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8 13:47

새로운 설교학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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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설교학 운동

(The New Homiletics)

 

주승중(장신대 예배와 설교학 교수)

 

들어가는 말

 

지난 1970년대 이후 현대 설교학에서는 “새로운 설교학 운동”이라는 커다한 설교의 갱신 운동이 일어난 바 있고, 이 운동은 서구의 설교학에서는 현재진행형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아직 한국교회에서는 이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으나 다행히 지난 2002년에 장로회 신학교 내에 있는 “교회와 커뮤니케이션 연구원”에서 북미주 설교학회 회장이었으며, 캐나다의 유명한 개혁신학교 중의 하나인 낙스 칼리지(Knox College)에서 설교학을 가르치고 있는 스테판 패리스(Stephen Farris)교수를 초청하여 “새로운 설교학 운동”의 역사와 그 내용에 대해서 특강으로 소개한 바가 있다.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한 작은 책을 통해서 시작된 운동이다. 설교학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르러 인식적이고 명제적인 설교에 대한 몇 차례의 경고들이 주어졌다. 그리고 1960-70년대 초에 이르러 모든 권위가 부정되어지고, 도전을 받게 되는 시대적인 흐름이 이어지면서 지금까지의 개념중심의 명제설교에 대한 회의가 제기되었다. 즉 1960년대의 전 세계적인 히피들의 자유운동과 또한 월남전쟁 반대운동, 그리고 시민불복종 운동 등의 인권 운동을 통한 자유의 흐름은 그 동안의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그 권위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전통적인 권위가 도전받는 사회의 시대적인 흐름은 결국 전통적인 교회와 그리고 설교 분야에도 어김없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시 미국 남부의 에모리 대학의 캔들러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였던 프레드크레독(Fred Craddock)은 [권위 없는 자처럼](As One Without Authority)이라는 조그마한 책을 쓰게 되었는데(1971년), 그 책이 바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모든 권위가 도전받고, 부정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설교자들이 “권위 없는 자로서”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을 일으키게 된 동인이었다. 이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로마 가톨릭의 설교와 개신교의 설교에 중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는데, 그래서 흔히 이것은 “설교학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프레드 크레독이라고 하는 한 설교학자가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가 [권위 없는 자처럼]이라는 책을 쓰기 이전에 이미 새로운 설교학 운동이 태동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중요한 요인이 더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해석학적인 토대의 변화에 있다. 이에 대해서 데이빗 버트릭(David Buttrick)이라는 설교학자는 새로운 설교학 운동이 20세기 성서신학 운동의 산물이라고 한다. 과학의 발단과 계몽주의 인식론의 영향을 받아, 지난 200년 동안 성서신학에서는 역사비평학이 그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고, 설교학은 그런 성시신학의 영향을 받아 이성주의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해석학은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인 해석학에서 수사학적인 해석학으로, 이성적인 해석학에서 미학적인 해석학으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성경 본문의 문법적, 역사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졌던 기존의 방법에서 벗어나 성서의 문학적인 표현에 관심을 기울이는 문학적 비평이 대두되었다. 그리고 이제 성서신학의 초점이 언어의 기능에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비유, 직유, 내러티브, 신화 등과 함께 메타포어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해석학적인 변화는 설교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은 이야기신학(narrative theology)의 재등장이었다. 그 결과 신학적인 논의에 있어서 이야기가 매우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야기는 새로운 설교학 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특별히 어거스틴이 설교학에 헬라의 수사학을 받아들인 이후,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성경의 주해적인 방법이 그 중심적인 형태를 이루면서 성경의 이야기성(서사성)은 점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야기 신학의 재등장으로 인하여 성경이 인간을 구원한 하나님의 이야기임을 알게 되고, 이야기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는데 가장 중요한 매개체라는 사실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의 재발견은 새로운 설교학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시대적인 상황의 변화와 함께 해석학적인 토대의 변화, 그리고 이야기의 중요성의 재발견 등의 영향으로 인하여 새롭게 시작된 설교학 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몸 말

1.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명제적-논증적 설교(Propositional Discursive Preaching)를 부인하고, 귀납적 설교를 강조한다.

그동안 전통적인 설교는 주로 연역적인 접근을 통해서 설교를 명제적이고 논증적으로 진행하였다. 전통적인 설교에 있어서 연역적인 접근은 일반원리에서 특수한 상황으로 적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즉 연역적인 설교는 초반부에 설교의 중심사상이나 명제를 제시하고, 본문에서 3개 정도의 대지와 또한 각 대지를 보충해주는 소 대지들을 가지고 그 중심사상이나 명제를 증명하고, 그리고 예화 등을 통해서 회중들의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것은 흔히 한국교회에서도 설교자들이 가장 즐겨 쓰는 “3대지 설교”의 형태를 말한다.

그러나 크레독(Craddock)은 이런 접근 방식에 회의를 품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단순한 관념들(idea)의 상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깊은 감동을 주는 소설이나 연극, 혹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것들을 통해서 받은 감격스러운 경험을 하나의 명제 또는 중심사상으로 압축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의 본문들 안에는 어떤 개념적인 틀 안에 다 짜 맞출 수 없는 분위기와 움직임들과 갈등들, 어떤 사실의 돌발적인 출현,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경험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어떤 본문의 중요 개념에만 집착하는 연역적인 설교는 본문을 너무 얕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크레독(Craddock)은 전통적인 설교가 가진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점들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귀납법적인 설교 형식을 제시하였다. 귀납법적인 방법은 특수한 상황에서부터 일반적인 원리를 발견해내는 방법이다. 즉 귀납법적인 설교는 특수한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관찰, 질문, 예, 경험들로부터 출발하여 어떤 일반적인 원리를 인도해 내는 설교이다. 크레독의 지적에 의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발견하고, 학습할 때에 귀납법적으로 행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설교도 귀납법적으로 전개되어야 회중들이 설교를 더욱 관심을 가지고 듣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자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에는 이렇게 귀납법적으로 하고, 전달할 때에는 연역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크레독에 의하면 설교자에게 있어서 본문 석의는 본문에서 메시지를 발견하기 위한 감격적인 과정이다. 즉 설교자는 석의라는 과정을 통해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탐구하게 되며, 그 과정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모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설교자는 처음부터 설교의 중심사상이나 명제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본문을 묵상하며, 단어와 문법을 연구하며, 역사, 문학, 사회학적인 비평을 통하여 본문을 주석하고, 그 이후에 여러 가지 시험의 단계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본문의 중심사상 또는 명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설교를 준비할 때에는 항상 귀납법적으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크레독은 지적하기를 설교자들이 이렇게 설교를 준비할 때에는 귀납법적으로 하면서, 정작 설교를 전달하기 위하여 원고를 작성할 때에는 연역법적인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의하는 단계에서 설교를 디자인하고 써 내려가는 과정으로 넘어가면서 석의 단계에서 발견했던 감격들이 다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즉 본문 석의의 귀납적인 감격이 설교의 연역적인 훈계에 의해 대체되어 버림으로 설교의 감격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크레독의 표현에 의하면 본문을 연구하는 석의 단계에서 “드디어 찾았다”를 외쳤던 기쁨과 감격이 설교를 전달할 때 “오늘 아침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에 관한 것입니다”라는 말과 같은 생명도 없고, 감격도 없는 소리로 뒤바뀌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레독은 석의에서 발견한 중요한 메시지들을 전달하는데 있어서도 설교자는 “권위 없는 자”로서 귀납법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석의의 과정에서 설교자가 귀납적으로 연구해 가면서 “아하, 이것이구나”라고 외쳤던 자리에, 청중들도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 과정이 만들어져서, 그들도 역시 “아하”라고 외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중들은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발견하거나, 인생을 경험할 때, 그리고 문제를 해결할 때에도 항상 귀납적으로 행하기에 설교를 들을 때에도 귀납적으로 듣게 될 때 훨씬 더욱 효과적으로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고, 설교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크레독의 이러한 주장은 설교학에서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설교학 이론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설교학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확장되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2.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설화(Narrative) 또는 이야기를 중시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God's Story),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이야기를 섬기는 종이라고 한다면, 설교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많은 부분이 이야기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70년대 이후로 성경의 문학비평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성경학자들과 설교학자들은 성경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 구약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스리시며,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다스림 가운데서 살아가는 가에 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복음서 역시 그 대부분이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되어 있으며, 예수님께서도 그의 설교의 대부분을 이야기로 전하셨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들려주신 선한 사마리아인과 탕자 그리고 씨 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들이 바로 이야기였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간단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동정과 용서, 그리고 개인적인 책임과 같은 중요한 개념들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 가르치고자 하였을 때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를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선한 목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야기 없이 설교하지 않으셨다." 사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생애가 하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레디 데이비스라는 설교학자는 “복음서의 아이디어들은 주로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의 형식은 70년대 이래 “새로운 설교학 운동”에서 논리적이고, 명제 중심적인 설교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하였다. 즉 “새로운 설교학 운동”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설교의 네러티브에 강조점을 둔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어떤 점에서는 내러티브 설교학이다. 전통적인 설교는 교리를 중심으로 엮어지며, 명제를 중심으로 한 대지들로 나누어, 논리적인 설교의 형태를 지닌다. 즉 설교는 논리를 통해 성경의 교훈과 교리를 가르치고, 성경의 내용을 전수해 주는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그 결과 이야기는 어떤 명제를 설명하고 예증하기 위한 예화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야기는 하나의 명제적인 진술 안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말씀하실 때, 그것은 단순히 자신이 실제로 말하고 싶은 것에 청중들의 귀를 기울이게 하려고 부제나 가벼운 소재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요지에 대한 실례가 아니라, 바로 요지 그 자체였다.

그러기에 지난 70년대 이래 성경신학과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중요성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설교학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새로운 국면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설교학”의 주류에서는 이제 설교를 “이야기를 말하는 것(storytelling)”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설교자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storyteller)”으로 이해한다. 많은 설교학자들은 성경의 대부분이 이야기로 쓰였기에 설교도 이야기로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성경의 문학적 형태를 가장 존중하는 설교의 형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현대사회는 이야기에 젖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V의 연속극, 영화, 연극, 시사뉴스 등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귀납적이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의 심성에 이야기가 더 와 닿아서 그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가 있게 된다. 우리가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삶이 하나의 드라마이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성경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중요한 요소이다. 이야기는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는 새로운 가능성과 함께 설교를 진정 가능케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설교학 운동”에서는 이야기를 그렇게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복음의 경험(Evocation of Experience)을 강조한다

새로운 설교학의 중요한 세 번째 특징은 복음의 경험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설교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명제적이고 확실한 사상의 진리를 회중들에게 확신시키는 것도 아니다. 설교는 복음의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설교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즉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설교의 목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있어서 그 의도가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경험에 있다. 다시 말해서 그 동안의 설교의 구조는 주로 말씀에 관한, 혹은 교리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전해주는 정보 전달 중심이었다고 한다면,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주로 말씀의 경험에 주안점을 둔다는 사실이다. 어떤 신학적 명제나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그에 대한 지적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을 설교의 주요 목적으로 삼던 전통적인 설교와는 달리 청중들이 복음을 경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경험이라 함은 인간의 의식 속에 말씀을 깨닫게 되는 차원을 의미하는 용어로, 이것은 지적, 심미적, 감정적 차원을 포함하는 통전적인 차원에서의 인식 작용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드라마에서 내용이 전개되어 가는 동안 어떤 드라마의 결론 부분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깊은 감동을 맛보게 되는 차원의 경험을 말하며, 이를 통해 바로 그 드라마가 제시하는 메시지를 경험하게 된 순간을 말한다. 또한 수사극에서 A라는 인물이 범인인지, B라는 인물이 범인인지 혹은 C라는 인물이 범인인지 궁금해 하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고, 드라마가 전개되는 동안 여러 가지로 복선이 깔려 있던 사실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그 사람이 범인이었구나”를 외치게 되는 단계가 바로 경험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이것은 인식의 전환에서 일어나는 단계이며, 어떤 사실을 전인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에서 회중들은 전인적인 차원에서 설교자가 제시한 말씀을 통해 성경의 네러티브를 나의 사건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을 나의 사건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그들은 직관적인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유명한 설교학자 헨리 미첼(Henry Michelle) "대리적인 만남“(vicarious encounter)라고 칭한다. 즉 설교를 통해 성경의 사건과 말씀을 나의 사건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설교자는 청중들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성경의 이야기를 다시 해석해 줌으로써 그 사건을 오늘 여기에서 대리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특별히 새로운 설교학에서는 이런 청중 내면의 경험을 불러일으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네러티브이며, 이것은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제 설교는 청중들에게 말씀의 세계에 대한 어떤 정보를 전달하여 인지시키고, 설득하려는 경향(말씀의 지적인 측면)에서 더 나아가 감성적인 차원에 대해서도 깊은 고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설교는 이제 논리적이고 논증적인 구조를 취하려고 했던 전통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말씀을 통한 사람들의 경험에 그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다.

프레드 크레독은 그 한 예로 유명한 “출석을 부를 때”라는 설교를 제시하였다. 크레독은 로마서 16장을 본문으로 한 이 설교에서 자신이 미국의 애팔래치안 산맥의 남쪽에 위한 작은 교회에서 목회했던 특별한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는 그 교회를 떠나올 때 한 교인이 그 교회 교인들의 이름이 하나 하나 바느질된 침대보를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크레독은 이사를 갈 때마다 그 오래된 침대보를 꺼내 놓고 침대 위에 그것을 펴 놓았다. 그리고 그와 그의 부인은 침대보 위에 수 놓여 있는 그 시골 교회의 교인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좋은 기억도 있고, 나쁜 기억도 있다. 그가 부임할 때 반대 투표를 던진 이도 있고, 목사의 자동차 타이어를 고쳐 준 부부의 이름도 있다. 술만 먹으면 난폭해지는 남편과 함께 살면서도 항상 조용하고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부인의 이름도 있다. 크레독은 이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이름을 기록하십시오. 당신의 주보나 종이를 꺼내고 기록하십시오”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제가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당신이 나에게 해준 일들 때문에) 나의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을 기록하라고 하였다. 크레독은 “당신과 함께 믿음의 친구들의 기억을 취하십시오. 텔레비전이나 스테레오는 버리십시오. 그러나 만약 책이 꼭 필요하다면 그 기억과 함께 책을 취하십시오. 죽음으로 인해 그 기억이 끝날 때까지 가지고 가십시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교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라고 하였다.

스테판 페리스 교수는 그가 강의하는 학교에서 해마다 1학년 학생들에게 크레독의 이 설교를 테이프로 들려주곤 하는데, 이 설교가 끝난 다음에 말없이 칠판으로 가서 “나는 ....모든 나의 기억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쓰고는 한 사람의 이름을 적는다고 한다. 그리고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학생에게 말없이 분필을 건네주면, 학생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행한다고 한다. 학생들은 차례대로 나오고, 복음 안에서 서로 도움이 되었던 친구들의 이름으로 칠판이 가득 찰 때까지 교실은 조용하다고 전한다. 그리고 스테판 교수는 “이 지구 안에서 복음의 경험보다 더 소중한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이 강조하고 있는 바 복음의 경험이다. 회중들은 설교를 통해서 가능한 한 복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의 삶이 변화되고, 말씀에의 순종함이 있어지기 때문이다.

 

4. 설교의 다양한 형태에 관한 관심

설교의 형태는 설교의 의미와 효과를 살리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의 기어 변속기가 아무런 소리 없이 기어 변속을 하는 것과 같다. 즉 설교의 형태는 비록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자동차의 기어 변속과 같이 설교가 계속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그러나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설교의 형태에 대한 관심은 무시되어 왔다. 설교자들은 그 동안 ‘무엇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지이 않았다. 그러나 설교의 형태는 설교라는 그릇을 빗어내는 진흙 모형과 같은 것으로 ‘설교의 자료들이 조직되는 구조’를 말한다. 이것은 설교 가운데서 무엇이 일어나게 할 것인지, 설교를 통해서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결정짓는 조직적인 계획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내용과 더불어 설교의 형태는 효과적인 설교를 위하여 필수적인 요소이며, 설교가 흘러가는 방향과 그 흐름을 결정짓는 강의 제방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설교의 형태는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설교의 틀은 주로 그 전개 형태에 있어서 연역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고, 구성의 특성으로는 주로 논리적이고, 명제적인 설교의 형태와 주제 설교의 형태, 3개 정도의 대지로 나누어서 주제를 설명하는 대지 설교의 형태를 따랐다. 사실 설교 형태라고 하는 측면에서 보면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거의 한 가지 형태에 고착되어 있는 모습이다. 다양성은 거의 무시한 채, 오직 한 가지 방법론(주로 3지창 설교의 형태)을 고집하거나 그것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 안에는 얼마나 다양한 형태들이 있는가? 또한 예수님께서도 얼마나 다양한 형식으로 말씀을 전달하셨는가? 예수님은 비유, 이야기, 논리적 교리, 편지, 묵시, 찬송 등 다양한 문학적인 표현들을 사용하셨다. 그렇다면 설교자들은 다양한 설교의 형태에 관심을 가지고 그 형태를 새롭게 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설교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 즉 계몽주의 이후로 형성되어 온 연역적인 구조의 3대지 설교에 집착하던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접근방법을 제시하였다. 특별히 전통적인 설교형태에 대해서 그 한계를 지적하면서 성경의 문학적인 형식을 따라 설교하는 형식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본문의 문학형식이 narrative이면, 이야기 설교의 형태를 갖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형태임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렇듯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성경이 다양한 형식을 통해 복음을 제시하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설교의 형태의 다양한 형식에 관심을 기울인다.

 

5. 설교의 언어에 대한 관심과 상상력

마지막으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설교의 언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언어는 인간의 의식 속에 무엇인가를 일어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기에 새로운 설교학은 언어의 사용에 관심을 기울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언어의 형태를 통하여 전달되기 때문이고, 언어는 청중들의 의식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영상으로 맺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전통적인 설교학에서 강조되어 온 언어는 주로 논리적이고, 논증적이고, 명령적이고, 분석적인 언어였다. 그런데 이런 언어는 주로 인간의 좌뇌를 자극하여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데 이런 언어는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그들의 삶을 바꾸는 데에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우뇌 접근 방식의 언어는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며, 보여 주고, 느끼게 하는 언어이다. 여기서 우뇌 방식의 언어는 바로 그림언어를 말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상상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언어, 그것이 바로 우뇌 접근 방식의 언어이다. 그래서 새로운 설교학 운동에서는 청중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게 하는 시적인 언어, 즉 그림 언어를 매우 중요시한다.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시각적 매체인 TV나 멀티미디어 등의 영상 매체는 이미지와 상상력이 풍부한 세계인 성경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자연스럽게 해 준다. 설교자가 설교 본문으로 삼고 있는 성서가 바로 이야기와 이미지, 상상의 언어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자, 시편의 시인,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이미지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또 지금도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성경 안에는 비유, 시, 잠언, 기도, 연설, 은유, 역사, 법률, 계약, 전기, 극, 묵시, 설화 등 많은 다양한 형태의 문학 형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어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읽고 있는 본문의 문학적인 형식과 그것의 독특한 관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성경의 많은 부분은 시로 되어 있다. 그런데 보통 시인은 시를 쓸 때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말의 비유적인 표현이나 상징적인 표현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농부가 “땅은 비를 필요로 한다.”고 할 때 그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땅은 비를 갈급해 한다.”고 표현한다. 시인은 이 표현을 통해서 사실을 말하면서도 우리의 느낌에도 진실로 통하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합리성과 논리를 추구하는 전통적인 해석 설교는 이런 시조차도 논리적으로 해석을 시도한다. 그 동안 많은 설교자, 특별히 한국 교회의 설교자는 본문의 문학 형식이 어떤 것이든지, 시(詩)도 3대지 설교로, 설화체 이야기도 3대지 설교로, 산문도 3대지 설교로, 은유도 3대지 설교로, 비유도 3대지 설교로 설교해 왔다. 그래서 본문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특성과 그 내용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상상력과 생명력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제 ‘읽는 문화’에서 ‘보는 문화’로 바뀌어 가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설교자는 성경 본문의 문학적인 장르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며, 성경의 저자로부터 상상이 담긴 표현과 은유와 그림 같은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오늘의 설교자는 산문의 세계(Prose-Flattened World)에서 시인의 세계로 넘어가야 한다. 월터 부르그만(Walter Brueggemann)은 그 동안 복음의 진리가 설교자에 의해서 단조롭게 되고(flattened), 사소한 것으로 되고(trivialized), 그리고 공허한 내용이 되어 버렸음을 지적하면서, 설교의 세계가 갱신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설교가 갱신되려면 극적이며(dramatic), 예술적이며(artistic), 사람들을 대화에 참여시키는 언어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은유와 그림 같은 언어, 상상이 담긴 언어를 되살리는 설교란 어떤 것인가?

