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8 13:51

영적 리더십

5031 0 0
?

단축키

Prev

Next

크게 작게 댓글로 가기
?

단축키

Prev

Next

크게 작게 댓글로 가기

영적 리더십

 

제1장 리더십의 정의

 

사전적 의미에서 리더(leader)란 흔히 ‘단체나 조직의 지도자’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리더십(leadership)이란 ‘지도자의 영향력’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헨리 블랙카비(Henry Blackaby)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회의 리더십 즉 영적 리더십은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리더십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다릅니다.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다른 실정입니다. 그러나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정의가 가장 무난하지 않나 싶습니다.

헨리 블랙카비 목사님은 그의 책 ‘영적 리더십’에서 영적 리더십의 특성을 몇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 영적 리더는 사람들을 움직여 현재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가게 한다.

둘째, 영적 리더는 성령께 의존한다.

셋째, 영적 리더는 하나님께서 책임진다.

넷째,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사람들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다섯째,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한다.

 

헨리 블랙카비 목사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영적 리더는 자신의 리더십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안다. 그래서 단순히 사람들을 하나님이 정해 주신 방향으로 이끄는데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 세대를 향한 목표를 실제로 이루시도록 일한다. 예수님의 리더십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였다.

리더십은 교회 내 사역의 일환이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거나, 학벌이 높다고 해서 교회의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 교회의 리더는 일반 리더와는 다른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한일월드컵 때 우리나라 대표 팀의 감독이었던 히딩크를 잘 압니다. ‘히딩크 신드롬’이 생겼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높았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우리나라 대표 팀을 월드컵 4강에 진입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어느 선수가 자기 몫을 잘 해낼 선수인지를 분별하여 키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스포츠신문기자들이 인정하는 바입니다. 잠재력이 있는 선수를 발굴한 것이 먹혀들었습니다. 월드컵이 끝난 후 ‘히딩크 리더십’이라는 단어가 생성될 정도로 그의 리더십은 탁월하였습니다. 리더로서 리더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닌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치관은 성경과는 여러 면에서 정도에서 벗어나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연고로 어느 누가 잠재력이 있는 리더인지 교회 내에서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 실정입니다. 분별할 수 있는 눈이 거의 없습니다. 그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분을 잠재력이 있는 일군으로 쳐다보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리더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만일 열심히 리더의 가장 주요 요건이라면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리더가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리더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주님의 눈에는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느껴지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하나님은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교회 가운데에서 이것을 하기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선 하나는 우리 모두가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리더로서의 자세와 자질들을 갖추기를 원하십니다. 또, 이 일로 인해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세워져 가기를 원하십니다.

 

리더는 섬기는 자 종입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건물의 철골구조물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철골을 세우는 일은 기초 작업에 해당합니다. 철골이 얼마나 튼튼히 세워지느냐에 따라 건물의 견고성도 더해집니다. 특별히 큰 건물일수록 철골은 더욱 든든하게 세워야만 합니다. 교회 내에서 리더가 어떻게 세워지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세워지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리더 한 사람 한 사람은 이처럼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의 일군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따라가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리더로 세워져야 합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붙고 더해짐으로 건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교회를 건물에다 비유하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부터 22절과 4장 16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처럼 리더십은 매우 중요합니다.

리더십 가뭄은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조지 바나는 “미국 교회는 강력한 리더십이 없어 죽어 가고 있다. 전례 없이 자원이 풍부한 이 시대에 교회는 사실상 영향력을 잃고 있다. 원인은 리더십 부재다. 리더십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헨리 블랙카비는 그의 신간 『영적 리더십』(두란노)에서 이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리더십 이론의 기본 전제는 일견 건전해 보이지만 성경과 상반되는 개념을 부추길 때가 있고 하나님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일반 리더십 원리와 영적 리더십 원리를 구분해서 제시하면서 균형 잡힌 신앙의 눈으로 현대 리더십 원리들을 성경 원리에 비추어 살펴보게 합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헨리 블랙카비가 제시하는 리더의 역할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영적 리더십의 새 정의영적 리더십은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정의에 담긴 영적 리더십의 독특한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영적 리더는 사람들을 움직여 현재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가게 합니다.이것이 영향력입니다. 일단 하나님 뜻을 알면 영적 리더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사람들이 자기 스타일을 따르는 삶에서 하나님의 목표를 추구하는 삶으로 옮겨가게 합니다. 영적 리더가 소임을 다했다면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 뜻에 순종한 상태일 것입니다. 2. 영적 리더는 성령님께 의존합니다. 하나님은 사실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도록 영적 리더를 부르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영적 리더는 역설 속에서 일합니다. 궁극적으로 영적 리더는 사람들 안에 영적 변화를 일으킬 수 없되, 오직 성령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3. 영적 리더는 하나님께서 책임집니다.영적 리더십에는 민감한 책임감이 필수입니다. 학생이 배우지 못했다면 교사가 아직 가르치지 않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못할 때 그들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까지는 아직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4.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사람들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영적 리더십의 최대 장애물은 하나님 뜻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표를 이루시고 당신의 나라를 넓히시고자 온 세상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리더들의 꿈과 목표를 이루거나 그들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목표는 당신의 사람들을 자기중심적 태도와 죄악 된 욕심에서 돌이켜 당신께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영적 리더십의 핵심은 영적 리더가 자신과 자기 조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을 움직여 자신의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 계획에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5.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합니다.여러분은 좋은 점뿐만 아니라 나쁜 점도 보여줄 수 있는 투명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을 포장하는 여러 가지 가면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까? (2)리더의 역할예수님의 모범은 그분의 ‘방법론’속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버지 뜻에 대한 그분의 절대적 순종에 있습니다. 현대 리더십 이론이 말하는 대로 훌륭한 리더는 훌륭한 추종자입니다. 영적 리더는 하나님이 자신의 리더임을 압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영적 리더십에서 열쇠는 아버지가 계시하신 모든 뜻을 잘 간직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리더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의 비전은 그분 자신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리더들에게 당신 대신 큰 꿈을 꾸라거나 당면한 문제를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과 친밀하게 동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보여 주실 때 즉각 그분 뜻대로 자기 삶을 조정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말입니다. 오늘날 기업 리더들은 고사하고 종교 리더들조차 따르고 있지 않은 성경적 리더십의 모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온 세상 그리스도인들이 이 순간 당장 자신의 뜻과 목표와 야망을 버리고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에 철저히 순종으로 반응한다면 세상은 뒤집어질 것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했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지금도 그 때 일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영적 고갈을 경험하는 목회자들을 적지 않게 보게 됩니다. 그런 목회자들은 리더십을 가지고 철두철미하게 일하고, 그리스도인 리더십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려고 애쓰지만, 영적으로는 소진되거나 산만해져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지만 목회현장 가운데서 늘 벌어지는 일입니다. 첨단을 달리고 성공하는데 너무 몰입하여 진정한 첨단이 무엇이며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들과 환호에 유혹되어 그것들을 얻으려는 경쟁에 매료된 나머지, 우리가 영적인 목적을 위해 사는 영적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영적 리더십을 행사해야하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하지만 늘 급한 일로 인해 밀려나게 되는“하나님과의 관계”를 조지 바나의 책 “물 밖의 물고기”(국제제자훈련원) 제9장을 정리해 봅니다. 1. 시간이 흐르면 우물은 마른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졸업 학위처럼 단 한 번의 투자로 문이 열리고, 가치가 더해지며, 장기적 역량이 충분히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리더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신이 가진 것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투자의 결과로 사람들은 성장합니다. 당신 자신을 갱신하고 새롭게 하지 않으면, 리더의 지도를 받으려 하는 이들에게 당신은 더 이상 가치가 없게 됩니다. 당신은 리더로서 당신이 갖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 리더로서 당신이 가진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소유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넓이와 깊이가 성장할수록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 귀하고 소중한 것들을 줄 수 있고, 당신의 리더십은 더욱 바람직하고 의미 있는 것이 됩니다. 2. 하나님을 절박하게 찾으라.

리더십은 단순히 당신의 그리스도인 됨의 한 표현일 뿐입니다. 당신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의 리더로서의 소명과 능력보다 하나님을 깊이 알고 인생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단호한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필사적인 리더들을 찾으십니다. 다윗 왕이 유능한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받은 교육이나(그는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다) 가문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겠다고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배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예배의 증언을 통해 수백만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야곱이 축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씨름하며 보여준 것과 똑같은 절실함과 끈기를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그분이 지명하신 리더들에게서 찾으십니다(창 32:22-32). 3. 영적인 지름길은 없다.

우리는 지름길을 좋아합니다. 심지어 올바른 판단에 반하여 영적 성숙을 향한 길조차 지름길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러한 지름길을 없습니다. 즉 영적 성숙이란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나서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여정으로 인도하는 과정입니다.

 

 

 

 

 

 

 

 

 

 

 

 

 

제2장 지도자를 키우는 목회

 

1. 닮은꼴을 만들라.

교회의 목회철학과 노선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지도자로 양성하라.

 

2. 소수에게 집중하라.

정예화 된 소수에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훈련된 그들이 또 다른 소수를 지도자로 키우도록 하라.

 

3. 실패할 수 있는 자유를 주라.

절대적인 신임을 주어 그들이 대담한 자세를 갖고 모험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라.

 

4. 끊임없이 인정해 주고 지도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라.

그들에게 이미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있음을 인정해주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계속 주지시키라.

 

5. 칭찬과 격려 속에 성장시키라.

그들의 단점이나 약점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독특하고 고유한 능력과 장점을 확신시키고 강조하라.

 

6. 진행과정을 정규적으로 체크하라.

간섭보다는 도움을 주고, 적성과 자질을 개발해 주고자 하는 차원에서 평가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라.

 

7.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하라.

관리자 또는 경영자로서의 자질과 방법을 훈련시킬 뿐만 아니라 영적인 개발을 반드시 장려하라.

 

8.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라.

점검과 공동체 의식을 위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의 모임을 주재하여 자유로운 토론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라.

 

9. 지속적으로 훈련시키라.

인격적인 제자화 훈련에 주력하고 업무 과정에서도 훈련과정을 두며, 봉직 중에도 교육받을 수 있는 그들을 후원하라.

 

10. 모범을 보이라.

가르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역자 들의 눈을 항상 의식하고 말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라.

 

 

 

 

 

 

 

 

 

 

 

 

 

 

제3장 한국 교회의 목회자상

 

1. 연구의 의의와 목적

한국교회에서 ‘목회자 상’은 다분히 구약적이며 특히 제사장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제단, ‘제사, ‘제물’ 이라는 말을 상징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예배용어로 사용하며, 또한 제사장적인 역할과 그 권위를 지나치게 내세우고 몇몇 목회자들은 제사장들이 했던 병자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일을 지나치게 행사함으로 거기에서 야기되는 부작용들을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목회자들이 가장 성별되어야 할 제사장의 모양은 있고 사모하지만 실제생활에 있어서는 제사장적인 규범에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세속적이고 비성경적인 자태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중심, 성경중심의 목회를 하지 않은 결과라고 여겨진다. 물론 목회자의 인식이 나빠지는 데는 일반교인들의 목회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 일반 세상 사람들의 무시나 불신앙적 비판, 질시도 그 원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목회자가 무엇보다도 ‘바람직한 목회자 상’을 정립한다는 것은 시기적절하며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람직한 목회자상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 답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성경에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치며 다스리는 영적목자와 감독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바람직한 목회자 상’이 무엇인가를 성경을 중심으로 밝혀보려는 것이다.

성경에서 본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 상’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제시하신 목회자의 자격을 온전히 구비하고 그의 직무를 생명 바쳐 수행하며, 하나님이 주신 리더십을 끊임없이 개발하여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목회는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아 온전히 구원 얻게 하는 것’ 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목회자가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로서의 소명의식이 투철해야하고, 성경에 제시된 목회자의 자질들을 모두 갖추어야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기 위하여 목회자에게 필요한 리더십을 주셨다. 따라서 목회자는 이것을 잘 개발하므로 그의 목회사역은 더욱 성숙해지고 더 풍성한 열매들이 맺혀지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연구를 통해서

1) 목회자란 누구인가?

2) 목회자의 자격은 어떠한가?

3) 목회자의 직무와 수행방법은 어떠한가?

4) 목회자의 리더십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 를 밝히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성경적인 참 목회자 상’은 이것이라고 분명히 제시하는 것이 본 연구의 의의와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연구의 방법과 범위

연구방법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상을 신구약성경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종 - 지도자’로서의 목회자의 모범이 되신다. 그는 섬기는 자로서 오셨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으뜸이 되고자하면 남의 종이 되며,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마20:26-27). 그의 사명이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서 희생하셨듯이(막10:45), 그의 일생전체가 섬기는 종으로서의 삶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섬기는 종으로서의 삶이 그가 구세주임을 증거 하였으므로 그는 ‘종 - 지도자’ 로서의 좋은 본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성경의 실제 인물들 가운데서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종과 지도자로서의 여러 자질을 목회자의 자질로서 적용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종과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한 사람들을 대표적으로 두 사람만 택하라고 하면 구약에서는 모세와 신약에서는 바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종 - 지도자(Servant-Leader)’의 목회자상을 우리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종들이었다.

 

3. 목회자란 누구인가?

‘목회자’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먼저 목회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목회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목회라는 말은 목사(牧師)의 ‘牧’ 자와 교회(敎會)의 ‘會’ 자가 연결된 단어로서 ‘목회’ 는 목자가 양을 치는 것같이 목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신자들을 진리로 가르치며 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란 목자가 목장에서 양을 치고 기르며 다스리고 보살피듯이, (영적인 목자인 목회자가) 영혼의 목장인 교회에서 양 같은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지도력으로 설교하고 교육하고 지도하며, 보살피고 다스리고 양육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요 봉사자인 것이다.

토마스 오덴(Thomas C. Oden)은 목회자가 목회의 정의를 내리려고 할 때에 만약 그리스도의 목회와 무관하게 정의한다면 이는 가지에서 잘려 말라버린 나무 잎과 같게 될 것이며(요15:1-5)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될 것이라(마15:14)고 하면서 목회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목회자는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부름 받아 안수식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하나님의 자기노출에 전적으로 응답 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양육하도록 따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된 하나의 구성원이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목회자란 말의 어원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4. 목회자의 어원적 의미

목회자란? 한국교회의 독특한 사용어로서 영어에는 Minister, Pastor, Bishop등, 세 가지의 낱말이 있다. 그러면 이 낱말의 어원적 의미를 하나씩 구분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1) Minister

이 용어는 라틴어 Minuere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본래 그 말은 ‘가장 적다, 저하 시키다, 감소시키다, 일과(Lesson)’ 등의 뜻을 나타내며 그 말이 동사 Ministrare로 쓰여서 ‘섬기는 것’(to serve), ‘종속 되어지는 것’(to be Subordinate)이란 뜻으로 통용되어 거기서 Minister라는 말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신약에서 세 가지의 다른 헬라어 어휘를 번역한 것인데 첫째는 διακονοs(Diakonos)로서 ‘노동자, 집사’ 뜻이 있고, 다음은 λειτουργοs(Leitourgos)로서 ‘공공 봉사자, 일하는 사람’ 이라는 뜻이며, 그 다음은 υπηρετηs(Huperetes)로서 ‘제2인자, 보조자’란 의미가 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러한 말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① Diakonos는 그 유래가 확실치 않다. 로버트슨(A. T. Robertson)은 그것을 Dia(통해서)와 Konis(먼지)의 합성어로, 봉사 하기위해 서두르느라고 먼지를 뒤집어쓰는 사람으로 본다.

테이어(Thayer)는 이를 거부하는데, 그는 이것을 Diako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Diako는 Dioko와 동류어인데, 과제나 목표를 추구하는데 근면하고 신속한 것을 암시하는 뜻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Diakonos를 주인격인 다른 사람의 명령을 이행하는 사람으로서 “일하는 봉사자를 대표한다.” 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이 말의 최종적인 의미는 사실상 똑같다. 예수는 명예나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봉사하는 일 그 자체가 기쁨이기에 바로 그 기쁨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란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셨다(마20:26).

같은 본문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교역을 말 하는데 Diakoneo라는 동사를 쓰셨다(마20:28, 참조5:8). 또한 이 말은 보통 ‘종’에 대해서도 씌어져있는 말로‘하인’(요2:5,9),‘섬기는 자’(마20:26, 23:11, 막9:35, 10:43, 요12:26) 등으로 쓰여 지고, 특별히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일군을 가리키는 말로 이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롬16:1, 고후3:6, 6:4, 11:15,23, 엡3:7, 6:21, 골1:7, 23,25, 4:7, 딤전4:6).

 

② Leitourgos는 신약성경에서 이 말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으로 쓰였다(롬13:6, Diakonos로 롬13:4). 또한 하늘의 성전에서 사제직을 맡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용 되었다(히8:6,1:7). 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 이라고 이 말을 한번 썼다(롬15:16).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은 공중예배와 복음의 공중선포를 인도하는 두 가지 개념을 내포한다.

 

③ Huperetes는 ‘아래’를 가리키는 헬라어 υπο(hupo)와 ‘노 젓는 사람’을 말하는 ερετηs(eretes)의 합성어로서, “아래의 노 젓는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시중드는 종이나 하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다른 사람 밑에서 시중드는 하인이나 공무원에 적용되어 왔다(마5:25, 26:58). 그리스도인 이라는 의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 으로서 자기와 아볼로를 가리키는데 썼다(고전4:1). 더욱이 이 말속에는 종속의 의미가 들어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밑에 있는 일꾼들이거나‘양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밑에 있는 하층 목자이다(히13:20). 게다가 바울은 Huperetes를“청지기(οικονομοs)”(딛1:7, 벧전4:10), 또는 “하나님의 신비를 돌보는 사람”(House Manager)과 같은 말로도 사용했다.

그러므로 Minister란 말 속에는 하나님의 종, 일군, 청지기 등으로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발견케 된다. 구약에서는 Minister란 말의 의미를 내포하는 용어 중에 폭넓게 쓰여 지고 있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섬김이라는 단어 “abedah”는 종이나 노예라는 단어인 ”ebed“(에베드-노예라는 뜻) 에 어원같이 “남을 섬기고 쓰이는 일에 종사하는 자를 총칭” 하는 말로서 구약에 799회 씌어 있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사4:8), 아브라함(창26:24), 모세(출14:31), 여호수아(수24:29), 다윗(삼하3:18, 왕상3:6), 선지자아히야(왕상14:18), 선지자(왕하9:7, 21:10), 욥(욥1:8), 이사야(사20:3), 스룹바벨(학2:23), 바울(빌1:1), 야고보(약1:1), 베드로(벧후1:1), 유다(유1:1), 요한(계1:1) 등 하나님의 일의 대행자로 택함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고 있다(시105:42).

이처럼 Minister로서의 목회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본이 되어야함을 이 말의 어원적 고찰을 통하여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Minister로서의 목회자는 성찬을 집행하는 자 곧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교인들에게 상징적으로 공급하는 봉사자이기도 한 것이다.

(2) Pastor

이 용어는 ‘보호한다.’(to Protect)는 의미의 어원에서 유래된 헬라어 ποιμην (Poimen)에서 번역한 말인데, 기본적으로 ‘목자’를 뜻한다. 또한 이 용어는 ποιμην(Poimen)과 같은 뜻인 라틴어 Pastores(사제라는 뜻으로 사용)에서 유래 되었다. 그리고 이 용어는 신약에서 18회나 사용되었는데, 8회는 양의‘목자’와 관계되는 것으로(마9:36, 25:32, 막6:34, 눅2:8,15,18,20, 요10:2), 7회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마26:31, 막14:27, 요10:11-2,14,16), 1회는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말하는 것으로(히13:20), 또 한 번은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쓰였고(벧전2:25), 이 용어가 ‘목사’ 로 번역되어 유일하게 쓰이는 것은 신약 전체에서 단 한번 나타나는 엡4:11이다. 그러나 이 용어의 동사형인 ποιμαινω(Poimaino)는 신약에 11회가 나타나는데 4회는 다스린다는 뜻으로(눅2:6, 계2:17, 12:5, 19:15), 1회는 양을 친다는 말로(눅17:17, 고전9:17), 또한 한번은 자기의 양을 먹이시는 어린양으로(계7:17), 그 외에는 유다서 1장 12절을 제외하고 “그리스도의 무리를 먹이시는 영적목자”(요21:16, 행20:28, 벧전5:2)로 쓰이고 있다.

 

구약 성경에는 ‘목자’ 란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① “가축의 사람들”인데 “목축업으로 사는 자”(Keepers of Cattle)로 개역되어 있으며, 요셉이 친형제를 바로에게 소개 할 때 사용한 표현이다(창46:32,34).

 

② ‘묻다, 구하다, 찾다’는 뜻의 ‘바카르(Baqar)’ 에서 유래된 것으로 ‘목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아모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그가 가졌던 직업을 가리키는 말로 단 한번 사용되었다 (암7:14).

 

③‘양 사육자’, ‘양 관리자’(감시인), ‘목자’ 등의 의미가 있다(왕하3:4, 암1:1). 그리고 이 말은 ‘목자’(Shepherd)로 번역되어 아모스의 직업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고 또 한 번은 모압왕 메사에 대하여 “양을 치는 자”(Sheep Breeder)로 번역 되어있다.

 

④‘돌보다, 기른다, 풀을 먹게 한다, 친다’ 등의 뜻이 있는 동사 ‘예언자(Raah)’ 의 분사인데 명사로서 취급되며, ‘목양자’를 의미한다. 이 말은 구약에 인용되어 있는데 한글 개역에는 ‘목자’ 로 거의 번역되어 75회나 쓰이고 있다. 또한 이 말은 형용적으로 지배자에 대하여 쓰여졌다.(사56:11, 렘3:15, 겔34:2, 슥10:3, 11:5, 13:7)

 

위를 정리하면 Pastor라는 말은 목자가 양을 치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양을 먹이고, 치고, 다스리시는 영혼의 큰 목자로서 지칭하는데 대부분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엡4:11에는 목사로 번역되어 유일하게 쓰이는데, 이를 통해서 목자로서 큰 목자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주님의 양 무리를 먹이고, 치고, 다스리는 목회를 하는자 임을 깨닫게 된다. 특히 예수께서 양들을 위해서 희생제물이 되어 그들을 구원 하시려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자기의 양을 먹이시는 분으로 묘사될 때에도 이 용어가 써졌음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계7:17). 곧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 혹은 일군 및 청지기로서 뿐만 아니라 양을 보살피는 목자로서의 직능이 있으신 분이심을 알 수 있다.

 

(3) Bishop

이 단어는 교회 곧 양떼를 인솔하여 다스리는 ‘감독’ 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헬라어인 ‘Episkopos’(επισκοποs : 관심을 가지고 본다, 돌본다, 살펴본다, 도와준다는 섬김의 사역을 의미한다.)’와 라틴어인‘Episcopus’(초대교회의 지도자를 뜻하는 감독을 의미하는 'overseer'라는 에세네파 직책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의 대응어이다.

70인 역은 이 말을 교회, 국가, 군대의 ‘감독권’, ‘감찰’, ‘조사’ (민4:16, 31:14) 등의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고전적 헬라어에도 나타난다. 또한 이 단어는 사도시대 이후 교회의 성직의 지위에 있어서 성직자의 최고의 지도자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현재 감리교회에서는 최고의 지도자를 ‘감독’ 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 용어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보다는 교회를 다스리는 감독으로서의 목회자의 의미로 지칭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신약 성경에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벧전2:25)” 라고 그리스도 자신에게 적용되어 쓰이고 있으며 바울서신에는 ‘장로(Presbuteres)’의 의미로 자주 언급된다. 이렇듯 ‘목회자’ 란 말을 영어의 Minister, Pastor, Bishop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이나 사용할 수 있고, 또 그 셋을 한꺼번에 사용해서 나타내는 삼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살펴본 바와 같이 Minister는 하나님의 종이요 일꾼이며 봉사자인 동시에 ‘성찬을 집행하는 자를 의미’ 하는데 이처럼 목사는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으로 공급하는 신령한 봉사자라는 의미에서 ‘목회자’란 단어 속에는 얼마든지 Minister라는 말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Pastor 는 ‘목자’ 라는 뜻인데 ‘목회자’ 는 목자가 양을 치는 것 같이 목회자도 교회를 진리로 가르치며 기르는 영적인 목자인고로 Pastor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Bishop은 교회를 다스리는 감독으로서 ‘목회자’가 하는 일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니 ‘목회자’ 란 칭호는 우리만의 기쁨이요 자랑이라 하겠다.

 

5. 목회자의 성경적 의미와 명칭

앞에서 우리는 목회자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목회자의 어원적 의미를 고찰해 보았다. 이런 목회자의 어원적 의미를 성경에서는 ‘목자와 양’ 의 관계 속에서 찾게 된다. 또한 목회자의 이런 직능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그의 양 무리를 보살피는데 필요한 것들이다. 따라서 목자와 양과의 관계는 상호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양’ 이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인간’ 을 비유해서 하는 말이다. 또한 양 무리는 교회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목자와 양’ 과의 관계성을 말할 때 요한복음 10장과 시편 23편을 빼 놓을 수가 없다.

