26:11; 시2:2, 18:50, 20:6 등). 이로부터 보스는 "다윗의 모든 후계자들이 실제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것임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 one or an anointed one)라는 것은 거의가 왕적인 인물을 지칭할 때 쓰였다고 봅니다.

때때로 선지자를 세울 때에도 기름 붓는 일이 있기도 하였고(예를 들면, 왕상 19:16), "기름부음 받은 자"로 불리기도 했습니다(시 105:15). 그러나 이때에는 그저 "as anointed" 정도로 표현된 듯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지자들이 다 기름 부음을 받고서 선지자 역할을 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선지자의 역할을 하도록 하신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아모스 7:14-15). 그러나 어떤 선지자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서 선지자 역할을 한 것을 보면, 선지자들도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기름 부음 받은 자 역할을 하도록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구약에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메시아=그리스도)가 많은 셈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많은 메시아, 많은 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구약의 인물들은 모두 장차 오실 진정한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한 모형(type)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약의 선지자, 제사장, 왕을 하나님께서 세우실 때 그들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자신들이 담당한 그 역할을 충실히 하라고 세움을 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장차 오실 진정한 선지자, 제사장, 왕 되신 분을 예표 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 장차 오실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은 열심히도 기다려 왔습니다. 그가 오시면 그가 진정한 제사장으로 이스라엘을 성결케 하시고, 진정한 선지자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주시고, 진정한 왕으로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온전히 다스리시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때에도 그들은 그가 혹시 오시리라고 기대 되던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며 그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눅 3:15; 요 1:19-22). 이 때 요한은 분명하게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보다 더 큰 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 가운데 서 계신 예수라고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려 오던 "그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언한 최초의 사람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 전에 이미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서는 예수께서 탄생하신 소식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리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천사들이 이미 어린아이로 오신 예수가 그리스도, 그것도 구약적 배경에서는 여호와에게 지칭되던 주이신 그리스도를 말했던 것입니다. 또한 결례의 기한이 차서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갔을 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눅 2: 26) 시므온은 그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께 찬송하면서 그 아기가 그 메시아임을 시사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에게 기대한 그런 일을 하루아침에 다 이루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가 과연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인지를 의혹에 찬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체포된 뒤에 예수님께서는 비록 암시적이기는 하지만 산헤드린 앞에서 자신의 메시아 됨을 확언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막 14:62). 이런 상황에서는 유대적 정치적 메시아로서의 오해를 받을 위험이 더하기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급기야 그가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자 유대 백성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메시아 개념에 근거해서 이를 조롱의 근거로 삼기도 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눅 23:35).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고난을 받는 메시아, 죽으시는 메시아, 그것도 나무에 달려 죽은 저주받는 메시아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를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오늘날도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을 우리들에게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일차 제자들 가운데서는 베드로가 대표로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라고 대답했었습니다(눅 9: 20).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긍정적으로 받아 주시면서 이렇게 고백한 것을 높이 사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血肉)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이 매우 긍정적인 답변은 이를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일 뿐 아니라, 이런 인식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에 의해서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아주 독특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그리스도)시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 기다리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예수님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여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기대와는 달라도 그 분이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임을 인정하면서, 그 분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아 생각을 고치고 사는 무리가 여기 생긴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무리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신앙을 다른 이들에게도 선포해서 오늘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많은 무리가 있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우리가 바로 그 무리들입니다. 그런 우리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뜻을 잘 알고 있는가하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그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지정된 자(세워진 자, ordained of God the Father)요,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anointed with the Holy Spirit) 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행 10:38). 이는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예수님께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하신 것은 성부의 보내심과 성령의 임하심으로 되어진 것임을 시사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신 것입니까?2.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1) : 최고의 선지자이신 예수님 첫째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참되시며 최고의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우리의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다 계시해 주셨고, 또 계시해 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선지자로서의 사역은 기본적으로 그가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시며, 자신이 이루실 구속이 어떤 것이며, 그리하여 그가 가져오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에 대해서 구약의 계시와 대조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그리고 그가 궁극적 선지자로 오실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된 것입니다(신 18:15).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르치신 그 내용은 오늘 우리에게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어서 우리가 이를 읽으며 그 가르침을 계속해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의 선지자로서의 사역이 과거 그 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시사가 있습니다. 그는 과거 그 때에 가르치시는 진정하고도 온전한 선지자였을 뿐만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성령으로 영감하여 기록하게 하시고 그 성경을 읽을 때에 성령으로 그 말씀을 깨닫도록 하셔서 오늘도 우리를 가르치시는 일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가 이 세상에 계실 때뿐만 아니라, 그가 천상에 오르셔서 천상에 계신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는 참 선지자의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오시기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여러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실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 일을 감당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한 바 있습니다. "이 구원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벧전 1:10-1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선지자로서의 사역은 성육신 이전에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그가 이 땅에 오신 후에는 친히 행하셨고, 승천하신 후에는 사도들과 성경을 깨닫게 하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최고의 선지자이십니다. 이런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성경을 잘 공부하여 그의 뜻을 깨닫고 그 교훈에 유의하며 그에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중요한 한 부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있어서는 (1) 성경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것이나, (2) 성경 이외에 다른 어떤 계시나 권위를 인정하거나, (3) 성경의 바른 교훈을 찾으려 하고 그것에 주의하고 착념하지 않거나, (4) 그 말씀에 따라 살지 않는 것도 모두 실천적으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는 것에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이라고 하는 이들이 실천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상황입니까? 우리는 그런 우(遇)를 범하지 말고 성경에서 배울 수 있는 그 분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그리스도의 선지자 되심을 믿고 드러내어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2) :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둘째로 그가 우리의 유일하신 제사장이시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사실이 포함됩니다. 우리는 먼저 그가 자신의 몸으로 유일한 희생 제사를 드리셔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을 말해야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셔서"(히 9:26)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라고 말합니다(히 10:12,10). 이 그리스도의 희생의 제사만이 죄를 없애는 효력을 가진 유일한 제사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히 10:4). 이런 구약의 모든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여"(히 10:3)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바라보게 하며, 그것을 예표 하는 그림자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닌 것"입니다(히 10:1). 이에 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은 한 번 제사를 드려서 그 효과가 영원히 있는 영원한 제사입니다. 이 제사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고 그야 말로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생명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1)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의존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거나, (2)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다른 무엇을 더해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거나, (3)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그 어떤 점에서라도 불충분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제단도 없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을 "제단 쌓는다."고 표현하거나, 강대상 부분을 "제단"이라고 표현하거나, 어떤 모임 장소를 "...제단"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부주의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희생 제사를 무시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제사장 되신다는 것은 그가 지금도 살아서 하나님께 중보 기도하신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런 뜻에서도 그의 중보자 역할은 영원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신 고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8:14-25).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 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여기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라는 말은 그의 중보 사역을 하나님 앞에 제시하시는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 중보 기도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의 공효를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제시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권위 있는 중보자(an authorized intercessor), 즉 사법적 주장을 제시할 수 잇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시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예배와 봉사와 삶을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위의 성도들은 순간 순간을 그리스도 덕분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순간 순간을 그리스도에게 의존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므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결국 실천적으로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말의 뜻(3) :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라는 뜻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가 진정한 왕이십니다. 