 

1) 상상이 담긴 설교: 마음의 화랑에 말씀을 그려라

사실 좋은 설교를 위한 상상력의 중요성은 최근에 강조된 것이 아니다. 이미 100년도 더 전에 미국의 가장 유명한 설교학 강좌인 예일 대학의 라이만 비처 강연(Layman Beecher Lecture)에서 헬리 워드 비쳐가 상상력은 “설교자가 가져야 할 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찰스 라이스(Charles Rice)도 “상상력의 활동을 수용하는 능력은 설교를 형성하는 데 극히 중요한 것”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마음의 상상력: 설교의 새로운 이해」(Imagination of the Heart)라는 책에서 윌슨도 설교자는 청중의 마음에 닿도록 할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영혼을 움직이는 상상력을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상상이란 무엇인가?

상상이란 우리의 마음 속에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이다. 위어스비는 “상상은 정신이라는 인간 내면의 화랑(Inner Picture Gallery)에 어떤 상을 만들어 내는 정신 작용”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정신의 화랑에서 상상을 통해 그림도 그리고 상도 조각하고 고안하며 어떤 것은 지워 버리기도 한다. 즉 우리는 언어를 가지고 말하고 쓰는 일을 하지만, 생각을 할 때는 언제나 상상력을 동원한 영상이나 그림을 통해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을 보다 활력 있게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며, 따라서 상상이야말로 우리 삶을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문자 이후 시대의 설교자의 과제는 “자기의 상상력을 활용해서 성서와 회중의 만남을 연결시키는 일을 중재하고 촉진시키는 것이며, 성경 본문의 형상(imagery)이 회중에게 보이고, 들릴 수 있도록 그것을 명료하고 힘있게 제시해야 한다.” 즉 설교자는 성경 저자가 제시하는 이미지와 은유, 이야기의 상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회중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위어스비가 소개하는 사무엘하 17장의 이야기를 소개해 보자.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몰아 내고 왕좌에 올랐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광야로 도망을 간 아버지 다윗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 때 모사 아히도벨은 이렇게 조언을 하였다.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나로 하여금 사람 일만 이천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따라 저가 곤하고 약할 때에

엄습하여 저를 무섭게 한즉 저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모든 백성으로 왕께 돌아오게 하리니 무리의 돌아오기는

왕의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삼하 17:1-3)

 

그런데 압살롬은 또 다른 사람, 즉 후새의 의견도 듣기를 원했다. 그 때 후새가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부친과 그 종자들은 용사라 저희는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병법에 익은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이제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좇는 자 가운데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비록 용감하여 사자 같은 자의

마음이라도 저상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부친은 영웅이요 그 종자

들도 용사인줄 앎이니이다 나의 모략은 이러하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 왕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저를 엄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저의

위에 덮여 저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또 만일 저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한 작은 돌도 보이지 않게 할 것이나이다”

(삼하 17:7-13)

 

위의 두 사람의 의견을 들은 압살롬은 결국 후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의 반란은 후새의 의도대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다면 아히도벨과 후새의 이야기의 차이는 무엇인가? 먼저 아히도벨의 말은 합리적이고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 만일 이 때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의 반란은 성공적으로 끝날 수가 있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아히도벨은 사람들의 지성에 호소하는 “왼쪽 뇌” 접근 방식을 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조언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반면에 후새는 그림을 그리듯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후새가 사용한 직유 및 은유를 보자.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같이”, “용감하여 사자 같은 자”, “저상하리니(얼어붙다)”,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등이다. 이런 표현은 듣는 압살롬으로 하여금 상상의 눈을 통해서 후새가 하는 말을 마치 그림을 보듯 떠올릴 수 있게 하는 말이다. 위어스비는 압살롬에게는 특별히 “바닷가의 많은 모래”,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등의 표현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후새는 감정에 호소하는 “오른쪽 뇌” 접근 방식을 택한 것이었고, 그것이 압살롬에게 더욱 효과적이었다는 것이다. 압살롬은 후새의 말을 듣는 가운데, 바닷가의 많은 모래를 상상하면서 그릇된 안전감을 느꼈을 것이며, 땅에 내리는 이슬을 상상하면서 일을 쉽게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도취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말은 “들었지만”, 후새의 말은 “보고 느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비록 아히도벨의 모략이 사실적이고 훌륭했으나, 압살롬은 후새의 말에 설득당한 것이었다. 후새는 압살롬으로 하여금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으며, 상상 속에서 이미 승리의 주인공이 된 자신을 그려 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문자 이후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의 설교자는 이렇게 성경 저자가 사용하는 상상이 담긴 언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며, 그들이 사용하는 이미지를 오늘의 설교에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2) 이미지에 담긴 설교: 성경의 그림을 마음에 그려라

오늘 설교자가 시인이나 이야기하는 사람의 그림 같은 언어를 좀더 사용할 수만 있다면 회중의 정신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응답하도록 초청하는 그런 방법으로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 이후 시대의 청중이 메시지를 인쇄물이나 말로 표현되는 언어뿐만 아니라 그림을 통해 시각적으로 전달받고 있기에, 설교자는 이미지가 풍부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회중으로 하여금 그 마음 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바로 그런 면에서 앞에서 소개한 위어스비의 책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이 곳에서 성경에 담긴 여러 이미지를 소개하고 있다. 즉 모세 오경의 그림, 역사서의 그림, 시가서의 그림, 예언서의 그림, 예수님의 그림, 사도행전의 그림, 교회에 대한 그림과 요한계시록에 타나난 그림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시간과 지면상 여기서 그 내용들을 소개할 수는 없고, 다만 설교자에게 그림 언어가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나 깊숙이 파고드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게리 스멀리(Gary Smally)의 책에서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가정에 문제가 있어 집을 나간 아빠를 돌아오게 한 딸의 편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스멀리는 소개하기를 그 딸은 집 나간 아빠에게 “아빠 돌아오세요. 우리는 아빠가 필요해요.”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딸은 단지 아빠가 자신의 삶에 필요하다는 것을 이렇게 그림을 그리듯이 설명하여 아빠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빠, 저는 우리 가족이 오랫동안 좋은 차를 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빠는 항상 회사차 같은 그런 차를 가졌으면 했잖아요. 안에는 온갖 좋은

것들로 치장되어 있고, 밖에는 긁힌 자국이 전혀 없는 그런 차 말이에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차에 조금씩 문제가 생겼어요. 차에서 매연이 많이 나오고,

바퀴가 흔들거리기 시작하고, 시트 커버는 찢어졌어요. 그 차를 산 이래로 아빠와

엄마가 늘 앞좌석에 앉아 계셨고, 저와 브라이언은 뒷좌석에 앉아 있었죠. 우리는

아빠가 운전하고 엄마가 그 곁에 앉아 있었을 때는 정말 안전하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지난 달에는 엄마가 운전을 했어요. 밤이었어요. 갑자가 웬 차가 우리를

향해 질주해 오는 것을 보았어요. 엄마는 길 옆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그 차에 사정

없이 들이받히고 말았어요. 엄마는 심하게 다쳤어요. 바퀴에 깔렸거든요. 갈비뼈가

여러 개 부러졌어요. 갈비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폐에 구멍이 뚫리고 거의 심장을

꿰뚫을 뻔했어요. 저는 차에서 퉁겨나갔어요. 오른쪽 다리가 부러진 채

차가운 맨바닥에 오랫동안 방치되었어요. 그 날 밤 사고를 겪고 나서 저는 우리가

과연 회복할 수 있을지 많이 생각해 보았어요. 고통이 아주 심해요. 그렇지만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가 아빠를 도무지 볼 수 없다는 거에요. 밤이 되면 병원은

정말 조용해요. 우리는 아빠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그 때가 참으로 그립다는 등,

아빠가 우리와 함께 있으면 참 좋겠다는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요. 아빠는

괜찮으세요? 우리에게 아빠가 필요하듯이 아빠에게는 우리가 필요하지 않으세요?

아빠 사랑해요.”

 

딸은 아빠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림을 그리듯 묘사함으로써 아빠를 설득하고 있다. 결국 아빠는 딸의 이 그림 언어의 편지에 의해 가족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렇듯 그림 언어는 우리 일상 생활에서도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언어보다는 청중들이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그림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즉 오늘의 설교자는 보다 효과적인 설득을 위해서 “말을 하는 대신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월터 부르그만이 설교자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올바른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설교자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설교자는 은유와 직유, 이야기와 이미지가 풍부하여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신선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를 어떤 이미지를 사용해서 청중의 마음에 그림을 줄 수 있을까?”를 늘 마음 속으로 그려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미지 언어

우리가 신약성경을 보면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앞서 말한 상상이 담긴 설교와 이미지에 담긴 설교를 가장 잘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는 그 속에서 이미지를 풍부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직유, 은유, 수수께끼, 비유, 역설 등을 사용하셔서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즉 예수님은 이 땅의 일상적인 것을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이용하셨다. 예수님은 후새의 방법을 사용하셨고, 사람들의 ‘귀에다 말씀하시지 않고, ‘눈에다’ 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주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마 6:26-30)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청중이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그림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사랑을 표현하실 때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과 같이 내가 내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마 23:27)고 말씀하심으로 은유와 이미지를 가지고 청중이 그 분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그려 주셨다. 예수님은 헤롯왕을 표현할 때도 “헤롯은 교활하고 믿지 못할 사람이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여우’(눅 13:32)라고 이미지를 사용하셔서 은유적으로 말씀하셨다. 그 외에도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그러므로 오늘의 설교자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 그리고 감성을 포함한 전인을 향해 메시지를 전하신 주님의 모습 속에서 설교자가 나아갈 방향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동안 머리로만 모든 것을 생각해 온 인쇄 매체 시대의 설교는 이제 가슴(마음)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스타일로 바뀌어야 한다. 전자 이후 시대의 회중은 TV와 영상매체에 의해 메시지를 받는 데 익숙한 회중이다. 그들은 시각적인 이미지에 의해서 메시지를 소화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설교자는 원래 성경 저자로부터 은유와 그림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롯해 구약의 예언자, 시편 기자가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 감성을 포함한 전인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 다채로운 언어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이제 설교자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자 이후 시대 설교 패러다임 변화의 방향이다.

그리고 이 흐름은 오늘의 예배 현장에도 일어나고 있다. 에밀리 브링크는 ‘기독교적이고 개혁 교회적인 예배’라는 그의 글에서 오늘의 공적인 예배가 합리적인 것에서 정서적인 것으로 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개혁 교회의 예배는 이제 ‘읽는 것’ 중심에서 ‘보는 것’ 중심으로, 담론에서 잔치로 변하고 있는데, 이는 북미의 텔레비전 문화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제 언어는 사유의 표현이 아니라 느낌의 표현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전 세대가 가슴을 희생시키면서 머리를 강조했다면, 이 세대는 가슴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 드라마의 역할이 커지고, 시각적인 상징에 보다 더 개방적이 되어 가는 것도 머리에서 가슴으로 강조점이 바뀌고 있는 변화의 일면이라는 것이다. 오늘 설교자는 바로 이런 새로운 설교학 운동의 변화의 물결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설교학 운동”이후의 다양한 설교의 형태들

 

1. Fred Craddock의 Inductive Preaching(귀납적 설교)

Fred Craddock. As One Without Authority. 『권위없는 자처럼』김운용 역. 서울: 예 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3.

Fred Craddock. Preaching. 『설교』 김영일 역. 서울:컨콜디아사, 1989.

Fred Craddock. Overhearing the Gospel. Nashville: Abingdon Press, 1978.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교인에게 “당신이 오늘 들은 설교의 형태는 무엇이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교인들은 매우 당황할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무엇을 말했는지, 또 그들이 받은 은혜와 결단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묻는다면 그들은 아주 쉽게 대답할 것이다. 이처럼 설교의 형식은 설교하는 자나 듣는 자가 다 같이 무관심할 수 있는 분야이다. 그러나 설교의 형식은 설교의 의미와 효과에 있어서 절대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할포드 루코크(Halford Luccock)는 “설교의 힘은 그것을 어떻게 치장하느냐에 있지 않고, 그것의 구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 것이다. 설교의 형태는 강줄기의 흐름에 있어서 강둑만큼이나 설교의 흐름과 방향을 결정해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모든 성경에 다 맞을 수 있는 설교의 형식은 없다. 다시 말해서 모든 본문에 적합하게 맞는 단 하나의 설교의 형식은 없다는 말이다. 설교의 어떤 형식도 모든 설교에 적합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설교 형식을 찾으려면 무엇보다도 본문의 문학 형식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까닭은 대부분의 문학 형식이 성경에 깔려 있는 본래의 설교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레독(Craddock)은 “설교의 형태는 신약성경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수사학의 형태만큼이나 다양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학 형식은 설화체(narrative) 형식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지난 1970년대 이래 설교학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설교 형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귀납법적 설교 형식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귀납법적 설교 형식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1) 연역법과 귀납법

전통적인 설교에 있어서 연역법적 접근은 일반 원리에서 특수한 상황으로 적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즉 연역법적 설교는 설교 초반부에 설교의 중심 사상이나 명제를 제시하고, 본문에서 3개 정도의 대지와 또한 각 대지를 보충해 주는 소대지를 가지고 그 중심 사상이나 명제를 설명하고 증명하고 그것을 회중의 삶에 적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연역법적 설교에 있어서 성경은 신학적 아이디어와 진리의 보고로 이해되며, 성경 석의의 목적은 그런 것을 담고 있는 본문이라는 그릇에 이르러 본문에서 중심되는 사상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설교자가 본문의 중심이 되는 주제를 이해하면, 설교자가 이 주제를 설교에서 다루게 된다. 즉 설교자가 석의를 통해 발견한 본문의 주요 아이디어는 설교의 명제가 된다. 그리고 이 중심 사상은 여러 요소로 세분되며 설교의 대지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연역법적 설교의 장점은 짜임새 있고 메시지가 선명한 설교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설교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해서 조직적으로 배열되기 때문에 어떤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내용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설교가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회중의 입장에서도 그 메시지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교학자들은 ‘중심 사상’을 핵심으로 접근하는 이런 설교 방식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왜냐 하면, 성경이 단순한 관념(Idea)의 상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깊은 감동을 주는 소설이나 연극, 혹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것을 통해서 받은 감격스러운 경험을 하나의 ‘명제’ 또는 ‘중심 사상’으로 압축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 본문 안에는 어떤 개념적인 틀 안에 다 짜맞출 수 없는 분위기와 움직임과 갈등, 어떤 사실의 돌발적인 출현, 다른 여러 가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어떤 본문의 중요 개념에만 집착하는 연역법적 설교는 본문을 너무 얕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크레독은 전통적인 설교가 가진 이런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귀납법적 설교 형식을 제시했다. 귀납법적 방법은 특수한 상황에서부터 일반적인 원리를 발견해 내는 방법이다. 즉 귀납법적 설교는 특수한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관찰, 질문, 예,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어떤 일반적인 원리를 인도해 내는 설교이다. 크레독의 지적에 의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발견하고, 학습할 때 귀납법적으로 행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설교를 귀납법적으로 전개해야 회중이 설교를 더욱 관심을 가지고 듣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는 이렇게 귀납법적으로 하고, 전달할 때에는 연역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크레독의 말에 의하면 설교자에게 있어서 본문 석의는 본문에서 메시지를 발견하기 위한 감격적인 과정이다. 즉 설교자는 석의라는 과정을 통해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탐구하게 되며, 그 과정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모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설교자는 처음부터 설교의 중심 사상이나 명제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본문을 묵상하며, 단어와 문법을 연구하며, 역사, 문학, 사회학적인 비평을 통하여 본문을 주석하고, 그 후 여러 가지 시험 단계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본문의 중심 사상 또는 명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설교를 준비할 때는 항상 귀납법적으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크레독은 이렇게 지적한다. 문제는 설교자들이 이렇게 설교를 준비할 때는 귀납법적으로 하면서, 정작 설교를 전달하기 위해 원고를 작성할 때는 연역법적인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의하는 단계에서 설교를 디자인하고 써 내려가는 과정으로 넘어가면서 석의 단계에서 발견했던 감격이 다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즉 본문 석의의 귀납법적 감격이 설교의 연역법적 훈계로 대체되어 버림으로써 설교의 감격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크레독의 표현에 의하면 본문을 연구하는 석의 단계에서 “드디어 찾았다.”를 외쳤던 기쁨과 감격이 설교를 전달할 때 “오늘 아침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에 관한 것입니다.”라는 말과 같은 생명도 없고, 감격도 없는 소리로 뒤바뀌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설교자가 그가 택한 주제를 대지로 나누게 될 때 그 앞 단계에서 경험했던 열정은 다시 가질 수 없다. 물론 그의 개념이 위에서 아래의 청중들에게로 진리를 전달하는 사람의 개념이 될 때 더욱 그렇다. 강단에서 그 자신이 가졌던 발견의 단계를 다 시 재현하고 싶은 생각도 가끔 갖지만, 설교자는 그의 연구실에서 가졌던 것을 강단 으로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신학교에서 배운 교훈을 회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간단히 물 리쳐 버린다. 그러고 나서 설교자가 무엇을 하겠는가? 그가 만약 좋은 설교자라면 그는 그의 설교가 지루하게 되는 것을 단호히 배척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잡은 서너 개의 대지 사이에 유머나 인용구, 예화나 시 등을 사용하면서 그의 논리적인 설교를지 루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려 깊고 포용력 있는 설교자는 이 설교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것이다.”

 

그래서 크레독은 석의에서 발견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도 귀납법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석의의 과정에서 설교자가 귀납적으로 연구해 가면서 “아하, 이것이구나.”라고 외쳤던 자리에, 청중들도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 과정을 만들어가면서, 그들도 역시 “아하”라고 외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중들은 일상 생활에서 무엇을 발견하거나, 인생을 경험할 때, 문제를 해결할 때도 항상 귀납적으로 행하기에 설교를 들을 때도 귀납적으로 듣게 될 때 훨씬 더 효과적으로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고, 설교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크레독의 이런 주장은 설교학에서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설교학 이론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설교의 다양한 형식이 출현하게 되었다. 서사 설교(설화체 설교, 이야기 설교), 대화체 설교, 일인칭 설교, 4페이지 설교,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지 않고 단일 주제를 다룸으로 산만하지 않게 하는 설교 등과 같은 새로운 형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

 

2) 크레독의 귀납법적 설교 방법론

그러면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크레독이 주장한 귀납법적 설교 방법론에 대해서 알아 보자. 간단히 말하면 크레독은 설교자들이 그들의 석의 과정에서 적용했던 창조적인 발견의 과정과 동일한 방법을 따라서 설교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연구할 때, 그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미리 알지는 못한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그 본문이 의미하는 것이 드러날 때까지 그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찾아 내야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자가 경험한 것을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귀납법적 질문을 상상력이 풍부하게 재창조해야 한다. 이것은 청중들이 설교자가 성경 본문으로부터 듣고 배운 것을 정확하게 설교로부터 듣고 배운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래서 그 설교가 제시하고 있는 것을 서론에서 듣는 대신에 다양한 작은 조각의 증거가 펼쳐지고, 청중들은 설교의 결론에서 어떤 진리를 발견할 때까지 설교를 따라 같이 여행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귀납법적 설교의 중심 이미지는 함께 여행하는 것이다. 실로 청중들이 귀납법적 설교의 결론 부분에 이를 때 이 탐구의 여행 과정에 동참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은 설교자가 아닌, 바로 그 청중들이 그들의 마음과 삶 속에 어떤 해답(resolution)을 얻게 되면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귀납법적인 설교는 “I. II. III” 식의 대지들이 형성되는 대신에, 절정에서 터져나오게 될 환호성 “아하!”를 향하여 집약적으로 세워져 나가는 작은 단편 혹은 움직임으로 구성된다. 결국 이 방법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어떤 실체를 경험하는 방식과 일치되며, 삶의 문제 해결의 행동이 자연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과 일치되도록” 하기 위하여 조직하는 것이다. 그래서 크레독은 자신이 제안한 이 귀납법적 설교의 형태를 문제 해결식의 행동으로 이름 짓는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설교자는 청중들이 특별한 문제를 해결해 가게 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그들에게 그 문제 해결을 위한 모든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설교를 디자인해야 한다. 그리고 적당한 순서를 따라 그들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귀납법적 설교의 결론은 설교자가 홀로 내리는 것이 아니고 회중으로 하여금 각자 자기의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열어 놓는다.

휴 리치필드(Hugh Litchfield)는 크레독과 또 한 사람의 귀납법적 설교의 주창자인 랄프 루이스(Ralph Lewis)의 이론을 요약하여 귀납법적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회중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하며 그리고 본문으로 돌아온다. 즉 상황이나 삶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본문을 향하여 간다. 회중의 삶의 경험을 말하며 그들에게 관계된 진리를 말하기에 청중들은 본문이 그들의 삶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듣게 된다.

