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8 13:55

치유 상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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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상담학

 

제1장 성령과 기질

 

‘우리의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타고난 기질만큼 묘한 것도 없다. 눈송이의 모양이 천태만상을 이루듯이 인간은 이 기질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구별되고 그 사람 나름의 특징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좌우 하는 근원으로써 잘 훈련되고 조절되지 못할 때 그의 정상적이고 건설적인 인품까지 비정상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인간의 기질에는 강하고 약한 면이 있다. 누구나 강한 면만 생각하고 싶겠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약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본래의 강한 면을 살리고 약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셨다.

▶ 기질(氣質:temperament) : 타고난 성품의 결합체, 유전학적으로 국민성, 인종, 성별, 그 외 어떤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 형성

▶ 성격(性格:character) : 앞에 말한 기질 + 어렸을 때의 훈련, 교육, 근본적 태도, 신앙, 원칙 등이 가미되어 형성됨. 곧 닦이고 훈련된 기질

인격(人格:personality) :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표면에 나타나는 태도.

네 가지 형태의 기질 :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체내에 있는 네 가지 체액 - 혈액, 황색담즙, 흑색담즙, 가래 - 에 비유하여 네 가지 기질의 이름을 정하였는데 다혈질(활발한 기질), 담즙질(활동적인 기질), 우울질(어두운 기질), 점액질(느린 기질)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질이 어떤 형태인지 파악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잠재적 능력과 약점들을 연구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힘을 통해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네 가지 형태의 기질에 대해 발표하고 연구하는 일은 자칫하면 위험한 공부가 된다. 친구들에 대해 분석적인 태도로 나아가려하고 "그 아이는 어떤 타입의 아이지?" 하는 생각을 갖기 쉽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비도덕적이고 위험한 일이다. 우리의 연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데에만 사용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단점과 약점을 이해하는 데에 사용되어서는 안 되겠다.

 

1. 다혈질

1) 장점 : 다혈질보다 더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자기주위 사물에 대해서 어린애 같은 호기심을 항상 품고 있으며, 환경으로 인한 감정이 예민하여 불쾌했던 일도 환경이 바뀌면서 곧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생기가 없거나 발랄하지 못할 때가 극히 드물며 웬만한 환경에선 항상 휘파람을 불거나 노래를 부르며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이다. 권태라는 단어는 그에게서 먼 단어이고 권태를 느끼기 전에 그는 이미 재미있는 일로 돌아서곤 한다.

그는 지나간 일을 쉽게 잊어버려 과거에 골치 아프고 복잡했던 문제들을 머릿속에 남겨두는 법이 없다. 또한 미래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므로 다가 올 곤경에 대해서도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질 않는다. 그저 현재에 따라 살기 때문에 낙관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사소한 일에도 희열을 느낀다. 그는 쉽게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그의 풍부한 정열은 때로 다른 사람까지도 그의 일에 함께 참여하게 하곤 한다. 그는 서로의 슬픔과 기쁨을 나누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친구 사귀기를 또한 좋아한다.

그는 사람을 좋아한다. 부드러움과 동정심이 많은 것은 다혈질의 훌륭한 재산중의 한가지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혈질보다 더 순수하게 대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좋고 나쁜 기분을 함께 나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라"는 명령을 그는 쉽게 지킬 수 있는 성품이다. 특히 의사인 경우 그는 훌륭한 태도로 환자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다혈질 사람의 엄숙한 태도는 가끔 타인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때가 있다. 다혈질의 감정이 너무 급속도로 변환하기 때문이다. 다혈질은 누구보다도 더 당신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다. 세상은 이러한 쾌활하고 반응이 빠른 사람들로 인해 재미있게 된다. 하나님에 의한 훈련과 동기가 주어진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다.

2)약점 : 다혈질의 끝없는 활동은 사실 자세히 보면 휴식 없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비실제적이고 무질서할 때가 있다. 그의 감정은 쉽게 그를 흥분시켜서 일의 전체를 심각히 분석해보기도 전에 그릇된 방향으로 이미 일을 진전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침착치 못한 성격 때문에 좋은 학생이 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성질은 그의 신앙생활에도 나타나 정신을 집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이 퍽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의 불안정한 활동상태가 일생 동안 계속될 때 그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자기의 잠재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때로 그의 생활은 극에서 극으로 움직이며,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하면 끝내 열매 없는 생애를 보내게 될 것이다. 다혈질은 항상 박력 있고 동적인 성격에 따라 행동한다. 이런 태도가 때론 그의 약점을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의지가 약한 점과 세련된 면이 부족 하다는 것이다. 그는 일은 곧잘 시작하면서 끝마무리를 제대로 못 맺는 위인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 내에서 주일학교의 반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있을 때 그의 즉각적인 대답은 "예"이다. 자신의 시간문제, 능력, 그 외의 여러 가지 책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일은 그의 일이 아니다.

자기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몇몇 사람의 앞잡이로 훌륭히 일을 하고 있지만 그 그룹의 일을 조직적으로 한다는 것은 어렵다. 고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기의 약속과 결실과 책임들을 쉽게 잊는다. 그에게서는 정확한 시간 약속 이행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의 약한 의지가 가장 위험한 결과로 나타날 때는 그의 도덕관이 주위의 환경과 동료들에 의해 변할 때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결실하는 사람이 아니고 충성스러운 사람도 아니다.

쾌활한 성격과 대인관계로 인해 동료들 가운데 일찍 사회적으로 훌륭한 지위에 앉게 되는데 여기서도 역시 그의 타고난 개인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대화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일들에 대해 혼자 떠들게 되고, 남들도 모두다 그 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극단으로 흐르다가 주위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 일쑤다. 다혈질은 감정적 불안정성 때문에 쉽게 용기를 얻는 반면에 자신의 약점을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성격이 온화해도 화를 버럭 내는 경우가 있고 한번 폭발한 후에는 그것에 대해 잊어버린다. 곧 사과도 잘한다. 남에게 쉽게 상처를 입히고는 자신은 건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다혈질은 똑같은 일에 대해서 여러 번 후회하고 고백하는 버릇이 있다고 보겠다. 다혈질처럼 육욕의 유혹을 많이 받는 사람도 없다. 그는 정서적으로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에 다른 타입의 사람보다 쉽게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이 유혹에 더 많은 생각을 쏟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성령께 간구해야 할 것은 "절제"와 "자제력"이다. 다른 세 가지 천성과 마찬가지로 다혈질도 가장 긴급하고 큰 문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다혈질의 대표적인 인물은 베드로이다.

“다혈질은 방안에 들어 올 때도 입부터 들어온다.”켄 포어 목사님의 말이다.

 

2. 담즙질

1) 장점 : 담즙질은 의지가 강하고 독립적이며, 자신의 능력을 크게 신뢰하는 편이며 투쟁력이 강하다. 항상 활동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계획은 다혈질의 계획과 달리 조직적이고 실용적이고 의지가 있는 것이다. 한번 시도했던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목적을 향해 줄기차게 밀고 나가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이번엔 이 한 가지 일만 해 봐야지"하는 식으로 일에 골몰한다. 복잡한 계획대신 단순한 계획 하에서 그는 그 일을 성취하고야 만다. 그의 성공의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훌륭한 계획보다도 『결단력』 과 『일에 대한 집착력』때문이다.

담즙질의 기질은 어느 면에서 보면 생활의 실제적인 면에 너무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물은 실리성(實利性)을 기준으로 다루고, 자기가 가치 있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단체적인 일에 대해선 무척 호감을 갖고 참여하고자 하지만 실무적인 일에서는 실증을 느낀다. 예민한 관찰력이 있어 순간순간의 상황을 파악하고 가장 실질적인 방법으로 그 일을 해결해 내는 능력도 있다. 담즙질의 소유자가 의사라면 특별히 긴급환자들을 잘 돌볼 수 있다.

그가 내리는 결정들은 이성적인 분석보다는 직감에 의한 경우가 많다. 담즙질은 원래 "지도자적인 자질"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강력한 그의 의지는 그룹을 이끌기에 충분하고 모든 사람들의 훌륭한 판단 자가 되며, 긴급사태에는 빠르고 대담한 태도로 일을 처리한다. 지도자로 임명되면 곧 이를 수락하거니와 때로는 자진해서 일을 맡고 나서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가끔『모든 일을 떠맡는 사람』으로 불리 운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거만하게 대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를 협조할 것이다.

담즙질 역시 천성적인 자기 신뢰로 인해 항상 『낙관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또한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기 위해서 자기의 안전한 환경까지도 기꺼이 떠날 만큼『모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남보다 앞장선 사고방식을 가지고 앞서간다. 어떤 일의 상황을 평가할 때에도 그는 도중의 함정과 잠재되어있는 문제점을 보지 않고 오로지 목표에만 중점을 둔다.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역경은 그를 실망시키지 못하고 그는 도리어 역경을 통해 그 일을 꼭 완수해야겠다는 욕망을 더욱 갖게 된다.

2) 단점 : 담즙질에게도 큰 약점이 있다. 가장 큰 것으로는 그의 "딱딱함과 화를 잘 내는 것과 성급하고 오만"한 점이다. 담즙질은 감정적으로 너무 무딘 사람이다. 그는 동정심 같은 것에 대해 감상적인 쓸데없는 짓이라고 멸시하기도 하며, 그는 뻔뻔스러운 행동을 많이 한다. 그는 급한 성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곧잘 화를 내며, 한번 화를 낸 후에는 그가 불쾌하게 느꼈던 일에 대해『계속 원한을 품는』버릇이 있다. 심한 복수심 때문에 실제로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다시 보복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사람이다.

이렇게 분개하는 성질은 그의 생활을 편안치 못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바람직한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한다. 육체적인 병으로는 40세 이전에 위궤양으로 고생하게 되는 수가 많고, 영적인 병으로는 분노와 화를 내는 일로 성령을 거스른 일이 많다. 담즙질에는 묘한 "잔인성"이 있어 자기의 목적성취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권리를 무단히 무시하고 짓밟는 경향이 있다. 그에게 강한 도덕적 기준이 제시 되지 않는 한 성공을 위해서는 법률을 어기거나 어떤 교활한 방법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많은 몰염치한 죄수들과 독재자들이 이 담즙질 타입의 사람들이었다.

담즙질의 강한 결단력은 또한 너무 강렬할 때가 있어 오히려 골치 아픈 문제 또는 나중에 그가 후회할 과격한 문제에 그를 몰아넣곤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완강하게 이런 문제들에 대해 끝장을 보고 만다. 그가 사과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많은 경우 인정이 없고 퉁명스럽고 또 냉소적인 말을 냉정하게 내뱉는다. 남에게 동의하는 것도 그에겐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가 결혼할 때 그의 배우자가 갖는 가장 큰 문제도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마 자제력을 발휘하여 자기 아내를 때리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더 잔인한 방법으로 아내를 다룰 것이다.(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

담즙질의 강한 독립심과 자만심은 그로 하여금 "거만한"사람이 되게 한다. 어떤 일에 좀 성공하기만 하면 그는 매우 거만하고 그 일에 대해 세도를 부려 드디어는 불쾌할 정도에까지 이른다. 그가 여러 가지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의 이러한 불쾌한 성품은 그에 대해 주위의 사람들이 실증을 느끼게 하고 또한 그들에게 "우리는 저 사람의 비위를 맞출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한다.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저지른 나쁜 행동보다도 성공 그 자체를 더 좋은 일로보고 거기에만 중점을 둔다.

그는 어린나이가 아니면 어른이 된 이후 신앙을 가지기 힘들며,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에도 주님을 의지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기가 몹시 어렵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려고 할 때 그의 마음은 곧잘 그날의 계획을 세우는 일로 꽉 차고 그가 성령에 깊이 감화되고 초자연적인 힘을 체험해보지 못하는 한 규칙적인 예배시간은 쓸데없고 시간낭비인 것처럼 생각 될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담즙질은 사도 바울이다.

 

3. 우울질

1) 장점 : 다른 어떤 기질보다도 가장 풍만하고 예민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다른 기질에서 보다도 더 많이 그리고 깊숙이 감상하며, 또한 예술에도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정서적으로 예민하나 다혈질과는 달리 자기의 감정을 통해서 심사숙고하는 사람이다.

우울질의 소유자는 창작적인 추리에도 능란하여 한창 상상력이 활발할 때는 가치 있고 건전한 창작물을 내기도 한다. 그는 또한『완전주의자』로서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훌륭함"의 기준을 두고 있으며, 어느 분야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그의 포용력은 다른 사람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앞으로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며, 과거에 이루어진 일들과 결정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만약 기회가 새로이 주어진다면 좀 더 훌륭히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울질의 "분석력"은 그의 완전주의자적인 성품과 합성되어 일의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하는데 능력이 있게 하였다. 다혈질이나 담즙질 같은 사람으로부터 어떤 기획이 제안되면 우울질은 그것을 즉시 분석하여 그들이 당면하게 될 여러 가지 숨은 문제들을 골라내곤 한다. 그래서 그는 때로 그가 분석해서 나온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그 일을 반대할 경우가 많은데 이 문제들이라는 게 그에게는 퍽 중요한 것이다.

그의 분석적인 능력과 태도로 보아 그에게는 "수학", "이론적인 과학", "의학", "건축학", "철학", "창작문학", "그 외 면밀한 것을 요하는 일"이 적합하다. 다행스럽게도 우울질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충성스러워지려고 일부러 애쓸 필요가 없다. 그 기질자체가 "충성스럽기"때문이다. 우울질은 다혈질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사귀려 들진 않지만 한번 사귄 사람은 문자 그대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정도로 그 친구들을 포용한다. 어떤 일을 주어진 시간에 끝까지 이끌고나가서 완성시켜 놓은 일에서는 그를 언제나 신임해도 좋다.

우울질은 앞에 나서서 일하기보다는 뒤에서 하는 일을 더 좋아한다. 때로는 지극히 희생적인 직장을 택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는 자기 동료들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그의 강렬한 욕망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자기 능력의 한도를 잘 알아서 자기가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일은 맡지 않는다.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자진해서 발표하려하지 않고 덮어두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견을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의 독특한 의견을 발표하며, 다혈질처럼 함부로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자기의 의견을 발표 하는데 에는 꽤 야무지다.

2) 단점 : 우울질은『자기중심적』이다. 할레스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어떤 타입의 사람들보다도 가장 자기중심적이다. 항상 『심사숙고』하고 『반성』을 하는 형인데 그의 이런 성품은 오히려 그의 의지와 정력을 마비시켜 버린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과 자기의 정신적인 상황을 해부하고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자신을 한층 두층 계속 벗겨 마침내는 그의 생활에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운 면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오로지『영구한 자기반성』만 남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자기반성은 이익이 못되고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우울질은 병적인 정신 상태에 빠져 들어갈 때가 많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관심을 갖는다. 접하는 문제마다 그에게는 큰 문제로 보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우울질은 유난히 쉽게 우울증환자가 된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그의 예민한 성격과 합해져서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언행을 가끔 저지르게 한다. 그는 기분을 자주 변동하는 자로 문자 그대로 "감정을 항상 팔에 걸고 다닌다." 때로는 곧잘 남을 의심하여 좋지 못한 방면으로 계속 상상한다. 만일 어떤 두 사람이 소곤소곤 얘기하는 것을 보면 그는 대뜸 그들이 자기에 관해 얘기한다고 단정한다. 이런 생각은 심한 경우엔 남을 변태적으로 냉대하고 박대하는 콤플렉스를 나타낸다. 우울질은 그의 완전주의자 적이고 분석적인 성품 때문에 비관적인 사람이 된다.

그는 목적을 내다 보기도하지만 도중에 생길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비관적이기 때문에 우울질은 어떤 일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자기가 생각하는 "완전"이라는 기준에 미달 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면에선 우울질을 따를 사람이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최선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들을 영접 하지 않는다. 많은 완전주의자들이 그들의 배우자가 그들이 기대했던 바의 90%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행복했던 결혼생활을 파괴했다. 자그마한 실수도 그의 완전주의자라는 안경을 통해 모두 드러나게 되어 그는 "많은 좋은 점을 보는 대신에 나쁜 점을 과장해서 보게"마련이다. 결혼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는 최종적인 결정을 못 내리고 주저할 때가 있다.

멀리서 여자를 보고 이상화시켜 그 여자와 사귀게 되면 그녀가 아무리 아름답게 생겼을지라도 역시 단점을 지닌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바로 그 단점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기를 주저한다. 기분의 변화에 있어서도 우울질을 따를 사람이 없다. 시시때때로 고조된 감정에 빠져 있곤 한다. 또한 우울질의 변덕스러움은 때로 좋지 못한 일을 발생시키는 요인이 된다. 즉, 그가 정상적으로 활동할 때 그를 좋아했던 사람들도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심한 우울증에 빠져있을 땐 그를 싫어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우울질을 피하게 되고 우울질은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아채고 더욱 우울하게 된다.

이 한 가지 사실은 능히 우울질의 전 일생을 망치고도 남음이 있다. 만일 그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만 말이다. 우울하고 감정이 쉽게 변하는 우울질타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고 위대한 사명을 어깨에 짊어진 채 자기 자신보다 남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며 좋은 목적을 지니고 살아나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잘 알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우울질의 특성을 들자면 그의 "보복심"이다. 그에겐 모욕을 용서 해 주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는 표면상으로 볼 때는 조용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마음속으로 격렬한 증오심과 불길 같은 적의가 있다. 담즙질처럼 직접 행동으로 옮기진 않겠지만 수년간을 이런 증오심과 보복 감을 품은 채 지낸다.

이렇게 남을 용서해 주지 못하는 성품과 보복하려는 그릇된 욕망은 때로 그의 훌륭한 자질을 지배하여 자질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편견에 근거를 둔 결정을 하게끔 한다. 우리는 우울질의 장 ᠊ 단점을 모두 보아왔다.

한 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여기서도 나타나는데, 즉 매우 훌륭한 장점과 잠재능력이 있는 천성에는 또한 가장 큰 단점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평범한 우울질』은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울질은 자기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여 동료들보다 우수한 위치에 서든가, 그렇지 않으면 약점으로 인해 신경질과 수심에 뒤덮이고, 자신을 즐기지도 못하고 남을 즐겁게도 못하는 우울증환자가 되어 동료들보다 열등한 위치로 떨어지게 된다.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뛰어난 인물들이 심한 우울질타입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우울질의 소유자들은 큰 위안을 받아야겠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와 솔로몬, 사도요한, 모세 등이 우울질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성경의 그 인물들은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공할 수 있었음을 알아야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자기의 타고난 성품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애를 보낼 수 있게 한다.

