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8 13:53

조직신학/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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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권 구원론

 

구원론(Soteriology)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각 개인에게 실제로 적용하시는 과정을 정리한다. 구원론은 성령의 사역론이다.

구원론의 주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일반 은혜, 성령의 활동들, 부르심, 신비적 연합, 중생(重生), 회개, 믿음, 칭의(稱義), 양자(養子), 성화(聖化), 성도의 견인(堅忍), 영화(榮化).

구원에 관한 진리는 구원의 필요성과 구원의 방법과 구원의 결과 등의 주제들을 포함한다. 이 주제들은 하나님의 복음 전체의 요약이다. 이 셋 중, 구원의 필요성은 신론과 인간론에서, 또 구원의 방법의 일부인 선택과 속죄는 신론과 기독론에서 다루어졌다. 구원의 방법의 나머지는 구원론에서, 그리고 구원의 결과는 교회론과 종말론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구원론에 관한 주요 성경들은 로마서(믿음, 칭의, 양자, 성화, 영화), 갈라디아서(칭의),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중생, 양자, 성화), 에베소서(성화), 야고보서(성화) 등이다.

 

 

 

 

 

 

 

 

 

 

 

 

 

제1장 구원의 서정

 

1. 본론의 진술

 

(1) 구원론(救援論 soteriology)이란?

 

구원론을 의미하는 라틴어 소테리올로지아(soteriologia)는 그리스어로 구제 · 구원을 뜻하는 소테리아와 말 · 생각을 뜻하는 로고스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특히 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연구하는 학문의 영역을 일컫습니다.

구원론은 말 그대로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에 대한 내용이 그 주제를 이루므로 구원론을 성령론이라고도 합니다.

타락한 인간에 대한 구원 계획은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졌다. 이에 따라 구원의 주체이신 성부 하나님은 구원의 객체인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성자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으며, 성자 그리스도는 구속 사역을 이루셨다. 그런데 이 구속 사역의 효과를 인간들에게 적용하는 성령의 사역에 관한 연구가 바로 구원론이다. 따라서 구원론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이루어진 구원 사역을 성도 각인에게 적용하기 위한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 때문에 구원에 관한 성경 교리가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 교리 다음에 다뤄짐은 자연스럽다. 여기서는 성령께서 각 개인의 구원을 어떠한 절차와 순서에 따라 이루어 나가시는지에 대해서 주로 다룬다.

 

1) 구원의 순서에 대한 고찰

구원의 순서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진 구원의 사역이 죄인들의 심령과 삶에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서술하는 용어다. 구원의 순서는 구속 사역의 적용에 있어 성령의 다양한 활동들을 논리적인 순서로 또한 이들을 상호 연관 하에 서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는데 있어서 무엇을 행하는 가에 강조점이 있다.

바이츠 재커는 구원의 순서에 단지 인간의 심령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들만 포함시켰으며, 부르심 혹은 칭의는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구원의 서정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의 객관적 사역이 죄인의 마음과 생활에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것은 구속사역에서의 성령의 다양 동작을 그 논리적 순서로 상호관계에 의해 묘사한다.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이란 구원이라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세부적으로 나누고 그 순서를 정한 것을 말한다. 물론 성령의 사역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순서를 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인간 구원을 위한 성령의 다양한 역사를 살피고, 그 은혜를 더욱 풍성히 체험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적 순서라기보다는 논리적 순서일 뿐이다.

그런데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계획,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집행되어졌다. 이러한 구원의 서정을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을까?

성경은 과연 명확한 구원의 순서를 제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성경은 우리에게 완벽한 구원의 순서를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한 순서에 대한 충분한 기초를 제공한다.

성경에서 구원의 서정과 근사한 구절은 롬 8:30이다. 여기는 소명, 칭의, 영화라는 구속적용의 3가지 행위가 있다. 성경이 명확한 구원의 서정을 어느 한 구절에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이 서정을 구성케 하는 일을 한다. 성경은 여러 구절에서 또는 여러 방식으로 구속사역에서의 모든 동작의 상호 관계와 선후 순서를 지시한다.

요 3:3-5; 요일 3:9, 5:16; 롬 3:30, 5:12, 6:22, 8:15-17, 29-30, 10:17; 갈2:16-20, 4:5-6, 5:16-17; 엡 1:13-14, 4:1-2; 빌 3:9-11; 벧전 1:22-23의 여러 절에서다.

이 모든 절과 기타 유사한 구절들에 구원의 서정의 교리가 기초한다.

 

이에 대해 벌콥은 다음을 주장한다.

 

①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개별적 개인들에게 적용하는데 있어 성령의 활동과 이들에게 분여되는 구원의 복들을 매우 풍부하게 나열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교의학에서 사용된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으며, 종종 다른 명칭을 사용하거나 비유들을 활용하고 있다.

 

② 성경은 여러 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구속사역에 있어서 상이한 활동들의 상호관계를 지시해주고 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믿음에 의한 것이요, 칭의 된 자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그에게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 우리는 의의 종이 되기 위해 그리고 거룩함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 우리가 양자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는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난다는 것, 율법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삶을 초래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상기 구절들과 이와 유사한 많은 구절들은 구속사역의 다양한 활동들의 상호관계를 제시해주며, 구원의 순서를 구성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해주고 있다.

성경이 구속사역의 적용에 따르는 정확한 순서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원의 순서에 대한 상이한 의견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 실제로 교회들은 구원의 순서에 대해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구원서정의 교리는 종교개혁의 산물이다. 초대교회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에 성령이 공작하시는 주관적 구원의 교리들보다 그리스도께서 땅위에서 이룩하신 객관적 구원을 취급하는 교리들을 먼저 발전시켰다.

로마 카톨릭은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이들은 성육신의 논의로부터 교회 및 성례로 치중하였다. 하지만 개혁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활의 기원에 치중하였다.

칼빈은 구원의 순서를 구성하는 개념들의 배열에 착수한 최초의 사람이었으나 그 배열에서 명확하지 못하였다. 그는 소명과 신앙, 중생과 회심, 성화, 칭의, 예정, 부활이다.

카이퍼는 이를 신적동작보다 인적동작에 치중하여 주관적이라고 비판했다.

구원의 순서를 말하는 양식에서 16세기 신학과 후대 신학 사이에 많은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벨직 신도게요는 24조에서 낡은 술어를 사용하여 “우리는 이 참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과 성령의 공작에 의해 사람 안에 조성되어 그를 중생하고 그를 새사람으로 만들어 그로 하여금 새 생활을 하게 하며 그를 죄악의 속박에서 해방한다고 믿는다.”고 하였다. 후대신학자들이 사용한 새 술어는 구원서정에서 중생을 새 생활의 시초에 국한한다.

 

2) 구원의 순서에 대한 개혁파의 견해

개혁파 신학의 구원의 순서는 인간의 영적인 상태는 그의 지위, 즉 율법과의 관계에 의존하며, 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근거로 하여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괴적인 죄의 영향력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개혁교회의 구원론은 성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사람들과 그리스도와의 구원의 언약에서 성립된 신비적 연합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 구원의 언약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소유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의가 영원히 전가된다. 이렇게 법적인 요소가 도덕적인 요소보다 우선하고 있으므로 맥코비우스, 컴리, 카이퍼 1세와 2세는 구원의 순서를 칭의에서 시작하고 있다.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유일한 조성자로 높인다. 이 신학은 구속의 적용을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은혜로운 의지에 추적하여 돌아간다. 사람이 구원의 참례가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역사의 나가는 길에 유효적으로 실현하시는 선택의 영원한 작정에 의지한다.

칭의의 위치에 대해 개혁파 신학은 그 출발점을 구속의 언약에서 성립되는 신비적 연합에 두는데 그 연합의 결과로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백성에게 영원히 전가되는 것이다.

카이퍼는 구속의 서정을 칭의로 시작하였다. 그는 개혁파와 루터파의 차이점을 개혁파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칭의를 가르치고 루터파는 신앙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그리스도 사역의 완성으로 서술하였다. 하지만 개혁파 신학자들의 절대 다수는 ‘구속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예상하면서 구원의 순서에는 신앙에 의한 칭의 만을 논의하며 그 논의를 자연히 신앙과 관련하여, 즉 신앙의 직후에 착수한다.

그러므로 구속의 적용이 그 발단에서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여 구원의 서정을 소명 혹은 중생으로 시작한다. 다음에 회심의 논의가 따라오는데 회심에서 중생의 사역은 죄인의 의식 생활에 투입하여 그로 하여금 자아와 사단과 세계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한다.

칭의에는 수양의 행복이 따른다. 그리고 칭의와 수양은 사람을 하나님과의 새 관계에 도입하여 새로운 순종의 의무를 그에게 부여하는 고로 성화의 사역이 다음에 고찰되며 최종에 성도의 견인과 영화는 구원의 순서를 종결한다.

롬 8:30에는 소명을 구원의 서정에 선두에 배치하며, 요 3:3-5에는 중생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선결 조건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요일 3:9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라 하여 중생자는 죄의 주관세력에서 구출됨을 말하니, 이는 중생에 회심이 따름을 암시한다. 회심다음에 신앙이 온다. 그리고 신앙에 칭의가 따르는 것은 이신칭의를 말하는 여러 구절이 증명한다. 칭의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수양되는 은혜가 뒤따르나니 후자도 전자와 같이 신앙의 결과다. 칭의된 자는 이미 성령으로 중생할 때에 성령의 내주를 얻은 고로 그의 수양에 성령의 인도가 동반하니 이는 성화의 공작이 진행함을 의미한다.

고전 6:11에는 성화를 칭의 보다 먼저 꼽았으니, 그것은 중생과 성화의 밀접관계 때문에 “씻음과 거룩함”을 연결하여 말한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신자 안에 행사하시는 선한 일은 모든 죄악을 통과하여 반드시 완성을 볼 것이니 성도의 견인은 이에 있다. 그리고 구속 적용의 최후 결과로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여 영광 계에 들어가니 이것이 영화이다.

롬 8:30은 소명, 칭의, 영화의 3가지 행복 즉 처음, 중간, 끝의 은혜들을 들어 구원의 순서 전부를 대표하게 하였다.

이것은 구속의 적용에 있는 순서의 광범한 개요이다.

성경은 이렇게 소명(calling), 중생(regeneration), 회심(conversion), 신앙(faith), 칭의(justification), 수양(perseverance), 성화(sanctification), 견인(perseverance), 영화(glorification)의 9가지 연쇄를 하나의 황금 사슬로 하여 구원의 서정을 제시한다.

 

2. 다른 파의 다른 견해(見解)와 비평

 

이러한 차이는 구원의 과정에서의 인간 의지 혹은 선행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구원의 전체 조건으로 강조한다. 즉 하나님만이 구원의 근본 열쇠를 지니고 계시다.

 

(1) 루터 교회의 견해

 

루터 교회는 구속의 적용의 여러 동작들 중에 사람의 신앙에 중점을 두며, 행복들의 순서에서 중생을 회개 다음에 두고, 신비적 연합을 칭의와 수양다음에 두는 특징을 가진다.

 

1) 신앙에 중점

루터파는 선택, 신비적 연합,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여러 교리를 인정하나 그것들로 출발점을 삼지 않는다. 그들은 죄인들의 마음과 생활에 구속의 주관적 적용은 신적 은혜의 사역이라는 것을 역설하나, ‘구원의 서정’을 묘사함에 있어서 강조를 하나님 편에서 보다는 사람 편에서 두는 바이다. 신앙, 특별히 사람 안에 능동적인 원리 또는 사람의 동작으로서 신앙이 그들의 구원의 순서에 결정적인 요인이다.

 

2) 영적 행복들의 순서

피펄에 의하면, 루터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류의 세계에서 화목시 되는 사실에 출발점을 둔다. 하나님은 복음 중에서 이 사실을 사람에게 공포하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객관적으로 공작된 사죄 즉 칭의를 주관적으로 소유케 할 것을 제안한다.

① 이 소명은 항상 어떤 분량의 조명과 생기(生氣) 고취를 동반하는 사람은 성령의 구원 공작에 저항하지 않을 능력을 받게 된다.

② 회개로 결국하고 이어서 성령이 죄인에게 구원적 은혜를 부여한다.

③ 중생은 사람에게 가하여진 감화력에 대한 그의 행위에 의하여 제약된다. 중생에서 사람은 구원하는 신앙의 부여를 받고 그것으로 그리스도안에서 객관적으로 주어진다.

④ 사죄 즉 칭의를 충용(充用-보충하여 씀)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수양되고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되고 갱신과 성화의 영 즉, 순종 생활의 생적(生的) 능력을 받는다. 이 모든 행복의 영구한 보전은 신앙의 계속에, 사람 편의 능동적 신앙에 의한다.

정리하면 루터파 구원의 서정은 소명, 조명, 회심, 중생, 신앙, 칭의, 신비적 연합, 갱신, 보전으로 구성된다.

 

(2) 알미니안파의 견해

 

알미니안은 구속의 적용에서 사람의 힘에 치중하여 소명에 응종(應從) 여부를 사람이 스스로 결정하며, 그가 결정하여 그리스도를 신앙하면 그 신앙이 의로 인정되어 구원을 얻는다.

 

1) 인력에 치중

알미니안파의 구원의 순서는 표면상 구원의 사역을 하나님에게 돌리나 실제는 사람의 태도와 행위에 의하여 우발하는 것으로 만든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 얻을 위치에 두시나 사람이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한다. 그는 아담의 죄책이 패괴(敗壞)되어 아무 영적 선행도 하기 불능하다는 것을 부인하고, 사람의 본성이 타락에 의하여 저하되고 상해된 것은 의심이 없으되 오히려 본성으로 영적 선행을 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재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죄악된 인성의 악한 편향과 악변(惡變)과 지둔(至鈍-지극히 우둔하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로운 도움을 주신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충족한 은혜를 주시어 그들이 선택한다면 영적 행복의 충분한 영유(領有-자기 것으로 차지하여 가짐)와 필경 구원에 달할 수 있게 하신다.

 

2) 영적 행복의 순서

복음의 권면(소명)은 모든 사람에게 구별 없이 와서 도덕적 감화를 끼칠 뿐이요, 그것에 저항하거나 순종하거나 하는 권세는 그들 자신들이 가진다. 그들이 만일 복음의 권면에 순종하면 그들은 회개와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돌아올 것이다. 신앙이 먼저이고 다음에 칭의와 중생이 온다. 그들의 신앙이 그리스도에게 종결되면 그 신앙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그들에게 의로 전가된다.

그들은 칭의를 주권적 행위로 본다. 그러므로 칭의는 단순히 죄의 용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하나 하나님에게 열납 되는 것은 사람의 율법에의 순종, 즉 복음적 순종에 의지한다.

신앙은 칭의 됨에 소용되고, 또한 죄인들의 중생에 봉사한다. 신앙은 사람에게 복음적 순종의 성화를 보증하며 이 은혜가 만일 한 생애를 통하여 동작하면 견인의 은혜로 결국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가항적이며 잃어질 수 있다.

 

(3) 웨슬레파의 구은관(救恩觀)

 

웨슬레는 알미니안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17세기 알미니안과 구별하여

① 아담의 죄책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가됨을 시인하나 동시에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 됨으로 이 죄책은 출생할 때에 문득 제거된다고 주장한다.

② 사람의 자연 상태에서 전적 패괴와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할 재능이 없음을 시인한다.

③ 그러나 아무 사람도 그 자연 상태에 있지 아니함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보편적 적용이 있어 죄인으로 하여금 능히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하는 때문이라고 한다.

④ 죄인의 갱신과 성화를 산출할 은혜의 초자연적 사역의 필요를 역설한다.

⑤ 현세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즉 전적 성화의 교리를 가르친다.

⑥ 또 알미니우스는 죄인에게 하나님과 협력할 재능의 부여를 공의의 사건으로 삼았으나 웨슬레는 이것을 은혜의 사건으로 보았다.

 

(4) 조건적 선택, 보편적 속죄, 협력과 저항

 

알미니안파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모든 구원하는 은혜의 원천이라고 하는 성경 교훈을 무시한다. 알미니안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은 구원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다. 선택은 선견(先見)된 신앙과 순종에 즉 사람의 행위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고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해 구속과 사죄를 획득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원죄를 제거한 결과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아래 출생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은혜와 협력할 은혜롭게 회복된 재능을 가지고 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능히 저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에 보다도 무저항에 의한 사람의 협력에 의뢰한다.

그들은 금일에 구원 얻은 자로 확실히 느낄 수 있으되 명일에 구원 얻은 자로 남아 있을는지 최소한 보증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 말하면서도 그리스도는 그가 위하여 죽으신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하지 않으시며 또 못하신다고 주장한다.

 

3.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 여기서는 성부께서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성취하신 구원을 각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주체로서의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고찰한다. (1) 성령의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

일반 사역은 자연과 인간을 유지 발전시키며, 일반 은총적(一般恩寵的) 지도를 통하여 창조 시에 받은 은사를 계발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시는 일이다. 사실 이것은 다음에 언급되는 성령의 특별 사역의 준비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특별 사역은, 택자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시켜 구원을 얻게 하는 일이다(요 3:5, 14:16-17; 고후 3:18; 약 4:5-6). (2) 일반 사역의 방법

일반 계시를 통한 자연인의 양심 지도(롬 2:14-15), 세속 통치자에 의한 인간의 완악함의 억제(롬 13:4-5), 특별 계시의 영향에 의한 신적 율법과 일치되는 공적 여론의 형성, 신적 율법과 일치되는 각종 사회 보상 제도를 통한 일반적인 선행 장려 등이다. (3) 일반 사역의 효과

회개의 기회 부여를 위한 신적 형벌 집행의 유예(사 48:9; 렘 7:23-25; 눅 13:6-9), 인간 사회 및 개인 속에서의 죄 확산 억제(창 20:6, 31:7; 롬 13:1-4), 진리와 도덕 및 종교에 대한 욕구 유지(행 17:22; 롬 2:15),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외면적 선과 세속적 공의(公義) 수행(왕하 10:29-30, 14:3, 14-16), 현세에서의 자연적 축복의 향유(창 17:20; 마 5:44; 눅 6:35-36)등이다.

4.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영광스런 피조물이었으나 아담의 범죄로 죄인이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죄성을 지니게 되었다.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고 죄로 향하던 인간의 마음과 삶의 방향이 의에로 향하는 변화를 말한다. 그것은 일회적 경험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구원에는 시작과 계속과 완성의 단계가 있다. 구원은 소명과 회심과 중생으로 시작하여 성화를 거처 영화로 종결된다. 이것이 구원의 순서요,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숙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를 닮도록 변화되는 역동적 과정이다. 구원의 완성과 순서는 많은 논쟁과 논란이 된 문제다. 복음주의교회 내에도 다양한 견해가 있으며, 대표적인 것이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입장이다. 이들은 회심과 중생의 순서, 예정, 온전한 성화의 완성시기 등에서 첨예하게대립하고 있다. 구원의 각 단계에 속한 요소와 특징을 교리적으로 정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성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아울러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는 주제에 대해서는 그 차이점과 논쟁점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1) 회심과 중생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에 속하는 주된 요소는 회심, 중생, 칭의, 양자다. 회심과 중생이 주관적 요소라면, 칭의와 양자는 객관적 요소다. 전자는 신자가 내적, 영적 성질의 변화를 나타내는 반면, 후자는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의 변화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소명으로부터 시작된다(마 11:28). 소명은 구원에로의 초대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감동되는 성령의 영향을 말한다. 불신자가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하여 삶의 방식과 방향을 바꾸게 되는 것이 회심이다. 회심은 죄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심은 신자의 생애에 있어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획 짓는 분기점이다. 회심에는 두 요소가 있다. 회개와 신앙이 그것이다. 회개는 불신자가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요, 신앙은 그리스도에게로 나가는 것이다. 회개는 자신이 지은 죄를 통회하고 돌아설 결심을 하는 것이라면, 신앙은 그리스도의 약속과 사역을 붙잡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매개물이다. 회개와 신앙은 동일한 사건의 두 국면이다. 이 둘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그 중 어느 것도 다른 하나 없이는 불완전하다. 신앙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회개는 신앙의 조건이다. 회개와 신앙은 구원의 상태로 들어가는 출입구다. 회심이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회개와 신앙은 실상 인간의 영혼 위에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중생은 인간의 자연적 성향들의 근본적 변화를 말한다. 인간은 죄와 타락으로 본성이 부패되고 도덕적 성품이 오염되었다.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도덕적, 영적 변화가 중생이다. 육적 마음을 정복하고 영을 따라 살 수 있는 새 생명과 능력이 부여되는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고후 5:17). 중생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죄의 세력이 제거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육신의 연약성이 철저히 제거되고 죄성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중생은 한 순간에 완성되는 초자연적 현상이요, 인간의 심령 속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영적 삶, 즉 성화의 시작에 불과하다. 중생은 회심의 또 다른 국면으로 이해된다. 이 둘은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난다. 보는 관점에 따라 신자가 체험하는 근본적 변화가 회심과 중생으로 구별된다. 인간의 관점으로 본 것이 회심이라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본 것이 중생이다. 한편, 구원받은 신자는 심령상태가 변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는 것이다. 칭의와 양자가 그것이다. 칭의란 죄인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사법적, 선언적 행위다(행 13:38-39; 롬 3:24-26). 또한 그것은 죄책으로부터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의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의롭게 된다. 중생이 죄의 세력을 제거시키는 것이라면, 칭의는 죄책을 제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는 하나님의 행위인 동시에, 인간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적대 관계로부터 하나님에게 열납되는 관계로의 변화다. 칭의의 유일한 조건은 신앙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 칭의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다. 루터에 따르면, 칭의는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교리요, 교회의 존폐를 결정하는 조항이다. 양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되는 위치로부터 하나님께 용납되고 그의 사랑을 받는 자녀의 위치로 신분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양자됨은 신분과 상태변화 모두를 포함한다. 그것은 신자에게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법적 신분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선언적 행위다. 동시에 신자는 아들 됨의 특권을 누리게 되며 하나님을 두려운 감독자가 아닌, 사랑하는 아버지로 신뢰하게 된다(요 15:14-15; 갈 3:26,4:7). 회심, 중생, 칭의, 양자는 구원의 시작을 나타내며,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한 사건의 다른 측면을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시간적 순서로 구분될 수 없으며, 단지 논리적 순서로만 구분될 뿐이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는 회심과 중생의 순서, 중생과 인간의 역할 등에 대해 서로 입장을 달리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중생이 회심 보다 먼저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은 아담의 범죄로 완전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에 의해 먼저 중생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회심하게 될 수 없다.