먼저 요한복음 10장을 퀘일 감독(Bishop Quyle)이 “신약에 있는 목자 시편(The Shepherd Psalm)의 대헌장” 이라고 주장 했듯이 이 말씀은 하나님의 종 된 모든 목회자들의 모델로서 ‘선한 목자 상’ 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다음으로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이다. 그는 아버지의 양떼를 지키는 목자로서(삼상16:11)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능력을 행하기도 했던(삼상17:34-6), 하나님의 종이요,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다(삼하2:1-4, 11). 그런데 그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 라고 찬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카일과 델리취는 시편 23편을 “압살롬의 치하에서 반란이 있었던 때에 속하는 것” 이라고 했는데 그런 상황 하에서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다윗이 여호와를 찬양한 것은 과연 여호와께서는 양을 만족시켜 주시는 완전하신 목자이시며 그는 여호와께 속한 양으로서 선한 목자의 모든 은택을 받아 누리며 모든 면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모든 목회자의 모범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며 또한 그의 보살핌과 인도하심을 받는 행복한 양을 바라보게 된다.

더욱이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자기들만 위하고 양들을 괴롭히며 파멸의 길로 몰아넣었던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고 명령 하시면서(겔34:1-10),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모아 좋은 꼴로 먹이고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리라” 고 말씀하셨다(겔34:11-16). 여기서도 우리는 여호와께서 선한 목자이심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다윗이 여호와를 가리켜 ‘목자’ 라고 한 말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확증 되었는데, 그가 하신 말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 선한 목자는 양을 알고(요10:14), 양과 함께 있으며(눅22:27), 양 무리보다 앞서가며 인도하고(요10:3-4), 양을 보호하고(요10:10), 양들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한다(요10:11,15,17,18).

뿐만 아니라 선한 목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 하셨으며 그의 양들을 인도하는 목회자들이 되게 하셨다. 특별히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요21:15)”, “내 양을 치라(요21:16)”, “내 양을 먹이라(요21:17)” 고 세 번이나 목양을 명령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목양을 명령받은 베드로는 ‘장로’ 들에게 다음과 같이 교훈 하였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2-3).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고 세움을 받아 그의 양들을 목양 하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영혼의 목자임을 명심하여 선한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본받아 목회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바쳐 우리를 충성 되이 여겨 맡겨주신 그의 양 무리를 두렵고 떨리는 심정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다스리고 먹이고 보살피고 양육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성경적 목회자가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에서 목회자의 진정한 의미를 간략하게나마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목회자와 관련된 다른 많은 명칭들이 나타나 있는데, 이 명칭들을 목회자란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양떼를 보살피고 치리하는 목자와 감독으로 정리 할 수 있다. 또한 이 목회자는 교사, 전도자, 청지기로서의 사명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명칭들을 7가지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하는 자 이므로 그리스도의 종 혹은 그리스도의 일군(고전4:1, 고후3:6, 빌1:1).

② 주님의 양떼를 보살피는 자 이므로 목자(벧전5:2-4).

③ 그리스도의 교회와 교인들을 치리하는 자이므로 장로 혹은 감독(벧전5:1-3, 딤전3:1-2).

④ 하나님께서 보낸 자이므로 복음의 사신(使臣) 혹은 사자(계2:1, 고후5:20).

⑤ 교훈하고 가르치는 자이므로 교사(딛1:9, 딤전2:7).

⑥ 복음을 전하는 자이므로 전도자(딤후4:5).

⑦ 주인의 위임을 받아 일하는 자이므로 청지기(눅12:42, 딛1:7, 벧전4:10).

이상의 명칭들을 요약하면, 목회자란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양떼를 보살피고 치리하는 목자와 장로 혹은 감독이며, 또한 그는 교사, 전도자, 청지기 등의 사명이 있음을 알게 된다.

특히 목회자와 관련된 다른 명칭들 중에서 “청지기:οικονομοs” 란 명칭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가 있는데, 그것은 1)수탁자로서의 청지기 2)수호자로서의 청지기 3)사도적 가르침의 전승자로서의 청지기 4)경영자로서의 청지기이다. 청지기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수탁자이다(고전4:1). 또 청지기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움을 지키라”는 수호자이다(딤후4:8,13). 그리고 청지기는 사도바울이 선한 청지기로서 그가 가르친 바를 디모데가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사도적 가르침의 전승자’인 것이다(딤후2:2). 더욱이 청지기는 예수님께서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의 복”이 있으며,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고 하신 것처럼(눅12:42,44), 청지기는 경영에 참여하여 효율적으로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적 창조주시며 만물의 소유주이시다(창1:1, 시24:1, 학2:8, 요1:3).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서 언젠가 결산할 날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고(롬14:12), 몸, 시간, 봉사, 재물, 복음 등의 청지기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여야만 한다.

 

6. 성경에 나타난 Minister의 종류와 특성

구약시대에 나타난 목회자상은 시편 23편에서 제시된 목자로서의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 선지자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복음서에 나타난 ‘종-지도자’ 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님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12제자들, 특히 베드로와 그 후 바울에게서 발견 할 수 있다. 그런데 Minister 곧 하나님의 종 혹은 일군으로서의 직분들을 보면 구약에서는 족장들, 민족 지도자들, 사사들, 왕들, 제사장들을 들 수 있고 신약에 와서는 사도들, 선지자들, 복음 전하는 자들, 목사와 교사를 들 수 있다.

 

(1) 구약

구약의 Minister, 곧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적 직분들은 신약의 목회자와 동일시 할 수는 없으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의 일면들을 살피면서 목회자의 그 특성을 밝혀보려고 한다.

 

1) 족장들

하나님의 택한 자손에게 하나님의 종 또는 지도자로서 목자의 역할을 한 족장은 아브라함(창18:19)과 요셉(창37:2) 등을 들 수 있다. 족장들은 가정의 ‘재판관’(창21장, 22장, 27장)이며 하나님과 종족들 사이의 제사장으로서의 직권이 주어졌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고 예배했으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을 각기 자기 가문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의 하나님이 되시며, 하나님은 족장을 축복하시고 그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축복을 받게 된다(창12:2-3, 18:18, 26:4, 28:14).

 

2) 민족의 지도자들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지도자로서 Minister의 역할을 한 지도자는 모세와 여호수아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출3:1-10)와 여호수아(민27:18-23, 수1:1-9)를 그 백성들의 지도자요 목자로 세우셨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내는 임무가 주어졌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3) 사사와 왕들

사사들은 하나님의 영이 주어지고, 그 힘에 채워져 활약한 사람들로서, 주위에 있는 나라들의 압박에 의한 위기에 처하여 군사적 지도를 한 군사 지도자이고, 평시에는 백성을 다스려 인도한 정치적 지도자이다. 그들의 기능은 첫째, 자기 민족을 원수들의 압박으로부터 영웅적으로 구원했다는 점과 둘째, 왕국을 세우지 않고 죽기까지 집정관으로서 지배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시편2:10에 보면 이들은 왕과 대등한 권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호7:7).

다음으로 왕직은 제사장 직분, 선지자 직분과 아울러 봉사직이었다. 그들은 백성을 다스리고 통치하며 관리하고 보호하는 사명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최초의 적극적인 왕인 다윗은 하나님의 권위와 지도력을 소유한 자로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태도와 뛰어난 통치에 의한 나라의 번영으로 인해, 그는 후에 이스라엘 왕의 이상상(理想像)으로 되었다.

 

4) 제사장, 선지자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회중이 바로 하나의 교회였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들을 지도하고 보호하는 것이 곧 목회였기 때문에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구약 시대에 나타난 목회자들 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과 하나 되어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로서 그의 직무는 1)여호와 앞에 있는 성소와 제단에 쓰이는 일(민16:40, 18:5), 2)하나님의 율법을 백성에게 가르치는 일(대하15:3, 렘18:18, 겔7:26, 미3:11), 3)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일(우림과 둠밈에 의해, 출28:30, 스2:63), 이 밖에도 소송을 취급하고 전쟁 시에는 양각 나팔을 불고 언약궤를 메는 일, 또는 문둥병자를 식별하는 일 등을 임무로 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직분을 행하게 하셨다(출18:1).

또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외에 선지자들을 세워서 백성들을 돌보게 했다. 선지자들은 사람들을 회개의 길로 불러 모으고 구속 주의 강림을 선포함으로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다.

특히 이사야 선지자는 범죄 한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사1:8). 또한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는 선지학교를 세우고 목회학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나단과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왕들(예 :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을 위한 특별 목회를 했다. 더욱이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께 잘못된 제사를 드리는 당시의 백성들의 그릇됨을 지적해 주고 올바른 제사를 드리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양들을 지도하게 하셨다(말1:7-14).

 

(2) 신약

신약 성경에 있는 Minister 의 종류는 첫째로 사도, 다음은 선지자, 셋째는 복음전하는 자, 넷째는 목사, 끝으로 교사라고 부른다(엡4:11). 이 중에서 끝에 있는 둘만이 교회내의 평상 직이요, 처음 셋은 주께서 그의 나라의 초창기에 세우셨고 필요에 따라 가끔 부활시키신다.

 

1) 사도들(Apostles)

사도란 명칭은 엄격하게 구분하면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선택된 열 두 제자와 사도바울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 교수가 지적하듯 사도는 바울을 도와서 복음에 시중 든 사도적인 사람들과 사도직의 은사와 은혜가 아울러 부여된 사람들까지도 일컬어진다. 그리하여 사도들은 보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바나바와 다른 동역 자들을 포괄하여 지칭한다.

사도들이 하는 일의 성격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것이다(마28:19, 막16:15). 주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자기를 본받아 그의 몸과 피의 거룩한 상징인 떡과 잔을 분배하라고 명령 하셨다(눅22:19-20). 여기서 “사도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신성불가침의 영원한 법이 부과되었고, 이 법에 의해서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며 성례를 집행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우신 사도들은 온 세상에 복음의 교리를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며 그리스도의 나라를 건설하는 직분을 가진 자들이었다.

 

2) 선지자들(Prophets)

신약성경에서도 선지자들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교회의 덕을 위하여 말하는 은사는 크게 발전되어 졌었다. 그리고 그들은 때때로 비밀을 계시하거나 미래의 사건을 예견하는 도구로 쓰였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단지 예언자들로 불리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때때로 어떤 특별한 계시를 받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는 현재 없거나 아니면 옛날같이 흔히 볼 수 없다. 그들의 일은 교회에 있어서 다만 어떤 하나의 신분이지 ‘직분’은 아니었다. 여기서 비밀을 계시하는 것은 교회 안에 영속하고 있으며 이는 개혁교회에 의해서 명백하게 승인되어 졌다.

성경은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요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1)” 고 했다.

 

3) 복음 전하는 자들(Evangelists)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을 새로운 곳에 전하는데 그들을 선교사들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에서 첫 번째로 복음을 전한 빌립(행 8:6-14)은 가이사랴 해안을 따라 복음을 전했다(행8:40). 그리고 그 다음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 에바브라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골1:7, 4:12). 또한 마가, 디모데, 디도등 적은 수의 사람들이 이같이 복음전하는 자들로 알려 졌는데 그들은 사도들과 동행하면서 때론 특수선교를 위해 파송되기도 했으며 더욱이 그들은 말씀을 가르치고 세례도 주었으며 장로들을 세우고(딤전5:22, 딛1:5),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도 했던 것이다(딛3:10). 이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움직였던 힘은 그들과 동행하시는 주님의 선물(은사)과 성령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4) 목사와 교사

목사와 교사는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직책들이다. 칼빈은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믿는다고 한다.

교사들은 제자훈련이나 성례집행이나 경고와 권면하는 일을 맡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 만을 맡았다. 이는 신자들 사이에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목사직은 이 모든 의무를 겸한다.

따라서 목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딛1:9)”, 참된 경건을 가르치며 거룩한 성례를 위해서 사역하는 일을, 목사들은 각각 자기가 맡은 양떼를 위해서 일 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받은 직분이다.

이상과 같이 목회자란 누구인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목회자의 어원적 의미와 성경적 의미 그리고 이와 관련된 다른 명칭들을 살펴보았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목회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에게 맡겨진 주님의 양 무리를 목자와 감독의 위치에서 진리로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며 다스리는 직능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는 주님의 양떼를 보살피고 다스릴 때에 부득이 함이나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종-지도자로서의 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참된 목자의 본을 보여 주셨듯이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쫓아 자원함으로, 즐거운 뜻으로, 또는 ‘종’ 의 정신으로 항상 양 무리의 본이 되어 그들을 다스려야 하며, 더욱이 목회자는 양떼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는 이것이야 말로 성경에서 본 하나님의 종, 혹은 지도자로서 목회자 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성경의 지도자들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모두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 양떼를 다스리는 지도자로서 그들 위에 군림할 수 없고 하나님의 종의 위치에서 그들을 섬기고 자기의 몸을 그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바람직한 목회자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이러 했다. 그는 양떼를 섬기려하고 자기 몸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대속 물로 내어주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목회자상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막10:45).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모든 지도자와 목회자들의 특성을 이해 할 수 있으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상을 발견할 수가 있고, 또한 그 모델을 제시할 수 가 있다고 본다.

 

다음으로 이런 목회자의 자격이 어떠한가를 성경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7. 목회자의 자격

목회자의 자격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라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목양해야 하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증과 사람들 앞에 인정받음이 없이는 도저히 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소명 받은 목회자들의 소명에 대한 확신과 증거가 잘 나타난다. 또한 소명 받은 목회자는 성경에 규정된 목회자의 자격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그가 목회자의 자격을 모두 갖출 때 그는 그의 사명을 틀림없이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이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성취되어지는 하나님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소명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1) 소 명

소명에는 일반적 소명(General call)과 특별소명(Specific call)으로 구분해 볼 수가 있는데 일반적 소명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을 부르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특별소명은 목회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 목회자의 소명을 말한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는가? 이 질문 앞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비록 그가 훌륭한 외적인 자질과 자격조건을 구비했다 해도 목회자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 직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닌 것이며, 또 타의에 의해서 억지로 하는 일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노력과 행동으로 훌륭한 자질과 자격요건을 고루 갖추는 일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따르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만일 소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목회자로서의 외적인 요건이 잘 갖추어졌다고 해서 목회자가 된다면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방해하거나 교회의 부흥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지식이나 세상의 무엇을 따라 목회를 하여, 참 목회자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 할 것이기 때문이다.

존 C. 디쎈은 소명을 받지 못한 자들의 특성은, 그들의 사역을 하나의 직업으로 여기고 사람들의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을 지상 과업으로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무오성과 영감을 자주 부인할 뿐 아니라, 설교 할 때에 설교문은 다른 사람들의 설교 집에서 취하며 성경은 단지 그들의 설교 본문에 필요한 구절 들을 찾아내기 위해서만 인용하며 설교 사역에 자주 환멸을 느끼고, 그들의 수입에 낙심하며 그 사역을 떠나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에게(밝히 말씀 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 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1-23)는 공의로우신 선고를 내릴 것이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명을 무시하고 목회하는 자는 그분의 뜻을 무시하고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날에 받을 심판을 두려워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명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어야 하고 사람으로 부터 오는 것은 결코 용납 될 수 없으며, 또한 이 소명은 근본적으로 교회나 특별한 지명에 의해서 올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내적 감화에서 올 때 그러한 소명이야말로 ‘효과적인 소명’ 인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소명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으로 알아 그 소명에 기쁨으로 응답해야 될 것이다.

 

(2) 일반적 소명(語源的 考察)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부르실 때 우선적으로 일반적 소명을 먼저 하시고 그 다음에 특별한 소명을 통하여 목회자로 세우신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 있는 특별한 소명을 받은 목회자들은 소명 받은 많은 성도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특별히 골라서 따로 뽑아 세우신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모든 신자들의 본이 되어야할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사도로 부르시는 일반적 소명에 모범적으로 응답하여야 한다. 그러면 잠시 소명이란 말의 어원적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소명이란 말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본문에 20단어 이상 나와 있다. 그 중에서 주된 단어는 히브리어 동사‘카라’인데 이 용어는 자주‘부르다, 외치다’라는 일반적 의미로 쓰였고(삿9:7, 사6:4), 또한 ‘초대하다(삼상16:3), 소환하다(삼하1:15), 이름을 부르다(창11:9)’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어 ‘카라(곁에라는 뜻)’ 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칼레오:καλεω’ 인데, ‘부르다, 초대하다, 소환하다, 이름을 부르다’ 라는 뜻이며, 또한 이 용어는 신약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사람을 부르시는 행동을 가리키는 특수한 의미로 쓰였다. 더욱이 이 용어는 사도의 직분 같은 특별한 직책으로서의 하나님의 부르심(롬1:1), 선교(행13:2, 16:2), 제사장 직분(히5:4) 등에 적용되어 사용되었다.

 

루이스 뻘콥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소명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것은 먼저 성부의 사역이다(고전1:9, 살전2:12, 벧전5:10). 그러나 성부는 일들을 성자를 통해 수행 하신다. 따라서 이 소명은 역시 성자에게 돌려진다(마11:28, 눅5:38, 요7:37).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부르신다(마10:20, 요15:26, 행5:31-32).

이처럼 일반적 소명은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나와서 그리스도께서 수행 하시는 사역인데,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 택한 자들을 부르신다. 칼빈은 “소명은 선택에 의존하며, 따라서 전적인 은혜의 사역이라” 고 했다. 즉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 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교회 안에서 내적인 확신과 증거를 나타내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서로 사귐을 갖게 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 소명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되어“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몸(교회) 에 의해 확증된 내적인 확신”이라 정의 할 수 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일반적 소명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소명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서 그가 창조하신 자녀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시며, 성도의 이름으로 부르신다. 성경은 “내 아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43:6하,7) 고 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녀들을 부르시는 것이다(계14:1, 눅19:5하, 요11:43하).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게 하시려는 것이다(벧전1:15). 더욱이 하나님은 야곱(이스라엘)을 부르실 때에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사43:1)라고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도의 이름을 부르신다.

둘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주님을 섬기라는 부르심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소명은 십자가로의 소명이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의 소명이다. 하나님의 소명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 그의 멍에를 메고 그의 제자가 되어야만 한다(마11:28-30). 주님의 멍에는 인류 구원을 위한 모든 고난을 의미하며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이 멍에의 최고봉이다. 그리스도께로 부름 받은 신자가 마땅히 주님과 함께 이 멍에를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메야함은 부활의 영광에 참예 하는 자가 되기 위함인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 짐은, 지는 자에게 무거운 것이 아니라 날수 있는 날개가 된다” 고 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그리스도께로의 소명은 “십자가로의 소명” 이다. 또한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즉 우리는 주님의 멍에와 짐을 지고 그를 따르는 제자로 부름 받은 자이다. 그런즉 주님의 제자들은 과실을 많이 맺어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한다(요15:8). 과실을 많이 맺으려면 썩는 밀알이 되어야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함이라”(막10:45) 고 하셨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 하리라”(요12:24-25) 고 말씀하셨다. 그러기에 주님의 제자 된 우리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쫓아야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으로 구원 얻는 자가 되어야한다(막8:34, 35).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름은 순교의 부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도록 부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셔서 그 영광의 보좌로부터 성령을 통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많은 선물(은사)을 주신다. 그 은사의 분량은 각 사람의 사역의 분량과 일치한다. 그런데 그 은사는 다양하나 그 은사를 주시는 성령님은 한 분이시다(엡4:4).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은 “한 소망 안에서의 부르심” 인 것이다(엡4:4하). 그러므로 우리에게 각양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엡4:1,3,7). 더욱이 이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기에 그 은사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전12:31, 14:1). 그리고 “몸”(교회)은 각 지체의 유기적인 상호 의존을 통해서 성장하며 또한 “각 마디를 통해서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엡4:16)”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사를 나눔으로서 우리의 소명을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고 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며(살전5:23, 고전1:9),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사를 힘입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섬기는 종으로서 응답하여야 한다. 그리할 때 그는 일반적 소명에 뒤따라오는 특별한 소명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3) 목회자의 특별 소명

특별소명은 일반적 소명 다음에 오는 사역에로의 소명인데, 목회자는 이 소명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셨다는 내적 확신과 외적 증거를 가지고 그의 직분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 를 주셨으며 또한 그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혹은 사도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의 직분을 주신 것이라고 했다(엡4:7,11,12).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직분들은 한마디로 오늘날의 목회자의 다양한 기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다양한 기능을 가진 목회자는 자기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택하시고 또한 부르심으로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참된 목회자는 자기 자신을 과신하여 자기의 뜻대로 사역에 임할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에 의해서 소명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응답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목회자가 모든 그리스도인들 위에 군림하려 든다면 그는 결국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양 무리위에 군림하는 주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전5:3).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는 어떤 권력의 자리도 마련되어있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는 분만이 보좌에 앉으셔서” 그의 권위로서 양 무리를 다스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웟치만니는 “하나님의 활동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며,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의 권위 위에 세워진다. 만물이 하나님의 권위를 통해서 창조되며, 우주의 모든 물리법칙이 하나님의 권위로 유지 된다” 고 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을 그의 권위의 능력으로 붙드시며(히1:3), 이와 같은 하나님의 권위로서 목회자를 특별한 소명의 자리로 부르시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의 권위를 가장 으뜸으로 섬기는 목회자에게 위임하여 양 무리를 치고 다스리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목회자에게 주신 직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기능과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목회자를 부르실 때, “모든 믿는 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갖도록 그리고 십자가를 지도록” 부르시며, 또한 “사람들을 주님의 왕국으로 모으도록” 부르실 뿐만 아니라 이 부르심은 “전도자로서 혹은 목사와 교사로서 그의 위치를 특정 짓는 특별한 은사들에 의해 강화되게 하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목회자를 부르시는 특별한 소명은 “전적인 부르심”인 것이다. 사도바울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라고 말한 것처럼 이러한 소명을 받은 목회자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응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목회자의 특별한 봉사는 그가 받은 은사(선물)의 분량대로 충성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가 주님께 받은 은사의 분량에 따라서 봉사하게 된다는 말이다(롬12:3-8). 그러니까 “그가 받은 은사가 크면 클수록 그의 책임도 커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그가 받은 은사를 항상 불 일듯 하게 해야 한다(딤전4:14, 딤후1:6). 만약, “믿음의 헌신 없이 그리고 순종하는 생활이 없이 목회하는 자가 있다면 어느 누구도 그를 바람직한 목회자라 말할 수 없고 오히려 목회직을 일찌감치 떠나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할 것이며, 스펄전의 말을 빌린다면“돌아가서 제 나름대로의 분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 옳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그가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그에게 무서운 화가임하고야 말 것이라는(고전9:16-17, 골1:25) 느낌이 있어야 한다. 또한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뼛속의 불과 같아야 할 것이다(렘20:9).

이상과 같이 목회자의 특별한 소명은 분명하고 독특한 부르심이며,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부르심인 것이다. 그러면 계속해서 소명에 대한 증거에 대하여 고찰 하고자 한다.

 

(4) 소명에 대한 증거

목회자는 하나님으로 부터 그 목양의 일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사명감에 넘치는 목회자가 될 수 없고, 죽도록 충성하는 목회자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부르신 자의 부름을 의식하지 못할 때 그에 대한 충성심이나 그를 부르신 목적을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처럼 목회자는 자기가 하나님으로 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후4:1).

 

곽 안련 목사는 목사 되기에 합당한 부르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부르심은 반드시 하나님께로 온다.

▶ 부르심은 직접 각 개인에게 온다.

▶ 객관적으로만이 아니라 주관적으로도 부르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 부르심은 안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로 부터의 소명을 받을 때에 개인적으로 부르심을 확신해야하며 그에 따른 증거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면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내적, 외적 증거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내적 증거

목회자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내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존 칼빈은 목회자의 소명을 “외적소명” 과 “내적소명”으로 구분하여 설명 하였는데, 내적 소명은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아는 일이며 교회는 증인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그는 이 직책을 받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려는 소원 때문이라는 것은 우리의 속마음이 잘 증거한다.” 고 했다. 이와 같이 소명을 받은 목회자는 그 확신이 성령의 내적 운동 가운데서 틀림없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증거는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겸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길목에 있음을 가르쳐준다. 사람을 어둠에서 부터 빛으로, 영적인 죽음에서 삶으로 부르시는(마11:28-9, 요6:4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 중에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시고(엡4:11), 그들이 성장하고 봉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되게 하신다(엡4:12-16). 더욱이 성령님께서는 온 양떼들 가운데서 목회자로 세우신 자들을 감독자로 삼아 교회를 치게 하셨다(행20:28).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교역에 종사케 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적 확신을 가졌다(딤전1:12). 더욱이 그는 주께서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9:14, 민18:8-20, 고전9:1-19)고 명하셨다는 성경적인 원칙을 선포함으로서 영적인 봉사를 위해 물질적 추구를 떠나야함을 암시 하였는데, 이것은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내적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곧, 주님에 의해서 공급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목회자의 삶 자체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결과이며, 특히 성령의 개인적인 내적 체험은 “가장 숭고하고 축복받은 기독교 생활의 본체” 인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분명한 내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2)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외적 증거

목회자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내적 확신과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가시적인 신앙 공동체의 확증이 또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요구되는 은사와 자질들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그런데 주께서는 목회자의 소명을 주신 자들에게 우선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는 무기를 주셔서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파견 하실 때 그들에게 필요한 무기와 도구를 주셨는데, 그것은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口才)와 지혜”(눅21:15)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되는”(막16:16-8)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말 하는데(행1:8;눅24:49),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사명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주시는 영적 은사와 천래적(天來的)으로 타고난 자질들이 과연 내게도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 그 외적증거를 인정받아야할 것이다.

