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8 13:48

성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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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령 론

 

 

                    

 

                        

 

 

 

 

             

 

 

 

 

 

 

 

 

 

 

 

 

                                         

목 차

 

 

제1장 삼위일체 하나님 성령 3

제2장 성령 하나님의 계시성 14

제3장 성령의 구원 21

제4장 성령신학 요약 33

성령신학 서평 54

제5장 성령론에 대한 바른 이해 72

제6장 존 스토트의 성령론 75

제7장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94

제8장 존 오웬의 성령론 116

제9장 차영배 교수의 성령론 152

제10장 칼빈의 성령론 163

칼빈의 성령론 연구 163

현대신학자들의 칼빈의 성령론 연구 166

칼빈의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167

제11장 예수님의 성령론 182

제12장 이사야의 성령론 197

제13장 성령론의 정리와 결론 209

성령론 참고도서 223

 

 

 

 

 

제1장 삼위일체 하나님 성령

 

1. 三位一體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가장 명확한 진리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유일(唯一)하신 분이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유일하신 하나님이 또한 삼위로 계신다고 증거 한다. 이 원리를 삼위일체라고 한다. 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참으로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 힘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고 사는 우리 인간에게 이 모든 한계를 초월하신 하나님은 신비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이해하기 전에 먼저 믿고 아멘 하는 것이다.

 

1) 삼위 일체교리의 성경적 근거

① 창 1:26-27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에서 우리라는 복수 대명사로 하나님을 말씀하셨고 창 3:22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복수로 나타내셨다.

 

② 창 1:28-27절이나 창 3:22절의 하나님의 히브리어 원어는 엘로힘(Elohim)으로 복수개념이다.

 

③ 마 3:16-17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막 1:9-11절에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 3:21-22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요 1:32-34에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등에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하셨음을 볼 수 있다.

 

④ 마 28:19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대 위임령을 내리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셨다.

 

⑤ 고후 13:13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하면서 바울은 성삼위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다.

 

⑥ 창 6:3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 41:38에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에서 성령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2)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칼빈의 이해

①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하면 된다.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 또는 세 실재가 존재한다.

 

② 그러나 각 위의 특성상 일정한 순서가 있다. 즉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이 성자에게서 성자가 오시고, 성자에게서 성령이 오시므로 그 순서가 정해진다. 그러나 이는 본질의 단일성을 훼손하는 것도 아니고,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조금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3) 삼위일체 교리 논쟁

① 논쟁의 발생

초대 교부들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명백한 개념 설정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터툴리안은 하나님의 三人格(tri-personality)을 명백히 단언하고 그 삼인격의 실질적 통일성을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도 삼위일체 교리를 분명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러는 동안 單一神論(모나키안이즘-Monachianism)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단일성과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질적으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터툴리안과 몇 몇 교부(오리겐, 히폴리투스)들이 이를 반대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이들이 만족할만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치 못하였고, 심지어 오리겐 같은 교부는 성자를 제2의 신으로 까지 호칭하는 바람에 아리우스에게 잘못된 삼위일체론의 디딤돌을 만들어 주게 되었던 것이다.

 

② 아리우스의 견해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던 아리우스는 단일신론(the monotheistic principle)주창자였다. 즉 하나님은 단 한분 출생되지 않은 하나님, 기원이 없는 한분의 실유(實有)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자는 영원한 하나님이기 보다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③ 아다나시우스의 반론

아리우스와 아리우스주의를 최초로 반대한 사람은 아다나시우스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대집사(Archo-decon)로 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면서 이 유일성을 해치지 않는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은 유일하시나 동시에 그 안에 세 실재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아리우스의 성자의 창조설을 거부하고, 성자의 영원한 인격적 실존을 주장하였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삼위는 어떤 형식으로든 분리 되지 않는 다고 하여 삼위일체 교리의 다신론(Polytheism)을 일찍 차단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唯一性과 하나님의 실유를 구분함에 있어 “본체의 하나 됨(Oneness of Essence)”이라는 술어로써 표현함이 가장 적절하다고 하였다. 이 술어는 聖子는 聖父와 동일한 본질이나 양자는 다른 점에 있어서는, 예를 들어 인격적 실존에서는 서로 상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한 것이다.

 

④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ea)

니케아 회의는 주후325년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다. 다음과 같은 구별을 통하여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의 논쟁점을 알 수 있다.

  아리우스

 아다나시우스

그리스도의 비시간적 발생이나 영원적 발생개념을 부정함

인정함

성자는 무 존재로 부터 창조되었다 주장

성자는 하나님의 본체에서 발생됨

성부와 성자는 동일 본질이 아님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Homoousios)이다.

 

이러한 격렬한 논쟁 끝에 아다나시우스는 승리하고 아리우스는 정죄되어 패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니케아의 결정은 삼위일체 논쟁을 종식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정죄를 받았던 아리우스주의자들이 다시 교회 안에서 득세하므로 아다나시우스는 다섯 번이나 추방당하는 비운에 처했다. 이후 半아리우스주의는 동방교회에서 성행하고 아다나시우스의 견해를 인정한 니케아교리는 서방교회에서 인정되었다.

 

⑤ 니케아 신경(The Nicene Creed)은 여러파로 부터 반대를 받았다. 아리우스파는 성자와 성부는 同一本質이 아니라 異質(heteroousios)이라 하였으며 半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는 성부와 類似本質(homoiousios)이라 하였다. 어떻든 이들은 니케아 신경의 語句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성자의 참되고 정당한 신성을 가리키는 니케아 교리를 반대 하였다. 그러므로 아다나시우스가 동방교회에서는 추방을 당하였고 서방교회에서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 초기 삼위 일체 논쟁은 성부와 성자간의 문제 제기였지 성령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2. 성령과 삼위일체

 

1) 성령은 인격이시다.

교회의 초대로부터 오늘 현대에 이르기 까지 여러 모양으로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어 왔다. 그들은 성령을 그 분이라고 하지 않고 그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 분을 제 삼위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고 비인격적인 영향력이나 세력으로 생각 할 뿐이다. 그러한 견해는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성령께서 인격의 하나님이심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시한다.

 

① 성령은 인격만이 가질 수 있는 사고(또는 지식 / 고전 2:10-11)와 의지(행 16:7, 고전 12:11)와 감정(엡 4:30)이 그에게 있음을 가르친다.

 

② 다른 인격과 병치(倂置)시키므로 그가 인격이심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마 28:19, 행 15:28, 눅 4:14등이다.

♦ 성령이 인격이시기에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로써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시며 우리 안에 계셔서 죄를 이길 힘을 주시고 성경을 영감하게 하시며 우리로 깨닫도록 조명하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시며, 우리의 기도를 중보 해 주시며 우리를 불러 교회의 직분을 맡기시기도 한다. 이는 모두 성령이 인격이시기에 오는 복이다.

 

2)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피조 된 인격으로 보고 하나님으로 보지 않는다. 즉 성부보다 낮은 인격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이 인격은 인격이로되 神格으로서의 인격을 가지셨다고 한다. 즉 성령께서 하나님으로서의 속성을 가지셨다는 증표는 그가 전능하사 창조사역(창 1:2)과 섭리사역(시 104:30)과 예수님의 초자연적 잉태와 부활과 각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은사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게 역사하심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전지하시다.

사 40:13-14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뇨”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리고 성령은 편재(遍在)하신다.

시 139: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뿐아니라 성경은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하는 말을 “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는 말과 무수히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이 대사명의 위임시에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또는 축도시에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에서 병기하고 있다.

성령이 하나님이신 사실은 성도의 신앙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 아니실진대 그의 창조의 아름다운 역사와 성경에 영감을 주는 일과 각 사람의 마음속에 조명하는 일들을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타락을 극복하여 중생시키고 우리 안에 내주하여 우리를 성화시키지 못하는 때문이다.

 

3) 성령은 삼위의 한 위이시다.

초기 교회 교리사상에 삼위일체 교리는 그 일체성을 강조하는 나머지 삼위에 대하여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자들이 있었다. 즉 그들의 이해로는 삼위의 하나님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성부로 그다음에는 성자로 또 이제는 성령으로 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삼위를 분명하게 구별한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한위가 아니시고 삼위이심은 풍성한 삼위일체의 교리의 모태이다. 즉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시는 아버지 성부 하나님, 또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시는 아들 성자 하나님, 그리고 이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조화는 신비 중에 신비요 가장 아름다운 하모니이다.

 

4)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

초기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동등하시고 同格 하시되 거기에는 次序의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제1위 하나님 성부는 제2위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는 차서의 관계이지 우열(優劣)의 관계는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3위의 하나님 성령께서도 제1위와 제2위 하나님과 차서의 관계를 가지는데, 성령은 성부와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이 나오신다는 말은 만들어진 것도 낳은 것도 아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아다나시우스 신경은 말하기를 “그는 만들어지지도 창조되지도 않고 누가 그를 낳은 것도 아니고 다만 나오신다.” 했다. 이 나오신다는 말을 쓴 배경은 요한복음 15:26절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에 있다. 그러나 성령이 비록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 해도 그 두 분 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성부로 부터 나오신다함은 요 15:26외에도,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20: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등에서 추론된다.

서방교회(Roman Catholic)과 동방교회(Greek Orthodox)가 갈라지게 된 중요한 원인은 삼위일체의 논쟁중 기독론의 차이도 컸지만 성령론에 서방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고 하였고, 동방교회는 성부에게서만 나오신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불건전한 성령운동은 예수로부터 나오신 성령님을 부정하는(filioque/ ‘필리오쿠에’ 라틴어로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뜻) 행위로서이다. 언제부터인가 장로교회 안에서도 성령의 역사를 예수의 역사와 분리시켜 성령의 성화만 내세우고, 예수의 구속을 뒷전으로 내몰리고 성령의 역사만 강조하는 나머지 그리스도와 교회와 성경으로 부터 독립이라는 위험으로 기울어진다. 성화가 칭의보다 성령과의 주관적인 교통이 객관적인 교회 생활보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이 성경보다 더 중요시되는 흐름을 보고 개탄치 않을 수 없다.

화란의 유명한 장로교 신학자이며, 칼빈주의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것이 동방교회에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심을 부인하는 결과로 생긴 것이라고 말하였다.

 

3. 성령 하나님의 인격

 

1) 성령 하나님의 인격의 중요성

전술한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성령님을 자신들의 기복이나 신비의 영험을 위하여 부리는 하인이나 종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은 성부나 성자와 동일하시며 동격이시며 어느 면으로나 동등하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경배를 받으심에 합당하다. 성경은 성령님을 그분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 15:26; 16:8,13,14에 나타난다. 헬라어에서 영의 대명사는 일반적으로 중성이나 성령은 남성 대명사로 선택하고 있다.

요한복음 16:7,8,13-15에서는 성령님을 “그”라는 남성 대명사로 12번이나 사용하였다.

 

2) 성령 하나님의 인격적 특성

성령님이 인격이심은 그가 의지의 성품(고전 12:11, 느 9:20, 롬 8:27) 지식의 성품(고전 2:10-12) 감정의 성품(엡 4:30, 롬 15:30, 사 63:10)을 가지시고 인격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신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감찰하신다. 말씀하시며(고전 2:10), 부르짖으시며(계 2:7), 간구하시며(갈 4:6), 증거하시며(롬 8:26), 가르치신다(요 15:26). 인도하시며 방향을 제시하신다(요 14:26). 또 명령하신다(롬 8:14). 불러 일을 시키시고 감독하신다(행 16:6-7). 보냄을 받은 대로 사역하신다(행 13:2, 20:28).

 

4. 성령 하나님과 창조

1) 창조에 있어 삼위 하나님의 역할 관계

삼위의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 하나이시다. 그러나 존재하는 방식은 구별되어 있고 질서가 있고 차서가 있다. 그래서 각 위의 신적 사역은 다르다. 이러한 관점에서 창조의 사역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공히 돌리나(행 4:24, 요 1:3, 욥 33:4) 그러나 탁월한 창조의 방편은 아버지에게 돌린다. 우리가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 보면 성령의 역사가 무에서 물질을 만들어 내는 창조의 역사가 아니고, 그의 역사는 그 후에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창1:1-2에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즉 무로부터 유의 창조 활동이 있은 후에야 성경은 성령의 활동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신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 성령은 이미 만들어진 것에서 일정한 질서를 수립하셨음을 볼 수 있다. 삼위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신학자는 “ 왕은 궁전에 필요한 재료를 제공하고 청부인은 실지로 건물을 짓는 일을 하는 것 같다. 창조에서 아버지는 왕처럼 만물을 무에서 창조해 내는 만물의 근원이며 아들은 그 청부인같이 그 재료로써 구성하시고, 성령은 아들이 성취한 것에 좀 더 손을 보아 그 잠재된 세력을 끌어내시고 제 성질에 따라 발전하도록 함으로 완성 시키신다.” 하였다. 그러나 창조의 역사에 있어서 삼위의 하나님의 역할론을 말하는 것은 대단히 무모한 일 일수 있고,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능이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다.

 

2) 성령 하나님의 창조사역

그것은 시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욥 26:13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손으로 날랜 뱀을 찌르시나니” 시 104:1-35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레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무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여호와의 나무가 우택에 흡족함이여 곧 그의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이로다 새들이 그 속에 깃을 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 나오나이다 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다가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 굴혈에 눕고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찌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찌로다 저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에 접촉하신즉 연기가 발하도다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찌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욥 33:4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에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재창조에 있어서 활발하게 역사하신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등이 그것이다.

 

 

 

 

 

 

 

 

 

 

 

 

 

 

 

 

 

 

    

제2장 성령 하나님의 계시성(啓示性)

 

1. 하나님의 啓示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시(Revealation)란 하나님께서 아직 감춰지고 알려지지 아니 하던 일들을 사람에게 자연과 성경 말씀을 통하여 알리시는 행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지식의 근원이다. 창세 이래로 인간은 참 지식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오고 있다. 그들은 본성적으로 우주의 기원에 대하여나 사람의 근원에 대하여 알려고 하는 근본적인 갈망을 그 본성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식의 욕구의 범위는 자신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고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하므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말하는 참 지식을 습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자연인들로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은 평생 그의 생각을 “아마도” “어쩌면” “생각컨대” “대체로” 란 말을 빼고서는 결코 단정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자연과 말씀으로 啓示하시므로 인간들이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스스로 존재하심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 그의 예정하신 계획, 인생들이 걸어가야 할 규율, 인간이 타락과 부패한 가운데서 구원받는 방법, 이 세상의 實在와 性質, 일정한 律法과 大義 그리고 死後의 되어질 일과 終末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이는 사람의 노력으로 어떤 연구나 발견을 통하여서는 결코 알아 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낸 자는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를 발견 한 것이다.

 

1) 自然啓示 혹은 一般啓示

① 자연계시는 자연 일반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이다. 따라서 일반계시라고도 한다. 하나님의 자연 계시는 우리가 둘러보는 모든 일반 자연 萬物에 나타나 있다.

② 만물이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것을 들어내며 그의 영광과 권세와 지혜와 神性의 얼마를 나타낸다.

③ 자연을 관찰하므로 하나님의 특성을 알 수가 있다.

시 19:1-2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④ 아이가 여섯 살 쯤 되면 이가 빠져 나가고 얼마 후에 자라는 턱에 알맞은 이가 적기에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알맞은 큰이가 나서 그 빈자리를 채웁니다. 이도 하나님을 계시하는 아름다운 증거이다.

 

2) 超自然啓示 혹은 特別啓示

① 하나님께서는 자연계시(혹은 일반계시)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즐거워하실 뿐 아니라 超自然啓示 혹은 特別啓示라는 방법으로 자신과 관계된 모든 것을 인간에게 나타내신다.

 

②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에 나타나 있으며 이를 성령 하나님의 照明이 없이는 바르게 읽을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 이는 우리 인간이 자신의 罪로 생긴 영적 盲目때문이다.

 

③ 성령께서는 일반 계시를 통하여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지만 자연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특별계시를 통하여 진리를 분명히 깨닫게 하신다.

 

④ 나가서 성령하나님은 자연 계시만으로는 불능한 구원의 도리와 또 구원을 이루어 가는 도리를 깨닫도록 작용하신다.

 

⑤ 사람은 누구나 자연계시를 통하여 역사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특별계시를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의 역사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⑥ 성령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여는 참지식의 열쇠가 되신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근본적으로 알 수가 없다. 오직 그가 함께 하시므로 사람은 우주와 하나님께 대한 영원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가 있다.

 

2. 특별계시란?

 

하나님께서는 옛적부터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명하여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총 66권의 성경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특별계시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여러 모양의 顯現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하갈, 야곱 등에 나타나셨고, 광야의 이스라엘에게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내셨고, 그리고 아담, 하와, 가인, 노아,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사무엘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직접 말씀하셨다. 그는 하늘로서 들려오는 소리로 또는 꿈과 환상으로, 우림과 둠밈으로 그리고 선지자들과 직접 대화하시므로 이렇게 직접 나타나시거나, 여러 방법의 채널을 통해 그리고 직접 말씀하시므로 그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런 계시들이 중요한 것은 예를 들어 창 1:28에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신 계시 중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한 것이나, 인간을 유혹하여 타락케 한 뱀에게 말씀하신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의 구원의 놀라운 예표의 계시 등은 중요한 것이다.

 

1) 특별계시의 제한성

① 하나님이 인간에게 여러 모양으로 전하신 말씀이 정확하여도 타락한 인간이 그 말씀 하신 바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로 제한성이 제기된다. 따라서 오늘날도 하나님이 환상으로 꿈으로 또는 직접 말씀으로 하신다고 하여도 그것을 정확하게 전달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②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의 서신 벧후 1:19절에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하였다. 즉 그는 산에서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고 하늘로서 오는 음성을 들었으나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2) 성경은 특별계시의 유일 한 보고

① 베드로는 어느 개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그 확실성은 그 순간과 그 개인에게 그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하나님께서 그 당시처럼 말하시지 않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그 말씀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돌아가 참조 할 수 있는 흑백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이 기록된 목적 중에 하나이다.

 

②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하여도 그것은 그대로 사라질 뿐이다. 인간이 그 음성을 되찾는 기계를 발명하지 못하는 한 기록되지 않고 구전된 것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같은 이치로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특정한 사람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하여도 그것이 혹 꿈인지? 실제로 말씀하셨는지 정확하게 그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특별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기꾼과 그 사기꾼을 좋아하는 우매무지한 사람들이 있다.

 

③ 그러나 기록된 성경 안에서는 하나님이 인생에게 말씀하심이 막연 하게가 아니라 정확무오하게 확인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오늘날도 우리를 직접 대면하신다.

 

3. 특별계시에 있어서의 성령 하나님

 

1) 성령은 특별계시의 책임자이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사람의 글자로 기록하실 때 그 원어에 있어 하나도 틀림없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그대로 정확하게 기록하게 하신다.

 

2)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다.

① 성경을 감동시킨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성경 전체가 증거한다.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②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이 성령 하나님이심을 여러 곳에서 인용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마 22:43절에서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하여 시편을 인용하여 성령이 그리스도를 주라하였다 하셨다. 가룟 유다를 대체하기 위한 제자를 선정할 때 베드로는 행 1:16절에서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하여 성령의 저자이심을 말하였고 히브리서 기자도 시 95편을 인용하여 그 첫 머리에 시편 기자를 들먹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하였다.(히 3:7) 

 

③ 삼위께서 하나이시므로 성경의 저자로 근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나 성경은 항상 성경의 저자로 성령 하나님을 주체로 말씀하고 있다.

 

2) 성령은 성경을 어떻게 감동 시켰는가?

① 성경을 기록케 하는 성령의 은혜는 보편적 은혜의 수준이 아니다. 즉 단테의 신곡이나 밀턴의 실낙원 정도의 영감 받은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거듭난 자로서 받아 기록케 하여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쓴 만큼 절대 권위를 가진다.

 

② 베드로나 바울이 그의 능력이 참작되어 성경을 기록케 하심이 아니라 그들을 불러 특별한 사역을 감당하게 하신 성령의 부르심으로 저자가 된 것이다.

 

③ 성령 하나님은 사람을 다만 기계적으로 부려서 성경을 기록케 하시지 않고, 유기적으로 사용하셔서 성경을 기록케 하셨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케 하는 과정에서 성령 하나님은 기록자를 완전히 수동적으로도 사용하셨다.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또는 딤후 3: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에서 볼 때 성경의 기록자는 수동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④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기록하는 사람의 성품이나 그가 살고 있는 시대적 배경이나, 환경을 무시한 채 다만 그들을 기계로 부리시지는 않았다는 의미에서는 기록자들이 능동적으로 그들의 특성을 담아 기록한 것을 의심할 수 없다.

 

⑤ 결론적으로 성경은 완전히 성령 하나님의 저작이며 사람은 수동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수동적이라는 말이 곧 기계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한 제2의 저자들의 경험과 상이한 감정을 사용하셔서 그들의 컬러가 성경에 표현되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윗의 자연문학에 대한 애착이 그의 시편에서 찬연히 빛나게 하셨고, 바울의 이방문학에 대한 통달이 그 서신가운데 나타나고, 누가의 의학적 지식이 그의 저술인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나타난다.

 

4. 결론

1) 성경이 다른 책과 같지 않고 위엄이 있는 책인 연고는 이 책이 성령 하나님께서 제1저자이신 까닭이다.

 

2) 성경은 제1저자인 성령 하나님의 神性의 입김과 제2저자들인 인간의 人性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책이다.

 

3)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도 말씀하시는 말씀 그 자체이다. 

 

4) 성경에 오류가 없도록 주장하신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자.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딤후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개신교  

카톨릭   

성경이 생활에 오직 한 가지 절대적 지침이다.(딤후 3:16-17; 요일 5:13,신 12:32)

성경과 교회의 전통이 그들의 믿음과 권위이다.

성경을 자유롭게 읽고 해석하되 성령께서 인도하심으로만 그 뜻을 해석한다.(요 5:39, 14:26; 롬 15:4; 요일 2:27)

성경의 해석은 최종적 단에 있다.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만이 아무 흠 없는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엡 1:22, 골 1:18)

교황(Pope)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지상 교회의 통치자로 결함이 하나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 서 영생을 허락해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롬 3:24, 5:1; 엡2:8-9; 롬10:9,

10)

구원은 카톨릭교의 전통에 의해 7성례와 신덕과 선행을 통하여만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을 통하여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요 3:16, 5:24, 5:18; 행2:21)  

하나님을 만족시켰는지 실제로 천국을 획득했는지는 결코 알지를 못한다. 그들은 천국에 이르기 위해 연옥에서 임시의 처벌을 받게 됨을 다행으로 됨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 카톨릭과 개신교 무엇이 다른가?

 

제3장 성령의 구원

 

앞장에서는 하나님은 자신을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분이심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계시를 성령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일깨워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 누구라도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구원의 역사를 깨달을 수가 없다. 이 같은 역사를 우리는 성령의 불가항력적 역사라고 한다. 성령께서는 불가항력적 역사로 照明하시고 그리고 來住하신다.

 

1. 성령의 구원하시는 준비사역

성령 하나님께서는 첫 창조 때에 역사하심과 같이 타락한 인간을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실 때도 역사하신다. 罪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에게 영적인 어둠과 죽음이 들어와 인간 스스로는 구원의 여망이 불가능할 때 성령께서 救援의 필연적인 역할로서 하나님의 선민들의 중생을 위한 사역을 수행하셨다.

 

1)성령의 불가항력적 은혜

① 성령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실 때 그의 특별하신 은혜 혹은 주효적 은혜(Irresisitible Grace) 다른 말로 하면 불가항력적 은혜를 통하여 이루신다. 이에 대하여 챨스 핫지(Charles Hodge) 박사는 말하기를 “중생이란 것은 전연 하나님의 성령의 공작의 산물이고 영혼은 단순히 수동적인 지위에 있다”고 말하였다.

 

② 성경은 천국에 들어가는 필수조건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이루는 중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중생시키는 일은 전연 하나님의 주권으로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된다.

 

③ 그러므로 중생된 자는 하나님이 그 신앙의 제작자요, 완성 자이심을 알 수가 있다. 고전 4:7절에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 한것 같이 자랑하느뇨” 하였다.

 

2) 성령의 조명

 

① 인간의 암매

 

a) 신약 성경은 自然人이 암매(暗昧 : 사람됨이 어리석고 못나서 사리에 어두움)하여서 크고 분명한 眞理가 啓示되어도 이를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누가는 루디아가 강가에서 바울의 전도를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여셨다고 기록하였다.

행 16:14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그 루디아의 마음을 열기 전에는 그의 총명이 어두워 있었던 것이다.

엡 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이를 영적 暗昧라고 한다.

 

b) 바울은 이 암매를 또 다른 말로는 마음에 드리운 베일 [고후 3:12-18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라고 하였다.

 

 

c) 자연인에게는 영적인 것을 이해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은 잘 말하여 주고 있다. 특히 고전 1:18절이 그렇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자연인은 이것을 이해 할 수가 없다. 만약 이를 인간 이성으로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면 지혜 있는 자들 문벌 좋은 자들 능한 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 고전 1:26절에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였다.

 

d) 세상적으로 영리하고 지혜 있는 자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거듭나는 것 곧 重生하는 것은  I.Q와 상관없기 때문이며 그 마음이 죄로 어두워진 때문이다. 바울도 고전 2: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라 하였다. 타고난 知能에 상관없이 육에 속한 사람은 단순히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것이다.

 

e) 그들에게 있어 창조의 기사는 과학과 모순된다고 한다. 아담과 하와와 뱀의 역사를 한낱 동화로 돌린다.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후대의 성경 저자들이 무식하기 때문에 저지른 잘못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 선택 예정은 이치에 맡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미련하게 여기는 것이다.(고전 2:14참조) 그러나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라고 한다.

 

f) 성경은 또한 거듭난 자들도 전적으로 암매함에서 벗어났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시 119:18절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한 것은 성도들이라도 계속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할 것을 보여준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이 경우이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5)  에베소서 1:17-19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라고 바울은 기도하였다. 이는 에베소 성도들이 중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암매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g)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 없이는 구원의 깨달음도 없고 성화의 구원을 위한 깨달음도 없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한 대로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일을 받지 않는다. 베일이 그 마음을 가리고 그의 눈이 닫혀 있는 때문이다.

 

② 성령의 照明

하나님이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자신을 나타내시지만 인간이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罪로 暗昧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쉽게 말하면 영적으로 소경된 상태라고 한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은 여기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 있도록 靈眼을 열어 주신다.

 

a) 이미 언급한바와 같이 사람의 靈眼을 여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된다. 이를 성령의 불가항력적 은혜라 하였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라 하였다.

 

b) 사람의 마음을 조명하는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인간의 타락한 지식과 지혜를 회복시켜 주신다. 그렇기에 세상의 말과 지혜에 통달한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갈 때 그 같은 세상적인 지혜로 하지 않았다고 선언하였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그리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였다고 한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c) 육에 속한 자는 暗昧하고 盲目(맹목 : 사리에 어두운 눈)이어서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신령한자 곧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성령의 일을 받는다. 고전 2:15에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하였다.

 

d) 에베소서 1:17절에서도 바울은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照明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는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받아들여졌다고 하였다.

살전 1:5-6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e)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 수신자들인 성도들이 성령이 거하므로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요일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f) 이를 종합하면 성령께서 사람들의 생명 속에 오실 때 그는 그들을 조명하여 지식을 주고 가르치며 그들의 눈을 여시고 마음에서 수건을 벗기시며 마음을 유화시키사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알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없이는 사람은 계시의 진리에 암매하여 오직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때만 모든 하나님의 비밀의 계시와 구속의 역사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③ 결론

성령의 조명은 이미 주어진 계시를 깨닫게 해주시는 유효적 역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주어진 계시 외에 새로운 계시를 논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히브리 성도들은 모세의 계시 외에 다른 계시가 필요하지 않고 오직 그들의 마음의 베일을 벗겨내는 것이 우선이었고,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다른 복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이미 저들에게 가르친 복음을 보지 못하게 가로 막는 죄의 장막을 걷어 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을 받고 그 내면의 죄의 베일을 벗겨내면 생전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완악한 자들도 눈에 눈물이 고이고, 그리스도께로 겸손히 나온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정교한 논리로 변론하고 웅변적이고 인기 있는 설교를 듣는다 하여도 성령의 조명 없이는 모든 것이 헛수고이고 수포로 돌아간다.

 

2. 성령의 구원 사역의 결과는 중생

성령의 조명 없이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런데 성령께서 범죄한 인간의 마음을 조명하시는 주목적은 그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있다. 이는 성령의 주관적 역사이다. 조직신학에서 구원론을 성령론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 구원의 필요성

①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성령의 중생의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람은 전혀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완전 타락하였고 그의 지능과 의지와 정서는 철저히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요 8:34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됨이라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②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전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으며 선한 일도 할 수 없다.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하였듯 자연인(육에 속한자)은 영적으로 선한 일을 할 수가 없는 때문에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③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3:3) 성령이 없는 사람은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없는 송장이라.(엡 2:1) 또는 마른 해골(겔 37장)이라 하였다. 에베소서 2:1절은 이것을 총체적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람은 본질상 죽어서 영적으로 썩어있다. 그가 죽은 사람이라면 인간적으로는 아무리 여러 가지 방법을 접근한다 할지라도 반응 할 수 없기에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④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성령의 중생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령의 역사만이 새로운 피조물을 낳을 수 있고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주안에서 재창조할 수 있다.

 

2) 중생이란 무엇인가?

중생이 무엇인가는 중생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가 있다.

중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려면 중생이 아닌 것에 대해서 말씀할 때 보다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① 중생하면 다시는 육체로 죄를 짓지 않는 다는 생각을 하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중생이 아니다. 만약 중생하나로 중생한 사람이 영화롭게 되는 일이라면 우리는 회심도, 신앙도, 칭의도, 수양, 성화, 견인, 영화에 이르는 모든 것을 철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생한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지상에서 중생하였음에도 육신이 연약하여 짓는 죄들을 경험한다. 만약 일약(一躍) 영화롭게 된다는 중생관을 갖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율법 폐기론 자들이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구원파의 문제점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중생한 자들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생각하고 그럼에도 나타나는 죄는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 내속에 있는 죄의 자아가 지은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기 때문에 사기도 치고, 죄를 물을 먹듯 마시고, 그 이상의 것도 저지르게 된다. 실로 교리(敎理)가 잘못될 때 그 행위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이단의 모습들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② 또한 중생은 생활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중생한자는 선한 생활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생활이 개선되었다고 다 중생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도 그 행위가 선하게 변화된 사람들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는 말 즉 허물을 고쳐 착하게 산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은 개과천선 정도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도의 썬다싱이 어느 곳을 가다가 보니 청년하나가 길가에 서서 오랫동안 손을 들고 서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해서 그곳에 있는 한 노인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왜 저렇게 하루 종일 손을 들고 서 있습니까?” 그 노인이 대답하기를 “저 청년은 본래 불량배로 그 들고 있는 손으로 별의별 죄악을 다 저질렀습니다. 그 손으로 살인도 하고, 폭행도 하고, 도적질도 하고, 놀음도 하였는데 지금은 개과천선하고 그 손을 길들인다고 저렇게 날마다 길거리에 서서 손을 들고 스스로 벌을 서고 있습니다. 벌써 열다섯 해나 된답니다.”

썬다싱은 이 말을 듣고 너무도 불쌍해서 “여보시오 젊은이 당신이 회개하려면 당신의 마음속에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 손이 무슨 상관이 있다 말입니까?” 하니까 그 사람이 그 들었던 손으로 썬다싱을 냅다 치면서 “이놈아 ! 예수가 무어냐” 했답니다. 15년 동안 벌주고 길들였던 그 손이 다시 사람을 치고야 말았던 것이다.

 

③ 그러므로 중생은 다만 생활의 변화라고 주장 할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보증수표(保證手票)도 아니며, 선한 생활의 변화가 곧 중생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 이제부터 중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먼저 그 단어가 주는 의미를 알아본다면, 중생이란 말은 디도서 3:5에서만 발견되는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러나 중생이란 같은 뜻을 가진 말들이 성경에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거듭난다.(요 13:1, 3:3-8; 요일 2:29, 4:7, 5:4,18) 새롭게 난다.(약 5:18)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엡 2:10; 고후 5:17; 갈 6:15) 이러한 모든 말이 뜻하는 바는 중생은 인간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곧 인간은 중생함에 있어서 어떤 조력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독창적 권한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중생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 이후로 우리의 영이 죽어 영적사망 가운데(엡 2:1) 있게 되었는데 중생으로 우리를 새롭게 살게 하신 것이다.

 

3) 중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① 성경은 우리가 중생할 때 성령께서 어떻게 하시는가에 대하여는 말씀하여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골 3:3에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추었음이라” 하심처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신비하게 성도와 연합하는지 성령의 방법을 알려 주시지 않는다. 중생의 역사에 있어도 그 결과는 분명하고 뚜렷하게 보이나 인간 영혼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가 없다.

 

②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이러한 방법으로는 이해 할 수가 있다.

a) 중생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식물의 성장처럼 몇 달이나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b) 성령은 영혼의 內召에 와서 무엇인가를 행한다. 즉 중생이란 단순히 행위의 변화가 아니라, 행동의 혁신만이 아니라 영혼의 내심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루디아가 바울의 전도를 듣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여셨다고 말한다.(행 16장)

c) 성령은 사람에게 새 지식, 새 감정, 새 의지를 주심이 아니라 사람이 소유한 지식, 감정, 의지가 하나님을 거스리는 대신에 그를 위하여 사용되도록 작용하신다. 즉 범죄한 인간의 지, 정, 의를 용도변경을 하시는 것이다.

d) 성령은 중생의 사역에 있어 主權的이시다. 인생은 성령의 뜻을 좌절시키거나 중생을 어떤 방법으로 調整할 수 없다. 이것이 성령의 不可抗力的 恩惠가 나타나는 기초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임의로 분다.”(요 3:8)하셨다. 임의라는 말은 그의 뜻대로 인 것이다.

e)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 가운데도 성령께서 행하시는 중생은 인간의 믿음에 의해 좌우된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를 자기의 구주로 받아야 한다는 오류를 보여준다. 그래서 중생은 신앙에 선행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 그의 기쁘신 선한 뜻에 따라 그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엡 1:3-5) 만일 중생이 신앙에 선행치 않는다면 롬 9:7절의 말씀은 무의미하다. 단언하건대 중생에 있어서 성령은 100% 능동적이시고 사람은 100% 무능하고 수동적이다.

f) 이같이 성령의 중생시키는 방법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적으나 중생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난다는 것과 성령께서는 사람의 영혼(심령) 내소에서 일하시고, 성령은 인간이 가진 知情意를 용도 변경시키시며 그리고 자신이 주권을 가지시고 不可抗力的로 행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3. 성령의 구원과 그 결과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결과를 알기 위하여 요한복음 3장 예수와 니고데모와 의 대화를 본문으로 삼아 보자.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며, 바리새인이며, 이스라엘의 선생 일 뿐 아니라, 장로였지만 거듭남 곧 중생에 대하여 캄캄하였기 때문에 예수께 찾아 왔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때 예수님께서 왜 거듭나야 하는지를, 왜 중생하여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요 3:3절에 의하면 중생치 않은 자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하며, 3:18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기 때문이며, 3:36절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중생한자는

1) 중생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있고 들어 갈수도 있다.

내세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억지로 부정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죽음 저편의 신비한 세계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노력하거나 어떤 공포를 가지고 두려워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이 세상의 종교들도 내세에 대하여 희미하게나마 다 말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인간의 양심이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 내세가 바로 ‘하나님 나라’ 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들이 살던 모습으로는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각양각색의 종교행위가 나오는 것이며 종교행위 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도덕적 인간으로서 살려고 애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국토와 국민과 주권등 나라의 3요소를 다가지고 있는 이 지상 국가와 같은 틀림없는 나라이나, 지상 나라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나라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권(主權)을 가지시고 다스리시는 나라라는 말이다.

 

2)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

 

죄와 관계된 인간은 썩은 사과와 같아서 그 외모가 어떻든 그 속은 썩어서 냄새가 나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 같은 철학자는 중생을 알지 못하였지만 “인간이 선한 의지를 나타내려면 이것은 부분적 개선이나, 어떤 개혁 정도로 될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안에 전적 전도(顚倒) 곧 새 창조에 비교할만한 혁명을 통하여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중생인지를 몰랐다. 중생이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진노 앞에 있다.

로마서 본론을 시작하는 1:18절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하였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은 경건치 않은 사람(Ungodliness)과 불의한 사람(Unrightiousness)들을 가르치는데, 그들은 원죄와 그 원죄로 말미암아 짓게 된 모든 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는 인정하여도 그 결과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서는 믿지 아니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폐차 공장에는 폐차들을 굉장한 압력으로 부수는 프레스 기계가 있고, 또 어마어마한 기중기가 있는데 그 기중기에는 또 자석이 있어서 전기를 넣으면 전자석이 되어 부수어진 폐차들을 끌려 올린다. 이 전자석이 작동을 하면 이 폐차들을 꼼짝없이 달라붙어 용광로까지 이동을 해 그곳에서 전기를 끊으면 자동적으로 용광로 속으로 떨어지게 설계한 공장이다.

 

이것은 중생치 못한 사람들의 필연적인 결과를 보여주는 좋은 예화가 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인데 그 대상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중생한 결과를 몇 가지 생각해보았다.

 

4. 결론

 

1) 성령은 그 선택한자에게 불가항력적 은혜를 주시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게 하신다.

 

2) 성령은 범죄한 인간의 심령 그 깊은 內召에 조명하시므로 이를 행하신다.

 

3)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수 없으므로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

 

4) 중생은 다시 죄를 짓지 아니하거나, 혹은 개과천선 정도가 아닌 성령의 재창조이다.

 

5) 성령의 중생의 방법은 정확히 모른다. 다만 그 결과로 아나 순간적으로 이루어져 밤죄한 인간의 知情意를 용도 변경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한다.

 

6) 성령으로 중생한 자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며 영생을 얻으며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

 

 

 

 

                               

 

 

제4장 ‘성령신학’요약 (서철원 지음)

 

 

제1장 서론

 

1. 오순절 운동의 교리

오순절 운동은 성령 추구의 운동이었다. 예수만 믿음이 아니라 성령을 체험하기를 바라서 일으킨 운동이 20세기 초엽에 일어나서 20세기가 다 되도록 그 운동이 교회로써 존재하고, 또 은사 운동의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성령은 예수 믿을 때 받고 예수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 후에 별도의 과정으로써 성령 세례를 받으므로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성령세례를 받으면 반드시 그 물리적인 증거로써 방언을 해야 한다.

 

1) 오순절 부흥 운동의 근원 : 알미니안 신학

오순절 부흥 운동은 알미니안 감리교회 지반에서 발생하였다. 알미니안 감리회 신학에서는 주권적 은혜의 역사에서 인간의 주도성에로 강조점이 넘어오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쟁취된다. 쿠르트 훗텐(Kurt Hutten)의 지적대로 은혜를 부인하지 않지만 그 은혜는 인간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2) 성령운동에 대한 공교회의 반응

오순절 운동은 성령 운동이었다. 공교회는 초기부터 성령 운동에 대해 우려와 불안으로 대하였다. 2세기 중엽의 몬타누스 성령 부흥 운동 때부터 교회는 우려와 경계를 크게 하였고, 그 후 종교개혁 때 나타난 광신파에 의해 성령의 직접적인 말씀과 내적 조명을 강조하여 성경을 배척하고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을 약화하여 내적 체험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배척되었다. 그러나 18세기 감리회 부흥 운동은 정당한 교회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런 배경에서 오순절 성령 운동이 일어나서 세계로 널리 퍼지고 정당한 교회로 자리 잡으므로 로마 교회와 종교 개혁 교회 다음으로 제3 기독교 세력이 되었다. 따라서 이전 교회사에서 일어난 분파들의 성령 운동을 대적한 교회의 반응은 없어졌고 로마 교회와 영국 교회에까지 이 운동이 퍼지므로 오히려 교회 갱신의 세력으로 영접되었다.

2. 개혁교회의 성령운동

 

1)성령받음 : 선물임

2)성령사역의 주권성 : 내주

3)성령의 내주 : 구원의 보장

4)성령의 사역 : 전도와 성화

 

개혁 신학의 성령 논의가 가장 바르고 성경적이다. 불필요한 논의로 교회의 힘을 소진하는 것은 중단될 때가 되었다. 성경적 증거들에 의해 오순절파의 주장이 많이 수정되었지만 기본 신학은 그대로 고집하고 있다.

신학이 성경의 자기 증거에 의해 바로 교정되었고, 교정되어야 한다.

우리의 성령 논의는 오순절 운동의 신학과 관련하여 진행되므로, 성령의 인격과 사역을 성경의 제시로만 다룰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책은 성령론이라기 보다는 성령신학으로 설정되었다.