둘째, 설교의 주제는 결론에서 언급한다. 귀납법적 설교는 마치 신비스러운 것이 최종적인 장면에서 해결되는 것과 같다. “설교자는 자신이 결론에 도달한 그 단계를 역추적해야 한다. 그리고 청중들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귀납법적 방법과 연역법적 방법의 차이는 마치 TV 드라마의 살인 사건이 해결되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연역법적 방법은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드라마 초기에 시청자에게 알려 주며, 드라마의 나머지 시간을 우리가 아는 살인자가 어떻게 잡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귀납적인 방법에 의하면 청중들은 살인자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청중들은 누가 살인자인지를 찾는 데 함께 동참하게 된다. 그리고 드라마의 최종 장면에서 청중들은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마침내 알게 된다.

셋째, 귀납법적 방법은 삶의 경험에 호소하며, 삶의 경험으로부터 논리적인 진리를 향하여 움직인다. 즉 특정한 적용으로부터 일반적인 진리를 향하여 움직인다.

 

크레독은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를 가지고 이렇게 귀납법적으로 설교를 전개할 수 있다고 소개한다. 그의 구조는 아래와 같다.

 

1.

2.

A.

1.

2.

B.

I.

 

그리고 여기에 살을 붙이면 이렇게 할 수 있다.

 

1. 우리는 삶에서 불행하다.

2.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

A. 하나님께 대한 반항은 우리를 불행으로 인도한다(돼지 우리).

1. 우리는 도움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2. 우리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음을 깨닫는다.

B. 회개는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한다.

I.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신실한 자녀로 다시 받아 주실 것이다.

 

크레독은 「권위 없는 자로서」의 뒷부분에 부록으로 그의 귀납법적 설교 한 편을 싣고 있다. 그 설교를 보면 크레독이 말하고자 하는 귀납법적 설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어느 정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에 그는 귀납법적 설교의 더욱 분명한 이론을 전개한 책을 출판했는데, 그것이 바로 Preaching(Nashville: Abingdon Press, 1985)이다.

 

어떤 설교 형식도 성경의 모든 본문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여러 가지 설교 형식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히 본문의 문학 형식에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설교의 형식도 본문이 가진 문학 형식을 따르는 것이 좋다. 그 많은 설교 형식 가운데 귀납법적 설교 형식은 한 가지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간략하게 본 것처럼 귀납법적 설교는 지금까지 거의 2천 년 동안 연역법적 설교 방식에 익숙한 설교자와 회중에게 있어서 금방 소화할 수 있는 형식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설교의 요점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모호한 가운데 끝나 버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귀납법적 설교 형식은 세심한 주의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납법적 설교의 형태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다양한 오늘 현대인에게 효과적인 설교의 형식임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귀납법적 설교는 회중을 설교 안으로 초청하며, 그래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귀납법적 설교의 예

 

본문: 로마서 11:33-36

제목: 영광의 찬가(롬 11:33-36)

설교자: 프레드 크레독

 

낮이 짧아지며 공기는 상쾌한 그 해 가을에, 나는 하루가 끝나면 집 안뜰에 홀로 나가곤 했다. 나는 그 곳에서 엉클어지고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곤 했는데, 그것은 불과 몇 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몇 분의 시간은 필요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은 이런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특별한 저녁은 다른 저녁과 달랐다. 나는 집의 안뜰에 앉아 내가 계획했던 하루와 내가 살았던 하루 사이에 커다란 고통스러운 차이가 있음을 기억하며 이해하려고 하였다. 점점 짙어져 가는 어두움이 내 마음과 생각 속에 스며들었고, 나는 어두움 속에 있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개념’(Idea)이 나에게 온 것은 바로 그 날 저녁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그 ‘개념’을 즐길 만한 기분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고, 또한 오래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개념일 뿐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저녁에 그 개념은 다시 내게로 왔고, 나는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기에 그것과 함께 즐길 수 있었고, 그 개념은 곧 내게서 떠났다. 그 다음날 저녁에도 나는 그 개념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즐겼으며, 그것을 먹여 주기도 했다.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 개념에게 점점 더 애착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 개념이 혹시 이웃 사람들 중의 누구에게 속한 것이어서 내가 가지고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웃집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물었다.

“이것이 당신의 개념입니까?”

“아니요, 그것은 우리의 개념이 아닙니다.”

나는 ‘개념’을 나의 것으로 주장하게 되었고, 주인의 권리로 그것에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는데, 그 이름을 ‘영광의 찬가’라고 불렀다.

나는 영광의 찬가를 우리 가족의 저녁 식사 자리로 데리고 왔다. 저녁 식사는 우리 가족의 시간이며, 대화는 주로 그 날 하루를 돌이켜보는 것이다. 만일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나는 주로 “오늘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안 좋았던 일이 무엇이었나?”를 물었다. 존은 대답하기를 “학교 종이 아침 8시 30분에 울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오늘 일어난 일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을 무엇이었나?”를 물으면, 존은 “학교 종이 오후 3시 30분에 다시 울리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되면 말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고, 로라, 존, 네티, 그리고 나, 우리 모두는 하루에 일어난 일들을 나누곤 했다. 저녁 식사 시간은 좋고 즐거운 시간이며, 우리 모두는 영광의 찬가가 저녁 식사 자리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동의했다.

그 다음날 영광의 찬가는 나와 함께 일상적인 볼일을 보러 시내로 들어갔다. 한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부지런히 핥아먹고 있었는데, 먹는 속도보다 아이스크림이 녹는 속도가 더 빨라 아이스크림이 아이의 팔꿈치를 타고 흐르는 것을 보고는 우리는 웃었다. 우리는 보석 상점 진열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한 걸인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과거의 좋았던 날들을 회상하고 있는지, 미래의 좋은 날들을 소망하고 있는 것인지를 의아해했다. 우리는 엄지손가락을 조끼 속에 넣고 값비싼 판 유리창 앞에서 마치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웃고 있는 은행의 간부와도 이야기 했다. 우리는 또한 바람이 부는 야외 매점에서 한 손으로는 여러 가지 물건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바람에 날리는 치마를 잡고 있는 여인들을 보고는 웃었다. 시내에 영광의 찬가와 함께 간 것은 매우 좋았다.

그러나 나는 성 메리 병원에 있는 베티를 보기 위해 그 곳에 들러야 했다. 베티는 암에 걸려 죽어 가고 있는 환자였기에 나는 영광의 찬가를 차 안에 두고 가려고 했다. 영광의 찬가는 나와 함께 병원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나는 죽어 가는 환자가 있는 곳에 영광의 찬가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데리고 가지 않았다. 나는 영광의 찬가를 차 안에 두고 갔다. 베티는 깨어 있었고 나를 보고 기뻐했다. 나는 거북스러운 죽음에 관한 주제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괜찮아요.”라고 말하면서, “나는 죽음에 관한 문제를 이미 정리했어요.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저에게 복을 주셔서 좋은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많은 행복을 주셨어요.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죽는 것을 원치 않지만, 그러나 죽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떠나기 전에 기도를 한 사람은 바로 베티였다. 차에 돌아왔을 때 영광의 찬가는 나에게 물었다.

“내가 베티의 방에 갔으면 좋을 뻔했지?”

“그래, 미안해, 내가 몰랐어.”

물론 영광의 찬가는 우리 가족의 휴가에도 같이 갔다. 금년 여름에 우리는 걸프 해안의 해변가로 휴가를 갔었다. 참으로 좋은 시간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수영을 하고, 오후에는 낮잠을 자고, 저녁에는 조개껍질을 주우러 해변가를 걸었다. 젊은이들이 모래 언덕 속에 묻혀 있으며, 노인이 몸의 절반쯤을 모래 속에 파묻고 있는데 벌레가 윙윙 소리를 내며 모래를 노인 곁으로 쌓아올리는 광경, 그리고 노인의 아내는 닭이 바베큐를 당하듯 태양 빛 속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영광의 찬가는 즐거워했다. 파도 속을 거니는 것도 재미있었다. 파도는 높게, 그리고 성난 것처럼, 위협하듯 우리를 향해 달려왔으나, 곧 우리 가까이 오면서 가라앉았고, 웃으면서 바다로 되돌아갔다. 영광의 찬가가 우리의 휴가 중에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아무런 질문의 여지가 없었다.

너무나 일찍 새 학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신학교 강의에 돌아갔으며, 영광의 찬가에게 신학교에서 영광의 찬미란 차고 넘쳐서 불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사실 우리는 신학교에서 날마다 하나님에 관해 말하며, 하나님에 관해 읽으며, 하나님에 관해 쓰는 데 시간을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우리가 신학에 몰두하고 있으므로 영광의 찬가는 신학교에서는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신학교에서 바울의 로마서 서신을 신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기록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는 로마서에서, 우리는 바울의 논설이 종종 영광의 찬가로 중단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로마서 첫 장의 성경과 그리스도의 지식이 없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구절 가운데, 바울은 “주는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이라는 영광의 찬가를 집어넣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가 유대인으로 오셨건만, 그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비극적인 상황에 관해 길게 언급한 다음에 바울은 갑자기 그의 논설을 그치고,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 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바울은 이렇게 여러 번에 걸쳐서 마치 자기 자신에게 무엇을 상기시키려는 듯이 그의 사고의 흐름을 영광의 찬가로 깨고 있다. 왜 그런가? 아마도 바울은 신학자가 해야 할 과제로서 영광의 찬가가 가장 적절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하는 말로 시작된다. 인간은 거룩한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인식해야, 그 다음에 그것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가를 알게 된다. 예배는 신학적 연구를 방해하지 않는다. 신학은 예배로부터 성장해 나온다. 우리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제공하기 위해 예배를 신학교에서의 삶에 부가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제공된 것 때문에 예배를 드린다. 어머니는 딸을 예쁘게 만들기 위해 딸의 머리에 리본을 달지 않는다. 다만 그 딸이 예쁘기 때문에 리본을 달아 주는 것이다.

더욱 특별하게도 영광의 찬가는 바울의 삶에 가장 적절한 것이다. 바울이 누구이기에 창조의 위대한 주제와, 구원의 역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을 기록하고 있는가? 바울은 바로 그 자신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창조물이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효과적인 사랑의 증거로서 자기 자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때때로 하나님께 영광의 노래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내 견해로는 우리가 누구이든지, 어디에 있는지, 또는 어떻게 하든지 간에 우리 모두에게 영광의 찬가보다 더 적절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끈적끈적한 카페의 책상에서 혁명을 말하며 시간을 보내든지, 또는 교외의 집 안뜰에서 무관심 속에 조용히 앉아 있든지 간에, 영광의 찬가는 우리의 장소에 부적당한 것이 아니다.

몇 년 전에 내가 독일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을 때, 나는 친구들에 의해서 오스트리아의 찰스부르그 부근에 있는 조그마한 호텔로 간 적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한 젊은 여인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녀는 미국의 쥬디 갈란트와 같은 가수로 영국에서 온 줄리 레이네였다. 그녀는 영국과 독일과 미국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녀가 부른 노래 가운데는 내가 좋아하는 옛날 노래들도 있어, 나는 곧 그녀의 노래에 녹아들어 갔다. 그런데 그녀의 공연 가운데, 그녀는 곡조는 익숙하지 않으나 가사는 내게 너무나 익숙한 노래를 하나 불렀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시편 121편)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만일 연예인이 종교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면, 그들은 곧 직업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대화할 것을 요청하였고, 그녀는 내 요청에 응하였다. 나의 질문은 ‘왜?’였다. 왜 대중가요를 부르다가 그 가운데서 시편 121편을 부르는가? 그것은 그녀에게 어색하고 부적절한 것이 아닌가? 그녀의 대답에 의하면 그녀는 모든 공연마다 찬양곡을 하나씩 포함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을 했다는 것이었다.

“만일 당신이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안다면,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린 후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안다면, 내가 부르는 노래 중에 시편 121편이 나에게 가장 적절한 노래인 것을 당신은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간혹 가다 신학생들 가운데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있다. 이런 일들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일어난다. 그들의 열심이 점점 식어 가며, 믿음이 약해지며, 기독교 사역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며, 샘물이 메마르듯 영혼이 말라 버리며, 눈이 무디어지고, 생기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공격하여 점령해 버렸는가? 아니다. 그들의 너무 많은 공부가 그들로 하여금 의심하게 만들었는가? 아니다. 목회 이외의 다른 매력적인 길이 그들을 변화시켰는가? 아니다. 어떤 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하나님과 더불어 말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영광의 찬가를 잃어버림으로 그 믿음이 메말라 죽게 된 것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찬양하는 것이 부적절한 때와 장소가 있는가? 내가 로마서를 가르치고 있는데 급한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큰 형님이 심방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은 너무나 놀랍고 아픈 소식이었기에, 나는 그 생각을 잊어버리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내에게 전화를 하였고, 아이들을 조퇴시켰다. 동료 교수들이 나의 수업 시간을 인도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고, 강연 예약들을 취소하였다. 그리고 우유 배달도, 신문 배달, 편지 등을 중지시켰고, 개도 다른 사람이 돌봐 먹이도록 부탁하였다. 주일 학교 성경 공부반도 다른 사람이 가르치도록 하였고, 차도 정비를 받게 하였다. 우리가 짐과 우리 몸을 차에 실을 때 아내는 “우리에게 필요한 옷들을 다 챙긴 것 같다”고 하였다.

밤새도록 두 개의 주를 건너가며 운전을 하였고, 우리의 눈동자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대화는 잠깐잠깐 이어졌고, 아무도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질문들만 반복해서 나누었다. 우리가 죽은 형님이 살던 마을과 집에 가까이 가게 되었을 때, 나는 형수님에게 첫번째 할 말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그는 나의 형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그녀는 남편이었다. 나는 차가 형수님 댁 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도 형수님에게 할 말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맞이하러 나왔고, 내가 차문을 열고 나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는 침묵을 깨뜨렸다.

“나는 당신이 영광의 찬가를 가져왔기를 소망합니다.”

“영광의 찬가요?”

“아니요,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나는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은 이후로 한 번도 영광의 찬가를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이제 분명해졌다. 우리가 영광의 찬가를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2. 유진 로우리의 Homiletical Plot (설화체 설교)

Eugene Lowry. The Homiletical Plot. 『이야기식 설교구성』이연길 역. 서울: 한국장 로교 출판사, 1996.

Eugene Powry. How to Preach a Parable. 『설교자여 준비된 스토리 텔러가 되라』 이주엽 역. 서울: 요단출판사, 2001.

“Narrative Preaching" in Creative Styles of Preaching, pp. 1-13.

“Narrative Preaching" in Handbook of Contemporary Preaching, pp. 103-116.

"Preaching from Oops to Yeah" in Patterns of Preaching, pp. 93-97.

정장복, 주승중, 김운용, 김수중. 『새천년의 성경적 설교: 서사설교의 실제1』 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0.

정장복, 주승중, 김운용. 『새천년의 성경적 설교: 서사설교의 실제 2』 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1.

 

로리에 의하면 설화체 설교는 “시간 안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불안정(또는 갈등)으로부터 시작되어, 불안정과 갈등이 더욱 복잡해지고 심각해지는 과정을 통해 놀라운 역전이 있게 되고 대단원으로 종결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청중 편에서 느끼는 ‘어떤 필요’가 설교를 구성하는 과제로서의 역할을 한다. 설교는 이 과제, 즉 딜레마를 서술함으로써 시작되어야 하며, 청중들은 혼동을 일으키는 모호함(ambiguity)을 경험하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 방법론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어떻게 모호함을 형성할 것인가에 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믿기로는 설교의 사건에 있어서 설교의 형태에는 아주 필수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모호함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설교의 서론 부분에서 이 모호함을 어떻게 회중들에게 일으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설교자에게 달려 있다. 예를 들어 로리의 견해에 의하면, “오늘 저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라는 말로 설교를 시작하는 설교자는 아주 따분하게 느껴질 것이다. 왜냐 하면 설교의 서론 부분에 아무런 긴장감도 만들어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우리는 아주 자주, 사랑을 베풀고 나서 실컷 두들겨 맞기도 하고 시퍼런 멍이 들고 깨지기도 하는데, 사실 우리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그런 대접을 받는 것, 그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라고 시작한다면, 청중들의 반응은 달라질 것이다. 사랑을 베푸는 손길이 깨지고 멍이 든다는 설교자의 말에서 청중들의 마음의 안정은 흔들리고 당혹감을 갖게 되거나, 혹은 그런 경험을 이미 한 사람들은 깊은 공감대를 가지고서 설교의 나머지 부분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로리는 여기서 “청중들은 그들이 듣게 될 나머지 부분에서 어떻게 그것이 해결되어 가는가를 간절히 보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교의 나머지 부분에서 할 일은 “특별히 중심 되는 그 모호함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로리의 설화체 설교에서는 설교의 서론 부분에서 모호함이 주어지고, 회중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당혹감이 얼마나 일어나느냐가 훌륭한 설교의 관건이다. 그리고 설교는 그런 모호함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가 어떻게 구성(plot)되느냐 하는 것은 성공적인 설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로리는 설교가 이런 역할을 바로 수행하기 위해서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지를 다섯 가지 기본적인 움직임(movement)을 통해서 보여 준다. 이 다섯 가지 단계는 설교가 움직임을 가지고 진행되기 위한 지침이다.

 

첫째, 모순되는 문제를 제기함으로 평형을 깨뜨리는 단계(Upsetting the equilibrium).

이 첫번째 단계에서 설교자는 본문으로부터 청중들이 느낄 수 있는 어떤 “문제”를 제기하여 설교의 주제 속으로 참여시키되, 모호함을 야기시키면서 청중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깨뜨리면서 그들의 마음의 평정을 깨뜨리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청중들은 의혹감과 당혹감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중요한 단계를 잘 개발하는 것은 설교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들이 이 단계를 효과적으로 개발해 내기 위해서 극작가나 방송 작가, 혹은 소설가의 접근 방식에 주의하는 것이 한 가지 도움을 얻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청중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그들 자신이 만들어 가는 세계로 청중을 끌어들인다. 이와 같이 선포되는 설교의 첫째 단계는 마치 여러 종류의 갈등이나 긴장을 소개하고 있는 연극이나 영화의 서두 장면과 유사하다.

이 단계를 준비함에 있어서 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다. 먼저 너무 주제와 무관한 모호함을 제시함으로 그것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핵심 줄거리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청중들의 주의를 끌려고 한다면 실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로리는 그의 실패담을 이야기한다. 그는 요나서의 설교를 통해 “요나의 편협함과 하나님 사랑의 거대함”을 설교하기를 원했다. 그는 서론 부분에서 20세기 과학의 눈으로 볼 때,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이러한 큰 물고기의 이야기를 과학 시대에 듣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설교를 시작했다. 흥미를 위해서 사용한 그 서두는 모호함과 당혹감을 일으켰지만 청중들을 그가 전하려는 주제로까지 인도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그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그 모호함과 의혹의 늪에서 도무지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단계에서 주의할 것은 줄거리의 해결점을 미리 말하지 말아야 하는 반면, 모호함으로 향하는 방향은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중들은 줄거리가 진행될 방향과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필요가 있지만, 그들에게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단계의 목표는 청중의 평형을 뒤집어 놓는 것이다. 일단 평정이 뒤집어지면 설교는 문제를 엄밀히 탐구하는 과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둘째, 모순되는 점과 불일치를 분석하여 그 모호함을 심화시키는 단계(Analysing the Discrepancy)

두 번째 단계는 이미 드러난 모순점과 모호함을 분석하는 단계이다. 제기된 문제를 탐구하고 왜 그것이 인간의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가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하면서 그 문제를 진단한다. 전체적인 설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필요한 단계로서, 로리는 이 단계가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말한다. 왜냐 하면 청중들이 그 이후 단계에서 주어질 복음을 심도 있게 경험하느냐는 이 단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신학적인 근거도 제시될 수 있고, “왜”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면서 인간 실존의 상태까지 심층 분석하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분석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서술하는 것이 아니며, 예화로 대치되어서도 안 되며, 깊이 있는 진단이 주어져야 한다. 다음 단계에서 제시될 해결의 실마리를 생각하면서 그에 대한 준비로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단계를 통해 설교자가 깊이 관심 가져야 할 것은 모호함이 주는 긴박감, 즉 서스펜스가 형성되고 증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문제 해결을 위해 실마리를 제시하는 단계(Disclosing the Clue to Resolution)

이 단계는 로리의 표현에 의하면, “아하!”가 터져 나오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설교자는 문제 혹은 모호함의 진정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복음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단계이다. 이 실마리는 의문 사항을 풀어 주는 갑작스러운 조명의 수단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역전되는(reversal) 현상이 일어나고, 단순하게 지적으로 아는 단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일어나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청중들은 그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 도착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뒤집어지면서 복음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극적인 역전의 원리에 의해서 이끌리는 것처럼, 설교자는 이 단계에서 역전의 원리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복음을 경험하는 단계(Experiencing the Gospel)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면 이제 청중들은 복음을 경험할 준비가 된다. 그 이전 단계는 이 단계를 위해서 존재한다. 모호함을 야기시키고 또 그 문제점을 분석해 주면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 복음을 성급하게 제시하지 않고 연기하였다가 선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로우리는 복음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전 단계에서 모호함이 적절하게 제시되고 또 문제의 실마리가 정확하게 제시된다면 복음을 명료하게 경험할 것이며, 청중은 이 단계에서 다시 평정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로리의 방법에서는 이 단계를 준비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2, 3 단계를 준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로리의 최근의 저서에 의하면 이 단계는 다른 단계와 함께 주어지는 유동적인 단계로 이해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체 설교의 가장 핵심은 청중으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고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결과를 기대하는 단계(Anticipating the Consequence)

지금까지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서 청중들은 모순을 분석했을 것이고,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면서 복음의 놀라운 소식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제 설교의 구성(plot)에 있어서 모호함과 팽팽했던 긴장감은 이완되면서 마음의 해답을 얻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렇게 주어진 복음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미래로 투사되면서 결론을 이루어 가는 단계이다. 경험한 복음을 중심으로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언급하는 단계이다.