주께서는 친히 목회자로 부르시고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신다(엡4:11). 그러나 주께서는 교회를 통한 소명이라는 규율을 이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 하셨지만, 행13:2에 보면 안디옥 교회가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께서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고 하심으로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었던 것이다. 또한 맛디아를 선택 했을 때도(행1:23) 두 사람을 세워 그 중 한 사람을 제비뽑게 했다. 이와 같이 “이 선택은 하늘의 명백한 확인을 얻었지만 조금도 교회 질서를 무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딤전4:14에는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라고 했고, 딤후1:6에는 “그러므로 내가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나게 하나니” 라고 하였으니 과연 하나님께서 그를 목회자로 부르셨다면 거의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강한 지지를 받으며 안수를 받게 될 것은 확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성령께서 그를 목회자로 세우셨고 또한 동일한 성령께서 교회 앞에 인정받고 임명 받도록 섭리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3)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성경적 증거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은 목회자들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부르셨지만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셨으므로 그들 자신이 분명히 알았다. 또한 소명 받은 목회자는 그 소명에 응답함으로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었는데, 그들 중에 때론 곁길로 피하려는 자들도 있었으나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 하였으며 명하지 아니 하였나니 그들이 내 백성에게 아무유익이 없느니라.(렘23:32)” 고 하신 말씀을 보면, 목회자의 소명은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소명 받은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전 생애를 바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소명은 분명하고도 독특한 부르심인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소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 그러면 그들 중에서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이렇게 세 사람을 택하여 고찰하려고 한다.

 

◆ 모세의 증거

하나님은 모세를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3:2-4).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에는 이미 애굽에서 학문을 익히고 난 뒤 목회자의 과정을 밟고 있었으며, 세상의 아름다운 모든 문명을 버린 상태에 있는 그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이유는 그를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었다(출3:8,10).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 그는 무려 5번이나 이유를 들면서 사양했다.

 

1) 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라고 겸손하게 사양하였다. 그가 일찍이 자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도우려고 했을 때에는 온전히 실패 하였었다(출2:11-15). 그는 실패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겸손하게 사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나설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주기위하여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출3:12)” 라고 하신다.

 

2) 모세는 아직도 용기를 얻지 못하고 또 하나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제기하는데, 그것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고 물을 때에 답변이 곤란하다는 것이다(출3:13).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여 말씀 하신다(출3:14,15).

 

3) 모세는 또 하나님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나타나지 아니 하셨다 하리이다”(출4:1) 라고 했는데, 이는 모세가 아직도 자신을 가지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약점을 깊이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세 가지의 표적을 통해서 그의 신앙을 강화시키고, 그의 백성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 할 수 있게 하셨다.

 

4) 모세는 또 다시 말이 능치 못하다는 이유로 사양한다(출4:10).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양하는 이유에 대하여 해결책을 말씀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입” 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니 모세의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시겠다는 것이다(출4:11-2).

 

5) 모세는 이제는 아무 이유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사양한다(출4:13). 하나님은 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다시 대책을 세워 주셨는데, 그것은 그의 형 ‘아론’ 을 그의 대언자로 세워주신 것이다(출4:14-16). 그리고 모세에게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적을 행하라고 하셨다(출4:17). 이렇듯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사양하는 모세에게 끝까지 사랑과 인내하심으로서 그가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 말씀하시고 표적을 보여 주신대로 모세와 함께하셨고 권능을 주셨으며, 모세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동안에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였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삶을 살았다.

 

(2) 이사야의 증거(사6:)

이사야는 예언자들 중 가장 전형적인 예언자로 간주되어진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택하시고 선지자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사6:8중) 그때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하)라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자원하는 심령이 되어 응답하였다. 이 응답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의 가장 모범적인 답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면 그의 소명을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 보려고 한다.

 

1) 신(神)의식에 뒤따르는 죄의식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이사야는 주권자이시고 전능자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1-4절). 하나님을 본 것은 이사야로 하여금 예언자가 되게 한 모든 것의 기초였다. 이 환상! 즉 이 하나님 의식은 곧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결과에로 다다르게 되는데 곧 죄의식이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이사야는 하나님의 빛 안에서 자신위에 있는 빛을 보았고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데서 그의 생명과 그의 길을 보았다. 하나님 인식에 기초한 죄의식은 하나님의 예언자 즉 그리스도의 목회자들의 삶과 사역에 근본적인 것이다.

 

2) 죄의 고백 후에 따르는 죄 씻음(5:7)

이사야에게 있어서 죄를 의식하는 것은 바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장 죄를 고백하는 일에 그의 영혼을 쏟아 놓았다. 그는 부정한 입술에 관하여 그 자신이나 국가가 실패한 것을 알았다. 만군의 주인 되시고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환상이 전과달리 이 사실들을 명백히 드러냈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는 것은 곧 죄 씻음을 받는 것이었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 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사6:6-7).

이사야는 즉각적이고도 완전하며 확실하게 죄 씻음을 받은 것을 경험하였다. 하나님의 불이 단번에 그리고 철저히 그 일을 행하셨다. 이사야가 이렇게 죄 사함을 받았을 때 하늘의 진정한 모습이 분명하게 보였다.

 

3) 하나님의 소명에 뒤따르는 하나님께로의 헌신(獻身)

이와 같이 죄를 깨닫고 죄 사함을 받은 예언자 이사야는 이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더 깊은 계시를 받기에 영적으로 적합하게 준비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있었고(1절), 민족의 죄악이 하나님의 행위를 불러 들였다(5절). 우리가 하나님을 뵙고 우리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 용서를 알 때만이 우리는 소명을 깨닫고 그 소명에 응답하며 전심으로 헌신을 하게 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는 이제껏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과 죄를 지은 백성들 중에 거하였다는 인식이 분명히 그로 하여금 이때까지 앞으로 나와서 그 백성에 대한 심판을 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깨끗하게 하시고 사명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게 하셨으므로 이제 이사야는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었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즉각적으로 응답할 수 있었다. 이사야는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하였던 것이 이제는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응답하는 사역자가 되었다.

 

4) 하나님의 위탁 후에 오는 하나님과의 영교(9-11)

보내심을 받을 준비가 되자 곧 하나님의 위임이 따랐다. ‘가서 말하라’ 는 하나님의 위탁을 받은 이사야는 “주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라고 질문하며 하나님과 영교 하는 자가 되었다. 이사야는 이처럼 신 의식에 뒤따르는 죄의식, 죄의 고백 후에 따르는 죄 씻음, 하나님의 소명에 뒤 따르는 하나님께로의 헌신, 그리고 하나님의 위탁 후에 오는 영교라는 독특하고 분명한 소명을 받은 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그대로 예언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응답하는 그의 순종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3) 예레미야의 증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소명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내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 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자리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렙1:4-10).

예레미야가 예언하기 전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초자연적으로 주어진 임명의 말씀은 그의 선지자직의 신적 기원과 그의 예언의 신적 권위를 확증해 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영적 무력함을 고백하였다(6절). 그러나 하나님은 손을 그의 입에 대시며 강권적으로 그를 부르셨다(9절). 이것은 그에게 주어진 예언의 내용과 방법과 그 성취가 하나님에 의해 직접 이루어질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명이 중차대하며 매우 촉급하다는 사실을 두 환상을 통해 보이셨다. 하나는 살구나무 가지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시겠다는 것이며(11-12절), 또 하나는 그 면이 북에서 부터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보이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게 하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섬긴 유다백성들을 치게 하며,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13-16). 이어서 하나님은 사명을 수행하는 그에게 함께하시며 보호해 주시겠다는 격려와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17-19).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예레미야는 소명의 확신을 가지고 모두 50년의 예언활동 기간을 하나님께 신실하게 헌신했다. 그는 거짓 선지자들이 만연한때에 하나님께 세움을 입어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함으로서 그가 참 선지자임을 보여주었다. 이로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증거를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4) 신약에서 소명 받은 목회자들의 증거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소명은 먼저 세례요한의 부르심으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제자들을 부르시는 소명’을 보여주고 있으며,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이후에도 계속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사도와 설교자들을 부르셨다. 신약적소명의 특징은 몇몇 특별한 직접적인 소명을 제하고는 은사 및 교회의 요구, 그리고 내적 확신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명 받은 자들 가운데서 세례요한, 베드로, 바울, 이렇게 세 사람을 택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 세례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3:2)”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예수 그리스도보다 6개월 먼저 이 땅에 보내시고(눅1:57), 그에게 성령이 임하여 말씀 전파자로 나서게 하셨다. 여기에서 성령의 임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상징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출생하기 전에 그의 부친 사가랴에게 주의 사자를 보내셔서 세례요한을 특별한 사명자로 보내실 것을 예언하셨다. 하나님은 세례요한과 함께 계셔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서 사역을 준비하게 하셨다. 그리고 나서 그를 부르셨는데, 요한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요단 계곡으로 나가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때가 가까 왔음을 선포하였다(막11:32, 마14:5).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책에 쓴바와 같이,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는 사명을 훌륭히 수행하였는데, 그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모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증거 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3:16-17).

또한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고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 하였으며, 결국 그는 목 베임을 당하는 순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다. 이로서 그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

 

2) 베드로의 증거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베드로를 부르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그를 쫓았다(마4:20). 베드로는 예수님의 주권적이며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에 응답하였으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그렇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다시 찾아주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조심스레 대답했고, 이에 예수님은 그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고, 치라” 고 목양의 사명을 부여하셨다. 그리스도의 소명을 받고 목양의 사명을 부여받은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 권능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으며, 강하고 담대한 설교자가 되어 수많은 양떼들을 주께로 인도하고 지도한 위대한 목회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소명에 대한 확신은 불변했고, 이로서 소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

 

3) 바울의 증거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극적인 소명은 사도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유대교에 속해있으면서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고(행7:58), 그 후에는 예수 믿는 자를 진멸하려고 유대교의 공문을 받아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리스도의 소명을 받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부르실 때에, 하늘에서 빛이 저를 둘러 비취게 하여 그의 눈을 보지 못하게 하였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고 말씀하셨으며 사흘 동안을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게 하셨다(행9:3-9,11).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 아나니아를 환상 중에 부르시고 바울에게 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고 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부르신 이유를 설명하셨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그에게 가서 안수할 때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고 세례를 받으며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졌다(행9:17-19). 그 후 그는 곧바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행9:20) 하였으며 주님께서 소명하사 말씀하신대로 그리스도를 위해 온전히 바쳐진 삶을 살았다. 이로서 그는 그리스도의 소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 바울은 대부분의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의 소명을 지적하는 말을 그의 개인적인 이름에다 하나, 혹은 둘 이상의 서술적인 구(句)로 첨부했다.

로마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롬1:1) 라고 했고, 고린도전서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고전1:1)이라고 했고, 갈라디아서에서는 “사도된 바울”(갈1:1),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엡1:1, 골1:1)이라고 했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도’ 로 부르셨음을 누누이 그의 서신들을 통해서 강조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르시고 맡겨주신 사명을 생명을 바쳐 수행하였으며,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이상과 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소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

목회자가 특별소명을 받고, 그 증거를 보여준다는 것은 목회자의 자격에 있어서 절대적인 요소가 된다. 이처럼 소명 받은 목회자가 성경에서 제시하는 자격을 모두 갖추고,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더 없이 귀한 일임엔 틀림없다. 이것 역시 목회자의 자격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 요소이다.

그러면 먼저 구약성경에 나타난 목회자의 자격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5) 구약 성경에 나타난 목회자의 자격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족장으로서 하나님의 종의 역할을 한 아브라함을 시험 하셨다(창22:1). 그 시험은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는 것이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 하였다(창22:2-12).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조상” 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기대 하셨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 하는 신앙 이었던 것이다. ‘경외’ 라는 것은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을 정서적으로 두려워하는 것만 아니라, 실상 하나님의 무한히 크신 권위 밑에서 안식하며 순종하는 태도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함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는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권위아래서 안식하며 순종하는 태도를 지닌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목회자의 자격을 가장 구체적으로 언급한 구절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명령으로 모세의 영적, 국가적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보조역할을 할 70인의 장로 선택과 자격이 기록되어 있고, 또 하나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제안에 따라 모세를 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고 다스릴 지도자의 자격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출18:13-25). 이 출애굽기 18장의 사건을 다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모세를 도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지도자를 뽑는 이야기가 신명기 1장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모세는 말하기를 “그런즉 나 홀로 어찌 능히 너희의 괴로운 것과 너희의 무거운 짐과 너희의 다툼을 담당 할 수 있으랴. 너희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자를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두령을 삼으리라.”(신1:12-13).

모세가 여기서 세우려는 지도자는 “단순히 백성들의 송사를 재판만하는 자가 아니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괴롭고 힘든 문제들을 해결하고 인도 해줄 지도자” 이었다. 출애굽기 18장과 신명기 1장에서 제시하는 목회자인 지도자의 자격은 다음과 같다.

 

① ‘지혜(智慧)’ 가 있는 사람

모세가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택하라고 한 지도자의 첫 번째 자격조건은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신1:13).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혜란 다음과 같이 3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기술적인 재능을 가리킨다. 금이나 은으로 어떤 물건을 잘 만들 줄 아는 장인을 가리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 한다. 예로서, 광야교회에서 성막을 만들 때 금과 은과 놋으로 여러 가지 공교한 것을 만든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 불렀다(출31:1-11).

둘째 사물에 대한 올바른 통찰력, 판단력, 혹은 처리능력을 가리켜서 지혜라고 한다(전8:5-7, 호14:9). 그러므로 이러한 지혜를 가진 자는 왕의 고문이 되었고(삿5:29), 또한 솔로몬은 이러한 지혜를 갖기 위해 하나님께 특별히 간구하였다(대하1:10).

셋째로 가장 중요한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구약에 있어서 모든 지혜서의 가장 핵심 되는 내용 중에 하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는 말씀이다(잠9:10, 15:33, 욥28:28, 시110:10등). 그러므로 출18:21에는 “지혜로운 자” 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지도자의 첫째 조건으로 말한다. 즉, 모세를 도울 지도자의 자격 중 제일 중요한 조건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이다. 따라서 잠언기자가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며 악을 떠나나”(14:16) 라고 했듯이 지도자로 선출될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에서 떠난 자가 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셨던 “하나님을 경외” 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창22:12). 그리고 모세를 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며 그들의 제반 문제들을 해결해 줘야하는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자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사물에 대한 올바른 통찰력, 판단력, 혹은 처리 능력을 가진 ‘지혜’의 사람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솔로몬 왕도 하나님께 이러한 지혜를 간절히 구하여 얻으므로 왕이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직분을 훌륭하게 수행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대하1:10,11).

 

② ‘지식(知識)’ 이 있는 사람

모세가 제시한 지도자의 자격조건 중에 두 번째는 “지식”이 있는 사람이다(신1:13).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타고난 재능이라 할 수 있는 이해력이나 판단력과는 달리 배워서 아는 것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로 택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물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진 자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지식을 소유한 지도자가 선출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문제들과 사건들을 올바르게 처리 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잠1:7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기 위하여 지혜를 구할 뿐 아니라 지식도 구하였던 것이다(대하1:10-12). 그런 까닭에 목회자는 ‘지식’ 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③ ‘유명(有名)한’ 사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릴 지도자의 자격 중에서 세 번째로 “유명한 자”가 되어야 함을 말했다(신1:13). 출18:21에는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지도자의 세 번째 자격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러니까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기적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자를 미워 할 뿐만 아니라 물질 관계에도 깨끗한 자가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을 지도자로 뽑으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진실하며 이기적이 아닌 즉 도덕적인 자격을 갖춘 유능한 사람들을 지도자로 선택하여 백성들을 정의로 다스리는 일을 맡겨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지혜와 지식이 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적자격을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불의한 이(利)를 탐하지 않아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④ 하나님의 ‘신(神)’ 을 받은 사람

민수기 11장에 보면 모세는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인도하는 책임이 너무도 무거워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민11:14-15). 그때 여호와께서는 70인의 장로를 뽑아 모세와 함께 짐을 나누어지도록 섭리하셨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장로 70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임한 신을 70인 장로들에게도 임하게 하셨던 것이다(민11:16,24,25). 따라서 지도자는 하나님의 신(神) 곧 성령을 소유한자가 되어 능력을 받아 맡겨진 직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세운 목회자들에게 여호와의 신을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바르게 성공적으로 이끌게 하셨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령을 받고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적자격을 구비해야 하며, 또한 진실하고 이타적인 생활을 하여 모든 사람들로 부터 좋은 평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도덕적 자격을 갖춘 유능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⑤ 거룩한 사람

목회자는 거룩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요구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며 더욱이 목회자의 자격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어떤 특별한 목적을 두고 구별 선택한 것이나 여호와께 바쳐짐으로 여호와의 소유가 된 모든 것에 대해서 쓰이는 선택 용어이며, 상관어(Relationship term)이다. 성경에 보면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린 자를 일컬어 나실 인이라고 했는데(민6:2),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민6:8)가 된다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기 몸을 구별하여 드려진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 이니라” 는 말씀을 많이 강조하셨다(레20:8,15,23, 22:16,32).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내게 거룩할 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 하였음이니라(레20:6)”고 하셨다. 그러기에 모든 신자의 모범이 되어야하는 목회자는 신자중에서도 또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이니 더더욱 거룩한 자가 되어야함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직분을 행하게 하되….(출28:1)”라고 하셨는데, 민3:2-3에 보면 “이는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그들은 기름을 발리우고 거룩히 구별되어 제사장직분을 위임받은 제사장들이다”라고 말함으로서 제사장들이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 있어서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총으로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다. 곧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셨기에 거룩한 자요 구별하시고 선택하시고 그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에 구별 된 자, 선택된 자,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제자들에게 대하여 거룩하다는 말을 쓰셨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거룩한 자가 되어야하며, 그러한 자격을 갖출 때 바람직한 목회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6) 신약 성경에 나타난 목회자의 자격

신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목회자의 자격요건을 말씀하셨다. 그중 가장 구체적으로 제시된 말씀을 보면 딤전3:1-7, 딛1:5-9, 벧전5:1-3, 이다.

게츠(Getz) 박사는 위의 성경 구절들을 중심하여 목회자의 자격에 대하여 20가지를 제시하였다.

1)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딤전3:2).

2)한 아내의 남편(딤전3:2).

3)절제(딤전3:2).

4)근신(딤전3:2, 딛1:8).

5)아담함(딤전3:2).

6)나그네를 대접함(딤전3:2, 딛1:8).

7)가르치기를 잘함(딤전3:2, 딛1:9).

8)술을 즐기지 아니함(딤전3:3, 딛1:7).

9)제 고집대로 아니함(딛1:7).

10)급히 분내지 않음(딛1:7).

11)다투지 아니함(딛1:7).

12)관용함(딤전3:2-3).

13)돈을 사랑치 않음(딤전3:11-3).

14)구타하지 않음(딤전3:3).

15)자기 집을 잘 다스림(딤전3:4).

16)외인에게 선한증거를 얻음(딤전3:7).

17)선을 행하기 좋아함(딛1:7,8)

18)의로움(딛1:7,8).

19)경건함(딛1:7,8).

20)새로 입교한자가 아닌자(딤전3:6).

그리고 김 득룡교수는 성경의 내용들을 1)하나님께 대한 자질 2)자기 자신에 대한 자질 3)교회에 대한 자질 4)가정에 대한 자질 5)대인관계에서의 자질로 구분하여 다루었다. 그러면 이 다섯 가지 구분에 의한 목회자의 자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논하면 다음과 같다.

 

8. 하나님께 대한 자격

(1) 근신하는 사람

“...근신하며...(딤전3:2, 딛1:8)”

목회자는 모든 일에 ‘근신’해야 한다(딤후4:5). ‘근신하며’란 말은 모든 일에 “근신하며 깊이 생각하는 심적 자세” 와 “건전하고 균형 있는 판단”으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근신’은 사색에 있어서 순전하고 단정함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자기 마음속을 잘 단속하며 단정히 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근신’ 이란 말을 마음의 욕심을 절제하며 깨어있음을 가리키는바 외부적 행위에는 절제 하면서도 마음속 욕심의 동작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는 1)그의 생활에 영적은혜가 없고 2)그에게 기쁨이 없고 고민이 있으며 3)신앙의 성장이 없는 것이다.

스펄전은 “사색은 그 능력을 개발하고 가꾸는 영혼의 단련” 이라고 했는데, 조지 폭스(George Fox)는 예리한 칼을 가지고 승마용 가죽바지를 한 벌 찢어서 이 세상의 유행을 등진 채 아름드리 나무속에 숨어사는 동안 한 달 내내 생각만 했다. 그 결과 그는 책을 가진 사람들을 뺨칠 정도로 생각이 많은 사람으로 자랐다. 그는 당대의 카톨릭교, 고위 성직자, 장로교 뿐 아니라 미국교도들 사회에서도 명성을 날렸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영적인 깊은 사색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수많은 유혹으로 부터 지키고 늘 깨어있는 근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의로운 사람

“...의로우며...”(딛1:8)

목회자는 의로워야 하는데 ‘의로우며’는 신적인 재판관 곧 주님의 법적 승인을 받은 행동을 의미하는데 이는 오직 주님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 ‘의인’이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 곧 구속을 받은 자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으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고후5:21). 이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의로워야 하는 것이다.

 

(3) 거룩한 사람

“...거룩하며 (οσιον)...” (딛1:8).

이 자격조건은 앞서 구약에서 제시한 목회자의 자격 조건에서도 언급했다. 성경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 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6) 라고 했다.

사도바울은 이점에 있어서 특히 모범적이었다. 그는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살전3:10)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부르셨을 때는 거룩한자가 아니라 오히려 주를 박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거룩은 스스로 노력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몸을 주시므로 인해서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효력으로 친히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17:17) 라고 기도하셨다. 실로 우리의 거룩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살전2:13)이라고 말씀하심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감히 목회자로서 세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목회자는 먼저 하나님께 근신하는 사람이 되어 언행을 삼가고“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 하신 말씀을 항상 기억하면서 의롭고 거룩한 목회자가 되어 주와 더불어 영교하며 성별된 자 답게 겸허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4)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요21:15-7).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세 번이나 자기를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주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다. 주님께서 이렇게 세 번씩이나 물으신 참뜻은 베드로로 하여금 자기가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으나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있는 것을 스스로 깊이 깨달아 앞으로 과거의 일 때문에 구애받지 말고 일할 수 있는 용기를 복 돋아 주기 위함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참마음으로 고백하는 그에게 주님은 그의 양을 맡기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연약해서 누구나 실수 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날도 주님은 그의 양을 맡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보다도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구약에서 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혜자의 마음속에 우러나오는 한 심성이라 생각 할 수 있다.

 

9. 자기 자신에 대한 자격

(1) 온전한 인격의 사람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의 가장 탁월한 덕목인 겸손으로 구체화 되신 것 같이 목회자의 온전한 인격은 목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목회사역은 목회자의 인격으로 부터 출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다(잠4:23). 따라서 목회자의 마음은 주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필립스 부룩스(Phillips Brooks)는 인격에 대하여 말하기를 목회를 준비하는 것은 “사람을 만드는 바로 그것” 이라고 했는데 결국 우리의 삶으로 부터 우리가 하는 일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온전한 인격을 갖추어야 하며 바로 그의 갖추어진 인격은 목회적 사명을 감당 하는 데에 튼튼한 기초가 된다. 더욱이 목회자의 인격은 지식을 뒷받침해 주어야하고 그래야 참된 지식이 되며 또한 그 지식은 인격이 성숙하게 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다간(E. C. Dargan)은 영국 청교도 역사에 있어서 전형적인 지도자였던 리챠드 백스터가 전향적인 지도자가 된 것은 “지성이나 혹은 학문적 탁월성 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덕스러운 그의 인격에 의한 것이었다.”고 했다. 온전한 인격자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는 생활이 되어야만 한다. 목회자는 선한 목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기 위하여 날마다 경건의 시간을 갖고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열심히 하여야 한다.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또한 마음속 깊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뿐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그 말씀을 순종하는 진실한 삶이 될 때 훌륭한 인격을 갖추게 되어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2) 영적 능력이 있는 사람

이미 구약에서 제시한 목회자의 자격 요건 중 성령을 받은 사람을 논했다. 사도바울은 목회자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성령의 능력임을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고린도 교우들에게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행했다고 한다(고후2:4). 또한 가르칠 때도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므로 오직 성령의 인도를 통해 가르쳐야 할 것을 강조한다(고후2:13).