 

4. 점액질

1) 장점 : 점액질의 거침없는 "유머"는 그가 어떤 일을 신중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는 세속적인 일에서 재미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시치미를 떼고 하는 그의 거친 듯한 유머가 다른 사람들을 곧잘 웃기는 것을 보면 그는 유머와 상상력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의 기질은 "카운슬러"가 되기엔 안성맞춤이다. 다혈질이나 담즙질 같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고민을 오랫동안 앉아 듣지 못하는 반면에 느리고 태평스러우면서 유연한 점액질의 태도는 그로 하여금 남의 얘기를 다 들을 수 있게 한다. 또한 자기 자신과 고민을 말하는 사람과 늘 동일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듣는다. 그리고는 충고의 말을 불쑥 쏟아 내 놓는 게 아니고 차근차근 대화를 나눈다.

점액질의 경우, 그의 명랑하고 훌륭한 성품뿐 아니라, 그의 책임감과 시간적 계획을 잘 지키는 면에서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우울질처럼 이 사람은 퍽 충실한 친구가 될 수 있고 친구에게 완전히 빠지지는 않지만 불충실하게 대하지도 않는다. 점액질도 역시 실제적이며 능력 있는 사람이다. 그는 생각 하는 데에 많은 정력을 소비하므로 그 결과 어떤 일의 상황을 잘 분석할 수 있게 한다. 그는 기분에 따라 즉흥적인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닌 반면에 적은 노력을 들여 일을 완수할 실제적인 방법을 찾는 사람이다. 그는 괴로움 속에서도 일을 잘한다.

실제로 그는, 다른 사람들은 꼼짝 못할 환경에서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한다. 그의 일의 결과는 항상 훌륭하고 깨끗한 결과가 된다. 비록 완전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도 역시 꽤 높은 수준의 정확성과 정밀성을 지니고 있다. 항상 바쁘고 크나큰 일을 하면서도 그의 책상이 항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능동적이고 소란스런 성품의 사람들은 항상 놀라게 마련이다. 그러나 점액질은 모든 것을 적재적소에 놓고 일하면 훨씬 쉽고 시간도 절약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 한마디로 말해 정돈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 단점 : 점액질의 가장 큰 단점은 "게으름"이다. 가끔『발을 질질 끄는 상태』로 나타나는데, 그는 자기 의사와는 반대로 자극을 받아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며 가능한 한 느리게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목적 없는 그의 생활은 "방관자"의 생활이고, 될 수 있는 한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이런 성품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고 있고 또 능히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의 인도자가 되지 못한다. 그에겐 모든 일이 오로지 "너무 지나친 일"로 보이는 모양이다. 다혈질의 불안정성과 담즙질의 활동은 그를 시시때때로 괴롭힌다.

점액질은 그들이 그를 자극시켜 일을 하게 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점액질은 또한 "이기심"이라는 단점을 보이기도 하는데 해가 거듭할수록 자기 자신을 옹호하려는 본능 때문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어떤 일을 변경하려고 "심한고집"을 부릴 때가 있는데 이는 자기가 그 일에 너무 휩쓸려 들어갈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에너지를 아끼는 면에서 보수 적이기를 원한다. 점점 성장하면서 그는 더욱 고집이 많아지지만 그의 태평스런 유머로 자기의 완고한 점을 감출 수 있게 된다. 주위사람들의 계획과 활동에 가담하기를 강요받을 때마다 그 일이 제대로 되어가지 않는 것이라면 그는 더욱 거절하는 태도를 취하며 그 일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의 이런 완고성은 결코 그를 "인색하고 이기적인"사람으로 만든다. "이것은 얼마의 비용이 들까?" 혹은 "이것은 내게서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를 항상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기심"은 점액질에 있어 정말 큰 문제다.

점액질에겐 해가 갈수록 더 결단력이 약해질 수 있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일에 가담할 것인가에 대해 선뜻 나서지 않는 성질 때문이다. 그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마음 사이에서 늘 동요한다. 그의 결단력 없는 태도는 곧 뿌리 깊은 습관이 되어 그의 장점 즉 실용적인 태도를 능가해 버리기까지 한다. 그의 실제적인 관점과 조용하고 분석적인 태도는 때로 어떤 일에 대한 더 좋은 해결방법을 고안해내지만, 그가 그 일을 시작하려고 할쯤에는 이미 다른 활동가가 그 일을 계획하고 그룹을 조직하여 움직이기 시작 했을 때이다.

그렇지만 점액질은 마음속에 자기계획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만 "부분적으로"가담하려한다.

아브라함은 전형적인 점액질이다.

 

⊙ 정리 : 위의 네 가지 기질의 여러 가지 변화가 이 세상을 움직여나가고 있다. 어느 것도 다른 성품보다 더 낫다고는 할 수 없다. 모두가 그것대로의 장점을 갖고 있어 사회에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각 기질이 지닌 장점은 그 기질을 매력적으로 만들며 우리도 모두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한다. 그런데 얘기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장점이 중요하듯이 우리가 지닌 약점도 중요하다. 어느 면에서는 더 중요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분석해 보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 그리고 그 약점은 보완되어야 하고 개선되어야한다.

 

5.약점을 극복하려면

우리가 이런 기질에 대해 공부하는 근본 목적은 우리 안에 있는 장점을 잘 활용하고, 단점을 극복 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함이다. 헨리 브란트 박사는 『성숙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를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아 장점과 단점을 구분할 수 있고, 단점을 극복하기위한 계획을 세울 줄 아는 사람" 이라고 했다. 여러분은 성장해야 한다. 지금의 단계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자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수년전, 혹은 수십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채 여전히 이웃들에게 상처를 입히며 고집과 내키는 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 자신이 어떤 타입의 사람이어서 어떤 장점과 어떤 단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선명 하고도 확실하게 객관적으로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단점들은 개선되어져야 한다. 당신의 천성이 꼭 사라져 버려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당신의 개성이 살아있는 채 당신의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자신의 약점을 세심히 솔직하게 연구하면 자신의 생활에 있어 하나님의 힘을 필요로 하는 부분을 쉽게 지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기억하자. 하나님은 그의 계획 하에 인간을 그의"영광을 위해"창조하셨다.(계4:11)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의 타고난 성품을 탓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기질 전체를 뜯어고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본래의 성품을 십분 활용하신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사용 되어져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탄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약점에 굴복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결과와 동일하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것인가?

 

약점을 죄로 여겨야한다. : 약점을 단순히 "그게 내 천성인걸!"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라는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라는 식으로 변명하지 말아야한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단점과 약점을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약점 쓰레기더미를 방치하고 있거나 회피하려고 한다.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말한다. 의지박약, 불안, 이기심, 자만, 성급, 잔인, 우울, 자기중심적, 비판적, 비관, 게으름, 조롱, 고집, 우유부단! 아름다운 것인가? 미안하지만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백성들이 이런 누더기들을 걸치고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심지어 그것은 우리 인간도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말다툼과 비방과 모든 악의를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대하며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4:30- 32)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근심거리라는 것이다. 버려야할 쓰레기라는 것이다.

 

인간약점의 근원 : 이기심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

 의지의 박약

 자기만족

 우울

 게으름

 불안

 성급

 자기중심적

 조롱

 이기심

 잔인

 비판적

 고집

 감정적 불안정

 매운 성격

 비관적

 우유부단

 

위의 도표는 우리의 각 기질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단점들이 어디로부터 궁극적으로 비롯되고 있는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모든 단점들은 크게는 분노와 두려움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고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요소들이 다 이 분노와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 분노의 변형된 16가지 : 격분, 증오, 폭동, 시기, 공격, 험담, 야유, 앙심 비통, 악의, 불평, 질투, 후회, 편협, 비난, 원한

▶ 공포의 여러 가지 표현 : 근심, 의심, 소심, 우유부단, 미신, 움츠림, 고집, 시비 걱정, 열등감, 비겁, 혐의, 주저, 실망, 교만, 수줍음

다혈질과 담즙질이 가지기 쉬운『분노』의 여러 유형들과 우울질과 점액질이 가지기 쉬운『두려움(공포)』의 여러 가지 유형들을 살펴보라. 이 소름끼치는 더러운 것들은 왜, 무엇 때문에 우리의 심령 속에 생성하는가?

그렇다. 그 냄새나는 흙탕물의 근원에는 바로『이기심』이라는 독샘이 자리하고 있다. 이기심이란 자기본위주의, 자기중심주의를 말한다. 이기심이란, 말 그대로 『나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내가 가지고 싶고, 내가 누리고 싶고, 내가 받고 싶은 것에 대해 충족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한다. 시기하고 불평한다. 내게 있는 것을 잃게 될까, 내가 손해 보게 될까, 내가 인정받지 못할까, 나의 기득권이 달아나게 될까 싶기 때문에 우리에게 덤벼드는 것이 두려움이다. 공포요 염려요 수줍음이며 열등감이다. 이것이 이기심이다. 이기심은 사탄(사14), 아담과 이브(창3), 그리고 가인이 근본 죄악이기도 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생기는 비인도적인 잔인성, 태초부터 21세기에 이르는 동안 일어났던 모든 문제와 슬픈 사건들은 모두 바로 이 이기심 때문이었다. 이기심이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물론 여러 형태로 나타나겠지만 결국은 사탄이 노리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배제하고 오직 나 자신만을 모든 사고와 행동의 중심으로 삼는 것, 이것이 죄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결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길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 이기심이 바로 우리 인간자신들을 분노케 하고 두렵게 하는,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불행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주범(主犯)임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이것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기억하라. 이기심이라는 근원에서 나오는 모든 이러한 쓰레기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인간에게 내리셨던 축복이 아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은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분명히 죄이다. 이것들은 사탄의 작품들이다. 이것들과 우리는 대항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적인 것이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것에 대한 치유를 하나님께 의뢰할 수가 있다. 자! 당신은 이 죄들을 인정하라! 한 가지 제안하고 싶다. 솔직하고도 객관적으로 자신에게서 인정되는 약점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보라. 그리고 그것들을 기억하라. 가능하다면 그 목록을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면 더 좋겠다.

 

죄를 언제나 고백하라.

요한1서 1장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구절은 주로 구원이 필요한 죄인을 위해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긴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요한은『나의 자녀들아』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그가 믿음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시편 66:18에서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고백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을 때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은 효과가 없게 된다. 분노와 두려움을 죄로 여기지 않아도 기도는 효과를 상실한다. 당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 그것이 잘못된 죄임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요한 1서 1:9절은 몇 번이나 사용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는 이가 있는데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당신이 죄를 지을 때마다, 또 죄를 의식하고 있을 때마다"이다. 죄를 지은 시간과 고백하는 시간사이에 아무 시간적 공간을 두지 않도록 하자. 당신이 화를 낼 때 마다, 두려워하고 낙심해있을 때마다 언제나 그것이 하나님을 거스른 죄악을 범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즉시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한다.

그리하였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대한 약속이 바로 요한 1서 1:9의 뒷부분이다. 하나님께선 그 죄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아니하시고 용서 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제대로 알고 있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자체만으로도 용서의 조건이 되심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분의 약속을 우리는 믿어야한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쟁이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쁜 습관과 죄를 없이해 주실 것을 간구하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노와 공포로부터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가 주님께 간구만하면 그의 뜻에 따라 간구한 것은 틀림없이 응답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내 천성인데 난들 어떡하겠어요?" 그렇다. 우리의 약점이나 결점이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고쳐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그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인가를 우리는 알고 있고 또 인정해야한다.

위의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간구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을 또한 확신해야 한다. 우리보다도 하나님은 더욱 우리의 약점 들을 고치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없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 (마28:18)임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라.

④ 성령 충만을 간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엄격히 다르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무슨 특별한 신비한 체험이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세주로 모셔드릴 때 동시에 일어나는, 평생에 단 1회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오시도록 요구할 필요가 없다.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主)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결단하는 순간 성령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20의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이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 때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 예수의 영(성령)이시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성령이 그 안에 계시다고는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로마서 8:9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말은 성령이 그 안에 계시지 않은 이는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신이 만약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교회도 오래 다녔으나, 그분을 당신을 구원할 구세주 그리고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했다면 우선 당장할 일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마음속에 영접해 들이는 일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에게만 계시며, 이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이 성령님의 도움에 의해서만 우리의 약점을 고칠 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한번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은 우리를 진리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요16:13),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며(요1 6:18), 하나님의 사역과 계획과 미래에 대해 알려주신다(요16:13). 그분은 우리를 도우시며(롬8:26, 막13:11)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시며(갈5:22), 우리가 옳은 일을 하도록 도우시기도 한다(요일2:2-7).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성령이라는 제3인칭의 존재로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 "내게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은 "성령 충만"을 요구할 따름이다. 그것(성령 충만)은 단순한 제안이나 요청이 아니다.

에베소서 5:18에서 주님은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Be filled with the Spirit)" 라고 분명한 명령형 문장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다. 오늘 날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에 있어서 가장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이 큰 문제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성령의 충만함과 방언을 말하거나 어떤 환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을 동등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령 충만 이란 어떤 체험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성경은 이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면서 현재시제를 사용함으로써 계속적인 의미로 『성령 충만』은 우리일생의 일회적인 경험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이다. 원어인 헬라어를 보면 이 구절은 "당신들은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하시오"의 뜻을 지닌다. 이 성령 충만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자리에 누울 때까지 계속 성령 충만하도록 명령받았다.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 우리를 두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활동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나게 하라는 의미이다. 왜 우리는 우리 삶의 주도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려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애초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원자요, 주인(主:Lord)으로 모셔 들였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자의에 의해 우리 삶의 주권을 가지시도록 영접 되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통치)아래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노예나 꼭두각시가 되어 로봇처럼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 무지한 탓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압제나 횡포가 아니다. 우리는 100%의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유로운 도덕적 행동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격려하시지만 행동은 우리가 해야 한다. 애초부터 성령께선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우리를 강압적으로 마음의 문을 부수고 들어오신 이후에도 그분은 결코 우리를 압제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의 인격으로 그분의 뜻에 동의하여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바로 우리가 사는 것이다.

우리가 기쁨으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와 책망에 순종 하는 것은 그 성령하나님의 인격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그 전폭적인 사랑과 신실 성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시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 방법과 길을 훤히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데 있어 유일한 진정한 안내자이시며 또한 원동력이시다.

성령 충만 이란 우리 인생 삶의 길을 성령의 지시에 전적으로 따라 우리가 운전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 충만은 느낌이나 별난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감정적인 쇼킹한 경험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과 육신적인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려고 오셨다. 에베소서 5장은 우리가 성령 충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함으로써(엡5:20)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육신의 힘으로 기쁨과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육신의 힘으로 우리들의 기질상의 많은 약점들을 개선시키고 변화시키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에겐 오히려 아름다운 성품들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갈라디아서 5:22-23에는 "성령님이 지배하는 생활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현대인의 성경 번역판) 여기에 나오는 목록들을 보라. 앞에서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가지게 된 우리안의 쓰레기들과 어떻게 다른가? '증오, 시기, 험담, 야유, 앙심, 비통, 불평, 질투, 후회, 비난, 근심, 의심, 우유부단, 움츠림, 소심, 고집, 열등감, 비겁, 주저, 실망, 교만'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기질을 갖고 있든 성령이 충만하기만 하며 그의 삶에는 이 아홉 가지의 삶의 특성이 열매로 맺히고 점차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사랑, 곧 모든 이들(원수까지도)을 향한 사랑이다.

희락, 곧 기쁨(joy), 환경을 초월한 변함없는 기쁨이다.

화평(peace), 곧 모든 두려움과 근심 대신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평안이다. 오래 참음(long suffering : 인내), 즉 모든 모욕과 고통과 비난 중에서도 묵묵히 일을 수행하는 능력이다.

자비(gentleness), 곧 부드러운 마음에서 나온 사려 깊고 예의 바르고 점잖고 신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이다.

양선(goodness), 즉 자신과 소유물에 대해 인색하지 않고 관대한 마음, 이기심 없는 모든 친절과 선한 일이다.

충성(faith), 즉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의지하는 태도, 신뢰성, 성실한 자세를 말한다.

온유(meekness),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이다.

절제(self-control), 즉 자신의 기질상의 약점을 자제하는 능력, 자기훈련, 자기조절 능력을 말한다. 성령께선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그분의 존재와 능력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 삶의 한 부분 한 부분에 개입 하실 것이다. 고함을 지르고 꽃병을 집어 던진 다혈질 사람에게 성령께선 즉각적으로 그 분노가 잘못된 죄임을 지적하신다.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알겠지? 그 방법은 이 문제의 해결의 좋은 방법일 수 없어! 자 지금 곧 그와의 화해를 시도해라. 전화를 걸어!"

성령의 사람은 그 말씀에 동의하고 순종하게 된다. 그는 곧 전화기 앞으로 달려간다. 다혈질의 사람으로부터 폭언과 꽃병세례를 받았던 우울질의 사람은 모욕감과 증오감에 시달린다. 두통을 느끼고 이를 갈며 침대에 누워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께선 내 버려 두실리 없다. "나는 네가 그 흉측한 증오심으로 그렇게 몸과 마음에 깊은 고통을 느끼며 있는 것이 싫다. 너의 평안이 내 기쁨이다. 그를 용서해라. 나도 너의 모든 죄들을 용서해 주지 않았니? 자! 일어 나거라! 그에게 화해를 청해라. 그가 너의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너에겐 평화가 있게 될게다. 어서 전화를 걸어라."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찌꺼기를 남겨두지 않는다.

자신의 약점으로 인한 실수들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싫어하므로 그는 신속히 그 실수들을 시인하고 해결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옛날의 그 편협적이고 고집과 독선과 혈기와 자기학대와 근심걱정의 지저분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전율할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주인이나 통치자로 모시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성령의 지시에 계속 불순종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소멸시켜 버렸다. 그들의 직분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근심걱정으로 우울증에 걸린 목사님이나 분노와 혈기로 위궤양을 앓고 있는 장로님도 사실은 성령을 무시하고 인정치 않으며 성령의 활동을 훼방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통해선 하나님께 선 기쁨과 영광을 얻으실 수가 없다. "내가 분명히 말해둔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님에 대한 모독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15:31) 개역성경은 여기의 성령모독을『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그 인격이 변화되어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아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계신 성령의 능력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였으니 그는 분명히 성령을 모독한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가!

물론 우리의 옛 성품과 자아를 상대하여 싸우는 싸움은 쉬운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약점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성령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다 가도 또 여전히 옛 자리로 되돌아와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는 우리는 실망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포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노리는 점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실망하지 아니하고, 죄를 지었을 때마다 또 죄를 깨달았을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요청하고 그분의 지시에 순종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결국에 가선 옛 습관이 더 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되돌아 봤을 때 당신은 과거와는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의 기질적 약점들은 많이 깎이고 다음어진 것을 선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나 자신이 이를 위해 이를 악문 고행과 수양을 쌓았기 때문인가? 기껏 내가 한 것이라곤 주님을 떠나지 않고 그분과의 교제를 중단하지 않은 것밖에 없다.

