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8 13:52

예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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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배 학

주 승중박사

 

개혁교회와 예배 강의안 목차

 

제 1강: 예배에 대한 기초적 이해/143

1) 예배란 무엇인가?

2) 예배의 신학적 정의와 언어를 통한 정의

3)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제 2강: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배/152

1) 시내산에서의 예배

2) 성막과 성전에서의 예배

3) 회당에서의 예배

4) 절기와 예배

제 3강: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배와 초대교회의 예배 예전(1세기의 예전)/159

제 4강: 속사도시대의 예배/174

제 5강: 순교의 터 위에 자란 2세기의 예배/179

제 6강: 감격과 소망 가운데서 성숙한 3,4세기 예배/184

제 7강: 종교개혁의 시대와 예배의 개혁/191

제 8강: 성경과 전통을 소중히 여긴 마틴 루터의 예배 개혁/196

제 9강: 수장령 아래 형성된 영국교회와 예배 개혁/203

제 10강: 예배의 전통을 단절시킨 쯔빙글리와 스위스의 예배 개혁/212

제 11강: 개혁교회 예배의 선구자 스트라스부르크의 마친 부처와 예배개혁/219

제 12강: 장로교회 예배의 원조 제네바의 칼빈의 예배 개혁/224

제 13강: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존 낙스와 예배 개혁/232

제 14강: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과 청교도 예배 그리고 장로교 예배/239

제 15강: 미국 서부 개척기의 Frontier Tradition과 예배/256

제 16강: 한국 장로교회의 초대교회 예배의 역사/262

제 17강: 예배회복 운동과 세계교회의 예배 예식의 동향 그리고 한국교회의 예배 예식/273

Epilogue/291

 

개혁교회와 예배 세미나 제 1강

 

예배에 대한 기초적 이해

 

1. 왜 예배를 드리는가?

전 세계에서 한국교회 교인들처럼 열심히 모여서 예배드리는 공동체가 없다. 우리는 주일예배부터 시작하여 주일 찬양예배, 수요예배(혹은 기도회), 금요일 구역예배 등 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여기서 심각하게 던져 보아야 할 질문은 도대체 우리가 ‘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마디로 그것은 구원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위에 보내셨는가? 눅 19:10에서 예수님은 그 분명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신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구원함을 받았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엡 1:3-7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 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 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 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 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구원받았기에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된 것이다. 즉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구속의 결과이다.

히브리서 12:28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즉 영원한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여기서 “섬기다”라는 말은 “라트레오우”라는 헬라어 동사로, “예배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12:28절의 말씀은 바로 이런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았기 때문에,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우리를 예배하는 자들로 만드신 하나님께 은혜롭게 반응하자.”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배의 근원은 바로 구원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시편 22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는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들의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직접적으로 다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는가? 그에 대한 대답도 시편 22편은 분명히 이렇게 답하고 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 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 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 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부르짖 을 때에 들으셨도다”(22-24)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바로 찬양과 그를 경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25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큰 회중 가운데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 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 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라”(시 22:25-27)

 

결국 시편 22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구속의 결과가 바로 찬양이요, 경배라고, 즉 예배라고 말한다.

 

우리가 또 한 예를 들자면, 일찍이 마틴 루터는 누가 17:11-19의 열 명의 문둥병 환자가 고침을 받은 사건을 통해서 “진실된 예배”(True Worship)란 무엇인가 하는 설명을 한 바가 있다. 열 명의 문둥병 환자가 고침을 받았는데, 그 중에 딱 한 사람,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만이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였다. 열 명이 구원함을 얻었는데, 그 중에 이 사람만이 하나님께 나아와 구원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기를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말씀하셨다.

결국 여기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구원에 대한 최초의 반응이 바로 예배라는 사실이다. 즉 구원은 예배의 근원이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가? 다른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2. 예배의 정의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인가? 우리가 예배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의 접근을 통해서 할 수 있다. 하나는 예배학자들이 예배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찾아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배를 나타내는 용어들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다.

 

1) 예배의 용어들

이제 먼저 예배를 나타내는 용어들을 몇 가지 살펴보는 가운데 예배의 의미를 알아보자

먼저 구약에서 나타나고 있는 용어들을 보면, “에바드”라는 단어이다. 이 말의 뜻은 “봉사” 또는 “섬김”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샤하아”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굴복한다” 또는 “자신을 엎드린다”는 뜻으로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두 단어가 나타내고 있는 바 그 의미는 곧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순종의 생활이 예배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 다음 신약성경에도 예배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단어들이 있는바, 그 첫째는 “프로스퀴네인”이라는 단어이다. 이 말은 “절하다” “굽어 엎드리다” “입맞추다”라는 뜻으로서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를 말해주고 있다. 그 다음은 “라트레이아”인데, 그 의미는 종으로서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흔히 service 또는 worship으로 번역이 된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레이투르기아”인데, 이 말은 노동(ergon)과 백성(laos)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원래 이 단어는 고대 희랍에서 시나 국가의 전체 이익을 위하여 실시하는 공익사업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이 말은 예배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이 단어에 의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들이 하는 노동 내지는 봉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후에 이 말은 특별히 기독교의 예전(liturgy)을 나타낼 때 사용하게 되었다. 즉 Liturgy는 신앙공동체가 그들의 신앙을 공중 예배를 통하여 표현하는, 근본적으로 외향적인 표현 형식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 외에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두 개의 단어가 더 있는데, 그것들은 “Gottesdienst”라는 독일어와 “Worship”이라는 영어 단어이다. 먼저 “Gottesdienst”라는 말속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봉사한다는 뜻과 사람이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 단어 속에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 하나님과(빌 2:7) 그러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섬김을 반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Worship”이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가치(worth)”라는 말과 “신분(ship)”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 가치와 존중을 돌린다는 뜻이다. 즉 이 말에 의하면 예배란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예배를 표현하는 단어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고,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단어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예배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에 대한 우리들의 봉사 내지는 응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엄청난 일을 이루셨기에, 우리들은 그 분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리면서, 그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가운데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사 놀라우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뵈옵고, 그 분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예배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다시 한번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의 현장에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 만남 속에서 감격과 감사가 넘쳐흐르게 되며, 그 결과(예배드린 결과) 우리는 전보다 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며, 더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2) 예배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

그 다음에 많은 예배학자들이 예배에 대해 정의한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표현한다면 그것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Franklin Segler는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다”라고 정의를 내린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대한 정성어린 응답의 행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의 기본적인 발걸음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믿음의 발걸음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 믿음을 가지고 거룩한 예배의 대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참여가 감격 어린 응답적인 행위로 변화되고,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자세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예배의 깊은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고 말하면서, 바로 이것이 우리 인간들이 참으로 드려야 할 영적 예배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예배의 깊은 의미가 이해되어질 때, 유명한 장로교 예배 신학자인 Paul Hoon이 예배의 현장을 계시와 응답의 만나는 지점이라고 한 말을 이해하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대화의 현장이 바로 예배라는 말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영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즉 그는 기독교 예배를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이라는 두 가지의 중심개념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루터교 신학자 Peter Brunner 역시 예배란 “우리 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기도와 찬송으로 그분에게 응답하는 것이며, 그 외에 다른 것은 행해지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순종의 태도”로서의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 그 분의 역사하심에 올바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장하기를 예배는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고, 자신의 은사에 우리가 응답하게끔 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그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 다음에 Evelyn Underhill은 성공회의 전통에 근거하여 “예배는 그것이 어떤 수준과 형태를 취하고 있던지 간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 예배는 다른 예배들과는 달리 “분명한 계시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포함한 “초자연적인 행동이며, 초자연적인 삶”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우리가 지금까지의 여러 전통의 예배학자들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예배에서 두 가지의 중심적인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세상에서부터 예배로 부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께 응답하고자 함께 모이게 된다. 즉 기독교 예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이것이 바로 예배의 첫 번째 중요한 요소이다.

그 다음에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즉 앞선 모든 예배의 정의를 보면 인간 편에서의 응답 또는 만남이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한 두 번째 요소임을 알게 된다. 즉 예배란 계시와 응답이 만나는 현장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적인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한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교제 또는 만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만남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개혁교회 예배학자인 John Burkhart는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셨고, 하시고 계시며, 또 앞으로 하실 것에 대한 축제적 응답이다”(Worship is the celebrative response to what God has done, is doing, and promises to do)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장복 교수도 “예배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수많은 은총에 감격하여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며 봉헌하려는 피조물의 응답적인 행위”라고 정리한다.

그러므로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만남의 현장”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예배란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시고, 찾아주시며,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적인 은총이 주어지므로 죄인 된 인간들이 구속의 은총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경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 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그의 백성 가운데 현존해 계시며, 그로 인해 우리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 하나님의 현존, 임재와 축복의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응답하고 봉사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서 예배의 현장에 임한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와 있으며, 어떠한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이 여기에 서 있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할 때에 그 예배 자는 맹종의 신앙인이 되기 쉽고, 또 그러한 자세 속에서는 하나님과의 깊은 의미 있는 만남을 이룰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오늘 예배 자들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이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정확한 이해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대로 예배란 하나님의 현존이 가장 뚜렷하며, 백성들과의 만남의 역사가 발생되는 현장이다. 즉 예배는 바로 계시와 응답의 가장 실감나는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육의 사건과 구속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 속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너무나 뚜렷한 계시이기에, 구속받은 인간들로부터 감격적인 응답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이 응답의 대열에 선 무리들은 언제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리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으며(What God has done), 무엇을 하고 계시며(what God is doing), 그리고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What God will do) 분명히 깨닫고 나아가야 한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의 은총과 결부시키고, 그 인격적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룬 사람만이 참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요한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 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3. 예배의 정신: 영과 진리로 하는 예배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인가? 위의 요한 4장 23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참되게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려면 어떤 마음과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어떤 예배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요한 4장 1-26절에서 예배의 가장 중요한 기본정신을 배우게 되는데,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향하여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 한다”(22절)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배는 드리고 있었지만 예배의 참 대상을 알지 못한 체 예배드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 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을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어떤 부분은 알고 있었지만, 구원에 대한 모든 계시를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예배는 예배에서 요구되는 합당한 지식이 없이, 진리가 없이 열성적인 마음으로만 드리는 예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예배는 적극적으로, 감동적으로 드려졌지만, 예배의 내용은 옳지가 않았던 것이다. 즉 그들은 신령으로 예배를 드렸지만, 진리로는 예배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유대인)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정반대였다. 그들은 39권의 구약성서 전부를 받아 들였고, 구원에 대한 모든 계시를 소유하였다. 그들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령함이 부족했다. 마태 6:1-8에 의하면 그들은 냉담하고 율법적이며, 의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즉 유대인들은 외양은 갖추고 있었지만 거기에 자신들의 영은 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는 소유했으나 영은 비어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극단의 예배 형태를 바라보게 되는데, 즉 하나는 그리심 산에서 드리던 열광적인 사마리아인들의 예배와, 또 하나는 풀 한 포기 날 수 없는 껍데기만(형식) 남아 있어, 그 속에 생명력이 없는 메마른 이스라엘의 예배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 4장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는 참된 예배가 되려면 이 두 가지가, 즉 신령과 진리를 겸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광적이고 열심히 있는 적극적인 예배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예배도 진리 위에 기초한 것이라야 하며, 또 진리를 따라 예배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예배 속에 뜨거운 마음으로 갈급해하는, 감격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열심도 있어야 한다. 결국 참된 예배는 이 둘의 균형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먼저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란 어떤 예배인지를 생각해보자.

1) 신령(πνευματι: spirit)으로 드리는 예배

여기서 신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인간의 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뜻이다. 바울은 롬 1:9에 보면 “내 심령으로(with my spirit)으로 ‘섬기는’ (리트류오: 예배하다)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라고 하여 자기의 심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다윗은 시편 103:1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고 고백하면서 자기의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예수님은 인간의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영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인간의 본성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먼저 많은 사람들이 육신으로 예배를 드린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하기만 하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물가의 여인은 예루살렘 성전이나 그리심 산상에 있는 사마리아인의 전에 가는 것이 곧 예배라고 생각했다. 이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주일 아침 교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찬송을 부르고, 혹은 촛불을 밝히고, 혹은 성호를 긋고 통로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런 행위가 예배 행위일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관습은 예배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수단 자체가 진정한 예배일 수는 없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수단이 예배를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일 아침에 우리가 행하는 특정한 관행과 예배 그 자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의 심령이 함께 하지 않는 예배, 우리의 껍데기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예배라면, 습관적으로 앉아 있는 예배라면, 그것은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예배가 아니다.

그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래서 예배를 감정과 혼동하고 있다. 우리의 혼은 감정이 위치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예배는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거니와 더 나아가서 혼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에 때때로 감정이 고무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감정이 격해져 눈물이 흐르거나, 기쁨에 넘쳐 감격에 젖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것인가를 묻는다면 언제나 그렇지 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눈물이 흐르거나 기쁨이 넘쳐 감격에 젖기도 하는 현상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경우에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찬양을 부를 때는 감동하다가도, 말씀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나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본성과 흡사한 인간의 이(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진정 깨닫고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날 때에 이루어진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서 영국의 유명한 성경주석가인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진정하고 순전한 예배는 인간이 그의 영을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때 이루 어진다. 진정하고 순전한 예배는 어떤 일정한 장소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의 식이나 기도를 통해 드리는 것도 아니며, 어떤 예물을 가져와 바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진정한 예배는 인간의 썩지 않고 보이지 않는 부분인 영이, 역시 썩지 않으 며 보이지 않는 분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께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신령으로,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우리가 신령으로 예배드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기 위하여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들어 오셔야 한다. 고전 2:11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영을 자극해 주시고, 동기를 부여해 주시며, 우리의 영과 혼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감격에 넘칠 수 있도록 열어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참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일단 구원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시며, 날마다 순간마다 교훈해 주시고, 가르쳐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감격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고전 12: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즉 성령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깨달을 수 없고, 그렇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따라서 예배는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님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이렇게 먼저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셔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향할 수 있도록 도우시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은 모든 방해물들을 밝히 드려내 주셔서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깨끗이 물리친 마음으로 예배할 때 그것이 바로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2) 진리(αληθεια: truth)로 드리는 예배

이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의 두 번째 특성에 대해서 말해보자. 예배는 하나님의 진리로 새롭게 된 마음의 분출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는 진리에 대한 응답으로 드려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예배란 진리 위에 기초된 응답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정으로”라는 말은 “진리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진리란 무엇일까? 이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17:17에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또 시편기자는 119편 142, 160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이렇게 우리가 진리로 예배 드려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즉 우리는 성경의 계시를 근거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드리려면 그 분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하며,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구속의 사역을 통한 한없는 은혜를 깨달아야 하는데, 이 놀라우신 하나님과 또 그의 사랑과 은혜를 완전히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 바로 그 분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통하여 예배드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응답하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진리의 말씀이 그렇게도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초대교회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그들은 예배드릴 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면서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시간(골 3:16-17)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에 앞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저들 속에 풍성하게 거하여, 저들을 주장할 때 저들은 비로소 바른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었고, 바른 기도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으려면,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깊이 생각하며, 묵상을 하여야 한다. 주중에는 단 한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기도하지 않다가, 주일이 되서야 먼지 묻은 성경책을 털고 나아오는 것은 참된 예배의 자세가 아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 말씀의 뜻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일날 교회에 나와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환언하여 우리가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매일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이제 주일이 돌아오면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일어나서,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기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한다. 일주일 내내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하는 것을 묵상하는 중에 보냈다면 분명히 그는 예배를 사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일을 맞이하여 예배드릴 때 우리는 분명히 참 된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질서가 있는 가운데 드리는 예배이다.

그 다음에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분께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αληθεια)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만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행 4:12). 그 분만이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릴 수 있게 된다. 즉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는 것을 말한다.

 

 

 

 

 

 

개혁교회와 예배세미나 제 2강

구약시대의 예배

 

1. 들어가는 말

기독교는 유대교와 히브리 문화로부터 유래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과 예배를 형성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은 히브리적인 것이었다. 특별히 구약성경은 창세기에서의 아벨과 가인의 제사로부터 시작하여 성막에서의 예배와 성전에서의 희생제사 등 예배에 대한 많은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시대의 예배에 대해서 알아보려면 많은 연구와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 강의에서는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의 예배에 영향을 끼친 네 가지의 중요한 구약의 예배에 관한 자료들로 그 범위를 제한하고자 한다. 그것은 시내 산에서의 예배 경험과 성전(성막), 그리고 회당과 절기 등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신약성경에 파편적으로 나타나 있는 예배의 모습과 초대교회의 예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들이다.

 

2. 몸 말

1) 시내 산에서 예배 경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홍해를 건너 시내 산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에 들어갔다. 이 시내 산에서의 계약 사건은 출 19-24장에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출애굽 사건에서 예배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시내 산 기슭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공적인 만남이다(출 24:1-8).

예배는 계시와 응답이 만나는 현장이다. 즉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만남의 현장이다. 그런데 우리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그 만남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만남에서 구약의 예배의 중요한 요소들을 깨닫게 된다.

첫째로,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불러내시고, 그들은 시내 산으로 인도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시내 산 기슭에서 만나시려고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은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회중”이 되었다. 바로 여기에 참된 예배의 선행조건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자신과 만나도록 먼저 부르신 것이다.

우리가 오늘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의 부름”으로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예배의 부름을 하나님의 말씀(주로 시편 말씀)으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 주시기에 그 부름에 응답하여 예배의 현장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의 현장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의 주도권(Initiative)은 하나님께 있다.

둘째로, 시내 산의 부름에서 모든 백성들은 그 만남에서 역할이 주어졌고, 모든 백성들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감당하면서 그 만남에 참여하였다. 지도자의 역할이 모세에게 주어지긴 했지만, 그 만남의 다른 부분들은 아론과 나답, 아비후, 이스라엘의 칠십 장로들,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 그리고 백성들 등에 의해서 분담되어졌다. 하나님과의 그 만남에는 회집한 자들 모두가 참여해야만 했다. 모든 회중들은 각자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가지고 있었고, 그 역할을 온전히 감당해야만 했다. 이것은 회중의 참여라고 하는 예배의 근본적인 측면을 가르쳐 준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예배는 계시와 응답이 만나는 현장이다. 그러므로 예배가 올바로 서려면 예배자의 응답을 통한 참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참여라고 하는 측면은 종교 개혁가들이 그렇게도 회복하고자 했던 예배의 근본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였다.

셋째로, 시내 산에서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만남은 말씀의 선포에 의하여 특징지워졌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이런 모습은 예배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의 들음이 없이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넷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계약의 조건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승인하였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헌신을 작정하였다.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라는 하나님 백성들의 고백은 예배의 한 본질적인 측면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즉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헌신)이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다섯째로, 시내 산에서의 만남은 계약 봉인에 대한 극적인 상징(피 뿌림)에 의하여 그 절정을 이루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항상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봉인의 표시로서 피의 제사를 사용하셨다. 시내 산의 사건에서도 모세가 피를 취하여 여호와의 단에 뿌리고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출 24:8)라고 선언하였다. 이런 희생 제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적인 제사를 지시하고 있으며, 주님의 희생 이후 주의 만찬은 교회가 하나님과 더불어 갖는 계약 관계에 대한 표지가 되었다.

 

2) 성막과 성전에서의 예배 경험

기독교 예배와 관련하여 구약 성경의 중요한 예배 자료는 바로 성막과 성전에서의 예배이다. 분명히 성막과 성전에서의 예배는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으며, 그 기본적인 특징들은 예배의 기본적인 모습들을 깨닫게 한다.

첫째로, 성막과 성전에서의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대하 6:7, 겔 43:7 참조)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막과 성전에서의 예배는 곧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그 특징으로 한다.

둘째, 성막과 성전의 예배는 그 특징이 상징적인 성격에 있다. 그것들은 거룩한 공간, 거룩한 예식들, 그리고 거룩한 제사장들 등에 의해 특징 지워졌다. 그리고 이런 모든 거룩한 상징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되었다. 예를 들어 다윗은 그의 성전건축의 계획을 말할 때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이 모든 일의 설계를 그려 나에게 알려 주셨느니라”(대상 28:19)고 말하고 있다. 즉 성전의 구체적인 각 모양들도 다 일일이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성전 자체의 양식도 다 상징적인 의사전달이었다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성전은 상징적인 공간 사용의 특징이 있다. 바깥뜰과 안뜰, 지성소 등의 배열은 지성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예배자들 사이의 거리를 표시한다. 번제단, 물두멍, 금등대, 진설병을 놓는 탁자, 향단, 언약궤 등의 모든 기구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묘사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성전 기구들 중의 어느 것도 임의로 선택되거나 아무렇게나 배열되지 않았다. 이런 내용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예배당의 구조도 신학(개혁교회의 예배신학)을 나타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셋째로 성전은 여러 가지 거룩한 예식들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성전에서의 예배는 희생제사의 일반적인 규칙들(희생제물을 바침, 희생제물 위에 안수함, 희생제물을 죽임, 피를 뿌림, 희생제물을 태움 등)과 함께 많은 제사들이 등장한다. 즉 번제(양 한 마리를 매일 드리는 제사로서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헌신을 의미), 화목제(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친교를 상징하는 자원의 제사), 속죄제(부작위에 의한 죄를 위한 제사), 속건제(작위에 의한 죄를 위한 제사) 등이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제사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시적이며, 유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내용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룩한 예식들은 함부로 다루거나 임의로 생략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성전은 거룩한 직분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성전 안에서의 거룩한 예식들을 집행하는 자들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자들이었다. 누구나 다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레위인들 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정교한 예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성별되었다(출 29장). 그들은 그들이 섬기는 일에 적합한 의복을 입었으며(출 28:40-43, 39:1-31), 거룩한 생활을 위한 엄중한 규칙들을 부여 받았다.(레위기 21:1-22:10)

결국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예배당), 거룩한 예식들(성찬식 등), 그리고 거룩한 직분(위임받은 자들) 등에 대한 개념들은 기독교 예배가 그 발전과정에 있어서 구약의 성막과 성전예배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또한 현재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3) 회당에서의 예배 경험

회당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및 포로기 동안에 세워졌다. 그리고 회당의 중심적인 동기와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공동체의 맥락 안에서 보존하고 전파하는 데 있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삶, 교육, 그리고 심지어는 사회적인 삶의 중심지였다. 회당을 통하여 고대 유대 종교의 전승들이 보전되었으며, 유대인들의 자기정체성(identity)은 여러 세대를 통하여 전달되며 유지되었다.

그런데 회당에서의 예배는 그 이전의 성전예배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달랐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면은 그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데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회당예배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신앙의 확인(Shema), 기도, 그리고 율법(성경) 등이다. 그러나 회당예배가 이러한 본격적인 순서로 들어가기 전에 항상 먼저 있는 순서가 있는데, 그것은 찬양이었다.

회당예배를 여는 순서는 함께 하는 찬양(corporate praise)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먼저 찬양한 후에 기도할 것”이라는 탈무드에도 기록되어 있는 원칙과 일치한다. 이 과정의 채택은 고전 14:26의 순서에서 제시하는 바와 같이 고린도 교회의 기독교 공동예배의 여러 순서들 가운데 그 첫 번째를 이루고 있는 “찬송시”(a hymn of praise)가 먼저 불려져야 함에서 볼 수 있다.

회당의 회당장은 “예배의 부름”과 함께 예배를 시작할 사람을 회중가운데서 초청하기 위하여 그 “맡은 자”(minister, 눅 4:20)를 부른다. 그러면 그는 “주님께 복이 있으리, 주님은 복 받으시기에 합당 하십니다”라고 외치면서 예배를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주님께 영원토록 복이 있으리”라는 축복으로 응답한다. 그리고 그 정신은 느헤미야 9:5(레위 사람 예수아와....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 찌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 이니이다”)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예배의 시작부터 예배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초청받으며, 그의 위대하심과 복을 인정하도록 초청된다.

 

(1) 신앙의 확인(Shema)

이 부분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중심적인 고백으로 선포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는 유대민족의 근본적인 의무를 말한다(신 6:4-9). 두 번째 부분은 보상과 징벌의 교리를 강조한다(신 11장).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은 거룩하기에 힘써야 하는 각 사람의 의무를 강조한다.(신 28:1-11)

(2) 기도(Tefillah)

회당예배의 두 번째 순서는 바로 기도이다. 이 순서에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 테필라(tefillah)라는 기도서가 일어선 자세로 낭독되었다. 첫 번째 부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 경의를 표함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을 “살아 있는 자들을 양육하시고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 높임으로써 하나님 찬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세 개의 기도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 부분은 “지혜와 이해력, 죄의 용서, 이스라엘의 회복, 건강 그리고 생존유지 등의 은혜를 간구하는 회중의 기도(간구의 내용이 13가지)로 이루어진다. 특히 이 기도는 회개, 죄의 용서, 율법 연구의 능력, 핍박이나 기근 및 질병 등과 같은 재난들로부터의 구원 등에 집중한다. 이 기도는 또한 더 나아가서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서 언급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요청한다. 기도의 세 번째 부분은 마지막 세 가지의 결론적인 기도인데, 이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감사를 강조하며, 평화를 위한 기도로써 끝을 맺는다. 여기 그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8개의 축복기도(The Tefillah)의 내용***

A. 세 개의 여는 축복기도 1. Thou are God

(Three Opening Benedictions) 2. Thou art mighty/ Praise of God

3. Thou are holy

 

Therefore we ask

4. Understanding

5. Repentance/ Spiritual blessings

6. Forgiveness

 

7. Personal freedom

8. Health/ Material blessings

9. Well-being

B. 13개의 청원들 10. Reunification of the scattered

(Thirteen Immediate Petitions)

11. Integral justice

12. Punishment of enemies

13. Reward of the just

14. The New Jerusalem/ Social blessings

15. The Messiah

16. Hearing of Prayers

 

Therefore:

 

17. Restore worship in Jerusalem

C. 3 개의 마지막 축복 18. Accept our gratitute/Thanksgiving to God

19. Grant us peace

 

(3) 율법(Torah)

회당예배의 세 번째 순서는 바로 율법의 낭독과 해석이다. 모든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토라를 연구하고 그것의 가르침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데 있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회당예배를 드릴 때마다 토라를 낭독하였고, 토라의 낭독 뒤에는 설교를 행하였다(눅 4:16-30 참조). 보통 토라의 낭독은 한 절씩 이루어졌으며, 각 절에 대한 번역이 뒤따랐다. 다음의 설명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전해 내려온 토라낭독에 관한 것이다.

 

“토라낭독을 맡은 자는 토라를 한 절씩 읽으며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한 절씩 번역한 다...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낭독자와 변역자 사이에 서서...낭독자와 번역자를 도우며, 그들이 읽거나 번역하기 전에 그들을 안내한다. ...만일 잘 읽지 못하거나 서투른 사람 이 있다면, 그 세 번째 사람은 그를 도와 준다. 그러나 만일 그가 전혀 읽지를 못한다 면 그는 읽거나 번역하는 일에 부름을 받지 못할 것이다. ... 그리고 만일 낭독자가 실 수를 했을 경우 번역자는 그것을 교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만일 번역자가 실수했을 경우 낭독자는 그것을 교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직 그 세 번째 사람만이 낭독이나 번역을 교정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설교는 낭독된 성경본문을 해석하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적용하였다. 그것은 토라 속에서 교훈을 찾는 “탐구” 행위, 즉 데라샤(derashah)로 알려졌다. 설교자는 “탐구자” 또는 “데라샨”(derashan)으로 불리워졌다. 설교자들은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가르침을 목적으로 삼았고, 그들은 사람들이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할 교리들과 율법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회당예배가 초기 기독교 예배에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신앙을 확인하고, 특별한 관심사를 위하여 기도하며,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하고 설교하는 일(적용까지) 등은 초대교회의 예배로 연결이 되었고, 쉽게 기독교 예배에 전용되었다.

아무튼 위의 세 가지 요소(신앙의 확인, 기도, 토라)는 회당예배에 있어서 어느 곳에서든지 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며, 때로는 일년 중 어떤 기간 혹은 한 주간의 어떤 날들(예를 들어 장들이 서는 날들이라든지, 월요일 그리고 목요일 등에는 더욱 짧은 성경구절이 읽혀져졌다)에는 조금씩 변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위의 세 가지 요소는 회당예배에서 지역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발견되어진다. 그리고 이런 예배의 틀은 신약성경 안에서도 발견되어지는데, 초대기독교인들의 조금의 변형과 함께 나타나 보여 진다. 그리고 발견되어진 여러 증거들에 의하면 초대교회의 예배는 회당과 다락방에서의 놀라운 경험을 통한 퓨전으로부터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여기 1세기의 회당 예배의 틀을 참고로 살펴보자.

 

***1세기의 회당 예배***

1세기의 회당예배는 아마도 율법과 예언서들의 낭독, 그리고 쉐마, the tefillah, 그리고 소위 제사장적 축도(민 6:24-26)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1) 성경봉독(Scripture Reading)

성경봉독은 1세기의 회당 예배에서 가장 넓게 증언되고 있는 활동이었다.(눅 4:16-27, 행 13:15, 27. 행 15:21 등 참조) 신약성경과 미시나(Mishnah)의 증언들에 의하면 회중들 가운데 남자 회원이 율법과 예언서에서 읽고 그 말씀을 해석하도록 초청받았다(눅 4:16-27)

2) Shema

쉐마(신 6:4-9, 11:13-21, 민 15:37-41) 역시 읽혀졌고, 암송되었으며, 매번 읽는 성경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신앙고백적인(creedal confession) 것으로서 암송되어졌다.

3) Tefillah, or Prayer

후에 발견된 자료들에 의하면 이 기도는 여러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부분의 끝은 축복(berekah)으로 끝난다. 1세기 말에 이들 부분들은 표준화되어져 갔고, 안식일에는 7개 그리고 주중에는 18개가 되었다. 이 기도가 바로 Tefillah로 알려져 있는 기도이다. 이것은 “the Eighteen Benedictions" 그리고 아미다(Amidah) 또는 표준적인 기도(Standing prayer)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놀라운 기도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으로 되어 있다.

 

4) 절기를 통한 예배 경험

고대 이스라엘의 절기들은 구약성경이 초기 기독교의 예배에 미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성전과 가정을 중심으로 한 크고 작은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속에 있는 특별한 행사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지켜지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절기들을 통하여 거기에 거룩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절기를 특별한 시간으로 구별하였다. 이러한 절기들과 관련된 예배는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생각과 믿음을 갖게 해 주었고, 또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임재를 확실히 알게 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세 개의 특별한 절기들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매우 중요하였고, 그 중에서도 유월절과 오순절은 초대교회의 예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먼저 유월절(Pascha:passover)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이 유월절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장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집 문설주에 피를 바른 가정을 주께서 “넘어 가셨다”(passing over)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유월절은 자신의 백성을 “강한 손과 편 팔”(신 26:8)로 애굽으로 부터 인도해 내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동을 증거 하는 구속의 절기였다. 구약성경은 유월절의 날자와 시간 및 식사방법 등을 포함한 경축방법들을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출 12, 민 9, 신 16, 대하 35 참조).

그런데 초대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절기 때에 주의 만찬을 주관하셨다는 사실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그것은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강조할 뿐만 아니라(고전 5:7), 주의 만찬을 새로운 계약의 중심적인 예식으로서 강조한다.

그 다음에 초대 기독교 예배에 큰 영향을 끼친 두 번째 절기는 바로 “칠칠절”이라고도 불리는 “오순절”이었다. 오순절은 유월절 때 시작된 시간의 순환을 마감하는 때이다. 그것은 수확기가 끝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절기로서, 모든 지역의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이끌어 경축하게 하였다(신 16, 행 2:5 참조).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신 이후(행 1-2장), 초대교인들은 교회의 시작을 오순절 때 생겨난 제도로서 구별하였다.

 

3.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시대의 예배에 대해서 큰 틀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예배는 기독교 예배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시내 산에서의 예배 경험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예배의 가장 근본적인 정의를 가르쳐 준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며, 백성들은 기꺼이 그 예배에 참여하며, 말씀에 동의함으로 응답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예배에서의 만남은 하나님의 인준행위에 의해서 봉인된다.

둘째로, 성막과 성전에서의 예배 경험은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며, 거룩한 공간과 예식들과 직분을 가르쳐 준다.

셋째로, 회당에서의 예배 경험은 신앙의 확인, 기도 그리고 말씀 등을 가르쳐 준다.

넷째로 절기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상시키며, 거룩한 시간 개념을 가르쳐 준다.

 

아무튼 구약시대의 예배는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면면히 그 정신이 초대교회의 예배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구약시대의 예배와 신약시대의 예배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구약의 예배는 출애굽을 중심으로 한 사건들에 뿌리를 박고 있으나, 신약성경의 예배는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 등을 중심으로 한 사건들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엄밀하게 보면, 이것은 차이점이 아니라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출애굽 후의 시내산 사건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결국은 해방과 구속이라고 하는 측면에서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속사적인 면에서 볼 때, 출애굽과 시내산 사건은 모든 죄와 어두움의 세력들로부터의 참 해방과 구속을 주려고 오신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사건을 보여주는 예표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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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yyim Schauss, The Jewish Festivals. New York: Union of American Hebrew Congregations,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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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E. Oesterley, The Jewish Background of the Christian Liturgy. Gloucester: Peter Smith, 1965.

 

 

 

 

 

 

 

 

 

 

 

 

 

 

 

 

 

 

 

 

 

 

 

 

 

 

 

 

 

 

개혁교회와 예배세미나 제 3강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의 예배

 

1. 들어가는 말

초기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 드려지던 예배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들은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를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는 거기에 예배의 기초가 있고, 그 이후의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보존하려고 했던 예배의 원형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가 드린 예배를 살펴보고자 할 때 문제는 그 예배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가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신약성경에는 완전히 단일화한 예배의 상(像)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당시의 예배의 외적인 모습과 그 발전에 대하여 분명한 상을 가지기가 힘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약성경의 여러 가지 파편적인 기록들과 초대교회의 문서들을 통하여 원시 기독교의 예배가 어떤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2. 몸 말

“초기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 드려지던 예배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들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을 물을 때 무엇보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 구성 요소들이 상당히 다양하였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오늘날의 우리의 예배는 그 반대로 초대교회 예배의 다양성을 많이 상실하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성경과 초대 교회의 몇 가지 기록들에 의하여 찾아볼 수 있는 초대교회의 예배의 요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1) 초대교회 예배의 요소들

(1) 설교(행 2:42, 46; 20:7)

제일 먼저 설교이다. 그 당시의 설교가 어떠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행전에 나타난 몇 가지의 예를 근거로 대답할 수 있다. 이 설교들은 무엇보다 구약성서에서부터 현재의 그리스도의 사건에 이르기까지의 구속사를 추적하려는 관심을 볼 수 있다. 특별히 사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때때로 설교는 예배와 상관없이 건물 밖이나 성전의 바깥 뜰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회당에서의 예배와 관련하여 행해지기도 하였다. 바나바와 바울은 함께 안디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행 15:35), 행전 20:7-11을 보면 바울은 “떡을 뗄 때” 아주 긴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설교를 신약성경 시대에 교회에서 매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설교 없이는 예배가 성립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2) 기도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역시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다락방에 모여서 “모두 하나가 되어 열심히 기도하였다” 오순절 사건 후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행 2:42). 초대교회 교인들은 아마도 다양한 기도를 하고 있었던 듯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할 때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 2:1)고 하였다.

그런데 예배에서의 기도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그들은 의식에서 나온 예식기도가 아니라, 진정 마음속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고전 14:15-16에서 “네가 영으로만 축복하고 마음으로 하지 않는다면,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모든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 바울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구분하면서, 유대의식에서 나온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기도를 할 것을 지적한다. 즉 초대교인들이 드린 기도는 영으로 드린 것이었으며, 기도문의 헛된 암송과 같은 기도가 아니었다.

후에 기도는 그 때 마다의 상황에 맞추어 자유로운 형식으로 드려졌는데, 주로 예언자가 맡아서 했다. “예언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디다케 10장 6절). 그리고 그들은 벌써 이른 시기에 주기도문을 예배드릴 때 외웠던 것 같다. 이것은 얼마 후에 주기도문 뒤에 송영(Doxology)이 첨가된 점에서도 암시되고 있다(디다케 8). Doxology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에 대한 예배 회중의 응답을 나타내는 것이다. 갈라디아 4:6(“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의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과 롬 8: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에 모든 기도가 “아바를 말하는 것”으로 지칭되어 있는 사실도 역시 주기도문(“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을 예배드릴 때 사용했던 사실과 관련이 있다. [클레멘트 첫째 편지] 59-61장에서도 96년경에 사용되던 공중 기도문의 예를 볼 수 있다.(『속사도 교부들』 J.B. 라이트 푸트 편집, 이은선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85-88을 참조할 것)

그러나 가장 오랜 기도문을 보려면, 마라나타(Maranatha)라는 아람어로 보존된 기도문으로 소급할 수 있다. 계시록 마지막에 있는 이 아람어의 헬라어 번역은 마라나타가 “우리 주는 오신다”라는 직설법이 아니라, 명령형의 기도문임을 보여준다. (“이것들을 증거 하신 아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기도문은 고전 16:22절에서도 아람어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디다케](10:6)에도 보면, 이것은 특별히 성찬식과 관련된 식사예식의 마지막에 드려지던 기도문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기도문이 바울의 의하여 헬라어로 번역이 되지 않고, 아람어로 그대로 전수되었다는 사실과 [디다케]가 기록되던 시기에 이르기까지 원형 그대로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오래된 이 기도문이 예배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아무튼 이 기도문은 원시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기도문이기도 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기도가 기독교회의 예배일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날 제자들 앞에 나타나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그리고 그는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을 것”(마 18:20)을 약속하셨다. 그래서 이 약속에 따라 초대 기독교인들은 성찬식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의 다시 오심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즉 마라나타라는 이 기도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제자들 앞에 현현했던 과거의 사실을 지시함과 동시에, 공동체의 식사 예식에 그리스도가 임재 하는 현재의 사실을 지시하며, 더 나아가서는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난 미래의 사실도 지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마라나타]는 무엇보다 먼저 성찬식의 기도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초대교회의 예배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였던 성만찬을 살펴보자.

(3) 성만찬

우선 초대교회에서 행하여지던 가장 오래된 형태의 주의 만찬은 실제적인 식사의 상황에서 행하여졌다. (“네가 배부른 후에” 디다케 10.1) 이 점에 있어서는 모두가 다 일치한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주의 만찬을 말할 때에 일상적인 식사를 뜻하는 “떡을 먹는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떡을 뗀다”고 표현한 사실은 그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일상적 식사를 함과 동시에 특별한 의미의 의식을 거행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가장 오래된 주의 만찬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든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관련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식사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식사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충만한 기쁨”이 넘쳤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주의 만찬은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연유되었다기 보다는,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 함께 식사했던 일들에 대한 기억에 의하여 시작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24:36에 의하면 부활주일에 열 한 제자는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하였으며, 그 바로 전에도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도상에서 두 제자와 함께 떡을 뗀 일이 있다. 그런데 누가 24:36에 보면 요한 21:12 하반 절에서와 같이,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위하여 차린 식사는 물고기로 차린 식사였다. 이것은 후대에 와서 성찬식에 물고기의 상징이 관련된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아무튼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초대 기독교의 주의 만찬의 의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부활주일에 제자들의 식사에 나타났던 일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부활한 그리스도의 처음 몇 번의 현현이 제자들의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것이라면, 초대 공동체의 성찬의식은 이러한 부활 이후에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의 공동식사를 회상했던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공동식사에서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가 약속했던 메시야적 식사(Messianic Meal, Banquet)가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앞당겨 거행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부활한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의 공동식사에 대한 기억과 부활사상이 얼마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행전 10:40-41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결국 이 말은 이런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리스도를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시고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다. 그 분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증인으로 미리 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성찬식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기쁨”을 가졌던 이유는, 이 의식이 한편으로는 부활사상과 연결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예수가 현재 영으로 임재하고 있는 공동체의 성찬의식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식사와, 앞으로 기대되는 종말론적 식사 사이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식사 자리에 모인 공동체 가운데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메시야적 식사에서 있을 그리스도의 도래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부활 이후에 있었던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의 공동식사를 회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시 기독교인들이 부활한 그리스도가 성찬식에 임재 한다는 사상을 강조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일을 예배일로 정한 사실과 일치하며, 또한 마라나타 기도의 핵심적인 의미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찬식을 가리켜 “주님의 성찬”(고전 11:20)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연유한 것이다.