회개와 신앙은 인간의 능력에 속한 것이 아니다.

반면, 알미니안들은 회심이 중생 보다 먼저라고 주장한다. 사람이 회개하고 믿으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변화시킨다. 회심은 중생의 필수 조건이다. 회심을 먼저로 보는 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교리와 조화되지 않으며, 중생을 먼저로 보는 것은 성경의 증거(행 2:38, 16:31)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견해를 수정, 보완한 해석이 등장했다. 웨슬리는 완전 타락교리를 수용하면서도, 선행은총을 통해 인간본성의 타락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고 보았다. 선행은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역을 통해 하나님에 의해 인간에게 회복된 능력을 말한다. 인간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선행은총에 의해 회심한 후에 중생하게 된다.

한편, 에릭슨은 하나님의 특별 소명 개념에 근거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특별소명은 선택된 사람들이 회개와 신앙으로 응답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를 말한다. 어느 누구도 복음의 일반적 소명에 응할 능력이 없지만, 선택된 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소명으로 역사하므로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하게 된다. 이 회심의 결과 하나님은 그들을 중생시키신다. 특별 소명은 선행은총과 유사하지만, 두 가지 면에서 그것과 다르다. 선행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반면, 특별소명은 선택된 자에게만 주어진다. 선행은총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에 자유롭게 응답하게 하는 것이며, 실제로 구원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반면, 특별소명은 그 대상자로 하여금 복음을 확실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한편,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는 중생과 인간의 역할에 대해서도 해석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중생을 완전히 하나님의 행위로 정의하고 인간의 협력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반면, 알미니안들은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 행위가 아니며, 신적 영향력에 대한 인간의 협력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알미니안의 입장을 수정하여 복음적 신인 협동설을 주장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호응을 인정하면서도, 중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임을 강조한 것이다.

(2) 성화

 

중생과 칭의는 신자의 영적 삶의 시작에 불과하다. 신자는 칭의와 중생을 통해 법적 지위와 신분이 변하고 죄의 세력이 제거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러나 인간본성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죄성이 완전히 근절되지 않고 아직도 남아있다. 중생한 사람은 모든 죄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며, 그의 마음속에는 은혜와 죄가 공존하고 있다. 사도바울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바를 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갈 5:17)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신자는 중생 후에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법적 신분에 일치하는 수준까지 도덕적, 영적 상태가 성장해야 한다. 신자의 삶은 구원받은 후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진보 과정에 있다. 이 성장 과정이 곧 성화다. 성화란 신자를 거룩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계속적 역사를 말한다. 인간의 부패와 타락성이 제거되고 하나님 형상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것은 도덕적 정결과 영적 성숙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는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 완전이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거나 죄를 짓지 않는 무죄적 완전, 또는 성장이나 발전의 여지가 없는 완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 완전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다(마 19:17). 성화는 인간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대적 완전을 말한다.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며, 그리스도를 닮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성화되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본질적 표시는 아가페적 사랑이다. 값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성화는 초자연적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업적이나 개혁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또한 인간의 과제다. 인간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성화는 인간이 협력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말씀연구와 기도, 죄를 멀리하고 경건에 힘쓰는 것, 덕을 실천하고 육신의 일을 죽이는 것은 인간의 삶을 거룩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성화사역에 응답하는 것이요 협력하는 것이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그런 삶을 살도록 권고하고 있다(롬 8:13, 12:1-17; 빌 2:12-13). 성화는 신자의 삶의 시초인 중생과 칭의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초기 성화요, 그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온전한 성화다. 중생이 회개와 신앙을 통한 불신자의 순간적 체험이라면, 성화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는, 그 완성을 위해 전 생애가 요구되는 과정적 사건이다. 칭의에는 정도의 차이가 없으나 성화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법적 신분의 변화를, 후자는 사람의 상태와 성품의 실제 변화를 말한다. 성화에 관해서도 많은 견해 차이가 있다. 성화의 개념은 물론, 그것이 점진적이냐 순간적이냐, 현세에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내세에서 이루어지는가 등이 논란이 된다.

모라비안 경건주의는 중생의 순간 완전히 성화되어 더 이상의 성장이 필요 없다고 하는 반면, 칼빈주의는 성화를 점진적 성장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웨슬리는 점진적 성장의 개념과 순간적 요소를 종합했다. 성화의 점진적 과정에 하나님의 직접적 역사에 의해 순간적 체험, 즉 온전한 성화가 있다. 그것을 그는 ‘제2의 축복’, ‘그리스도인의 완전’ 또는 성령세례 등으로 불렀다. 기독교 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주제는 성화의 과정이 신자 생전에 완료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미완성으로 남는가 하는 문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모든 영혼이 완전상태로 회복되는 전진과정은 회심 때부터 시작하여 전 생애를 통해 진행되나 그 대부분은 육체의 죽음 이후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어떤 이는 성화를 이 세상에서 획득하지만, 어떤 이는 내세에서 획득한다.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연옥사상이다. 한편 개신교의 입장은 완전주의와 비 완전주의 두 가지로 정리된다. 완전주의는 온전한 성화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입장이다. 신자가 죄를 짓지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며 참으로 어떤 신자들은 그 상태에 도달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죄를 지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이 아니고 실제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완전주의자들은 알미니안적 경향이 있다. 웨슬리는 성화가 성령의 순간적 역사로 중생 후 완성된다고 믿었다. 반면, 비완전주의는 완전 성화를 현세에서는 성취할 수 없는 하나의 이상과 목표로 간주한다. 칼빈주의자들은 대개 비 완전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성화는 이생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고, 죽는 순간 또는 그 직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3) 영화

 

구원과정에 있어 마지막 단계는 영화다(롬 8:29-30). 이는 성화의 최종 단계로 구원론과 종말론이 겹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생을 넘어 앞으로 올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영화는 신자가 온전히 의롭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영적, 육적으로 온전해지는 것은 물론, 전 피조물의 세계가 새롭게 변화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현재 삶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제약들이 제거되는 것이다. 흠 없고 책망할 것 없는 축복의 상태가 영화다(골 1:12). 그것은 재림 시, 신자의 육체적 부활과 더불어 일어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이들은 부활하여 살아있는 신자들과 함께 영광스럽게 변화된다(살전 5:16-17; 빌:20-21).영화는 신자들에게 아름답고 영광스런 삶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는 소망과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약속한다.

요약하면, 신자의 영적 성숙은 회심, 중생, 칭의, 양자로 시작, 성화의 과정을 거쳐 영화로 완성된다. 구원은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 성장을 거쳐 완성된다. 그것이 한마디로 성화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나, 인간의 협력 또한 필요하다. 신자의 삶의 목표와 이상은 성화다. 이것은 교리나 구호 문제가 아니라 실천 문제다. 믿음만을 강조하여, 현재의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소홀히 하는 것은 신앙성장에 불균형을 초래한다. 구원의 완성인 영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화의 과정을 거처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벧 1:16)

 

 

제2장 일반 은혜

 

1.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호의와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를 구분할 수 있다. 일반 은혜(common grace)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혹은 공통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나 택하지 않으신 자들이나 구별 없이 공통적으로 누리는 은혜이다. 사람이 이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특별 은혜(special grace)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내리시는 구원의 은혜를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2. 역사적 고찰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Pelagius)는 하나님의 영께서 사람의 의지에 직접 역사하지 않고 오직 간접적으로만 역사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반대로 어거스틴(Augustine)은 성경대로 사람의 전적 부패와,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주권적 활동을 주장하였다. 그는 성령의 주권적 활동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며, 사람이 그것을 거절할 수 없다고 보았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의지에 직접 역사하셔서 사람의 영혼을 중생시키시는 선행적 은혜와, 하나님께서 중생한 영혼과 협력하여 그로 하여금 선을 행케 하시는 후속적 혹은 협력적 은혜를 구별하였다.

중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을 인정하는 어거스틴주의를 취하든지, 구원을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적 결과로 보는 소위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를 취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성례를 통해 주입된다는 소위 성례주의를 발전시켰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루터(Luther)와 칼빈(Calvin)은 어거스틴이 주장한 성경적 은혜 개념으로 돌아갔고 성례주의를 배격했다. 그러나 후에 루터파는 루터의 입장을 떠나 반(半)펠라기우스주의적인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의 경향을 보였다. 칼빈을 따랐던 개혁교회는 성경적 은혜 개념을 보존하였다. 칼빈은 또 처음으로 하나님의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를 구별하였다. 그 시대에 유아 세례를 부정했던 재세례파(再洗禮派, Ana- baptists)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부정했다. 그들은 자연과 은혜를 대립시켰고 자연의 질서를 불결하다고 보았다. 또 그들은 국가의 권위를 무시했고 전쟁을 반대하였다.

17세기의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는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와 구원을 위해 충족한 은혜를 주신다고 주장했다. 그들에 의하면, 이 충족한 은혜가 곧 일반 은혜요, 구원하시는 은혜이다. 만일 하나님의 이 충족한 은혜가 구원적 은혜가 아니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회개의 원인은 성령과 협력하는 사람의 의지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반(半)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은 신인협력설이다. 개혁교회의 도르트 회의는 알미니우스주의를 정죄하고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적 사역을 고백하였다.

근래에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개혁교회 안에서도 헤르만 훽스마(Herman Hoeksema)는 은혜라는 말을 하나님의 구원적 은혜에만 적용하고 일반 은혜는 은혜라고 부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3. 일반 은혜의 내용들

 

하나님의 일반 은혜는 몇 가지 점들에서 고찰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여러 가지 자연적 혜택들을 주신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신다. 사도행전 17:25,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그는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비를 주신다. 마태복음 5:44-4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그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때를 따라 식물을 주시며, 또 결실기를 주셔서 식물로 사람의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주신다. 시편 145:9, 15, 16,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사도행전 14:16, 17,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 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와 재능을 주심으로써 문화적 혜택을 누리게 하신다. 그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다(창 1:28).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러한 문화 명령을 받아 땅을 정복하며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였다. 일찍이 가인의 자손들 가운데 야발은 목축업을 시작했고, 유발은 악기들과 음악을, 두발가인은 철공업을 개발하였다(창 4:20-22).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지혜의 정신을 주셔서 아론의 옷을 만들게 하셨다(출 28:3). 또 그는 브사렐과 오홀리압과 기타 지혜 있는 자들을 세워 성막의 여러 가지 기구들을 만들게 하셨다(출 31:1-11). 현대인들이 누리는 주택, 전기와 수도, 교통과 통신, 출판, 의술 등의 문화적 혜택들은 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성, 즉 하나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과 생각을 주셨다. 로마서 1:19-20,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사도행전 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도덕의식을 주셨다. 그것은 사람의 양심을 통해 나타나며, 또한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선악 보응을 통해 일깨워진다. 세상 정부와 사회 여론은 상당히 이런 도덕의식을 반영한다. 로마서 2:14, 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서 13:3-4,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이러한 종교성과 도덕의식 때문에, 사람들은 어느 정도 선과 의를 행하며 세상의 악들도 상당히 억제되고 극단적 부패와 혼란도 방지된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도 어느 정도 지연된다.

 

 

 

 

 

 

 

 

 

 

 

 

 

 

 

 

 

제3장 성령의 활동들

 

성령께서는 택한 자들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救贖)을 그들에게 적용시키신다. 구원의 전체적 과정은 성령의 활동이다. 구원론은 성령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성령의 사역론이다.

 

1. 오순절 성령 강림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강림하셨다(행 2장).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오순절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과정에서 한 시대적 분기점을 이루는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성취이었다(사 32:15; 겔 36:27; 욜 2:28-29; 요 14:16-17; 15:26; 16:7, 13). 그것은 또한 성령께서 교회 가운데 거하시기 시작한 사건이었고 성령의 활동 시대가 시작된 사건이었다. 요한복음 14:16,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이러한 점들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은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둘째로,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 성령을 받은 사건이라는 일반적 의미를 가졌다. 신자가 성령을 받는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그 사건은 그 후 시대에 계속 반복된다. 즉, 죄인이 구원 받을 때마다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들어가신다. 사도행전 10:44에 입증된 대로, 성령께서는 베드로의 전도를 듣는 고넬료의 가족들에게 내려오셨다.

 

 

2. 성령의 세례

 

(1) 성령 세례의 의미

신약성경에는 ‘성령의 세례’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

첫째로, 사도행전 1:5의 성령 세례는 오순절 사건을 가리켰다. 오순절의 성령 세례는 성령께서 제자들 속에 처음 들어오신 사건이었다. 제자들은 이미 믿은 자들이었으나, 성령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성령을 받게 된 것이었다.

둘째로, 사도행전 11:16의 성령 세례는 성령께서 고넬료의 가족들 속에 처음 들어오신 사건이었다. 15절,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이 경우엔, 사도행전 1:5의 경우와 달리, 대상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듣고 처음 믿었을 때 일어났다.

셋째로, 고린도전서 12:13의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신비적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성령의 세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약성경에 쓰인 용법을 살펴 볼 때, 성령 세례는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처음 들어오시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오순절 사건의 일반적 의미와 동일하며, 구원의 사건이다. 이것을 ‘성령의 세례’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하여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 때문이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내주하심이나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동일하다. 요한복음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요한일서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 성령 세례를 받는 때

신자는 언제 성령을 받는가? 성령께서는 언제 신자 속에 들어오셔서 거하시는가? 신자가 성령을 받는 것은 중생할 때 즉 구원 받을 때라고 대답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대답할 때, 우리는 성경 역사상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 이전과 이후를 구분해야 한다. 오순절 사건 이전에는, 구원받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이 시간적으로 달랐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이미 구원을 받았고 깨끗함을 얻었지만(요 13:10; 15:3) 성령을 받지 못했었다. 요한복음 7:39,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러나 오순절 사건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구별이 사라졌다. 사도행전 8장의 한 가지 예외를 제외하곤, 일반적으로 성경은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밝히 가르치고 있다. 로마서 8:9,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에베소서 1:13, “그[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요한일서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모든 믿는 자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신약성경에는 성도들을 위해 성령을 받으라거나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과 같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그는 우리에게 더 오실 수 없다.’ 단지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단지, 사도행전 8장에 입증된 사마리아 교회의 경우는 예외적이었다. 사도행전 8:15-16은 그것이 예외적이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오직 ... 만’이라는 표현은 그 당시 다른 곳에서는 믿음과 세례와 성령 받는 일이 시간적으로 분리되지 않았음을 보인다. 사마리아 교회가 예외적이었던 이유는 그 교회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반쯤 이방인이었다. 더욱이 그 곳에 복음을 전했던 사람은 사도가 아니고 집사 빌립이었다. 이런 점들이 주께서 사마리아 교회에 성령 강림을 지연시키셨던 이유이었을 것이다.

 

(3) 성령 세례의 목적

성령 세례 즉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들어오심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적용하여 죄를 씻으시고 그들로 회개하고 예수 믿어 구원을 얻도록 하시기 위함이며 또 구원한 자들을 위로, 격려, 권면, 경책하셔서 그들로 거룩하고 온전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에스겔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요한복음 14:16, “그가 또 다른 보혜사[위로자, 돕는 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고린도후서 13:13,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3. 성령의 충만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와 구별된다. 모든 신자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았지만 모든 신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교훈하였다(엡 5: 18). ‘충만을 받으라’는 원어는 ‘계속적으로 혹은 반복해서 성령으로 충만케 되라’는 뜻이다.

성령 충만의 증거는, 믿음을 굳게 지키고 말씀을 담대히 증거함과 거룩한 인격과 삶이다. 사도행전 4:8,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사도행전 4:31,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에베소서 5:18절 이하에서, 바울 사도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한 후 찬송과 감사, 피차 복종, 부부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등을 교훈하였다.

성령 충만의 방법은 철저한 회개와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기도와 말씀 묵상과 순종이다. 성령 충만은 어떤 이상한 체험이 아니고, 성도의 정상적 경건 생활의 과정이다. 성도는 그의 모든 죄악과 연약을 철저히 고백하고 버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될 것이다.

성경 역사에서 성령 충만을 받았던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출애굽기 31:2, 3,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신명기 34: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영]이 충만하니.” 누가복음 1:41,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사도행전 4:8,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사도행전 6:5,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 사도행전 9:17, “형제 사울아, 주 곧... 예수께서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사도행전 11: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4. 성령의 그 밖의 활동들

 

성경은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 도우심, 간구하심, 위로하심, 가르치심, 인치심 등에 대해 말씀한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26,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요한복음 14:26,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성령께서 이렇게 성도들 속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하고(갈 5:16) 그를 근심케 말아야 하며(엡 4:30) 또 그의 감동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살전 5:19).

 

 

 

제4장 부르심(소 명)

 

1. 구원의 순서

 

하나님의 특별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은 어떤 순서 혹은 단계로 이루어지는가? 성경의 전체적 진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 타락 허용, 선택, 속죄, 구원의 순서로 이해된다. 그 가운데, 인간 구원의 순서 혹은 논리적 단계는 부르심, 중생(重生), 회심(回心), 믿음, 칭의(稱義), 양자(養子), 성화(聖化), 성도의 견인(堅忍), 영화(榮化) 등이다. 로마서 8:30은 구원의 순서를 간단히 예정, 부르심, 칭의(稱義), 영화(榮化)로 표현하였다.

다른 파의 견해를 살펴보면, 로마 천주교회는 구원의 은혜를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로, 충족 은혜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시고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가리키며, 사람은 이 은혜에 저항할 수 있다고 한다. 둘째로, 협력 은혜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의 죄악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려고 결심하고 세례를 받고자 하는 것을 가리킨다.

셋째로, 주입 은혜란 세례를 통해 초자연적 덕성이 주입(注入)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은혜를 통하여 사람이 중생하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한다. 또한 칭의는 계명의 순종과 선행으로 보존되고 불신앙과 죽음에 이르는 죄를 인해 잃어버릴 수 있지만, 고해성사(告解聖事)와 관면(寬免)과 보속(補贖)으로 다시 얻을 수 있다. 관면은 죄책과 영원한 형벌을 제거하고 보속은 현세적 형벌을 제거한다고 한다.

한편 루터교회는 구원의 순서를 외적 부르심, 깨닫게 하심, 회개, 중생, 믿음, 칭의, 양자(養子), 신비적 연합, 성화(聖化), 보전 등으로 본다. 알미니우스파는 외적 부르심, 회개(복음적 순종), 믿음, 칭의, 중생, 성화(계속적 순종), 성도의 견인(믿고 순종할 때만) 등으로 본다.

 

2. 외적 부르심(외소)

 

성경은 구원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표현한다.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이 있다.

외적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것이다. 마가복음 16:15,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태복음 22:1-14,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누가복음 14장의 잔치 초청의 비유도 비슷하다.

외적 부르심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보편적으로 주어진다. 마가복음 16:15,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사야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요한계시록 22:17,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율법의 요구가 진실하듯이, 외적 부르심은 진실하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고 진실하게 부르시며 초청하신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경우, 외적 부르심은 구원으로 연결된다. 주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막 16:15-16).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외적 부르심은, 비록 구원을 위한 부르심이 될 수 있지만, 아직 구원이라는 의미의 부르심은 아니다. 불택자들의 경우, 외적 부르심과 초청은 단지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낼 뿐이다. 로마서 2:4-5,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교회 역사상,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이 사람의 완전한 자유 의지의 응답으로 효력 있게 된다고 보았다. 중세의 반(半)펠라기우스주의나 종교개혁 이후의 알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이 사람의 협력으로 효력 있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무능력하므로,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은 사람의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특별한 활동이 없이는 효력을 가질 수 없다.

 

3. 내적 부르심(내소)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부르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중생(重生)과 동일한 사건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는 말씀은 이러한 부르심을 가리킨다. 로마서 1:6,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고린도전서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베드로후서 1:10,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1문

“효력 있는 부르심이란 무엇입니까?”

답 : “효력 있는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영의 하시는 일인데, 그것에 의해 그는 우리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권하사 복음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은 주권적이다. 그것을 ‘성령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이끄시면 죄인들은 그에게로 온다.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또한, 하나님의 이 부르심은 불변적이다. 그가 한 번 구원에 이르도록 부르시면 그의 구원은 확실해진다. 로마서 8:2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제5장 신비적 연합

 

성경은 구원을 또한 연합의 개념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그것을 ‘신비적 연합’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이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초자연적 활동으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연합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은 죄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생명을 찾는 것이며 그 생명 안에 포함된 모든 복과 특권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부르심이나 중생(重生)과 동일한 사건으로 보며, 다른 이들은 이것을 구원 과정 전체의 기초로 본다. 벌코프는 말하기를, “신비적 연합은 중생과 칭의(稱義)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나,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이다”라고 하였다. 이 연합에서 구원의 충만한 복이 전달된다.