 

제2장 오순절 운동의 시작과 확산

 

1. 오순절 운동

 

1906년 4월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가(Azusa Street)에서 흑인 감리교회 목사인 윌리암 씨모어(William Seymour) 목사의 부흥회로부터 시작하였다. 씨모어는 방언 운동을 처음 출발시킨 챨스 파함(Charles Parham)에게서 배웠다. 이 운동이 짧은 시간에 미국 전역에 퍼지고 전 세계에 퍼질 수 있게 된 것은 프랑크 바틀만의 문서 활동에 크게 기인한다. 그는 미국의 성결회 계통의 신문들에 아주사 부흥 운동을 자세히 보고하였고 소책자들을 각처로 보냈다. 세계 각처에서 특히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들이 오순절의 체험을 얻기 위해 아주사가로 모여들었고, 많은 목사들도 부흥회에 참가하였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1950년대에는 그 내적 힘을 고갈하여 매우 피폐해졌지만 은사 운동의 전개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2. 오순절 운동의 확산 : 전 세계에 퍼짐

 

1) 유럽에 퍼짐

2) 남아메리카에 퍼짐

3) 아프리카에 퍼짐

4) 아시아에 퍼짐

 

3. 은사 운동

 

은사 운동은 신학은 오순절 운동과 동일하나 새로운 교회를 구성하지 않고 은사에 강조를 두는 면만 다르다. 로마 교회로 은사 운동이 퍼지면서부터는 성령 세례 대신 영의 해방을 사용한다. 즉 세례에서 성령은 이미 받았고 견신 때 혹은 그 후에 방언과 다른 은사들을 경험하는 것은 세례에서 받은 은혜가 방출되는 것으로 보게 된다. 이 은사 운동은 영국 교회에도 파급되어 칸터베리에서 은사 대회를 1978년 가졌다.

 

제3장 오순절 운동의 신학 : 중생 후 성령 세례

 

-방언이 세례의 증거 -

 

1. 중생 후 성령세례 받음

 

성령 세례를 받으면 봉사에 능력(power in service)을 입는다는 것이 오순절 운동의 교리이다. 그리스도의 생애에 성령의 두 작용이 있었다. 첫째 역사는 그리스도의 성령의 역사에 의한 출생이고, 두 번째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어 메시아로 임직되었다 그러면 신자의 생에서도 왜 두 가지 성령의 역사를 갖지 않아야 하는가? 출생(혹은 중생)에서는 성령은 안으로 오시고 성령 세례에서는 내려오신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는 중생 후의 과정이다.(Ernest S. Willams, Systematic Theology. Ⅲ. 1953.1981. pp.44-46)

 

2. 조건들 이행으로 성령세례 받음

 

성령 세례는 모든 신자들의 출생권(birthright)이다.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은 자기의 출생권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가 가능적으로 각 신자의 소유이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자기에게 충용해야 한다. (R.A.Torrey.The Person & work of the Holy Spirit. 150) 하나님의 주려는 능력이 인간의 받는 능력에 의해 제한되었다. 토리는 성령 세례 받는데 필요한 7단계를 제시한다. 랄프 리그스는 5단계를 , 퍼얼만은 기도에 중점을 두어 조건들을 강조하고, 도널드 기이, 챨스 칸등도 조건을 제시한다.

 

성령을 받기 이전에도 이런 철저한 죄에서의 분리를 이룰 수 있는 영웅이나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죄와 완전히 격리될 수 있다면 성령 받을 필요가 있는가? 성령을 받기 전에 완전한 순종을 할 수 있으면 성령 받을 필요가 있는가? 인간 본성이 그렇게 선하고 타락이 별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그러할 것이다. 인간의 노력이 성령 받음과 받음의 양을 결정하는 것은 은혜의 종교일 수가 없다.

 

3. 방언으로 성령 세례가 표현됨

 

카알 브럼벡은 주장하기를 "성령 세례 혹은 위로부터 능력을 입었는지의 여부는 방언을 말함으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왜 하나님이 방언을 성령 세례의 초기 물리적 증거로 택하셨는지를 7가지로 설명한다. 그중 4번째는 방언은 성령이 신자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상징이다. 혀는 마지막까지 성령에게 양도하려고 하지 않는데 완고한 혀로 성령이 말하게 한다는 것은 성령이 신자를 완전히 소유했다는 표가 되기 때문이다. 방언은 성령이 신자의 진리와 발언의 원천임을 현시하며, 또 말함이 인간의 특권과 능력의 대표이므로 하나님이 방언을 초기 물리적 증거로 고르셨다는 것이다.

 

4. 경험을 표준으로 삼는 알미니안 신학

 

오순절 신학은 알미니안 신학과 웨슬리의 성화 교리의 융합이므로 체험과 인간 주도성이 강조되어 교리보다는 경험을 규범으로 삼는다. 경험을 믿음과 구원 확신의 중심으로 삼음으로 육체적 현상들을 중시한다. 또한 성화가 칭의의 조건들이면 성화 이전의 사람들은 다 죄인으로 남고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도 칭의에 이르기 위한 모본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범으로 성립한다. 성화를 온전히 이루어 그 도덕적 의에 근거해서 칭의를 입으면 그 의는 내 획득 사항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다. 오순절은 정통 교리보다 정통 실천을 강조하여 영안에서 동력적 활동을 가짐으로 교리적 진리가 정당화를 받는다. 이처럼 오순절 파는 성령 세례의 동력적 경험의 유지를 목표하고 교리의 강조를 거부한다. 성령 세례의 경험은 인간 편에서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오순절파는 신약의 은혜를 오순절파의 공로로 바꾸었다. 종교의 경험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제4장 오순절의 성령 강림 :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1. 성령 강림의 근거 :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성령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이고, 믿음외의 다른 종교적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서는 이룰 수 없는 의를 이루어야 한다. 그 의의 성취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다.

 

2.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짐

 

구약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어도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에 의해 그 죄가 완전히 속량되지 못하였으므로 백성들 가운데 임재를 곧 성령의 거주를 가졌지만 그 백성들 각자가 성령의 내주는 갖지 못하였다. 그것은 신약 교회의 특권이다. 신약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에 의해 완전히 죄가 제거되었으므로(행 10:10-12) 성령을 받고 교회의 각 지체들이 성령을 내주 방식으로 모신다.

 

3. 그리스도의 승천 : 성령 강림의 필수 단계

 

파송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여 아버지께 청구한 것이고, 구속 때문에 획득하였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공로이고 다른 길이 전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이는 성령의 파송과 강림은 전혀 불가능하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전에 예수 믿었던 사람들이 성령 받지 못한 이유이다.

 

4. 예수 그리스도 : 성령 파송자

 

성령의 오심은 아버지의 약속이지만(눅 24:49, 행 1:4),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획득되었다. 신인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파송한다.

 

5. 성령은 보혜사로 오심

 

원 보혜사는 제자들이 예수를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 그의 몸으로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성령은 제자들의 모든 삶의 길에 항상 그들과 함께 하였고 동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각 사람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 보혜사와 다른 보혜사와의 차이점이다. 이 차이점이 원 보혜사로 하여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고 말하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혜사로서 제자들과 함께 거주할 동안에는 성령이 오실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원 보혜사가 백성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혜사는 예수의 부재 시, 예수의 현존이라고 정의한 레이몬드 브라운의 정의가 타당하다.

 

6. 성령 강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승천 후 속죄 보고를 받으시고 성령을 보내셨다. 그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에 이미 탐지되었던 인격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의 육체에 거하실 수 있게 되었다.

 

1) 성령이 처음 오셨을 때는 120명의 작은 무리에게 오셨다.

 

2) 첫 성령 수납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행 2:1; 1:12-15)

 

3) 첫 성령 강림은 강한 바람소리를 동반하고 불의 혀처럼 각 사람에게 임재 하였다.(행 2:2-3)

 

4) 성령 강림은 성령 충만으로 나타났다.(행 2:4)

성령 충만은 성령의 지배를 뜻한다. 오순절파의 주장처럼 물을 가득 붓는 식으로 흘러넘치게 부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5) 성령 강림은 방언 현상을 나타내었다.(행 2:4)

오순절 강림 시 방언을 말함은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외국어를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이방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 됨을 광포하는 것이다.

 

6) 오순절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오순절파는 사마리아인의 개종, 로마인들의 개종, 요한의 제자들의 개종 사건에서 오순절의 반복을 주장한다. (James Dunn. Jesus and the Spirit 1978. pp. 136-146 참조) 한번 오신 성령은 영구히 교회와 함께 하사 인류에게로 그 주거를 확장하신다. 사마리아인들이 성령 받은 것도 오순절의 반복으로 하늘에서 성령이 다시 강림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와 계신 성령이 그들에게 임재 하셨다. 여러 사람들이 성령 받은 것은 보충적 부어줌이나 반복적 강림이 아니라 성령이 그의 주거를 확장하심이다.

 

제5장 신약의 증거들 : 믿음으로 성령 받음

 

- 예수 믿음 = 성령 받음-

 

1. 예루살렘 교회

 

행 2:1-4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 후 처음으로 인류에게 오신 날이다. 오순절 이후에는 예수 믿고 성령 받는 일의 표준을 행 2:1-4에서 구할 것이 아니고 행 2:38-41에서 구해야 한다.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은 주의 말씀으로 이미 깨끗해졌다. 많은 경우 중생은 성령의 사역이므로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오신 하나님이므로 사죄의 권세를 갖듯이(마 9:3-6; 눅 7:48) 중생케 하는 권세를 가졌다. 중생 케함이 원래 보혜사의 직임이다.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이 직임을 계승하였다. 성령 오심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 때문이다. 십자가에 죽어 죄를 제거함이 없이는 성령이 오실 수 없다. 이런 구원 섭리 때문에 사도들과 제자들은 주 예수를 믿고 그의 권능으로 중생하고서도 오순절 성령 강림 시 성령을 받게 되었다.

 

3천 제자들은 베드로의 선포의 말씀을 듣고(아포덱사메노이) 세례 받았는데(에밥티스데산) 제자들로 추가되었다.(프로세테데산) 이 동사들이 다 단순과거동사이고, 2,3째 동사는 다 단순과거 수동태로 쓰였다. 말씀 듣고 세례 받아 성령을 받는 일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 행 2:1-4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 후 처음으로 인류에게 오신 날이다.

 

2. 사마리아 교회

 

행 8:4-25에서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의 전도를 받음으로만 아니고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을 받아 확실히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행 8:12에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하는 빌립을 그들이 믿었더라"고 한 것을 보면 주 예수를 믿었다기보다는 빌립을 더 믿었음을 알 수 있다. 기적들을 인해 그냥 미신적으로 믿은 기적 신앙이었고 예수 믿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전체 문맥에서 예루살렘에서 간 사도들이 예수의 사역 선포 없이 안수하였다고 볼 수 없고, 그 때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해야 바르다.

 

3. 바울의 개종 (행 9:1-18)

 

오순절파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중생하였고 3일후 아나니아에 의해 세례 받으며 중생하므로 중생 후 성령 세례의 도식 본문으로 삼는다. 그러나 주 예수를 만나고 세례 받기까지 3일간이 중생 후 성령 받기를 기다리는 기간으로 볼 것이 아니다. 3일간은 예수 믿음으로의 전이 과정이었고 투쟁 과정이었다. 세례 받음이 곧 신앙 고백이므로 삼일 후 신앙고백과 성령 받음이 일치한다. 또한 바울은 갈 3:2-5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믿음의 들음으로냐(ek akoees pisteos)"고 하여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 간에 아무런 시간적 거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한다. 갈라디아인들이 들어 믿고 바로 성령 받았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했으면 바울 자신의 경우도 동일하다.

 

4. 고넬료와 로마인들의 개종 (행 10:1-48)

 

오순절파는 그가 성령 받기 전에 이미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고넬료는 예수 복음을 듣지 못했으므로 예수를 믿을 수도 없어서 중생은 불가능했다. 또 고넬료야 율법을 아는 경건한 개종자이었지만 그의 친족, 친지들과 군인들은 전혀 그런 것도 알지 못했다. 베드로가 주 예수의 사역을 선포하는 중에 특히 "저를 믿는 자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고 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오셨다.(행 10:43-44) 로마인들의 개종에는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완전히 동시적이었다.

 

5. 갈라디아 교회 (행 15:1-5, 갈 1:1-4:6)

 

갈라디아인들은 율법에 관해서 듣고 지킬 의무감을 느끼기 전에 복음만 선포 받아서 믿고 동시에 믿어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예수 믿고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율법 준수의 의무가 전혀 부가되지 안했다. 성령 받음은 믿음으로 되고 율법의 행위 곧 인간적 노력으로 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갈라디아서만큼 성령 받음과 믿음이 일치하는 성경책도 없다.

 

6. 데살로니가 교회 (행 17:1-9; 살전 1:2-10)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주를 본받는 자들이, 즉 믿는 자들이 되었다.(살전 1:6-7) 바울은 여기에 단순 과거분사 분사를 사용하므로 (살전 1:7) 성령의 기쁨을 갖는 것, 곧 믿음과 말씀을 받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한다. 짧은 기간 곧 세 안식일 동안에 복음을 들었어도 받을 때부터 기쁨으로 주를 믿었다.(행 17:2; 살전 1:6)

 

7. 고린도 교회 (행 18:1-11; 고전 1:13-2:16)

 

행 18:8에 누가는 주를 믿은 것을 표기하기 위해 단순 과거동사 믿었다(에피수센)를 사용하여 주를 받는 일과 성령 받음이 동시적으로 발생했음을 분명히 하지만,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할 때는 미완료 과거형을 썼다. 이것은 일년 육개월 간 믿고 세례 받는 일이 반복되었음으로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고전 12:13에서 한 성령에 의하여(en heni pneumati) 우리 모두가 한 영으로 세례 받아졌고, 예수 믿어 그의 몸에 결합되는 일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오순절파는 세례 주는 이는 성령이 아니시고 주 예수이므로 이 본문을 성령에 의해서로 이해 할 수 없고 성령 안에 서로 이해한다고 하지만 바른 이해가 아니다. 성령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결합시키는 일을 하시는 분이므로 한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에로 세례 받아진다. 이 세례 받는 일이 믿는 때에 이루어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단순과거 수동태(ebaptisthemen)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성령을 마시게 되어졌다. 내가 노력해서 성령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마시게 되어졌다. 수동태 동사 epotisthemen를 사용하였다. 예수 믿을 시초부터 성령을 받음을 성령 세례라고 말해야 맞다.

 

8. 에베소 교회 (행 19:1-20)

 

1) 에베소의 첫 그리스도인들(행 19:1-7)

오순절파는 아볼로의 전도와 세례 받음으로 중생하고 바울에 의해 성령 세례 받았음이 분명하므로 중생 후 성령 세례 공식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하였으므로(행 18:25) 예수 이름으로 세례주어 예수 믿게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로 남았다. 예수 믿을 때 성령 받음이 당연함을 바울의 놀란 질문에서 잘 알 수 있다. 행 19:2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여기 믿을 때와 성령을 받았느냐는 모두 단순 과거여서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동시적인 사건임을 분명히 한다. 흠정역이 너희가 믿은 이후에(Since ye believed)로 잘못 번역한 것이 그릇된 해석과 잘못된 신학을 낳게 하였다.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고서야(행 18:26) 복음을 바로 알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줄 수 있었다.

 

2) 다른 에베소인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3년간의 집중 전도로 많이 주께로 돌아가게 되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akousantes) 바로 믿어(pisteusantes)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 받았다.(esprasisthete) (엡 1:13) 듣고 믿고 인침이 다 단순과거로 표시되어 복음을 들을 때 믿고 믿음으로 성령 받았음을 분명히 한다. 이 일은 다 복음을 들을 때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 성령으로 인침이 성령 받음과 동일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성령을 주심이 믿음의 결국 곧 구원에 이름의 보증이기 때문이다.(엡 1:14; 고후 1:21-22)

 

9. 신약 후기 교회들

 

사도들의 퇴장 이후에는 교회의 세례 주는 관행이 바뀌었다. 복음의 선포로 예수 믿게 하여 바로 세례 주어 교회에 가입시킨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들을 교회에 들여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문답 교육을 시켜서 세례 받아 교회에 가입시켰다. 교육 과정 중에 사도신경을 익히고 외우게 하였는데 그러므로 예수 믿음과 세례 받음이 분리되어 오늘까지 왔다.

 

제6장 성령 세례 = 성령 받음

 

1. 예수의 성령 세례 = 메시아 임직식 : 성령의 담지자[멜담(擔), 가질지(持), 사람자(者) '담지자'는 담당자와 비슷한 말-책임을 맡은 사람, 임무를 짊어진 사람, 일을 맡은 사람, 사명을 띤 사람, 심부름꾼이라는 뜻]됨

 

하나님의 아들로서 출생하신 이가 성령을 받아 메시아로 세워지심으로 예수는 성령 담지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메시아로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되 한량없이 받았기 때문이다.(요 3:34) 예수가 성령 담지자가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성령 받는 것은 예수에게서 만이다. 예수 성령 담지자는 성령 파송자가 될 수 있기 위하여 죽고 부활에 이르러야 했다. 주 예수는 부활의 날에 성령 파송의 약속을 "성령을 받으라"로 밝히 표현하였다.(요 20:22)

 

2. 성령 강림 = 성령 세례 = 성령 받음

 

성령 세례는 예수의 메시아의 임직에 합당히 적용되고 백성들의 성령 받음은 성령 받음, 성령 부어주심, 성령 충만으로 표기되었다. 성령 세례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아니하고 주 예수의 약속을 회상하여 한 번 반복함밖에 없다. (행 11:16)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성령 세례를 약속하지 않고 성령 받음을 약속했다.

 

제7장 성령 받음 = 선물로 받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단지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이렇게 믿기만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롬 4:5) 청구하면 성령이 오시는 것이 아니고 믿으면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보내신다. 중생 후 성령 세례를 가르치는 오순절 신학은 신약에 전혀 생소한 율법주의이지만 복음주의 신학으로서 힘 있게 주장되었다.

 

제8장 성령 강림의 목적 = 하나님의 거소 마련

 

하나님의 거소 조성이 성령 강림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은 백성들이 거룩해짐으로 이루어진다. 백성이 거룩해지는 것은 성령의 인도로 된다. 성령의 인도가 죄를 죽이고 거룩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내주로 이루어진다. 성령의 내주는 그리스도께서 계심인데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함으로 영이 살아나고 몸은 죽게 된다.(롬 8:10) 성령의 거주가 하나님 자신의 거주이다. 성령의 내주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해졌다.(고전 3:17) 그러나 이스라엘의 거룩은 외적 거룩이요, 의식적 거룩이므로 내면에까지 완전히 거룩해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셨고 백성들 각자 안에 내주하지 못하였다. 백성들 각자 안에 거하는 것은 신약 교회의 몫이었다.(요일 4:15)

 

제9장 성령의 내주 = 지속적인 인격적인 관계 맺음

 

구약 백성들에게는 성령께서 장막을 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 위에 계셨다.(출 25:19, 40:34-38)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함께 한 민족은 이스라엘뿐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백성들 각자의 마음에 하나님이 내주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신약 교회만의 특권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백성이 구속되었으므로 그 은혜 때문에 성령이 신약 교회 전체와 함께 계시지만 신자들 각자의 마음속에 거주하신다.(롬 8:9; 갈4:6; 고전3:16, 6:19;고후 1:22, 5:5)

 

기독교 구원의 신비는 성령의 내주로 시작하고 진행되는 것이다. 육체 안에 하나님이 내주하신다는 것은 말로 기술할 수 없는 신비이다. 육적 존재 안에 성령이 거하기 위해 오셨다. 성령의 내주로 육인 인류가 영으로 변화되었다. 영은 성령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이 된 자들의 존재 방식이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의하여 성령의 오심이 삼위 일체 하나님의 오심을 뜻한다. (요 14:23; 요일 3:24; 4:13, 2:24) 그리스도의 은혜는 영구한 것이어서 우리를 영원히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은 새 인류의 각자 안에 영구히 거하신다. 칼빈은 이 진리를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가 죽은 후에도 우리의 영혼에서 떠나가지 않고 함께 한다고 하여 재세례파의 영혼 수면설을 반대하였다.

 

제10장 성령 충만 = 성령의 지배

 

1. 성령 충만 = 성령의 지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의로울 뿐만 아니라 원리적으로 거룩하다.(엡 1:4) 그리스도인이 이처럼 원리적으로 거룩하여도 거룩해져야 한다. 바울은 성령 충만은 엡 5:18에서 한번 사용하였고 다른 서신들에서는 성령의 인도로 표현하였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충만도 그 전체 문맥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통치를 말한다. 신약 전체의 문맥에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인도 또는 지배이다.

 

2. 엡 5:18 성령 충만을 받음 = 성령 통치 받음

 

'영으로 충만케 되어져 있으라'이다. 현재 수동태 명령형을 썼다. 영으로 충만케 되어져 있음은 내 노력에 의해 영으로 충만케 됨을 배제한다. 은혜가 이미 주어져 있다. 현재형이므로 계속적인 의무 사항이지 반복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영이 주어져 있으므로 영으로 충만케 되어져 있음은 그리스도인의 책임 사항이다. 성령 충만은 통상 생각하듯 물리적 양적 채움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에게 전적으로 순종하고 완전히 지배받음을 뜻한다. 이 일은 오순절 후 사도들과 처음 제자들에게 잘 나타났다.

 

3. 사도들의 성령 충만 = 성령에 전적으로 순종 곧 성령에 지배받음

 

그들은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하였다. 성령의 지배 외에 달리 할 수 없었다. 성령 충만은 일곱 집사에게 적용되었다. 제2세대 사도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바나바는 전도자로 시작하였는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행 11:24) 성령 충만은 바울에게도 적용되었다. 성령 충만은 사도행전에서는 비시디안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으로 적용되고 그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행 13:52의 예로 중단되었다. 그 이후는 성령의 역사가 처음처럼 그렇게 힘 있게 전개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를 보면(살전 1:6) 성령 충만이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바울의 서신에 성령의 인도가 강조됨을 볼 때 성령의 역사가 처음 세대와는 강도가 낮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성령의 인도 = 성령 충만 = 죄악을 벗음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악의 행실들을 죽이게 하는 역사이고 그리스도의 법으로 살게 하는 성령의 인도이다.

 

제11장 성령으로 인침 = 구원의 보장

 

성경이 말하는 구속은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완전히 구원에 이름을 뜻한다. 이 구속의 보장으로 성령을 주시고 인치셨다. 칼빈은 성령 부어 주심과 성령으로 인치심을 동시적 사건으로 일치 시켰다. 성령으로 인침은 믿음의 일이요, 복음의 약속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동시적으로 심장에 새겨진다.

 

제12장 성령 받았음의 증거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

 

성령을 보신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이 성령을 받았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제13장 성령의 사역 : 전도와 성화

 

성령의 사역은 전도와 성화 작업이다. 그 외의 모든 일들은 다 이 전도와 성화 작업 사이에 들 뿐이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전파 : 전도자 성령

 

성령이 원전도자이고 사람 전도자들은 다 그의 전도의 조력자들이다.

 

2. 거룩한 백성 만듦 : 성화자 성령

 

성령은 본래 거룩한 하나님이시지만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직임 때문에 거룩한 영으로 호칭되었다.

 

제14장 성령의 능력 : 복음 전도의 능력

 

성령의 능력은 기적과 신유 능력 행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거를 힘 있게 이루는 능력이다. 성령은 창조주로서 창조 사역도 하였지만 주 예수의 부활 후에 오신 성령은 전적으로 주 예수의 증거에 자기의 모든 활동을 집중하였다.

 

1. 성령의 능력은 예수 복음을 증거 하는 능력

 

2. 성령의 능력은 죄를 이기는 힘

 

3. 성령의 능력은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

 

제15장 능력의 길 : 기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결 같이 갈망하는 것은 성령의 임재 체험과 그 능력의 행사이다. 성령의 임재가 바로 그리스도 임재이다. 임재의 체험은 주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을 받음은 능력의 원천을 받음이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행사하는 길은 기도를 통해서이다.

 

성령은 종말론적 선물이어서 영원히 계속될 선물이지만(요 14:16)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임시적이어서 계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할 사항이다. 기도의 역사는 마법이 아니므로 한 번의 능력 받음으로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기도하여 죄악을 떠남으로 능력을 덧입는다. 성화의 진행과 비례해서 능력을 더 크게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은 성화가 근거가 돼서 능력을 받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기 죄악을 내어놓는 기도는 하나님의 들음을 받아 능력을 입어 복음 증거를 힘 있게 한다. 성령 세례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능력을 입기 위해 전력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제16장 능력의 소실

 

1. 기도가 약해지거나 기도를 쉼으로 능력을 상실한다.

2. 육체의 욕망들을 추구하고 그것들을 생활의 법으로 하면 능력을 입을 수 없고 힘입는 능력을 상실한다.

3.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주된 생각이 돈에 집중하면 능력을 상실한다.

4. 성령의 능력을 자기 추구에로 전용하면 능력이 곧 소실된다. 그러므로 능력을 입고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를 죽이고 영광이 주께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제17장 성령의 은사들

 

1. 은사의 성질과 목적

 

은사들은 은혜의 표현이다. 은혜는 구원 은혜를 말한다. 은사들은 다 성령에게서 유래하였다. 성령은 그의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은사들을 베푼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면 그 은사들은 성령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은사들은 다 초자연적으로 오지 않는다. 이미 주어진 재능들이 개발되고 활용되는 것도 성령의 은사이다. 성령의 선물은 종말론적 선물이어서 영원한 선물이지만 은사는 임시적이다. 모든 교회의 지체들은 일정한 은사가 아니어도 다른 은사들을 받아가지고 있다.

 

2. 은사들의 종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과 교회의 봉사, 위로와 구제, 교회의 치리는 항속적이나 나머지 은사들은 다 사라졌다. 오용하기 때문에 부패하고 중단하였다. 특히 계시 전달의 성격을 갖는 예언과 방언과 방언 통역은 신약 성경의 완결로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므로 중단하였다.

 

3. 방언

 

방언은 행 2:1-4, 행 10:46, 행 19:6에 그 나타남이 기록되었으나 사도행전 다른 부분에는 명기가 없다. 그리하여 사라진 줄 알았는데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 교회가 매우 혼란하였다.(고전 14:12-14) 고린도 교회의 방언도 곧 사라지게 되었다. 방언이 계시나 권면의 내용의 전달이 아니고 자기 과시를 위해서 방언의 은사가 오용되므로 중단되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방언은 임시적인 은사이기 때문이다.

 

1) 고린도 교회의 방언

고린도 교회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방언하고, 서로 먼저 방언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전 12: 27, 14: 23) 방언의 은사를 제일로 여기며 다른 은사들을 무시하였다.(고전 12:14-26)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주어졌으므로 방언도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고, 이 일을 위해서는 통역이 필수적이다.(고전 14:15-19) 고린도 교회에 방언자는 많았어도 통역자는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고전 14:5, 28) 방언이 통역되면 권면을 전하는 예언이 될 수 있었다.

 

2) 사도행전의 방언들

예루살렘의 방언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한 번 허용되었다. 유대인들이 믿지 않으므로 방언으로 큰 구원을 선포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의 옮김을 광포한 것이다. 가이사랴 고넬료와 로마인의 개종시 방언은 이방인도 예수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되는 일에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고, 예수 믿음에 성령을 동시적으로 주심을 유대인들에게 분명히 하기 위해 주어졌다. 방언을 동반하지 안했으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성령 주심과 예수 믿음을 인정하지 안했을 것이다.(행 11:18)

 

에베소 열두 형제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므로 옛 세대에 속한 자들이고,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방언도 안디옥에 거주하며 바울의 복음 선포시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에 대한 증거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에베소는 국제도시이고 가나안과 육지로 연결된 교통 요지였으므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증거한 것이며 방언으로 증거한 이후에 대대적으로 이방인들의 개종이 이루어졌다.

 

고린도도 국제 항구 도시이므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 이 고린도 교회도 방언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졌음을 분명히 하게 된 것이다.(행 18:7)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대한 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바울이 떠나 간 후에도 계속되어 교회내의 문제가 되었다.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와 에베소의 경우처럼 일과성이 아니고, 상당 기간 계속되면서 방언을 오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방언은 폐지되었다. 또 복음서와 사도들의 글이 이루어지므로 더 이상 방언으로 권면이 계속될 필요가 없고 신약에 근거해서 가르치고 권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방언이 발생하면 방언자들의 자기 과시욕 때문에 교회는 혼란하고 자라지 못하며 분열해왔다.

 

3) 오순절 운동의 방언

20세기 오순절 운동은 방언으로 시작하였다. 방언해야 성령 받았다는 표가 되므로 방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였고 학습과 모방에 의한 방언을 힘쓰게 되었다. 오순절 운동이 은사 운동으로 바뀌면서 방언과 신유의 은사가 크게 강조되어 70년대 까지 방언이 크게 번졌으나, 은사 운동이 80년대 교회 성장 운동으로 바뀌면서 신유의 은사 강조보다 방언의 강조가 적어지므로 방언이 거의 사라졌다. 고린도 교회에서 통역은 적었던 것처럼 20세기 오순절파의 교회들에서도 통역은 적어서 방언의 내용은 별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순절 운동의 방언은 혼란과 무질서만 많이 하였고, 신앙의 성장은 없었다. 그러나 방언을 받기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한 것은 새 신자들을 신앙에로 성장하도록 하는 유익을 주었다고는 할 수 있다.

 

헤르베르트 뮐렌은 말하기를 방언은 자연적 재능이 성령에 의해 해방되어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하는데 사용되는 것으로써 하나님께 헌신의 표현으로서 일종의 기도형태라고 말한다.

 

20세기 방언은 예언을 가져오는 계시적 은사가 아니라 방언을 갈구하고 방언을 환경에 접촉되므로 나타나는 언어 기관의 특별한 반응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이 방언 현상은 19세기 부흥 운동이 크게 일어나도 그 때는 경험하지 못한 현상이다. 방언을 추구한 20세기 사람들이 얻은 경험이다.

 

4. 예언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은 방언과 방언 통역과 예언을 성령의 세 기본 은사로 주장해왔다. 교회 성장 운동이 신유의 은사를 강조하기 전까지는 이 세 은사를 가장 중요한 현존 은사로 여겨왔다. 계시의 계속성을 말하는 자들은 오순절파 사람들이 받은 성령과 사도들이 받은 성령이 동일하므로 현대인도 동일한 성령 경험을 하고 지금 사람들이 받는 말씀도 성경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성령은 동일한 성령이어도 사도들은 계시의 기관이므로 영감을 받아 받은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하였다. 영감은 사도들과 성경 저자들에 국한하여 성경 계시가 완결되었으므로 더 이상의 성경적 구원 계시는 계속되지 않는다. 사도들에 의해 성경 기록이 완료되고 그들이 퇴장하므로 계시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미래 예언은 불가능하고 사도와 선지자들 외에는 허락되지 안했다. 성경 예언의 해석 외에는 다른 길은 불가능하다. 성경 예언의 해석도 그 성취를 예언할 때는 인간의 해석이므로 그 해석된 대로 성취되지 않는다. 예언과 지식의 폐지를 예언한 바울의 예언대로 예언은 그쳐졌다. 성경에 모든 예언이 다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칼빈의 가르침대로 고린도전서 12:28-29의 선지자는 미래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 성경을 다르고 적용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때는 영감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이 적용된다.

 

5. 신유의 은사

 

야고보 사도가 가르치는 믿음과 기도로 병이 고쳐지는 것은 교회사에 계속 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약 5:14-16) 그러나 신유의 은사를 저장 받아 마술적 지팡이를 휘두르듯 병자들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사도 시대로 그쳤다. 바울도 그의 말년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의 위장병을 고쳐줄 수 없어서 자연적 처방만을 했을 뿐이다.(딤전 5:23) 에바브로디도는 죽기에 이를 만큼 병들었지만 신유 은사로 바울이 고치지 못하고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사 고쳐주시기만 기도하였고(빌 2:26-27) 드로비모도 병들어도 신유의 은사로 낫게 하지 못하고 밀레도 섬에 남겨두었었다.(딤후 4:20) 사도들에게는 치병과 귀신 추방의 권세가 주어져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확증하고 교회를 설립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두 능력은 사도들의 사도로서의 신임장이었다. 복음의 선포와 교회의 설립을 위해 이 능력들이 행사되었다. 그들은 기적 행사와 신유 능력의 현시와 그 자체의 확증을 위해서는 그 능력이 현시되지 안했다. 바울 사도의 경우는 마지막 선교가 이루어진 멜리데 섬에서의 활동까지는 치병의 은사가 행사되었다.

그 후에는 이방 세계에서 전도하는 일이 진행되지 못하였으므로 치병의 기적들을 행했다는 신약의 보고가 없었다. 따라서 신유 은사자는 사도들의 활동이 끝남과 함께 중지되었다. 사도 시대 이후에는 믿음의 기도로 병들이 낫는 것이 허락되었다. 믿음의 기도로 병자들을 고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

 

제18장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

 

1. 예수 = 성령으로 시작한 사람

 

2. 예수 = 최초의 성령 세례받은 자 - 구원 시대 곧 하나님 나라의 시작

 

3. 예수 = 성령의 담지자

 

4. 예수 = 살리는 영, 성령의 파송자

 

5. 성령 = 예수의 영; 예수의 인격 = 성령 오심의 통로

 

우리에게 실제로 오신 분은 성령이셔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체험한다.

 

6. 보혜사 = 예수의 제2 자아

 

7. 그리스도 사역의 승계 : 보혜사로 역사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사역을 계속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자기 자리에 보내셨다.

 

8. 성령 사역의 목표 = 그리스도의 영화

성령의 또 다른 주요 사역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이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함을 그의 목표로 삼았듯, 이제 차례를 바꾸어 성령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함을 그의 사역의 목표로 삼는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에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보신다. 왜냐하면 이 일에서 그리스도께서 왕이시기 때문이다.

 

9. 예수 = 부활의 첫 열매 ; 성령 = 그 보증금

 

10. 영 = 종말 세계의 생의 원리

종말 세계에서는 영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고 유지되며 영위되는 삶을 살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성령의 내주와 충만은 다 종말 세계에서 우리가 누리고 살 풍성한 영의 지배의 예표라고 할 것이다.

 

 

 

 

 

성령신학 서 평 (서철원 지음)

 

<저자소개>

 

서철원 교수는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의 신학적 여정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미국의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변증학으로 석사학위를 하고, 네델란드 자유 대학교 조직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별히 그의 학위 논문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론으로 받았다.

 

학위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개혁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이후에 총신으로 옮기고 현재까지 총신에서 가르치고 있다. 서철원 교수의 성령론을 살펴보는 것은 현재 가장 큰 교단으로 인식되고 있는 합동의 대표적인 신학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신학은 합동뿐 아니라 개혁교단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장로교단에 영향을 주고 있다.

서철원 교수의 성령론은 많은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특별히 차영배교수의 성령론과 비교하거나 성경신학자들의 성령론과 비교하여 볼 때 그 독특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과 그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본다는 점에서 서철원 교수의 성령론을 바로 살피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1. 오순절주의 성령론

 

성령론은 정교회 신학자인 니콜라이 베다에프의 말을 빌자면 “마지막 탐구되지 않은 신학의 영역이다.” 칼바르트는 성령신학을 기독교 신학의 미래라고 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성령론에 대한 다양한 면을 살펴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성령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은 복된 작업이라 생각한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그리고 성령의 인침과 은사들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개혁교회의 성령 세례는 오순절운동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도널드 메크레오드가 마틴 로이드존스의 성령론과 비교하여 개혁주의 성령론을 논의하였다면 서철원 교수는 오순절주의와 비교하여 개혁교회 성령론을 제시하고 있다.

 

서철원 교수는 성령론이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그리스도 신학으로 개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임을 말하는 것이다. 특별히 성령 세례와의 관계에서 오순절주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강림과의 연결이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오류라고 하였다. 즉 예수 믿음과 상관없는 세례 받음에서 성령세례의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성령운동에 대한 공교회는 초기부터 우려와 불안 회의와 경계로 대하였다. 2세기 중엽의 몬타누스의 성령부흥운동과 종교 개혁시에 나타난 광신적 성령운동 모두 성경의 가르침보다 내적인 체험을 강조했다. 즉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와 조명을 강조하므로 교회의 질타를 받고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러한 교회사의 역사는 오순절 운동이 초기에 크게 배척을 당하게 된 이유이다.

 

오순절 운동이 불러일으킨 신학적 논의는 바로 성령세례이다. 성령세례를 중생 후에 받는 별도의 과정이고 중생이나 교회 가입과 일치 시킬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오순절주의의 성령이해는 성령 자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강림의 근거인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서 시작함으로 교정할 수 있다.

 

1) 오순절 운동의 역사

 

서철원교수는 오순절 운동과 오순절 신학의 역사를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것은 오순절운동은 오순절시 예루살렘 교회처럼 성령세례 받고 그 표로 방언해야 한다는 신학으로 시작하였다. 즉 오순절 운동은 방언 받는 것을 추구하였다. 방언을 받아야 성령 세례를 받았음을 증거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운동은 1900년 미국의 감리교 목사인 찰스 파함에게서 시작하여 1906년 그의 제자인 흑인 감리교 목사인 윌림엄 씨모어르 통하여 전파 되었다. 이에 1914년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을 형성하였고, 1960년대까지 로마 카톨릭을 비롯하여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2) 오순절 신학의 역사

 

오순절 신학은 처음부터 성령을 추구하였다. 오순절 신학은 알미니안 신학과 웨슬리의 성화교리의 융합이다. 이 둘 다 체험과 인간주도성이 강조됨으로 인하여 교리보다 경험을 규범으로 삼는다. 이러한 오순절의 신학은 웨슬리의 완전 성화의 가르침에서 시작하였다. 웨슬리는 칭의가 성화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특별히 완전 성화는 인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웨슬리의 완전 성화는 믿음과 성화에 있어서 인간의 주도성이 강조됨으로 자연히 경험이 강조되고 경험이 신앙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웨슬리는 완전 성화에 있어서 성령세례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웨슬리의 인간 주도적 경험주위 신학은 19세기 초엽 미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던 찰스피니에게 이어진다. 찰스피니는 장로교도였지만 웨슬리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그는 감정보다도 자유의지와 지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인간 주도적 경험은 더욱 분명하였다. 찰스 피니는 법정적 칭의를 부정하였다. 오히려 찰스 피니의 자연적 능력으로 이 땅에서 완전 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고 바울은 증거로 논증하였다.

 

이러한 웨슬리와 찰스 피니의 신학을 요한 플릿처가 수정 보완하였다. 그는 완전성화가 이루어지려면 성령세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로써 오순절 운동이 바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오순절파의 기본 교리는 성령 세례를 반드시 경험해야하며 그 경험은 방언으로 확증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찰스 피니의 후계자인 D.L 무디에게 이어졌다. 무디는 성령세례를 강조하여 이는 개종과 구분되는 경험으로 봉사를 위해서 오순절적인 능력을 입음이라고 전파하였다. 이 운동은 영국의 케스윅 운동을 열게 하였다. 이러한 무디의 강조는 그의 동역자인 R.A 토레이에 의하여 확정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흐름으로 오순절은 중생, 성령 세례, 신유 그리고 긴박한 재림의 4대 교리가 세워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순절주의 근본신학은 성령세례는 중생 곧 구원 다음의 제2의경험이고 방언을 말함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성령 세례의 경험은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 편에서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2.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이해

 

이제 오순절 성령강림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서교수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있다고 본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 성령을 받게 작정되었고 약속되었다(요 7:37-39).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는 다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되어 있으며(갈 3:14), 성령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이고 믿음외의 다른 종교적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서는 이룰 수 없는 의를 이뤄야 하는데 그 의의 성취가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한 제사가 죄를 완전히 제거하고 해결하였으므로 인류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백성 됨의 표로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교수는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 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가 성령으로 이루어진 사건을 첫 아담(창 6:3)에게서 보여 졌고,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함으로 임재를 확실하게 하였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성소를 짓고 거주하셨다. 이렇게 거주하심이 바로 성령의 임재이다. 이것이 성령의 임재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광야 중에서 성령을 거스렸다고(행 7:5)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구약의 임재는 성도 각자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도 각자에게 임하는 것은 신약교회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성도 각자에게 임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속 받은 백성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성령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신 성령은 오직 보혜사로 왔다는 것이다. 보혜사의 의미가 백성들과 함께 있고 백성과 함께 거하고 백성들 각자 안에 내주하시는 자를 말한다. 요일 2:1에는 보혜사가 변호사로 쓰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함을 지시하지만 요한복음의 보혜사는 백성과 함께 있고 그들을 인도하며 그들과 함께 거하는 자이다(요 14:16-18).

 

서 교수는 바로 요한복음의 관점을 더 우선시 하여 성령은 보혜사로 백성들과 함께 하고 그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 안에 내주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즉 성령 강림의 근본 목적은 백성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 안에 내주하심이며, 성령의 내주가 그의 사역의 일차적 목표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파는 성령의 보혜사로서의 직임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 능력 주시는 면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 강림의 목적이 백성들 안에 내주하심이기에 한번 오신 성령은 백성을 떠났다가 반복적으로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보혜사의 직임이 백성들과 함께 있고 그 들과 함께 거하는 것이므로 제자들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요 14:6). 즉, 한번 오신 성령은 다시 떠나시지 않고 반복되는 것은 오순절 성령의 오심은 종말론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반복되면 그것은 임시적인 것이지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다.