한편 고린도 전서 11장에서 바울은 성찬식의 기원이 예수의 지상 생애 마지막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에로 소급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그릇된 성찬식 습관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강조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가 부활한 후에 제자들이 다시 식사 자리에 모였던 것은 바로 그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기 위해서였고, 또한 그곳에 부활한 그리스도가 나타났던 것이므로, 지상의 예수가 제자들과 가졌던 최후의 만찬이 기독교 공동체의 성찬식을 출발시킨 원래적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마지막 만찬 때의 예수의 말씀 가운데도 메시야적 성찬사상("내가 그것을 새로이 먹을 때까지")과 새로운 공동체의 계약 사상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공동체의 계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성찬식에 있어서의 이 모든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성립되었다는 생각은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성찬식에 있어서 부활의 요소가 너무 강조되는 바람에 완전히 뒤로 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예수의 마지막 만찬이 성찬식의 기원임을 고린도서에서 그렇게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원시 공동체의 성찬식이 지니고 있던 나머지 두 요소, 즉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도래라는 요소와 현재에 이미 그리스도가 성찬식에 임재 한다는 요소를 간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1장 26절에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성찬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포해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 10장 16절에서는 교회와 동일시된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과의 연합이 현재 성찬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말하였다. “우리가 그 떡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떡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성찬식에 임재함으로써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하나가 된다고 하는 사상은 오늘날의 성찬식에 있어서 너무 소홀히 되고 있지만(교제로서의 성만찬), 디다케의 기도문에 보면 이 사상이 유대교의 기도문의 예를 따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이 부서진 빵이 산 위에 흩어졌으되 다시 모아지고 하나가 된 것 같이, 당신의 교회도 세계 각처로부터 모여서 당신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소서”(9:4)

그 밖에 디다케는 성찬식을 아직 예수의 마지막 만찬과 죽음에 연결시키지 않았던 바울 이전 원시 공동체의 성찬식 유형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요소가 성찬식에 들어와 영속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바울이 초대 기독교의 성찬식을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로 소급시킨 결과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성찬식이 발전해 가는 가운데 오히려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는 성찬식과 예수의 죽음과의 관련성이 일방적으로 강조되었고, 원시 공동체의 성찬식이 지니고 있었던 부활과,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식사와, 부활한 그리스도의 미래적 도래와의 관련성은 상실된 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 한국교회에서 있어서 아주 심각한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현재 BEM(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문서에서 지적하는 바,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의 의미 등을 잃어버리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혹은 기억)으로서의 성만찬의 의미만이 강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성만찬의 분위기가 마치 장례식 분위기 같이 너무나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의 개념은 전혀 보이지를 않고 있다. 기쁨과 감사로서의 성만찬의 의미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오로지 엄숙과 수난, 죽음 등만을 기억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만을 기억하고 있지, 부활하신 주님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디다케에 의하면 우리는 가장 오랜 성찬식의 여러 구성 요소들 가운데 성찬식 기도 외에 다른 요소들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에 디다케 9장 5절에 보면, 마라나타로 끝맺는 기도를 드리기 전에 먼저 이런 요구를 말하도록 되어 있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사람들 이외에 어느 누구도 성찬식의 빵과 잔을 들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에 관하여 주님이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4) 죄의 고백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서 있는 예배하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용서와 임재를 간구하는 고백의 기도는 구약에서부터 발견하게 되는 소중한 순서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장면(사 6:5)은 바로 고백의 기도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베드로가 주님을 뵈었을 때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고백과 주님의 용서, 그리고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는 모습은 다 죄의 고백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예물을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는 말씀도 죄의 고백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다. 초대 교회의 문헌 중에서는 디다케 14장 1절에 보면 초대 교인들은 성찬을 먹기 전에 죄의 고백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5) 평화의 (거룩한) 입맞춤(Kiss of Peace)

또한 초대 교인들은 성찬을 들기 전에 형제와 다툰 사람은 화해를 한 후에야 성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마지막 절에서 가장 오랜 성찬식 제의의 단편을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제물을 드리기 전에 화해해야 한다는 마태복음 5장 23절과 관련된 디다케의 이런 요구가 실제로 실행되던 관례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의 마지막 부분에도 이와 비슷한 요구가 마라나타 기도 앞에 놓여 있다. 즉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 앞에 20절에 언급되어 있는 “거룩한 입맞춤”이라는 제의적 관습은 신약성서의 다른 곳(롬 16:16, 고전 16:20, 살전 5:26, 고후 13:12, 벧전 5:14)에도 나타나는 하나의 확립된 제의적 관습으로서, 이것도 역시 원시 공동체의 성찬식 제의에서 연유된 것이 확실하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찬식의 기도에 따라 그리스도가 실제로 그들 가운데 나타나도록 하기 위하여 성찬식을 베풀기 전에 먼저 완전한 형제애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6) 계시

바울은 초대 교회의 예배를 말하는 가운데 고전 14장 26절(“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에서 찬송, 계시, 방언 그리고 방언의 해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계시”라는 것은 29절(“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과 32절(“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언자들의 예언”을 의미한다. 이 예언은 “로고스 소피아스”(지혜의 말씀), “그노시오스”(지식, 고전 12:8)에 근거한 것, 즉 말씀에 관한 지적인 해설이 아니라, “아포칼루피스”(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즉 특별한 영감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가르침이나 설교와는 구별된다. 이렇게 초대교회에는 설교 이외에도 성령에 의존하여 완전히 자유롭게 선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바울은 이러한 자유로운 선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공동체에게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고전 14:29, 살전 5:19-21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디다케도 역시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하도록 요구하고 있다(11-13장)

 

(7) 방언

방언은 초대교회 당시 예배 참석자의 자발적인 활동 형태였고, 초대교회 안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한편 방언이란 것은 정상적인 이해력으로는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없고, 발음이 불분명하게 나오는 소리로서 예배드릴 때 이러한 방언을 말하는 것에 관하여 바울은 한층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당부하였다(고전 14장 27-28절 “누가 방언으로 말할 때에는 둘 또는 많아야 셋이서 말하되, 차례로 말하고, 한 사람은 통역을 하십시오. 만일 통역할 사람이 없거든, 교회에서는 침묵하고, 자기에게와 하나님께 말하십시오”). 예배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방언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있거나, 순서를 지켜서 질서 있게 방언을 말하여 그것이 예배 모임의 목적, 즉 교회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경우, 바울은 예배 모임에서 이러한 자유로운 성령의 활동을 일종의 특수한 기도형식으로서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방언을 말하지 말도록 금지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본 대로 초대교회 예배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예배의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형식에도 구속되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운 영적 표현도 이와 함께 병립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 성시와 찬송가(Psalmen und Hymnen)

성시와 찬송가를 예배에서 사용하는 것은 유대교로부터 전해 받은 의식으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만들어지기도 하고 또는 일정한 형식으로 고정되어 예배 때마다 반복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전 14장 26절 이외에도 골 3장 16절(“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며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과 엡 5장 19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등을 들 수 있다.

시편 133편이 불려진 사실을 우리는 터툴리안의 글[De jejunio, 13]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부는 유대교의 노래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고,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이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찬송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 5:9; 5:12-13; 12:10-12; 19:1-2; 19:6) 특히 요한 계시록에 보존되어 있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원시 기독교 예배 찬송가들의 [바 솔로몬의 노래](Oden Salomos)라는 것도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플리니(Pliny)의 편지에 보면, 기독교인들이 해뜨기 전에 “마치 하나님에게 하듯이 그리스도에게 불러 드리는 노래”를 서로 번갈아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예배에 관계된 플리니의 서신의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조사한 그리스도인들의 위법과 잘못이란 정해진 날 해뜨기 전에 정규적으로 모 여 신이신 그리스도에게 노래를 번 갈아서 부른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저러한 죄를 짓 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둑질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약속을 꼭 지키며, 그들에게 맡겨진 것들의 위임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언약으로서 그들 스스로를 결속한 사실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습관이란 공동 식사를 함께 나누기 위 해 모이고 헤어지는 일뿐이며 평범하고 순결한 사건들뿐이다.”

 

아무튼 초대교회는 예배 때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여기서 “시”는 회당예배에서 사용하였던 구약의 시편을 가리킨다. “찬미”(hymns) 역시 “시”와 비슷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찬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신령한 노래들로서(spiritual songs) 성령의 감화에 의해 불려졌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노래하는 것”과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는 것”이라는 표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전자는 찬양의 외적인 표현을 의미하며, 후자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결국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찬양이란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성령님의 감화 감동 안에서 자발적으로 드리는 노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9) 신앙고백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 하였도다”(딤전 6:12)라고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9:13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고백”이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으며, 히브리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에 관한 말을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원시 기독교 예배에서는 신앙고백이 낭송되었으리라는 것이 어느 정도 확실하게 가정할 수 있다. 호모로게인(고백하다)나 엑소모로게이스타이(고백하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느니라”)라는 동사는 마라나타가 주님의 재림을 간구하듯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내용의 고백과 관련된 동사이다.

물론 이런 말들이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예배 시간에 어떤 명문화된 신조(creed)를 습관적으로 암송한 것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드릴 때에 주님께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한꺼번에 고백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약성서와 그 밖의 초기 기독교 문서들에도 주님에 대한 이런 고백이 보다 상세한 진술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때만 해도 아직 고정된 신앙 고백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대의 신앙고백 공식 문에서 공통되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10) 축복 공식문

신약성서에는 많은 축복 공식문들이 있다. 이들이 상투적인 형식과 엄숙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원시 공동체의 예배모임에서 사용된 것이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서신의 첫머리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구세주 우리 주님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축복 공식문은 예배의식에 있어서 예배를 시작할 때 말하는 도입형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신의 끝부분에 있는 “우리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마음에 내리기를 빕니다”(갈 6:18; 빌 4:23) 또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은총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고전 16:23) 또는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내리기를 빕니다”(계 22:21), 또는 예배의식 면에서 볼 때, 보다 완벽한 삼중적 형식을 갖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고후 13:13)라는 축복 공식문은 곧 이어서 실제로 떡을 떼는 순서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1) 송영(Doxology)

신약성서의 각 책의 끝이나 그 안에는 수많은 송영이 나타나 있는데, 이것도 예배의식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송영들은 유대교에서 전해 받은 것이다. 특히 바울의 서신에서 우리는 이러한 송영들을 대단히 많이 볼 수 있다.

이들은 “유로게토스”(축복받다)로 시작되거나,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5)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고후 11:31)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딤후 4:18)

 

또는 “독사”(영광)으로 시작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갈 1:5),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빌 4:20).

 

(12) 성경봉독

우리는 특별히 바울의 서신들 안에서 예배의식과 관련된 구절들이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울이 그의 서신을 쓸 때 마음속으로 예배를 위하여 모인 공동체를 생각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바울은 그의 서신이 예배의 회중 앞에서 읽혀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서신 안에 예배의식의 공식문을 미리 적어 넣은 것이다.

바울의 서신들에 있어서 끝 부분의 결구 형식들은 고대의 성찬식 첫머리에서 사용되던 형식들과 일치된다.[참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고전 16:23)] 그 이유는 바울이 자신의 서신이 읽혀진 다음에 곧 이어서 성찬식이 거행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끝 부분에 그의 편지를 모든 형제들에게 읽어줄 것을 당부하면서(“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살전 5:27), 그 뒤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살전 5:28)라는 성찬식의 시작을 알리는 도입 부분을 첨가한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그의 편지를 낭독하도록 부탁하였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골 4:16) 바울은 딤전 4:13에서도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격려하는 일과 더불어 회중에게 그의 편지를 읽어주도록 권고하였다.

한편 원시 기독교의 예배에서는 이미 이른 시기부터 기독교 문헌뿐만 아니라, 구약성서도 읽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장 분명한 증언은 순교자 저스틴의 변증론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저스틴은 예배에 관하여 서술하면서 “태양의 축일이라 불리는 날(일요일)에 여러 도시와 지방에 사는 이들이 일정한 곳에 모인다. 이 때 사도들의 서간이나 선지자들의 말씀을 시간이 허락하는 데까지 읽는다. 낭독자가 읽기를 마치면 그 집회의 인도자는 성경 말씀을 강론하고 그 말씀들을 실천하도록 권면한다”고 쓰고 있다. 그가 말하는 예언자들의 글이라는 것은 구약성서의 문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서의 낭독은 유대교 회당에서 행하던 예배의식의 한 순서이지만,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적어도 사도들의 편지를 읽는 일에 우선권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모였을 때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는 것도 예배의 중요한 순서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3) 회중의 “아멘”

예배의식에서 사용하는 “아멘”도 유대교의 예배의식에서 가져온 것으로서, 고린도 전서 14장 16절(“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에서 볼 수 있듯이 예배 회중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예배의식은 일반적으로 대단히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었고, 예배의식에 쓰이는 공식문들도 경직화된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모든 회중이 예배의식에 참여하였다. 요한 계시록에도 보면 네 마리의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멘”을 말하고 있고, 순교자 저스틴도 예배에 관한 서술에서 온 회중이 아멘을 말함으로써 인도자의 기도에 동참한다고 언급하였다.(“...강론하고 그 말씀들을 실천하도록 권면한다. 그 후에 우리는 모두 일어서서 함께 기도를 드리고, 기도가 끝난 후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떡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온다. 이 때 집례자는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모든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플리니(Pliny)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는 기독교의 교송도 역시 예배의 회중이 모두 예배의식에 참여하였다는 증거이다.

 

(14) 세례

초대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역시 초보적인 단계의 세례의식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행하여졌다는 증거가 있다. 행전 8장 36절(“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과 10장 47절(“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11장 17절(“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데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에 보면 “코류에인”(방해하다)이라는 동사가 상투적인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세례 받을 사람이 세례를 베푸는 사람 앞에 섰을 때 의례적으로 묻는 “티 코유에이”(세례를 주지 못하도록) 무엇이 방해하는가? 라는 예배 의식적 질문에 관한 확실한 증거로 보인다. 즉 이 질문의 내용은 “갑이라는 사람이 세례를 받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는가?”라는 뜻으로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 묻기도 하고, 또는 세례 받을 사람이 “내가 세례를 받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습니까?” 라고 스스로 묻기도 하였다. 행전 8장 37절에 의하면(서방사본에만 있고, 우리 성경에는 없음),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믿는다면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세례 받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그리스도에 대한 짤막한 신앙고백을 하였다. 그 이전에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세례를 받았었다.(갈 3:27; 고전 1:13; 행 2:38; 8:16; 10:48; 19:5)

한편 디다케에는 이런 의식 이외에 세례집행에 관한 외적인 절차가 규정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흐르는 물”에서 주도록 되어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다른 물”에서, 또 필요에 따라서는 따뜻한 물로, 그리고 불가피한 경우에는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세례를 베풀었다.

 

(15) 봉헌(Offering)

신약성경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자신들의 소중한 물질을 모아 성도들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도록 하는 순서를 주일에 이행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고전 16:1-2)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연보(collection)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인들을 구제하는 데 쓰였는데, 이것은 로마서 15:26에 다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 8장과 9장에서 물질을 바치는 문제의 소중한 원칙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연보의 순서에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않도록 부탁한다. 바울은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는 해석과 함께 인간들의 단순한 구제행위로서 끝나는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하여 바쳐져야 할 성도들의 당연한 봉헌적 행위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사상은 바로 초대 교회의 예전 가운데 봉헌의 순서로 빈궁한 성도들을 위하여 물질을 드리는 순서를 먼저 가졌고, 이어서 성례전을 위한 성물(빵과 포도주)을 바치는 예전을 이루었다. 아무튼 이 봉헌의 순서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초대교회의 봉헌은 어떤 법의 규정에 따라 세금이나 십일조를 내는 것과 같은 아니라, 받은 바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진정 기꺼운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2)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 예배의 모습 개괄

사실 초대교회가 위에서 언급한 15개의 항목을 모든 예배에서 전부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며 또한 알 길도 없다. 그리고 어떤 원칙에 따라 그들이 예배순서에 위의 순서들을 넣었는지도 알 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위의 내용들이 어느 정도 들어간 예배의 순서라면 그 결과 예배는 결코 짧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신약성경 시대의 예배가 간단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신약성경 시대의 예배는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데, 첫째로, 그 예배는 말씀을 중심으로 한 회당예배와 성만찬을 중심으로 한 다락방 예전이 연합된 모습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속에 포함되는 중요한 예배의 요소들은 설교를 포함한 성경봉독과 해석, 그리고 기도(문), 찬양, 성만찬 예식 등이다. 이것들은 신약성경 시대의 초대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불변하고” “영원하며” “지속적이고 중요한” 요소들로 불리워지며, 기독교 예배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그 예배는 예배드리는 자들의 자유로운 참여, 애찬, 그리고 방언과 같은 순서들로 이루어진 자발적인 특징이 있는 예배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요소들은 초대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불안정하고” “단명하며” “일시적이고 비영속적인” 예배의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윌리엄 멕스웰은 그의 책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에서 지금까지 본 신약성경과 그 밖의 초대교회 문서들을 종합하여 1세기 말의 기독교 예배를 다음과 같은 순서를 만들었다.

 

1부: 회당예배를 계승하여 발전하게 된 순서

성경낭독(딤전 4:13; 살전 5:27; 골 4:15)

시편과 찬송(고전 14:26; 엡 5:19; 골 3:16)

기도(행전 2:42; 딤전 2:1-2)와 회중의 아멘(고전 14:16)

설교 또는 강론(고전 14:26; 행 20:7)

신앙고백(고전 15:1-4; 딤전 6:12)

헌금(고전 16:1-2; 고후 9:10-13; 롬 15:26)

 

2부: 다락방 예배: 주님의 만찬(고전 10:16; 11:23; 마 26:26-28; 막 14:22-24;

눅 22:19-20)

봉헌기도

*감사(눅 22:19; 고전 11:23; 14:16; 딤전 2:1)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회상(행 2:42; 눅 22:19; 고전 11:23, 25, 26)

*중보기도(요한 17장)

*주기도문 암송(마 6:9-13; 눅 11:2-4)

찬송

평화의 입맞춤(롬 16:16; 고전 16:20; 살전 5:26; 벧전 5:14)

 

아무튼 이러한 신약성경 시대의 예배는 애찬과 성만찬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떡을 뗀다고 부르는 예배형태가 그리스도인이 함께 모여 예배 드린 유일한 예배형태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때 방언 등을 통한 예배참여자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예배학자들은 신약성경 시대의 초대교회 예배가 회당예배와 같이 비교적 안정되고 고정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모든 교인들이 참여하는 비교적 자유로운 예배형태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특별히 신약성경 시대의 예배는 성령님의 역사에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이를 통한 교인들이 열정주의는 찬양, 기도, 봉헌, 설교, 그리고 이와 관련된 다른 모든 순서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주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에는 “자발성” (spontaneity)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며, 자신이 원하는 때와 장소에 자신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역사하는 성령님을 온전히 맞이한 영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신약성경 시대의 예배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경직된 예배와 반대되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예배

(2) 제사예배와 반대되는 기도예배

(3) 제사장적 예배와 반대되는 예배자들이 참여하는 예배

(4) 의식적(예전적) 예배와 반대되는 설교예배

(5) 외형적, 형식적 예배와 반대되는 영적, 감동적, 내적인 예배

(6) 너무 신비적인 예배와 반대되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예배

그러므로 오늘날의 예배도 신약 성경적 의미에서 완전히 기독교적이고, 살아 움직이게 되기 위해서는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순서들에 자발성이 가미되어야 하며, 특별히 성령님의 역사에 활짝 열어 그 분이 주관적으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한다.

 

3) 초대교회의 예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초대교회의 문헌들(주후 약 2세기까지)

다음의 초대교회 문서들은 주후 2세기까지의 기독교 예배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헌들이다.

(1)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가 A.D. 96년 경에 고린도에 보낸 첫 번째 편지

그의 서신은 예전에 관한 문서는 아니고 하나의 권면을 기록하고 있으나, 초대기독교 예전(1세기 말)에 관련된 내용들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기도에 대한 엄숙한 내용이 나타나고 있으며, 거룩송(the Sanctus “거룩, 거룩, 거룩, 만군의 주여,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영광으로 가득하나이다”)과, 봉헌(oblation)의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후에 주의 성만찬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를 일컫는 전문용어로 사용되지만, 당시 기독교 초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헌금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2) A.D. 112년경 소아시아 비디니아(Bithynia)의 총독이었던 플리니(Pliny)가 로마 황제 트라얀(Trajan)에게 보낸 편지

플리니는 기독교인 아니었으므로 외부에서 관망하는 입장에서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의식에 대해서 보고하고 있다. 이 서신은 초대교회의 두 가지 의식(rite)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러한 의식은 어떤 정해진 날, 즉 매주 일요일(Sunday)에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다. 첫째 의식은 “해뜨기 전에”(before daybreak) 있었는데, 이 때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응답형식 또는 교송으로 찬양을 드리고, 성만찬 예전을 통하여 죄악을 삼갈 것을 맹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공동으로 흠 없는 식사를 들었는데, 이것이 두 번째 의식이다. 이 서신에 의하면 초대교인들은 아침예배 때는 성만찬을 나누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저녁 예배 때에는 별로 특기할 만한 사항이 없다.

 

(3) A.D. 9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디다케(Didache)라고 불리우는 [열 두 사도의 교훈집]

이것은 흔히 [열두 사도의 교훈집]으로 알려져 있는 문서인데, 속사도시대의 기독교인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에는 성만찬과 애찬(Agape)이 함께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떡보다 잔을 먼저 든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또한 수요일과 금요일은 금식일(fast day)이요, 일요일에 정규적으로 모여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이 문서에는 초대교회가 행했던 여러 가지 목회에 관한 내용들도 기록되어 있다. 즉 종교적인 교훈과, 애찬을 집전하는 방법, 훈련에 대한 지침, 지도자들의 임무, 경계할 것에 대한 훈계 등을 16장으로 다루고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세례를 베풀 때에 [디다케]는 세례水에 대해서 상세한 내용을 제공한다. 즉 흐르는 물이 좋으며, 차거운 물이 바람직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머리에 세 번 물을 부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흥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때까지 초대교인들은 애찬과 주의 만찬을 함께 지켰으며, 기독교인들은 “매주 주의 날”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였고, 짤막한 감사기도 몇 가지와 기도 후 “예언자”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감사”할 수 있었다는 등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4) A. D. 140년경에 순교자 저스틴(Justin)이 로마의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에게 보낸 [제 1 변증서](First Apology)

그의 변증서는 당시 로마에서 행해졌던 일요일 예배에 관하여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당시의 예배에 관한 개략적인 윤곽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당시의 예배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많은 예배학자들은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예배순서가 사도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예배라고 생각한다. 그는 일요일에 거행되던 정규 예배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한다.

“태양의 축일이라 불리는 날(일요일)에 여러 도시와 지방에 사는 이들이 일정한 곳에 모인다. 이 때 사도들은 서간이나 선지자들의 말씀을 시간이 허락하는 데까지 읽는다. 낭독자가 읽기를 마치면 그 집회의 인도자는 성경 말씀을 강론하고 그 말씀들을 실천하도록 권면한다. 그 후에 우리는 모두 일어서서 함께 기도를 드리고, 기도가 끝난 후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떡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온다.”

“기도가 있은 후 우리는 서로 형제의 입맞춤을 나누며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는 빵과 물과 섞은 포도주를 집례자에게 드린다. 그는 그것을 받아서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부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 그가 기도와 감사를 마치면 모든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아멘’은 히브리어로 ‘그대로 되어지이다’는 뜻이다.” “집례자가 감사 기도를 드리고 온 회중이 아멘을 한 후에, 부제(deacon)라고 불리는 이들이 축복한 빵과 물을 섞은 포도주를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예배에 참석치 못한 사람들에게는 집으로 보내준다. 이 음식을 성체성사(eucharist)라고 부르는데, 진리의 가르침을 받고 믿는 사람과 죄의 사함과 중생을 얻은 사람, 그리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사람만 참예할 수 있다.”

저스틴의 변증서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기독교의 예배드리는 날이 매 주의 첫째 날(일요일)이었음을 밝히는 것인데, 이는 창조와 주님의 부활을 기리는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한다.

“대중이 함께 모이는 날은 주일인데, 그 날이 주의 첫째 날이며, 그날 하나님이 세상과 빛을 지으셨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5) A.D. 200년경에 기록된 로마의 히폴리투스에 의해 편집된 [The Apostolic Tradition](사도전승)

이는 헬라어로 만들어진 문서인데, 원본은 찾을 수 없으며, 현재는 에디오피아 번역본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예배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서에 대해서 몇 명의 예배학자들은 이것이 번역본이기 때문에 해석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특별히 이 문서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성만찬 시 감독이 봉헌을 하면서 드리는 성찬기도(Consecration Prayer)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성만찬 대감사기도(The Great Prayer of Thanksgiving)로 알려져 있으며(한국교회에서는 이 기도를 잃어버림)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하는 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나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사 구세주요, 구속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신(Messenger)이 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나이다. 하나님은 그를 하늘로부터 보내시사 동정녀로 잉태케 하시며, 성육신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 주셨나이다. 성령을 통해 동정녀에게 잉태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로 고난을 당하게 하시므로 고통 중에 있는 백성들을 구하셨나이다.”

 

[참고문헌]

남 호, 『초대 기독교 예배』서울: 대한기독교 감리회 홍보출판국, 2001.

오스카 쿨만, 『원시기독교 예배』 이선희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4.

윌리엄 멕스웰,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8.

제임스 화이트, 『예배의 역사』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7.

페르디난드 한, 『원시 기독교 예배사』 진연섭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C.F.D. Moule, Worship in the New Testament. Richmond: John Knox Press, 1961.

Cyril D. Richardson, ed. Early Christian Fathers.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78.

Henry Bettenson, ed.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47.

Lucien Deiss, C.S.Sp. Springtime of the Liturgy.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79.

Paul Bradshaw, Early Christian Worship.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6.

Ralph P. Martin, Worship in the Early Church.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4.

 

 

 

 

 

 

 

 

 

 

 

 

 

 

 

 

 

개혁교회와 예배 세미나 제 4강

 

속사도 시대의 예배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앞에서 사도들의 예배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사도들은 복음이 장으로서의 성전과 회당예배에 참여하였고, 결과적으로 초기 기독교의 예배는 유대주의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사도들의 시대가 지나간 후에 속사도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독교 고유의 예배는 점차로 정착되어 갔으며 발전되어 갔다. 속사도 시대는 보통 주후 60년에서 100년 넘어 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물론 연대를 이렇게 정확하게 나누는 것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대체로 속사도시대란 사도들의 활동이 끝난 후부터 약 50여 년간의 기간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은 초대교회가 매우 활발하게 형성되던 시기였다. 이 때쯤에는 교회의 선교활동이 로마제국의 거의 전역과 그 너머까지 확장되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확장과 더불어 이교도 집단의 형성에 의한 도전도 시작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자신을 보다 분명하게 밝혀야 하는 외부적인 압박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작업은 신앙적인 문헌들의 수집(복음서와 서신들)과 보다 정돈되고 보다 구체적인 교회조직(딤전 3:1-13), 신앙고백적인 진술들의 형성(딤전 3:16; 고전 15:3-5 등), 그리고 훨씬 발전된 예배의식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기독교 예배의 정착과 발전이 이루어져 갔던 시기를 공부하고자 하는데, 그 첫 번째 부분으로서 속사도시대의 예배를 알아보자.

 

2. 몸 말

1) 속사도 시대의 예배를 알려주는 문헌들

사도들의 활동이 끝난 이후 약 50년간에 걸친 속사도 시대의 예전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찾을 길은 사실은 없다. 이 시대의 정황은 네로 황제가 주후 63년 7월의 로마 대화제 사건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고 대대적인 살해와 박해를 가하던 잔인무도한 시기였다. 교인들이 어느 곳에 머물러 차분히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겨를도 찾기 힘든 험악한 시기가 바로 이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인 형편이 이해되어질 때, 이 시대가 왜 예배에 대한 기록을 충분히 남기지 못했을까 에 대한 대답을 알게 된다.

일찍이 웨스털리(W.O.E. Oesterly)는 그의 유명한 [기독교 예배의 유대적 배경](The Jewish Background of the Christian Worship. Gloucester: Peter Smith, 1965)이라는 책에서 “기독교의 자료를 찾기 위한 우리의 지식을 총동원해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찾기는 아주 막막할 뿐이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시대의 예배에 관한 연구는 누구나 확실성을 가지고 서술하는데 매우 힘이 든다. 그러므로 오직 유대인들의 예배와 사도들의 예배에 관한 기록과 2세기의 문헌 가운데 조금씩 나타난 기록과 연관지어서 이 시대의 예배를 탐구하게 된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시대의 예배를 조금씩이나마 언급한 너무나 소중한 문헌들이 근래에 와서 발견되었기에, 예배의 역사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이 시기의 예배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초대교회의 문헌들은 이미 지난 시간에 소개한 바 있는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의 서신], 로마의 트라얀(Trajan) 황제 때에 비시니아(Bithynia)의 총독을 지내었던 [플리니(Pliny)의 서신], 그리고 흔히 열두 사도의 가르침으로 알려진 초대교회의 예배와 목회분야에 매우 소중한 문헌인 [디다케(Didache)] 등이다.

 

2) 예배의 내용들

이상의 삼대 초기 문헌들은 속사도 시대의 교회가 예배하는 공동체로 어떻게 살았으며, 그 신앙상태가 어떠하였는지는 밝히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박해로 얼룩진 시대상을 말하듯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에 의하여 남겨진 공식적인 예배 지침서들은 찾기가 힘들다. 그러나 위의 문헌 가운데 나타난 다음의 자료들은 기독교 예배의 맥을 찾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위의 세 가지 문헌들이 속사도 시대의 초대 교회 예배를 가르쳐 주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들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한다.

제일 먼저,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바 있는 서신(Letter to the Corinthinas)이다. 이 서신은 본래 예배에 관한 것이 아니고, 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 있는 기도에서 우리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기도의 내용과 수준을 알 수 있게 된다.(59장-61장). 이 기도는 로마교회의 예배 기도로 여겨진다. 여기서 그들은 비록 박해의 어려움 속에서 인정받지 못한 존재들로 이름 없이 살아갔지만,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존재들로서 보호가 있을 것을 확신하는 신앙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기도 속에서 그들은 지도자들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온 만물의 창조자시여! 이 세상에서 선택되어 인침 받은 이들을 보호하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부르셨나이다. ....우리의 심령의 눈을 여시사 하나님을 보게 하소서....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인간들의 모사를 흩으시며,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강한 자를 꺾으시는

주여,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소서.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구하시고, 낮은 자들

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넘어진 자를 일으켜 주시고, 곤궁한 자들에게 함께 하시며,

죄인들을 치유하시고, 주의 길을 벗어난 자들이 다시 돌아오게 하소서.

굶주린 자들을 먹여 주시고, 옥에 갇힌 자들을 구하여 주시고, 병든 자를 치료

하시며, 낙심한 자를 위로 하시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

이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이요,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양떼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오,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의 잘못과 불의함과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진리로 우리를 정하게 하시고,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소서....

주여, 이 땅의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지도자들을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따라 세우셨사오니, 우리로 하여금 그들에게 복종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도록 하소서...그들을 권고하사 평화롭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행사하게 하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요, 영혼의 보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세세

무궁토록 영광과 권세가 있어지이다. 아멘”

 

둘째는, 디다케에서 보여준 성찬 성례전은 매우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음을 다음의 기록에서 보게 된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이들이 아니면, 아무도 여러분의 성찬 예식에 참여하여

먹지도 마시지도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은 개들에게 주지 마시오’라고”(디다케 9-10장)

 

셋째는, 디다케에서는 성찬 성례전에서 받게 될 성물을 앞에 놓고 드려야 할 감사기도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잔에 대하여)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다윗의 거룩한 포도에 대하여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영원하소서”

“(떡에 대하여)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생명과 지식에 대하여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영원하소서

산들에 흩어져 있던 낱알들이 모여 한 덩이 떡을 만들 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땅끝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함께 모이도록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가 영원하소서”

 

넷째는 디다케는 잔과 떡을 다 받아 든 다음에 드려야 할 감사의 기도를 제시하고 있다.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인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종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신 지식과

믿음과 영생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영원하소서.....

오! 주여, 하나님의 교회를 기억하시사, 모든 악으로부터 건지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전케 하소서. 또한 성결케 된 하나님의 교회를 불러모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나라에 이르게 하소서. 세세토록 영광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이들은 주님의 살과 보혈을 받은 다음에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는 주역들로 스스로를 다짐하는 종말론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여기서는 지금의 낡은 세상은 사라져 버리고 새 세상의 은총만이 올 것을 부르짖고 있다.

 

“은총이 오고 이 세상은 물러가라!

다윗의 하나님 호산나!

어느 누구도 거룩하면 오고,

거룩하지 못하면 회개하라.

마라나타

아멘.”

 

여섯째는, 세례 성례전은 매우 신중한 준비를 갖춘 후에 주도록 하였음을 디다케에서는 밝히고 있다.

 

“세례 전에 집례자와 수세자는 미리 단식하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도 할 수 있으면 미리 단식하시오.

집례자는 수세자에게 하루나 이틀 전에 단식하라고 명하시오.”

 

일곱째로, 비두니아(Bithynia)의 총독이었던 플리니의 서신은 초대교회 예배에서의 찬양의 모습(교송)을 보여준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위하여 모일 때 무엇을 하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신이 발견한 사항을 기술하였는데, 특별히 그는 기독교인들이 찬양하는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보고 한다

 

“...그들은 어느 일정한 날 날이 밝기 전에 모여서 그리스도라는 신에게 응답형식 또는 교송으로 찬양을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덟째로, 플리니의 서신은 기독교인들이 예배 시간에 일종의 서약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어떠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고, 절도나 강도, 간음 등을 삼가겠다고 서약함으로써 굳게 결속되어 있어서 자신들의 약속을 거기거나 기부금을 요청받을 때 거절하는 일이 없습니다”라고 보고 하였다. 이 서약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예배학자들은 그것이 “죄의 고백”에 해당되는 순서였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를 들어 예배학자 융만(Joseph Jungmann)은 그것이 “주일의 죄의 고백에 해당하는 양식”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그것이 아마도 십계명의 낭송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플리니는 초대교회가 모일 때마다 가지고 있던 공동식사, 즉 Agape meal에 대해서 보고한다. 그는 말하기를 “...그들은 헤어졌다가 식사를 위하여 다시 모이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통상적인 일이어서 해롭지는 않습니다...”라고 한다. 플리니가 “통상적”이고 “해롭지 않다”는 표현을 한 것으로 보아 그가 그 식사에 대하여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식사가 곧 온 교회가 함께 하던 공동식사, 즉 아가페 식사였다.

이 아가페 식사는 가장 초기의 예배경험에 그 기원을 둔 기독교인들의 공동식사였다. 이에 대해서는 디다케 문서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누가는 이 식사를 행전 2:46에서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묘사하였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초대교회에서 원래 주의 만찬은 아가페 식사의 맥락에서 경축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주의 만찬과 공동식사는 점차 분리되었다. 그리고 플리니의 서신은 이 둘이 이미 분리되어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3) 남겨준 교훈들

속 사도시대라고 일컬었던 이 시대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다. 네로의 박해와 함께 사도들이 순교의 제물로 사라져 가고, 예배는 성전이나 회당에서 공공연하게 드릴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자기 신분의 노출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행위에 속하였다. 사회로부터의 소외와 박해의 시련은 예배를 통하여 새롭게 위로를 받았다. 부활하신 주님이 성체를 받는 감격은 한 주간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충분히 달랠 수 있었고, 또 한 주간을 주님께 소망을 두면서 나갈 수 있었다. 이 때의 예배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거대한 충전을 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하기에 이 시대가 넘겨준 교훈들은 실로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먼저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일요일은 주님의 날, 즉 작은 부활일(little Easter)로 정하고, 그 정한 날에 철저한 예배생활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실천은 지금까지 유대교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부활하신 주님만을 섬기는 기독교 예배의 뿌리를 활착시켰다.

둘째로, 그들은 사도들이 남긴 예배의 유산을 최대한 계승해 나갔었다. 비록 시대적인 여건이 박해의 연속이었고, 지하교회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주일 새벽과 저녁을 이용하여 예배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였다. 이 예배에서 성만찬 성례전을 거룩하게 준수하였고, 이러한 예배에서 그들의 신앙은 더욱 공고히 되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신의 생명을 걸고 받게 된 세례 성례전은 매우 철저히 실천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책임과 의무를 다짐하였다. 이러한 결단의 사건을 위하여 집례자나 수세 후보자가 모두 금식을 하고 준비한 모습은 현대교회가 시급히 따라가야 할 교훈임에 틀림이 없다.

넷째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 생활이 철저하게 이어져 나갔었다. 비록 주님의 기도를 비롯하여 기록되어진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를 계속했더라도 그 정신과 실천은 현대의 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다섯째로, 이 때의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진실된 사역자들을 발견하면 “그들을 마치 주님처럼 받아드리라”(디다케 11장)는 명령을 준수하였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계 역시 늦추지 아니함으로 진리의 수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신성한 예배의 행위는 주일에 국한하여 단 1회적인 행사로 끝나지 아니하고, 수요일과 금요일을 금식일로 정하고(디다케 8장)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실천적 신앙을 키우면서 기도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지켜 나갔다.

 

3. 나가는 말

진실로 속사도시대의 교인들의 신앙생활과 예배는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박해로 얼룩진 그 시대에 교인들은 더욱 열심히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를 노력하였고, 기도생활과 성찬을 통하여 항상 주님과 깊이 교제하는 그런 예배하는 공동체였다. 그리고 이 시기의 교회는 성찬을 통하여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는 그런 복된 교회였다. 아마도 오늘 현대교회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예배의 모습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참고 문헌]

 

남호, 『초대 기독교 예배』서울: 감리회 홍보출판국, 2001.

정양모 역주,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케)』서울:분도출판사, 1993.

Clement of Rome, “Clement's First Letter” in Early Christian Fathers, Cyril C. Richardson, ed.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78, pp. 33-42.

Pliny the Younger, “Christians in Bithynia” in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Henry Bettenson, ed.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47. pp. 5-7.

W.O.E. Oesterly, The Jewish Background of the Christian Worship. Gloucester: Peter Smith, 1965.

개혁교회와 예배 세미나 제 5강

 

순교의 터 위에서 자란 2세기의 예배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앞서 속사도시대의 초대교인들의 신앙생활과 예배드리는 모습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그 시기는 어쩌면 가장 본래적인 초대교회 예배공동체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 박해 당하는 상황 속에서 오히려 매주일 드리는 작은 부활주일 예배를 통하여, 그리고 그 예배에서 주어지는 성찬의 은혜를 통하여 힘과 용기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 시대를 넘어서서 2세기로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 2세기의 예배 역시 오늘 현대교회들이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예배의 원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시기의 예배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된 것은 한 순교자의 공헌이 크다. 그는 바로 저 유명한 순교자 저스틴(Justin)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변증문에서 2세기의 초대교회 공동체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몸 말

1) 순교자 저스틴의 변증문과 예배

저스틴은 제 2세기의 희랍 변증신학자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인정된다. 그는 마음에 철학을 항상 안고 다니면서 지적인 방황을 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이다. 그는 100년경에 성경에 나오는 세겜 땅에서 출생하여 기독교 진리에 대한 수많은 글을 남긴바 있다. 그는 좋지 못한 종교와 전통을 버리고 진리만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기독교의 기수로 살다가 165년에 순교한다.

그런데 그가 140년경에 로마의 황제 안토니우스 파이어스(Antonius Pius)에게 보낸 변증문은 기독교의 고대문헌으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오늘까지 인정받고 있다. 그가 남긴 제 1 변증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을 보고 정죄하는 로마의 정책에 조용한 설득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의 세계를 좀더 정확히 파악하여 줄 것을 차원 높은 변증적 논리로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매주일 갖는 예배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성의 껏 그 실체를 기록하고 있다. 비록 예배의 순서를 질서 정연하게 순서별로 기록하지 않고, 윤곽만을 언급하고 있으나, 당시의 예배에 대한 분명한 개념과 내용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우리는 이 변증서가 사도 바울이 순교한지 7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기록된 것이기에 사도들의 예배와 단절됨이 없이 예배의 형태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특별히 그 시대에 로마에서 일고 있던 미드라교(Mithraism)에 대항한 그의 변증은 이교도로부터 기독교의 고유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철저하게 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당시의 미드라교는 로마 제국에서 가장 번성한 종교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세례의식과 떡과 술을 드는 의식이 기독교의 세례와 성찬 성례전과 유사한 인상을 남기면서 잘못 이해되어 질 때, 그는 기독교의 성례전의 진리를 뚜렷이 부각시키는 작업을 펼치는데 땀을 흘렸다.

그의 변증문은 2세기의 예배에 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거의 유일하게 당시의 예배를 풍부하게 말해주는 자료가 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2세기의 기독교 예배가 얼마나 건재했는지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예배의 내용을 자세하게 연구할 수 있게 된다.

 

2) 예배에 관한 저스틴의 변증문 내용

그의 변증문은 전체가 68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61장에서 67장까지가 예배와 관련된 부분이다. 그 내용은 61-64장은 세례식에 관하여, 65-66장은 성찬식에 관하여, 그리고 67장은 주일의 준수에 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저스틴은 이곳에서 세례와 성찬식을 기독교 예배의 기본적인 요소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두 가지 경우의 성찬식을 서술하고 있는데, 하나는 세례식 후에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상적인 주일 예배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성찬식의 윤곽은 (1) 사도들의 글이나 예언서를 읽음 (2) 말씀 읽은 것에 대한 인도자의 담화 (3) 일어서서 드리는 공동기도 (4) 평화의 키스 (5) 떡과 포도주, 그리고 (세례의 경우) 물을 바침 (6) 인도자에 의한 기도와 감사, 그리고 회중의 “아멘”으로 응답 (7) 집사가 감사가 드려진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예배의 순서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모임(Gathering)> 말씀 낭독(Reading)> 설교(Preaching)> 공동 기도(Common Prayer) 또는 중보기도(Intercessary Prayer)> 평화의 키스(Kiss of Peace)> 드림/봉헌(Presentation of Bread and Wine)> 감사(Great Thanksgiving)> 분병 분잔(Distribution and Reception of Eucharistic Gifts)> 결석자에게 분배(Extended Distribution of the Absent).

 

저스틴은 이러한 주일 예배의 순서를 다음과 같이 서술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태양의 축일이라 불리는 날(주일을 말함)에 여러 도시와 지방에 사는 이들이 일정한 곳에 모인다. 이 때 사도들의 서간이나 선지자들의 말씀을 시간이 허락하는 데까지 읽는다. 낭독자가 읽기를 마치면 그 집회의 인도자는 성경 말씀을 강론하고 그 말씀들을 실천하도록 권면한다. 그 후에 우리는 모두 일어서서 함께 기도를 드리고, 기도가 끝난 후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떡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온다.”

“이 때 집례자는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그리고는 성물(떡과 포도주)을 각 자에게 분배하고, 참석치 못한 사람들은 부제가 집으로 가져다 준다”

“기도가 있은 후 우리는 서로 형제의 입맞춤을 나누며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는 빵과 물을 섞은 포도주를 집례자에게 드린다. 그는 그것을 받아서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부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 그가 기도와 감사를 마치면 모든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아멘’은 히브리어로 ‘그대로 되어지이다’는 뜻이다.”