성례주의에 의하면, 신비적 연합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가 주입되므로 이루어진다고 미신적으로 이해된다. 소시너스주의에 의하면, 그것은 선생과 제자, 혹은 친구들 사이의 사랑의 교제와 같은 정도의 연합이라고 너무 가볍게 취급된다. 신비주의에 의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실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너무 지나치게 생각된다. 신비주의적 이해에서는,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구별이 없어진다. 그러나 개혁주의에 의하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은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인격적 구별이 있는 신비적, 영적 연합이라고 이해한다.

 

1.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계심

 

성경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여러 구절들에게 증거한다.

첫째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계신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적 연합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15:4-5,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내가 저 안에 있으면.” 로마서 8:9-10,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고린도후서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갈라디아서 2:20,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빌립보서 1:21,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골로새서 1:27,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

 

2.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

 

둘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표현한다. 로마서 16: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고린도전서 3:1,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 고린도전서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고린도전서 15:18,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 고린도전서 15:22,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후서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갈라디아서 1: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 에베소서 2:6,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3:6,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빌립보서 4:2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골로새서 1:2,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골로새서 1:28,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2: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 데살로니가전서 4:16,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참조) 로마서 6:3-6, 8,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삶.” 골로새서 3:1, 3,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취어 있음.”

 

3. 포도나무와 몸의 비유

 

성경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신비적 연합을 포도나무와 몸의 비유로 말한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에베소서 1:22-23,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교회는 그의 몸이니.” 에베소서 4:15-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 [참조] 고린도전서 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제6장 중생(重生)

 

1. 중생의 의미

 

성경은 구원을 또한 중생(거듭남)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중생(重生, 거듭남, regeneration)이란, 죄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는 새 사람이 되고 새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성경은 중생을 ‘하나님께로서 남,’ ‘거듭남,’ 혹은 ‘성령으로 남’이라고 표현한다. 요한복음 1:13,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3, “사람이 거듭나지(겐네데 아노덴) 아니하면.” 요한복음 3:5-6,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야고보서 1:18,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아페퀴에센).” 디도서 3:5, “중생의(팔링게네시아스)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2. 역사적 고찰

 

역사적으로 볼 때, 초대교회의 어거스틴은 중생과 회심을 구별하여 중생은 마음의 시초적 변화로써 하나님의 단독적(單獨的, monergistic) 사역이며, 회심은 중생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중생을 하나님의 단독적, 주권적 사역으로 본 것은 성경적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의 사상이었고, 오늘날 개혁신학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중생과 칭의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는 중생을 사람이 자기 생활과 습관을 도덕적으로 개선하는 행위 정도로 보았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다. 교회 역사상 어떤 이들은 중생을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보았다. 이런 견해를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 synergism) 혹은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라고 부른다. 근세에 나타난 알미니우스주의는 본질적으로 이런 견해와 같다. 한편, 로마 천주교회는 사람이 세례를 통해 부패성이 제거되고 의가 주입(注入)됨으로써 중생된다고 보았다. 이것을 세례중생설 혹은 주입은혜의 교리라고 부른다.

 

3. 중생의 성격

 

(1)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

첫째로,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해져 있었다. 로마서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혹은 ‘절망적으로 악한’) 것은 마음이라.”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죽은 영혼은 스스로 살아나지 못하며, 하나님의 활동에 협력하지도 못한다. 죽은 자는 자신의 부활을 도울 수 없다. 따라서 중생에 있어서 그는 전적으로 피동적(被動的), 수동적(受動的)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나사로야 나오라’고 불러내실 때 죽은 나사로가 주의 음성에 협력할 수 없는 것과 똑같다. 선지자 에스겔이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향해 대언할 때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만 그것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겔 37장).

그러므로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적(單獨的), 주권적 활동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중생에서 사람은 전적으로 피동적(被動的)이다. 중생에서 사람의 의지는 협력적 원인이 될 수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때문이다. 성경의 많은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을 중생시키심을 증거한다.

에스겔 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요한복음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성령으로’(엑스 프뉴마토스)라는 말은 중생에서 성령께서 원인자이심을 보인다. 요한복음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에베소서 2:1, “[하나님께서] 허물들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들을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4, 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디도서 3:5,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중생시키실 때 주로 복음의 말씀을 사용하신다. 따라서 성경은 말씀을 중생의 수단이라고 표현한다. 야고보서 1:18, “...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유아들의 경우는 다르나, 성인들의 경우 중생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과 동시적이다. 그러므로 우리 편에서는 오직 전도에 힘써야 한다.

 

(2) 영혼의 지배적 성향의 변화

둘째로, 중생은 영혼의 지배적 성향의 변화이다. 중생은 중생한 자의 이전의 영혼과 새 영혼이 실체적으로 교환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그 자신이다. 그의 영혼은 동일하다. 그 동일한 영혼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또한, 중생은 영혼의 지정의(知情意)의 기능들 중의 일부나 전부가 단지 새로워지는 정도도 아니다. 죽은 영혼이 다시 산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을 의미한다. 물론, 중생은 중생한 자가 범죄 할 수 없는 존재로 완전하게 변화되는 사건도 아니다. 사람은 중생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그것은 성경도, 경험도 증거하는 바이다.

중생은 영혼의 지배적 성향(governing disposition)의 변화이다. 중생 사건에서 하나님의 영께서는 영적으로 죽은 죄인들 속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셨고,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영혼의 성향, 의향, 혹은 마음가짐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는 새 마음을 받는다. 비록 옛 죄악성이 그의 인성에 남아 있어 자주 실수하고 실패하기도 하지만(롬 7장), 그의 영혼의 이 새 성향은 의를 지향하고 의만을 지향한다. 그것은 다시 불경건과 부도덕의 죄악성에 굴복할 수 없는 새 생명의 원리이다.

에스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에베소서 4:22- 23, “유혹의 욕심을 따라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새 생명]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4. 중생의 증거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중생한 자는 죄를 깨닫고 죄로부터 돌이키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일서 2: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7,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복음 1:12-13, “영접하는[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16의 말씀도 요한복음 3:3, 5의 중생에 대한 말씀과 관련해 생각하면, 중생으로 얻게 되는 영원한 새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확증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일서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5. 중생한 영의 범죄 여부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중생한 영은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입어 다시 살았으므로 그것이 범죄 한다면 다시 죽어 그리스도의 대속이 무효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은 범죄 할 수 없다. 중생한 사람이 범죄 하는 것은 영이 아니고 심신(心身, 몸과 마음)이다. 영과 심신(心身)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며 죄성은 심신에게만 있고 영은 완전 성결하다. 믿는 사람에게 영의 구원은 이루어졌으나 육의 구원은 아직 안 이루어졌으므로 그의 심신은 중생한 영의 지배를 받아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이 견해의 주요한 근거 구절은 요한일서의 다음 몇 구절이다.

요한일서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한일서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견해는 이상의 구절들을 중생한 영에 관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견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과 심(心, 마음)이 존재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전통적 개혁신학이 이해하는 대로, 사람은 영(프뉴마) 혹은 영혼(프쉬케)과 육(소마)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고, 마음은 영의 기능이다. 육은 물질적 실체이며 자체적으로 지정의(知情意)의 기능을 가질 수 없다. 물론, 영육의 결합체로서의 인간의 마음이 순전히 영의 활동만인가하는 질문은 정당한 질문이다. 영육의 결합체로서의 인간의 마음은 순전히 영의 활동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마음은 육과의 결합 속에서 생성된 마음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는 영육의 존재적 분리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육과 분리된 영에 대해서만 무엇을 논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요한일서의 구절들은 실상 중생한 영의 문제가 아니고, 중생한 사람의 문제이다. 만일 그것이 중생한 영의 문제라고 한다면, 요한일서 전체의 교훈의 필요성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요한일서는 중생한 성도가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이 범죄 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는 요한일서의 교훈의 강조점에서 볼 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은 중생한 사람이 범죄치 않고 의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일서의 강조점이다.

요한일서의 표현들은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이해하는 대로 동사의 현재시제의 현재 진행적, 반복적 의미로 보아야 한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한다.”는 3:6의 말씀은 주 안에 거하는 자, 즉 중생한 영이 아니고 중생한 사람이 현재 진행적으로 혹은 반복적으로 범죄하고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잠시 넘어졌을지라도 즉시 일어나 회개하고 의롭게 살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는 3:9의 말씀도 중생한 자가 계속 죄를 짓고 있거나 죄 가운데 살고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새 생명이 그 속에 심어졌고 그 새 생명은 거룩하고 의롭게만 살려는 새 성향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생한 자가 범죄 하면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가 무효화 되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적인 칭의와 실제적인 성화를 오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한 자가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하여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때, 그의 죄책(罪責) 즉 하나님 앞에서의 법적인 책임은 제거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하고 영원한 의를 전가(轉嫁)받았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에게 죄성(罪性)이 아직 남아 있고 그가 종종 범죄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성화의 전 과정은 실상 죄책 없는 죄성의 문제요 결코 정죄될 수 없는 과정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는 단지 중생한 자의 영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영육의 인격 전체에 적용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전인적(全人的) 구원이다. 성도의 중생뿐 아니라 또한 성화와 영화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의 구원과 육의 구원을 분리시켜 중생한 자의 현실적 죄 문제에 연관시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택자들의 모든 죄 곧 영육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적극적 진술은 성경적인 근거가 약하다. 역사적 개혁신학은 그런 진술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생한 자에게 있어서 육과 분리된 영의 순결성과 완전성을 추론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베드로전서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카타 테스 프쉬케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톤 살키콘 에피두미온) 제어하라.” 이 구절은 ‘육체의 정욕’과 ‘영혼’을 구별하고 대조시킨다. 이것은, 육체 혹은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대조시키는 구절들과 다르다(롬 8:4-6; 갈 5:16, 17).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7문

“신자들은 죽을 때 그리스도께로부터 어떤 유익들을 얻습니까?”

답) “신자들이 죽을 때 그 영혼들은 거룩에 있어서 완전해지며 즉시 영광으로 들어가고, 그 몸들은 그리스도와 여전히 연합된 채 부활 때까지 그들의 무덤들에서 쉽니다.”

신자들이 죽을 때 그 영혼들이 즉시 완전히 거룩해진다는 생각은, 육과 분리된 중생한 영의 완전한 순결성의 가능성을 생각게 한다.

 

6. 유아들의 구원 문제

 

의식적으로 혹은 인격적으로 회개와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유아 때에 죽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떤 이들은 유아 때 죽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 얻을 것이라고 보았다. 미국 장로교회는 진술하기를, “유아 때에 죽는 모든 사람들이 은혜의 선택에 포함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어느 방법으로나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중생하며 구원 얻는다고 우리는 믿는다.”라고 하였다.

촬스 핫지는, 유아 때에 죽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 얻는다는 것이 복음적 개신교인들의 공통적 교리라고 말했다. 그는 그 근거로 로마서 5:18- 9의 아담 안에서의 인류의 정죄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많은 사람들의 칭의를 든다. 그는 말하기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명백히 드러난 자들 외에는 다 구원받는다.”고 했다.

한편,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유아들만 구원을 얻는다고 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3-4, “유아 시에 죽는 선택된 유아들은 그가 기뻐하시는 때에, 기뻐하시는 곳에서, 그리고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중생하고 구원을 얻는다. 또한 말씀의 사역에 의해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을 수 없는 그 외의 선택된 사람들도 그러하다.” 이 견해가 성경의 전체적 진리에 맞는다고 생각된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에베소서 1:4-5,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제7장 회개(회심)

 

구원은 사람이 죄로부터 떠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와 믿음이다. 이 둘을 포함하여 때때로 회심(回心, conversion, 돌이킴)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중생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써 사람의 무의식 세계에서 시작되어 의식 세계로 나타나며, 그 증거가 바로 회개와 믿음이다. 물론 회개와 믿음이 결코 인간편의 어떤 공로적 행위는 아니다.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의 당연한 표현일 뿐이다.

 

1. 회개의 세 가지 요소들

 

회개는 죄로부터 떠나는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 회개는 지정의(知情意)의 세 가지 요소들을 가진다.

첫째로, 회개는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포함한다. 죄로부터 떠나려면 먼저 죄를 죄로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하나님의 율법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로마서 3:20,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둘째로, 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과 미움을 포함한다. 참된 회개는 상한 마음을 동반한다. 사람이 참으로 죄를 미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없이는 죄로부터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히브리어 (나캄)은 ‘후회하다,’ ‘뉘우치다’는 뜻으로서 회개의 한 면을 묘사한다. 욥기 42:6,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나캄).” 헬라어 메타멜로마이도 ‘뉘우치다’는 뜻으로서 같은 면을 나타낸다.

셋째로,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의지적 결단 곧 죄의 청산을 포함한다. 이것이 회개의 핵심이다. 참된 회개는 마음의 변화에서 나온 행위의 변화이다. 누가복음 15:20, “(탕자가)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히브리어 슈브는 ‘돌아온다’는 뜻이다. 예레미야 3:12, 14, 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시편 51: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헬라어 메타노이아메타노에오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며, 에피스트로페에피스트레포는 돌아옴 혹은 돌이킴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4:17, “회개하라(메타노에오).” 누가복음 24:47, “회개와 죄사함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사도행전 11:18,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사도행전 3:19,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에피스트레포)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사도행전 15:3,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데살로니가전서 1:9,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는 단지 죄에 관한(페리) 혹은 죄로 인한(에피) 슬픔의 감정 정도가 아니고 죄로부터(아포 혹은 에크) 돌아서는 의지적 결단과 행위이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반드시 회개의 열매를 동반한다. 마태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누가복음 19:8, (삭개오의 예)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속여 빼앗았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2. 회개의 성격

 

회개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일으키신 선하신 일, 곧 하나님의 재창조의 행위이시다. 시편 85:4,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예레미야 31:18, 19,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예레미야 애가 5: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사도행전 11:18,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중생은 사람의 무의식적 세계에서 시작되지만, 회개는 의식 세계에서의 변화를 가리킨다. 회개의 성경적 용어들은 주로 사람의 행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회개는 사람의 능동적, 의식적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은 회개에 있어서 ‘협력자’이며 ‘피동적인 동시에 또한 능동적’(박형룡, 217, 218쪽)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중생, 회개, 칭의(稱義)는 모두 단회적이며, 성화는 점진적이다. 성경에서 ‘반복적 회개’를 보이는 듯한 구절들은 구원의 순서 혹은 단계로서의 회개가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일시적인 범죄와 방황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회개는 갑작스러울 수도 있고 점진적일 수도 있다. 누가복음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요한계시록 2:5, 16,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러므로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3:3, 19, “회개하라...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 회개의 중요성

 

회개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다.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은혜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떠나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말씀을 포함한다. 마태복음 3:2, (세례 요한이 전파한 내용)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태복음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누가복음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사함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사도행전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사도행전 20:21, (바울 사도의 설교 요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회개는 또한 구원에 필수적이다. 회개는 죄의 깨달음과 돌이킴뿐이므로 죄책과 죄의 형벌에 대한 보상이 되거나 구원의 공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회개는 죄 용서와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 조건이다. 마태복음 18:3, “너희가 돌이켜[회개하여]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3:3, 5,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3, “비록 회개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행위인, 죄를 위한 어떤 만족이나 그것의 용서의 어떤 원인으로 의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회개는 모든 죄인들에게 매우 필수적이어서, 아무도 그것 없이는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

 

4. 천주교회의 고해 성사(告解聖事)

 

천주교회의 고해성사(告解聖事, penance)는 덕과 성례를 포함한다.

첫째, 덕(德, virtue)이란 죄를 인한 근심, 죄를 버리려는 결심,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려는 의도를 가리킨다.

둘째, 성례(聖禮)란 통회, 고명, 보속을 가리킨다. 통회(痛悔, contrition)는 범죄에 대해 슬퍼함이고, 고명(告明) 혹은 고백(confession)은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16세기 천주교회의 트렌트 회의는 고명이 신자의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선언했다. 보속(補贖, satisfacion)은 죄를 갚기 위해 행하는 고행이나 선행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해 성사는 성경에서 말하는 회심이나 회개와 같지 않다. 또한 성경은 죄의 고백이 성도의 의무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특히, 보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 완전한 속죄제사에 대한 불신이요 모독이다.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5. 생명 얻는 회개(悔改)는 무엇인가?

 

초대 교회의 예루살렘 제자들은 고넬료의 회심을 두고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합니다.

회개(悔改)란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이고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면서 진보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합니다. 더 착해지기도 하고 더 악해지기도 합니다. 그것으로 구원을 받았다거나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를 않습니다. 중생한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변화는 회심(回心)입니다. 거듭남으로 심어진 새 생명은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됩니다. 성령세례는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즉, 세상과 죄악을 향하던 옛 생활에서 돌이켜 이제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하는 방향 전한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회심입니다. 회개를 통하여 발생되는 회심이 얼마나 크고 어마어마한 사건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회개를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1) 두 가지의 회개(생명을 얻는 회개와 원죄에 대한 회개)

 

1) 원죄가 무엇인가? - 마귀가 죄의 본질입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

 

요일 3:8,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구원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회개를 하나로 보는데 혼돈이 옵니다. 회개는 두 가지로 보아야 합니다.

원죄를 회개하는 것과 생명을 얻는 회개 입니다. 세례요한이 외쳤던 회개는 허물을 사하는 원죄에 대한 회개입니다.

율법을 어긴 죄 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것은 허물, 곧 우리의 인류의 대표 조상의 죄 입니다.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죄를 사하는 회개를 외치면서 정직하게 살라고 외칩니다.

눅 3:10-14,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율법을 잘 지키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유대인들에게 베드로의 회개를 외친 회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죄를 회개하라”고 하신 외침입니다.

우리도 성령이 내 속에 계시지 않는다면 베드로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여야 성령이 오셔서 내 영이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야 내영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사도행전 2장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6-38)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 지르던 유대인들에게 베드로의 회개의 외침이 있은 후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구원은 베드로를 통해 구원받았고 이방인은 사도바울을 통해 구원받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하셨습니다. 죽을죄 사형(지옥)에 해당되는 죄는 예수님께서 담당하셨기에 이제 자범죄만 회개 하면 됩니다.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도 멸하셨지만 목욕한 자는 손발만 씻으면 되는데, 이 회개는 반복적인 회개이고 눈물 흘리고 통회할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생각 날 때마다 회개하면 되는 죄입니다. 마치 신랑한테 신부가,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것같이 고백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을 얻는 회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끝내놓으셨습니다.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안 믿어지면 이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으면 죄를 져도 의인입니다. 세상 살면서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생명을 얻는 회개를 통해서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2) 생명 얻는 회개

 

① 반복적 회개 : 죄를 지을 때 자백하면 됩니다.

 

② 생명을 얻는 회개 : 예수님의 말씀인 복음을 듣고 단번에 구원 받습니다.

 

③ 생명을 얻는 회개는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됩니다.

 

④ 반복적 회개는 성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반복적 회개(육신이 죽을 때까지 반복 할 회개입니다.)

 

자범 죄는 육신이 약하여 율법을 범한 죄로써 경범죄입니다.

고백과 자백하며 죄를 미워하며 슬퍼하며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회개의 결과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죄를 회개치 않을 때 하나님과 교제의 단절이 옵니다. 그리고 상급이 없습니다.

 

반복적인 죄를 짓는 자는 미련한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징계가 옵니다. 그리고 기도응답이 없습니다.

 

잠 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시 89:32-34, “그때에 내가 막대기로 그들의 죄 지은 것을 벌하며 채찍으로 그들의 불법을 벌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완전히 거두지 아니하고 나의 신실함도 없어지게 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거나 내 입술에서 나간 것을 변개하지 아니하리로다.”

히 12:7-8,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대우하듯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가 무슨 아들이냐? 모든 사람이 징계를 받으므로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너희가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니라.”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됩니다.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마음의 평강을 얻게 됩니다. 징계를 면제 받습니다.

 

반복적 회개의 오해들은 반복적 회개를 통하여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회개 하지 않으면 한번 구원받은 것이 취소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것이로되 아들이면 징계를 받습니다.

 

요 10:27-28, “내 양은 나의 음성을 듣고, 나도 내 양을 안다. 내 양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3) 생명을 얻는 회개의 방법은?

 

①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엡 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행 11:14, “그가 네게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전해 줄 것이다”

 

② 고넬료는 이방인으로 믿음으로 경건, 경외, 구제, 기도가 상달 되었지만 구원이 없었고 확신이 없었습니다.(행 10:1-8)

이와 같이 교회는 다니고 믿음은 있다고 하나 성령이 내주하지 않아서 항상 불안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지옥 갈까 두려워 떠는 자는 구원을 다시 점검하여 보아야 합니다. 은사를 받은 것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지 성령님이 내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만 사모하여 큰 은사를 소유했던 사람들이 이단 교주가 되어서 멸망하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본 증거들 입니다. 이것을 보고 오해 하여서 성령 받은 자도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곡해합니다.