 

이렇듯 서교수는 성령 강림의 목적을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두고 있음이 오순절파와는 분명히 다른 관점이며 성령 강림을 구속의 완성과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종말론적 사건으로 보는 견해가 또한 차영배교수를 비롯한 여타의 분들과 다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3. 성령 세례

 

1) 예수의 성령 세례

 

성령 세례에 대한 부분은 참으로 분분하다. 오늘날 성령론의 근본 문제가 바로 성령 세례에 있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라는 말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성령으로 받는 세례, 혹은 성령으로 주시는 세례로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신약에서 성령 세례가 처음 등장한 것은 세례 요한의 메시아 선포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예수의 성령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에 의하여 메시아 곧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선포되었다(요 1:34).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됨의 표는 그가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고 성령으로 세례 주는 자라는 데서 성립한다. 바로 이것이 메시아의 전령인 세례 요한의 선포이다.(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이렇게 예수는 전령인 세례 요한에 의해 세례 받을 때 성령이 강림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복음서 기자들은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고 하지 않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에게 임하였다고 기록한다(마 3:16; 막 1:10; 눅 3:22; 요 1:33).

 

서 교수는 이 사실에 주목하여 예수의 성령 세례는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음이라고 해야 더 타당하다고 강조한다. 즉 예수의 성령 받음은 메시아로서의 임직식이었으며 이 같은 사실이 하늘의 음성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언이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리니’(마 3:17; 막 1:11; 눅 3:22) ‘내 사랑하는 아들’이 메시아로서의 공식 선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였다(요 1:34). 결국 예수는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음으로 메시아로 임직되고 선포되었다.

 

서 교수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 받아 메시아로 세워짐으로 그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 다 성령 받을 것임을 예시하였다고 본다(요 7:37-39). 이렇듯 예수의 성령 받음이 기름 부음 받음이므로 요한의 백성들이 성령 받는 것도 기름 부음 받음으로 표기하였다(요일 2:20)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보다 성령 받음으로 표기해야 올바른 이해로 본다.

 

2) 성령 세례는 성령 받음이다.

 

성령세례에 대하여 오순절파는 구원받은 이후에 오는 또 다른 표라고 말한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론의 중심이다. 이에 대하여 개혁교회는 성령세례에 대하여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서교수는 성령 세례는 예수의 메시아의 임직에 합당히 적용되고 백성들의 성령 받음은 성령 받음, 성령 부어주심, 성령 충만으로 표기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에서 성령 세례를 약속하지 않고 예수 믿음으로 성령 받음을 약속하였음을 그 예로 증거한다(행 2:38). 결국 성령 강림 후에는 더 이상 성령 세례는 적용되지 안했고, 주 예수의 약속을 회상하여 한번 반복함밖에 없다는 것이다(행 11:16). 서교수는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령 세례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안했고 성령 받음과 성령의 충만, 성령의 내주, 성령을 마심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는 성령세례가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다 성령 받음으로 족한 것이다. 사마리아교회(행 8:15-17),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행 8:26-39), 고넬료와 로마인들(행 10:34-48),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행 13:13-48), 빌립보 교회(행 16:12-15), 데살로니가교회(행 17:1-4), 고린도교회(행18:5-8), 모두 예수믿음으로 성령 받은 후에 물세례 받음이 이방 교회에 이루어진 교회 구성 방식이다. 서 교수는 이러한 논증에 따라 확증하여 말하기를 “예수 믿을 때 받는 성령 받음이 성령 세례이고 예수 믿은 후에 성령 세례는 사도행전에 없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논증이 오순절파와 개혁교회의 차이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서교수의 분명한 입장을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 사마리아 교회는 성령 세례를 받았는가?(행 8:4-25)

 

오순절파는 이 본문이 중생 후 성령 세례 받는 도식이 가장 잘 성립하는 본문으로 삼는다. 이에 대하여 서교수는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의 전도를 들었다. 그러나 말도 들었지만 빌립이 행하는 표적을 보고 그의 말을 따르다가(행 8:6), 귀신들이 나가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므로 큰 기쁨을 얻어(행 8:7-8),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하는 빌립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행 8:12) 사마리아인들은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 받았으니 예수를 믿었다고 할 수 있으나 성령이 아무에게도 내리시지 안했으니(행 8:16), 그들이 바로 예수 믿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행 8:12에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하는 빌립을 그들이 믿었더라’고 한 것을 보면 주 예수를 믿었다기보다는 빌립을 더 믿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 마술사 시몬을 믿은 것처럼 이번에는 그보다 더 큰 기적들을 행하는 빌립을 믿었다고 해야 한다. 빌립은 믿은 사실은 마술사 시몬의 믿음과 세례에서도 보여 진다. 다 믿어도 시몬은 안 믿을 줄 알았는데 자기보다 더 큰 기적을 행하는 빌립을 믿고 세례를 받았음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믿을 수 없는 시몬이 믿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시몬 자신까지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시몬과 사마리아인들이 믿고 세례 받았음의 표현이 동일하다. 그러나 시몬은 실제로는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의 믿음도 바른 믿음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빌립의 기적들을 인해 그냥 미신적으로 믿은 기적 신앙이었고 실제로 예수 믿었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이 사마리아인들의 교회 가입에 사도들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2) 바울의 개종(행 9:1-18)

 

오순절파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중생하였고 3일후에 아나니아에 의해 세례 받으며 성령을 받았으니 중생후 성령 세례 도식이 잘 성립하는 본문으로 삼는다. 그러나 오순절파와 달리 서교수는 본문은 중생 후 도식으로 볼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바울은 3일 전에 예수 믿고 그 후에 세례 받은 것이 아니고 세례 받음이 바로 신앙 고백이므로 그의 믿음은 주 예수를 처음 만나 후 세례 받기까지가 예수 믿음에로의 전이 과정이다. 철저한 율법주의자가 그의 율법종교의 체계를 부수고 그리스도의 구원에 이르는 투쟁이었다. 삼일 간 식음을 전폐한 것이(행 9:9) 그 단적인 증거이다. 바울이 예수 믿음에 이르러 주 예수가 하나님의 성육신이고 자기의 죄를 위해 어린양으로 죽었음을 이해하기 위해는 자기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삼일간의 식음 전폐는 이 투쟁이었다. 부활자 예수의 현현은 바울에게 폭탄의 폭발이었다. 사울이 주 예수를 만나고 신앙 고백이 없었다. 예수를 주 예수라고 고백하며 신앙에 이른 것은 삼일 후 아나니아에 의해 세례 받을 때 이루어졌다( 행9:17-18).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일치한다. 바울은 자기의 경험과 갈라디아 교회 설립시 경험에 근거하여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 간에 아무런 시간적 거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함으로(갈 3:2-5) 이 진리를 분명히 한다.”

 

(3) 고넬료와 로마인들의 개종(행 10:1-48)

 

고넬료의 개종 사건도 은혜의 두 단계로 본다. 그러나 고넬료의 개종 사건 역시 은혜의 두 사건으로 볼 수 없다. 고넬료는 예수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수 없고 중생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고넬료도 예수 믿어 중생해야 할 사람이었다. 이것이 베드로를 청해서 복음을 들어야 할 이유이다.(행 10:3-8, 30-33) 또 고넬료야 율법을 아는 경건한 개종자이었지만 그의 친족, 친지들과 군인들은 전혀 그런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예수의 사역을 선포하는 중에 특히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고 할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행 10:43-44).

 

그렇다면 로마인들이 방언하게 된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성령 세례 받은 증거가 아닌가? 이에 대하여 서교수는 “로마인들로 방언하게 하므로(행 10:46)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도 아무 구분을 두지 않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편입시킴을 분명히 하였다. 이방인 특히 로마인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교회에 편입시킨 줄을 유대인들은 전혀 기대하지 못하여 놀랐다(행 10:45).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편견과 좁은 마음을 전적으로 깨뜨리셨다. 방언을 말함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 되었음을 유대인들에게 알리는 하나님의 신호이다.”

 

결국 고넬료와 로마인들의 개종 사건도 중생 후에 성령 받음이 아니라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같은 사건이다.

 

(4) 에베소 교회(행 19:1-20)

 

에베소 교회의 문제만큼 오순절 파의 강력한 주장의 근거가 된다. 이에 대한 서교수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아볼로는 전도하여 12명을 세례 주었지만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하였으므로(행 18:25) 예수 이름으로 세례주어 예수 믿게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12명은 세례요한의 제자로 남았다. 그들은 예수 믿어 성령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남았다. 예수 믿으면 성령 받음이 당연한데 그들은 예수 믿는 신앙 고백을 못하였으므로 믿는 자가 아니어서 성령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세례 받게 하여 성령을 받았다. 예수 믿을 때 성령 받음이 당연함을 바울의 놀란 질문에서 잘 알 수 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둘 다 시제가 단순과거여서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동시적인 사건임을 분명히 한다.”

 

특별히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라는 헬라어 말씀을 흠정역이 ‘너희가 믿은 이후에’라고 말함으로 잘 못된 신학을 낳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둘 다 단순과거로써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동시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또한 에베소 1:13절의 말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에서 복음을 듣고 믿고 인침이 다 단순과거로 표시되었음을 강조한다. 즉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동시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서교수는 성령세례는 곧 성령 받음이고, 성령 세례와 중생은 별도의 단계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이 오순절파와 분명히 다른 개혁교회의 가르침으로 보고 있다.

 

4. 성령 받음

 

성령 받음이 성령 세례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성령 받음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성령 받음에 대한 찰스 피니의 주장은 인간의 주도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가르침은 이와는 분명하게 다름을 볼 수 있다. 서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이루어져서 성령이 강림해서 교회에 계신 이후에는 종교적 노력으로 성령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의해 선물로 받는다(행 2:38). 도덕적 의를 이루는 종교적 노력들로 성령을 중생 후에 추후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중생 후에 기도와 회개, 전적인 죄의 제거와 완전한 순종, 성령 신앙과 기다림과 간청으로 성령을 청구하여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예수 믿으면 성령의 도움으로 중생하고 그 후에 도덕적 의를 이룸으로 성령을 추후적으로 받는다고 주창하는 알미니안 감리교회 지반에서나 가능하고 성경에는 그 자리가 없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성령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단지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결국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믿음으로 성령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갈 3:14). 성령 받는 것은 듣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음과 성령 받음이 일치한다(갈 3:2). 이렇게 성령은 주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저주를 제거하시되 대신 저주가 되심으로 해소되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결국 성령은 믿음으로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는 불가능하다. 성령 받음은 인간의 종교적 노력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만 받는 선물이다(행 2:38).

 

5. 성령 충만

 

성령 충만에 대한 논란은 은사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근거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오순절 성령 강림의 반복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오순절 성령 세례의 반복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 충만과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의 반복 형식이 아니고 성령의 지배 혹은 인도를 말한다. 성령은 인격적 영이시므로 사람들에게 오실 때 그들을 지배하고 다스리신다. 성령의 지배 혹은 인도가 성령 충만이다.”

 

결국 성령 충만을 이야기 할 때 성령의 세례의 반복적인 의미가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신자들에게 내주하실 때부터 그들을 지배하고 인도하신다. 이 인도는 죄와 악과 모든 더러움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거룩한 백성 되게 하는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선물로 주어졌지만 인격적 영으로 오셨으므로 신자들을 지배하고 다스리신다. 주권적으로 역사 하신다. 성령이 한 개인에게 오시면 믿음을 일으키고 회개케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믿음과 동시에 내주 한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성령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엡 5:18절의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의미는 성령의 전적인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에베소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통치를 연관해서 전개하고 있는데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통치를 완전하게 이루는 통치의 영역 곧 충만으로 표현하였다(엡 1:23).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케 됨은 성령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그에게 지배됨을 뜻한다. 성령으로 충만케 된 자는 전적으로 성령에 매이고 그에게 복종하는 자를 뜻한다.”

결국 성령으로 충만 받았다는 것은 성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며 그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으로 인도받으면 죄악의 행실들을 벗는다. 결국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령의 인도가 성령의 지배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 이다.

 

6. 성령의 은사

 

성령론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사이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서는 은사의 문제로 인하여 심한 대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은사에 대한 이해와 대립되는 관점인 방언, 예언, 신유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첫째, 은사는 성령께서 모든 이들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자들은 모두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인류에게 오실 때 풍성한 은사들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배분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 성령을 받은 자들은 다 은사를 받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자연적 은사의 복원이든지 새로운 은사의 수여이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은 다 은사를 받아 가지고 있다(고전 12:4-11).

 

둘째, 은사는 몸의 지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즉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몸의 지체들에게 주신 것이다.

“믿는 개별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사가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목적에서 그렇게 작정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는 다 교회를 세우고 바로 자라 가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은사가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지 않으면 오히려 교회를 혼란케 하고 교회를 하무는 일이 되는 것이다.

 

셋째, 은사들의 은혜의 표현이다.

 

넷째 은사들은 교회의 지체들에게 주어졌으므로 각각 상이한 은사를 받아 서로 보충하게 되어 있다.

 

다섯째 은사들은 성령의 주권적 역사에 의해 몸의 지체들에게 배분되었다(고전 12:11).

 

여섯째 은사들은 다 초자연적으로 오지 않는다.

이미 주어진 재능들이 개발되고 활용되는 것도 성령의 은사이다.

 

일곱째 성령의 선물은 종말론적 선물이어서 영원한 선물이지만 은사들은 임시적이다. 목적이 성취되면 그 기능이 중단한다.

 

여덟째 은사들은 다 성령에게서 유래하였다. 성령은 그의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은사들을 베푼다.

 

성경은 이러한 은사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은사를 보면 고린도전서와 로마서 그리고 에베소서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 방언

방언 문제만큼 문제가 되는 것이 없다. 본질적으로 방언문제는 오순절 교회와 개혁교회의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 왔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오순절은 방언 받음을 중생 후 성령 세례 받음의 증거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순절 교회와 고린도교회에 일어났던 방언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오늘날 방언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서 교수는 일단 방언은 성경의 기록이 완성된 후 교회사속에서 사라졌다가 20세기에 오순절 운동으로 방언문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분명한 사실을 방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 졌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주어졌으므로 방언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고 이 일을 위해서는 통역이 필수적이다(고전 14:15-19). 그러나 통역 은사 받은 자들은 방언 은사 받은 자들보다 수가 적었다(고전14:5, 28).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고린도 교회에 방언 자는 많았어도 통역 자는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방언이 통역되면 권면을 전하는 예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통역도 방언이 중단되면 자연히 소멸되게 되어 있다(고전 13:8).”

 

이와 같이 방언은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통역되면 계시의 역할을 한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주신 말씀이니 당연히 계시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운동의 방언도 통역되면 예언이 되어 새 계시가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리하여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사도들이 받은 동일한 성령을 받았으므로 새 계시도 사도들을 통해서 온 계시와 동등한 계시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성경의 자기 증거와 합치하지 않는다. 계시는 신약 정경의 작성으로 완결된 후 더 이상 계속하지 않는다. 계시는 신약 성경의 작성으로 완결된 후 더 이상 계속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새 계시를 가져오는 방언은 신약의 기록의 종결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도 임시적이었다. 그 때는 아직 서신들과 복음서들이 기록되기 전이었으므로 간혹 예언성 방언이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방언에서의 통역은 아무런 예언을 가져오지 못하였고, 혹 통역을 통해 유익을 봤다면 그것은 성령의 조명이지 전혀 영감이 아니다.

방언은 성경의 종결로 폐지되었다(고전13:8-10).

 

그렇다면 오늘 날 일어나는 방언의 현상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은사인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만약 아니라면 오순절 운동의 부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서 교수는 두 가지로 분명하게 대답한다.

첫째, 20세기 방언 현상은 성령으로부터 온 초자연적 은사라기보다 자연적 언어 기관의 특별한 반응이라고 해야 맞다. 자연적 능력이 환경과 분위기에 의해 방언이 형성되고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심리적인 열망에 의해 그와 같은 다른 방언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들도 방언을 말하는데서 알 수 있다. 20세기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은 방언 받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방언들과 접촉하여 그들의 영향권에 있으므로 방언은 계속 확산될 수 있었다. 방언을 열렬히 추구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다. 이와 같은 분위기와 열망이 방언 현상을 일으켰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 방언 받기 위해 열심히 기도한 것이 오순절 운동을 촉진시키고 지속시켰다. 기도를 많이 하므로 주와 깊이 교제하게 되어 영이 자라게 되었다. 방언이 영을 자라게 한 것이 아니라 방언 받기 위한 회개의 기도와 간구가 오순절 운동의 생명을 지속시켰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기도의 열성이 탈선도 많이 일으켰지만 그 기도는 주께로 나아갔으므로 기도의 불이 오순절 운동을 지금까지 지속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서 교수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방언 현상에 사탄의 역사도 있다고 까지 말하고 그러한 보고들이 있고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확인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있지 않다.

 

2) 예언

예언의 문제 역시 중요하다. 예언은 새로운 계시를 가져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오순절은 여전히 예언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은 이미 성경의 기록으로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서 기록된 예언의 은사는 무엇인가? 예언은 구약에서 선지자가 그리고 신약에서는 사도들이 그 직임을 감당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선지자와 예언의 은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칼빈의 견해를 따른다.

 

“칼빈의 가르침대로 고린도 전서 12:28-29의 선지자는 미래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 성경을 다루고 성경을 해석할 뿐 아니라 지혜롭게 그 시대의 요구에 맞도록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성경의 탁월한 해석자들이요, 교회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탁월한 지혜와 소질을 가지고서 교회의 요구에 응하는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다. 즉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교회의 현재 요구에 바로 적용시키는 능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덕을 세우기 위해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완결 이후의 선지자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해석하여 교회와 시대의 요구에 적용시키며 교회를 바로 세우는 역사를 하는 사람과 그런 말씀이다. 이때는 영감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이 적용된다.”

 

3) 신유

신유에 대한 열심은 한국이 가장 앞선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신유의 은사가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서 교수는 초대 교회 사도들의 은사와 오늘 날 은사와 구분하여 말한다.

 

초대 교회에 신유의 역사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신유의 은사는 특별하고 임시적인 것이라 복음의 사역과 정착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로 디모데의 질병을 위한 바울의 태도(딤전 5:23)와 에바브로 디도의 병이 죽을 만큼 중하였지만 고쳐주지 못하였다(빌 2:26-27). 그렇다면 초대 교회에 주신 치유의 은사는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도들은 교회의 설립자이고 계시의 기관이며 복음 전파들이었으므로 상당기간 신유의 은사를 행하였다.(행3-10, 4:30-31, 6:8, 9:32-34, 37-42, 14:8-10, 19:10-12, 20:7-12, 28:8-9)

하나님은 교회를 바로 세우고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사도들로 여러 기적과 신유의 은사를 행하게 하셨다. 그들은 기도와 안수로 그들의 사역 기간에 병을 고칠 수 있는 권능을 받았다. 그들은 복음 사역의 기간에는 신유 은사의 소유자로 일하여 기적을 행하고 병을 낫게 하였다. 그러나 복음 전파의 사역을 쉬거나 제한 당하고 있을 때는 이 은사를 활용하지 못하였다(딤전 5:23). 신유 은사자는 사도들의 활동이 끝남과 함께 중지되었다. 신유의 은사도 교회 설립과 복음의 확증을 위해 사도들에게 주어진 특별 은사임으로 사도들의 죽음으로 끝났다. 또 사도들에 의해 성경 기록이 완료됨으로 이 신유 은사의 지속적 행사도 계속 될 필요가 전혀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신유 은사의 소유자로서 치병의 능력을 행하는 것은 사도들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그렇다면 오늘 선교 지역에서 들려오는 신유의 보고는 무엇인가? 이것은 신유의 역사라기보다는 기도의 응답이라 보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이다.

 

“사도 시대 이후에는 믿음의 기도로 병들이 낫는 것이 허락되었다.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대로 믿음과 기도로 신자들의 병이 나음을 얻게 된다(약5:14-16).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기도를 따라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병을 고치신다. 지속적인 신유 은사의 행사는 더 이상 일정한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많은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초자연적 치유가 일어난다. 그러나 신유의 은사가 어떤 특정인들에게 주어져서 임의로 병을 고치고 지속적으로 그 은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상에서 보듯이 서철원 교수는 성령의 은사는 분명히 부정되지 않으나 은사에 대한 오순절 교회와 분명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방언과 예언 그리고 신유의 논증은 오늘 한국 교회 대부분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특별히 신유의 문제가 신유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측면은 분명히 되새겨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개혁교회라 말하면서 이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혼돈하고 있는 이들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부분이다.

 

7. 성령의 사역

 

성령의 강림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서 교수는 성령의 사역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파 즉 전도하시는 일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그의 본업이며 이에 사람들을 동참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을 통하여 성령이 예수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거룩한 백성을 만드시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화자 성령이라 말한다. 즉 성령이 내주하시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 육의 욕망들을 매일 죽임 당하게 하시며 거룩해 진다고 하였다. 결국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성화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의 목표는 거룩한 백성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거룩한 영이라 호칭된다는 것이다.

 

8. 결 론

 

한국의 대표적인 개혁교회의 신학자인 서철원 교수의 성령론을 살펴보았다. 서 교수의 성령론은 전통적인 개혁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다수의 성령에 대한 이해와는 많은 부분 상충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것이 개혁교회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논의하여 적용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교회 성장 논리에 빠져 덮어 버리고 만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교회의 강단에서도 개혁교회의 가르침을 바르게 설교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인기 영합주의나 혹은 성장주의에 교회의 좋은 유산을 폐기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렇게 혼란스러움은 서철원교수가 제기한 것처럼 바른 가르침에 벗어나서 보이기 위한 사역에 힘썼기 때문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서철원교수의 입장은 어떤 면에서 매우 고답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과연 개혁교회의 가르침을 우직하게 교회에 적용한 적은 있었는가? 물론 성령의 능력과 인침 그리고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등은 다루지 않았다. 특별히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폭넓게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 있지만 오늘날 문제가 되는 부분에 대하여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저자의 저서들을 꼼꼼하게 읽어 보기 바란다.

 

다음의 말로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보냄 받은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에 예수를 가르치고 해석하며 조명하고, 주 예수의 가르치신 것을 바로 이해하게 하고 바로 해석하여 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인격을 바로 알도록 가르치시고 조명하여 주는 일을 한다.

제5장 성령론에 대한 바른 이해 1. 일반적 개관 오늘날 '성령론'이라고 말할 때, 성령의 은사에 관계된 것으로만 이해하기 쉽다. 이것은 성령론의 근거에 대하여 바른 이해가 없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성령론의 근거는 성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즉 성령의 발원(發源)은 아버지로 부터 발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했고 또한 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론이 하나님과 관련시키면 신론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시키면 기독론이 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련시키면 삼위일체론이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위에 세워진 교회와 관련시키면 교회론이 된다. 이렇게 성령론은 신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별로 체계적으로 다루어 지지 못하였음을 보게 된다. 동방교회에 있어는 성령이 예배 의식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신학적으로도 비교적 체계화 되었지만, 서방교회에서는 성령론은 신론과 기독론에 밀려 뒷전으로 서자(庶子) 취급을 당했다. 2. 왜 지금껏 '성령론' 지금까지 중점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는가? ① 성경에 나타난 다양성과 복잡성 때문이었다.(일관성 있는 체계적인 전개를 곤란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② 교회사를 걸쳐 제도화된 교회 안에서 보다, 일반적으로 제도화된 교회의 영적 상태를 죽은 상태로 보는 열렬한 신앙그룹에 의하여 일어났기 때문이다. 즉 성직자 중심의 주도하에서 보다 평신도 주도하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직자 직을 겸하는 신학자들에 의해 이 운동이 비논리적이고 교육받지 못한 자들의 감정적 신앙 표현으로 받아드려졌기 때문이었다.

3. 오늘에 와서 왜 갑자기 성령론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해 졌는가? 그 이유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운동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교회 성장이 성령운동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나, 한국 교회에서도 성령운동은 사회의 경제적 혜택을 받지 못한 소외계층과 가정주부들을 중심으로 전개 되었다. 그러나 오늘 한국 교회의 성령운동은 어느 계층이나 여신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교회적 운동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또한 지금까지 많은 신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성령운동은 개발도상국의 한 사회적 특징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이 오늘에 와서 잘못된 것임이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성령운동으로 입증 되었다. 성령론은 현대 신앙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인 됨의 정체성을 재발견하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생명력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공동체가 되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하는 일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를 변화 시키고 하나님의 자유에로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신앙인과 교회의 거듭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과 교회의 연합, 교회와 교회들 사이에 연합, 교회와 신학의 연합에도 이르게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신앙인들에게 끊임없이 생수와 만나를 공급하여하고, 신앙인은 교회의 지체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일은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4.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함께 알파와 오메가이다. 성령은 창조 때에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고 동역했으며(창 1:2, 2:7), 예수의 생애동안 그와 함께 하였으며(공관복음 참조) 그 후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과 함께 있어 그들이 지치지 않도록 생명수를 제공한다.(계 22:17)

그러므로 성경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의 역사를 성령의 활동의 역사(歷史)라고 말할 수 있다. 5. 성경 안에 나타난 성령의 활동을 이해함에 있어 유의해야 할 점 ① 인격체로서의 성령과 이 인격체에 의하여 주어진 은사(성령의)를 구별해야 한다.(예수를 시험받도록 광야로 내 몰은,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한 성령은 주체적인 성령임) 그러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할 때의 성령은 성령의 은사 곧 객체적 성령이다. ② 성령의 존재와 활동에 관한 고찰은 삼위일체적인 사고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존재의 근거와 활동이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성령이 하나님으로 부터 발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대로 그의 활동의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점에서 유의하면서 성경 안에 나타난 성령의 활동을 고찰할 때 우리는 비교적으로 일관적인 성령론을 전개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 안에 기자들의 성령에 대한 상이한 보도들은 일관적인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다. 즉 어느 복음서 기자의 성령의 이해가 표준적인가? 라는 의문이 제기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제한적인 것으로 부터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다양함과 삶의 다양함에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기에 죽은 신들과 같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들과 함께 하시며 움직이시며 호흡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신앙하는 각자들 속에 그의 합당한 말씀을 주신다. 각자의 상황 속에 합당한 말씀을 전달하는 성령의 역사도 이와 같이 다양하게 임한다. 바로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다양성임을 알아야 하겠다.

 

 

 

 

 

 

 

 

제6장 존 스토트의 성령론 1. 들어가며 20세기 기독교 내에서 가장 큰 운동인 오순절 운동이 시작되면서 성령론에 대한 논쟁은 지난 세기 기독교계의 가장 큰 화두(話頭)였다. 특히 칼빈주의적인 전통을 따르는 개혁교회들 내에서 조차 성령론에 대한 다양한 입장과 차이를 보이면서 여전히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경우,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의 중심에 있는 교회가 가장 큰 교회와 교단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기존 교회들이 교회성장을 위한 한 방법으로 은사주의 성령론을 무분별하게 채택하는 왜곡도 가져왔다. 오순절 운동이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성령님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성령의 선물(오순절 입장에서의 성령세례)에 대한 결과론적인 관심과 집중에 의해서 부정적인 결과를 낳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인들에게 성령론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올바르게 이해할 기회를 제공하는 주제는 존 스토트의 성령론이다. 2. 저자 소개와 개론 존 스토트는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자로 위대한 학자인 동시에 설교가이며 저술가이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로마서 강해』,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 등 수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그는 복음주의 운동의 대반전으로 평가받는 1974년 로잔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의 로잔언약의 입안자 중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그는 영국 런던에 있는 올 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의 교구 목사로 섬기면서 강력하고 혁신적인 목회 사역을 감당했으며, 런던 현대 기독교연구소(LICC) 소장을 지내면서 IFES(국제 복음주의 학생회, 한국의 IVF) 등에서 폭넓게 활동해 왔다. 존 스토트의 성령론은 한 마디로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며 이후 성령 충만을 강조하는 정통적인 개혁주의 성령론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의 성령론을 주장한 외국의 신학자들로는 찰스 핫지(Charles Hodge), 워필드(B.B. Warfield),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iper), 개핀(Richard B. Gaffin) 등이 있으며, 국내에서는 박 형룡 박사가 『신학지남』을 통해 처음 이런 입장을 펼쳤고, 신 성종박사, 김 해연박사 등을 통해서 잇달아 소개되기 시작했다. 서 철원교수의 성령론과, 도날드 맥클로우드의 성령론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더 많은 지식을 얻을 것이다. 존 스토트의 성령론은 그의 저서인 『성령 세례와 충만』(IVP)을 중심으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존 스토트는 이 책을 쓴 목적에서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긍정적인 진리를 더 분명히 밝혀 그리스도의 풍성한 삶을 누리며, 성령의 열매를 맺고 성령의 은사를 활용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성령님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자 하는 우리의 목적 역시 그런 관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3. 기본적인 접근 원리 존 스토트는 성령론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몇 가지 접근 원리들을 제시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공통된 소원과 의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셋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은 설명하는 부분에서보다 교훈하는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넷째,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배우려고 하는 우리의 동기는 학문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개인적이어야 한다.” 위의 원리는 성령론에 대한 이해 역시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성경을 기반으로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함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 원리의 경우 부연 설명에서 그 목적을 사도행전의 설화체 본문에서보다 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설교나 글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신약 성경이 묘사하는 행습(行習)이나 경험이 아니라 분명한 가르침이 주어진 부분으로부터 우리의 믿음과 표준을 끌어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행전 역시 성경의 일부이므로 교리적으로 배제될 수 없다는 주장을 통해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려 했던 로이드 존스의 입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4. 성령의 약속(성령 세례) 존 스토트의 성령론에 대한 접근은 다양한 이론에 대한 반박보다는 오히려 성경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와 접근을 통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했다. 먼저 그는 중생이 곧 성령의 선물임을 분명히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성령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거듭남은 ‘성령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요 3:3-8). 또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롬 8:15-16)의 말씀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라는 바울의 확언이 이것을 증명한다. 문제는 성령의 선물이 곧 성령의 세례와 동일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오순절 운동이 성령의 선물 곧 중생과 성령 세례가 다르다고 보며 구원을 받은 신자가 후에 성령 세례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반면에 존 스토트는 중생은 곧 성령 세례이며, 따라서 구원과 성령 세례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임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점에서 성령 세례를 설명한다. 1) 성령 세례는 독특한 축복의 약속 성령 세례는 전적으로 신약에만 나오는 표현으로(7회), 구약 성경이 기대해 온 것의 성취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순절에 행한 베드로의 설교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요엘이 약속한) 이 영의 ‘부어 주심’을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약속한) 성령의 세례와 동일시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8)는 세례 요한의 고백 역시 구약의 기대에 대한 성취를 통한 세례자로서의 예수님의 독특한 사역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의 독특한 사역의 또 다른 언급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이다. 이로 보건대 예수님의 특징적인 사역은 이중적인데, 그 사역은 옮겨 버리는 것과 가져다주는 것, 즉 죄를 지고 가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는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 역시, 죄의 용서와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게 됨을 확증해 주고 있다.

사도행전 1장과 2장은 ‘성령의 선물’이 ‘성령의 약속’(행 1:4; 2:33, 39), ‘성령의 세례’(행 1:5), ‘성령의 부어 주심’(행 2:17, 33)과 동일한 것임을 보여주며, 죄의 용서와 마찬가지로 구원의 복음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독특한 축복 중 하나이다. 2) 성령 세례는 보편적 축복의 약속 존 스토트는 성령 세례가 새로운 시대의 독특한 축복이면서 구약과 달리 중생한 모든 신자에게 임하는 보편적 축복이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인용했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행 2:17)라는 요엘서 말씀에서 요엘 선지자를 통해 주신 약속의 강조점 역시 성령이라는 선물의 보편성이다. 구약 시대에는 모든 신자가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사역을 위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임하였다. 하지만 이제, 모든 믿는 사람은 성령의 축복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늘 성령이 함께 하게 되었으며, 이 모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 오순절 베드로 설교의 결론은 우리 주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성령 세례의 약속이 해당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3) 오순절의 단회성과 오늘날의 표준 오순절파와 개혁교회가 성령 세례와 관련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이 바로 오순절의 성령강림(행 2장)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성령 세례 중 유일하게(오순절파와 개혁교회 모두가 인정하는) 중생과 성령 세례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존 스토트는 오순절 사건이 갖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성령 세례에 대한 이후의 표준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로 생각한다. 즉,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은 후 두 그룹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처음에 나오는 120명과 뒤에 나오는 3,000명이다. 이 두 그룹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120명은 이미 중생한 사람들로서 열흘 동안 하나님을 기다린 끝에 성령의 세례를 받은 반면 3,000명은 불신자들이었다가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았다. 이 120명과 3,000명의 두 그룹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오늘날의 표준은 첫째 그룹이 아니라 둘째 그룹인 3,000명의 경험이 더 정확한 것이기 때문이다. 120명의 경험이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 세례의 표준과 달리 중생과 성령 세례가 분리되어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에 이어서 오래 전부터 약속되어 온 성령의 부어 주심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마지막으로 나타난 역사적 특수성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 시대의 도래는 구세주의 죽음, 부활, 승천이 반복될 수 없는 것처럼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라고 존 스토트는 주장한다. 따라서 120명의 경험 이후 3,000명의 회심은 죄 사함과 성령 받음이 동시에 나타나며 이러한 현상들을 오늘날의 표준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과거 교회사에서 ‘부흥’이나 ‘성령의 능력’이 이례적으로 역사에서 이어져 왔지만 그러한 현상을 표준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4) 사마리아인 신자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을 받지 않고도 신자가 된 것처럼 보이는 본문이 두 곳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도행전 8:5-17이다. 전도자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이 본문 역시 많은 논란이 불러일으킨다. 오순절파는 이 본문을 중생과 성령 세례의 시간차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인식하지만, 서철원 교수는 이 본문에서 마술사 시몬을 포함해 사마리아들까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으므로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존 스토트는 이 사건을 중생과 성령세례가 분리되어 나타난 것으로 해석한다. 다만 그는 이 사건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는 말씀에 비추어 사마리아가 갖는 독특한 상황의 문제로 인식한다. 즉 오순절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빌립을 통해 회심한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사마리아가 갖는 역사적 특수성에 비추어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그들을 방문해 회심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확증할 때까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성령의 선물을 보류했다는 것이다. 즉, 이 경우도 오순절의 성령강림처럼 역사적 정황에서 생겨난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에 일회적이며 다시 반복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오늘날 이 사건 역시 우리의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5) 에베소의 제자들 두 번째의 예외적인 사건은 사도행전 19:1-7에 묘사되어 있다. 바울은 그의 3차 여행 중 에베소에 이르렀고, 어떤 제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2절)고 묻는다. 그러자 그들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다”(2절)고 말한다. 그러자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고 그들이 방언도 한다(6절). 오순절파는 이 말씀을 중생 이후의 성령 세례에 대한 후속적인 경험에 대한 근거로 사용한다. 그러나 존 스토트는 이 말씀이 그런 견해를 지지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바울이 세례를 주고 안수했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그 전에 그리스도인이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바울이 처음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던 질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믿음의 진실성을 의심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믿는 자들은 성령을 받는다고 일관되게 가르친 바울은 이런 질문을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지 않고 오히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아 그들에게 붙여진 제자라는 표현 역시 아볼로와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분명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회심은 오히려 바울이 안수하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는 순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존 스토트는 말한다. 6) 세례라는 용어(고넬료의 회심) 사도행전 8장과 19장의 특별한 경우에 의해서도 부정되지 않았던 것은,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의 시초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또한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 성령을 받는다. 그리고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선물(중생)’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세례’라는 개념 자체에는 입문을 뜻하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고넬료 사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고넬료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것, 곧 그의 회심이었음이 분명하다. 베드로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죄 사함의 약속으로 끝을 맺었다.(10:43) 고넬료와 그의 온 집이 믿고(15:7) 성령과 물로 세례를 받은 후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묘사되어 있다(11:1).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고”(11:18),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셨다”(15:9)고 성경은 말한다. 성령의 선물의 시초적인 성격은 ‘세례’라는 용어가 시사한다. 또 고넬료의 회심이 예증하듯이 ‘성령 안에’ 있는 것, 성령을 ‘가진 것’, ‘성령으로 사는 것’,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 등은 믿음의 성숙도와 관계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게 출생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똑같이 적용되는 표현들이다.(롬 8:9; 롬 8:14; 갈 5:25) 그리고 존 스토트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권면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7) 고린도전서 12:13 성경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시초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표현과 관련해서 일곱 개의 구절이 등장한다.(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행 11:16) 그리고 일곱 번째 표현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이외의 유일한 본문인 고린도전서 12:13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앞에 언급한 여섯 구절과 관련해서는 전부 성령 세례의 주체를 예수 그리스도로 간주하고, 그 결과를 성령 세례로 인식하지만, 고전 12:13의 경우 성령 자신을 세례자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령 자신이 세례자로 나타난다면, 그 분이 사용하셔서 세례를 베푸시는 ‘요소’는 무엇이란 말인가? 세례의 은유에서는 절대적으로 ‘요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요소가 없는 세례는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다른 구절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례자료 여겨야 하며, 세례의 요소를 ‘성령’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5. 성령의 충만 1) ‘세례’와 ‘충만’의 차이점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라는 것이 과거적인 사건으로 현재와 미래에는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충만’이라는 지속적으로 축복으로 이어진다. 성령 세례의 결과로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행 2:4) 따라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 세례의 결과였다. 세례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고(하늘로부터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었다. 세례는 독특한 입문적인 경험이었고, 충만은 계속되는 영구적인 결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이 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입문의 경험으로써의 세례는 반복될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충만은 반복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든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죄로 인해 ‘근심하기도’ 하시고(엡 4:30), 죄인을 충만하게 채우시는 일을 그치기도 하신다. 신약 성경에서 사람들이 성령으로 “채우심을 받았다”거나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첫째, “충만하다”거나 “채우심을 받았다”는 것은 모든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특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이 표현은 어떤 특정한 사역이나 직책을 위해 하나님이 내려주신 것을 가리킨다.

셋째, 때때로 성령의 충만은 일생 동안 지속되는 직분(예를 들면 사도나 선지자처럼)을 위해서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나 또는 어떤 위기 상황에 준비시키기 위해서 주어졌다. 이것은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시작에서 성령과 깊이 관련되어 나타나는데, 주님의 성령 충만함의 경험은 이 세 가지를 전부 포함한다. 성령 충만의 지속적인 충만과 채움의 중요성은 에베소서 5:18의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을 통해 알 수 있다. 반대로 성령세례와 관련된 신약 성경의 일곱 구절은 명령형으로 된 권면이 하나도 없다. 이러한 구절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며 자주 있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은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고전 12:3)과 모든 신령한 은사들을 넘치게 받았다(고전 1:4-7)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신령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책망하는 것을 통해서 성령의 은사 발휘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 맺는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령의 은사를 넘치게 받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방언을 하는 것’이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한 필요 불가결한 표지(標識)라는 가르침을 접할 때 자신은 성령을 받지 못했거나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도행전에는 성령을 받은 모든 그룹 중 오직 세 그룹만이 ‘방언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2:1-4; 10:44-46; 19:1-6), 성령을 받은 다른 사람들과 그룹들이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그런 주장은 독단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방언’의 은사는 여러 은사들 중 하나일 뿐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명확히 가르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에 몇몇 은사주의 운동과 오순절 교회에서 방언이 성령의 선물에 대한 불가결한 표지가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 2) 성령 충만의 지속과 결과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존 스토트는 요한복음 7:37-39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 충만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존 스토트는 계속해서 예수님께 와서 마시는 것 외에는 이러한 계속되는 들이킴과 흘러나감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성령의 충만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충당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윌리엄 템플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받은 성령 충만은 전도의 열망과 활동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하면서(또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는 그 누구도), 그 성령을 자신에게만 제한할 수 없다. 성령은 그 계신 곳에서 흘러나가신다. 만일 흘러나가지 않는다면, 그분이 거기에 계시지 않은 것이다.”(윌리엄 템플) 존 스토트는 성령 충만의 주된 증거가 기적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며, 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에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 충만에 대한 결과를 묘사한 유일한 본문으로 에베소서 5:18-21을 제시한다. 이 본문은 먼저 성령 충만을 우리에게 명령으로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 충만이 모든 시대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택이 아니라 의무로 받아들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령 충만의 결과로는 서로 화답하며(교제), 찬송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피차 복종하는 일로 나타남을 강조한다. 5) 성령 충만의 잘못된 이해 오순절 운동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의 세례가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는 성경이 아닌 선험적(先驗的-후천적인 경험과 결합하여 학적 경험을 형성하는 특성- 예, 칸트철학) 입장에서 접근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사람들은 항상 마음 한구석에 오순절의 극적인 사건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들은 바람과 불 그리고 방언 등을 추구한다. 그들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의 회심과 함께 나타났던 초자연적인 표지들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회심에서 전형적인 모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함께 나타났던 초자연적인 표지들이 모든 성령 세례의 전형적인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령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것보다 수준 낮은 신앙생활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더 문제임을 지적한다. 따라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실패와 보잘것없는 성과는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오순절적인’ 경험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특정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존 스토트는 단호하게 말한다.