“집례자가 감사 기도를 드리고 온 회중이 아멘을 한 후에, 부제(deacon)라고 불리는 이들이 축복한 빵과 물을 섞은 포도주를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예배에 참석치 못한 사람들에게는 집으로 보내준다. 이 음식을 성체성사(eucharist)라고 부르는데, 진리의 가르침을 받고 믿는 사람과 죄의 사함과 중생을 얻은 사람, 그리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사람만 참예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의 빵과 포도주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육신이 되시고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주신 그의 살과 피로 여긴다. 그러므로 기도로 축복하고 그것이 변화되어 우리의 살과 피에 영양을 공급하는 이 음식물은 성육신하신 예수의 살과 피인 것이다”

 

“여유도 있고 뜻이 있는 사람은 자유의사에 따라 헌금하고 헌금은 대표자가 보관하며, 고아나 과부, 가난한 사람들, 죄수, 외국에서 온 사람 등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도록 되어 있다. 대중이 함께 모이는 날은 주일인데, 그 날이 주의 첫째 날이며, 그날 하나님이 세상과 빛을 지으셨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

3) 저스틴이 서술한 예배의 의미

(1)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모이는 시간에 대한 문제이다. 박해의 칼날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정규적으로 모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날을 철저히 준수하였음을 다음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태양의 축일이라 불리는 날에 여러 도시와 지방에 사는 이들이 일정한 장소에 모인다...

회중이 함께 모이는 날은 주일인데, 그 날이 주의 첫째 날이며, 그 날 하나님이 세상과

밭을 지으셨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한 주간의 삶은 곧 이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예배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생명력을 잃게 되는 것이기에 이 예배를 위하여 주님의 날에 모이는 것은 생명을 건 신앙의 실천이었다.

 

(2) 둘째로, 예배 공동체에 들어오게 되는 새 신자들은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의식을 거치도록 하였다. 먼저 그들은 교리와 윤리적 실천을 점검 받았다. 그런 다음에 물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자신들이 받았던 데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이 때 이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 씻음을 받은 세례를 받게 되고, 그 후에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함을 받게 되었다.

 

(3) 셋째로, 저스틴은 이들이 모이는 데로 “사도들의 서간이나 선지자들의 말씀을 시간이 허락하는 데까지 읽는다. 낭독자가 읽기를 마치면 그 집회의 인도자는 성경말씀을 강론하고 그 말씀들을 실천하도록 권면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알고 그 말씀을 경청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때는 성경봉독은 한 두절이 아니라, 시간이 허락하는 한 충분히 읽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단순한 말씀의 낭독이 아니라, 그 말씀을 풀어주고 삶의 장에 적용시키는 일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정성을 기울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4) 넷째로, 이 예배시간에 그들은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헌금을 하였다. 자신들이 받은 복된 사연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마음과 신앙을 이웃에 나누어 주고자 하는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뚜렷하게 입증되고 있다. 저스틴은 이러한 취지로 드려진 물질은 대표자에 의하여 보관되었다가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나 나그네들이나 옥에 갇힌 자들을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유도 있고, 뜻이 있는 사람은 자유의사에 따라 헌금한다. 이 헌금은 대표자에게

보관되며, 고아나 과부, 병이나 다른 이유로 물질이 필요한 자들, 감옥에 있는 사람들,

외국에서 온 나그네들을 돌보는 자로서 이 물질을 사용한다.”

 

(5) 다섯째로, 성찬 성례전에 참여하기 전에 그들은 성도의 교제를 반갑게 갖는 순서를 가졌다. 이 때의 다시 만남이란 매우 큰 의미를 서로가 가지고 있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서로를 만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가졌던 인사들이었기에, “우리는 서로가 입맞춤으로 인사를 나눈다”는 기록은 매우 깊은 의미를 오늘의 우리들에게 더해주고 있다.

 

(6) 여섯째로, 성찬 성례전에 사용된 빵과 포도주는 일반적인 보통 음식과 같은 것이 될 수 없고, 이것이 봉헌되어지고 기도가 있어진 다음에는 주님의 살과 피가 된다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고수하는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의 빵과 포도주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육신이 되시고,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주신 그의 살과 피로 여긴다. 그러므로 기도로 축사하고 그것이 변화되어 우리의

살과 피에 영향을 공급하는 이 음식물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살과 피이다”

 

(7) 일곱째로, 앞에서 언급한 이 성물(Elements)을 받게 되는 귀한 성찬예식에 참예할 수 있는 자격에 관하여 저스틴은 분명하게 언급을 하였다. 여기서 그는 성체성사에는 “우리가 가르치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세례 받고 죄 용서함 받고 거듭난 사람들,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분명히 영접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참여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성찬예식에 참여함은 주님의 사람으로 자신들의 생명을 다하여 충성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고유한 특권이며 주님 주신 명령의 준행이라는 사상을 확고히 하고 있다.

 

(8) 여덟째로, 저스틴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예배의 핵심이 되는 성찬 성례전을 집례하는데 혼돈을 가져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 집례의 순서를 설명해 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9) 아홉 번째로, 모진 박해 속에서 언제 순교의 장으로 끌려 갈지 알 수 없었던 그 시대이기에 저스틴은 예배의 장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장소면 어디도 좋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예배의 장소는 각 자가 선택한데로 모인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장소 때문에

마음이 정결해지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그의 존재는

하늘과 땅, 믿는 이들이 예배하는 곳, 그에게 영광을 드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득하게 계신다”

 

3) 제 2세기의 예배 순서

이 시대의 예배에 깊은 관심을 갖는 사람마다 저스틴의 변증서에 대하여 무한한 고마음을 갖게 된다. 그 이유는 어느 기록에서도 이 시대의 예배를 저스틴처럼 상세하게 서술한 것을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실린 제 2세기의 예배의 순서는 저스틴이 만든 것이 아니다. 개신교의 예배역사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막대한 공헌을 한 바 있는 윌리암 맥스웰(William Maxwell)이 저스틴의 변증서를 보고 재구성한 예배의 순서를 여기 다시 한번 소개한다. 이 예배의 순서는 바로 이어지는 3,4세기의 예배를 이해하는데 매우 필요한 과정이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the Word)

 

성경봉독(Lections)예언서, 서신서, 복음서

권면(또는 설교)

기도(연도-Litany)

시편송과 찬송

 

다락방 예전(The Liturgy of the Upper Room)

 

평화의 인사(입맞춤)

봉헌구제헌금 포함

성찬 기도

감사기도하나님의 창조 섭리 구속에 대하여

성물봉헌

축성기도(에피클레시스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

중보기도(Intercession)

아멘(회중)

성체분할

배찬

폐회

 

3. 나가는 말

이상과 같이 정리된 순서는 사도시대와 1세기의 예배를 추적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이 순서에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예배가 말씀의 예전성찬의 예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성물을 앞에 놓고 드리는 축성기도(에피클레이시스)에서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고 있는 순서이다. 이 기도가 있어진 다음에 성물이 그리스도의 몸과 살로 변화된다는 교리는 지금까지 동서방교회가 신봉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성체분할은 떡을 떼고 잔을 붓는 순서로서 주님이 하셨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부분이다. 후에 칼빈은 이 순서를 성찬예식의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가르친 바 있다.

 

 

 

 

개혁교회와 예배세미나 제 6강

 

감격과 소망 가운데서 성숙한 3-4세기의 예배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앞에서 순교자 저스틴의 변증문을 통하여 2세기의 예배의 내용이 어떠했나에 대하여 공부를 하였다. 순교의 터 위에서 자란 2세기의 예배는 오늘 모든 현대교회들이 회복하고자 하는 예배의 본래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예배였다. 우리는 저스틴의 기록에 근거하여 초대교인들이 모이던 시간과 장소 그리고 예배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2세기의 예배의 이런 구체적인 모습들은 이제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3,4세기의 예배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예배는 감격과 소망 가운데서 더욱 성숙한 예배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3,4세기의 예배를 공부하는 것은 오늘 예배의 회복을 추구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예배를 위하여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2. 몸 말

1) 지하에서 발전을 거듭한 예배

로마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에서 기독교는 3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단한 길을 멈추지 못하였다. 박해와 이교도들의 공격은 기독교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 때의 그리스도인들은 155년 폴리캅의 순교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순교의 제물로 사라지는 현장을 보면서 그날 그날을 지탱하여 왔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극심한 박해의 칼날 앞에서 위축된 신앙이 아니라, 더욱 굳은 신앙으로 승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승화된 신앙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에서 확인되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오늘의 수난을 딛고 일어서는 날 언제인가 승리의 그날을 하나님이 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기도는 뜨거웠고, 찬송은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그것도 화려한 성전이 아닌 비밀의 장소에서 행해졌다.

이 때의 예배를 말해주는 문헌은 매우 제한적이다. 앞에서 공부한 디다케와 클레멘트의 서신은 3세기 이전까지의 예배를 추적하는데 주요한 자료였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될 때까지의 기록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박해의 극치가 모든 예배와 기록의 활동을 지하로 잠기게 했던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이 때에 발견되어지는 몇 안 되는 문헌은 3세기 초 로마의 유명한 저술가였던 히폴리투스(Hippolytus)가 남긴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220년경)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저자가 자기의 지식에 따라 저술한 것이 아니라, 기존 교회에서 이미 행해지고 있던 것을 주로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예배의 실상과 역사를 알아보기에 매우 유용한 자료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본 문헌은 예배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 내용은 세례와 성찬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제도와 신자생활의 규범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 그 외에 3세기 초반의 북시리아에서 유래한 「사도들의 교훈」(Didascalia)(230년경)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220년 경에 죽음)와 오리겐(Origen, 251년에 죽음)의 저술 속에서도 이 시기의 예배에 대한 파편적인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자료는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이며, 여기에는 예배에 대한 서술을 중심하여 몇 가지의 변화하는 모습들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1) 첫째, 2세기의 순교자 저스틴의 [변증문]에서는 성찬성례전을 집례하는 집례자가 드리는 기도는 기록된 기도에 제한하지 않았다. “자기의 능력을 다하여” 기도할 것을 권한 바 있다. [사도전승]에서도 기도자가 자기 능력에 따라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 오직 정통교리에 맞는 건전한 기도를 바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자는, 앞에서 규정한 바대로, 감사의 (기도를) 바칠 것이다. 앞에서 규정한

기도와 똑같은 기도를 바칠 필요는 없으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암기하여

바치도록 힘써야 하겠지만, 각자는 자기 능력에 따라 기도할 것이다. 만일 누가

충분히 (길게) 그리고 성대하게 기도를 바칠 능력이 있으면 좋은 일이다. 만일

누군가 기도를 바칠 때, 정도에 맞게 기도한다면, 그를 저지하지 말고 그가 정통

교리에 맞는 건전한 기도를 바치도록 할 것이다”

 

(2) 둘째, 이 시대는 처음으로 예배의 현장에 찾아 온 사람들에 대하여 철저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먼저 교사들 앞에 인도되어 믿으러 온 동기를 확인하고, 그들의 신분을 파악하는 일을 하였다. 그들의 신분이 조각가는 우상을 만드는 일을 포기하도록 하고, 포주, 배우, 기사, 투사, 사냥군, 우상숭배의 제관들은 자신의 직업을 완전히 그만 두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경우에 한하여 말씀을 듣는 초신자들의 예배 참석을 허용하여 일정한 기간을 보내게 하였다.

 

(3) 셋째, 세례 후보자의 훈련은 매우 철저하게 관리하였고, 세례를 받는 날에 준비는 어느 시대보다 철저히 요구하고 있었다. 초신자로 말씀의 예전에 3년간 참석한 후에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인을 닮아 가는 생활을 계속했는지를 인도자가 증언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례 전에 잡귀를 쫓아내는 축귀식(exorcism)을 갖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례 일에는 몸을 정결하게 하고, 여성의 경우 월경이 있을 때는 다른 날에 세례를 받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세후보자는 전날 밤 철야를 하면서 성경을 읽고 가르침을 받도록 하였다.

 

“그들이 예비자로 있는 동안 성실하게 살았는가? 과부를 공경하였는지? 병자들을

방문했는지? 매일 선행을 실천했는지? 인도자는 증언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행한

사람만이 복음을 듣게 할 것이다.....세례를 받게 될 사람들은 주간 다섯째 날에

목욕하고 씻어야 한다. 월경 중에 있는 여자는 분리되어 다른 날에 세례를 받게

할 것이다. 세례를 받게 될 사람들은 안식일의 준비 일에 단식할 것이며...축사식이

끝나면 그는 그들의 얼굴에 숨을 내쉬고, 그들의 이마와 귀와 코에 십자표시를

한 다음 그들을 일어서게 할 것이다....그들은 밤 내내 성경을 읽고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합당하게 된 사람은 같은 시간에 예물을 바치는 것이 타당하다”

 

(4) 넷째로 [사도전승]에서는 세례의 유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세례수는 디다케에서 가르친대로 생수나 흐르는 물을 사용하되, 불가피한 경우에는 현지에 있는 물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 번의 질문과 대답이 있어질 때마다 한 번씩 물에 잠기도록 하였다. 첫 번째 질문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과 교회의 사도적 전승과 세례와 영생을 믿는가의 질문에 “예, 그렇게 믿습니다”의 대답을 하면 한번 침수 시켰다. 두 번째는, 성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수난과 부활과 재림, 그리고 육신의 부활을 믿는가의 질문에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두 번째 침수를 시켰다. 세 번째는, 성령과 성 교회와 육신의 부활을 믿는지의 질문에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세 번째의 침수를 시키는 형태를 가르치고 있다.

물에서 나오면 집례자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성유를 바릅니다” 하면서 집례자의 손에 기름을 붓고 수세자의 머리에 안수하면서 “전능하신 주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성유를 그대에게 바르노라”하였다. 그리고 집례자가 이마에 십자가 표시를 하고 입맞춤을 하면서 “주께서 당신과 함께” 하면 수세자는 “또한 사제와 함께”를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5) 다섯째,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생활은 이 시대에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박해시대의 신앙이란 기도 속에서 아픔을 이기고 소망을 갖게 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신학자였던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은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하루에 3시, 6시, 9시의 세 번씩의 기도를 드리고 거기에 더하여 새벽과 황혼의 기도를 선호한 바 있었다.

사도전승에서도 사도들의 가르침대로의 시간대 기도의 내용까지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하였다. 오전 9시 기도에는 주님이 못 박히신 시간이므로 그리스도의 살과 보혈이 바쳐지는 것을 생각하면서 거기에 연관된 기도를 하도록 하였다. 정오의 기도에는 십자가에 달려 온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신 주님의 본을 받는 기도를 하였다. 오후 3시에는 주님이 물과 피를 흘리시면서 돌아가신 주님의 죽음을 통해 구원받은 의인들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모습을 본받아 기도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을 닭이 우는 시간으로 정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새벽기도회의 뿌리가 이미 이러한 기도의 역사와 그 맥을 함께 하고 있음이 입증된다.

 

“남녀 모든 신자들은 아침에 잠에서 일어나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기 손을 씻고

하나님께 기도한 다음 자기 일을 하러 가도록 하라.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일이 있으면, 가르치는 사람을 통하여 자기가 듣고 있는 분은 바로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그곳에 가는 쪽을 택하도록 하라....

가르치는 사람을 통해 성령께서 너에게 전해 주시는 것들에서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모든 이는 영이 꽃피게 되는 곳인 교회에 가는 데에 열성을 다할

것이다....수 닭이 우는 시간에 일어나 기도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리

스도를 부인하였는데, 우리는 믿음으로 그 분을 알아보았으며, 죽은 이들이 부활

할 때에 있을 영원한 빛에 대한 희망을 갖고 이 날을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6) 여섯 번째로, 성찬 성례전에 참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이 철저히 관리되었던 예배였다. 지금의 일부 교회에서는 성찬 성례전에 세례교인의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경우들이 발생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가 질서 잡아가던 2세기 이후에는 세례교인이 아니면, 성만찬을 나눌 수 없다는 관례가 철저히 준수되었다. 특별히 240년에 죽은 터툴리안의 경우는 성찬예전이 시작이 되면 세례교인만 한 방에 모이도록 하여 참여의 자격을 엄격히 규정하였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3세기 예배에 빠르게 영향을 미쳐 공식적인 관례로 채택되었다.

 

(7) 일곱째로, 성찬성례전의 특별한 부분들의 시도와 정착이 나타나고 있다.

세례를 받고 새롭게 들어온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빵과 포도주의 성물 외에 젖과 꿀과 물을 받게 하였다. 이 때의 젖과 꿀은 이집트를 벗어나 약속된 땅을 찾아 나선 것의 의미를 수세자들에게 부여한 것이었다. 즉 죄의 속박으로 얼룩진 세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들어오게 된 것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물은 세례성례전의 은혜를 다시 음미하게 한 것이었다. 이 때의 성찬 성례전의 장면을 다음의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감독자는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이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이다. 감독자가

빵을 나누어서 그 조각을 각 사람에게 주면서, ‘이것은 천상의 빵인 예수 그리

스도의 몸입니다’라고 말하면, 받아 모시는 사람은 ‘아멘’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그들에게 주고, 그 다음 젖을 주고 그

다음 꿀을 줄 것이다. (포도주) 잔을 주면서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라고 말하면, 받아 모시는 이는 ‘아멘’하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끝나면

각자는 온갖 선행을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바르게 생활하며, 교회를

위해 열성적이며, 배운 바를 행하며, 신심을 향상시키는 데에 전력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핍박 속에서 신앙을 지키던 지하시절의 기독교 예배는 어느 시대보다 철저하였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면, 이들은 예전의 제반 행위의 엄숙한 이행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실천적인 삶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박해라는 수난의 세월동안 이들이 직면한 것은 예배자체의 순서나 내용보다는 예배를 드려야 할 장소의 문제였다. 이들은 기독교가 자유를 얻고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 예배의 처소는 가정집이나 채석장 사갱, 토굴, 카타콤 등 외떨어진 야외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에서 드린 예배였기에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배의 열정과 정신은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것이었다.

 

2) 3-4세기의 예배 순서

250년에서 350년간의 약 100년간은 많은 박해 속에서 신앙을 이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의 ‘비밀집단’으로 행동하면서 신변안전과 믿음의 고유성을 지켰고, 예배생활을 계속하였다. 이 때에 가졌던 예배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터툴리안과 같은 지도자에 의하며 수찬 자격을 엄격히 구분하였다는 점이다. 즉 엄격한 심사와 훈련과정을 거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성찬 성례전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래서 초신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말씀의 예전에만 참석하고 부제의 지시에 따라 밖으로 나가 해산하였다. 이러한 절차가 있은 다음에 입교인들만 남아서 다음에 이어지는 성찬 성례전에 계속하여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토록 예배하는 무리들까지 선별하면서 드렸던 이들의 예배 형태를 맥스웰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예배를 위한 인사

인사(Salutation)

집례자: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혹은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여러분과 함께‘

회중: ‘또한 사제(목사)와 함께’

 

말씀의 예전

성경봉독(Lections): 율법서, 예언서, 사도행전, 복음서, 서신서

시편송(Psalms): 성경봉독 사이 사이에 불려짐

알렐루야(Alleluia)

설교

연도(Litany): 입교자(초신자)를 위하여

자비송(Kyrie):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초신자 해산: 세례 교인만 남게 함

 

성찬 성례전

연도: 신자를 위해(산자와 죽은 자를 위해)

자비송(Kyrie):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평화의 입맞춤(Kiss of Peace)

봉헌: 헌금

성물봉헌

성찬상 준비와 포도주에 물을 섞음

 

마음을 드높이:(Sursum Corda)

집례자: ‘여러분들의 마음을 높이 드십시오’

회 중: ‘우리가 주께로 마음을 드나이다’

집례자: ‘주께 감사를 드립시다’

회 중: ‘이것이 적당하고 올바른 것입니다.’

성찬기도(Consecration Prayer)

예비기원: 창조주의 섭리에 대한 감사와 찬양

삼성송(Sanctus):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천지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나이다.

오, 주여, 하나님께 영광이 있어지이다.

감사기도: 구원에 대한

성찬제정의 말씀(Word of Institution)

회상(재현)의 말씀(Anamnesis)

성령임재를 위한 기도(Epiclesis)

대중보기도(Great Intercession): 중보기도 및 주님의 기도

 

성체분할(Fraction)

거양성체(Elevation)와 배찬(Delivery)

성찬 후 감사기도

부제의 기도(연도)와 사제의 간단한 중보기도

병든 자와 불참자를 위한 성물(떡) 보관(Reservation)

폐회(Dismissal)

 

3) 첨가된 예배순서의 특성들

3-4세기의 예배는 2세기에 있었던 예배와 비교할 때, 예배의 기본 성격과 구조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되어 있는 점에서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의 부분이 첨가되면서 예배의 발전이 시도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 먼저는 봉사자들이 성물을 봉헌하고 거기에 손을 얹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에 가졌던 인사(Salutation)부분이다. 지금의 축복(강복선언)에 해당하는 부분이 예배의 시작에서 먼저 행하여졌다. 그런데 인사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교환되던 인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보아즈는 베들레헴으로부터 와서 수확하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인사하였으며, 그들은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룻 2:4)라고 대답하였다. 이런 인사들은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보편화 되었으며, 이것이 기독교 예배의 시작을 표시하고, 교회의 기도에 선행하는 인사가 되었던 것이다. 3세기의 예배에서 이것이 사용된 것은 그 실제적인 기원이 불명확하다 할지라도, 인사가 이미 2세기 말엽에 교회에서 통용되었음을 증거해 준다. 아무튼 이 순서는 당시의 그리스도인의 만남이 이룩되는 순간마다 서로를 축복하는 관례가 예배 안에 자리잡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둘째는, 마음을 드높이(Sursum Corda)의 순서로서 감사의 정신을 고조시키어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게 하는 순서였다. [사도전승]에는 이 순서는 성물에 집례자가 손을 얹고 감사를 드린 후에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의 인사를 한 후에 이어서 회중과 함께 마음을 드높여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도록 하였다.

 

(3) 셋째는, 삼성송(Sanctus)의 등장이다. 이 순서는 이사야(사 6:3)와 요한(계 4:8)이 환상 가운데 경험한 하나님의 실존을 부르짖음에 근거한 것이다. 클레멘트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이것이 사용된 것을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그 발전 과정을 추적할 수는 없지만, 예배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외치는 이 순서는 3세기의 예배에서는 보편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주의 만찬 동안에 사용되었으며, 특별한 감사의 기도(성찬 기도)의 시작을 표시한다.

 

(4) 넷째는, 사제나 부제가 예배드리는 회중들을 위하여 기도한 후에 회중이 “주여 우리는 불쌍히 여기소서”를 노래하는 “기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이다. 이 순서는 회중들이 그들을 위하여 드려지는 기도에 동참하고 그 간구에 함께 함을 표시하는 응답이었으며 매우 보편화 된 순서로서 이 때에 정착되었다.

 

(5) 다섯째는, 예배에서 사제들에 의하여 드려진 봉헌기도나 또는 일반기도 후에 회중들과 함께 주님이 가르치는 기도를 드리는 순서이다. 이 순서에서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기도의 최고의 모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었다.

(6) 여섯째로,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에 나타난대로 3-4세기의 예배에서는 성찬기도가 완벽하게 내용과 그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가 소개하고 있는 성찬기도는 대략 “여는 대화”(Opening dialogue)> 서언적 기도(Preface):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한 광범위한 감사>성찬 제정사(Word of Institution)> 아남네시스(Anamnesis)> 성령강림의 간구(epiclesis)>영광 찬양(Doxology) 등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7) 그 외에도 시편을 비롯하여, 알렐루야, 사가랴의 축송, 시므온의 노래 등이 예배에서 사용되었다. 그리고 예배 중에 분향하는 순서들이 교회마다 자유롭게 진행되었다. 이 때의 분향은 일반적으로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던 구약의 헌물 사상이 이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3. 나가는 말

이상에서 본 3-4세기의 기독교 예배는 모두가 모진 박해 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의 교회가 유의할 것은 그 환난과 핍박이 기독교의 예배를 움츠려들게 하거나 퇴보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시대보다 깊은 의미와 내용을 담은 예배를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의 예배는 제도권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예배로 이어진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누리게 되는 특권으로서의 예배를 드렸다. 그러하기에 거기에는 감사와 감격이 언제나 수반되었다. 비록 그들이 직면한 환경은 어두웠지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소망 속에 이어진 그들의 예배는 언제나 밝고 엄숙하였다. 그리고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희미한 추상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 속에서 실증되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었고, 그에게 드리는 예배였다.

 

「참고 문헌」

 

남호, 『초대 기독교 예배』서울: 감리회 홍보출판국, 2001.

로버트 웨버, 『예배의 역사와 신학』 정장복 역. 서울: 장로회 총회 출판국, 1988.

윌리엄 멕스웰,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4.

제임스 화이트, 『예배의 역사』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3.

히뽈리뚜스, 『사도전승』 이형우 역. 왜관: 분도출판사, 1992.

페르디난드 한, 『원시 기독교 예배사』 진연섭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Cyril D. Richardson, ed. Early Christian Fathers.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78.

Paul Bradshaw, Early Christian Worship.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6.

Justin the Martyr, "The First Apology", in Early Christian Fathers. Cyril C. Richardson, ed.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78.

Lucien Deiss, C.S.Sp. Springtime of the Liturgy.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79. pp. 87-94.

 

 

 

개혁교회와 예배세미나 제 7강

 

종교 개혁기의 예배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난 시간에 동.서방교회의 예전에 대하여 공부를 하였다. 동.서방 교회의 예전이 어떻게 분리되기 시작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1960년대 초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서방교회의 예배에 대하여 까지 알아보았다. 1960년대에 이르러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개혁을 이루게 된 로마 천주교회는 이 때에 예배에 대하여도 많은 개혁을 이루게 되었다. 한 가지 흥미 있는 것은 종교개혁 당시 개혁가들이 예배에 대하여 부르짖었던 많은 내용들이 바로 이 때에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역사는 종교 개혁가들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에 로마 천주교회에서 이루어졌던 많은 개혁들은, 특별히 예배와 관련하여 이루어졌던 개혁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Counter Reformation이 4세기 만에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당시 개혁이 필요했던 중세교회의 예배는 어떠하였을까? 중세교회의 예배가 어떠하였기에 종교 개혁가들은 그렇게도 개혁을 부르짖게 된 것이었을까?

 

2. 몸 말: 개혁이 필요했던 중세교회의 예배

1) 유산으로 이어져야 할 부분들

1517년의 종교개혁이 있기까지 서방교회로서 존속해온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이다. 개혁교회는 분명히 이들로부터 개혁의 기치를 들고 나온 교회이다. 그러나 한국의 개혁교회들은 가톨릭교회와 무관한 것처럼 주장하면서 이들을 이단시하는 극단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는 곧 기독교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예배의 의식도 개신교 예배의 역사와 내용과 변천에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소중한 줄기임에 틀림이 없다. 비록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나 예배의 의식이 오늘의 개혁교회가 수용할 수 없는 부분들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 하여도, 그러나 개혁의 시점까지 이어온 예배 역사의 뿌리와 함께 개혁교회가 버릴 수 없는 것들 또한 적지 않다.

앞에서 우리는 1054년 기독교가 동 서방교회로 분열된 이후 서방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배의 실상을 공부하였다. 그 가운데서 오늘의 기독교가 새롭게 긍정적인 가치성을 인정해야 할 부분들이 무엇인지 예배신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이들의 예배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여 지극한 경외와 찬양을 드리고 있었다. 오늘의 한국의 개신교회와 같이 회중들의 정서나 감정을 의식하고 예배의 방향이나 내용을 함부로 바꾸며 구성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둘째로, 동. 서방교회가 공히 언제나 그 의식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더욱 빛나게 하는데 주안점으로 두고 순서 하나 하나에 깊은 관심을 두고 진행하였다. 때로는 이러한 열심이 너무 가시적인데 치중하다 보니 우상숭배와 같은 인상을 남기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으나 그 기본 정신은 개혁교회가 따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셋째로, 중세의 수도원 생활에서 보여준 예배의 일상화는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에 밀착된 삶을 살게 하는 중요한 신앙인들의 표준이 되었다. 이러한 신앙형태는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만남이 신실한 신앙을 지키는 최선의 방편임을 가르쳐 주었다.

넷째로, 이들의 예배가 추구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과 대속을 재현하는 노력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매주일 거행되는 성찬 성례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형성되었고 거기서 감사가 우러나오는 신앙이 되고 있었다.

다섯째로, 예배에 사용된 문장들이 고정되어 신선한 부분들이 없이 기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그들의 예배는 언제나 섬세한 준비와 정중한 어휘의 선별을 거쳐 진행되었다. 한 치의 실수가 없도록 하는 진지한 예배의 준비성은 개혁교회가 따를 수 없는 부분들이었다.

끝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일치성을 지켰다. 어느 곳을 가던지 그들의 통일된 예배의식을 통하여 하나의 예배하는 공동체(Worshiping Community)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하나의 교회임을 확인하였다.

 

2) 예배에 대한 불만과 종교개혁

일반적으로 알려진 종교개혁의 시발과 확산은 “구원은 행함에서가 아니라 믿음에서”라는 교리의 주창 때문이라는 단순한 결론을 개신교는 지금껏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적인 논쟁이 전 유럽에 종교개혁의 불길을 그렇게 신속하게 번지게 했다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인 평가이다. 요즈음 들어 로마 천주교회에 대한 개혁이 교리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매주일 드리는 예배에서 싹튼 불만이 바로 개혁의 대열을 강화시켰다는 사실이 새롭게 인정되고 있다. 그 이유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창조가 어느 지도자에 의하여 단순하게 이룩된 것이 아니고 그 지도자와 공감하고 함께 따라주는 교회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교회가 바로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가 느끼는 필요성이 고조되고 합류될 때 진정한 개혁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다음의 말은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서술이다.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한 종교의 여러 양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였다. 왜냐하면 종교의 모든 측면은 신학과 정치형태를 포함하여 예배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배가 저속하게 타락하였던 당시 상황은 개혁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주원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1517년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들기까지는 교회에 예배 이외의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16세기가 시작되면서 교회는 깊은 암흑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성 베드로 사원의 오랜 건축으로 인해 재정이 부족하게 된 로마 교황청은 지역 교회로부터 더 많은 건축 헌금을 모금하기 위해 면죄부 교리를 결정하게 된다. 면죄부를 구입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비록 죽은 자라 할지라도 지상에 있는 가족들이 그를 위해서 면죄부를 구입하면 연옥에 있던 가족들이 천국으로 올라가게 된다고 가르쳤다. 거기에 더하여 성직 세계의 부패는 극도에 달하였다. 이러한 예배 외적인 문제는 교회가 직면한 시급한 개혁의 과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멕스웰은 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그 때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16세기 초에 서방 교회의 성만찬 의식이 하나의 극적인 구경거리로

전락되고, 그 절정을 영성체의 시간에 두기 보다는 화체의 순간에 두었으며,

거양성체(elevation)에 있어서도 미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숭배하게 되는 것을

보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들리지 않게 말하면서 의식이 진행되고, 지나치게

화려하고 장식된 의식, 그리고 정교하고 수준 높은 음악 등은 회중들이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극히 제한하였다. 회중들은 1년에 한번 이상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어려웠다. 설교는 무덤 속으로 퇴락하고, 대부분의 교구 신부들은

설교를 하기에는 너무 무식하였다. 성경이 봉독되어져야 할 부분이 성자들의

생활담이나 전설로 채워졌고, 성경은 예배자들의 모국어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미사의 헌금과 면죄부의 구입은 성직 매매와 착취의 근원이 되었다. 따라서 종교

개혁은 시급하고도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 교회의 예배 안에서 개혁이 가장 시급했던 부분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예배의 언어를 들 수 있다. 예배의 공용어가 모두 라틴어로 되어있어서 회중들은 듣기는 들어도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한 결과는 회중은 단순한 관객의 역할을 감수 할뿐 예배의 진지한 내용과 동화되지 못하였다.

둘째는, 어거스틴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 중세의 미사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말씀으로 먹여지고 살지는 지적인 기능이 상실되는 위험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특별히 성경이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 이들은 성경말씀과의 접촉이 단절되어 있었다.

셋째는, 빵과 잔에 성찬기도가 있어진 다음에 그 성물이 성변화를 일으켜 주님의 몸과 피가 된다는 화체설은 성체성사(성찬 성례전)가 신비적인 예전으로 이해되었고,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발생된다는 미신적 신앙이 농후하였다.

넷째는, 성체성사의 신학적 해석이 언제나 고난과 구속에 초점을 둘뿐 부활과 승천을 가져온 대 제사장으로서의 해석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이러한 예전은 순교와 고행과 덕행이 강조되었고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가장 위대한 덕목으로 간주되어 부활의 신앙보다는 고난과 순종이 강조되었다.

다섯째는, 이들의 예전은 사제가 독무대를 이루어 회중의 이해나 관심을 외면하였다. 특별히 그 집례의 위치와 방향은 제단을 향해 서 있어서 낮은 소리로 진행하는 예배내용은 회중들이 들을 수 없고 볼 수도 없었다.

여섯째로, 미사의 기본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희생제사를 드림으로 교회를 이룬다는 측면은 약화되었고, 미사는 사제가 다른 개인들을 위해 드리는 희생제사로서 그 자체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결과 어떤 미사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제사적 행위로 전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곱째로, 고대 교회가 사용하였던 여러 가지의 상징물들과 그림들, 그리고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의 상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중세에 이르러서는 이것들이 모두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어 상징에서 우사숭배의 형태로 변질한 모습이 보편화 되었다.

여덟째로, 1415년 콘스탄틴 회의 이후부터는 시간과 외형적인 번거러움을 구실로 성찬성례전에서 잔은 주지 않고 빵만 돌리는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사제만이 성물을 들고 회중은 구경하는 형식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

끝으로, 고정된 예배서가 개정을 거듭하지 않고 수세기를 지속하여 사용됨으로 언제나 변하지 않은 기도문의 내용과 예배 순서의 답습은 예배의 신선감이 결여되고 기계화된 예배로 전락되었다.

이상과 같이 회중들은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만끽하지 못한 체 수세기 동안 불만과 아픔 속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여야 했다. 소통되지 않은 예배언어, 맹목적인 헌신과 신비의 강조, 미신적인 연출이 가득한 성찬예전, 하나님 말씀의 부재 등등으로 얼룩진 예배의 무질서는 종교개혁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맥스웰은 중세 후기의 교회에 “종교개혁은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이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3) 예배에 대한 개혁가들의 공통분모

개혁자들은 모두가 참된 교회로의 회복을 위한 신학의 정립과 교회의 구조적 개혁을 원했다. 그러나 개혁의 필요성(what)은 함께 느끼면서도 “어떻게”(how)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였다. 일리온 죤스는 개혁자들의 이러한 점에 대해서 그들이 새로운 예배 형태로 개혁하는 임무를 용기 있게 그리고 치밀하게 잘 감당했고, 그로 인해 몇 가지 중요하고 필수적인 개혁들을 이루지만 그 개혁들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통일된 하나의 예전을 만들어 내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기보다는 다양성 있는 개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이로 인해서 다양한 예배 전통이 생성되어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개혁자들이 가졌던 공통 관심사는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되어진다.

첫째로, 중세의 예배에 대한 신학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반복 혹은 재현으로 보는 경향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로마 가톨릭 미사에서는 성찬성례전을 미사의 절대적인 구심점으로 하여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신학에 개혁가들은 모두가 동의하지 않았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예배는 원래부터 말씀의 예전과 성찬 예전이 두 축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켜온 화체설의 문제였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교리로서 봉헌된 성물(빵과 포도주)을 앞에 두고 성령임재를 위한 기도(epiclesis)를 드리면 성물이 성변화를 일으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이다. 더욱이 화체설의 배후에 공적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가들은 반대의 기치를 들고 일어섰다. 그 당시 화체설의 영향을 받은 교인들은 성찬을 받는 사람들의 믿음이 없이도, 심지어는 그것이 회중들에게는 나누어지지 않더라도 집례한 성물을 보기만 해도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셋째로는 개혁자들은 말씀의 선포인 설교의 위치를 초대 교회부터 가지고 있던 본래의 위치로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막중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말씀의 회복을 위하여 성경이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져야 하고 설교가 회중들의 언어로 전달되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넷째로, 개혁가들은 교회의 용어가 라틴어로 고정되어 있는 것에 강한 불만과 반대의 의사를 함께 표현하게 되었다. 성경을 비롯하여 예배나 강론 등이 모두 알지 못하는 언어로 표현되었을 때 진리의 소통이 전혀 이룩될 수 없다는 사실에 모두가 한결같이 반기를 들고 있었다.

다섯째로, 로마 가톨릭의 사제의 위치 문제였다. 모든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구원의 역사에 의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직접 나아 갈 수 있다는 교리에 개혁가들은 호흡을 함께 하였다. 결코 사제를 통하여 고해성사와 같은 과정이 필요하거나 사제가 대신 드려주는 기도에 의하여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개혁가들은 모두가 강조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총론을 함께 펴면서 출발했던 개혁가들은 새롭게 탄생한 하나의 교회를 갖고 싶어 한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거대한 로마 가톨릭의 세력에 대항하여 서로의 힘을 모아 오직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하는 공동체의 출발만을 바라는 것이 개혁가들의 순수한 동기였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교황이라는 절대권아래 일사불란한 통제와 질서가 유지 되었으나 개혁가들은 전체적인 조직이 있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서로가 자신의 주장과 이상을 펼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뜻을 같이한 추종자들과 힘을 합하여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것이 주어진 환경이었다. 개혁가들의 기질은 타협과 화해보다는 자기주장의 관철이 언제나 우선적이었다.

결과적으로 개혁가들은 앞에서 본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론에서는 철저히 자신의 이상을 굽히지 않았다. 특별히 그들은 예배 개혁에 대해서 각기 다른 주장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각기 다른 개혁의 노선을 걷게 된다. 이들이 함께 일치점을 얻을 수 없었던 쟁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예배의 형태에 대한 주장들이었고, 또 하나는 성만찬의 해석 문제였다.

예배 형태에 있어서 개혁자들의 근본적인 불일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배 전통으로부터 연속성, 불연속성에 대한 문제였다. 그 이유는 새롭게 주창된 신학과 교리가 적용되는 현장이 바로 예배였기 때문이었다.

 

3. 나가는 말

이상과 같은 개혁가들의 내용과 방향을 달리한 주장은 결과적으로 교회의 분열이 도처에서 발생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자신들과 견해를 달리하면 언제나 새로운 교회를 이룩하게 되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하나의 몸으로 지속되어 오던 교회는 개혁이라는 이름과 함께 새롭게 떠오르는 교회들이 속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런 상황속에서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나온 개신교회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그 방향을 달리하였는지에 대해서 공부하도록 하자.

 

 

 

 

 

 

 

 

 

 

 

 

 

 

 

 

 

 

 

 

 

 

 

 

 

 

 

 

종교개혁과 예배 세미나 제 8강

 

성경과 전통을 소중히 여긴 루터 계열의 예배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앞서 종교개혁이 근본적으로는 예배의 개혁과 함께 일어난 사건임을 보았다. 그리고 예배와 관련하여 개혁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그리고 개혁가들의 공통분모 등도 살펴보았다. 그러나 결국 개혁가들은 각각의 주장에 의해서 그 길을 달리 하고 말았는데, 그들은 대표적으로 다음의 사람들이었다.

즉 종교개혁시 예전에 관한 입장들은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독일의 루터, 쮜리히의 쯔빙글리, 스트라스부르크의 부처, 제네바의 칼빈 그리고 영국의 크랜머와 존 낙스 등이다. 우리는 앞으로 그들의 기원과 발달과정 그리고 차이점 등과 아울러 오늘의 모습까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제 그 첫 주제로 성경과 전통을 소중히 여긴 루터 계열의 예배에 대하여 알아보자.

 

2. 몸 말

1) 루터의 예배의식

마르틴 루터는 가장 먼저 개혁의 총성을 터뜨렸던 첫 주자였지만 개혁자들 가운데서 가장 온건한 입장에서 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는 예배에 있어서 중세 교회의 미사로부터 어떤 급격한 변화를 원치 않았다. 루터는 기존 교회의 예배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며, 그는 몇 가지 문제되는 현안들에 대해서만 수정하기를 원하였다. 특별히 그가 관심을 두었던 것은 예배는 온 회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자신들의 언어로 집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독일어로 집례 할 수 있는 예식서를 발간하고, 독일 찬송가를 쓰고 작곡했으며,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또한 구원은 선한 행위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통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중세 후기의 예배에서 죽은 자를 위한 미사, 성직자의 독신주의, 순례, 평신도들에게 잔을 허락하지 않은 것, 화체설 등을 반대하면서 새로운 예배 신학을 수정 보완하였다. 그래서 맥스웰의 말대로 루터의 예배 개혁은 창조적인 것(creative)이었다기 보다는 보존하려는 경향(conservative)을 가졌다. 그는 처음부터 예배 형태를 바꾸는 개혁은 계획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루터의 예배에 대한 입장은 상당히 모순된 면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루터는 모든 개신교 예배의 기초를 제공해 주었던 「교회의 바벨론 유수」(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1520년)를 통하여 그의 성만찬 신학에 대한 입장을 피력한바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로마 가톨릭의 성만찬 신학과 제도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하였다. 그는 이 논문에서 자국어로 미사를 드려야 할 것과, 화체설에 대한 반대, 회생제사로서의 미사 반대, 그리고 모든 미사에 성만찬이 있어야 할 것을 선언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그리스도 안에서(in), 그리스도와 함께(with) 나누는 그리스도인들의 친교(fellowship)로 이해했으며, 그는 성찬 성례전을 설교와 함께 예배의 중심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는 1520년 설교를 통하여 주님의 만찬은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매일 집례 되어져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는 이런 입장을 수정하여, 성만찬을 보다 자주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 제외하고는 주일에 한번 갖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루터교에서는 주님의 만찬을 매주일 한번 갖는 것이 전통으로 되었다.

그는 성찬 성례전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예전으로서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임재가 ‘실질적으로 임재함’(the Real Presence)을 주장하는 공재설(consubstan- tiation)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재설은 중세의 화체설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으며, 그는 주님의 실재적 임재(the real presence)가 예배자들이 성만찬을 받을 때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성례전은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의 선물(the Mass as a sacrificium)로서가 아니라,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미사(the Mass as a testament)라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1523년과 1526년에는 두 예식서를 발간하는데, 특별히 「독일 미사」는 전적으로 독일어만을 사용하는 예배의 모범을 보여줌으로서 모국어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예전이 되었다. 대체적으로 그 내용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의 대부분을 그대로 보존하려고 하였고, 다만 모국어로 진행하는 예배에 모든 사람들의 참여를 적극 고려한 흔적을 보게 된다.