 

이상에서 소개한 유진 로리의 설화체 설교의 방법은 한 마디로 이야기의 구성(plot)을 따라 설교를 진행하는 방법이며, 설교가 진행되어 가는 움직임을 강조한다. 그의 대표적인 설화체 설교를 읽어 보려면 How to Preach a Parable: Designs for Narrative Sermons (Nashville: Abingdon Press, 1989)를 보라.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설교와 함께 그 한 편의 설교가 나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이야기에 젖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V의 연속극, 영화, 연극, 시사 뉴스 등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의 심성에 ‘서사 설교’가 더 와 닿아서 그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삶이 하나의 드라마이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성경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중요한 요소이다. 이야기는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는 새로운 가능성과 함께 설교를 진정 가능케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설화체 설교의 예

 

본문: 마태복음 20:1-16

제목: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Who could Ask for Anything More?)

설교자: 유진 로리(Eugene Lowry)

(1단계: 평형을 깨드리는 단계)

포도원 주인이 오늘 그의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불러 오기 위해 시장터에 나간 것은 아침 7시 15분 전쯤 이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그 날 하루의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것은 적절한 액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포도원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9시 15분 전쯤 주인은 다시 동네의 시장터와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나갔습니다. 그 곳에서 일할 거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 주인은 말했습니다. “내가 상당하게 지불할 것이라.”고 말하자 그들은 그 주인의 포도원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역시 12시 15분 전쯤에 주인은 시장터에 다시 나왔습니다. “왜 이 사람은 처음에 필요한 만큼의 사람들을 고용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태풍이라도 불어온다는 뉴스를 들었나 보지!” 어떤 사람들은 의아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후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이 포도원 주인은 다시 나왔고, 불과 일할 시간이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오후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나왔습니다.

드디어 일이 끝나는 오후 6시가 되었습니다. 임금을 지불할 시간입니다. 주인은 포도원의 살림을 총괄하고 있는 총무과장에게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제일 늦게 와서 일을 시작한 사람부터 임금을 지불하세요.” 임금을 받은 그들은 놀랐습니다. 겨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한 데나리온을 다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뻐서 흥분이 되었습니다. 7시에 온 사람들의 반절도 일하지 않았는데 한 데나리온이라니. “저 주인은 아마도 시간당 한 데나리온을 지불하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오늘 하루 일하고서 우리는 한 달 수입의 절반은 벌게 되었구나!”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오후 3시에 와서 일한 사람들에게 임금이 지불될 때까지 그들은 그것을 철석같이 믿고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3시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저 사람이 무엇인가 실수한 거겠지? 아마도 저 인자한 주인은 총무과장에게 다시 귀에 대고 그가 실수한 것이라고 일러 줄 거야.

그러나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청지기는 12시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아침 7시에 와서 일한 사람의 얼굴에서 미소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럼,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는가는 상관없이 주인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임금을 지불한다는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침 7시에 와서 온종일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만을 받았습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그들이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그대로 실을 수 없어서 점잖은 표현을 쓴 것일 것입니다. “아니, 나중 온 사람하고 동일하게 임금을 주는 것은 말이나 되는 거야? 가장 늦게 온 사람은 땀 흘릴 시간도 없이 고작 한 시간 일했는데, 한낮의 뙤약볕에서 온종일 일한 우리와 똑같이 취급할 수 있는 말인가?” 그들의 말은 거칠어졌습니다. “잠깐만.” 주인은 대답했습니다. “왜 더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까? 오늘 아침 당신들과 약속한 것을 잊었습니까?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한 것에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동의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좀 다르지 않습니까?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셨으면, 당연히 우리는 좀더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우리는 더 받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주인은 말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게 있습니까? 내가 관대한 것에 대해서 왜 당신들이 불평하는 것입니까? 나는 그들에게도 똑같이 지불하겠다고 마음먹었소. 그것은 당신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요.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쓰는데 당신들이 왜 소란들이요. 당신들 돈을 받았으면 돌아가시오.”

 

(2단계: 불일치를 분석하는 단계)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 자신이 아침 7시부터 온종일 일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그 때 우리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일한 시간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월급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면, 아무리 내 돈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지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시 교육 위원회에 속한 위원으로서 새로운 교사를 채용하려고 할 때, 지원자 중 선정된 두 사람이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거의 동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남자고, 한 사람은 여자입니다. 만약 당신이 현재의 구직 시장(job market)의 상황을 고려해서 여자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남자보다 월급을 덜 지급한다고 합시다. 당신은 일을 바로 처리하지 못한 것이고, 당신은 해고감이 될 것이고, 당연히 그리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정원의 일을 맡기기 위해서 몇 사람의 임시직의 일꾼을 구한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백인이고, 한 사람은 흑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돈을 적게 지불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도 약간의 차이가 날 뿐이지, 동일한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국 노조 연합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참 할 이야기가 많은 내용 같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여기에서 충격을 받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왜 이렇게 불공정한 주인의 편을 드시는 것입니까? 사실 늦게 온 사람부터 임금을 지불한다는 것도 잔인한 것이고, 말문이 막히는 일입니다. 그는 아침 7시부터 와서 일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불의가 행해지고 있는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도록 했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먼저 품삯을 지불하고 그들을 보낸 다음에 9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순으로 지불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내일 아침 7시에 시장터에 가서 사람을 찾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 시간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고, 아마 오후 5시 15분 전에 사람을 찾으러 가는 시간에 맞추어 몰려들 것이고, 오직 한 시간만 일하고 같은 임금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3단계: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시하는 단계)

이 이야기에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담겨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무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첫번째 실마리는 나중에 온 사람에게 먼저 지불되는 장면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한 장을 깊이 관심갖지 않고서는 이 이야기의 요점을 놓치고 말 것입니다.

바로 19장에 나타나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한 젊은 부자 관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그는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그의 삶이 바로 되어 있었던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서 모든 것을 팔아라. 그리고 그것을 가난한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님과 그 젊은 관원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귀를 의심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전에 교회 성장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훌륭한 교인이 될 수 있는 촉망 있고 부자인 관원을 돌려 보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충격받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여기서 이 이미지를 비신화화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마치 “바늘귀는 예수살렘 성의 문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의미하신 것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아주 살찐 낙타가, 그것도 커다란 혹까지 등에 짊어진 커다란 낙타가 조그만 바늘귀로 들어가는 그것이, 부자가 하늘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쉬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요,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겠네요.” 제자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 주십니다. “그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요점을 전적으로 다 놓치고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나아와서 실언을 하고 맙니다. “예수님,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얻겠습니까?” 들으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럼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겠습니까?”

주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속았다(Cheated).” 베드로가 그것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너는 속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비즈니스 거래가 아니며, 계약(contract)을 체결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언약”(Covenant)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도 그렇게 물으신다면, “결론적으로 내가 얻을 것이 무엇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도 속았다.”

이런 설명에 이어서 곧바로 따라오는 것이 오늘의 본문인 포도원 품꾼들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모두도 어떻게 스스로 속임을 당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나는 나보다 일을 더한 사람들과 나 자신을 비교해 본 적이 없습니다. 늘 나보다 적게 일한 사람과 비교합니다.

이 “결론적으로”의 멘탈리티는 언제나 교회를 혼란스럽게 해 왔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 캔자스 주 위치타 시의 어느 작은 감리교회에 다닐 때, 어른들이 나누던 이야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늘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우리의 물질과 시간을 들여 일평생 교회를 섬겼고, 말씀을 따라 바로 살려고 노력하고 좁은 길을 걸으려고 노력해 온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평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임종 자리에서 겨우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과 함께 같은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나 불공평합니다. 정말 같은 천국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공평한 일이 아닙니다.”

가끔 이러한 태도는 비극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느 주일날 오후, 당신이 다양한 경험을 가진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훈련받는 자리에 있었다고 합시다. 참석자들은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뉘어 빙 둘러 앉아 모임을 가졌다고 합시다. 인도자가 말하기를 “먼저 우리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간단히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서로 나누도록 합시다.” 둘러앉아서 자기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나이 드신 분이 자신을 소개합니다. “제 이름은 아무개이고 한때 연관공이었습니다.” “한때?” 도대체 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삶은 계약인데, 그의 계약은 이제는 다 끝났다는 말인가? 그는 한때는 돈을 벌어서 집에 가지고 갔던 사람이었고,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지금은 그저 “한때”만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한 여자 분의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수줍어하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단지 주부에 불과합니다.” “단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는 전혀 돈을 벌어 오지 못한다는 의미입니까? 이제는 요리를 하고, 그리고 부엌을 정리하고, 그리고 나머지 일을 위해 하루 18시간 이상을 보내는 그저 가정주부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계약은 희미해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4단계: 복음을 경험하는 단계)

이제 여러분이 3살, 6살, 9살 먹은 세 자녀를 둔 부모라고 상상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세 살 먹은 아이보다 9살 먹은 아이를 세 배나 더 사랑하십니까? 물론 9살 먹은 큰 아이는 나이는 세 배나 더 먹었고, 가장 오랜 시간 부모를 많이 도와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아니 당신이 9살 먹은 아이라면, 당신은 세 살 때 했던 것보다 부모님을 세 배나 더 사랑하십니까? “아니,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인걸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한 가족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시몬은 이것이 사업의 거래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지금은 가족의 계약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5단계: 결론을 기대하는 단계)

포도원 주인이 지금 이 시간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그분은 지금도 아직도 포도원에 청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아직 그 부르심에 응답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찾기 위해 시장터로 나가고 계십니다.

그 청함이 아침 7시에 주어졌든, 아니면 9시에 주어졌든, 정오에 주어졌든, 혹은 오후 3시나, 5시에 주어졌든, 혹은 일할 시간이 다 지나버린 새벽 두시에 주어졌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부르시기를 원하십니다.

포도원에 초청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본향에 청함받은 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3. 이야기 설교(Storytelling Preaching)

Charles L. Rice. Interpretation and Imaginatio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0.

Edmund Steimle; Morris Niedenthal J. and Charles L. Rice. Preaching the Stor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3.

Charles L. Rice, "The Preacher as Storyteller," Union Seminary Quarterly Review 31, no. 3. Spring 1976.

Richard L. Eslinger. A New Hearing. Nashville: Abingdon Press, 1989.

Charles L. Campbell. Preaching Jesus, 『프리칭 예수』 이승진 역.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2001.

 

성경의 이야기를 전하는 ‘이야기 설교’(Storytelling Preaching)는 리차드 젠센(Richard Jensen), 에드문드 스타이물(Edmund Steimle), 그리고 찰스 라이스(Charles Rice) 등을 중심으로 제시된 방법이다. 이들은 설교를 하나의 이야기 아니면, 설교 안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야기 설교는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설교이다. 이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사건 혹은 장면(stage)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 설교의 방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이야기 설교는 이야기가 가지는 특성을 따라 전개된다. 이야기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든지, 사건을 중심으로 하든지, 그것을 묘사하는 특징을 가진다. 특별히 이야기는 듣는 회중으로 하여금 말씀의 체험(또는 경험)이 가능하게 한다. 크라이테스(Stephen Crites)는 이것을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의 특성’이라고 지칭한다. 이야기 설교는 이러한 이야기의 특성을 바탕으로 하여 구성되며, 회중이 말씀을 경험하게 하는 데 그 초점을 둔다.

둘째, 이야기 설교는 장면 혹은 사건이 계속해서 진행되어 가는 과정(mobility in preaching), 즉 설교의 진행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야기는 서론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몇 가지 첨가되는 삽화가 있으며, 절정을 향하여 진행되다가 끝이 난다. 이와 같이 이야기는 움직이는(movement) 특징을 가진다.

셋째, 이야기 설교는 설교의 자료를 반드시 성경의 내용만으로 제한하지 않으며, 설교자와 회중을 포함하여 사람의 다양한 경험을 중요시한다. 특별히 설교자의 경험은 이야기 설교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성경의 세계와 일상의 세계를 오가며 이루어진다. 즉 이 설교의 진행은 두 세계를 오가며 이루어지는데, 성경의 이야기(The Story)와 개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이야기(stories)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리차드 에슬링거(Richard Eslinger)는 이것을 이야기 설교가 갖추어야 할 ‘이중의 해석학’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야기 설교는 단순하게 성경의 사건만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서 오늘의 삶의 상황을 조명하며, 회중의 삶의 상황과 경험을 통해 성경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에서의 말씀의 적용은 성경과 삶의 상황 사이를 오고가는 것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야기 설교의 한 예를 보면서 위에서 말한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에드문드 스타이물(Edmund Steimle)은「Preaching the Story」라는 그의 책에서 이야기 설교란 3가지 이야기를 짜집기(weaving)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God's Story: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고, 지 금도 어떻게 계속해서 역사하시는가를 이야기한다. 성경의 진리의 이야기이다.

(2) Preacher's story: 어떻게 하나님의 이야기가 설교자의 삶에 연관되는가?

설교자는 어떻게 성경의 진리가 그의 삶 속에 일하고 있는가를 말한다.

(3) Their story: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회중의 삶 속에서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회중을 변화시키며, 위로하며, 도전을 주는가를 말한다.

 

그의 이런 방법론에 근거하여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본문으로 이야기를 짜집기하는 형식으로 만들어 보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의 이야기: 둘째 아들은 자기의 상속을 받아 집을 떠나 먼 나라에 가서 방탕 한 생활을 하다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돼지를 치는 자가 되었다. 그는 늘 굶주렸 고, 삶이 힘들었기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는 집으로 돌 아와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하였다.

(2) 설교자의 이야기: 나는 탕자가 느꼈던 것을 안다. 나도 아버지께 반항을 하였고, 그 가 가르쳐 준 가치관을 배격한 때가 있었고, 교회에 나가지 않고 세속 삶을 산 적 도 있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깨닫고 돌아왔을 때 나의 아버지는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 주었다.

(3) 회중의 이야기: 여러분들도 하나님께 반항한 적이 있었는가? 마음이 아팠는가?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의 팔로 여러분이 돌아오기를 지금도 기다리신다.

 

이처럼 이야기 설교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든지, 사건을 중심으로 하든지, 그것을 묘사하며, 장면 혹은 사건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중요시하며, 성경의 이야기와 우리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1) 성경의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는(Retelling) 이야기 설교의 작성 지침

이제 우리는 성경의 내용 혹은 사건을 재구성하여 들려 주는 방법(retelling method)인 이야기 설교의 작성 지침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이 방법은 그 동안 장로회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실에서 정장복 교수에 의해 개발되고 정착된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 설교의 방법론은 설교의 구성(plot)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설화체 설교’(narrative preaching)에 비해 설교 구성에 있어서 유연성(flexibility)을 가지고 있으며, 설교자가 보다 자유스러움과 창의성을 가지고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이다. 모순점을 제시하고 그것을 풀어 가는 형식을 따르는 것이 설화체 설교라면, 이야기 설교는 어떤 틀에 얽매이기보다는 설교자의 창의성을 십분 활용하여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장면(stage)을 구성하여 전달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 실례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본문으로 하여 설교를 할 경우, 설화체 설교는 일한 만큼 그 수고에 대한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모순점을 제시하며 시작할 수 있다. 즉 설교자는 “일한 만큼 그 수고에 대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는 것이 정의인데, 포도원의 주인은 왜 수고한 대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가?”라는 모순점을 제시하면서 설화체 설교를 시작할 수 있으며, 그러한 모순점을 풀어 가는 문제 해결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 설화체 설교의 형식이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는 방법(retelling method)으로서의 이야기 설교는 그 본문을 풀어 가면서 구성을 전혀 달리한다. 즉 ‘장면 I’에서 일거리를 찾지 못해서 시장에서 서성거리는 일꾼의 심리와 상황이 묘사되고, ‘장면 II’에서는 일꾼을 부르는 포도원 주인의 모습을 그린다. ‘장면 III’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포도원의 정경을 묘사하고, 그 다음에서는 포도원 주인의 최종적인 대답을 듣는다. 이와 같이 정해진 구도 속에 맞추어 치밀한 구성을 하는 설화체 설교와는 달리 이야기 설교는 구성에 있어서 유연성을 지닌다.

첫째, 이야기 설교는 언어 사용과 인물과 상황 묘사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즉 권면하고 교훈하는 내용보다는 설교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줄거리가 있는 구성을 따라 간다. 그리고 거기서 함께 보고, 느끼고, 상상하며, 경험하는 언어의 표현이 한 폭의 그림을 그려 주어야 한다. 여기서 설교자의 통찰력과 창의력 그리고 상상력 등이 요구된다.

둘째, 이야기 설교는 이야기가 가지는 특성 중에서 시간(time), 인물의 성격(character), 배경(setting), 본문의 분위기와 어조(tone), 문학적 표현(style), 본문의 관점(point of view) 등을 중심으로 장면을 설정해야 한다.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이러한 요소들은 그 이야기 속에 혼합되어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이야기 설교의 장면은 이런 요소를 중심으로 하여 구성될 수도 있고, 설교의 관점에 따라 시간적인 순서를 재배치할 수도 있다.

셋째, 이런 장면은 설교자가 그 설교에서 전달하려고 하는 주제를 중심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설교의 첫 시작부터 마지막 결론까지 일정한 통일성과 연결성(connection)을 가지고 진행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즉 각 장면은 전체적으로 일치성과 통일성을 가져야 하며, 설교에 있어서 통일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야기 설교는 움직임을 통한 설교 진행(movement)을 전제하기 때문에 통일성과 연결성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설교는 단일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단일 주제는 메시지의 선명성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회중이 메시지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도 흥미를 가지고 들을 수 있게 하며, 전달에 있어서도 강력하고 효과적인 메시지로 지속시켜 준다는 장점이 있다.

넷째, 그렇다면 이야기 설교는 한 편의 설교에서 몇 개 정도의 장면이 요구되는가? 이 문제는 설교자가 판단하여 결정할 문제이지만, 설교의 내용과 다루는 본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4-5개의 장면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 현대 커뮤니케이션에서는 회중이 어떤 내용에 집중하는 시간(concentration span)을 대략 4-5분 정도로 보는 것을 고려할 때, 25분 정도의 설교에서는 5개 전후의 장면으로 설교가 구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 장면에서는 설교의 서론의 역할을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주제와 관련하여 문제 제기를 하면서 설교의 방향을 잡아 가는 내용이 제시되는 것이 좋다. 또한 인물이나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한 본문이라면 본문 중에서 설교의 핵심 부분이 도입 부분으로 설정되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마지막 장면은 설교의 결론으로 나아가는 단계로서 회중이 설교의 결론에 도달하도록 격려하고 인도하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이야기 설교는 주로 귀납법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회중이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돕고, 설교자가 결론을 명시적으로 내려 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각 장면은 다루려고 하는 내용을 아무런 원칙이 없이 무질서하게 나열하기보다는 ‘도입부’와 ‘내용 전개’ 그리고 ‘종지부’ 등의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해진 공식이라기보다는 설교자가 한 장면을 구성할 때 그러한 원칙을 따라 구성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도입부는 그 장면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내용으로 연결시키는 부분이며, 내용 전개 부분은 그 장면의 중점 사항 등이 서술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종지부는 그 장면에서 다룬 내용을 정리해 주면서 다음 단계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꾸며야 한다. 여기서 앞서도 지적했듯이 각 장면은 서로 연결성을 가져야 하며, 각 장면은 전체적으로 일치성과 통일성(unity)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 이야기 설교는 언어 사용에 있어서 논쟁적이고 명제적인 언어의 사용보다는 서술하는(indicative) 언어 표현과 보여 주는 그림 언어(picture language)를 사용해야 한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적절한 언어 구사의 능력은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지만, 특별히 이야기 설교자는 언어 사용에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야기 설교자는 언어 사용의 귀재가 되어야 한다. 이야기의 특징이 권면하고 교훈하는 내용보다는 설교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시간을 통한 줄거리의 구성을 따라 함께 보고, 함께 느끼고, 함께 상상하며, 함께 경험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야기 설교는 그림 언어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언어, 이미지가 담긴 언어의 사용을 적극 권장한다. 추상적인 개념을 전달하는 언어와는 달리 그림 언어는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이, 또는 한 폭의 그림을 보여 주듯이 사용되는 언어를 지칭한다. 또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언어는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이해하게 해 주는 언어를 말한다.