은사는 논밭에서 추수하는 자에게 필요한 농기구를 나누어 주는 것이나 같습니다. 일이 끝나면 농기구는 반납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 없이 은사만 사모하거나 말씀 없이 은사만 받았다면 산을 옮기는 은사가 있다하여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을 수 있습니다. 다만 세상에서 일하는 삯 만 받는 것입니다. 은사는 말씀과 같이 가야 합니다. 그 은사를 통하여서 주님께 영광 돌리며 복음 전하는데 사용하여야 합니다. 말씀으로 내 속에 성령님이 계셔서 나를 주장하고 인도 하셔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들을 때 내영이 탄생하고 자라게 됩니다. 내 영이 주의 영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은사는 성령의 도구이지 성령님이 아닙니다. 성령 받는 것과 성령의 은사 받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에 은사를 나타내고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거나 모여들면 다음으로 이어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말씀선포였습니다. 말씀도 없이 목적도 없이 은사로 병만 고쳐주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병 고쳐 주고 복음 전하고 그 영혼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은사는 육체에 성령께서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육체는 죽습니다. 생명의 말씀은 영에게 주는 것입니다. 영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③ 고넬료와 친족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생명 얻는 회개를 하였고 구원(성령)을 받았습니다.

할례 받은 신자들은 베드로의 말을 다 듣더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행 11:18,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다”라고 말했습니다.

 

4) 생명 얻는 회개의 결과

 

① 회개하지 않으면 영생이 없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 5:28-29, “이 말을 한다고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이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생명을 얻기 위해 부활할 것이며,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할 것이다.”

 

단 12:2-3, “이미 죽은 사람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다시 깨어나 영원히 살며, 어떤 사람은 깨어나 영원히 부끄러움과 멸시를 당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늘의 밝은 별처럼 빛날 것이다.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끈 사람은 영원히 별처럼 빛날 것이다.”

 

② 생명을 얻는 회개가 이루어지면, 구원의 확신과 심판의 면제를 받습니다.

믿는 자들 중에도 심판의 두려움이나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두려워 떠는 자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구원받은 자는 남이 몰라주어도 본인은 압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본인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성령의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맺어준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도구입니다.(고전 12장) 그것을 사용할 때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져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자기를 들어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높이고 복음 전하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지옥갈 수 가 없습니다. 감옥에서 사면을 받아 나왔는데 다시 감옥에 가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곳에 보내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깨닫고 확신해야 합니다. 은사는 육체의 것이고 말씀은 영의 것입니다. 바른 회개가 필요하며, 나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제8장 믿음(신앙)

 

구원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회개와 믿음은 어느 것이 먼저인가? 어떤 이들은 믿음을 먼저로 보고(칼빈, 핫지), 다른 이들은 회개를 먼저로 본다(죤 머리, 박형룡). 논리적으로는 회개를 먼저로 보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1. 잘못된 믿음들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잘못된 믿음들이 있다.

첫째로, 성경의 역사적 내용이나 정통적 신조들을 지식적으로만 믿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믿음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야고보서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둘째로, 복음 진리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 없는 일시적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은 복음 진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심과 열정이 있지만 새 생명의 뿌리가 없어 환난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실패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주로 감정에 근거하며,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더 추구한다. 마태복음 13:20-21, “돌밭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셋째로, 기적을 경험하거나 기적을 행하는 믿음이 있다. 이것은 구원을 동반할 수도 있고 동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태복음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못했으니] 불법을 행하는[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누가복음 17:11-19에 기록된 대로,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 오직 한 명 사마리아인만 예수께 나아와 감사하였다.

 

2. 참된 믿음

 

(1) 참된 믿음의 원천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심어주신 믿음이다. 알미니우스주의는 믿음을 단지 사람의 행위로만 본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조성자이시며, 우리의 믿음은 그의 은혜의 선물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계시한다.

마태복음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5: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태복음 16:16-17,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고린도전서 12: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를 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후서 4:4, 6, “그들 안에서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느니라.” “이는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음이니라.” 에베소서 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2:8-9, “이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피스티스여성명사)을 통해 구원을 얻었으며 이것이(투토중성대명사)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임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원문 직역).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originator, 창시자)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perfecter, 완성자)인 예수를 바라보자”

 

소요리 문답 86문답,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복음 중에 우리에게 주신대로 예수를 영접하고 그에게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4:1, “선택된 자들이 그것으로 그들의 영혼의 구원에 이르도록 믿을 수 있게 되는 믿음의 은혜는 그들의 마음속에서의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이시며, 일반적으로 말씀의 사역에 의해 생겨나고, 또한 그것에 의해 또 성례들의 집행과 기도에 의해, 그것은 자라고 강해진다.”

 

(2) 참된 믿음의 대상

참된 믿음의 대상은 무엇인가? 참된 믿음의 대상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요한복음 3:16,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 16:31, “가로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피스튜오+에이스(다음에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가 목적어로 나온다).

참된 믿음의 대상은 둘째로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에 관한 설명인 복음 진리 사이에는 어떤 대립이나 충돌이 있을 수 없다. 마가복음 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6:15, 16,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하나님의전통 사본]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말미암느니라원문].”

참된 믿음의 대상은 셋째로 성경 전체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며, 더욱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4:14,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요한복음 5:39, “성경책들을 자세히 연구하라. 이는 그것들을 통해 너희가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함이니, 그것들은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원문 재번역) 디모데후서 3:15,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3) 참된 믿음의 세 가지 요소들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은 세 가지 요소들을 가진다.

믿음의 첫 번째 요소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 역사적 사실들을 자세히 기록하며 증거하고 있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칼빈 선생은, “믿음이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인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약속의 진리에 기초하며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계시되며 확인된다.”고 말하였다(기독교 강요, 3. 2. 7).

메이천(J. G. Machen)은, 믿음에 대한 오늘날의 비(非)지성적 관념을 비평하면서, “모든 참된 믿음은 지적 요소를 가진다. 어떤 인격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그 인격에 대한 지식을 가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천주교회는 ‘명시적 믿음’(explicit faith)에 대해 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묵종적(黙從的) 믿음’(implicit faith)에 대해 가르쳤다. 묵종적 믿음이란, 신자가 종교의 몇 가지 기초적 진리들에 대해서는 알아야 하지만,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지식 없이,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믿으려는 태도만 가지고서 믿는 믿음이다. 그러나 성경이 참된 믿음은 확실한 지식을 동반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에, 묵종적 믿음을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다. 지식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그러면,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의 믿음의 지식이 필요한가? 적어도, 사람은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그리고 왜 하셨으며, 또 그가 장차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실 것인지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박형룡, 252쪽).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찬동이다. 찬동은 복음 진리에 대해 기쁘게 동의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믿는다’는 말은 어떤 사실에 대해 동의함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4: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히브리어 헤에민+는 어떤 증거에 대해 승인함을 가리킨다.

죤 오웬은, “모든 믿음은 증언에의 찬동이요, 신적 믿음은 신적 증언에의 찬동이다”고 말하였다.

믿음의 세 번째 요소는 신뢰이다. 신뢰란 믿음의 내용을 자기의 것으로 확신하고 그 내용을 주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인격과 그 약속을 믿고 의지했다. 히브리어 헤에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이나 사물을 의지함을 나타낸다. 시편 37: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바타크+도 신뢰의 요소를 강조하는 말이다. 그 외에, 카사는 도피한다, 자신을 숨긴다는 말로써 역시 신뢰의 요소를 강조한다. 신약에 피스튜오+에이스는 가장 특징적 구문이다(49회 사용됨). 그것은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을 표현한다. 요한복음 3:16, 18, 36, “저를 믿는 자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죤 머리는 말하기를, “지식은 찬동으로 옮겨가고 찬동은 신뢰로 옮겨간다.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신뢰함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그에게 맡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믿음의 의지적 요소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은 믿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요 1:12), ② 예수 그리스도를 우러러 보는 것(요 3:14-15), ③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것(요 6:44-65), ④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요 6:50-58).

믿음의 의지적 요소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참된 믿음은 순종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다.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야고보서 2:17, 26,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행위로 그 구원을 확증한다. 성도의 의롭고 선한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확실한 표가 된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제9장 칭의(稱義)

 

성경에서 구원은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로 표현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칭의(稱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효력 있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 하시되, 그들에게 의를 부어넣으심으로가 아니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고 받아들이심으로이며, 그들 안에 이루어진 혹은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즉 믿는 행위나, 다른 어떤 복음적 순종을 그들의 의로 그들에게 전가(轉嫁)시키심으로가 아니고,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때, 그의 순종과 만족(satisfaction, 속상<贖償>)을 그들에게 전가시키심으로인데, 그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11:1).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칭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칭의(稱義)는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행위인데, 그것에서 그는, 우리에게 전가(轉嫁)되고 믿음으로만 받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 앞에서 의로운 자로 용납하십니다.”(33문답).

 

1. 칭의의 성격

 

성경이 말하는 칭의는 다음 몇 가지의 성격을 가진다.

첫째로,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선언이다(forensic).

온 세상의 심판 주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늘 법정에서 믿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그것은 죄인의 죄책(罪責, guilt; 법적 책임)을 제거시키는 것이며 죄인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사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성화와 비교해 볼 때, 칭의는 죄책의 제거이며, 성화는 죄성 혹은 부패성의 극복이다. 또 중생, 회심, 성화는 사람의 내면적, 인격적, 실제적 변화이며, 칭의는 사람의 외면적, 신분적, 법적 변화이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칭의의 법정적 성격이 명확히 인식되지 못했었다. 천주교회는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주입(注入)을 받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보았고 따라서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구별치 않았다. 그러나 성경은 칭의가 법정적 선언임을 보인다.

칭의 혹은 ‘의롭다 하다’는 성경 용어가 사람을 실제로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뜻이라는 사실은 다음의 여러 구절들에서 확증된다.

히브리어 히츠디이크(의롭다 하다)출애굽기 23:7,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신명기 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이사야 5:23,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 도다.” 이와 같이 이 말은 정죄(定罪)라는 말과 대조되는 재판적 용어이지, 사람의 내면적 의(義)의 덕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헬라어 디카이오오(의롭다 하다)로마서 3:20-28, “...이제는 율법 외에[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 없이]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8:33-34,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둘째로, 칭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3:24-2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골자이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결론을 내리노라].” 로마서 4:4-5, “...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셋째로, 칭의는 즉각적이며 완전하다.

로마서 5:1, 9,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디카이오덴테스,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 (참조) 로마서 3:24, 디카이오우메노이(현재분사); 8:33, 호 디카이온(현재분사)현재분사는 칭의의 효력이 계속적임을 나타낸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 곧 육신을 좇아 행하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칭의는 믿음의 크고 작음 혹은 많고 적음의 정도에 관계되지 않는다. 작은 믿음일지라도 진실한 믿음이면 칭의를 얻기에 충분한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게 하신다.

천주교회는 사람이 세례를 통해 원죄와 및 세례 받기 전의 모든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게 되지만, 세례 받은 후의 죄들에 대해서는 고해성사(告解聖事)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계속적 칭의 혹은 증가적 칭의라고 불리 운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는 성경적이지 않다. 한편, 신정통주의도 칭의가 즉각적이지만 또한 반복적이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성경적이지 않다.

 

2. 칭의의 근거

 

이 땅에는 온전히 외롭다 할 만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모든 사람은 다 죄와 허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음에로 불러내신 삶,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 우리는 이것을 칭의(稱義)라고 부른다. 이제 칭의가 무엇인지,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자.

 

 

사람은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여전히 많은 죄를 범한다. 고의적으로 뻔뻔스러운 죄를 노골적으로 범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실수나 연약함에 의한 죄는 범하고 산다. 또 전에는 죄악된 것인지를 알지도 못했던 것들이 죄임을 발견하고는 더 많은 회개를 한다.

  그래서 사실상 오히려 믿기 전보다 더 많은 죄의식을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롬 3:26). 실제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볼 때, 아직도 많은 죄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의인을 악하다고 하거나 악인을 의롭다고 하는 자를 미워하시는 분이시다(잠 17:15). 그러므로 악한 자를 의롭다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은 오직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을 보시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의가 전가되어진다.

  이것은 마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여김을 받아서 사망에 이르게 된 것과 같다(롬 5:12). 예수님은 흠 없는 어린양이셨다. 의로우신 분이셨다. 유대인도, 빌라도도 그에게서 아무런 흠을 찾지 못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의가 전가되어진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의의 흰 예복을 입은 사람으로 여김을 받는다. 그러므로 칭의의 근거는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 때문이다.

  이처럼 칭의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자가 되었느니라"(롬 3:24)고 하였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께서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했다(약 2:24). 얼핏 보면 사도 바울의 말씀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는 믿음과 행함을 나누거나, 믿음에다 행함을 추가하는 말씀이 아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따르지 않을 수 없음을 강조하여 가르치는 말씀일 뿐이다. 즉 반드시 행함이 수반되는 살아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은 칭의의 구체적인 증거가 되는 인물이다. 그는 실수와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고, 하나님의 벗이 되었다(약 2:23). 노아도 욥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창 6:9), 그리고 동방의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았다(욥 1:8).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동일하게 베풀어주신다.

 

3. 칭의의 때

 

택한 백성들의 칭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속에 계획되어진 것이고, 역사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성도들의 칭의가 영원 전에 이루어졌다거나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8:29-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또한, 온 세상의 심판 주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받은 성도들을 죄 없다고, 의롭다고 공적으로 선포하실 것이지만, 성도들의 칭의가 그 때 이루어진다고 보아서도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이다. 죄인의 칭의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루어진다.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내리실 의롭다는 선언은 그들이 믿음으로 이미 받은 칭의의 확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5:2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8:33, 34,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해주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롬 4:25).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에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 모두를 의롭다 해주기 위한 객관적인 근거를 마련하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능력을 각 개인 안에서 실제로 나타내는 것은 그를 믿을 때이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은 믿음이 칭의의 수단이 되어짐을 의미한다. 믿음은 칭의의 조건이나 근거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믿음도 역시 의롭다 함을 받을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만일 믿음이 칭의의 조건이 된다면, 칭의는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공로가 되어 얻어낸 당연한 결과에 불과하다.

  믿음은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아 중생한 사람에게서 나타나지는 첫 번째 현상인 회심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중생은 성령께서 사람 속에서 단회적으로 일으키시는 변화이다. 그리고 그 효력은 영원토록 지속하게 하신다. 따라서 믿음을 도구로 하여 주시는 칭의도 단회적이다.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단번에 주어진다. 그러나 그 효력은 영구적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을 다시 정죄하시는 일이 없다(롬 8:1).

 

4. 칭의의 수단

 

칭의는 우리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로마서 3:21-22, “율법 외에”(코리스 노무, 율법과 별개로). 로마서 4:4-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사야 64:6,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로마서 3:27-28,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과 관계 없이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결론을 내리노라](로기조메다).”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의 행위에서(엑스 에르콘 노무)가 아니고, 믿음을 통해(디아 피스데오스)이다.

그러나 믿음이 의로 간주된다고 해서(롬 4:3, 9), 믿음 자체가 의로 간주된다거나 믿음 자체가 효력을 가진다고 볼 것은 아니다. 믿음은 단순히 칭의의 수단일 뿐이며 그 효력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있다고 보아야 한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다시 말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 때문에’(디아 피스틴)가 아니고 ‘믿음을 통하여’(디아 피스테오스)이다. 알미니우스주의는 믿음 자체가 의로 간주된다고 본다. 그러나 믿음은 기관차와 객차를 연결하는 연결쇠와 같다. 물론 객차가 가려면 먼저 연결쇠로 기관차와 연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객차를 끄는 것은 연결 쇠가 아니고 기관차이다.

야고보서 2:14-26의 말씀은 얼른 보면 바울의 증거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과 충돌하는 것 같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使者)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나 야고보서의 이 말씀은 바울 사도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밝히 증거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와 충돌되도록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율법주의에 반대하여,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율법 행위로가 아니고 믿음으로임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율법적 행위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는 믿음의 의를 구별하여 진리를 설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참 믿음이 사랑으로 행동하며 의에 순종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로마서 6:15-18, “...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한편, 야고보는, 반(反)율법주의(율법 폐기론) 혹은 죽은 믿음에 반대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선행을 동반함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선행이 없는 믿음과 선행이 있는 믿음을 구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죄인이 행함이 없는 믿음만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표현하였고, 이런 문맥에서 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순종의 행위를 인용한 것이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원리는 구약 시대에도 성도들에게 적용되었다.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과 그 아내를 에덴동산에서 내어보내시기 전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이 은혜의 구원을 암시하였다(창 3:21). 아담과 하와의 아들 아벨은 양을 죽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음을 의미한다(창 4:4). 아브라함의 경우는 구약 성도에게도 이 원리가 적용됨을 증거 한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바울 사도의 증거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 또 요한계시록에는 이렇게 증거 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錄名)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구약 아래서 믿는 자들의 칭의는, 이 모든 점들에서, 신약 아래서 믿는 자들의 칭의와 동일하다”(11:6).

 

5. 칭의의 요소

칭의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사죄(赦罪)이다. 또 다른 하나는 죄의 결과로 주어졌던 죽음에서부터 해방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의롭다 함이란 죄가 없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죄가 없다는 것은 죄가 용서받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신다. 작고 사소한 죄 뿐만 아니라, 제아무리 크고 주홍 같은 죄까지도 다 용서해 주신다. 사람에게 대한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죄도 용서해 주신다. 시간적인 제약도 두지 않고 다 용서해 주신다. 그리고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멀리 옮기시고,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시 103:12).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죄에 관한 한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온전케 여김을 받게 되어진다(히 10:14).

  칭의는 죄의 용서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엡 2:3). 그리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양자의 영을 부여받는다(롬 8:15). 하나님의 거룩한 기업도 얻게 된다(행 26:18).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기도 한다(롬 8:17). 그리고 현재의 고난 이후에 올 영광에 이르게 된다(롬 8:30).

 

6. 칭의와 고난

 

의롭다 함이 용서를 의미한다면,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죄로 인한 책임을 더 이상 짊어질 필요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는 의인이 많다. 오히려 의롭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은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이러한 일 때문에 낙심을 하는 일마저도 생겨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분명한 답을 주었다. 그는 죄인과 의인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매우 다르게 여긴다. 죄인이 당하는 고난은 죄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형벌이다. 그러나 의인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내리는 징계이다. 당하는 고난이 겉으로는 같아 보인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심판 주와 죄인,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자녀라 하고도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로 여겨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히 12:8). 잠언의 말씀도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고 했다(잠 3:12).

  아버지가 내리는 징계의 채찍은 매우 가혹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자녀를 향한 사랑이 들어있다. 그리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선한 의도가 들어 있다. 그러기에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징계는 더욱 가혹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에 오히려 감사를 하게 된다. 형통할 때나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생활, 그래서 모든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우는 것이 의인의 생활이다(빌 4:14).

  의인에게는 징계 이외에 연단으로 주어지는 고난이 있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더욱 정금같이 단련하시기 위해서 때때로 불같은 시험을 주기도 하신다(벧전 4:12). 의인은 이러한 연단의 고난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즐거움으로 그 고난에 참예하여 인내하고, 이것을 통해서 소망을 이루어야한다(롬 5:4). 욥이 보여 주었던 좋은 본을 따라야 한다.

 

 

 

 

 

 

 

 

 

 

 

 

 

 

 

 

 

 

 

 

제10장 양자(수양)

 

소요리 문답 34문답, “양자(養子, 자녀로 삼으심)란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행위인데, 그것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수에 들고 그 모든 특권을 누릴 권리를 가집니다.” 중생이 새 생명의 시작이라면, 양자는 새 신분의 시작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에베소서 2:19, “그러므로 너희는 더 이상 외인(外人)도 아니요 이방인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함께 동료 시민들이요 하나님의 가족들이라.”

 

1. 양자(養子)의 근거

 

성도가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된 것은 자연적 관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자연적 관계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된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도 두어 구절에서 그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사도행전 17:28, 29, “너희 시인 중에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히브리서 12:9, “모든 영의 아버지.”

그러나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이러한 자연적 관계의 의미가 아니고, 특별한 언약적 관계 혹은 구원적 관계이다. 신명기 32:6,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사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예레미야 31:9,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요한복음 1:12,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일서 3:1-2,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중생과 칭의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1:12- 13, “...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로마서 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프뉴마 휘오데시아스)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갈라디아서 4:5-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3:26, 29,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2. 양자(養子)의 특권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 혹은 특권이 무엇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2장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모든 자들을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 분 때문에, 자녀로 삼으시는 은혜에 참여하게 하시는데, 그것에 의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수에 들며 그 자유와 특권들을 누리고, 그의 이름이 그들 위에 붙여지며 양자(養子)의 영을 받고 담대히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고,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고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으며 보호함을 받으며 공급함을 받으며 징계를 받고, 그러나 결코 버림을 당하지 않으며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고 영원한 구원의 상속자들로서 그 약속들을 이어받는다.”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마태복음 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 구원하신 목적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잘 모르면서 믿을 때가 많다. 대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멸망당하지 않도록 구원하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1차적인 목적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닮도록 해서 우리의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마 5:16) 이 점에서 가장 오해를 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복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우상숭배를 해도 복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교인들도 이 점에서 대단히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무조건 복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2) 어느 정도까지 닮을 수 있을까?