 

2) 루터의 예배 개혁

위에서 우리는 루터의 개혁의 성격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루터의 예배개혁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정리해보자. 제일 먼저 루터의 예배 개혁에는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루터의 예배개혁들은 학문적인 계획들로 고안된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교구 생활의 현실들에게 나온 것이라는 데 그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한 마디로 루터의 예배개혁의 가장 큰 특징은 목회적이라는 사실이다.

사실상 루터는 새로운 평신도 신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신학은 단순히 예배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교회와 목회와 세상에서의 생활과 경제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중세기는 엄격하게 거룩함을 추구하는 계급 조직 시대로서 성직자를 최정상에 두고, 평신도들은 최하위에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위치한 곳이 어디든지 간에 서로 섬기라는 소명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 신학은 성직자의 위엄을 낮추지 않으면서 평신도를 성직과 종교직에 있는 사람들과 동일한 위치로 상승시켰다.

루터의 이러한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인하여 세례가 새로운 존엄성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는 사람은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으로 옷 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세례의 물 속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이미 성별된 사제와 주교와 교황이라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례에 의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이 되고, 교회와 사회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루터는 신학적으로 만인 제사장설을 중심하면서 신부를 중재자로 한 예배의 구조에 거부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루터에 의하면 예배의 결과는 막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참여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루터의 교회관과 예배에 대한 견해의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리고 이런 이해는 자연스럽게 루터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예배의 방법들에 대한 개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즉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제사장직을 완수하려면 평신도들이 능동적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다음과 같은 분야의 개혁이 있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1) 교회 음악과 찬송가에 대한 루터의 개혁

첫째로, 음악은 모든 사람이 제사장의 사역을 행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루터교의 예배는 본질적으로 음악예배가 되었다. 루터는 예배를 위한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들 중에 하나”로 음악을 간주하였기에 그는 보편화된 회중 찬송의 작곡, 작사에 대단한 열의를 보였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예배에서 음악을 사용하기를 좋아했다.

특별히 예배의 구성 부분으로 대중적인 찬송의 개발은 루터에게 있어 아주 중요했다. 그래서 1523년에 벌써 그는 독일어 찬송들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240여 편의 독일어 찬송을 만들었다. 그는 모두 약 37편의 찬송들을 작사했고, 또한 대게 작곡까지 직접했다. 많은 찬송들은 주로 시편에 의존했다. 그러나 그 찬송들은 힘차고 박력 있는 운문들로 제작되었다.

 

(2) 설교와 예배개혁

그 다음에 루터가 그의 예배 개혁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였던 것은 예배에 있어서의 설교였다. 루터는 말씀의 예전을 회복하여 설교사역을 부활시키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그의 설교들은 직접적으로 성서의 본문들을 다루었던 본문 설교의 형태를 가졌고, 그러면서도 회중들의 상황에 그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잉그베 브릴리오트(Yngve Brilioth)는 [설교의 역사]라는 책에서 “설교의 역사에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루터의 연구는 중요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루터는 설교를 개신교 예배의 필수 부분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은 신령한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해석된 하나님이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모든 예배는 설교를 포함해야 하고, 심지어 결혼식과 같은 공적 행사들에도 설교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이렇게 이론적으로만 설교의 중요성을 부르짖은 것이 아니었다. 예배에서 설교를 향상시키는 데 있어 루터의 중요한 공헌은 그 자신의 모범이었다. 그의 설교는 솔직하고 현실적인 양식으로 성경 본문들을 다루었다. 그의 설교는 부자연스럽게 꾸민 수사학이나 웅변술이 아니라, 평민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였으며,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이끌어 낸 생생한 실례들로 성경의 내용을 생생하게 마음에 그리도록 도와주는데 목표를 삼았다. 그의 설교는 교훈적이라기 보다는 주석적이었다. 그의 설교에 대한 견해가 담겨있는 [탁상담화]에 보면 그는 말하기를 “젊은 신학생들은 히브리어를 공부하여 나중에는 희랍어와 히브리어 단어들을 서로 비교하여 그것들의 특성과 본질과 강조점 등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루터는 설교의 목적은 항상 설교를 통해 회중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회중 즉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회중에게 알게 하는가의 문제였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본문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여 본문에 입각해서 설교하려고 노력하였다.

 

“설교자는 본문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기 앞에 있는 본문에 주의하여 그것을 회중에게

이해시키도록 해야 한다. 입에는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설교자는 마치 시장에 간 어떤

여인을 생각게 해준다. 그녀는 다른 여인을 만나서 멈취서서 잠시 수다를 떨고 또

다른 여인을 만나서 말하고 계속해서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시장에 늦게 도착할 수

밖에 없다. 본문을 떠나서 헤매고 있는 설교자는 꼭 이와 같다.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말해 버리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Table Talk)

 

(3) 성만찬의 횟수에 대한 그의 개혁

루터는 성찬 성례전을 기독교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미 앞에서 지적한대로 성만찬을 매주일 시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물론 루터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개혁이 바로 성만찬의 빈번한 집례였다. 그러나 사실상 이 변화로 인해 평신도들이 제사장의 모습으로 개조되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매주 또는 매일 성찬식을 행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전문적인 성직자들에게만 기대되었던 이 성찬을 모든 평신도들에게 돌려준 것은 진실로 대과업이었다. 그는 평신도들에게 모든 성찬식 때마다 성찬을 받으라는 권면을 하였고,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떡뿐만 아니라 포도주까지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일년에 한번, 대게 부활절에 성찬식을 받던 사람들에게 이것은 분명히 놀랄 만한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4) 모국어의 사용

루터는 처음에는 비록 신중하였으나, 나중에는 말씀을 평신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지 않고는 평신도의 역할을 거의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 미사](Deutche Messe, 1526)에서 예배에서 완전한 자국어 사용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제 예배 전체가 회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참여할 수 있는 언어로 드려지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공적 기도에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1526년부터 대부분의 기도는 교구 교회들의 자국어로 드려짐으로 회중들은 무엇이 말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교회들에서는 기도를 드릴 때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거나 혼자 또는 찬송을 부름으로 참여할 수도 있었다.

 

(5) 세례 신앙

루터의 공헌들 중의 또 한 가지는 “세례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는 “세상에 세례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고 믿었으며, “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아는 지식 가운데 큰 위로를 얻었다. 하나님께서 세례 가운데 하신 약속은 확신의 분명한 구원으로, 평생 동안 매일 일어날 때마다 촉촉이 내려 주심으로 새로워지는 것이었다. 이런 신앙으로 인해 루터는 “죄를 극복해 주고 제거해 주며, 매일 새사람을 강건하게 하고 우리가 이 현대의 비참한 상태를 떠나 영원한 영광으로 옮겨갈 때까지 항상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세례이다”라고 단언하였다. 루터 교인들은 지금도 생활 방식으로 루터의 깊은 세례신앙을 채택하고 있다.

세례 의식에 있어서 그는 어린이에게 입김을 부는 것, 에바다(막 7:34), 두 번 기름을 붓는 것, 촛불을 주는 것과 같은 많은 의식들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십자가 기호를 그리는 것, 루터의 홍수기도(Flood Prayer: 이 기도는 세례라는 사건을 노아의 홍수와 홍해 통과라는 구약성경의 사건들과 연관시킨 것임), 마가복음 10:13-16의 사용(“어린이를 용납하라”), 마귀에 대한 부인, 신조에 대한 질문, 물에 잠그는 것(루터가 선호한 방법), 그리고 흰옷을 주는 것과 같은 많은 과거의 의식들(사실 이런 의식들은 우리가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교회 때부터 시행되었던 요소들이다)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6) 주일과 교회력

루터의 주일에 대한 매주 주기의 강조는 기독론적 사건으로서의 매 주님의 날에 초점을 맞춤으로 강화되었다. 그는 주현일(Epiphany, 1월 6일), 마리아의 수태고지(Annunciation, 3월 25일)과 같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축일들은 기독론적인 차원에 더 큰 강조를 두면서 지속하였다. 성경의 구원 사건들을 강조함으로 성인들의 축일들은 사실상 감소하였고, 따라서 상당히 적은 축일들이 지켜졌다.

 

(7) 기타 성례들에 관한 그의 견해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7성례 중에서 세례와 성만찬 만을 성례로 인정하였다. 그는 먼저 견진(Confirmation)은 성례가 아니라고 하였고, 결혼식도 성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결혼이 “수도원의 생활보다 백 배나 더 신령하지만” 성례는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는 “일반 목회자들을 위한 결혼식순”이라는 그의 의식에 따라 교회 문 앞에서 서로 서약을 했다. 그는 마태 19:6을 덧붙이기도 하였고, 결혼식은 성경을 낭독하고, 설교를 하고, 축도를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교회 안으로 행진해 들어가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또한 성직 수임식 역시 자유롭게 여러 가지 개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종부성사(Extreme unction) 역시 성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장례 의식도 규정하지 않았다. 그는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requiem masses), 철야기도(vigils) 등 인간 대행자에 의해 죽은 사람을 위해 행해지는 일에 초점을 맞춘 행위들을 배제하였다.

 

(8) 기타 내용들

루터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예배를 위한 복장과 이미지, 그리고 중세 교회 미사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것들, 즉 촛불 사용, 제단, 성상들, 십자가, 종 등을 루터는 깊은 의미를 주는 상징물로서 계속해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루터에 의해서 제시되어진 이상과 같은 예배의 개혁은 사실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별히 루터교의 예배는 종교개혁을 통해서라기보다는 18세기와 19세기를 지나면서, 특별히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를 경험하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와 오늘에 이른다.

 

3) 루터의 독일 미사(Deuche Messe, 1526)

특별히 루터의 두 번째 예전인, ‘독일 미사’를 통해서 루터의 예배 예전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입당송과 함께 시작된 예배는 ‘자비의 연도’ (Kyrie eleison), 인사 교환(Salutation)과 짧은 기도(collect), 그리고 서신서 봉독, 찬송(독일 찬송), 복음서 봉독, 사도 신경을 통해서 신앙을 고백하는 동안 성만찬이 준비되어지며, 그 후에는 설교가 따라온다.

이상이 말씀의 예전이었으며, 다락방 예전으로는 주기도문, 권고의 말씀, 성만찬 제정의 말씀과 분병, 분잔, 그리고 찬송을 부르면서 성만찬을 받으며, 성만찬 후 기도와 아론의 축복으로 이어진다. 루터는 성만찬 예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성만찬 제정사에 포함시킴으로서 단순화 시켰고, 성만찬 기도와 그와 관련된 전통적인 요소들을 대폭 감소시켰다. 이러한 기본적인 예배의 틀은 오늘의 루터교 예전으로 발전하였다. 다음은 루터가 과감하게 수정하여 만든 [독일 미사](1526)의 내용이다.

 

말씀의 예전

 

입당송 혹은 독일어 찬송

자비의 연도(Kyrie eleison)

인사와 짧은 기도(collect)

서신서 봉독

독일어 찬송

복음서 봉독

신앙고백/ 사도신경 (이때 성만찬이 준비됨)

설교

 

성찬 성례전

 

주기도 해설

권면

성만찬 재정에 대한 말씀 봉독과 분병과 분잔

성만찬 참여 (찬송하면서)

성만찬 후의 기도

아론의 강복 선언(축도)(민 6:24-26)

(아론의 축복기도를 루터가 선호한 것은 이것이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축복하시면서 사용된 것이라는 약간 무모한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루터가 이것을

소개한 후 이 축복기도는 종교개혁가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4) 오늘날 루터교 예배의 특징들

20세기 중엽부터 세계 곳곳의 루터교 예배에 대변화들이 일어났다. 본질에 있어 이 변화들은 루터주의를 넘어 새로운 교회 일치 시대로의 이동이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제2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로마 천주교회에도 미치게 되었는데, 루터교인들도 로마 천주교회의 새로운 개혁들에 많은 기여를 했다. 특별히 주일의 성경 교독, 다양한 성찬식 기도의 사용, 그리고 개정된 목회자의 의식들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루터교 예술이 융성했던 때였으며, 설교에 있어서도 훨씬 더 주석적인 형식으로 이동되어 가고 있었다. 1978년의 [루터교의 예배서](Lutheran Book of Worship)는 16세기의 의식에 대한 충실성을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예배마다 나타나는 세례에 대한 강조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루터가 매우 자주 나타냈던 세례의 신앙을 반영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 예배서는 루터주의의 범위를 넘어서기도 하는데, 그 중요한 것은 로마 천주교회의 [에큐메니칼 성구집]의 채용이다. 이 성구집은 구약성경의 성구 낭독을 회복시켜 주일 예배에 읽을 세 가지 성구를 제시했다. 공동성구집과 더 빈번한 성찬식 거행과 같은 모습은 다른 개신교들에서도 점점 더 일반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예배의 변화는 예배를 위한 공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성찬대는 벽에서 멀리 옮겨졌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세례반이 보다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찬송 곡목들은 상당히 확장되었다. 주님의 수세주일 또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주일(Christ the King Day)과 같은 교회력의 새로운 절기들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성구집에 따른 설교를 위한 자료들도 제작되었다. 이렇게 루터교의 예배는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최근 몇 년간 크게 변화를 겪어왔다.

 

3. 나가는 말

루터의 예배개혁은 비록 모순점이 있기는 하나, 그는 예배의 정신을 보다 깊고 넓게 하였으며, 회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순서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회중들은 적어도 그들이 예배 가운데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고, 공동의식으로 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성만찬도 바른 위치를 회복하게 되었다. 특별히 루터가 교회의 찬송가(hymnody)에 미친 영향력은 영원히 빛나는 것이라 하겠다.

루터의 추종자들은 그 이후의 예전에 있어서 루터가 만든 것들보다 훨씬 풍부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따라서 루터의 후예들은 루터교 안에 있으면서도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예배의식들을 갖게 되었다. 독일 지역 이외의 루터교회는 예전적으로 볼 때 보다 창조적인 면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은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고 미국의 루터교회 등 세계의 각 지역에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정장복, 주승중 외 공저. 『예배학 사전』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0. pp. 672-675.

정장복. 『예배의 신학』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9. pp. 92-93.

제임스 화이트. 『개신교 예배』 김석한 역.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97. pp.49-89.

. 『예배의 역사』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7. pp.145-200.

윌리엄 맥스웰.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4. pp. 104-112.

Bard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1. pp.95-137.

James White, "Lutheran Worship" in Twenty Centuries of Christian Worship. Robert Webber, ed. Nashville: Star Song Publishing Group, 1994. pp. 75-76.

Gordon Lathrop, Luther: Formula Missae: Order of Mass and Communion for the Church at Wittenberg(1523)" in Twenty Centuries of Christian Worship. Robert Webber, ed. Nashville: Star Song Publishing Group, 1994. pp. 188-195.

Paul Nelson, "Lutheran Worship" in The New Westminster Dictionary of Liturgy & Worship. Paul Bradshaw, e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pp. 293-294.

 

 

 

 

 

 

 

 

 

 

 

 

 

 

 

 

 

 

 

 

종교개혁과 예배 세미나 제 9강

 

‘수장령’ 아래 형성된 영국교회

(Church of England)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앞에서 종교개혁시 예전에 관한 다섯 가지의 흐름들이 있음을 지적하였고, 그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서 루터는 예배에 관한 한 개혁자들 가운데서 가장 온건한 입장에서 개혁을 주도 하였다. 그는 예배에 있어서 중세 교회의 미사로부터 어떤 급격한 변화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영국의 종교개혁은 그 출발이 일반적인 개신교와는 달리하고 있었다. 헨리 8세가 자신의 비합법적인 결혼이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출교의 처벌을 받게 되자, 그는 1534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종교적인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영국 교회의 수장은 영국 왕이 되어야 한다”는 유명한 수장령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수장령에 의하여 영국 교회(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통치권은 로마의 교황청으로부터 영국 왕실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개혁은 교리나 신학에서 출발된 것이 아니었기에 교황청으로부터 독립된 교회의 구조와 제도를 수립하였지만, 예배에서는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단계적으로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이 번에는 “수장령 아래 형성된 영국교회”의 예배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2. 몸 말

1) 영국 교회의 개혁

1542년 켄터베리 주교회의 때부터 시작된 개혁의 싹은 헨리 왕이 죽은 이후 에드워드(Edward VI 1537-1553) 때에 이르러 개혁의 줄기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에드워드는 1547년 영어 설교를 비롯하여 성경봉독이 모두 영어로 읽어지도록 조치를 취하면서 개혁의 양상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개혁은 실질적으로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에 의하여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크랜머는 최초의 개신교 지향의 켄터베리 대 주교로서 에드워드 왕실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상담역을 담당한 바 있다. 그는 독일의 부처와 같은 유럽의 개혁자들을 영국에 초빙하여 개혁의 이론적 바탕과 미래의 방향을 정하면서 예배분야에 특별한 개혁을 서두른 바 있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성상이나 숭배의 대상이 된 성자들의 유물들을 허물어 뜨리면서 바른 예배를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그는 1549년 예배 역사에 한 축을 이루는 「공동예식서(Book of Common Prayer)를 만들어 영국 교회 예배 개혁을 완성시킨바 있었다. 이 「공동예식서」는 주일 예배를 비롯하여 매일의 아침 저녁 예배, 성찬 및 세례 성례전, 시편송, 기도문, 주일의 성서일과, 결혼과 장례 등을 수록하여 영국교회의 예배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한바 있었다. 크랜머 역시 예배의 핵심은 말씀과 성찬 예전이 필수적으로 있어져야 함을 기본적으로 강조하였다.

이러한 개혁작업이 비록 오늘 개신교회가 볼 때는 로마 가톨릭과의 차이점을 크게 느끼지 못할 경우가 있으나 그 당시로서는 실로 거대한 개혁의 발길이었다. 맥스웰은 이 예배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를 하면서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예식서는 예전의 자료들에 있어서 풍부한 보화들을 보존하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볼 때 독특한 영국 스타일의 적합성과 고상함, 그리고 우아함을 보여주고 있다. 기도문(collect)들은 라틴 형식과 비슷하지만, 미사 전문(Canon)은 고대 의식에 비해 매우 우수한 면을 갖추고 있다. 「공동기도서」의 공헌은 매우 값진 것이며, 이 예식서는 16세기의 다른 예식서들과는 대조적으로 오늘날까지도 사용되어지고 있다.

 

2) 영국교회 예배의 특성

영국교회(Church of England)는 영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감독교회(Episcopal Church)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는 성공회라고 그 명칭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교회 제도나 예배가 독자적임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배의 특성을 가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영국교회의 중추적 인물이었던 크랜머가 루터와 쯔빙글리와의 만남을 통하여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성공회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장점을 모두 수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교회라고 일컫게 된다.

먼저, 이 교회는 로마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아닌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면서도 예배에 있어서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의 정신을 준수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중과의 만남을 가져오는 두개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

둘째는, 이들의 예배의 방향과 표준은 먼저는 성경에 바탕을 두며, 지적인 감각을 이탈하지 않으며, 예배하는 회중들을 중심한 것이다.

셋째는, 성공회는 7 성례를 가지고 있는데 세례와 성찬은 예수님이 세워주신 성례로 존엄하게 지키고 있으며, 견진, 고해, 신품, 혼배, 조병 등은 교회가 필요하여 세운 성례로서 세례와 성찬과는 구별된 성례로 지킨다.

넷째는, 이들은 가톨릭의 화체설을 거부하였고 올바르고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성물을 받은 경우에 한하여 주어진 떡과 잔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다섯째로, 이들의 교리와 예배에서 연옥, 면죄, 성상, 및 유물의 예배와 숭배는 수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고해성사와 같은 중보의 행위가 성경적 근거가 없음을 지적하였다.

여섯째로, 「에드웨드의 설교(1547)」라고 칭한 설교문을 통하여 영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른 위치로 회복하려고 노력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의 구원”이라는 설교는 영어로 기록된 최상의 신학 단편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이다.

일곱째, 이들은 준비 없는 즉흥기도 보다는 철저한 준비와 명상 속에 작성된 기도문들을 가지고 예배시간에 함께 드림으로 기도의 진지함을 지속하고 있었다.

끝으로, 영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수장령」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기에 이들의 예배가운데는 왕을 위한 기도가 있었다.

 

3) 공동예식서

이상과 같이 영국교회는 왕을 위한 기도와 같은 특수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매우 훌륭한 예배신학과 실제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은 영국교회의 예배를 좀더 섬세하게 관찰하기 위하여 1662년 공동예식서(Book of Common Prayer)의 예배순서를 여기에 소개한다. 이 공동예식서에 대한 공식적인 개정은 1662년부터 1927년 사이에는 없었으며, 1928년에는 [성찬 예배 규범](Order of Communion)을 개정하여 만든 예배의식이 있다. 이를 위하여는 윌리엄 멕스웰(William Maxwell)의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를 참고하라.

 

1662년의 예배순서(B.C.P)

 

말씀의 예전

주님의 기도-(집례자만 사용함)

성결을 위한 기도(Collect for purity)

십계명송-키리에와 함께

왕을 위한 기도

본기도(Collect of the day)

서신서

복음서

니케아신경

설교

 

성찬성례전

봉헌

-성구봉독

-헌금

-성물 준비

중보기도-죽은 이를 위한 추모가 있음

권면

성찬초대사

고백기도

사죄의 선언

위로의 말씀

수르숨 코르다

성찬기도

-예비기원

-상투스

-입례기도

-수난을 기림

-성찬 제정사와 성체 분할:

영성체

주기도문

헌신과 성찬 후 감사

영광송

평화의 인사와 강복선언

 

4) 한국성공회 미사 순서

 

말씀의 전례

1. 입당 찬미 (일어선다)

2. 개회기도

3. 기리에

사 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또는 기리에 엘레이손)

신 도: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 제: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또는 그리스데 엘레이손)

신 도: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 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또는 기리에 엘레이손)

신 도: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4. 영광송

사제: 하늘 높은 곳에서는 천주께 영광

신도:

○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응답: 주 천주여, 하늘의 임금이여,

○ 전능하신 천주 성부여 응답: 주를 기리나이다, 찬미하나이다.

○ 주를 흠송하나이다, 높이 받드나이다. 응답: 주의 영광크시기에 감사하나이다.

○ 주 천주여, 성부의 아들이여, 응답: 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여,

○ 천주의 어린 양이여, 응답: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응답: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응답: 성부 오른 편에 앉아 계시는 주여,

○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같이: 천주 성부의 영광안에 성신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고/홀로 높으시도다! 아멘.

 

5.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인사)

사 제: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다같이: 또한 사제와 함께하소서.

 

6. 본기도

사제: 기도합시다.

이는 성부와 성신과 한 분 천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다같이: 아멘

 

7.성서독서-구약성경 (앉는다)

신 도: 구약성경은 ( )책 ( )장 ( )절부터 ( )까지의 말씀입니다.

신 도: 이것은 구약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천주께 감사합니다.

8. 층계송

9. 성서독서-서신성경 (앉는다)

신 도: 서신은 ( )책 ( )장 ( )절부터 ( )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신 도: 이것은 서신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천주께 감사합니다.

 

10. 성시 혹은 성가

11. 복음낭독 (선다)

사 제: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다같이: 또한 사제와 함께 하소서

사 제: 복음성경은 ( )복음 ( )장 ( )절부터 ( )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주께 영광을 드립니다.

사 제: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그리스도를 찬미합니다.

 

12. 설교 (앉는다)

 

13. 니케야신경 (선다)

우리는 믿나이다.

한분이신 전능 천주 성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오직 한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모든 세계에 앞서 성부께 나신 천주시오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오 참 천주로부터 나신 참 천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시며 만물이 다 이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믿으며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신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으며, 본디오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묻히심을 믿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 편에 앉아 계시며 산 이와 죽은이를 심판하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신을 믿나니 성신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며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같은 흠송과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와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후세의 영생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14. 신자들의 기도

사 제: 기도합시다.

가) 모든 그리스도와 교회와 인류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믿음으로 구하는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와 또한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의 진리에 순응하며, 주님의 신앙안에 살면서 이 세상에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소서.

다같이: 아멘

나)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여, 모든 정치의 책임있는 자들에게 은총을 베푸사,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나라와 다른 모 든 나라 사람들을 정의와 평화의 길로 인도하게 하시고 온 인류가 서로 사랑하며 주의 뜻에 합 당한 일을 구하게 하소서

다같이: 아멘

다) 우리 이웃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여, 우리 가정과 친지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이웃된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저 희들로 하여금 서로 도우며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다같이: 아멘

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기쁘거나 슬프거나 오로지 주님 만을 의지하고, 주님의 은총을 믿고 살게 하소서.

다같이: 아멘

마)별세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여,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들과 함께 주님의 영 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다같이: 아멘

다같이: 자비로우신 아버님, 성부의 외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15. 십계명

16. 죄의 고백

사 제: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를 합당하게 드리기 위하여 서로 화목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죄를 고백합시다.

다같이: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실로 주님과 이웃에게 죄를 지었으며, 또한 자주 의무 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주여,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워 지게 하소서

사 제: 진실로 죄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시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선행할 힘을 주사 영생을 얻게 하소서

다같이: 아멘

 

성찬의 전례

 

17. 평화의 인사

사 제: 여러분은 다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각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평화를 이룩하셨으니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됩시다.

사 제: 주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다같이: 또한 사제와 함께 하소서

사 제: 서로 평화의 축복을 나눕시다.

18. 봉헌례 (선다)

사 제: 모든 것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에 저희가 받은 것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주여, 이것으로 당신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게 하소서

다같이: 아멘

19. 성찬기도 (선다)

사 제: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다같이: 또한 사제와 함께 하소서

사 제: 마음을 드높이

다같이: 주를 향하여

사 제: 우리 주 천주께 감사합시다

다같이: 마땅하고 옳은일입니다.

사 제: 전능하신 천주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 언제나 어디서나 감사를 드림은 참으로 우리의 마땅한 본분이로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모든 천사와 성도들과 함께 주 의 이름을 받들어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다같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도다.

만군의 주 천주여!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

높은 데에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높은 데에 호산나!

 

거룩하신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감사제를 받으시며, 성신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 거룩한 신비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사 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복종하여, 수난하신 전날 밤에 빵을 들어(이때 빵을 집음) 성 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받아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라.

 

사 제: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이 때 성작을 집음)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들에게 주시며 말 씀하셨나이다.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시라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너희들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새로운 계약의 피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

 

사 제: 우리는 신앙의 신비를 선포합니다.

다같이: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사 제: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하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기억하며, 또한 그리스도 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심을 바라보며, 이 빵과 이 잔을 주의 완전한 제물로 드리나이다.

아버지 천주여, 이 제사를 받으시고 이 성사를 받는 모든 신자들을 성신의 힘으로써 예수 그리 스도와 한 몸이 되게 하소서.

전능하신 아버지 천주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신과 한가지 로 온갖 영예와 영광을 세세무궁토록 받으시나이다.

다같이: 아멘

20. 주의 기도

사 제: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기도합시다.

다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 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 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 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아멘

 

21. 천주의 어린양 (이제 빵을 뗀다).

천주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천주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천주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22.영성체초대

사 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천중의 어린 양이 여기 계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다같이: 주여, 주를 내안에 모시기를 감당치 못하오니,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23.영성체

그리스도의 성체. 아멘.

그리스도의 보혈. 아멘.

사 제: 그리스도의 성체

회 중: 아멘

사 제: 그리스도의 보혈

회 중: 아멘

 

24.영성체 후 기도

사 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보혈을 신령한 양식으로 우리에게 먹이심으 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되게 하셨으니 감사하나이다. 주여, 우리를 성신으로 도우사 사랑 가운데 서로 상통하며 주께서 분부하신 일을 이루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신과 한분 천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다같이: 아멘

 

25.강복선언

사 제: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다같이: 또한 사제와 함께 하소서

사 제: 하느님의 무한하신 평화가 교우들과 함께 하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항상 머 무르게 하시고,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신은 여러분에게 강복하소서.

다같이: 아멘.

사 제: 나가서 주의 복음을 전합시다.

다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사 제: 나가서 주의 복음을 전합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다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알렐루야 알렐루야.

 

 

[참고문헌]

정장복. 『예배의 신학』서울: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9. pp. 442-445.

정장복, 주승중 외. 『예배학 사전』 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0. 73-74, 565-567.

윌리엄 맥스웰.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4. pp. 180-198.

제임스 화이트. 『개신교 예배』 김석한 역.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97. pp. 157-196.

. 『예배의 역사』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7. pp.145-200.

Bard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1. pp. 227-284.

Donald Gray, "Anglican Worship" in The New Westminster Dictionary of Liturgy & Worship. Paul Bradshaw e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12-13.

Marion Hatchett, "The Traditional Anglican Liturgy(166)" in Twenty Centuries of Christian Worship. Robert Webber, ed. Nashville: Star Song Publishing Group, 1994. pp. 204-216.

 

 

 

 

 

 

 

 

 

 

 

 

종교개혁과 예배 세미나 제 10강

 

예배의 전통을 단절시킨 쯔빙글리 계열의 예배

 

1. 들어가는 말

1500년 동안 기독교 예배의 구심점이 되어 왔던 성찬 성례전을 최초로 주일 예배에서 분리시키고 그 회수를 년 4회로 축소시켰던 개혁가의 이름이 바로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이다. 그는 중세의 주일 예배에서 사라진 설교를 매주일 회복시키고 예배순서를 대폭 간소화하고 예배당 안의 성상의 조각이나 악기들마저 철거하는 예배의 대 개혁을 쥬리히에서 단행한 개혁가였다. 그가 쥬리히(Zurich)군대를 이끌고 군목으로 참전했다가 샤펠(Cappel) 전투에서 전사하기까지 개혁의 대열에서 활동한 시기는 10여년에 불과하지만 그는 거대한 예배개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오늘의 개혁교회를 창출시킨 개혁가였으나 예배의 차원에서 볼 때 그의 과격한 개혁은 어쩌면 혁명에 가까운 과정들을 밟았다는 평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2. 몸 말

1) 쯔빙글리의 개혁

앞에서 이미 공부한대로 루터는 자신이 주도한 종교개혁의 구심점은 성경과 교회의 역사와 전통이었다. 그는 현실교회 안에서 겪은 영적인 갈등과 고뇌의 반복 속에서 성경의 우위성을 부르짖으면서 일어선 개혁가였다. 그러기에 루터는 교회의 역사, 특히 예배의 전통과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예배의 부분적 수정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루터와는 다른 입장에서 개혁의 대열을 형성하였다. 그는 16세기 동안을 이어온 예배의 전통과 역사는 거의 고려하지 않고 오직 성경만을 강조한 급진적인 개혁가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개혁성향이 있기까지는 다음의 두 가지의 배경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그가 에라스무스의 르네상스 인문주의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 있어서 보다 합리적(rationalist)이었으며, 신비적인 면은 중요시하지 않고, 주관적(subjective)이고 분석적인(analytical) 면에 치우쳤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는 기본적으로 개혁운동을 민족주의적인 바탕 위에서 정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조국 스위스가 외국 군주들을 위한 용병으로 젊은이들을 보내 수입의 원천을 삼았던 것에 반기를 들 때 의외로 기존교회와의 심각한 마찰이 발생되자 그는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그의 사상적 배경은 루터와는 달리 기존 교회의 예배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분석에는 예배의 신비적이고 전통적인 요소나 실체들은 긍정할 수 없는 대상들이 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예배의 주역들인 사제들의 역할이나 역사적인 유산들은 부분적인 수정보다는 전면적인 개혁의 대상들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예배관은 드디어 성찬예전이 매 주일 갖는 기독교 예배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사실마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쯔빙글리가 다른 개혁가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점 하나는, 그 자신이 성만찬 자체를 은혜의 방편(a means of grace)으로 여기지를 않았다는 것이며, 그래서 성만찬 예전을 기독교 예배의 정규적 순서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성만찬의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성만찬을 자주 가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이 점은 쯔빙글리가 루터나 칼빈과 비교할 때 아주 다른 점이었다.

이러한 쯔빙글리의 신학사상은 그로부터 형성된 개혁교회로 하여금 과격한 개혁의 유산을 받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예배의 온전한 유산을 이어받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윌리엄 맥스웰은 이러한 안타까움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쯔빙글리 예전이 가져다 준 가장 비극적인 영향은 주일 예배에서 성찬 성례전을 분리하므로서, 더 이상 성찬성례전이 주일 예배의 정규순서가 아니라 비 주기적으로 거행하는 기념의식이 되었다는 점이다.

 

2) 쯔빙글리의 개혁의 긍정적인 요소들

쯔빙글리가 스위스 쥬리히를 중심하여 활동했던 개혁운동은 무엇보다도 예배에 직접적인 영향을 심각하게 미치고 있었다. 특별히 그가 내 놓은 1523년의 「미사경본 비판」과 1525년의 「주의 만찬의 활용법」은 쯔빙글리 계열의 개혁교회 예배의 표준이 되고 있었다. 그가 시행한 개혁의 형태는 비록 예배 역사의 단절을 가져온 결과라는 심각한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 결과는 개혁교회의 예배를 주도하는 영향을 남겼다. 여기서 그가 주도한 예배 개혁의 내용 중에 개혁교회가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들을 먼저 살펴본다.

첫째로, 그는 기독교 예배에서 사라진 하나님의 말씀이 자국어로 행하여 진 설교를 통하여 철저하게 선포되어지고 해석되어지도록 하였다. 여기서 중세교회의 미사에 의하여 잃어버린 말씀의 예전을 회복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남기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는, 중세 교회 예배의 현장이 사제의 독무대로서 사용된 언어나 의식의 거의 대부분이 회중과의 진정한 소통(communication)이 없었기에 회중은 언제나 관객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이러한 모순을 제거하기 위하여 쯔빙글리는 의식보다 말씀에 회중의 관심이 집중되도록 하는데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셋째는, 그는 성인숭배를 비롯하여 가시적인 성상들이 회중들에게 우상화 되어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예배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각종 성상과 성자 축일을 비롯하여 각종 의식에 사용하는 성구(聖具)들을 소멸하였다.

넷째로, 중세교회가 성찬 성례전을 신비의 대상으로 여기고 여기서 회중들이 미신적 신앙을 타파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즉 성만찬에 있어서 그의 합리주의적 입장에 따라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를 부인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긍정적인 요소들은 후일 개혁교회 예배의 본질이 되었다. 이 본질은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예배의 형태로부터 완전히 다른 줄기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결과는 동방교회나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롯하여 심지어 루터 계열과도 예배의 교류가 단절된 길을 걷게 되었다.

 

3) 쯔빙글리의 개혁의 부정적인 면

그러나 쯔빙글리가 주도한 예배가 가져온 부정적인 면이 또한 적지 않다. 특별히 전통적인 예배의 줄기를 벗어나서 진행되었던 다음의 문제들이 최근에 이르러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먼저는, 무엇보다도 앞에서 본대로 기독교 예배가 처음부터 지켜온 말씀의 예전과 성찬 예전의 두 축을 분리시킨 점이다. 부패한 중세의 교회가 말씀의 축을 외면했다면 쯔빙글리는 그 잃었던 말씀의 축을 회복하고 대신 성찬예전을 축소시킨 비극적인 우를 범하였다.

둘째는, 기독교 예배의 기본 정신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높이 들어내는데 있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예배의 초점을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들려주는 예배의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그것도 가시적이고 경험적인 은혜의 방편인 성례전 보다는 설교자의 언어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 전달에만 귀를 기울이게 하는 「듣는 예배」로 지금까지의 「드리는 예배」를 종식시켰다.

셋째는, 기독교 예배의 15세기 동안의 역사와 전통의 맥을 거의 단절하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쯔빙글리는 새로운 전통의 수립에 나섰다. 기존 교회의 예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이론과 전통을 세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서 개혁교회 예배의 전통과 역사성의 결여를 심각하게 초래하였다.

넷째로, 예배를 통한 기독교의 신비한 경험이나 식어진 영성의 성장보다는 그는 인문주의자로서 철저히 모든 예배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에서 검토되었다. 이로서 개혁교회는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예배를 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다섯째로, 언어로 해결할 수 없는 메시지의 전달 수단을 완전히 파괴시켰다는 점이다. 그 동안 교회가 언어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진리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하여 각종 상징과 음악과 절기 등을 활용하였다. 즉 교회는 이런 수단들을 통해서 예배 자들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와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이러한 것을 모두 배척 또는 축소하고 순수한 언어와 문자에만 의존하였다.

끝으로, 그는 성찬 성례전을 그리스도인들의 기억에 남아 있어야 할 단수한 기념식과 같은 범주에 머물게 하였다. 단순한 ‘이성과 합리’의 단계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그의 기본 사고 구조가 "나를 기념(Anamnesis)하라"는 말씀의 뜻이 ‘회상과 재현’이라는 사실에는 거의 접근하지 못했다. 그 결과 오늘의 개혁교회가 전통적인 기독교 예배의 성찬성례전과 호흡을 함께 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쯔빙글리의 예배개혁은 이상과 같이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남기는 매우 특수한 것이었다. 현대의 예배신학자들의 일반적인 평가는 그의 예배개혁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4) 쯔빙글리의 개혁된 예배 의식

쯔빙글리는 1523년에 미사 예식에 대한 첫 수정본으로 [미사 경본 비판](An Attack upon the Canon of the Mass)를 발간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미사 전문(Canon)에 대해서 공격하면서, 봉헌 기도로서 이 전문은 너무 지지부진하고, 모순되며, 회생 제사적 개념을 갖는 부적합한 것이기 때문에 사용하는데 동의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말씀의 예전 순서에 해당되는 부분은 그대로 보전하였으나, 성서일과(lectionary)가 간단하게 되고, 성자 축일에 관련된 기도문이나 성경 본문, 기타 순서들은 배제되었다. 음악적 요소들은 과격할 정도로 축소시켜 버렸다. 성경 봉독과 설교는 자국어도 진행하도록 하였다. 성만찬 예전에 있어서는 봉헌송과 수르숨 코다가 없어지고, 대신 니케아 신경(the Nicene Creed)이 노래로 불리워지는 동안 성물의 준비가 이루어졌다. 예비 기원과 쌍투스는 그대로 보존하였다. 그러나 미사 전문(Canon)은 네 가지 기도로 바뀌어졌는데, 그 길이는 본래의 미사 전문과 비슷하거나 약간 짧을 정도였다. 성찬 제정사(the Words of Institution)는 고린도 전서 11장 23-26절까지의 말씀을 낭독하게 되는데, 이것은 로마 미사 예식의 제정사보다 한 절이 더해진 것이었다. 성찬 제정사 후에는 주님의 초청(invitation)이 있었는데, 내용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찬 참여가 있고, 시므온의 찬가가 불리워진 후 간단한 성찬 후 기도(post-communion prayer)로써 예배라 마쳐진다.

쯔빙글리가 1525년 봄 스위스 쮜리히에서 발간한 독일어 예식은 그의 급진주의적인 입장을 더욱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주의 만찬의 활용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것은 후에 쯔빙글리 계열의 예배에 있어서 표준이 되었다. 그는 이 작품의 서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먼저 앉은 자세로 성찬을 받는 형식(sitting communion)이 여기서 유래되고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쯔빙글리 자신이 중세 교회가 했던 것보다 더 자주 성만찬을 거행하도록 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성만찬을 일년에 네 번부활절, 성령강림절, 가을, 성탄절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가 남긴 예배의 순서와 그가 목회하고 있었고 개혁의 중심지로 삼고 있었던 쥬리히의 그로스뮌스터(Grossmunster)교회의 오늘의 예배순서를 소개한다.

 

쯔빙글리의 예배순서(1520년대)

 

기 원

기 도 문

서 신 서

영 광 송(교창)

복 음 서

설교

죄의 고백

사도신경

 

* 이상의 순서가 쯔빙글리에 의해 매주일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예배순서이다. 다음의 순서는 일년에 4번 성찬 성례전을 포함할 때 사용되었던 순서이다.