여섯째, 그러므로 이야기 설교는 설교자의 상상력을 중요시하며, 회중들이 설교를 듣는 중에 그들의 상상력을 동원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야기 설교자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본문의 배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하며, 사건과 인물에 대한 심층적인 묘사가 이루어져야 하며, 행간에 담긴 의미와 창조적인 상상력을 활용하여 보다 깊고 감동적인 메시지를 개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시인들을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는 풍부한 상상력을 담고 있으며, 성경 안에는 상상의 언어들도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다. 성경을 거대한 한편의 설교로 볼 때, 성경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상상력을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할 때,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설교자들은 뛰어난 상상력을 활용하여 전달한다. 그러한 설교를 듣는 청중은 그 설교를 들으면서 심판의 메시지 앞에 전율하게 된다. 이렇게 단순한 묘사의 차원을 넘어서, 상상력이 적절하게 동원되어 전달되는 메시지는 설교의 깊이를 더해 준다.

물론 본문의 내용과 위배되는 상상력의 활용, 지나친 묘사나 과장법을 사용한 상상력은 본문의 내용을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러나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설교자가 상상력을 적절하게 활용한다면, 이야기 설교는 그 효과를 더하게 될 것이며, 메시지의 생명력을 더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설교는 언어 사용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인물의 심리 묘사와 사건의 상황 묘사에 대해서도 깊이 관심을 가진다. 설교자가 앞에서 언급한 언어의 형태를 통해 심리와 상황을 묘사하게 될 때, 청중은 묘사되는 상황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며, 함께 느끼게 되며, 함께 경험하게 되며, 동일시(identification)의 경험까지 하게 된다. 선명한 필치로 제시되는 묘사는 청중의 감각이 춤추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며, 그것을 통해 청중은 흥미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탕자의 비유를 가지고 설교하는 내용에 대해서 오래 신앙 생활을 한 사람들은 별다른 감흥이 없이 설교를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들을 타국에 보낸 아버지의 심리가 심도 있게 묘사될 때, 그리고 집안에 있는 또 하나의 피해자인 맏아들의 심리가 당시의 상황과 함께 적절하게 묘사된다면, 청중은 메시지를 새롭게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묘사를 통해서 오늘의 삶의 상황 속에서 비슷한 고통과 아픔을 겪는 사람들은 동일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동일시가 일어난 설교는 그 어느 메시지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청중에게 전달하게 된다.

 

이야기 설교의 예

 

본문: 마가복음 5:24b-34

제목: 새롭게 됨으로 바뀐 고통

설교자: 월터 부르그만(Walter Brueggemann, 미국 콜럼비아 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이 여인은 본문의 중심에 서 있지도 않았고, 나름대로의 이야기도 갖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실 때도 이 여인은 예수님 가까이에도 설 수 없는 군중들 저 끝에 서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전체의 이야기에서도 이 여인은 겨우 본문에 끼여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녀는 이 본문의 내용에 속해 있지 않은 침입자였습니다. 보다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대한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 보다 굉장하고 대단한 이야기인 죽은 자가 살아난 이야기의 중간에, 겨우 중간에 끼여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이야기의 흐름 속에 끼여 들어온 이 본문, 바로 앞부분에는(21-24a절), 당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던 회당장이 자신의 병든 딸을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끼여든 오늘 본문의 뒷부분에서 회당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고, 그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을 봅니다(35-43절). 이렇게 이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영향력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의 중간에 끼여들면서 주위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을 끝없이 불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말씀과 인생 그 자체가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짧은 이야기가 더 멋지고 중요한 이야기의 틈바구니 속에 초라한 모습으로 끼여 있습니다. 단지 15분에 끝날 명성, 아니 명성이라고 말하기에 그렇다면 그저 15분에 끝날 영화(well-being)로 만족해야 할 그런 존재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초라한 여인이 성경 본문에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 수 있겠지만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참으로 무기력한 이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이 여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봅시다.

 

<장면 1>

 

이 여인은 비참한 사람이었고, 당신의 군중들 속에서도 별로 각광을 받지 못하던 여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오히려 부정하게 만드는 “사람 축에도 끼일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서 있는 저 끝자락에 서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 대해 알 수 있는 첫번째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바로 이 여인은 크나큰 중병에 걸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정체성을 잘 보여 줍니다. 그녀는 몸에 커다란 곤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심한 고통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은 세 가지 형태로 드러납니다.

 

그녀는 지난 12년 동안 계속해서 혈루증을 앓아 왔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 내면서 생명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혈루증을 앓고 있는 환자는 누구에게나 환영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 싸매고 있어야 했고, 역겨운 냄새를 감추어야 했습니다.

이 여인은 “많은 의원들로부터 치료를 받으면서 많이 견디어야” 했습니다. 그녀의 병을 고치려고 모든 노력을 다 쏟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도 얻지 못하고 여러 병원에 수많은 치료비만 갖다 바쳐야 했습니다. 때로는 병실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때로는 응급실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으며 그 수많은 의료 기구에 질리기도 했을 것이고,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수차례 인적 사항을 적어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점잖기도 하고 때로는 불친절하기도 한 의원들이나 또는 수련의로부터 이런 저런 짜증나는 질문을 수없이 받아야 했습니다. 의원들로부터 수많은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가진 것은 병을 고치는 일에 다 쏟아 붓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건강 보험에 가입한 것도 아니어서 가진 모든 것을 병 고치는 데 다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이제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태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여인은 당시 주류에서 소외되었던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고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피 흘리는 고통, 의학적인 무관심으로부터 당하는 고통, 경제적으로 모든 것을 허비해 버린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건강도 잃어버리고, 돈도, 희망도 없이 고통 가운데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필사적으로 최후의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이 여인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시도해 보려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필사적인 행동은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능력의 예수님을 만지기 위하여 손을 내밉니다. 그녀의 앞으로 내뻗은 연약하고 창백한 손은 예수님의 권능을 만지는 ‘고통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만일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라도 하면 병이 나을 수 있을 텐데….” 그녀는 자신의 가난함이나 삶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좌절감, 절망, 그리고 부끄러움을 뛰어넘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나아가 예수님과 일 대 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갈구하였습니다. 그녀는 사실 “손을 뻗어서 누군가를 만집니다.” 그것은 도시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스쳐 지나가듯 슬쩍 만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명성이 있는 사람과 멸시받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그럴듯한 벽을 부수고 도저히 만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지는 진정한 만짐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든 환경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만지려는 그의 노력은 필사적인 희망의 행동이었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손을 잡기 위해서 손을 내밀고 있는 아이의 간절한 노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정맥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손으로 양로원에 찾아오는 자녀를 만지기 위해 손을 내미는 노인의 손과 같이 손을 내뻗습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고, 고독한 삶을 넘어서 능력의 삶을 만지기 위해서 손을 내뻗습니다. 이제 손을 내밀었더니, 이제 놀라운 권능이 그녀에게 전달됩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전달하는 안수식처럼 이 여인에게 미래를 향한 새로운 가능성이 부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권능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간의 가능성이 구현되는 것과 같은 진정한 사도적 계승(real apostolic succession)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때, 그녀가 소망했던 일이 드디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만졌고, 그 즉시로, 그 즉시 피가 멈추고 그녀는 고침받았습니다.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서 마가는 ‘곧, 즉각적으로, 일순간에’라는 뜻을 가진 단어인 euthus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정말로 즉시로 피가 멈추었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고통은 능력을 만졌고, 그 결과로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장면 2>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진 직후에야 예수님께서는 입을 여십니다. 그것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 그의 존재에 치유의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생명의 권능이 충만하였고, 그 주위에 이 권능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 즉시로’ 예수님은 권능이 빠져나갔음을 아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대담하고 확실한 인간의 행동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이 갑자기 무례하게 끼여든 것에 당황해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 일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염려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서 누가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되었는지, 누가 이렇게 거룩한 권능이 흘러가도록 한 것인지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짤막하게 묻습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 아마도 예수님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를 찾아보아라.”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누군가가 예수님을 살짝 만진 것이 대수이겠는가 싶어서 제자들은 그에 대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병든 자가 권세자를 만진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대꾸한 것입니다. “예수님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군가가 밀었겠죠.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서 만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 일에 온통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마치 제일 소중한 친구보다도 더 특별하게 생각하시며, 자신을 만진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자신이 병에서 이제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 여인도 알아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몸이 노출되었다는 사실과, 그렇게 자신의 노출이 그 여인과 마찬가지로 전혀 새롭게 되었음을 알아챘습니다. 권능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이 병자가 안고 있는 고통과 접촉됨으로 해서 전혀 새로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 여인이라도 접근할 수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감동되지 않으면서 남만을 감동시키려는 분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으신 권능자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만짐으로 해서 결정적으로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병자와 예수님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고통과 권능의 드라마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맡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나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시며, 그러한 믿음의 여인이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시며, 그녀를 돌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라보십니다. 주위의 군중을 둘러보십니다. 군중 속에 숨어 있는 그 여인이 누구인지 계속해서 찾으십니다.

이 때 그 여인이 자발적으로 나섭니다. 이제 고침받고 새롭게 되었으며, 새로운 용기와 질병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맛보면서 그 자신을 드러냅니다. 복음서 기자는 그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서 모든 사실을 아뢰었다.” 병 고침을 받은 여인과 권능의 치유자 사이에 드러나는 참으로 감동스러운 순간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 부적절하게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합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주도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끼여들 수 없는 곳에 불쑥 끼여들었습니다. 남들 같으면 그렇게 권능의 주님을 만질 수 없는 순간에 몰래 예수님을 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두려움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전에 평생 동안 짊어지고 있어야 했던 고통과 이제 자신의 생명을 살린 예수님의 권능에 관한 사실,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새롭게 된 사실에 대해서 털어놓습니다. 주님 몰래 행한 일에 대해서 고백합니다.

그녀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요? 부정한 몸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는 그녀가 주님께 나아가 만진 것은 적절하지 못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무안을 당하고, 심한 꾸중을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병들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사람들한테 학대받았고, 권력자들 앞에서는 그녀의 병든 몸은 언제나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장면 3>

 

여인의 말이 끝나자 이제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가능성을 함께 만들었던 파트너를 드디어 발견하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와 병든 자가 서로 대면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함께 만들었던 권세자와 병자 두 파트너가 서로 대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권능자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또한 의심할 것 없이 군중들도 놀라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꾸짖거나 창피를 주지 않으십니다. 또한 그녀를 학대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향한 권세자가 가져야 할 새로운 방식을 새롭게 제시하고 계셨습니다. 의외의 방식으로 나아온 것에 대해서 결코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을 만짐으로써 자신의 권능이 약화되거나 또는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하찮게 여겨지지 않을까에 대해서도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자신의 권익이나 권위를 지키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관심에만 마음을 두신 것이 아니었고, 오직 “다른 사람의 관심”(빌 2:4)에 마음을 두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 그녀의 미래에 온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사실 예전에는 자기에게도 어떤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면서 마음의 기쁨을 가져 보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 여인에게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그렇게 부르십니다. “딸아!”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이 여인의 참된 그녀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관심과 감사를 담은 이름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새롭게 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과 순종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그녀를 높여 주시면서 그녀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위해 자신이 행하신 일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녀의 믿음은 예수님을 향한 열심의 일부분이었습니다. 주님의 모든 능력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은 의원들과 재력가들이 그녀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로 내버려두었던 것을 이제 거부하면서 그녀 자신을 주님 앞에 세워 주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병든 몸을 치료받기 위해 주도권을 갖게 했던 용기를 부여해 주었으며, 그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분명 손을 내밀어서 만지고, 주님의 치료의 능력을 받고, 새롭게 변화되었으며,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을 통해 새롭게 될 수 있었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이제 자신의 미래는 더 이상 황량한 과거와 같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평안히 가라”는 축복과 함께 그녀를 보내고 계십니다. 거룩함을 가지고 가라.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샬롬과 함께 가라. 이제 더 이상 피 흘림도 없이, 생명을 빼앗아 가는 더 이상의 혈루증도 없이, 더 이상 아무런 도움과 희망을 주지도 못하는 의원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필요도 없고, 소중한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빈궁해질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평안과 함께 가라. 이제 충만하여, 건강하고, 기쁨에 넘치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가라.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인생 스토리 가운데 온전하고, 그 모든 속박으로 완전하게 해방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마가는 다시 좀더 크고 멋진 이야기인 회당장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영향력 있는 사람과 그의 딸에게도, 가련한 한 여인에게 행하셨던 것과 동일한 일을 행하십니다. 무엇을 더 베풀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 없는 무명의 여인은 회당장이 받았던 것과 같이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다시 허락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안에서는 이 여인도 이제부터 영원토록 중심 인물이 된 것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었고,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있었지만, 그런 고통의 순간들 때문에, 그리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용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이 되었고,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의 영역 안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장면 4>

 

오늘 말씀이 제시하는 스토리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이 여인과 같이 생명이 점점 시들어 가게 하는 피흘림으로 가득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이런 저런 억울한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오지 않습니까? 가진 재산은 다 날아가고, 이제는 손을 내밀어도 도움을 요청할 마지막 힘마저 빠져 버린 삶을 살아오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 모두는 분주한 제자들 중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람 숫자를 헤아리는 일에 너무 바쁘며, 중요한 일, 몰두하고 있는 일에 온 마음을 빼앗긴 채로 고통 가운데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무관심한 부류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물론 예수님은 아니지만,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치유하시는 그분의 권능과 능력을 함께 공유하고 있음을 알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의 권능이 우리에게서부터 피 흘리며 소외된 사람들에게로 흘러들어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주목하고 있는 곁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랜 병으로 절망 가운데 있는 이 여인과 하나님의 돌보시는 대사로 등장하시는 예수님이 사회적 관계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고 있음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새로운 가능성을 생성해 주며, 새로운 영적 친교를 위한 기회와 사회적으로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새로운 패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탄하고 있습니다.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새로운 생명을 향하여 창백하게 내뻗었던 그 손이 결국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 가련한 여인이 삶과 현실에 대한 전혀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이 여인에 관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케케묵은 사회적인 관습을 새롭게 고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강자와 약자, 권세 있는 자와 권세 없는 자는 어쩔 수 없이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제시하려고 기록된 말씀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현실과 서로 다른 선택 사항과 다른 삶에 대한 다른 모습을 제시해 줍니다. 이 말씀은 손을 내밀어 주님을 만지고, 그분의 권능을 나누어 받음으로 얻게 된 새로운 생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분을 만짐으로써 우리에게 새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함께 하나의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를 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삶의 현장 속에서 고통과 아픔 속에서 피 흘리는 사람들을 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4. David Buttrick의 Sermon as Plot and Moves(전개식 설교)

“Sermon as Plot and Moves" in Patterns of Preaching, pp. 87-92.

Thomas G. Long. The Witness of Preaching, pp. 101-104.

David Buttrick. Homiletic: Moves and Structure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7.

1970년대 초에 「새로운 설교학」(The New Homiletics)의 등장 이후, 1980년대에 들어와서 설교학 이론은 설교학 전반을 다루기보다는 각각의 특색 있는 설교 방법론 내지는 설교 형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또 하나의 설교학적인 형태를 주장한 설교학자가 데이빗 버트릭(David Buttrick)이다. 그는 1987년에 『설교학: 움직임과 구조』(Homiletic: Moves and Structures)라는 설교학 교재를 발간했는데, 이 책은 흔히 ‘활동 사진 형태의 설교’ 또는 ‘전개식 설교’라고 알려져 있다.

 

1) 활동 사진 형태의 설교란 무엇인가?

버트릭은 우리가 산책할 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걷듯이,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 말할 때도 한 마디 한 마디씩 말한다고 지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연속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온갖 감각이 동시에 일어나는 전체성으로 경험하지만, 우리의 경험을 말할 때는 차례로 연결된 일련의 문장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즉 인간의 어떤 말도 연속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도 질서 정연한 연속적인 말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설교는 아무리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어도 연속적인 말, 즉 어떤 논리에 의해서 결합된 일련의 언어 단위이다. 대화 중의 일련의 문장이 모아져서 의미를 형성하는 것과 똑같이, 설교에서도 언어 단위가 의식 중에 형성되어서 이해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설교는 언어가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움직이는 것인데, 각 개념은 한 덩어리의 말로 표현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설교자가 설교할 때, 어떤 연속적인 유형으로 배열된 언어 단위로 말하는데, 그는 이 언어 단위를 ‘움직임’(Move)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두 여인이 가까운 이웃인데, 식탁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그들의 대화는 다음과 같이 연속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예컨대, 잠시 동안 자녀 이야기부터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로 진전될 것이다. 그리고 대화는 더욱 확대되어서 공교육의 문제를 바라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더욱 어려운 입시 문제로 진전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문제가 많은 입시 제도로 인한 사교육비의 부담에 대해서 불평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라의 교육비 예산 부족에 대해 토론을 하게 된다. 비록 전체 대화가 한 시간 정도 걸리겠지만, 여기서 대화의 움직임을 일련의 ‘움직임’(Move)으로 분해할 수 있다. 우선 그들은 자녀에 대해서, 그러고 나서 지역 학교에 대해서, 그러고 나서 공교육의 문제에 대해서, 그러고 나서 말썽 많은 입시문제에 대해서, 그러고 나서 사교육비 지출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라의 교육비 예산에 대해서까지 말했다. 각각의 ‘움직임’(Move)은 함께 생각되고 연상 논리에 의해 결합되어 대화를 하였다. 어떤 문제(예를 들어 사교육비의 문제)는 거의 15분 이상 논의했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다른 주제는 비교적 짧은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모든 인간의 말이나 대화는 이렇게 연속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A에 대해서 그리고 나서 B에 대해서, 그러고 나서 C에 대해서 말을 한다. 이렇게 인간의 대화는 일련의 ‘움직임’(Move)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설교도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이동해 가는 언어의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버트릭은 “설교의 구조는 즉각적으로 떠오른 일련의 생각으로서 청중의 의식을 통하여 발전되어 가야 하는데, 믿음을 형성하는 일에 모든 것이 조립되도록 하기 위해 전문적인 기술을 통해 디자인되고 형상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소 어려운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는 이러한 그의 설교 형태론은 “인간의 의식은 카메라 렌즈와 똑같이 작동한다.”라는 간단한 유비로서 설명될 수 있다. 버트릭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인간 의식의 렌즈를 통해서 보고 관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사진 기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다 필름에 담는 것은 아니다. 사진 기사는 앞뒤 배경을 함께 담아 초점을 맞추어 찍으려고 하는 어떤 물체를 정해야 한다. 초점이 되는 어떤 정경을 사진기에 담을 때에 와이드 앵글 렌즈를 사용하여 보다 넓은 정경을 담든지, 또한 근거리를 찍을 수 있는 상태로 렌즈를 돌려 어떤 일부분만을 담을 수도 있다. 또한 어떤 의미 있는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필터를 사용할 수도 있으며, 구도를 결정하고 보는 각도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준비되면 그는 셔터를 눌러 그 정경을 필름에 담게 되며, 또 다른 구도를 담으려고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유비(analogy)이다. 버트릭은 이 유비를 통해 설교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침을 제시한다. 즉 설교자는 일련의 흥미 있는 광경을 찍기 위해 작업 준비를 하고 청중으로 하여금 그 광경의 사진을 찍도록 권하고 있는 사진 기사의 조수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설교자가 성경을 해석할 때, 청중은 거기에서 계시의 상징에 의해 생성된 이해의 장을 발견한다. 여기서 설교의 과제는 청중이 그의 마음의 필름에 잡을 수 있는 방법으로 그 발견한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버트릭은 “설교는 청중을 의식하면서 어떤 틀을 갖춘 이해력에 대해서 깊이 묵상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의 이런 주장이 설교 형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그에 의하면 설교는 연결된 어떤 개념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첫째로 설교자는 이 개념과 다른 개념 그리고 그 다음의 개념을 설교에서 이야기한다. 설교자가 이 개념에 이어 또 다른 개념을 계속해서 제시할 때, 청중은 자신의 의식의 카메라에 그런 개념을 찍어 두기에 무척이나 바쁘다는 것이다. 설교자가 “첫째 개념은 이것입니다.”라고 말할 때, 청중은 ‘찰칵’ 하고 그들의 의식의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계속해서 설교자가 “두 번째 사실은 이것입니다.”라고 말하면, 청중은 또다시 ‘찰칵’ 하고 셔터를 누른다.