과거 구약의 이스라엘의 왕들은 그의 왕 되심을 대리하고 예표 하던 것이고, 메시아이신 자신의 사역으로 이 땅위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런데 그가 우리의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실 때 그는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말씀을 잘 깨닫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 뜻을 이루어 가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의 현세적 통치는 이렇게 순수한 영적인 통치(spiritual kingship of Christ)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그의 통치를 받아 나간다는 것은 그의 말씀의 뜻에 주의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 뜻을 지켜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는 그의 통치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의 말씀을 지켜 나가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어렵고 고난에 찬 삶을 살게 되지만, 그래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얻으신 구속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보존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의 우리의 왕의 든든한 보호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이 우리를 해치지 못하도록 그가 튼튼한 팔로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왕의 보호를 의식하는 자는 믿음으로 어려워도 그의 가르치신 말씀대로 살아 나가는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일의 중요한 부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있어서 성령을 통해서 말씀으로 우리를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을 통해 회복시키신 사람들의 본래적 통치권을 행사해 나가는 것도 그것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5. 결론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바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31 문답은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왜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 받은 자로 불립니까?" "왜냐하면 그는 우리에게 우리 구속에 관한 비밀스러운 경륜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계시해 주시는 우리의 주된 선지자요 교사로, 그리고 그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성부(聖父)께 간구(懇求)하시는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大祭司長)으로, 또한 그의 말씀과 영으로 우리를 통치하시며 우리를 변호(辯護)하시고, 우리를 위해 얻으신 구속 안에 우리를 견인(堅忍)시키시는 우리의 영원한 왕으로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지정된 자(세워진 자, ordained of God the Father)요,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anointed with the Holy Spirit)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된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그를 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고백하는 것이며, 이는 매우 풍성한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 고백은 우리의 입술에만 있어서는 안 되고, 우리의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발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선지자로서 그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선지자로서 그는 하나님에게 사람을 대표하고, 왕으로서 그는 통치권을 행사하시고 사람의 본래적인 통치권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서 배우고, 그를 통해 거룩하게 되며,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고, 그에 근거해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통치권을 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역할에 근거해서만 우리는 이 땅에 그리스도인으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12장 그리스도의 칭호 (3) : "하나님의 독생자" [요 10:22-39; 마 11:25-27] 1.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의 일반적 용례들 우리는 앞에서 우리 주님의 "예수"라는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그가 왜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불리시는지를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보편적으로 언급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다양한 의미로 쓰여지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과연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하는 것을 밝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돌리되, 참된 의미에서는 그에게 이 중요한 칭호의 의미를 돌리지 않는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성경 가운데서 어떻게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지 그 용례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순전히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아들 됨" 또는 "언약적인 아들 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 관계에 들어간 이들이기에 이들의 아들 됨을 언약적인 아들 됨, 또는 하나님 백성 됨의 아들 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셨고(출 4:22; 호 11:1), 그에 속하는 개개인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자녀]"이라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신 14:1; 호 1:10; 롬 9:4). 이런 용법을 본받아 신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 또는 "하나님의 자녀들(children of God)이라는 표현을 돌리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가운데서 왕으로 불림을 받아 임직한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의 후손으로 왕이 될 이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삼하 7:14). 이런 뜻에서 시편 2편에서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을 향해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시 2:7). 이는 "직임적인 아들 됨"(official sonship)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이런 직임적인 아들 됨의 의미에서 그렇게 부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지상적인 존재가 아닌 천상적인 존재들 일반을 지칭할 때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을 사용한 일이 있습니다.(욥 1:6, 2:1, 38:7; 단 3:25). 또 우리말로는 "권능 있는 자들"이라고 옮겨진 말도 권능의 아들이란 말로 이런 천상적 존재들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된 일이 있습니다(시 29:1, 89:6 참조). 2.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의 뜻 그렇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그 말의 의미를 과연 위의 세 가지 용례의 어느 한 예에 속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인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자신을 "아들"이라고 하실 때, 그는 자신의 아들 됨이 그저 언약적 아들 됨이나, 직임적 아들 됨, 또는 천상적 존재로서의 아들 됨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시사 하셨습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의해서 읽어보십시오.“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 ...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요 10:25-30, 38). 이 말씀 중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는 말씀은 그저 그 둘이 같은 것을 의도하거나 생각하는 바가 같다는 것을, 즉 예수님께서는 성부와 같은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환언해서 이는 그 둘의 기능적 일치성(a functional unity)을 표현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성부와 성자 그 둘이 한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그렇게 되면 결국 양태론적 결론이 날 것이므로), 단지 그 둘의 본질이 같다는 것을 단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 여기서 하나라는 말을 요한이 왜 "헤이스"가 아니라 "헨"이라고 옮기고 있는지의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본질적 통일성"(essential unity)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요한복음서의 서언의 말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나, 그와 함께 서는 것"이라고 말하는 모리스는 옳은 것입니다. 이는 38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30절의 하나 됨을 본질적 하나 됨으로 보지 않으려는) 비슬리-머레이 조차도 이 상호 내주의 표현으로부터 "다른 곳에는 없는 관계인 가장 온전한 연합과 통일성"(completest unity, a relation sui generis)을 생각을 발견하여 말하고 있다는 데서 확언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이런 온전한 하나 됨에 대한 주장, 그 둘의 배타적인 관계에 대한 주장은 요한복음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맑게 개인 하늘에 나타난 요한적인 뇌성벽력"이라고 불리는 다음 말씀 가운데서도 이는 아주 분명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여기에 오직 그 분만이 "내 아버지"라고 하실 수 있는 독특한 아들이 있다는 자의식이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와 그 아들은 서로에게 대해서 아주 독특한 배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런 식의 아들은 이 세상에 이 분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면서 말씀하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그런 식으로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이는 예수님 밖에는 다른 이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듣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런 점을 잘 의식하면서 반응하였습니다.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하는도다."(요 10:33). 유대인의 이런 반응은 예수님의 주장이 단순한 그와 아버지의 뜻의 하나 됨 정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장하시는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을 때 그 말은 그저 그가 언약 백성의 한 부분이라든지, 큰 직임 심지어 메시아로서의 일을 감당할 분이라든지의 뜻으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의식하면서 성부(God the Father)에 대해 성자(God the Son)의 관계에 계신 분이심을 드러내시며 사용하신 아주 귀하고 독특한 계시적인 말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삼위일체적 아들 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이런 독특하신 아들이심을 가장 잘 표현하는 칭호: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런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용어가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요 1:14) 또는 "독생 하신 하나님"(요 1:18), 또는 "하나님의 독생 하신 아들"이라는 칭호입니다(요 3:16, 18). 어떤 이들은 주로 그의 성육신과 관련해서 이 '독생자'라는 말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이는 그리 바른 생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출생하여 이 땅에 오셔서 비로소 '모노게네스'가 되시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이 단어는 출생적인 아들 됨을 지칭하는 용어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그가 아버지의 독생자이심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특히 요한복음 1:18의 "아버지 품속에 있는"(요 1:18) 독생자라는 말에서 잘 시사되고 있습니다. 그는 그저 독생자나 독생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 품속에 있는"(요 1:18), 즉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와 아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또는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한" 독생자이십니다. 많은 이들이 이 구절과 요한복음 1:1을 연결시키는 이유가 분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영원과 선재 상태로부터도 그가 하나님의 독특하신 아들이었음을 이는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독생자'라는 말의 용례를 잘 살펴보면, 그것이 "유일하게 낳아진" 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예도 있지만, 이것이 이 말의 유일한 용례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유일하게 낳아진"이라는 어원 전체에 주의를 집중하기보다는 그저 "유일한"(one of a kind, only, unique, 또 the only one of its kind)라는 뜻으로 이 단어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유일한"이라는 말과 "사랑 받는"이라는 말이 같이 사용된 용례가 많다는 것에 근거해서 이 둘을 동의어로 보려고도 합니다. 그리고 문자적으로 유일한 아들이 아닌 경우에도 이 '모노게네스'라는 용어를 사용한 예들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22:2을 희랍어로 번역하면서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번역한 것들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때 이삭은 아브라함이 유일하게 가진 아들은 아니나, 사랑하는 아들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우의 '모노게네스'는 '유일한'이란 뜻이기보다는 '독특한'(unique)이란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용례는 그렇게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가 유일한 아들이기에 사랑 받는 아들이라는 보스의 말을 깊이 생각하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실상은 이런 경우에 '아가페토스'가 '모노게네스'와 같은 수준으로 높여져서 사용되어 독특함이나 특이함이라는 숫자적 의미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에 '아가페토스'라는 말은 '아들이면 부모에게서 당연히 사랑을 받듯이 그런 아들로서 사랑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에서 특별한 정도의 사랑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야히드'와 같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를...'(thy son, thine only son, whom thou lovest)(창 22:2, 12, 16). ... 사실 '아가페토스'가 신약 성경에서 사용될 때도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숫자적으로 하나뿐인 것이기 때문에 특이한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 옳다. 우리는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나 변화 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의 말씀의 뜻도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즉 우리 주님께서는 여기서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묘사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묘사되었다고 말이다.