 

말씀의 예전

 

봉 헌: 성물의 준비

기 원

기 도 문

서 신 서

영 광 송(교창)

복 음 서

사도신경

 

성찬성례전

 

권면

성찬단 성별

주기도문

입례기도

성찬 제정사

성체 분할

집례자 영성체

배찬 및 성찬 참여

시편 교송

성찬 후 기도

폐회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쯔빙글리의 예배 의식은 종교 개혁시의 예전들 중에서도 가장 간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예배 음악의 문제인데, 음악은 1525년 쯔빙글리의 예배 의식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며, 대신에 시편송을 교창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후에 이것은 회중들 대신에 두 사람의 부제의 의해 실제적으로 수행되었다. 아무튼 쮜리히는 음악을 폐지한 개혁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들은 과거 예배 의식에서 성가대에 의해 불려진 수준 높은 음악 대신 회중들의 찬송으로 대체하였다. 쮜리히는 예배 속에서 음악을 배제하려는 극단적 입장에 빠지게 되었고, 회중 찬송(congregational song)이 소개되어지게 되었다.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예배순서(1997)

(그로뮌스터 교회는 쯔빙글리가 개혁 당시 목회하였던 교회로서 지금도 그의 개혁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다)

 

예배로 나아감 오르간전주

성가대 응답송

예배의 말씀과 인사

찬송

 

경배 시편봉독

찬송

기도

 

선포 복음서 봉독

찬송

설교(설교자가 본문을 읽음)

오르간 간주

찬송

 

중보의 시간 알림(기도가 필요한 사람과 일들)

중보기도(침묵으로)오르간 연주

주님의 기도

 

파송과 축도 파송의 말씀

축도

찬송

오르간 후주

 

 

5) 예배로부터 자유를 추구한 재세례파

쥬리히를 중심한 쯔빙글리의 진보적인 예배개혁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특히 그의 개혁이 설교와 성경연구를 통하여 성경의 권위와 복음이 강조되고, 로마 가톨릭의 미신적 요소들을 물리칠 때 대단한 환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쯔빙글리의 개혁이 국가와 연계성을 가질 때 거기에 동의하지 않고 진정한 자유교회의 모습을 추구하면서 독자적인 개혁의 길을 걸었던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재세례파(Anabaptist)들이다. 이들의 초기 지도자였던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98-1526)은 “말씀의 전달자 쯔빙글리는 말씀을 저버리고 그의 발아래 짓밟았으며 포로로 만들어 버렸다.”는 심각한 저항을 하면서 그가 스위스의 형제단(Swiss Brethren)을 조직하고 완전한 자유교회를 지향하고 나서면서 새로운 교회의 형태인 재세례파를 이끌게 되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형제단 또는 메노나이트(Mennonites)라는 교파명을 가지고 유럽 각지에 번져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국가적인 제도권 아래서 주어진 유아세례와 같은 것은 강제력에 의하여 주어진 세례라고 규정하고 어린이의 신앙적 무의식은 세례의 효력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부모의 신앙을 맹목적으로 이어받은 전통사상을 거부하고 자발적인 신앙에 의한 종교의 선택과 교회의 형성을 주장하였다. 대부분의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주된 관심은 성만찬이었고 세례에 대한 부분은 깊은 토론과 관심의 내용이 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계열의 개혁자들은 교회의 보다 완전한 정화를 추구하면서 그들은 유아 세례의 시행이 교회의 개혁에 지대한 방해가 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리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든지, 혹은 다른 계열의 개혁자들에 의해서 행해진 유아 세례를 세례로 인정하지 않고 이들은 공적으로 신앙고백을 한 성인들의 세례를 다시 시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사상은 자연적으로 전통적으로 이어온 예배의 내용과 형태를 거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배의 순서는 자신들의 의향대로 정하고 개인적인 신앙의 명상과 표현을 오히려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성찬 성례전은 부정기적으로 갖게 되었다. 이들은 예배의 일정한 틀이나 격식을 외면했기에 예배순서로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오직 이들은 모여서 말씀을 중심하여 은혜를 나누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에서는 성경봉독과 그 말씀의 해석, 그리고 찬송과 기도가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이들의 신앙생활과 예배형태는 개신교로부터 심각한 박해를 받았으나 오히려 이러한 박해를 통하여 그들은 매우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돈독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들은 비록 장엄한 예배나 사제의 돋보인 예전적인 활동들이 없었으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질과 신앙의 본은 대단하였음을 다음의 서술을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들의 외적인 공동의 삶을 바라볼 때에 그들은 전혀 비난할 것이 없다. 거짓말, 사기, 맹세, 투쟁, 거친 말, 무절제한 과식과 과음, 외부로 나타난 개인적인 자기 과시 등은 그들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겸손과 인내, 강직, 겸손함, 절제, 솔직함이 있을 뿐이다.

 

이상과 같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을 추구했던 이들은 주로 스위스, 남부 독일, 홀랜드와 같은 유럽의 각 지역에 번져있었다. 이들이 추구했던 자유교회의 특성은 기독교 예배의 역사와 전통과는 거의 담을 쌓고 어느 단체나 국가의 간섭이나 지배를 배제하면서 개 교회가 독자적인 노선을 자유롭게 펼쳐갔었다. 이들의 신앙생활에서 예배와 관계된 부분들에 나타난 특성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이들은 국가와 연관된 교회의 조직과 영향 아래서 제정된 통일된 예배의 형태를 거부하였다. 이들은 공식적인 예배의식(Public Worship)의 필요성까지 거부하고 철저히 개교회 중심으로 예배행위를 자유롭게 가지면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강조하였다.

둘째로, 이들은 예배의 가장 중심적인 부분으로서 말씀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이들의 설교는 은혜를 추구한 성경공부와 같은 주해 설교를 강조하였다. 그 결과 이들의 설교자는 성경 말씀을 회중들의 삶에 바르게 선포하고 교육하고 적용할 수 있는 학자적 지식과 교양을 중요시하였다.

셋째로, 이들은 철저히 유아 세례를 거부하고 성년이 되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서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이미 받은 유아세례는 모두 무효가 되고 이름그대로 ‘다시 세례를 받는 무리’들로서 개신교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넷째로, 이들은 국가와 동일한 보조를 취하지 아니함으로 받은 극심한 핍박과 순교를 통하여 굳어진 신앙을 찬송으로 승화시켜 많은 작사 작곡을 남기었다. 중반까지 개신교에 사용한 찬송가의 상당부분이 지금도 이들의 찬송이 차지한바 있다. 특별히 이들은 이러한 찬송을 애송함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공동체 정체성을 확인하여 나가게 되었다.

다섯째로, 이들의 성찬 성례전은 매우 비예전적인 형태를 취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성직제도를 부정하고 지교회에서 선택한 지도자로 하여금 자신들의 목사로 추대하고 성례전을 진행시키도록 하였으며 성찬예전의 시기는 쯔빙글리 처럼 일 년에 4회 정도로 시행하였다. 그리고 이 성찬예전의 신학은 기념적인 예전으로 해석되었고 삶의 성화와 사랑에 강조점을 두어 자신들의 공동체를 공고히 묶게 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정장복. 『예배의 신학』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사, 1999. pp. 93-95.

정장복, 주승중 외. 『예배학 사전』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0. pp. 726-728.

제임스 화이트. 『개신교 예배』 김석한 역.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97. pp.131-156.

. 『예배의 역사』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7. pp.145-200.

윌리엄 맥스웰.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4. pp. 113-122.

Bard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1. pp. 141-156.

James White. "Reformed Worship" in Twenty Centuries of Christian Worship. Robert Webber, ed. Nashville: Star Song Publishing Group, 1994. pp. 76-77.

James White. "Anabaptist Worship" in Twenty Centuries of Christian Worship, pp. 77-78.

John Rempel, "Mennonite Worship" in The New Westminster Dictionary of Liturgy & Worship. Paul Bradshaw e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pp. 313-316.

 

 

 

 

 

정교개혁과 예배 세미나 제 11강

 

개혁교회 예배의 선구자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부처의 예배의식

 

1. 들어가는 말

개혁파 전통의 기원은 몇몇 중심지들과 여러 지도자들의 활동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대체적으로 쮜리히(Zurich)와 제네바(Geneva)가 그 중심을 이루지만, 그 외에도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 바젤(Basel), 베르네(Berne) 등의 지역을 통해서도 개혁파 전통이 세계 곳곳으로 퍼지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이들 가운데 쮜리히를 중심으로 개혁운동을 펼쳤던 쯔빙글리의 예배에 대해서 알아보였다. 쯔빙글리가 중심이 된 개혁은 그가 사망한 후에 개혁파 전통의 창조적인 예봉이 쮜리히에서 스크라스부르크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개혁을 주도한 이들은 존 칼빈(John Clavin, 1509-1564), 윌리암 파렐(William Farel, 1489-1565), 그리고 마르틴 부처(Bartin Bucer, 1492-1551) 였다. 그런데 뒤의 두 사람은 사실상 예배 부문에 관한 한 칼빈의 스승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이들 개혁파 예배를 이끈 인물들 가운데 특별히 마르틴 부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스트라스부르크의 예배의식에 관하여 알아보자.

 

2. 몸 말

1) 스트라스부르크의 부처

독일이 모두 루터의 영향아래서 각 교회마다 그가 만든 예배의 형태가 진행되고 있었으나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는 상당히 독립적이었다. 이 지역의 예배개혁은 디볼트 슈바르츠 (Diebold Schwarz)가 1524년 성 로렌스(St. Laurence)교회의 성 요한 채플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인 것이 미사를 개신교의 예배로 전환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예배순서에는 쯔빙글리와 같은 과격하고 급진적인 변화보다는 많은 부분을 보존하고 창의적인 면을 첨가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희생제사의 교리의 배격, 성자들이나 성모 마리아를 향한 기원, 사제가 드리는 개인적인 기원 등이 생략되었다. 그러나 사제의 예복을 비롯하여 거양성체와 집례자의 손을 씻는 의식과 무릎을 꿇는 예배자의 몸 가짐 등은 그대로 지속하고 있었다.

이 무렵 마틴 부처(Martin Bucer)가 1530년 이곳의 감독이 되면서 예배의 개혁은 새로운 틀을 잡아가게 되었다. 부쳐는 아직도 복잡한 루터의 예배와 너무나 간단한 쯔빙글리 예배의 중간 지점에서 개혁교회 예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1550년 영국 국교회 성직 수임식을 개혁하는 데에도 관여했고, 1552년에는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의 개정에도 관여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두 개의 전통, 곧 칼빈에 의한 개혁파 전통과, 크랜머(Cranmer)에 의한 성공회 전통의 기원에 강력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었다.

 

2) 부처의 예배 개혁

부처의 예배 개혁의 내용들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특히 기도문들을 선택하여 드리게 되고, 사도 신조가 니케아 신조를 대신하여 주로 사용되어진다. 로마 교회의 강복 선언(축도)(Roman Blessing) 대신에 아론의 축복(민 6:24-26)이 사용되어지고, 회중들로 하여금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높이고자 시편 찬송과 독일어 운율 찬송이 사용했다. 그리고 미사(Mass)라는 말 대신 ‘주님의 만찬’ 혹은 ‘성만찬’이라는 용어가 사용하고, ‘사제’(priest)라는 말 대신 ‘목사’(minister)라는 용어가 대체되어 사용되어졌다. 또한 ‘제단’(Altar)이라는 말 대신 ‘성찬상’(Holy Table)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고, 라틴어 용어들이 독일어 용어들로 대체되어진다. 옛날의 성서 일과를 따라 복음서와 서신서의 말씀들을 택하지 않고, 설교자에 의해서 자유롭게 본문이 선택되었으며, 설교는 정기적으로 선포되었고, 서신서나 복음서를 모두 읽지 않고 한 가지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가 선포되기도 했다. 절기들은 간단해졌고, 집례자가 회중들에게는 등을 돌리고 성찬상을 바라보며 집례 하던 것을 이제는 성찬상 뒤에 서서 회중들을 바라보며 집례 하였고, 성찬상은 회중들 가까이로 옮겨졌다. 목사의 예배 가운도 검정색의 단순한 가운을 착용하게 되었고 종래의 다양한 사제들의 제의(祭衣)는 폐지되었다. 이 기간에 성찬의 매주일 실행은 변경되는데, 1537년부터는 매주 시행되던 성만찬은 대성당에서만 지켜질 뿐이었고, 월 1회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는 부처의 친구요 후원자였던 주교(The Bishop of Meaux)에게 쓴 부처의 편지에서 그의 예식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기록을 볼 수 있다.

 

“주일 날을 그들은 축제로 지키고 있습니다....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주의 만찬을 거 행하고 있습니다. 즉 성찬대(the Table)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교회의 전면 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은 제단(altar)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그것은 그들 이 주의 만찬을 희생제사(sacrifice)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찬대의 모 양은 제단과 그렇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집례하는 목사는 성찬대에서 회중을 바라보 면서 집례하지, 회중을 등지는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성찬대에 서서 집례자는 회 중을 바라보고, 모든 회중들은 집례자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집례 목사는 먼저 간단한 기도를 드리고....이어서 모든 회중들이 시편을 노래합니다. 이것이 끝나면 목 사가 다시 기도를 하고, 강대상으로 가서 그가 설교한 성경 본문을 봉독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합니다....설교가 끝나면 그는 성찬대로 되돌아오고, 모두가 신경(the Creed)를 노래하게 됩니다. 그 후에 집례자는 왜 그리스도께서 우리 에게 성만찬을 남기셨는가를 복음서와 바울서신에 기록된 내용과 관련하여 회중들에 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성찬을 받기 원하여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성 찬에는 모든 사람을 다 초청은 하지만, 의무적으로 다 받도록 하지는 않음) 떡과 잔 을 나누어 주는데, 이것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 쳐진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의 상징 (symbol)입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 각 사람은 각각 자기에게 주어지는 떡과 잔을 받 게 됩니다. 그리고 모두가 자비송(Kyrie eleison)을 부르는데, 이 찬송에 의하여 각자 가 받은 은혜를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은 질서 있게 진행되는데, 집례자가 마 지막으로 참여하며, 이 때 그는 남아 있는 것을 모두 자신이 정리하게 됩니다. 그 리고 예배가 끝나면서 각 자는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해서 부처의 예배에서 사도행전 시대의 초기 예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두 가지 요소, 즉 교제(fellowship)와 기쁨(Joy)이 예배 속에서 이루어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예배의 내용 속에서 우리는 조금은 아쉬운 점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제일 먼저, 교송(versicles and responses)의 대부분이 사라짐으로써 예배가 갖는 교창 형식(antiphonal character)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고 예배에서 말로 하는 산문 형식들이 점자 운율에 맞춘 시편이나 찬송 형식으로 바뀌어졌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교창 형식이나 산문 형식의 시편을 예배에서 없애버린 극단적인 면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둘째로, 수르숨 코다(Sursum corda)와 갗이 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뿌리 깊고 적합한 내용이 사라져 버린 것도 애석한 일이다.

셋째로, 교회 자체 만큼이나 오래된 예비 기원(Prefaces), 상투스(Sanctus), 베네딕투스(Benedictus)등이 매우 빈약해지거나 변경되어 버렸다. 예배자들이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모든 바꾸어야 한다는 이러한 생각은 역사적인 예배 형식들이 갖고 있었던 아름다움, 다양함과 풍부함 그리고 넘치는 은혜의 차원을 결여케 하고 말았다.

넷째로, 또한 이 시기에 성서 일과에 대한 봉독(lections)이 사라지고 복음서만 낭독되어지게 되었는데, 이것 또한 예배를 빈약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개혁이었다. 성서일과에 대해서 교정하려 했다면, 그것이 지나치게 남용되는 것만을 막는 정도로 했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이 때 설교는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그 길이가 한 시간 정도가 될 정도로 대단하였다.

다섯째로, 가장 슬픈 현상은 이 시기에 매주일 거행하던 성만찬 의식이 차즘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1537년 경에는 대성당에서 매주일 거행된 반면 지역 교회들은 매월 1회 정도로 축소되어 졌다.

 

1526년부터 1539년 사이 스트라스부르크의 예배에 관해 기록한 부쳐의 글은 그동안 개정된 내용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해 주고 있다.

 

“회중들이 일요일에 함께 모이면, 목사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위해 기도하도록 권면한다. 그리고 모든 회중을 위해 목사가 하나님께 죄의 고백을 드리고, 용서를 위해 기도하며, 사죄의 선언을 한다. 그리고 나서 모든 회중은 짧은 시편이나 찬송가를 함께 부른다. 그리고 목사가 짧게 기도한 후 사도들의 서신을 읽 고 가능한 한 간단히 설명을 한다. 그리고 회중들은 십계명이나 기타 다른 것을 노래 한다. 그 후에 목사가 복음서를 읽고 설교를 한다. 설교가 끝나면 회중들은 운율에 맞추어 사도신경과 같은 신조를 노래로 한다. 목사가 지도자들과 모든 사람들을 위하 여 기도하고, 특별히 회중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가운데서 그들의 믿음 과 사랑과 은혜가 더욱 충만해지기를 간구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성만찬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가운데서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죽고, 기쁨으로 자 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믿음 안에서 더욱 강건해지도록 권면을 한다. 또한 십자가 위 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과 피를 드리신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자비하심 을 믿는 마음으로 그 앞에 앉도록 권한다. 권면이 끝나면 목사는 주의 만찬에 관계된 복음서의 내용이나, 고전 11장의 바울 서신을 읽는다. 그리고 목사는 회중들 사이로 주님의 떡과 잔을 분배한다. 그 때 회중들은 찬양의 찬송을 다시 부른다. 그 후 목사 는 짧은 기도와 함께 성찬식을 끝맺고, 회중들에게 강복선언(축도)을 한 후, 주님의 평강 속에 돌아가도록 한다. 이것이 우리가 매주일 거행하는 성만찬 형식이다.”

3) 1537년의 부쳐의 예전

이렇게 계속되는 과정을 거쳐 1537년에 만들어진 부쳐의 예전은 개혁 교회의 예배 전통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이 예전으로부터 나중에 칼빈주의의 예전과 스코틀랜드 교회의 예전이 파생되어 나온다. 이 예전에서 특징적인 것은 스트라스버그에서는 성체를 받을 때, 사람들은 성찬상 앞으로 나아가서 서서 받거나 혹은 무릎을 꿇고 받았다. 여기에 실린 1537년의 스트라스버그의 독일어 예전은 나중에 개혁 교회 주일 예배의 중요한 모범들이 되어진다.

 

말씀의 예전

 

죄의 고백

속죄의 말씀

용서의 선언

시편송, 찬송가 혹은 키리에와 영광송

성령임재를 위한 기도문

운율 시편송

성경봉독(복음서)

설교

 

성찬성례전

 

봉헌

성물준비(이때 사도신경을 노래함)

중보기도와 성찬 기도

주기도문

권면

성찬제정사

성체분할

분병분잔

성찬참여(시편송이나 찬송을 부름)

성찬후 기도

아론의 강복선언(축도)

 

우리는 부처의 이 예배 의식에서 몇 가지 특징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중보기도들(intercessions)이 성찬기도(the Consecration Prayer)의 시작부분에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예배의 관례에 따른 것으로써, 중보기도를 성찬 기도 다음에 두었던 초기 교회의 예배 의식과는 다른 면이다.

둘째로, 성찬 제정사(the Words of Institution)가 성찬기도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따로 그 순서가 독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초기 교회에서 지켜온 방법으로써 꼭 정해진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규정된 것은 아니다.

셋째로, 스크라스부르크의 예배 의식은 성만찬을 받을 때 회중들이 성찬대 앞으로 나아가 서서 받거나 아니면 무릎을 꿇고 받았다는 점이다. 집례 목사는 성찬대의 북쪽 끝에서 서서 떡을 나누어 주고, 보조 목사는 남쪽 끝에 서서 잔을 나누어 주었다.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본당 중앙 통로에 줄을 지어서 앞으로 나와 먼저 떡을 받고, 그 다음에 잔을 받은 후 자기 자리로 되돌아 갔다.

넷째로, 예배 규범은 지나치게 오용되는 축일들을 막기 위하여 오직 주일에만 하루 전체를 축제일로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쉬도록 하였다. 그리고 연중 큰 절기, 즉 성탄절, 수난 주간, 승천일, 성령강림절 등은 설교를 통해 지키도록 하였으나, 성자축일들을 지키도록 하는 규정은 없애 버렸다. 그리고 오직 주님의 행적을 기념하는 날들이 그 중심 위치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스트라스부르크의 독일 예배 의식은 종교개혁 초기의 개혁교회 예배, 즉 봉헌과 성찬 기도와 영성체가 생략된 성만찬이 없는 일요 예배의 규범이 되어졌다. 따라서 이 예배 의식은 성만찬의 핵심적 요소들을 결여하고 있는 예배라는 사실이다.

 

[참고문헌]

정장복. 『예배의 신학』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9. pp. 95-97.

정장복, 주승중 외. 『예배학 사전』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0. pp. 675-678.

제임스 화이트. 『개신교 예배』 김석한 역.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97. pp. 91-129.

. 『예배의 역사』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7. pp.145-200.

윌리엄 맥스웰.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4. pp. 122-153.

Bard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1. pp. 159-181.

James White, "Reformed Worship" in Twenty Centuries of Christian Worship. Robert Webber ed. Nashville: Star Song Publishing Group, 1994. pp. 76-77.

Donald Gray. "Reformed Worship" in The New Westminster Dictionary of Liturgy & Worship. Paul Bradshaw e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pp. 402-403.

 

 

 

 

 

 

 

 

 

 

 

 

 

 

종교개혁과 예배세미나 제 12강

 

개혁교회의 선구자들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예배의식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앞에서 1531년 쯔빙글리의 사망 후에 개혁파 전통의 창조적인 예봉은 취리히에서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크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공부하였다. 과격했던 쯔빙글리의 사후에, 이제 개혁교회는 두 번째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국면을 지배한 사람은 존 칼빈과 그의 예배 부분의 두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윌리암 파렐과 마틴 부쳐이다. 1533년 제네바 종교개혁은 파렐(Guillaume Farel,1489-1565)의 지도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1536년 파렐이 불란서 출신의 칼빈(John Calvin 1509-1564)에게 제네바 종교개혁에 동참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데서부터 칼빈과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연관을 맺게 되었다. 칼빈은 그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초대교회가 가졌던 내용을 되살리는 예배를 회복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전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한 개혁교회 예배 전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칼빈의 예배의식에 대해서 알아보자.

 

2. 몸 말

1)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부쳐와의 만남

칼빈은 목회자가 매 주일 수행해야 할 중요한 직무는 설교와 교육 그리고 매주일의 성찬 성례전을 집례하는 일임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칼빈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 그것은 칼빈이 성례전적인 예배(sacramental worship성만찬 중심의 예배)를 말씀 중심의 예배(preaching service)로 완전히 바꾸려 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의 의도와 노력에 대한 오해요, 그가 가르치고 행한 모든 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칼빈은 두 가지의 목표를 가졌는데, 첫째는 매주 예배에서 성만찬이 초대 기독교의 단순성과 조화를 되찾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예배에서 성경말씀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즉 칼빈은 예배 가운데서 주님의 만찬이 완전히 정착 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쯔빙글리 예배의 영향권에 빠져 있던 제네바 의회는 이에 전혀 동조를 하지 않았다. 칼빈은 그가 제네바에 오기 전에 집필했던 「기독교 강요」에 있는 다음의 명언으로 자신의 주장을 펴면서 용감하게 초대교회의 예배정신을 계승하려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사람들이 1년에 한번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한 관례는 분명히 악마의 농간이다. 주님의 만찬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한번은 참여할 수 있도록 거행되어져야 한다.

 

이 때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 있지 않던 환경이었기에 제네바의 행정 관료들의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러나 제네바의 행정 관료들은 칼빈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고 그들과 갈등을 계속하던 칼빈은 결국 1538년 스트라스부르크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한편 스트라스버그에서의 예배 개혁은 칼빈이 이곳에 망명해와 불어권 회중들을 목회 하면서 완전한 정착을 가져왔다. 부처의 환영을 받으면서 이곳에서 활약하던 칼빈은 1541년 제네바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약 3년 동안 지내면서 부처의 예배 개혁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부처가 작성한 예배 모범(Service book)은 매우 중요했다. 칼빈의 첫 예배 의식은 그가 1538-41년 사이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망명한 프랑스 회중들을 목회하던 때에 만들어졌다. 특별히 그의 성례전에 대한 입장 때문에 제네바로부터 추방당하여 스크라스부르크에 와서 그는 망명자들을 위해 신학을 가르치고 목회를 하였는데, 당시 그곳에는 종교개혁에 동조하므로 박해를 받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은신처가 되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크에 도착하기 전까지 당시 그곳의 독일인 관료들은 그곳에 망명한 프랑스인들이 별도로 성만찬을 거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이 도착한 후 그들은 매월 한번씩 부처를 따르는 그 지역 교회들에서 당시의 관례에 따라 성만찬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 정착할 당시 예배에 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그는 이를 하나 하나 적용시켜 나갔다.

그는 예배 인도자로서 이곳에서 활동하는 동안 부처의 예배 모범을 사용하였고, 나중에도 약간의 수정을 가한 예배 모범을 발전시킬 뿐이었다. 그 동안 쯔빙글리에 의하여 예전의 감각이 없이 설교만으로 예배를 진행했던 개혁교회 예배에 대한 새로운 갱신을 칼빈은 이곳에서 시도하였다. 즉 칼빈이 이곳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보다도 성찬 성례전을 주일 예배에서 생략하는 경우에도 예배로서의 깊은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예배의 구성을 시도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후일에 개혁 교회 예배의 중요한 틀로서 영향을 끼치게 된다.

 

2) 제네바에서의 예배 개혁

스트라스부르크에서 3년여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1542년 그의 예배 모범(service book)을 펴낸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예배 전통에 따른 성만찬의 집례 요령과 그 기도문」(The Form of Prayer and Manner of Ministering the Sacraments according to the Custom of the Ancient Church)이라는 기다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예전은 스트라스버그의 부처의 예전과 파렐(William Farel)의 예전에서 받은 깊은 영향과 자신의 예배 현장에서 얻은 경험들을 종합하여 이 예전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일요 예배에 있어서 나는 스트라스부르크 예배 의식을 취하였고, 많은 부분들을 그것에서 빌려 왔다” 말한다.

칼빈은 독일어를 읽거나 말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처음에 독일 예배 의식을 라틴어나 프랑스어로 번역해 놓은 것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번역에 착수하여 독일 예배 의식을 프랑스어로 바꾸어 나갔다. 그의 이 목표는 1539(또는 1540년 초)년에 비로소 이루어졌는데, 그는 이 때 첫 예식서를 발간하였다. 여기에는 회중 찬송을 위한 프랑스어 운율과 멜로디로 된 몇 개의 시편송도 담고 있었다. 제네바로 돌아온 후 칼빈이 사용한 예배 의식은 1542년에 발간된 것이었으며, 그 후에 판을 거듭한 내용들이 오늘까지 많이 남아 있다.

칼빈과 스트라스부르크의 예전이 얼마나 서로 관련이 있는가를 위하여 우리는 1537년 스트라스부르크의 독일어 예배의식과, 1540년 스트라스부르크의 프랑스(어) 예배 의식, 1542년 제네바 예배 의식을 비교해 보고자 이들을 여기 소개해 본다.

 

1537년 스트라스부르크의 독일어 예배 의식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Word)

죄의 고백

속죄의 말씀(딤전 1장)

용서의 선언

시편송, 찬송가 혹은 키리에와 영광송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문

운율 시편송

성경봉독(복음서)

설교

 

성만찬 예전(The Liturgy of the Upper Room)

헌금

성문준비(이 때 사도신경을 노래함)

중보기도와 성찬기도

주기도문

권면

성찬 제정사

성체 분할

분병분잔

성찬참여(시편송이나 찬송을 부름)

성찬 후 기도

아론의 강복선언(축도)

폐회

 

1540년 스트라스부르크의 프랑스 예배 의식

 

말씀의 예전

예배의 부름(시 124:8)

죄의 고백

속죄의 말씀

용서의 선언

키리에와 함께 운율에 맞춘 십계명 찬송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문

성경봉독

설교

 

성만찬 예전

헌금

중보기도

주기도문 해설

성문준비(사도신경을 노래함)

성찬기도

주기도문

성찬제정사

권면

성체분할

분병분잔

성찬참여(시편송을 부름)

성찬 후 기도

시므온의 찬미

아론의 강복선언(축도)

 

1542년 제네바 예배 의식

 

말씀의 예전

예배의 부름(시 124:8)

죄의 고백

속죄를 위한 기도

시편송(운율에 맞춤)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문

성경봉독

설교

 

성찬성례전

구제를 위한 헌금

중보기도

주기도문 해설

성물준비(사도신경을 노래함)

제정의 말씀

권면

성찬기도(성령임재를 위한)

성체분할(분병례)

분병, 분잔

성찬참여(시편 혹은 성경말씀 봉독)

성찬 후 기도

아론의 강복선언(민6:24-26)

 

위의 예배 순서들을 비교해 보면 이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죄의 고백이나 중보기도, 성찬 기도 등은 부처의 예배 의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단지 해설이 더해진 주기도문을 더하고 있을 뿐이다. 십계명의 사용은 칼빈의 예식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기는 하나, 이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그리고 칼빈이 시므온의 찬미를 성찬 후 넣고 있으나, 이것 역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제네바 예배의식을 잘 살펴보면 그 구조가 더욱 빈약해 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가능하면 예배 의식을 간단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제네바 행정 관료들의 극단적인 입장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칼빈의 입장이 가장 잘 반영된 예배 의식은 제네바 보다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만들어진 예배 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1545년에 작성한 예식서의 서문을 살펴보면 그의 입장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죄의 고백으로 시작하여, 율법서나 복음서의 성구로 용서의 선언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의로우시며 생명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의로와지며, 새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시편송, 찬양의 찬송, 복음서 봉독, 신앙고백(사도신경 등), 헌금을 한다. ...그리고 복음서의 봉독과 설교, 신앙고백 은 매우 생동감 있고 활기있게 진행된다....이어서 우리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 안에서 더욱 불타오르도록 기도드린다. 그리스도의 삶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어서 우리는 성만찬 예전을 통하여 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게 되므로.... 우리는 신 령과 진정으로 그분께 경배드린다....”

 

3) 칼빈의 예배 의식의 특징들

(1) 초대 교회의 예배 예전을 회복하려함

위에서 인용한 1545년 그가 작성한 예배 의식의 서문을 살펴보면 초대 교회의 단순하고 간결한 성만찬 예전을 회복하려 했던 그의 입장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는 성만찬 예전을 통하여 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게 되므로...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그분께 경배드린다. 우리는 경외와 찬양과 감사로 신비한

성만찬을 받는다. 이러한 절차와 방법으로 우리는 예배를 진행하는데, 이것은

사도와 교부들 시대의 고대 교회와 일치되는 것이다”

 

칼빈이 “은혜의 방편”으로서 강조한 두 가지는 말씀(the Word)성례전(the Sacrament)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목회(ministry)는 말씀과 성례전에 대한 사역이었다. 목회자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과업과 직무는 설교와 교육을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매주일 성만찬을 집례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봉독과 해설을 고대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배의 중심에 놓았고, 성만찬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전 생애 동안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이것을 분명히 하도록 하였다.

칼빈의 예전에서 특징적인 것은 초대 교회와 같이 성체를 받기 위해 나아 온 사람들에게 권고와 경고의 말씀을 주고 있으며, 성경 봉독과 설교 전에 성령 임재를 위한 기도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운율을 사용한 시편이 찬송되었다는 점과 구제를 위한 헌금이 드려짐으로서 사람들에 의한 봉헌이라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만찬 신학을 보완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칼빈은 중세 미사를 흉내 내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그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초대교회가 드렸던 예배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2) 성만찬에 대한 그의 견해

특별히 칼빈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쯔빙글리의 기념적 행위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 (means of grace)이었다. 칼빈은 루터의 공재론처럼 성만찬에서의 주님의 사실적 임재론을 피하고 있다. 그는 “나는 그것을 이해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경험하기를 원하다”고 피력하면서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성만찬에 실제적으로(really), 그리고 전적으로(fully) 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찬을 행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실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참여한다”고 하였다. 바로 그러한 신학이 「영적 임재설」로서 오늘에 이른다. 어떤 점에서 칼빈의 성만찬의 임재론은 쯔빙글리와 루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아무튼 칼빈은 성찬을 1년에 한번 참여하도록 한 관례는 분명히 “악마의 농간”이라고 하였고, 주님의 만찬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한번은 참여할 수 있도록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제네바의 행정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 추수절에만 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연 4회의 성찬식 전에 준비 기간을 갖도록 하였다. 이 준비 기간은 “각 사람이 성찬식을 가치 있게, 그리고 성찬식을 합당한 경건함으로 받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마음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전 주일에 선포했다. 어린이들과 외부인들은 사전에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상당한 자기 검사와 성찰 후에 성찬식에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자기 성찰적 경건은 개혁파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매주일의 성찬예전을 시도하지 못하고, “화평을 위해서” 네 번 집례함에 동의 하였지만, 1555년 베른(Berne)의 행정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편지로 표시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성만찬을 일년에 네 번 집례하거나 여러분이 세 번 하고 있는 것은 문제입니 다. 여러분이나 우리는 성만찬이 보다 자주 집례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의 사 도행전을 보면 최초의 교회에서는 성만찬이 보다 자주 거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 다. 그리고 그것은 고대 교회에서도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미사에 대한 사탄의 증오가 사탄에 의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년에 한 두 번 성만찬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들의 본을 따 르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큰 결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칼빈은 시의 간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원치 않은 성만찬 관례를 따랐지만, 이것은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의 가르침이나 방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성만찬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면, 성찬을 받는 순서는 교회의 서열에 따라 집례자가 제일 먼저 받고, 그 다음이 부교역자, 그리고 회중 순이었다. 성찬을 받을 때는 성찬대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거나 또는 선 자세로 받았으며, 먼저 한 목사로부터 빵을 받고, 다른 목사에게서 잔을 받았다. 그리고 성만찬이 없는 주일 예배는 1530년 이후 스크라스부르크에 있는 지교회(parish church)들에서 행해지는 방식을 따랐다. 성찬 예배의 순서나 구조, 내용은 광범위하게 수용하였으나, 성찬 기도와 영성체 부분에 관련된 순서들을 생략되었다. 이러한 예배 형식은 종교개혁 후에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청교도들에게 이어져 갔다.

 

(3) 설교에 대한 그의 견해

칼빈은 성경을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로 여겼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성만찬과 함께 예배에 있어 중심적이고 규범적인 요소였다. 즉 설교는 그의 예배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성경의 계속적인 강독을 선호함으로 말미암아 설교가 성경의 각 책을 차례로 다루어 감에 따라 성구집은 폐기 되었다. 성경의 본문이 상세하게 해설된 다음 현재의 삶에, 특별히 교리와 도덕의 관점으로 적용되었다. 칼빈의 설교신학은 주로 주석적 신학이고, 그는 말년의 많은 부분을 성경의 대부분의 책들의 주석을 만드는데 보냈다. 칼빈은 강단에서 예배의 대부분을 인도하는 것을 좋아했고, 따라서 훌륭한 강단들이 개혁파 교회들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4) 기타 예배의 요소들

먼저 칼빈은 말씀과 성례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그의 성찬 신학은 그리스도의 식사에 초대하여 기운을 북돋아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 그래서 성찬을 받기 전에 성령 강림을 비는 기도(epiclesis)와 또는 성경 봉독 전에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Collect for Illumination)는 아주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도들은 개혁파 예배에서 영속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 다음에 칼빈은 시편송을 아주 강조하였다.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장려하였던 루터교 전통이나. 노래를 부르는 것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던 쮜리히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칼빈은 시편을 프랑스 운문으로 번역하도록 조치했다. 그래서 제네바를 방문한 사람들은 시편 찬송이 예배에 주는 엄숙함과 기쁨에 대해 말하였고, 회중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감명을 받았다. 찬송가는 파이프 오르간과 같이 배제 되었다. 따라서 모든 음악은 사실상 회중의 찬양이 전부였다. 회중은 십계명을 찬송하기도 했다. 모든 찬송은 성경적이었고 구약성경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는 이렇게 시편의 기쁨과 슬픔들이 음악으로 회중의 입으로 옮겨질 수 있었던 반면에 예배 장소의 시각적인 면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쮜리히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상들은 제거되었다.

그 다음에 칼빈은 세례용 석대(오늘의 세례반)를 회중 앞에 두어 유아 세례가 완전하게 회중의 행사가 될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하여 세례반이 강단과 가까운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는 세례식을 재형성하여 매우 단순한 의식 형태로 만들었다. 견진은 폐지되었으나, 젊은이들이 회중 앞에서 “자신들의 믿음을 설명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 규정은 결국 믿음의 공동체에서 성인에 이른 사람들을 위한 표준적 개혁파의 통과 의식으로써 공적인 신앙고백 의식이 되었다.

또한 예배를 위한 주간의 중요한 행사로 주일에만 초점을 맞춤으로 성일들 및 다른 축제들은 없어졌다. 그러나 앞서도 밝혔듯이 년 4회의 성찬식 거행은 직전의 준비일들과 함께 교회력에 있어 중요한 날들이 되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생활주기를 특징짓는 예배들도 단순화 되었다. 예를 들어 결혼식은 성례가 아니지만 선한 의식이라고 주장했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기름을 바르는 “도유식” 또는 종부 성사(extreme unction)는 폐지되었고,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개혁파 교회들에서 장례식은 비난을 받고 폐지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성직 수임식은 거의 성례로 생각했다.

 

3. 나가는 말

칼빈은 진정으로 교부적인(patristic) 예배를 성취하기를 원했다. 그의 모델은 초대 교회였는데, 그 초대 교회란 단지 신약성경의 교회만이 아니라, 교부들과 순교자들의 교회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의 이러한 입장은 제네바 행정의 구조적인 장벽 때문에 펼쳐지지 못하였지만 오늘 개혁 교회들이 다시금 온전히 회복해야 할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정장복, 주승중 외. 예배학 사전. 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0. pp. 629-631.

정장복, 예배의 신학.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9. pp. 97-98.

제임스 화이트. 『개신교 예배』 김석한 역.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97. pp. 91-129.

. 『예배의 역사』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7. pp.145-200.

윌리엄 맥스웰.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4. pp. 154-162.

Bard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1. pp. 185-224.

Elsie McKee, "Calvin; The Form of Church Prayers, Strassburg Liturgy(1545)" in Twenty Centuries of Christian Worship. Robert Webber ed. Nashville: Star Song Publishing Group, 1994. pp. 195-203.

James White, "Reformed Worship" in Twenty Centuries of Christian Worship. Robert Webber ed. Nashville: Star Song Publishing Group, 1994. pp. 76-77.

Donald Gray. "Reformed Worship" in The New Westminster Dictionary of Liturgy & Worship. Paul Bradshaw e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pp. 402-403.

 

 

 

 

 

 

 

 

 

 

 

 

 

 

 

 

 

 

 

 

 

 

종교개혁과 예배 세미나 제 13강

 

개혁교회 예배의 선구자들

스코틀랜드에서의 낙스 예배의식

 

1. 들어가는 말

제네바가 칼빈을 중심하여 개혁교회 신학의 요람지가 되었다면 스코틀랜드는 낙스(John Knox, 1513-1572)와 멜빌(Andrew Melville,1545-1622)에 의하여 이룩된 장로교의 요람지이다. 장로교회의 교회직제와 정치와 교리의 규범은 멜빌의 주도하에 1578년 스코트랜드 교회 총회에서 비준이 되어 확정되지만, 장로교 예배의 초석이 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Directory for Public Worship)은 챨스 I 세(1600-1649)의 몰락에 이어 1645년에 제정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장로교 예배의 원조가 되는 이 예배모범이 나오기까지는 긴 역사가 그 뒤에 담기어 있었다.

 

2. 몸 말

1) 존 낙스와 개혁가들

세계 장로교의 원조가 되는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의 역사의 줄거리는 죤 낙스로부터 시작된다. 낙스의 망명은 피의 여왕이라는 악명이 붙은 메리(Mary Tudor, 1516-1558)의 등장 때문이었다. 메리 여왕은 대영제국의 교회에 심각한 한파를 몰고 왔었다. 그녀는 부왕이었던 헨리8세의 교회 수장령마저 파기하면서까지 로마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시도하였고 여기에 반대한 무리들에게는 잔인한 핍박을 가하였다. 이 때 개혁의 기치를 이미 들고 활동하였던 낙스는 대륙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프랑크프르트(Frankfort)를 거쳐 영어권의 개혁교도들을 위한 일시적인 목회를 제네바에서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여기서 부쳐와 칼빈으로 부터 신학과 예배에 대한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고, 그곳에서 목회하는 동안 칼빈의 예식서를 사용하면서 칼빈의 예배신학에 접하게 되었다. 1558년 메리 여왕의 죽음은 낙스로 하여금 귀국을 서두르게 하였다. 낙스는 1559년 고국 스코트랜드의 수도 에딘버러(Edinburgh)에 있는 성 쟈일(St. Giles)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면서 예배의 개혁을 본격화 시키게 되었다.

낙스가 고국에 귀국하면서 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위하여 「신조-Confession of Faith」, 「교회행정지침서-Book of Descipline」, 「예배서-Forme of Prayers」를 가지고 왔었다. 이것들이 바로 후에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통과된 장로교의 기본 지침서들이 되는 초석이었다.

 

2) 낙스와 스코틀랜드 교회의 예배 개혁

그 중에서 예배서는 낙스 자신이 목회를 하는 동안 칼빈의 예식서를 약간 수정하여 사용하였던 것이기에 스코트랜드 교회의 예배서로 내 놓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드디어 이 「예배서」(Forme of Prayers)(이 책은 “The Form of Prayers”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the Book of our Common Order" "Book of Geneva" "Order of Geneva" 등으로도 알려졌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존 낙스 예전”(John Knox's Liturgy)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1564년 스코트랜드 교회 총회에서 그 가치성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 예식서의 서문에는 “목사로 안수를 받은 자는 에딘버러에서 최근 출판된 예식서를 반드시 소유해야 하고 그것을 가지고 예배예전, 기도, 결혼, 성례전을 집례해야 한다”라는 결의문이 실리게 되었다. 여기 그 순서를 소개한다.

 

The Forme of Prayers (1564)

 

말씀의 예전

죄의 고백

용서를 위한 기도

운율 시편송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

성경봉독

설교

 

성만찬 예전

헌금

감사기도와 중보기도

주기도문

사도신경

봉헌: 시편이 불려지는 동안 성물을 준비하여 드림

성찬제정사

권면

봉헌기도(Prayer of Consecration

경배(Adoration)

감사기도: 창조와 구속에 대한

기념(Anamnesis)

송영(Doxology)

성체분할

집례자 성찬

분병분잔(Delivery)

회중의 성찬참여집례자는 주님의 수난사를 봉독

영성체 후 감사기도

시편송

축복기도(아론의 축복 기도와 사도의 축복 기도)

 

이 예식서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성만찬은 공중 예배의 규범이 되었다. 따라서 성만찬이 집례되지 않을 때에도 성찬 기도와 영성체(성례를 받는 것)에 관계된 순서만 생략되고 나머지 성찬예식은 그대로 지켰다. 그 결과 앞에 소개된 예배 의식의 신앙고백까지는 그대로 진행되다가 그 후 중간 순서는 생략되고 후반부의 시편송이 불려진 다음 축복기도로 예배를 끝내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스코틀랜드 주일 예배는 성만찬 예전에 기초를 둔 것이지, 성무일과(the Hour's Offices기도회 성격의 모임)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이 예식서가 스코트랜드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자 영국 왕실의 분노가 치솟기 시작하여 낙스의 예식서 사용을 금지시키는 칙령과 함께 즉흥적인 기도와 장로제도의 폐지를 명하였다. 이 칙령에 반대한 자들은 모두 출교를 시키면서 영국 왕실은 켄터베리 대 주교였던 윌리엄 로드(William Laud)를 시켜 대영제국의 왕을 수장으로 하는 교회의 예식서(Laud's Liturgy)를 만들어 스코트랜드 교회가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왕실의 노력은 스코트랜드 교회에 의하여 철저히 외면당하였다. 드디어 스코트랜드 교회는 자신들의 개혁신앙을 따라 예배하는 교회가 될 것을 다짐하면서 드디어 계약군(National Covenant)을 조직하고 무장봉기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계약군은 거의 동시기에 영국 의회의 크롬웰(Oliver Cromwell,1599-1658) 장군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의회군과 연합하여 챨스왕의 군사를 물리치고 승리의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 이 승리는 바로 스코트랜드 교회의 청원대로 웨스트민스터에서 새로운 예배모범과 신조와 교회직제를 우선적으로 제정하여 1645년 1월에 영국의회의 통과를 보게 되어 스코트랜드 교회 총회와 의회의 인증을 거침으로 장로교의 예배모범은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다.