곽 안련 목사는 “교육은 받았으나 신령하지 못한 목사가 있고 무식하더라도 신령한 목사가 있을 때 양자 중에 하나를 택한다면 물론 무식하더라도 신령한 목사를 택하여야 한다.”고 했다(고전21:14). 그러나 유, 무식을 막론하고 신령한 능력을 받았을 때는 유식한자가 더 좋은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오순절에 예루살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 충만은 이제껏 무지하고 이기적이며 비겁하고 무기력하던 제자들을 능히 변화시켜 전무후무한 능력 있는 목회자들로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성령은 인간의 힘으로, 능력으로, 할 수 없는 모든 일 들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슥4:6). 따라서 목회자는 성령 충만을 지속하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더욱이 목회자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놀라운 신비적인 체험을 가졌으나 육신의 생각과 정욕을 쳐서 끊임없이 영적생활의 향상에 힘쓴 것처럼”(고전9:24-7, 빌3:11-6) 성령 충만 해야 한다. 목회자가 영적능력을 지속,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첫째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둘째는 열심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그리고 세 째로 목회자는 건강한 생활을 통하여 영적능력을 지속하고 향상시킬 수 있다. 몸이 병들면 주의 일을 슬기롭게 끝마칠 수 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내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라고 했다. 건강을 위해서 목회자는 먼저 “성령의 전”이 되는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날마다 끊임없이 드려야 한다. 그리고 절제하는 생활을 함으로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을 피하여야 한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책은 아론 자손들에게 맡기워 졌으나 몸이 상한 자나 불구자는 그 직책을 계승하지 못하였다(레21:16-24). 사실인즉, 목회자가 건강하지 못하면 목회를 제대로 감당할 수 가 없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항상 자기 몸을 돌봐야 하는 것이다.

에딘버러의 유명한 알렉산더 화이트(Alexander Whyte) 는 “너의 생명을 낭비하라 그러나 너의 건강을 유의하라” 고 했다. 이 말은 목회자가 비 이기적인 목회에는 그의 생명을 아낌없이 투자해야 할 것이나 더욱 온전하고 지속적인 투자를 위하여 그의 건강을 보존해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건강 할 때 영적능력을 유지하며 더욱 힘차게 그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전진을 할 수 있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3) 실력(知的, 學的)을 갖춘 사람

바울은 목회자의 자격으로 “가르치기를 잘하며”(딤전3:2),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할 수 있는자”(딤전1:9)여야 함을 말한다. 더욱이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을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 할 것이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권면했다(딤전4:13,15). 따라서 목회자는 제일먼저 성경학자가 되어야 한다. 구약에서도 모세는 목회자의 자격으로 ‘지식 있는 자’ 여야 함을 지적했다(신1:13). 많은 목회자들이 여기에서 실패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목회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목회자는 신학의 전문적 기초 없이 목사가 되려는 것은 콘크리트를 하지 않고 그냥 맨땅에다 고층건물을 짓는 것과 다를 바 없기에 신학적 기초를 튼튼히 하여야 한다.

 

 

 

 

 

 

 

 

 

 

 

 

 

 

 

 

제4장 이런 사람이 지도자다.

 

성경에 소개된 지도자들 중에 위대한 사람을 꼽으라면 대부분이 주저하지 않고 모세를 꼽을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지도자로 삼으시는 과정을 보면 본래부터 그렇게 위대한 지도자 ‘재목’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계속해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면 그는 결코 타고난 지도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출4:l, l0, 13). 그러나 그가 수백만의 무리들을 사십년간 지도했던 것을 보면 요즈음 지도자에 대한 책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듯이 지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뒤로 물러서는 그를 붙잡아서 지도자로 세우셨고 그를 40년 동안에 걸쳐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만드신 것이다.

여호수아의 경우를 보면 그 사실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모세의 시종으로서 근 사십년 동안 모세의 비서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이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이 자기를 택해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삼으려고 했을 때 무척이나 당황했었다. 이런 초기의 그의 모습도 결코 지도자 재목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도자를 잃고 당황해하며 잔뜩 겁을 먹은 그에게 하나님은 확신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면서 지도자로 세웠으며(수1장) 계속되는 가나안 정복 과정을 통해서 그를 지도자로 만들어 가셨던 것이다(수4:14, 6:27). 이 두 사람의 예를 보더라도 지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과정을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알 수 있다.

이 원리는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된다. 이제 우리들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던 간에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지도자로 세우실 수 있다는 사실과 우리 자신이 인식을 하든 못하든 우리 안에 지도자가 될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도자 감이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도망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지도자로 세우실 수 있음을 인정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언젠가 어떤 위치에서든지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대비해서 리더십을 개발해야한다. 성경은 리더십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수많은 지도자의 사례를 통해 지도자에게 필요한 요소들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그 중에서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지도자의 모습이 가장 포괄적이며 실제적으로 도전이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리더십의 핵심은 마20: 25-27에 요약되어 있다. 이렇게 지도자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신 예수님은 자신의 말대로 사람들을 섬기되 죽기까지 했던 것이다. 여기서 종이 된다 함은 종의 위치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의 자세를 가지는 것을 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서 종의 자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섬겼다(빌2 5-7). 오늘날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바로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적인 지도자(leader)는 사람들을 자기의 뜻대로 장악하려는 통치자(Ruler)가 아니며 단순히 사람을 관리하는 관리자 (Manager)도 아니다. 섬기는 자세로 이끄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았던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다. 그가 이 땅에서 섬기는 지도자로서 보여준 여러 영역에서의 모습은 오늘 크리스천들이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있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작은 동네에서 활동하셨지만 그의 머리에는 항상 하나님의 나라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가르칠 때도 질병을 고칠 때도 하나님 나라가 사역의 근거가 되었다. 제자들을 훈련하시고 그들에게 사역을 맡기실 때도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근거로 하셨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커다란 비전을 추구하신 것이다. 지도자는 멀리 넓게 내다보아야 한다. 직장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든지 크리스천 직장인은 바로 이런 비전을 소유해야 한다.

 

둘째 영적으로 늘 깨어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항상 하나님과 연합하는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새벽 미명에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셨고(막l:35)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눅6:l2).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능력을 행하실 수 있었지만 제자들에게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고 가르쳤다(막9: 29). 영적인 생활은 항상 그의 사역보다 우선했다(눅 5 : l5-l6). 오늘 많은 지도자들이 무언가 많은 업적을 이루려다가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는 것을 본다. 오늘날 우리가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 원한다면 예수님에게서 기도의 본을 받아야 한다. 어떤 다른 능력보다도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서 얻어지는 영적인 능력을 소유할 때 지도자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셋째 사역의 중심은 사람이었다.

예수님에게 사역이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섬기고,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어떤 프로젝트를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부리고 이용하는데 비해서 예수님에게는 사람 자체가 그의 프로젝트였다. 또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데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뛰어난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더 찾으셨으며(막2:l7) 그 당시 사람들이 무시했던 어린아이들을 받아들이셨다. 사업과 돈, 개인의 성취와 업적이 성공의 기준이 되는 오늘 사회에서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예수님의 자세가 필요하다.

 

넷째 인격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그러면서도 종교 지도자들의 불의와 죄악은 엄격하게 꾸짖으셨다. 그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줌으로 겸손의 본을 보이시고 겸손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면서 자기를 부인한 제자를 끝까지 참으시고 용서해주셨다. 그가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인격적인 탁월함 때문이었다. 오늘날 많은 지도자들이 권위를 갖지 못하는 것은 인격적인 결함 때문인 경우가 많다. 정치 지도자들이나 기업의 지도자들은 물론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인격적인 결함 때문에 사람들의 존경을 잃게 된다. 반대로 존경을 받는 지도자들을 보면 개인의 능력이나 그가 이룬 업적보다는 인격이 남다른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지도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격을 개발하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모범이 되는 생활양식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고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셨다. 공생애 동안에도 머리 둘 거처가 없었으며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는 초라한 나귀를 타셨으며 죽을 때도 남의 무덤에 묻히셨다. 물질적인 풍요가 성공의 기준이 되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초라 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실 오늘날도 이런 모습의 지도자가 더 권위를 인정받고 존경을 받는다. 사람들은 풍요를 누리는 사람을 부러워 하지만 그런 사람을 반드시 존경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풍조를 거슬리는 지도자는 사람들을 이끌 수 있다. 예수님은 이상의 다섯 가지 영역에서 온전한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이제 그를 따르는 제자로서 크리스천들은 그를 닮아가야 한다. 크리스천들이 다 목회자가 되지는 않지만 어떤 영역에서든지 지도자가 준비는 해야 한다. 모든 크리스천이 최고의 위치에 있을 수는 없지만 어떤 위치에서건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 다섯 가지 영역에서 계속해서 자신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제5장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리더

 

리더십을 측정하는 법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가에 있다. 리더십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당신이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면 결코 다른 사람들을 이끌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리더는 목적을 갖는다. 그 목적은 어떤 일이나 기술, 경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리더는 남다른 열정과 애정을 갖고 사람들과 관련된 중요한 일을 성취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이 목적은 열정과 애정을 가진 미션을 말한다.

 

1. 사명이 있는 리더의 무형적 조건 - 열정

리더는 사명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열정이야말로 일과 사역을 구분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이다. 리더의 목표는 그의 삶보다도 크다. 민수기 14장에는 열두 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뒤, 그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자손이 원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이스라엘의 최고의 리더십들, 즉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모세와 아론의 열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 회중이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자 모세와 아론은 그들 앞에 엎드렸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옷을 찢고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고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라고 호소했다. 백성 중에는 아무도 소유할 수 없었던 열정을 그들은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

 

2. 지도자의 열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계시로 열정을 소유할 수 있다. 크리스천의 열정은 조직에서의 일과 그 목표를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 때 시작된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할 때 리더에게는 힘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자신들의 목적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된다.

둘째로 사람들의 가능성이다. 열정은 리더가 사람들의 가능성을 보고 그들이 자신보다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가능성이 없는 조직이나 사람들은 그들의 리더가 열정이 없다는 증거이다. “리더가 할 수 있을 만큼 그들도 하겠다.”는 정서적인 벽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리더가 그것을 제거해주는 순간 사람들의 가능성은 열린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모세를 비롯한 네 명의 열정은 그들의 요구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셋째는 부르심, 곧 사명이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을 부르셨음을 말한다. 그 일에 부르심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열정이 없다. 사명감이 충만한 리더에게는 열정이 있으며 그 열정의 사람은 일이 곧 하나님의 뜻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리더들은 그런 열정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리더가 확실히 깨달을 때 그 단체는 앞으로 나아간다.

열정은 개인적이다. 이것은 다른 이들이 준다고 해서 가질 수도 없다. 열정은 위임할 수도 없다. 열정은 계속해서 자란다. 하나님께서 주신 열정의 불은 시간이 갈수록 자라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만든 불이면 사라지고 만다. 또한 열정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된다.

 

3. 미션이 있는 사람의 유형적 조건- 열심

리더는 자신의 마음에 열정이 있으면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먼저 아무 대가 없이도 기쁘게 할 수 있는 자신의 일을 찾으라. 그리고 그 일에 탁월성을 겸비해 사람들로 하여금 기쁨을 줄 수 있는 일을 찾으라. 종종 젊은 리더들은 자신의 사역을 마치 직업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위치나 자신에게 돌아올 보상에 관심이 많다. 이것은 비전 없는 리더의 전형이다. 젊은 리더가 더 열정이 많을 거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신기하게도 35-45세의 나이에 그 열정을 볼 수 있다. 리더는 생각하는 모든 것과 행동하는 것이 열정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교회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열정은 교회를 좌우하는 에너지다. 리더에게 열정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동력과 같다.

주위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무엇이라도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주는 것을 기뻐하신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주시는 이에게(엡 3:20). 이 말씀은 크게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첫째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가능성을 본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가능성을 본다. 그는 긍정적인 말을 한다. 하지만 가능성을 발견해도 말을 안 하는 사람이 있다. 리더로서 표현을 자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려면 말을 해줘야 한다. 리더의 가능성을 입으로 시인하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남들이 보이지 않는 관심을 보인다.

크게 생각하는 지도자는 주변의 사람들이 최고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능력이 있다. 이 원리를 배우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리더는 누군가와 5분 동안 이야기한 후 그들이 세상의 정상에 서있는 느낌이 들도록 해야 한다. 자신이 그만큼 가치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다른 이들로 하여금 리더인 당신에게 끌려오게 하는 자석과 같다.

셋째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가능성을 나눈다. 즉 다른 이들의 삶을 세워주는 것이다. 주변 사람의 자신감을 세워주는 것은 리더의 가장 큰 책임이다. 참된 리더는 긍정적인 말을 하고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그들이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는 사람이다.

 

4. 자신감을 심어주라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신감은 확신을 의미한다. 이 확신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지도자들을 믿을 수 있게 한다.

리더에게 자신감은 다음과 같은 도움을 준다.

첫째 사람들을 믿도록 도와준다. 왜? 우리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만큼 다른 이들을 동일하게 보기 때문이다. 리더가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으면 동역자를 경쟁자로 여긴다.

그럼으로써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고 그 결과는 시기와 질투로 나타난다. 자신에게 자신감이 있으면 다른 이들을 격려하고 돌볼 수 있는 리더가 될 수 있다.

둘째 사람들을 세워줄 수 있다. 칭찬과 확신을 충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찬양과 격려=에너지 높임, 일-격려=에너지 감소.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법칙이다.

셋째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 자신감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는다. 역대상 20장에는 다윗의 주변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다윗의 주변에는 거물을 죽인 인물들에 대한 내용이 많다. 흥미롭게도 사울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 왜? 사울은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친 자신감으로 말미암아 주변의 사람들도 자신감을 얻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밥 빌(Bob Biehl)은 ‘자신감 부족과 함께 나타나는 불안감은 많은 경우 이기주의의 증세이다’라고 말한다.

자신감 부족에 따른 불안감과 이기주의는 상당히 연관이 깊다.

당신은 주는 것을 더 염려하는가, 얻는 것을 더 생각하는가?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연설을 할 때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는가 아니면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멋있어 보이기를 희망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5. 모험하는 리더, 결정할 때 동기를 갖는 리더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려면 모험하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모험을 하는 리더들은 스텝들이 창의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모험하는 리더는 스텝들에게 실수해도 상관없다는 것을 그들의 모험적인 행동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위를 세심히 살피고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리더는 안전을 최선으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리더는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실수도 용납하지 못한다.

모험하는 리더를 따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든 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텝들의 생각에는 이 리더와 함께 있으면 실수해도 용납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모험하는 리더의 중요성은 이처럼 실수해도 용납되는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리더는 결정권을 행사할 때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윌로우드 피터슨이란 사람이 말하기를 “결정은 행동을 시작하게 하는 신호가 될 수 있고 결정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리더가 결정을 내릴 때 다른 사람들에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리더가 결정할 때는 세 가지를 중점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왼편에는 가치, 오른편에는 예수, 가운데에는 동기이다. 이 동기는 자기의 필요나 열망하는 것에 기초를 삼아야 한다.

 

6. 영적인 생동감이 있는 리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려면 힘을 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는 신뢰할 만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힘에는 네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힘을 원하는 사람은 힘을 가지면 안 된다.

둘째 힘을 즐기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동기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이 이야기가 이해되는가? 힘을 즐겁게 여기는 사람을 조심하라.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교회에서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담임목사라 할지라도 힘은 아주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세 번째 힘은 남을 돕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지도자는 이 한 가지 이유로 그 힘이 주어진 것이다. 문제는 그 힘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섬길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네 번째 힘은 리더의 성품을 시험할 때 도구로 사용된다. 리더가 힘을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를 통하여 그 사람의 성품을 볼 수 있다. 나는 성공이 실패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 링컨은 ‘한 사람의 성품을 시험하려면 어려움보다도 힘을 주어 보라, 그러면 그 사람의 온전한 성품을 알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려면 영적인 생동감(Dynamic)이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목회자에게서 영적인 생동감을 가장 최우선으로 찾기 원한다. 영적인 리더가 삶 속에서 확실한 사명감을 찾지 못하고 자기 영성을 계발하지 못하면 스텝들을 제대로 인도할 수 없다.

영적인 생동감을 꼭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리더가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을 주변인들이 확실하게 느끼는 것이다.

리더가 영적인 생동감이 없다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장기적으로도 이끌 수 없다. 영적인 생동감은 리더에게 필수다.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리더에게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7. 상황에 민감한 리더(헌신적인 리더)

리더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려면 민감해야 한다.

이것은 리더십의 부드러운 요소이다. 민감함은 사람들의 현 상태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준다. 민감함은 상황적 리더십에 결부시켜 이야기할 때 무척 중요한 요소이다. 상황적 리더십은 환경에 자신의 리더십 스타일을 변화시켜 적응하는 것이다. 좋은 상황적 리더는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파악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그 상황에 알맞게 변형시킨다.

상황적인 리더십은 리더가 기술자뿐 아니라 예술가가 되도록 요구한다. 많은 리더들이 단계적 리더십에 대한 훈련을 원하지만 가장 위대한 리더는 상황적 리더이다.

그들은 다양한 환경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리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에 민감한 리더는 접근 방법을 변화시킨다.

상황적 리더라도 그때그때 원칙을 바꾸는 사람은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헌신이다. 헌신은 앞에서 언급했던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와 같은 역할을 한다. 헌신은 어려운 때에 한 사람의 결정을 확실하게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또 모든 사람들이 포기했을 때 포기하지 않는 힘이 될 수 있다. 리더십 잠언이 있다.

“사람들을 이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따르는 자가 없다면 그는 오직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일뿐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그들은 당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당신은 리더가 아니다. 당신이 어느 사람과 이야기하든 간에 리더십은 그 사람에게 영향력을 준다는 것을 기억하라. 리더십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제6장 목회신학과 교역신학

 

오늘 목회(牧會)신학이라고 하는 말은 상당히 혼란을 주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교역(ministry)과 목회(pastoral ministry)의 혼동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의 목회신학 정립을 위해서는 목회와 교역, 목사와 교역자, 목회신학과 교역(敎役)신학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一般的)으로 교역신학(theology of ministry)은 목회신학(pastoral theology)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나 분명한 구별이 있다. 목회신학은 목사의 직(職)과 기능(機能)에 초점을 맞추며, 교역신학 가운데 단지 한 부분을 다루는데 불과하다. 토마스 오덴(Thomas Oden)의 목회신학은 목사의 직과 기능을 논한 대표적인 목회신학 교재이다. 목회신학은 안수(按手) 받은 교역자의 이해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에 교역신학은 교회전체의 자기표현인 교역(ministries)의 과제들을 신학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목회신학이 안수 교역자인 목사의 직과 기능을 논하는 반면에 교역신학은 목사의 이해뿐 아니라 평신도 전체의 교역을 주제로 삼아 연구한다. 교역신학은 교회가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교회의 교역경험들은 교역신학의 출발점이 된다. 사실 교회가 경험하는 교역의 경험은 인간의 노력과 성취의 경험이 아니다. 교역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교역의 경험은 교회에 현존하여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경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교역을 계속해 나가신다. 교회는 끊임없이 자기들 가운데서 자기의 교역을 계속해 나가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한다. 바로 이것이 교역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경험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경험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현존하여 역사하는 그리스도 체험일까?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경험을 인간들의 경험과 구별할 수 있을까? 교역신학은 전통(성경과 기독교역사), 공동체의 경험, 그리고 이성적 판단이라는 세 가지 표준에 근거하여 교회가 경험하는 모든 경험들 가운데서 그리스도 경험을 식별하려고 한다. 요약하면 목회신학은 이 세 가지 표준에 근거하여 교회의 모든 경험들 가운데 그리스도 경험을 식별하여 기독교 교역 실천의 근거와 방향과 실제를 제공하는 실천신학의 한 가지이다.

이제 우리는 목사와 교역자의 의미를 고찰하고 목회신학의 무엇인가를 논하고 이어서 교역신학을 요약적(要約的)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렇게 목사와 교역자, 그리고 목회신학을 교역신학과 대조하면서 함께 소개하는 것은 한국교회 목회의 바른 방향 정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1. 교역자(敎役者)와 목사(牧師)

(1) 교역자 (Minister)

교역자(minister)는 섬기는 자를 의미한다. Ministry는 섬김, 봉사 등을 의미하는 헬라어 diakonia를 영어로 변역한 말이다. 이 말은 초대교회의 사도들이나 집사들만 참여하는 특수한 봉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봉사를 의미하였다.

그런데 영어의 ministry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목회(牧會)” 또는 “사역(使役)” 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ministry라는 영어가 나오면 목회라고 번역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번역상의 문제가 한국교회의 교회와 ministry 이해에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첫째로 모든 성도가 다 참여하는 diakonia를 ministry로 번역하고 ministry를 하는 자를 minister 즉 교역자(敎役者)로 사용함으로써 교역자를 특수한 소명을 받고 안수를 받아 교회에서 시무(視務)하는 자의 봉사로 축소시켜 버렸다. 그 결과 모든 성도들은 봉사를 받는 자의 입장에 서게 되고 목사만이 봉사하는 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즉, 한국교회는 diakonia를 수행하는 소수의 특수 그룹과 diakonia를 받는 다수의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diakonia(영어의 ministry)를 목회로 minister를 목회자로 번역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성경의 diakonia의 개념이 아주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교회가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diakonia-ministry이다. 그래서 ministry는 preaching-ministry(설교), educational-ministry(교육),

healing-ministry(치유), praying-ministry(기도)등 교회가 하는 모든 사역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ministry를 목회라고 번역함으로써 목사의 특수(特殊)사역(使役)만을 ministry(diakonia)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ministry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한신 대학의 박 근원 교수는 이 단어를 교역(敎役)이라고 번역하였다.

그 이유는 ministry의 본래 의미인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는 모든 봉사를 포괄하려고 하는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다 필수적으로 ministry(diakonia)에 참여하여야 된다는 사명감을 재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ministry 즉 교역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가(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봉사를 총괄적(總括的)으로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하려 한다. 그리고 교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시고 명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ministry를 의미하며, 모든 성도들은 자신의 ministry를 본받아 이 땅위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ministry를 하여야 한다.

Minister(교역자)는 diakonia를 수행하는 자이다. 일반적으로 교역자라고 할 때에 모든 성도들이 다 diakonia를 수행하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는 모든 성도들을 다 minister라고 부를 수 있다. 특별한 소명을 받고 안수를 받아 봉사하는 교역자는 ordained minister(안수교역자, 즉, 목사)라고 부르며 교회로부터 특수한 사역을 위임(委任) 받은 자를 의미한다. 교역자(minister)는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를 섬기며, 사람들을 섬기는 종의 직분을 강조하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목회신학 이라는 말과 교역신학(theology of ministry)은 다른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목회신학(pastoral theology)은 목사의 직(職)과 기능에 초점을 맞추지만 교역신학은 교회 전체가 경험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 전체를 대상으로 삼아 연구한다. 교역이라는 말이 섬김이라는 말에서 왔고 교역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를 섬기며, 사람들을 섬기는 자를 의미하기 때문에 교역신학은 목사들의 직과 경험 뿐 아니라 전교회의 교역을 다룬다. 그런 의미에서 교역신학은 섬김의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Pastor(목사)

“목사(牧師)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교회를 바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양의 목자로서 교회의 ministry에 활력을 제공하며,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보여주시고 명하신 ministry를 이 땅위에 구현시키도록 성도들을 인도하며 지도하며, 교육하며, 훈련하며, 감독하는 자이다”

토마스 오덴(Thomas C. Oden)은 목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목사는 하나님과 교회에 의하여 부름을 받고 안수를 받아 교회를 대표하여 말씀을 선포하며, 성례전을 집례하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완전한 응답을 하도록 기독교 공동체를 인도하고 양육하기 위하여 구별된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대 목자(The Great Shepherd)가 되신다고 선포한다(시23편). 신약성경은 예수님 자신이 선한 목자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는 자들을 목자라고 부르고 있다(요 10:1-30, 벧전 5:1-4). 특히 베드로전서 5장은 장로들에게 권면하면서(여기에 장로들은 당시 지 교회 목사였음) 양 무리를 치되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4)고 언급한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를 세움을 받은 지도자들을 목자로 비유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렘23:1-4, 겔34:1-16등).

양을 치는 목자는 양들을 인도하며, 양육하며, 훈련하며, 지도하며, 보호하며, 희생하며, 양 무리와 삶을 함께 나누는 독특한 사명과 직무를 갖는다. 즉 목자는 양 무리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명과 봉사를 갖는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과 봉사와 구별되는 사명이요, 봉사 이다.

오늘 우리는 교회에서 이러한 목자의 사명을 부여받은 교역자(minister)를 목사(pastor)라고 부른다. Minister라는 용어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능과 봉사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Pastor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들과 재능들을 발견하게 도와주고 그것들을 개발시켜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 각자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담당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교육하며, 성숙하게 지도하고 인도하고 그들의 사명을 감독하는 대표 교역자를 의미한다. 즉, minister는 봉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한 명칭이요, pastor는 ministry의 사명을 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지도하는 감독자의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는 교역의 중심 부분을 이루는 교역의 한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교역은 포괄적(包括的)인 개념이요, 목회는 부분적(部分的)인 개념이다. 목사의 직무는 목회의 직무이고, 전체교인들의 직무는 교역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목회는 소명을 받고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로부터 위임을 받은 안수 교역자의 사역이다. 오늘 교단별로 독특한 헌법의 규정에 따라 목회의 직무를 안수교역자인 목사 외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경우에도 헌법이 규정하는 특수한 일을 특수한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 minister의 직과 pastor의 직이 교회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가는 뒤에서 볼 것이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전체 그리스도인들의 ministry를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며 동시에 안수 받은 교역자인 목사의 목회를 통하여서도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의 세계교회 목회신학의 흐름의 첫 번째 강조점은 곧 안수 받은 목사의 목회를 강화시키면서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ministry의 재발견과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2. 목회신학

목회신학이란 용어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말이다. 과거에는 목회신학과 유사하거나 목회신학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용어들, 이를테면 실천목회학, 응용목회학, 상담목회학 등의 용어들을 사용해 왔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목회신학 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도 이 용어는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이해될 것이다. 다음의 몇 가지 이해들은 목회신학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목회신학이 담고 있는 뜻의 전부는 포괄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부분적으로 목회신학을 이해하는 것들로부터 먼저 고찰하면서 목회신학의 정의를 내려 보자.