이와 같이 성자는 성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입니다. 여기서는 강조점이 그가 성부의 유일한 아들이셔서 그와 동등한 이가 없고 따라서 아버지를 온전히 계시하실 수 있으시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자의 유일하심을 말하는 것을 넘어서서 역사적 교회와 함께 보스처럼 "모노게네스라는 형용적 서술어는 아버지에 의한 아들의 영원적 출생(the eternal generation of the Son by the Father)이라는 숭엄한 교의를 지지해 주는 것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이들과는 아주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독특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가 "독생자"라는 말의 뜻입니다. 4. 독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우리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 1:12). 그러므로 우리의 아들 됨, 자녀 됨은 양자 됨의 의미에서의 아들 됨입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이심은 본래적인 아들이심, 존재론적 아들이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제 33 문에서는 이를 이렇게 묻고 대답하여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문)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God's only-begotten Son) 라고 불립니까? (답)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본래적인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비하여, 우리는 그 덕분에 은혜로 양자됨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의 "맏아들"이라고 표현했을 때도(롬 8:29) 우리는 이런 존재론적 차이를 의식하면서 말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많은 오해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 됨과 우리의 아들 됨의 의미를 존재나 질에서의 차이가 아니라, 단지 정도의 차이 정도로만 생각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의식한 후에는 예수께서 "맏아들"이시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본 받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를 따라가며 그의 모습을 이 땅 위에 드러내어야 하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성을 취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들의 존재적 특성인 것입니다.

 

 

 

 

 

 

 

 

 

 

 

 

 

 

 

 

 

 

 

 

 

 

 

 

 

 

제13장 그리스도의 칭호(4) : "주" [고전 6:19-20; 마 7:20-29]

 

이번에는 그리스도께 적용된 칭호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주"(the Lord)라는 칭호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는 스타우퍼가 "가장 풍성한 기독론적 칭호"라고 부른 바 있는 매우 중요한 칭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다양한 상황 가운데서 다양한 의미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일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당시에 "주님"이라는 칭호가 사용되던 다양한 의미를 반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주님"이라는 칭호는 단일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이를 알기 위해 먼저 "주님"이라는 호칭의 일반적인 의미부터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주님"이라는 칭호의 일반적 용례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정중한 표현을 하고자 할 때(a title of courtesy) "주님"이라는 호칭이 사용된 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부를 때도 "주여"라고 부른 일이 있으며(마 27:63), 또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 지기로 잘못 알고 부를 때도 그를 "주"라고 부른 일이 있습니다(요 20:15). 이처럼 신약 성경 시대 당대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이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그 폭도 매우 다양했다고 여겨집니다. 로마 황제도 이런 의미에서 "주"라고 불렸습니다. 예를 들자면, 네로가 "세상의 주"(Lord of the World)로, 도미티안이 "우리 주와 신"(our Lord and God)으로 언급된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노예들의 주인도 "주님"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제자들은 그 선생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지극히 존경하며 존대하여 말할 때도 이 칭호를 사용한 일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그 남편을 이런 칭호를 사용하여 부른 예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나타납니다(벧전 3:6). 그러므로 "주"라는 칭호는 가정에서도 사용된 칭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해서도 그를 그저 선생님이라는 의미로 부를 때에 "주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표현한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유대인의 "관원"(눅 18:18)인 부자 "청년"은(마 19:16)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면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고 있습니다(막 10:17; 눅 18:18).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선생님이여"라는 말을 유지합니다(막 10:20). 일반적으로 "선생님"이라는 말이 예수님께 적용된 경우에는 "주님"이라고 즐겨 표현하는 마태복음서에서도 이 청년의 말은 그대로 "선생님이여"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마 19:16). 물론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님께 나아와 가르되 '선생님이여'라고 했다는 시사를 주면서 말입니다(마 19:16). 이 경우에는 이 청년이 예수님을 매우 존숭(尊崇)하지만("달려와서 끓어 앉아 묻자오되"- 막 10:17) 그는 예수님을 그저 인간적 수준의 선생님으로만 생각하면서 질문하고 대화한 것으로 시사되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선생님"이라는 말은 "크다"(great)라는 히브리어 "랍"(rab)에서 온 "나의 크신 분"이란 뜻의 '랍비'(Rabbi)의 번역서로써 대개 주전 2세기부터 선생님들에 대해 "랍"(rab)이란 말을 사용했고, 따라서 선생님에 대한 호칭이 "나의 선생님"이란 뜻의 "랍비"가 되었다가 후에 "나의"라는 접미사는 그 의미를 상실하고 "랍비"가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님에 대한 공식 명칭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이 그저 하나님의 뜻을 잘 가르치시는 선생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8과 20:16에서는 이 용어를 이방 독자들을 위해 친절히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의 표현들을 비교해 보면 같은 사건에 대해서 어떤 복음서에서는 "선생님이여"라고 표현한 것을 다른 복음서에서는 "주여"라고 표현한 곳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귀신들려 말 못하고 간질병의 질환을 나타내던 아이를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는 사건에 대한 보도에서 마가는 그 아버지가 예수님께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주님께] 데려왔나이다."라고 하면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막 9:18). 그런데 같은 사건을 보도하면서 마태는 그 아이의 아버지가 "주여", 즉 "쿠리에"라는 호칭을 계속 사용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마 17:15). 이는 복음서 기자들의 차이로 설명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는 수준에서 말할 때도 "주님"이라는 호칭을 쓴 예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같은 맥락에서 주와 선생님이라는 말이 호환적으로 사용된 예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주 높은 의미의 "주" 칭호를 예수님께 돌렸는지, 아니면 그저 일반적인 수준에서 "주"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인지가 모호한 것입니다. 이처럼 공관복음서에 있어서는 상당히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그 의미가 모호하게 나타납니다. 즉,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에게 높임을 표현하는 것으로 표현된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이 칭호가 사용되었는지가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저 예수님을 인간적 수준의 선생님으로 말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3:13-14). 이럴 때에는 예수님의 의도 중에 이 둘을 거의 동일시하면서 언급하고 계신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나 서신서에 예수님을 그저 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분명히 아주 높은 의미에서 "주"로 부른 예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들이 이 논의를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2.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의 가장 높은 의미 가장 높은 의미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는 부활로부터 높아지신 구주에 대한 특별 명칭으로 이 칭호가 사용된 때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행 2:36). 도마도 부활하여 나타나신 예수님께 대해서 그가 진정 부활하셨음을 믿고서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셨습니다(요 20:28). 이는 모두가 신적인 칭호들(titles of deity)입니다. 당대의 유대인들은 이를 신성 모독으로 생각했겠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된 도마는 아무 거리낌 없이 가장 신적인 칭호를 주님께 돌린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는 참으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이십니다(롬 14:9). 부활과 승천으로 높여지신 그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 것입니다(빌 2:9).