 

3)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

이 예배모범은 그 기본정신과 표현에 있어서 제네바 예식서와 큰 차이를 발견하기는 힘들지만 그 구조와 내용의 형성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예배모범에 실린 강조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1) 주일 성수는 철저히 준수하도록 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서 모든 준비를 하도록 강조하였다. 이 날의 준비는 오락이나 운동이나 불필요한 노동을 삼가도록 하고 주일 예배를 위한 준비 기도를 권장하였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는 독서와 말씀의 명상, 병자의 심방이나 자선의 손길을 펼치는 날로 보내도록 하였다.

(2) 예배의 분위기는 엄숙하고 진지할 것을 강조하고 어떤 성상이나 무덤을 참배하는 것을 엄금하고 옆 사람과의 대화, 왕과 같은 특수한 인물이 들어 올 때의 경의 표시, 기타 목사를 괴롭히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도록 명시하였다.

(3) 주일 예배의 시작은 죄의 고백으로 시작하여 예배자들이 용서받은 몸으로 예배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예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가장 우선적으로 실천해야할 예배행위는 하나님께 참회하고 용서받는 것임을 강조한다.

(4) 세례 성례전은 필요한 경우 언제나 공적인 예배시에 목사가 예배모범의 예식을 따라 집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아세례는 아이 아버지의 신앙고백과 청원을 중요하게 여겼다. 회중들은 이 시간을 자신이 세례를 받았던 과거를 회상하고 점검해 보는 시간으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5) 설교 전의 기도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설교자의 죄까지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도록 하였다. 이 부분에 해당된 기도문의 실제는 매우 길게 제시된바 있다. 그리고 감사의 예물은 이 기도 전에 드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기록된 기도문 보다는 즉흥적인 기도를 장려하여 중요한 기도의 유산을 상실한 바 있다.

(6) 성경봉독은 가급적이면 66권이 차례대로 봉독할 것을 권장하였으며 분명하고 엄숙하게 봉독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성경읽기는 보편화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7) 설교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의 사역에 가장 위대하고 탁월한 부분으로 정의하였다. 일을 위하여 설교자는 성경의 원어를 비롯한 신학. 문학, 과학의 지식을 소유해야 함을 당연시하고, 이 막중한 소임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령님의 임재에 의하여 보다 확실히 조명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8) 성찬 성례전을 자주 갖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집례 할 목사가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문제와 제네바에서 년 4회의 성례전의 관례는 이곳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회수를 정기적으로 지키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9) 성찬 성례전 의식에 있어서 제정의 말씀을 읽도록 하였고, 그 말씀의 적용을 간단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분병 분잔이 끝난 다음에도 집례자가 주님의 살과 피에 흠이 가지 않도록 성결한 삶을 살 것을 간결하게 강조하도록 하였다.

(10) 성찬 참여의 형태는 수찬자들이 쯔빙글리가 시도한데로 앉아서 받는 것이 아니라 모두 성찬상 앞으로 12명씩 나와서 받도록 하였다.

(11) 예배 찬송은 시편에 그들의 고유한 운율을 사용하여 불렀고, 악기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는 교회 음악의 발전과 함께 악기의 사용이 허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과 같은 웨스터민스터 예배모범의 원칙을 가지고 시행되었던 예배순서는 다음과 같다.

 

말씀의 예전

예배의 부름“다같이 하나님께 예배 드립시다”

기원(Prayer of Approach)경외, 찬양, 성령의 임재를 위해

구약봉독한 장을 읽음

신약봉독한 장을 읽음

운율 시편송성경봉독 전이나 사이에

고백과 중보의 기도

설교

기도

주기도문

 

다락방 예전

봉헌(Offertory)구제 헌금

성찬초대사

성물 배열

성찬 제정사

권면

성찬기도(Prayer of Consecration)

입례 기도(Prayer of Access)

창조와 섭리에 대한 감사기도

구속에 대한 감사기도

말씀과 성례전에 대한 감사기도

기념(Anamnesis)

축성기도(Epiclesis)

성체분할(Fraction)

분병분잔(Delivery)

성찬 참여집례자가 먼저 받음

권면참된 삶을 위한

성만찬 후의 감사기도

운율 시편 찬송(시 103편)

축복기도

 

4) 스코트랜드 교회의 예배 부흥운동

이상과 같은 예배의 정신과 형태는 장로교의 원조인 스코트랜드 교회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일기 시작한 예배 부흥운동은 스코틀랜드 교회에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예배에 대한 부흥은 19세기의 마지막 10년(1890년대)의 시기에 오게 되는데, 이 때 스코틀랜드 교회는 강력한 개혁을 추진한다. 그래서 1923년 스코틀랜드 교회의 총회는 [거룩한 예배를 위한 기도서](Prayers for Divine Service)라고 이름 붙은 예식서를 출간하도록 정식인가 하였다. 그리고 몇 번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1940년 「공동예배 규범서」(The Book of Common Order)를 출간하게 되었다. 이 예배서에 나타난 예배의 순서는 개혁가들이 상실한 것을 많이 보충하고 있음을 본다. 여기에는 성만찬 집례를 위한 다섯 가지 규범(Order)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정규 성만찬 예식, 둘째는 약간 축소된 약식의 성만찬 예식, 셋째는 교차식으로 된 예식(alternative Order)으로서 내용상으로 볼 때는 첫째 것과 유사하지만 정통적 예전에 비해 언어를 적게 사용토록 되었으며, 넷째는 병든 자를 위한 간략한 예식, 그리고 다섯째는 보존된 성물을 사용하는 규범 등으로 되어 있다.

아무튼 실질적으로 16세기의 개혁가들은 로마 가톨릭이나 영국교회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루터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예배형태에 대하여도 독자적이고 축소된 방향을 찾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스코트랜드 교회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개혁교회의 예배가 예배의 고유한 정신과 형태들의 중요한 부분들이 상실된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과 같은 예배의 순서를 새롭게 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말씀의 예전

 

입당송: 시 xliii. 3-5

예배의 말씀: 시 cxv1.12-14

정결을 위한 기도문

죄의 고백

용서의 확신

기도문

찬송 혹은 시편송

예언서나 구약의 말씀 봉독

시편송

서신서 봉독

복음서 봉독

니케아 신조: 봉헌 순서에서 하지 않을 경우

중보기도와 죽은 이를 추모(Commemoration)

시편송이나 찬송

혼인 예고(Banns of Marriage, and Intimations)

설교전 기도

설교

하나님을 찬미(Ascription)함

 

성만찬 예전

 

봉헌: 봉헌기도

-말씀으로 초대

-성물을 성찬대로 가져다 놓는 동안 시편송

-니케아 신조: 앞 부분에서 하지 않았을 경우

-성물 현시(Unveiling of Elements)

-인사와 확증(Warrant,고전 11:23-26)

-성물을 취함(Taking of Elements)

인사와 수르숨 코-다

성찬기도

-예비기원: 창조와 섭리에 대한 감사와 절기에 맞추어

상투스, 베네딕투스

상투스(Vere Sanctus-구속에 대한 감사)

기념(Anamnesis),성물 봉헌(oblation),축성기도

헌신(Self-oblation, Oblation of Church),산 이와 죽은 이

를 위한 중보기도

송영(Doxology)

주기도문

성찬 제정사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찬미, 집례자의 성찬

분병 분잔과 회중의 성찬참여

성만찬 후 감사기도, 죽은 이를 추모

시편송이나 찬송

강복선언

 

 

3. 나가는 말

스코틀랜드 교회의 이런 훌륭한 예배 의식은 그들의 예전의 풍부함과 독특함 그리고 전통적 예배의 핵심적인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예배에 수반된 모든 의식은 간단하면서도 주된 격식을 모두 갖춘 실용적인 것들도 되어 있다. 그들의 예배 의식은 고상함(dignity)과 표현의 적합성(felicity), 그리고 풍부한 내용은 기독교 권의 모든 예배에 값진 가치를 제공해 주고 있다.

[참고문헌]

정장복. 『예배의 신학』 서울: 장로신학대학교 출판부, 1999. pp. 99-100.

정장복, 주승중 외. 『예배학 사전』 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0. pp. 692-695, 707-720.

제임스 화이트. 『개신교 예배』 김석한 역.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97. pp. 91-129.

. 『예배의 역사』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7. pp.145-200.

윌리엄 맥스웰.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4. pp. 162-180. 198-204.

Bard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1. pp. 287-307.

Michael Thompson, "Worship in the Church of Scotland" in The New Westminster Dictionary of Liturgy & Worship. Paul Bradshaw e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pp. 426-427.

 

 

 

 

 

 

 

 

 

 

 

 

 

 

 

 

 

 

 

 

 

 

 

 

 

 

 

 

종교개혁과 예배 세미나 제 14강

 

청교도와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

그리고 장로교 예배

 

I. 들어가는 말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개신교의 한 줄기이다. 당시 종교 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는 영국 교회의 감독제에 반대하면서, 자신들의 교회직제를 장로제로 하기로 하면서, 장로교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붙게 된 것이다.

이 장로교회는 청교도들의 신대륙 이민 이후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상륙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제 1, 2차 대각성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미국 장로교회는 크게 성장을 계속하였고, 그들의 선교열은 기독교 복음을 세계로 확산시키는 놀라운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의 복음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80%가 장로교회인 것을 볼 때, 그들의 장로교 예배를 공부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예배의 뿌리를 아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먼저 장로교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고, 미국에서의 정착과 성장 과정을 정리한 후, 그들의 예배에 대하여 공부하도록 하겠다.

 

II. 몸 말

1. 장로교회의 역사적 배경

장로교회는 종교 개혁 이후 등장한 개신교의 한 전통이다. 신학적으로는 존 칼뱅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존 낙스에 의해 스코틀랜드에서 정착된 교회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감독제에 근거한 직제를 전통적으로 지켜 왔으나, 장로교회는 감독제를 거부하고, 장로제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런 장로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 개혁기의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추적해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1) 영국과 종교 개혁

16세기 영국은 정치 종교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지금까지 영국은 로마 카톨릭 교회 소속으로서, 로마 교황청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헨리 8세가 즉위한 후, 그의 이혼과 결혼 문제로 교황청과 갈등을 빚으면서, 1534년 영국 의회는 수장령을 선포하고 로마 교회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이제 영국 내에는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계열, 로마 가톨릭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려는 계열, 그리고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아 교회를 개혁하려는 개신교 계열특별히 청교도들로 나뉘게 되면서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은 아주 복잡하게 빠져들게 된다.

헨리 8세 이후 에드워드 6세는 개신교를 옹호하는 입장에 선다. 그러나 1553년 그가 죽고 피의 여왕 메리(Bloody Mary)가 등장하면서, 다시 상황은 바뀐다. 그녀는 에드워드 6세에 의하여 이루어진 모든 개혁 조치들을 폐지하고, 로마 교회에 돌아가, 1554년 영국에 대한 교황권을 회복시킨다. 한편 메리의 박해는 역으로 영국 내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반 카톨릭 감정을 더욱 고조시키고, 유럽에 망명한 사람들에게는 대륙의 종교 개혁 사상을 보다 확실하게 배워 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들이 돌아온 후 영국에서는 보다 거센 개혁의 물결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1558년 메리 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다시 개신교 쪽으로 기울었다. 그녀는 로마 교황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에드워드 6세의 기도서를 개정하여 예배에서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모든 교회 안의 장식이나 성직자의 복장 등은 에드워드 재임시의 규정을 따르도록 하였다.

1603년 엘리자베스가 죽자 영국에는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영국은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 6세를 데려다가 영국 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도록 하였다. 그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두 나라의 이름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한 나라를 만들고자 하여, 영국교회의 감독제를 수용하도록 함으로써 장로 직제를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교회와 갈등을 일으켰다.

1625년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절대 왕권 정책을 계속 추진하였고, 특별히 William Laud를 기용하여 종교 정책을 펴는데 도움을 받았다. 그는 영국 교회를 강화하고, 모든 의식과 복장과 예배를 통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찰스는 영국 의회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고, 나아가 스코틀랜드에서는 거센 저항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별히 그는 1633년 라우드(Laud)를 동행하고 스코틀랜드를 공식 방문하였는데, 그곳의 교회 구조와 예배 형태가 영국교회와는 너무 다른 것을 놀랐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1636년 스코틀랜드 교회가 존 낙스의 예식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대신 영국 교회의 기도서(Laud's Liturgy)를 사용하도록 하고, 즉석 기도와 장로 제도는 금지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1637년 마침내 에딘버러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1638년 “국민 계약”(National Covenant)을 맺고 자유를 선포하였다. 그 해에 그래스 고우 대성당에서 총회가 소집되어 1610년 이래로 지속되어오던 감독제를 폐지하고, 장로제도를 다시 확립하였으며, 왕의 예식서를 거부하는 대신에 “공동 예배 규범서”(The Book of Common Order)를 사용토록 하였다. 이에 찰스 왕은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서 영국 내부 사정도 더욱 악화되어, 왕을 지지하는 세력과, 개혁 세력 중심의 의회파 나뉘어 싸우게 되었다.

 

2) 스코트랜드 교회의 개혁

중세 후반기를 지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스코틀랜드에도 종교 개혁의 물결이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의 아버지는 바로 John Knox(1515?-1572)이다. 그는 1553년 영국에 친 로마 가톨릭 정권인 메리 여왕이 등장하면서, 프랑스의 프랑크푸르트로 망명해서 영국인들을 위해 목회를 하다가, 에드워드 기도서에 대한 그의 비평적 입장 때문에 분열이 생겨서 칼뱅이 종교개혁을 하던 제네바로 가서 칼뱅의 열렬한 제자가 되었다.

1555년 후반 낙스는 잠시 스코틀랜드에 귀국하여 머물렀는데, 약 9개월이 체류 기간 동안 그는 스코틀랜드 국민들 사이에 퍼져 있는 개혁에 대한 열망을 확인하게 되었다.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낙스는 스코틀랜드 개혁 세력의 요청에 따라 1559년 5월 귀국을 하게 된다. 그는 귀국하여 개혁 운동을 열렬히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개혁 세력은 이제 국회의 지배 세력이 되어 1560년 낙스가 기초한 칼뱅주의적 신앙고백을 신조로 채택하고, 1주일 후에는 교황권을 배격하고 미사를 금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 때부터 스코틀랜드의 교회는 왕과 귀족의 손을 떠나 평민의 교회로 자리를 잡게 된다.

1560년에는 소위 제 1회 스코틀랜드 총회(General Assembly)를 열고, 그 다음에는 “제 1 교회 치리서”(First Book of Discipline)를 국회에 제출하여 장로교회 조직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려 하였다. 또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모든 축일은 폐지하고, 주일만 지키도록 하였으며, 공중 예배를 위해 일명 “낙스의 예전”(Knox Liturgy)이라 부르는 “공동 예배 규범서”(The Book of Common Order)를 작성하여 1564년 총회에서 승인 받았다.

낙스는 1572년 사망하게 되는데, 그 이후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왕(제임스 1세)이 되면서 두 나라가 같은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나 낙스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에는 Andrew Melville(1545-1623)이 개혁을 계속하면서, 장로교를 정립하고 체계화하는데 공헌하게 된다.

 

3)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예배모범

1603년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영국 청교도들은 “1000인 청원서”를 제출한다. 그 결과 1604년 Hamton에서 회의 가 열리게 되었고, 그들은 거기서 감독제도보다 장로제를 도입할 것과 개혁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직 성경 번역만 허락되어 “King James Version”이 나오게 되었다.

1625년 찰스 1세가 즉위하면서 “감독 없이는 참 교회도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절대 왕권과 감독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는 라우드(Laud) 주교를 기용하여 영국 내 모든 교회의 의식과 복장과 예전을 통일하려 하였다. 그의 종교 정책과 세금 제도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지배를 하고 있는 의회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찰스는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1629-40년까지 국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마침내 1637년에 에딘버러에서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1638년 국민 계약을 맺고 감독제를 폐지하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이에 격분한 찰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고, 1640년 국회를 소집하였으나, 국회가 비협조적이자, 이를 바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손해 배상을 해야 하는 찰스 왕은 1640년 다시 국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국회에서 향후 2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당시 의회에는 청교도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의회 내의 종교위원회를 설치하기 위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회의이다. 이 회의는 1643년 7월에 시작하여 1648년 2월까지 계속 되었다.

처음 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위원의 수는 총 151명이었다. 위원은 121명의 성직자들과 30명의 평신도로 이루어졌는데, 평신도 중 10명은 상원 의원이었고, 20명은 하원 의원이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장로교 계열의 청교도들이었고, 회중 교회파와 영국 국교회에서 몇 명 참석하였으며, 특별히 스코틀랜드에서는 참관인 자격으로 목사 4명과 평신도 2명이 참석하였다.

회의 장소는 웨스트민스터로 하고, 그 이름은 “웨스트민스터 성총회”(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로 칭하였으며, 폐회 때까지 1163회의 모임을 가졌다. 이 회의에서 저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대. 소 요리 문답” 그리고 “공중 예배 모범”(Directory of the Public Worship)등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에 그대로 수용되어 장로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예배로 사용되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특기해야 할 사항은 그 동안 우리는 이 회의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과 요리 문답을 대표적으로 만든 회의로 먼 생각하는데, 사실 이 회의는 예배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이 회의는 무엇보다도 예배 모범을 최우선적으로 취급하게 되어서, 70회가 넘는 회의를 거치면서 1644년 예배 모범을 국회에 제출하여 1645년 1월 국회를 통과하게 된다.

그 내용은 전문 위원 자격으로 참관했던 스코틀랜드 교회 대표들이 자기의 총회에서 연구되어진 것들을 가져와서 제출한 것은 거의 만장일치로 채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통과된 「예배 모범」, 「신앙고백」, 「교리문답」 등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여 총회에서 통과시킴으로서, 장로교회의 신앙과 예배와 조직을 정립하게 되었다. 이로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모든 면에서 확고한 장로교에서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 때 만들어진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말씀의 예전

 

예배의 부름“다같이 하나님께 예배드립시다.”

기원(Prayer of Approach)경외, 찬양, 성령의 임재를 위해

구약봉독한 장을 읽음

신약봉독한 장을 읽음

운율 시편송성경봉독 전이나 사이에

고백과 중보의 기도

설교

기도

주기도문

 

다락방 예전

 

봉헌(Offertory)구제 헌금

성찬 초대사

성물 배열

성찬 제정사

권면

성찬기도(Prayer of Consecration)

입례 기도(Prayer of Access)

창조와 섭리에 대한 감사기도

구속에 대한 감사기도

말씀과 성례전에 대한 감사기도

기념(Anamnesis)

축성기도(Epiclesis)

성체분할(Fraction)

분병분잔(Delivery)

성찬 참여집례자가 먼저 받음

권면참된 삶을 위한

성만찬 후의 감사기도

운율 시편 찬송(시 103편)

축복기도

 

이미 존 낙스의 예전에 대해서 공부할 때에 소개하였듯이, 이 예배모범(Directory for Worship)은 그 기본정신과 표현에 있어서 제네바 예식서와 큰 차이를 발견하기는 힘들지만 그 구조와 내용의 형성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예배모범에 실린 강조점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

(1) 주일 성수는 철저히 준수하도록 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서 모든 준비를 하도록 강조하였다. 이 날의 준비는 오락이나 운동이나 불필요한 노동을 삼가도록 하고 주일 예배를 위한 준비 기도를 권장하였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는 독서와 말씀의 명상, 병자의 심방이나 자선의 손길을 펼치는 날로 보내도록 하였다.

(2) 예배의 분위기는 엄숙하고 진지할 것을 강조하고 어떤 성상이나 무덤을 참배하는 것을 엄금하고 옆 사람과의 대화, 왕과 같은 특수한 인물이 들어 올 때의 경의 표시, 기타 목사를 괴롭히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도록 명시하였다.

(3) 주일 예배의 시작은 죄의 고백으로 시작하여 예배자들이 용서받은 몸으로 예배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예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가장 우선적으로 실천해야할 예배행위는 하나님께 참회하고 용서받는 것임을 강조한다.

(4) 세례 성례전은 필요한 경우 언제나 공적인 예배 시에 목사가 예배모법의 예식을 따라 집례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아세례는 아이 아버지의 신앙고백과 청원을 중요하게 여겼다. 회중들은 이 시간을 자신이 세례를 받았던 과거를 회상하고 점검해 보는 시간으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5) 설교 전의 기도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설교자의 죄까지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도록 하였다. 이 부분에 해당된 기도문의 실제는 매우 길게 제시된바 있다. 그리고 감사의 예물은 이 기도 전에 드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기록된 기도문 보다는 즉흥적인 기도를 장려하여 중요한 기도의 유산을 상실한 바 있다.

(6) 성경봉독은 가급적이면 66권이 차례대로 봉독할 것을 권장하였으며 분명하고 엄숙하게 봉독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성경읽기는 보편화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7) 설교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의 사역에 가장 위대하고 탁월한 부분으로 정의하였다. 일을 위하여 설교자는 성경의 원어를 비롯한 신학. 문학, 과학의 지식을 소유해야 함을 당연시하고, 이 막중한 소임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령님의 임재에 의하여 보다 확실히 조명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8) 성찬 성례전을 자주 갖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집례 할 목사가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문제와 제네바에서 년 4회의 성례전의 관례는 이곳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회수를 정기적으로 지키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9) 성찬 성례전 의식에 있어서 제정의 말씀을 읽도록 하였고, 그 말씀의 적용을 간단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분병 분잔이 끝난 다음에도 집례자가 주님의 살과 피에 흠이 가지 않도록 성결한 삶을 살 것을 간결하게 강조하도록 하였다.

(10) 성찬 참여의 형태는 수찬자들이 쯔빙글리가 시도한데로 앉아서 받는 것이 아니라 모두 성찬상 앞으로 12명씩 나와서 받도록 하였다.

(11) 예배 찬송은 시편에 그들의 고유한 운율을 사용하여 불렀고, 악기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2. 미국 장로교의 정착과 성장

미국에 대한 식민지화가 유럽의 여러 족속들을 미국 땅에 유입시켜 놓았듯이, 유럽의 여러 교파들이 신대륙에도 그대로 이식되었다. 그러므로 북미 대륙에는 유럽의 다양한 기독교 교파들이 그대로 전해지고, 이러한 현상은 교파간의 종교적인 자유를 그 땅에서 허용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장로교가 그 중의 대표적인 교파이다.

 

1) 장로교의 정착과 조직

신대륙의 장로교는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해서 들어왔다. 첫째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민하면서 들어오게 된 것이고(청교도 장로파 계열), 두 번째는 18세기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대 이민 때 들어온 경우이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 대 이민은 18세기 초에 시작되어 중엽 이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들이 미국 장로교의 주된 구성원을 이룬다. 이들은 주로 뉴햄프셔, 버몬트와 메인, 메사츄세스, 펜실바니아, 메릴랜드, 버지니아, 캐롤라이나, 조지아 등으로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 후 유럽으로부터 계속 흘러 들어오는 이민들로 인해 장로교인들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1716년 장로교는 자체적으로 필라델피아 대회(Synod)를 조직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네 개의 노회, 즉 필라델피아, 뉴 캐슬, 롱 아일랜드, 그리고 스노우 힐 노회로 나뉘게 되었다.

 

2) 대각성 운동과 분열

1730년 이후 독립전쟁까지의 기간은 장로교가 미국의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려가면서, 영적 각성을 체험하고, 기관들을 설립하고, 지도자들을 양성하면서 발전해 나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 17세기 말은 신대륙이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태였고, 종교적인 열성도 청교도 후손들에게서 식어져 가고 있었으며, 교회에는 형식적인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런 현상들은 새로운 영적 각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1730년대를 기점으로 조나단 에드워드(1703-1758)와 조오지 휘필드(1714-1770)같은 인물들을 통해서 제 1차 대각성 운동을 일으키게 하셨다. 휘필드의 영향은 미국 장로교에도 크게 미쳤다. 그 결과 장로교인들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놀랍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런 발전과 함께 장로교는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했는데, 그것은 영적 대각성에 대한 입장의 차이 때문이었다. 영적 대각성 운동에 대하여 두 가지 입장이 나뉘어졌는데,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이었다. 여기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New Side(신파), 부정적인 사람들은 Old Side(구파)라 하였는데, 이들은 1741년 구파의 구성원들은 필라델피아에서 대회를 열고, 신파의 구성원들은 뉴욕 대회를 열어 각각 결별하고 말았다. 그 결과 미국 장로교는 최초로 나뉘어 지면서 1758년 다시 통합될 때까지 두 개의 진영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 전반적인 분위기는 대각성 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장로교 지도자들 중에서도 젊고 유능한 사람들이 대부분 신파에 있었기 때문에, 1758년 두 측은 결국 신파를 중심으로 다시 합의를 하여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3) 독립전쟁기의 교회

18세기의 마지막 25년은 미국의 혁명시기였다. 영국과 식민지 주들 간의 갈등은 1775년 전쟁으로 발전되어, 1776년 미국은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고, 전쟁은 178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미국의 종교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종교의 자유였다. 그 동안 유럽의 대부분 교회들은 국가 교회의 형태로 국가의 간섭을 받아왔으나, 이제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함으로서, 각 교파들은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받는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장로교인들은 포함한 많은 미국인들이 이 기간 동안에 미국의 독립과 독립 전쟁을 위해서 지원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장로교회는 사무관이나, 군인으로, 또는 군목으로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장로교인들은 영국에서 이민을 오게 된 동기가 종교적인 박해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영국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히 높았다.

1780년대 미국의 종교적인 상황은 전쟁 중에 있는 국가처럼 자신들도 매우 어수선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독립은 교회에도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도록 하였다. 교회들은 각기 조직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체계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장로교회도 마찬가지로 미국 장로교 총회를 구성하기 위한 대회를 필라델피아에서 모였다. 여기서 대회와 노회들은 공중 예배와 교리, 직제, 치리의 내용을 포함한 장로교회의 헌법과 함께 새로운 “미국 예배 모범”(American Directory for the Worship of God)을 채택하였다. 1786년 필라델피아 대회에서는 노회 수를 12개에서 16개로 늘렸고, 4개의 대회로 편성하였으며, 총회를 구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789년 제 1회 장로교 총회가 모여, 뉴욕 제일 장로교회의 John Rodgers(1727-1811)를 총회장으로 선출함으로써, 역사적인 미장로교 총회가 출발하게 되었다.

독립 전쟁은 미국의 정치적인 면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시기였다. 미국이 정치적 독립과 자유를 얻었듯이 미국의 교회들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미국 내에서의 종교적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미국이 국가 체계를 위해 헌법을 제정한 것처럼 교회들, 특별히 장로교회도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교회 정치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4) 제 2차 대각성 운동

대각성 시기에 미국 전체는 종교적인 새로운 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독립 전쟁 이후 전쟁의 시기를 거치면서, 종교적인 관심들이 식어져 버렸다. 합리주의적 사고가 확산되고, 이신론적인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 도전들이 심화되고 있었다. 교회는 영적으로 침체되고 있었다.

이 때 기독교의 영적 각성을 위한 새로운 움직임들이 동부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제 2차 대각성 부흥운동이다. 이 운동은 차츰 서부로 퍼져 나가게 되었는데, 1795년 예일 대학의 학장 Timothy Dwight를 중심으로 일어난 부흥의 물결은 다른 대학으로 옮겨갔으며, 19세기 초 20년 동안 미국의 영적 상태를 새롭게 하였다.

특별히 이 운동은 서부로 전파되면서 크게 부흥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순회 전도자들이 나타나 설교를 하고, 야영집회와 영적인 체험 현상들이 나타나고, 특별히 이 운동의 영향은 장로교에 많이 나타났다. 이 때 활동했던 대표적인 부흥사가 바로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 같은 사람이다. 이 운동의 결과로 선교 활동이 활발해져서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 선교를 위해 헌신하게 되었으며, 많은 대학과 신학교들(Union, Columbia, McCormick...)이 장로교를 중심으로 세워지고, 초교파적인 연합 기관들과 자선 단체들이 조직되고, 기독교 신문이나 잡지들이 발간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장로교는 두 번의 중대한 분열이 일어났다. Cumberland지방에서 부흥운동에 대한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뉘게 되는데, 찬성하는 세력들을 중심으로 컴버랜드 장로교회가 형성되었다. 두 번째는 켄터키 지역에서 부흥회 지지 세력인 New Light파가 중심이 되어 이탈하기도 했다.

 

5) 남북 교회의 분열, 그리고 재연합

제 2차 대각성 운동이 지나고, 미국 교회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교회의 내적인 문제도 아니요, 신학적인 문제도 아니었다. 미국 사회의 문제가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의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노예 제도였다. 노예문제는 급기야 남북 전쟁으로 비화되었고, 교회도 남북으로 나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1837-38년 미국 장로교회는 또 다른 분열의 고통을 당하는데, 그것은 구학파(Old School)와 신학파(New School)의 대립이었다. 분열의 원인은 신학과 교회 정치와 개혁 등의 입장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노예 문제가 큰 문제였다. 1836년 뉴욕 유니온 신학교가 신학파의 영향으로 설립되고, 프린스톤 신학교는 구학파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1837년과 1838년 총회를 거치면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 후 시민전쟁(1861-65)이 다가오기 전인 1857년에 신파 장로교회가 다시 분열을 하고, 1861년 구파 장로교회가 나뉘어졌다. 그러다가 남쪽의 신구파가 1864년에 연합하여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로, 북쪽의 두 파는 1861-1870 사이에 연합하여,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로 부르게 되었다. 남쪽 교회들은 남북 전쟁 기간을 통해서 노예 제도를 찬성하는 입장에 섰고, 북쪽 교회들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서 싸웠다. 전쟁은 북쪽의 승리로 끝났으나, 그들의 상처는 쉽게 아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로교 연합 운동은 계속해서 일어나 1906년에 PCUSA와 CPC(Cumberland Presbyterian Church)가 다시 결합을 하는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1950년대 초까지 미국은 PCUSA, PCUS, 그리고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장로교회인 UPCNA(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 등 세 계열이 장로교회로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8년에 PCUSA와 UPCNA가 연합하여 UPCUSA(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1983년 조지아주 아틀란타에서 남북 장로교 총회가 연합으로 모여 통합을 선언함으로써, 미국 장로교회는 모든 분열의 역사를 매듭짓고 새로운 출발을 이루게 되었다.

 

3. 장로교의 예배

1) 장로교 예배의 신학

장로교의 예배 신학은 개혁교회의 사상을 기초로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장로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했으며, 예배의 초점은 언제나 하나님의 초월적인 주권(majesty)과 그 앞에 선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에 맞추어졌다. 이것은 마치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과 부르심 앞에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사 6:1-8) 이런 기본적인 개혁교회의 근본 사상에 근거한 장로교 예배 신학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로교 예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한다.

장로교회는 칼뱅의 전통에 따라 교회와 예배와 모든 생활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삼았다. 그들은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성경과 선포된 말씀으로서의 설교를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그래서 장로교 예배에서 성경을 봉독하는 것과 설교를 하는 시간은 예배의 가장 중심 부분을 차지하였다.

 

둘째로, 장로교의 예배는 계약신학(covenant theology)에 근거를 두고 있다.

칼뱅에 의하여 만들어진 선택 교리는 인간들의 어떤 공로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인 선택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에 의하여 성립이 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우리는 그 분 앞에 나아가 예배를 드리고 그 분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장로교의 세례는 하나님의 계약 공동체로서 주님의 몸인 교회로 들어오는 의식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과 같다. 성만찬 역시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에 이루어지는 계약식사(covenant meal)요, 주님이 임재하신 계약의 표징(covenant sign)이다.

 

셋째로, 장로교 예배는 성령의 역사를 중요시한다.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성경의 권위를 확증시키는 분도 성령이시오, 선포되어지는 설교도 성령의 능력과 자유 안에서만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성례전 신학에 있어서도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만이 성례전들은 유효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세례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와 성만찬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성만찬도 성령님의 임재에 의해서 우리는 주님을 체험하게 된다는 영적 임재설을 믿는다.

 

넷째로, 장로교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이성이나 이해력으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높고 비밀스러운 것들을 보게 한다. 믿음은 계시에 대한 통로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있도록 하고, 그것을 통하여 주어지는 선물들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사람의 입을 통하여 다가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세례도 믿음이 없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세례는 믿음의 종속물이여...만일 세례가 믿음이 없이 주어진다면 이것은 사악하고 신성 모독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이루어진 세례는 강력하고 실제적인 은총의 수단이 된다. 세례와 함께 성만찬에 있어서도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받는다. 믿음에 의하여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로교의 예배 신학에 있어서 초대교회 신자들의 믿음은 예배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칼뱅은 모든 예배의 근거를 사도행전 2:42에 두고, 초대 교회 성도들이 드렸던 예배를 모델로 하여, “말씀, 기도, 성만찬, 교제(구제헌금)”를 예배의 가장 기본적인 틀로 생각했다.

이상과 같이 장로교 예배 신학은 말씀의 신학, 계약 신학, 성령의 역사, 믿음, 초대 교회의 전통에 근거한 역사적인 예배를 중요시 한다.

 

4. 미국 장로교 예배의 변천사

미국 장로교는 예배에 관한 두 가지의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예배 모범(지침)(Directory of Worship)이고, 또 하나는 예배서(Service Book)이다. 예배 모범은 교회 헌법에 실린 것으로서 교회의 법적 권위를 가지고, 장로교 예배 신학과 예배를 위한 적절한 지침들을 제시한다. 이것은 예배 순서를 예시하지는 않고, 예배 순서를 위한 기준과 규범을 제시한다. 그러나 예배서는 예배 지침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예배에 관한 순서(order)와 예문(text)들을 제시해준다. 개혁 교회에 있어서는 예배서가 예배 모범 보다 훨씬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미장로교의 예배의 변천 과정을 공부하는 가운데 한국 장로교 예배의 뿌리를 살펴보도록 한다.

 

1) 16-17세기의 예배

16세기의 개혁 교회들은 예배서들을 사용하였다. 쯔빙글리, 부처, 칼뱅 등은 회중들을 위한 예배 형식들을 모두 준비하여 사용하였다. 칼뱅의 후예인 존 낙스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기도 예식서”(The Formes of Prayers)를 발간하여 사용하였고, 그것은 곧 “공동 예배 순서집”(The Book of Common Order)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무렵 영국에서는 “예배서”로 말미암아 영국 국교회와 정부 측과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졌던 청교도 간에 갈등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이는 스코틀랜드와도 갈등을 가져 왔다. 영국 국교회와 정부는 자신들의 예전으로 영국 전체를 통일시키려고 한 반면에, 대륙의 종교 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배를 개혁하려 했던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 교회는 국교회의 예전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다. 이런 결과는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심화되었고, 드디어는 청교도 측의 승리로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1644년에 그 유명한 “The Westminster 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를 만들게 되었다.

이 예배 모범은 미국 장로교 예배 지침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 인들이 신대륙에 정착하게 될 때, 이들은 미국 장로교회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이들은 신대륙에 이주하여 예배서에 대하여는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고, 그 대신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을 기초로 하여 예배를 드렸다. 식민 시대의 미 장로교회는 1644년도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1788년 미국 장로교를 위한 개정판이 나와 총회에서 채택되어 그것을 사용하게 되었다.

 

2) 19세기의 예배

19세기 중반에 미국 장로교와 기타 개혁교회들 사이에는 하나의 새로운 운동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예전 전통을 회복하고, 예배서를 활용하는 가치를 깨달은 것이다. 이 때 장로교에서는 개인적으로 예배서들이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그 좋은 예가 1855년 Charles W. Baird(1828-1887)가 「장로교 예배서」(Presbyterian Worship)를 발간한 일이다. 이러한 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북장로교의 출판사들을 자극하여 예식서들을 발간하려는 움직임을 일게 하였다. 그러나 예식서가 정식으로 먼저 나온 곳은 1894년 남장로교에서였다. 북장로교는 9년 후에 총회에서 예배서를 요청하는 긍정적 반응들이 나오게 되었다.

 

3) 20세기의 예배

(1) 공동 예배서(The Book of Common Worship, 1906, 1932, 1946)

1903년 북장로교(PCUSA)는 예배서에 대한 요구가 차츰 증대되어가자 예배서를 발간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06년에 “공동 예배서”가 출간되었다. 이것은 미국 장로교회로 하여금 예배를 만드는데 있어서 예전적인 순서(order)와 예문(text)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1906년 공동 예배서는 미국 장로교 예배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이것은 주일 아침과 저녁 예배 순서를 포함하고, 그리고 성만찬 집례, 교회력에 따른 절기, 세례와 입교 문답에 대한 순서와 예문, 시편송과 찬송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06년판은 1932년에 다시 개정되었는데, 여기서는 절기에 대한 예문이 첨가되고, 기초적인 성서일과가 포함되었다. 특별한 것은 남장로교 총회가 이것을 사용하도록 승인하였다는 사실이다.

1946년이 이 공동 예배서는 다시 개정되는데, 여기서는 에큐메니칼 예전학자들과 종교개혁가들의 예배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들이 반영되었다. 이것은 주일 낮 예배와 밤 예배 그리고 성만찬 집례에 관한 자료들이 더 보강되었다.

 

(2) 예배서(The Worshipbook, 1970)

1955년 북장로교 총회는 또 다른 개정판을 요구했다. 여기는 남장로교 뿐만 아니라. Cumberland 장로교회도 함께 참여하여, 1970년에 “The Worshipbook Services”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가, 2년 후에 “The Worshipbook-Services and Hymns”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의 공헌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용어를 현대화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주일 예배를 말씀과 성만찬 예배로 분명하게 규정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예배서는 제 2차 Vatican 공의회 이후 각 교회들이 예배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하게 됨으로써 다시 개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된다

 

(3) 1993년 공동 예배서 (Book of Common Worship)

1980년 미북장로교 총회는 새로운 예배서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Cumberland 장로교회와 함께 새로운 예배서를 만들려고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이 때 남북 장로교회가 연합하는 일이 1983년에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연합된 미 장로교회(PCUSA)는 1989년에 예배 모범(지침)을 다시 개정하고, 이 예배 모범과 조화를 이루는 예배서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993년에 출간된 가장 최근의 미 장로교의 예배서인 “Book of Common Worship”이다.

 

5. 미국 장로교 예배 순서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미국 장로교 예배서에 나타난 예배 순서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대로 미 장로교회의 예배 예식서는 1906년부터 시작하여, 1932, 1946, 그리고 1970년, 1993년 판으로 되었다. 그 중에 1906, 1932, 1946년판은 거의 차이가 없고, 그 이후에 1970년과 1993년은 대폭 수정이 이루어졌으므로, 우리는 그 중에 대표적으로 1946년과 1970년 그리고 1993년판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The Book of Common Worship(1946)

1946년 “공동 예배서”는 크게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예배를 위한 준비로서 예배자와 집례자의 준비, 개회 기도와 찬양대 기도문을 제시한다. 2장은 공중 예배를 위한 순서들을 주일 아침 예배, 특별 예배, 저녁 예배, 아동 예배, 청년 예배, 연도 등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 3장은 성례전과 교회의 예식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유아 세례, 성인 세례, 입교, 타교인의 수찬, 성찬 준비, 성만찬, 환자에 대한 성만찬과 심방시의 성경, 결혼, 장례, 목사 후보생 승인, 목사의 안수와 취임, 장로의 안수와 취임, 집사의 안수와 취임, 교회 건축 및 봉헌, 오르간이나 성물 봉헌 등을 취급하고 있다. 4장은 기도에 관한 것으로서, 교회력에 따른 기도와 국가 기념일에 따른 기도, 특별 용도나 은혜를 위한 기도, 봉헌 기도, 축도, 용서를 위한 기도, 가족 기도, 등을 예시하고 있다. 마지막 5장에서는 성서 일과를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주일 낮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참고로 본 예배서는 주일 낮 예배에 관하여 5가지 형태를 예시하고 있다)

 

주일 낮 예배 성만찬 예배

예배의 부름 예배의 부름

경외의 기도(Adoration) 기원

십계명

죄의 고백 죄의 고백

용서의 확인 용서의 확인

시편송 영광송이나 송가 또는 찬송

제 1성경 봉독 서신서 봉독

찬송이나 교송 복음서 봉독

제 2 성경 봉독

신앙고백 신앙고백

찬송이나 교송 찬송

감사기도 설교

간구 찬미

중보의 기도 봉헌

성도의 교제 초대사

봉헌 성물 현시(uncovered)

찬송이나 교송 성찬 제정사

설교 예비 기원

찬송 떡을 들어 쪼갬(성체분할)

축도 잔을 듦

집례자 수찬-장로수찬-회중수찬

감사기도

찬송

축도

 

2) The Worshipbook(1970)

“예배서”는 미국의 Cumberland 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PCUS), 그리고 북장로교회(UPCUSA)가 연합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배서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미국 장로교회가 연합하여 만든 장로교 예배서라는데 그 의의가 크다. 그리고 이 예배서는 현대 영어를 예배에 사용하도록 채택하였으며, 찬송도 현대적인 것들로 하였다.