첫째, 그런 경험의 일부는 의심할 여지없이 마귀적이며, 진정한 영적 경험인 양 위장한 사단의 끔찍한 계략이다.

둘째, 그러한 경험 중 좀 더 많은 부분은 심리적인 것들이다.

셋째, 어떤 또 다른 현대의 경험들은 실제로는 회심의 경험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적이지 않고 순전히 심리적이지도 않은 경험들이 있다면 그것은 회심의 경험이며 하나님에 대한 참되고 깊은 경험들이다. 그럼에도 이런 경험에 대해서 존 스토트는 세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그 경험들은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남으로 특정한 것으로 정형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그러한 경험은 매우 감동적이고 흥미로울 수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그분과 화목케 하신 그 첫 번째 은혜의 사역이 지니는 중요성과 비교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경험이 중생을 훼손하거나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된다.

셋째, 이러한 경험은 우리의 구원의 여정(旅程)에서 본다면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걸어가야 할 더 많은 고난의 길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6. 성령의 은사들 존 스토트는 성령의 충만이 삶에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사용되도록 그리스도 개개인에게 주어진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쓸 때, 종종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대조시킨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령 사역의 결과다. 교회는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다양한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에게 각각 다른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은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고, 성령의 은사들(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교회의 사역을 다양하게 만든다. 교회는 통일성의 근거를 ‘카리스’(charis, 은혜)에, 그 다양성의 근거를 ‘카리스마타(charismata, 은혜의 은사들)에 두고 있다.” 1) 영적 은사들의 특성과 종류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6)는 말씀을 통해서 비록 은사가 다양하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또한 성령의 은사들은 사람들이 특정하게 각자에게 맞는 봉사의 일을 하는데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여하신 일정한 재능들이다. 존 스토트는 은사와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방언과 예언과 병 고치는 은사 같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은사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등을 통해 다양한 은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적어도 신약 성경에 명기된 스무 가지의 은사가 있으며, 다양성을 사랑하시고, 후히 주시는 분인 살아 계신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은사들을 주실 수 있다. 그것은 바울이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성령은 한 분이시지만 은사는 여러 가지고, 직임도 여러 가지며, 역사도 여러 가지라고 그는 쓰고 있다(고전 12:4-6). 2)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과의 관계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의 상호 연관 관계를 부인하기 어렵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창조의 하나님과 새 창조의 하나님은 같은 분으로서, 그분은 그 둘 모두를 통해 그분의 온전한 뜻을 이루어 가신다. 이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다. 둘째, 몇 가지 ‘카리스마타’는 기적적인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다. 성경의 모든 증거들은 타고난 재능과 영적인 경계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한다고 말한다. 3) 모든 영적 은사는 기적적인 은사인가? 현대에는 ‘카리스마적’이라는 말이 ‘기적적인’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된다. 그러나 어떤 은사들은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며, 무척 평범하고 심지어는 단조롭게 보인다. 가르치는 은사나 권위 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나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 또는 ‘믿음’(고전 12:8-9)등도 그 용어만 보아서는 그것들이 기적적이거나 기적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명백한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기적에 대해 우리 인간이 함부로 가능과 불가능을 독단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유로우시며 우주를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을 가지신 창조주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거나 그분의 행하심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활동을 오로지 기적적인 사건들에서만 찾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마술사 같은 존재로 둔갑시킨다. 우리 모두는 초자연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그리고 기적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우선적으로 일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계시를 바로 인식해야 한다. 성경을 단순히 기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 역시 문제다. 성경에 여러 기적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의 하나님이 단지 기적의 하나님만은 아니듯이, 성경 역시 단지 기적에 대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 역사의 많은 부분에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이 구약 시대에 속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던 세례 요한은 전혀 기적을 행한 적이 없다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요 10:41). 그러면서 존 스토트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힌다. “나는 오늘날 기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에 의해 그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할 특별 계시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며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기적을 행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4)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영적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주어지는가?

존 스토트는 사도와 선지자가 오늘날 교회에 존재하는지의 문제에 대한 접근을 통해서 사실상 구약의 은사가 오늘날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도들의 경우 역사적 예수님, 특별히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자들(행1:21-22; 고전9:1; 15:8-9)이라는 점과, 그리스도에 의해 개인적으로 임명되고 권위가 주어졌다는 점(막 3:14)과 그리고 가르치는 사역을 위해서 특별한 영감을 받았다는 점(요 14:25-26; 16:12-15)에서 독특하다. 그런 점에서 일차적인 의미로는 사도라는 은사는 성격상 그들의 계승자로 존재하지 않는다. 선지자는 신성한 계시가 주어지는 통로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던 자들이며 따라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했던 자들이었다(출 4:12; 7:1-2; 렘 1:4-9; 23:16,18,22,28). 이 용어에 대한 이러한 핵심적인 성경적 의미에서 보면, 더 이상 선지자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성경의 정경은 완성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적이고 새로운 계시의 통로로써의 ‘선지자들’이라는 일차적인 의미에서는 이 ‘카리스마’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가르침의 방법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경 안에서 이미 완성된 그분의 계시에 대한 강해이다. 5) ‘은사적’이라는 말 존 스토트는 ‘은사적’(charismatic)이라는 말이 잘못 사용되는 것은 비판한다. 먼저 어떤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언급할 때 ‘은사적’이라는 말과 ‘제도적’(instituional)이라는 말을 대치시키는 문제를 지적한다. 그들은 목사나 교사는 ‘제도적인’ 반면, 선지자는 ‘은사적’이라고 부르면서, 전자는 교회가 임명하지만 후자는 하나님이 직접 임명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서도 그 직분을 임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존 오웬은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미리 준비시키시기 전에는 그 누구도 사역의 직분에 임명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결국 ‘카리스마’는 직분과 은사가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다(고전 12:28; 롬 12:7; 엡 4:11). 첫째로 대중적으로 이 말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라는 말처럼 매력과 천재성이 합쳐진 모습을 묘사하는 말로 쓰이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신약 성경의 ‘카리스마타’는 마치 눈에 확 들어오는 은사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는 일, 관대함, 행정 등과 같이 눈에 띄지 않는 일들도 성경적인 의미에서 똑같이 ‘카리스마적’인 것이다. 둘째로 오순절 운동과 관련한 특정한 운동을 ‘은사주의적’ 운동이라고 지적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대단히 왜곡된 표현임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전체 교회에 사용될 칭호이지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될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 교회는 은사적인 공동체로써, 모든 지체들이 자신의 은사(카리스마타)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이다. 6) 은사의 범위: 은사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은사의 종류가 다양하다면 그 분배도 다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신약 성경은 ‘카리스마타’는 선택된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비록 은사를 묻어 두고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한 가지씩은 은사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증하는 근거를 제시해 준다(롬12:3-6; 고전 12:11; 엡 4:7; 벧전 4:10; 고전 12:12,14,27). 이러한 관점에서 전체 교회는 ‘은사적 공동체’이다. 7) 영적 은사들의 원천: 은사는 어디에서 오는가? 첫째,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값없이 주시는 구원과 마찬가지로 봉사를 위해 주어지는 ‘카리스마타’ 역시 영생의 ‘카리스마’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베푸시는 것이다. 둘째,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영의 선물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령이 우리에게 영적 은사들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셔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시고(3절),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마실 때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게 하신다(13절). 셋째,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이다. 성경은 믿음의 성장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주권적인 성령의 뜻에 달려 있다. 8) 영적 은사의 목적: 은사는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가? ♦ 영적은사의 목적 성경은 은사의 주된 목적이 교회에 ‘덕을 끼치는 것’, 즉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봉사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는 말씀과 “각각 은사(카리스마)를 받은 대로...서로 봉사하라”(벧전 4:10)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영적 은사들은 우리 자신들(수혜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고, 강건하게 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우는 것’의 의미다.(엡 4:12, 16) 모든 ‘카리스마타’가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전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세우는 역할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그 가치는 더 커진다. ♦ 방언에 대하여 방언이라고 알려진 현대의 현상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은사와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던 신자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 즉 외국어로 말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던 언어들은 모두 군중 속의 여러 그룹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행 2:4-11).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현상도 이와 동일할 것이라는 강력한 신학적·언어학적 추정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을 예리하게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쪽에 나오는 현상이 동일하다고 보는 논증, 즉 알아들을 수 없는 황홀경의 말들이 아니라 적어도 현장에 있는 일부 사람들(오순절 때처럼)에게는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들이었다는 논증의 강점을 생각할 때 그러한 문제점들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바울은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사는 좋은 것이며 사모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은 그 자체로서는(다시 말해서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떠나서는) 덕을 세울 수 있는 특정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방언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님을 존 스토트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첫째, 신약 성경에서 ‘덕을 세우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말한다. 자기를 세우는 것은 결코 신약에서 덕을 세우는 것이 될 수 없다. 둘째, 모든 영적 은사들은 봉사의 은사이며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에 비추어서 방언에 대해 접근해야 한다. 모든 ‘카리스마타’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다.

바울은 에베소서 4:11-12을 통해 다양한 은사를 설명하며,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7. 결론 지금까지 20세기 가장 대표적인 복음주의자인 존 스토트의 성령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개혁주의 성령론에 기반을 둔 존 스토트의 성령론은 영국 내에서는 그와 쌍벽을 이루었던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두 사람의 사역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의 원인이 성령론의 차이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까지 보인다. 그렇지만 존 스토트는 위대한 복음주의자 답게 오순절 운동에 대해서도 유연성을 보여주며, 성경을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대화를 제안한다. 다른 이야기지만 존 스토트의 설교방법을 Bridge Building라고 부른다. 그것은 성경과 현실을 연결하는 그의 독특한 설교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전통적 개혁주의 성령론을 받아들이는 교회들조차 성령님의 이해와 적용에 대해서는 오히려 오순절 운동을 따르는 모순된 경우를 보게 된다. 가장 대표적으로 'Again in 1907' 같은 기독교 내 운동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과연 성령의 역사가 100년 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가? 오히려 평양 대부흥 운동은 초기 20세기 초 한국적 상황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던 독특한 성령의 사역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21세기에 성령의 역사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왜 바울이 초대교회에서 노예해방 운동을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소수의 기독교인이 존재하던 시대적 상황과 다수의 기독교인 존재하던 시대적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존 스토트는 대답했다.

지금 한국교회 역시 소수가 아닌 다수 기독인들을 기반으로 서 있다. 이 상황에서 성령의 역사 역시 Bridge Building 과정을 통해서 이해하고 적용해 간다면 성령의 역사가 더 다양한 방면에서 포괄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아무튼 한국교회처럼 성령운동이 무분별하게 진행되어 온 상황에서 존 스토트의 성령론은 대중적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며 균형 잡힌 신학적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데 유익함을 줄 것으로 믿는다.

 

 

 

 

 

 

 

 

 

 

 

 

 

 

 

제7장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I. 로이드 존스의 생애 로이드 존스는 1899년 12월 20일 남 웨일즈 카디프에서 출생하였다. 그리고 1981년 3월 1일에 81년간의 순례자의 길을 마치었다. 그는 본래 내과 의사로 수업을 받고 그는 왕실주치의였던 호오더경의 조수로서 미래가 보장된 의료계의 경력을 1927년에 포기하고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채 같은 내과 의사였던 아내 베단과 함께 그의 고향인 남 웨일즈 탈보트 항구의 아베라본에 있는 한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1938년에 그는 버킹엄 게이트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켐벨 모르간 박사와 동사로서 초청을 받았다. 1943년 단독 사역을 시작했고 1968년 8월 건강상의 문제로 은퇴하기까지 거기에서 목회를 계속했다. 그 다음 그는 순회 설교자로서, 저술가로서 여생을 주를 위하여 섬겼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설교자로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고 특히 한국에서 많은 목회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분이다. 그의 저서들의 계속하여 번역되어 나오고 있는데 그 분의 책들을 참고하시면 여러분에게 깊은 감동과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II. 로이드 존스의 성령사역과 성령세례 1.들어가는 말 현대 21세기의 영성과 성령에 많은 관심이 대두되는 시기에 이렇게 성령론을 고찰하며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먼저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중에서 성령의 세례라는 부분은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적인 생각과 신학을 가지고 또한 개혁주의적인 성경해석을 하는 분으로 이해를 한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서는 개혁주의 적인 길을 벗어나 조금 그 사역에서 문을 열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개혁주의 성령론에서는 조금 나아가고, 그렇다고 오순절적인 성령론에는 다른 그런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많은 독서와 목회에서 경험한 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세운 듯하다. 그는 어린 시절에 웨일즈의 부흥을 보고 자랐다고 할 수 있고, 자신이 하는 목회사역에서 큰 부흥은 없었지만 개인적인 그리고 지엽적인 부흥을 보고 갈망한 사람이다. 이것들이 그의 목회와 사역에 그리고 신학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전체적인 성령론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논쟁이 되는 부분에 집중을 하도록 한다. 성령론에서 그는 성경의 논리와 교회사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논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고 보고, 그 안에서 목회자로서 성도로서 우리에 유익을 주는 것들이 있다고 봅니다. 2. 성령의 중생의 사역 1) 성령의 중생의 은밀한 사역 로이드 존스에게 성령의 사역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사역은 중생의 사역이다. 그러나 이것은 체험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밀한 사역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은 그에게 그 일이 발생했을 때에만 알게 된다.그가 중생한 증거들로 그는 롬 8:7,9절을 통해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로마서를 인용하면서 성령의 사역으로 자연인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하면서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과 12절과 고린도전서 2:14절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일을 받을 수 있고 믿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이다 라고 말한다.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믿을 수가 없으며, 모든 성도들 안에는 성령께서 필연적으로 내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중생은 성령의 사역이다. 그런데 성령의 중생의 사역은 은밀한 사역으로 보고 있다. 2) 중생한 사람의 증거들 중생은 은밀한 사역이지만 우리가 내주의 사역으로 중생한 사람들에게 “나의 보편적이고 전체적 사고방식을 그로 하여금 주장하시게 하며, 규정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싶어지고, 그리고 언제나 자기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더 큰 지식을 소원하게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더 크게 바라게 된다. 그리고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 자기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늘 염려하고 주님, 내 사랑이 약하고 연약해서 늘 걱정입니다 고 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더욱 더 깨닫게 된다. 그리고 죄를 짓는데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에서 자기가 행한 일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괴로워하게 된다. 더불어 그는 점점 갈수록 죄악과 유혹이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 예민해 진다. 결론적으로 자기 속에서 의와 거룩을 사모하여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들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면서 내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지 없는 지는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 로이드 존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중생의 사역으로 성령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중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 즉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다.” 그럼으로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중생의 사역과 성령의 세례를 별개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내주로 인한 중생의 사역은 죄를 깨닫게 하시며, 빛을 비추시며,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성령이 사람 안에서 내주함으로 일어나는 성령의 은밀한 사역이다. 그리고 은밀한 사역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알 수 없는 사역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결과들은 분명히 있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3. 성령세례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중생의 사역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고 보면서 성령의 세례는 세례 요한이 증언했던 “그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로 성령의 세례는 예수님의 행동이고 특권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령 세례는 “성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행해지는 어떤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 성령의 세례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특수하게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에 대한 그 나름대로 이론은 사도들이 중생한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계신 당시에는 성령세례를 받지 못 하였고 예수가 승천하신 후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을 말하면서 이 성령 세례는 중심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역임을 증거한다. 1) 성령 세례의 성경적 증거들 ① 사도들의 성령 세례 : (행 1장-2장)여기에 나오는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미 중생한 사람들이다. 그런 증거로 요한복음 7:37-38을 증거 하면서 여기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를 말하면서 제자들은 오순절 이전에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요 15:3, 17:6-9) 이것으로 볼 때 사도들이 오순절 이전에 모두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여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은 성령이 부음 바 된 사람들이지만 아직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행 1:4-8을 통해서 이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똑같은 사람들이 이미 신자들이고 거듭난 사람들이며 어떤 의미에서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 후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령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바로 사람은 주 예수님을 믿는 참된 신자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동시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고 있는 것이다. ② 사마리아의 성령 세례 (행 8장)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6-8) 여기서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행 8:12 )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이 빌립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의 오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 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 8:14-17) 이들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 예수님을 그들의 구주로 믿은 참된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안수를 함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③ 바울의 성령 세례(행 9장)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7-18) 여기서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을 믿었다고 보며 더불어 후에 아나니아를 통해서 보냄을 받고 그가 안수함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 후에 물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울을 고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고 성령의 세례를 주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습니다. 행9장 18절을 보면서 세례를 받기 전에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보고 이것으로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다고 말합니다. ④ 고넬료 가정의 성령세례 (행 10장) 고넬료 가정의 사건은 믿음과 동시에 성령의 세례가 내려온 것으로 보고 있다. 믿음과 성령 세례가 같이 올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⑤ 에베소의 12제자의 성령세례 (행 19장) 그리고 행 19장을 통해서 그는 더욱 자신의 논증을 분명히 밝혀나갑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 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행 19:1-7) 여기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물으면서 그들이 복음을 믿었지만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성령세례 없이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 한다. 그리고 바울이 안수를 함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면서 분명히 중생과 믿음과 연관되고 그 이후에 성령세례를 별개의 것임을 주장한다. ⑥ 에베소 교회의 성령 세례 (엡 1:13-14)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회상시키며 그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그리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하면서 신자만이 성령의 세례를 받으며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서 순서적으로 믿는 일이 먼저이고 그 후에 성령으로 인치는 것이 온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의 세례는 동시에 일어날 수 도 있고 또는 다르게 일어날 수 도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생과 성령의 세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 성령 세례의 결과들 로이드 존스는 성령 세례의 직접적인 결과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체험적인 증거라고 말합니다. 중생은 신비한 것이며 영혼의 깊은 곳에서와 중심부에서 이뤄진 기적적인 행동으로 어느 누구도 그리고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그가 중생한 그 순간에 관해서 말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의식적이며 체험적이며 분명하며 명백하고 선명하여 받는 자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것이 인식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체험적인 것에 관하여 그는 주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으로 구분을 한다. ① 주관적인 체험 주관적인 체험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례적인 자각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조나단 에드워드는 하나님( 성부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성령)의 영광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해준다고 말하면서 그는 이것을 믿었지만 그가 말하듯이 그것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들로 20세기 웨일즈의 대학 총장인 토머스 찰스 에드워드가 1859년 그가 학생 때 체험한 것을 말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을 때에 어느 집회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고 이렇게 말한다. 그가 떠날 때에 “...그가 심지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만났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D.L.무디의 체험을 더불어 말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례적인 자각이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다.그러면서 개인적인 체험의 부분에서 성령의 세례가 임하면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색다른 확신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세례와 중생을 동일시 여기면 모두가 자동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확신을 가진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 2장을 통해서나 그 밖의 성경들을 통해서 그렇지 않은 듯하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세례가 오면 더욱 확신을 가지고 기쁨과 행복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고백의 한 부분을 통해서 “믿음을 얻는 것과 믿음의 확신사이에 뚜렷한 차이를 끌어내는데 매우 신중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성령세례는 가장 높은 형태의 확신을 준다고 한다.

첫 번째 확신의 유형은 성경에서 추론하여 얻는 확신입니다.

두 번째 확신의 유형은 요한 1서 5장 13절의 말씀과 같이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세 번째 유형은 친히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확신이다. (롬 8장15-16절) 이것을 토마스 굳윈의 글을 인용하면서 아버지와 아이가 길을 가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아이를 들어 올려 안아주면 귀여워 해주는 사랑을 듬뿍 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묘사한다.성령으로 세례가 임하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타서 체험적인 것이 된다. 이것으로 영적 마음이 자극하게 된다고 증거 하면서 그는 청교도인 존 플라벨과 조나단 에드워드의 글들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체험적인 것들을 증거합니다. “이것들은 마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② 외부적인 증거 그러면서 성령 세례의 외부적인 증거들을 여러 가지 제시합니다. 그 한가지로 교회의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세례가 교회 역사상 모든 위대한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성령세례와 부흥과의 사이에 있어서 차이점은 단순히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수효의 차이이다. 큰 무리, 즉 사람의 그룹으로서 부흥을 정의하는데, 동시에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즉 성령이 함께 모인 사람들 위에 강림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흥이라는 것은 교회 성장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영적 대각성과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말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은 사도행전의 교회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재현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와 같이 성령이 교회위에 다시 부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으로 로이드 존스는 성령세례가 집단적으로 부어지는 역사가 부흥이고 부흥이 성령의 세례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성령세례는 발생하는 사람들에게와 이 사람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되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다. ③ 성령세례를 받은 외부적인 증거들에 대한 성경의 증거 이러한 증거들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들을 이러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듯이 오순절 강림사건은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인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행 2:12-13) 사람들이 감정의 격발과 활력, 그리고 기쁨과 풍부와 힘이 넘침 그리고 이것에 대한 일반인들의 의혹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가 사도행전 2장 44-47절에 나오는 유무상통하는 삶이고, 이러한 경향들이 부흥의 시기마다 있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사도행전 4장31절에 나오듯 모인 곳이 진동하였다. 즉 굉장한 감정의 고조가 그 자리에 모든 사도들과 모든 제자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장에서 집사들을 임명할 때에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뽑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관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들이 사도행전 8장의 빌립의 전도와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로 목격될 수 있고 그리고 9장에서 바울을 통해서 아나니아의 안수로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성령이 충만하여 변화된 것을 모든 사람들이 목격합니다. 그리고 10장에서 고넬료 집에서 있었던 사건에서 성령이 내려오는 것은 베드로와 그 동행한 자들이 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장에서 제자들에게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묻고 그들이 세례를 받고 후에 바울이 안수를 함으로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서 초대교회에서는 흔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들이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그리고 반복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그들 위에 부으심으로 기독교회가 시작하셨다는 것과 신약교회는 성령 세례를 받은 교회이다 그리고 신약의 모든 교훈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고 말하면서 오늘날의 교회가 그렇지 못하여 문제가 심각하게 된 것이며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초대교회와 같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으로 로이드 존스는 성령세례를 부으심과 교회의 부흥에 깊은 연관이 있음을 말하고 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은 바로 이 성령세례로 기름부음의 역사를 통해서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부흥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온전히 그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말하며 주님이 주권자이며 성자께서 그 자신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서 이 선물과 세례를 베푸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3) 교회사 속에 있었던 증거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성령세례와 부흥의 관계를 교회사 속에서 몇 가지로 증거한다. 1904-1905년에 있었던 웨일즈의 부흥에서 사람들은 그의 신앙이 부흥되었다고 표현을 했다. 이전에 신앙이 있었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었는데 부흥으로 그들의 신앙에 부흥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부흥의 때에 성령이 사람들과 회중에 내려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1738년 5월 24일에 있었던 올더스 게이트 가에서 존 웨슬리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IVF(UCCF)그 밖의 여러 단체의 원조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을 지도했던 캠브리지의 유명한 성직자인 찰스 시몬은 “ 이것(부흥/성령의 부음)은 결코 그것을 아직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많은 백성들이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즐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주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심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감정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지 거의 알지 못 합니다.” 이것이 찰스 시몬에게 체험적인 사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인침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믿고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해온 자들을 위해마련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이러한 은사가 그들에게 허락되어지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끝맺습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입는 것이 바로 성령의 세례이고 성령의 부음이고 인 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과 사역자들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은 그 사역을 색다르고 능력 있게 감당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4) 성령세례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러면 성령의 세례가 주어지는 목적이 무엇인가? 일차적인 목적과 기능으로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위대한 구원사역에 대한 증인이 되게 한다고 말한다. 그는 누가복음 24장 45-49절에서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말씀에서 목격자로서 증인으로 해야 할 일과 더불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은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 울 것이 바로 성령세례라고 설명한다. 사도행전 1장 4-5절에서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모든 말씀에서 성령의 세례의 목적은 바로 증인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2장을 기점으로 제자들은 완전히 증인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걸음 더나가 성령세례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좀 더 완전한 지식을 얻게 한다고 말한다. 즉 행 2장33에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성령 세례로 인하여 베드로가 설교하는 내용을 통하여 단번에 알게 된 것이고 분명해 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여 줍니다. 즉 이것은 설교의 역사와 관련됩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과 그리고 설교자의 모습과 설교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머레이 맥췌인의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설교단에 올라가서 설교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것은 그가 하나님의 면전에 있으면서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임하신 결과들 중의 하나가 외부적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교회가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성령의 활동을 다시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교회들은 집회들과 신앙의 운동 등을 조직하여 기본적인 요소를 대체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성령이 오실 때 그의 증거가 오류가 없으며, 또 그 결과는 놀랄 만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금 신약의 본래에로 되돌아 갈 때에 만이 비로소 소망이 생긴다고 말한다. 그는 신약의 초대교회 본래에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능력과 자유이다. 사람들이 담대히 증거하며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의 세례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사람들 앞에서 담대히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무력해졌을 때 하나님은 갑자기 한 사람을 붙드시고 그에게 성령을 부으시며 그를 일으켜 세워 그의 설교를 변화 시켰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독일의 요한 타울러 그리고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 그리고 스코트랜드의 존 낙스 존 리빙스톤 그리고 호웰 해리스 그리고 조지 휫필드나 웨슬리, 찰스 피니 그리고 D.L. 무디와 R.A.토레이, A,B. 심프슨 등을 예로 설명하기를 설교자가 능력과 확신으로 전하기 위하여서는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성령세례와 성화의 관계에서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증거로 행 2:9에서 베드로와 바울의 증거를 통하여 성령세례는 우선적이고 필수적으로 능력의 세례이다.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가 성령 세례를 받았어도 많은 문제들이 나타난다. 이것을 봄으로 성령세례와 성화의 문제는 직접적인 관련됨을 볼 수 없다. 그러면서 롬 8:12 말씀과 같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죄를 없애버린다면 사도가 굳이 우리에게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5) 성령세례와 성화의 관계 성령의 세례와 성화저인 측면에서 성령의 열매는 자란다는 것으로 구별된다고 보고 있다. 열매가 맺어지고 자라나는 것은 성화적인 측면인데 성령의 세례가 이 성화적인 측면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성령세례는 성화가 다 이루어진다고 보는 성결주의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면서 성령의 세례는 성화를 가능한 한 가장 많이 격려해 준다. 성령세계가 성화에 가장 자극제이며 동기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매우 좋은 시금석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항상 성령의 사역과 작용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것이나 모든 것에 적용시켜야 한다.4. 성령의 인침 성령의 인침과 성령의 세례는 같다 같은 것인데 문맥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1) 인침의 구절과 이해 성령의 인침이라는 것은 고후 1:21-22 “우리에게 기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그리고 에베소 1:13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나니”, 엡4:30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이것은 이미 구약에 약속된 것이지만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는 때에 성취된다. 인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된 것이고 그리고 신약의 교회와 성도에게 성취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인치는 것이 믿음으로 중생한 이후에 주시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2) 인침의 의미 인침의 의미에서 찰스 하지는 “인치심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음의 다음에 오는 어떤 것이다.” 찰스 시몬은 이것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교회에는 언제나 그것을 소유하고 누리는 많은 자들이 있다.……, 이와 같이 성화의 더 높은 확신은 믿은 후에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성령의 인침의 의미들을 권위자들의 생각을 빌려오면서 인침의 의미가 또 다른 어떤 것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하여 교회에는 언제나 인침의 의미는 소유권적인 의미가 있고 더나가 권위를 부여하거나 참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요1장 33절과 6:25-27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하여 인처진 자라는 것입니다. 이 의미에서 보증의 의미보다 권위를 부여하다. 혹은 참되다 증명하는 것이다. 웨스트 코드 감독은 인침과 보증에 대하여 “부과된 것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을 위해 엄중히 따로 구별해 두며 이해할 만한 싸인들로 말미암아 보증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세례와 인침은 같은 것으로 보고 있고 믿은 이후에 얻게 되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인침과 성령의 감동으로 믿는 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인치는 것은 믿은 후에 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은 후”에 혹은 “ 믿고 나서 막”을 말하면서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5. 성령 충만에 관하여 그러면서 성령세례의 또 한 증거가 성령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음과 동시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을 통해서 그는 성령의 세례가 “성령의 충만함”을 내표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고는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체험하지 않고도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다.1) 성령 충만의 의미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테일러의 헬라어 사전을 인용하면서 “무엇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 충만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기운으로 살라고 말하는 것으로 성령에 의해서 지정의의 인격이 다 다른 영향과 다른 세력에 의해서 조종을 받고 있는 것으로 말한다. 성령의 충만함에 관하여 충만한이란 ‘가득차다’. 혹은 ‘성령으로 흠뻑 젖은 것’, 단순히 그들 속에 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넘쳐흐르는 성령으로 충만 된, ‘성령으로 흠뻑 젖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의 충만을 두 가지로 구분을 한다. 특별한 경우에 주어지는 충만으로 어떤 특수하고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입은 사람들이 있다. 그 예로 브사렐과 오홀리압 엘리사벳의 경우들이 있다.그리고 생활상에 주어지는 성령의 충만이다. 엡 5장 18절의 말씀을 관련하여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여기서 성령 충만을 지시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것은 어떤 한 상태나 조건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계속적인 현재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전자의 임무수행을 위한 충만과 구별을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그는 롬 5장2절의 말씀에 관련한 존 오웬의 ‘성령과의 교제’를 진술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소망가운데 기뻐하는 것 ... 그것은 어떠한 고난이나 영광을 통해서 영혼을 인도하며,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에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부어주심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 성령은 모든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시면서 즐거움과 희열 그리고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심령의 환희로 채우시면서 우리 영혼에 그것을 은밀히 주시시도 하고 거두어 가시기도 한다.”그리고 토마스 굳윈의 글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영혼에 임하시고 인간을 압도하시며,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 그는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시켜주며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부터 그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빛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빛은 일반적 신앙의 빛을 넘어선 빛입니다.” 즉 로이드 존스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백성에서 특별하게 그리고 예외적으로 주시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며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세례는 성령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이 곧 성령 세례를 받은 증거는 아니라고 로이드 존스는 본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는 성령을 통해서 중생을 한다. 그리고 그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중생과 더불어 성화의 과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성령세례가 반드시 완전한 성화를 만들어 내놓지는 않지만 가장 큰 자극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성령세례는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 세례는 교회를 새롭게 회복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확신과 기쁨과 부흥을 맛보게 하는 것이요 설교자나 사역자들이 권능을 입고 능력 있게 사역하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령세례라는 책에서 성령의 세례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사하지만 우리가 끈질기게 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말하면서 우리는 힘써 기도하며 힘써 구해야 할 것이라 종용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구할 가치가 있고 내가 힘써 구해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혹은 성령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6. 성령의 은사들 1) 은사들은 구분 기준들 로이든 존스는 성령의 세례를 다른 것을 보는 사람들과 또 다르게 그 은사들을 이해한다.

첫 번째로 성령의 은사들은 자연적인 은사들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연적인 은사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라고 그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성령의 은사들은 이 자연적인 은사들과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성령님에 의해서 주어진 은사들은 직접적인 은사들입니다. 자연적인 재능과 성령의 은사를 구분한다. 그는 계속하여 영적인 은사들이란 “어떤 그리스도인을 구별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하는 특별한 능력들로 이것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영혼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의한 신적 은혜의 능력이기 때문이다.”고 정의한다. 교회를 섬기는 목적으로 주어진다고 그는 주장한다. 두 번째로 은사들이 성령님에 의해서 주권적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자신의 주권의 능력 안에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은사를 주실 것인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주시기로 계획하시고 시행하신다는 이것이 성령님의 특권이다.세 번째로 이 은사는 각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져 소유되고 있는 선물이다. 고전 12장 7, 11절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참된 각 지체는, 한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세례를 받은 참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특별한 영적 은사를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네 번째로 은사의 중요성에서 차이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 12장14절의 말씀과 같이 몸은 한 지체뿐이 아니요 여럿이니라고 말을 하지만 28절에서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인용하면 은사들이 그 중요성에 있어서 다양하다는 분명한 가르친다. 그리고 14장 18-19절을 통해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말합니다. 다섯 번째로 모든 은사들은 항상 사랑 안에서 사용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바울은 13장을 통하여 "은사는 사랑 안에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과 단순히 그런 이름들은 가진 은사들은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성을 평가 혹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만약 우리가 어떤 특별한 은사를 소유하거나 나타내지 못한다면, 우리를 향하여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지도 혹은 성령의 어떤 충만함도 알지 못한다고 비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거짓된 가르침이다. 2) 일시적인 은사 은사들에 대하여 이 모든 은사들이 교회에서 항상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고전 12장의 은사들이 초대교회에만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오늘날의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일까? 이런 것들은 일시적인 것일까? 영속적인 것일까? 이런 모든 은사들에게 이런 원칙 중 어떤 원칙을 적용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은사들을 나누어야 할까?로 질문을 하면서 은사에 대하여 고찰한다. 로이드 존스는 은사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은사적인 이해를 기준으로 가지고 은사들을 구분합니다. 그는 은사들 중에 일시적인 은사가 있고 계속적으로 있는 영속적인 은사가 있다고 말을 한다. 로이드 존스는 일시적인 은사로는 첫째로 사도직의 은사입니다. 사도직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으로 영원합니다. 사도직의 은사와 관련이 있는 예언의 은사와 사도적 치유의 은사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에 의해서 주어진 직접적인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환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기도의 결과로 환자가 치유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영적인 자들과 어떤 이들이 치유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지만 성령님의 치유의 은사는 사도들과 함께 끝났다고 그는 보고 있다고 로이드 존스는 보고 있다. 더나가 기적들과 영을 분별하는 은사와 방언의 은사들까지 그는 일시적인 것으로 끝났다고 본다. 3) 항존적인 은사 로이드 존스는 계속적으로 존재하는 항존적인 은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나오는 은사들 중에 항존 하는 은사 목록들을 제시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교육의 능력과 섬김과 돕는 은사, 집행과 통치의 은사, 집사와 장로 그리고 다른 직분자들이 소유한 능력, 복음 전파의 능력, 목회를 위한 능력, 권면의 은사와 9절에서 나오는 믿음의 은사 - 여기서 이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특별한 사역을 수행했던 사람들에게 볼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며 그런 일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는 것- 이다. 4) 방언에 대하여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에 사도들이 했던 방언은 언어로 15개국의 언어 들려 졌다. 그리고 고린도에 나타나는 방언을 어떤 사람들이 이해됨이 없는 단지 소리나 말들로 일종의 무아지경 속에서의 외침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과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방언의 차이는 오순절 날, 고넬료의 집 그리고 에베소에서 완전함과 영광으로 모두에게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 볼 수 있는 차이는 방언을 말하는 자신조차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으며,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것은 해석할 수 있는 자들을 새로운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던 자들을 볼 때 예루살렘에서도 모든 사람이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석할 수 있었던 해석자들이 있었다. 로이드 존스는 방언의 은사가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사도적인 은사는 그쳐졌다고 말하고 이 사도적 은사와 연관되어 있는 은사들은 그쳐졌고 더불어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은사들은 항존적인 은사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Ⅲ. 결 론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이 개혁주의에서 벗어나서 펜타코스트(註 : 오순절을 의미하는 펜타코스트(Pentecost)는 50번째를 의미하는 라틴어 ‘펜테코스테’에서 유래했다.)의 길로 약간 기울어졌다고 말한다. 그런 면이 있다. 그러나 그는 목회자이다. 그는 설교와 목양에 힘쓴 목회자이다. 그래서 그는 목회적 관점에서 그 누구보다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설교자가 이 성령 세례(기름부음, 인침)를 받아야 한다. 설교자는 설교를 할 때 권능을 입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적인 부분에서 이러한 성령 세례(인침, 기름부음)가 있음으로 부흥과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의미와 관점에서 성령의 기름부음 즉 성령 세례의 중요성은 특별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초대교회와 같은 그러한 일(성령의 기름부음)들이 교회 회복의 유일한 소망임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그가 펜타코스트주의 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은사 면에서 그들과 전혀 다른 면을 보이고 개혁주의 측면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사역적인 면과 설교적인 측면에서 중요하지만 비정상적인 은사 운동에 대하여서는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은사의 유용성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데 목적이 있음을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에서 비정상적인 은사운동들이 횡행(橫行)하고 있는데 그러한 경향에 대하여 일침을 가하지 않나 생각된다. 은사라는 것이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이 주권적으로 은사들을 주신다는 것을 통해서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를 세우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러한 은사들이나, 마치 자신이 사도와 같은 권위의 은사가 있음을 주장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의 교만함이 사악함을 드러내 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의 성령에 대한 이해를 단지 논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목회자로서 그리고 성경을 연구하는 자로서 그리고 사역에 놓인 우리의 사역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 많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참고도서 성령세례 : 로이드 존스, 정원태, 기독교 문서 선교회 성령론 : 로이드 존스, 홍정식, 새순출판사 에베소서강해 1 영적 선택 : 로이드 존스, 서문강, 기독교문서 선교회 에베소서강해 6 영적생활 : 로이드 존스, 서문강, 기독교 문서 선교회 로이드존스 성경교리 강해 시리즈 2 성령하나님: 로이드 존스, 이순태, 기독교문서 선교회 로마서 강해시리즈 5권 : 로이드 존스, 서문강, 기독교문서 선교회 진정한 기독교 1 : 로이드 존스, 전의우, 복 있는 사람

 

 

 

 

 

 

 

 

 

 

 

 

 

 

 

제8장 존 오웬의 성령론

 

Ⅰ. 존 오웬의 생애

 

  '청교도의 왕자'라고 불릴 정도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존 오웬은 웨일즈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교도 운동의 중반기(청교도 3세대-부록참조)로 접어든 1616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북쪽으로 약8km 떨어진 스타드햄(Stadham)의 옥스퍼드셔(Oxfordshire)에서 청교도 목사인 헨리 오웬(Henry Owen)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헨리 오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존 오웬(John Owen)은 할아버지 때부터 벌써 명문으로 널리 알려진 웨일즈 지방의 청교도들이었다. 외가(外家) 쪽 할아버지 루이스 오웬은 웨일즈의 귀족으로, 북 웨일즈 메리오넷 지방의 대법관과 부장관으로서 중요한 일을 국왕과 상의하는 위치에 있었다. 

할아버지 험프리 오웬은 루이스 오웬의 손녀 수잔과 결혼하여 열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가장 막내였던 헨리 오웬을 신앙적으로 잘 양육하였다. 헨리 오웬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언어, 철학,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옥스퍼드 지방의 스타드햄 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는 열심을 다해 교회를 섬기던 중 막내 오웬을 낳아서 교회에 바쳤다. 존 오웬은 세 명의 형제들과 한 명의 누이와 함께 성장하였다. 오웬의 유년기는 성실하고 능력 있게 목회를 하던 경건한 청교도 목사인 아버지 헨리 오웬과 어머니의 관심과 돌봄 속에서 신앙적인 훈련과 교양적인 훈련을 충분하게 받는 시기였다.

 

1. 존 오웬의 학문의 기반

                                                            

옥스퍼드 출신의 목회자이며 걸출한 신학자인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를 둔 가문에서 자란 존 오웬은 명석하고 천재성의 비범함을 보였는데, 그는 겨우 12살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10년간 공부를 하였다. 그는 학자의 기질이 있어 밤에 4시간의 수면만 취하면서 학문적 탐구에 몰두함으로 건강을 잃을까 염려하기도 하였다. 그는 종종 여가를 즐기기도 하였는데, 투창 경기를 즐겼으며 롱 점프 선수였고, 플뤁을 불었다.

웨일즈의 청교도 피가 흐르는 가문의 영향을 받아 하루 네 시간 만 잠을 자면서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여서 훗날 건강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성경 언어(히브리어, 헬라어는 물론)를 망라하여 라틴어와 고전어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고, 학사와 석사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많은 독서와 탐구 능력을 길렀다. 존 오웬은 청교도 정신을 물려받아 고상한 학문과 청결한 양심을 가정과 학교에서 배양하였다. 이러한 청교도 집안의 3대에 걸친 기도와 학문의 밑거름이 청교도 신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데 기여한 많은 신학자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로 기억되게 하였다.

그는 곧바로 학위를 받은 후, 대학의 설교자로 부름을 받아서 대학에 남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2년 선배인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를 만났으며, 이 두 사람은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자 리차드 십스(Richard Sibbs)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훗날 절친한 동료가 된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과 함께, 오웬은 옥스퍼드 대학교로부터 명예 신학박사(doctor of divinity) 학위를 수여 받았다.

 

2. 오웬의 생애적 변화

                                                                   

오웬은 정치에 있어서는 의회당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오웬이 학문을 하는 동안 아버지가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주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삼촌의 도움을 받았는데 삼촌은 왕당파를 지지하였으므로, 결국 둘은 결별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오웬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런던으로 돌아오는 오웬에게 하나님께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귀중한 선물을 예비해 두고 계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웬의 영적 체험과 성숙이었다.