 

원래 ‘양자’라고 하는 것은 친자식이 아닌데 법적으로 자식을 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아무래도 양자는 친자식에 비해 부모를 덜 닮게 되어 있고, 심지어는 전혀 닮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가 예수 믿는다고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을 닮았다고 말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셔서 우리 속사람이 하나님을 닮도록 만드신다. 성령님께서는 원래 우리 안에서 마귀를 닮았던 강퍅하고 못된 성품들을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녹이시고, 거룩하고 겸손한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을 심어주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먼저 가시나무와 엉겅퀴 같은 우리 성품을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와 같은 성품으로 바꾸어주셔서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가시나무에 어디서 열매를 하나 구해서 달아놓고 열매를 맺었다고 떠들어대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나무가 먼저 변한 후 무궁무진한 천국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하나님을 닮을 수는 없지만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씀을 하신다.(엡 4:13)

(3) 아들의 축복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셨다(마 6:9). 하나님은 우리의 친 아버지가 되어주셔서 모든 어려움을 다 해결해주신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나갈 때 우리의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미래의 모든 것을 다 책임져주신다.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미래는 전부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천사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게 된다. 천사들은 부리는 종이지만(히 1:14),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천사를 두고서 기도를 한다든지 천사를 사모한다든지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이나 돈이나 권력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전염병이나 지진이나 전쟁 같은 재앙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의 유산을 물려받게 된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모든 자를 하나님은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자기의 양자가 되게 하는 은혜에 참예하게 하셨으니 이로 말미암아 저희는 하나님의 자녀의 수에 들어 그 자유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양자의 영을 받아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고, 불쌍히 여김을 받고 보호를 받고 쓸 것을 미리 아시고 채워주심을 받고 아버지가 하듯 징계를 받으나 결단코 버림을 받지 않고 구원의 날까지 인치 심을 받아 약속들을 유업으로 받되 영원한 구원의 상속자로서 받는다.

 

3. 양자 삼으심의 결과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과 양자로 삼으시는 것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따지면 의롭다 하시고 양자로 삼으신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이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발생하는 것은 동시적이고 우리가 느끼는 것도 동시적입니다.

왜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쓰지 않고 양자라는 말을 씁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는 지위와 권세가 다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피조물인데 하나님이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지만 정확히 표현할 때는 양자로 삼으심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다는 것은 양자로 삼으실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포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어떤 존재입니까?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지 못하는 고아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다는 것은 마치 버려진 고아를 양자로 삼아 집으로 데려와서 돌봐주고 나중에 유업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양자가 된 후에는 다시 버림을 받지 않고 늘 돌봄과 유업을 받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4-7)

 

이것을 볼 때 양자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양자가 되는 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둘째, 양자가 되는 것은 영구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양자로 삼으신 사람은 버림을 받지도 않고 사탄에게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9)

셋째, 양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양자된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성령님과 우리 영이 함께 증거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영만으로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또 성령님도 우리 영과 함께 증거 하시지 혼자 증거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 혼자 하나님의 양자라는 느낌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양자가 되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꿈에서 그런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성령님의 증거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님의 증거를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성령님의 증거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도구는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쳐주는 내용이 성령님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어떤 사람을 참 신자라고 한다면 그것이 성령님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이 이것을 함께 증거 하면 우리는 참 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한다면 이것은 우리 영의 증거입니다. 이 때 성령님과 우리 영이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영광과 능력과 신적 성품에 있어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양자가 되어도 결코 하나님처럼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양자 되는 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본질상 피조물인 우리가 양자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니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우리는 후사로서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또한 세상의 여러 환경 속에서 항상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우리에게 고통이 있더라도 그것은 좋은 결과를 위한 사랑의 훈련이나 징계일 뿐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6-13)

그리고 하나님은 양자 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늘 함께하며 지켜주시고 돌봐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 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4. 양자 삼으심의 은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시는 것은 칭의에 뒤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뒤따른다는 말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고 또한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의로움을 갖지 못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양자 삼음의 은혜는 논리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이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볼 때 의롭다 하심과 양자 삼으심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양자 삼으심은 의롭다 하심과 마찬가지로 한 순간에,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효과는 영구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번 양자 삼으신 사람을 결코 버리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내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10:29) 또한 양자 삼으심은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실 때는 완전한 법적 아들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시는 것입니다.(갈 4:6)

따라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의붓아버지와 의붓아들처럼 서먹서먹한 관계가 아닙니다. 아들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는 친 아버지를 대하고 부르듯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또한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십니다.(롬8:16) 이것이 바로 성령의 내적 증거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령의 증거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이 성령의 증언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성령의 외적이고도 객관적인 증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내적, 외적 성령의 증거에 근거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자 삼으심의 진리에도 두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첫째,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주로 자유주의자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이 창조하심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시며, 모든 사람이 다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17:26-28절 말씀을 근거로 내세웁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형통으로 만드셨고, 따라서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소생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12:9절을 보면, 하나님을 “모든 영들의 아버지”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성경은 일반 은총의 영역을 말씀하면서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이야기합니다.(마 5:44-45; 눅 10:29이하) 그들은 이 말씀들을 근거로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주장은 결국에 가서 ‘만인구원론’, 또는 ‘보편구원론’이라는 비성경적이고, 이단적인 사상으로 귀착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의 타락 사건 이후에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다 마귀에 속한 마귀의 자식들이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인 것입니다.(요 8:44)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 의롭다 하심과 양자 삼으심을 통해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아들 됨과 우리의 아들 됨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나신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독생자(one and only son)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본질상 그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나 신적 성품에 있어서 아버지와 똑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들 됨은 입양을 통한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법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또한 그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성품에 있어서도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장차 예수님의 몸과 같은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피조물로서의 피조성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예수님과 같은 아들이라고 맞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신비한 연합을 통해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인연합’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범신론이나 자유주의,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신인연합’ 대신에 ‘신인합일’을 주장합니다. 즉, 우리 인간과 하나님이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뉴에이지 운동이나 은사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개념 속에는 항상 이 ‘신인합일’의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인간이 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됨’이란 ‘합일’이 아닌 ‘연합’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성화되고, 영화되어서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남고, 인간은 인간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의롭다 칭하시고, 양자로 입양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아들이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주인을 두려워하는 종과 같이 살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아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영적 연합을 통해 한 몸으로서의 친밀함을 누리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함께 아들 된 자로서 영광을 받을 뿐만 아니라, 고난과 징계(훈련)도 기쁨으로 받아야 합니다.

 

 

 

 

 

 

 

 

 

 

제11장 성화(聖化)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 단계로 되어 있다. 중생과 칭의는 구원의 과거적 단계이며, 성화는 구원의 현재적 단계이며, 영화(榮化)는 구원의 미래적 단계이다.

 

1. 성화의 본질

 

성화(聖化, 거룩하여짐; sanctification)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실제적으로 그 인격과 삶이 거룩하여지는 과정을 가리킨다.

소요리 문답 35문 : 성화가 무엇입니까?

답 : “성화란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일인데,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전인(全人)이 새로워지고, 죄에 대해 점점 더 죽고 의에 대해 살 수 있게 됩니다.”

 

(1) 전인(全人)의 실제적 변화

 

성화는 전인(全人)이 새로워지는 것, 즉 영육 전체, 지정의의 전(全) 인격, 전(全) 생활이 죄에 대해 점점 더 죽고 의에 대해 사는 것이다. 죄는 죄책과 부패성으로 구성된다. 칭의는 우리의 죄책이 법적으로 제거되는 것이지만, 성화는 우리의 부패성이 실제로 극복되는 것이다. 성화는 칭의에 근거한다. 또한 칭의는 외적, 객관적 사건이지만, 성화는 내적, 주관적 사건이다. 성화는 인격과 삶의 변화의 문제이다. 그것은 사람의 전 인격과 삶의 실제적 변화이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법적인 의(義)를 성도들이 인격과 삶에서 실제로 나타내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거룩해졌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실제적으로도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성화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지식과 도덕성이 그 주요 내용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평생의 성화의 정도는 별로 크지 않은 듯하나, 지식과 깨달음의 차원에서 그것은 상당히 진전된다. 성도들은 일생의 성화 과정을 통해 무엇보다 자신의 죄악성과 무능함,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을 깨닫는다. 물론, 이와 함께 거룩과 의, 선과 사랑, 진실 등의 도덕성에 있어서도 상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레위기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9:2 등). 에베소서 1:4,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골로새서 3:1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에베소서 4:22-24, “(받았으니) 곧 옛 생활방식에 관하여 너희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와 거룩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베드로전서 1:15, 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성화는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에베소서 4:13, 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예물과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셨음같이 너희도 사랑으로 행하라.” 골로새서 3:13, “피차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베드로전서 2:21,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 성화의 동기

 

성도가 거룩한 삶과 선행을 힘써야 할 근본적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너무 큰 은혜, 너무 귀하고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 뜻을 행하는 것뿐이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후서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3. 성화의 성격

 

(1)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됨

 

성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요 그의 하나님의 초자연적 활동이다.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24,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히브리서 13:20-21, “영원한 언약의 피로 말미암은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특히, 성령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이제 중생시킨 신자들 속에 거하신다. 에스겔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성령께서는 신자들 속에 계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믿고 행하게 도우신다.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 돕는 자, 위로자, 권면하는 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성령은 또한 우리를 도우신다. 우리는 성령의 계속적 충만함이 필요하다.

로마서 8:1,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에게는.” 로마서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그 안에 방탕이 있느니라.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여지라.”

 

(2) 사람 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함

 

성화는 사람 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을 요구한다. 물론, 이 점은 성화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성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선행의 능력은 우리 속에 계신 주님과 성령께로부터 나온다. 그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인격적 존재로 취급하신다. 사람은 중생에서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소극적이지만, 성화의 과정에서는 능동적, 자발적, 협력적이다. 인간 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은 성도의 당연한 의무와 책임이다.

빌립보서 2:12, 13,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했던 바와 같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이니라.”

매튜 풀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했다.

“우리는 구원의 일에 있어서 게으르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일해야 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이 협력은 구원의 공로나 값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주께서 풍성하게 완성하신 것을 적용하는 것이며, 구원의 원인이나 근거가 아니고 단지 우리가 구원에 참여하는 과정과 수단일 뿐이다.”

로마서 6:12, 13,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고린도후서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깨끗케 하자.” 데살로니가전서 4:1-3,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더욱 많이 힘쓰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베드로후서 1:5-10,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몇 가지 수단들을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 및 하나님의 섭리적 지도 등이 그것들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은 성화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골로새서 1:28, 29,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여기에 있다. 디모데후서 3:15-17,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구원의 두 면은 칭의와 성화이다.

둘째로,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의 유형적(有形的) 표현으로써 성화의 수단이 된다. 바르게 집행된 성례는 말씀 속에 담긴 은혜를 증거하고 기억케 한다.

셋째로, 기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영적 도움과 능력을 받는 합법적 수단이다. 성도는 무엇이든지 구할 특권을 부여받았다. 성도의 기도 제목들 가운데 영적 성장, 곧 성화는 매우 중요한 기본적 제목이며 주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넷째로, 그 외에도 하나님의 여러 가지 섭리적 훈련과 지도는 성화를 위한 수단들이다. 예를 들어, 직업 현장에서의 훈련, 시험과 유혹, 고난 등이 그러하다. 그것들은 다 성도를 겸손케 하고 성결케 하는 수단들이다. 베드로전서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시편 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수단들을 성실하게 사용함으로 점점 더 자라며 거룩해져야 한다.

 

(3) 점진적이지만 필연적임

 

성화는 점진적이다. 중생이 영적 출생이라면, 성화는 영적 성장이다. 육신적으로 출생 후에 점진적인 성장이 따르듯이, 중생 후에 점진적 성화가 따른다. 중생, 회심 및 칭의는 단회적(單回的)이지만, 성화는 중생과 회심에서 시작되어 일평생 계속되는 점진적 과정이다. 야곱의 생애를 흔히 성화에 인용하듯이, 성도의 생애는 성화를 위한 한 훈련 과정과 같다. 채소는 수개월이 필요하나 참나무는 백년이 필요하듯이, 사람의 성화는 오랜 기간과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성화는 구원의 당연한 열매이므로 필연적이다. 정상적으로 말해, 육신의 출생에 반드시 뒤따라오는 것은 육신의 성장이다. 예외적인 기형아가 아니라면, 태어난 아기는 자라게 마련이다.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성화는 반드시 중생, 회심, 칭의를 따른다. 성화의 단계는 다양할지라도 성화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실패치 않는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이기는 자’라는 말은 성도들 가운데 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음을 의미하는가? 중생하고 칭의 함을 받은 자들 가운데 성화에 실패하는 자가 있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참으로 중생한 자라면, 참으로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라면, 세상을 이길 것이다.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

 

4. 성화의 불완전함

 

성도의 성화는 지상에서 불완전하다. 육신의 죄악성은 완전히 극복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며 경험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도의 구원은 이런 불완전한 성화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단번 속죄의 의에 의존한다. 성도의 성화가 아무리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이루어주신 의에 미치지 못한다. 성도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의 때문에 완전하며 성도는 최종적 영화의 단계에 나아가는 것이다. 성도는 죽을 때 그 영혼이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케 되어 즉시 영광의 천국에 들어간다. 히브리서 12:23,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소요리 문답 37문) 신자들은 죽을 때 그리스도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습니까?

답) 신자들이 죽을 때 그 영혼들은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케 되어 즉시 영광에 들어가고, 그 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므로 부활 때까지 그 무덤들에서 안식합니다.

성도가 지상에서 완전 성화될 수 있다는 주장(완전론)은 성경과 경험에 배치된다. 마태복음 6:12-13,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로마서 7:7-26,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갈라디아서 5:16-24, “...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슬려 욕심을 내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리며,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디 엘 무디는, “사람들은 무죄에 더 가까워질수록 그것에 대해 더욱 적게 말한다.”

그러므로 다음 구절들은 주의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를 보일 뿐이다. 야고보서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토이스 텔레이오이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것은 완전 무죄가 아니고, 영적 성장을 의미할 뿐이다. 노아, 욥 등의 인물도 완전 무죄한 자들이 아니다.

요한일서 3:6, 8,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범죄치 아니하나니’(우크 하말타네이, 현재형)라는 말은 중생한 성도들이 계속 범죄하거나 죄 가운데 머물러 있지는 않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중생한 성도들이 계속 범죄하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씨 곧 새 생명의 원리가 그 속에 있고(요일 3:9) 또 하나님께서도 그를 지키시기 때문이다(요일 5:18).

알미니우스파의 완전론은 완전의 표준을 낮추어, 의식적 죄만을 죄로 간주한다. 마치 완전론자는 10m 사다리를 놓고 그 꼭대기에 올라가 ‘나는 완전하다’고 말하지만, 불 완전론자는 무한한 높이의 사다리를 놓고 10m에 올라가 ‘나는 불완전하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5. 선행과 상(賞)

 

(1) 선행은 성화의 열매

 

선행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인 동시에 성화의 당연한 열매이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에베소서 5:9, “빛의 열매[성령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2) 선행에 대한 차등(差等)한 상(賞)

 

성경은 선행에 대한 상(賞, 미스도스, reward)에 관해 많이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상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10: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25:19-21,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상(賞)은 선행과 봉사의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를 것이다. 다니엘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마태복음 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9:16-17,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특히,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에게 각각 수고한 만큼, 충성한 만큼의 상이 약속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3:8, 14,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린도전서 3:12-15의 말씀은 성화에 관한 것으로 종종 오해된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그러나 이 말씀은 일반 성도의 성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사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금과 은과 보석은 바른 성경적 교훈을 말하고, 나무나 풀이나 짚은 그릇된 인간적 교훈을 말한다. 이 말씀의 요지는, 목사가 바른 교훈으로 사역하면 마지막 날 상을 받을 것이지만, 목사가 바른 교훈으로 사역하지 않으면 자신은 구원 받을지 모르나 자기의 교훈을 받던 자들의 멸망으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3) 선행의 비(非)공로성=상의 은혜성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선행이 상을 위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성화와 선행이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선행들을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전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에게서 나온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주께서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5).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주를 위해 많이 고난을 당했고 역사상 아마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종이었지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다(고전 15:10). 또 사도 요한이 본 천국의 환상 중에서, 24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영원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말했다(계 4:10-11).

더욱이, 우리의 성화와 선행은 하나님의 완전한 도덕적 기준에 비추어볼 때 여전히 부족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결코 어떤 공로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의 비유에서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해야 한다(눅 17:10). 우리의 의는 예수님의 보혈 공로밖에 없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진술한다.

“그들의 순종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능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라도 공로를 쌓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이상을 할 수 있기는커녕, 그들이 의무상 해야 할 만큼에도 미치지 못한다.”(16:4).

그러므로 우리의 성화나 선행은 상을 위한 공로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상은 오직 그의 은혜일뿐이다.

 

7. 칭의의 결과로서의 성화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진 사람은 이제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의롭고 거룩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온전히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성도가 거룩해야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레 11:44). 우리는 이것을 성화(聖化)라고 한다. 그러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거룩하다는 말은 본래 구별 또는 분리되어짐을 가리킨다. 즉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 세속적인 것들과 구별이 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거룩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음이 생각이나 행동이나 상태가 죄와 구별이 되어 있는 것을 거룩하다고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 즉 세속적인 사람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것이 되어진 거룩한 사람이다. 이것은 칭의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성화란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생각이나 행동이나 상태에서 거룩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화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젖을 먹던 어린아이가 단단한 음식을 먹는 어른으로 성장을 하는 것처럼, 일평생을 두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완성은 죽음 이후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거룩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누구나가 사람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사탄의 활동이 허용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을 지나치게 높이거나 예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제아무리 성자라고 추앙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거룩한 신이 되어 질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남달리 거룩하다고 하여, 또는 남다른 능력을 지녔다고 하여, 사람을 높이려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단호히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지난날보다 더 거룩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노력을 해야 한다. 성화의 과정은 우리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 속도가 더딤을 안타까워하는 경우가 많다. 넘어지는 아픔을 맛보는 때도 있다. 뒷걸음질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전능하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진행이 된다. 따라서 결코 실패함이 없다.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성령께서는 기필코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 되도록 이루시고야 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빌 1:6).

  성화의 과정은 옛 사람을 벗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옛 사람을 벗는다는 것은 믿기 이전의 생각이나 판단이나 습관이나 취미나 관심 등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 또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다(갈 2:20)는 말씀으로 표현하였다. 옛사람을 벗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는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그것이 항상 쓴 뿌리로 남아서 다시금 부패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옛사람은 벗은 이후에는 새사람을 입는 과정이 뒤따른다. 이때에 새사람의 목표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8. 칭의와 성화의 비교

 

성화는 많은 면에서 칭의와 대조가 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미 앞에서 말한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하는 의미에서, 몇 가지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칭의는 단회적이고 순간적이지만, 성화는 반복적이고 점진적이다. 칭의는 현재에 완전히 이루어지지만, 성화는 그리스도를 목표로 한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기초로 하지만, 성화는 그리스도를 목표로 한다. 칭의는 성부께서 법적으로 선언을 하시는 것이지만, 성화는 성령께서 실질적으로 변화를 일으키시는 것이다. 칭의는 믿는 자 밖에서 이루어지지만, 성화는 믿는 자 안에서 이루어진다.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주어지지만, 성화는 믿는 자의 노력이 필요하다. 칭의는 사죄와 영생으로 구성되지만, 성화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것으로 구성된다.

 

(1) 성화의 수단

 

성령께서는 믿는 자의 성화를 위하여 효과적인 수단들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섭리가 그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성화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색다른 음성이나 환상으로 나타나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그리고 그 기록된 말씀을 해석하거나 전파하는 말씀을 말한다. 믿는 자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 많이 들어야 한다. 많이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믿음에 굳게 설 수 없다. 또 믿음에 서지 않고는 거룩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의 거룩함을 위하여 세 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 그리고 사람과 세상을 바로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둘째는 죄를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그 죄를 멀리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아가게 해준다. 셋째는 믿는 자가 이루어야 할 거룩한 삶의 대한 표준을 제시해준다.

  성례도 성화의 효과적인 도구이다.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눈에 보이는 상징으로 표하고 인치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한다. 그리고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결심을 새롭게 다짐한다. 하지만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할 때에라야 성화의 수단이 된다. 성례의 의식 그 자체만으로는 성화를 위한 성령의 역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성화는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믿는 자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수단은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외식하는 기도가 아니라면, 성화는 기도생활과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거룩의 정도가 더할수록 일용할 것을 구하기보다, 더욱 거룩해지기를 간구한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맛본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더 찾게 되는 것과 같다. 맛을 모르는 사람은 먹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거룩해진 사람일수록 더욱 거룩해지기를 사모한다.

  기도는 묵상도 포함한다. 묵상은 간절한 간구와 다르다. 묵상은 하나님 말씀의 뜻을 새겨 보거나,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음미해 보는 것이다. 자기의 지난 발자취와 장래의 나아갈 길을 하나님 안에서 그려보는 것일 수도 있다. 믿는 자는 이러한 수단을 통해서 자신의 옛 모습을 발견하여 벗어버릴 수 있다. 새사람에 대한 설계를 그려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달려갈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많은 묵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주야로 많이 묵상을 하는 사람은 참을 복이 있는 사람이다(시 1:6).

  믿는 자의 성화를 위해서는 일반적이거나 특별한 섭리가 그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이성 침공에 실패를 경험하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성도들에게 역경을 만나게 하여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신다. 또 날마다 여호와와 동행을 했던 에녹처럼, 형통함을 통하여서 더욱 의를 위해 살게도 하신다. 같이 길을 걷다가 벼락에 죽은 친구를 보고 주의 종이 되었던 루터처럼, 갑작스런 재난을 만나게 하여서 새 길을 걷게도 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풀 한 포기를 보고도 거룩해질 수가 있다. 역사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거룩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전도자는 사람의 모든 경험들을 열거한 후에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리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라고 하였다(전 12:13).

  성도는 믿음에 굳게 서서 담력을 가져야 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기 때문이다. 다시는 정죄함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영생하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닮아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답게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푯대를 정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달음박질을 하여야 한다. 그래서 준비된 부르심의 상급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한다.