예배의 구성은 첫째, 예배를 위한 준비에서 예배 전 기도, 십계명 등을 기록하고, 둘째, 공중 예배를 위한 순서에서는 성만찬을 포함한 예배, 세례를 포함한 예배, 성례전이 없는 예배에 대한 순서를 먼저 제시하고, 다음으로 순서에 대한 해설이 이어진다. 해설과 함께 된 내용은 주일 예배, 세례, 입교, 성만찬, 아침 기도회, 저녁 기도회, 애찬식, 결혼식, 장례, 안수와 취임식 등이다. 셋째는, 연도가 한 장으로 취급되면서 보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공동예배서”와 다른 점이다. 연도에는 산상 수훈, 고백의 기도, 중보 기도, 감사 기도, 교회를 위한 기도, 교회의 일치를 위한 기도, 교회의 이름들을 위한 기도,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 국가를 위한 기도, 근로자를 위한 기도 등이 제시되어 있다. 넷째로 교회력에는 강림절, 주현절, 사순절, 종려주일과 성주간, 세족 목요일, 성금요일, 부활절, 승천절, 오순절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다섯째로 기념일로서 새해, 교회 연합 주일, 세상과 나눔 주일, 종교개혁 주일, 추수감사절, 국가 기념일 등에 관한 예배를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에 성서일과, 기타 기도문, 가정에서 사용할 기도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일예배 성만찬 예배

예배의 부름 예배의 부름

찬양의 찬송 찬양의 찬송

죄의 고백 죄의 고백

용서의 선언 용서의 선언

응답송 응답송(영광송, 찬송, 시편송)

성령 임재 기도 성령 임재 기도

구약 봉독 구약 봉독

신약 봉독 신약 봉독

설교 설교

신앙고백 신앙고백

회중을 위한 기도 회중을 위한 기도

평화의 인사 평화의 인사

봉헌 봉헌

감사의 기도 초대사

주기도문 감사기도

찬송 주기도문

위탁 성만찬

축도 응답송

찬송

위탁

축도

 

3) Book of Common Worship(1993)

이 공동 예배서는 1983년 남북 장로교회가 연합한 후, 1989년에 예배 모범을 개정하고 여기에 맞추어서 나온 예배서로서 그 가치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예배서의 특징을 보면,

첫째, 예전적이면서 자유로움을 인정한다(form and freedom). 예배의 순서를 제시하되 어디까지나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에큐메니칼적이다(ecumenical convergence). WCC의 B.E.M. 과 함께 이 예전은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셋째, 개혁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reformed and catholic). 이 예배는 종교 개혁가들의 정신을 따르면서도 기독교의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다.

넷째, 지역적이면서도 우주적이다(local and universal).이 예배는 미국 회중들의 관심을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는 기독교 예배의 우주성을 갖고 있다.

다섯째, 이 예배서에는 다른 예배서에 포함된 안수나 취임, 기타 절기에 따른 예배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가진 이 예배서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예배를 위한 준비: 예배 전 기도, 십계명, 예배 인도자를 위한 기도

(2) 주일 예배: 주일 예배 순서와 각 순서에 따른 세부 예문이 제시되고 있다

(3) 교회력: 교회의 절기에 따른 예배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4) 세례

(5) 매일 기도회

(6) 시편송

(7) 기도(연도)

(8) 결혼식

(9) 장례식

(10) 목회 예식: 환자 사역, 불참자에 대한 성찬 등

(11) 성서일과

 

그리고 주일 예배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주일 예배 성만찬 주일 예배

모임(Gathering)

예배의 부름

오늘의 찬송 또는 개회 기도

찬송, 시편 또는 영가

죄의 고백과 용서

평화의 인사

송가, 시편, 찬송 또는 영가

말씀

성령 임재를 위한 기도

첫 번째 성경 봉독

시편송

두 번째 성경 봉독

교송, 찬송, 시편송, 송가 또는 영가

복음서 봉독

설교

초청

찬송, 송가, 시편송, 또는 영가

신앙의 확증(신앙고백)

(목회 예식: 세례등)

회중의 기도(중보 기도)

평화의 인사

 

성만찬

봉헌 봉헌

성만찬 초대

감사기도 대감사기도

주기도문 주기도문

분병

회중의 수찬

 

파송

찬송, 영가, 송가 또는 시편송

위탁과 축복 기도

 

이 예배의 몇 가지 특징을 보면,

첫째로, 찬양의 형태를 다양하게 하여 찬송가나 시편송이나 영가나 송가 중에서 선택하여 부르게 함으로써, 예배 인도자의 선택의 폭을 넓혀놓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개혁 교회의 전통에 따라 죄의 고백과 용서가 예배의 시작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평화의 인사가 앞부분과 뒷부분에 등장하고 있는 점은 회중과의 교류적인 측면에서 좋다고 본다.

셋째로, 칼뱅의 전통에 따라서 성경 봉독 전에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가 있으며, 성경은 현재 전 세계의 개신교회가 함께 쓰고 있는 “공동 성서일과” (The Revised Common Lectionary, 1992)를 따라 세 번 나누어서 봉독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는, 설교 후에 초청의 순서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대각성 부흥운동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다섯째는, 봉헌, 신앙고백, 찬송 등의 모든 순서들을 설교 후에 둠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하나님께 응답하도록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섯째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 예배가 성만찬을 하지 않을 때에도, 그 형식에 있어서는 성만찬의 순서를 갖는 예배처럼 짜여져 있다는 점이다. 즉 성만찬이 없는 때에라도 그 예배의 순서에서 봉헌 후에 감사기도를 넣음으로써, 원래 주일 예배는 성만찬이 있는 예배가 원칙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칼뱅을 비롯한 모든 개혁가들이 회복하고자 했던 초대교회의 예배의 모습이다.

 

III.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청교도 전통으로 시작된 장로교 예배의 신학과 그 역사에 대해서 공부했다. 결론은 장로교예배는 개혁교회 전통에 가장 우뚝 선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예배가 말씀을 중심으로 서 있다는 것이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칼뱅을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이 그토록 회복하고자 했던 초대교회의 말씀과 성례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예배의 모습을 회복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지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렇게 개혁교회의 전통에 가장 굳게 서 있는 미국 장로교회의 예배를 전수 받은 한국교회의 예배가 그 실제적인 모습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미장로교회의 예배의 모습 내지는 개혁교회의 예배의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미국에서 일어난 대각성 부흥운동과 특별히 19세기에 미국 대륙을 풍미했던 Frontier Tradition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은 미국에서의 두 번에 걸친 대각성 부흥운동과 19세기의 “변방전통”에 의해서 많이 왜곡되고 변질되어 버렸고, 바로 그 변질된 예배의 전통이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과 예배세미나 제 15강

 

미 서부 개척기의 예배전통

(Frontier Tradition)

 

1. 들어가는 말

현재 이민교회를 포함한 한국교회의 예배의 형식은 시대적으로 볼 때 19세기 북미 지역을 강타한 소위 “개척자 전통”(Frontier Tradition)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한국교회는 주로 미국교회의 선교를 통하여 형성되었으며, 그 결과 한국교회의 형성과 예배의 형태와 신앙생활의 가르침은 모두가 미국 교회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성이 강하고 순수하여 아무런 비판 능력이 없었던 한국교회로서는 그들이 전해준 예배와 가르침이 전부인 줄 알고 지난 세기를 보내 왔다. 그러나 특별히 미국교회가 우리에게 전해준 예배는 미국이라는 세계와 그 문화권에서 많은 변화를 거쳐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다. 즉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예배는 종교개혁가들이 회복하고자 했던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많이 이탈된 예배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9세기에 미국 전역을 강타했고, 거의 모든 교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개척자 전통(Frontier Tradition)에 대해서 알아봄으로 그것이 한국초대교회의 예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또 오늘날까지 교회의 예배에 어떤 문제점들을 갖게 하였는지를 알고자 한다.

 

2. 몸 말

1) 미 서부 개척기의 상황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합중국은 1800년대에 들어서 부터는 아무런 제한이나 간섭이 없이 자유롭게 연방정부의 확산과 서부를 향한 개척의 발길을 내딛기 시작했다. 이런 결과 미국의 19세기 초는 인구의 이동이 급속도로 진행이 되었고, 동부 중심의 미국사회는 이제 남부와 서부로 그 영토의 확장을 이루게 된다. 이 때 동부에서 서부를 향한 인구의 이동이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글도 있다.

 

“끊임없이 서부로 가는 물결은 최초의 정착지대서양 연안지대를 넘어 해안으로

흐르는 강을 넘어, 그리고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서 흘러 들어갔다. 1800년에는

미시시피와 오하이오 강의 계곡이 가장 크게 발전되어 가는 변방이었다....19세기

초엽의 이와 같은 막대한 인구의 이동은 놀라운 속도로 구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신 지역을 낳게 하였다. 새로운 주들(states)이 가입하여 오는 사이에 미시시피강

동쪽의 정치도 안정되어 갔다. 불과 6년 내에 6개 주가 새롭게 창설되었다”

 

이러한 인구의 대이동은 하룻밤 사이에 새로운 변방에 거주지가 생기고, 이 개척자들은 황무지에 불을 질러 길을 만들고 농토를 만들어 식물을 재배하고 사냥을 하면서 정착을 해 나갔다. 이들은 처음에는 쉽게 소유할 수 있는 토지를 개간하여 정착하는 농업 위주의 일을 하였다. 그러나 이어서 이런 사람들을 따라 움직이는 직업인들로서 의사, 변호사, 언론인, 각종 기술자, 정치가 등이 줄을 이어 개척지를 찾아 왔다. 그리하여 점점 그 규모는 커져 갔고, 사람들의 종류도 다양해져 갔다. 그러므로 이 개척의 대열에 합류한 사람들은 각각 다른 전통과 교육과 문화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개척지의 세계는 사람들에게 있어 과거의 경력이나 문벌에 따라 신분의 귀천이 차별화되지 않는 새로운 무대가 되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따라 스스로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자유와 환경이 보장된 곳이었다. 그러므로 점점 더 이 개척 사회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창의력과 용기와 개인적인 정열과 의지가 이 개척 사회에서는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구조의 형성은 후에 미국이 실용주의(Pragmatism)현실주의(Realism)가 가장 활발하게 꽃피는 고장이 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구조와 사상의 출현은 자연적으로 교회의 존재와 그 해석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들은 청교도와 같은 미국의 초기 정착민들 처럼 새로운 땅에 우선적으로 예배당을 짓고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삶의 터전을 만드는 따위는 옛 이야기로 치부하였다. 물론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개척자들이 결코 하나님을 외면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배나 신앙생활을 외면하고 정착하는 데 땀을 흘리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자연적으로 부모 때의 신앙은 사라지고, 불신자의 자리로 물러 앉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교회를 설혹 찾아 나서더라도, 전통적인 교회의 구조와 형태와 의식보다는 간편하고, 부담이 되지 않는 형태의 교회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자연적으로 서부 개척기에 변방에서 새로운 기독교 신앙형태를 낳게 하였다. 특별히 예배의 구조와 내용에도 유럽으로부터 이어진 예전적인 예배를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2) 새로운 예배 전통의 출현: 부흥집회로서의 새로운 전통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의 서부 개척기는 제 2차 대각성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현실에 안주하고 개척과 물질만능에 그 정신이 흐려져가고 있을 때 발발하였던 대각성 부흥운동은 사람들을 다시 한번 신앙으로 돌이키게 하였고, 신앙 안에서 개척의 정신을 바로 세우게 하였다. 그러므로 제 2차 부흥운동의 여파는 회심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19세기 미국전역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경제와 문화와 교육에 뒤지고 있던 남부를 비롯하여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서부로 향하던 개척의 대열에서 이 부흥운동은 연속되었다. 이 개척기의 변방전통(Frontier tradition)에 대하여 자세히 분석을 하고 있는 예배학자 제임스 화이트는 그 모습을 다름과 같이 설명한다.

 

“서부 개척기에 대한 시기는 본질적으로 독립전쟁 이후부터 한 세기를 지칭한다.

지역적으로 그 범위는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서부 연안까지에 달한다. 이 개척기의

새로운 예배전통의 형성이 시작된 것은 켄터키, 테네시 그리고 서부 뉴욕과 같은

지역들이었다. 앤드류 잭슨(1829-1837) 대통령의 시대의 인구의 3분의 1이 애팔래치 아 산맥 서쪽에 살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이 미개척의 땅은 계속적으로 사람들을

산을 넘고 울창한 광야를 지나 더 멀리 서쪽으로 이끌려 가게 하였다”

 

설교중심의 집회의 성격을 띠었던 이 개척기의 변방전통은 기존교회들과의 마찰을 필연적으로 야기 시켰다. 사실 장로교회와 회중교회가 일찍이 1700년대 중반부터 개척자들의 정착지에 개척교회를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동부와 남부들로부터 목사님을 파송하고 노회를 조직하게 한 바 있었다. 그런데 예배당을 벗어나서 천막을 치고 야영집회(camp meeting)를 예배로 대치하는 변방전통의 집회는 탈 예전적인 모습이었고, 그러므로 심한 갈등을 가져오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당시의 부흥집회의 분위기는 기도나 찬양이나 심지어 성경봉독 까지도 설교를 듣기 위한 준비행위로 격하시키고, 기타의 모든 것은 경험이나 회심의 황홀함을 함께 하도록 강조하는 위험한 경지를 보편화시키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분명히 기독교 예배의 역사와 전통과는 어긋나는 예배의 정신이며,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버림받은 영혼들의 구원”이라는 대의 앞에서는 어떤 교회도 적극적인 반대를 할 수는 없었다. 즉 서부로 향한 사람을 따라가면서 전개했던 부흥운동과 그곳에서 진행되었던 예배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예배에 대한 관심보다는 죽어간 영혼의 구원을 위한 말씀의 선포가 시급하였다. 이러한 예전의 외면과 설교 중심의 예배는 후에 동부의 기존교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미국교회의 새로운 세기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3) 변방전통의 집회 내용

실용주의적인 정신에 입각한 이 변방전통의 기본적인 틀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설교를 듣는 준비의 과정으로써 열광적인 찬송의 시간이다. 이 때에는 복음송들과 같이 매우 단순하게 부를 수 있고, 대중적 취향을 나타내는 찬송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복음송은 야영 집회에서의 기도회 또는 전도설교에 정서적으로 분위기를 잡아주기 위하여 태어났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결국 이 시기의 찬송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도록 정서적으로 준비시키는 찬송으로써 그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사람들은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열정적으로 찬송 또는 복음송가들을 불렀다.

그 다음에 이 야영 집회의 두 번째 부분은 복음 전도설교였다. 이 때의 설교의 메시지는 불신자를 회심시키는데 가장 우선적인 주안점을 두었다. 즉 설교의 초점은 언제나 복음 메시지에 있었다. 그리고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도 “구원 아니면 멸망, 회심 아니면 비회심”과 같은 절대적이고도 극단적인 방식으로 회중에게 결단을 촉구하고 회심을 유도해 내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설교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찰스 피니 같은 경우는 자기 부정과 인격의 거룩성 회복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회개의 촉구를 강조하였다.

끝으로 결신자를 앞으로 불러내는 초청의 순서가 이어졌다. 이 야영집회는 설교가 끝난 다음에는 언제나 과거의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싶은 사람들과 그리스도를 새롭게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는 초청이 있었다.

이렇게 크게는 열렬한 준비찬송, 복음 전도설교 그리고 초청의 순으로 이루어졌던 변방전통의 집회순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오르간 주악-찬송-사도신경-기도-주기도문-성가-구약성경 봉독-송영-신약성경 봉독-광고-헌금-설교-초청으로 되어있다. 이것을 보면 이 변방전통의 집회가 한국교회의 예배 순서와 매우 흡사한 것을 알게 된다.

 

4)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의 예배 순서

여기서 우리는 제 2차 대각성 부흥운동 당시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찰스 피니의 예배순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도록 하자. 우리는 이를 통하여 미국의 제 2차 대각성 부흥운동과 서부 개척이 함께 얽혀졌던 시대의 예배가 얼마나 비예전적이었고 설교중심적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전주

(예배를 위한 관현악단이 있더라도 전주에서는 오르간이 사용되어 예배를 위한 분위기와 설교를 경청할 마음을 성령님께 열어놓도록 한다)

기원

송영

찬양

(여기서의 찬양은 찬양대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이 시대 부흥집회에서의 찬양대는 그들의 음악을 통하여 회중들을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하였다. 찬양대가 부르는 찬양은 설교의 메시지를 함축하도록 하였다. 피니는 특별히 찬양대가 복음에 응답하는 노래로 회중들의 가슴을 적시도록 강조하였다)

성경봉독

기도

(여기서의 기도는 경배와 찬양과 감사와 회중을 위한 간구의 내용이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특정의 인물을 호명하는 일도 있었다)

영광송

찬송

(부흥회의 찬송은 회심이 필요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찬송을 부르도록 하였다. 감동을 주는 음악을 통하여 회심을 촉구하는 데 목적이 많았다)

봉헌

설교

결신

(Altar Call이라고 일컫는 이 순서는 설교를 들은 후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심한 사람들과 그리스도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는 순서이다)

기도

결단과 회심의 찬송

(여기서의 찬송은 느리게 부르면서 회개해야 할 심령들이 응답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송영

축도

 

우리가 이 예배 순서를 보면, 이 예배는 모든 것이 복음 전도 설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위하여 충간 중간에 계속해서 찬송을 부르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19세기 변방전통의 집회를 향하여 “찬송 샌드위치”라는 이름으로도 부르기도 한다.

 

5) 개척자 예배전통의 특징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대로 19세기 미국의 서부 개척기의 환경과 더불어 성행하였던 이 부흥집회가 가져온 예배의 내용은 분명히 과거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 예배전통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변방예배 전통은 설교 중심의 집회였다는 사실이다. 이 집회에 있어서 모든 순서는 독자적인 의미와 목적을 갖지 못하고 설교에 초점을 모으기 위하여 준비되었다. 그러므로 설교가 이 집회의 전부로 여겨졌고, 설교가 없는 집회는 예배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설교의 중심적인 내용은 복음적 메시지에 있었다. 이 집회는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의 결단과 회심을 이끌어 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설교의 초점은 언제나 복음의 제시에 있었다.

둘째로 이 변방예배 전통은 그 정신이 실용주의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예배전통을 고수하던 이들은 교회가 역사나 전통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그것들이 오늘의 장에 얼마나 실용적이며 효과를 가져오느냐에 따라 예배의 내용과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찰스 피니 같은 이는 예배의 진정한 가치는 실용적인 효과성에만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제임스 화이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약 1800년부터 개척의 대열에 합류하여 지역을 옮겨가고 있었던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야 했던 특수한 목회 환경에서 기존 예배와는 차이를 나타내는

새로운 예배전통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것은 당연히 미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새로운

예배의 시도들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성분이 내포되었는데, 하나는 예배에 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적 경향과 또 다른 하나 는 교회 법규집이나 예배서에 의해 금지를 받지 않고 이를 행하는 자유였다. 어떤 의 미에 있어 이것은 무전통이 전통이었으나, 곧 이러한 태도는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셋째로 변방예배 전통은 개인주의적인 영성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집회는 신자 개개인의 회심과 결단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고도로 개인적인 측면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야 어찌하든 “내가” 결단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가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당시에 널리 불려지던 찬송들은 이러한 시대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는데, 이 때의 찬송들은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뚜렷하다. 흥미 있는 것은 이 때의 천막집회에서 널리 불려지던 찬송들과 복음송가들이 오늘 한국교회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 속에 많이 들어 있으며, 지금은 미국에서는 더 이상 불려지지 않고 있는 많은 복음송가들이 여전히 우리의 예배 현장에서는 불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넷째로, 변방예배 전통은 예배에 있어서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예배에서의 기도는 목사가 기도문을 가지고 드렸으나, 이 전통에서는 즉흥적인 기도가 오히려 장려되었고, 평신도들도 이 순서를 맡아 수행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엄숙했던 예배 분위기와는 달리 예배하는 성도들이 감정을 자유롭게 소리내어 표현하게 하였고, 기타의 열광적인 행위들도 수용되었다. 그 결과 소란한 예배의 분위기가 가득하였으니, 이것을 살아있는 예배로 이해하고 있었다.

다섯째로, 변방예배 전통은 전통적인 예배가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그 내용도 철저히 준비하였으나, 이 예배는 언제 어디서나 내용과 절차에 관여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예배를 드렸다는 점이다. 그 결과 아름다운 예배당의 건물이나 예배를 위한 성구들이 가치와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이 전통이 예배당의 구조에 영향을 끼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설교단 중심의 예배당이다.

 

3. 나가는 말

이상과 같은 19세기 변방예배 전통을 다시 한번 요약해 보면, 이 예배전통은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예배의 엄숙한 진행이 아니라, 설교를 통한 인간의 감성과 지성을 일깨우는 집회 중심의 교회로 예배의 성격을 현저하게 전환시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당시의 이 전도집회의 분위기는 기도나 찬양이나 심지어는 성경봉독 까지도 설교를 듣기 위한 준비행위로 격하시키고, 기타의 모든 것은 경험이나 회심의 황홀경을 함께 하도록 강조하는 위험한 경지를 보편화 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것은 분명히 기독교 예배의 역사와 전통과는 어긋나는 예배정신이며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개척자 정신과 실용주의 정신에 입각한 이 예배전통은 한 마디로 예배라기보다는 전도 집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런 형식의 집회와 신앙 형태가 19세기 북미 대륙 전역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것이며, 마치 블랙홀과도 같이 모든 교파들의 예배에 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이 변방예배 전통은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루터교, 퀘이커 등 거의 대부분의 미국의 개신교 예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19세기 말에 바로 이들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한국의 개신교는 그 예배 형태에 있어서 자연히 그들이 전해준 것을 전수 받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예배학자인 제임스 화이트에 의하면 그 실용주의적인 정신에 입각한 변방예배 전통은 현대에까지 그 흐름이 계속되고 있는데, 미국의 흑인들의 예배에서 그 흐름이 계속되고 있으며, 또한 오순절 전통에서도 흐르고 있다. 특별히 현대의 TV 복음전도자들도 역시 이 전통 하에 있는데(로버트 슐러, 제리 팔웰, 오랄 로버츠, 지미 스와가트 등), 이들은 현재도 기본적으로 동일한 예배 구성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대부분 부흥회 예배의 세 가지 형태격렬한 음악이 따르는 예비 단계, 열정적인 설교, 그리고 결신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렇게 19세기 말에 미국에서의 대각성 부흥운동의 열매로 맺혀진 이들이 한국교회에 선교사로 들어와 우리들에게 복음과 함께 이런 집회 형태의 전통을 전해주었는데, 21세기를 맞이한 오늘 한국교회에 이 변방 예배전통은 또 다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최근의 빈야드 운동의 예배를 비롯하여 구도자를 중심으로 드려지는 열린 예배(집회?)와 텔레비젼 복음전도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민교회와 한국교회에 또 다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런 오늘의 예배 형태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노라면, 거의 모두가 다 서부 개척시대에 발생했던 변방예배 전통의 내용과 형태에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과 예배 세미나 제 16강

 

초기 한국 장로교 예배, 1879-1934

 

김 경 진

(부산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예배학)

 

I. 들어가는 말

“한국의 장로교회는 어떠한 예배의 전통을 이어받았을까?”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전하여 준 예배의 신학과 형태는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무엇이 한국 장로교 예배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이 글의 우선적 목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먼저 던져야만 한다. “과연 그러한 질문에 대답할 만한 충분한 자료가 존재하는가?”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예배의 신학과 형태를 보여 주는 자료를 과연 찾을 수 있는가?”

지금까지의 연구는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부정적인 대답을 해왔다. “초기 한국 장로교회는 예배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에 특별한 예배자료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가설이었다. 실제로 한진환은 그의 논문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예배 관련 최초의 공식적인 문서로 1934년에 발간된 「예배모범」을 꼽고 있다. 따라서 1934년 이전의 장로교회의 예배 관련 자료의 발굴과 연구는 아직까지는 미흡한 연구의 영역으로 남아 왔었다.

따라서 본고는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예배 상황, 특별히 초기 한국인들이 예배를 드린 시점(1879)으로부터 한국교회 예배의 형태가 어느 정도 갖추어진 1934년까지의 기간 동안에 발간된 예배 자료들을 발굴하고 그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초기 한국 장로교회 예배의 신학과 형태를 밝혀 보는 데 그 목적을 둔다. 이렇게 함으로써 얻게 되는 다양한 지식들은 ‘과거에 대한 단순한 정보’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한국교회 예배 갱신을 위한 매우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예배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예배 개혁에 대한 이유와 정당성을 제공해 줄 것이다.

 

II. 초기 한국 장로교 예배의 시대적 구분

 

초기 한국 장로교회 예배를 말하기 전에 한국 장로교의 시작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에 의해 한국교회의 시작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시작들이 있어 왔다. 예를 들어, 선교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알렌(Horace N. Allen)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온 1884년이 한국교회의 시작이 된다. 하지만 한국에 교회가 생겨난 것으로 따지자면 소래 교회의 형성(1883)이 한국교회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학적 관점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뱅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거행되는 곳”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동의한다면,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은 한국에 장로교 선교사가 처음 들어온 1884년보다 훨씬 이전인 18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1879년 10월경에 이미 만주에서는 한국인들 30여 명이 정규적으로 모여 한국어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말씀이 선포되고), 그 해에 4명의 한국 사람들이 최초로 그 곳에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성례전이 거행되는 곳)이다.

만주에서 모였던 이 한국인들의 초기 신앙 공동체를 한국교회의 시작으로 보는 데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만주에서 신앙을 얻은 이들이 한국에 와서 초기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백홍준, 이응찬, 서상륜 등의 한국인들은 만주에서 만들어진 성경과 소책자들을 들고 평양과 의주를 비롯한 서북 지방과 서울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하였으며,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1884)하기 전에 이미 한국 내에서 초기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즉, 만주에서 경험된 예배는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이미 원시 한국교회가 드리는 예배의 틀을 제공한 것이다. 따라서 만주교회에서 최초로 한국인들이 세례를 받고 예배를 드린 1879년부터 미국의 선교사들이 들어온 1884년까지의 한국교회 예배는 만주에서 경험된 예배의 독점적인 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84년 이후, 보다 정확히 1885년 미국의 장로교 목사인 언더우드(Underwood)가 감리교 목사인 아펜젤러(Apenzeller) 목사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이후부터, 한국교회는 미국 장로교회 예배의 신학과 형태에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경험을 중시하는 신파”(New School)의 예배신학과 “철저한 청교도적 예배관의 구파”(Old School)의 예배신학이 바로 그것이었다. 1885년부터 미국의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기도회(Prayer meeting)와 기도주간(week of Prayer)을 개최하였는데 이 때부터 한국교회는 미국의 부흥운동(Revivalism)과 청교도주의(Puritanism)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의 예배 신학과 형태를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다른 요소로써 1891년 장로교 선교사들이 받아들인 네비우스 선교 정책(Nevius Method)이 있다. 네비우스 선교 방법은 선교 사역과 교회생활에 있어서 토착민(현지인)의 참여를 극대화하자는 것이었다. 네비우스가 내세운 세 가지 중점(Self-support, Self-propagation, Self-government)은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교회가 스스로 자신의 교회를 책임지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이러한 네비우스의 방법은 한국 장로교 예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예배에 있어서도 “현지인들이 스스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네비우스의 견해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예배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새로운 전통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사경회나 학습 제도, 그리고 연합예배(Union Service) 등은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1907년, 최초로 한국인 목사가 배출되기 시작되면서 한국교회의 예배는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살펴보아야 하는데 첫째로, 예배의 토착화 과정이다. 한국인 목사들이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하면서 초기 한국교회의 저변에 흐르고 있었던 토착적인 예배 형태가 한국교회 예배의 전면에 나오게 되었는데, 잘 아는 대로 새벽기도, 통성기도, 산상기도, 철야기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외에도 추도예배(제사), 낙성식, 환갑연 등의 토속제의(rite)들이 기독교 예배의 형태로 탈바꿈한 것도 이후의 일이다.

1907년 이후에 나타난 두 번째 중요한 예배의 흐름은 공식적인 예배문서들의 도입․발간과 관련되어 있다. 1907년 독노회를 설립한 조선장로교회는 1912년 총회를 구성하면서부터 예배와 관련한 공식적인 교회의 문서들인 예배모범과 예식서 등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907년 이후의 한국교회의 예배는 예배와 관련한 공식적인 문서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으며 발간되었는지를 정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1907년 이후에 눈여겨보아야 할 또 다른 예배의 흐름은 “초기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배에 대한 전략이 한국인 목회자가 배출되면서부터 어떻게 바뀌었는가?” 하는 물음이다. 초기 선교사들이 임시로 채택하였던 네비우스 선교 전략은 한국인 목회자의 배출과 더불어 새로운 국면을 맞았기 때문이다.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한국의 장로교회를 향하여 선교사들이 제시한 1907년 이후의 예배 패턴은 어떠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교회가 차츰 자리를 잡아가면서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선교사 등은 목사지법(1919) 등의 저서를 통하여 이제 한국 장로교회가 칼뱅의 예배 전통을 회복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지만, 이러한 목소리는 간단하고, 부흥회 스타일의 예배에 익숙한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토속적인 악기와 가락 등을 사용해야 한다는 게일(Gale) 등 일부 선교사들의 목소리도 역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1930년대로 넘어서면서 한국교회는 10년이 넘도록 문제가 되어온 신사참배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하였는데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옛것을 추구하는 전통의 회귀 현상(traditum)이 나타나게 되었다. 신사참배의 거부와 함께 새로운 예배 전통을 모두 거부하는 태도가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옛 전통을 지키려는 강박관념에서 나온 것이지만,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한국교회의 예배는 1930년대 이후로 별다른 발전과 형태의 변화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고정된 한국교회의 예배는 이후에 정장복, 박근원 등에 의해서 예배갱신 운동이 시작된 1980년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III. 만주교회와 한국 장로교 예배(1879-1884)

 

일찍이 한국 사람들과 접촉하였던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과 토마스(Robert J, Thomas) 등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한국인들을 위한 선교는 존 로스(John Ross)와 존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에 의해 시작되었다. 1872년 도착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1874년과 1876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문(the Korea Gate, 1842-1915)을 방문하였으며, 그의 두 번째 방문에서 그의 한국어 선생이 된 이응찬을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에 그들은 한국어 성서번역에 매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동참하게 되었다. 결국 1879년 최초로 사도행전과 로마서의 한국어 번역이 완성되었고 자연스럽게 만주교회에는 한국인들이 모이는 예배가 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만주에서 형성된 한국교회는 성경의 한국어 번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성경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접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첫 열매가 1879년에 있었다.

그렇다면 만주에서 한국인들이 경험한 예배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만주에서 한국인들을 선교하였던 로스(the Rev. John Ross) 선교사는 1903년에 자신의 선교를 회고하면서 Mission Methods in Manchuria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속에는 만주교회의 다양한 집회의 종류들이 소개되고 있다. 순회전도(Itinerancy)와 노상설교(Street Preaching), 뒷방(back room)에서 매일 저녁 모였던 저녁집회, 원입교인을 위한 교육, 그리고 세례교인들의 교육, 공적인 주일예배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만주교회에서 한국인들이 경험한 예배의 커다란 특징만을 정리하고자 한다.

만주교회 예배의 특징은 첫째로, 만주교회의 예배가 특별히 성경공부 중심의 모임이었다는 사실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모임이 많았다는 점이 원인이 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 당시 로스의 한국어 성경 번역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만주로부터 배운 한국인들의 예배 전통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경전을 읽고 해석하는 전통에 익숙하였던 동양인들에게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또한 암송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특별히 성경 암송은 세례교인들이 매일 같이 모였던 성경공부에서 자주 권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만주로부터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는 모임의 전통이 자연스럽게 한국의 초기 신앙 공동체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두 번째로, 만주교회의 예배의 특징으로 성숙한 교인을 유창한 기도로 구분하는 만주 선교사들의 잣대를 들 수 있다. 만주교회는 세례받은 사람은 누구나 공적인 자리에서 기도를 인도하도록 훈련하였고, 그들은 그러한 무기를 가지고 한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만주교회로부터 얻은 예배의 특징으로 평신도들에 의해서 인도되는 예배를 들 수 있다. 한국에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가지고 전도하러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평신도로서, 한국의 초기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또한 그 곳에서 예배를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국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자국의 평신도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점에서 그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결국 한국교회 초기의 예배는 평신도들에 의해 드려진 예배였다.

네 번째로, 중요한 만주교회 예배의 특징은 동양의 제의적 습관이 기독교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하였으며, 특별히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은 그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였다는 점이다. 실제로 로스는 만주 지역의 최초의 현지인 목사였던 왕 목사(일명 왕도사)가 새벽에 일어나 손자들과 함께 새벽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을 1903년에 발간된 그의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새벽기도는 동양권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적으로 이루어졌던 토착화한 형태였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백홍준이 서울의 새문안 교회에서 일할 때에 매일 새벽에 일어나 중국어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였다는 기록도 만주교회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만주교회는 결혼 예식 또는 동양의 관습을 추가하여 진행하였는데,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새해의 첫날을 맞는 제사를 기독교적으로 변형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독교 예배의 토착적 요소들은 후에 대다수 미국 선교사들의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연연히 이어지게 되었고, 새벽기도와 추도예배 등의 형태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IV. 미국의 선교사들이 소개한 예배 전통

 

최초로 한국에 장로교 선교사가 들어온 것은 1884년이었다. 의사인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의 입국과 더불어 미국의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알렌 선교사는 처음부터 공식적인 예배를 들리지 않았다. 개인적인 기도와 찬송의 시간을 보내었으며, 무엇보다 황실을 통해 점진적으로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노력하였다. 본격적인 미국의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85년이었다. 미국 장로교 목사인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미국 감리교 목사인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입국한 후 선교사들은 공식적인 영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황실에 요청하였다. 한국인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던 이 영어예배는 그렇게 해서 1885년부터 시작되었다.

1884년 이후로 한국에 들어온 서구의 선교사들은 대부분 미국의 청교도(Puritanism) 전통과 부흥운동(Revivalism)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이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남겨준 예배 전통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발전한 기도주간(week of prayer)을 우리에게 소개하였다는 점이다. 선교사들은 그들만이 영어로 예배를 드리던 1885년부터 이미 기도주간을 지켰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주일 동안 특별한 선교의 주제를 가지고 기도를 하였던 것으로 열정적인 기도의 주간을 보내곤 하였다.

1887년에 처음으로 한국교회가 세워진 후에 바로 1888년 1월에 한국인들은 기도주간을 지켰다. 또한 그들은 가능한 자주 기도모임(집회)을 갖곤 하였다. 결국 이러한 전통은 한국교회에 부흥운동의 씨앗이 되었고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기도를 중시하고 신앙의 부흥을 열망하는 교회가 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전하여 준 예배 전통은 교단의 예배 전통에 연연하지 않는 탈교파적 예배 전통이었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적 열정 때문에 교단적 정체감이 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각각 한국어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1887년을 보내면서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는 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John Wesley)의 언약예배(the Covenant Worship) 전통인 야성회(the Watch Night Service)를 공동으로 드릴 것을 제안하게 되는데 언더우드 목사가 이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최초의 연합예배가 드려지게 되었다.

후에 이 예배는 송구영신 예배로서 한국교회의 전통적 예배가 되었는데, 한국교회의 예배는 이와 같이 교파간 혹은 교회간 함께 드리는 연합예배가 하나의 특성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후에 한국 장로교회 예배가 장로교회의 교파적 특성을 간직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V.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초기 한국 장로교 예배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던 1885년, 중극 산둥반도에서 일하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 네비우스(John Nevius)는 그의 선교 사역을 정리하면서 Chinese Recorder에 하나의 글(Plant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es)을 발표하였다. 다음해 이 글은 상하이의 장로교 출판사를 통하여 한 권의 책으로 발간되었는데 그 책의 이름은 Method of Mission Work였다. 1889년 이 글을 읽은 언더우드는 네비우스 부부를 서울로 초청하여 두 주간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강의가 끝난 후 그 곳에 모였던 장로교 선교사들은 깊은 기도와 함께 감격적으로 네비우스의 선교 방법을 한국에 적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1년 네비우스 방법에 기초로 한 “The Presbyterian Northern Mission Rules and By-laws”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네비우스 선교 방법은 흔히 삼자정책으로 알려져 있는데, 선교지의 교회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선교의 전략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자립(Self-support), 자전(Self-propagation), 자치(Self-government)를 통해서 한국교회가 스스로 자신의 교회를 책임지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이러한 네비우스의 선교 방법은 선교 사역과 교회생활에 있어서 토착민의 참여를 극대화하는 쪽으로 나타났다. 네비우스의 선교 전략은 한마디로 남자, 여자, 어린이 등 각각의 사람들이 지도자와 교사가 되어 스스로 선교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네비우스는 토착민에 의한 선교가 훨씬 효과적임을 굳게 믿었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이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길 원하였다.

이를 위해 네비우스는 토착민을 대리자로 만들었다. 선교와 예배는 몇몇의 장(長) 훈련을 받은 조사를 통해 기본적으로 구성되어 진행된다. 조사들은 상당수의 교회를 책임지고 지도한다. 이와 함께 각 지역의 작은 교회들(신앙 공동체)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지도자들이란 신앙적으로 잘 훈련된 사람들이 아니라 그 지방에서 평범한 사람들인 상인이나 어부들이다. 네비우스는 이러한 평범한 토착민들이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파하고 예배를 드릴 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정규적인 신학수업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이 예배의 인도자가 되도록 허락하였다. 한국인 목사들이 배출되기 전까지(1907) 한국교회는 이러한 평신도 인도자들에 의해서 예배가 인도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평신도들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토착민 평신도 예배적 주도권(worship initiatives)을 유지하기 위해 네비우스는 예배 인도에 서투른 지도자를 돕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무엇보다 네비우스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예배에서 조직적인 설교를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예배에서 설교하지 말고 성경을 읽고 해석하도록 하였다. 즉, 설교(preaching)가 아니라 성경공부(teaching)를 하도록 권장한 것이다.

둘째로, 네비우스는 예배 인도자들이 함께 모이는 연합예배(Union Service)를 개발하였다. 한두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연합예배를 통하여 평신도 인도자들은 선교사나 조사들의 도움을 받아 앞으로 드릴 예배의 내용을 익히고 가르칠 성경공부의 내용을 익히곤 하였다. 배운 후에는 각 지교회(평신도 신앙 공동체)로 돌아가 예배를 인도하곤 하였다.

셋째로, 네비우스는 성경공부반(Bible Sturdy)의 운영을 제안하였다. 농한기에 6주에서 두 달 동안 계속되는 특별 성경공부로서 이 기간에 신학교육 등이 이루어졌다. 후에 이 성경공부반은 사경회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넷째로, 네비우스는 원입교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예배와 관련한 소책자를 발간할 것을 권장하였는데, 그의 계획에 의하면 이 책에는 몇 가지의 간단한 찬송가와 기도문들, 1년 동안 읽을 성경의 본문들, 그리고 간단한 예배 순서 등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네비우스의 권고를 따라서 마펫(Samudel Moffett) 선교사는 「위원입교인 규죠」라는 책을 1895년에 발간하였다.

다섯째로, 네비우스는 평신도들이 긴 순서의 예배를 인도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임시적이지만 가능한 간단한 예배 순서를 만들어서 그 예배 순서대로 예배를 드릴 것을 권장하였는데, 이 순서를 따라 마펫이 그의 책, 「위원입교인 규죠」에서 설명한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찬미를 부를 것이요(2) 기도를 할 것이요

(3) 성서를 볼 것이요

(4) 교우 중에서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나 기도를 할 것이요

(5) 찬미시를 부를 것이요(6) 성서 뜻을 풀어 가르칠 것이요

(7) 기도를 할 것이요(8) 연보전을 드릴 것이요

(9) 찬미시를 부를 것이요

 

마지막으로 네비우스는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예기간을 둘 것을 권장하였는데, 이것은 선교지의 상황을 고려한 결과였다. 마펫 선교사는 이러한 네비우스의 생각을 실험적으로 즉시 실행하기 시작하였으며, 1894년 장로교회는 유예기간(Probation Period)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도 공적인 신앙고백을 하도록 함으로써 학습 제도가 생겨나게 되었다.

네비우스의 선교 정책이 한국교회 예배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는데, 사경회나 학습 제도, 그리고 구역예배와 같은 한국교회 예전의 큰 틀이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관련이 있으며, 평신도의 예배 참여가 장려되는 예배 전통 또한 이 선교 정책이 우리에게 내려 준 전통이 아닌가 싶다.

 

VI. 1907년 이후의 한국 장로교 예배

 

1. 공적인 예배 자료의 발간

 

1907년 최초의 목회자가 배출되면서 한국교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지금까지 평신도 지도자에 의해서 주도되어 온 예배를 목회자들이 맡게 된 것이다. 1907년 독노회의 시작과 더불어 배출되기 시작한 한국인 목회자들은 1912년 평양에서 최초로 총회가 개최될 즈음에는 상당한 수로 늘어나 있었다. 두 번째 총회였던 1913년 전라노회는 목회자 쓸 예식서(Book of Forms)를 만들 것을 제안하였으며, 총회는 게일(James Gale) 선교사를 비롯한 다섯 사람에게 예식서의 초안을 만들 것을 주문하였다.

1917년 게일 선교사는 예식서의 초안을 제출하였으나 불행히도 이 책은 공식적인 문서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총회는 다시 새로운 예식서를 만들 것을 다른 위원들에게 주문하였고, 새로운 예식서는 1924년에 발간되어 총회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

또한 한국의 장로교회는 헌법과 더불어 예배모범을 초안하였는데, 예배모범의 초안은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선교사에 의해 주도되었다. 곽안련 목사는 1919년 미국 남장로교회의 예배모범을 거의 수정 없이 받아들여 예배모범의 영문 초안을 완성하였다. 이는 헌법의 다른 부분인 정치와 권징 등이 미국 북장로교회의 것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정치적 배려의 결과였다. 이 예배모범은 1921년 교회의 공식적인 문서로 출판되었으며, 1934년 한국어를 사용한 개정판이 발간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공적인 예배 자료의 발간의 과정에 나타나는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예배모범이나 예식서가 한국의 예배 상황을 거의 배려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한국교회에는 다양한 토착화된 예배의 형태가 발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구색을 맞추듯 남장로교회의 예배모범을 받아들인 것 등은 서구 선교사들에게 한국적 예배 형태가 얼마나 무시되었는지를 반등해 주고 있는 듯하다.