 

오웬은 옥스퍼드 대학시절부터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근심해 오던 것이 있었다. 그는 그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변화 없이 그대로였다. 물론 오웬은 이미 신학적 지식을 많이 갖춘 실력 있고 확신에 찬 칼빈주의자였다. 하지만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만큼은 확신이 결여되어 있는 가련한 사람이었다. 오웬에게 있어 매우 중대한 변화는 친구들과 함께 런던을 방문하는 동안 당시 유명한 에드먼드 캘러미(Edmund Calamy)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성 미가엘 교회(St. Michael Church)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을 때였다.

그날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캘러미 목사가 오지 않고 한 시골에서 올라온 무명의 목사가 설교를 대신하여 실망하게 되었다. 오웬의 친구는 다른 유명한 설교자가 설교하는 교회로 빨리 가자고 말했지만, 지칠 대로 지쳐있던 오웬은 그냥 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날의 설교는 마치 오웬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손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오웬의 영적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이 무명의 설교자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거늘”(마 8:26)이란 본문으로 설교하는 동안 하나님은 이 방문 목사를 통해서 오웬의 심령에 구원의 확신 갖도록 역사하셨던 것이다. 일화에 의하며 런던에 돌아온 이후로 오웬은 여러 가지 상황의 변화 속에서 이전보다 더 격렬한 영적인 씨름을 하게 되었는데, 그에게 얼마나 깊이 영적 각성이 일어났던지 약 3개월간 다른 사람과 교제할 수 없었고, 대화도 나누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3. 복음을 파수하는 실천적, 논쟁적, 구원론적인 신학자로     

 

1644년, 오웬의 첫 목회지는 에섹스의 포드햄(Fordham)이라는 마을이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에섹스에서 상업도시인 코게샬(coggeshall)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그곳 출신의 메리 루크(Mary Rooke)와 결혼했다. 오웬은 1646년 주일에 출석 교인이 2천 명인 런던의 한 교회에 초빙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교회관의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장로교 제도보다 온건한 회중교회주의자가 되었다.

신학적 노선에 있어서 오웬과 당대의 청교도로 유명한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존 호른(John Horne) 같은 탁월한 지도자들과 갈등이 있었다. 코게샬(Coggeshall)에서 회중교회 목회를 하던 1648년, 오웬은 백스터와 논쟁을 하게 되는 데, 그의 저술이 상당히 반율법주의 경향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아주 흔하게 벌어지던 논쟁이 바로 반율법주의 논쟁이다. 오웬은 “구원은 거룩하신 예수 안에서의 선택이다.”(salus electorum, sanguis Jesu)을 발표하였다.

1648년 6월에 페어팩스(Fairfax) 장군은 콜체스터(Colchester)를 포위하였다. 그때 오웬은 군인들을 위한 설교 초청을 받았다. 그는 많은 장교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그중에는 올리버 크롬웰의 사위인 헨리 아이어턴(Henry Ireton)도 있었다. 오웬의 은사는 곧 소문이 퍼져 의회에 초청을 받았고 의회에서 가장 선호하는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의 군종으로도 임명되었다. 그는 14년간 크롬웰과 함께 영국의 개혁에 동참하게 되었다. 크롬웰은 오웬을 데리고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데리고 다니면서 군인들에게 설교를 하게하고, 점령지의 종교적 상황을 판단하고 크롬웰의 정치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도록 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서 크롬웰에 의해 1651년 의회파가 승리한 후에 하원의 투표에 의해서 장로교회 지도자였던 레이놀즈 박사를 제치고 옥스퍼드 ‘그리스도의 교회’ (Christ's church) 교수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오웬의 탁월한 행정력은 눈부신 업적을 남겨놓았으니, 최고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대학을 맡기고 경건과 신앙심의 고취는 물론, 일반 교육수준을 크게 높이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많은 인재들이 큰 감동을 받고 배출되었다.

 

그는 마침내 크롬웰의 궁중목사가 되었다.

1652년,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다음해에는 성직자 임명과정을 감독하는 감독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가 부총장이라는 직책은 각종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그는 6년간의 재직 기간에 신학, 설교, 교리문답, 기도를 중심으로 살았다. 오웬은 옥스퍼드 시절 여러 권의 설교집과 강의서, 논쟁적인 글들, 주석, 교리 연구서를 남겼는데, 그의 저작이 지닌 가치와 중요성은 실로 막대한 것이다. 옥스퍼드의 질서는 약한 편이었지만, 오웬은 관대하면서도 확고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행정을 할 수 있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토론 때 한 학생이 상스런 말을 하였고, 그는 경고를 받았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오웬 자신이 그 학생을 힘으로 강의실에서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오웬이 옥스퍼드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당시 대학의 행정가들을 지배하고 있던 대주교 윌리엄 로드(William Laud)가 로마가톨릭에서 내려온 온갖 미신적인 장식과 가톨릭적인 의식을 강요하면서, 거기에다가 새로운 수리를 하면서 온갖 장식을 고치고, 새 동상을 세우자는 고압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청교도들의 분위기는 반발하려는 기운이 감돌자, 젊은 오웬은 가장 앞장서서 이러한 정치 목사의 행태에 비판을 가하고 강력히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한 나머지, 학교의 설교목사직과 강사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로부터 청교도들은 ‘신성의 특권’과 ‘고상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 행동이라거나, 마땅히 거부해야할 인간의 명령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부해 오고 있었다. 화형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리들리(Ridley)와 라티머 (Latimer) 목사를 높이 추앙해 왔던 것이다. 대주교 로드(William Laud)는 상하 구조의 국가체제를 따르는 ‘고교회(高敎會)’ (High church)주의자였다.

1657년, 전제정치를 실현하려는 크롬웰의 욕망에 반대하여, 오웬은 크롬웰과 결별하게 된다.

 

4. 청교도 운동의 최전선에 우뚝 선 칼빈주의 신학자

                                   

1658년, 오웬은 회중교회의 목회자 모임에 나갔다. 이 모임은 런던의 사보이 궁(Savoy Palace)에서 열렸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한 고백서를 준비하기 위해서 토마스 굳윈, 필립 나이, 윌리엄 브리지, 윌리엄 그린 힐, 조셉 카릴과 함께 대표로 임명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알려진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이다. 청교도 신학의 절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인데, 여기에 참여한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존 오웬이었다. 1658년 사보이에서 독립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신앙고백서를 따로 작성하고, 오웬이 서문을 썼다. 그러나 1660년 올리버 크롬웰의 죽음으로 인해서 오웬의 생애는 급작스런 변화를 겪게 되는데, 부총장의 자리는 다시 레이놀즈 박사로 교체되었다.

 

신대륙 미국에서 장로교회가 회중교회를 핍박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를 격렬하게 항의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총장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도 이를 지적하면서 거부하였다. 더구나 오웬의 철저한 비타협적 자세와 다른 독립주의자들의 입장으로 인해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당대 영국에서 교회를 장악하고 있던 인물들은 거의 다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장로교회 제도를 바꾸게 하거나 근본적으로 수정하도록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면서 장로교도들이 찰스 2세를 다시 불러들여 왕정복고를 이루는 과정에서 독립파는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장로교를 국교로 삼겠다고 약속했던 찰스는 오히려 청교도를 핍박하기에 이르면서 이전과는 모든 상황들이 다르게 전게 되었다. 그는 약10년 동안 옥스퍼드 교수와 목사로서 최선을 다하였다.

1660년 3월 13일에는 감옥에 갇혀있던 존 번연 목사의 석방을 위하여 노력한 일로 인하여 다시 한 번 고향 스타드햄튼의 교회로 물러나게 된다.

1662년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으로 2,000여명의 청교도 목사들이 강단에서 추방되었을 때, 오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후 핍박이 계속되는 동안 핍박에 굴하지 않고 오웬의 저항도 계속되었다.

1673년, 그동안 장로교회와 독립파 회중교회의 목사들은 각 교구에서 자주 대립하였는데, 리챠드 백스터의 제안으로 장로교회와 독립교회가 연합하자는 운동에 오웬이 적극적인 노력으로 많은 갈등이 해소되었다. 백스터는 그동안 오웬의 비타협적 독립교회 제도에 철저히 반대하여오던 지도자였다. 오웬은 가톨릭식으로 상하관계가 형성되는 교회의 교구제도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한 교구 내에는 그 지역을 담당하는 하나의 교회만을 세우되, 이를 노회 단위로 모이게 하는 일에도 반대한 것이다. 개신교 진영의 교회들이 연합하는 일은 매우 절실하였던 과제였고, 공적인 일에 항상 관여하여 왔던 그는 즉각적으로 환영하며 참여하였다. 하지만, 1571년 의회는 비국교도들에게 관용을 허용치 않는다고 발표하여 고난과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1660년 왕정복고 이후 그의 남은 인생을 반 추방형식으로 집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목사요, 설교가로서 오웬의 문서 활동이 크게 증가하는 시기였고, 그의 저술은 우리 세대의 청교도 비국교도주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 오웬은 우리들이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다. 그는 메리 루크(Mary Rooke)와 결혼 후 31년간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아이 하나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딸의 결혼도 깨어져서 친정에 돌아와서 산 지 얼마 안 되어 결핵으로 사망했다. 오웬은 1676년 훌륭한 그의 아내 메리 루크를 잃었다. 그는 18개월 후 재혼을 하였다.

그는 80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1647년에 그의 모든 저작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 죽음의 죽음”을 간행하였다. 이것은 난공불락의 책으로, 속죄에 대한 고전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진술로 인정을 받았다. 1677-8년에 그는 기념비적인 “성령론”의 전반 두 부분을 간행하였다. 1681년에 그는 3편의 고전적인 논문을 썼다. “그리스도론”, “신령한 마음의 은혜와 직무”,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묵상과 강화”가 그것이다.    

1656년에 그는 “신자 안에 있는 죄 죽임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이 책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로부터 찬사와 감사를 받았다. 인간 영혼의 분석을 통찰력 있게 묘사하였다. 오웬은 로마서 8장 13절에 근거하여 이 논문을 썼는데, 철저한 탐사를 통하여 우리 속에 감추인 동기와 정욕과 본능과의 싸움을 선언한다. 1658년에 그 뒤이어서 “유혹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또 하나의 책을 출간하였다. 그 책은 그들이 권력을 잡은 때에, 교묘한 도덕적 부패에 대하여, 잠복해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그들을 경계한다. 1668년에 그는 많은 책을 내었는데, 특히 “내재하는 죄”라는 책이 주목을 끌었다. 이것은 시편 130편을 강해한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5.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친 후에

                               

존 오웬 (John Owen)은 뜨거운 가슴으로 사역했던 목회자였다. 그의 거룩한 영혼은 하나님만을 더욱 더 즐거워했고, 건장했던 그의 육체는 완전히 쇠잔해졌다. 잦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고된 업무로 인해서 완전히 탈진 상태에 빠진 것도 여려 차례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했다. 70세에 못 미치는 그의 전 생애를 쉼이 없는 학문 연구와 목회자로서의 열정적인 삶에 바친 결과, 말년에 담석증과 천식으로 고생하다가 67세를 넘긴 1683년 8월 24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런던 번 힐 묘지에 묻힘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나는 교회라는 배를 폭풍의 바다에 두고 떠납니다. 그러나 위대한 선장이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배 밑창에서 노 젓는 나 같은 사공 한 사람이 사라진들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위로의 유언을 남기고 오웬은 이 땅을 떠났다. 그러나 당대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가장 영향력 있는 청교도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긴 인격자로 알려져 있다. 청교도 시대의 신학과 신앙을 연구하는 많은 이들은 오웬을 가리켜 '최후의 청교도 신학자'로,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심오한 신학 저서를 방대하게 내놓은 저술가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오웬의 전집을 독파했던 패커는 그를 일컬어 “성경에서 파악된 인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들을 드러내는 진실함, 당당함, 그리고 위엄에 있어서 필적할 사람이 없는사람”으로 평한바 있다.

 

Ⅱ. 오웬의 저작들의 의미

 

1. 오웬의 신학과 그의 저작들에 대한 평가

                                              

존 오웬은 17세기 명실상부하게 영국의 최고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책은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24 vols. (London: Johnston and Hunter, 1850-53), repr.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1967)]으로 남아 있다. 오웬의 신학은 한 마디로 실천적이며, 논쟁적이며, 구원론적 신학이다. 우리가 오웬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웬이 당시 알미니안주의, 소시니안주의, 백스테리안주의, 로마 가톨릭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는지 지적이며, 역사적인 정황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이 파도와 같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그가 기독교신앙의 정통성을 수호했는지를 그의 저작들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오웬은 조지 폭스(1624-1691)가 주장하는 ‘내적인 빛’에 의존하는 ‘퀘이커파’도 단호하게 비판하였다.

‘청교도의 황태자’로 불리며, ‘영국의 칼빈’으로 불린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명저 ‘삼위일체 신학’, ‘중생과 성화론’, ‘죄 죽임론’,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 ‘성령론’, ‘죄와 유혹’ 등은 오늘날 목회자와 신학생들의 필독서이며, 넘어야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오웬은 개혁주의 신학자, 보다 정확히 말하면 17세기 영국 청교도 신학자인 그는 기독 신자의 삶을 강조하고, 성령론을 매우 실제적으로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오웬의 영성이 탁월했다고 주장 한다. “개혁주의 청교도들은 이념적으로, 관념적으로 치우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감정과 정서를 중요시했다.”고 말한다.

 

문제는 청교도의 신학을 바르게 해석하고 계승해야 할 후대의 신학자들이 청교도들이 가졌던 감정과 정서를 무시하고, 계몽주의자들처럼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웬은 기독신자의 신앙생활에서 경험을 강조했으며, 그리하여 확신과 안정감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오웬은 당시 신비주의자들이 종교적 황홀감을 맛보기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집착하는 문제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고, 합당하게 필요한 감정적 차원을 설명한 바 있다.

 

존 오웬은 격동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오웬 당시 시대상을 담고 있는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Apostasy from the Gospel, 생명의 말씀사)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청교도 혁명의 성공과 실패, 가톨릭주의와 가톨릭의 득세를 목격하였고, 때로는 강단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당시 찰스 2세는 왕정복고 이후에 통일령을 발표하여 청교도들을 국교회 밖으로 몰아내었고, 찰스 2세는 임종 시에는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의 동생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들을 정부 요직에 등용하였다. 이제 영국은 가톨릭화 하기 시작하였다. 오웬은 가톨릭과 가톨릭주의를 배교라고 규정하고 복음의 진리와 복음적인 삶과 예배를 수호하기 위하여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웬의 저술에서 그가 매우 분석적이고 조직적이며 탁월한 지성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의 글은 모두 그가 심오하게 이해한 은혜의 교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오웬의 문장 스타일은 현대인들에게는 쉽지 않다. 다행히도 로우(R.J.K. Law)의 수고에 의해서 오웬의 대표작들에 속하는 『성령론』(The Holy Spirit),『하나님과의 교제』(Commuinon with God), 『복음으로부터의 배도와 그리스도의 영광』(Apostasy from the Gospel and the Glory of Christ)이 요약되거나 현대어로 고쳐져서 나왔다. 계속해서 그의 작품들이 번역 출간되고 있어 우리들이 좀 더 쉽게 그의 신학의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부록참조)

 

Ⅲ. 오웬의 신학적 배경과 이해

 

1. 청교도 운동

                                                                 

1640-1660년, 20년은 청교도의 황금기로 ‘청교도 신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여기에 참여한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존 오웬이다. 오웬의 신학은 청교도 운동의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16, 17세기의 영국에서 엘리자베스시대가 허용했던 것보다 더 발전된 영국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추구한 운동으로써 청교도를 일컫는 영어의 'puritan'은 'puritas(purity)'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교회를 깨끗하게 정화하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puritan', 깨끗한 척하려는 사람‘, 'precisian' ’꼬치꼬치 캐려는 사람‘이라는 조소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청교도 운동은 바로 이들 청교도들에 의해 펼쳐진 종교개혁운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세기 이상 동안 지속된 성직자와 평신도 운동이었으며, 종교뿐만 아니라 근대 서구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고 개혁을 일으킨 세계관적 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의 국교파는 그들의 기도서와 예배의식, 예복 등의 준수를 강력히 요구하였으며, 이에 대해 대륙의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종교생활에 있어서 이런 형식이 아니라 내면에 있음을 강조하고, 성경 중심적인 경건과 청빈사상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근거로 영국국교파와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였으며, 성경대로 살려는 엄격한 근본주의적 입장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2. 칼빈주의 수호자

                                                         

개혁주의 신학자 패커(J.I.Paker)는 ‘성경적 신앙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오웬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스펄전 역시 오웬을 칼빈과 칼빈주의를 잇는 가교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보았다. 오웬의 저작들에는 펠라기안 이래로 면면히 흐르는 소시니안, 알미니안주의와 같은 이성주의, 인간 중심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였으며, 로마 가톨릭의 형식주의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의 어조는 마치 하나님의 정염(情炎)에 불타는 구약의 선지자와도 같이 분노로 격앙되어 있었다.

 

3.성경에 근거한 탁월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

                      

청교도 신학의 최정상에서 거의 모든 주제들을 다루고 재정비한 신학자이며, 탁월한 저술을 가장 많이 발표한 오웬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오웬의 신학함의 깊이와 방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일 것이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기독교강요’ 1권 첫 소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두었던 것은 그 중요성 때문이었다. 오웬의 신학 속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에 관하여 얼마나 분석적이며, 통찰력 있고, 해박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오웬의 저작 가운데 인간 안에 내재하고 있는 ‘내면의 죄’, ‘죄 죽이기’는 매우 세미한 것을 살피는 통찰력을 볼 수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스도의 영광’과 ‘삼위일체’, ‘기독론’, ‘성령론’은 하나님에 관한 그의 지식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오웬은 이 모든 것을 성경에서 찾았으며,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그가 하나님과 인간에 관하여 경험한 모든 것을 다시 성경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오웬의 신학체계는 칼빈을 넘어 어거스틴과 교부들의 작품, 그리고 유대 랍비문서를 넘나들며 방대한 신학을 섭렵함을 통하여 세워진 거대한 저수지와 같다.

그는 성경을 근거로 목회적 경험을 치밀한 논리로 펼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을 정초(定礎)하였다. 젊은 시절 오웬의 자신의 회심 폭풍 전야의 경험이 그를 더욱 겸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제6권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겸손하게 하는데 적합한 두 가지 사항이 있으니, 하나님에 대한 바른 사고와 인간에 대한 바른 사고(思考)이다.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을 생각하고, 인간의 초라함과 비천함을 숙고해야 한다.”고 했다.

존 오웬은 "내가 익힌 학문과 '저 대장간의 힘'과 바꾸고 싶다" 고 할 정도로 존 번연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시대에 겸손과 지성을 가진 목회자, 하나님의 말씀에 해박한 지식과 영혼을 해부하여 치유하는 영적이며 탁월한 하늘의사가 필요하다.

 

Ⅳ.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화론

 

오웬은 그의 『성령론』제4부에서 “성화”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중생(regeneration)하고, 회심(conversion)을 한다. 이는 성령의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 두 번째 부분(part)라고 할 수 있다.

성화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the God of peace)은 우리의 본성과 인격을 성화시키셔서 하나님과 평강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 본성(whole nature)을 성화시키셔서 완전한 영과 완전한 혼과 완전한 몸을 가지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평강 안에서 흠 없이 우리를 완전하게 보존하신다는 말이다. 성화는 그의 신학적 학문의 탐구와 지식은 다른 청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위한 실제적인 지식이었다. 그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화라고 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성화는 신자들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로 그들의 본성을 죄의 오염(汚染)과 부정(不淨)으로부터 정결케 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함으로 그들이 은혜의 신령하고 습관적인 원리를 따라 하나님께 순종을 바칠 수 있게 하는 것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화는 죄의 오염으로부터 죄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있어서 포괄적인 주제인 ‘하나님과의 교통’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사실 하나님과의 교통 사상은 청교도 신학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주제는 다른 모든 신학적 주제들과 연결되는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간의 문제에 방대하고 치밀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서였으며, 성화는 이 목적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1.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오웬은 여전히 죄가 신자 안에서도 지배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서 그의 성화론이 출발한다. 죄는 결코 신자를 지배할 수 없지만, 신자가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한 것은 아니다. 즉 죄의 지배에 대해서는 자유하지만, 죄의 지배하려는 속성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않다. 이 속성과 신자는 싸워야 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은혜 아래 사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신자의 마음은 전쟁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죄를 이길 수 있는 계속적인 은혜의 공급으로 생명과 능력을 준다.

성경은 내재하는 죄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미 그 지배권을 잃었음을 선포한다. 간단히 말해서 신자는 은혜의 지배아래 있다. 그리고 불신자는 죄의 지배 아래 있다. 오웬의 성화 교리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죄의 지배는 무너진다.”는 토대 위에 세워진다. 그의 성화 교리에 있어서, 죄와 은혜라는 이 두 가지 지배력 안에 모든 인류를 가둔다. 모든 인류는 죄와 은혜라는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둘 다 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전히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잔존하여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죄는 신자 안에서 신자를 지배할 법적인 근거를 잃었으나, 그것은 여전히 살아서 그 힘과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계획을 세우고, 신자를 유혹하되, 열렬히, 광기(狂氣)를 가지고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조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배할 수 없는 신자를 지배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의 논문 ‘죄와 은혜의 지배’는 바로 내재하는 죄의 속성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내재하는 죄는 계획하고, 충동하여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 인격으로 의인화되어 묘사되고 있으며, 이것은 로마서를 기술한 바울의 관점에서 일치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들어오기 전 불신자를 지배하던 죄의 지배아래 있었으나, 그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는 순간 죄의 지배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 내면의 원리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은혜로운 틀(frame)이 구축되었다. 그리하여 신자는 죄를 범할 때, 불신자와 다르게 그 것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죄의 영향력과 힘은 여전히 신자에게 존재한다. 은혜와 죄 사이에는 항상 싸움이 있다. 은혜는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고 건강을 증진시키고 필요한 것이지만, 죄는 우리 영혼을 약화시키고 부패케 한다.

오웬은 바울이 설명한 롬 7:21을 근거로 내재하는 죄를 “한 법”이라고 하였다. 신자가 은혜의 지배아래 있으면서도 또한 동시에 신자 안에 잔존하는 죄의 세력, 곧 그것의 힘을 축소시키지도 않는다. 그것은 인간 안에 계속 존재해 온 어떤 내재적이고 습관적인 원리이다. 오웬도 바울처럼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곧 신자의 적인 죄를 인격과 같이 의인화하고 있다. 이 내재하는 죄의 본질은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반감(反感)이다. 싫어함(aversion) 또는 혐오, 진절머리 내는 것,  증오(憎惡) 마음이다. 이것은 반드시 신자가 자신 안에서 역사(役事)하지 못하도록 죽여야 할 원수이다. 왜냐하면 신자 안에 내재하는 그 죄는 반드신 신자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도록 파멸하도록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오웬에 의하면, “죄는 자신의 지배 자체를 빼앗겼을 뿐, 그 속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의 파렴치한 속성들 중, 하나는 죄는 항상 악(惡)을 지향하되, 그것도 최대치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죄의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아무리 작게 남아 있더라도, 죄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죄의 속성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지배권을 향한 그것의 열렬함은 죄의 속성으로써, 죄는 틈만 나면 그의 통치구조(frame)를 재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남겨두면 내가 죽는 것이고, 죄를 죽이면 내가 사는 것이다.

죄가 계속해서 약화되지 않고서는 죄는 죽지 않는다. 우리는 죄의 힘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죄의 요소와 죄의 활동을 주시하여야 한다. 이것이 신자의 의무이고,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우리의 육체를 죽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것을 할 수 없다. 이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in) 또는 성령에 의해서(by)서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세력과 치세는 성령에 의해서 약화되고 손상을 받아 마침내는 멸망 받고 만다.

 

(1)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좋지 않은 습관적 요소, 성질, 행동 등을 뽑아 버리시고, 정반대의 마음을 주시고 좋은 습관, 요소, 행동 등을 심어 주신다. 육체의 욕심을 갖지 않는 것이 죄를 죽이는 일이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죄를 죽이는 것이다.

 

(2) 성령께서는 죄를 죽이는 사역을 그의 은혜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공급하고 지원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도우시는 힘으로 실천적으로 죄를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도와주시는 은혜를 따라 부지런히 주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한다. 그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갈망하는 것을 주신다.

 

(3) 우리를 지도하시고 도와주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박멸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죄를 죽이는 사명을 또한 주셨다. 일반적인 훈련을 통해서 감당하는 우리의 의무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죄를 죽이기 위해서 용의주도하게 계획된 속에서(in) 또는 계회에 의해서(by) 각각의 독특한 경우에 알맞게 우리는 대처하고 적용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이 사역의 목적을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들 가운데 성취하신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이러한 죄 죽임의 의무를 성취케 한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고,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고, 일치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가 우리에게 유효하여 죄 죽임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2. 은혜 언약의 핵심 :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

                              

오웬의 언약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기초가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오웬의 생각은 엄격하게 칼빈주의적이며, 동시에 청교도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라는 틀 속에서 구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언약적 관계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들어간다. "이제 이 언약은 진지한 고려 가운데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아브라함의 씨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오직 한 씨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언약을 받게 된다. 바로 그리스도를 향해 언약의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 연합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이 연합은 신자에게 모든 유익을 가져오는 통로이다. 다른 청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오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교통을 위한 기초이다. 그것은 그분의 인성에 성도가 동참함으로써 얻는 구속의 효과이며, 나머지 하나는 바로 성화이다. 즉 오웬은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칭의와 성화를 밀접하게 연관시키면서 동시에 구별한다. 그러므로 오웬에 있어서,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자의 구속과 성화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과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신 성육신 사건 속에서 발생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은혜언약 안에 거하는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의 모든 효과가 그에게 붙어있는 신자에게 전달되고, 그리스도께 있는 하나님의 형상(거룩함과 은혜)도 신자의 것이 되는 것이다.

 

3. 성화의 목표 :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우리의 전본성(全本性-whole nature)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으로 지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다. 그는 초자연적인 생명(Supernatural Life)의 소유자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향해(to God) 살아드리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은 손상을 입었고, 그리고 그것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우리 영혼의 어떠한 하나의 능력이(one power) 소멸된 것이 아니고, 한 부분(part)이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며, 기능이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본성(whole nature)을 잃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말한다.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형상은 말할 수 없는 손상을 입게 되어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이 전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외부적인 도움이 없다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복음을 주셨다. 세상에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의 공로를 죄인들에게 덕 입게 하셔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다. 이러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말미암는 중생과 성화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게 하셨다. 오웬에게 있어서 성화의 본질은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복원하는 것, 곧 재창조의 사역이다.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회복이다.

 

4. 성화의 과정

                                                                

오웬은 “성령론”에서 성화를 씨에 비유한다. 오웬에게 있어서 중생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인 반면에 성화는 신적인 사역인 동시에 여기에 순종하는 인간적인 반응을 요하는 인간적인 사역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화의 주체는 성령이시오, 인간은 그분에게 피조물로서 마땅히 드려야할 순종을 드린다는 의미에서 인간적인 사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과 협력하여 무엇을 이루어 간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성화는 하나님의 영의 직접적인 사역이다(Sanctification is an immediate work the Spirit of God)’라고 그는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께 마땅히 순종해야 하며, 성화는 그 순종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구원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인간의 순종이 결코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다.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순종이 결코 공로가 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으로 반응하는 선한 행위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이 개혁주의 성화론의 놀라운 신비이다.

 

5. 신자의 의무 : ‘죄 죽인다’는 의무

                                                

성화는 계속적인 의무 수행을 필요로 한다. 의무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또한 성도들에게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책임 전체를 말한다. 사람의 의무와 성도의 의무는 동일하다. 그러나 이러한 의무를 순종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성도뿐이다.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이 의무는 성도의 새로운 본성과 일치하며, 성령의 도움 없이는 실천될 수 없는 것으로써, 반드시 믿음으로만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은 신분의 자유와 내적 자유를 동시에 준다. 이로써 영혼 위에 역사하던 죄의 권세나 영혼 안에 역사하는 죄의 권세는 모두 파괴된다. 내재하는 죄는 완전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영광의 단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성경과 오웬이 동시에 주장하는 바이다. 내재하는 죄가 여전히 한 법으로써 그 내부에서 역사하고 있는 신자의 실존이 그에게 죄 죽임(고행, 굴욕-Mortification)이라는 중대한 의무를 요구한다. 그러나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이 이미 신자에게 죄의 지배를 파괴하고 자유를 주었다는 사실이며, 이 사실이 신자로 하여금 그 의무를 자유롭고 담대하게 이행하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한다.

오웬은 우리에게 신자가 어떻게 성화를 위한 삶의 지침으로 ‘죄 죽이기’를 말한다. 그는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에서 이 교리를 이끌어 낸다. 그리고 신자는 일평생 죄를 죽이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아한다고 말한다.

오웬이 죄를 ‘죽인다’는 말은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서 죄가 역사하지 못하도록 그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죄의 세력이 신자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죄를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죄 죽임의 필요성에 대해 오웬은 매우 강하게 말하고 있다. “이 죄 죽임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은혜는 고갈되고 욕망은 충만해지며 마음의 구조는 점점 더 악해진다. 주님은 이런 상태가 어떤 절망적이고도 두려운 일들을 일으키는지 잘 알고 계신다. 죄 죽임을 무시함으로써, 죄가 거대한 승리를 거둔 곳마다 영혼의 틀은 파괴된다.(시 31:10) 그리고 인간을 약하게 하고 아프게 하며 죽게 만든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고개 들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연약한 피조물이 고난과 실패와 상처 속에서 그들 자신을 일으켜 활발한 대적을 할 수 없을 때, 그들은 죄의 속임으로 인한 굳은 마음 이외에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고 그 결과 그들의 영혼은 피 흘리며 죽어갈 것이다. 태만(怠慢)에서 오는 이러한 일은 정말 슬픈 일이다.

신자는 죄의 정체와 그것의 전략을 파악하고, 죄가 신자가 마땅히 수행해야할 영적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기 위한 노력들을 무너뜨리려 침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죄가 신자 안에서 역사하지 못하고 죽어있는 증거이다. 이러한 일은 오직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죄를 죽이는 일이 가능하도록 신자 안에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일하심에 신자의 순종이 뒤따라야 한다. 신자는 총체적인 순종 곧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방편들 - 기도, 말씀, 묵상, 하나님과의 교제(사귐) 등 -을 부지런히 활용하여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피 흘리기까지 자신과 싸워야 한다. 이 싸움에서 승리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어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통’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Ⅵ. 하나님의 은혜와 신자의 의무와의 관계

 

성도는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이고 의 앞에서 사는 사람이고 성화 앞에서 사는 사람이다. 성화는 은혜의 습관을 수반하는 능력(power)이 있고, 은혜의 습관을 행하려는 경향과 성질도 가지고 있다. 본질상 우리는 영적인 일을 수행할 ‘힘이 없으나’ 중생(regeneration)의 은혜와 성화(sanctification)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해 살아드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우리는 부여받는다.

‘성화는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에 의하여 우리 속에 일어나는 일’이다. 성화에 대한 우리의 의무(duty)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셨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약속을 주셨다. 명령이란 약속을 위한 어떤 여지가 없는 것이고, 약속이란 명령의 권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거룩하게 되는 일이 우리의 의무라면 여기에 은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거룩하게 되는 일이 은혜의 결과라면 거기에는 의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쟁은 ‘육체적 지혜’의 산물이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우리에게 다른 것을 가르친다. 실로 성화에 있어서 은혜와 행함은 상반되는 것이다. 즉, 모순이란 말이다. “만일 성화가 행함으로 된 것이라면 은혜는 없는 것이고, 만일 성화가 은혜로 되었다면 행함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의무와 하나님의 은혜는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점이 없다. 성화를 위해서 우리의 의무와 하나님의 은혜는 상호 필요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의 의무'를 행할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의무를 이행하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거부하는 자는 곧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는 자요, 결국 성경 전체를 거부하는 자이다.

어떤 이들은 성령의 약속된 사역을 이유로 해서 스스로 나태함과 소홀함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성령의 약속에 무관심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필수적인 의무는 일치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 손을 가지고는 온전히 일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성령의 은혜로우신 역사에 우리의 의무(duty)가 종속되어야만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단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탁월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 드물고 우리들 자신도 그렇다. 하나님은 부지런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순종이 그토록 중요한데 사람들은 태만하고 나태에 잠겨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도와주려고 하시다가도 저들의 행동을 보고 오히려 미워하시게 된다.

만일 우리 안에 모든 은혜들, 즉 모든 은혜의 정도들과 결과들이 성령과 그의 뜻에 기인한다면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자신의 노력과 성실한 것은 소용없다. 더 거룩해져야 함과 순종의 의무들을 수행하기 위해 수고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노력할 것을 명백히 의도한 성경의 모든 명령과 경고와 약속과 권고들은 어떤 목적으로 주어진 것인가? 오웬은 이렇게 스스로 예상하는 반론을 제기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주어지지 않은 영적인 선함이 우리들 안에 어느 정도라도 있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은혜를 무너뜨리는 행동이다.

성령께서는 사람이 일하는 곳에서 역사하시고 사람이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곳에서는 성령께서도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신다. 은혜를 주시는 정도(degrees)는 모든 신자에게 각기 독특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신자들은 그들의 의무들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과 권능을 공급받는다. 은혜와 거룩함의 향상은 대부분 신자의 의무수행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무를 나태하고 소홀하게 해도 된다는 것을 성령의 유효한 사역으로 입증하려는 것은 야만적인 무지(無知)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한 방편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의무의 한 방편으로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in) 역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통하여(by)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의무는 하나님의 명령들을 열심히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들을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또한 성령의 사역인 것이다.

그러면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의무수행을 위해 힘쓰는 모습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변화되지 아니하는가? 그리고 그들의 거룩함이 향상되지 아니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오웬의 대답은 분명하다. 그는 예수님의 중보기도 가운데 “나의 영광을 보게 하시기를”(요 17:24) 주석하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졌다고 말하는 자들 중에도 그분의 영광을 이해하고 그분의 형상(likeness)으로 변화하는 자는 소수뿐이다. 단지 그리스도의 행동을 본받음으로써는 아무도 그분과 같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만이 믿는 자를 그리스도와 같이 만들 힘을 가지고 있다.

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깊이 있는 영적 생활의 체험을 경험하는가?’는 그의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그분을 얼마나 생각하고,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비례한다(갈 2:20). 우리가 참신자라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영적으로 다시 세워진 우리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역사하사 우리가 그 명령을 이행하도록 도우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변화산상에서 제자들처럼 압도되고 만다.

이처럼 성화의 과정이 우리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한 은혜의 체험에 결정적으로 관련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성경의 단순한 지식으로는 삶이 변화되거나 거룩함의 향상이 따르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성경에서 얻는 단편적인 지식과 같은 단순한 개념으로 만족한다면 그런 개념에는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성화에 있어서 은혜의 체험과 우리의 의무를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은혜의 체험

 

성도의 성화에 있어서 체험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오웬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령한 욕구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가?’라고 질문한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너무나 실제적인 것이어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교회를 구속(救贖)하시려고 행하시고 고난 받으셨던 일이 마치 우리가 직접 행하고 고난 받았던 것처럼 여겨진다. 사도바울은 교회를 자신에게 주신 것과 양자(兩者)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진 것을 큰 비밀로 묘사한다(엡 5:23). 그러나 그것이 비밀이라고 해도 우리는 각 신자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 2:16)라고 말 할 수 있는 이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오웬은 은혜 체험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성령께서는 신자들에게 믿음의 진리와 실제, 그리고 탁월함을 경험하게 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경험(experience)이란 것은 은혜로운 양식(food)이다. 그러므로 경험은 성도를 성장시키고 강화시킨다. 믿음으로 얻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믿음의 맛(taste)이고, 이러한 믿음의 맛은 성도를 무게 있게 하고 키를 크게 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약한 교회를 기르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가 그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경험하도록 하신다.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그가 믿는 것들의 실제적이고 능력 있는 특별한 경험들에 의해서 그의 믿음이 성장하고 강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영적이며 지각할 수 있는 실제적이며 능력 있는 경험을 주신다.

이 체험은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는 사역과 더불어 교회에 주신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성령은 메마르고 열매를 맺지 못하고, 타서 갈라진 땅과 같은 인간의 심령에 부어지심으로 사람의 심령이 샘이 되게 하시며 거룩하고 의로운 열매들을 맺게 하신다는 것이다(히 6:7). 이와 같이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도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신다.”(시 72:6) 선하신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물들과 새롭게 하시는 소낙비를 항상 주신다.

물론 초대교회의 기초를 놓는 데 필요했던 성령의 특별한 권능의 발휘가 그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의 전체적인 은혜의 역사는 오늘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가운데서 오순절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수행되고 있으며, 교회를 가르치는데 필요한 성령의 은사 역시 계속해서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엡 4:10이하).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인 것이다.

오웬은 ‘때때로 참된 신자들은 이생에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 발견되는 기쁨을 조금은 경험한다.’고 말한다. 일단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면, 믿는 자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기까지는 항상 들떠 있을 것이다. 이생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믿음으로 볼 수 있다. 성경과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는,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게 하여 그것은 그들의 영혼을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 채울 정도이다. 이런 경험은 흔치 않은데 그것은 우리의 나태와 신령한 빛의 결핍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는 일에 열심을 내면 영광의 서광은 우리 영혼에 보다 자주 비춰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신령한 참 축복에 관심도 없이 지극히 분별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주 그리스도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가져다주게 하신 거룩한 영적 상쾌함을 알지 못한다. 그런 축복에는 영적 평화, 신선한 위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복된 확신이 포함된다. 이런 체험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는 무정하고 생명이 없고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이 영적 축복을 누린다는 약속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늘의 영원한 영광에 관한 약속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영적 신선함을 주는 수단들이 있음으로 해서 그분과 함께 즐기게 된다(계 3:20). ‘그런 축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봄으로써’ 이다.(벧전 1:9,10)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 안에서 복음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려는 노력을 포기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알 수도 있었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

성도의 영적 체험에는 늘 은혜로우신 성령께서 찾아오시는 체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에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떠나가시는 체험을 하게 된다. 오웬은 이 체험도 놓치지 않고 설명한다. 우리의 마음이 영적 본분을 다함에 있어 점점 냉랭해지고 생기가 없게 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잠시 우리를 떠나신 것이 틀림없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살펴보면, 성령은 어떤 사람들로부터 떠나신다(삼상 16:14). 성령의 떠나심은 전체적(total)이거나 부분적(partial)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았고, 그 은사들이 계발되어졌으며 또한 확신 가운데 복음을 소유해왔고, 많은 직무들을 행해왔다. 그러나 그가 시험에 빠져들게 되고 자신의 정욕에 정복당하게 되고 자신이 시작했던 선한 일들을 포기하고 어리석음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성령은 완전히 떠나신다. 성령은 그들을 포기하시며 그들 자신의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두신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은사들은 고갈되며 시들게 된다. 그들의 빛은 사라지며 그들은 미래에 대한 꿈(vision)대신에 어두움을 가지게 된다. 이와 같은 경우는 참으로 비참할 때 일어난다. 만일 그들이 은혜의 성령에게 분노를 더하여 성령의 전체적인 일에 경멸을 더한다면 그들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히 6:4,6; 10:26).

성도로부터도 성령께서는 떠나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부분적이며, 일시적이다. 왜냐하면 은혜의 언약 안에서 성령이 성도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성령께서 성도들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결코 떠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그 약속들이 성경에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사 59:21; 렘 31:33; 32:39,40; 겔11:19).

성령께서 하나님의 은혜와 조명, 위로의 크기와 이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효과 면에 있어서 얼마동안은 이러한 사역을 중지하실 수도 있다. 성령은 얼마 동안은 그의 백성을 돌보지 않으시며 내버려 두실 수도 있다. 성도는 영적 고갈과 심한 연약함에 내버려질 수 있다. 이때부터 성도들은 자신들이 철저히 내버려지고 기억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사 40:27; 54:7). 그러나 이와 같이 성도로부터 성령은 절대적으로나 완전히 결단코 떠나지 않으신다.

 

1) 기 도

오웬은 『성령론』부록 제1편에서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기도의 의무는 성령의 사역과 분리될 수 없다. 성령은 우리들 안에 있는 모든 은혜의 조성자이시고, 근원이시며 유일의 원인이시다. 하나님은 ‘간구의 영’(a Spiritual of Supplication)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들 안에 기도의 의무(duty)를 감당할 수 있는 은혜스러운 성향을 주셔서 영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기도하게 하시며, 기도의 능력도 주신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communication)을 하게 하시고, 특별히 기도의 방법(way)을 통해, 기도의 훈련(exercise)을 통해 모든 성령의 은혜를 주신다. 우리는 이 약속의 성취를 이미 받았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Abba Father)’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느니라”(갈 4:6; 요1:12; 딤후1:7; 롬8:15).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도 우리를 연약함을 아시고, 기도하신다.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도 기도 할 수 있고, 또한 기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기도할 마음을 주신다.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이 없도록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주셔서 기도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우리의 부패한 본성, 우리의 어두워진 총명, 심술궂은 우리의 의지, 영적인 것들을 싫어하는 싫증을 고칠 수 있는 것은 기도이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죄를 모두 옮겨 주시고, 날마다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새롭게 하여 주신다.