예수님을 이렇게 높은 의미로 부르던 "주"라는 칭호는 당대에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일컬어 "나의 주"(adonai)라고 부르던 것과 연관된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던 관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말 성경에 "여호와"로 음역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명칭을 부르는 일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 칭호가 나타날 때마다 "나의 주님"(adonai)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피조계와 관련하여 주권적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이심을 지칭하기 위해 하나님께 "주"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일이 일반화되었습니다(마 1:20, 11:25; 눅 4:18). 그래서 웰즈가 잘 지적하듯이, "70인 경에서는 6,000번 이상이나 '쿠리오스'가 YHWH에 대한 대치어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높은 의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이후의 주님에 대해서는 아주 분명히 이런 뜻의 "주" 칭호가 사용되었음을 확언할 수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이 "주님"이라는 명칭은, 보스가 잘 지적하는 바대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셔서 들어가신 새로운 수준의 메시아적 주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높여지신 그리스도는 아주 뛰어나신 주님(the Lord)이셨던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일시하는 의도로 이 "쿠리오스"라는 칭호를 예수님께 적용하여 썼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사용하였던 어귀들을 예수님께 적용하여 인용하는 일도 흔히 발생하고 있습니다(마 3:3, 23:39; 막 1:3; 롬 10:13, 14:11; 빌 2:11; 히 1:10; 벧전 2:3, 3:15 등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을 이런 높은 의미에서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시며(행 7:59, 60; 고전 16:22),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행 9:42, 11:24). 또한 그런 주님으로 그는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시며(계 19:16), 특히 교회의 주님이십니다. 그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주님으로 불리신 분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섭리자요 주재자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뜻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고,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고백은 최초의 신앙 고백 형식의 하나가 되었습니다(행 8:16, 19:5; 고전 12:3 참조). 이 때 그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주님으로 불렀던 그 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눅 1:43 참조). 그러므로 사도 시대의 교회에 있어서는 예수님을 이런 신적인 의미에서 "주"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던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일반화된 명칭이 이것을 잘 드러내어 줍니다(행 1:21; 4:33; 7:59; 8:16; 11:17; 15:11, 26; 20:21, 24, 35; 28:31). 예를 들어, 마가복음의 뒷부분에서는 "주 예수께서 ... 하늘로 올리우사"라고 말하고(막 16:19) 사도들의 사역에 대해 "주께서 함께 역사하셨다"고 합니다(막 16:20). 그리고 누가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라고 말합니다(눅 24:3).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을 이런 의미에서 "주"라고 부르며 주께서 하신 일을 진술해 가는 것은, 거뜨리가 표현하는 대로, "즉각적이고 거의 자동적이고 ...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께서 임하시느니라(Marana tha).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 할지어다"(고전 16:22-24). 이 말씀은 예수님을 "우리 주"라고 부르던 아람어 표현이 그대로 사용되면서 주의 재림에 대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는 "주권자로서 그의 현재 지위에 대한 외침도" 같이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면서 그를 "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웰즈의 다음 요약을 유념해 봅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말하는 것은 그를 여호와와 존재론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고, 그에게 오직 하나님에게만 옳게 속하는 경배를 돌리는 것이고, 그가 교회와 피조계에서 주권적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를 세상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나타내신 분으로 보는 것이다." 3. 예수님의 지상 사역 기간 중에 주님으로 불린 일들과 그 의미 그런데 예수님을 이런 높고 지극히 고귀한 의미에서 "주님"으로 부른 일들은 그가 부활하신 뒤에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에서부터 나타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고, 많은 이들은 이런 생각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여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자연스럽게 읽는 이들은 그가 지상 생활을 하실 때도 때때로 이런 높은 의미의 주님이심을 시사하시고, 그런 칭호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몇 가지 예만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말을 따라 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은 후 베드로가 보인 반응과 그의 말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여기엔 하나님 앞에 선 죄인 된 인간의 반응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이는 그저 고귀하신 종교적 선생님이나, 선지자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 사용된 "주여"라는 말도 고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그 칭호의 최고의 신적인 취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는 "기적으로 시사된 예수님의 신성에 대조되어 베드로는 그가 죄인이며 따라서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자격이 없다고 느낀 것"이라고 말하는 메릴 씨 테니(Merrill C. Tenney)의 요약적 진술은 매우 옳고도 적절한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시편 110편의 의미를 가지고 메시아의 성경에 대해서 사람들과 논쟁하신 곳에서도(마 22:41; 막 12:36; 눅 20:42-44)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언급된 메시아가 시편에서 다윗의 "주"라고 언급되어 있음을 친히 지적하신 것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다윗이 '나의 주'라고 언급하고 있는 그 표현은, 리펠드가 잘 지적하듯이, "위엄감을 전달하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대체어로 자주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이 논의의 주된 취지는 ... '다윗의 자손'이라는 명칭에 서기관들이 부여한 현세 중심적 개념에 항거하여, 메시아는 초월적 주권의 위치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보스(Vos)의 논의는 매우 옳고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실 때에 하신 말씀인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에서의 "주"의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마 21:3; 막 11:3; 눅 19:31,34). "그의 임자들"을 언급하는 누가복음 19:33의 빛에서 보면 누가복음 19:31과 34의 "쿠리오스"는 그 나귀의 소유주라는 뜻이기보다는 예수님 자신을 지칭하되, 그를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주인"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에는 그것을 마음대로 처분 할 수 있는 분으로서, 또한 포괄적인 주권을 가진 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의도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면서 "주"라는 칭호를 사용한 예입니다. 넷째로, 산상수훈에서 "나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시는 것(마 7:21)에는 최소한으로 말해도 이 "쿠리오스" 칭호가 정중한 표현 이상이라는 것이 함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이 칭호에 가장 깊은 의미를 부여할 것을 미리 준비하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카슨의 말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주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그리스도 주시니라"라고 한 것에도(눅 2:11) 분명히 신적인 주되심에 대한 함의가 전달되는 것입니다. 모리스는 이 구절과 관련해서 여호와를 지칭하는 용어까지를 사용해서 그리스도 주라고 한 것은 아기를 최고의 가능한 용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 이전에는 예수님께 지고한 의미의 '쿠리오스' 칭호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드물게나마 예수님의 신적 주님 되심에 대한 시사와 인식과 이를 인정하는 표현들과 이에 대한 시인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자들을 떠나 그들을 위한 사역을 하러 가시시기 전에도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4.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위치 이렇게 가장 높은 의미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자신들을 그 주님의 "노예"라고 기꺼이 인정하는(willing bond-slaves)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그 주님에게 속하여 그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활동하며, 자신들의 삶을 살아 나가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자의식을 표현하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그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까? 그가 "금이나 은으로가 아니라, 그의 보배로운 피로써 우리를 죄와 마귀의 모든 세력에서 구속하시고 사주셔서 그분 자신의 것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34 문답). 바울은 이를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고전 6:19-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구속함으로 받은 자들로서 우리의 존재 전체를 사용해서 우리 주님의 뜻을 잘 행해 가야 합니다.

그러한 우리는 이 높으신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며(롬 12:11), 자신들의 삶을 그에게 합당하게 정돈해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11:27).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주님의 뜻을 아는 일이 아주 필수적인 일입니다. 그 분의 뜻을 잘 살펴서 그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그를 잘 받들어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그의 진정한 종인가를 깊이 있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 계신 주님과 깊이 있는 교제를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과 고귀하고도 깊은 교제를 가지고 있는 주의 종들인가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리고 그 그렇지 않음이 우리 생애 끝까지 계속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그 일을 헛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헛되게 "주여"라고 하는 이들을 향하여 우리 주께서 말씀하신 엄중한 경고를 우리는 귀 기울여 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그의 뜻을 무시하고, 그의 말을 행하지 않는 이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요(마 7:23), "어리석은 사람"(마 7:26)인 것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주님은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엄중하게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자들이고, 어떠한 자들이 될 것입니까? 헛되이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이들입니까, 아니면 진정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진정한 예수의 종들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매순간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제14장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1) :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눅 1: 26-38] 이제부터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삶을 사시고, 그 삶 가운데서 어떠한 일을 하여 나가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일, 흔히 우리가 성육신이라고 부르는 일에 대한 생각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성육신'의 사건은, 게할더스 보스가 잘 표현한 바와 같이, "선재하시는 메시아가 인간성(human nature) 안에 들어오시며, 초역사적인 분이 역사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시는"[1] 놀라운 일입니다. 그가 이처럼 이 세상과 역사 가운데로 오실 때 그는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드님[聖子]께서 우리들의 인성(human nature)을 취하실 때 그는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는 방식을 취하셨고, 따라서 그녀의 몸 안에서 다른 어린아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10달 동안 자라시다가 마리아에게서 낳아지신 것입니다.