 

2. 한국의 독특한 예배 형태들

 

1907년 한국인 목회자가 배출되면서부터 한국교회에는 독특한 형태의 예배들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선교의 초기부터 내려오던 예식들이 한국인 목사들의 배출과 더불어 예배의 표면 위로 올라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선 다양하고 독특한 한국의 예전은 기도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06년 타 지역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존스톤(H. A. Johnston)이라는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와 기도의 실험적 형태로서의 통성기도 사례를 발표하였다. 이후에 1907년 대부흥운동의 시작과 통성기도는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기도 형태로 발전되어 왔고, 조용기 목사 등에 의해 세계 여러 곳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1993년 발간된 「미 감리교 예배서」(Worship Book)에는 한국의 독특한 기도의 형태로 통성기도(tongsung kido)가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외에 새벽기도는 동양적 패턴이 만들어 낸 기독교 예전의 새로운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07년 길선주 목사에 의해 공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과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개인적으로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던 새벽기도가 공적인 예전으로 발전한 것뿐이었다. 이외에도 산상기도와 철야기도 등 다양한 기도의 형태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살펴볼 것은 추도식에 대한 것이다. 1915년 경충노회는 “선조가 죽은 날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며 기도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문의를 하였는데, 이에 대한 총회의 답변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이후에 추도식에 대한 다른 결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추도 예식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예배와 예식에 대한 총회의 이해가 한국교회의 예배 상황과 동떨어져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외에도 추수감사절에 강단을 장식하는 것, 부활주일에 등을 만드는 것, 정초식 등 다양한 형태의 토착화의 과정이 진행되었지만, 현대교회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듯하다.

 

3. 1920년대의 예배갱신 운동

 

평신도에 의해 주도되던 한국교회의 예배는 1907년 7명의 한국인 목사가 최초로 배출되면서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예배에서의 평신도의 역할이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1910년 곽안련 선교사는 신학생과 목사를 위한 강도요령을 발간하였는데, 그 내용은 지금까지 성경공부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바야흐로 목사들에 의한 조직적인 설교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한국인 목사들의 역할은 예배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점차로 평신도를 위해 마련되었던 간단한 예배 순서가 아닌 교파적 특성을 지닌 보다 길고 다양한 예배 순서들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1919년 곽안련 교수는 「목사지법」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는데, 그 책에서 그는 목사들에 의해서 주도될 새로운 예배 순서를 제안하였다. 그 예배 순서에는 칼빈과 장로교회의 전통적인 순서인 죄의 고백과 용서의 선언, 그리고 성경을 순서대로 읽어내려 가는 것과 설교와 관련된 성경을 읽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선교사들은 초기 한국인 목사들이 없는 상황에서 임시적으로 유지해 왔던 평신도가 인도하는 예배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제는 한국 목회자들에 의해서 보다 정규적인 예배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이러한 선교사들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한국교회는 훈련된 목회자들이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신도들에 의해서 드려지던 단순한 예배를 고수하였다. 1932년 새문안교회에서 드려진 예배순서와 1895년 네비우스 정책을 토대로 임시로 평신도들에 의해서 드려진 예배 순서의 초안을 비교하면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예배 순서

(원입교인 규죠 1895)

1932년 새문안교회

예배 순서

곽안련 선교사 예배 순서(1919)

찬숑가를 부르시오.

기도거시오.

 

 

성경을 볼거시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기도할 거시오.

찬숑가를 부르시오.

셩경뜻을 프러 가칠 거시오.

기도거시오.

연보젼을 드릴거시오.

 

찬숑가를 부를거시오.

 

 

 

예배사

찬송

기도-장로 송순명

시편-1편

성경봉독-장로 송순명

 

 

찬송(찬양대)

설교-목사 차재명

기도-목사 차재명

연보와 기도

광고

찬송

축복 기도

 

 

 

총설-성경요절, 기도, 찬송

자복-고백의 기도

찬송

성경봉독-예정된 성경 본문

신경, 사도신경, 십계명 중 하나

찬송

성경봉독-강도와 관련된 본문

공기도

찬송

연보와 기도

광고

찬송

강도

강도 후 기도

찬송

안수 축복

묵상

이상의 비교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교회의 예배는 목회자들이 배출된 이후에도 네비우스 정책으로 마련되었던 마펫의 순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곽안련 선교사가 제안한 고백의 기도라든가, 사도신경의 낭독,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성경 본문 등의 순서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평신도 인도자를 위한 임시적 예배의 형태였던 마펫의 예배 순서가 한국교회에 자리잡게 되었다. 1920년도에 있었던 선교사들의 예배갱신 운동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평신도들이 모이던 집회의 형식을 고수함으로써 참다운 예배의 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한 예배 순서는 1980년도에 새로운 예배갱신 운동이 한국에 소개되기까지 계속되었다.

 

VII. 나가는 말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특별히 한국교회의 예배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만주교회로부터 훈련받은 평신도들이 한국에 들어와 전도하고 가정교회를 설립하면서 한국교회는 평신도들에 의한 예배가 주도되기 시작하였으며, 한국에서 선교 정책으로 받아들인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한국 토착민의 자립과 자치를 장려함으로써 예배에서도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 초기 예배는 간단한 순서가 특징이었으며, 한국교회는 한인목사를 배출하기 시작한 후(1907)에도 계속 초기의 단순한 예배 순서를 사용하여 왔음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서 파악하였다.

그러나 초기 선교사들 중에는 한국교회의 예배가 더 엄숙하고 형식을 갖춘 예배로 발전할 것을 희망하고 신학생들에게 가르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갱신 운동은 불행하게도 결실을 맺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1907년 이후 발전하기 시작한 부흥회와 각종 기도회 등의 영향으로 더욱 비형식적이며, 감정적인 집회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하여 발견된 예배에 관한 초기 한국교회의 정보들은 현재 한국교회의 예배가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알려 주고 있다. 또한 1980년 이후 한국교회에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예배갱신의 노력 등을 통하여 한국교회의 예배 예전이 보다 나은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바란다.

 

 

 

 

 

 

 

 

종교개혁과 예배 세미나 제 19강

 

예배회복 운동과 세계교회의 예배 예식의 동향

그리고 한국교회의 예배 예식

 

I. 들어가는 말

400년 전 종교 개혁가들은 종교개혁을 수행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의 내용 가운데서 예배의 개혁을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로마 천주교회의 예배는 성직자들만의 예배였고, 회중들은 단지 구경꾼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었다. 예배는 형식화되어 있었고, 회중들은 라틴말로 진행되는 예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예배는 회중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는 드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개혁가들은 많은 의식으로 이루어진 로마 천주교회의 예배를 개혁하고자 하였고, 특별히 칼뱅 같은 이는 초대교회의 예배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렇게 초대교회의 전통을 이어받고자 하는 많은 교회들은 그 동안 예배가 창조적이고 신선한 것이 되게 하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19세기말부터 시작되어 20세기까지 계속된 예배 회복 운동(The Liturgical Movement)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 교회의 예배의 현장에는 커다란 두 가지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주의 날에 드리는 예배가 초대교회의 모습대로 말씀과 성찬의 균형 있는 모습으로 회복하게 되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 20세기말에 이르러 로마 천주교회와 개신 교회 모두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용에 관한 일치를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20세기말에 이르러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의 사용과 함께 신, 구교 모두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회복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세계 교회의 커다란 두 가지 흐름이요 발전이다.

그러나 20세기말에 이르러 또 한 가지의 커다란 흐름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주로 북미의 비예전적인 교회들과 독립교회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집회 형식의 예배이다. 이것은 1980년대 이후 소위 구도자의 예배(seekers' service), 열린 예배(open worship)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 집회 중심의 예배 아닌 예배의 흐름이다. 이런 집회 중심의 예배는 199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도 직수입이 되어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고, 현재는 다양한 형태의 현대적 예배(열린예배, 젊은이 예배 등)로 발전되어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본 강의는 이런 커다란 세 개의 흐름 속에 있는 세계 교회의 예배의 흐름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이민교회를 포함한 한국교회의 예배가 이런 예배의 흐름과 어떤 관계 속에 있으며,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II. 몸 말

1. 세계 교회들의 예배 예전 형태

1) 예배 회복 운동 진영의 예배 형태

이미 앞서서 지적했듯이 19세기말부터 20세기 후반까지는 예배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유럽과 북미 지역의 예배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예배 회복 운동(Liturgical Movement) 때문이다. 이 운동은 교회로 하여금 초대교회의 예배와 그 정신을 회복하고자 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예배라 함은 교회가 동방 교회와 서방교회로 분리되기 이전의 예배를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시기적으로 기독교가 국교화되고 제도화되기 이전의 약 3세기 초반까지의 예배를 지칭한다. 이 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 더욱 활발히 진행된 초대교회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로 말미암아 예배 개혁에 관한 여러 가지의 신학적 관점을 가지게 되었는데, 가장 중요하게는 초대교회의 예배와 그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이 회복 운동은 예배에 있어서의 회중의 참여와 예배의 공동체성의 회복, 교회력의 재발견과 예배에 있어서의 성서일과의 사용, 예배의 절기를 상기시켜 주는 교회력의 색과 상징의 사용, 초대교회 교인들의 핵심적인 신앙이었던 부활신앙과 함께 관련하여 성만찬의 회복, 예배 예식서의 발간, 그리고 말씀이 바로 선포되어지고 성례전이 올바로 집례 되어질 수 있는 예배당의 구조 등의 개혁에 그 초점을 두게 되었다. 그 결과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던 세계의 많은 교회들은 이런 면들에 있어서 많은 개혁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전 세계의 예전적인 교회들은 이 운동의 결과로 말미암아, 초대 교회의 예배의 두 개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의 예전]과 [성만찬 예전]을 주일 예배에서 온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배 회복 운동의 진영에 참여한 거의 모든 교회들은 신, 구교를 막론하고 초대교회가 가졌던 예배의 틀인 2중적 구조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말씀의 예전(Word), 성만찬 성례전(Table)이다. 그리고 말씀의 예전 앞에 예배의 도입(entrance) 부분이 있고, 성만찬 예전 뒤에 파송(dismissal)의 순서가 들어감으로 결국 현재 전 세계의 예배 회복 운동 진영의 교회들은 전체적으로는 4중 구조의 형식을 가지게 되었다. 즉 그 구조는 “모임의 예전(entrance)”, “말씀의 예전(Word)”, “성만찬 예전(Table)”, 그리고 “파송의 예전(dismissal)”이다. 이런 예배의 구조는 결국 초대교회에 나타난 예배의 형태를 회복한 것으로, 그 동안 말씀만을 강조하면서 예배의 풍성함을 잃어버린 많은 교회들(특히 개신 교회들)에게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이런 4중적 구조를 회복한 개혁 운동 진영 교회들의 순서를 직접 살펴보는 가운데, 그들의 예배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모든 교파들의 예배를 살필 수는 없으므로 미국교회의 예배 형태에서는 장로교회와 감리교의 예배를 그리고 유럽교회의 예배는 성공회와 루터교 그리고 로마 천주교회의 예배 예전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사실상 이들 교회들은 북미와 유럽을 대표하는 교회들이므로 우리는 그들의 예배를 통해서 세계 교회의 예배의 흐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1) 미국교회의 예배 형태

가. 미국장로교회의 예배 형태

미국의 장로교회는 크게 두 개의 교단으로 나뉘어 있는데, 하나는 PCUSA(Presbyterian Church of United States of America)이고, 또 하나는 PCA(Presbyterian Church in USA)이다. 그 중에 전자는 장로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고, 예배에 있어서도 좀 더 개혁적이다. 이들은 모두 예배신학적으로 그 역사적인 뿌리를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목회를 했던 칼뱅에 두고 있으며, 칼뱅으로부터 예배를 배운 스코틀랜드의 John Knox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John Knox는 칼뱅의 「교회 기도의 양식」(The Form of Church Prayers)에 근거한 예배 예식서를 편찬하였는데, 그 예배서가 낙스의 「기도 양식」(The Forme of Prayers, 1556)이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1645년에 만들어진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서(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 PCUSA는 다른 개혁운동의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4중적 구조의 예배를 가지고 있다. 주일은 한 주간의 첫날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날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주일에는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기억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신 일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린다. 그 동안 여러 번의 개혁과정을 거쳐 마침내 1993년에 만들어진 「공동 예식서」(Book of Common Worship)에 의하면 그들의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모임의 예전(Gathering)

예배의 부름(Call to Worship)

예배의 기원(Prayer for the Day or Opening Prayer)

경배의 찬송/시편송 혹은 영가(Hymn of Praise Psalms, or Spiritual)

고백과 사죄(Confession and Pardon)

평화(The Peace)

찬가, 시편송 등(Canticle, Psalm, Hymn or Spiritual)

 

말씀의 예전(The Word)

조명을 위한 기도(Prayer for Illumination)

제 1독서(First Reading, 구약의 말씀)

시편(Psalm)

제 2독서(Second Reading, 서신서의 말씀)

찬양/찬송, 또는 영가(Anthem, Hymn, Psalm, Canticle, or Spiritual)

복음서 봉독(Gospel Reading)

설교(Sermon)

초청(Invitation)

응답의 찬송(Hymn, Canticle, Psalm or Spiritual)

신앙고백(Affirmation of Faith)

(세례 등의 목회적 의식이 있는 경우 이곳에 들어감)

중보 기도(Prayers of the People)

(평화의 인사, The Peace)

 

성만찬 예전(The Eucharist)

봉헌(Offering)

성찬으로의 초대(Invitation to the Lord's Table)

주기도문으로 끝나는 성만찬 대감사기도(Great Prayer of Thanksgiving, concluding with the Lord's Prayer)

분병분잔(Breaking of the Bread)

성찬을 받음(Communion of the People)

 

파송의 예전(Sending)

찬송/영가 혹은 시편(Hymn, Spiritual, Canticle, or Psalm)

위탁과 축도(Charge and Blessing)

 

나. 미국 연합 감리교의 예배 형태

감리교 예배란 존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와 그의 동생 촬스 웨슬레(Charles Wesley)의 제자들과 후예들 그리고 다른 동역자들(초창기에 이들은 대부분 성공회 교역자들이었다)을 의미한다. 이렇게 요한 웨슬레 형제에 의해서 시작된 감리교회는 초창기부터 예배의 즉흥성, 자발성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와 함께 또 한편으로는 예배 의식서를 사용하는 것을 다 포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1968년에 미국 감리교회의 최대교단인 미연합 감리교회(The United Methodist Church)가 여러 교단을 통합하면서 탄생한 후에, 몇 번의 개정 작업을 거처 1992년에 「연합감리교 예배 예식서」(The United Methodist Book of Worship)가 나오게 되었다. 이 예배서 역시 예배 개혁 운동에 참여한 교회의 특징인 말씀과 성만찬이 통전적으로 이루어지는 예배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감리교의 예배는 여전히 즉흥적이며 자발적 기도 등이 장려되고 있다. 그들의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도입(Entrance)

모임(Gathering)

예배 인사와 찬양(Greeting and Hymn)

개회기도 및 찬양의 찬송(Opening Prayers and Praise)

 

선포와 응답(Proclamation and Response)

조명을 위한 기도(Prayer for Illumination)

말씀(Scripture): 제 1독서(Old Testament)

시편 찬송(Psalm)

제 2독서(The Epistles)

찬송, 또는 알렐루야(Hymn, Song or Alleluia)

복음서 봉독(Gospel Reading, 모두 일어서서)

설교(Sermon)

말씀에 대한 응답(Response to the Word):

찬송(Hymn)

목회 예식(세례, 견신례, 치유 의식, 임직식 등)

신앙고백(Creed)

관심과 기도(Concerns and Prayer, 간단한 중보기도, 간구, 감사기도 가 연도의 형식으로 진행, 목회기도, Pastoral Prayer)

고백/용서/평화(Confession, Pardon, and Peace)

봉헌(Offering, 헌금,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가 봉헌됨, 성만찬으로 초대 하는 찬송)

감사(Thanksgiving, 성만찬)

거양성체(Taking the Bread and Cup, 떡과 잔을 높이 듬)

대감사기도(Prayer of Thanksgiving)

주기도(Lord's Prayer)

분병과 분잔(Breaking the Bread)

성찬을 받음(Giving the Bread and Cup)

 

파송(Sending Forth)

찬송 또는 성가(Hymn or song)

축복과 파송(Dismissal with Blessing)

 

(2) 유럽교회의 예배 형태

가. 영국 교회(Anglican/Episcopal Church)의 예배 형태

흔히 우리에게는 성공회로 알려져 있는 영국교회는 본래 로마 천주교회와 예전 상으로 갈라진 교회는 아니었다. 성공회 예배는 450년을 내려오면서 예전에 있어서 거의 변함이 없는데, 이 예전은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에 의해 만들어진 1549년의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성공회 예배만큼이나 하나의 예배서에 이렇게 오랫동안 의존하고 있는 예배는 드물다. 그들의 공동 예배의 중심은 성찬으로 적어도 매주일과 가능하면 매일 거행한다. 성공회가 1662년 영어로 된 예배서가 나온 후 최근까지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도 20세기에 들어와 예배 회복 운동의 영향으로 각 나라에 따라 새로운 예배서들을 만들었고, 미국 성공회에서는 예배 회복 운동의 영향으로 다년간의 작업을 거쳐 1979년에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채택하였으며, 4세기 동안이나 사용되던 그랜머의 언어를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었다. 1662년의 「공동기도서」를 개정한 1928년의 영국 교회의 예배순서는 다음과 같다.

 

말씀의 예전

주기도문-집례자만

성결을 위한 기도

십계명송키리에(자비송)와 함께

그리스도의 요악된 계명 말씀

본기도(Collect)

서신서

복음서영광송과 함께

니케이 신경

초대기도(Bidding Prayers)원할 경우

설교

 

성만찬 예전

봉헌

성구(읽거나 노래)

헌금

성문준비와 포도주에 물 혼합

특별기도나 감사기도

중보기도-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성자에 대한 추모가 있음

권면

성찬 초대사

고백기도

사죄의 선언

위로의 말씀

입례기도

인사

수르숨 코다

성찬 기도

예비기원

상투스(Sanctus)

베네딕투스(Benedictus)

수난을 기림

성찬제정사와 성체분할

회상(Anamnesis)

축성기도

헌신(Oblation)

결문(Conclusion)과 송영

주기도문

평화의 인사

영성체

성찬 후 감사기도

영광송

평화의 인사와 축복기도

 

그리고 예배회복 운동의 영향으로 다년간 연구 끝에 만들어진 1979년판 미국 성공회의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말씀의 예전(The Word of God)

시편/찬송/찬양(Psalm/Hymn/Anthem)

축복의 인사(회중의 응답)

경배의 찬송(Song of Praise) 또는 자비송(Kyrie)

본기도(The Collect of the Day)

구약의 말씀 또는 서신서의 말씀(One or two lessons)

시편/찬송/찬양(Psalm/Hymn. Anthem)

복음서 봉독(모두 일어섬)

설교(The Sermon)

니케아 신조 (The Nicene Creed)

사람들의 기도(The Prayers of the People, 사람들이 참여하는 일종의 중보기도)

고백의 기도(Confession of sin, 생략 가능)

평화의 교환(The Peace)

 

성만찬 예전(The Holy Communion)

봉헌의 말씀(Offertory Sentences)

봉헌(Offertory)(회중들은 성물의 봉헌시 일어섬)

성만찬 대감사기도(The Great Thanksgiving)

마음을 드높이(Sursum corda)

삼성창(The Sanctus)

성찬 제정사(고전 11:23-25)

기념(anamnesis)

성령 임재의 기도(epiclesis)

송영

주기도

분병분잔(The Breaking of the Bread)

수찬(Communion)

성만찬 후 기도(Thanksgiving after the Communion)

축복(Blessing)과 파송(Dismissal)

 

여기서 우리는 영국 교회와 성공회의 예배 역시 4중 구조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 루터교회의 예배 형태

루터교 예배는 루터가 1523년에 시작한 라틴어 예배의식(Formula Missa, Form of the Mass)을 변경하여 1526년의 「독일어 미사」(Deutsche Messe)를 만들었는데, 이 예식서에 큰 영향을 받았다. 원래 루터는 종교개혁가들 중에서 예배의 이론에 있어서는 가장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한편 그는 실제(practice)에 있어서는 상당한 변화를 시도하여서 모순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루터는 본래 외적 형식이나 구조가 고정되지 않은 복음적인 예배, 즉 입과 손으로 복음을 고백하는 자들을 위한 예배를 생각했으나, 한번도 그런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형태의 예배든지 도움이 된다면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고정된 형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의 「독일어 미사」에서 예배 순서를 제공했다.

루터 이후에 루터 교회는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발전하였는데, 후에는 게르만식, 스칸디나비아식 그리고 북미식 예전으로 발전하여 나갔다. 그러나 대다수의 루터 교회들의 기본적인 순서는 역시 설교와 성례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예배 회복 운동은 루터교의 모든 분파에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루터교회 역시 그 예배가 4중 구조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각 분파에서 예배서를 제작하였으나, 특히 루터교의 최대 분파인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의 예식서인 「루터교 예배서」(Lutheran Book of Worship, 1978)는 전 세계 루터교회의 예배를 대표하는 것이다.

 

입례(Entrance)

입례송(Entrance Hymn)

인사(Greeting)

키리에(Kyrie, 노래로)

찬양의 찬송(Hymn of Praise, 교송 형식)

그 날의 기도(The Prayer of the Day)

 

말씀(Word)

제 1 독서(The First Lesson, 구약)

시편송(Psalm)

제 2독서(The Second Lesson, 서신서)

찬양

복음서 봉독(The Gospel)

설교(Sermon)

그 날의 찬송(Hymn of the Day)

신앙고백(The Creed, 사도신경 또는 니케아 신경)

기도(The Prayers, 교회와 나라와 궁핍한 자 등을 위한 중보기도)

 

성만찬(Table)

평화의 인사(The Peace)

봉헌(The Offering, 봉헌찬송과 함께)

봉헌 기도(Offertory Prayer)

성만찬 기도(마음을 드높이, 서문경, 삼성창, 제정사, 기념, 성령 초청 등 포함)

배찬 및 수찬 (Communion)

수찬 후 찬송(시므온의 노래, 눅 2:20-22)

성찬 후 기도

 

파송(Dismissal)

아론의 축도(Blessing)

파송

 

다. 로마 천주교회의 예배 형태

그 동안 로마 천주교회는 성만찬 미사를 교회의 가장 중심적인 행위로 지켜왔다. 이를 통해 예배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며, 또한 그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려왔다. 그리고 거의 1500년 이상을 커다란 변화 없이 성만찬 미사 중심의 예배를 드려왔다. 그러나 예배 개혁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선정하여 소집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3년에 예배에 관한 획기적인 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전례 헌장”안에 요약되어 있다. 이 때부터 로마 천주교회의 예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마침내 1970년에는 Roman Missal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의 로마 천주교회의 예배 개혁에 관한 중요한 원칙들은 성경 중심의 예배 회복, 공동체적인 예배의 회복,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예배의 회복, 통일성과 다양성의 추구, 회중들의 능동적인 참여의 회복 등이다.

그런데, 이런 몇 가지 중요한 원칙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로마 천주교회의 예배 역시 크게 4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시작예식, 말씀예전, 성만찬 예전 그리고 마침 예식 등이다.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가 펴낸 “미사 통상문”에 의하면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시작예식

입당

인사

참회

자비송

대영광송

본기도

 

말씀전례

제 1독서

화답송(시편)

제 2독서

복음환호송(알렐루야 또는 다른 성가)

복음서

강론

신앙고백 (니케아 신경 혹은 사도신경)

보편지향기도(신자들의 기도 혹은 중보기도)

 

성찬전례

제대와 예물 준비

예물준비기도

예물기도

대감사기도

 

영성체 예식

주의 기도

평화예식

분병

하나님의 어린 양

영성체 전 기도

영성체

감사침묵기도

영성체 후 기도

 

마침예식

강복

파견

 

2) 비 예전적인 진영의 예배 형태

비 예전적이라는 말은 예배에 있어서 어떤 형식보다는 말씀과 설교, 성령의 은사의 구현들을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 삼는 모습을 말한다. 이런 비 예전적인 예배의 의식을 가진 교파들은 오순절 교회 혹은 은사주의 교회들, 성결교회, 침례교회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말에 와서 더욱 두드러진 모습은 찬양과 경배를 중요시하는 북미의 독립교회들과 집회의 형식의 구도자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이에 포함될 것이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예배 회복 운동에 관심이 없고, 예배의 형식을 배격하는 그런 특징을 지닌다. 그들은 성령님의 사역을 예배의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며, 성령님의 자유로운 활동에 따라 예배가 진행되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들의 예배 순서는 대체적으로 아주 간략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들의 예배는 주로 찬양, 기도, 성경봉독, 설교, 찬양, 기도, 그리고 축도 등의 순서로 진행되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20세기말에 북미에서 시작된 구도자의 예배(Seekers' Service) 또는 열린 예배(Open Worship)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이 예배 아닌 예배의 형식은 오늘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도자의 예배는 “믿지 않는 사람들 누구든지 그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식을 택한 예배 스타일”이다. 이것은 예배에 낯선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접근하기 쉬운 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뜻에서 폐쇄적이기보다는 열려 있다는 개념에서 사용된 말이다. 그래서 흔히 열린 예배라는 말과 혼용하여 쓰기도 한다.

원래 이 예배는 월로 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담임 목사인 빌 하이벨스(Bill Hybels)가 1973년 처음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청소년을 위한 수요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중 불신자 학생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전도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써 특별 행사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매주일 불신자 학생들을 위한 이벤트 형식의 모임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의 구도자 예배의 모체가 되었다. 현재 윌로 크릭 교회 이외에도 구도자 예배의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대표적인 교회로는 1980년 릭 워렌(Rick Warren) 목사가 개척한 새들백 교회를 들 수 있다.

구도자의 예배는 다음과 같은 몇 기자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 첫째,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 대해 사회학적 조사를 통해서 그들을 먼저 이해하고 또한 그들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음악적 효과의 사용, 연극, 드라마, 비디오를 사용한다든지, 대중악기의 도입, 헌금을 하지 않는 등의 방법을 도입한다. 둘째, 예배를 드리는 사람과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예배를 기획한다. 셋째로, 예배 중에 환희와 기쁨, 축하의 요소가 있다. 넷째 음악을 선택할 때 매우 신중히 한다. 즉 구도자의 예배는 현대 음악적인 요소를 많이 사용하여서 고갈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그대로 노래하게 한다. 다섯째, 예배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순서와 순서 사이에 지루하지 않은 요소들을 삽입한다. 여섯째, 구도자의 예배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따뜻하다.

이런 원칙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는 시카고의 윌로 크릭 커뮤니티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의 「구도자의 예배」(Seekers' Service) 순서는 다음과 같다.

 

전주(Prelude: 재즈 구릅, 오케스트라, 록(rock) 그룹, 혹은 컨츄리 밴드의 라이브 음악)

회중 찬송과 인사(Welcome)

보컬 그룹의 음악 연주(Vocal Duet)

드라마(Drama)

성경봉독(Scripture: 회중이 그 날의 주제를 인식하도록 간단한 소개와 함께)

노래(Song)

광고(Announcements)

헌금(Offering: 이 때 구도자들은 헌금을 하지 말도록 광고한다)

메시지(Message: 6-70분간 계속되는 예배 중에서 3-40분이 메시지에 소요된다. 설교가 끝난 후에 간단한 기도와 함께 예배를 마친다)

토론과 교제(Discussion and Fellowship)

 

윌로 크릭 교회는 「신자들을 위한 예배」(Believers' Worship)를 주중에 따로 갖고 있는데, 이 때의 예배순서도 구도자의 예배와 크게 차이가 없다. 신자들을 위한 예배는 다음과 같다.

 

전주(Prelude)

개회인사(Greetings)

경배찬양(Exaltation: 약 20여 분간 회중이 일련의 찬송을 노래하는데, 이는 예배 분위기와 메시지를 듣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함이다)

광고(Family Concerns: 교회 신자들의 공동 관심 사항을 광고)

십일조 봉헌(The tithe offering)

메시지(Message: 45분 정도 계속되며, 성경공부 형식으로 진행한다)

경배 찬양(Exaltation: 예배 찬송을 더 부른다)

마침 기도로 폐회(A Closing prayer)

 

그러나 예배 신학적인 관점과 예배 회복 운동의 관점에서 구도자의 예배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먼저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을 지향한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구도자의 예배는 구도자를, 즉 인간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해도 구도자의 예배는 예배라고 말하기보다는 집회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또 한 가지 구도자의 예배는 결국 그 최종적인 목적이 영혼 구원에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그 예배를 통해서 구도자를 구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 예배는 목적 지향적이고, 실용주의적이다. 그러나 예배를 이렇게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구도자 예배가 가진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회중 참여의 결여이다. 이 예배는 일체의 행위가 인도자들에 의해서만 진행이 된다. 구도자들은 말하거나 행동할 필요가 없으며, 그냥 앉아서 보기만 하면 된다. 헌금도 하지 말라고 광고한다. 그러므로 회중들은 그저 앉아서 들려주는 좋은 음악과, 드라마를 보면서 즐기기만 하면 된다. 예배의 기본정신은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다. 그러나 구도자의 예배는 바로 이 면에서 치명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다.

 

2. 한국교회의 예배 형태

이제 우리 한국교회의 예배의 모습으로 넘어가 보자. 현재 한국교회에는 예배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의 흐름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본 대로 예배 회복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교회들의 흐름이고, 또 하나는 구도자의 예배와 같은 자유로운 형식을 도입하고자 하는 흐름이다.

 

1) 예배 회복 운동 진영의 한국교회들

먼저 우리가 잃어버린 초대교회와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을 회복하고자 하는 흐름은 주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등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 중에 대표적인 교회가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980년도 이후에 전 장신대 교수였던 정장복 교수가 예배 회복 운동을 한국교회에 소개한 이래, 통합 측은 세계 교회의 예배 개혁 운동의 흐름에 발맞추어 예배의 개혁을 시도하였고, 그 동안 예배의 요소들 가운데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들을 많이 회복하였다. 장로교회 통합 측의 성만찬을 포함한 주일 예배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예배를 위하여 나아감

전주

예배의 선언

응답송

예배의 말씀

예배의 기원

 

찬양과 고백

경배의 찬송

언약의 확인

고백의 기도

침묵의 기도

용서의 확신

영광송

 

중보의 시간

기도

주기도

 

말씀의 선포

구약의 말씀

서신서의 말씀

찬양

복음서의 말씀

설교 전 기도

말씀의 선포

설교 후 기도

헌금

(세례 성례전이 있는 경우에는 이곳에 들어간다)

 

성찬 성례전

신앙고백

성찬의 찬송

제정의 말씀

성령임재를 위한 기도

떡을 뗌

참예선언

떡을 받음

잔을 부음

참예선언

잔을 받음

감사의 기도

감사의 찬송

 

위탁과 축도

파송의 말씀

축도

후주

 

이 예배의 순서를 보면 장로교 통합 측의 예배는 예배 회복 운동을 추구하고 있는 대부분의 세계 교회의 흐름과 일치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예배의 틀이 예배 회복운동의 결과 가지게 된 도입, 말씀예전, 성만찬예전, 그리고 파송의 4중 구조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의 예배는 세계 교회의 예배와 비교 분석하여 볼 때, 바람직한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한국의 개신 교회들이 이런 예배의 틀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앞으로 한국교회의 예배는 결국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흐름은 전 세계 개혁교회들의 예배의 흐름이기 때문이요, 보다 더 중요하게는 이것이 바로 예배 회복 운동으로서 초대교회 예배의 모습을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예배의 형식은 그 순서가 논리적으로 잘 연결되고 있고, 전체적으로 예배가 예전적(liturgical)이며, 하나님의 존엄성과 거룩성의 차원이 강조된다. 또한 우주적이고, 보편적이다. 여기서 우주적이라 함은 종교 개혁가들이 회복하고자 했던 초대교회의 말씀과 성찬의 균형 있는 예배에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현재 예배 회복운동의 결과로 말미암아 거의 모든 개신교회들은 초대교회의 예배의 틀에 접근해가고 있으며,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제 2바티칸 공의회 이후 자체 개혁을 이루며 회복하고자 하는 예배도 바로 이 말씀과 성찬의 균형 있는 초대교회의 예배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현재 도입, 말씀예전, 성만찬 예전, 그리고 파송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예배의 형식은 우주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한국교회는 이렇게 세계 교회의 예배 회복 운동과 발맞추어 예배를 계속적으로 갱신해야 할 과제가 있다.

지금 한국교회의 각 교파에는 현대 예배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학자들이 많이 있다. 적어도 10여명 이상의 젊은 예배학자들이 각 신학대학교에서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다 세계 교회의 예배 회복 운동의 흐름이 무엇이며, 그 핵심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단순히 우리에게 120년 전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교회의 예배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 교회의 예배 회복 운동의 큰 흐름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비 예전적 예배 진영의 한국 교회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의 또 하나의 흐름 속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대형 교회들을 중심으로 열병처럼 번져가고 있는 구도자의 집회와 열린 예배의 형식이 있다. 앞서도 밝혔듯이 이 예배의 흐름은 주로 미국의 비예전적인 교회들과 독립교회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집회 형식의 예배이다. 그런데 이 집회 형식의 예배 아닌 예배가 1990년대에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통해서 소개되면서 한국 교회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교파를 초월하여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 실정이다. 많은 대형교회들 뿐만이 아니라, 중소형 교회들도 요사이는 열린 예배라는 이름하에 집회 형식의 예배가 시도되고 있다.

한 가지 흥미 있는 것은 그 동안 구도자의 예배가 처음 한국교회에 소개되었을 때에는 구도자의 집회가 곧 열린 예배로 인식되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에 한국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더 이상 구도자의 집회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본래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구도자의 집회(Seeker's Service)라는 부자연스러운 번역 대신에, 1990년대 당시에 유행하던 “열린”이라는 단어로 의역을 한 것으로 구도자의 집회는 곧 열린 예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시대적으로 1990년대 이후에 한국 사회가 세계화를 통한 열린사회를 지향하면서 열린 교육, 열린 음악회 등의 용어들이 등장하였는데, 바로 이런 시대적인 흐름을 따라 교회 안에도 구도자의 집회가 열린 예배라는 용어로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구도자의 집회가 한국 교회에 소개된 지 15년이 지난 요즈음에 있어서는 더 이상 열린 예배는 구도자의 집회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즉 요사이 한국교회에서는 교파를 초월하여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구도자의 집회와는 별도로 신자 중심의 열린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에는 구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 집회로서의 열린 예배의 개념보다는 기존 신자들에게 새로운 생동감을 주는 예배로서의 열린 예배가 별도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아직 신자 중심의 열린 예배가 그 개념이나 내용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아직은 혼돈 가운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교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열린 예배를 설명하자면, 이는 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형식적이고, 딱딱한 전통적인 예배를 벗어나서 잔치적이고, 시각적이며, 회중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많이 격려하는 생동감 넘치는 예배의 형식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기존의 주일 예배를 획기적으로 수정해서 생동감 넘치는 잔치와도 같은 예배를 목표로 한다. 예를 들어 음악도 기존의 찬송가를 중심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현대 기독교 음악(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을 부르며, 온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한다. 그리고 전통적인 설교보다는 드라마 설교, 간증 설교 등을 하며, 예배 춤(liturgical dance) 등을 도입한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특히 예배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서 이런 새로운 형태의 열린 예배를 조금은 부정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로 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열린 예배는 계속해서 미래 한국 교회에 관한 전망에서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적 상황에서 예배 회복의 일원으로 열린 예배의 적용에 관한 문제는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과제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마지막으로 북미 교회에서 시작하여 아무런 비판과 연구가 안된 채로 직수입된 구도자의 집회와 관련하여 꼭 밝히고 싶은 필자의 경험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구도자 집회의 원조라고 하는 시카고의 윌로 크릭 교회에서의 필자의 경험이다. 찬양, 연극, 베이스 기타 등을 사용한 고막이 울리는 록(rock)음악, 칸츄리 음악, 재즈 피아노, 그리고 유색인종은 거의 보이지 않는 백인 일색의 회중 등, 한 마디로 윌로우 크릭 교회에서의 예배의 경험은 “백인 문화”의 강렬함 그 자체였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시카고 근교의 백인들만이 살고 있는 곳에서 그들의 문화에 가장 알맞은 형식의 전도집회를 시작해서 오늘의 윌로우 크릭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것은 정말 그들에게 가장 잘 맞아떨어진 집회였다. 그렇다면 필자에게 떠오르는 한 가지 질문은 그 백인문화의 결실인 구도자의 집회가 “김치문화권”인 한국교회에 얼마나 잘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사실 구도자의 집회는 역사적으로 그 뿌리가 19세기 미국의 모든 교회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대각성 부흥운동 당시의 “변방 전통”(Frontier Tradition)에 있다. 그리고 그 부흥집회 형식의 변방 집회는 그 집회들의 열매로 맺어진 청년 선교사들을 통하여 120년 전에 한국교회에 소개되었다. 뜨거운 찬송과 열정적인 복음 전도 설교, 그리고 결신자를 불러내는 초청의 단순한 순서로 이루어졌던 변방전통은 선교 초기에 복음과 예배를 모르고 있던 한국민들에게 청교도 선교사들에 의해 전달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가 예전적인 전통이 약하고 집회 형식의 전통이 강한 것은 바로 그 시작에서부터 이런 비예전적인 형식의 예배를 선교사들로부터 전해 받은 이유가 크다.

그런데 이렇게 19세기 말 한국선교 초기에 영향을 끼쳤던 비예전적인 전통이 20세기말에 와서 새로운 미국 문화의 옷을 입고 오늘 한국교회에 또 다시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한국교회에서 구도자의 집회이든지, 열린 예배이든지, 어떤 형태의 예배이든지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추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제는 한국교회의 상황과 한국인들의 문화와 심성을 고려하는 집회나 예배를 계획하고 인도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고민을 하여야 할 것이다.

 

III.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전 세계의 예배의 경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예배 회복 운동 내지는 예배 갱신 운동으로서, 이는 초대교회의 예배를 회복하고자 하는 흐름이다. 이 예배는 말씀과 성찬의 균형 있는 예배, 기록된 말씀과 보이는 말씀인 성례전의 균형을 이룬 예배이며, 그 순서가 논리적이며, 예전적이다. 또한 하나님의 존엄성과 거룩성의 차원이 강조되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이런 전 세계 교회의 흐름에 발맞추어 나가려고 하는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이런 예배 회복 운동은 그 동안 북미의 교회와 예배 문화에 거의 의존하다시피 한 한국교회의 예배의 영역을 전 세계 교회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예배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반면에 또 하나의 한국교회의 예배 경향인 비예전적인 전통, 특별히 그 중에서도 지금도 유행하고 있는 구도자의 집회의 형식을 빌린 열린 예배의 모습은 아직도 한국교회가 북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아쉬운 생각을 갖게 한다. 단순하고, 간단하며, 예배 순서 자체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예배를 복음을 전달코자 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실용주의적인 발상에서 시작된 이런 집회형식의 예배가 우리 교회의 문화와 상황에 대한 심각한 고민도 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한국교회가 선교 2세기도 훨씬 지난 성숙한 교회가 되려면, 예배에 있어서도 전 세계 교회와 발맞추어 나가는 모습과 동시에 우리의 문화권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예배의 형식과 내용을 창출해내는 고민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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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미사통상문」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회, 1996.

 

 

 

Epilogue

 

여기 한국교회의 예배를 바라보면서 가진 한 실천신학자의 꿈이 있다.

 

“우리도 그런 꿈을 한번 꾸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예배의 영광이 회복 되고, 온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가운데로 들어가는 예배, 하나님의 거룩한 광채(holy splendor)와 능력 앞에서 가슴 터질 듯한 감격과 희열을 맛보는 예배, 그리 고 예배 이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선포하는 ‘삶으로 이어지는 예배’가 이 나라 구석구석에 드려지는 그런 꿈을 한번 꾸어볼 수는 없을까? 그리하여 매주일 드려지는 예배마다 유배지 밧모 섬에서 드렸던 사도 요한의 영광스러운 예배가 펼쳐짐으로 비록 고달픈 삶의 현장에 서 있다 할지라도 하늘과 땅 이 잇대어지는 감격스러움을 맛보게 될 그런 예배 부흥의 꿈은 어떨까?...거룩한 예배. 영광스러운 예배, 하나님이 받으심 직한 예배, 하나님의 엄위와 광휘(splendor)에 사로 잡히는 예배, 우리 삶의 ‘무한 중심'(infinite Center)이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자신을 세우는 예배, 그러한 예배를 꿈꾸어 볼 수는 없을까?”

 

이 꿈은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꿈이다. 바로 이런 꿈이 있기에 오늘도 여기저기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특별히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이하여 교회들은 사실 내심 커다란 위기의식 가운데 있다. 기존의 진리체계가 해체되고 상대화되며, 모든 기존의 권위와 전통이 부정되는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기존의 교회들은 당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현재 일부 교회에서는 이런 시대의 도전 앞에 수 백 년 동안 지켜온 예배 전통을 서슴없이 내려놓고 시대와 문화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나가기도 한다. 바이어스(Byars)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배의 방향이 “점진적인 개혁의 형태”(evolutionary pattern)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인 개혁의 형태(revolutionary pattern)”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혼란과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 현장에도 이런 혼란이 가증되고 있다. 소위 "구도자에게 민감한 집회"(Seeker Sensitive Service)가 지난 90년대 초에 한국교회에 소개된 이후에 이제는 그것이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많은 교회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특별히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소위 “열린 예배”는 그 동안의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과 내용을 내려놓고 찬양과 경배를 중심으로 한 역동적인 예배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예배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구도자에게 민감한 집회”는 예배가 아니다. 앞서 이미 지적하였듯이 그것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접하게 하려는 전도 집회이다. 문제는 이렇게 예배 아닌 것이 예배처럼 인식되고, 예배를 수단시하여 어떻게든 사람들을 많이 모을 수만 있으면 어떤 형식이든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모방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무감각이 문제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초대교회의 예전을 회복하여 교회의 예배를 개혁하고자 했던 개혁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 장로교회는 다시 한 번 우리 개혁교회의 예배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 정체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 불변의 요소와 가변적인 요소들은 무엇인지를 잘 구별하여 무질서한 예배의 현장을 끊임없이 개혁하는 가운데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고귀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시편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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