인간의 본성은 소경이기 때문에(nature is blind) 이러한 눈을 가지고서는 죄를 죄로 보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만에 사로잡혀 있고, 어리석고, 죄에 대해 무감각하고, 죄를 죄인지 모르는 채 인사불성(insensible)으로 살아간다. 기도할 때 우리는 마음속에 내재하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은혜와 성화와 영적인 특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기도할 때 우리는 일시적인 것에 대해, 현세에 대해 가지던 관심이 바꾸어진다.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기도를 통하여 “비애와 경건한 슬픔”을 가지게 하시어 간절히 간구하게 하신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뜨거움과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마음이 커져서 때로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웃에게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도우실 뿐 아니라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롬 8:23,27). 그러므로 성도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여 항상 기도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마음속에서 부터 뜨거운 마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오르고 커질 때 그 기도는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전 심령이 기도의 문제로 인하여 기도의 틀(frame)이 짜여 있어야 하고, 그 속에 들어가 기도에 전념해야 하며, 언제나 기도로 육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의무를 계속해서 잘 감당하겠다고 하는 뜨거운 마음의 결심을 해야 한다. 우리의 의무는 기도하는 것이다.

오웬은 성도들이 기도할 것을 간절히 촉구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런데도 어리석게 기도에 게으른 사람은 누구인가? 회개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렇게 하는 사람은 성령을 얼마나 슬프시게 하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심령은 얼마나 손상을 당하는 것인가! 우리가 날마다 기도해야 할 의무에 게으를 수 있단 말인가? 성령의 은혜로운 호의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기도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육적으로만 살아갈 수 있을까? 아,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사람들은 기도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줄 모른다. 심령으로 속사람이 기쁨으로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줄 모른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오늘날은 특별히 유혹이 많고 위험이 도처에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기도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세상적인 말은 적게 하고 기도를 더 많이 한다면 모든 일이 더욱 잘 되어질 것이다.

기도야말로 하나님이 성도의 성화를 위해 주신 방편이다. 마치 장인(匠人)이 그의 직업의 기술을 연마해야 하듯이, 우리는 믿는 자들을 단련시킬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방도들을 사용해야 한다. 이 방도 중 첫째가는 것은 열심 있는 기도이다. 모세처럼 하나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라(출33장). 바울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라고 기도해야한다.

성화의 방법은 학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 가운데 기도를 통해서 된다고 할 수 있다. 성화는 은혜의 성령과 간구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기도할 수 있는 신자는 기도를 함으로, 그리고 성화의 성령이 성도들 가운데 역사함으로 성도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계속 지원해 주시며 온전하게 되시기를 원하신다. 만일 우리가 지혜롭게 기도를 통하여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들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에 의한 사역에 대해서 대단히 많이 이해하는 것이다.

 

2) 묵 상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은혜의 보좌에 계신 분이시다. 우리는 중재자이시고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는 은혜의 보좌에서 주 그리스도의 효과적인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훈련되어야 한다. 오웬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함으로써 얻는 유익을 그의 최후의 저술인 『주님 영광에 대한 묵상이 신자에게 주는 유익/위로』(1684)에서 밝혀주고 있다. 그는 “만약 우리의 장래 행복이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 있으면서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에 대한 준비로써 그 영광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서문에서 제안한다. 따라서 성경 각권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해 기쁨을 가지고 묵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천상에서 그 영광을 보고자 하는 참된 소망을 갖지 못할 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끊임없이 묵상함으로 비롯되는 유익들로는

① 우리가 하늘나라에 적합한 자로 지어질 것이다. 우리의 현재 영광에 대한 지식은 장래의 영광을 알기 위한 준비이다.

②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참된 견해는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되기까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후 3:18).

③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규칙적인 묵상은 우리 영혼에 안식과 만족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이다(롬 8:6).

④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영원한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그분을 봄으로써, 그분처럼 될 것이다(살전 4:17; 요17:24; 요일3:2)

 

‘평강과 위로와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즐기는 그런 축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으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봄’으로써이다.(벧전 1:9,10) 심지어 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심도 있는 영적 생활의 체험을 갖느냐’하는 것도  그의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고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비례하는 것이다(갈 2:20). 오웬은 묵상의 유익과 성화생활의 비결로서의 묵상을 소개하면서 묵상의 의무를 수행할 것을 권면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얻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에 관해 자주 묵상해야 한다.

 

3)죄 죽임(mortification)과 은혜 살림(vivification)

오웬의 죄 죽임의 교리는 종교개혁자 칼빈의 죄 죽임과 은혜살림의 교리를 이어받아 더욱 견고히 했다. 칼빈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이 은혜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轉嫁)받는 것 곧 법정적 칭의(稱義)와 둘째, 우리의 전인(全人)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사역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그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정적인 의(義)의 전가에 대한 신자의 마땅한 반응은 회개(repentance)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 회개는 실질적으로 성화와 동의어이다. 칼빈의 회개(悔改)에 대해 정의하기를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을 향하여 진실로 돌이키는 것, 그분께 대한 순전하고 열망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 돌이키는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우리 육신과 옛사람이 죽는 것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사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고 말한다.

이처럼 회개와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 죽임(mortification)과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바 '은혜를 살리는 것'(vivification)인데 이 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달려 있다.

죄 죽임(mortification)은 그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 짝이라고 할 수 있는 은혜살림(vivification)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 은혜살림은 거룩하고 헌신된 삶의 방식으로 살려고 하는 열망, 즉 거듭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은혜 살림은 하나님께 대한 거룩과 경건을 향한 갱신된 열망이며 태도이다.

죄를 죽이는 것은 곧 은혜를 살리는 것이다. 죄를 죽이는 일은 마음 안에 있는 죄를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활기차게 자라게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마음 안에 있는 죄는 항상 신자의 내면에 거하므로 우리는 항상 그것을 죽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온전하여 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죄 죽임의 필요성에 대해 오웬은 매우 강하게 말하고 있다. 성령께서 우리를 살피시고 온전하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의 성장을 방해할 요소를 제거시켜 주셨다고 하더라고, 만일 우리가 어떠한 죄든지 허락하고 거기에 빠져버린다고 하면 우리가 아무리 잘 성장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결국에는 전면적으로 부패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화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죄를 보는 견해에 개선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성도는 타고난 죄의 본질과 결과에 대해 알도록 힘써야 한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이 일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무들이 요구된다.

① 우리들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인 성경을 자세히 살피라. 성경을 통해서도 스스로의 일그러진 모습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타락한 채로 살다가 저주받은 채로 죽을 수밖에 없다.

② 자신의 타락된 상황과 관련된 성경의 증거를 이미 받은 사람은 그 증거를 통해 자신을 살핌으로써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한층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실로 그들은 거울 속에 비친 불결한 사람을 향하여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댈 것이다.

③ 하나님의 빛과 인도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즉,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힘과, 우리를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해 주는 그의 피 뿌림을 계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매일 우리 스스로를 더럽힌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매일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샘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완전히 불결하게 되어 버린다.

여기에 죄를 죽임의 당위가 있다(롬 8:13; 골3:5). 죄를 죽인다는 것은 부패한 본성의 모든 힘과 정력을 끊어버리고,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근절시킨다는 것이다. 죄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세력을 죽이고, 행동을 못하게 하여 그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그것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계속해서 항상 행하여야만 한다. 그래서 죄에 대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죄를 억제하고 죽이고 처형시키는 것이다. 아픔 없이는 죄를 죽이지 못한다. 오른 손을 자르고 오른 눈을 뽑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감정적 격렬함이 없이는 죄를 죽이지 못한다.

우리가 죄를 죽이는 일을 하지 않으면 죄가 마음을 어둡게 하고 육신의 정욕이 잡초처럼 자라게 된다. 신자는 날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을 죽이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삼아야 한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신자를 죽인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으로만 죄를 죽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죽이는 일의 주체는 참 신자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보존하시므로 죄를 죽이는 일은 성령에 대한 우리 신자의 순종의 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죽이는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기 위해 주시는 도움을 거부하는 것이다. 죄를 죽이기를 원하는 자가 기도하고 탄식하고 근심하며 구원을 갈망하지만 경건한 독서, 기도 생활, 하나님과의 묵상을 게을리 하면서 자기 생활 속에서 죄가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자 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태이다.

 

4) 성화의 대적 : 게으름

성도의 의무들을 행하는데 가장 큰 대적은 ‘게으름’과 ‘나태함’이다. 오웬은 대단히 많은 곳에서 이 성화의 대적을 지적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일에 게으르거나,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은혜받기 위한 훈련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의심할 것 없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패한 것이고 ‘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성화에 진전이 없다면 그 이유로는 세 단계의 ‘게으른 측면’이 있다.

첫째는 이미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교만하며 미련한 속임수로 자신을 속인다. 그리고 모든 본성과 복음적인 거룩한 임무를 파괴한다.

둘째로는 그들은 우리는 이미 거룩하게 되었으니 성화에 대한 열망함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셋째로는 성화를 반대하는 심령 속에는 피곤과 낙담이 일어난다. 사람들에게서 너무나 많이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발견한다. 성화를 반대하는 곳에는 부패와 유혹이 있고 세성의 일들만 있다. 이 사람들은 결국에는 세상에 항복하고 만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에 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높고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즐거워하다가도 오래지 않아 싫증을 내고 곧 그런 생각으로부터 돌아서 버린다. 그래서 영적 삶에 게으르고 나태한 영혼은 결코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과 같은(출애굽기 33장)’ 이런 영광의 체험을 얻지 못한다. 우리의 이러한 지독한 게으름으로 인해 하늘의 것들에 관해 묵상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너무도 잦은 것이다.

 

Ⅶ.결론 : 평가

 

종교개혁자 칼빈이 죄 죽임(mortification)과 은혜 살림(vivification)의 교리를 말하였고, 오웬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신학화 함으로써 신자의 삶에 빛을 던져 주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는 신앙 체험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신학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싱클레어 퍼거슨이 특별히 오웬의 신학에 이르기까지의 언약신학의 발전에 관하여 지적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언약신학이 16세기에는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였는데, 17세기에는 그것이 기독교 체험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었다.

오웬은 신앙체험을 신학화하는 탁월함에 있어서도 다른 청교도 신학자들과는 구별된다. 이 17세기의 체험 신학자 존 오웬이 『성령론』(1674)을 발표한지 약 70여년 후인 1747년에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앙 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을, 그 후로 또 약 70여년 후인 1810년대 초에는 구 프린스톤의 아키발드 알렉산더에 의해 Thoughts of Religious Experience가 출간되었다. 이 두 저서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본격적으로 다룬 몇 안 되는 걸작들이다.

오늘날 21세기 교회에 17세기 오웬의 신학은 적시성을 지니는가? 라는 질문에 답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하시며, 또 그 말씀을 대하는 인간들의 본성 또한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오웬이 인간의 마음을 분석하여 체험을 설명해준 그의 신학적 저작들은 오늘날에도 또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재천명되어야할 오웬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첫째, 회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강조

인간의 노력이 회심이나 성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오웬은 특히 신자의 중생과 회심을 강조한다. 중생이 없는 성화는 없기 때문이다. 성화에 있어서는 인본주의적인 알미니안, 백스테리안, 가톨릭과 가톨릭주의를 배격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령에 의한 사역임을 강조한다. 오늘날 교회가 신자의 중생과 회심에 대해 무관심 내지는 안일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오웬은 오늘날과 같은 많은 교회들에서 통용되는 천박한 회심의 견해에 대해서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은 청교도들, 특별히 오웬에게 있어서는 죄악된 것이며, 교회를 깨뜨리는 요소이다.

 

둘째, 성령의 은혜와 성화의 의무 강조

오늘날 교회들이 구원받은 이후의 삶인 성화에 대해 무지하거나 혹은 한쪽으로 치우친 가르침으로 인하여 균형을 잃었거나 혼돈 속에 있다. 오웬은 신자의 성화에 있어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에 의한 성화를 강조한다. 즉,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주도적인 사역을 강조한다. 은혜를 입어 중생한 신자는 하나님을 향해서(to God) 살도록 재창조함을 받았기에 그에게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성화에 있어 성령의 주도적인 은혜의 사역과 신자가 믿음의 순종으로 성화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화의 의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의무를 감당 할 수 있느냐’라고 하면 ‘전혀 없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셔야만 우리는 은혜를 따라 우리의 거룩한 의무를 수행할 수 있고, 여기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결의적인 행동이 있어야 이 일을 온전히 이루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인간 편의 노력이나 열심이 없는 사람이 회심이나 성화의 은혜에 참여할 수 없다. 오웬은 이 양자(兩者)의 균형을 이루어 개혁 신학의 백미를 보여주고 있다. 성화는 신적인 사역인 동시에 여기에 순종하는 인간적인 반응을 요하는 인간적인 사역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성화의 주체는 성령이시며, 인간은 그분에게 피조물로서 마땅히 드려야할 순종을 드린다는 의미에서 인간적인 사역이라는 것이다.

 

셋째, 성화에 있어서의 성화의 의무들을 수행함을 강조

오웬은 은혜체험과 신자의 의무, 둘 다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힘써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성화의 본보기가 되신다. 우리는 그를 닮아야 하고, 더욱 영적으로 은혜스러운 영향을 많이 받아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우리도 살고,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의무(the duty of faith)를 잘 감당해야 한다. 신자는 성화를 위한 의무들, 곧 ‘기도’와 ‘묵상’, 그리고 ‘죄 죽임(은혜 살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며, ‘게으름(나태함 혹은 태만)’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 오늘날처럼 신비주의적 영성이 기독교적인 진정한 영성인양 대두되는 시점에서 더 더욱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유산인 ‘실천적 영성’은 더 강력하게 요청된다.

 

넷째, 성화의 소극적 차원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강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신자들에게 ‘번영’을 축복으로 가르치고, 신자들은 ‘십자가가 없는 신앙생활’을 마치 축복인양 간증을 한다. 오늘날 신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많이 강조되고 가르쳐 져야할 부분이 있다면 ‘성화’ 관한 교리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성화’에 대해 무지하거나 혹은 잘못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성화를 마치 전무한 제로(zero)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쌓아가는 것처럼 인식되고 또 가르쳐지고 있다. 성경공부와 기도와 교회봉사를 통하여 성화의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성화는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를 죽이는 실천적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통’하게 된다. 이러한 신자의 삶은 이 시대의 교회가 회복해야만 할 사활이 걸린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성화에 대한 실존적 영적 전쟁(靈的戰爭)으로써의 인식은 이 시대의 기독교의 실패에 대한 바른 대안이 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종교개혁 이후로 가장 뛰어난 청교도 신학의 거장 존 오웬은 ‘성령론 신학자’였다. 그의 신학이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았으며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학문이다. 그러한 것에 관하여 가장 진지한 고민을 했던 청교도 오웬이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남겨 놓은 성령론의 중생과 회심 그리고 신자의 성화의 삶에 관한 촉구는 오늘날과 같은 혼돈의 시대에 신자의 삶에 나아가야할 길에 빛을 던져 주고 있다.

 

 

 

 

 

 

 

 

 

 

 

 

 

 

 

 

 

 

 

 

부 록

1. 청교도 세대구분

청교도 인물들

청교도 선구자들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 (Marsilius of Padua,

                      Marsiglio:1270-1342)

존 위클리프(John Wycliff,1324-1384)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1495-1536)

존 후퍼 (John Hooper,1495-1555) 

존 칼빈 (John Calvin,1509-1564) 

존 낙스 (John Knox,1513-1572) 

존 폭스 (John Foxe,1516-1587

 

청교도 1세대들

리처드 그린햄 (Richard Greenham,1531-1591)

에드워드 데링 (Edward Dering,1540-1576)

리차드 로저스 (Richard Rogers,1550-1620)

존 도드 (John Dod,1550-1645)

윌리엄 퍼킨스 (William Perkins,1558-1602) 

헨리 스미스 (Henry Smith,1560-1591) 

아서 힐더샘 (Arthur Hildersam,1563-1631) 

존 로저스 (John Rogers,1566-1636) 

 

청교도 2세대들

로버트 볼턴 (Robert Bolton,1572-1631)

윌리엄 구지 (William Gouge,1575-1653)

토마스 테일러 (Thomas Taylor,1576-1632)

윌리엄 아메스(William Ames,1576-1633)

리차드 십스 (Richard Sibbes,1577-1635) 

로버트 해리스 (Robert Harris,1578-1658) 

제레마이어 버로우즈 (Jeremiah  

                 Burroughs,1599-1646) 

 

청교도 3세대들

윌리암 브리지 (William Bridge,1600-1670)

토마스 굳윈 (Thomas Goodwin,1600-1679)

존 오웬 (John Owen,1616-1683)

토마스 맨톤 (Thomas Manton,1620-1677)

토마스 왓슨 (Thomas Watson,1620-1686추정)

스테판 챠녹 (Stephan Charnock,1628-1680)

존 번연 (John Bunyan,1628-1688)

 

청교도 후예들

요한 웨슬리 (John Wesley,1703-1791)

조지 휫필드 (George Whitefield,1714-1770)

윌리암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1759-1833)

로버트 맥체인 (Robert McCheyne,1813-1843)

존 라일 (John C. Ryle,1816-1900)

찰스 스펄젼 (Charles H. Spergeon,1834-1892)

로이드 존스 (Martin Lloyd-Jones,1899-1981)

 

미국의 청교도들

존 카튼 (John Cotton,1584-1652)

존 데이븐포트 (John Davenport,1597-1670)

토마스 쉐퍼드 (Thomas Shepard,1605-1649)

나다니엘 구킨 (Nathaniel Gookin,1656-1682)

조나단 에드워드 (Jonathan Edward,1703-1758)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David Brainerd,1718-1747)

윌리암 스프레이그 (William Sprague,1795-1876)

 

2. 존 오웬의 저작 중 번역 출간된 책들

1) 죄 죽이기(SFC출판부)                          

2) 죄와 유혹(은성)

3) 성도의 견인(생명의 말씀사)                     

4) 그리스도의 영광(지평서원)

5) 개혁주의 성령론(여수룬)                        

6)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생명의 말씀사)

7) 영적 사고방식(청교도신앙사)                    

8)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생명의말씀사)

9) 성령이 도우시는 기도(지평서원)                

10) 참된 믿음과 신앙의 특성들(생명의말씀사)

 

 

3. 존 오웬 전집 16권의 내용 분류

그의 전집은 영어로 된 신학서의 최대 보고이다. 오웬은 '청교도들의 다윗 왕'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전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당시의 도전과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책을 썼다. 그러나 그의 모든 글에는 힘과 일관된 사상이 있고, 항상 성경의 권위에 충실했다. 오웬의 가르침의 균형과 예리한 통찰에 있어 맞설 자가 없다는 것은 여러 실례로 증명될 수 있다. 예로써 『성령의 인격과 사역』(Th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Works, vol. 3), 『그리스도의 영광』(The Glory of Christ), 『죄 죽임』(The Mortification of sin, vol.6) 등이다. 그의 『양심의 자유』(Liberty of Conscience, vol.13)는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적실성이 있는 저서이다.

 

 

참 고 문 헌

 

Owen, John. The Works of John Owen. Ed. William H. Goold.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6.

『개혁주의 성령론』이근수 역. 서울: 여수룬.

『주님 영광에 대한 묵상이 신자에게 주는 유익/위로』조주석 역. 서울: 나침반.

『성도의 견인』서문 강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황을호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그리스도의 영광』 서울: 지평서원.

『죄 죽이기』서문 강 역. 서울: SFC.

『죄와 유혹』엄성옥 역. 서울: 은성.

『영적 사고방식』서문 강 역. 서울: 청교도 신앙사.

『성령이 도우시는 기도』. 박홍규 역, 서울: 지평서원.

『영적 사고방식』서문 강 역. 서울: 청교도 신앙사.

『청교도 사상』박영호 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원종천. 『칼빈과 청교도 영성』(서울: 하나, 1994).

김남준, 『죄와 은혜의 지배』(서울: 생명의말씀사, 2005).

김남준, 『은혜와 부패』(오웬의 시130편 주해를 설교, 묵상집) (서울 : 생명의말씀사, 2005).

김남준, 『청교도들의 마음지킴의 교리』

김남준, 『존 오웬과 나의 목회』(제4회 열린교회세미나) 2003.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 서문 강 역 (서울: 지평서원,1987).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서문 강 역 (서울: 지평서원, 1994).

장호익,『청교도 신학의 현대적 적용: 존 오웬의 신학사상과 실천목회』

김재성,개혁신학의 정수』 서울: 도서 출판 이레서원, 2003. 제8장 청교도 사상의 정수(Ⅱ) 참조.

김재성, 『현대 영성신학의 현상과 문제점』(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존 칼빈, 『기독교 강요 3권』 김종흡,신복윤,이종성,한철하 공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1)

박홍규,『존 오웬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John Owen's Trinitarian Understanding on the Atonement)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죽음의 죽음”(침례신학대학교)

Gerstner, John H.  The Rational Biblical Theology of Jonathan Edwards, vol.1. Powhatan, Virginia:

Berea Publications, 1991.

Furguson, Sinclair B. John Owen on the Christian Life.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7.

 

 

 

 

 

 

 

 

 

 

 

 

 

 

 

 

 

 

 

 

 

 

 

 

제9장 차영배 교수의 성령론 Ⅰ. 들어가는 말 몇 년 전부터 자연적 교회성장과 함께 새로운 목회방법이 한국교회에 도입되어 침체된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순복음 교회의 구역을 모델로 삼았다는 셀 목회가 그것이다. 늘 언제나 그래 왔듯이 모든 방법에는 장, 단점이 있다. 셀 목회 역시 헌신자 양성부재라는 피할 수 없는 숙제를 안게 되었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새롭게 시작되고 있는 것이 G12이다. 콜롬비아 MCI교회의 세자르 카스테라노스 목사로 시작된 G12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를 중심원리로 모든 사람이 12명의 제자를 삼아야 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G12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MCI 교회의 성령의 역사에는 예언가들(란디, 맥밀란)의 예언이 등장한다. 그리고 세자르 목사는 MCI 교회는 예언사역을 하는 교회라고 드러내 놓고 말한다. 성령에 대한 바른 고려도 없이 교회부흥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고, 선전하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성령론은 목회뿐만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의 생활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분야이다. 어떻게 성령 하나님과 사역을 이해하느냐에 따라 목회의 방향과 교회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차-바빙크로 잘 알려진 차영배총장(이후로 차교수로 칭함)은 성령론이라는 것으로 책을 쓴 적이 없다. 단지 몇몇 학자들의 성령에 관한 글을 비평한 것이 그분의 성령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짧은 단편에서 ‘차영배의 성령론’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조금은 무리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그 동안 신학지남에 쓴 글과 강의안을 엮어 경향문화사에서 ‘성령론’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 놓았다. 그나마 그것이 차교수의 유일한 성령론이라고 여겨진다. 1.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영속성 차교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연계 선상에서 즉, 구원사적 사건으로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사건은 단회성과 연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단회성이라고 증거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주님께서 약속하신 후, 또는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지 않고서는 성령이 내려올 수 없다(요 7:39)는 의미에서 성령강림은 ‘유일 독특한 사건’이다.

 

둘째, 예수님이 세우신 열 두 사도가 단회적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내린 성령강림은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그는 12사도를 제외된 120명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사도들과 함께 내린 성령강림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는 일로 단회적이다.

 

셋째, 사도들에게 모든 교회의 초석을 놓았다는 의미에서 ‘독특한 사건’이다. 베드로의 고백(마 16:16)은 교회를 세우는 고백이었다면, 성령강림으로 성령의 권능과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가 비로소 반석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넷째,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오순절 전이나 후에도 그와 같은 모양으로 강림하신 적이 없다는 것에서 단회적이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은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행 2:2-3).” 차교수는 1907년 평양 대 부흥에 장로교회 사기(史記)에 “성령이 급한 바람 같이 임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좀 과장된 것으로 여긴다. 설령 비슷한 현상은 있을지 몰라도 “바람소리”는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네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성령강림 사건의 단회성을 말한다. 그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은 엄연히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단회성에 근거하여 말해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때 사도들을 비롯한 120명은 결코 대표 원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은 120명이 우리의 대표로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따로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순절 임하신 성령은 계속해서 교회 안에서 역사 하셔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이 계속 역사 하느냐 곧 영속성(永續性)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는 성령강림의 영속성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성령이 계속 역사 하신다’는 것에 대한 설명부터 한다. 성령이 계속 역사 하신다는 말은 단번에 임하신 성령이 그대로 교회 안에 계속 계시면서 역사 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성령이 내린 성도들에게 내주(內住) 하셔서 아버지께로 갈 때에도, 하늘에서나 재림 때에도 영원토록 계신다는 말이다. 또 오순절에 성령이 계속 교회 안에 머문다는 것은 사도들이나 성도들의 수단을 통해서 함께 역사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단은 안수와 기도와 말씀의 증거이다. 이것은 간접적인 방법으로써,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직접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 속에 있는 성령님이 옮겨진 것도 아니다. 한번 오신 성령님은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은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고후 1:22)는 구절이 증거 한다. 이런 의미로 보아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사도들과 함께 하늘로 가셨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차교수는 사도들이 쓴 말씀과 더불어 성령으로 함께 하신다고 밖에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성령을 영원토록 보내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영속성과 관련된 것으로 차교수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첫째, 사도들에게 임한 성령님은 그들과 함께 올라 가셨기 때문에 계속 오실 수밖에 없다. 그는 성령님이 하늘로 가셨다가 다시 오신다는 것에 대해서 카이퍼도 몰랐다고 말한다. 그리고 서철원 교수가 한 말 ‘성령께서 세상에 오심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번에 오셨다’는 말에 대해서 단번에 오신 성령님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고 되묻는다. 만약 120명 속에, 교회당에, 사도들 속에, 그리고 신자들 속에게서 오늘날까지 성령이 나오는 것이라면 이것은 이단사상이라고 말한다. 사도들과 함께 오르신 동질의 성령님이 다시 오시는 이유는 단회적으로 세워진 초석 위에 그와 같은 동질의 건물을 세우기 위함이다. 그 누구도 사도들이 세운 초석을 떠나서 또 다른 건물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3:10). 그는 오순절에 임한 동질의 성령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결코 단회성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둘째,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이 절대적인 단회성이기 때문에 그 분의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오순절의 동질의 성령님이 계속해서 부어져야 한다. 그는 이것은 승천하신 예수님이 성령을 항상 보내신다는 교리에도 맞는 것이라고 부연하여 설명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항상 영원히 나오신다.”(Filioque) 셋째, 오순절의 성령이 다시 오셔야만 하는 목적은 전적으로 부패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려면 오순절에 임한 동질의 성령님이 오셔야만 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매한가지로 부패되었다. 오순절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가 전적으로 필요한 시대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 비추어 오순절 성령강림은 예수님의 구속사건과 사도들과 관련하여 단회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구속을 적용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영속적으로 오셔야만 하는 영속성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순절에 임한 성령님은 지금도 동질의 성령님으로 오셔야만 한다. 2. 성령 받음에 대해서 오순절에 120명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리고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행 2:38)’. 성경에서 ‘성령을 받는다’는 표현은 구약에는 거의 없고, 다만 하나님의 신이 임하신 다든가(삼상 10:10), 감동하신다(삼상 11:6)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구약에는 성령이 임하셔서 잠정적으로 계시지만, 신약에는 항상 내주 하시는 영으로써 성령을 받는다고 말한다. 또 신약에서 성령을 받는다고 할 때 오순절에 임한 동질의 영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을 받기 이전에도 감화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역사로 사도들이 예수를 영접할 수 있었다. 차 교수는 만약 이것을 부인하면 오순절 이전에는 물론 구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성령의 역사가 없고, 믿음도 없고, 칭의도 없다는 것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제임스 던이 오순절 성령 받음과 동시에 믿음이 시작됐다는 것은 잘못된 견해로, 그가 오늘날까지 비판을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말한다. ‘예수를 믿는 그 시간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세례 받기 전에는 믿음이 없었다는 말이 될 수 있다. ‘예수 믿으면 중생하고,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넓은 의미의 중생으로 보면 옳은 주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생을 좁은 의미로 보면 잘못된 것이 된다. 성령을 받기 이전에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하면 예수 믿게 된다.’고 해야 옳고, 믿으면 중생한다는 것은 넓은 의미로 가능하다. 그는 넓은 의미의 중생은 곧 성령세례로 본다. 그는 ‘중생하면 믿게 되고, 믿음으로 성령 세례 곧 넓은 의미의 중생의 은혜를 입는다.’고 해야만 성경대로 바로 말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혹 ‘성령을 받을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행 8장의 사마리아들에 비추어 보면 빌립의 전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도들이 안수하여 성령 받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다. 이미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에게 성령이 내린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복음의 말씀과 더불어 성령의 감화 또는 감동 정도가 아니라, 마술사 시몬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역사한 오순절의 성령이었다. 신약에서 성령을 받음은 곧 충만함을 입는다. 충만과 지속적 내주와 직결되는 것이 곧 성령을 받는다는 말이다(갈 3:2; 요 7:39). 그는 ‘성령 받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에 대해서도 언급하기를 이러한 표현은 성경에 없다고 단정한다. 그는 갈라디아 4:6절의 내용은 ‘아들인고로 성령을 받는다.’고 말하고, 로마서 8:9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없다며, 법적으로 양자가 아니면 양자의 영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갈라디아 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 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세상은 성령을 받지 못하지만, 자녀가 부르짖을 때는 천부께서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눅 11:9-13). 기도하는 자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 자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자녀의 명분을 얻는다. 이러한 권리를 가진 자가 양자의 영을 받으면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다. 차교수는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신약에서 오순절의 동질의 성령을 받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받는다는 말이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보면, 성경의 사실과 다르다고 본다. 더구나 예수님을 영접하자마자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그럴 경우도 있지만, 결코 일반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3. 요한의 세례와 성령세례 1) 요한의 세례 세례는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할례로부터 시작되었다. 할례는 믿음으로 된 의(롬 4:11)와 마음의 할례(신 10:16; 렘 4:4)를 인(印)치는 표로써 주어진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칭의와 또는 죄의 용서와 중생 또는 성결에 대한 인침이다. 하나님은 할례 대신에 세례를 베풀게 하셨다. 요한의 세례는 요한 스스로 독자적으로 시행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며, 누구든지 이것을 거역하는 것은 의의 도를 저버리는 것과 같다(마 21:25, 32). 요한은 세례를 베풀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독사의 자식과 같다고 말하였다. 요한의 세례도 단순히 회개케 하는데 그치지 않고 죄 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였다. 세례는 요한만 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례를 주었다(요 4:2).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제자들이 준 세례)의 세례에는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예수님도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고, 또 요한의 세례를 받은 제자들을 세례를 다시 줌 없이 그의 제자로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지만 후에 다시 세례를 받지 않았다(행 18:25). 마 28:19절의 대사명도 새로운 세례를 명하신 것이 아니다. 이 세례는 제자로 삼는 표로써 세례를 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모든 민족으로 나아가라는 것뿐이다. 요한의 세례와 기독교의 세례는 수단과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2) 성령의 세례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 차교수는 성령의 세례를 정의하기를 ‘성령 속에 잠기어 성령 자신으로 말미암아 기름 붓듯, 혹은 물 붓듯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성령세례는 요한의 물세례와 같이 제자 됨, 죄 사함, 옛 사람의 죽음, 성결의 역사 등을 일으킨다. 하지만 다른 점은 성령의 세례는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요한의 세례와 성령세례는 본질적으로 차이는 없지만, 사람이 주는 것과 그리스도가 주는 것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행 8장에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저들이 물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후에 사도들로 말미암아 내린 성령의 임함은 성령세례이며, 성령 충만 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은 서로 별개가 아니다. 그 동안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구원의 서정상 다르다고 가르쳐 온 것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다만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이 다른 것은 성령세례는 한번 일어나는 일이지만, 성령 충만은 계속해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와 기독교의 세례와 성령세례는 하나이다(엡 4:5). 단지 시세자와 수단이 다르므로 즉, 인간이 주는 것과 예수님이 주는 것 또는 물과 성령으로 주는 것이 다르므로 구별은 해야 한다. 헤르만 바빙크도 이 세례들을 분리시킬 수 없으나 구별은 해야 한다고 하였다. 4.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 차교수는 ‘예수님을 믿으면 곧 성령을 받는 것이고, 성령을 받았으면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음을 말하면서 거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얽혀있다고 글을 시작한다. 이 말들은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은 것으로 보는 것과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 구별되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 먼저, 중생에 대한 이해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중생하면 예수님을 믿게 된다.’라는 것은 중생을 좁은 의미로 본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칼빈의 중생관은 넓은 의미의 중생관으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중생관 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사도들의 경우로 보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고백은 거듭난 후의 고백으로 본다. 이것은 칼빈의 신앙관과 일치하는데, 그가 말하는 “믿음”은 오늘날 “거듭남”이고, 그의 “중생”은 우리의 “회개” 또는 “성령의 세례나 충만”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또한 ‘중생은 한 생명의 출생이다. 따라서 출생한 후에 또 하나의 출생이 추후에 공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을 또 다시 받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중생하는 기간이 있었는데, 출생이면서 어떻게 기간을 가질 수 있느냐고 서철원 교수를 비판한다. 그는 거듭 바빙크의 중생관을 말하면서 바빙크는 한 생명의 출생이나 새로운 피조적 생명이 들어오는 것으로 중생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니고데모의 질문을 살펴보아도 중생을 출생이라고 볼 수 없고, 성경 어디에도 새로운 피조적 생명이 들어온다거나, 이러한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이 없다고 말한다. 사도바울의 예를 보아도 그가 언제 즉, 다메섹 도상 3일쯤의 기간 어느 시점에 중생했는지 우리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개혁신학에서 중생시기(시점)의 불확실성의 교리를 내세운다. 그는 디도서 3:5절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우리에게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신 넓은 의미로 중생으로 보고 성령세례로 간주한다. 행 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여기에서 ‘죄 사함을 받으라’와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이에 “kai”(그리하면, 그리고)는 연속적인 연결사이다. 그러나 문제는 연속적인 사건이라고 해서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차교수의 말이다.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와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은 반드시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시차가 있을 수도 있다. 더구나 회개하고 구속함을 받는다는 동사는 과거능동인데 이것이 명령일 때는 단순현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는 동사는 미래형이다. 이러한 예로 행 8:16절을 들 수 있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분명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세례 받는 사건과 성령을 받는 사실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다. 존 스토트는 이 사건을 비정상적인 사건으로 단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 차교수는 존 스토트의 이러한 판단에 대해서 자신의 주장과 모순되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고 말을 하였다.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와 성령 세례는 반드시 동시에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고, 또 그렇지도 않았다는 것이 더 성경적이고,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존 스토트가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건으로 고넬료의 가정을 드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고넬료의 경우도 엄밀한 의미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완전히 동시에 일어난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 외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성령의 세례는 넓은 의미의 중생과 같은 것을 볼 수 있으나, 좁은 의미의 중생과는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과의 관계는 제자들과 사도바울, 사마리아 교인들과 고넬료, 에베소의 12제자들 등은 첫 충만이 곧 성령의 세례라고 말한다. 그는 어떤 사람(Pache)은 행 1:4-5절 이후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없다는 주장을 가지고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다르게 말하는데 그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한다. 그러한 견해는 서신에 없다고 교리화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성경 완전영감에 어긋나며, 이단적 사고방식에 가깝다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엡 5:18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구절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을 전제한 말씀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아직도 충만함을 입은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과 동일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서신에 명령이 없다고 해서 우리에게 아무 의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라고 일축시킨다. 5. 성령세례의 조건 차교수는 조건과 관련하여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따라 알미니안주의와 개혁신학으로 판가름 난다고 말한다. 오순절 계통에서는 성령세례의 조건을 믿음, 회개, 기도, 순종, 전적의지, 세례, 죄 사함 들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은 사도바울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갈 3:2-14). 기도는 믿음의 발로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도도 못한다. 순종은 성령을 받은 후에 일어나는 모습이다. 순종하는 것은 현재이고, 성령을 받는 것은 그 전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회개요, 믿으면 곧 죄 사함을 받게 된다. 이것을 가시적으로 인치기 위해 세례를 받는다. 전적인 신뢰는 성령을 받아야 참으로 의뢰하게 된다. 그 전에는 육신이 마음의 원대로 따르지 않는다. 베드로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가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했지만 세 번 부인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이 조건이다. 갈라디아 3: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보셨다고 한다.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고, 또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 일은 모두 성령으로 시작하는 일이다(갈 3:3). 성령으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성령으로 마쳐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믿음으로 받는다. 믿음은 성령을 받는 수단이다. 물론 성령을 받으면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성령을 받기 전에도 믿음이 있었다. 이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더욱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Ⅱ.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차영배의 성령론은 몇 가지 점에서 좋은 평가를 내려야 할 것 같다.

 

첫째는 그 동안 중생 곧 성령세례라는 도식으로 인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건과 에베소 사건에 대해 넓은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학계에서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둘째, 중생에 대해서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에 대한 견해와 성령세례에 대해서 시차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성경의 역사적인 사건을 두고 하는 것이어서 퍽 인상적이다. 또한 그것이 구원의 서정이라는 도식에 매달려 해석하려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고 본다. 그의 주장이 일반적으로 순복음 신학이라고 치부하여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를 버리는 과오를 보게 하였다. 즉,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순복음의 것 인양 간주하여 피했다. 그리고 무조건 벽을 쌓으려던 순복음 신학에 대해서 겸허히 손을 내밀 수 있는 작은 채널을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바빙크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Chahvinck 이거나 Bavinck-Chah 일 수는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논지의 주장과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바빙크의 신학을 가지고 등장한다. 분명 그가 말하는 대로 바빙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Chahvinck라고 할 정도로 의존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또 하나의 도식에 성경을 맞추려는 잘못을 범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하여튼 그의 성령론은 기존의 학자들에게 논쟁거리를 제공하였다. 그의 세밀한 주장에 대해서 아직 분명하게 호응할 수 없지만, 성령론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10장 칼빈의 성령론

 

Ⅰ. 칼빈 성령론 연구 - 이 종성박사

 

2천년 동안 교회사 안에서 활동한 수백만의 신학자들을 대별한다면 세 가지 종류로 구별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주장하는 학자(오리게네스)와 성령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학자(스페나)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하는 학자(아우구스티누스)로 나눌 수 있다. 칼빈은 제3의 범주에 속하며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신학자이다. 기독교강요 제3권 안에 있는 그의 성령론을 중점적으로 개관한다. 먼저 칼빈은 성령을 삼위일체 중 한 위이며, 현 역사 안에서 성부와 성자를 종합적으로 대표하여 교회와 신자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활동 한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하에 칼빈은 성령의 활동에 대하여 그의 대저 기독교강요에서 구체적으로 설득력 있게 변론한다. 그의 성령론의 요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령이 오순절에 나타나 흩어진 제자들을 모아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현재까지 지키고, 가르치고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교회의 주인이요, 알파와 오메가요, 교회생활 전체를 인도하신다.

 

둘째, 교회 안에는 언제든지 교리와 경건과 실천이 있는데 이 세 가지를 현실적으로 지배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셋째, 성령의 첫 선물은 우리에게 주신 신앙이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신앙은 없다. 또한 교회도 없다.

 

넷째, 현재 우리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주는 이도 성령이다.  

다섯째, 성령은 우리를 올바르게 기도할 수 있게 하는 교사이다.

 

여섯째, 교회가 설교를 중심한 모임이라면 그 설교는 성령의 인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칼빈은 강조한다. "설교의 창시자는 하나님이시며 성령이 설교와 함께할 때 은혜가 풍부하게 내려진다."(강요 4,3,1)

 

일곱째, 성례전에 있어서 떡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성령이 수행하신다. 따라서 성령은 성례전에 항상 임재 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로마 천주교회와 루터교회와 쯔빙글리와 칼빈 사이에 해석의 차이가 있어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천주교는 화체설을 말하나 쯔빙글리는 그 설에 반대하고 다만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고 했다(기념설). 루터는 예수님의 살과 피가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존재한다고 했다. 이 문제 때문에 루터파와 개혁파가 분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의 논쟁에 가담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영적 임재설이라고 한다. 하여간 물질로써의 떡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케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한다.

여덟째, 교회가 목사의 설교를 중심하여 있다면, 설교의 창시자인 성령이 그 설교와 함께 임재 할 때 그 설교는 은총이 풍부하게 된다. 성령이 그 설교와 함께 하지 않을 때 그 설교는 무용지물이다.