이런 잉태와 출생 방식의 의미와 그 유익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 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경륜 가운데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일이 일어난 후에야 이에 대한 우리의 모든 생각과 고찰이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건이 이미 발생한 후에야 우리가 이 일의 의미와 유익을 생각해 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성육신의 사실은 우리의 성찰에 앞서 이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밀 부룬너 같은 이와 같이 "동정녀 탄생 사상은 성육신의 기적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말해서는[2]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각 가운데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육신 하도록 하셨는가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할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고찰과 성찰에 따라서 이 사건이 바뀌거나 그 의미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이들과 같이 성육신에 대해서 생각한다거나 어떤 식으로 이 일이 발생하는 것이 더 은혜스러울 것이라든지, 더 하나님의 의도를 잘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의 의미는 이미 이 사건이 발생할 때부터 그 사건에 붙박여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사실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모든 성찰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는 우리 시대와 같이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고 저버리는 시대에 아주 필수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1. 성육신의 사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속자, 구원자가 이 세상에 올 것이며, 그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시원적(始原的) 형태로나마 계시된 것이고, 신실한 성도들은 그 계시를 믿고 계시에 따라 구속자의 오심을 대망해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실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그 구원자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던 이들조차도 그 메시아가 오신 것과 그가 오신 방식을 보면서 놀라며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의 기이함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그것을 아시고, 당신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그 일을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그 계획에 따라 어느 날 갈릴리 나사렛에 다윗의 자손(다윗의 집안에 속한) "요셉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정혼한" 처녀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이르러 그녀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눅 1:26, 27 참조).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말은 마리아를 놀라게 하였고, 그녀를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왜 나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가?' 또 '주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등의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듯이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되어 질 일을 설명해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보라 수태하여 이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영원히 야곱의 집, 즉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영원한 왕이 자신의 몸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이런 소식을 듣고 그 사실도 놀랍지만, 처녀인 자신이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 의아해 하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은 다시 이렇게 설명하여 줍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여기 사용된 "임하다"는 말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표현하는 것과 같은 용어가(행 1:8) 사용되고 있고, 이 배후에는 아마도 이사야 32:15절과 같은 말씀이 있는 듯합니다. 또한 "덮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의 신현적 임재를 표현하고자 할 때 사용되던 말입니다(출 40:35; 시 91:4; 140:7).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마리아에게 있게 되고, 그 결과 그녀는 아이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가운데서는 그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가브리엘의 설명에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가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미래사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등의 표현이 바로 수태의 순간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리아가 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되는 일을 조금은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가브리엘은 마리아의 (여자)친척 엘리사벳에게 되어진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능치 못하는 일이 없다는 것의 하나의 예증으로 언급합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 36-37).

 

이 모든 대화 가운데서 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마리아에게 아이가 수태된 것이 다 하나님의 성령의 크신 능력으로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우리는 주로 누가 복음에 근거해서 진행하였습니다. 누가가 그의 복음서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그 바로 뒤에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누가는 동정녀 탄생이 사실이라고 믿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마태의 보도는 누가 복음의 기사와 독립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것도 역시 동일하게 동정녀 탄생 사상을 확고히 지지하고 있다". 이처럼 거뜨리는 마태와 누가가 동정녀 탄생을 받아들여진 사건(as an accepted fact)으로 제시하려고 했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태도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후에 요셉에게도 주의 사자는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20). 이는 아마도 마리아가 요셉에게 전하여 준 말을 확언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추론됩니다. 이 이야기 가운데서 마리아의 처녀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눅 1:27; 마 1:27, 34절) 처녀성 자체를 높이 보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이 얼마나 큰 이적으로 이루어지는가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더구나 많은 주석가들은 이이야기 속에서 마리아 자신의 가치가 강조되어 있지 않은 것에 주목합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크신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지 인간의 가치와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인간 부모 된 마리아와 요셉은 천사들로부터 이 아이의 수태가 성령으로 된 것임을 고지 받고 그 일을 받아들이고서 이 아이의 부모 역할을 하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이 고지 후에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와서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한 것"입니다(마 1:24-25). 이 말은 예수님의 수태가 자연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일어난 가이사 아구스도의 '본 동리에 가서 호적하라'는 명에 따라(눅 2:1-4) 호적하러 베들레헴에 내려가서 그 다윗의 동리에서 아기 예수를 낳게 된 것입니다. 2.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는 사실의 의미 이렇게 되어진 사실 가운데서 성령님으로 잉태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인간의 능력에 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성육신이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선언해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도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요 1:13). 하물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드님께서 참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성(the very nature of man)을 취하시는 일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이것도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크신 힘과 능력으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되어진 일 가운데서 세상의 창조와 더불어서 가장 초자연적인 일이 바로 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잉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성자께서 우리의 인간성을 주님께로 취하여 들이신 삼위일체적인 사건입니다. 따라서 이 일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가운데 있던 일이 그 정해진 때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라고 말했던 것입니다(갈 4:4). 이 일은 우연히 되어진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되어진 일이란 의미인 것입니다.

이런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잉태에서 성령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따라서 타락한 인간성이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죄의 죄책과 오염이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간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분이십니다(히 7:26).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타락한 이후로 가지게 된 연약해진 인간성, 따라서 죽을 수 있는 인간성을 취하셨지만 죄의 부패와 오염은 가지지 않은 인간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잘 언급하고 있는 것이 로마서 8:3의 어려운 표현인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라는 말의 정확한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르시온의 생각 같이 그저 육체를 가진 것과 같이 나타났다는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가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모양이라는 말은 피상적인 유사성이나 외적인 유사성을 뜻하는 말이 아니고, "형태"(form)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과 죄된 육체를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을 막는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의 하나로 머레이의 다음 설명을 주목해 보십시오.

“성부께서 성자를 죄와 비참과 죽음의 세상에로 보내실 때, 그 자신은 죄된 존재가 아니게 되면서도 그에게 가능한 한도 내에서 죄된 인간성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게 하시는 방식으로 보내셨음을 나타내는 일에 관심을 나타내면서 (바울은)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 자신은 거룩하고 더렵혀지지 않으셨다 - '모양'이라는 말이 이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는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in the same human nature) 오셨다. 그것이 바로 '죄된 육체'라고 말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온전하게 표현해 낼 다른 단어의 조합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같은 시리즈의 로마서 주석을 대체한 더글라스 무(D. Moo)의 다음 설명도 역시 비슷한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아주 조심하여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is walking a fine line). 한편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인간적 조건에 들어 오셨고, "육화되셨다"(in-fleshed, in-carnis). 그리고 그런 존재로서 자신을 죄의 세력에 노출시키셨다(롬 6:8-10 참조)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영역에 참여하심으로 그가 육체에 갇히시고 그럼으로써 그 자신이 죄책이 있을 정도로 죄에 종속하게 되었다는 시사를 피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호모이오마는 "육체"라는 말에 "죄 된"이란 말을 덧붙인 것이 너무 한 방향으로 치우쳐 나가지 않도록 균형 잡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예수님께서는 죄를 제외하고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할 수 있는 인간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와 함께 우리는 그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히 4:15). 3.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의 의미 그러나 가장 초자연적인 일은 그저 초자연적인 일로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자연과의 밀접한 조화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즉,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수태될 때에라도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뼈로부터 인간성을 취하며, 그 아이가 태중에서 자라 갈 때에도 마리아의 모든 인성을 다 사용하면서 자라 가며, 다른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로써 초자연이 초자연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함을 잘 보여 줍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마리아가 감당한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옳다. 이를 강조하면서 도날드 맥클라우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 2절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ex Maria), 즉 마리아의 실체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아주 구체적인 언급까지를 합니다.