나는 기대한다. 지금까지도 나를 조금씩 변화 시켜 오신 주님께서 앞으로도 나의 남은 날 동안 변함없이 나를 지도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다듬어 가실 것을 말이다. 나는 나의 약점들을 매일 점검하고 있다. 그것들은 나의 적이다. 내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들이다. 여러 번의 실패와 좌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내가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이 적들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라는 확신 때문 이다. 예수 안에서 나는 능히 이 약점들을 물리칠 수 있음을 확신한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담대 하라. 승리를 확신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제2장 현대 사회에 있어서 죽음에 대한 상담

1. 서 론 오늘날 인간들은 과학적 정신으로 끊임없이 많은 것들을 창조하고 생산해 내고 있다. 사람들은 과거에 비하여 엄청난 문명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현대사회에서 "생산적인 인간(Productive Person)"은 하나의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회생의 가능성이 없는 죽어 가는 사람은 비생산적인 인간으로 간주되어 진정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유한적 존재로써 죽는다. 인간이 경험하는 죽음의 상황은 같지 않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인격적인 경험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인격적 경험이란, 의미를 발견하고 품위를 갖고 죽고 싶은 욕구가 충족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인격적 경험은 점점 어려워져 가고 있다. 그렇기에,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돕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고려되어져야 할 특별한 마음가짐과 가설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문인들은 각자 다른 견해들을 갖고 있지만, 독특하면서도 보편적이고 또한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욕구를 갖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다 현명하고 효과적으로 돕기 위하여 자신들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전문적인 통찰력을 나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의사의 경우, 죽음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유기체적이며 생물학적이다. 그는 육체적 죽음을 적으로 생각하고 생명을 유지시키도록 훈련을 받았다. 임상심리학자나 정신의학자는 환자의 마음과 감정 깊은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직업상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중립적이지만, 그가 상담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목회자는 육체적 죽음에도 관여하지만 자신의 내담자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여 유한성과 관련된 생물학적 사건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배려한다. 이렇게 다양한 견해는 상담자의 독특한 역할과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의사나 목회자의 예비훈련이 심리학적 통찰력에 의하여 더욱 심도 있게 되며, 목회자나 임상심리학자가 병원의 일정과 의학적 통찰력에 의하여 도움을 받을 때 더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이글의 목적은 학문적인 방법을 통하여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상담에서 요구되는 종합적인 통찰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2. 죽는 자를 위한 상담의 기본 전제들 죽어 가는 환자는 상담자에게 특별한 기회와 위험 요소들을 제공한다. 상담자가 두려움과 불안감 때문에 환자를 피하게 되면 그의 특별한 요구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진다. 반면, 상담자가 자신을 환자와 지나치게 동일시하면 심각한 정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죽어 가는 환자와 의사소통을 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죽음의 주제에 대한 침묵이다. 우리는 유한성에 대하여 사회적 금기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존재인데도 죽음의 의미에 대한 건전한 토론을 꺼린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죽어 가는 환자는 자신의 내적 요구는 더욱 깊어 가는 반면에 그것을 만족시켜 줄 기회는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죽어 가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가족이나 공동체와의 정상적인 의사소통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가장 인간적인 접촉이 필요할 때 완전히 고립될 수 있다. 이러한 분리의 현상은 불안의 표현인데 오히려 그것은 자주 배려의 행위로써 합리화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족 공동체와 격리된 병원과 같은 환경에서 임종을 맞게 된다. 병원은 의사나 간호원들의 영역이며, 만약 그들이 환자의 감정적 요구에 적합하게 대응하지 못할 경우 환자의 고립감은 심각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문가들로 하여금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게 해준다. E. 에슬러는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심리치료사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죽음이 삶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연장이 되기 위하여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R. 버틀러 역시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삶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므로 상담자의 역할은 환자에게 단순히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차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사는 육체적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는 자신의 역할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심리치료사는 환자가 심리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그의 존재 전체에 관여하여야 한다. 아마, 그는 때때로 죽어 가는 환자들과 같이한 시간들이 낭비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복되어서 좋은 모습으로 보답한다는 약속 없이 죽음을 향해 외로운 순례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 깊어지면, 그는 삶과 인격의 성스러움에 대하여 믿음을 갖기가 어렵게 되며, 결과적으로 죽어 가는 환자를 돌보아야 하는 책임감으로부터 회피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에 직면하는 동안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더욱이 종교와 분리된 일반학문을 통하여 훈련받은 심리치료사들은 종교적 제의나 성례전의 치유적 기능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성례전은 말기 환자가 분리의 느낌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성례전은 말보다 깊은 언어로 환자로 하여금 신앙공동체와 관련되어 있음을 느끼도록 해준다. 심리치료사들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말하는 수단으로써의 상징적인 종교적 행위가 갖는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심리치료사가 죽어 가는 환자로 하여금 깊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도록 도울 때, 그는 환자가 식별할 만큼 육체적 건강도 좋아지고 감정적으로도 건강하게 변화한 것을 보게 된다. 심리치료사가 종교적으로 훈련된 환자를 대할 때에는, 자신의 일들이 환자로 하여금 성례전에 참석하고 고백하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임을 인정할 만큼 겸손해야 한다. 무의식적 죄의식 때문에 계속되는 고백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불안한 환자에게는, 심리치료사와 많은 시간을 같이 일한 뒤에 성례전에서 그가 처음으로 경험한 면죄의 은총은 극적이면서 감사한 경험이 될 것이다. 때때로 심리치료의 과정은 깊은 감정적 갈등을 드러내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삶에 새로운 의지를 부여한다. 심리치료의 목적은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을 건설적으로 사용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환자들은 질병 대신에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며, 이때 그들이 제기하는 질문에는 신학적인 측면이 있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나?" 또는 "왜 내가 죽어야 하나?"와 같은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왜 나는 인간인가?", "나는 어떠한 존재였는가?",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묻는다. 환자는 이러한 질문을 추구하는 가운데, 현재의 고난 속에 과거와 미래가 함축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현재의 고통을 넘어서서 내적인 만족을 갖게 된다. 이렇게 환자가 시간의 한계점을 극복할 때 영혼이 삶을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환자들은 자신의 병과 시간의 흐름에 대하여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더욱이 심리치료사가 시간에 대하여 너무 의식하면 환자의 생각과 느낌에 집중해야 하는 정상적인 치유과정을 방해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환자로 하여금 우주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기가 어려워진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넘어서서 우주의 깊이를 깨달을 때 그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높은 수준으로 고양된다. 그러므로 심리치료자는 시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환자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기보다는 환자 자신이 육체적 죽음에 의해서도 파괴될 수 없는 가치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죽어 가는 환자가 일시적으로 의식을 되찾거나 호전될 때 예상과는 달리 의사의 노력에 감사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환자에게 있어서 의사의 노력은 경우에 따라서 한번 겪어야 할 과정을 여러 번 겪게 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환자는 이 과정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이 다른데 써야 할 에너지를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쓰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사실, 죽음 앞에서 인간에게는 고통보다 의미와 품위, 그리고 개인적 자유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암과 투병하는 한 여인은 이같이 말했다. "나는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그러나 죽는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혼돈과 경멸감에 대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를 느끼며 품위를 지키면서 죽고 싶다." 그녀의 경우 자신이 지켜 왔던 가치를 끝까지 보유한 것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초인적으로 의식에 매달렸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사건이지만, 비존재의 상태로써의 죽음과 과정으로써의 죽음에는 다른 점이 있다. 죽음의 과정에 개입하는 상담자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에 좀 더 성숙하게 직면하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도울 수 있다.