 

9.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구원의 서정에서의 성화 교리 이러한 성화는 개혁파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조직신학의 구원론에서 구원의 순서로 다루면서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양자에 이어서 성화를 다루고 그 뒤로 성도의 견인과 영화를 다룬다.성경은 이 구원의 순서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에 따라서 구원의 순서는 개혁파 신학자들 간에도 그 이해를 달리하는 사람 간에 입장을 달리하고 있기도 한다. 가령 안토니 A. 후크마는 구원의 순서에서 중생과 회개 사이에 ‘돌이킴’을 두는가 하면, 존 머레이는 회개(또는 회심)을 다루지 않고 믿음(또는 신앙)이 양자 다음에 다루어진다. 그런가 하면 구원의 순서를 중생보다는 칭의로 시작하는가 하면, 신앙을 회심 앞에 두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소명 또는 중생에서 시작하여 회심을 신앙 앞에 두며 칭의를 신앙 다음에 둔다.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이러한 견해적 차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이 순서들이 갖는 유기적 관계성에 대한 이해와 그로 인해서 강조되는 데 따른 것이다. 성화가 교의신학(Dogmatic Theology)이라고도 불리 우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에서 구원의 순서로 다루어짐에 따라서 교회에서와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교리적인 학문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가르쳐지고 있다. 교의신학을 조직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직신학이 성경의 교리적인 원리들을 가르치는 신학을 조직적으로 표현하는데 따른 것이다. 그러니까 조직신학은 기독교 교의학인 것이다. 그런데 교의신학이라는 명칭보다 조직신학이라는 명칭이 우리에게서는 더 익숙해 있다. 그것은 미국에서 조직신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영향 때문이기도 한데다가 워필드(Warfield)가 말한 대로 조직신학은 어떤 원리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바람직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교의신학이라는 명칭을 고수한다면 거기에서 말하고 있는 바에 신학 사상이 갇혀서 보다 성경적 관점에서 이해한 교리적인 원리들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10. 성경 신학의 관점에서 재정립되어야 할 성화에 관한 연구(1) 교회사적으로 본 성화의 관점 1) 종교개혁 이전의 성화론 성경의 교리적인 원리들을 말해나가며 이를 저술해 나간 것은 3세기 초부터이므로 상당히 오래 전부터 다루어져왔으며 이후 다양한 명칭으로 많은 조직신학이 비중 있게 저술되어 왔다. 그런 까닭에 구원의 순서에서 다루어지는 성화 부분이 교회사적으로 이 시기에서는 어떻게 말해졌는지에 의해서 그 이후에도 성화의 개념과 그 이해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교회사적으로 먼저 종교개혁 이전에 언급되거나 다루어진 성화의 관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① 고대의 성화관 박형룡은 그의 저서 ‘박형룡 박사 저작전집 제5권 교의신학 구원론’에서 성화에 관한 역사적 고찰을 다루면서, “초대 교회에서는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신앙과 선행에 의뢰할 것을 가르치는 도덕주의의 긴장이 현저히 나타났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주석으로, “세례 받기 전에 범한 죄들은 세례 받을 때에 씻어졌으나 그 후에 범한 죄들을 위하여는 신자가 반드시 고해(告解)와 선행(善行)으로 대비하여야 했다. 그는 반드시 도덕생활을 하여서 주의 시인(是認)을 받을 공로를 세워야 했다. 여기서 자연히 수법주의(守法主義), 성례중시주의(聖禮重視主義), 속계(俗界)에서 세력을 펴려는 성직자의 정략(政略), 과도한 수도사적 경건의 결점 있는 개념들이 자라났다. 고행주의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여 지게 되었다.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초대 교회 시대인 고대에서는 고도의 도덕생활을 요하는 도덕주의가 성화의 관념을 띠고 행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② 4세기까지의 구원론의 동향에 의한 성화관 교회사에서 종교개혁 이전에 성화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인물은 4-5세기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 이다. 그 이전인 초대교회 교부들의 저서에는 성화의 교리에 대한 진술이 거의 없다. 단지 이 당시에는 구원론의 관점에서 그 동향이 어떤 것인지를 통하여 성화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가졌을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하여 신앙과 선행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가르침에서 도덕주의의 경향이 현저히 나타났다. 세례 받기 전에 범한 죄들은 세례 받을 때에 씻어졌으나 그 이후에 범한 죄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고해와 선행으로 준비해야만 한다. 그는 반드시 덕스러운 생활을 해야만 하며 그리하여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공로를 세워야만 한다. 뻘콥은 이에 대한 스코트(Scott)의 말(The Nicene Theology, p.200)을 소개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이원론(二元論)은 성화의 영역을 단지 간접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과 연관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히 죄에 대한 불완전한 개념, 율법주의, 성례주의, 사제술(司祭術), 지나친 수도사적 헌신을 성장시킨 분야(field)였다” 라고 하였다. 이 당시는 금욕주의가 크게 중요시하게 된 시기이나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때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관점은 고대의 성화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③ 어거스틴의 성화관 루이스 뻘콥은 4세기 이후 어거스틴은 성화의 개념을 최초로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본다. 박형룡도 뻘콥의 견해를 그대로 인용하여 같은 견해를 보였다. 어거스틴이 가진 성화의 견해들은 중세기 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종교개혁 시기에도,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그 영향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아담의 죄와 부패는 자손에게 유전하는 것, 이 죄의 벌로써 죽음이 온 것, 사람은 출생한 그대로의 상태에서는 참으로 선을 행할 힘이 없는 것, 우리가 선택하여 선을 취하고 이를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 이 은혜는 사람의 공덕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전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되어지는 것으로 이 선택은 확실 불변하여 지속의 힘이 있으며 이 은혜는 결코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어거스틴은 선을 행할 힘과 여지가 사람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렇지만 그러한 어거스틴은 사람의 성질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성화를 신적 생명의 새로운 초자연적 부여에 의한 능력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은 신적 은혜가 사람의 영혼에 새롭게 주입(注入)된 능력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이 은혜는 일종의 ‘부가적 선물’로서 실유(being)를 새로운 수준 또는 보다 더 높은 질서에로 들어오려 하나님을 알고 소유하며 즐기는 천적인 운명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장수민은 그의 저서 ‘칼빈의 기독교강요 분석’에 부록으로 실은 기독교강요인명록의 어거스틴에 대한 설명에서, “칭의의 은총은 인간의 재창조이며 갱신이다. 이 은총은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의 주입과 자신 안에 초자연적 능력의 전달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행위를 초자연적으로 선하게 만들며, 하늘에서 보상을 받게 한다. 이러한 새로운 능력들이 인간에게 진정한 의지의 자유를 부여한다. 즉 초자연적인 선의 연습을 위한 능력을 부여해 준다.” 라고 하였다. 어거스틴이 이와 같은 견해를 갖는 것은 칭의를 단번에 되어지는 사건으로 보는 동시에 계속적으로 의롭게 되어가는 과정으로 보고서, 여기에 성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한 때문이다. 즉, 칭의는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하며 전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의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칭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과정을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성화는 여기에 있게 되는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역사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으로, 은혜의 선물을 통한 하나님의 행위인 것이다. 어거스틴이 가진 이러한 성화의 관점은 이후에 성화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 신적 능력이 임하여 그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상태에 있게 하는 것으로 인식케 하였다. ④ 중세 시대의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화관 어거스틴에게서 나타난 성화의 개념은 중세기 시대의 로마 카톨릭교회가 가진 신학에서 좀 더 그 개념이 명확해진다. 그것은 어거스틴은 성화의 개념을 최초로 발전시킨 사람이었기에 그의 견해들은 중세 시대의 로마 카톨릭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의 로마 카톨릭교회에서의 성화관이 어떤 것인지는 이 시대의 신학 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들에서 가장 발전된 형식으로 발견되었다. 이 발전 과정 속에서 성화의 은총적이고 에너지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이것이 교회의 성례전적인 시행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분여된다는 교리가 확고해졌다. 그들의 교리는 트렌트공의회의 선언을 통하여 더욱 구체화되었는데, 정상적인 인간성은 죄와 불가분의 관계이고, 인간의 공로만을 통한 구원은 불가능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초자연적인 은총이 필요한데, 이것은 인간이 이미 지니고 있는 자연적인 본성에 선물로써 더해지는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보다 초자연적인 존재로 승화되며 이로써 하나님을 이해하고 교제하며, 그에게서 오는 복을 누리게 되는데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구원의 은총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보았다. 성화 역시 이러한 신학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였다. 즉, 죄인을 성화시키는 은총의 에너지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자원으로 삼아서 교회를 통하여 성례전이라는 수단을 통로로 죄인들에게 주입되는데, 이것을 통해서 신자들은 거룩한 삶을 살게 되고 여기서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신자들의 마음에 주입된 죄인을 성화시키는 은총의 에너지는 신자들을 공덕(supererogation)의 행위를 수행할 수 있게 하여서 자기 자신들의 구원에 필요한 것보다 더 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이익에 보충할 만한 선행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중세 시대의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화관은 그들이 갖는 점진적 과정의 칭의관과 일맥상통하여 점진적 과정의 성화관을 갖는다.

도머(Dom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칭의는 점진적 과정이다. 신자의 생활의 전 과정을 통해 계속된다. 죄의 고백과 각종 징계가 칭의를 확보하는데 필요하다. 사람들은 거룩해진 것만큼 의롭게 된다. 그 결과 인간은 현재 생애에서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칭의는 계속 과정이기에 칭의가 기초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도 반드시 계속적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미사가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칭의는 이 세상에서 결코 완성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므로 누구도 완전한 의로운 자로 죽을 수 없다. 그래서 연옥설이 있는 것이다.”

 

2) 종교개혁 시대의 성화론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교회에서의 성화의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서 신학적인 맥락에서 시도되었다. 성화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다루어져 오면서 개혁교회의 구원론에서 아주 중요한 교리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중요한 인물이 루터와 칼빈이다.

① 루터의 성화관 루터(Martin Luther)의 신학사상을 따르는 루터교의 전통적인 신학적 강조점은 ‘이신칭의’의 신학이다. 그러나 루터의 신학 사상이 항상 믿음만을 강조하는 신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루터교는 ‘Sola Fide'의 성화관, 곧 ‘이신칭의 성화관’을 말한다. 현재 루터교의 ‘이신칭의 성화관’을 대변하는 루터교 신학자는 Gerhard O. Forde가 있다. 그의 논문 내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신칭의 성화관’을 정리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A) 무조건적인 은총의 결과로서의 성화 a. 성화란 칭의와 구별되는 어떠한 새로운 무엇이 추가적으로 첨가 된 것이 아니라, 성화란 칭의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성화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예수님의 공로에 기초한 ‘무조건적인 칭의’의 원리에 익숙해지는 것뿐이다.

b. 성화란 인간이 노력해서 성취하는 도덕적인 삶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도덕적인 삶이란 옛사람이 추구하던 바이므로 우리는 옛사람이 추구하던 ‘자기 의(義)’ 포기하고 새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들어가야 한다. B) 성화와 칭의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이 지닌 문제점 포데(Gehard O. Forde)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전통적인 설명이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칭의는 죄인을 무조건적으로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고 성화는 인간 편에서 감당해야하는 부분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어떠한 상호 계약의 결과로 간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화는 사람이 그것을 성취하는 주체로 오해될 수 있다. 이는 칭의는 종교적 서곡으로 보게 되며, 성화를 핵심으로 보게 된다. 그로 인해 계속되는 옛 자아의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C) 성화는 칭의의 무조건적인 원리에 속한 것 포데는 신자의 삶의 방식에는 무조건적인 삶의 방식과 조건적 삶의 방식 이렇게 둘이 있다고 말한다. 조건적인 삶의 방식은 옛사람의 방식으로 여기에는 문제가 있는데, 첫째로는 이는 율법적인 삶으로 나의 의를 강조하게 되며, 둘째로 칭의를 불필요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참 성화란 무조건적인 삶의 방식인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 이는 칭의에 추가적으로 첨가된 새로운 실체가 아니며, 무조건적인 칭의의 원리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신칭의 성화관은 믿음의 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차이점은 칭의의 개념이 너무 강조되어 성화의 영역에까지 침범한 경향이 없지 않다. 그는 무조건적인 삶의 방식과 조건적인 삶의 방식이 상충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②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성화 성화란 말이 용어로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종교개혁 이후이다. 교리적으로 성화가 다루어지고 있는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은 종교개혁의 산물인 개혁교회의 귀중한 유산이다. 그리고 이 용어가 교리화 되는데 영향력을 가장 크게 끼쳐 온 것은 칼빈(John Calvin)의 기독교강요이다. 그런데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총 4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러한 기독교강요의 어디서부터 성화가 다루어져왔는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칼빈의 성화론은 기독교강요 3권인 구원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W. Niesel은 구원론의 3권에서 3장부터 다루고 있는 회개론에서 성화론이 시작되어 11장의 칭의론에서 부터는 성화론이 본격적으로 언급되고 있다고 본다. 그가 이렇게 보는 것은 칼빈이 성화를 회개와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웨버(O. Weber)와 웬델(F. Wendel)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다만, 웨버는 칼빈이 중생과 성화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판단하여서 3장부터를 성화론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웬델은 니이젤(W. Niesel)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어서 회개와 성화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3장부터 성화론의 시작으로 보되, 6장의 그리스도인의 생활로부터 19장 그리스도인의 자유까지 전체를 성화론으로 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철하는 3장부터 10장까지를 회개에 의한 중생, 11장에서 13장까지를 칭의론, 그리고 14장부터 19장까지를 본격적인 성화론으로 본다. 이상에서 성화를 회개, 또는 중생과 동일하게 보는 것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남으로 성화된 자가 되었다고 보고서 그에게서 성화의 시작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화론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칭의론에서는 성화론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그것은 성화된 자는 순결한 삶을 신장(伸張)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칭의와 성화의 이중은총을 말한다. 즉 칭의와 성화의 이중 은총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두 속성인 의와 거룩이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칭의와 성화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말하면서, 성화를 칭의의 지속적인 진보의 관계에서 다룬다. 즉 칭의를 받은 자에게서는 또한 거룩에 합당한 순결한 삶을 요구받고 있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11장 1절 1항에서 칭의 교리의 위치와 그 뜻을 설명해 나가는 중에서 성화를 언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소유하도록 하였으며 그리스도에 참여함으로써 주로 다음과 같은 이중적(二重的)인 은혜를 받게 하신 것이다.

즉, 첫째로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통하여 하나님께 화해가 되어 우리는 그를 하늘나라에서 심판주가 아니고 자비로우신 아버지로 모세 되는 것이요, 둘째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화(聖化) 되어 우리가 생활의 결백과 순결을 향하여 전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화 되어”(being sanctified by his Spirit)라고 말하고 있어서 그가 기독교강요에서 성화를 말한 사람으로 이해되어 왔다. 칼빈이 말한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에 의해 성화되어 생활의 결백과 순결을 향하여 전심하게 된다.”는 그가 가진 성화의 개념을 말해 준다. 칼빈의 성화관은 죄인은 의롭다 함을 얻고 성화의 은혜로 심령이 변화되어 그 열매로서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화를 지속적인 회개 또는 중생으로 이해하면서, 죽임과 살림으로서의 성화를 먼저 이야기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발전된 개념의 성화를 주장한다. 그것은 곧 적극적인 사랑으로의 성화이며, 내적인 순수성과 외적인 행위까지 포함하는 전체적인 의미에서의 성화이다.

이러한 이해는 벌콥의 견해도 같다. 그는 말하기를, “성화란 성령께서 죄인을 죄의 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시며 계속적인 사역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다시 안토니 A. 후크마(Anthony A. Hoekema)의 견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 있는 참여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의 본성 전체를 새롭게 하시어서 우리가 주님을 즐겁게 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를 성화라고 한다.” 칼빈은 성화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보를 통하여 우리를 그에게 화해시키고, 값없이 죄를 용서해 주어 의롭게 보아주시는 경우, 동시에(at the same time) 그 은총에 그의 자비를 더하여주신다. 즉 하나님은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육신을 날이 갈수록 죽어지게 하여 날마다 성화가 되게 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화란 생활의 참된 순결 속에서 주님께로 성별되어지는 것이며 이때 우리의 마음은 율법을 순종하도록 틀이 잡혀지게 된다. 이러한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좇고 또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의 영광만을 증진시키는 것이 우리의 특별한 뜻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성화를 인간의 자의적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화의 열매인 선행은 구원의 공적을 쌓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구원은 행함과 관계없이(마 20:1-15) 믿음으로 받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칼빈은 선행을 통해서 영생의 기업, 즉 구원의 완성에 이른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에게 있어서 성화의 이해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의롭게 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이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 성화되어 율법에 순종하여 선행을 실천하는 ’생활의 거룩함‘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그러한 몸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을 요약한 것이기도 하며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 시무하면서 평신도의 신앙의 지도를 위하여 직접 사용하였던 기독교 교리 교본이기도 한 1537년 제네바 교회를 위하여 쓴 신앙안내 및 신앙고백을 번역한 일역(日譯)을 참조하여 다시 우리말로 편술한 책인 ‘칼빈의 기독교 신앙안내’에서도 그가 가진 성화관을 잘 알 수가 있다. 거기에 보면, 칭의에 근거한 성화를 언급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의롭다고 인정하기 위하여 우리의 보증이 되시고 자기의 의를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가 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성령에게 우리를 맡기시고 우리를 온전히 성결하게 하여 흠이 없게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성령은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하신 은혜로써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시며 스스로 깨닫는 영이시며 심려하시는 영이시며 능력의 영이시며 주를 경외케 하는 영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충만한 데에서 은혜를 받게 되며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에 따라 우리가 성화되어 가는 것이다. 성령의 성화의 사역을 따라 성화되어 가지 않는 자는 성령을 거역하는 자인 것이다. 이는 성경이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뿐만 아니라 성화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화되지 아니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칼빈이 칭의에 근거한 성화의 이해를 가진 것은 하나님은 칭의의 은혜를 주실 때 성화의 은혜도 더불어 주신다며 이 둘의 불가분리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가? 믿음으로 의를 붙잡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반드시 동시에,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도 하신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유대관계로 결함되어 있다.”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여러 신학자들에 의하여서 강조되고 있다. 특히 필만(H. Pohlmann)은 말하기를, “성화가 없다면 칭의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헨드릭스 뻘콥(H. Berkhop)도 칭의와 성화의 유기적인 관계를 말하기를, “성화는 구원의 목적인 측면에서는 첫 번째이나, 결과에 있어서는 두 번째 위치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칼 바르트(Karl Barth)는 성화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인 것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로 역설하였다. 또한 칼빈은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주해하면서 “전혀 성화에 관심도 없고 성화의 증거도 없는 자는 칭의 된 자가 아니다.” 라고 하였으며, 그가 쓴 기독교강요 3권 17장 12항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반드시 선행(성화)으로 그 칭의를 증거한다. 성화는 칭의의 증거이다. 칭의는 법정적이고 선언적인 성격을 가지나, 동시에 효과적이다. 하나님의 선언은 그 자체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의 은혜의 동시를 말하지만, 이 둘의 불가분리성의 관계를 칭의는 성화에 선행하고 법적인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Heppe는 칼빈의 칭와와 성화에 대한 이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화는 칭의가 성화의 실제적이고 필수적인 시작이라는 점에서 칭의에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가 소명과 구별되는 것처럼 칭의와도 구별된다. 왜냐하면 소명은 중생의 시작인 반면, 성화는 점진적인 완성에로 가는 중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칭의는 인간 밖에서 결과 된 하나님의 행위이고, 이 칭의에 의해 하나님은 외적인 의를 사람들에게 배정한다. 반대로 성화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이 부름 받은 사람들 속에서 간접적으로 생산되는 효과이다. 칭의는 동일한 방법으로 나눠주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단 한 번의 행위로 하고 성화는 개인이 받은 성령의 다양한 방법에 따라서 다양하게 완성되어지는 점진적인 과정이다.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관련은 순전히 피동적이며, 성화는 인간과 협력한다." 칼빈이 성화를 칭의에 근거하고, 칭의를 성화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면서 칭의와 성화를 서로 구분하고는 있지만,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는 않는다. 윤영래는 ‘칼빈의 성화론 연구’에서 말하기를, “성화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다. 이 말은 성화가 단순히 우리의 금욕적 노력과 헌신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는 말이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는 없는 은혜이다. 칭의와 성화 모두가 신본적인 차원에 속한다.” 라고 하였다. 칼빈은 고린도전서 1장 2절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신성함은 하나님의 선택의 근원으로부터 비롯된다.” 칼빈이 성화의 이해를 칭의에 근거하여 가진 것은 어거스틴을 비롯하여서 중세 교회가 가져온 성화의 개념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중세교회가 가져온 성화의 개념과는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중세교회가 성례전이라는 수단을 통로로 해서 거룩한 삶과 성령의 열매가 열리는 성화의 개념을 가졌으나, 칼빈은 성화를 칭의에 근거하여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이중은총(double grace)으로 보면서, 구원은 행함과 관계없이 믿음으로 받으나 성화의 열매인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늘나라로 인도되는 것으로 알고서 성화를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의 개념으로 보았다. 그가 이렇게 본 것은 신자는 비록 죄책에서 해방되어 자유한 자이나, 악한 인간의 본성에서 항상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욕망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가는 것을 말하면서 완전한 성화는 죽음 이후의 일로 남겨두었다. 칼빈의 성화에 대한 이해는 개혁교회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칼빈은 개혁교회를 세운 사람이며, 당시에 그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 신학 사상의 영향 속에서 함께 개혁교회를 이루어 나감으로써 생긴 개혁교회와 개혁주의 장로교회가 오늘날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교회에서 칼빈주의를 말하지 않는 교회가 없으며, 따라서 칼빈주의적인 교회임을 내세우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화를 말할 때 예외 없이 칼빈이 말한 성화의 개념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12장 성도의 견인(堅忍)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끝까지 견딤)이란,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사람은 은혜의 상태 안에서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1,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으시고 그의 영으로 효력 있게 부르시며 거룩케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떨어져 버릴 수 없고, 그 안에서 확실히 끝까지 견디며, 영원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

 

1. 성경적 증거

 

성도의 견인 교리의 증거들은, 우선, 성경에 명백히 가르친 구절들이다. 요한복음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로마서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고린도전서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데살로니가후서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디모데후서 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2. 지원하는 진리들

 

이런 명백한 구절 들 뿐만 아니라, 성도의 견인 교리를 지원하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들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성이다.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에독사세)은 부정과거시제로써 미래의 확실한 사건을 나타낸다. 예정된 자들은 남김없이 다 영화롭게 된다. 디모데후서 2:19,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의 완전성이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라.” 요한복음 6:39,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로마서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9,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셋째는 성령의 인치심이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에베소서 1:13-14,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를 바라며 그를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 심을 받았으니, 그는 그 얻으신 것의 구속의 때까지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에베소서 4:30,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 심을 받았느니라.” ‘인치심’은 보증이며 보장이다. 이렇게 보증된 자들은 중도(中途)에 실패할 수 없다.