 

아홉째, 설교는 성경해석을 위주로 해야 한다. 세상 지혜를 이용하여 성경을 주석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해석하고 주석해야 한다. 인간의 지혜로써 성경을 장식하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직 성령의 인도 아래에서만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치고 전파해야 한다.

 

열 번째,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서 구원의 은총을 현재화하고 하나님나라의 내림을 공포한다.

열한번째, 교회의 감독(목사)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요, 천국확장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는 목자이므로 교인들은 그의 가르침에 따르고 그가 하는 목양사역에 전적으로 협조하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맞이할 준비를 충분히 해야 한다.

 

열두번째,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요, 하나님의 입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설교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열세번째, 성령은 율법의 최상의 해석자이다.

 

열네번째, 교회 회의가 성령과 성경의 말씀에 의하여 진행될 때 참 회의가 형성된다.  칼빈의 예배 형식과 설교의 특징을 소개한다면, 칼빈은 성경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와 예배에 중점을 두었다. 설교 본문은 구약과 신약을 번갈아 택했으며 예화를 들 때는 성경 내에 있는 사건을 토대로 했다. 절대로 세상의 이야기를 예화로 들지 않았다. 찬송가는 시편을 가사로 경건한 곡조를 붙여 불렀으나 훈련된 성가대원만 봉사할 수 있었다. 악기를 쓰지 않았다. 목사 가운은 흑색에 흰 컬러만 착용하고 일체 다른 모양의 장식품은 붙이지 않았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이 예배의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교단에는 설교대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았다. 교인들이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만 경청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칼빈의 예배관에 비추어 볼 때 오늘의 한국장로교회는 예배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칼빈을 격분케 하고 있다. 예배 내용에 있어서 비 복음적 내용이 많이 있다. 설교의 내용이 너무나 세속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고 설교 내용에 자기 자랑이 많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성가대에는 칼빈의 신학에 전혀 용납되지 않는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최근에는 설교단이 없어지고 성가라고 부르는 것이 지나치게 감상주의적이고, 때로는 직업 가수의 독창회 같은 인상을 줄 때가 많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오늘 한국장로교회가 예배 내용을 신중하게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말끝마다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자라고 하면서 실지로는 자기의 영광을 위한 목사와 장로가 많이 있는 한국장로교회는 때가 늦기 전에 그 마음에 있는 모든 비 복음적인 잔재를 버리고 성령을 모셔야 한다고 생각된다.

 

Ⅱ. 현대 신학자들의 칼빈 성령론 연구

 

최근의 칼빈 신학에 대한 연구는 주로 구원론과 교회론, 성령론의 틀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틀 속에서 현대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칼빈 신학에 있어서 성령론을 어떻게 이해하며 연구하고 있을까?  국내 칼빈학자인 최 윤배교수(장신대)는 칼빈의 성령론 연구자로 벤자민 B 워필드와 판 데어 린더(S. van der Linder),크루쉐(W. Krusche) 등을 언급했으며 최근에 칼빈의 성령론을 연구하는 신학자로는 헤셀링크를 손꼽았다.  여기에 또 한 명의 연구자를 소개한다면 리처드 개핀(Richard. B. Gaffin)을 포함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린더는 신정통주의자인 칼 바르트를 비판하는 시각에서 네덜란드 경건주의의 눈으로 칼빈의 성령론을 바라보는 반면 크루쉐는 바르트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에서 칼빈의 성령론을 보고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우선 시기적으로 볼 때,칼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는 1904년 벤자민 B 워필드의 연구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보는 경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프린스턴의 유명한 신학자인 그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로'로 부르며 칼빈이 신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령의 사역에 교리'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칼빈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 최초로 조직적이고 적합하게 표현한 신학자라고 언급했다. 칼빈의 성령의 사역에 대한 교리는 교회에 주어진 선물이라고 언급할 정도이다.워필드가 칼빈의 성령론을 연구하면서 거둔 성과는 칼빈이 기독론적인 기초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강조했다는 부분을 밝혀낸 점이다. 칼빈의 주저인 '기독교강요'는 죄악 된 인간을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죄악 된 인간에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해 주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논술이라고 워필드는 강조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리처드 개핀(Richard. B. Gaffin)은 칼빈이 성령의 내적인 증거를 통해 성령의 신적인 기원과 진리성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었다고 봤다.  기독교강요 제3권 구원론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 중에서 성령론의 논의가 주목을 끌고 있다고 리처드 개핀은 개인적인 체험 속에서 구원의 적용을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워필드의 주장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크루쉐(Werner Krusche)는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해 칼빈의 성령론을 다루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할 때,성령이 창조사역에 함께 참여했다고 강조했다.

 

Ⅲ. 칼빈의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 최 윤배 교수(장신대 / 조직신학)

 

1. 서론

 

칼빈의 성령론은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의 성령론을 크게 두 가지 영역, 즉 성령의 본질과 성령의 사역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미 칼빈의 성령론 연구에 대한 입문에 해당되는 글과 특히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triplex munus Christi)에 대한 글을 최근에 쓴 바가 있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와의 관계 하에 살펴보고자 한다. 성령론에서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교회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기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네덜란드의 대표적 개혁파 현대 교의학자인 헨드리꾸스 베르꼬프(Hendrikus Berkhof, 1914-1995)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현대 성경 신학이나 교의학의 관심 주제만은 아니다. 칼빈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연구를 체계적으로 시도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다양한 저서들로부터 볼 때, 現今의 신학자들 못지않게 여기에 대한 분명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칼빈의 경우,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는 상호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에먼(E. Emmen)은 칼빈은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의 관계를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반대하여, 판 데어 린드(S. van der Linde)가 칼빈의 경우 성령은 그리스도에게 중요하다고 말한 것은 우리가 보기에 타당성이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어린 시절에 비로소 성령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잉태 때 이미 성령을 받으셨다. 이 같은 그리스도의 영적으로 또는 성령론적으로 정향된 지상적인 삶의 시작은 그의 전 생애, 그의 고난과 부활에서도 계속되었다. 크루쉬도 여기에 동의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심으로써 성령의 담지자(擔持者)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승천하신 이후에 그는 성령을 보내시는 자가 되셨다.

 

우리는 성령을 보내신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논의는 제외하기로 하고, 성령의 담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논의하기로 한다.

 

2.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칼빈의 경우,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동기와 목적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동기는 우리의 죄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다. 여기에 대한 칼빈의 사상은 이미 『기독교강요』초판(1536)에 나타난다. “우리는 아버지의 신성과 함께 연합되셨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아버지의 신적인 호의와 자비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으시고,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타락한 마귀의 독재로부터, 우리를 사로잡았던 죄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충동으로 몰고 갔던 몸과 영혼의 죽음의 노예로부터, 우리가 받아야만 했던 영원한 처벌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를 원하셨다. 이 모든 힘에 억눌려 있지 않고, 우리는 해방되어 구속받았다. 왜냐하면, 이를 위해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시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참 인간성과 무흠(無欠)의 문제를 중심으로, 칼빈은 마니교도, 마르시온주의, 재세례파, 로마 가톨릭교회와 논쟁했다. 칼빈은 마니교도들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참 인간성을 강력하게 옹호한다. 그리스도의 참 인간성 문제와 관련해서 칼빈의 마니교도들과 마르시온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의 『기독교강요』 초판 이후의 다른 개정판들 속에서도 계속 나타난다. 마르시온주의는 그리스도께서 참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가현(假現)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주장했다. 마니교도들은 그리스도가 마리아로부터 땅에 있는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하늘의 몸’을 입고 오셨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을 하는 마니교도들은 헛된 꿈을 꾸는 몽상가에 불과하다고 칼빈은 그들을 비판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conceptus de spiritu sancto)”라는 사도신경의 한 구절을 중심으로 칼빈은 예수의 완전한 인간적 육체성을 부정하는 고대 시대의 가현설적인 개념과 16세기 재세례파, 특히 멘노 시몬스(Menno Simons)에게서 발견되는 새로운 형태의 가현설을 비판했다. 멘노 시몬스는 네덜란드 출신으로서 재세례파에 속했으며, 종교개혁 당시의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칼빈의 비판은 『기독교강요』(1559) 최종판에 특별히 많이 나타난다.

 

칼빈은 멘노 시몬스가 잘못 이해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개념을 비판한다. “여기서 마태는 동정녀 마리아를 그리스도를 탄생케 한 관(官)으로 묘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탄생의 놀랄만한 방법과 보통 사람의 정상적인 방법 사이를 구별해 준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부터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삭이 아브라함에게서 나며, 솔로몬이 다윗에게서 나며, 요셉이 야곱에게서 났다고 말하는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마태는 그리스도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나셨다고 기록해주기 때문이다.” 칼빈은『재세례파에 대한 반대』라는 저서에서 그리스도의 참 인간성과 그리스도의 무흠을 주장했다.

 

고대 교회에서 기독론 이단(異端)으로 정죄된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는 영원한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영혼으로 계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단지 반쪽 인간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칼빈의 경우, 성령의 작용하시는 기능이 동시에 거룩하게 하시는 기능으로 이해될 때, ‘성령으로 잉태하사’라는 구절이 비로소 올바로 이해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마리아의 태로 잉태케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은 거룩하게 하시고, 준비 작업을 하셨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철학적 사고에 의존하여 남성의 씨만이 종족 번식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 남성이 개입되지 않았으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무흠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출생의 전 과정에서 거룩하게 하신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바울 사도는 다른 구절에서도 동일한 사실을 가르친다. 곧,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하여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롬 8:3-4). 그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와 보통 사람을 분명하게 잘 구별하여,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지만 허물과 부패가 없으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로마 가톨릭교회) 아주 유치하게 떠들어댄다. 곧, 만일 그리스도께서 오점이 전혀 없으시고, 성령의 신비한 역사를 통하여 마리아의 씨에서 나셨다면, 여자의 씨는 부정하지 않고 오로지 남자의 씨만 부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점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비단 그의 모친이 남자와 동침하지 않고 그를 낳으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 아담의 타락 이전에 있었을 그런 순전하고도 더럽혀지지 않은 그런 상태로 출생되셨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곧, 성경이 그리스도의 순결하심을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그의 참 인간성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순결하시다는 말은 구태여 반복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복음서 주석』(1555)에서 칼빈은 성령을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神性과 人性)과 그리스도의 무흠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세르베투스에 반대하여,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의 형성시에 성령이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리였다고 주장했다. 세르베투스는 말씀과 성령을 서로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했다. 칼빈에 의하면, 고대 교회와 종교개혁시대에서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신성 없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의 속성들을 주장하는가 하면, 이와는 정반대로 그리스도의 인성 없이 그리스도의 신성의 속성들만을 받아들였다. 이 같은 주장들에 반대하여 칼빈은 ‘두 본성 속에 있는 한 인격(una persona in duae naturae)’의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과 고대교회의 주장을 전거(典據)로 내세운다.

 

특별히 루터파에 반대하여, 칼빈은 ‘엑스트라-칼비니스티쿰’(Extra-Calvinistiucm)

의 개념을 가지고 그의 성찬론에서 그리스도의 참 인간성을 주장한다.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를 간과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에게 결코 다가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와 무엇인가를 공유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무시하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즈네브 요리문답』(1545)에서 사도신경의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에 대한 해설에서 칼빈에게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구원론적 모티브, 성령의 기적, 중보자의 참 인간성과 그의 무흠이다.

 

3.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칼빈이 그의 『공관복음서 주석』과 『복음서에 대한 설교』에서 요단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성령과 아주 밀접하게 결부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발견된다.

 

칼빈은 『요한복음 주석』(1553)에서 요단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해서 취급하고 있다.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는 말씀은 문자적인 표현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이다. 어떤 눈을 가지고 요한이 성령을 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비둘기 같다는 말은 성령의 현존(임재)에 대한 분명하고도 오류가 없는 표징이다. 비둘기는 비유적으로 성령으로 불린다. 비둘기 자체가 성령이라는 말이 아니라, 비둘기라는 말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속에서 성령을 보여 준다.”

 

잇따라 칼빈은 왜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를 묻는다. 여기에 대한 칼빈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표징과 본질 사이의 유비(類比)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확고하게 붙들어야만 한다. 성령이 사도들에게 주어졌을 때, 그들은 불의 혀 같은 것을 보았다(행 2:3). 왜냐하면, 복음의 설교는 모든 방언을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야 하며, 불의 능력을 가져야만 한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라고 이사야서 42:3절이 찬양하는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공적으로 드러내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 위에 내려오시는 것이 보였던 첫 번째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 이전에 성령이 그리스도께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말하자면, 지금 그리스도께서 엄숙한 의식을 통해서 (공적으로 메시아로) 취임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30년 동안 사적으로 개인처럼 숨어 계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의 출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세상에 알리기를 원하셨을 때, 그는 세례로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그는 성령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성령을 받으셨다. 우리에게 필요하면서도 우리에게는 없는 모든 풍성한 은사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이 가시적으로 내려오셨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세례가 성령론과 관련하여 기독론적․교회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신성에 따라서 그리스도는 이미 그의 영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는 세례를 받을 필요도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의 인성에 따라서 그는 성령을 통한 준비가 없이는 중보자도 구속주도 되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왕들과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직분자들로서 기름부음 받았듯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삼중직(왕, 제사장, 예언자)으로 기름부음 받는다. 그리스도는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성령을 필요로 하지만, 그가 성취하신 구원과 은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백성, 즉 그의 자녀들과 교회를 위한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성령세례를 기독론적으로 그리고 교회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어야할 중보자로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가 성취한 구원을 베풀어주실 그의 백성을 위해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이사야 주석』(1550)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세례 시에 성령이 그리스도 위에 내려온 것은 구약의 배경 속에서 중보자로서 메시아직에 대한 준비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가 이전에 구약의 백성에게 약속되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힘과 능력과 위엄이 여기서 성령의 은사들 안에 존재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이 같은 종류의 은사들을 결핍하시지 않을지라도, 그가 우리의 육신을 취하셨기 때문에, 그는 성령의 은사들로 풍성하게 되실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그와는 달리 우리가 결핍하고 있는 모든 축복들의 참여자들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이 말하듯이 우리는 샘물로부터 그리고 그의 충만함으로부터 생수를 길러 내야하기 때문이다(요 1:16; 요 7:37-38).”

 

계속해서 칼빈은 왜 예수께서 ‘그리스도’(메시아)로 불려지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심으로써 아버지로부터 은사를 충만히 받아 우리에게 베푸시게 되셨다. “이것이 바로 기름부음을 받으심인데, 여기서부터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받으시게 되고, 그는 그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다. 그 결과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진다. 그리스도께서 ‘선물의 분량대로’(엡 4:7) 자신의 충만함으로부터 우리에게 베풀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자신과의 교제를 허락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고 분명히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부요함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받으셨던 그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성령의 은사와 관련해서 칼빈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은사론을 비판한다.

“어떤 사람이 생각했다시피, 선지자는 여기서 성령의 모든 은사들을 열거하지 않는다. 어리석고도 무식하게 교황주의자들은 이 구절로부터 일곱 가지 은혜를 이끌어냈다. 고대 교부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도 이와 똑같은 실수를 범했다. 선지자는 여섯 가지만 열거하는데, 그들은 그들의 머리로부터 짜낸 일곱 번째 것을 덧붙였다. … 선지자는 모든 은사들이 우리에게 전달되기 위해서 모든 은사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는 그의 친구로 불린다.(시 45:7) 왜냐하면, 힘이 각 지체들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며, 똑같은 방법으로 그는 자신의 하늘의 기름부음을 받으심을 그의 온 몸이신 교회에 흘러넘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말라 황폐해지고 목마른 사람들은 다 함께 그리스도에게 전혀 관심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짓 영광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모든 은사들 중에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는 어제든지 우리의 불신앙을 탓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참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모든 은사들의 참여자들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직과 제사장직 및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칼빈의 사상은 이미 『기독교강요』(1536) 초판과 『즈네브 요리문답』(1537)에 나타난다. 『기독교강요』(1536) 초판의 제5장에서 칼빈은 ‘기름부음’과 관련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직분론과 성례론에 나타나고 있는 의식(儀式)주의적이면서도 자동주의적인 개념을 거부한다. 여기서는 성령론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이중직(왕과 제사장)만 나타나다가, 재판(再版) 『기독교강요』(1539)에서는 마르틴 부처(Martin Bucer)의 영향으로 예언자직이 첨가되어 그리스도의 삼중직이 나타난다. 『기독교강요』(1559) 최종판에서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은 용어상으로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사용하고 있지만,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각 직분이 내포하고 있는 뜻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전체나 각 부분 모두가 그리스도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행 4:12). 그러므로 우리는 그 중에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다른 데서 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찾는다면,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은 ‘그에게서’ 온다는 것을 가르친다(고전 1:30). 우리가 성령의 다른 은사들을 찾는다면, 그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받으신 데서 발견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인간성에 따라 받으신 성령의 배분은 이중적인 목적, 즉 자기 자신을 위할 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과 그의 온 몸이신 교회를 위해서다.

 

4.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부활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행위는 성령론적으로 규정된다는 크루쉬의 판단은 우리가 보기에 타당하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것은 그가 성령을 통해서 행하셨다. 그는 성령을 통해서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직관하시고, 치유하시고, 투쟁하시고,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바로 이점에서 칼빈의 기독론은 성령론적으로 규정된다.

 

성경을 잘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우리도 성령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강요』(1536) 초판에서 칼빈은 ‘교사’로서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지만, 아직까지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성령론적 관점과는 결부시키지 않고 있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교회는 최고의 교사이신 성령의 학교에서 성찬론을 배우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앞에서 우리가 이미 말했다시피, 『기독교강요』(1539) 재판 이후 모든 개정판에서 칼빈은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그의 예언자 직을 연결시킨다.

 

“그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아버지의 은혜를 선포하는 증인이 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방법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는 비슷한 직분을 가진 다른 교사들과는 완전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유의해야할 점이 있다. 즉, 그가 기름부음을 받으심을 받은 것은 그 자신이 교사의 직책을 다하시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의 온 몸이신 교회를 위해서 복음이 계속 전파되는 일에 성령의 권능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하신 완전한 가르침이 모든 예언을 종결시켰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만족하지 않고 밖에서 무엇을 가져다가 복음에 꿰매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권위를 깎아내린다. 그 다음에 이 기름부음이 머리로부터 지체들에게 확산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예언자로서의 위엄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든 말씀에 완전한 지혜의 모든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성령을 통해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 그는 육신의 연약함으로 고난을 받으셨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골 3:4)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은 자신의 권능을 단 한 번만 나타내 보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신자들에게도 성령의 동일한 역사를 보여주시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생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죽을 것을 소생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장차 도래하는 삶에 참여하는 자들로 삼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것은 그가 교회의 머리시며, 교회와 그가 분리되는 것을 결코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직분을 통해서 우리를 성령의 능력에 참여케 하신다.”

 

『로마서 주석』(1540)에서 칼빈은 성령을 부활시키시는 자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약함으로 인하여 굴복하셨던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의심스럽고도 불확실한 성격을 가진 어떤 것의 도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하늘의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거두셨다.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분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시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과 교회를 위해서 부활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심으로 칼빈은 고대교회의 아폴리나리우스와 당대의 소위 자유주의자(les Libertines)와 세르베투스를 비판한다. 아폴리나리우스와 자유주의자에 대한 칼빈의 비판은『고린도전서 주석』(1546)에 나타난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레고리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주장에 반대하여, 칼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레고리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연적이며, 참된 것으로 이해하고, 부활의 목격증언자들은 영적인 부활에 대한 어떤 증언도 하지 않았다고 선포한 바울의 말씀을 자신의 주장의 전거(典據)로 내세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처럼 살아있는 영혼이 되셨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하지만, 게다가 그의 영혼 이외에 주의 영이 그에게 부음 바가 되셔서,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여기에 주의해야 할 이유는 한 때 아폴리나리우스가 상상했던 거처럼 어떤 사람도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으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세르베투스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인격으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 때 그리스도로부터 다른 하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주석』(1553)에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행동하셨다고 말한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교사의 직책을 맡으셨다. 그러나 아버지를 알리시기 위해서 그는 단순한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성령의 신비한 계시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사도들에게 효과적으로 가르치셨다는 것을 의도하신다. 게다가, 사도들의 신앙이 그 때가지만 해도 매우 약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미래에 그들의 더 큰 발전을 약속하심으로써, 그들이 성령의 보다 풍성한 은혜를 소망하도록 준비하신다.” 칼빈은 쉽사리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고통이 영에 의해서 인도함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의 의도는 전혀 다른 곳에 있는데, 그리스도의 고통이 내적인 것이며, 전혀 가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통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신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이다. 부활시키는 자로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시다.

 

위와 동일한 사상을 우리는 그의『공관복음서 주석』(1554)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내적 교사로서 그리스도의 영이 그의 직책을 수행하실 때, 말씀을 수행하는 일꾼의 사역이 헛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을 깨달음의 영으로 능력을 덧입히신 이래로, 그리스도께서 성경으로부터 그의 백성들과 함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신적인 영으로 숨은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들어가신다.

 

마음속을 아시는 자이신 그의 성령 외에 어떤 다른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같은 지식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께 분별의 영에 의해서 우리가 인도되어 그에게 속한 것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의 자유로운 선물에 의해서 우리의 것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만 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사람들은 치유의 역사는 성자(聖者)들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믿는다. 칼빈은 이 같은 신앙을 미신(迷信)으로 규정하고,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믿음과 말씀을 통해서 인도함 받은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을 그의 성령으로 고치셨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감동을 받았던 두 맹인들을 성령으로 고쳐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인도된 삭개오를 성령으로 구원해 주셨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들의 대표자로서 시험을 받으셨다면,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시험들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 일어나는 우연한 것이거나 사탄의 변덕스런 발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신앙을 더욱 돈독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싸움 속에 내주(內住)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만족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모든 죽음 보다 더 나쁜 심판자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느낀다는 것은 어떤 그 무엇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나님에 반대하여 서 계시며, 파멸할 운명에 처한 이 같은 형태 속에서 심판이 그리스도에게 다가왔다. 그는 (모든 인류를 수백 번 삼키고도 충분히 남을) 두려움을 극복하셨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기적적인 능력에 의해서 승리자가 되셨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신적인 용기에 의해서 훈련받으시고, 성령의 강력한 힘이 그리스도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감정을 초월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아왔던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그들의 연약한 육신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에는 성령의 신적인 능력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곧 이루실 것에 대한 일종의 예표로 사용하신 것은 그가 그의 아들을 영광과 승리 가운데서 하늘로 들어 올리시기 위함이었다. “바울이 올바르게 말하고 있듯이(고전 15:14),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것을 확고하게 붙잡지 않는다면, 복음도 없고 구원의 소망도 헛되고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의는 성취되었고, 우리가 하늘에 이르는 길이 열렸다. 그 때 우리의 입양이 보증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을 행사하시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입증하셨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신적인 감각으로는 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의 부활을 보여주셨지만, 그를 기쁘시게 하는 그 방법이 또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법으로 보인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부활하셨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설교들』에서 성령과 관련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매우 자주 언급하지는 않는다. “만약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조명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지식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내적으로 도달하게 되면(여기서부터 믿음이 나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고 올곧은 제자들이 되어 이 교리의 열매를 향유할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에 의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는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서 고난을 받으셨을지라도, 그에게 주어졌던 성령에 의해서 항상 강력한 힘으로 지원받으셨다. 거룩한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여기에 대해 말하다시피,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에서 그의 승리를 쟁취하신 것을 보라!” “그의 부활과 함께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그의 죽음과 고난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셨듯이, 그는 그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서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고난당하셨듯이, 그는 역시 우리의 의를 위해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칼빈은 『사도행전 주석』(1554)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령론적・교회론적・종말론적 관점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열매가 성령의 은사이다. 그리스도는 큰 기적을 일으키시는 자시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는 전(全) 교회로 하여금 그의 생명에 참여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셔서 영원히 사실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들에게도 영원한 복(구원)을 선물로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그에게 수여하신 생명의 영속성(永續性)이 우리 모두에게 연장되어지고, 우리의 것이 된다.”

 

칼빈은『시편 주석』(1557)에서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알려준다. “게다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불멸의 영광의 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의 무덤이 그의 성령의 생명을 주는 향기로 방부 처리된 것처럼 가득 채워졌다.”

 

5. 결론

 

칼빈의 경우,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는 상호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양자는 상호 불가분리의 관계 속에 있음이 밝혀졌다. 잉태로부터 부활에 이르는 그의 전(全) 생애와 삶이 성령론적으로 규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과 모든 행위는 성령과 관계 속에 있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으로 시험받으셨고, 성령으로 말씀을 선포하셨고, 성령으로 병자들을 고치셨고, 성령으로 고난 받으셨고, 성령으로 십자가를 지셨고, 성령으로 자신을 아버지께 대속물로 드리셨고, 성령으로 부활하셨다.

 

본 주제와 관련해서 칼빈은 몇 그룹의 논쟁자들을 만났다. 그리스도의 참 인간성 문제를 중심으로 칼빈은 창조 세계를 일반적으로 무시하는 이원론적・가현설적 사상가들을 만났다. 그 중에 고대 교회에 악영향을 미쳤던 마니교도들, 마르시온주의, 아폴리나리우스가 있고,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재세례파가 있었다. 마르시온주의는 그리스도의 참 인간성을 전적으로 부인했고, 마니교도들과 재세례파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입고 오신 ‘천상적인 육신’을 주장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입고 오신 ‘영혼’(누스)을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말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 문제를 중심으로 세르베투스는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를 잘 구별하지 못했다.

 

칼빈의 비판이 강하게 집중되는 논쟁자 그룹이 바로 로마 가톨릭교회(소위 ‘교황주의자들’)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죄 없음에 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교황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을 차용하여 남성만이 종족번식에 기여하는데, 그리스도의 탄생의 경우 여성으로서 마리아만이 관계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무흠(無欠)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개념들에 반대하여, 칼빈은 성령께서 준비하시고, 성령께서 잉태케 하시고,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셨다고 주장한다. 말씀의 선포와 가르침 및 성례전의 효과와 관련해서 칼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자동주의적 개념을 도출한 사효론(事效論, ex opere operato)를 비판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표징과 실재 사이의 유비 안에서 최고의 교사로서 성령을 강조한다.

 

직접적으로는 성찬론과 관계되지만, 간접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 특히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계되는 문제를 중심으로 칼빈은 루터파에 대한 비판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루터파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편재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강하게 주장하여 역사적 예수의 경우 신성이 인성화 하는 경향이 있고, 부활・승천하여 승귀(昇貴)된 그리스도의 경우 인성이 신성화하는 경향이 있다. 칼빈은 성령론적 관점에서 루터파에 의한 그리스도의 인성의 신성화를 비판했다.

 

성령과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서 칼빈과 함께 우리는 성령의 담지자로서 예수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스도는 제2위의 하나님, 즉 그의 신성에 따라서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실 필요가 없지만, 중보자와 구속자의 수행하기기 위해서 그의 인성에 따라서, 그는 성령을 받으셔야만 했다. 또한 중보자의 성육신의 동기와 목적은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을 받으심은 이중적인 목적, 즉 기독론적 목적과 교회론적 목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사와 신학사에서 부활・승천 이후 고양된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의 파송자라는 측면은 강조되었지만, 성령의 담지자로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강조는 전무했다. 그러나 다행히 최근의 성경 신학의 연구, 특히 공관복음서 연구를 통해서 성령의 담지자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측면이 밝혀졌으나, 부당하게도 어떤 성경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선재(先在)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입양설(양자설, adoptionism)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는가 하면, 어떤 성경 신학자들은 말씀-기독론(Logos-Christology)을 거부하고, 영-기독론(Pnuma-Christology)을 주장한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인간성 때문에 그리고 그의 백성을 위해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필요로 하고, 기름부음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는 칼빈의 주장은 최근의 위와 같은 주장들에 대한 비판적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제11장 예수님의 성령론

 

1. 서 론

이번 장의 목적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에 근거한 성령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사용한 자료는 신,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이 성령님에 대해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한정하였다(실제 조사결과 성육신 전의 예수님이 직접 성령님에 대해 말씀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기존의 조직신학의 성령론 보다는 제한된 자료를 가지고 성령론을 구성함으로 부수적인 한 가지 이점(利點)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성령님에 대해 하신 말씀으로만 성령론을 구성한 것은 기존의 조직신학의 성령론과 어떤 점에서 한계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령론을 구성함에 있어서 기존 조직신학의 분류 방식을 이용하되 기존의 지적 선입관을 가급적 배제하고 작업 하였다. 따라서 신,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 말씀한 것을 종합하여 주제별로 정리하였다. 논지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주석적 논란문제 그 자체는 가급적 다루지 않았고, 반면 성령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이것을 주제별로 배치하여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 어떻게 말씀 하고 계신지를 살펴보려고 노력하였다.

 

2. 본 론

 

1) 예수님이 명명한 성령님의 호칭(상징어 포함)

성경에는 성령님에 다양한 호칭들이 나타나고 있다. 호칭은 그 분의 속성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성령님의 호칭을 살펴봄으로써 성령님의 속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명명하신 호칭만을 다루도록 하겠다.

 

①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성령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 중에 가장 귀한 것이다.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 즉 성령님을 주신 것이다(마 7:11; 눅 11:13). 이것은 구약(겔 36:27; 욜 2:28)에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의 마음에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을 상기시켜 준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은 위로부터 오며 능력을 주신다. 이 약속의 성취는 위에 표기한 구절이 보여 주듯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으나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성취되어 진다.

 

② 보혜사(요 14:16, 26, 15:26, 16: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요 14: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5:26)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더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며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요 16:7)

원어는 '파라클레토스'이다. 이 동사는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부르다', '소환한다.'를 의미한다.

신약 성경에서 이것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V.C. Pfitzner, 지미숙역, 요한복음, 서울: 컨콜디아사, 1993, p. 263].

'위로하다, 또는 용기를 주다, 경고하다, 교훈하다, 충고하다'. '돕는 자'(Helper: TEV), '위로자'(Comforter: AV)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요한은 법적인 용어(심판, 증거)를 즐겨 사용하기 때문에 이 파라클레토스를 피고측의 변호인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보혜사'(Counsellor)가 그래도 적절한 번역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예수님의 묘사에 내포되어 있는 다양한 역할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혜사로서 성령님은 영원히 성도들과 함께 있으며 예수님이 말씀한 모든 것들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신다. 원어적인 의미를 고려하면 보혜사로서 성령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를 돕고, 위로하며, 변호하시는 분임을 나타낸다.

 

③ 진리의 영(요 14:17, 15:26, 16:13)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7)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다. 진리의 영이라는 것은 성령님이 진리의 근원이 되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참된 진리는 성령님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서 진리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세상은 진리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진리의 영이 함께 거하시고 또한 성도들 안에 계신다.

 

④ 물(요 4:14), 생수(요 7:38)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예수님은 성령님을 물로 호칭하셨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야곱 우물의 물과 대조하여 사용하신 상징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님은 성령님을 생수라고도 말씀하셨다. 이는 초막절을 맞아 물 깃는 행사와 관련된 듯이 보이는 상징어라고 하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7:38)

예수님은 물, 생수를 사용하심으로 성령님이 우리 몸과 영혼의 갈급함을 만족시켜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세상이 주는 것은 야곱의 우물물과 같이 한시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하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인 것이다. 이 생수는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받을 참된 복인 것이다.

 

⑤ 바람(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8)

바람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명명하신 것은 아니라 성령님에 대한 비유로써 사용하신 말씀이다. 바람은 그것이 원하는 대로 불기 때문에 그것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 이와 같이 성령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때와 장소에서' 믿음과 생명을 창조한다(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 제5항). 바람이 임의로 불며 소리를 들어도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성령의 역사는 신비인 것이다.

그러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듯이 성령님의 사역이 일어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성령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⑥ 아버지의 성령(마 10:20), 하나님의 성령(마 12:28), 하나님의 손(눅 11:20), 주의 성령(눅 4:18)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 10:20)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20)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8)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성령,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손, 주의 성령이라고 명명하신 것은 성령의 명칭이라기보다는 성령님의 능력과 출처에 관계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보인다.

 

2) 성령님의 신성

 

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렬로 기록되어 있다(마 28:19-2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19-20)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렬로 기록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름이 단수로 사용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등하게 신성을 가지신 분임을 지지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님이 단순한 어떤 힘이 아닌 하나님(신성)을 되심을 알려준다.

 

② 성자와 동질의 보혜사(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요 14:16)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아버지께 구하여 보내시겠다는 것을 보아 예수님 자신이 보혜사이심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사용된 '또 다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알로스'이다. '알로스'는 '똑같은 것 가운데 하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김상복, 성령님 사랑해요, 서울: 도서출판 횃불, 1994, p.51]. 따라서 성령님은 예수님과 똑 같으면서도 또 다른 개체적 인격을 가지신 분임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듯이 성령님도 하나님인 것이다.

 

3) 성령님의 사역

 

① 환난 중에 대언해 주신다(마 10:20; 막 13:11; 눅12:11-1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 10:20)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막 13:11)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눅 12:11-12)

성령님은 성도가 환난 중에 무슨 말을 하여야 할지를 생각나게 하고 가르쳐 주신다. 그러므로 성도가 핍박을 받을 경우 염려치 말고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로 대답하여야 한다.

 

② 능력을 주신다(눅 24:49; 행 1:8).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 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눅 24:49)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성령님에 의해 능력을 받기까지 예루살렘 성에 유할 것을 명하셨다. 또한 성령님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온 유대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시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에 주요 초점이 있다.

 

③ 예배를 예배되게 하신다(요 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3-24)

성령님은 예배를 예배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새 시대의 예배는 더 이상 장소문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드려져야 한다[David E. Holwerda, 류호준역, 요한복음, 서울: 기독교문서 선교회, 1992, p. 63]. 우리의 예배가 바로 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한다.

 

④ 성경을 영감 되게 하셨다(마 22:43; 막 12:36; 눅 4:17-21; 요 14:26, 요 15:26).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3)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막 12:36)

다윗이 시편 110편 1절 이하에 한 노래는 성령님에 감동하여 한 것이다. 본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구약 적어도 시편 110편을 성령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는 인정하고 있다. 물론 이 자체만을 가지고 일반화해서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 모두가 영감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영감설을 지지하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구절이라 하겠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구약시대에도 성령님의 감동이 있었다는 점이다. 구약시대에는 특정 인물에게 한시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령님께서 역사 하신 것이다(물론 이것은 현재의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는 논증되기에 근거 자료가 부족하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하심이라 하였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눅 4:17-21)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글뿐 아니라 이사야의 글이 응하였다고 하심으로 자신이 구약을 성취시키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에게 성령님이 임하심은 복음전파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인정하고 계신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보혜사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신다. 즉 예수님의 영광과 사역을 증거 하신다.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많은 것을 목격하였으며 배웠다. 이제 예수님이 떠나시게 되면 보혜사가 오실 것인데 이 보혜사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행한 모든 일들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셨다. 따라서 이 말씀은 사도성을 가진 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4복음서의 기록이 성령님께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여기서 4복음서가 성령님에 의해 영감 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5:26)

진리의 성령님이 오사 예수님을 증거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4복음서 뿐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 신약의 서신서들도 성령님에 의해 영감 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13) 진리의 성령님은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한다. 성령님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한다고 함으로 성령님은 바로 예수님을 대신하여 말씀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도행전은 성령님이 사도를 통해서 행하신 사역이시기에 사도행전의 영감성 또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님이 장래 일을 알리시리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요한계시록을 상기시킨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친히 교회들에게 명하시기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11, 17, 29, 3:6, 13, 22)라고 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요한계시록도 성령님에 의해 영감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⑤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다(요 3:5-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 요3:5-6)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령님으로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도덕적, 철학적 어떠한 노력으로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결국 육이요 오직 성령으로 난 것이 영이기 때문이다.

⑥ 영생을 주신다(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물로 비유하셨고, 아울러 이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영생을 주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⑦ 죄, 의,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 하신다(요 16: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요 16:8-11)

성령님은 죄, 의,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신다.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이유는 의로우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도리어 핍박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으로 자신의 결백함(의로움)을 나타내심으로 성령님은 이제 세상의 불의를 책망하신다. 성령님은 또한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이는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과 죽음을 당하심으로 세상 임금이 쫓겨나고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신다(요 12:32). 이렇게 함으로 성령님은 이제 심판의 확실함을 세상에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⑧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13)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믿는 자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성령님은 진리 되신 예수님을 증거 하시기에 예수님의 말씀과 모순된 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⑨ 교회들에게 말씀하신다(계 2:7, 11, 17, 29, 3:6, 13,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계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2: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3:22)

 

성령님은 교회와 함께 하시며 교회에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들로 하여금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을 명하고 계신다.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밧모섬에 있는 사도요한에게 하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승천 후 성령을 통하여 교회에 말씀하고 계신다.

⑩ 영원히 함께 하신다(마 28:19-20;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요 14:16))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 구약에도 성령님은 특정 인물 들(왕, 선지자, 제사장등)에게 한시적으로 그 직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한번 오신 성령님은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한다는 점에서 뚜렷이 차이가 난다. 아울러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19-29)

이 말씀 후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 이후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셨고, 한번 오신 성령님은 영원히 함께 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종합하면 이러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성령님을 통하여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런 점에서 벌코프는 '구속을 적용하는 사역조차도 그리스도의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루이스 벌코프, 권수경외 1인역, 조직신학(하),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88, p. 669]. 즉 그리스도는 자신이 생명을 바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공로로 세운 모든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서 지금도 하늘에서 그 사역을 계속하신다는 것이다.

⑪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증거하신다(요 14:26, 15:26, 16:13, 14).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성령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다[서철원, 성령의 사역, 서울: 한국 로고스 연구원, 1990,p. 14]. 여기서 서철원교수는 '예수의 이름으로 보낸다'는 말은'예수그리스도의 권세에 의해 성령을 보내신다.'는 말씀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님은 철저히 기독론적인 특성을 나타내게 될 것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한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이것은 사도성을 가진 신약성경의 영감설을 암시하기도 한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5:26)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서 성령님을 보내신다. 진리의 성령님은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신다. 이점에서 성령님은 철저히 기독론적이다. 성령님이 역사하는 곳에는 바로 예수님이 증거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13) 예수님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제자들에게 성령님께서는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신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성령님은 다른 어떤 것을 말씀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씀하신다고 하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적용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요 16:14)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마다 예수님이 영광스러워진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 아닌 것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사역이 잠시라도 예수님의 사역과 분리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울러 예수님의 것은 또한 아버지의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것이 모두 예수님의 것이고 성령님은 그것을 받아가지고 제자들에게 알린다. 우리는 여기서 삼위일체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온전히 하나 되심을 보게 된다.

4)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관계

① 성령님은 예수님의 사역에 능력으로 함께 하셨다(마12:28; 눅 4:18, 11:2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8) 예수님의 공적 사역은 성령님의 임함과 함께 시작하였다. 예수님에게 성령님이 임하자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 하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2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② 성령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을 근거로 파송 되어진다(요 3:8-15, 20:22).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8)상기 구절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중에 하신 말씀이다. 성령님으로 거듭남에 대해서 니고데모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9)라고 질문을 한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결국 상기의 문맥가운데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근거로 해서 니고데모가 질문한 성령님을 통한 거듭남이 이루어 질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20:22)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 후 부활하사 제자들에게 나타나사 비로소 성령을 받으라고 명하셨다. 이전에는 약속 상태로만 말씀하셨으나 이제는 친히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사역에 따른 귀결로써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③ 성령님은 예수님이 떠나셔야만 오신다(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7)

예수님은 근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실상 자신이 떠나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하신다(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은 장소적으로 제한을 받으시지만 성령님은 영으로서 오시기에 이러한 제한을 받지 아니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사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증거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떠나셔야만 보혜사가 오시기 때문인 것이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사 대속의 사역을 행하시고 아버지께로 가셔야 만이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적용하실 보혜사가 오시게 되는 것이다.

5) 성령 훼방 죄

① 성령 훼방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마 12:31-32; 막 3:29; 눅 12:10).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1-32)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막 3:29)

예수님께서 정죄하신 성령 훼방 죄는 해석상 다소 난제에 속한다. 성령 훼방 죄는 예수님의 이적적 권능 곧 성령님의 능력을 사단으로 말미암은 사술이라 비방하는 서기관들에게 강한 경고로서 답변하신 것이다. 성령 훼방 죄는 성령님께서 부르시며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주시는 분명한 일을 거부하고 고의적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불신자들만이 범할 수 있는 죄로 알려져 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눅 12:10)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 역시 성령 훼방 죄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성령님의 역사가 분명하게 보임에도 고의적으로 거부하며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

3. 결 론

우리는 상기에서 예수님 자신의 말씀에 근거한 성령론을 구성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요약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님께서 호칭하신 성령님의 이름으로는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보혜사, 진리의 영, 물(혹은 생수), 바람, 아버지의 성령(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손, 혹은 주의 성령)이 있었다. 이를 통해 성령님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으로 성도들을 변호하며 영생을 주시며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살펴보았다.