 

(1) 목회신학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

1) 교회의 직제(職制)에 대한 연구를 목회신학이라고 보는 견해

런드세이(T. M. Lindsay, 1902), 스트리터(B. H. Sreeter, 1929), 커크(K. E. KIRK, 1946)등 20세기 초반의 목회학자들은 목회신학을 교회의 본질과 형태, 특히 감독,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제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신약학자 들의 연구결과와 초대교회 역사에 근거하여서 교인들에 대해 교회가 가지고 있는 권위, 교회간의 관계, 카리스마적 권위와 제도적 권위들의 관계를 교회의 직제라는 각도에서 검토하고 연구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논의를 신약학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현대 사회학의 통찰들을 초대교회의 직제에 적응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즉, 이러한 논의는 목회신학의 변두리 학문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말이다.

 

2) 목회신학은 목사의 직무와 기능을 다루는 기독교 신학의 한 가지라는

견해

토마스 오덴(1987)은 목회신학을 목사의 직무와 기능들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그는 “목회신학”이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목사의 정체성에 관하여 처음 몇 장을 할애한 후에 그 책의 대부분을 목사의 직무와 역할에 대하여 논의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다. 그는 어떠한 성경적 기초와 역사적 연속성과 이성적 추론 위에 서서 목사는 자기의 직무와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그는 목사의 직책과 기능에 대한 연구라는 목회신학의 정의 위에 “성경에 증거하고 전통을 통해 전달되며, 비판적 추론을 거쳐 묵상하고, 개인적, 사회적 체험에서 구체화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숙고하고자 한다.” 라는 말을 첨가했다. 그의 “목회신학”은 오늘날의 목사가 교회와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직무와 역할이 무엇이며, 그 일을 어떻게 수행하는 것이 성경적이요, 역사적인 연속성을 잇는 것이요, 어떠한 방법으로 목회하여야 하는지를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약점은 제도적 목회, 특히 목사의 기능에 목회신학의 논의를 집중시키고 있으며, 목회실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데서 제한을 갖고 있다.

 

3) 교회의 경영과 목회지도력에 중심을 둔 목회신학의 이해

깁스(E. Gibbs, 1981), 쉘러(L. Schaller, 1972)등은 현대 경영학이 개발한 경영이론들을 교회의 경영과 지도력에 접목(椄木)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경영 이론에 입각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업무의 위임, 변화와 갈등의 관리, 교회성장의 계획 수립, 의사소통, 그룹 다이나믹스등의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들은 교회의 성장과 활성화는 경영의 쇄신과 지도력의 갱신에서 온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특히 교회성장이론은 오늘의 목회에 대한 충분한 이유 있는 성찰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목회신학은 이보다 더 포괄적이 되어야 하고, 좀 더 성경적 신학적이 되어야 한다.

 

4) 상담 목회학(pastoral care)을 목회신학과 동일시하는 견해

시워드 힐트너 등 목회 상담 훈련을 받은 학자들은 상담목회(pastoral care)를 목회신학과 동일시하고 있다. 힐트너는 실천신학 전반을 목양의 관점, 전달의 관점, 조직의 관점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 목양의 관점에 목회실천을 성찰하고 그 가운데서 새로운 신학적 통찰을 얻는 연구를 목회신학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독특한 점은

i) 목양의 관점에서 ministry전반을 보면서 ministry 전반을 목양적으로 경청하며, 수용하며, 존중하며, 인도하며, 지탱하며, 치유하는 상담적 접근으로 전환하려고 한 것이며,

ii) 성경적, 이성적 기초위에서 ministry를 실천하는 것에 목회 신학을 제한시키지 않고 ministry 전반을 목양의 관점에서 성찰하면서 그 가운데서 신학적 통찰을 도출해 내어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 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힐트너는 첫 번째로 목회신학을 목사의 직능과 역할 가운데서 목양의 관점에서 국한시켜서 전달의 관점과 조직의 관점 등을 목회신학의 범주에서 제외시키거나 아니면 목회신학의 변두리로 밀어내고 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로 힐트너는 개인 대 개인의 인격관계에 목회신학을 제한시킴으로써 교회의 제도와 구조에 대한 논의의 여지를 배제시키고 있다. 셋째로 힐트너는 목회의 성경적 신학적 기초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실천, 성찰의 단순한 방법론에 매여 하나님의 교역(ministry of God)의 기본적인 입장을 목회신학에 반영시키지 못하고 있다.

 

5) 도덕신학과 영적신학을 목회신학의 핵심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

현대의 시대상을 “암흑세력의 급상승”으로 규정하면서 데만트(V. A. Demant)는 오늘의 목회신학의 급선무는 목회의 도덕적 기초와 기독교적 영성개발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도덕과 영성이 목회신학의 핵심이 되어야 상승하는 암흑의 세력에 대항하는 기독교를 정립할 수 있다고 했다.

쏜톤(Martin. Thorton)은 목회신학을 “일반적으로 양떼를 감독하면서 목사가 교리를 양떼들에게 적용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했지만 이러한 노력의 핵심에는 금욕주의(禁慾主義)적 영성이 뿌리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회신학에 있어서 영성이 중요한 요소인 것은 사실이나 영성에 중심을 둔 목회신학은 목회신학이 포괄해야 될 교회의 직제와 신학과 지도력 등등 수많은 주제들을 변두리로 밀어내는 제한을 지니고 있다.

 

(2) 목회신학이란?

위에서 언급한 견해들 외에도 목회자가 가지고 목회에 임하는 소신을 목회신학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이 있으며, 단순히 목회실천 전체를 논하는 실천신학과 목회신학을 동일시하는 이도 있으며, 성경의 계시와 기독교 신학과 역사적 통찰 등을 목회에 응용하는 응용신학을 목회신학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몇 가지 중대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1) 목회실천의 성경적, 신학적 기초가 불분명하며, 사회과학의 이론이나 응용과학의 이론들에 근거하여 목회실천 이론들을 개발하고 있다.

2) 지나치게 성경적, 신학적으로 접근하여 사회과학의 발견이나 목회의 실제경험이나 인간의 합리적 추론과 성찰 등을 배제시키고 교리의 적용에만 목회신학을 제한시킨다.

3)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하여, 교회가 성장하고 어떠한 결과가 일어나면 그것은 모두 기독교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ministry와 예수님 자신의 목자의 모델에 근거하고 그 교역과 목회를 현장에 적용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의 열매를 얻는 것에 치중하기 보다는 현장의 목회기능에서 출발하여 어떠한 열매가 있느냐에 중점을 둔다. 그리스도의 교역과 목회와 분리된 어떠한 목사의 활동도 우리는 목회신학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5) 이런 주장들은 너무 지나치게 포괄적이거나 너무 지나치게 제한적으로 목회신학을 정의하고 있다. Ministry의 전반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기초를 제시하는 것이 목회신학이라고 주장하든지 목회(목사의 ministry)가운데 상담 목회나 교회 행정이나 영성 또는 설교학 등의 연구에 목회신학을 국한시키고 있다.

6) 이런 주장들 가운데는 인간의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나 성령께서 오늘의 목회현장에서 어떻게 역사하며, 하나님 자신의 교역을 하나님 자신의 영을 통해 성취해 나가는 하나님의 목회관념이 약한 주장들이 있다.

위에서 지적한 제한점들을 보완하고, 목사들의 목회를 뒷받침 하며, 새로운 활력을 제시 할 수 있는 목회신학의 정의는 무엇인가? 먼저 오늘의 목회신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부분부터 정리하면서 거기에 근거하여 오늘의 목회신학의 동향을 바라 볼 수 있는 하나의 정의를 도출해 보자.

 

① 목회신학은 모든 ministry를 포괄하며, 실천신학이나 응용신학 전반을 포괄하는 용어라기보다는 실천신학의 한 부분이면서도 실천신학의 핵심이 되는 분야이다.

② 목회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목자의 모델에서 유래한 목사의 ministry

(pastoral ministry)를 그 주제로 삼는다. 목회신학의 주제는 소명을 받고 안수를 통해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직무를 위임 받은 목사나 또는 적어도 교회의 위임을 받아서 교회를 대표해서 직책을 수행하는 자들의 ministry와 연관되어 있다. 목회신학은 특히 목사의 직책과 역할을 기독교 역사적으로 그리고 임상적으로 규명하여야한다.

③ 목회신학은 기독교 신앙과 진리에 견고하게 기초하여 그것을 목회 실천을 통하여 현장에 적용해 나가는 기독교 진리와 기독교 실천 간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목회신학의 기능 가운데 하나는 바로 목회 자체와 일반적인 ministry에서 기독교 진리와 실천 간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다.

④ 목회신학은 계시와 기독교 역사에서 개발한 기독교 진리들을 현장에 적용하는 관계를 규정 할 뿐 아니라 목회실천을 통해서 교회가 경험하는 목회현장을 묵상(黙想)하고 성찰하여 거기에서 하나의 신학적인 각성을 도출해 내는 것을 포함해야한다(seward hiltner). 목사들은 목회현장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를 확인하며, 현장경험이 자기들의 목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 한다. 그들은 신학에서 출발하여 목회하지만 목회가 또한 자기들의 신학에 새로운 통찰과 각성을 제시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목회신학은 목사들이 현장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통찰과 각성들을 기독교 전통의 관점에서 다시 한 번 성찰하여 신학적 결론을 도출할 수있어야한다.

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ministry는 오늘의 목회에 모델을 제시할 뿐 아니라 오늘의 목회 활성화에 결정적이다. 목회신학은 모든 목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ministry에 충실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교역에서 활력을 얻고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어야 한다.

⑥ 목회신학은 오늘 목회현장에 임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규명하며, 목회가 목사의 목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목회임을 명백히 밝힐 수 있어야 한다.

⑦ 목회신학은 오늘 사회과학이 발견한 원리들과 방법들과 통찰들을 어떻게 목회에 수용하여 활용할 수 있는가를 규명하며, 신학과 사회과학간의 관계성을 밝혀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목회신학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제한점들과 공통점들을 종합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목회신학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신학은 기독교 전통(성경과 기독교역사)에 근거하여 목사의 직무와 기능이 어떠해야 함을 다루며, 사회과학과 교회의 경험이 목회에 미치는 제한점과 공헌을 규명하며, 예수님의 교역에 근거하여 목회현장을 성찰하고 목회현장 가운데 임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여 새로운 신학적 통찰을 얻어 나가는 신학의 한가지이다.”

 

3. 교역신학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맥을 이으면서도 새로운 발전을 촉진한다. 성령 강림의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종에게만 성령이 임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제사장(祭司長), 선지자(先知者), 왕등의 3직을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부른다. 그 뜻은 이 3직만이 성령을 받은 자들이요, 그들만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서 수행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도 이러한 맥을 잇는다. 곧 성령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ministry를 이 땅에서 수행한다. 그런데 구약과 다른 새로운 발전이 신약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곧 신약은 구약이 예언한 새 시대로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고 있다는 것이다.(행 2:14-21)

사도행전 2:1-4까지의 성령강림의 기사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한다. 마가의 다락방에는 대표교역자로 부름을 받은 12명뿐 아니라 여자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이름을 알 수 없는 100여명이 함께 모였다.(행1:12-15, 2:1) 그런데 성령이 강림 할 때에 대표 교역자로 선택받은 12명에게나 여인들에게나 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구별도 없이 똑같이 성령이 임한다. 이것은 행4:31절과 행10:44-48의 고넬료의 집에서도 증명된다. 여기에서도 성령이 임할 때에 어느 사람도 구별하지 않고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 12:13)고 선언(宣言)한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성령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ministry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고 성도들을 교회의 지체로 비유하는 바울의 편지(고전12:12-31)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며, 각 지체들은 각기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고전12:14-27),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다.(고전12:4-11,28-31,고전7:6-7, 벧전4:10-11)

이러한 신약의 기록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신 교역의 계획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본받아서 이 땅위에서 살아야 하는 자요, 성령께서 오셔서 인도하며 능력주시는 대로 교회의 세상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성령과 은사들을 받아서 하나님의 교역을 수행하는 ministry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ministry로서 봉사하는 모든 성도들을 목회하여, 그들을 양육하며, 지도하며, 감독하는 대표교역의 직을 강조한다. 대표교역의 직은(오늘의 목사직은)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며, 가르치며, 지도하며, 감독하는 특별한 기능을 가진 직으로서 모든 하나님의 ministry의 기초가 된다. 바로 이러한 대표교역과 일반교역의 조화가 성경의 목회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초대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교역을 수행하는 교역의 공동체였다.

 

(1) 교역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교역은 전체 교회의 기능이다. 교역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에게 주시는 선물이며, 교회는 구체적인 교역실천을 위해 개인들을 선택하여 임무와 과제들을 위임한다. 교회가 곧 교역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세상을 봉사하는 것이요, 바로 이것을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이다. 권위와 능력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목사의 권위와 능력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것을 교회가 개인을 선택하여 위임하는 것이다. 안수교역은 교회를 대표하는 교역으로, 안수 받은 교역자가 특별히 구별된 성품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교회의 삶과 사명 가운데 구별된 기능을 수행하도록 위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선택하여 위임한 목사의 직을 통하여 역사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그의 제한과 성품과 가능을 뛰어넘는 하나님이 은혜와 권위와 능력을 전달하는 통로가 된다. 세례는 하나님의 교역의 은사를 위임받는 예식이요, 세례의 안수를 받은 자는 모두 일반 교역자들이다. 그러나 목사의 안수(위임)는 특별교역 - 설교, 성례집행, 교회일치(감독), 축복의 교역 - 을 위해 기능을 구별하는 예식이다.

 

(2) 하나님의 백성의 교역(평신도의 교역)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laos, 즉 laity:평신도)이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든 지체들(성도들)은 각기 교역을 담당하는 교역자이다. 바울은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엡4:1)고 권면한다. 그는 특별한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편지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하고 있다.

프란시스 아이레스(Fransis. O. Ayres)는 “부르심”을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가장 기본적이요 우선적인 부르심이란 용어의 성경적인 뜻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 즉 용서와 의미와 자유의 삶으로 초청하는 긴급한 초대장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떠한 종류의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보내는 초대장이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과거에 성직자들만이 가지고 있던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교황이나 주교나 신부나 평신도가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안수교역자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격려하고 각자의 은사와 재능을 발견하여 그들을 훈련하고, 하나님이 부르심에 합당한 교역들을 수행하게 위임하고 그들을 지도 감독하게 하여야 한다.

 

(3) 교역은 직업이 아니라 소명이다.

교역은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되며, 그 부르심에서 동기를 부여받고, 그 부르심이 힘과 능력을 제공하며, 그 부르심이 지탱하고 견디게 할 때에 진정한 하나님의 교역이 된다. 칼빈은 세 가지 소명을 구별하였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내적 소명(신비적인 부르심)으로 우리의 심령의 내면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으로, 이것을 우리는 성령의 지속적인 부르심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는 외적 소명, 또는 교회의 부르심으로 내적 소명 받은 자를 검증 하고 시험하고 훈련하여 안수교역자로 위임하는 것을 의미하며, 안수 받았을 때에 내적 소명은 정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는 증거를 얻는다.

세 번째는 지교회의 소명으로 안수 받은 교역자 또는 안수 받아야 할 교역자는 지교회가 불러주어야 자기가 받은 소명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다. 모든 안수 교역자들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시는 부르심에 따라 각기 교회 안에서 임무를 부여받아 교역을 담당한다.

 

(4) 안수와 교역자의 권위

교역은 전체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중에 몇을 따로 불러 대표교역자로 세우는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신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를 위한 특별한 봉사를 하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안수라는 단어는 라틴어 ordo에서 왔으며 이것은 “질서 있는 순서”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안수는 교회의 질서유지를 위한 기능의 구별이라는 뜻이다.

로마 천주교는 안수 받을 때에 어떤 신성한 것을 선물로 받기 때문에 안수교역자는 다른 성도들과 구별되는 성스러운 어떤 것을 갖는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성직자는 평신도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에 속한다. 그러나 개신교는 안수 받을 때에 신성한 어떤 것을 선물로 받는다는 천주교의 주장을 부인한다. 오직 기능에서의 구별만을 인정하는 것이 개신교의 특징이다.

안수를 받을 때에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권위는 언제나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는 당위성과 함께 행사되어야 한다. 교회는 안수교역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남을 섬기기를 원하며, 자기의 개인적인 명성과 유익을 구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목사의 권위는 언제든지 안수 받을 때에 하나님께 부여받은 교역의 권위와 지성과 지혜를 따라 사랑으로 섬기는 교역자의 순종이 만나야 드러나는 것이다.

 

(5) 섬기는 자로서의 교역자

기독교 교역의 성격은 섬김이다. 섬김은 교역자를 다른 모든 전문가와 구별시키는 중대한 기준이다. 아무리 높은 직분을 가지고 있고, 명예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교역의 본질은 더러운 발을 씻기는 예수님의 섬김과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벗어날 수 없다.

종으로 세상에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빌 2:5-11)의 섬김은 교회역사 속에서 모든 교역의 방향과 본질을 결정하는 힘이요, 방향이 되어 왔다. 설교준비하고 연구하는 전문인인 예수를 상상할 수 있는가? 고통당하는 자들과 죄지은 자들과 세상의 버림받은 자들을 찾아 그들을 돌보며 섬기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전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종의 사역 속에서 우리는 진실한 예수님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영적인 척도는 그가 얼마나 빨리 필요에 처한 자를 발견하여 그를 섬길 수 있는가에 있다. 그러나 자기 포기적인 종의 목회와 자기 완성적인 목자의 목회는 언제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긴장 관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6) 은혜의 언약으로서 교역

그리스도의 교회는 언약공동체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교역은 은혜의 언약에 따른 교역이다. 교회는 제도가 필요하다. 규범과 조직과 질서와 훈련이 있어야 교회는 유지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며, 교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은 제도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뿌리를 둔 신뢰와 은혜의 언약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은혜의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총과 믿음의 중요성을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영적 도덕적 성취로 대치할 수 없다. 교회는 도덕적으로 순결한 자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평신도와 목사들로 구성된 은혜의 언약 공동체이다. 서로의 관계는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있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것은 조직과 구조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은혜의 언약관계이다. 이 양자의 균형은 교회와 교역에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역에 참여한 자는 누구나 능력이나 기술이나 재능 때문이 아니라 용서와 은혜가 필요하다는데서 평등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각자의 교육이나 재능이나 능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차원 곧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7) 전문 교역을 넘어서 소명의 교역으로.

다렐 맄(Darrell Reeck)은 전문성을 정의하면서 4가지 척도(尺度)를 제시한다. ① 광범위한 교육을 받은 자, ② 고도의 발전된 기술과 지식을 소유한 자, ③윤리규범에 따라 일하는 자, ④ 다양한 필요에 응답하는 사명감

교역자는 이 4가지 척도에서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하나님의 교역을 담당할 수 없다. 교역자의 전문성은 가장 밑바닥 기준, 곧 거기에서 출발하는 시발점에 불과하다. 그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시발점을 거치지 않으면 교역의 경주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모든 교역자는 최소한 전문성을 훈련받아야 한다. 또 하나는 시발점은 출발하는 곳이므로 언제든지 교역은 전문성 위에 안수교역의 깊이와 소명의 부요함을 더해야 한다. 제임스 구스타프슨(James. Gustafson)의 말대로 전문성 없는 소명은 무능하고 비효과적이요 위험스러우며, 소명 없는 전문성은 인본주의적인 민감성과 동기와 자기 성취에 근거를 둔 인간적인 교역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교역은 하나님의 부르시는 그 음성에 응답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뜻하는 바로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상에서 제시한 7가지 교역의 기초는 언제든지 양면적인 긴장관계에 있다. 교역은 언제든지 문화적인 상황에 응답하나 그 상황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교역이어야 한다. 교역은 인간의 전문성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소명이요 선물이다. 교역은 시공 안에서 수행되나 시공을 초월한 영원이 현존한다. 교역은 인간의 삶을 나누는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즉 교역은 분명히 인간들의 손으로 인간들 가운데서 인간이 수행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그곳에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신비가 살아서 숨 쉬는 곳이요, 영의 눈을 가진 자들은 인간이 수행하는 교역 속에서 숨어서 신비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교역을 보며 즐거워할 것이다.

제7장 지도자로서의 목사의 기능

 

1. 상징화의 기능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모든 생체구조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공통의 가치와 목표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목사는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이 된다. 즉 목사는 교회의 목적, 가치, 방향, 목표 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목사가 교회에게 목적이나 가치를 가르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인들은 목사를 볼 때에 교회의 목표와 정체성을 상기하게 되며, 목사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어떠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상징화의 기능을 갖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목사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기억나게 하고 그분께 충성할 수 있게 그리스도에게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기능이다.

교회구조의 지도자로서 목사의 기능은 사람들을 예수님 주위에 모이게 하는 것이다. 목사는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 분을 중심하여 살아가는 법들을 지도한다. 세례요한의 손끝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듯이 목사의 삶과 교역과 가르침은 언제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인들은 목사를 보면서도 목사 개인을 보기보다는 먼저 목사가 가리키고 있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되어야한다. 모든 교인들이 목사를 만날 때마다 또는 목사를 기억할 때마다 목사 자신을 넘어서 목사가 가리키려고 애쓰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때에 목사는 상징화의 기능을 바로 수행하는 것이다.

 

2. 존재의 기능

상징화가 교회의 집단 정체성을 보여주는 기능이라면 존재의 기능은 목사의 개인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목사는 교회의 가치와 목표를 함께 공유하는 집단 정체성을 가질 뿐 아니라 자기의 독자적인 삶을 갖는 인간이다. 목사가 보여주고자 하는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죄와 흠이 없으신 우리의 구원자이시지만, 목사 자신은 불완전하고 언제나 그리스도의 속죄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제한된 인간이다. 목사는 교회의 상징으로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기능을 수행하여야 하지만, 목사 자신은 불완전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모형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힘쓸 것이다. 목사에게는 실패도 있을 것이요, 결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사는 끊임없이 자기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며, 상처를 보여주며, 연약한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목사는 모든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존재이다. 목사가 존재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목사도 모든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결함투성이이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열심히 그리고 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모든 교인들에게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은혜의 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 수밖에 없음을 자기의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목사의 존재의 기능이다.

 

3. 공유의 기능

목사는 교회가 아니다. 목사는 교회 구조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목사는 교회 구조와 함께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교회 구조의 책임과 권위와 통제 기능 등을 목사 혼자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목사와 교회를 혼동하는 잘못이요, 목사 자신이 교회 구조의 부분임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이다. 이런 목사는 교회 구조에 장애를 초래하고 목사와 교회와의 갈등을 만들어 내며, 결국 교회를 메마르게 만든다.

교회와 함께 목사가 공유해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다.

① 목사는 성취의 감격을 교회와 함께 공유하여야 한다. 목사가 교회의 무대의 중앙에 서는 것은 사실이나 교회의 성취를 마치 자신의 성취로 착각하여 “내가 그 일을 해내었다”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는 없다. 그 일은 교회가 함께 해낸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목사는 교회의 성취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자랑해야 할 것이다.

② 목사는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교역을 교회에 위임했기 때문에 목사가 자기의 책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 책임을 교회와 나누어 질 수 있어야 한다.

③ 목사는 권위를 공유해야 한다. 교회의 모든 일에 최종적인 책임이 목사에게 있는 것은 사실이나 목사는 교회와 함께 의논하며, 교회와 함께 결정하며, 교회와 함께 추진하는 자이다. 목사의 권위가 아니라 교회의 권위로 교회일이 진행되어야 한다.

④ 통제기능의 공유이다. 교회의 모든 교역을 목사 혼자서 수행할 수 없다. 모든 지체들은 각기 자기의 책임을 담당하며 그 일을 수행할 힘을 가지고 있다. 목사는 자기 혼자서 모든 일을 주관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각 지체들에게 힘을 부여하여 그들이 스스로 자기의 교역을 수행할 수 있게 격려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교회의 교역은 목사의 교역이 아니라 교회의 교역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

 

4. 능동적 기능

목사는 지도력을 수행하는 지체구조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언제든지 능동적으로 교회구조의 기능을 촉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모든 교역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연속성을 가지고 수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전들을 교회에 제공하는 것이요, 교회 구조의 집단정체성을 중심으로 모든 교인들을 통합시키는 것이요, 그래서 모든 교회로 하여금 공동의 의식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① 능동적인 지도자로서의 목사는 계획을 작성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며 교인들이 역할을 설정하고 교회의 자원들을 활용하고 분배하여 하나님의 교역을 추진하는 자이다.

② 능동적인 지도자로서의 목사는 모든 교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명을 받게 하며,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하며, 교인들의 삶에 이미를 부여하고 교회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을 한다.