천국의 기업을 약속하심도 이와 관련된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베드로전서 1:3-4,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3. 구원의 확신 문제

 

로마 천주교회는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의무적이지 않고 원할 만한 것도 아니며 또 가능하지도 않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반(半)펠라기우스주의와 고해 성사(告解聖事) 사상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구원의 확신을 가능한 것으로 본다. 구원의 확신을 보이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35, 37-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구원의 확신이 믿음에 본질적 요소인가 아닌가에 관해서는 견해가 나뉜 다. 어떤 이들은 구원의 확신을 믿음에 본질적이라고 말한다. 반(反)율법주의자 드 라바디(De Labadie)는 믿음의 충분한 확인을 갖지 못한 자를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루터나 멜랑톤도 구원의 확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개혁 교회에서도 매로우 사람들(Marrowmen)과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게할더스 보스, 루이스 벌코프 등이 구원의 확신을 믿음에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구원의 확신을 믿음에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믿음의 열매라고 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비롯하여, 프란시스 투레틴, 촬스 핫지, 로버트 댑니 등이 그런 입장을 취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1-4, “... 주 예수를 참으로 믿으며, 그를 진실히 사랑하며, 그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으로 행하기를 힘쓰는 자들은 그들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을 이 세상에서 확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할 수 있으며, 그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 무오한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참 신자라도 그것에 참여하기 전에 오래 기다리며, 많은 어려운 일들과 싸울 수 있지만... 참 신자들이라도 그들의 구원의 확신이 여러 방식으로 흔들리고 감소되고 중단될 수 있는데...”

촬스 핫지, “자신의 구원의 확신을 믿음에 본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의 백성의 경험에 반대된다.”

 

4.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한 반론들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한 여러 가지 반론들이 제출되었다.

 

(1) 성화에 대한 계속적 권면에 반대된다는 반론

 

성경에는 성화에 대한 계속적 권면들이 많이 있다.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요한복음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그러나 이 말씀들은 권면 받는 신자들 중에 누구가 끝까지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 완성을 위해 사람의 자발적 행위를 수단으로 사용하심을 증명할 뿐이다.

 

(2)나태와 방종으로 인도한다는 반론

 

성도의 견인 교리가 성도들에게 나태와 방종에로 인도한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오해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편의 근면과 성실한 노력 없이 우리를 보호하신다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며, 성도의 견인의 확신은 도리어 성화를 위해 큰 위로와 힘이 되기 때문이다. 하비의 말과 같이, 성도의 견인 교리는 “위험한 시간에 불기둥이다.”

 

(3) 배교(背敎)의 경고에 반대된다는 반론

 

성경에는 배교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이 많이 나온다.

마태복음 24:4-5,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로마서 11:20-22,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 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러나 이 말씀들도 경고 받는 신자들 중에 누구가 배교하리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 구원 완성을 위해 경고가 수단으로 사용됨을 증명할 뿐이다. 배교의 경고는 배교의 가능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4) 배교(背敎)의 실례들에 반대된다는 반론

 

성경에는 또한 배교의 실례들도 없지 않다.

디모데전서 1:19, 20,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디모데전서 4:1,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디모데후서 2:17-18,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베드로후서 2:1, 2, “...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그러나 배교자들이 한 때 교회 안에 있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들이 참으로 중생하고 구원 얻은 자들이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의 제자들 중에 속하였지만,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는 자요(요 6:64), 도적이요(요 12:6), 깨끗지 않은 자이었다(요 13:10-11). 히브리서 6:4-6, 10:26-29은 배도의 경고 혹은 실례들에 관련된다고 본다.

제13장 영화(榮化)

 

1. 영화(榮化)의 의미

 

영화(榮化, glorification)란 넓은 의미로는 성도가 죽을 때의 영혼의 완전 성화와, 부활 때의 몸의 완전 구속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엄격한 의미로는 부활 때의 몸의 완전 구속을 의미한다.

죤 머리, “(영화란) 신자의 죽음에서 영혼의 완전 성화를 가리키지 않고, 마지막 날에 죽음 자체의 파멸을 포함하여 죄의 모든 결과들로부터의 구속을 가리킨다.”

신자는 죽을 때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해진다.

소요리 문답 37문답, “신자들은 죽을 때, 그 영혼들이 완전히 거룩해지며 즉시 영광 안으로 들어가고.” 누가복음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빌립보서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히브리서 12:23,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이것은 순간적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의 최종적 단계는 몸의 구속(救贖), 곧 우리의 몸이 영광스런 부활체가 되는 것이다. 로마서 8:23,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성도의 부활의 몸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범죄 할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고, 다시 범죄 할 수도 없고 다시 죽을 수도 없는 몸이다. 누가복음 20: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부활의 몸은 썩지 아니하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영적인 몸일 것이다(고전 15:42-44, 49). 그 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를 닮은 몸일 것이다. 로마서 8:29,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빌립보서 3:21, “그가 ...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요한일서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런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세계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로마서 8:18-23에 증거한 대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라며 탄식하고 있다.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다. 그 곳에는 눈물도, 사망도, 애통도, 아픈 것도 없을 것이다. 그 세계는 현재의 이 세계가 완전히 새로워진 세계일 것이다(계 21:1-5).

 

2. 완전한 구원의 영광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로 말미암아 이미 법적으로 거룩하여졌고(고전 1:2; 히 10:10) 도덕적으로 완전하여졌다(히 10:14). 그것이 칭의(稱義)의 진리이다. 성화란 법적으로 이루어진 그 거룩과 의를 인격과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비록 성화가 이 땅 위에서 매우 서서히 이루어지고 심히 불완전하지만, 우리는 구주 예수께서 우리 위해 이루신 완전한 의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완전한 의인으로 간주될 것이다. 미래의 영광은 우리의 불완전한 성화의 정도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완전한 의에 근거한다.

영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법적으로 이미 이루어진 구원에 내포된 것이다.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은 성도들의 영의 구원만 완성한 것이 아니고 육의 구원도 원리적으로, 법적으로 이미 완성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영광스런 몸의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마태복음 8: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거룩한 삶의 결과를 단순히 ‘영생’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부르심의 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로마서 6:22-23,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브라베이온, prize)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은혜로 주실 상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영화롭고 완전한 구원에 비교될 수 없다. 성화는 더 나은 구원을 만드는 무엇이 아니다.

 

3. 상급에 따른 내세의 영광의 차등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성도의 선행과 봉사에 따라 은혜로 내려주실 상(賞)은 성도가 내세에 누릴 영광에 관계된다고 볼 수 있다. 성화의 교리에서 논의한 대로 성도가 장차 받을 상에 차등이 있다는 점에서, 성도가 누릴 미래의 영광에 차등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인리히 헤페는 그의 개혁파 교의학이라는 책에서 역사상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 이런 점들을 언급한 피스카토, 부칸, 코체유스 등의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피스카토는 영생과 천국의 영광을 구별하며, 의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은사의 분량에 따라 차등하게 천국의 영광을 얻게 된다고 보았다.

부칸은, “영생의 영광이 모든 택자들에게 동등한 분량으로 공통적일 것인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택자들에게 자기의 은사들을 차등하게 나누어주시듯이, 천국에서도 자기의 은사들을 택자들 가운데 차등한 방식으로 주실 것이다.”

코체유스는, “영광에 있어서 개인들에게 차이가 있을 것이나, 질투함이 없을 것이며 가장 큰 영광 곧 머리의 영광이 모두에게 흘러넘칠 것이다,” “영광에 있어서 또한 등급들이 있을 것인데, 행위들의 공로에 따른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이 세상에서 맺은 의의 열매들에 일치하는 방식으로이다.”

헤르만 훽스마와 박형룡 박사도 그들의 교의학 저서들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견해를 소개하고 논평하였는데 그들 자신의 견해들도 헤프가 인용한 사람들의 것과 비슷하다.

훽스마에 의하면, 아브라함 카이퍼는 영생과 상을 구별하였고 영생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하여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지지만 상은 그들의 선행과 봉사에 근거하여 일부의 신자들에게 내리시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보았다.

헤르만 바빙크는 성경이 각 사람의 행위에 따르는 상에 대해 말할 때 장차 그가 누릴 영광의 차등함을 가르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사람은 그에게 주어진 재능을 사용하는 성실성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큰 영예와 통치권을 받을 것이다(마 24:14 이하). 물론 모두가 동일한 복, 동일한 영생, 하나님과의 동일한 교제를 나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광과 광휘(光輝)에 있어서 그들 가운데 차이가 있다. 교회들은 그들의 충성과 열심에 비례하여 그들의 주님과 왕으로부터 다른 면류관과 상을 받는다(계 2-3장)”고 하였다.

성도들이 내세에 누릴 영광의 차등은 상급에 대한 구절들에서 당연히 추론되지만, 특히 다음 몇 구절은 그 사실을 잘 보인다.

다니엘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마태복음 5:19,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많은 주석가들에 의하면(칼빈, 매튜 풀, 데이빗 딕슨, 매튜 헨리, 데이빗 브라운 등), 이 구절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를 범해도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고 본다. 예수께서 강조하신 바는,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이루러 왔으며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17-18절) 우리가 율법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중요하게 여기며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석가들은 본 절의 천국을 주께서 종종 의미하신 신약 교회를 가리킨다고 이해보았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해 박윤선 목사는 다르게 주석했다.

“이 구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곧 진정한 신자들에 한하여서는 율법을 지키든지 못 지키든지 구원 문제에 있어서 직접 관계는 없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받을 영광의 크고 작은 문제에만 직접 관계를 가진다. 여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율법의 일부분을 범한 자라도 천국에 들어가기는 하였다. 그는 다만 천국에서 상급이 적은 것뿐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실행하면서 남을 가르치는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이며 내세에 상을 받는다(단12:3).”

누가복음 19:16, 17,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누가복음 19장의 므나 비유는 지상에서의 충성의 정도에 따라 내세에서 누릴 권세와 영광이 다르다는 것을 보이는 것 같다. 이것은 상급의 차등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내세의 영광의 차등을 위해 인용되는 다음의 구절들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고린도전서 15:39-44,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 말씀은 죽은 자들의 부활체들의 영광의 차등을 말한다기보다, 현재의 몸과 장차 누릴 부활의 몸과의 현격한 차이를 말한다고 보인다.

히브리서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본 절의 ‘더 좋은 부활’도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체들 중에 더 좋은 것이 있고 덜 좋은 것이 있다는 뜻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의 죽은 자의 부활 즉 회생(回生)보다 오는 세상에서의 부활이 더 좋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제14장 박 형룡의 구원론연구 - 칭의와 성화를 중심으로

 

Ⅰ. 서론

 

박형룡의 신학에 대한 상당한 오해들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박형룡의 인격과 신앙과 신학을 근거로 그를 지나칠 정도로 영웅시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지나칠 정도로 폄하한다는 사실이다. 윤천석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박형룡의 신학, 특히 그의 성령론에 대한 오해들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신학의 발전을 위해 어떤 특정한 신학자나 신학에 대해 평가할 때, 가장 먼저 확보되어야할 조건은 객관성을 가진 공정한 눈과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앞으로 보다 발전된 박형룡의 신학에 대한 바람직한 논의가 계속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박형룡의 구원론 전체를 다루는 것이 좋겠지만, 그의 구원론에서 칭의와 성화만을 다루기로 한다.

개혁신앙에 대한 재조명을 위해 그가 평소에 중요하게 여겼던 Calvin의 구원론을 칭의와 성화를 중심으로 간단하게 살펴보고, 박형룡의 신학의 위치를 평가하기 위해 소위 ‘개혁전통’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한다. 박형룡의 구원론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줄어든 것을 염두에 두면서, 질적인 확보를 위해 그의 주저『교의신학/구원론』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기로 한다.

 

Ⅱ. ‘개혁전통’에 대한 정의

 

무엇이 ‘개혁전통(改革傳統)’(Reformed tradition)인가? ‘개혁전통’에 대해 한 마디로 분명하게 신학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학자들마다 여기에 대한 견해들이 매우 다양하여 아직도 논쟁이 뜨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전문적 신학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현상적으로 그리고 역사적(歷史的)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구별 또는 차별내지 대조되는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있고, 프로테스탄트교회 내에서도 여러 종류의 교파들[(예, 감리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루터교회, 장로교회, 개혁교회, 영국성공회, 순복음교회, 동방(그리스, 러시아)정교회 등]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여러 종류의 프로테스탄트교회 중에서 ‘개혁교회’(Reformed churches) 또는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es)라는 이름으로 많은 교회들이 세계 도처에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개혁교회’ 또는 ‘장로교회’의 이름으로 존속하는 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삶을 ‘개혁전통’으로 명명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개혁전통의 근원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개혁전통은 16세기의 종교개혁 운동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종교개혁 운동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동종교개혁 운동과 좌파적 급진적 종교개혁 운동(재세례파 운동이나 토마스 뮌처의 농민운동 등) 외에 종교개혁 운동 속에 독일 중북부의 루터 중심의 종교개혁 운동과 독일 남부(스트라스부르 등)와 스위스(즈네브와 쮜리히 등) 중심의 종교개혁 운동이 있었다. 독일 중북부의 루터 중심으로 전개된 종교개혁 운동은 오늘날 ‘루터교회’ 전통 (루터, 멜랑흐톤, 『아우쿠스부르크 신앙고백, 1530』, 『협화신조, 1557』)으로 계승되었고, 독일 남부(스트라스부르의 마르틴 부처)와 스위스(쮜리히의 쯔빙글리와 불링거, 즈네브의 파렐과 깔뱅)를 중심으로 전개된 종교개혁 운동은 유럽 대륙에서는 칼빈과 베자를 거쳐서 ‘개혁교회’(Reformed churches)로 명명되어 계승되고 있고, 영국에서는 칼빈과 녹스(John Knox)를 거쳐서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es)로 명명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개혁전통’은 칼빈에 의해서 집대성되어 유럽대륙에서는 베자를 거쳐 스위스(『즈네브 요리문답, 1537/1542』), 프랑스(『프랑스신앙고백, 1559』), 네덜란드(『네덜란드신앙고백, 1561』) 등에서 꽃을 피웠고,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는 녹스를 거쳐 장로교회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8』, 『스코틀랜드 제일신앙고백, 1560』) 꽃을 피웠는데, 때로는 정통주의 형태로, 때로는 경건주의 내지 청교도주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개혁전통의 근원을 형성한 16세기의 개혁파 종교개혁자인 쯔빙글리, 부처, 칼빈의 전통은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나 청교도주의 및 개혁파 경건주의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의 찰스 하지나 워필드와 네덜란드 계열의 미국의 루이스 베르꼬프의 『조직신학』이나 네덜란드의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과 아브라함 카이퍼나 독일의 헤르만 헤페의 『개혁교의학』에서 나타난다. 20세기와 21세기의 현대신학에서 대표적인 개혁파 신학자는 스위스의 칼 바르트, 에밀 브룬너, 로흐만(체코), 독일의 슐라이어마허, 오토 베버, 한스-요아킴 크라우스, 위르겐 몰트만, 미카엘 벨커, 네덜란드의 베르까우어와 헨드리꾸스 베르꼬프, 영국의 토렌스, 미국의 니버 형제와 밀리오리 등으로서, 세계적으로 걸출한 신학자들의 대부분은 개혁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라는 목표를 지향하는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개혁전통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 어떤 특정한 시대의 개혁신학이나 어떤 특정한 사람의 개혁신학을 절대화하거나 개혁신학 전체와 동일시하는 경우이다. 때로는 루터신학 자체가, 때로는 츠빙글리신학 자체가, 때로는 칼빈신학 자체가, 때로는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자체가, 때로는 바르트신학 자체가, 때로는 몰트만신학 자체가 개혁신학의 전체 내지 개혁전통의 전체로 이해되는 경우이다. 개혁전통과 개혁신학은 어떤 면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신학을 본질적으로 공유하면서도, 루터와 차별을 보인 소위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인 츠빙글리, 부처, 칼빈을 출발점으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와 18-19세기 슐라이어마허를 거쳐서, 20세기와 21세기 초의 현대개혁신학자 바르트나 몰트만 등을 비롯하여, 현재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개혁교회 또는 장로교회의 신학과 삶을 총망라한 500여년의 전통 속에서 빛나고 있다. 우리는 각 시대와 각 신학자에게 나타난 개혁전통 각각을 500여년의 전통이라는 큰 틀 속에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빛에 비추어 공정하게 평가하여, 각 장점을 받아들이고, 각 단점을 보완하여 보다 바람직한 개혁전통을 21세기에도 계속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할 것이다.

 

Ⅲ. 칼빈의 ‘이중 은혜’(duplex gratia)

 

1. 구원론에서 신학 용어와 구조

 

(1) 시간적․단계적 순서와 신학적․논리적 순서

 

우리는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몇 가지 용어와 개념을 먼저 정리하여 신학적 혼동을 피하고자 한다. ‘구원론’은 구원의 은혜를 죄인에게 전달하는 것과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으로 회복되는 것을 다룬다. ‘구원의 순서 또는 서정’[선택, 소명, 칭의, 성화, 영화 등]’(Way of Salvation, ordo salutis, Heilsaneignung, Heilsweg)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진 구원의 객관적 사역(works)이 죄인들의 심령과 삶에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주관적으로 실현(적용)되는 과정을 서술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루터파 또는 개혁파)에서는 구원의 순서가 시간적․단계적으로 파악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의 경우, 구원의 순서는 시간적․단계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순서로써 신학적․논리적으로 이해되었다.

 

(2) 성화+중생 = 회개

 

일반적으로 예수를 영접하는 단 일회적 사건을 ‘중생’(회개)으로, 중생한 뒤에 성도 안에서 일생동안 계속적으로 거룩해지는 과정을 ‘성화(결)’로 이해되지만, 칼빈은 일생동안 거룩해지는 과정인 ‘성화’를 ‘중생’ 또는 넓은 의미의 ‘회개’로 이해한다. 그의 『기독교강요』(1559) 제 III권 제3장의 제목은 “믿음에 의한 우리의 중생, 회개”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을 개혁파 정통주의 용어로 바꾼다면, “믿음에 의한 우리의 성화(결)”가 될 것이다.

 

(3) 성화 → 칭의

 

구원의 순서와 관련해서 칼빈은 선택이나 칭의를 먼저 언급하지 않고, 개혁파 정통주의와는 달리 성화(결)를 제일 먼저 언급 한 뒤에, 칭의, 선택, 영화의 순으로 언급한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칭의를 약화시키거나 희생시키면서 선행과 성화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에 반대하여, 종교개혁 초기에, 특히 루터는 칭의를 강조함으로써, 루터 이후 종교개혁 제2세대에서는 성화와 윤리의 약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여기에 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판을 의식한 종교개혁 제2세대인 칼빈은 종교개혁신학에서는 칭의는 물론 성화와 윤리도 약하지 않다는 것을 로마 가톨릭교회의 논쟁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선택이나 칭의 보다도 성화를 먼저 언급하고 있다.

 

(4) 구원의 개관적 내용과 구원의 주관적 적용

 

구원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은혜(총)이며, 구원의 적용은 성령과 성령의 은사인 신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 밖에 계시는 그리스도’(Christus extra nos)가 어떻게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Christus in nobis)가 되는가? 그것은 성령과 신앙은 통해서이다. “우리가 신앙으로 이것을 얻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서 제시된 것, 즉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모든 사람이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을 볼 때 우리는 더 높은 견지에서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를 검토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띠는 성령이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신앙을 일으키는 것이다”. “성령은 신앙의 근원이며, 원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백성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들에게 불어넣으시는 이 독특한 생명을 바울은 악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적인 생명과 대조시킨다.” “신앙은 무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에 있는 것이다”. “신앙의 지식은 이해에 있다기보다는 확실성에 있다.” 칼빈에 의하면, 마음의 확신으로서 신앙을 무시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스콜라신학자들은 과오를 범했다.