이렇게 해서 설교가 끝나고 나면, 청중이 결과적으로 가진 것은 무엇일까? 만약 설교가 아주 빈약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면, 그 날 청중이 가진 모든 것들은 쓸데없는 스냅 사진으로 가득한 쓰레기통과 같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설교가 잘 준비된 형태를 가졌다면, 이것에서 다음의 것으로 이동되어 가는 생생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이해를 가지고 서로 작용하는 일련의 사진으로 구성된 긴 영사 슬라이드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버트릭은 “설교는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움직이는 것인데, 각 개념은 한 덩어리의 말로 표현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설교의 개별적인 개념이나 혹은 구성 요소를 ‘움직임’(Move)이라고 부른다. 즉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그의 이런 이해 때문에, 그는 이런 ‘움직임’들이 하나의 청사진을 통해서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의 설교를 ‘활동 사진 형태의 설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2) 활동 사진 형태의 설교에 있어서의 ‘움직임’(Move)

버트릭은 “설교는 아무리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어도 연속적인 말, 즉 어떤 논리에 의해서 결합된 일련의 언어 단위가 있으며, 대화 중 일련의 문장이 모여서 의미를 형성하는 것과 똑같이 설교에서도 ‘움직임’(Move)이 의식 중에 형성되어서 이해를 낳는다.”고 말한다. 그는 말하기를 어떤 설교에도 어떤 구조적인 계획으로 배열된 단순한 의미의 일련의 주제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각각의 단순한 의미는 길이가 3-4분인 언어 단위인 ‘움직임’(Move)으로 전개된다. 마치 책이 서로 다른 사상을 탐구하는 일련의 문단으로 만들어지는 것같이, 설교도 각각 설교의 기술로 형성되는 ‘움직임’(Move)의 세트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움직임’(Move)은 인간이 대부분 이해하는 것처럼 의식 속에서 형성되는 방법으로 모형화, 형상화, 정서적 태도, 개념의 형태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버트릭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관심사를 충족시켜서 청중의 공동 의식 속에서 단일한 이해를 형성하는 ‘움직임’(Move)을 가질 수 있을까?”에 있다.

그리고 버트릭은 이 움직임(Move)을 설계하는 것이 설교자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움직임은 아주 다양하게 설계될 수 있지만, 그래도 기본 “움직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설교의 모든 움직임(Move)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필수 불가결한 구성 요소를 가져야 한다. 즉 모든 움직임은 시작부(Openings)와 종결부(Closings)가 있고, 그 중간에 어떤 전개되는 유형이 있는데, 이를 중간부(In Between)라고 한다.

 

(1) 시작부(Opening Statement)

이 부분에서 설교자는 아주 분명한 ‘핵심 문장’을 통해 이 움직임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움직임의 중심 개념을 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와 같은 하나의 분명한 개념을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특별히 처음에 회중이 집중하게 하려면 적어도 세 개의 문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처음에 여러 문장을 마치 한 문장인 것처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죄인이다. 죄인이라는 말은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라는 식으로 시작부에서는 이 움직임의 핵심 개념이 무엇인지를 먼저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트릭은 “인간의 의식은 카메라 렌즈와 똑같다. 움직임의 처음에 설교자는 회중의 의식이라는 렌즈를 어느 특정 방향으로 돌려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움직임의 처음 진술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움직임의 ‘시작부’는 이러한 초점 이외에도 이 움직임이 앞에 있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는 보여 주어야 하고, 즉 연결 논리를 보여 주어야 하는데, 그 논리는 움직임의 관점을 제시해 주어야 하고, 움직임의 감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2) 중간부·움직임의 전개(Development)

움직임의 시작과 종결부 사이에 중간부에서는 중심 개념이 전개된다. 여기서 설교자는 문제는 자료를 어떻게 전개시킬지 결정하는 문제이다. 설교자는 여기서 무슨 자료를 사용하고, 그 자료를 어떻게 배열할지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움직임’의 중심 개념을 상세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이 부분에서 비유, 예화, 실례, 간증 등의 방법으로 움직임의 개념을 설명하고, 또 때로는 변증법, 대조법 등을 동원하고, 가끔은 중심 개념의 반대 상황을 제시하면서 개념을 설명하기도 한다.

 

(3) 종결부(Closure)

모든 움직임에는 종결부가 있어야 한다. 움직임의 종결부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처음 진술로 돌아가서 단일 이해가 회중의 의식 속에 형성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움직임에 있어서 처음의 ‘핵심 개념’에 대한 진술이 필수적이라면 확고부동한 종결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버트릭은 종결부를 만들려면 항상 그 움직임이 시작한 처음 진술의 개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때때로 그 돌아감은 그 움직임이 시작한 문장과 꼭 같은 문장을 사용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결국 간결하게 제시되는 마지막 문장에서 ‘움직임’의 중심 개념은 이 움직임이 완성되었음을 회중들에게 알리면서 다시 언급되는 것이다. 그리고 청중의 카메라 셔터는 닫히고, 필름은 다음의 ‘움직임’을 위해 준비 상태로 나아간다.

 

3) 설교에서 움직임의 시간과 숫자

버트릭은 현대인들이 어떤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일 주제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약 4분 정도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움직임은 이 범위 안에서 종료되어야 하며, 설교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움직임의 개념을 이 시간 내에 전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잘 디자인 된 20분 정도 소요되는 설교는 위에 제시된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는 움직임이 다섯 번이나 여섯 번을 넘지 않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버트릭의 ‘활동 사진 형태의 설교’는 이해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설교 형태이다. 그럼에도 그의 설교 형태는 긍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설교할 때 청중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오랫동안 신중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다. 그는 언어가 가지는 힘과 무언가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는 형태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견해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설교 형태는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질문은 과연 버트릭이 주장하는 방식대로 인간의 의식 안에서 설교의 개념이 정말로 형성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모든 경우에 그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질문은 하나의 개념으로부터 다른 개념으로 언어적인 전환으로서의 설교를 인식하는 것이 과연 적당한 것인지 아닌지의 질문이다. 정말 설교는 오직 일련의 아이디어로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이동해 가는 언어의 움직임”이라는 버트릭의 ‘활동 사진 형태의 설교’는 비록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지만, 현대인의 개념 형성에 대한 중요한 그림을 가르쳐 주고 있는 의미 있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알려져 있다.

 

 

전개식 설교의 예

 

본문: 예레미야 24:4-9, 로마서 8:35-39

제목: 포로민들에게 쓴 편지(A Letter to Exiles)

설교자: 데이빗 버트릭(David Buttrick)

 

(Beginning) 몇 년 전에 라이프지에 애처롭게 보이는 한 장의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사진에는 중동 포로 수용소의 철조망 뒤에 서 있는 아랍 전쟁 포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반바지와 낡은 즈크화를 신고 있었고, 그의 목에는 그가 옛날에 살았던 집 열쇠인 커다란 목걸이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치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의 두 손을 무기력하게 늘어뜨린 채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도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포로로 사로잡힌 사람들로서 세속 세계에서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쓴 편지를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는 지금 우리에게도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Move Ⅰ

(Statement) 추방: 추방은 오늘날 미국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은유처럼 여겨집니다. 왜냐 하면 우리도 세속 속에서 포로민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Development) 옛날에 미국은 진정한 신앙인들인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플로리다에 정착한 스페인 출신의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정착되었습니다. 이 두 지방 사이에 있는 뉴욕 에는 화란 개혁파 사람들이, 펜실베니아 동부에는 독일 경건주의자들이, 버지니아 주 전역에는 영국 국교도인 앵글리칸이 뻗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스테판 카터(Stephen Carter)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불신앙의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의 종은 여전히 주일 아침에 울려 퍼지고 있지만, 요즘 우리는 도시 식당에서 값비싼 브런치(역자주: 아침과 점심 사이에 먹는 식사)를 먹고 있습니다. 옛날 당신들의 위대한 할아버지는 천로역정에 의해서 신앙을 측정했지만, 지금 우리는 현대 심리학을 구독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에 무신론자들은 그들의 위치를 방어하기 위해 모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시대는 바뀌었고, 오늘날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준비해야만 합니다.

(Image) 그래서 브로드웨이의 토니 쿠쉬너(Tony Kushner)는 미국의 종교를 하나님이 언젠가는 미국에 다시 오실 것인지 아닌지를 궁금해 하면서 큰 성경책 크기의 책을 꽉 쥐고 있는 한 무리의 늙은 천사들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Closure) 추방.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세속적인 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이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Move Ⅱ

(Statement)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우리 교회 안에서의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우리에게 조언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많은 충고의 소리가 있습니다.

(Development) 어떤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종교적 부흥이라는 밝은 꿈을 뒤쫓고 있습니다. 가끔 「타임」지는 베이비 부머들의 신앙과 교회들이 쇠퇴하고 있다고 특집 기사를 다룹니다. 그리고 신앙의 부흥은 남부의 여러 주에서조차도 더 이상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권력에 의한 세속주의자들로부터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투쟁적인 기독교 연합에 참가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 예산은 삭감하면서도 막대한 국방 예산은 찬성하는 이들이 학교 교실에서 기도하기를 원하고, 반 여권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반동성 연애자이고, 사형 제도를 강하게 찬성하기까지 하는데, 그 어디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물론, 대부분의 교회는 고귀한 삶을 위해 그들 자신을 놓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Image) 여러분은 몇 달 전에 둔스버리(Doonesbury) 만화를 보셨습니까? 그것은 거의 빈 성도 석 앞쪽에 있는 두 명의 작고 늙은 숙녀들과 그들 뒤에 있는 늙은 노인들이 있는 고딕 교회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설교단에서 손을 쳐든 젊은 신부가 “우리의 날은 다시 올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 말씀은 가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Closure)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땅에서 추방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방 땅인 세속에서 주를 위해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Move Ⅲ

(Statement)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우리를 위한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Development)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집을 짓고, 거기 거하십시오. 정원에 씨앗을 심고 그것들을 추수하십시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고 그들로 계속해서 자녀들을 생산케 하십시오. 포로 생활에서조차도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창조인간의 즐거움에 대한 선한 것들로 가득 찬 세계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집을 짓고, 자녀들을 기르고, 땅의 소산을 마음껏 즐기십시오. 여러분은 예레미야가 기독교의 고립된 집단, 심지어는 미국의 교회 밀집 지역(Church street, 성화가 그려진 창문을 가진 교회들이 많은 지역)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지지하게 할 수 없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어느 곳이든지, 심지어 포로지에서조차도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창조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Image) 새 이웃이 최근에 우리 이웃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새 이웃이 된 그녀는 몇 년 동안 너무 많이 이사를 했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살았던 모든 집들의 사진을 담은 앨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진마다 동일한 낡은 테이블과 꽃 정원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녀는 “나는 나의 부엌 테이블로 이사를 하고 나서 나의 정원을 가꿉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집을 짓고 당신의 밭을 가꾸고, 땅의 소산을 즐거워하십시오.” 예레미야는 포로민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Closure) 예레미야는 20세기의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아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는 모든 곳에, 그리고 어느 곳에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Move IV

(Statement) 자, 이제 멈추고 한 가지 질문을 해 보십시오. 무엇이 그의 신앙을 자극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까가?

(Development) 여러분은 어떻게 그 편지가 기록되었다고 들었습니까? 여러분은 “내가 추방했던 모든 추방자에게” 보내는 주의 말씀이라고 들었습니까? “나, 하나님이 추방시켰던 추방자에게” 우리는 마치 세속 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세워진 것처럼 그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계속 우리의 추방을 실현하는 데 관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세 교회의 승리주의(triumphalism)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방황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 혼란, 즉 불신앙이라는 낯선 혼동으로 끝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 세계는 여전히 하나님의 세계이고, 동시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계입니다.

(Image) 그래서 20세기 초 장로교 지도자인 브라운 박사는 그의 노년에 갓 시작한 N.C.C(National Council of Churches) 앞 강단에 서서 그의 신앙에 대해 외쳤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라는 엄청난 해류가 모든 만물의 표면 아래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라고 외쳤습니다. 세속주의는 개신교의 종교개혁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19세기 중엽에 그것은 ‘-주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속주의는 퍼져 나가고, 유럽 전역의 교회들은 비어 가고 그리고 지금 미국도 그렇습니다. 세속 세계는 과학과 공업과 노조와 대학과 정당과 교회에 의해 형성되어 왔습니다.

(Closure)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하나님은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추방했던 추방자에게” 말입니다. 그러므로 귀를 기울여 들으십시오.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Move Ⅴ

(Statement) 따라서 우리가 세속의 시대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소명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Development) 예레미야는 “그 성읍의 안녕을 구하라. 그리고 너희가 사는 곳에 안녕을 위해 기도하라.”고 노래합니다.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분은 인간 세상에서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그분은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그분은 대담하게 외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공익을 위해 일하면서 이 세상에서 섬겨야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학교에서만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바칠 뿐만 아니라, 빈민가에 있는 학생들을 섬기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아이들을 위한 멋진 학교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용기를 내어 외쳐야 하기 때문에, 단지 교회 지도자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미국은 정치적인 활동을 함께 하는 데 어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위험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머리 위로 신앙이라는 덮개를 뒤집어쓴 채, 우리의 성경을 붙잡고 안전하고 감미로운 피난처인 교회로만 생각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해야만 합니다.

(Image) 몇 년 전에 주일 학교 어린이들이 그린 커다란 그림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의 중간 부분에 접혀진 부분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는 웨이터들처럼 서로를 향해 몸을 아래로 구부리고 있는 여러 쌍의 사람들을 그린 추가모형의 커다란 그림(stick figure)들이 있었습니다. 그림 아래에는 크래용 글자로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모든 이교도 지역은 여전히 하나님의 왕국 내에 있고 모든 순간 이웃들에게 유용합니다.

(Closure) 예레미야는 “성읍의 안녕을 위해서 일하라”고 노래합니다. “성읍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Ending) 그러면 우리는 신앙을 떠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거주하고, 우리의 자녀를 양육하고, 모두의 안녕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사랑이라는 엄청난 해류처럼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섭리를 신뢰하는 하나님의 가족으로서떡을 떼고, 잔을 나누면서잔치를 베풀어야 합니다.

 

 

5. Paul S. Wilson의 The Four Pages of the Sermon (4 페이지 설교)

“The Four Pages of the Sermon" in Creative Styles of Preaching, pp. 77-91.

"Four Pages of the Preacher" in Patterns of Preaching, pp. 80-86.

Paul Scott Wilson. The Four Pages of the Sermon. 주승중 역. 『네 페이지

설교』 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6.

주승중 “새로운 설교 형태의 연구-네 페이지 설교” 『장신논단』제 18집 (2002), pp. 447-498.

 

윌슨(Wilson)은 그의 책에서 설교란 에세이 작성 흐름을 따르기 보다는 하나의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진행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설교를 제시한다. 오늘의 세대는 읽는 문화에서 보는 문화로, 즉 시각적인 세대로 변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속에서 윌슨은 인터넷의 웹 페이지에 주목했다. 영화와 같은 이미지 효과를 충분히 나타낼 수 있으면서도, 웹 페이지는 말과 그림, 정보와 영화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이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네 페이지는 엄밀하게 말하면 네 쪽이 아니라 설교의 네 부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매일 같이 한 부분씩 준비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고 있는 설교의 네 페이지, 즉 네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본문에 나타난 문제(Trouble in the Bible): 본문에 나타난 갈등이나 문제를 찾는 것

2. 이 세상에 있는 문제(Trouble in the World):이 세상의 부조리와 힘을 보여줌으로 하나 님의 은혜와 행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야 함.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의 갈등 을 본문 속의 갈등을 비추어 해석하는 것. 예를 들어 본문에서 유다가 예수님을 어떻게 배신했는가를 말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배신으로 가득 차 있음을 지적함을 통해서 둘째 페이지는 전개될 수 있을 것.

3.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God's Action in the Bible): 설교의 중심부분으로서 이 부분에서는 본문에서 말하는 기쁨 소식에 눈을 돌린다. 성경 본문 속에서의 하나님의 역 사가 중심이다. 예를 들어 낙원에서의 추방 사건이 새 예루살렘을 향한 길로, 출애굽은 약속의 땅을 향한 출발로, 십자가는 부활의 시작으로 바라보면서, 본문 안에서 발견되어 졌던 문제를 보던 시각이 그 사건의 이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시각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나님 중심, 즉 하나님의 행동이 그 핵심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동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설교는 은혜 위에 세 워져야 하며, 은혜를 표출하고, 확대하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 하심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주의 할 것 한 가지는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행동을 문장으로 확인한 후에 곧바 로 인간의 의무로 그 초점을 옮긴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설교자들은 “하나님이 우리 를 사랑하신다”고 말한 뒤에 곧 바로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고 말함으로써, 다시 인간중심적 행동을 요구하는 쪽으로 바뀐다. 이런 점을 주의해야 한다.

4. 이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God's Action in the World): 본문 속의 기쁜 소식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의 기쁜 소식 사이에 다리를 놓게 된다. 이곳은 성경 본문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 세상에서 똑같은 하나님의 역사 를 찾아내는 곳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똑같이 역사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은 혜로운 행동을 찾아야 한다.

 

네 페이지 설교의 실례와 분석: 성탄절의 취소(마 1:15-24)

 

(도입부)

어떤 때는 성탄절의 휘황찬란함을 보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니가 하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텔레비전에서 말쑥하게 차려 입은 신사가 벽난로 가에 앉아 잔에다 위스키를 따라 그 맛을 음미하는 순간, 갑자기 배경 음악으로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 합창이 울려 퍼져 나오는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저희 집 우편함에 최신 상품 목록이 수록된 험버타운 플라자 전단에서부터 로블로우스 매장의 식품 품목이 기록된 전단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광고 전단들이 배달되었는데, 하나같이 ‘성탄절의 평안과 기쁨의 소식’이라는 제목을 붙여 놓았습니다. 만일 남부의 평안함을 소망하고 매장의 할인 가격을 기쁜 소식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끔 저는 하나님께서 교회 문 앞에 “성탄 연휴 기간은 문을 닫고 남부로 휴가를 갔음. 새해에 돌아 옴”이라고 써 붙이고 성탄절을 취소하시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탄절에 애정을 쏟아 붓듯이 여러분이 파티에 온 열정을 쏟아 붓고, 하나님이 성탄절 축제를 누구에게나 허락하셨듯이 여러분이 그 파티에 누구나 오게 한다면 분명히 일은 잘못되고 말 것입니다.

 

(분석) 이 부분은 설교의 도입 부분으로,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도입부에서 윌슨은 현대의 성탄절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회중들의 관심을 신속하게 사로잡고 있다. 그런데 이 설교에는 윌슨이 이미 주장한대로 도입부부터 “취소”(calling off)라는 하나의 중요한 이미지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하는 ‘하나의 이미지’는 바로 ‘취소’이다. 그리고 이 ‘취소’와 관련한 이미지는 본 설교의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반복되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Page One: 성경 속의 문제)

성경에 나오는 원래의 성탄절 이야기를 보면, 요셉은 성탄절을 취소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성탄절 쇼핑을 하려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배우자, 곧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이제 너도 네 것을 골랐구나”라고 말할 수 있도록 결혼한 상대인 신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틀 무렵부터 해가 질 때까지 열심히 일하며 사는 목수였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그의 목공소에서는 그가 식탁이나 연장들을 만들 때 돌아가는 톱 소리가 들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녁 때 집에 돌아가 문을 닫고 누워 있을라치면 한없는 외로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는 의롭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천성이 선한 그인지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저를 결혼시킬 예정이시거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게 맞는 배우자를 찾게 해 주세요.” 그는 하룻밤 그렇게 기도하고 마는 사람이 아니라 평생을 걸고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순하고 착한 아내를 얻고 싶어했습니다. “오 하나님! 아이들에겐 좋은 엄마요, 나이가 들면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착한 여인을 아내로 얻게 해 주세요.”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기도의 응답처럼 그에게도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요셉아!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를 네 아내로 데려오너라.“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사람은 요셉 혼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부모들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똑같은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부모들도 하나님이 요셉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과 관계된 사소한 것들을 놓고 기도해 오던 중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 되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도와주시길 바라지요? ‘어떻게든 되겠지’하고 내버려두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데이트 상대를 찾는데 컴퓨터가 이용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인격체가 아닙니다. 뭔가 좀 더 근본적인 것, 즉 우주를 주관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상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데이트를 준비해 놓으시고 청첩장을 쓰신 후 두 사람을 결혼식장으로 데려오시려 할 때 여러분은 뭔가 흔들리지 않는 어떤 토대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요셉과 마리아가 가지고 있던 것, 즉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들은 결혼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끌렸습니다. 그들은 사랑스런 눈길로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둘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 못지 않게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이 하나가 되는 것을 원하신다는 사실에 아주 기뻐했습니다.