③ 목사는 문제 해결과 변화 가능성이 있는 일을 수행하면서 언제든지 교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의식을 보유하게 하여 모든 교인들과 함께 그 일을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

 

5. 모형 기능과 위험부담 기능

목사는 언제든지 모범을 보이는 자이며, 교인들보다 한 발 먼저 시험적으로 실천하는 자이다. 목사는 교인들에게 삶과 실천으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역의 모범을 보여 교회가 따라 올 수 있게 하는 양의 목자이다. 그러나 모형이 되는 것은 위험 부담을 안고 있다. 첫발을 딛는 자는 언제나 관찰과 비판 앞에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목사는 교인들 앞에 자기 목을 내밀어 살아야 한다. 이것은 목사의 소명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는 완전한 모형이 아니라 감히 관찰과 비판 앞에서라도 용감히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목을 내어민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형이다. 목사가 완전하지 않지만 교회가 따라 올 수 있게 한 걸음 먼저 발을 내딛는 것은 하나님 나라 성취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6. 한계설정의 기능

모든 구조들은 죄인인 인간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긍정적인 기능과 함께 부정적인 기능들을 가진다. 가족 구조가 식구들의 건강과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사실이나 많은 경우에 가족 구조가 식구들의 성장을 둔화시키고 파괴하고 있다. 교회 구조도 제한된 인간들의 집단이므로 그 속에서 여러 가지 역기능이 생겨난다. 탐욕적이요, 전제적이며, 이기주의적이요, 개인주의적인 교회 구조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교회의 가르침이 아무리 이상적이라도 구조가 역기능이 된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①목사는 교인들을 지켜볼 뿐 아니라 교회구조의 기능을 지켜보면서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그리고 자기 정체성을 따라 살고 있는지를 분별해야 하며 ② 교회구조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경계선을 설정하고 지도하며 ③ 교회와 교회가 따라야할 긍정적이요 적극적인 삶의 지침과 방향을 설정하여 파괴적인 행위를 방지하고 옳은 행동을 강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구조를 파괴적인 행동으로부터 구해야 한다.

 

7. 능력부여의 기능

위에서 언급한 6가지 기능들은 결국 능력 부여(enabler)의 기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능력 부여자로서 목사는 다음의 기능을 수행한다.

① 목사는 연결시키는 자(connector)의 기능을 수행한다. 목사는 교회구조에 속한 서로 다른 지체 구조들을 상호 연관시켜 공동의 가치와 목표를 가질 수 있게 한다.

② 목사는 중재자(mediator)의 기능을 갖는다. 목사는 여러 지체 구조들, 교인들 간에 그리고 교인들과 구조 간에 발생하는 갈등을 해결하고 우선순위를 설정하며 교회 구조를 질서화 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③ 목사는 촉진자(facilitator)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 과제는 계획을 세우고, 교회에 동기를 부여하고, 구조를 조직화(組織化)시킴으로 그 과제를 수행해 갈 수 있게 돕는 기능이다.

④ 목사는 촉매자(catalyst)의 기능을 수행한다. 촉매(觸媒)는 서로 다른 물질들의 화학 반응을 촉진시킨다. 목사는 교회의 기능을 촉진시키기 위해 촉매로써의 기능을 수행한다. 촉매는 힘을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교회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힘을 활성화(活性化)시킬 수 있게 조력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목사는 교회가 스스로 하나님의 교역을 수행할 수 있게 교회가 본래 가지고 있는 힘을 촉발시키는 일을 한다.

생명체(生命體)인 교회 구조의 목사는 교회구조의 한 구성원(構成員)으로서 자신의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목사의 기능으로 해서 교회구조는 건강하게 성장하고 사랑으로 가득할 수 있다. 목사는 생체구조인 교회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생체구조의 지도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더욱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균형적 권위 관계에서 교회와 같은 하나의 기관이 가지고 있는 힘은 원리상 모든 회원이 가질 수 있다. 극단의 경우에는 어느 한 회원도 다른 회원위에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모든 회원은 힘에서 동등하며 그것을 행사할 권리를 갖는다. 거기에는 지도자와 따르는 자 또는 성직자(聖職者)와 평신도(平信徒)의 구별이 없다. 그렇게 완전히 균형적 관계 불균형적 관계보다도 조직상으로는 훨씬 드물게 존재하며,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공식적 지도자의 역할이 발달함에 따라 필요에 의해서 균형적인 관계의 극단에서 멀어지게 만들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상대적이긴 하지만 균형적 관계를 가진 교회 기관들과 구조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로 이러한 균형적 관계는 단순히 지도자와 따르는 자 또는 목사와 평신도 간의 힘의 교착상태를 의미하는 힘의 균형일수 있다. 그러나 더 적극적으로, 목사와 평신도간의 구별이 실질적인 힘의 불평등이라기보다는 기능적인 구별에 불과한 교회 기관들도 있다. 각자는 기관 안에서 다른 이를 보완하며 보조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쌍방은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권위를 행사한다. 어느 편도 프로이드가 우려했듯이 다른 편을 종속시키는 데에 권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균형적인 관계들을 포함해서 균형적인 관계들은 특히 덜레스가 교회의 공동체 모델 “신비적인 교제”로서 교회라고 부른 교회들 가운데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교회는 제도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생겨나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교제로써 관심과 협조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창출한다.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이미지들은 상대적으로 균형적인 공동체 모델을 포착하고 있다.

레티 러셀(Letty Russell)이 그녀의 저서 “Household of Freedom”에서 개발하고 있는 하나님의 권속으로서의 교회는 또 다른 각도에서 교회의 공동체 모델과 파트너십 및 균형적 관계의 상호 의존적 특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러셀과 같은 여성학자의 해석은 덜레스의 다섯 번째 모델인 종의 모델과 유사성이 있다. 이 모델 역시 균형적 관계들을 강조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의 상호성, 특히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가난한 자들과 눌린 자 들과 교회의 동일시를 강조한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을 받은 초대 기독교회들 가운데서 볼 수 있다.

에드와드 슈바이저(Eduard Schweiger) 가 보여준 바와 같이 요한은 철저하게 카리스마적인 교회 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령으로 거듭나며, 예수그리스도와 직접적이요 완전한 합일(合一) 가운데 살며,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의 내적 외적 생활을 인도하는 계속적인 선물이다. 어떤 특별한 교역도 필요 없으며, 각자에게 나눠 주시는 성령의 선물에도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요한복음이나 요한 서신에 나타나는 유일한 직제는 적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대적자들의 현현(顯現)이라고 기록되었다. 초대교회가 점점 복잡해져가는 상황 이단적인 운동의 위협에 직면해서 공식적인 지도력을 세워야 했을 때, 이것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상 기능적이었으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균형적이었다.

에드워 쉴레베커(Eduare Schillebeeck, 1981)가 처음 3세기 동안의 교회 생활에서 기록한 바와 같다. “이 모든 다양한 형태에 대응하여 교회의 교역은 근본적으로 집단성, 즉 다양한 교역의 은사(恩賜)를 가진 사람들의 연대성이다.”

얼마 후 아마도 늦게는 4세기에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차이는 존재론적 성격 또는 질적 차이로 보게 되었다. 초대 교회에 강력한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나타나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권위를 행사했으며 따라서 초대 교회에서도 불균형적 관계를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베드로, 바울, 야고보 등은 아주 중요한 지도력을 행사하였다. 속사도시대의 지도자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등의 목회서신들은 좀 더 계층구조적인 교역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계속해서 교역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명으로 보았다. 아무리 불균형적으로 보이는 관계에서도 그 당시의 권위의 차이들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에서 기능적인 것이었다.

이전 초대교회의 권위 형태는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개신교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주었다. 대부분은 목사와 평신도 사이의 기능적인 차이를 주장하면서도, 개혁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섬김의 교회 교역을 위해 부름 받았다고 가르쳤다. 종교 개혁의 좌파, 특히 쾌이커 교도들은 목사의 직을 전반적으로 부정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똑같이 성령의 능력과 인도에로 나갈 수 있다고 믿었으며, 신약성경의 요한복음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 재 세레파는 권위가 전체공동체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예언자들과 다른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적법성(適法性)은 공동체의 인정에 달렸으며, 최종적(最終的)인 권위는 공동체에 있었다.

 

목회자의 지도력(指導力)과 신학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리는 목회자의 지도력과 신학을 먼저 예수의 사역(Ministry)을 통해 모색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3대 사역은 말씀선포, 가르침, 치유(돌봄)였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지도력은 카리스마적 권위주의에 있지 않고 그의 신학과 불가분의의 관계에 있다.

목회자의 지도력은 목회자의 영감에 충만한 예배와 감동적인 설교와 실력 있는 가르침(교육)과 희생적이고 사랑에 가득 찬 돌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예배학, 설교학, 성경 신학에 대한 해박한 신학적 지식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목회자의 지도력은 지나친 우월감이나 기름 부음을 받은 주의 종이란 교만에서 벗어나 기도해서 얻은 영적인 힘과 노력해서 얻은 신학적 지식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목회자의 지도력을 서술하면

첫째 목회자의 지도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소명(召命) 의식과 필요 한 은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둘째 목회자의 지도력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종으로서 교회와 사회에 대한 봉사에서 나온다.

셋째 목회자의 지도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이지 권력을 가지고 교회의 법규나 규칙을 행사하는 일이 아니다.

넷째 목회자의 지도력은 하나님의 종일뿐만이 아니라 교회의 종도 됨으로 성도들에게서 스스로 비판을 받는데 있다.

다섯째 목회자의 지도력은 지도적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민주적 사상의 실천에 있다.

여섯째 목회자의 지도력은 구체적인 영적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대한 예언자적인 외침에 있다.

일곱째 목회자의 지도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삶 속에서 실제적 모범을 보여주는데 있다.

목회자가 지도력을 갖추는데 필요한 것은 올바른 신학적 이해이다.

“신학이란 기독교 전통의 해석과 현재적 상황의 해석 사이의 상호 비판적 관계와 상관관계를 수립하는 시도"라고 트레이시는 말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부르조아적인 중산계급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쉽게 교회에 나올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미래의 한국교회는 물량적인 개체교회 중심의 성장만을 계획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의 질적인 성장을 위한 신앙지도 계획이 필요 하다.

맨슬 패티슨(Mansell Pattison)은 목사의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목사는 본질적으로 구조(system)를 돌보는 목자라고 생각한다. 목사는 교회의 지체 구조들(subsystems)을 양육하고 인도해야 한다. 목사의 역할은 목사가 생체 구조에서 어떠한 기능을 가진 존재인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목사에게 있어서 행함과 존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목회란 살아있는 생체 구조(system)로서의 교회를 돌보는 것이다.”

 

사회학자 이반 밸러 (Ivan Vallier, 1968)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목사들은 실천적인 문제의 해결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적인 지식 체계가 부족하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목사들의 지식은 규범적이요 닫힌 지식이요, 과학적이요 열려진 지식이 아니다. 세속의 전문가들은 처방을 내리는데 목사들은 해석을 하고 있다. 목사들은 그 사건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건에 의미를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공적(公的) 교역의 능력을 배양(培養)시키는 것은 두 가지 방향(方向)에서 수행할 수 있다.

첫째로 모이는 교회 생활에서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이는 교회에서 공적 지원과제를 강조하는 것은 공적교역의 제1차적인 장으로써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주의를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목사도 laos, 즉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다. 목사들이 모이는 교회생활에 제1차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공공생활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모델을 보이고, 공적인 사건에서 종교의 상징적 대변자로 행동함으로써 더 넓은 사회에서 중요하고 생생한 역할들을 수행해야 한다.

목자(牧者)의 이미지는 지도자(指導者)의 권위와 희생적(犧牲的) 섬김을 조화시킨다.

목자는 권위를 가지고 양들을 인도하고 양육하며, 훈련하고 보호한다. 양들이 제 길로 가지 않을 때 목자는 합당한 권위를 가지고 그 양을 훈련하며 바른 길로 인도한다. 목자는 지도자로서 훈련하고, 지도하고, 감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분명한 권위를 가지고 양들을 지도하지 않는 목자 때문에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 마다 유리되었고...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겔 34:6)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겔 34:5)되고 있다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준엄하게 책망한다. 목사는 양들을 돌보고, 훈련하고, 지도하고 감독하라고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위임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나 목자의 권위는 강압적이요 정치적인 권위는 아니다. 양들의 처지를 공감함이 없는 외적이요 조작적이요 강제적인 권위는 목자의 권위와는 거리가 멀다. 목자의 권위는 상호관계에 근거한 권위요 지도력이다. 목자의 권위는 양들과 인격적 친밀관계에 근거하여 양들의 필요와 상황과 아픔과 감정을 공감적으로 이해하고, 그들의 삶에 참여하여 양들과 함께 생활하며, 양들에게 최선의 돌봄을 줌으로서 얻는 관계적 권위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하여 인간들과 함께 사시면서 인간들을 공감적으로 이해하며,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섬김의 지도력이요, 종의 권위이다.

목사는 섬기는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十字架)의 섬김을 위해 위임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주제는 하나님께 부름 받고 교회로부터 위임받은 양의 목자로서의 권위와 지도력을 가지면서, 양들을 공감적으로 이해하고, 양들에게 더욱 풍성한 삶을 주기 위하여 양들과 함께 살면서 양들을 돌보며, 양들의 최선을 위해서 죽기까지 섬기는 희생적 섬김으로 봉사하는 목사직의 양극을 조화시킨다.

목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교회를 바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목사의 직을 임명하시고 세우셨다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목사의 목회를 통하여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 자신의 교역을 계속 실천해 나가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목사가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세상을 향한 교역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에 거기에 친히 임재 하셔서 목사의 목회를 지탱하시고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신다.

토마스 오덴은 목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목사는 하나님과 교회에 의하여 부름을 받고 안수를 받아 교회를 대표하여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례하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완전히 응답하도록 기독교 공동체를 인도하고 양육하기 위하여 구별된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다.”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의 측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역할을 담당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제사장이요 동시에 속죄양이 되어서 단번에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구약적인 희생제사는 필요 없다(Calvin Inst. 4. 14).

그러므로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성례전을 집례 하더라도 이것은 제사장으로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희생 제물이 되셔서 우리 죄를 위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므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례 하므로 오늘 우리 가운데 현존(現存)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장해 간다.

 

 

 

 

 

 

 

제8장 목회자의 리더십

 

1. 목회자의 지도력

목회자가 어떠한 유형의 지도력을 전개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교인들의 참여도가 결정되어지기 때문에 목회자의 지도력의 문제는 교회 본질의 문제까지도 확장되어 생각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목회자의 지도이론은 다음 네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전통적 지도력 : 이것은 카톨릭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수직적인 지도력이다. 즉 이 지도력을 가진 지도자는 조직체의 변화를 꾀하지 아니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것으로써 전통을 지키려고 하며 그의 기능은 유산을 지키는 일과 의식적인 일에 국한된다. 이러한 지도력이 전개되어 질 때 교회는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지게 되어 발전하지 못하며 사회의 시대적 요구에 결코 부응하지 못할 것이다.

 

(2) 카리스마적 지도력 : 이것은 특별한 한 사람이 예언자적 감화력을 가지고 개인적인 호소를 통해 지도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지도력이다. 이 지도력의 주된 기능은 선포, 해석 그리고 모든 교인이 선교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일이다. 오늘날 대교회라고 불리 우는 교회들의 목회자들이 대부분 카리스마적 지도력에 바탕을 둔 사람들이다.

 

(3)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지도력 : 이 지도력은 자기를 부각 시키지 아니하고 조직 속에서 각 개인이 목표를 성취하도록 하는 것에 중점을 둔 지도력이다. 이 지도력은 구성원의 요구에 민감하고 간접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지도력이 교회 안에 유입되어질 때 기독교적 인간이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나 목표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어려움도 가지고 있다.

 

(4) 체제이론에 입각한 지도력 : 이러한 것은 지도력이라고 보기 보다는 전문적 활동성을 가진 기능인 것이다. 이 지도력은 직책에서 비롯되는 권위가 아니라 그룹 내의 문제를 조정하고 동기를 부여 하는 식의 조직의 활성화 방식을 통하여 조직을 성장시켜 나가는 지도력이다. 이러한 지도력이 오늘날 교회에서 바람직한 지도력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기본에서 본다면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지도자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권위주의형 지도자 : 권위주의형 목사는 자신의 권위에 의하여 독단적으로 해결하는 형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도력은 어떤 사태를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일을 빨리 처리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의 결과가 한 사람의 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지므로 잘못된 결과가 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많은 사람의 호응을 가지지 못하게 되므로 교회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는 경우가 될 수도 있으며 교인들의 불평 내지는 반항 집단의 형성도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

 

(2) 자유방임적인 지도자 : 이것은 모든 것을 교인들의 의사와 능력에 상황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교인들이 자율적으로 모든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여 나갈 때는 바람직한 것이 되겠지만 방임으로 흘러 버릴 때는 교회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3) 민주주의형 지도자 : 이것은 지도자가 의견을 제시하여 놓고 모든 교인들과 함께 그 의견을 토의하고 공통적인 노력을 통하여 그 목표를 수행하여 나가도록 하는 지도자이다. 이것이 가장 성경적이고 바람직한 지도자상이라고 보여 진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 적용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느 경우에 있어서는 자유방임형의 지도력이 좋을 수도 있고 어느 경우에 있어서는 민주주의 지도력이 좋지 아니할 때가 있다.

앞으로의 지도력은 자연스럽게 자유방임 쪽으로 스타일을 바꾸어 갈 수 밖에는 없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그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각 교회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때에는 목사가 권위주의형의 목사가 되어야 교회에 이익이 있을 때도 있을 것이며, 어떠한 때에는 목사가 민주주의적이거나 방임주의적인 때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무엇보다도 바람직한 목사의 지도력은 상황적인 지도자(Contextual Leader)이다.

 

(4) 상황적인 지도자 : 상황적인 지도자란 급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나 완급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나 교인들의 의사에 끌려 다니지 아니하고 교인들의 의사를 충분히 고려하면서 결정하는 지도력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도자는 때로는 과감하여야 하고 때로는 완만하여야 하며 타고난 민감성과 창의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특성들이 훈련에 의하여 얻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지도자들은 이러한 상황적 지도력을 가지도록 평소에 훈련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지도력에서 또 하나 바람직한 것은 "공동지도력(Shared leadership)"이다. 지도력을 요청하는 모든 직업이 그렇듯이 목회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도로 전문화된 기능들이 목사의 기능을 앞선다. 다시 말하면 전문화된 경영인은 경영이라는 측면에서는 목사보다도 앞선다. 그러므로 교회의 경영 부분에서는 이 전문 경영인의 지원을 받아 교회의 경영을 합리화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바로 목사가 과 감히 다른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있도록 일부분을 포기하는 지도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피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목사의 권위가 상실된다 하는 것을 들 수 있으나 오히려 이러한 협조를 통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전하게 수행함으로서 그에게 주어지는 권위가 훨씬 더 클 것이다. 목사의 권위가 다른 사람의 관계성 속에서 상실도 되고 회복도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회고할 때 이러한 공동지도력의 개발을 시급히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2. 지도자가 겪는 어려움

성경에 쓰여 있는 지도자들의 배경을 공부할 때 우리는 지도자의 문제점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많은 교훈을 배울 수가 있다. 성경에 기록된 지도자들의 간증은 우리에게 좋은 본 보기를 제시해 준다. 예를 들면 모세는 왕궁에서 살면서 애굽의 모든 지혜를 배웠다. 그러나 모세가 애굽에서 장성할 때 얻은 경험이 그의 지도력에 도움을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러한 경험들은 크리스천의 지도력에 있어서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교역자들이 매일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 따라서 세상에서 가르치고 있는 심리학 같은 학문을 연구할 때는 성경과 비교해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잘 선별해야만 한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1) 성격적인 약점 : 야고보서 5장 17정을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실망을 하고 고통을 당하며 극단적인 여러 가지 경험을 가졌던 사람이다. 한편 디모데는 엘리야와는 아주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디모데는 매우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줍음이 많고 조그만 일에 쉽게 당황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또한 디모데는 위가 좋지 못해서 소화를 잘 시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디모데는 대체로 좋은 성격을 가졌던 인물로 평가된다.

모세는 자신이 지도자로서 부족한 인물이라고 느꼈던 사람이었다. 모세의 결적인 약점은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성을 잘 내는 사람이었고, 또한 어떠한 도전을 받았을 때 회피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을 적절한 사람들에게 배분하고 경영하지 못하고 맡겨진 일을 혼자서만 다 감당하려고 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베드로는 리더십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지도자로서는 많은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베드로는 자기가 필요로 했던 좋은 성격을 세속에서 배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2) 환경으로 인한 어려움 : 성경에 나타난 지도자들의 배경을 볼 때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은 당시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많이 받았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교회의 목회자들도 교회 내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사도 바울도 그러한 경험을 많이 했다. 성경에 나타난 지도자들이 배경을 보면 그들의 가정안에서도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엘리제사장의 예를 들 수 있다. 엘리는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그의 자녀들은 신앙생활을 못해서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했었다. 또한 호세아는 창녀인 아내가 있었다.

 

3. 성경적 지도자론

오늘날 지도자가 된다는 말은 비판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가 급격하게 빠른 속도로 민주화 되어가고 모든 사람의 모든 것이 공개되는 정보시대가 되어 가면서 우리는 이른바 지도자의 노출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딤전 3:1) 새로운 영어 성경인 New English Bible은 이 구절을 "지도자 됨을 열망하는 것은 명예로운 야망이다.(To aspire to leadership is an honourable ambition)"라고 옮기고 있다. 필자는 `영적 지도력(spiritual leadership)`과 `세속적 지도력(secular leadership)`의 이원적 구분을 본질적으로 거부한다.

우리가 지도력을 행사하는 영역에 따라 지도력의 영성(spiritual)이 결정된다고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가진 목사라는 신분이 곧 우리의 영적 지도자 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지도력을 행사하는 동기와 태도가 지도력의 영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적 지도자`임을 자긍하기에 앞서 우리가 소위 "영적 지도자 됨"을 인식하는 근거가 무엇임을 먼저 물어야만 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역의 자리에 설 때 비로소 우리의 지도력의 영성을 말할 수가 있다고 믿는다.

구약시대의 지도자 느헤미야는 설교자도 전도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영적 지도력을 말 할 때 그를 천거하지 안을 수가 없다. 그는 한 시대를 살아간 분명한 역사적 인물이면서도 그의 모본(example)은 실로 시대를 초월한다. 그의 투명하고 견고한 그림자에서 우리는 참된 영적 지도력을 만난다. 그리고 그가 살아 있는 몸으로 시연(試演)한 역사의 무대 위에서 우리는 성경적 지도자 론의 정체를 벗겨 보기로 한다.

 

(1) 기도의 사람

이 말은 단순히 그가 기도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바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그는 기도를 많이 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말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기도는 "바라봄"이다. 진실로 느헤미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세상을 바라본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그 세상에 대한 해답을 바라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우리가 기도하는 성자(聖子)를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산에 엎드린 고행의 수사(修士)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기도의 출발점은 그가 아침에 읽은 조간신문의 뉴스였다. 그는 그의 사랑하는 조국 예루살렘의 형편을 소식으로 "듣고" 훼파된 에루살렘의 참상을 "보고" 기도를 시작한다(느1:2-4). 그는 닫힌 귀가 아닌 열린 귀의 소유 자였고, 닫힌 눈이 아닌 열린 눈의 소유자였다.

우리는 흔히 기도할 때 "이 세상일을 다 잊어버리게 하옵시고……."라고 말한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도피의 주문에 불과하다. 역사의 현장을 떠난 곳에 기도는 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기도는 곧 역사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처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상황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책임의 자리에 서게 한다. 여기서부터 기도는 출발한다. 기도의 사람은 우리가 처해 있는 `그 현실에 응답하는 사람들(people responding to reality)`이다.

느헤미야의 기도의 눈물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지각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며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 하여……."라고 자복한다(느1:6). 존 화이트는 이것이 느헤미야의 "공동체적 책임감각(a sense of corporate responsibility)"이며 우리가 기도 할 때에 반드시 터득해야 할 "동일시의 원리(the identification principle)"라고 일컫는다.

왜 기도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자기의 책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자.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심이라고 얼마나 우리는 자주 고백하여 왔는가? 그는 친히 우리의 책임을 자기의 책임으로 떠맡으셨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신 것이 아닌가? 그의 십자가는 인류가 경험한 가장 처절하게 벌거벗은 "기도의 자리"였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기에 십자가의 사람일 수 있었다. 아니,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이기에 진실로 기도의 사람일 수 있었다. 오늘 이 시대의 목회자 들인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인가? 우리의 머리에 씌워져 있는 것은 가시 면류관 인가? 황금의 면류관인가?

 

(2) 사람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

사람을 움직일 수 없었던 이를 지도자라고 부른 일은 없었다.

지도자(leader)라는 단어 자체가 `인도한다.`(lead)는 뜻이 아닌가?

그러면 지도자는 마땅히 사람을 리드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움직이느냐?"이다. 단순히 "내가", "내 뜻대로" 회중을 움직이고자 할 때 이는 종종 인간에 대한 조작(manipulation)이나 이용일 수 있다. 다시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지도동기(motives)와 결과(results)라 할 수 있다.