"마리아는 어떠한 인간 어머니가 자기 자식에게 기여하는바(난자, 유전자, 보통 수정체의 성장과 정상적인 분만)를 그대로 그리스도에게 기여하였다."[ 이런 맥클라우드의 생각은 그 이전에 이미 "자기의 태의 열매와 관련하여 다른 어머니들에게 주어지는 어떠한 것이라도 마리아에게 부인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말했던 죤 피어슨(John Pearson)의 생각을 유지하면서 발전시키는 것인 것이다. 가장 초자연적인 일의 성취가 이렇게 자연과의 묘한 조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면, 다른 일이 이루어지는 일에 있어서는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자연과 초자연의 절묘한 조화는 이 동정녀 탄생에 대해 보도 이후에 그의 인성의 성장과(눅 2:40) 이 땅의 부모님들에게 순종하신 일(눅 2:51) 등을 언급하고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초자연의 독자적인 행사만이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잘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에서는 초자연은 대부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요셉을 양부로 하여 나셨다는 것은 마리아와 요셉의 족보가 모두 다 다윗 왕가의 족보라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과거에 영원하신 왕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나타날 것이고 그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하신 약속에 (예를 들자면, 삼하 7:13-16) 따라서, 그 태어난 아이가 그 '다윗의 자손(씨)'임을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이런 역할을 감당할 이들을 미리 준비하셔서 그리스도의 인간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4. 이 사실들의 우리에게 미치는 유익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줍니까? 이 질문은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제 36문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수태와 탄생으로부터 당신은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 이에 대해서 요리 문답은 "그가 우리의 중보자이시라는 것과 그의 순수하심과 온전한 거룩하심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타고난 (내가 그 안에서 난) 나의 죄를 덮으시는 유익을 얻습니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은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대답이요, 동시에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는 목회적인 대답이기도 합니다. 영원하신 성자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인간성을 무흠하게 취하셨기에 그는 인성과 신성을 한 인격에 가진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고, 그가 취하신 인간성은 참으로 순수하고 거룩한 것이기에 그로서 그가 이루신 구속으로 우리의 죄를 덮으실 수 있다는 이 고백은 함께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정확한 이해와 큰 위로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의 존재와 그의 사역에 대한 장엄한 진술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생각할 때에도 우리의 생각의 지침이 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어 구속을 이루시고 율법과 율법의 정신을 온전히 성취하셔서 (1) 이 세상에 본래 아담이 이르러 소유해야 했던 그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영생을 주심) 본래의 인간성의 본래적 구현을 이루도록 하시고, (2) 신약의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세워지도록, 그리하여 (3) 그의 거룩한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워 발전시켜 결국 극치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고귀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시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를 바라보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와 기적을 놀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주님을 높이고 그의 능력과 영광을 찬양하며, 그가 이루신 이 놀라운 일이 지향하는바 구속과 우리의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가 인간성을 취하셔서 이루신 십자가에서의 구속에 근거하여 살고, 우리의 인간성을 취하여 드러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 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제15장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2) :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수난을 당하사" [마 26:35-27:66] 오늘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상 생애의 끝 부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잘 읽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그렇게 많이 생각하며, 특히 고난 주간(passion week)에 우리가 주로 이 부분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그런 의식이 더 확대되기는 하지만, 이 부분에 기록된 것들만을 우리 주님의 고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난"(suffering)이라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주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죄의 세력과 권세에서 풀어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자리에 서시어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의 성격과 의미를 잘 생각해 보고 그것이 우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어떻게 연관되어져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의 "전체성"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하는 것은 그가 받으신 고난은 "전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그의 고난은 전체적인 것이었으며, 그가 취하신 인간성으로도 그는 전체적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첫째로, 시간적으로 그는 전체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소위 말하는 고난 주간에만, 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과 관련된 사건들에서만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뿐만이 아니라, 그의 생애 전체에 걸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그 전체가 수난의 생애(a life of suffering)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영국의 어떤 묘지 앞의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자"라는 비명을 보면서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자는 그리스도였다고 생각하고 말했던 것처럼,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광의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부터가 수난스러운 것입니다. 그가 영광을 감추시고 우리의 정황 가운데 오시는 것 자체에 벌써 우리를 위해 당신을 주시며, 당신을 우리에게 맞추시는 일(accommodation)입니다.