따라서, 결혼 준비가 다 끝난 뒤에,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임신했다는 말을 했을 때 요셉이 화를 낸 것은 이해가 갑니다.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다 엉망이 되었는데 누군들 하나님께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요셉은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 요셉은 말했습니다. “저를 엉망이 되게 만드시는군요. 제가 신부를 찾으려고 어디로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까? 술집엘 갔습니까? 해변엘 갔습니까? 하나님께로 갔지 않습니까? 도와달라고 기도했고요. 정직하고 의롭고 진실한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누군가를 점 찍어 둘 수도 있었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지요. 제게 그녀의 이름을 말해 주셨잖아요. 마리아라고 하셨죠.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ㅁ 자로 시작하죠? 마리아가 ‘안나’나 엘리사벳, 사라 또는 룻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은 ‘마리아’라고 말씀하셨고 저도 분명히 ‘마리아’라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마리아다. 마리아가 네 아내야’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약혼을 했고요. 데이트도 했지요. 예식장도 빌려 놨고, 음식도 예약해 놨고요. 그런데 임신이라니? 저보고 동정녀 탄생을 믿으라고 그러더군요. 제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건 정말이지 아주 잔인한 계략입니다. 하나님, 당신께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대하시면 당신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요. 어쨌든 하나님, 전 이 일에서 빠지고 싶어요. 이번 성탄절 계획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 모든 걸 다 취소하겠습니다. 정말 불쾌한 아이디어예요. 좋게 될 게 하나도 없지 뭐예요. 사람들도 돈도 고통도 많이 들 겁니다. 그러니 성탄절을 취소합시다.”

 

(분석) 먼저 첫 번째 페이지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본문에서의 갈등이나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때, 윌슨은 이곳에서 마리아의 임신을 통한 갈등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의 임신은 분명히 본문이 가지고 있는 갈등의 요소이다. 그리고 윌슨은 그 갈등을 통해서 첫 페이지의 주제를 전개하는데, 그렇다면 이곳에서의 주제문은 무엇일까? 그것은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고 있는 요셉의 말, 즉 ““어쨌든 하나님, 전 이 일에서 빠지고 싶어요. 이번 성탄절 계획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 모든 걸 다 취소하겠습니다” 에서 볼 수 있듯이, “요셉은 하나님의 초대를 거부하였다” 가 될 수 있겠다. 그리고 윌슨은 본문의 내용을 한 영화의 장면, 즉 요셉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면(scene)을 하나의 영화의 장면처럼 재구성하여 전개하고 있다. 특별히 요셉이 화가 나서 하나님께 항의하는 장면은 영화에서의 하나의 장면(scene)을 회중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첫 페이지에서도 윌슨은 “취소”와 관련한 주된 이미지를 계속해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취소”의 이미지는 요셉의 “이번 성탄절 계획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 모든 걸 취소하겠습니다...성탄절을 취소합시다”라는 말속에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 설교의 교의는 기독론(성자의 탄생)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런 여러 가지 면들을 분석해 볼 때, 이 첫 페이지는 윌슨이 주장한 바 첫 페이지가 지녀야 할 중요한 요소들을 잘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Page Two: 세상 속에서의 문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성탄절을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극장에 가기도 하고, 나무를 잘라 오거나, 파티에 가거나, 교회에 오거나, 캐럴을 부르거나, 선물을 주고 받고, 칠면조 고기를 먹거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서 성탄절이 사리진 지는 오랩니다. 음악도 듣고 지나간 성탄절의 따뜻한 추억은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산타를 위해 과자와 우유를 준비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논쟁을 벌이거나 흘려 버려야 할 기적이라기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할 기적인 것입니다. 혹 교회라도 나오는 사람들은 4주 간의 강림 주일 동안 강림 화환대에 켜진 촛불을 보게 됩니다. 매주 한 자루씩 그리고 마지막 촛불은 그리스도를 위한 촛불이 성탄절에 켜지는 것을 보게 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촛불이 켜져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탄절을 취소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탄 전야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교회에는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고, 촛불 하나 켜져 있지 않으며 마음 속 교회의 지붕으로는 빗물이 새고 창문들은 다 깨져 있습니다. 오직 차가운 북풍만이 그 교회 안으로 휭하니 불어 갑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이신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따뜻한 바람은 불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서는 성탄절이 취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 머리 위에는 이번 주에 베들레헴 하늘의 그 별은 빛나지 않으며, 왕의 나심을 찾아 나서는 동방 박사들도 없고, 요셉과 마리아처럼 머물 방을 찾는 이들도 없을 것입니다. 설령 찾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 마음의 사관에는 빈 방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성탄절이 취소되었으니까요. 하늘의 천사들은 노래도 불러 보지 못한 채 흩어져 버렸고, 하나님의 아들은 아기로 태어나 사람들에게 보여지기도 전에 거부되었습니다. 찬양은 채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침묵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성탄절을 취소하는 게 최선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만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여러분 마음 속에 들어오시게 하면 그 작은 하나님이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는 아주 조그만 아이, 새로 태어난 갓난아이지만여러분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취소하고 다 끝내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안전하게 혼자 지내십시오. 모든 만물이 앙상하게 벌거벗은 겨울 밤 창 밖을 내다보며 우리가 지금 내다보고 있는 것들은해골 같은 나무들과 얼어붙은 대지, 끝없이 이어지는 밤 등항상 그 자리에 있어 왔다고 결론을 내려 보십시오. 무신론과 불가지론은 절망을 안고 사는 인간을 한 번도 구해 준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사람들을 정죄만 해 왔습니다.

우리의 자녀와 배우자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도 성탄절을 취소해 버렸으니까요. 이런 사람들에게도 소망이 있을까요? 물론 저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색하게 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하려 하지 않을 때는, 비록 그것이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들 역시 한 두 번씩은 다 성탄절을 취소하고 싶어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병을 앓거나 실직을 당했거나 구조 조정의 여파로 직장에서 밀려나 성탄절을 취소시킨 채 살고 계신 분들에게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노숙자들에게 과연 성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뉴욕 경찰이 최근 펜 센트럴 지하철 역 부근에서 하루 저녁에 400명의 노숙자들에게 급식을 제공하던 간이 식당차에 대해 급식 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노숙자들이 몰려든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뉴욕 시는 노숙 자들에게 도시를 떠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론토도 뉴욕 시를 따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대신해서 데안나와 도시 전도대가 미시소가에 있는 쉼터 연대에서 열린 대책 회의에 12번도 더 참석했으며 최근에는 하젤 멕골리언 시장과도 면담을 가졌습니다. 그 결과 시장도 이 노숙자 문제가 연방 정부나 주 정부만의 문제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쉼터 연대와 공동의 해결책을 모색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분석) 윌슨은 둘째 페이지에서 성탄절을 취소한 현대인들의 문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성탄절을 취소해 버렸습니다”라는 주제 문장을 통해서 첫 번째 페이지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으며, 그가 제시하고 있는 문제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거부하는 현대인들의 수직적인 문제에서 시작하여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색한 수평적인 문제를 포함한다. 더군다나 그 문제는 노숙자들을 위한 급식조차 취소하는 공동체적인 문제에까지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서는 성탄절이 취소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의 심각성을 전달해 주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이 회복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둘째 페이지에서 어느 정도 보여주어야 할 필요(need)를 충족시키고 있으며,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한 회복이라는 은혜는 기독론(doctrine)과도 연결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취소”라는 이미지 역시 이 페이지에서도 계속 나타나고 있다. 첫 페이지의 주제 문장인 “요셉은 하나님의 초대를 거부하였다”에 이어서 이 페이지의 주제 문장도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아기로 태어나 사람들에게 보여지기도 전에 거부되었습니다” 에서 추출할 수 있다. 즉 두 번째 페이지의 주제문은 “우리들도 성탄의 초대를 거부한다”가 될 것이며, 따라서 ‘필요’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가 될 것이다. 결국 이 필요는 그 다음 페이지들에서 자연적으로 연결되어서 해결되고 채워질 것이다.

 

(Page Three: 성경 속의 은혜)

수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취소한 것이 이런 문제들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면으로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겠지요. 성탄절은 우리가 뭔가 행동해서 실천해야만 하는 어떤 날은 아닙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어떤 날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성탄절은 여전히 돌아올 것입니다. 아, 이제 영광은 사라졌도다! 아름다운 전구로 장식된 집들이 늘어선 거리도 없고 꼭대기에 베들레헴의 별이 걸린 실내의 성탄 트리도 없으며 성탄 카드도 없어지겠지요. 그래도 성탄절은 계속 돌아올 것입니다. 어쩌면 원래의 성탄절에 훨씬 더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요셉에게 있었던 성탄절이 그랬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하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성탄절을 취소하고 싶어했습니다. 잠자리에 들었는데 하나님이 천사의 모습으로 밤에 찾아 오셨습니다. 요셉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아, 요셉아, 얘기 좀 하자. 네가 성탄절 취소한 것을 알고 있다. ‘메시아’ 연주회를 위해 예약해 놓았던 것을 취소한 사실도 알고 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성찬절 대 축제 행사를 취소시킨 것도 안다. 마리아보고 혼자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라고 할 생각이지? 다른 남자하고 놀아난 여자인 마리아하고 결혼해서 사람들로부터 놀림 받고 싶지 않겠지. 그래 요셉아, 그런 이유들은 다 합당하고 이해가 가는 것들이지. 나는 너를 약 올리는 게 아니다. 네가 포기하고 싶어한다는 걸 이해한다. 동정녀 탄생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이냐? 어쩌면 너한테 뭔가 더 나은 방법을 썼어야 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요셉아, 그렇게 하려면 문제가 생겨. 너하고 나하고는 잘 아는 사이지? 우리는 늘 그래 왔잖니?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너를 알고 있었지. 네가 세상에 태어나도록 부른 이가 나니까. 나는 너를 세상에 태어나도록 작정해 놓았거든. 네 생애에 어떤 목적을 주었지. 그리고 너를 내 성탄절 축제에 참가시키기로 선택했지. 너는 한 가지 잊고 있는 게 있단다. 너와 나 사이의 관계 말인데 우리는 똑같지가 않아. 나는 이 축제의 기획자야. 너는 배우고 나는 감독이란 말이다. 나는 네가 에드립할 자유, 즉 네가 생각해서 꼭 필요한 말을 하거나 가장 현명하고 재치가 번뜩이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했지. 하지만, 나는 네가 연기하는 걸 지도할 감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단다. 요셉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아주 간단한 거란다. 성탄절은 네가 취소할 수 있는 너의 것이 아니야. 성탄은 내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는 것이란다. 미안하지만, 이 성탄절 축제의 주인공은 네가 아니란다. 이 행사에서 너는 다른 사람의 역할을 가로채는 못된 녀석이 아니란다. 바로 아기가 주인공이지. 이 행사를 통해 나는 세상의 모든 죄를 없애려는 거야. 그러니 요셉아, 다른 사람들이 너에 대해 뭐라고 생각할까 하는 것에 신경 쓰지 말았으며 좋겠구나. 나는 네가 사람들이 아기 예수에 대해 뭐라고 생각할까 하는 데 신경을 썼으면 한단다. 그는 이 세상의 희망이며 빛 중의 빛이요, 찬란히 빛나는 새벽별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자요, 섬기는 왕이며 내 우편에 앉을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란다. 내 행사에 네가 참석하길 바란다.” 갑자기 동정녀 탄생이라는 요셉의 고민은 무대 뒤로 서서히 사라지고 요셉에게 나타나 말하던 하나님의 천사가 재빨리 무대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분석) 세 번째 페이지에서 우리는 이 설교의 main theme을 지닌 문장을 찾을 수 있다. 즉 세 번째 페이지의 주제문이자 동시에 설교 전체의 주제문은 “네가 내 행사에 참여하기를 바란다”는 말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은 요셉을 구주 탄생의 자리에 초대하셨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설교자는 첫 번째 페이지의 이야기, 즉 요셉이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성탄을 취소하겠다는 이야기를 이 페이지에서 다시 영화화하면서 새로운 전환으로 이끌고 있다. 여기서 윌슨은 “수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취소한 것이 이런 문제들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전이의 문장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세 번째 페이지로 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이곳에서 요셉과 하나님의 대화는 계속된다. 그러나 첫 번째 페이지에서의 대화는 요셉이 하나님께 화를 내면서 성탄절을 취소하겠다는 것이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성탄절은 네가 취소할 수 있는 너의 것이 아니야”라는 말씀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구원의 행동을 하심을 보여준다. 즉 첫 번째 페이지의 이야기가 새롭게 전환하여 다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일방적으로 선포되고 있다. 즉 이 페이지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은혜는 바로 첫 번째 페이지의 문제(성탄절은 취소되었다)의 연결이자 해결이다. 이곳에서도 설교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취소”의 이미지가 계속되어지고 있으며, 영화화의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요셉과 하나님이 다시 만나서 대화하는 장면(scene)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Page Four: 세상 속에서의 은혜)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잔아, 빌아, 베드로야, 다이안아여기에 여러분 자신의 이름을 넣어 보십시오나는 네가 이 행사에 참석했으면 한다. 내 아들이 태어나는데 이것을 통해 사람들이 내가 세상을 구원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구나. 이라크엔 포탄이 떨어지고 그 때문에 워싱톤은 온통 정신이 없지만, 나는 여전히 이 세상을 구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우리가 성탄절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성탄절의 진리를 우리가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탄절을 받아들이고, 천사들의 합창에 화답하며, 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를 찾아 길을 떠난다면,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크게 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들고 가는 곳마다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빛이 닿는 곳마다 공의가 다스리고 진리가 선포되며 자비가 하나님의 은혜처럼 풍성히 넘쳐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리시겠습니까?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지금껏 외면해 왔던 어떤 사람에게 자비의 손길을 펼치시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사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그분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석) 넷째 페이지의 초점은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이다. 윌슨은 이를 위하여 이라크에서도, 워싱톤에서도 여전히 그의 아들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에서 성탄절의 진리가 우리의 마음 속에 깨달을 수 있는 방법들은 모색하시며, 우리를 구원을 알리는 도구로 부르신다. 그러므로 이 페이지의 주제문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을 알리는 자리로 부르셨다”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윌슨은 넷째 페이지에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임무를 분명히 제시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을 깨달은 회중들은 이제 “외면했던 사람들을 향한 자비의 손길을 내밀라”는 초청의 음성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의 손길을 펼치는 것이 결국 우리가 강보에 싸여 누우신 아기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는 마지막 선언은 회중들에게 기쁜 소식이자 소망을 전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지금까지의 분석을 정리해보면, 이 설교는

1 페이지 (성경 속의 문제): 요셉은 하나님의 초대를 거부하였다

2 페이지 (세상 속에서의 문제): 우리들도 성탄의 초대를 거부한다

3 페이지 (성경 속의 은혜): 하나님은 요셉을 구주 탄생의 자리에 초대하셨다

4 페이지 (세상 속에서의 은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을 알리는 자리로 초대하셨다

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 설교의 교의(doctrine)은 기독론이며, 필요(need)는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이며, 이미지(image)는 “성탄의 취소”, 그리고 임무(mission)는 “외면했던 사람들을 향한 자비의 손길을 내밀라”가 될 것이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대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지난 1970년대 이래 설교학에서 일어난 커다란 패러다임의 변화의 물결이다. 이것은 설교를 새롭게 하려는 노력과 복음을 통한 설교를 새롭게 전달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듣든지 말든지 무조건 선포만 하면 그만이라고 하는 예전의 권위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들려지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나오게 된 운동이다. 왜냐하면 “들려지지 않는 설교는 설교일 수 없으며,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운동의 결과로 많은 다양한 형태의 설교 방법론들이 소개되었다. 그것들 중에 우리는 다섯 가지 정도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사실 이 외에도 더 많은 새로운 형태의 설교방법론들이 있다. 북미의 교회가 1970년대 이후 모든 기존의 권위가 부정되는 다양한 문화 변동의 흐름 속에서 심각한 강단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제시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아직도 거의 모든 설교를 소위 “3대지 설교” 형식의 명제적, 논증적인 설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강단에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오늘 한국교회의 청중들도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이런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다면 그래서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이미 맞이하고 있는 강단의 위기의 높은 파고를 극복하지 못하고 유럽의 교회들처럼 가라앉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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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전략과 현대설교학의 최근의 동향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의 EPIC Church 개념을 중심으로

 

주승중(장신대 예배설교학 교수)

 

들어가는 말

로버트 듀페트(Robert G. Duffett)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오늘의 시대를 조명하면서 오늘의 설교자들은 아무도 듣지 않으려는 시대 속에서 말씀을 전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 전파 사역을 위임하시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에)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하셨는데, 우리는 지금 말씀을 전파하기 힘든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모든 시대는 언제나 변화를 거듭하면서 발전해 왔지만, 21세기는 이전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 새로운 상황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바 던(Marva Dawn)은 21세기의 포스트모던 문화를 해석하면서 “오늘의 문화가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교회의 예배와 설교가 이런 포스트모던 문화에 의해서 깊은 영향아래 놓여 있다고 말한다. 특별히 즐거움과 감성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던 문화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빼앗고 있으며, 더 나아가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면서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버리고자 하는 포스트모던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하여 매우 도전적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설교와 관련하여 에모리 대학의 설교학자 토마스 롱(Thomas G. Long)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 바 있다. 그는 오늘의 설교가 “가장 비난하기 곤란한 소음”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그의 지적은 오늘날 교회의 설교가 포스트모던 상황 속에서의 시대적인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해 나가지 않는다면, 설교가 사람들에게 마지못해 참아주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면서 결과적으로 참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시대에서도 설교 사역을 감당하라고 부름 받은 설교자들은 시대의 변화와 특징에 깊이 관심을 가지면서, 그에 적합한 설교의 패러다임을 추구해야 한다. 본 강의는 이런 전제 아래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전략에 관하여 생각해 보면서 현대설교학의 최근의 동향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본 강의를 전개하기에 앞서 두 가지 전제를 밝히고자 한다. 먼저 본 강의는 설교학에 관한 글이기 때문에 포스트모던 시대의 의미와 상황,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설명을 시도하지 않는다. 둘째, 본 강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한 설교의 전략 모두를 다루기보다는(이것은 너무 크고 포괄적인 주제이다), 포스트모던 상황 속에서 미래 교회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던져주고 있는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의 EPIC church 개념을 중심으로, 설교의 전략과 그 방향성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본 강의는 스윗의 EPIC 교회의 개념에 대해 설명할 때에 그 속에서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논의하게 될 것이다.

 

몸 말

레너드 스윗의 영성과 감성을 하나로 묶는 미래교회

레너드 스윗은 그의 책 『영성과 감성을 하나로 묶는 미래교회』(Postmodern Pilgrims)에서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의 21세기 목회의 대안을 제시한다. 그는 성경을 믿는 교회에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찬 문화 속에서, 영혼 구원을 핵심으로 여기는 교회에 영혼 구원을 개인적으로 체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 문화 속에서, 소비주의가 제일 종교가 된 문화 속에서, 성경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더 이상 제공해주지 못하는 문화 속에서,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의 메시지를 들어 올릴 것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세상의 모든 지혜를 합친 것보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직면한 포스트모던 위기를 헤쳐 나가기에 적합하다는 믿음을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리고 그 결과 EPIC 교회의 모델을 제시한다.

여기서 EPIC 교회는 경험(Experience), 참여(Participatory), 이미지(Image-Driven), 그리고 관계(Connected) 중심의 EPIC 교회를 말한다. 그는 이 EPIC 교회가 포스트모던문화와 상호 작용하며, 여전히 살아 있는 복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성경적인 전통과 개혁의 길을 함께 모색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1. 경험하고 느끼는 교회

1) ‘이성’에서 ‘경험’으로((From Rational to Experiential)

포스트모던인들은 진리를 단순히 알기보다는 자기의 것으로 체험하고 싶어 한다. 스윗은 포스트모던인들을 가장 잘 이해하여 성공한 한 기업의 예를 드는데, 그것은 이베이(eBay)이다. 이베이(eBay)가 교회보다 영향력이 큰 것은 포스트모던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베이의 마술은 쇼핑을 경험으로 만드는데 있는데, 이베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집에서 쇼핑을 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경매 사이트에 자기가 직접 참여하여 물건을 사게 되는데, 그 경험은 긴장과 스릴만점이다. 스윗은 이베이는 교회가 포스트모던인들의 관심을 끌어 모아 그들을 교회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인데, 포스트모던인들은 경험에 더욱 개방적이기 때문에 교회가 이에 대해서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인들의 이런 경향을 설명하기 위하여 스윗은 이런 예를 소개한다.