제임스 번스(James M. Burns)는 지도자를 두 가지 형태로 나눈다. 하나는 "교환형의 지도자(the transacting leader)"요, 다른 하나는 "감동형의 지도자(the transforming leader)"라고 말한다. 교환형의 지도자는 서로 서로 `주고` `받는`지도자이다. 그는 가치를 흥정하고 교환하는 자이다. 원색적으로 말하자면 `이용하는 관계` 즉 무엇인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관계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지도자와 피지도자의 관계가 이런 유형이라면 지나친 진단일까? 번스는 바람직한 새 시대의 지도자상으로 "감동형의 지도자"를 천거한다. 이 감동형의 지도자는 피지도자의 필요를 공급하여 그를 감동시켜 따라오게 함으로 피지도자와 지도자를 궁극적으로 함께 유익 하게 하는 지도자이다. 그가 먼저 앞세울 관심은 자신의 필요이기보다 피지도자의 필요이어야 한다. 피지도자의 필요가 지도자의 최고선으로 존재하는 `지도력의 스타일 (leadership style)`을 의미한다. "교환형의 지도자"는 대부분 공동체를 유지(maintain)하는 자이나, "감동형의 지도자"는 공동체를 자라게(build)한다. 느헤미야의 최고 최대관심은 `지도자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이스라엘 백성의 보금자리인 예루살렘성의 중건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것이 주 앞에 순수하고 투명한 목적일진대 하나님이 그 일을 축복하실 것을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주께서 친히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을 주님 자신이 움직여 주십사고 기도했다. 그는 자신이 사람을 움직이기보다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을 음직이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백성들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고자 함"(느2:18)을 볼 수 있었다. 이 얼마나 바람직한 지도자상 인가?

 

(3) 계획의 사람(비전의 사람)

계획 없는 지도자의 성취는 불가능하다. 계획에 관한 한 우리는 언제나 두 가지의 서로 반대 되는 양극단의 입장을 보게 된다. 한 입장은 "기도 없이 계획"하는 스타일이다. 그 결과는 종종 자기 야망의 성취일 뿐 하나님의 뜻의 실현은 아니다. 이는 대부분 인본주의적 지도력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입장은 "계획 없는 기도"의 스타일이다. 그의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일 뿐이다.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지 모르는 자가 무엇을 응답 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느헤미야는 2장에서 아닥사스다왕이 그가 원하는바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즉각 그가 기대하고 있는 성취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할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느2:5-8).

바리새인이 바라 본 한 사람 베드로는 무식한 갈릴리의 배우지 못한 어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가 바라본 베드로 안에는 한 시대의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 낚는 어부의 가능성이 숨 쉬고 있었다. 이 한 사람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운동력과 폭발력을 보고 그를 제자로 삼고자 계획하셨던 나사렛 예수야말로 오늘 이시대가 기다리고 있는 참 지도자의 모형이 아닐 수 없다.

 

(4) 일마다 최선을 다한 사람

느헤미야는 이른바 `기도만`하고 게으르게 누워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기도하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전념을 다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기도하면서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4장 9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그는 기도하면서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므로 방비 하는 일에 최선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4장 16절을 보도록 하자. "그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그는 백성의 일부분은 공사하는 사람으로, 다른 일부분은 경계하는 사람으로 나누어 놓았다. 4장 18절에는 나팔 부는 자를 배치해서 만일의 경우 경계조치를 취하게 하고 있다. 밤에는 보초를 두어 순찰케 하고 밤중에 파수하는 자들은 옷을 벗지 아니하고 경계 태세 지내도록 조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얼마나 철저한 조치인가? 기도는 결코 인간 의 노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도했기 때문에 덜 일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했기 때문에 기도의 힘으로 더욱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유명한 해군 제독 리크오버(Rickover)에게 인터뷰를 받고 있던 젊은 해군 장교가 있었다. 시사문제, 전투함의 구조, 해군전략, 전자, 음악, 문학등 쏟아지는 곤란한 질문들에 이어 오랜만에 자신 있는 영역에 대한 질문이 주어졌다. "그대는 해군사관학교 졸업 시 석차가 어떠했는가?". "예, 820명 중 59등 했습니다." 이 때 제독은 쏘아보는 눈으로 다시 질문을 했다. "그 성적이 그대의 최선의 결과인가?". "글쎄, 꼭 최선을 다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얼버무리는 그에게 다시 제독의 폭탄질문이 명중했다. "왜 그대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Why not the best?)". 이때부터 이 해군장교의 도전적인 좌우명이 선택되었다. 그것이 바로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의 삶의 모토인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였던 것이다. 우리가 한 날 주의 심판대 앞에 서서 지도자로서의 일생을 결산 하는 날 이 질문이 주님께로부터 우리에게 던져진다면 우리의 대답은 무엇일까? "그대는 지도자로서의 최선을 다했는가?"

 

4. 목회자의 지도력이 교회성장에 미치는 영향

목회자의 지도력이 얼마나 교회성장에 영향을 미치는가? 목회자의 지도력과 교회성장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 마디로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 이상으로 교회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도자를 통해서 교회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서 교회성장을 연구하는 클레어런스 림(Clarence Lim)은 교회성장이나 쇠퇴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은 지도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목회자의 지도력은 계속해서 성장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목회자의 지도력이 교회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다음 몇 가지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목회자의 선교비전

목회자가 지도자로서 가져야할 능력을 크게 두 가지라 본다. 하나는 지도자로서 지도력이며 또 하나는 관리자로서의 행정력이다. 지도력의 은사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맞도록 목표를 설정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어떤 지체에 주신 특별한 능력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과 이러한 목표를 서로 나누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교회의 특정한 사람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이다. 행정력은 다스리는 은사로서 교회의 특별한 부분의 즉각적인 또는 장기적인 목표를 분명히 이해하도록 또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어떤 사람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이다. 순수한 지도자이거나 순수한 행정가인 목회자는 드물다. 대부분 두 가지가 섞여 있다.

지도자는 하나의 비전과 그에 따르는 여러 개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명과 목표를 성취함에 있어서 지도자의 비전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매일 그것을 생각하고 밤마다 그것을 꿈꿔야 한다. 비전을 교인들에게 전하고 또 전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교인들로 하여금 그 비전을 실현시키고 그들의 진정한 필요를 만족시킬 일에 전력투구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목회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비전은 세계복음화를 위해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고 교인들이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강력하게 설명해야 한다.

목회자가 가져야 할 선교의 대한 비전을 간략하게 살펴본다면 이렇다.

1) 선교의 위대한 꿈(Great Vision)

2) 끊임없는 쇄신운동(Renewal movement)

3) 교회 내 선교조직의 활성화

4) 치유목회(Healing Ministry)의 방향

5) 세계복음주의 교회와 협력

6) 21세기 목회를 지향하는 구체적인 선교활동

7) 성경교육을 통한 교회질병 예방

8) 사회봉사 운동과 병행하는 선교계획들

 

(2) 목회자와 희생

성장에 있어서 가능성을 위한 첫째 문제는 우리 목회자 자신이 성장에 대해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가라는 사실이다. 즉 성장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희생할 각오가 있는가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목회자를 위한 희생의 목록을 한 번 제시하고자 한다.

여러분이 스스로 질문해 보시기를 바란다.

1) 내 꿈과 비전을 쏟아 붇고 있는가? 우리는 3V 즉 비전(Vision), 지칠 줄 모르는 활동력(Vitality), 모험심(Venture)을 오직 교회성장에 쏟아 부어야 한다.

2) 성장을 위한 마땅한 대가를 지불하려 하는가?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No gain without pain!)는 교훈을 늘 기억하기를 바란다.

3) 하나님과의 진실 된 기도 시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교회는 내 수준 이상으로 도저히 성장할 수 없다.

4) 사람에게 얼마나 관심을 쏟고 있는가?

5) 포기하지 않는 열심을 투자하라.

 

(3) 목회자와 사람들의 요구

1) 사람들의 요구를 아는 목회자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는 목회성공의 비결을 "사람들의 요구를 발견하고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교회는 지역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조사함으로써 몰랐던 요구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목회자는 교회 내에 상처받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도울 수 있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각각의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선교를 해야 한다.

 

2) 대처하는 교회진단과 전략

조지 헌터(George Hunter, 에즈베리신학교 선교학 교수)는 [교회성장과 목회전략(To Spread the Power :Church Growth in the Wesleyan Spirit)]에서 다음과 같이 6가지 성장전략을 말한다. 나라 사이에 문화적 차이가 있으나 그 원리는 여기서도 동일하다고 본다.

 

a) 공동체안의 변화를 문제로써 인식하지 말고 기회로 인식하라.

b) 새로운 교인 중 가장 수용력인 사람을 인도하고 훈련시키기 위해 민첩하게 움직이라.

c) 새로운 교인의 일부를 두드러진 지도자로 높이고 훈련시켜 교회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이 다른 교회에 초대 받았다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라.

d) 교회의 예배문, 찬송가, 스타일, 이미지를 문화적으로 적합하게 바꾸어라.

e) 당신이나 이미 전도한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성을 알아내어 친척이나 친구들이 참여 할 수 있도록 초대하라.

f) 대상 교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새로운 봉사직무를 채택하라.

 

그리고 교회성장을 위한 분석과 이에 따른 전략을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적용해 보라.

a) 인간에 대한 수용성의 중요성

b) 사회적 관계망의 중요성

c) 소그룹의 활용

d) 봉사방법의 확충

e) 수용적인 전도방식

f) 계획수립

(4) 목회자와 지도력 개발

지도력은 타고난 것도 아니며 유전된 것도 아니다. 지도자들과 지도자가 아닌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차이는 `자세`일 뿐이다. 여러분은 적성과 기질을 바꿀 수가 있다. 리더십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편 지도력은 하나님의 두려운 책임이다. 지도력에 대한 원리들을 개발하라. 그러면 성장에 대한 의무를 넘어 자신감을 갖게 된 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목회자에게 주신 가능성을 목회자 자신들이 개발하기를 원하신다.

지도자의 자기 통제력의 개발은 다음과 같은 신앙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1)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결단으로

2)계속되는 훈련된 삶을 통해

3)강력한 기도와 간구로

4)역경에 대한 감사를 통해

5)마음을 다스림으로

6)비전에 대한 일관된 초점을 가짐으로

7)최적의 자기통제는 성령의 통제이다.

이러한 자기통제를 통해서 지도자로서 얻어지는 것은 자유, 확신, 기쁨, 안정, 지도력이다. 지도력은 신장되고 또한 지속되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해도 정체되어 버린 지도력은 미래가 없다. 끈기 있게 성취해 나가는 지도력이 아니면 성장의 결과를 보장 못한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지도력에는 변화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필요한 능력을 얻기 위해서 기술을 연마하듯이 적극적인 훈련이 지도자에게는 필요하다.

 

5. 교회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성격, 덕목, 자질

영웅이 없는 시대는 참으로 불행한 시대이다. 미래의 희망을 보여주며 삶의 목표를 제시해 주고 뜨거운 가슴으로 삶의 의욕을 갖고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지도자가 너무도 필요한 때이다. 교회와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은 학문이나 신앙의 부족이 아니고 리더십의 부족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이제라도 한국교회가 좋은 지도자 양성을 위한 적절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1) 지도자의 성격

그러면 바람직한 교회지도자로서의 가장 적합한 성격은 어떤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가장 이상적인 성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지도자들이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보는 수많은 지도자적인 인물들이나 현재 하나님께서 쓰시고 계시는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너무도 다양한 성격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천성이 낙관적이고 사교적이다. 어디서나 재미있고 스스럼없이 사람을 사귀고 말하기를 좋아하고 사람이 모임 곳에서는 언제나 눈에 뜨이는 분들이 있다. 짐작 컨데 베드로가 그런 분이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또 다른 분들은 목표 지향적이며 적극적이며 추진적이다. 목표를 달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인물은 제거한다. 사업가들이나 운동선수들의 매니저들 가운데 많이 보인다. 바울과 마가의 초기단계가 그러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감정이 풍부하고 정확하며 분석적인 경향이 있다. 예술가들 중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모세와 예레미야와 같은 구약의 예언자들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어떤 이들은 차분하며 온화하고 꾸준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다. 연구실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분들이다. 이삭이나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와 비슷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이 가운데 어떤 성격의 소유자가 목회에 가장 적합한가라고 질문할 때 어느 한 성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격마다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격을 다 자신의 목적을 따라 구성하셨기 때문에 모든 성격을 다 쓰신다.

 

(2) 지도자의 덕목

그러나 어떤 성격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바람직한 교회의 지도자로서 지녀야 할 덕목은 공통적인 것이 있다.

첫째 교회의 지도자는 무엇보다 사랑의 사람이어야 한다. 목회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요, 목회의 대상은 사람이기 때문에 지도자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 인생을 즐겁게 살 줄 알아야 한다. 누구를 대해도 무엇을 해도 즐겁게 한다. 재미없어 보이는 일도 재미있게 해낸다. 그분을 보면 사는 것이 쉬워지고 즐거워 보인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하는 말씀이 영적인 지도자에게는 매일의 경험이라야 한다.

셋째 영적인 지도자는 평화의 사람이다. 그분에게는 늘 잔잔한 평화가 깃들어 있다. 그분을 만나면 마음이 편하고 그분의 모습만 쳐다보아도 삶의 풍랑이 잔잔해 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평화의 사람이라야 한다.

넷째 좋은 영적이 지도자는 인내심이 잘 발달되어 있다. 목회를 하는 분들은 적극적인 인내 없이는 도저히 목회를 할 수 없다. 성공적인 가정도 인내가 필수적인데 하물며 교회의 지도자는 더할 나위가 없다.

다섯째 영적인 지도자는 친절의 미덕이 있다. 친절은 기대하지 않았을 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이다. 사람들의 필요를 늘 관찰해서 적절한 때에 친절을 베풀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여섯째 착한 사람이라는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에게 "간사함이 없다" 고 쓰여 있는데 이것은 악한 데가 없다는 뜻이다.

일곱째 지도자는 성실한 사람이어야 한다. 무슨 일을 해도 자기의 최선을 다하면서 살기 때문에 믿을 수가 있고 그분을 신임할 수 가 있기 때문에 따라갈 수 있다.

여덟째 좋은 지도자는 부드러움이 있고 과격한 데가 없다. 말씨나 태도, 표정이나 행동이 부드럽고 온건하며 극단적인 데가 없어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다.

아홉째 모든 면에서 자신을 통제하면서 산다. 절제가 있다. 무엇이든지 잘 생각해 보고 연구해 보고 가장 적합한 때에 적합한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컨트롤하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삶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본이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이다.

이상의 덕목들을 교회지도자가 다 소유한다는 것은 인간의 수양으로 가능한 것들이 아니라 성령께서 성취할 수 있는 덕목들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계발되고 있는 지도자 들은 시간이 갈수록 돋보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관록과 지위는 높아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일으키는 지도자는 되지 못할 것이다.

 

(3) 지도자의 자질

그러면 지도자는 어떤 자질이 있어야 하나? 지도자는 성격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자질에 있어서는 공통분모들이 있다.

첫째 지도자는 비전의 사람이다. 현실을 넘어서서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영적, 지적통찰력이 있다. 그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도 하고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나오기도 한다. 그는 보다 더 나은 미래를 보고 씨름하며 고민하고 기도한다.

그 결과로 현재를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강하게 느껴진다.

둘째 강렬한 소명의식이 있다. 모든 성공적인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를 알고 부름 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어서 하는 일의 크고 작음을 개의치 않고 유명무명에 상관없이 자기의 일을 해야 한다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다.

셋째 지도자는 계획성 있는 사람이다. 영적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운다. 큰일을 여러 개의 작은 성취 가능한 부분으로 나누어 사람과 일을 조직하고 권한을 위임할 줄 안다.

넷째 지도자는 추진력이 있다. 계획된 일을 추진하여 성취한다. 사람을 모아 감화하고 설득하고 조직하여 일을 이루어간다. 즉 계획을 행동화한다. 일을 해도 열정적으로 한다.

다섯째 지도자는 투지가 있다. 위대한 비전은 큰 대가를 요구한다. 가치 있는 것은 그만한 값을 지불하게 되어 있다. 영적인 투쟁에는 희생과 수고가 요구된다. 부활의 승리는 십자가가 요구된다.

여섯째 영적인 지도자는 기도가 생활화 되어 있다. 순간순간 하나님께 큰일뿐 아니라 작은 일에도 의논하고 일을 추진한다. 영적인 일은 자기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시오, 그분의 일일뿐 아니라 자기는 하나님의 종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도자는 성취의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다. 먼저는 하나님께요, 다음은 동역자들과 함께 나눈다. 성취의 환희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수고는 길지만 성취의 기쁨은 잠깐이므로 성취감에 도취되지 않는다. 다음에 또 할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일반교인들이 요구하는 영적 지도자의 자질은 무엇인가?

미국과 캐나다의 신학교 연합회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첫째가 겸손이며, 다음은 정직성이며, 셋째는 신앙생활에서 삶의 본을 보여주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목회의 기능으로 나타나 있다.

인간의 성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매일같이 성장해야 하며 주님나라에 갈 때까지 성장해야 한다.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기 보다는 지도자의 덕목과 자질을 기르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6. 평신도지도자의 육성과 제자훈련

지금 기독교는 제2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 첫 번째 종교개혁이 평신도가 성경을 읽게 된 것이라고 하면, 두 번째 종교개혁은 평신도가 복음사역의 주체가 된 것이다.

영어에서 `평신도(lay)`라는 단어는 헬라어 `라오스`의 현대어이다. 라오스가 신약성경에서 `백성`(행 4:10)으로 사용되었으나 세속적으로는 군중이나 도시국가의 시민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문가`에 대립되는 `비전문가`나 `능력이 적은 사람` `교육받지 못한 사람`의 동의어로까지 쓰이게 되었다.

교회사를 통해보면 초대교회는 교역자와 평신도의 근본적인 구분이 없었다. 특히 사도들의 직분이 독특하게 취급되기는 했으나 그 직분이 교회의 계급을 구분 짓는 것은 아니었다.

클레멘트(Clement)는 "교회의 직분 자들이 온 교회의 동의를 얻어 직분을 맡을 것"을 말했으며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직책이 인간을 높이게 하지 마시오. 신앙과 사람이 모든 것이며 그보다 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평신도의 위치와 기능을 새롭게 회복시켰다. 루터는 [독일 귀족 크리스천에게 보내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만인 제사장 론을 펼쳤다. "교황, 주교, 사제들 및 승려들을 `영적 계급`이라고 부르고 군주들, 영주들, 직공들 및 농부들은 `세속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조작인 것이다. 실로 이것은 거짓과 위선인 것이다. 모든 크리스천은 참으로 영적인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의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고린도서에서 우리가 다 한 몸이나 모든 지체가 다른 지체를 섬기기 위하여 각기 다른 임무를 가진다(고전12:12). 고 말하는 것과 같다".

종교개혁이 평신도의 원상회복을 위한 이론적 작업이었다면 21세기는 평신도의 위치에 대한 현실적 적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금세기에 갑자기 평신도에 관한 중요성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사회적으로 본다면 종교의 핍박을 받았던 공산진영과 민주진영의 양상이 좀 달랐을 것이다. 민주진영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 확산된 의무교육에 따른 민주의식의 확산과 선거권의 부여 같은 평등의식, 기존의 전통적 권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참여하는 종교 활동에 접목되었다. 공산진영에서는 종교 활동의 억압과 교역자의 전인사역(full time)이 용이하지 않게 되자 평신도 가운데서 자연스런 대행이 이루어졌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제자훈련`이란 말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교역자의 교육이 신학교에서 주로 이루어졌다면 제자훈련은 평신도 지도자의 교육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 제자훈련의 초기에는 몇몇 선교단체에서 시작되었으나 요즈음은 교회에서 평신도 교육을 위해 제자훈련이란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제자훈련이란 새로 고안된 방법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켰던 방법이었으며, 복음서를 통해 보면 제자훈련은 예수님의 핵심적인 사도 교육으로 이들을 통해 세계 비전을 기대하셨다. 예수님의 교육은 한 사람의 전인격과 삶의 목표, 방식을 변화 시키되 마음을 변화시키는 교육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의 제자훈련은 다음 세 가지 영역에서 주의를 요한다.

첫째 지식을 키우는 주지적 교육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둘째 제자훈련의 목표는 교회성장이나 구역장 교육을 위한 교육 또는 내 교회, 내 모임, 내 나라에 국한되는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효과적으로 세계비전이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성취하기 위한 순종이어야 한다.

셋째 제자훈련은 기능적인 사역의 효율보다 개개인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마5:48)는 요구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케 되도록 해야 한다.

 

제자선교회에서 훈련받은 목회자들이 지역교회나 기관에서 제자훈련을 적용하면서 느낀 점을 앙케트 조사해보니 아래와 같은 유의사항을 알게 되었다고 제자선교회 대표는 말한다.

첫째 제자훈련은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되어 진다는 것이다.

둘째 단순한 내용, 단순한 방법이다.

셋째 전도와 양육의 경험을 많이 쌓고 사역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넷째 선발과 집중의 원리를 써야 한다.

다섯째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성경이 원하는 평신도의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 복음으로 살든 자비량으로 살든 그들은 성장과 헌신이 동일해야 할 만인제사장 들이다. 제자훈련은 평신도들을 그들이 속한 교회나 사회에서 제사장 되게 하는 유일한 예수님의 방법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께서 우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자.

 

 

 

 

 

 

 

 

 

 

 

 

 

 

 

 

 

제9장 현대 교회에서의 목회지도력

                     

1. 들어가는 말

넓은 의미로 지도력은 구성원으로 하여금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지원하고 이끄는 능력이다. 교회의 지도력도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공동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이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점이 있다. 지교회의 목사는 개인의 목표 달성보다 교회, 지방, 전체 교회의 목표 성취를 위해 전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체계 이론적으로 볼 때 목회 지도자는 교회의 목표를 성취할 뿐 아니라 구성원을 성숙시키며 구성원의 목표도 달성되도록 인도해야 한다.

 

(1)지교회의 목회 지도력

목회 지도력이 수립해야 할 기본 과업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능률적인 조직의 관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 일은 교회의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시행하는 모든 행정과 관리를 포함한다.

둘째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를 위해 효과적인 지원과 안내를 마련하는 일이다. 여기서 지도자는 신도들로 하여금 명확한 방향을 갖게 하고 교회의 선교를 위해 자유롭게 헌신 하도록 돕는다.

셋째는 확실한 영적 지도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 일은 적합한 교육, 설교, 상담, 기도, 예배, 위기 지원 등을 포함한다.

 

2. 개체 교회 목회 지도력의 모형

이 목회 지도력의 모형 안에는 성경이 제시하는 제사장적, 예언자적, 왕 같은 직능이 포함되어 있다. 목회 지도자 자신은 학문, 인격, 전문성, 영성의 영역에서 충분한 함양과 훈련을 받지 않는 한, 효과적인 목회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가 지적 한대로 목회 지도자의 과업은 훌륭한 관현악 지휘자의 역할과 비교된다. 관현악 지휘자는 주어진 자원을 통하여 최상의 음악을 창출한다. 뿐만 아니라 관현악 지휘자는 작곡자의 원본 악보를 하나의 안내서로 받아 해석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와 비슷하게 목회 지도자도 지휘자인 동시에 해석자로서의 위치에 선다. 그런데 관현악 지휘자가 이룬 음악은 단순히 아름다운 음악으로 출현하지만, 목회 지도자가 이루는 음악은 하늘의 음악이다. 그러므로 목회 지도자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신도들을 통하여 하늘의 음악을 창출해야 한다.

피터 드러커는 1960년대에 이미 지식사회의 도래를 예견하면서 지식근로자라는 용어를 세계 최초로 소개한 경영학의 대가입니다. 190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피터 드러커는 훌륭한 성과를 거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그들은 성격이나 지식, 관심사 등에서 천차만별이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그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 모두 목표를 달성하도록 해주는 ´실행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피터 드러커는, 기업에서 일하든, 정부나 병원, 대학에서 일하든, 그가 필요로하는 이 ´실행 능력´은 똑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능이나 상상력, 지식 등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러한 실행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다고 강조합니다. 피터 드러커는 이 ´목표달성 능력´은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노력하면, 효율적인 시간관리 방법이나 타인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스킬(기술) 등의 실행 능력을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일종의 ´습관´입니다. 초등학생이 구구단을 외우듯이, 조건반사적으로 몸에 밸 때까지 지겹도록 반복해야 익힐 수 있는 그런 능력입니다. 그 어떤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도 처음 피아노를 배웠을 때는 악보를 보고 그 음계대로 연습했을 겁니다. 그리고 연습을 통해 ´실행 능력´을 갖추며, 그는 뛰어난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쌓아나갔을 테지요. 그가 ´대가´의 반열까지 오를 수 있느냐는, 그 이후의 문제입니다. 그가 천재성을 타고 났는지는 오직 그 천재성을 부여해준 신께서만 아실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노력을 통해 그는 뛰어난 연주자까지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오를 수 있습니다. 피터 드러커의 이 얘기는 모든 지식근로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이 구구단을 외우듯이, 자신의 분야에 필요한 실행 능력을 몸에 배도록 갈고 닦는 것. 학습과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갖출 수 있는 이 능력은,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1)신앙과 지도력

신앙은 지도력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모세는 본래 입술이 둔하고 겁이 많은 사람으로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었지만 그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을 때 용감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이미 틸리히(Paul Tillich)가 지적 한대로 믿음은 "...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특성을 지닌다. 믿음은 어떤 역경이나 절망에도 불구하고 일하도록 돕는다. 믿음은 수치와 조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정진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지도력의 유효성을 창출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바른 신앙과 확고한 신앙을 겸비한 사람이다.