벌코프가 잘 말하듯이 "만군의 주께서 죄의 형태로 사신다는 것, 무죄하신 분이 날마다 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신 다는 것, 거룩하신 분이 죄로 저주받은 세상에서 사신다는 것" 자체가 고난인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태어난 것도 인간적으로 보아도 영광스럽다기 보다는 비천한 출생을 하셨습니다. 또한 호적을 하러 가는 독특한 상황과 베들레헴에 많은 이들이 왔었다는 섭리적 정황에 따라 그가 낯선 곳에서 태어나 구유에 뉘어지셨다는 것도 그의 고난을 잘 나타내 보여줍니다. 또한 그 후에도 그는 부유한 삶을 살지 않았고 가난한 유대인으로 사셨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난지 40일 쯤지나 율법의 규례를 따라서 정결 예식을 행할 때에도 일 년 된 어린양을 번제로, 비둘기를 속죄제로(레 12:6,7) 드릴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어린 반구 둘로 정결 예식을 감당할 정도로(레 12:8; 눅 2:22-24)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그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 주변에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 그를 수종 들며 그가 당대의 랍비와 같은 대우를 받으셨다고 추정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를 들어서 자기 소유의 집을 지니시고, 편안한 삶을 사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생애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수난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고, 더구나 그의 생애의 마지막은 수난의 극치(passio magna)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육신에서 시작된 그의 수난은 십자가에서 그 극치에 이른 것입니다. 그는 한마디로 그의 생 전체에 걸쳐서 수난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그의 인간성의 어느 한 부분에서만 수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취하신 인간성 전체에서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즉, 그의 영혼과 육신 모두가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받으신 수난은 무수한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그의 영혼이 받은 수난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의 존재를 바로 이해한 이도 극히 적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를 이해한 이들도 매우 적은 것입니다. 그는 가족과 친척들에 의해서도 오해 받으셨습니다. 또한 그가 백성들을 위해 그들을 불쌍히 여겨 병을 고쳐 주시며 귀신을 쫓아내신 것에 대해서도 그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신다고 오해받기도 하셨습니다(마 12:24). 더구나 그가 가장 가깝게 여기며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가르친 제자들조차도 그가 말씀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가 죽고 부활하신 후에야 그가 말씀하셨던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가 선전을 청결하게 하신 후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도(요 2:19), 유대인들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그의 제자들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난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했으니(요 2:22), 그 전까지는 주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의 삶과 죽으심의 의미를 이해한 이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고, 그가 부활하신 후에야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가 알려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에게 지극한 배려를 베풀면서 그의 삶을 살아가신다는 것은 큰 어려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그가 십자가의 속죄에서 짊어지실 우리의 죄에 대한 "중보적 죄의식"(a mediatorial consciousness of the sin of humanity)을 가지고 사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으신 최대의 고난은 역시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시는 그 일이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은 이 무시무시한 분리를 가져올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여기에 그의 최대의 수난이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던 이 분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이 죽음이 얼마나 공포로 가득찬 것임을 분명히 해 줍니다. 이것을 바로 볼 때에야 왜 그가 십자가 수난을 앞에 놓고 "심히 놀라고 슬퍼하시며"(막 14:33), 그 잔이 지나가기를 원하셨으며,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하시면서(막 14: 34) 기도해 주기를 요청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구속이 얼마나 큰 값을 치러야 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렇게 실재적이고 큰 값을 지불하는 고난이었습니다. 그가 죽으시는 이 특정한 죽음은, 바울이 "죄의 삯이라고 말한, 죄인들과 하나가 되셔서 그들의 죄를 지시고, 그들의 죽음을 죽는,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부어지는 그런 죽음인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그렇게 사용된 것처럼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잔도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시 11:6, 75:8; 사 51:17, 22; 렘 49:12; 계14: 10, 16:19, 17:4).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가 대신하시는 우리들의 죄 때문에 이 잔을 마셔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이 때 예수께서 우리의 자리에서 버림받고, 성부께서 버리신 것이 아주 실재적인 것이지만 "성삼위 내의 통일성은 그 때에라도 파괴되지 않았다고 하는 역설을 주장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하다"(Cranfield, 마가복음 주석). 그 누구도 신성내의 분열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강조하다가 삼위의 통일성을 파괴한다든지, 신성 자체의 수난을 말하는 식으로 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도 인성은 인성이고 신성은 신성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을 말하는 칼시돈 정의와 extra-Calvinisticum에 따른 사고를 잘 개발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는 비웃음과 능욕을 받으셨습니다(막 15:16-20, 31 참조). 그가 받으신 신체적 고난도 큰 것이었습니다. 특히 십자가와 관련해서 그것이 아주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경을 우리의 관심을 따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잘 살펴보면 심지어 십자가 고난과 관련해서도 복음서와 성경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육체적 고난에 대해서는 그가 받으신 영적인 고난만큼 그렇게 크게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수난 이야기와 비교하면 성경은 비교적 담담하게 절제하면서 예수님의 육체적 수난을 묘사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영적인 고뇌에 대해서는 아주 큰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고구엘(M. Goguel)은 이런 점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예수의 수난에 대한 초기 기록들이 그의 영적인 고뇌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정확히 세밀한 기록을 가지면서도, (흔히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께서 견디신 육체의 고통을 그렇게 강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는 다는 것은 그의 전 생애를 하나님 앞에서 산 이에게 있어서 무한한 고통의 원인이었음에 틀림없다". 로버트 스타인도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두려워하신 것이 신체적인 고통이나 죽음이었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고 잘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은 복음서를 읽는 가운데서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수난 받으신 이유: "사랑" 그는 왜 이렇게 수난의 삶을 사셨을까요? 그가 고난을 즐긴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수난을 당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런 수난의 삶을 사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는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늘 보좌에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누리시던 당신의 그 영광을 한 순간이라도 가리시거나 감추실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는 낮아지시되 종의 형상을 취하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사랑이 그를 고난에로 인도한 것이고, 사랑 때문에 그는 고난을 즐겨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인한 그의 수난은 다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그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유일한 구속의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정죄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해 그의 생애 전체에 걸친 고난, 특히 그의 생애 마지막에서의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37문답).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만 하는 존귀와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영광을 손상시킨 것에 대한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수난의 가장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위한 고난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그의 수난의 이런 의미가 아주 강조되어야만 합니다. 이는 그의 수난의 구속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그 어떤 사람의 고난이 대신 할 수 없는 그리스도로서의 아주 독특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형벌을 대신 받아 주는 것이 그가 받으신 수난의 의미 전체는 아닙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셔서 그는 적극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마땅히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순종의 삶을 그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얻어 주시려고"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37문답). 그의 순종과 고난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시고 그에 대한 공로로 우리에게 생명과 온전한 의를 부여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영생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아 가면서 온전하신 순종의 삶을 살아 주신 덕분입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헌신의 삶도 비록 그 자체로는 흠이 많은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온전한 순종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에 대해 권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벧전 2: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것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이 구절에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셔서 고난 하신 것을 "가난하게 되셨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좋은 주석가들은 대개 다 이 점을 잘 설명합니다. 이런 강조점을 잘 설명한 후에 필립 휴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문학적으로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하늘로부터 그는 갈보리와 무덤에로 내려오신 것이다. 이전에는 그보다 부유한 이가 없었지만, 그가 이제 가장 가난한 자가 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 즉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려고 그가 고난당하신 것을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그가 가난하게 되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도심은 우리의 부요를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 아닙니까? 이러한 고난으로 그는 우리의 구원을 이룬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수난과 우리의 고난 이렇게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수난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십자가에서의 수난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하는 대속의 수난인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존재가 감당할 수 없는 성격의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영원을 다해 드려도 부족할 무한한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수난에 대해서 감사만 하고, 찬양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수난은 또한 지금 여기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의 성격에 대해서도 큰 의미를 지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수난뿐만이 아니라, 수난을 당하는 우리에 대한 위로와 격려, 그리고 우리의 모범이 됨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지금 여기에 사는 성도들의 수난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이 요점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이런 수난의 삶을 사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를 때에 그들에게 닥쳐오는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참으로 위로하고, 그들로 그 기독교적 고난을 잘 감당해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고난스러워도 우리를 위해 더 큰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어떤 고난이든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이시라는 것, 심지어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는 것이(히 4:15)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분이 어떻게 우리를 체휼할 수 있느냐는 현대인의 질문을 바라보는 듯 오래 전에 웨스트코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시험 중에서 죄인을 체휼하실 수 있음은 죄를 경험해야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 없으신 분만이 가장 온전히 알 수 있는 죄에 대한 유혹의 강도를 경험하시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는 이렇게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지만, 도날드 해그너가 잘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다른 제사장들과 같이 그 자신이 죄를 범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다른 대제사장들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셨음을 생각하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당하는 성도들 앞에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2-3). 따라서 그 분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어떤 고난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이 세상에서 자신이 사는 삶이 가장 고난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너무 커서 그 누구도 이해할 수도 위로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런 분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보다 더한 고난을 당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는 시험 당하는 이들을 도와주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 말합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사실 이렇게 하시는 것에 "체휼하신다."는 말의 뉘앙스가 잘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그저 감정을 나눈다, 동정한다(compassion)는 말 이상의 의미가 있어서 적극적 도움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친히 자신이 고난당하신 우리 주님은 고난당하는 우리를 뒤에서 밀어 주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후에는 그가 친히 우리의 눈에서 우리가 그를 위해 그의 나라와 복음 사역을 위해 흘린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수난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당한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수난의 삶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뒤를 좇아가는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삶,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한 고난의 삶이어야 함을 생각하도록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삶을 사셨는데 그를 좇는다고 하는 우리가 고난을 마다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가 친히 멸시 천대 십자가를 지고 가셨는데, 어찌 우리가 존귀 영광 모든 권세만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에 근거한 그 고난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에 고난의 삶에로 나아가는 일을 그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 2:21). 