V. 프랭클은 이것을 그의 저서 From Death-Camp to Existentialism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 있던 친구들이 공포에 질린 동물처럼 죽음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갖고 죽음에 직면하도록 도왔다. 그는 인간이란 살았던 것처럼 죽을 것이라고 믿었다. 불안과 공포에 억눌려 살았던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반면 내면에 평정을 갖은 사람은 평화롭게 죽을 것이다. 이것은 G. 카플란의 말대로 인간은 위기를 대응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전 존재를 연결시킨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삶을 완성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좌절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위기의 시간에도 자신이 지켜 왔던 가치와 의미를 실행한다. 그러나 삶에는 때때로 실패와 좌절감이 너무 압도적일 때가 있다. 악성 종양으로 죽음 앞에서 분노를 느끼며 삶을 포기한 청년의 경우, 그는 자신이 겪는 고난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었다. 여기서 V. 프랭클의 견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의 고난은 우리가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때에도 의미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꽃은 어느 누구도 보거나 감사하지 않을 때에도 피고 진다. 가치는 사실에 있다. 그 사실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의미 없이 창조된 것은 없다는 믿음에 의하여 인정되는 것이다. 냉혹하게 허물어진 삶도 내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사람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의미의 타당성을 명상할 수 있어야 한다. 상담자가 죽음 앞에서 좌절하는 사람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중요한 의무이다. 프랭클은 심리치료자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믿음이 죽는 자를 상담하는데 있어서 결핍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보통 전문가들은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고착되어 있어서 환자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 즉 믿음으로부터 오는 확신의 감정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상담자는 죽어 가는 환자가 신앙 속에서 삶의 의미와 질서를 발견하는 것은 삶의 종결이 아니라 삶의 시작임을 인식하고 자신을 이 구원적 사건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써 이해하여야 한다. 3. 죽는 자를 위한 상담 임상적 증거에 의하면 많은 환자들이 심리치료를 받으면 회복시킬 수 있는 삶의 의지를 상실하기 때문에 예측된 시간보다 빨리 죽는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죽어 가는 환자들은 상담자보다는 그들에게 불길한 예후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말하는 의사들과 지지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욕구는 전반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우리는 환자들이 죽는 과정에서 둔화되어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한다고 들어왔다. D. 케폰에 의하면, 인간은 이상한 성격과 감정에 의하여 고통 받고 살았던 사람처럼 죽어가기 때문에 전과 같이 접근하기 힘들며 다가오는 죽음은 그의 자아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는 자와 대화를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상담 가들은 케폰의 의견에 반박한다. 아마 D. 케폰의 생각은 의사가 환자와의 관계를 회피한 것에 대한 자책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무의식적 소원일 것이다. 환자에게 심리치료가 생각보다 훨씬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사례가 여기 있다. 한 의사는 악성 대장염으로 인하여 직업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평소 심리학적 해결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상담과정에서 그가 사춘기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그 때 그는 생명을 구하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사춘기에 있는 그의 아들이 죽음으로써 그는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아들이 죽은 몇 달 후 그의 첫 증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계속 그 증상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그를 괴롭혔다. 상담과정에서 그는 의사가 된다는 것의 고통은 말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으로 그가 느꼈던 공포와 분노에 대하여 말했고 어린 시절에 억압했던 눈물을 흘렸다. 그 후 그의 증상은 사라지기 시작하여 완전히 회복되었다. 삶의 의지와 죽음의 의지 사이의 갈등에서 나타나는 요인들은 심리적이고 영적이다. 삶의 의지가 회복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라면 그 의지를 강화시키는 치유적 자원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때, 시간은 상대적일 수 있지만, 삶의 의미는 절대적이다. V. 프랭클에 의하면, 인간이 미래를 추구할 때만 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특성이다. 말기 환자를 위한 상담의 목적은 삶의 의미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만약 신체적 회복이 어려우면, 상담은 죽음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에 직면하여 인간은 과거의 삶 속에서 성취할 수 없었던 존재의 완전한 성장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 있어서, 상담자, 의사, 목회자, 심리치료사, 환자의 가족들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중요한 목적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는 신비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삶과 죽음의 세력을 실용적인 측면에서 개념화 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의 경우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더 살기를 원하며 이러한 열망이 질병에 대한 육체의 저항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환자의 살려는 의지를 강화시키는데 있어서 또한 고려해야 할 것은 환자 자신의 가치들이다. 환자는 진정한 가치를 추구할 때 수반되는 자기발견과 자기수용 속에서 성숙한 존재가 된다. 이러한 자아의 성장은 시간의 흐름과는 관계가 없는 가치이다. 우리가 인간의 가치와 삶의 거룩한 특성을 믿는다면 죽음이 다가와도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심리치료사, 의사, 목사, 상담자들의 책임은 어떤 발달단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치료는 경과되는 시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창조된 가치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의 의미와 관련된 철학적 문제를 짧게 다루고자 한다. 철학적 전제 없이 치유적 가치를 논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상담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가져야 한다. 상담가의 견해는 치명적으로 아픈 환자들과 일할 때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죽음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일반적인 의학적 견해는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만약 상담자가 삶과 죽음의 의미의 절대적 분리를 믿으면서 환자를 대한다면 그것은 상담의 목적인 삶의 수용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그 때 상담자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데 관심을 두기보다는 죽음을 막는데 에너지를 쓸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견해는 삶과 죽음은 의미 있는 실존의 양면이라는 것이다. 누가 진리를 위해 불의와 싸우다 죽는 순교자를 구할 것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을 그의 존재의 참된 의미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가 죽지 않고 산다면 그는 자신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배반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희랍의 성인 히게이아[Hygeia(건강의 여신, 의학의 여신, 위생을 상징)]가 건강의 의미를 육체적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게 하는 전체성(Wholeness)의 견지에서 설명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건강의 의미는 현대 심리학자 A. 매슬로우에 의해서도 자아실현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환자가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가면, 신체적 상태가 호전되지 않거나 악화될 때에도 죽음의 공포는 점점 감소될 것이다. 치유는 죽어 가는 환자에게 거짓된 희망을 주어서는 안 된다. 치유는 육체적 회복보다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아의 해방과 확대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새로 찾은 생명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이 때 상담의 접근방법은 환자에게 있어서 자아의 궁극적 관심을 증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담자 자신이 먼저 궁극적 관심을 갖고 환자의 절망에 직면해야 한다. 상담 관계 속에서 환자 안에 신앙이 내재할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신앙이란 P. 틸리히가 말한 의미와 같다. "신앙은 궁극적인 관심을 갖는 상태이다." 상담자는 환자로 하여금 성공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을 극복하고 자신의 내적 발전에 관심을 갖도록 인도해야 한다. 틸리히에 의하면 신앙의 영역에 들어가는 사람은 삶의 성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신앙을 환자가 붙잡고 응답할 때 그는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신앙을 요구하는 환자들을 여러 명 갖는 것은 상담자에게 긴장감을 안겨 준다. 이러한 유형의 상담은 열정적인 집중과 거의 절대적인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보살핌은 상담자가 자신을 보호하려고 취하는 신중함이라든가 친절함의 성격과 다른 것이다. 상담자는 동정이 아닌 공감 속에서 환자가 마음 문을 열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망설임 없이 환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노력 없이도 상담자와 환자는 종종 치료과정에서 협조적으로 일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죽어 가는 환자에 대한 상담의 절대적 관심은 환자로 하여금 스스로 참된 자아를 발견하도록 돕는데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프리니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그는 이것을 재차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진실한 모습으로 즐길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은 완전한 성장이다." 환자는 이러한 의미의 가치와 경이감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가치의 증거는 환자가 상담을 통하여 성장할 때 나타난다. 환자는 상담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을 받으면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된다. 이러한 자아의 추구는 상담자에게도 중요한 과제이다. 흔히 상담자는 자신의 접근방법에 지나치게 확신을 하기 때문에 환자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상담자가 자신을 알지 못할 때, 그는 환자에게 지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가치나 생각을 행할 때가 있다. 환자는 이것을 재빨리 느끼게 되며 상담의 효과는 심각하게 감소된다.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한 상담에서 상담자는 환자가 갖고 있는 정신적 증상의 원인보다는 환자의 삶에 대한 열정을 해방시켜 주는데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신적 증상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무능력과 자기표현을 계속 억압하는 행동양태로 생각되어 진다. 매슬로우는 이것을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인격 장애는 자신의 진실 된 본성이 파괴되는 것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다." 우리는 환자를 상담할 때 환자의 정신적 병리나 죽음에 대한 준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환자의 내적인 힘을 추구하는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일반적인 상담방법은 환자의 인격적 약점을 찾아내려는데 시간을 많이 쓴다. 그러나 로젠탈이 주장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환자의 두려움을 감소시키는 것은 그의 창조적인 힘을 다시 소생시키는 것이다." 많은 상담자들이 이러한 접근방법을 통하여 큰 결실을 얻었다고 믿고 있다. Ⅳ.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 있어서 종교적 가치 말기 환자들은 종종 자신들을 압도하는 두려움과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종교에 귀의하고 싶어 한다. 때때로 그들은 절망 속에서 마술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종교가 주는 위로 속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정리한다. 종교적 자원들은 환자들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는데, 이것은 결코 두려움이나 불안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죄책감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행하여지면 안 된다. 반대로, 종교적 자원은 환자들의 회복과정을 촉진시키며 내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창조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종교적 상담자는 종종 무의식적으로 죽음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과 실존적 불안을 환자에게 투사한다. 그는 환자에게 자신이 지킬 수 없는 종교적 흥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보장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육체적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종교적으로 흥정하려는 노력은 실제적으로 환자에게 성숙함과 현실성이 요구되는 때에 마술적인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치유 사역 팀에서 목회자는 죽어 가는 환자를 죄책감과 불안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돕는데 있어서 타당한 위치를 갖고 있다. 그는 환자가 진정한 자기발견과 자아실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G. 질보르그가 지적한 것처럼, 심리치료는 발견되지 않은 자아, 즉 성경이 말하는 옛 사람을 다루는 반면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정체성의 신비한 형태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사람"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자기포기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자기완성이 되는 십자가를 포함한다. 바울은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강한 끈기를 낳고 그와 같은 끈기에서 희망이 솟아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4-5)" 이와 같은 신앙발달은 죽어 가는 환자로 하여금 현실을 도피하지 않으면서도 질병이나 죽음과 같은 현상을 초월하여 자기 발견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자기 발견은 위기에 직면하여 종교 속에서 도움을 구하는 환자와 더불어 심리치료사나 목회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자주 목회자나 의사가 죽어 가는 환자는 더 이상 잠재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환자와의 관계를 회피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러나 종교의 모험적 정신은 인간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각성의 시간에 활성화되는 잠재력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깊이 인식할 때 시간과 공간에 속박된 많은 생각들이 부적절한 것으로 느껴진다. 인간 존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므로 이미 영원한 것에 대한 경험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환자로 하여금 죽음이 다가올 때 자신의 존재가 갖는 고유성과 그의 존재 안에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은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존재의 근거(the ground of being)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C. 융에 의하면 그의 환자들은 자신들의 기본적 욕구가 근본적으로 종교적임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이 엄격한 태도로 너무 쉽게 비판하면서 설교를 하였기 때문이다. 융은 상담과정에 있는 목회자의 훈련에 많은 진보가 있음을 최초로 인식한 사람이었다. 의사들은 한 가지 방법으로만 해결하기에는 복잡한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목회자들과 관계를 맺을 필요성을 느꼈다. 과학으로써의 의학은 인간의 전인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의학이 인간적 동기를 탐구하지 않는다면 질병의 근원을 다룰 수가 없게 되었다. 정서장애를 다룰 때 나타나는 문제 중 하나는 "무능한 통찰력(impotent insight)"이다. 환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볼 능력이 없어서 그것을 변화시킬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이 삶의 의미나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사실과 직결된다. V. 프랭클은 이러한 환자들을 다루면서 실존주의적 분석의 과제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삶의 고유한 의미를 발견하여 책임감을 갖고 자신에게 적당한 일을 하도록 인도하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이 환자들을 대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심리학적 통찰력은 삶에 대한 중요한 영적 질문에 대답을 요구하는 인간의 개념에 도달해야 한다. 비종교적으로 훈련된 심리치료 방법을 오랫동안 사용한 후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어디서 힘을 얻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과 같이, 의사도 삶의 궁극적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치유체계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사실, 어떤 치유체계도 치유 받는 인간의 개념보다 더 클 수는 없다. 잘 조직되고 분류된 지식으로써의 과학조차도 부분적인 인간 경험에 국한된다. 과학이 갖고 있는 이 같은 한계는 전인적인 인간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상상력을 억압하기 쉽다. 만약 인간이 다양한 화학적 요소들로 균형 있게 조직된 존재라면, 약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내적인 화학적 균형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치유하기 위해서 과학은 인간을 화학적 요소들의 종합체가 아닌 인격적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 의학은 그 자체 안에서 인간의 전인성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인간 그 자신이 이해되지 못하면 인간의 질병이나 불운한 일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과학은 인간의 삶을 전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영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과학자는 결국 형이상학자가 된다. 그가 "왜?"라는 질문을 계속 할 때마다 그는 결국 의미와 목적이라는 궁극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철학자와 종교적 사상가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인간의 종교적 견해도 의학적 견해와 같이 부분적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종교에 대하여 너무 윤리적이나 초자연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인간이 갖는 전체성의 견지에서 볼 때 문제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의도하는 것은 종교나 의학의 한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신체의학과 종교사이의 공동 영역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시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여러 측면이 있다. 의학은 그 자체의 한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연구를 통하여 우리의 삶에 고유한 빛을 던져 주고 있다. 그러나 삶에는 각기 다른 빛을 요구하는 여러 면들이 있다. 인간과 그의 건강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위하여 이 모든 면들은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종교적 연구방법은 육체적 증상의 치유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전체성을 산출하는 영적 조화를 어떻게 성취하느냐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인간의 영적 본질에 대한 이해가 인간의 전인 건강에 부여하는 통찰력은 엄청나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인간이 건강하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육체적 건강은 무너질 수 있지만 자기의식과 영적 각성은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패배의 시간이 아닌 확실한 신앙의 표현으로 만들어 준다. 신앙은 우리가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존재하는 것이다. 신앙의 힘은 합리적인 사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완성에 이르는 길에 있다. 성숙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위기의 시간에 미성숙하게 의존하거나 자기 소망을 투사시키게 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숙한 신앙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삶과 죽음의 의미에 전적으로 직면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삶 속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 M. 부버가 말하는 "나와 너(I & Thou)"의 인격적 관계를 성취할 수 있는 심오한 능력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 안에서 꾸준히 성장한 사람에게 죽음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늘 있었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의 신비함을 믿는다. 자신의 신앙을 가족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나누면서 신앙 안에서 죽는 사람은 가장 의미 있는 봉사를 한 것이다. 신앙 안에서 죽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다. 육체를 다루는 의사와 영혼을 다루는 사람들이 먼저 이러한 신앙을 스스로 발견하고 환자들과 의사소통할 때, 그들은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일들을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이 항상 도전적인 존재의 과정 속에서 성장할 때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로 볼 것이다. 4.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서 목회자의 문제와 과제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한 상담에서 종교적 가치가 강조된 것처럼 그 가치를 재현해야 하는 목회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죽어 가는 환자나 그의 가족들은 자주 영적인 상담자를 원하며, 목사가 지원해 주면 안정감을 느낀다. 이것은 죽음이 다가올 때, 사람들은 육체적 차원의 안정감보다는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담당 의사나 직계가족이 죽어 가는 환자로 둘러싼 일에 관여하듯이, 목사도 중요한 사람이다. 그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은 의사나 환자의 가족에게 중요하다. 그러나 목사는 시작부터 모순된 입장에 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인간이면서 거룩한 것을 증거 해야 하고 자신에게도 불가사의한 것을 간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유한성을 의식하면서 영원불멸한 것에 대하여 말해야 하며,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추측할 뿐 답을 갖고 있지 않을 때에도 설명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하여 목사 자신이 갖고 있는 태도는 그가 죽어 가는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깊다. 죽음에 대하여 그가 느끼는 두려움, 고립감, 불안은 그가 죽어 가는 환자와 같이 일할 때 나타난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외롭고 내버려진 말기 환자를 대할 때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문제의 주요 원인은 그들 자신이 언젠가는 버림을 받고 외롭게 죽을 것이라는 무의식적 두려움이다. 목사들이 갖고 있던 깊은 무의식적 감정이 환자의 상태와 동일시됨으로써 죽어 가는 환자와 일하는 것이 어려워진 것이다. M. 바워스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때 동기가 있으며 어린 시절에 충격적인 죽음의 경험을 한 목사들은 목회를 하면서 죽음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들은 장례식을 계속 담당하지만 그들 자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계속되는 상징적인 행동은 그들에게 감정적인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그 안정감은 상징적일 뿐 죽음의 실체는 그의 역할을 혼돈스럽게 하여 그의 존재에 위협을 주고 있다. 뛰어난 설교자와 능력 있는 행정가로 알려진 K목사는 자신의 회중을 보거나 병원에 있는 신자를 방문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주일에 그는 회중 위의 높은 곳에다 눈을 맞추고 매우 학문적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신도와의 만남을 회피하였고 특히, 병원은 그에게 힘든 곳이었다. 그에게 있어 아픈 사람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의 죽음을 목격했고, 고아원에서 성장하였으며 안정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책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는 자기만의 세계를 벗어나 사람들을 만날 때 위험을 느꼈다. C라는 목사는 특히 성만찬 식을 행할 때 고통스러워했다. 심리치료를 통하여 밝혀진 것은, 그가 어렸을 때 병리학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아이를 돌볼 사람을 찾지 못했을 때 어린 아들을 실험실로 자주 데리고 갔었다는 것이다. 어린 소년은 본의 아니게 자기 아버지가 많은 동물을 갖고 생체실험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어떤 살인적인 의지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아버지가 싫어졌다. 그가 목회의 길을 택했을 때 그것은 그가 두려워했던 아버지가 아니라 훌륭한 아버지 즉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아들이 희생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성만찬 식을 행할 때는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있었던 두려움이 표출되었다. 우리는 그가 죽어 가는 환자 옆에서 성례전을 베풀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목사들이 깊은 인간적 만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쓰는 가면들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목사가 그의 가면을 의식하고 던져 버릴 때만 죽어 가는 환자와 자유롭고 개방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의식적 행사의 가면이 있다. 목사는 형식화된 기도와 전통적인 절차를 사용함으로써 깊은 인간적 만남을 회피할 수 있다. 그는 환자의 침대 곁에 서서 진정한 관심을 표현하기보다는 "우리 짧게 기도할까요?"라고 말하는 것이 습관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말은 환자의 대화에 대한 욕구를 차단시킴으로써 환자를 더 외롭게 만드는데 목사는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느끼면서 병실을 빨리 떠난다. 둘째, 특수한 종교적 언어의 가면이 있다. 전통적으로 쓰여 왔으나 개인적 의미를 갖지 못한 언어들은 대화의 통로가 아니라 장벽이 될 때가 많다. "은총"이라던가 "구속의 힘"같은 말들은 공중예배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환자에게는 그 말들의 깊은 뜻이 전달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러한 언어는 깊은 인간적 배려가 없으면 결코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에게 있어서 그 언어들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편한 언어들이기 때문에 그 언어의 깊은 뜻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은 제기되지 않는다. 의사에게는 죽음이 그의 직업적 역할에 도전이 되는 것처럼 목사에게는 죽음이 그의 신앙에 도전이 된다. 다행히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 속에서 죽음과 잘 타협하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사는 목사들이 있다. 그들은 환자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 축복된 영적 공동체 안에서 마지막 순간들을 나누고 삶과 죽음에 대하여 의미를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대하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의 감정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목사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목사이다. 그는 삶 속에서 마음의 가면을 쓰거나 방어기제를 발전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환자의 침상 옆에서 몇 시간이고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말을 하면서 위로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의식적 행사조차도 장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의사표현을 위한 접근방법이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직업의 성격이나 관계 때문에 죽어 가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사람들조차 죽음에 대한 문화적 반감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문화적 반감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죽어 가는 환자와 만날 때 감당해야 하는 긴장감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직업을 이용한다. 오늘날의 문화를 살펴보면 젊음, 건강,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마치 최고의 선이나 되는 것처럼 강조되고 있다. 은퇴하고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특별한 양로원이나 실버타운이 사회로부터 떨어져 건설되고 있다. 그러나 젊음에 문화적 프리미엄이 붙는 것과 동시에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들이 공동체의 부분이 되었다. 이러한 분리는 건강하지 못하다. 또한 육체적 미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삶의 의미와 깊이를 부정하는 결과를 갖고 온다. 이러한 풍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노화현상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때 자신을 지탱해 줄 적합한 가치 창조를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건강이 젊음의 상징일 뿐 현명하고 건강하게 늙어 간다는 의미를 배제한다면 건강의 개념은 가치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분명히 문화적 산물이라고 생각되는 죽는 자에 대한 태도는 윤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기에 직업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죽어 가는 사람에게 책임감을 갖은 사람들은 문화적 성향을 다시 검토하고 삶의 철학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그들이 이러한 책임감에 정직하게 직면할 때 문화적 조류는 좀 더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죽어 가는 환자와 관련된 전문인들 사이에 창조적인 대화가 일어나야 한다. 마치 의사가 환자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 신체적이며 생화학적인 관심 이상의 것을 요구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목사도 자신의 목회를 병들게 하는 개인적인 두려움에 직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환자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 일하는 전문인들에게도 방해가 된다. 목사나 그 외의 전문인들은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하여 공통된 과제를 설정하고 좀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두려움과 실패에 직면할 필요가 있다. 5. 결 론 죽어 가는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문화적 가치에 의하여 제약을 받기 쉽다. 현대 사회에서 생산성이나 젊음, 건강에 대한 지나친 찬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어 가는 환자에게 필요한 치유적 상담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 다가올 때 절망과 공포 그리고 고립감속에서 자신과 싸우고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죽어 가는 환자를 전문적으로 돕는 사람들은 환자들이 죽음을 패배의 사건으로 경험하지 않고 비존재의 위협에도 파괴될 수 없는 자신의 삶의 고유한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삶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죽어 가는 환자들이 삶의 의미를 상실했을 때 죽음이 예측보다 빨리 진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증상과 정신적 증상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서 심리학적 그리고 영적 차원들이 탐구되고 적절하게 사용될 때 상담자의 환자에 대한 책임은 좀 더 완전하게 수행될 것이다. 특히,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한 상담에서 종교적 가치는 매우 의미 있다. 일반적으로 환자들은 상담을 통하여 전보다 회복되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효과적인 상담이 언제나 육체적 죽음으로부터의 회복을 촉진시키는 것은 아니다. 상담자는 환자로 하여금 죽음이 다가와도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 속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죽음 속에서 발견하고 성취함으로써 존재의 완성에 이르도록 도와야 한다. 즉, 치유과정의 목적은 환자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종교적 차원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할 만큼 확대되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치유 사역에서 목회자의 역할이 갖는 고유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한 상담이 인간 존재가 갖는 전체성이라는 특성의 견지에서 보다 심도 있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담자의 인격적 완성이 요구된다. 다양한 상담 기술에 앞서 상담자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환자와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상담자는 환자와 그의 문제에 대하여 진실 된 태도로 직면하여 기본적 신뢰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는 환자의 분노나 허세 속에 감추어진 숨은 의미와 욕구까지도 볼 수 있는 깊은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죽어 가는 환자에게 필요한 삶의 의미를 전달할 만큼 신앙적인 확신이 있어야 한다. 또한 죽어 가는 환자를 돌보는 일에 관련된 전문인들, 즉 의사, 심리치료사, 정신의학자, 목회자, 상담자 등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전문 분야가 갖는 특성과 약점을 이해하고 창조적인 대화를 함으로써 죽어 가는 환자에게 보다 인간적이고 효과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전문가들이 이러한 책임을 완수할 때, 죽어 가는 환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패배가 아닌 삶의 완성으로써 경험될 수 있을 것이다.

 

 

 

제3장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 병든 자를 위한 목회상담학적 접근

 

1. 들어가는 말

 

의학에서는 19세기 이후 모든 질병의 원인을 자연과학적인 설명에 의해 몸 속의 모든 변화가 실질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의학에서는 “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으로 질병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질병이 “어떻게”생기게 되며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자연과학적인 견해는 영적인 의미 - 질병은 하나님으로부터, 또는 악마로부터 온다. -와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의미 - 질병은 영적인 힘의 무질서와 죄의 결과이다 - 와는 분리된다. 이러한 의미들은 “어떻게” 라는 질문보다는 오히려 “무엇 때문에” 질병이 생겼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들은 동시에 질병의 의미해석을 제시할 수 있다. 질병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설명은 이러한 의미들을 의미 없는 운명, 병든 사람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 결과 주체는 계속해서 질병의 관찰에서 제외되며 생물학적인 잘못된 기능은 한 개인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측면과는 관계없이 치료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학에 의해 지배된 견해는 항상 의의가 제기 되었다. 즉 많은 질병들이 갈등과 극복하지 못하거나 또한 잘못된 삶의 표현으로서 개인의 인생사의 영역에서 이해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극복되지 않은 심적이고 영적인 갈등이 다시금 육체적인 증상으로 강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건강상태는 자연과학적인 인과성의 의미로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살아온 그의 인생의 전기와도 연관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질병의 물질적인 원인을 인과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정신적이고 영적인 상징으로써, 그리고 인생전기의 배경에 근거해서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질병에 대한 신학적인 관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질문은 “왜” 질병이 생겼으며, 인간을 위해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이다. 의학에서는 질병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으며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에 대한 육체적인 관점에서의 생물학적이며 자연과학적인 질병의 원인과 치료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신학적인 관점은 생물학적이고 자연과학적인 관점보다는 “무엇 때문에” 질병을 얻게 되었는지 병든 자와의 관계 속에서 질병의 원인과 영적인 차원의 치유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로부터 자주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들은 생물학적이고 자연과학적인 질병의 원인이 아닌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질병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병원 의사에게보다는 환자를 찾아간 목회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질병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 즉 질병에 대한 신학적 이론을 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병든 자들의 그러한 물음에 담긴 심리적인 의미는 무엇이며, 그와 더불어 “왜”라는 질문으로 자연과학적인 질병의 원인보다는 자신의 질병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을 우리가 목회상담자로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며, 진정으로 어떻게 그들을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으로 도울 수 있는지 목회상담적 접근방법을 모색해 보는 것이 목적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연구되어진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질병으로 인한 병든 자들의 심리적 반응으로서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질병의 의미를 묻는 물음의 내적인 의미와 물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질병이 죄의 대가로써 하나님의 징벌로 판단하는 질병의 의미부여에 대한 심리적 이유를 살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질병을 죄의 대가로 이해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다루게 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질병을 잘못 살아온 과거 삶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는 ‘퇴행적 집착’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구원과 치유가 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목회상담학적인 접근방법을 다음 네 가지로 제시해보고자 한다.

열려진 질문, 대답해야 하는 의무감으로부터 해방, 고통의 나눔, 신앙적인 지탱과 위로이다.

 

2. 질병으로 인한 병든 자들의 심리적 반응

 

1) 질병의 의미에 대한 물음 -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자기 스스로 환자가 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된 의사가 그를 방문한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일생동안 저는 열심히 일했고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이런 모습으로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요즘 더 이상 이렇게 질문하지 않지요. 진실이 아니지요. 그것은 중년기에 질문하는 물음에 불과하지요. 이러한 질문은 사실 요즘시대에 뒤진 말이지요.” 이 말에 목사는 대답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이 늘 다시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게 되죠.” - “그렇지요.”라고 의사는 그 말에 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맞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단순히 멈추지 않아요.”

 

병원목회상담에서 우리는 질병으로 인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의심해 하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게 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많이 질문한다.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러한 모든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까?” “왜 나는 이래야 합니까?” “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처하면 이러한 생각을 우리 스스로 억제하거나 그러한 생각을 한 번 표현하고 나서 위에서 언급한 의사처럼 그것을 곧 다시 취소하기를 원한다. 여기서 우리는 긴장 속에서 서로 지울 수 없는 극단적인 두 생각이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극단적인 두 생각은 강하게 서로 함께 존재한다. 즉 한 편으로는 질병으로 인한 자신의 고통과 다른 사람의 여러 형태의 고통에 대한 무력함과 굴복감, 다른 한 편으로는 모든 것에 대하여 초월하거나 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많은 일들 속에서 고통과 아픔으로 쓰러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고통에 처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은 의심의 감정이면서 한편으로는 또한 갈망이다. 저항하고 싶은 감정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신뢰로 버티고 싶어 한다. 때로는 다시 자유대신 속박과 무력함, 그리고 좌절을 경험하기도 한다. 여기 또 다른 상담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4인실 병실에 누워 있는 75살의 할머니를 병원 상담자가 방문하게 되었다. 그 환자는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 누워 있어요. 모든 사람이 이곳에서는 그렇게 혼자이며 오직 자신을 위해서 있지요. 저는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많이 여기서 죽는지 아세요? 제가 여기 있는 동안 이미 네 명이 죽었어요. 여기 이 병원에서 얼마나 죽어가야만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잠시 멈추더니 그 할머니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서는 단지 자신을 위해 최소한의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을 바랄 뿐이에요.”

 

목회상담자는 할머니가 이야기하고 있는 병원의 상황이 할머니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할머니는 모든 것을 여기서 그렇게 인도되어진다고 느끼고 있군요.” 그때 그 할머니로부터 마치 갑작스러운 파도처럼 말이 튀어 나왔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야 해요. 모든 삶이 다 그랬지요. 처음에는 전쟁, 그러고 나서 자식들 키우고, 집 사고, 일하고, 그리고 지금은 암이에요!” 할머니는 자신의 병의 체류기간을 세면서 의사는 아직 반년은 남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자신의 분노를 의사에게 그리고 모든 가능한 사람들을 향해 폭발했다.