 

(2) 섬김과 지도력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지도자에 대하여 역설적으로 일러주었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마 20:26-27.(공동번역)

위대한 지도자는 먼저 남을 섬기는 사람이다. 여기서 섬김의 대상은 지배층의 권력이나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바로 이것들에 의해서 희생당하고 소외된 백성이다. 공관 복음서가 암시하는 백성은 가난한 사람, 병자, 세리, 죄인, 창녀, 어린이, 고아, 과부, 부랑자, 날품팔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날에는 이외에는 신체장애자, 알코올 중독자, 가난한 노동자, 시한부 환자, 에이즈 환자 등은 현대판 주변부 민중에 속한다. 만일 우리가 진정한 목회 지도자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역설적 진리를 배우고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고,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 20:28)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는 바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먼저 속한 것이었다.

미국의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은 첫 임기를 끝낸 후 재선에는 실패하였다. 미국인은 그의 지도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형의 지도자를 세웠다. 카터대통령의 직임은 4년으로 끝났지만 그의 봉사는 계속되었다. 1976년 그는 인간 거주 지원단(Habitat for Humanity)을 창립하여 자원 봉사자들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짓는 일에 가담하도록 하였다. 이 인간 거주 지원단의 봉사자들은 미국밖에 있는 여러 나라의 빈민촌에 3만호의 집을 지었다. 카터대통령은 임기 후에도 세계의 지도자로서 계속 봉사하였다. 그는 못을 박고, 벽에 페인트를 칠하며, 소외된 사람들과 무주택 빈민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봉사하고 있다. 카터에게 지도력이란 섬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라 섬기는 지도자가 되었다.

지도자들은 앞으로 완전한 복종의 멍에를 메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아 "섬기는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3) 치유와 지도력

훌륭한 지도자는 남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대신 치유(healing)를 가능케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또 다른 지도자 상은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레위인과 제사장은 강도 당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의 상처를 싸매 주고 돌보아 주었다. 사마리아인은 멸시와 천대 속에서 고통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었기에 고통 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그 고통을 친히 공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연민에 찬 마음으로 불쌍한 사람에게 치유를 베풀 수 있었다. 그는 진실로 상처 입은 치유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일리프 신학대학교의 총장 메써(Donald E. Messer)박사는 이와 관련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은 아픔, 비극, 깨어짐을 아는 동시에 쓴맛, 자포자기, 절망 너머로 움직여 간 사람들을 찾고 있다." 한국 교회도 이런 지도자를 찾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점에서 최상의 "상처 입은 치유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병자, 죄인, 천대받는 사람을 찾아 새 희망을 줄 뿐 아니라 만인을 위하여 고통스런 십자가를 지고 구원과 치유의 길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4) 해방과 지도력

성경이 증언하는 지도자는 백성들을 모든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사람이다. 그는 모순된 생의 속박 속에 살면서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가난한 자, 소외된 민중, 억압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해방의 기쁨을 안겨 주는 지도자이다. 한국에도 마딘 루터 킹, 투투 대주교, 링컨과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한다.

 

(5) 한(恨)과 지도력

한국 교회가 바라는 지도자는 한(恨)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선교자이다 "한"은 불의한 정신, 신체, 상관의 억압에 의하여,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압박에 의하여 야기된 마음의 중대한 상처이다.

이것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절망, 슬픔, 억울함, 거부, 증오, 적대감, 소외 의식 등의 반작용을 통하여 표현된다. 한을 극복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통한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회 지도자의 과업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한으로부터 해방되게 하는 동시에 새 시대를 창조하는 목회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3. 맺는 말

현대 교회에서의 바람직한 목회 지도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설적 진리에 근거한다. 그 지도자의 형상은 섬기는 지도자, 상처 입은 치유자, 예속된 해방자, 그리고 한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창출하는 선교이다.

조지아 주립대학의 데이비드 슈워츠 교수는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를 말하면서 “성공하는 사람은 키나 체중, 학력이나 집안 배경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크기에 따라 평가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나는 안 되어도 하나님을 하실 수 있습니다.

 

 

 

 

 

 

 

 

 

 

 

 

 

 

 

 

 

 

 

제10장 예수 그리스도의 지도자론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매스컴에 분주히 등장하는 사회 지도자들을 눈여겨보고 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제각기 “내가 국가를 이끌 지도자로서 적격자”라는 논리로 국민을 설득한다. 이즈음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국가가 필요로 하고, 국민 대중이 원하는 지도력이 무엇인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그 지도력의 본질이 어떠해야 하는지, 어떤 인격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지, 혹은 그 지도자의 구체적인 인격을 검토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성경 안에 가장 대표적인 지도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주로 복음서 안에서 살펴봄으로써 기독교적인 올바른 지도자 상을 알아보자.

 

2. 예수님에게 “지도자”라는 호칭이 가능한가?

(1) 신약성경에서 “지도자”(a leader) 혹은 “지도하다”(to lead)에 해당하는 어휘들을 대략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명사형으로 “지도자”는 ἀρχηγος, ἡγουμενοι, ὁδηγος, ἐπισκοπος, ἐπιτροπος, ἐπιστατης, πρωτοστατης, παιδαγωγος, καθηγητης, 혹은 ἐπισκοπη 등이며, 동사형으로 “지도하다”는 ἡγεομαι, ὁδηγεω, ποιμαινω 등이다.

구체적으로 위의 어휘들에 대한 용례를 먼저 살펴보자.

 

1)아르케고스(ἀρχηγος) : 이 말은 칠십인 역에서 통상 백성들의 정치적 혹은 군사적 지도자를 의미했다. 신약성경에서는 단 4회 사용되는데, 행3:15은 “생명의 주”(ἀρχηγος της ζωης), 행5:31은 “임금과 구주”(ἀρχηγον και σωτήρα), 히2:10은 “구원의 주”, 히12:2은 “믿음의 주” 등이다. 이는 초대교회가 이 말을 변증적 설교의 맥락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여 보좌에 오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도록 사용했음을 알게 한다.

 

2)헤구메노스(ἡγουμενος) :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8회 사용된다(마2:6, 눅22:26, 행7:10, 행14:12, 행15:22, 히13:7,17,24). 이 말을 마태는 2:6에서 미가5:1,3절과 왕하5:2을 결합해 종말론적 왕으로서 백성의 선한 지도자로 이해하며, 사도행전과 히브리서에서도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책임을 맡은 목회자들이나 신앙의 모범 자들로 이해한다. 특히, 막10:43-44(“누가 큰 자인가”)을 자료로 하여, 누가는 눅22:26에서 “지도자”는 “섬기는 자”이어야 함을 말한다(눅22:26,27. 막10:43,45).

 

3) 호데고스(ὁδηγος) : 이 말은 칠십인 역에 거의 나오지 않지만, 신약에서는 “지도자”나 “안내자”로 사용한다. 행1:16에서 예수님을 대적 자들에게 안내한 가룟 유다에게 적용하며, 마23장(16,24, 참조.15:14)에서는 소경 인도자인 바리새인을 가리킨다. 특히 요16:13에 “인도하다”(ὁδηγηω)는 말을 통해 요14:26의 “보혜사 성령”(παρακλητος)과 관련하여, 지상의 예수 자신도 참 인도자로 그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도했음을 말한다.

 

4) 에피스코포스(ἐπισκοπος) : 이 말은 성경 밖의 헬라어와 유대교에서는 하나님, 감독자인 인간, 견유학파 사람, 혹은 어떤 직책의 이름으로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단 5회만이 사용된다. 벧전2:25에는 ‘그리스도’ 자신을 그렇게 불렀고, 나머지 구절에서는 대체로 초대교회 내의 ‘지도자’를 가리킨다(행20:28, 빌1:1, 딤전3:2, 딛1:7). 아마도 이 말은 교회의 발전 과정 속에서 “장로”와 같이 책임 있는 자를 가리키다가, 목회서신의 교회에 와서는 구별된 직책으로 말해졌을 것이다.

 

5) 에피스타테스(ἐπιστατης) : 이 말은 세속 헬라어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지도자’를 주로 가리켰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누가복음에서만 호격(επιστατα)으로 7회 사용된다(눅5:5, 8:24,45, 9:33,49, 17:13). 복음서 기자 누가는 다른 복음서의 “랍비”(ῥαββι), “교사”(διδσκαλε), “주님”(κυριε)에 대신하여 이 말을 편집 삽입어로 사용한다. 누가는 제자 공동체를 지도한 지상의 예수님을 회상하며, 역시 지금도 그가 교회 공동체의 참 지도자(a true leader)임을 말한다.

 

6) 카데게테스(καθηγητης) :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마23:10에서만 2회 사용되었다. 물론 이 말이 “교사”나 “(길)안내자” 등을 가리키지만, 마23장의 맥락에서 마태는 예수님만이 제자들에게 “유일한 지도자”일 수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님은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니 곧 그리스도니라”로 말한다.

 

(2) 우리는 이미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막스 베버(M. Weber)의 지도자 론에 따르면, 지도력(leadership)이란 지도자와 추종자들 모두가 그 가치들, 동기들, 희망들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어떤 추상적인 목표들을 향해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사실 초대교회는 교회의 지도력을 참 지도자이며 따라야 할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활동과 그 인격에서 찾으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의 지도력이 그 자신의 기독론적 혹은 종말론적 이해의 지평과 더불어 초기교회의 신앙 고백적 선포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은 일반적인 카리스마적 지도자라는 개념의 테두리를 넘어서 ‘구원자’라는 신적 인간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3)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서만 아니라, 참된 지도자로 이해했으며, 교회 공동체인 자신들은 그를 따르는 선택된 무리 혹은 제자들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누가의 이해는 분명하다. 누가는 제자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을 “에피스타타”(επιστατα)로 부르도록 하며, 눅22:24-33에서는 그런 예수님의 지도자적 모습이 제자들과의 관계로 더욱 구체화되어 드러난다. 즉, 유월절 만찬(눅22:14-23)에 이어서,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로 다툰다(눅22:24-30).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지도자는 섬기는 자”(눅22:26절)라 말하면서, 바로 그 자신이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고 말한다(눅22:27). 이런 맥락에서 누가는 예수님을 제자들의 지도자(ὁ ἡγουμενοι,‘두목’)로 이해한다. 더불어, 편집구인 눅22:28-33절에서 누가는 이 맥락을 더 확대시킨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의 모범으로 수난의 길을 갔듯이, 지금 제자 공동체들도 종말론적인 심판과 “그 나라”를 소망하며 그들 자신도 다른 “형제들”을 지도해야 함을 말한다. 결국 누가는 교회의 지도력이 주님의 말씀에 있었고 지상의 예수님이 교회 지도자의 원형(proto-type)이었음을 회고하며, 동시에 누가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바울처럼 역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요16:13에서도 동일하다.

 

3.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지도자론

만약 초대교회가 지상의 예수님을 회고하면서 그를 자신들의 참 지도자로 이해한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 자신은 자기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마23:8-12의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단락의 전승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랍비”나 “지도자”로 불려지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마23:8,10). 마23:8-11에 따르면, “랍비”, “아비”(일종의 스승), “지도자” 등으로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호칭은 그리스도처럼 ‘섬기는 자’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 적극적으로는 오직 한 분 - 그리스도 - 만이 그런 호칭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마태는 “랍비”(ῥαββι) - “아비”(πατηρ) - “지도자”(καθηγητης) - “그리스도”(Χριστος) - “섬기는 자”(διακονος)라는 도식을 통해, 섬김의 참 지도자인 그리스도를 마태 교회의 모범으로 회상시키고 있는 것이다(마23:8-9). 그러면, 이런 호칭의 사용이 전적으로 초대 교회로만 돌려져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1) 참 지도자로서 권위

사실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과는 대조적인 지도력을 나타낸다. 그 당시 종교 지도력이 율법, 성전, 혹은 사제를 중심으로 한 제도적 권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면, 예수님은 그보다는 카리스마적 선지자와 이적 행위자로서 자신의 새로운 지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제사장도 아니면서 죄를 용서해 주고, 병을 치유하며, 정결 법을 무시하고, 성전의 기능을 스스로 수행했다(막7:10-23, 마15:1-20, 막1:4, 5:1이하, 25이하). 더 나아가 부패한 성전을 공격하고(막7:10-12, 마15:4-6, 23:23, 눅11:42) 성전 청결사건(막11:15-19)과 그에 따른 권위에 관한 논쟁을 야기 시킨다(막11:27-33). 이런 예들은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메시아적 권위를 보여주며 그 사건의 중심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는 메시아적 상징성을 나타낸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모든 이들을 위한 대속적 죽음을 스스로 촉발시키며 성전(공동체)의 종말론적 새 회복을 기대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는 자신의 지도력을 의도적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시키고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한 “자기중심적” 중재자로 자신을 이해하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참 지도자로서 예수님의 새로운 권위였다(막1:27, 2:10, 28, 4:41, 11:18, 27-33).

 

(2) 삶의 자리

1)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곧 모든 이들을 이끄는 현장을 의미한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많은 회당이 있었고 거기서 많은 대중들은 율법을 만나고 안식일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눅4:20). 이는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요한의 연대기를 차제하고서라도, 복음서 역시 예수님의 주요 활동의 무대를 우선은 예루살렘 성전과 여러 회당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유대교의 제도 안에 있는 예수님을 말한다. 한 예로, 막14:49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고 말한다. 이는 그의 지도력이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성전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지도력이 먼저는 사회적 적법성의 틀을 유지코자 하는데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그러나 우리는 머리 둘 곳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았던 카리스마적 유랑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눅9:58, 마8:20). 사실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해진 장소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지도했다. 그 반면에, 예수님은 정해지지 않은 공간으로 모든 사람을 찾아 나서며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쳤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에세네파의 쿰란처럼 금욕적 은둔생활을 강요하거나, 헤롯당처럼 어떤 정치적, 군사적 혁명운동을 부추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때를 분별하며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화해와 섬김의 복음으로 선포했던 것이다(막1:15, 눅4:18-19). 그 뿐인가?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에 의해 소외된 자들 - 세리, 죄인, 간음한 여자, 각색 병든 자, 소경, 문둥병자, 여자들, 가난한 자들, 귀신들린 자 등 - 을 찾아다니며 그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그들을 하나님 나라에 초대하기도 했다(막2:15-17).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이 마을 저 마을을 유랑하며 닫힌 사회적, 종교적 공간을 의도적으로 깨트리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를 세우는 운동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3) 지도자론

예수님은 자신을 추종하는 많은 무리들 중에서 그의 말과 행위를 모범으로 삼고 배우려는 자들을 자신의 제자로 삼으셨다(막3:13-19). 그러나 제자들을 부름이 오직 예수 자신의 주도권에 의해 이루어진다. 배타적으로 그들에게 당시의 다른 지도자와 어떤 관계도 허락지 않았다(마23:8-10). 이는 예수님의 지도자 의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사실 그는 말과 행위를 통해 그들을 철저히 가르치려 했으며 역시 자신의 제자들을 다시 세상에 파송하면서 사명을 주고 행동 지침을 주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려 했다(막6:6-13, 마10:1, 5-15, 눅9:1-6, 10:1이하). 유대교의 지도력이 율법에 대한 결의론적 해석에 치중한 유대교의 자의적이고 편파적인 법 해석에 기반을 둔데 반하여, 그의 지도력은 보다 인간 중심적인 법의 정신과 그의 종말론적 지평에 의해 이끌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시의 지도 세력들과 갈등을 야기 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 지도력의 동기들

그러면 예수님의 지도력은 천부적이었나? 꼭 그렇지는 않다. 복음서는 그의 경험들을 말한다. 일단 예수님의 결정적 경험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은 사건일 것이다(막1:9-11). 그 때,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 하듯이, 이런 영적 체험은 확실한 자기 소명의식과 연관된다. 한편, 이런 자기의식은 예수님의 지도력을 나타내는 중요한 동기들로서 우리는 그의 지도력과 관련하여 이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① 먼저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자”로서의 “(그) 선지자” 의식이다(눅13:33, 마23:31이하,37-39. 막6:4).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했다고 주장한다(막3:28이하, 마12:28, 사61:1). 그의 선지자적 권위는 여기에 연관된다. 백성, 제자, 심지어 바리새인도 그를 선지자로 이해한다. 예수님은 사61:1의 영의 약속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끊어진 영”에 대한 제자들과의 공유를 통해 그것의 종말론적 회복을 기대했다. 이 종말론적 하나님의 영은 아버지 - 아들 - 따르는 자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도록 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아들”의 자격을 부여한다. 이런 창조적 관계를 드러내는 부름말이 “아바”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율법적 권위가 아닌, 가족적 사랑으로 이해하도록 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새로운 이해는 기존의 제도권에 대한 반체제적 사회혼란 행위로 비쳐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연히 이스라엘 안에 새로운 개혁적 지도자로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막1:22,27, 2:10, 11:27- 33).

② 둘째는, 메시아적 “인자” 의식이다. 수세사건(막1:11)과 시험사화(막1:12-13)를 통해 이미 세례요한에 의해 예고된 인자-메시아로서 예수님은 자신을 새롭게 인식한다(막1:7). 이런 "최초의 결단"을 통해 그는 점진적으로 메시아적 인자의 길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엄격한 “아들 됨의 순종”(A. Schlenter)으로 걸어가도록 하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종적인 결단”에 이른다. 이처럼 예수님은 홀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아들과 인자-메시아로 나아갔고 또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 때, 예수님 자신은 “가난한 자”에 대한 극진한 헌신(cf.사61:1-2), 사랑의 섬김(눅19:10, 막10:42-45, 요13:2-17), 또한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통해, 새롭게 자신을 이스라엘과 일치시키려 한다.

 

2) 지도 방법론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지도자로서 예수님의 자의식과 그것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런 예수님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지도하려 했고 또 지도했는지를 알기 위해, 여기서 어떤 체계적인 방법론을 추출 해내기보다는 일괄적으로 예수님의 특징적 활동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살펴보려 한다.

①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지만 비유적이어서 그 성격상 제한된 자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영역이었다(막4:11-12).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자를 자신의 자리에 초대했지만, 세리, 죄인, 가난한 자, 종 등과 같은 하층민들이 그 초대에 응할 뿐이었다(눅14:7-14, 4:18이하, 마11:5, 막2:17), 그의 초대에 응한 자들은 속옷조차도 빼앗기며,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만 하는 형편에 놓여 있었다(마5:40-41). 한편, 지도층 인사들은 율법과 제사는 원하면서 이웃에 대한 자비는 원치 않았다(마12:7. 막2:23이하). 화려한 궁전과 쌓이는 재물에 정신이 팔려 그것들을 의인의 축복과 평안으로 오해했다. 이런 사회적 갈등이 결국 자신들의 자멸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가난한 자들의 종교적,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이 당연한 현실이었다. 이 때,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회에 등장했던 것이다.

②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을 통해 사회적 현실이 역전되기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약속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을 향한 새로운 비전이며 새로운 지도력이었다. 그 약속은 물질의 만족을 넘어서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확신”을 체험케 하는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런 새로운 확신의 자리는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며 행동으로 옮겨지는 현장이기도 했다. 그 현장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하나의 비전(the vision)을 통해 서로가 만나는 삶의 자리였다. 예수님은 랍비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율법에 대한 문자의 해석과 행위적 모범이라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혹은 새로운 신율의 나라를 경험하도록 무리들을 초대하고 지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밖에 있던 자들은 예수님이 새로운 왕국을 꿈꾸며 자신의 지도력을 이 땅에 확장시켜 나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심지어 가까이 있던 제자들도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요10:11, 마26:31)를 보기 보다는, 열 두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부릴 수 있는 그런 지도자(마26:53)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③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의 지도자였다. 이는 남을 자유케 하는 고난의 섬김을 뜻한다. 예수님은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며(막1:32-34, 21-28, 3:1-6, 5:1-43), 세리나 죄인들과 식탁교제를 의도적으로 한다(막2:15-17, 마9:10-13). 그런 일들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베푸는 용서의 평강에 그들을 동참하게 함으로, 상처 난 자리를 싸매고 치유의 자리에 들게 한다. 이렇게 사회 속에 함께 나눔의 자리를 공유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가 누려야 할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친히 그것을 몸으로써 보여 주었다. 즉,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메시아적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있을 용서와 화해를 그 초대의 현장에서 종말론적으로 경험케 한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과 행위 앞에는 의인과 죄인, 정결과 부정, 부자와 빈자라는 이분법적 차별이 없어진다. 그는 율법의 행위 규범으로 인간을 파악하지 않고 믿음의 법인 섬김과 사랑으로 모두를 파악했던 것이다.

④ 더 나아가 예수님의 섬김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막10:45에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맞이할 수난을 앞두고 대속적 죽음을 각오한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지도자나, 선지자, 혹은 모범자로 이해하고 부르는 것을 거부케 한다. 예수님의 섬김은 일반적 범주를 넘어서 오히려 고난당하는 자들과 그 현장을 자신의 인격에 일치시키며 새롭게 자유와 생명을 해산하는 창조적 행위였다. 이를 우리는 최후의 만찬에서 알게 된다. 그는 유월절을 앞두고 자신의 사명과 제자들의 책임을 가르쳤다. 그는 단순히 떡과 잔을 통해 자신의 제자 공동체가 ‘하나’이어야 함을 가르치며 죄용서 받은 기쁨의 ‘새 계약 공동체’가 그의 인격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이해시켰다. 역시 부활 후에 초기교회는 이런 것들을 기억하며 새롭게 기독론 적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4)결론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지도자 론은 “십자가의 길” 그 자체였다. 그는 지도자로서 성경을 풀어 주기도 하고, 비유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상상력을 키워주며, 종말론적 신앙의 능력을 보여주고, 자신의 말씀 앞에 제자들을 결단하도록 이끌며, 눈물을 흐리는 자와 함께 흘리며, 기쁨에 넘치는 자와 함께 기뻐하며, 그렇다고 유대교의 지도자들처럼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온유와 겸손을 통해 자기를 들어내며,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남을 자기처럼 여기며,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섬김과 화해의 지도자로 자신을 내던졌던 고난의 종이었다. 그리하여 의인보다는 죄인을 찾아다니며, 일등보다는 꼴찌를 사랑하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나라의 새 질서는 무엇인지를 깨닫게 했다. 그 뿐인가? 예수님은 타락한 성전 예배를 반대하며 성전을 청결케 하며, 율법의 원래적 정신에 어긋난 비인간적 독소 조항을 철저히 비판하며, 또한 그것들을 자신의 안위에 이용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훼파하려 했으며, 개혁하지 못하는 안일한 기존의 체제를 향해 메시아적 선지자로서 저주를 선포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결국에는 하나님을 알고 신뢰한다는 자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을 모욕했다는 죄명으로, 기존의 체제를 비판하고, 민중 봉기를 획책하여 반란을 도모했다는 역적 죄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던 것이다. 어느 누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결단”을 통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자초하며 하나님 나라의 모범을 보이신 하나님 아들이었다.

 

4. 마치는 말

초기교회는 자신들의 지도력을 예수 그리스도에서 찾으려 했다.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지상의 예수님을 회상하므로 자연스레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공동체의 참 지도자의 원형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런 이해가 초기교회의 것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물론 예수님의 지상 활동에서 “지도자”라는 호칭이 직접적으로 불려 지지는 않았지만, 초기교회의 이런 이해의 바탕은 지상의 예수로부터 나왔다는 데에 거부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섬김과 화해로서의 지도자 정신을 생각해 보았다. 이는 자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지도력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특히 지금 우리는 사회 문화적인 가치의 혼란과 정치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져 들고 있음을 누구나 말한다. 더구나, 아직도 우리는 휴전선으로 잘라진 민족의 현실 이외에도 선진국들에 의해 급속히 변화하는 세계 속에 들어와 있다. 이런 여러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은 어떤 지도자 론을 필요할까? 또 우리 각 개인과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사회 안에 지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까? 역시 우리의 결국은 초기교회가 그러했듯이 지도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현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검토하고 보다 성경적인 이해에 접근하여 다시 민족과 사회 안에 자리 매김하는 교회와 내가 되어야 한다.

 


List of Articles
26 2015년 여름학기 강의안 file 관리자 2015.07.16 2616
25 2012년 계절학기 교재 file 관리자 2014.02.18 2871
24 누가복음 file 관리자 2014.02.18 3052
23 치유 상담학 관리자 2014.02.18 2689
22 치유사역 연구 관리자 2014.02.18 2700
21 조직신학/구원론 관리자 2014.02.18 3160
20 장로교회란? 관리자 2014.02.18 3418
19 예식서 관리자 2014.02.18 3586
18 예배학 관리자 2014.02.18 3206
» 영적 리더십 관리자 2014.02.18 5031
16 역사신학 관리자 2014.02.18 3196
15 개혁주의와 언약신학 관리자 2014.02.18 3255
14 성찬과 성례 관리자 2014.02.18 4870
13 성령론 관리자 2014.02.18 3316
12 설교학 관리자 2014.02.18 3333
11 새로운 설교학 운동 관리자 2014.02.18 3073
10 사도신경 강해 관리자 2014.02.18 3136
9 목회 신학 관리자 2014.02.18 3299
8 내적 치유 사역 관리자 2014.02.18 3192
7 기도학2 관리자 2014.02.17 3204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