2)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신 신성을 가지신 분이심을 알 수 있었다. 이점은 아울러 성령님이 단순한 어떤 힘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3) 그리고 성령님의 사역은 바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 곳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성도들을 환난 중에 지키시고 변호하시며 진리로 인도하시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 성령님을 통해서 거듭나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 성령님은 죄, 의,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 하시며, 아울러 예배를 예배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성령님은 성경을 영감 되게 하셨고(자체 구절로써는 부족함이 있지만), 또한 해석자가 되어 주신다. 오늘도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성도들과 함께 하시고 교회들에게 말씀하신다.

4) 성령님은 예수님의 사역에 능력으로 함께 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파송되어 진다. 예수님이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아버지께로 가심으로 성령님이 오시게 되었다.

5) 성령 훼방 죄는 성령님께서 부르시며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주시는 분명한 일을 거부하고 고의적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용서받지 못한다. 이상과 함께 관찰된 것은, 구약 즉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 언급한 것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아울러 신약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일반 은총적인 면에서의 성령님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성령님에 대한 언급은 주로 기독론적이며, 특별은총에 관한 것이었다.

 

 

 

 

 

 

 

 

 

 

 

 

제12장 이사야의 성령론

 

한국교회의 현실을 살펴보면 삼위일체 되시는 성령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히 한국교회가 생각하는 영성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성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인격적인 면을 포함하지 않고 능력, 신비함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구원론적인 관점으로만 성령님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성령님에 대한 부분적인 이해만을 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님의 역사 이후에 성령의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성령님의 사역은 구약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구약에 나타난 성령님의 사역은 온 우주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우주를 주관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한 개인에게도 임하시는 내재성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는 이사야서에 나타나는 성령님을 통해서 성령님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신약과 연결하는 작업을 통해서 올바른 영성관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바른 신앙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개인의 삶도 더욱 풍성하여질 것이고 성숙해질 것이다.

 

이사야서를 중심으로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성령님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성령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

 

1. 창조사역을 감당하시는 성령님

(사 40:12-14; 창 1:2, 2:7; 욥 26:13, 33;4)

 

구약에서는 성령님을 ‘하나님의 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시면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 세상은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모습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독단적으로 창조사역을 감당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성령님의 인격적인 면이다. 하나님과 성령님께서는 사역을 감당하실 때 서로 의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령님이 단순히 어떤 힘이 아니라 인격이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성령님과 의논하시면서 그리고 함께 창조사역을 감당하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창 1:26)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이 살 수 있는 모든 공간을 조성하신 이후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게 될 인간들에게 그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성령님의 창조는 이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지혜의 근본이신 분이시다. 과연 누가 왕에게 이러한 모사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를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인간을 겸손하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2. 자연과 역사의 흐름을 지배하신다.(시 104:29-30; 사 34:16, 40:7)

 

(시편 104:29-30)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여호와는 생명을 주관하신다. 생명이 태어나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멸은 새로운 창조를 기대하게 한다. 주의 영을 보내시어 새로운 자연을 창조하시고 온 땅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계절마다 우리는 새로운 감동에 젖어들게 된다. 봄에는 새로운 새싹이 움돋고 여름에는 그 잎이 무성하며 가을에는 단풍이 물든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모든 무성했던 잎들이 다 떨어진다. 모든 동식물들이 이 땅에 태어났다가 죽게 되고 다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모든 창조가 성령님의 사역이다.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시랑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수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며 올빼미가 거기 거하여 쉬는 처소를 삼으며 부엉이가 거기 깃들이고 알을 낳아 까서 그 그늘에 모으며 솔개들도 그 짝과 함께 거기 모이리라”고 한다.(사 34:14-15절)

약한 짐승이 강한 짐승에게 먹히는 것도 성령님의 섭리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신이 동물들의 짝을 이루도록 하신 것이다.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은 여호와의 기운에 의한 것이다. 즉 인생은 하찮은 풀과 꽃의 운명도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이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선포이며 또한 사람이나 다른 국가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지 말라는 의미이다. 자연을 주관하듯이 인간의 역사에도 개입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인간이 보기에는 이 세상이 무질서해 보이고 혼돈스러울지라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에돔 주민들과 그 영토의 운명을 영원히 못 박아 버리는 것이 된다. 에돔의 황폐는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에돔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대적한 나라들의 대표로서 혼돈과 공허가 임할 것을 예언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아무리 강대한 나라일지라도 하나님의 권능 앞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언뜻 역사를 보면 직선적(直線的) 역사라기보다는 윤회적인 역사인 것 같이 보이지만 성령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역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종말을 향하는 직선적인 역사 속에서 늘 함께 하시며 섭리하신다.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의 일부분밖에 되지 않는다.

 

3. 하나님의 진리와 뜻을 계시하심(민 24:2; 삼하 23:2; 대하 12:18; 느 9:30; 욥 32:8; 사 61:1-4; 겔 2:2, 11:24, 37:1; 미 3:8; 슥 7:12)

 

주 여호와의 신이 이사야에게 임했고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서 주님이 택한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그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신다.

 

“내게 기름을 부으사” 이 말은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기름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와 더 많은 관계가 있다.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할 것이다. 선지자는 여기서 희년에 사용하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이 모든 직무는 왕으로서의 메시아 사역과 관련이 있다. “자유를 전파하다”(רורר רקל)는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희년”에 대해 사용된다. 예언자들은 포로로부터의 해방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 말을 사용한다. 희년이 실제로 실시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택한 도구 도구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자유를 나타내는 은유이다.

 

“(권리들을)주다”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한다. 話者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제시한다. 그는 정의를 수립하고 악을 바로잡는 권위를 갖고 있다. 이 권위는 경제와 정치적 상황에 변화를 가져오는데, 진실로 이 변화는 찬양과 기쁨의 근거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의 전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로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에게도 성령님이 임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을 다윗에게 사무엘이 기름을 부을 때에도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

 

여호와가 율법과 그 신으로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된 말씀을 듣지 않을 때 큰 노를 베푸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권위를 선지자에게 부여하신 것이다.(슥 7:12) 백성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이유는 그 마음을 닫았기 때문이다. 죄로 인한 완고한 마음 때문이다.

 

4.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시는 성령님

(느 9:20; 시 143:10; 사 48:16, 63:10-14)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실해지고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령”은 “자기 앞의 사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이며 또한 섭리적 인도와 구원과 구속의 대행자이다. 그러나 고대의 이스라엘조차도 하나님이 성령과 그분의 사자를 거절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서 “돌이키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후원자와 보호자가 되시는 대신에 그들의 “대적”이 되셨다. 하나님은 “친히 그들을 치셨다.”(사 63:10) 신명기의 보응 교리가 여기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에서 긍정적으로는 인도하심 가운데에서 부정적으로는 심판 가운데 나타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대한 보응으로 백성들이 반역함으로써 성령이 근심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성령은 어떤 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지닌 분으로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성령은 인간 행동에 의해 상처받을 수 있는 인격으로 나타난다. 11절에서 그는 인간의 영혼에 능력을 주고 힘주는 임재의 영이시다.

 

11절에서 “백성이…추억하여” 이 구절은 “그가 기억했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기억은 하나님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정규적인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기억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출 2:24)

또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기억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나게 하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찾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애굽 당시에 홍해를 건너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바다를 건넌 것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다. 그리고 14절에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라는 말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비유이다. 여기서 “쉬게 하심”은 여호와의 은사의 결과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을 통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사랑하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함이며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한 구원의 동기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 모든 하나님의 심판과 구속은 결국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는 그 동기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좀 알아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리고 “주의 선한 신을 백성들에게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느 9:20)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의 율법과 성령의 감동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통해서 기록된 모세오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입을 때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올라오게 하신 후부터, 주님은 “그들 중에 성령을 두셨다”는데 있다. 다른 구절들에서처럼 선지자에게만 임한 영도 아니다. 모세나 특정인물에게 임한 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출애굽과 홍해를 건너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성령님에 대해서 나타내고 있다.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시편 143:10) 성령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올바른 삶을 살도록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다윗은 이러한 성령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분은 선하신 분이시므로 공평한 땅으로 자신을 인도하실 분이심을 확신하고 있다. 여기서 “공평한 땅”이란 장애와 위험이 사라진 평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환경을 초월하여 평안케 하시는 분이시다.

 

5. 인격적 관계를 갖게 하시는 성령님(시 51:10-12; 사 11:2, 44:3; 겔 11:19, 36:25-27, 37:14, 39:29; 욜 2:28-29; 슥 12:10)

 

1) 여호와의 신은 왕에게 다스리는데 필요한 능력을 부여한다. 이 능력들은 세 부분으로 열거된다. “지혜”와 “총명”은 왕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자질이다. 앗수르 왕은 자신이 이 자질들을 얻었다고 주장했다.(10:13) 이 자질들은 다윗과 솔로몬에게서 증명되었다. “지혜”는 왕이 선한 판단을 할 수 있게 하는 자질이다. “총명”은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한 보다 깊은 지적 통찰력으로 정책을 수립하는데 요구되는 자질이다.

“모략과 재능”은 두 번째 쌍을 이루는 자질들이다. 재능은 나라를 위한 전략 구성, 전쟁과 정책의 계획을 포함한다. 왕은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주도한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함” 이 두 단어는 모두 여호와와 관련이 있다. 이 단어들은 여호와 신앙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용어이다. 여호와의 신은 백성들에게 믿음과 예배의 강한 생명을 왕에게 불어 넣어주시는 분이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지식의 부족은 중대한 죄다.(1:3)

새 시대를 나타내는 두드러진 묘사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라”는 것이다.(11:9) “지식”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의 참된 이해이며 관계를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의미한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나님께서 함께 만나시고 교제하신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도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형식적인 예배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이란 말은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 가운데 계시며 오직 경배만 받으실 수 있는 거룩한 하나님께 왕이 드리는 근본적인 경외와 복종을 묘사한다. 이 일은 여호와께서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다.

나를 성결케 하고 죄에서 회복되어지며 하나님을 향한 일에 열정이 생기도록 하시는 분은 나의 힘이 아니라 성령님의 힘이다. 주의 종이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의지와 힘과 지도력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 통곡하며 아파하게 하신다.(슥 12:10) 결국 우리는 죄에서 회개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분위기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흉한 범죄를 저질렀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면 그 삶이 완전하게 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다.

 

2) 에스겔서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신은 백성들에게 일치하는 마음, 즉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등하는 분열된 심령상태가 아닌 오직 하나님에게로만 향한 신실한 마음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돌 같은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교만하고 무례한 인격을 겸손하고 온유한 인격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 부분은 무척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 현실에서 성령님의 인격적인 사역을 도외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신약에 나타나는 성령님의 인격적인 사역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3) 신약성경에서는 성령을 제3위 하나님으로 설명하는데, 성부와 성자가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 구별되는 것처럼 성령 또한 그들과 구별된다고 말한다. 그분은 “보혜사”(요 14:16,25, 15:26, 16:7) -경우에 따라 위로자(기운을 북돋우는 자라는 뜻), 상담자, 도움을 주는 분, 후원자, 조언자, 변호인, 동지, 노련한 친구 모두를 뜻한다.- 이신데 이 모든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뿐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분은 “또 다른”보혜사(14:16), 곧 주 예수의 다음 주자로서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인격체만이 그런 사역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이 성령을 말씀할 때마다 남성명사[ekeinos, 그]를 사용하고 있다는데 중점을 두어 말한다. 이 부분을 헬라어 문법에 맞추자면, 중성명사인 ‘영’(프뉴마)과 맞추어 중성대명사[ekeino, 그것]가 들어가야겠지만, 요한은 성령이 ‘그분’이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독자들이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를 원했던 것이다. 더욱 인상적인 사실은 14장 26절, 15장 26절, 16장 8, 13, 14절에서 동일한 남성대명사를 사용한 반면, 성령을 처음 소개하는 14장 17절에서는 문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중성대명사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요한은 이런 사실을 통해 그 다음부터 성령을 남성대명사로 바꾸어 쓴 이유가, 헬라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심오한 신학적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

그밖에도, 성령께서는 들으시고, 말씀하시고, 증거 하시고, 확신시키시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시고, 이끄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명령하시고, 금지하시고, 갈망하시고, 그리스도인에게 선포할 말씀을 주시고, 도움을 주시고, 그리스도인을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시며, 성도들이 기도할 때 친히 하나님께 부르짖으신다.(요 14:26, 15:26, 16:7-15; 행 2:4, 8:29, 13:2, 16:6,7; 롬 8:14,16,27; 갈 4:6, 5:17,18) 또한 우리는 성령께 거짓말 할 수도, 성령을 근심케 할 수도 있는데(행 5:3,4; 엡 4:30) 그런 말은 인격체에 대해서만 할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결론을 내리자면 성령께서는 단순한 영향력이 아니라 성부나 성자와 마찬가지로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6. 리더십을 부여하시는 성령님(창 41:38의 요셉, 민 11:17의 모세, 11:16-19의 70인의 장로, 27:18과 34:9의 여호수아, 삿 3:10의 옷니엘, 6:34의 기드온 11:29의 입다, 13:25, 14:19, 15:14의 삼손, 삼상 10:10, 11:6, 19:20-23의 사울, 16:13의 다윗, 왕하 2:9-15의 엘리야와 엘리사, 사 11:1-5, 42:1-4의 메시아)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만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고백을 하고 믿는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우리에게 주신 지도자들에 대해서 존경과 신뢰를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들의 지도자들도 우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델이 될 만한 지도자의 부재를 외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야기 시키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리더십의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 참된 지도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실재로 많은 한국 국민이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강한 지도력을 가진 지도자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를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강한 지도력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잃었으며 개인의 삶이 존중되지 못하고 짓밟혔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어두운 한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인생의 올바른 해답을 제시하는 성경에서는 리더십에 대해서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지도자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리더십을 부여하는 주체는 성령님이시다.

 

여기서 메시아를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메시아는 종의 모습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실 분이시다.(빌 2:6-7) 완전한 순종의 모범을 보이실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 메시아의 리더십은 종으로서 섬기는 리더십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에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한다. 여기서 “공의”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문맥상 Justice의 의미보다는 “증인들 앞에서 천국 법정에 의해 내려진 판결”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 42:3)라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의 리더십은 사랑의 리더십이다.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참다운 리더십인 것이다. 겸손하고 온유한 예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어떠한 반응이나 환경에 의해 실망하지 않는 강인한 리더십이다.(사 42:4절) 이것은 풍성한 내면에서 밖으로 나오는 리더십이다.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것이다.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만히 있는 리더십이다. 이러한 리더십도 성령님의 힘을 입을 때 가능한 것이다.

 

1) 다윗에게 임한 여호와의 신은 다윗에게 능력을 주었고 강인하게 했다.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하셨다. 여호와의 신이 다윗과 늘 함께 했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사울이 악신을 들었을 때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에게 있던 악신이 떠났다. 다윗이 수금을 잘 탔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의 리더십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생긴 리더십이다. 다윗의 능력에 의한 리더십이 결코 아니다.

 

2)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신이 강림하시므로 기드온이 나팔을 불 때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기드온에게 임하신 성령님께서 기드온에게 신적 권위와 능력을 주신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서 성도들을 억누르고 말씀으로 위협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진정한 리더십이 아니다. 자신이 리더라고 내세우지 않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권위를 가지고 능력을 가지면 성도들이 따르고 존경하게 될 것이다.

 

3)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신이 그 백성들에게도 임하므로 모세 혼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그 백성들도 함께 짐을 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목표를 세우고 성도들을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에게 성령께서 주신 비전과 이상을 예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성도들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지도자가 가진 비전과 이상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그 공동체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즐거움과 감격으로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4)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신의 감동을 입은 자로서 전쟁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그리고 그 백성들을 가나안의 여러 지파와 민족들의 공격에서도 백성들을 지키는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사명을 이루는 지도자가 되었다.

 

5) 요셉에게 임한 하나님 신은 꿈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장래 계획과 뜻을 알도록 하셨고 요셉에게 애굽을 통치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주셨다. 그리고 어려운 재난에서 침착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하시므로 애굽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민족과 많은 민족들을 구하는 귀한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다.

 

7.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주시는 성령

(출 31:1-11, 35:30-35의 브살렐과 오홀리압, 왕상 7:14의 히람, 성전 건축을 위해 필요한 예술적인 숙련 기능에 대해서는 학 2:5, 슥 4:6)

 

1) 애굽의 많은 학문과 지식을 갖춘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성막을 제작하는 일에 있어서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것이지만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를 이스라엘 민족들이 성막을 제작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브살렐과 오호리압에게 하나님의 신이 충만하게 임하사 그들이 성막을 제작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공급받게 된다. 성막을 제작하는 일을 모세가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일들을 감당해야 한다. 성막제작에 필요한 섬세한 기술과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어느 분야에서 일을 하든지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 높은 자리에 있는 지도자들만이 지혜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섬기고 봉사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온전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지도자는 각 사람에게 이러한 은사를 발견하고 배치하고 격려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2) 솔로몬 왕이 성전기구를 만들기 위해서 두로에서 히람이라는 사람을 데려온다. 그는 특별히 놋 일에 남들보다 지혜가 탁월했다. 히람은 그의 독특한 재능으로 성전의 기구를 만드는 귀한 일에 쓰임을 받았다. 당시에 놋으로 물건을 만드는 일을 가졌던 사람들도 크게 존경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재능과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귀중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재능을 부러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지혜와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하는 것이 더 값진 일이 될 것이다.

 

3) 유다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들은 정치, 종교의 지도자들이다. 이들 지도자들에게 필요했던 능력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른 외부적인 환경과 자신과의 갈등 문제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백성들의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담대함이 필요한 것이다. 이들은 성전 재건을 하면서 낙심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이 너무 크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학 2:5)

이 말씀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주고 인도해 주셨던 하나님의 신이 학개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동일하게 머물러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머물러 있나니”는 기둥으로 서있다는 뜻이다. 즉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고 보호하여 주었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담대 하라는 것이다.

 

4) 스가랴에게 임한 말씀도 학개서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부여한다.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사람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신으로 되는 것이다. 아무리 대적이 많고 성전건축을 하는 백성들의 수는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이 낙담해 있었다. 이들의 마음에 힘을 주고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은 외부적인 어떤 힘보다 성신이 그들 마음에 역사함으로 힘을 얻고 성전재건을 완수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슥 4:6)

 

8. 맺는 말

 

이사야서에 나타난 성령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준비하면서 너무나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 주제를 가지고 이사야서를 중심으로 구약과 신약을 살펴보면서 기존에 알고 있었던 성령님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었다. 성령님은 참으로 인격적인 분이시며 우리의 모든 삶과 사역 속에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달고 오묘하며 신비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님의 모습만 뇌리에 강하게 심겨져 있었는데 이사야서와 구약에 나타난 성령님의 모습을 보면서 성령님이 더욱 나와 가까이 계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우리의 생각과 이성을 초월하는 분이시며 온 우주를 섭리하시는 놀라운 분이시다. 오늘을 살아가는 시대에 성령님은 우리 성도들을 예수님께로 향하도록 하고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서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인도하신다.

제13장 성령론의 정리와 결론

 

1. 삼위일체론

성령님의 사역에 관한 견해는 체험 위주의 성령 운동과 교리 위주의 일종의 지성주의와의 사이에 극단적인 견해차이로 인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외면하도록 하는 손해를 초래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이 둘 중 그 어느 쪽도 혼자로서는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성령론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확실히 알아야 되는 부분은 삼위일체론 이다. 삼위일체론은 이해하는데 있어서 뿐 아니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난해한 부분이다. 그러나 성경이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이 숫자적으로 하나라는 개념으로 훨씬 많이 강조되어서 실제적으로 설명하려는 부분을 놓쳐버렸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하는 것은 숫자적으로 한 분이시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유일신(唯一神)이라는 말씀이다. 다른 신은 없고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라는 뜻이지 숫자적으로 한 분이시라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유일신이지 단일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숫자적으로 한 분이라고 이해하고 있으므로 매우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하면 예수님과 성령님의 위치가 매우 애매하게 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근접된 표현으로 하나님은 '3 인격체' 즉 '구별된 3위'이시다.  초대교회에서도 이 삼위일체에 대하여 성자 하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여러 이단들이 있었다. 그래서 A.D.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하나님은 숫자적으로 한 분이 아니라 "3인격체(3위, three persons)"라는 공식적인 신조를 채택하였다.

이제 '하나'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하나'라는 말은 영광과 존귀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모든 신의 속성이 똑같다는 의미이다. 즉 본질에 있어 '하나'라는 뜻이다. 그것은 외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한 분이라는 이론은 단일신론(單一神論)이라는 형태로 많이 나타난다. 이는 숫자적으로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단이다. 그중 양자론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성령님을 보내셨으므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같은 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자 하나님은 피조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또 양태론은 한 분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신약 시대에는 성자 예수님, 현 교회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가면을 바꾸어 쓰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경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명령이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말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삼위 일체란 3 인격체인데 그 본질에 있어서 우열의 개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질서상 1위, 2위, 3위가 있을 뿐이다.2. 성령과 불로써 세례세례란 원래 동일화, 동질화(identification)한다는 뜻이다. 이런 용어들은 원래 서양에서 연구되어진 것들이기에 우리말로 적당한 표현을 찾기가 힘들다. 동일시, 동질화, 연합정도로 표현한다. '연합'이라는 표현이 제일 많이 쓰인다.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를 처음으로 세례 받는 일로부터 시작하신다. 왜 그런가? 죄는 없으신데 죄인인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죄인과 동등시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그 물 세례 아래 친히 들어가심으로 자신도 죽어 마땅한 인간들과 동등한 위치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묘사할 때 세례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는 자이고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과 대조를 해 보아야 잘 이해가 된다. 물은 우리 모두를 심판아래, 사망과 멸망아래 가두게 하는 역할을 한다. 세례를 줌으로써 우리가 나 자신은 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을 자, 심판을 받을 자들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방주 안에 들어감으로써 물로 말미암아 그 위에 뜰 것을,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것을, 분리 된 자인 것을 고백하듯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히 주시는 '성령과 불' 세례는 불에 타버릴 것들을 불로 태워 없이하고 성령 안에 들어가 하나님과 같이 있는 자로서의 그 일에 신앙 고백적으로 동참하는 자임을 하나님께서 인치시며 또 우리에게 신앙 고백으로 요구하는 세례인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분이요 의와 거룩으로 사실 분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연합되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분이 가는 데로 우리도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방주 안에 타고 있는 자들이 배가 가는대로 갈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시므로 우리는 성령님이 가시는 데로 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성령 하나님이 지옥에 가실 리도 없고, 사망 아래 있을 수도 없으므로 그와 연합된 그가 우리 안에 오심으로 하나 된 우리는 이제 그와 도저히 떼어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즉 성령님이 드디어 우리를 죄와 사망과 저주로부터 꺼내실 보증으로 와 계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그 신앙 고백이 있는 자들이 모두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의미에서의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이다.3.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오순절의 의미를 알려면 일단 먼저 안식일의 개념부터 알아야 한다. 안식일은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신 날수를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천지창조를 생활로 간증하는 의식이다. 쉰다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레 되는 날 쉼으로써 앞의 엿새 동안에 하나님께서 일해서 온 천하 만물을 만들었다는 신앙고백을 형식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 5장에서는 안식일의 개념이 한 단계 더 진전한다. 여기서 보면 안식일의 개념 속에 우리를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첨가된다.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어 거룩하게 하는 것, 즉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의 안식일의 개념이 여기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안식일을 지킴으로 일상생활의 규칙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거룩케 하는 하나님,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해낸 하나님인 것을 즐거워하는 절기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일의 결과를 감사하며, 즐기며 돌아보는 절기로 안식일이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지킴으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어떤 결과를 얻는 절기로T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안식일'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케 하는, 안식케 하도록 간섭하는 일의 상징인 것을 알 수 있다. 안식일을 지키게 함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죄와 악과 더러움과 부패함에서 꺼내어 안식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섭, 즉 "거룩케 하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 일이 더욱 강조된 것이 희년이다.

성경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런 절기들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이루실 것인가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오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어떻게 친히 죄와 사망의 종에서 꺼내셨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4. 성령강림, 그 자체가 갖는 메시지

신약시대와 구약시대는 결국 약속된 것이 이루어진 것,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이루어진 것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분기점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안식년, 희년, 맥추절, 칠칠절 등 절기로써도 요구하시고 강조하신 것 같이, 그가 이루시려는 구원 사역은 이제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일로 완성된다.

죄와 사망의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꺼내어 자유케 하신 것은 나의 조건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사, 불쌍히 여기사 은혜로 이루어 주신 그 일, 죄의 세력에서 꺼내어 구별하여 거룩케 하신 그 일을 상징화하고 있는 오순절날 성령님이 임하시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것이다. 오순절이라는 절기를 주어 놓고 거기에 맞추어 성령님이 그날에 임하시므로, 오순절이 갖는 의미와 동일한, 성령님의 임하심, 즉 구원의 사역이 하나님 쪽에서 전적으로 하신 일이요 우리 쪽의 일의 결과가 아님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오순절 날에 성령님이 강림하신 이유이다.성령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키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니다.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임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이 오신 그 사실로 심판이 효과 있게 되어 버렸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여 버린 사실이 무엇으로 증명이 되는가?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증명이 된다. 예수님이 떠나셨으니 성령님이 오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자체가 갖는 의미이다.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그 일을 위해서는 아닐지라도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에 대한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 된다.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가 있다는 표이다. 예수님이 그 존귀와 영광의 보좌에 가셔서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사실,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 세상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이 오셨으며, 실제로 계신 것, 이런 것들을 볼 때 그분이 그의 약속에 따라 일을 하셨으며, 또 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기뻐해야 된다. 성령 강림은 개인적 신자가 갖는 주관적 체험의 문제로써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성령님이 오신 그 일, 그 자체의 객관적 증거로도 우리에게 이미 커다란 경계가 되며, 힘이 되며, 각성해야 되는 표인 것이다.5. 성령이 주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성령세례라 할 때 우리는 그 개념이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성령세례가 다른 분에 의해 성령에로의 세례를 받아서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지, 혹은 성령님이 베푸는 세례를 성령 세례라 하는지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보통 '성령세례'라 할 때 성령님께로 가는 세례, 성령님 속으로 들어가는 세례로 많이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았다 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 우리가 성령님 안에 파묻히는 것, 성령님의 충만함이 흘러넘치는 것으로 보통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 성령 세례는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베푸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럴 때 나타나는 어려움 중 하나가 그러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으면 성령이 없는 자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를 믿으면 우리 안에 성령이 있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이 단계에서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잘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는 '성령 세례'라 할 때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례로써 성령님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것 외에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가 있다고 말한다. 성령님이 베푸시는 자로서의 '성령 세례'가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령의 충만한 자리로 들어가는 것,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이야기 할 때, 그 세례는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례이고, 예수님이 성령으로 베푸시는 세례를 말한다. 지금 언급하는 '성령세례' 즉 성령님이 주시는 세례라는 것은 성령님이 구원 얻은 모든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신비스러운 연합으로 불러 모으시는 그 일을 말한다. 성령께서 세례를 베푸셔서, 우리는 이제 한 몸이 되었고 다 한 성령을 마시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접붙여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신비로운 연합체가 된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접붙이는 일, 하나 되게 하는 일이 바로 성령님이 베푸시는 '성령세례'인 것이다.

성령님이 주시는 성령세례에 의하여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나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몸으로 부름 받은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서 생명과 삶을 유지케 하시는 분이고, 부여하시는 분이다. 성경이 예수를 믿는 신자들에게 분명히 확신시켜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구원 얻은 일에 대하여 우리의 인식이 없듯이, 성령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내시는 일, 그의 몸에 덧붙이는 일에도 우리의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우리는 모두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냄을 받고 있고,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 일은 그 자체로는 우리들에게 인식되지 않고 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일, 구원을 받는 일은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고 다 된 다음에 결과로써 성경을 통하여 알며, 성장하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6.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성령 세례'라는 것은 성령님께서 베푸신 '성령 세례'와는 구분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 세례(성령의 부어주심)는 구원 얻는 것과는 다르고 그 이상의 선물이고 그 이상의 경험이다. 신, 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님이 내주해 계신다. 그래서 신, 구약의 차이도 성령의 내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령의 부어주심, 성령의 충만에 관하여서이다. 중생(성령이 베푸시는 세례+성령님의 내주)과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지 않으면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 세례(성령의 부어주심)를 받지 못한 자는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는 외적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간 한국교회에서는 이 문제에서 늘 방언이 그 첫 번째 표적으로 등장하곤 하였다. 어떤 외적인 증거가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틀림없는 일인데 그 외적인 증거를 꼭 방언이라고 못 박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될 것은 성경의 약속과 체험과의 관계이다. 성경이 약속하는 것과 체험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서 참으로 위험한 실수를 할 수 있다. 성경이 약속한 것 중 몇 가지 체험한 것 때문에 그것만을 가지고 나머지 성경이 약속한 것들도 쉽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편 기독교가 갖는 초월성과 기적들을 배제해 버리는 잘못된 견해가 있다. 이것은 이성주의적 오류가 되는 것이다. 요즘 신자들의 분위기를 보면 이 쪽으로 점점 쏠리고 있다.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교육 수준의 향상과 함께 사람들이 다 너무 이성주의적으로 가고, 그 동안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에 의한 체험들이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아름답게 사용되지 못한 것으로 인한 반작용으로 인해서일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이 겪는 가장 큰 아픔은 원함이 있으나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요즈음 같이 성경공부가 붐을 이루고 있는 때는 예전엔 없던 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말씀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알고들 있는 때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신자들은 힘이 없다. 신자의 가장 큰 불행은 아는 것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데 있다. 

 성경에 기록된 신자들의 삶에는 분명히 어떤 힘이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어떤 간섭이 있었다.  우리의 맥 빠진, 힘없는 신앙생활과는 판이하게 다른 기쁨과, 충만과 자신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왜 그렇지 못한가?  여기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며 성경의 지적 앞에 우리의 위치와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부흥 운동이 일어난 곳은 언제나 성령님의 나타나심이 충만했음을 교회사가 증명하고 있다. 언제나 부흥 운동은 성령님의 운동이었다.

7.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의 차이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성령님의 내주도, 성령세례도 가능해졌다고 보아진다.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한 우리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를 시인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언하기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오해하는 경우에는 복잡해진다. 성령이 있다는 것이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인가? 이렇게 되면 한국교회가 한동안 문제가 되었듯이 방언이 없으면 구원을 못 받았다는 경지에까지 가는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계셔도 우리가 모르고 성령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성령의 나타나심을 무시한다면 바로 이런 부분이 너무 모호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성령세례(부어주심), 성령의 나타나심에 관한 약속들을 제외시켜 놓고 성경을 논하여 왔다. 이유는 그것으로 인한 부작용 때문일 것이다. 가장 큰 이유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늘 외적으로 은사로 나타나는 법이다."라는 것에 대한 반대가 그만 극단으로 가서 또 하나의 축복된 약속을 빼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성경의 엄청난 기록들을 읽으면서도 몇 가지 부작용을 맛보았기에 성경의 증거에 대하여서도 신중하고 심각하게, 기대에 차서 들여다보는 시선을 빼앗겨 버려 아무런 감동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심각한 오류인 것이다.

빈번하게 고넬료 사건은 믿을 때에 즉 구원을 얻을 때에 성령세례(부어주심)가 동시에 임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본문이 그렇게 보이는 가능성도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것이 동시적이지 않다. 성령님의 내주와 성령세례(부어주심)의 차이점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예로써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실과 그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과의 차이점을 생각할 수 있다. 신자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신자가 신자답게 살지 못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죄책감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 그분을 향하여 죄책감을 가진다는 것이다.

성령님의 내주가 신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면 이제 성령의 부으심(성령세례)라는 것은 그 외의 일로 인하여 오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것으로 나에게 확실히 인식되는 것이요, 내가 직접 감각하는 것이요, 내가 분명히 "이것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님의 내주와는 달리 내가 그것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결코 그 사건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는 확신이 있다. 성령 세례를 받은 그 기쁨과 만족감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유일한 것으로 주장하기에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다. 내주 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우리는 인식하지 못할 수가 있지만, 즉 우리 자신이 성령의 전인 줄도 모르고 있고, 우리 안에서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는 것도 모르고 있을 수 있지만 성령 세례는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언제나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본인에게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알도록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성령의 충만'과 어떻게 다른가라는 것이다. 성령세례(부어주심)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사하시는 은사이다. 은사란 베푸는 쪽에서 주권적으로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열심히 추구할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또한 분명히 구별되어야만 한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원래 성경에서 성화의 원리로서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성화의 원리로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방언을 주시고 성령의 나타나심을 허락하신 것과, 그 사람이 성화 되었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있음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성화에 대한 큰 자극과 촉진이 되기도 한다.  성화란 성령 충만에 의한 것이다. 성령 충만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셔 그의 요구와 그의 권면과 그의 명령 앞에 자기를 끊임없이 굴복시키며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요구와 원리와 명령을 나의 것으로 삼아 나가는, 즉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보았던 부작용들과 같이 내가 성령의 부어주심을 체험했다고 하여 그것으로 모든 대화의 내용을 삼으면 모든 일에 증거로 삼아서 사실상 우리가 성화에 얼마나 방해를 받았는지 모른다. 이제는 어떤 의미에서 성경공부를 함으로 내용적으로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달은 바 그 내용을 우리 자신에게 확신시키며 기쁨과 확신과 자랑 속에서 용수철처럼 일어나게 할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요청되고 있는 때임을 우리는 겸손히 시인해야 한다.8.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들'성령 충만'에 대하여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는 문제에 있어서는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고 되어 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체험과 경험을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쪽에서는 '성령세례'를 요구하고 또 그것을 받기 위하여 어떤 조건을 제시할 수도 없다. 우리 쪽에서는 전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도 할 것도 없다.

어떤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던가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그는 사랑을 소유치 않을 수도 있다. 성령의 부어주심으로써의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사역에 대한 증인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어떤 능력이다. '성화'가 개인적인 인품과, 신앙 인격에 대한 문제라면 이 '성령세례'는 제3자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의 구원 사역에 대한 증언을 능력 있게 하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특별한 은혜이다. 그러니까 이 일은 즉 '성령세례'는 증인되는 일과 무관하게는 보통 잘 발생하지 않는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내적으로

 

첫째 자기의 내면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 감지가 생긴다. 즉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 생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는 동시에 자신의 비천함에 대한 자각이 생긴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동시에 일어난다. 

 

두 번째로 내적으로 기쁨과 거기에 수반되는 확신이 일어난다.  예외적인 기쁨과 감사인 것이다.  

 

세 번째로 성령세례를 받은 본인에게 두드러진 현상중 하나는 주를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일어났던 가장 큰 부작용은 '성령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전파하지 않고 내가 경험한 것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증명하는 바람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자존심 싸움, 우열의 싸움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네 번째로 빛과 이해가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어떤 영적인 밝음을 소유하게 되고 어떤 명쾌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 어떤 외적인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살펴보자.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외적 현상 중에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 세례를 받은 사람들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보아서 뿐 아니라 들어서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어떤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외적 현상 중에 '얼굴이 달라진다.'는 현상도 있다. 이것은 적당한 표현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그의 얼굴에 어떤 경외감이 있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말'이 달라진다. '말'이라고 할 때는 우리가 하는 언어 그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 말, 즉 그 내용이 능력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의 말과 증거는 자기 것이 아닌 어떤 힘과 어떤 존재의 능력과 지혜와 권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을 때 듣는 사람이 지혜에 관한 것에 대하여 이해가 더 확실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권능이 있는 말씀, 권위자의 말씀이라는 권위적 압도 감을 받는 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계시'에 대하여 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계시는 내용 면에서 완성되었다.  그러나 계시된 성경의 내용을 밝히시는 하나님의 간섭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9. 성령의 인침과 은사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치심은 본질상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어느 쪽에 초점이 주어지는가에 따라서 구별이 되어 진다. 근본적으로 성령 세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하도록 하는데 즉 증인의 사역을 감당케 하는데 훨씬 많은 초점이 있다. 성령의 인치심이라는 말은 증인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인 자기와 구원문제,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확인'쪽에 초점을 두고 사용한다.  어떤 부분에 더 많은 초점을 두는가에 따라 똑같은 내용을 용어만 다르게 쓰는 것이다. 성령의 인침이 갖는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즉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하는 것은 에베소서 1:14절에 나와 있는 것 같이 '보증'이다. 신자가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인하는데 가장 놀라운 확신이 있다면 여러 가지 중에서 아마도 하나님께서 직접 확인 시켜 주는 이 '성령의 인치심'일 것이다. 이 깨우침은 신자들에게 약속된 것이요, 커다란 축복이요, 경험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인침'이 도장을 찍었다는 의미가 있는 것임을 생각할 때 도장이라는 것은 단둘만의 비밀스러운 일을 위해서는 쓰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쓰이는 것이 도장이다. 즉 성령의 인치심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인가를 그 '인침'을 받은 본인이 체험적으로 깨달을 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그 사람이 성령의 인침을 받았다는 것을 주위의 사람들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세례' '성령이 인침'을 받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내용 면에서 다른 사람보다 나아진 것도 없다. 다만 있었던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뿐이다.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사이에 우열의 개념은 절대 없다.

성령의 부어주심으로써의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침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고린도전서 12장, 즉 은사 쪽에서 볼 때는 이 사역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사역이다. 성령 세례나 성령의 인침을 받는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고 그가 어떻게 나를 사랑하는가를 아는 것이지 능력을 받는다는 차원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능력적인 것이다. 이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키 위한 증언을 위한 능력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한 능력이다. 은사를 주심으로 우리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약속과 소망이 어떻게 확실하며 대단한 것인가를 확인시켜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를 소망케 하시는 것이다.10. 성령세례, 어떻게 받을 것인가?성령세례에 대해서 두 가지 큰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가장 큰 첫 번째 오류로서 성령 세례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론을 이야기할 때 많이 오해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써 내가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이것은 또 다른 행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은혜로 결과를 주는 방법이다. 나는 주신 줄로 믿고 기도했으니 마땅히 주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허락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요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 위험은 "안수"라는 방법을 통해서 성령세례(부어주심)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안수하는 자가 준다는 표현이 아니라 이 일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며 하늘로부터만 허락된 것이라는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변해버렸는가? 능력 많은 사람이 손을 얹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안수는 의식적이요, 메시지적이지 성령님이 임하시는 통로가 아닌 것이다. 성령은 자기 힘으로, 자기 뜻대로, 자기 의사대로 내려오시지 누구에 의하여 누구의 요구에 의하여 주장되지 않으시는 분이다.  

또 하나 우리가 조심할 것은 성령의 부어주심을 원하는 그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늘 자신에게 확인해 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증명하거나, 자신을 치장하기 위한 것이 되지 않도록 자기중심에서 이것을 구하고 간구할 때마다 점검해 보아야 한다.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 항상 이 약속을 목표와 생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 성령님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죄와 죄들로부터 자기를 거룩케 하기 위하여 애를 써야 된다. 그리고 양립할 수 없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자신", "자아"이다. 내가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한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세 번째는 기도하는 일이다. 믿음을 인과론적 차원에서 동원하면 잘못이듯이 기도 역시 방법론적 차원에서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인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큰 상징이다. 

 

마지막으로 전심전력해야 한다. 정열을 다하라는 것 뿐 아니라 인내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오랜 시간, 이것을 얻기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참고 도서

번호

제목

저자

역자

출판사

1

개혁주의 성령론

죤 오웬

이근수

여수룬출판사

2

성령

존 월부어드

이동원

생명의 말씀사

3

성령론

로이드죤스

홍정식

새순출판사

4

성령론

빌리그래함

전민식

충현출판사

5

성령론

레만스트라우스

 

생명의 말씀사

6

성령론

R.A. 토레이

심재원

대한기독교서회

7

성령론

박영선

 

크리스챤서적

8

성령

팔마

최낙재

개혁주의 신행협회

9

성령론

조용기

 

영산출판사

10

성령의 사역

R.A.토레이

이성강

기독교문서선교회

11

성령의 인격과 역사

어네빠쉬

정학봉

요단출판사

12

성령과 그의 은사

J.O.샌더스

권혁봉

요단출판사

13

성령의 인침

랄프 W. 니이버

도한호

침례회출판사

14

은사와 은혜

아놀드 바틀링거

정인찬

기독지혜

15

은사확인론상하권

원세호

 

국제신학연구소

16

성령세례

로이드죤즈

정원태

기독교문서선교회

17

조용기목사와 성령운동

안준배

 

박영사

18

현대방언운동연구

R.그로마키

 

기독교문서선교회

19

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성령론

아쳐 토리

 

한국양서 

20

오순절세례

윌리암칼드웰

이희숙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21

참방언과 거짓방언

데일요컴

김용련

성결교 출판부

22

성령의 약속

바클레이

서기산

기독교문사

23

기독교강요

존칼빈

이종성

대한 기독교서회

24

기독교강요

존칼빈

김종흡

생명의 말씀사

25

세례와 성령 충만

존 스토트

IVP

한국기독교학생출판부

26

성령론

찰스 핫지

황승룡

한국장로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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