 

목회상담자는 할머니의 생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려고 애를 썼다. “할머니는 정말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군요. 그것이 사실이에요. 그러나 거기에 전혀 좋았던 날은 없었을까요?” 이러한 말이 할머니를 자극하게 되었다. “어떻게요? 스무 살 나이에 전쟁에서 저는 저의 친척을 묻었고 길가 옆에 무덤들을 팠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강을 헤엄을 쳐서 건넜습니다. 그러나 나의 약혼자를 잃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침내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었죠. 그런데 어떤 여인이 나타나서 자기 남편과 무엇을 하고 있냐는 것이에요. 저는 그 남자와 다시 헤어져야만 했지요. 그때 저는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는 그리고 나서 19살에 불의의 죽음을 당했어요. 그리고 다시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낳아서 힘들게 살아왔는데... 그리고 지금은...?” 할머니는 계속해서 말했다. “한 번 말해 보세요. 제가 무엇을 했다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제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제가 이런 심한 병으로 벌을 받아야 합니까? 답을 알고 계십니까?” 힘없이 할머니는 손으로 이불 위를 내리쳤다

 

내가 겪어야 하는 병의 의미는 무엇인가? 수천만 명중에 왜 하필이면 나일까? 이러한 질문은 종종 하나님과 관련짓게 된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놔두실 수 있습니까?” 그래서 마침내 질병의 의미에 대한 의심이 하나님에 대한 의심으로 표현되어진다.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하나님은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을까? - 이러한 물음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전해진다. 그것은 나에게 가치가 없는 거야!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것은 부당해! 하나님은 나에게 부당하게 하고 있는 거야! - 이러한 진술에 대하여 종종 아무런 주장도 세우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리고 “왜” 병으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러한 물음 속에 숨겨진 의미를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이러한 질문에 대한 특정한 대답, 즉 꼭 어떤 분명한 대답을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대답은 오히려 병든 사람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회고해서 오랜 자신과의 심적 갈등 후에 비로소 개인적으로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그 질문에 대하여 꼭 대답해 주어야 한다는 책임은 없다.

 

둘째, 때로는 그러한 질문은 자신이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당한 대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형상을 묻는 것이다. 질문에 담긴 하나님의 형상은 포악한 폭군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욥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욥이 올바른 데도 불구하고 내리치신 그러한 분이며 아무도 거기에 관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욥을 축복을 하셨으며, 그리고 그를 징계하신 분이었다(욥10:8). 이 두 가지 사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될 수 있을까? 우선적으로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다. 그것은 잘못과 징계와의 관계 속에 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누가 여기서 죄가 있는가? 친구들은 욥에게 숨겨진 죄가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욥은 그것과는 반대로 다른 의미를 내세우고 있다. 하나님은 난폭하고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은 하나님에게 있는가? 그것을 주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항한 인간의 자만심이라고 친구들은 욥에게 꾸짖는다.

네 죄가 네 입을 부추겨서, 그 혀로 간사한 말만 골라서 하게 한다. 너를 정죄하는 것은 네 입이지, 내가 아니다. 바로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한다.(욥15:5-6)

그러나 욥 자신에게 잘못을 돌리는 이러한 비난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은 영원히 악한 질책자의 형상으로만 표현된다.

나는 평안히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으스러뜨리셨다. 내 목덜미를 잡고 내던져서 나를 부스러뜨리셨다. 그가 나를 세우고 과녁을 삼으시니 그가 쏜 화살들이 사방에서 나에게 날아든다. 그가 사정없이 내 허리를 뚫으시고 내 내장을 땅에 쏟아 내신다.(욥16:12-13)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욥의 처음 발언과는 달리 여기서는 하나님이 이 시간으로 침입해서 시간의 연속을 파괴하는 난폭하고 포악한 폭군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죄 없는 사람에게 닥친 고통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창조와 역사의 진정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하며 오히려 그러한 하나님의 자리에 어마어마한 악마가 대신 들어 와 앉아 있는 것으로 끝이 난다.

 

셋째, 그것은 공개적이든 숨겨져 있든 하나님을 향한 질문이다. 그 질문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며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물음이다. 때때로 그 질문은 공개적으로 드러내 놓고 표현되어진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아! 어떻게 하나님은 그 많은 것들, 모든 전쟁들, 이 세상의 굶주림, 고통, 슬픔, 재난 등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 하나님은 전혀 존재하지 않다!”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무신론의 고백과 같은 것은 전혀 아니다. 그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필사적인 도전이다. 누군가 “너는 전혀 나를 위해 있지 않아! 너는 전혀 존재하지 않아!”라고 우리의 머리에 돌을 던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넷째, 대부분 이러한 질문은 공격적이며 도전적이다. 공격과 도전은 무엇보다도 목회상담자에게 향한다. 일반적으로 목회상담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들의 역할을 이행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할이 오히려 목회상담자로 하여금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목회상담자는 질문하는 자의 무력감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버리고, 마침내 질병 앞에서의 무력함과 목회상담자 스스로 아무 것도 도와 줄 수 없다는 자신의 무력함 앞에서 순간 질문하는 자와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자주 목회상담자들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왜”라는 질문 속에 담긴 이러한 의미들을 마치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이론을 제기하려는 것처럼 여기며 그들의 신앙에 대하여 의심을 하면서 마치 무신론자의 발언으로 오해하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 의심하면 그가 믿음을 잃었거나 포기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군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와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을 표현하면 무엇이 그에게 문제인지 파악하지를 못하며, 물음에 대하여 함께 공감하면서 참고 견디지를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종종 의심을 갖고 질문하는 대화의 상대자에게 신앙을 다시 일깨워 주려고 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존재하며, 그들의 신앙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대화는 예외 없이 성과 없이 진행된다. 우리의 대화 상대자는 완고하게 대항하며 대항을 포기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서로 대화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2) 질병에 대한 고통의 의미부여 - 죄의 대가로서 하나님의 징벌

 

“왜, 내가 이런 질병으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 뒤에 나타나는 심리적 반응은 최소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해 질병으로 인한 고통의 의미 부여이다. 우리는 질병의 원인을 여러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질병의 원인 가운데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라는 죄와의 관계성 속에서 고통의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통의 질병은 정말 하나님의 징벌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심리적 이유는 무엇일까?

 

질병과 죄와의 관계성에 대한 물음은 고통의 의미를 묻는 영역에 속한다. 고통 중에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고통의 무의미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든 자가 최소한의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목회상담자가 병든 자에게 고통을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시키거나 고통당하는 사람이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고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질병에 대한 고통의 책임이 병든 자에게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완전히 무의미의 어둠 속에서 더듬는 것보다는 나을 때가 있다. 매우 심각한 병을 앓으면서 왜 질병의 고통으로 죽어야만 하는지 고심하고 있는 환자를 만난 목회상담자는 자신의 느낌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죄를 어떤 확실한 것으로 느끼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이미 해안가를 떠난 지 오래고 아직 새로운 해안가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바닷물에 빠질까봐 걱정하고 있다면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최소한 자신의 질병을 죄의 대가로 확신하는 것이 더 간단하지 않을까?” 이것과 함께 우리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징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면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직 방해되지 않았고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또한 징벌은 역설적으로 아직 하나님이 병든 자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

 

맞는 것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어린 시절 우리가 무시당한 듯 부모님이 몇 일간 침묵하거나 우리와의 마주침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오히려 부모로부터 꾸중이나 벌을 받는 것을 원한다. 우리는 자신의 병을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하는 병든 자에게 “당신은 당신의 병을 하나님의 벌로 이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면 그 환자는 그것에 대하여 반항하지는 않으나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유지를 위해 때로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속적인 관심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병을 하나님의 벌로 받아들이기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는 결코 혼자서 버티지 못하고 계속해서 질병에 대한 의문을 제기 한다. “내가 이러한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무엇에 대한 벌인가 내가 구태여 나의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면 나의 상황을 좀 더 잘 견딜 수 있을 겁니다.”

 

병든 자 뿐만 아니라 목회상담자도 역시 질병이 죄의 대가로써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의미부여를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답으로 여길 수도 있다. 심각하게 타격을 받은 욥에게 그의 친구 한 명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사람은, 그래도 복된 사람이다. 그러니 전능하신 분의 훈계를 거절하지 마라. 하나님은 찌르기도 하시지만 싸매어 주기도 하시며 상하게도 하시지만 손수 낫게도 해주신다.”(욥 5:17-18). 여기서 징계를 받는 의미가 신학적으로 설명되고 있으나 그의 징계의 경험은 징계를 받는 사람에게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징계를 주는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정당하게 상처를 받고 징계를 받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이 벌을 주셨다. 하나님은 벌을 줄 권리가 있고 인간은 항상 그것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또한 상처를 준 자가 또한 다시 상처를 싸매어 줄 것이며, 때린 자가 또한 다시 치유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은 인간은 얻어맞은 상태에서 복을 받게 될 것이며, 전능자의 징계를 거부하지 말 것을 경고 받게 된다. 상처를 싸매고 치유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징벌은 동시에 그의 관심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상담자나 고통 받는 사람 모두 최소한의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고통을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하고 싶어 한다. 신약성경에는 이러한 의미를 간결하게 요약하면서 구약성경과 공통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고통 받는 사람에게 자주 인용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은 징계하신다.”라는 구절이다. 병든 자가 속해있는 관계는 특별하다. 그것은 잠언서 3장 11절과 12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아버지적인 충고이다. “아이들아,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의 책망을 싫어하지 마라.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꾸짖으시니, 마치 귀여워하는 아들을 꾸짖는 아버지와 같으시다.” “나의 자녀들아, 주의 훈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마라.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훈련하시고,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자마다 채찍질하신다.”(히12:5-6) 이렇게 신약성경에는 구약성경에서처럼 같은 의미가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친구의 충고적인 말이 욥에게 빈번히 방어를 불러일으킨 것처럼 “아버지적인 훈계”에 우리는 거부감을 갖는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징계로 성장한 경우 더욱 그렇다. 히브리서처럼 우리가 확신하고 싶은 부모의 사랑을 징벌과 관련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은 자신의 병으로 버둥거리는 것을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일치시키려는 경우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러므로 목회상담자가 병실을 방문하게 되면 환자가 공격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래요, 목사님은 나에게 또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는 말을 하시려는 거지요?”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아요!”

 

벌을 통해 죄가 없어지고 관계가 분명해지기 때문에 정당한 벌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나 죄가 없는데 고통을 부당하게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큰 소리, 또는 낮은 소리로 대항을 한다. 시편에서 우리는 이러한 대항의 소리를 찾아 볼 수 있다. "음식을 먹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내 마음은 풀처럼 시들어서 말라 버렸습니다. 나는 재를 밥처럼 먹고, 눈물 섞인 물을 마셨습니다. 주께서 저주와 진노로 나를 들어서 던지시니, 내 사는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으며, 말라 가는 풀과 같습니다."(시102). 하나님은 고통 받는 자를 들어서 땅위에 던지신다. 이보다 더 가혹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반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는 말이 여전히 우리 안에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마도 그것은 어린 시절 경험과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를 잃을까봐 두려움이 있었다. 그 두려움은 때로는 우리의 삶에 위협을 주기도 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부모의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했다. 그것 또한 마찬가지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는 말이 여전히 우리 안에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우리가 부모들로부터 정당하지 않게 취급되었다고 느낄 지라도 감히 거역하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3) 질병을 죄의 대가로 이해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

 

지금까지 우리는 병든 사람이 자신의 질병으로 인해 겪는 아픔 때문에 던지는 질문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의미와 그 물음에 대한 반응 중의 하나로써 질병을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죄의 대가로서 고통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심리적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건강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질병은 정말 죄의 대가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은 없는가?

건강과 질병에 대한 기독교적인 관점은 단순히 의학적인 정의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극복에 대한 전인적인 이해가 반영되어져야 한다. 즉 건강하다는 것과 질병에 걸렸다는 것은 개인적인 인생경험과 문화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문화적 이해란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질병과 치유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 당시에는 현대 의학이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유란 종교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주, 곧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출15:26)라는 말은 의사로서 치료직의 의미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으로서의 치유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당시 나병과 같은 피부병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었으며 불결한 것으로 여겼다. 깨끗하고, 불결한 것, 그리고 그것이 금기인지 아닌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진단은 제사장의 몫이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의 기적치유는 영적인 질병과 정신적인 질병, 그리고 육체적인 질병에 대한 분명한 구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없다. 즉 그것은 어느 한 쪽만의 치유가 아닌 통합적인 차원의 치유였다. 성경에서 나타난 예수의 치유는 병든 자와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전인적인 차원의 치유였다. 예수는 병든 자를 회중과 종교 공동체로부터 제외시키지 않았다. 예수의 치유는 전적으로 병든 자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의약이냐 아니면 믿음치유냐 하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오늘날까지 병든 자, 특히 정신 이상자를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으며, 현대에 와서 암 또는 에이즈 환자들을 종종 피하기도 한다. 이렇게 특별한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연관 지어 생각하거나 질병을 자신의 잘못, 또는 죄로 생각할 경우에 더욱 심각하다.

 

요한복음 9장에 나타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질병과 죄와의 관계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언뜻 예수의 대답은 논리적이지 않다. 두 번째 부분은 첫 번째 부분과 맞지 않다. 그는 다른 차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부분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반응이었으나 두 번째 부분에서 예수는 그러한 질문을 부인하며 모든 논리를 깨트리신다. 그는 바로 계속해서 “내가 그에게 기적을 행할 수 있도록 그는 눈먼 사람으로 태어나야만 했다”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말이 더 논리적이었을 것이다. 대답의 첫 부분은 언어적으로 단절되었으며 두 부분 사이에 방향 전환이 일어나는 중단이 생긴다. 당연히 눈먼 사람이나 그의 부모 또한 어떠한 잘못이 없기 때문에 예수에게는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죄에 대해서 언급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 눈 먼 사람과 그의 질병을 자신과 관계시켰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그리고 ‘지금 일어나는 것’과 예수와의 만남의 순간에서 분명해지는 ‘구원’이다. 태어날 때 눈 먼 사람과 지금 보는 사람은 예수가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8;12)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질병과 죄와의 논리적인 관계를 깨뜨리신다. 이 순간 죄에 대한 질문은 그에게 관심이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의미로서 어디로부터,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런지 이유를 찾으며 마침내 단념으로 끝나버리는 대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인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힘으로 연관시킨다.

 

그러므로 질병에 대하여 호네커(M. Honecker)는 다음 세 가지 관점으로 정리고 있다.

 

첫째, 현실적으로 볼 때 고통과 질병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삶에 속한다. 그러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이 구원이 아니다. 그러므로 역전의 논리 속에서 질병을 불행과 죄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신앙이란 노인과 병든 자가 없는 건강한 세계의 유토피아가 아니다. 신앙은 병든 자를 분리하는 것을 거부한다.

 

둘째, 질병에 대한 기독교적인 의미는 각 사람이 창조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병든 자와의 교제를 위해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의 연대적인 공동체를 요구한다. 의사와 병든 자를 돕는 사람은 고통과 질병에 대항하여 투쟁할 때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이다. 이러한 이해의 근원은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인간성"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며 약한 자에게 향한 “예수의 공감"이다.

 

셋째, 건강과 질병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전기의 표현이다. 건강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삶의 힘, 즉 삶을 긍정하는 힘이다.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이러한 의미에서 “건강한” 것이다. 의로워 짐으로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었고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개인적인 한계를 경험하고 인정하기 때문에 삶에 대한 긍정이 기독교인에게는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병든 자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생명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는 질병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건강하다는 것은 오히려 신체적으로 인간의 한계 속에서 사는 힘이다. 전인적인 형태의 육과 정신, 그리고 영의 일체는 병든 자에 의해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건강하다는 것은 모든 방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방해들과 함께 살아가는 힘이다. 신앙은 “약한데서 오는 힘”(고후12:9)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능케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인 생명이 아니라 완전한 의미에서 전인적인 인간의 생명이다. 그것은 사회적인 차원, 인간애, 공동체 안에서의 생명을 의미한다. 의학적인 모든 도움을 이러한 포괄적인 차원에서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을 위한 힘으로서 신앙은 마침내 개인적인 운명을 극복하도록 이끈다. 신앙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함으로 건강한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으며 병든 사람에게는 생에 대한 확신과 삶의 의욕과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다. 신앙은 소위 질병 속에 숨겨진 깊은 진실을 발견하게 한다.

 

그러므로 인생을 새롭게 정리할 정도로 질병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깨닫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나중에 질병의 경험이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위기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죄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과 이러한 경험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즉 전자는 질병은 동시에 지금까지의 잘못에 대한 영수증과 같다고 해석하여 ‘과거를 구속’하는 반면, 후자인 이 경험은 ‘앞으로 향한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체념으로 이끌게 하며 환자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대화를 끊고 싶어 한다.

그러나 환자가 바깥쪽을 향하여 문을 열게 되면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저는 이제 나의 인생이 달라진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건강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건강은 꼭 그렇지만은 않지요. 저는 좀 더 의식하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저는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 싶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인생을 다른 빛 안에서 바라보게 된다. 관점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구원과 치유가 된다.

그렇다면 질병을 잘못 살아온 과거 삶의 집착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통해 진정한 구원과 치유가 될 수 있는 목회상담적인 접근 방법은 없을까? “왜”라 는 질문 속에 담긴 이러한 다양한 반응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물음에 목회상담자로서 어떻게 답하는 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3. “왜”라는 물음에 대한 목회상담학적 접근

 

1) 대답해야 하는 의무감으로부터 해방

 

“한 번 말해 보세요. 제가 무엇을 했다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제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제가 벌을 받아야 합니까? 답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무슨 말로 응하기를 원하는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우리가 주로 하고 있는 가능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 아주머니는 무언가 불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주머니가 말했듯이 아주머니에게는 두 아이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아이들을 생각해서 힘내세요!

- 한 번 솔직해 보세요. 전쟁 때문에 고통을 당한 자가 아주머니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한 번 저의 어머니에게 물어 보세요!

- 선생님이 겪은 일들은 정말 좋지 않은 경험이지요. 그러나 저는 선생님의 인생에서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느 누구도 전혀 죄 없는 사람은 없어요. 혹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어두운 부분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요?

- 모든 고통에는 감추어진 의미가 있지요. 그러므로 고통을 받아들인다면 그 고통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지요.