 

2. 하나님의 ‘이중적 은혜’로서 칭의와 성화

 

(1) 칭의와 성화는 상호 동일하지 않고, 상호 구별되나, 상호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칭의’ (justification)는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이고, ‘성화’ (sanctification)는 ‘분여된 의’ (imparted righteousness) 또는 ‘효과적인 의’라고 불러진다. 칭의 속에서는 죄책이 제거되고, 성화 속에서는 죄의 얼룩이 지워진다. 칭의는 사람이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게 만들고, 성화는 사람이 하나님을 갈망하게 만든다. 칭의는 새 신분을 수여하는 반면, 성화는 사람 안에 새 성격을 창조한다. 칼빈의 경우, 칭의와 성화는 상호 구별되면서도, 상호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속에서 상호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신앙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인가?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동시에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 1:3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도 만드신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해체되지 않는 유대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지혜로 조명하신 사람들을 구속하시며, 구속하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며, 의롭다 하신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는 둘을 구별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두 가지를 다 포함하시며, 그 둘은 서로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선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서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둘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13) 주께서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시며 우리가 이 은혜들을 누리도록 하시는 방법은 그가 자기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뿐이므로, 그는 동시에 두 가지를 함께 우리에게 주신다. 한 쪽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쪽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행위와 떨어진 것이 아니면서도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이 사실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다는 것은 의에 못지 않게 거룩함을 포함한다.”

 

칼빈은 특별히 본질적인 칭의 개념을 가지고 칭의를 이해한 오시안더(Osiander)의 칭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루터처럼 칭의의 법정적인 개념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리스도를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이 그의 안에 있는 두 속성, 즉 의와 거룩하심도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오시안더가 두 가지 은혜를 혼동하는 데는 그와 비슷한 불합리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의를 보존하시기 위해서 값없이 의롭다고 간주하신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오시안더는 이 중생의 선물과 값없이 용납하심을 혼합해서 이 둘은 하나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면서도 따로 따로 기록하여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가 우리에게 더 잘 보이게 한다. 바울이 우리의 의와 성화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할 때(고전 1:30), 그는 불필요한 말을 붙이지 않는다.”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를 소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께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원칙적으로 이중 은혜(duplex gratia)를 받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무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됨으로써 우리는 하늘에 계시는 심판자 대신에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하게 된다. 둘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삶을 이루어 나가게 된다.”

 

(2) 중생(=회개+성화)

 

칼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성화’를 ‘회개’ 와 ‘중생’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나는(=칼빈) 회개(repentance)를 중생(regeneration)으로 해석한다. 중생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타락을 통해서 손상되고,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회복하는 것이다.” 깔뱅의 경우,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엡 4:24)”이다. “회개는 두 가지 부분, 즉 육의 죽임(mortificatio)과 성령을 통한 살림(vivificatio)으로 구성된다.” “회개의 열매는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생활 전체의 거룩과 순(정)결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은 중생에 의해서 아담 때문에 잃었던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게 된다. 이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 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싸움은 죽음을 통해서만 끝이 날 것이다. 신자들이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이 평생토록 달릴 수 있는 회개의 경주(競走)를 하게 하신다.”

 

(3) 칭의(稱義)

 

칼빈이 이해한 ‘칭의’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위(행동, 선행)를 통한 의’와 ‘믿음을 통한 의’의 차이를 잘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의 생활이 순결하고 거룩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의롭다는 증언을 얻을 만한 때는 그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또는 그 행위의 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그와 반대로 행위에 의해서는 의롭다는 증거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인으로 나타날 때- 신앙에 의해서 의로움을 받는다.” 칼빈은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칭의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칭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호의로 우리를 의로운 사람들로서 받아주시는 것에 대한 승인(인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칭의가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칼빈의 구원론에서 기독론과 성령론은 신앙론과 함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깔뱅은 구원의 순서를 시간적․단계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논리적․신학적으로 이해했다. 칼빈의 경우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의 ‘이중 은혜’(duplex gratia)로서 상호 동일하지 않고, 상호 구별되며,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내용으로 이루며, 칭의에서 법정적 개념이 중요하며, 칭의는 ‘행위를 통한 칭의’가 아니라, ‘믿음을 통한 칭의’다. 칼빈의 경우 회개와 중생은 상당히 포괄적 개념으로서 성화와 연관된다.

 

Ⅳ. 박형룡의 구원론

 

1. 구원론에서 신학 용어와 구조

 

박형룡은 “「구원론」(Soteriology)은 「구원함」혹 「구원」을 의미하는 헬라어 「소테이리오스」”로부터 파생되었으며, “교의학의 이 부분을 혹 「성령론」(Pneumatology)”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 부분에서는 구속(救贖)의 적용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구속의 적용은 성령(聖靈)의 사역(事役)인 때문”이라고 말하고, “성령의 사역에 의한 구속의 적용을 논하는 이 부분만을 구원론이라고 명칭함이 가장 적정(適正)하다.”라는 말로 그의 구원론을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는 박형룡이 구원론을 성령론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박형룡은 구원 순서 또는 서정을 순전히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순서로 이해한다. 구원서정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의 객관적 사역이 죄인의 마음과 생활에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다양한 행복들이 피택 죄인에게 적용되는 순서 혹 배열의 제시다. 이것은 구속 사역에서의 성령의 다양한 동작을 그 논리적 순서로, 또는 그 상호 관계에 의하여 묘사하기로 목적한다. 이 순서는 구원의 행복들이 명확한 시간의 선후에 따라 죄인에게 주어지는 듯이 순전히 시간적 의미로 이해될 것이 아니다.”

박형룡에 의하면, 구원의 순서를 말하는 양식(樣式)에서 16세기 신학과 후대신학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어서 구원 서정에 대한 기술 양식의 다양성을 보이면서도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유일 조성자(唯一造成者)”로 높이고, “구속의 적용을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은혜로운 의지”에 돌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박혁룡은 개혁신학과 성경주석의 논의를 통해서 구원 서정으로써 소명(召命), 중생, 회심(= 회개+신앙), 칭의, 수양(收養), 성화, 성도의 견인(堅忍), 영화(榮化)의 순서로 언급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주장한다. 박형룡은 소명을 외적 소명(vocatio externa)과 내적 소명(vocatio interna)으로 나누고, 비교적 중생에 대한 바람직한 정의는 ‘새 생명의 심음과 주관적 성향의 성화’이며, 회심은 회개와 신앙으로 구성되고, “수양”(收養)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하나님이 중생시키고 은혜의 상태에 유효적으로 부르신 자들은 그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최후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 상태에서 끝까지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 얻을 것이 확실하다는 교리이다. 영화는 구속의 적용의 최후 국면이다.

 

2. 칭의

 

박형룡은 “죄악한 인생에게 칭의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칭의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신약성경의 헬라어 동사 “디카이오오”는 히브리어 “「히츠띠크」와 같은 의미를 가지어 「사람을 의롭다고 선고함」을 가리킨다. 이 말은 사람의 윤리적 의(倫理的義)에 관설(關說)하지 않고, 재판적 혹 법적 결정의 결과인 의(義)의 신분(身分)에 언급한다.” 박형룡이 칭의를 정의할 때,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에드워즈, 하지(A.A. Hodge), 베르꼬프(L. Berkhof)의 정의를 직접 인용․나열만 한다. “또 조금 다른 말로 정의하면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하여 죄인에 관한 율법의 주장이 만족된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적 행위이다」(L.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 513).” 그는 칭의의 은혜적, 법정적, 선언적, 제정적(규정적), 즉각 완전 최종적 성격을 말하고, 칭의의 특징으로써 죄책의 제거, 일회적으로 우리의 밖에서부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재판, 의롭다고 선고하시는 주체가 성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박형룡은 칭의가 두 가지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칭의를 두 가지로 구별한다. “그리스도의 의는 첫째로 율법(律法)의 형벌을 만족시키고, 둘째로 행위 언약(行爲言約)에 적극적 조건들을 만족시켰으니 곧 율법의 교훈들에 순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의의 신자들에게 전가(轉嫁)는 첫째로 형벌의 보상과 죄의 용서를 취득하였고, 둘째로 신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언약이 성취되고 그것의 모든 약속들이 법적으로 시행된 자들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칭의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인정하심과 그들에게 영생 얻을 권리를 부여하심으로 구성된다. 이것을 구성하는 두 성분을 구별하게 되나니 곧 소극적 성분인 사죄와 적극적 성분인 영생권의 부여이다.” 능동적 또는 객관적 칭의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의 칭의이니 하나님의 법정(法廷)을 경역으로 단행된다(롬 3:20; 갈 3:11). 이것은 죄인 안에서 되는 주관적 칭의의 기초이니,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에 관하여 하나님이 행하시는 의의 신분의 제정과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동적 혹 주관적 칭의는 죄인의 심정(心情) 혹 양심(良心)을 경역으로 하여 행해지는 것이다.”

 

박형룡은 칭의의 시점(時點)과 관련하여, “영원부터의 칭의”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의 칭의”를 성경주석적, 신학적 논의를 통해서 전적으로 거부하고, “신앙으로 칭의”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칭의는 죄인이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수납하는 때에 이루어진다. 죄인의 신앙이 있기 전에 그의 칭의가 있을 수는 없다.” 칭의와 신앙의 관계에서, 신앙은 칭의의 원인(“때문에”)이거나 공로적인 무엇이 아니라, 도구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앙으로 칭의”에 대한 술어적 표현을 중심으로 박형룡은 칼빈 등이 이해한 기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으로써 신앙, 이용기관(利用器官, appropriating organ)으로써 신앙, 없을 수 없는 조건(conditio sine qua non)으로써 신앙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신앙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객관적 주관적으로 이용한다는 이중 의미에서 이용 기관이라 칭할 만하다.”라고 말한다. 박형룡에 의하면,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칭의의 근거는 소극적으로 인간의 미덕이나 선행이 결코 아니라, 칭의의 근거는 적극적으로 죄인에게 전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의가 어떻게 전가되어 우리의 것이 되는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회계되어 이것이 당연히 받을 법적 결과를 그가 받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돌려짐이다.” 전가에서 우리의 회계로 넘어 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한 용서와 수납의 결과를 받을 권리이다. “전가의 기초는 우리의 그리스도에게 연합함이다. 이것은 다만 그가 완전한 사람, 우리의 대표인 사람이 되신 때문에만 아니라, 또한 그 안에 우리의 신비적 연합(神秘的聯合)이 있는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법적 머리(元首)도 되시고, 영적 머리도 되시는 고로 우리의 죄가 그에게 전가되고,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정당하다.”

 

3. 성화

 

박형룡이 구원 서정에서 칭의와 성화 사이에 두고 있는 “수양”(收養)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을 말한다. “수양은 은혜의 사역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양자(養子)되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 수 있으며 자기의 자격(子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박형룡에 의하면, “거룩과 성화의 개념은 신약에서도 구약과 다를 바가” 없지만, “구약에서 신약에로 건너가면 현저한 차이를 의식하게 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과 동등에 선 자가 없으나 신약에서는 거룩이 하나님에게 드물게 돌려졌다.” 하나님의 위엄적 거룩성은 윤리적 거룩성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에, 인간의 윤리적 거룩성은 “단순한 도덕적 단정(道德的端正)만이 아니며, 성화는 단순한 도덕적 개선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일이다. … 성경은 단순한 도덕적 개선(道德的改善)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관계된, 하나님의 연고로, 하나님의 봉사를 위하는, 도덕적 개선을 교훈하는 것이다. 즉 성경은 하나님과 관계된 성화를 역설한다.”

성화의 필요성은 자기의 백성을 자기와의 사귐에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엄숙한 명령에서 따라온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명령에 순종할 의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신자 안에 있는 죄를 억제하며 극복함으로써 장래의 완전한 거룩을 준비하기 위하여 성화의 은혜와 노력이 요구되며, 신자 안에 죄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내면적 투쟁을 일으킬지라도 그 안에 성화의 생활은 실재성을 갖는다.

박형룡은 성화를 개혁전통의 신앙고백과 하지(A.A. Hodge)와 베르꼬프의 정의를 직접 인용하여, 나열한다. “「성화는 성령이 이로써 칭의된 죄인을 죄의 더러움에서 구출하시며, 그의 온 성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更新)하시며, 그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할 만하게 하시는 은혜롭고 계속적인 공작이다」.”

성화의 특징과 관련하여 성화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새 사람의 창조인데, 이 두 가지는 계기적(繼起的)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同時的)이며, “신체와 영혼, 지 정 의(知情意)를 포함하는 사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성화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하며, 신자의 영혼은 죽음 순간이나 직후에, 신체는 부활 시에 성화가 완성된다.

특별히 박형룡은 성화의 주체로서 성령 자체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성령이 사용하시는 성화의 다양한 방편 내지 수단을 강조한다. “신자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성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함이 필요하다. 성화를 조성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살전 5:23). 특별히 성령이 성화를 조성하신다. 그리고 그의 성화의 공작의 양식은 신비하여 헤아릴 수 없다.” “성화는 3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우리는 성화가 전적으로 성령에 의뢰한다는 것을 명심함이 가하다. 사람의 영적 발전은 인적 성취가 아니라, 신적 은혜의 사역이다. 우리는 물론 사람의 활동이 성화의 과정에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말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기구적(器具的)으로 이 일에 공헌하는 것뿐이니 아무 공적도 인정받을 것이 없으며 의뢰할 바 아니다.” “성화에서 성령의 공작은 신비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죄의 오염으로부터 진보적으로 정화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서 더욱더욱 변화됨에 의뢰하는 성령의 내주와 사람의 심력(心力)들 위에 행하시는 감화의 양식을 알지 못한다.” 박형룡은 성령께서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중요한 몇 가지 방편을 소개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묵상과 하나님의 섭리적 지도 등을 거론한다.

 

박형룡은 성화의 칭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성화는 칭의와 나눌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 둘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할 것이나 결코 분리되지 못할 것이다. 칭의는 성화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화됨은 우리가 칭의된 때문이요, 우리가 성화된 때문에 칭의 되는 것이 아니다. 은혜 언약에서 칭의는 성화보다 앞서서 성화의 근거가 된다. 행위 언약에서는 의와 거룩이 이와 정반대의 순서를 취하였던 것이다. 칭의는 성화를 위한 재판적 근거다. 성화가 하나님의 무상 은혜에 탁월이 의뢰하는 칭의를 근거로 하여 서는 사실은 우리가 성화로써 어떤 공로를 세운다는 관념을 제외한다.”

박형룡은 특히 공로의 근거로서 선행에 대한 상(賞)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선행에 대한 상을 주장한다. “진리를 말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한편으로 행위와 상 사이에 적응(適應)이 있음이 주장하여야 되고 다른 편으로 선행에 생길 수 있는 공로마저 부정하여야 한다. 로마 교회에 의하면 이것은 역리적(逆理的)이며 자가 모순적(自家 矛盾的)인 해결이다. 그러나 개혁파 신도게요들에 의하면 이것은 성경적 전도(聖經的 傳道)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way)이다. 신자들의 영생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한 것이니 은혜로 얻음이 분명하고, 영생에 추가하여 받는 상은 선행에 기초하나 그 구경적(究竟的)인 기초는 역시 은혜요, 선행을 장려하기 위한 위안(慰安)을 포함한다.”

 

Ⅴ. 칼빈과 박형룡의 비교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중심으로 칼빈과 박형룡의 구원론을 상호 비교해보면, 아래와 같은 상호 유사성과 차이점이 발견된다.

 

① 칼빈과 박형룡은 모두 구원론을 성령론 속에 정초시킨다.

 

② 칼빈과 박형룡은 모두 구원 순서(서정)를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지 않고, 논리적 순서로 이해한다.

 

③ 칼빈과 박형룡에게서 공히 ‘이중 은혜’는 상호 구별되나, 상호 분리되지 않고,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④ 칼빈과 박형룡의 구원론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주도권이 나타난다.

 

⑤ 칼빈과 박형룡의 성화 개념 속에 “옛 사람의 죽임”과 “새 사람의 살림”의 사상이 강하게 나타난다.

 

⑥ 칼빈과 박형룡에게서 칭의는 ‘행위를 통한 칭의’가 아니라, ‘신앙을 통한 칭의’이며, 여기서 신앙은 칭의의 원인이 아니고, 도구적으로 이해된다.

 

⑦ 칼빈과 박형룡의 칭의에 나타난 중요 개념은 법정적(forensic) 개념이다.

 

⑧ 칼빈과 박형룡이 이해한 성화는 지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 완전히 완성되지 않는다.

 

⑨ 칼빈이 이해한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구성되고, 박형룡이 이해한 칭의는 죄의 용서와 영생권의 획득으로 구성된다.

 

⑩ 칼빈은 구원 서정을 중생(= 회개+성화), 칭의, 선택, 영화 등으로 배열하고, 박형룡은 소명(召命), 중생, 회심(= 회개+신앙), 칭의, 수양(收養), 성화, 견인(堅忍), 영화(榮化) 등으로 배열한다. 칼빈이 중생을 칭의 보다 먼저 기술한 것은 그가 처했던 시대 상황에서 일어난 변증적 이유 때문이었다.

 

⑪ 칼빈의 경우 중생은 성화보다도 더 포괄적인 개념인 반면, 박형룡의 경우 중생은 매우 제한적이고도 좁은 개념이다.

 

Ⅵ. 결론

 

‘개혁전통’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신학을 공유하면서도, 루터 전통과 차별화되고, 개신교(= 기독교) 전통에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삶으로서 500여년의 전통 속에서 빛나고,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성령의 조명 하에 검토하여, 보완하고, 계승․발전시켜야 할 전통이다.

우리는 칼빈의 주저 『기독교강요』(1559)에 근거하여, 칼빈의 이중 은혜를 중심으로 그의 구원론의 신학 용어와 구조를 살피고, 이중 은혜를 살펴보았다. 또한 우리는 박형룡의 구원론을 그의 주저『교의학 V』에 기초하여 그의 이중 은혜를 고찰하였다. 특히 구원 서정에 대한 분류에서 박형룡이 더욱 섬세하고, 칼빈은 덜 섬세하였고, 칼빈은 더 변증적이었고, 박형룡은 더 조직신학적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이중 은혜에 대한 이해는 본질적으로 거의 같았다.

박형룡의 구원론의 내용은 베르꼬프(L. Berkhof)의 구원론에 가장 접근하고 있는데, 다만 구원 서정 부분에서 박형룡은 ‘수양’(收養)을 도입하고, 베르꼬프는 영화를 생략한다. 그러나 박형론의 성화론과 베르꼬프의 성화론에서 가장 큰 차이는 박형룡은 성화의 주체자로서 성령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박형룡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큰 차이점을 보여준다. 박형룡은 일반적으로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의 약점들 중에 하나인 성령의 약화를 잘 극복하고 있다. 우리는 칼빈 처럼 그를 ‘성령의 신학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성령의 신학자가 될 수 있었던 두 가지 가능성, 즉 신앙체험과 신학연구를 억측해본다면, 전자의 경우, 선교 초창기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겪었던 영적 신앙체험이며, 후자의 경우, 성경연구 및 성령을 강조한 개혁교회 신앙전통(칼빈, 아브라함 카이퍼, 베르까우어 등)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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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 과제]

 

1.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를 간략히 설명하라.

2. 일반 은혜의 내용들은 무엇인가?

3. 오순절 성령 강림(행 2장)의 의미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4. 성령 세례는 무엇이며, 언제 이루어지는가?

5. 성령 충만의 방법은 무엇인가?

6. 개혁 신학에서 보는 구원의 단계들을 열거하라.

7.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을 간략히 설명하라.

8. 신비적 연합이란 무엇이며, 그 성경적 증거들을 들라.

9. 중생(重生)의 의미와 성격을 간략히 논하라.

10. 중생관에 있어서 개혁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의 차이점은?

11. 중생의 증거는 무엇인가?

12.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견해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13.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않는다’는 말씀(요일 3:9)의 바른

뜻은 무엇인가?

14. 중생한 자가 범죄 해도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가 무효화 될 수 없다

고 보는 이유가 무엇인가?

15. 유아 때 죽은 영혼들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 간략히 논하라.

16. 회개의 세 가지 요소들은 무엇인가?

17. 회개의 성격을 간략히 서술하라.

18. 회개의 중요성을 간략히 말해보라.

19. 천주교회의 고해 성사는 왜 잘못인가?

20. 잘못된 믿음을 세 가지 들어보라.

21. 믿음에 대한 알미니우스주의의 잘못은 무엇인가?

22. 믿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라는 증거 구절들을 들라.

23. 믿음의 세 가지 대상들을 열거하라.

24. 믿음의 세 가지 요소들을 열거하라.

25. 구원을 위해 필요한 믿음의 지식의 분량은 어느 정도인가?

26. 칭의(稱義)의 성격을 간략히 논하라.

27.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28.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야고보의 가르침은

어떻게 바울의 가르침과 조화되는가?

29. 신자의 양자(養子)의 근거가 무엇인가?

30. 신자의 양자의 특권들을 열거하라.

31. 성화(聖化)가 무엇인지 중생과 칭의와 비교하여 간략히 설명하라.

32. 성화의 동기가 무엇인가?

33. 성화의 성격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34. 선행과 상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35. 성도의 견인(堅忍)이란 무엇인가?

36. 성도의 견인을 가르친 성경 구절들은 무엇인가?

37. 성도의 견인을 지원하는 주요한 교리들은 무엇인가?

38. 신자의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간략히 논하라.

39. 성도의 견인 진리와 배교의 경고 구절은 어떻게 조화되는가?

40. 영화(榮化)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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