이처럼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에게 모범적인 의미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16세기의 소시니안 주의자들이나 19세기의 유럽의 어떤 이들처럼 이 사실만을 절대적인 것처럼 말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의 일차적인 의미인 구속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수난의 구속적 성격을 분명히 한 터 위에서 우리는 그 수난의 모범적인 의미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수난의 대속적 의미만을 말하고 모범으로서의 수난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수난 당하셨지만, 또한 우리의 모범으로서 수난 당하시기도 했다는 사실을 유념하고서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에 근거한 고난의 삶에로 기꺼이 나아가는 일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 자신을 주와 이웃을 위해 허비하며 고난을 당하는 데로 기꺼이 나아 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런 고난의 복음(the Gospel of suffering)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크게 선포되어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으니, 그것에 근거하여 구속함을 받은 우리로서도 그 사랑에 반응하는 자처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여 우리의 삶을 희생하며, 시간을 내어 주고, 손과 발을 내어 주며, 생각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16장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4) : "십자가 사건의 유익" [골 3장 9절-10절] 우리는 지난번에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결국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과 저주를 그가 당하신 것이라는 논의를 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표현한다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사람의 죽음"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00년전에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가 마땅히 받고 당할 형벌을 다 받고 죽으셨을 때에 아주 신비하게도 우리의 옛사람이 그 사건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신비한 하나됨'(unio mistica, mystical union) 가운데서 발생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과 오랜 시간적 거리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놀라운 일이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가운데서 옛사람의 죽음이라는 이 사실과 그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우리 '옛사람'의 죽음이란 사실 자체 우리의 '옛사람'이란 말로써 우리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살던 존재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존재,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렇게 새로운 존재가 되기 "이전의 존재와 그 존재 방식 전체"를 지칭하여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하나님과 관련 없는 사람이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입니다(엡 4:22). 그런데 성경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옛사람의 죽음은 십자가와 관련하여 각 개인에게서 오직 한 번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옛사람이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다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9-10). 이 구절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옛사람과 그 옛사람에게 속하는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은 것입니다. 즉,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관련하여 일어난 영적이고 신비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고, 그와 함께 장사된 것입니다(롬 6:8, 4). 즉,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고, 새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개역 성경의 번역 때문에 우리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우리를 오도(誤導)하기 쉬운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말씀도 지금까지의 논의의 빛에서 새롭게 해석하며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여기 나오는 동사를 명령형으로 보고서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명령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부정사를 명령형으로 사용한 예가 있으므로(예를 들자면, 롬 12:15; 빌 3:16) 이런 번역이 아주 있을 수 없는 번역은 아닙니다만, (1) 22절에는 부정사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정사가 목적격과 함께 나오고 있기 때문에 명령형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으며, (2) 또한 이렇게 번역하면 우리는 항상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어야 하든지, 적어도 그리스도인이 된 후 적어도 한 번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여 성경의 전체 가르침과 괴리를 가져오는 생각을 하도록 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문제 속으로 들어가는 해석을 하기보다는 다른 설명의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문법적으로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의 또 하나는 이를 설명의 부정사로 보고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명의 부정사로 보고서 앞의 주동사와 연결하여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었다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옮기면 전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해석을 할 수 있어서 더 좋습니다. 이를 생각하면서 프란시스 폴크스(Francis Foulkes)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영어 개정역(RSV)에서 22, 23, 24절의 시작에 있는 명령형은 희랍어에서는 부정사들이고, 22-24절은 21절과 연관되도록 구성되어 다음과 같이 옮겨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는 너희가 [옛사람을] 벗었고, 새롭게 되어 [새사람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었다고 분명히 말하는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골로새서 3장 9-11절의 병행 구절의 말씀과 비교하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이런 주해를 잘 드러내고 강조한 이들의 선구자로 우리는 죤 머레이(John Murray)교수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부정사를 결과의 부정사(the infinitive of result)로 보는 것입니다. 또한 안토니 후크마도, 머레이의 주해를 따르면서, 이 문장 속에 있는 세 가지 부정사{즉, (1) "벗어버리다"는 뜻의 "아포떼스따이", (2) "새롭게 되다"는 뜻의 '아나네우스따이', 그리고 (3) "입다"는 뜻의 "엔두사스따이"를} 많은 영역본이나 한글 개역과 같이 명령형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머레이가 제시하는 것처럼, 결과를 나타내는 부정사 혹은 설명형의 부정사로 보는 것이 더 옳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크마는 이 세 부정사 모두가 주동사인 21절의 "너희가 가르침을 받았다"에 의존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NIV와 같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새롭게 되어 ... 새사람을 입었다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구원론에서는 이 문제를 좀 더 길게 논의하면서 왜 머레이와 같은 해석을 하는 것이 더 옳은지를 잘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신자 안에 새사람과 옛 사람이 현존하고 있어서 싸움하고 있다는 다른 개혁 신학자들의 견해에 반하며, 이를 주해를 통해 교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함을 받은 새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일입니까! 이 일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유익을 주는 것일까요? 2. 옛사람의 죽음의 소극적 유익 먼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옛사람이 죽었다는 그 사실은 소극적으로는 이제 우리가 더 이상 죄와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는 죄의 형벌과 관계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과 죄의 세력과 관계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씩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의 옛사람은 죄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만 하는 형벌로서의 그 죽음을 죽은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옛사람의 죽음의 가장 큰 의미입니다.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그와 함께 죽은 우리 옛사람의 죽음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다 내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사람의 죽음에 어떤 공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사하는 공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만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새사람인 우리는 더 이상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옛사람의 죽음과 함께 우리는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그리스도를 믿는 새사람은 죄에 대한 형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결국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속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 것이고, 그 일에서 발생한 옛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가 어떤 일에 대해서 혹시 하나님의 벌이 임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나,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또 그런 저주의 위협 때문에 바른 생각과 바른 길 가는 것을 못하고 하는 것은 모두 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속을 온전히 믿지 아니하는 불신앙적인 처사입니다. 둘째로, 옛사람의 죽음과 함께 "육의 소욕"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속에서 일어난 옛사람의 죽음과 함께 우리는 죄의 형벌로부터 만이 아니라, 죄의 지배(the reign of sin)로부터도 원칙적으로 해방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사람은 원칙상(in principle)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여 우리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하던 일에서 우리가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신약 성경이 때때로 "육" 또는 "육체"라고 표현하는 부패한 인간성의 잔재가 새사람 안에도 남아 있어서 우리가 끊임없이 이 육[부패한 인간성]과의 투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전투하는 그리스도인이지, 결코 죄를 전혀 범하지 아니하는 승리한 그리스도인, 영광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성도는 성령께 의존하면서 항상 부패한 인간성의 죄의 소욕과 투쟁하여 가고, 때때로 실패하여 죄를 범할지라도 항상 죄 중에 있거나 즐거이 죄를 짓지는 않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요한은 "그[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요일 3:6), 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니니"(요일 5:18)와 같이 강력하게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즉 중생한 새사람은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식의 완전주의를 한 번도 시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단적인 예를 들어 말하자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라는 그 말을 하는 요한이 바로 요한 일서 초두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거하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하면서 우리의 죄 고백을 권면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현세에서 우리가 죄가 전혀 없는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여기 현재형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 쓴 것이 습성적 상태(habitual state) 또는 반복되는 행위(repeated action)를 시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는 말의 본의는 결국 "진정한 성도는 항상 죄 가운데 거할 수는 없다." "죄를 죄로 알면서 거기 계속 머물러 있는 상습적인 죄의 상태 가운데 있을 수 없다", "계속 죄를 지을 수 없다"(cannot continue to sin)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죄를 지으면 그것을 불법이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며 그것을 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이 성경의 일반적 가르침에 가장 일치하는 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자면, 성도는 이런 의미에서 원칙적으로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하기 전에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죄와의 투쟁, 육의 악한 소욕과의 투쟁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투쟁에서 때때로 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가 참으로 중생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한 성도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고, 그 승리의 방도를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잘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 5:16- 17). 즉,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 성령의 가르침을 따르고,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서 행하되,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그리하는 것이 우리의 승리의 비결인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것만이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승리의 방도입니다. 3. 옛사람의 죽음의 적극적 유익 우리는 이미 새사람의 죄와의 투쟁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이것과 연관해서 좀 더 적극적인 유익을 말한다면, 이제 새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a sacrifice of thanksgiving)로 드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는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죄를 향하여 달려가는 존재가 아니고,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가지고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힘씀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인(골 3:10) 새사람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그는 이제 하나님의 경륜과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서, 그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데 자신을 드려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드릴 수 있다는 것도 그러하지만, 우리의 드리는 바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것은 아주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된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진정한 의미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된 것입니다. 루터와 칼빈 등의 개혁자들이 강조한 만인 제사장주의(Universal priesthood of believers)의 근거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 우리의 그 일상을 다 주께 드리고, 그 시간과 노력을 사용해서 주께서 시키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살아 나가는 것이 이렇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산제사(living sacrifice)를 주께 드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싸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므로 사실 우리의 애씀과 힘씀 그 자체가 하나님께 받음직한 것이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도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말합니다(벧전 2:5).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신령한 제사를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희생 제사의 공로에 근거해서만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힘씀과 노력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나 찬송, 그리고 예배도 그 자체가 무슨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께 드려 질 수 있는 것이고, 우리의 삶과 매일의 행보도, 또 그것을 대표로 표현해 내는 우리의 헌상 예식도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께 드려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섬김과 봉사의 삶을 받으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죄인 우리에게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고, 주를 위해 힘써 드리고 난 후에 우리의 마음은 주께서 이를 그리스도의 공로로 써서 받아 주셨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큰 감사와 감격으로 넘쳐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주를 기쁘시게 하고 주께 유익한 일을 하여 드렸다는 공로 의식이 있을 수 있는 여지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께 드리는 삶의 열매는 결국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드신 주님께 대한 감사의 표이므로, 감사의 제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일들은 다 우리를 구원하신 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효능이나 능력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저 구원받았음을 감사함으로 표현하는 기능을 할뿐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들의 삶에서 항상 이런 감사의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고찰한 바를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43문답은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제43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희생 제사와 죽음에서 우리는 또한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 (답) 그의 능력으로 우리의 옛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고 장사지낸바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육의 악한 소욕들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감사의 제사로 그에게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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