-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훈육시키십니다.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것은 단지 더 병들게 하지요. 무엇인가 아름답고 긍정적인 것을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대답들은 일반적으로 더 말이 많고 친절한 방법으로 포장되어 전달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포장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답들이 틀에 박힌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유와 의미에 대한 물음은 실질적이지는 않더라도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열거한 대답들을 한 번 우리 자신을 향해 말해진다면 얼마나 두렵고 거의 이해할 수 없으며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는지 의심이 된다. 우리 스스로도 이러한 말들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 라고 질문하는 그러한 의심의 상황에서 고통 받는 자가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경험해야만 하는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스스로 고통 받는 당사자가 된다면 “왜,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을 당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할 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이 우리의 귀에 뚫고 들어 올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러한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질문 자체를 견딜 수 없어 하며 그 질문으로부터 회피하려는 대답으로 반응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왜”라는 물음에 대하여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하려고 애를 쓴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모든 가식적인 확신이 땅에 떨어지게 되고, 모든 가면이 찢어지게 되며, 그리고 모든 답변이 정체가 들어 나는 빈말이 되어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환자에게 신앙적인 설명과 함께 질병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어떤 분명한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왜 하필이면 꼭 그것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무엇 때문에 내가 그러한 일을 당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나님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셨는가? 라는 그렇게 세속적이고 불공평하며 무의미하게 들리는 질문들은 마지막 의미영역인 나의 존재가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향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질문들이 목회상담자인 우리의 귀에 들어오게 되면 그러한 질문들은 우리 자신을 향한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와 닿는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기꺼이 대답을 하려고 하는가? 또는 더 잘 표현한다면 왜 질문을 미해결로 내버려두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모두들 단지 대답으로 거대해졌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진정한 대답은 없고 오히려 그럴듯한 대답들이다. 그 대답들은 질문보다 앞서있으며, 질문들을 방해하며 질문에 대한 의지를 미연에 방지해 버리며, 질문들을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감추어버리려고 한다. 마치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내보내기 위하여 대답들이 잘 포장되어 들어 있는 어떤 한 상자 위에 앉아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뜻밖에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내기를 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러나 고통당하는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아직 질문들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숨겨져 있고, 수수께끼 같고 무서운 하나님으로서, 욥에게서, 또는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와 같이 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는 불공평한 재판관으로서 경험하고 있는 것을 말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그들은 최소한 옷의 끝자락이라도 붙잡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도전을 하고 반항을 한다. 따라서 목회상담자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던지는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러한 일을 당해야 하는가?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은 목회상담자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풀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2) 열려진 물음

 

열려진 물음이란 병든 자들로 하여금 “무엇 때문에”, “왜” 라는 질문을 억제하지 않고 표현하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질문이 열려져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음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사례보고는 아직 목사가 아닌 병원 목회상담 실습생에 의한 것인데 그 실습생은 한 여성 환자의 “왜” 질문에 대하여 알맞게 반응을 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대략 60살의 이 환자에게 그녀는 좋은 인상을 주었으며, 어느 날 아침 그녀가 그 환자를 방문 했을 때, 그 환자는 또 한 번 대화를 나누기 위해 다시 찾아 와 주기를 요구했다.

 

실습생이 병실에 들어서자 그 환자는 불쑥 말을 시작했다. “의사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나는 내가 대장암이고 그것이 이미 다 퍼져버렸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내 인생이 끝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처음에 나는 이러한 생각들을 하지 않으려고 많이 애를 썼지요. 그래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진실 앞에서 영원히 도망칠 수 없지요. 모든 것에서도 마찬가지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일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내가 그런 건가요? 무엇 때문에 내가 지금 이러한 고통으로 죽어야만 합니까?”

실습생이 의심으로 가득한 이러한 질문 앞에서 한 대답은 이렇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정말 어려운 질문을 하시는군요. 그 질문은 매우 정당하지만 저는 아주머니에게 아무런 대답을 줄 수 없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환자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실습생이 그 환자에게 대답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 환자는 화를 냈을까? 그 환자는 실망하여 관계를 끊고 실습생에게 등을 돌렸을까? 그 환자는 실습생에게 자신에게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예를 들면 목사와 같은 다른 사람을 불러오라고 요구할 것인가? 실습생은 그 침묵의 순간 완전히 확신도 없었고, 자신에게 어떤 책임을 느꼈지만 자신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환자는 실망하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그 환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죽음에 대해서 큰 두려움이 있어요. 저는 혼자에요. 그러나 지금 나는 나에게 아직 낯선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혼자 있고 싶지가 않아요.” 이것은 혼자 있는 것이 두렵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실습생에게 다가오는 시간을 함께 있어주기를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대화는 오직 상대방에 대한 커다란 신뢰를 토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실습생이 그녀에게 대답을 제대로 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이러한 신뢰가 가능하게 되었을까? 결정적인 것은 실습생이 병든 사람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습생은 질문하고 있는 병든 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던 것이다. 만약 실습생이 그 환자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환자의 질문을 진실로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예를 들면 실습생이 그럴듯한 대답으로 그 아주머니를 안정시키려고 했더라면 그 아주머니는 그 실습생을 거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습생은 질문에 대한 환자의 권리를 인정하고 자신 스스로도 대답할 수 없음을 고백함으로써 병든 여인과 실존적으로 같은 처지에 있다는 인상을 준 것이다. 그것을 통해 죽어 가는 사람은 자신의 의문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며 실습생에게 계속적인 방문을 요구하는 용기를 갖게 된 것이다.

많은 목회상담 대화에서 공개적으로 또는 (대부분) 숨겨진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왜”라는 물음은 교리적인 설명의 차원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을 한다는 것이 신앙적이지 못하다거나 또는 완고하다는 표시는 아니다. 오히려 질문의 목표는 변화될 수 없으며, 다시는 반복이 불가능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비밀이다. 사람이 상처를 받고 위협을 당하면 그러한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절망적인 심정이 그러한 질문을 유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은 종종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을 때 마침내 큰소리로 외치게 된다. 때로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래, 다가와야만 하는 모든 것이 온 거야! 그것을 거부할 의미가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그 질문은 종종 힘들게 억제되고 침묵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목회상담자는 환자가 자기 안에 숨겨진 의문을 억제하지 않고 밖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어떠한 것도 질문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여야 한다. 환자가 자신이 던진 질문이 잘못된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러한 질문이 가능하다는 것을 느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정해진 대답은 없다. 왜냐하면 단지 미래가 열려있고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길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들을 신학적으로 분류한다면 그것은 “마지막 사건에 대한 가르침”, 즉 종말론에 속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내게 아무 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16:23) 그 날은 “왜”라고 질문을 던졌던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이 오시는 날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 이러한 질문을 억제하고 싶지 않으며, 그럴듯한 말로 만족을 주고 싶지 않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답하실 질문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질문을 하도록 내버려둘 필요가 있다.

 

3) 고통의 나눔

 

“왜”, 이것은 하나의 질문이며, 그 질문은 대답을 찾고 있으나 정해진 대답은 없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대답 그 이상을 찾고 있다. 그 질문은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견디어 내고 함께 나누는데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없는지 우리를 찾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대신에 필요한 목회상담자의 반응은 병든 자와의 ‘고통의 나눔’이다. 그렇다면 그 고통의 나눔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첫째, 목회상담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먼저 받은 자로서, 그리고 튼튼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약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앓고 있는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로서 존재한다. 목회상담자로서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는 그 한가운데서 우리를 통해, 그리고 약한 자에게서 힘이 되시는 성령을 통해 생명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 자신은 아무런 힘이 없지만 그의 병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병들어 있는 나의 이웃과 함께 하나님의 강한 자비로우신 손안에 보호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의 장소는 위로부터 오는 돕는 자와 구원자를 기대하는 장소로 변화되며, 이 장소는 병든 자가 자신의 연약성, 무력, 죄를 깨닫는 장소가 된다. 그래서 병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지나온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명상의 장소가 된다. 명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시 재구성하는 것이다.

 

둘째, 병든 자의 현재 상황에서 출발한다. 예수 자신이 병자들, 그리고 삶에서 소외를 당한 모든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들의 고통을 더불어 나누신 것처럼(마25:35이하) 목회상담자는 어떠한 선입견 없이 병든 자의 현재 상황에서 그와 만나야 하며 사랑의 열정 외에는 다른 어떠한 것도 필요가 없다. 목회상담자의 방문은 병든 자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병든 자가 목회상담자의 방문을 통하여 사랑에 가득 찬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상담자로서 우리는 병든 자의 말을 경청하고, 간단히 산보하거나 지나치게 자신에게 집착해 있는 것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건강한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는 병든 자는 잠시나마 목회상담자를 통하여 다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경험하며 그를 위해 염려하는 목회상담자를 사랑의 증명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셋째, 병든 자와의 실제적인 만남을 위한 노력이다. 그것은 목회상담자가 병든 자의 주위세계, 가족관계들, 교육수준, 출생지, 직업, 병 때문에 생긴 모든 고민을 받아들일 때 병든 자와의 실제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병든 자가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지 않고 목회상담자가 먼저 얼른 그들의 질문에 응답하기 위하여 말하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목회상담자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모든 감정이 밖으로 표현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병든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뿐만 아니라 그의 표정, 그의 몸가짐, 절망, 살려는 욕구를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인 참여의식과 온정과 호의를 가지고 완전히 병든 자의 관심사에 주의를 돌려 귀를 기울여 듣고 받아들여야 한다.

병든 자들은 목회상담자가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려는 이러한 반응으로 우리가 그들을 버리지 않고 그들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병으로 인한 그들의 고독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그들의 고통을 목회상담자에게 털어놓을 수만 있다면 그들은 완전히 혼자라는 외로움의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 목회상담자가 “왜”라는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대답을 하려는 노력보다는 이러한 반응으로 병든 자와 함께 그의 고통을 짊어진다면 그의 고통은 조금은 가벼워질 것이다.

 

4) 신앙적인 지탱과 위로

 

목회상담자는 병든 자가 “왜”라는 질문을 하지 못하고 억제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면 이유에 대한 물음을 인정하거나 그녀를 격려하는 신앙의 용기가 필요하다. 목회상담자는 질병의 위력 앞에서 무력감과 무의미성을 자주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질병에 대한 의미를 찾았든지 그렇지 못했든지, 또는 자신의 병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과 질병으로 인하여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치유되지 않는 회복이 불가능한 사람에게도 모두 영혼 돌봄의 지탱과 위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앙적인 지탱과 위로는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에게 도덕적인 대화나 종교적인 대화로 고통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값싼 도움은 아니다.

그러므로 욥기에서처럼 질병에 대한 의미부여나 신앙적인 설명이 고통 받는 자를 위한 목회상담의 우선적인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질병에 대하여 독단적인 틀을 가질 수 있는데 질병의 진정한 존재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독단적인 틀에 의해 설명되어진 질병의 위력이 인간으로 하여금 걱정과 무력감속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실망과 의심과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인간이 힘든 고통으로 영적으로 망가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과연 있는가?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라고 의심을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신앙이 없다고 단정을 내린다. 그러나 신앙이 없이 의심은 없다. 의심은 신앙이 전제된다. 의미에 대하여 의혹을 갖고 질문하는 사람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렇게 의혹을 갖고 찾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외치는 자는 하나님에게 도전하려고 하며, 하나님을 부르려고 한다. 그는 종종 마귀의 얼굴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괴로워하기도 하며, 때로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기도 한다.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등에서 부르짖는 외침이다. 그 외침은 하나님이 돌아서서 외치는 자를 바라보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삶의 의미를 질문하고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무의미와 의미에 대한 갈망과 무력함과 숭고함과의 갈등 속에 서 있다. 신앙은 이러한 갈등이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토양이다. 기독교인의 자유는 의미를 묻고 하나님에게 도전할 수 있는 데 있다. 그가 그것을 할 수 없다면 믿음의 갈등은 허물어지게 되고, 결국 냉정한 무관심 속에서 단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고통과 죽음이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 위로는 고통과 죽음의 특성을 빼앗아 버릴 수 있으며 신뢰할 수 없는 감언으로 이끄는 위로가 될 수 있다. 고통과 죽음을 장악하려는 의도로 신앙에 대하여 호소하는 목회상담을 지양한다. 우리에게 신앙이 있다면 고통과 죽음이 아무런 해가 될 수 없다는“거대한 비약”을 권하지 말아야 한다. 또는 신앙이 위에 있다면 고통과 죽음은 침하 되어 사라지고, 그 반대로 고통과 죽음이 강하게 나타나면 신앙은 사라지는 한 번은 이편으로 그리고 다시 다른 편이 위가 되는 그런 시소와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이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대가로서 영수증과도 같은 질병에 대한 의미부여를 포기할 때 신앙은 유지된다. 왜냐하면 질병의 의미가 병든 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구원의 빛 안에서만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건강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마지막 재산이 아니라 끝에서 두 번째의 재산이다. 그러므로 병든 자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가 다시 육체적으로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것이다.

신앙은 오히려 건강을 신성화하는 것을 막는다. 신앙의 의미는 필히 치료적인 효과를 나타내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약속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과 지금 체험하고 있는 좌절 사이에서 긴장하면서 존재하고 있다(롬8:19이하). 그러므로 신앙은 문제를 없애거나 건강을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다.

 

타케(H. Tacke)에 의하면 신앙이란 삶을 돕는 것으로써 불안한 사람이 하나님의 신뢰에 의지하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즉 자신을 포기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온 질병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신앙을 통해 질병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명상의 장소가 되어 자신의 삶에서 잘못된 길들이 인식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구체적인 죄의 인식과 참회가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목회상담자는 병든 자와의 대화에서 그의 잘못된 신앙적인 자세를 추궁하거나 억지로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병든 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육체적이고 영적인 치유는 신앙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인간이 치유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건강한 사람이 어떻게 치유되지 못한 사람과 살아갈 수 있는지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다시 우리가 뛰어 넘을 수 없는 긴장을 표현하는 공식으로 인도되어 진다. 그것은 믿음의 비밀이다. 이사야서의 “나는 너를 어느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그가 우리를 떠난 그 순간조차도 우리와의 관계를 끊지 않으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우리에게 그러한 순간에도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고통 속에 있는 커다란 하나님의 부재의 순간에도 우리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찾고 있으며, 우리 곁에서 잠시 참고 견디어 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야 하는 일이 우리에게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러나 큰 긍휼로 너를 다시 불러들이겠다.” 라고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4. 나가는 말

 

우리는 모두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위기나 육체적 또는 정신적 고통에 처하면 왜 나는 이래야 하는가? 왜 그렇지 않을 수는 없을까? 라고 물음을 던진다. 그러나 나 자신으로부터는 아무런 대답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대답은 나의 환경으로부터도 아니고 더욱이 이 세상으로부터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질병의 위기에 처하면 질병으로 오는 고통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를 쓴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왔고, 잘못 살아온 ‘대가’로써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제 우리의 삶에서 무언가 달라져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바쁨 속에서 너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고, 우리의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고, 우리 인생의 중요한 물음들을 회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면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행복과 불행이 평형을 이룬다는 운명의 그림을 다시 받아들인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 저울을 우리 자신에게로 옮겨본다. 이제는 소위 “영적인 평형”이 문제이다. 거기에 방해가 있고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근본적인 것을 무시한다면 죄책감이 생기게 된다.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인생”에 어떤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 안에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알림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생의 한계의 결과로써 삶의 제한과 생에 대한 파괴적인 저주로써 질병을 좀 더 정확하게 구별하는 분명한 신학적인 표준이 없기 때문에 목회상담에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서 그 발단을 찾고 견딜 수 있는 질병과 고통,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질병과 고통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질병을 견딜 수 있는지 없는지는 질병의 심각성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인격구조와 생활태도,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통해 체험한 질병에 대한 경험과 나눔,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떤 경우에든 인격을 혼란시키는 질병은 견디기 힘들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일과 능력에 일치시킬수록, 그리고 질병을 통해 이러한 능력이 인간에게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질수록 질병이 오면 누구에나 깊은 ‘정체성의 위기’가 따른다. 물론 질병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은 불확실한 ‘자존감’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질병을 자신이 살아온 인생사로부터 이해하려고 하며, 새로운 인생방향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병든 자를 위한 목회상담은 과거 집착적인 “왜 내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미래지향적으로 새로운 인생방향을 찾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병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과거 인생사의 결과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어떤 목적으로의 의미와 함께 새로운 인생방향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질책과 불신앙을 추궁하는 의미로써 잘못 살아온 과거에 집착하는 질병의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인생방향으로의 질병의 의미를 찾을수록 힘든 운명을 쉽게 견딜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상담의 과제는 질병은 병든 자에게 지금까지 닫혀져 있는 진실의 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돕는 것이다. 곧 하나님을 다시 찾고 자기가 받은 생명의 궁극적 의미와 목표를 확정하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육체적인 질병만을 치유하여 건강한 몸이 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치유될 수 없을지라도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견디어 나갈 수 있는 깊은 영적인 차원, 곧 하나님의 차원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기쁨과 평안을 체험하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상담자는 병든 자의 질병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답하려는 의무감이나 질병의 고통을 신앙적인 검증의 차원으로 판단하는 무모함에서 벗어나 고통의 아픔을 함께 나눔으로써 그들에게 감추어진 감정이 충분히 밖으로 표현되어지도록 하여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하나님과 함께 재구성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제4장 심리치료와 기독교인

상담이란 무엇일까? 에 대한 질문으로써 상담은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만남의 예술로 정의를 하고 싶다. 여기에서 세 가지 중요한 범주들에 대해서 좀 더 분명하게 밝혀야 논의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리라 본다. 1. 만 남 만남은 여러 가지 측면과 차원에서 조명을 해 볼 수 있겠다. 어떤 수단 혹은 도구를 통해서 만나는가 하는 점에서 만남을 정의할 수 있겠다. 전화로 만나는 전화상담, 편지로 만나는 서신 상담, 컴퓨터를 통해서 만나는 사이버 상담, 직접 얼굴을 마주보는 면접 상담 등을 생각할 수 있겠다.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서 상담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면접상담을 중심으로 상담을 발전해왔는지 상담역사와 서구문화의 토양을 살펴보는 일을 상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한국의 경우, 면접상담 보다는 전화 상담이 많은 호응을 받고 있는데 전화 상담에 대한 이론적 확립의 노력 혹은 기술적 차원의 주제들에 대해서 별로 많은 학자들이 조명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신 상담의 경우에도 한국 문화 혹은 넓게는 비 표현의 문화를 가진 아시아의 경우에는 중요한 상담의 방법이나 수단이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우리는 부부 상담 혹은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에서 서신을 통해서 만나도록 하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표현에 익숙하지 못한 가족들인 경우에 효과적 수단이 됨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신세대를 중심으로 열병처럼 번지고 있는 사이버 상담의 경우에 앞으로 상담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중요하게 다루어야할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정보사회의 핵심이 컴퓨터라고 한다면 컴퓨터를 통한 상담의 방법을 개발하고 이에 대한 이론의 대비를 하는 일은 상담의 미래를 좌우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만남의 수준이라는 측면에서 생각을 할 수 있겠다. 전문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전문 상담은 많은 임상훈련과 학문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상담을 의미한다. 준 전문상담은 어느 정도 임상훈련과 다소간의 학문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상담을 말한다. 비전문 상담은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상담을 의미한다. 친구관계 혹은 부모자녀 관계 혹은 부부관계 혹은 직장 및 무수한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상담을 의미한다. 상담이 주로 전문가 중심으로 이루어져왔기 때문에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상담의 현상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가 부족한 실정이다. 만남의 수준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전문 훈련과 지식이라는 측면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삶의 경험과 인간 자질이라는 두 측면에서 중요하게 연구되고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전문 상담자에 의해서 행해진 전문 상담과 비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진 상담에 대해서 의의 있는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는 상담자의 자질에 대한 두 측면에 대해서 주목을 해야 하는 대목이라고 생각된다.만남의 영역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심리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심리 상담, 교육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교육 상담, 종교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종교상담, 법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법률 상담, 목회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목회상담, 결혼 중매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결혼 상담, 세무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세무 상담, 직업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직업상담, 행정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정 상담 등등 수없이 많은 직업의 종류에 의해서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심리 전문가들은 상담을 심리 영역으로만 국한시켜 생각함으로써 상담이 일어나고 있는 많은 영역들을 스스로 위축시키고 있다. 여러 가지 직업의 종류에 의해서 일어나는 상담의 현상을 개념 혹은 관점을 통해서 정리하려는 노력의 부족 현상은 상담의 현상이 흩어지며 전문 영역으로 자리를 잡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가져오게 한다. 상담의 방식 측면에서 만남의 방법은 다르다고 생각된다. 개인상담의 경우에 있어서 만남의 방법은 일대일의 만남이며 가족 상담 혹은 집단 상담의 경우에는 일대다 혹은 다대다의 만남의 방법이다. 일대일의 만남의 방법은 깊은 심리적 차원의 만남을 전제하고 있다. 내담자들은 상담을 통해서 자신들의 내면세계와 상담자의 내면세계가 깊이 있게 만난다. 이러한 깊이 있는 만남이 곧 내담자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고 있다. 집단 혹은 가족 상담의 경우에는 상담자 자신이 내면세계를 드러내고 깊이 있는 만남을 하기보다는 가족 구성원 혹은 집단 구성원들끼리 깊이 있는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코치 혹은 지도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경우에는 집단 혹은 가족의 전체 역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때로는 많은 정치적 안목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겠다. 전체의 틀을 바꿈을 통해서 개인의 변화를 꾀하는 활동이다. 2. 예 술상담은 예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정교한 과학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상담의 실제에 있어서 예술성이 발휘되어야 한다. 아무리 도공이 도자기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도자기를 실제로 빚어보지 못하면 제대로 도자기를 생산할 수 없는 예술성과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인간에 대한 아무리 훌륭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실제로 내담자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상담자는 좋은 상담자라고 보기 어렵게 된다. 예술은 작품에 의해서만 평가를 받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상담이라는 좋은 작품이 탄생되기 위해서 상담자는 심혈을 기울여서 상담을 해야 하는 예술성의 혼과 정신을 요구하는 활동이라고 생각된다.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상담은 과학을 통해서 생겨난 학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상담을 과학이라고 생각을 하면 상담이 가지고 있는 예술성을 약화시킨다고 생각을 한다. 물론 상담은 과학의 도움을 받는 예술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상담의 일차적 특성을 과학이라는 학문적 성격에서 찾기보다는 상담은 예술이라는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본다. 상담은 활동을 빼면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학문으로서, 과학으로써 상담만을 생각한다면 대단히 인위적 구분이라고 생각된다. 과학으로써 상담을 생각하면 영토가 존재해야하는데 그러한 영토를 일정한 영역에만 국한시키려는 생각은 자연스러우리라고 생각된다. 상담을 학문의 대상인 어느 영역으로 구분하기보다는 상담의 활동성이라는 측면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상담은 예술세계의 한 분야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서 음악과 미술이 다같이 예술이면서 서로의 영역을 가지고 있듯이 상담도 예술이면서 독특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음악이 소리라는 특성을 통한 예술이라고 한다면 미술은 그림이라는 특성을 통한 예술이라고 생각된다. 상담은 만남을 통한 예술이라고 생각된다. 만남을 통해서 일어나는 변화를 기술하고 그러한 변화들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규명하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상담이 예술이라고 한다면 상담자에게 요구되는 특성이 있다. 개인 상담의 경우에는 상담자 자신이 곧 예술의 도구가 된다. 상담자 자신이 예술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상담자는 자신과 내담자를 동시에 연주해야하는 입장에 있는 예술가로서의 위치에 있게 된다. 어떤 종류의 만남이 되게 하며 언제 어떻게 만나야할지를 예술적 감각으로 구분하고 실제로 이러한 만남을 통해서 좋은 만남의 예술품을 만들어내야 한다. 마치 성악가가 자신을 예술의 도구로 삼아서 좋은 노래를 불러야 하듯이 말이다. 가족이나 집단상담의 경우에는 상담자는 마치 연주가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합창지휘자가 많은 합창단원들을 지휘를 통해서 좋은 합창을 만들어내듯이 가족 혹은 집단 상담자는 여러 사람들이 좋은 화음을 내도록 하는 만남을 갖도록 해야 한다. 집단 혹은 가족상담자는 때로 자신의 예술도구를 시범적으로 보여줄 필요는 있으나 가족 혹은 집단 구성원들과 함께 화음을 낼 필요가 없는 상담활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단 혹은 가족 상담자들은 개인 상담자들에게 요구되는 특성과 다른 예술적 특성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개인 상담을 잘하기 위해서 상담자들은 자신을 좋은 예술의 도구로 만드는 일은 필수적이다. 좋은 예술의 도구는 곧 좋은 만남을 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상담자의 특성으로 요구되는 따뜻함, 진실함, 배려 등의 특성들이 이해될 수 있다. 집단 및 가족 상담자들은 이러한 개인의 특성을 통한 상담자의 자질이 요구되기보다는 지도력, 조정력, 정치력과 같은 관계의 특성들이 요구되는 상담활동이라고 생각된다.상담은 시간의 예술이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내담자들이 받아들이거나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시점에 하지 않으면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가 어렵게 된다. 많은 부모들 혹은 일반인들이 상담자와 같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상담의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까닭은 시간의 예술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부모들이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개입해야 할 적절한 시기를 놓치기 일쑤이며 때로는 개입하지 말아야할 시기에 잦은 개입으로 인해서 더욱더 큰 문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3. 초 월 1) 자기 초월의 의미

인간이 자기를 초월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이 자기를 초월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자기초월을 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인간의 여러 가지 욕구에 사로잡히게 된다. 정신분석에서는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에 원욕이라는 충동적 욕구가 있어서 이 욕구는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고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행위를 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교훈을 주고 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을 초월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면 인간은 동물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욕구나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충동의 인간이 되기 마련이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도덕의 삶을 전혀 살 수 없게 된다. 자기를 초월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행동과 욕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는 적어도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선택을 할 때 어떤 종류의 가치관과 생각의 틀을 혹은 다른 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행동의 방향은 달라진다.초월이란 쉽게 표현을 한다면 자기 자신을 뛰어넘은 상태를 말한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초월하고자하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이 힘이 인간에게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을 더 해보아야 할 것이다. 프로이드에 영향을 받은 많은 상담의 이론들은 욕구라는 생물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인간의 내재된 특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욕구란 신체적 흥분상태로써 인간의 정신적 특성들이 신체라는 영역으로 환원된 느낌을 받는다. 인간의 초월적 특성들은 어떻게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일까?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역량(Capacity)으로써 두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수평 초월(Horizontal transcendence)과 수직 초월(Vertical Transcendence)로 방향성을 생각할 수 있다. 2) 수평초월 (Horizontal Transcendence)수평 초월이란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해서 자신을 뛰어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아픔이나 처지 등을 자신의 아픔이나 처지처럼 생각을 하는 공감 이해와 존중 등을 말한다. 타인을 위한 인간의 행위 곧 이타 행위들은 모두 수평 초월에 해당한다. 상담자들이 내담자들을 공감하는 행위들, 사회사업가들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행위, 이웃들끼리 아픔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는 행위들이 모두 수평 초월에 해당되는 인간의 활동들이다. 수평 초월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하는 능력으로서 타인들을 위해 헌신하는 행위를 말한다. 공감이라는 개념은 수평초월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본다. 수평 초월을 범주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자신과 타인이 같이 들어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범주의 확장으로써 자신과 타인들이 공동으로 들어있을 때 범주의 확장이라고 한다. 공감은 정의 상 자신을 잃지 않고 타인의 감정과 마음을 자신의 것인 양 이해하는 인간의 활동을 의미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만일 인간의 마음속에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특성이 없이 가능하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이 주어져 있으며 이로 인해서 인간은 타인의 마음도 내 마음처럼 이해할 수 있는 활동이 가능하다고 보여 진다. 타인의 마음을 나라는 축에서 이해를 하며 또한 타인의 입장에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특성을 인간은 가지고 있다.수평초월을 말할 때 아마도 인간에게는 서로 공통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 진다. 자신과 타인이 서로 공유될 수 있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공유된 특성들은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서 반영되고 이해되는 것이다. 공유된 특성들이 두 사람에게만 존재하기보다는 아마도 인간이면 누구에나 있는 특성이라고 생각된다. 한 인간에게는 인류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초월적 특성은 모든 인간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인류의 보편적 특성으로 이해된다. 한 인간은 모든 인류의 특성을 자신의 특성처럼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역량이 충분히 발휘될 때 수평적 초월이 완성된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예로써 많은 상담의 이론들은 한 개인의 마음을 조명하는 이론들이지만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원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상담의 이론을 배우는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인류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틀을 갖추게 된다. 이렇게 인류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틀을 가진 사람과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틀을 가진 사람의 행동은 같을 수 없게 된다. 일류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틀을 가진 사람들은 한 개인을 이해할 때 전체 속에서 하나의 개인을 이해하기 때문에 한 개인이 살아가야 하는 방향성 등을 지시하고 조언할 수 있게 된다. 상담자의 활동들은 이렇게 인류에 대해서 이해를 하는 전체의 틀에 근거를 하고 있어서 이러한 틀들이 상담을 가능케 한다.수평초월에서 자신이 포함되지 않고 다른 사람만 이해하는 행동이나 상태는 초월의 상태가 아니다. 수평초월을 말할 때는 범주의 확장을 의미한다. 범주의 확장이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인류 전체가 동시에 들어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만일 자신이 없고 타인만 있다면 이는 여전히 한 개인의 범주만 가지고 있는 셈이 된다. 이러한 범주는 개인 범주이며 관계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다. 범주는 여러 가지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게 된다. 개인 범주, 가족 범주, 사회 범주, 민족 범주, 인류범주사회 등 여러 가지 영역으로 부분이 가능하다. 한국사회는 가족범주의 경향이 아주 강하다. 가족 범주의 여러 가지 변형으로 학교범주, 출신지범주, 회사범주 등이 가능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범주들을 생각해보면 한국인들은 많은 경우에 가족이라는 범주에 갇혀있다고 생각된다. 가족이라는 범주는 생활의식과 가치관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다. 생활의식이라고 하면 조상숭배라는 제사의식을 말한다. 조상숭배라는 제사의식은 가족을 하나로 묶고 가족이 번성해야 한다는 철학적 믿음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가치관 측면에서는 가계계승이라는 대 원칙을 가지고 살아왔었다. 조상을 숭배하고 가계를 계승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되어왔었다. 가난하여도 자식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등의 사회적 현상은 가족범주라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국인의 극단적 개인주의 성향은 아마도 가족범주라는 측면에서 보다 잘 설명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극단적 개인주의가 개인을 위한 행동이나 가치관이기보다는 아마도 가족을 지지하고 살리는 의미에서 개인주의라고 보아야한다. 가족과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행동들이 한국에는 많이 있다. 이러한 행동들을 묶어서 가족범주라는 용어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3) 수직초월수직 초월이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이해하는 행위를 말한다. 영의 세계를 이해하고 영의 세계와 관련을 맺으려는 행위를 의미한다. 영의 세계에는 절대자 곧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려는 인간의 행위를 말한다. 상담은 곧 내담자들이 자신을 초월하도록 하는 활동을 한다. 정신분석에서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분석이라는 활동을 한다. 분석이라는 활동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돕는 과정을 의미하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활동이다. 자신을 초월하는 행위를 하도록 돕는 활동을 한다. 의식화라는 과정은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자기 초월의 행위인 것이다. 대화 상담이론은 대화자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대화를 보도록 돕는다. 이를 대화에 대한 대화(Meta communication)라고 부른다. 대화에 대한 대화는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대화의 패턴을 보도록 하는 자기 초월의 행위이다. 상담자들은 사람에 대한 사람들로서 사람들을 초월하는 사람들(Meta humans)이다. 즉 인간에게는 이렇게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초월을 가리켜서 수직 초월이라고 한다. 수직 초월은 인간의 세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초인간적 경험들은 하나님의 세계인 영의 세계를 수직적으로 초월하는 인간의 행위들이다.인간이 자기를 초월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이 자기를 초월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자기초월을 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인간의 여러 가지 욕구에 사로잡히게 된다. 정신분석에서는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에 원욕이라는 충동적 욕구가 있어서 이 욕구는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고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행위를 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교훈을 주고 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을 초월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면 인간은 동물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욕구나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충동의 인간이 되기 마련이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도덕의 삶을 전혀 살 수 없게 된다.자기초월을 인본주의 심리학의 관점에서도 이해를 할 수 있겠다. 인본주의 심리학에서는 자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자신의 욕구를 예민하게 알고 이해하며 이를 충분히 받아들이면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고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대답이 없다.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고 알 수 있는 능력은 아마도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자신을 알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느끼고 감지할 수 있는 의식의 활동이 가능하다고 본다.

로제리안에서 제시되고 있는 잠재 지각은 결국 수직 초월의 개념을 의미하며 인간은 자신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초월적 존재인 셈이다.자기를 초월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행동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욕구들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의미를 지닌다. 일단 자신의 행동과 욕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는 적어도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선택을 할 때 어떤 종류의 가치관과 생각의 틀을 혹은 준거 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행동의 방향은 달라진다. 기존의 심리치료 이론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구를 선택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무엇, 그렇기 때문에 이론의 여지없이 충족해야하는 대상으로 본 것이다. 만일 인간의 욕구를 객관적으로 보고 이를 선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본다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어떻게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한 측면으로 부각된다. 기존의 심리치료 이론들은 이러한 선택을 위한 준거 틀을 제시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활동은 자연적이고 객관적으로 주어진 그 무엇이기보다는 적극적 준거에 의해서 판단되고 선택되어야 한다. 이러한 학문을 가리켜서 규범적 학문이라고 해도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자연 학문으로서 심리치료이론들은 자연 상태를 연구하는 물리학의 범칙들을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인간에 대해의 폭을 대단히 좁히거나 왜곡하는 방향에서 이론을 제시하게 되었다. 인간을 객관적 상태로 존재하는 물질과 신체의 특성에 따라서 움직이는 동물적 특성을 격하시키는 오류를 범할 것이다.수직 초월의 의미는 자신 보다 더 큰 존재를 향하여 나아가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심리 치료의 이론들은 인간보다 더 큰 존재를 상정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의 존재이고 인간은 가장 발달된 존재이므로 인간보다 더 큰 존재를 상정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입장에 선다면 논의는 크게 달라진다. 초월적 존재와 어떤 형태로든지 관련을 가질 때 인간은 완전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수직 초월은 인간이 자신 보다 더 큰 존재와 관련을 가지며 자신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자신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 자신의 사회, 자신의 나라 그리고 인류 전체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을 갖도록 하는 일이다. 마치 높은 산에 있는 사람들은 아래와 사방이 잘 보이는 이치와 같이 인간이 수직적으로 초월을 하게 되면 행동의 폭이나 이해의 폭은 훨씬 넓어지게 된다. 4) 초월의 방법① 반성적 사고(Reflective Thinking)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초월할 수 있을까? 자신을 초월하기 위해서 한 개인은 자신을 개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과 안목이 있어야 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 해야 할 활동이 있다. 자신을 반성적으로 보는 안목이다. 반성적 사고(Reflective Thinking) 혹은 반성적 관찰(Reflective Observation)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인간의 생각은 참으로 자유롭다. 아주 작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기도 하고 아주 영원한 삶을 그리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영화나 많은 다른 예술 작품들은 인간의 생각의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중요한 도구들이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의 자유로움은 인간이 신의 특성을 닮았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신의 특성은 시간과 공간에 사로잡힘이 없이 자유롭게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심지어 인간과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벽을 지나다니며 시간을 초월해서 다니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자유로움을 오직 생각 혹은 영혼이라는 측면에서만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생각은 자유롭지만 육체를 가진 인간은 그 자유로움을 현실 세계에서 다 실현시키지 못한다. 인간은 육체와 현실적 조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의 역사는 곧 육체와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삶이다. 육체와 삶의 조건들은 변화시키기가 너무 어렵지만 인간은 생각을 통해서 그러한 삶의 조건들이나 현실들을 정신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재구성을 할 수 있게 된다. 정신적으로 재구성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는 활동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활동은 곧 반성적 관찰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될 것 같다. 반성적 관찰이라는 활동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삶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는 도구를 갖게 된다. 반성적 관찰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역사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러한 의미들이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음미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반성적 관찰은 적어도 내담자 혹은 우리들로 하여금 적어도 자신의 삶을 다른 방향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를 가져다준다.

② Member and Class영원성이 존재하는 형상적 존재로써 인간은 영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고 기술되어야할 것이다. 초월의 방법을 논의함에 있어서 인간은 영원성이라는 커다란 범주는 변화의 원리라는 측면에서도 이해된다. 변화를 할 때 인간은 members와 그들을 포괄하는 class를 상정하게 된다. Member들은 결코 자신들을 초월하는 상태에 있는 class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만일 member들이 class의 논리를 이해하려고 하면 member들은 2차 변화(Second Order Change)를 경험하여야 한다. 만일 member들이 class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2차 변화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원을 생각할 수 있는 존재임으로 인간은 자신의 member를 초월하여서 class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 영원성을 상정하지 않으면 인간은 더 이상 큰 범주에로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영원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인간이 member에 갇혀 있는가 하는 점은 초월과 인간의 정신병리라는 측면에서 논의되어야할 사항이다.③ 영원성 : 내재 혹은 외재인간의 영원성이 인간에게 내재적인가 혹은 외재적인가 하는 점은 또 다른 중요한 논의사항이다. 만일 인간에게 내재한다고 한다면 과연 어느 정도로 인간에게 내재적인가? 만일 인간의 외부에 있는 영원성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어떻게 그러한 영원성과 접촉을 할 수 있는가? 접촉된 영원성들은 어떻게 인간의 내면관계에 자리하게 되는 것일까? ④ 분화 (Differentiation)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 혼자서는 그러한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에 자신을 의지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의지하는 대상은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이 있다.

이러한 의존이 Interdependent Relationship이 되지 못하고

Co-dependent Relationship이 되면 인간은 자신을 그 대상으로부터 초월하기 어려워진다. 인간이 그 대상과 Co-dependent Relationship을 갖게 되면 인간은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그 대상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 대상이 사라지거나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되면 인간은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Freud는 인간의 심리에너지가 고착되면 인간은 건강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심리에너지가 마음속에서 자유롭게 고착되지 않고 흘러야만 인간은 심리적으로 건강해진다. 인간이 이 세상의 영원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인간은 건강하게 된다. 자유롭다는 말은 인간이 초월을 쉽게 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건강하지 못함은 이 세상의 것들에 사로잡혀있을 때 발생된다. 집착이라는 단어로 이를 표현할 수 있겠다. 집착의 상태는 인간에게 불안을 유발한다.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불안은 그만큼 커진다고 생각된다. ⑤ 통합자신을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분화를 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관계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나와의 관계, 타인과 나와의 관계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영적 세계의 신비는 마음속에서 심리적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영적 체험을 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상대방을 대하거나 상대방을 위협하여서 자신의 말에 복종하게 하는 일들은 영적 체험이 심리적으로 일치를 이루지 못한 상태라고 생각된다. 영적 체험은 심리적으로 인격의 성숙을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 신비의 영적 체험은 먼저 마음속에서 편안함과 따뜻함으로 그리고 심리적 안정으로 다가와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분화는 곧 영적 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영적 체험을 자져오도록 하여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즐거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영적 체험이 불안을 가중하고 세상의 것들로부터 불편함이 마음속에 싸이게 되면 이는 심리적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영적 체험이 심리적으로 일치를 가져오면 그 결과는 사회적 장면에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심리적 일치는 사회 속에서 부드러움과 사회적 기여로 나타나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물론이고 사회의 구조적 악들에 대해서 저항을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때 조심할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일을 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방식으로 일을 하여야 하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핍박을 받는 모습으로 보여 져야 한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나 물질적 풍요 그리고 삶의 여유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일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은 아니다.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통합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추구하는 일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일로서 심령이 가난하고 마음이 청결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하여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의 힘으로만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받아들인다. New Age운동을 하는 사람들처럼 인간의 힘만으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죄성을 드러낸 일이다. 인간은 영적 세계의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잠재력을 개발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인간에 대해서 지나친 낭만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주의 심리학자들로 대변되는 사람들은 Rogers, Perls, Maslow등 인간에 대해서 낙관적이고 낭만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잠재력 개발을 통해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넓혀 나갈 수 있다는 기본적 가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잠재력 개발로 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하려다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엄마인 여성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하려고 하다가 자신의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된다. 여권신장주의자들이 여성들로 하여금 남성들과 경쟁을 통해서 자신의 정당한 욕구를 충족하겠다고 하는 일들도 인간에 대한 잠재력 개발이라고 하는 낭만적 생각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잠재력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에 대해서 성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개발하기 위해서 성장을 거듭해 나가야 한다. 성장을 거듭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검증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극단적 자아주의(Egoism)로 빠지게 된다. 인간주의 심리학자들이 극단적 자아주의에 빠지는 반면 인간의 초월을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려는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신비적 환상주의에 빠진 사람들이다. 환상주의와 자아주의는 둘 다 인간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 인간은 일정한 한계를 가진 존재이며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절대자의 도움을 받으려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절대자의 도움을 통해서 인간은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영적 성숙 혹은 발달은 무엇인가?5) 초월 상태의 인간① Human Life Goal: The Restoration of God’s Image인간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회복하는 일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회복하는 일은 개인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Individual Identity에서부터 Relational Identity로 관점을 전환할 수 있을 때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하게 회복된다. 기존의 Erik Erikson의 이론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정체감을 정의하고 있다. 이는 서구사회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Ideology인 개인주의 시대사상을 벗어나지 못한 생각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요한 일서의 말씀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정체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랑이라는 말은 개인주의적 용어가 아니며 관계적 용어이다. 관계라는 틀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용어가 사랑이라는 단어이다. 인간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의미가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에 보면 인간이 사랑을 온전하게 할 수 없다는 의미는 우리 안에 두려움이 있다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인간은 탄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공포심과 수치감의 상태를 경험적으로 알게 되며 이러한 공포심과 수치감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데 어려움을 갖게 한다. 인간은 죄 성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 속에서 살게 된다.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은 인간을 버려두지 않은 것처럼 인간이 탄생될 때 부모는 아이가 혼자 살도록 버려두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것처럼 신생아는 엄마의 사랑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게 된다. 엄마의 사랑이란 신생아에 대한 전적인 받아들임인 것처럼 하나님도 인간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주신다.② 성경에 나타난 인간상 예수는 인간에게 분명하고 뚜렷한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산상수훈에 보여 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정리해 보도록 하자.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 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등이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는 심령이 가난하고 청결한 자로 표현되어 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청결하고 가난한 심리적 상태를 소유할 수 있다. 청결하고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온유한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결과를 갖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할 가치는 의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의란 하나님의 진리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사모하고 목말라해야 한다는 의미를 말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애통해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애통해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이 청결하고 가난하게 된다고 말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비판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은 청결하게 되고 심령이 가난해진다. 이런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할 일은 곧 화평케 하는 일이고 불의에 대해서 핍박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우리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라는 예수의 말씀이다. 산상수훈은 성경 속에 나타난 인간의 심리적 상태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인간이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인간이 대인관계 속에서 보여져야할 모습, 그리고 이 땅에서 할 일이 제시되고 있다. 마음이 청결하고 가난한 상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마음속에 소유하지 않는 무소유의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이 스스로 무소유의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인간은 무엇에 자신을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한다. 인간은 자신들을 의지하는 대상들이 돈과 권력, 미, 학력, 다른 사람들, 동물들, 기타 등등 수없이 많은 이 세상의 대상들에 자신을 의지하면서 살게 된다. 돈이 있다가 없어지면 급격히 마음속에 불안과 공포, 두려움 등이 생기게 된다. 학력이 없어지면 또한 비슷한 심리적 상태에 놓이게 된다.

 

보우웬은 사람이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분화될 수 있으면 건강한 상태라고 하였다. 건강한 상태란 인간은 자신 속에 진짜 자아라는 심리적 요소가 있어서 그 진짜 자아를 많이 확보하면 건강하고 관계 속에서 흔들림이 없이 자신이 계획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보우웬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진짜 자아라는 요소를 마지막 보루로 삼고 있다. 진짜 자아라는 요소를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의 정신적 건강을 논할 수 없게 된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그 진짜 자아를 갖게 되는가 하는 논의에 있어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자신이 되고자 하는 힘과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려는 힘이 인간의 마음속에 주어져 있다고 보았다. 보우웬의 생각의 틀은 인간과 인간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을 뛰어 넘는 영적 힘을 보지 못하고 있다.인간은 영적으로 자신을 뛰어넘는 어떤 존재와 연관성을 찾지 못하면 자신의 진짜 자아는 존재의 근거를 잃고 만다. 인간은 절대 진리에 자신을 의지하고 맡길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자신의 진짜 자아를 갖게 된다. 진짜 자아를 상정할 때 하나님과 인간의 틀이라는 생각의 구도가 아니면 인간의 진짜 자아를 상정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참으로 개인적이거나 개별적일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관계의 존재인데 그 관계가 어떤 관계의 틀 속에서 규정되고 이해되는가에 따라서 인간을 보는 관점과 생각이 달라진다.인간이 이 세상의 것들에 많이 자신이 붙어 있을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자신을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를 하여 하나님과 연합을 하면 할수록 진짜 자아를 많이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연합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줄 아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미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이 세상의 삶은 영원한 천국의 삶을 위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사는 일이다. 죽는 연습들이 곧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사실임을 인식해야 한다.목숨을 내어놓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많은 것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연습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이 세상의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면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없게 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언제든지 이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즉시 그 자리에 놓고 예하고 대답을 하고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예수가 제자들을 부를 때 예수의 제자들이 즉시로 예수를 따랐다고 하는 성경의 장면들은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다.6) 초월 상태의 인간① 인간의 타락창세기 3장을 보면 인간의 타락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를 하고 있다. 그 뒤에 뱀의 유혹으로 인해서 아담과 이브는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게 되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벗었음을 발견하고 이를 숨기기 위해서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해서 입었다. 그 뒤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는 수치감에 관한 대화이고 그 결과로 인간의 죽음의 형벌을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원리는 기독교 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핵을 이루고 있다. 죄인으로서 인간은 두 가지로 분류를 할 수 있다. 하나는 죄 된 행동을 하는 인간이고, 또 하나는 죄 된 속성을 가진 인간이다. 죄 된 행동에는 죄책감이 따르고 죄 된 속성에는 수치감이 따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죄책감은 인간의 행동의 영역에서 발생된 감정이라고 한다면 수치감은 인간의 존재의 영역에서 생기는 감정이다.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살펴보면 죄 된 행동과 죄 된 속성으로 구분을 해서 살펴 볼 수 있겠다. 인간의 죄 된 행동을 통해서 인간은 죄 된 속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원래 인간은 죄 된 속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죄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죄 성을 확인한 셈이 된 것이다. 인간이 창조될 당시에 죄 된 속성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큰 논란거리라고 생각된다. 아담과 하와의 행동은 이러한 죄 성을 발견하게 한 사건인지 아니면 행동을 하자마자 죄의 속성이 들어왔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와와 아담이 뱀과 아내로부터 유혹을 당한 것을 보면 인간은 창조 때부터 죄 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인간의 죄 성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불완전성과 죄 성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불완전하게 창조된 인간이란 의미는 곧 유혹이 왔을 때 넘어갈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난 뒤에 자신들이 벗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는 자신들의 불완전성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닐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해서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을지 모른다.불완전에 대해서 인간은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일까? 최고의 학위를 갖지 못한 사람이 최고의 학위를 가진 사람 앞에 서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 앞에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부끄러운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불완전성을 발견한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완전한 분 앞에서 수치감을 느꼈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두려운 감정은 그 수치감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때에 드는 감정이 아닐까?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난 후에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인간은 완전을 향한 환상을 갖게 된다. 그 환상을 세상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꿈이라고 부르고 혹은 야망, 대망이라고 부른다. 혹은 이상이라는 말로 인간들은 미화를 하여 불완전함을 무마하려고 한다. 인간이 나이가 들면서 현실적이 된다는 말은 인간의 한계를 점차로 깨달아가게 된다. 인간의 한계를 깨달아간다는 의미는 곧 인간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젊은 처녀 총각들이 애인을 사귀고 사랑을 하면서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인간의 사랑에 대한 불완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현상으로 이해된다.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기 전에 인간은 왜 자신의 불완전성을 알지 못하였을까?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의 삶은 어떠하였기에 인간의 자신의 불완전성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였을까? 아마도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해서 자신의 불완전성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자신이 너무도 부족하고 아는 것도 없으면서 수치감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이 자신들이 부족함을 알면서도 서로 수치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곧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사랑이라고 생각된다. 아이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완전한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받아들여줌을 통해서 어린아이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수치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두 연인이 서로를 사랑함을 통해서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고 있는 것처럼 불완전성이 보완하여질 때 인간은 수치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Total acceptance(완전한 받아들임)를 통해서 인간의 부족함을 보완하셨던 것이다.부모의 안전한 보호 속에 살고 있던 자녀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면 그 자녀는 자신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살인을 저지른 자녀는 부모의 낯을 피하게 되고 숨으려 하게 된다. 부모가 나타나면 그는 두려움을 갖게 되고 그 두려움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수치감을 동시에 나타내주는 감정이다. 이미 자신이 수치감과 죄책감을 갖게 된 자녀는 그 부모의 집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다. 그 부모의 집은 그러한 수치감과 죄책감이 자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녀는 자연히 그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데 자녀의 집을 떠남이 곧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다.인간은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며 거꾸로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은 행위를 쉽게 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살인의 행위를 통해서 발견한 살인자라는 존재는 살인의 행위를 더 쉽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모습이 가인으로부터 시작한 살인자의 모습이 라멕에게서 엄청나게 커지는 행위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흔히 우리가 하는 말에 처음 할 때가 어렵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한 번 하게 되면 다음은 쉬우며 계속해서 더하는 경향성을 인간은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경향성은 인간의 불완전성으로부터 오는 것 같다.행위를 저지른 자녀에 대해서 부모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단속을 하게 된다. 행위에 대한 단속은 곧 구약의 율법이며 율법은 인간의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러나 일단 일어난 행위에 대해서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용서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행위에 대한 죄책감은 용서를 통해서 해결이 된다. 죄책감은 해결이 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이 행위를 통해서 발견하게 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해서 오는 수치감은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의 수치감은 은혜를 통해서 해결이 된다. 은혜란 전적으로 받아들여주는 것을 의미하며 전적인 받아들임은 수치감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수치감을 전적으로 하나님은 받아들인 것이다. 불완전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수치감은 전적으로 받아들임을 통해서 해결되며 이는 곧 은혜를 통해서 해결이 된다.하나님이 구약에 율법을 주었을 때는 인간이 존재의 수치감을 맛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율법을 존재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마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 즉, 하나님의 전적인 받아들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율법에 의한 구원은 범주 오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행위를 통해서 존재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어리석음을 바로잡고자 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통한 전적인 받아들임은 존재에 대한 받아들임을 의미하며 예수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의 수치감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결코 율법을 폐하러 이 땅에 온 것이 아니고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일은 이해할 수 있다. 행동을 통해서 인간의 수치감은 극복될 수 없으며 오히려 행동은 자신들이 수치감을 더욱 깊숙이 감추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죄 성을 가진 인간, 불완전성을 가진 인간, 이미 아담과 하와의 죄 된 행위를 통해서 갖게 된 인간의 수치감은 결코 율법이라는 행위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구약의 십계명은 인간이 더 이상 자신들이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였음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이미 알게 된 인간의 수치스러운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셨다.인간의 죄 성은 어떤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될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완전한 연합처럼 인간이 처음 어머니의 배속에서 완전한 연합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태아와 어머니의 완전한 연합은 에덴동산에서의 완전한 연합으로 이해를 하면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다. 태아가 어머니 배속에서 탄생되는 순간이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경험으로 일치시켜 보면 어떨까?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많은 공포심, 두려움을 경험했으리라 상상된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마치 밀림에 떨어진 사람의 모습과 흡사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온갖 어려움과 역경을 인간 스스로 해결하여야 하는 어려움과 부담을 안게 되었다. 태아가 어머니의 배속에서 분리되는 순간이야말로 인간은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곧 인간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키며 그 공포와 두려움은 곧 인간을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데 많은 부담과 어려움을 갖게 한다. 모든 인간은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보이는 증상을 탄생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갖게 되며 이를 통해서 인간은 두려움과 공포를 늘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인간은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 경험했던 엄마와의 일체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엄마와의 일체감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경험을 하였던 하나님과의 일체감은 아닐까? 엄마와 일체감을 경험한 인간은 탄생 후에도 그 일체감을 늘 원하면서 사는 존재일 것이다. 완전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완벽을 향한 인간의 욕구, 이상을 향한 인간의 생각 등은 경험적 측면에서 보면 엄마와의 일체감 속에서 경험으로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살게 된다. 엄마와의 일체감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으로서 영원을 향한 그리움과 하나님을 갖는 생각 혹은 욕구의 경험이 된다.② Total Depravity(타락, 악행) or Reason Theory(추리 이론)일체감을 인간이 엄마의 배속에서 경험할 때 인간은 사랑과 따뜻함, 안전한 느낌, 타인을 향한 그리움 등을 경험하며 이러한 그리움은 하나님의 형상을 재생산하게 된다. 인간은 엄마와의 일체감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마음 속에 경험적으로 간직하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 또한 인간의 죄 성과 같이 경험적으로 다음 세대에게 전이된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어디엔가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소인을 통해서 엄마와의 일체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전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의 소인과 경험적으로는 엄마와의 완전한 일체감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세대를 통해서 전이되게 된다.③ 인간의 죄 성이란?인간의 죄 성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고민을 해왔다. 죄 성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정의를 할 수 있겠으나 우리의 생각으로는 인간은 하나님 같은 존재가 되려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마음은 힘을 향한 욕구와 선해지려는 욕구로 나누어서 생각을 할 수 있겠다. 선해지려는 인간의 욕구는 힘을 향한 인간의 욕구와 밀접한 방식으로 관련이 되어 있다. 힘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가 타인의 눈에 좋지 않게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서 선해지려는 인간의 욕구는 인간의 도덕이라는 보기 좋은 방패를 가지고 있어서 쉽게 사람들이 인지하기 쉽지 않은 인간의 죄 성이다. 내가 선하다는 말은 이미 나 아닌 누군가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아미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곧 교만의 죄를 범하고 있는 죄 성의 표현이다. 인간은 선하지 않다. 또한 선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힘을 향한 인간의 욕구는 통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타인을 통제하여서 자신의 우월감을 충족하려는 인간의 마음의 표현이다. 집단상담의 단계를 보면 처음 단계에서는 집단 원들이 서로 인정하고 칭찬을 하여서 어느 정도 친한 관계가 형성되고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심한 갈등과 비난이 생기게 된다. 갈등은 곧 힘을 통해서 우위를 점하려는 인간의 욕구로서 이러한 욕구로 인해서 집단 원들은 우위를 점하기 위한 투쟁과 전쟁에 들어가게 된다. 젊은 두 남녀가 서로 데이트를 할 때에는 서로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서로의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어서 가깝고 자유롭게 되면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을 하게 되면 두 사람은 엄청난 갈등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때 갈등은 서로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 위한 Power Struggle(노력)이다. 서로 힘을 통해서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힘에 대한 욕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아내와 남편의 마음속에 상처를 만들게 된다.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생겼다는 말로 해석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인간은 자신의 상태가 너무 형편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은 곧 자신에 대한 창피감과 수치감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창피감과 수치심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곧 자신이 더 능력 있고 착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낳게 되었다. 수치심과 창피감은 능력 있고 착하다는 자기인식을 하고 있는 한 맛보지 않아도 되는 인간의 감정이다. 능력이 없고 착하지 않다는 인식은 곧바로 자신에게 수치와 창피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또다시 힘과 선함을 추구하는 수레바퀴에 빠져서 하나님처럼 되려는 불가능의 노력을 하고 있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수치심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은 자신이 부족함을 충분히 받아들이는 일이다. 자신이 무능하며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수치심이 생긴다 하더라도 수치심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즉 하나님처럼 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일이다. 나는 선하지 않고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시인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하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받아들인다는 말은 내 자신이 부족하고 형편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즉 다른 인간들과 비교를 해서 비교우위를 점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세우는 일을 할 때만 이러한 인간이 되려는 노력은 가능하다. 다른 인간들과 내 자신을 비교하는 일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놀면서 자기가 나이가 더 많고 힘이 더 세다 하고 비교하는 일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인간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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