 

“어떤 사람이 금으로 포장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는 길에서 도로표지판과 두 갈래 길을 본다. 도로표지판에는 오른쪽과 왼쪽을 가리키는 금으로 된 화살표가 새겨져 있 다. 그는 표지판을 읽는다. 오른쪽 화살표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쓰여져 있다. 왼 쪽 화살표는 ‘천국에 관해 토론하는 길’이라고 쓰여 있다. 모던인이 어떤 길을 선택할 지 추측해보라”

 

스윗은 여기서 이성과 과학 그리고 논리를 중시하는 모던인들은 ‘천국에 관해 토론하는 길’을 선택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인들은 당연히 ‘천국으로 가는 길’을 선택할 것임을 말한다. 포스트모던인들은 경험에 끊임없이 열려 있는 사람처럼 경험하고 느끼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스윗은 웨일즈 신부이며 시인인 토마스(R.S. Thomas)가 웨일즈의 시골길을 산책할 때, 아직도 따뜻하기를 희망하면서 산토끼가 누워있었던 장소에 손을 넣어보는 습관이 있었음을 말하면서, 포스트모던인들은 이처럼 하나님이 방문했을지도 모르는 곳에 계속해서 그들의 손을 넣어보면서 그곳이 여전히 따뜻하기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포스트모던인들은 경험, 특히 하나님 경험을 갈망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문화는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하나님,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교회 전통, 교회 사역자, 교회 제도)이 정의하는 하나님에 만족하지 않으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이성에서 경험으로 변화되는 세계관의 변화를 그대로 나타내며, 기독교 영역 내에서는 ‘영성’과 ‘자기 개발’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교회의 설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강렬하게 느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포스트모던 문화에서 경험은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설교자들은 설교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의 경험을 해보는 것, 이것 자체가 메시지가 된다. 그리고 이런 세키나(Shekhinah: 이 말은 히브리어로 신적인 현존을 의미한다) 경험은 모든 감각-청각, 시각, 촉각, 미각, 그리고 후각-을 하나님의 현존의 찬란함 빛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게 한다.

 

2) “새로운 설교학 운동”(New Homiletics)과 복음의 경험 그리고 내러티브

그러기에 지난 40여년 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변동에 대처하여 설교의 갱신을 이끌어온 “새로운 설교학 운동”(New Homiletics)은 ‘경험’을 그렇게도 강조해온 것이다. “새로운 설교학 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성들 가운데 하나는 설교의 목표를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데 둔 것이다. 설교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명제적이고 확실한 사상의 진리를 회중들에게 확신시키는 것도 아니다. 설교는 복음의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설교의 목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있어서 그 의도가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경험에 있다. 그 동안의 설교가 주로 교리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해석해 주는 지식과 정보 전달 중심이었다면,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복음을 경험하게 하는데 그 중심을 두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신학적인 명제나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그에 대한 지적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 설교의 주요 목적으로 삼았던 전통적인 해석설교와는 달리,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청중들이 복음을 경험하게 하는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경험이라 함은 인간의 지적, 심미적, 감성적인 차원을 모두 다 포함하는 통전적 차원의 경험을 말한다. 이런 경험은 TV의 드라마에서 내용이 전개되어 가는 동안 그 드라마의 결론 부분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깊은 감동을 맛보게 되는 순간의 경험에 비유할 수 있다. 즉 예를 들어 미스테리 범죄 수사극에서 A와 B 그리고 C라는 인물들 가운데 누가 범인인지를 몰라 궁금해 하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고, 드라마가 전개되는 동안 깔려 있던 여러 가지 복선들이 결말에 가서 해결되면서 “아! 저 사람이 범인이구나” 외치게 되는 순간이 바로 이런 경험이 일어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인식의 전환의 순간이며, 어떤 사실을 전인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설교는 회중들이 설교 가운데 선포된 계시의 말씀을 통해 성경의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만남을 경험하고, 그 만남 속에서 진정한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게 만드는 사건이다. 이것을 설교학자 헨리 미첼(Henry Mitchell)은 “대리적인 만남”(vicarious encounter)라고 말한다. 즉 이런 만남은 설교를 통해서 성경의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경험하고 고백하게 되는 만남을 말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청중들의 생생한 삶의 경험을 통해서 성경의 사건과 이야기들을 다시 해석해 줌으로서, 성경의 사건이 바로 나의 사건임을 경험하게 해 주어야 한다.

특별히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이러한 청중들의 내면의 경험을 불러일으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구가 바로 내러티브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내러티브, 즉 이야기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을 전달해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복음의 경험과 함께 내러티브, 즉 이야기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사회도 이야기에 개방적이다. 또한 오늘의 문화는 이야기에 젖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V의 연속극, 영화, 연극, 시사뉴스 등 어디를 보아도 온통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인의 심성에는 이야기가 더 와 닿아서 그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가 있게 된다. 오늘 사람들이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삶이 하나의 드라마이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성경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중요한 요소이다. 이야기는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야기 없이 설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들려주신 선한 사마리아인과 탕자 그리고 씨 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들이 바로 이야기였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간단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동정과 용서, 그리고 개인적인 책임과 같은 중요한 개념들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 가르치고자 하였을 때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를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선한 목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야기 없이 설교하지 않으셨다." 사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생애가 하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레디 데이비스라는 설교학자는 “복음서의 아이디어들은 주로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감동적인 경험을 하기를 원하는 포스트모던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도구이다. 그래서 그래함 존스톤(Graham Johnston)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전략』이라는 책에서 이야기하기(storytelling) 방법을 사용할 것을 강력히 권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1) 서스펜스를 가진 이야기를 소개할 것 2)이야기의 요점을 요약할 것 3) 구체적이며 생생한 이미지를 사용할 것 4) 개인의 이야기로 만들 것 5) 이야기의 흐름을 유지할 것 6) 감정적이 것을 내면화 할 것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설교자들은 감동받기를 원하는 포스트모던인들에게 가슴 뛰는 놀라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야 하며, 그들은 향한 하나님의 여전한 사랑을 이야기를 통해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2. 참여하고 상호 작용하는 교회

1) ‘대리’에서 ‘참여’로(From Representative to Participatory)

스윗은 대리에서 참여로 바뀐 포스트모던 문화의 대표적인 모습을 이베이(eBay) 경매 사이트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하루에 2천만 건 이상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경매 사이트 이베이는 ‘참여 경기’라고 불려진다. 이베이의 힘은 생산자가 아닌 구매자에게 있다. 구매자가 가격을 결정한다. ‘소매가’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고객이 상품에 얼마를 지불할지 결정한다. 이런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황을 가리켜 ‘참여의 시대’ ‘수평사회’라고 부른다. 이렇게 포스트모던인들은 상호 의존적이며 상호 작용하는 기질 안에서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들은 관찰하는 자로서 참여자만큼이나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며 세상과 함께 상호 작용하기를 원한다. 상호성은 포스트모던인들의 두뇌 속에 장착되어 있는 하나의 기능이다. 그들은 의소 소통의 측면에서 대화하는 형태를 띠며 쌍방향 미디어를 이룬다. 인터넷의 발전과 그 활용도를 보면 이런 모습을 제일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그저 주어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개성을 부여하기를 원한다. 인터넷이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최적의 도구이다. 무수히 많은 웹으로 연결된 인터넷의 세상에서는 지구 어느 곳에 있는 누구와도 바로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인들은 자신이 머무르다 갔다는 증거를 남기는 ‘변화’를 추구한다. 이렇게 포스트모던 문화는 ‘선택의 문화’, 즉 ‘참여의 문화’이기 때문에 상호작용할 수 없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스윗은 이렇게 대리에서 참여로 바뀌고 있는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교회는 여지껏 가지고 있던 “우리는 설교하고 당신들은 듣는다”라는 방식에서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지체는 참여하는 공동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회중들은 참여하는 관찰자가 되기를 원한다. 포스트모던인들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상호 작용하고, 몰입할 수 있으며, ‘정면으로’ 부딪히는 참여를 원한다. 가령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도 그들은 몸으로 예배를 드리며 몸으로 하는 의식을 간절히 원한다. 그러므로 스윗은 주장하기를 설교가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지 상호작용적 요소가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설교자는 상호 작용적 설교를 시도하면서 회중들과 마이크를 공유하면서 함께 설교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 설교를 이루어갈 수 있는가?

 

2) 새로운 설교학 운동과 귀납적 방법을 통한 참여

이 문제와 관련하여 “새로운 설교학운동”을 태동시킨 프래드 크레독(Fred Craddock)은 귀납적 방법론을 주장한 바 있다. 21세기 청중들에게 효과적인 방법은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연역적인 설교(deductive preaching)보다는 귀납적인 설교(inductive preaching)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설교에 있어서 연역적인 접근은 일반원리에서 특수한 상황으로 적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즉 연역적인 설교는 초반부에 설교의 중심사상이나 명제를 제시하고, 본문에서 3개 정도의 대지와 또한 각 대지를 보충해주는 소 대지들을 가지고 그 중심사상이나 명제를 증명하고, 그리고 예화 등을 통해서 회중들의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것은 흔히 한국교회에서 설교자들이 가장 즐겨 쓰는 “대지 설교”(일명 '삼지창 설교')의 형태를 말한다.

그러나 크레독(Craddock)은 이런 접근 방식에 회의를 품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단순한 관념들(idea)의 상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깊은 감동을 주는 소설이나 연극, 혹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것들을 통해서 받은 감격스러운 경험을 하나의 명제 또는 중심사상으로 압축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의 본문들 안에는 어떤 개념적인 틀 안에 다 짜 맞출 수 없는 분위기와 움직임들과 갈등들, 어떤 사실의 돌발적인 출현,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경험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어떤 본문의 중요 개념에만 집착하는 연역적인 설교는 본문을 너무 얕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크레독(Craddock)은 전통적인 설교가 가진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점들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귀납법적인 설교 형식을 제시하였다. 귀납법적인 방법은 특수한 상황에서부터 일반적인 원리를 발견해내는 방법이다. 즉 귀납법적인 설교는 특수한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관찰, 질문, 예, 경험들로부터 출발하여 어떤 일반적인 원리를 인도해 내는 설교이다. 크레독의 지적에 의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발견하고, 학습할 때에 귀납법적으로 행한다. 그러므로 설교도 귀납법적으로 전개되어야 회중들이 설교를 더욱 관심을 가지고 듣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자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에는 이렇게 귀납법적으로 하고, 전달할 때에는 연역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크레독에 의하면 설교자에게 있어서 본문 석의는 본문에서 메시지를 발견하기 위한 감격적인 과정이다. 즉 설교자는 석의라는 과정을 통해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탐구하게 되며, 그 과정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모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설교자는 처음부터 설교의 중심사상이나 명제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본문을 묵상하며, 단어와 문법을 연구하며, 역사, 문학, 사회학적인 비평을 통하여 본문을 주석하고, 그 이후에 여러 가지 시험의 단계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본문의 중심사상 또는 명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설교를 준비할 때에는 항상 귀납법적으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크레독은 지적하기를 설교자들이 이렇게 설교를 준비할 때에는 귀납법적으로 하면서, 정작 설교를 전달하기 위하여 원고를 작성할 때에는 연역법적인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의하는 단계에서 설교를 디자인하고 써 내려가는 과정으로 넘어가면서 석의 단계에서 발견했던 감격들이 다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즉 본문 석의의 귀납적인 감격이 설교의 연역적인 훈계에 의해 대체되어 버림으로 설교의 감격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크레독의 표현에 의하면 본문을 연구하는 석의 단계에서 “드디어 찾았다”를 외쳤던 기쁨과 감격이 설교를 전달할 때 “오늘 아침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에 관한 것입니다”라는 말과 같은 생명도 없고, 감격도 없는 소리로 뒤바뀌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레독은 석의에서 발견한 중요한 메시지들을 전달하는데 있어서도 설교자는 “권위 없는 자”로서 귀납법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석의의 과정에서 설교자가 귀납적으로 연구해 가면서 “아하, 이것이구나”라고 외쳤던 자리에, 청중들도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 과정이 만들어져서, 그들도 역시 “아하”라고 외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중들은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발견하거나, 인생을 경험할 때, 그리고 문제를 해결할 때에도 항상 귀납적으로 행하기에 설교를 들을 때에도 귀납적으로 듣게 될 때 훨씬 더욱 효과적으로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고, 설교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귀납적인 설교 전개는 청중들의 삶의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결론을 향한 움직임을 따라 진행되어 간다는 점에서 청중들이 몰입(involvement)과 참여(participation)가 가능하게 해 주는 장점이 있고, 그러기에 포스트모던인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몹시 싫어하며, 자신이 그것을 조사해보고 시험해보기를 원한다. 그래서 스스로 확인하고 경험하기 전에는 어떤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인들에게는 귀납적 접근방식이 안성맞춤이다. 왜냐하면 귀납적 접근 방식은 듣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시된 증거로부터 그들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납적 설교라는 책을 쓴 랄프 루이스(Ralph Lewis)는 “귀납적 설교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설교과정의 일부가 되도록 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관계를 맺게 된다”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듣는 사람이 함께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가르침은 듣는 사람을 개입시킨다. 이와 같이 설교 자체가 그들의 경험의 일부, 그들의 익숙한 귀납적 학습 스타일의 일부 가 된다. 도달한 결론, 즉 설교 말미에서 말한 주장들은, 개인적인 생각과 경험으로 말 미암아 검증되고 또 거기 도달하게 된, 개인적인 확신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3. 이미지와 은유로 사고하는 교회

1) ‘문자’에서 ‘이미지 추구’로(From Word-Based to Image-Driven)

포스트모던 문화는 이미지를 추구한다. 이미지는 감동을 불러 일으키며 포스트모던인들은 감성에 따라 반응한다. 사실 포스트모던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말이 아닌 이미지로 사고한다. 즉 이미지 추구는 포스트모던 문화뿐만 아니라 인간 정신 자체가 지니는 특별한 활동이다. 인간의 정신은 은유로 이루어져 있고, 은유는 사고와 행동을 구성한다. 이렇게 이미지는 인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세계 공용어가 되었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는 이미지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등록상표로 세계적인 음료수가 되었다. 코카콜라 상표 이미지는 코카콜라를 전하는 ‘고유한 이야기’가 되었고, 엄청난 힘이 된 것이다. 이렇게 포스트모던 문화에서는 이미지가 힘의 언어로 작용한다. 한 획으로 된 나이키의 상징이 증명하듯이 힘의 궁극성은 단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유를 결정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이제 포스트모던인들은 더 이상 글이나 말이라고 하는 단순한 전달체계는 거부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미지가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매체가 되어 글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말’이 삶을 더럽힐 수 있다면, ‘이미지’는 포스트모던인들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는데 있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진다. 생각이 이미지 형태를 띨 때 그것은 머리 위로 날아가는 미사일이 되어 다른 사람을 돕든지 아니면 결정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 그러므로 나쁜 이미지는 포스트모던인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미디어 문화에서 섹스와 폭력은 함께 따라 다닌다. 오늘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에게 컴퓨터 게임을 통해 폭력과 섹스와 살인의 이야기가 아름답고 재미있는 이미지로 포장이 되어 전달되고 있는지 모른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오는 것처럼 영상물을 통한 폭력과 살인이 아름다운 이미지로 포장이 되어 이 사회의 폭력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EPIC 교회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 가운데 하나는 회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이미지의 지배를 받도록 하므로 복음이 전하는 구속의 은총을 마음에 채우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말과 글로써 충분히 표현하기 힘든 것들을 이미지나 은유로써 표현해서 교회가 효과적인 복음 전달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매우 바람직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은유로 이루어져 있고, 은유는 실재를 창조하며, 사고와 행동을 구성하는 언어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스윗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미지, 사람들을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이미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주장한다. 설교자들은 이 복음의 형상을 포스트모던인들이 익숙한 이미지를 통하여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2) 설교 패러다임의 변화와 설교의 상상력(Imagination) 그리고 이미지와 그림언어

(1) 패러다임의 변화

앞서 이미 밝혔듯이 인쇄된 글은 선적인(linear) 방식으로 전달되지만, 포스트모던 시대의 메시지의 전달 방식은 주로 이미지에 의해서이다. 즉 전달매체의 변화에 따른 포스트모던 문화는 “읽는 문화”에서 “보는 문화”로 옮겨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청중을 향해서 보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이루기 위하여 설교의 패러다임의 변화는 필수적이다. 즉 오늘의 설교가 보다 더 효과적이고, 호소력이 있기 위하여서는 “시각적 이미지(visual imagery)를 눈에 그려볼 수 있는 다채롭고 풍요로운 언어,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언어가 사용되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청중들은 설명하는 것 못지않게, 움직이고 싶고, 감동 받고 싶고, 삶이 자극 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설교는 회중들의 지적인 차원의 면만을 만족시켜주는 선적인(linear) 전달만이 아니라, 회중들의 감성과 의지에까지 호소하는 전인적인 부분을 포함하여야 하는데, 그를 위하여는 이미지와 은유, 그리고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언어의 사용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래서 가장 최근의 설교학계의 경향은 지금까지의 합리적이고 석의 적인 형태의 강해설교로부터 이미지와 은유 그리고 스토리가 풍부한 설교양식으로 옮겨가고 있다. 즉 ‘새로운 설교학’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최근의 설교학계의 경향은 설교에서의 상상력(Imagination)과 이미지의 역할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 나오는 있는 설교학 책들의 이름만을 열거해 보아도 이런 흐름은 뚜렷이 알 수 있는데, 상상력을 동반한 설교와 가르침(Preaching & Teaching with Imagination), 이야기를 설교하기(Telling the Story: Variety and Imagination in Preaching), 이야기 설교(Storytelling: Imagination and Faith), 마음의 상상력: 설교의 새로운 이해 (Imagination of the Heart: New Understandings in Preaching) 등의 책들이 대표적이다.

 

(2) 설교와 상상력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시각적 매체인 TV나 멀티미디어 등의 영상매체는 이미지와 상상력이 풍부한 세계인 성경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자연스럽게 해준다. 설교자들이 설교의 본문으로 삼고 있는 성서가 바로 이야기와 이미지, 상상의 언어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자들, 시편의 시인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이미지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또 지금도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성경 안에는 비유, 시, 잠언, 기도, 연설, 은유, 역사, 법률, 계약, 전기, 극, 묵시, 설화 등 많은 다양한 형태의 문학형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어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읽고 있는 본문의 문학적인 형식과 그것의 독특한 관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성경의 많은 부분은 시로 되어 있다. 그런데 보통 시인들은 시를 쓸 때에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말의 비유적인 표현이나 상징적인 표현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농부가 “땅은 비를 필요로 한다”고 할 때 그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땅은 비를 갈급해 한다”고 표현한다. 시인은 이 표현을 통해서 사실을 말하면서도 우리의 느낌에도 진실로 통하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합리성과 논리를 추구하는 전통적인 해석설교는 이런 시 조차도 논리적으로 해석을 시도한다. 그 동안 많은 설교자들, 특별히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본문의 문학형식이 어떤 것이든지, 시(詩)도 3대지 설교로, 설화체 이야기도 3대지 설교로, 산문도 3대지 설교로, 은유도 3대지 설교로, 비유도 3대지 설교로 설교하여 왔다. 그래서 본문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특성과 그 내용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상상력과 생명력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제 “읽는 문화”에서 “보는 문화”로 바뀌어 가는 포스트모던 상황 속에서 설교자들은 성경본문의 문학적인 장르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며, 성경의 저자들로부터 상상이 담긴 표현들과 은유와 그림 같은 언어를 통하여 이미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오늘의 설교자들은 산문의 세계(Prose-Flattened World)에서 시인의 세계로 넘어가야 한다. 월터 부르거만(Walter Brueggemann)은 그 동안 복음의 진리가 설교자들에 의해서 단조롭게 되고(flattened), 사소한 것으로 되고(trivialized), 그리고 공허한 내용이 되어 버렸음을 지적하면서 설교의 세계가 갱신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설교가 갱신되려면 극적이며(dramatic), 예술적이며(artistic), 사람들을 대화에 참여시키는 언어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언어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3) 스토리와 이미지, 은유가 풍부한 설교

그러므로 오늘 설교자들이 시인이나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그림 같은 언어들을 좀 더 사용할 수만 있다면 회중들의 정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응답하도록 초청하는 그런 방법으로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청중들이 메시지를 인쇄물이나 말로 표현되는 언어 뿐만 아니라, 그림을 통하여 시각적으로 전달받고 있기에, 설교자는 이미지가 풍부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회중들로 하여금 그 마음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바로 그런 면에서 앞에서 소개한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be)의 책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그는 이 책에서 성경에 담긴 여러 이미지들을 소개하고 있다. 즉 모세 오경의 그림들, 역사서의 그림들, 시가서의 그림들, 예언서의 그림들, 예수님의 그림들, 사도행전의 그림들, 그리고 교회에 대한 그림들과 요한계시록에 타나난 그림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사실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이미지와 은유한 풍부한 설교를 하신 가장 대표적인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보면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스토리와 이미지, 그리고 은유가 풍부한 설교를 가장 잘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그 속에서 우리는 이미지가 풍부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분은 직유, 은유, 수수께끼, 비유, 그리고 역설 등을 사용하셔서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즉 그 분은 이 땅의 일상적인 것들을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이용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귀에다” 말씀하시지 않고, “눈에다” 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주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마태 6:26-30)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청중들이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그림언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사랑을 표현하실 때에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과 같이 내가 내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마 23:27)고 말씀하심으로 은유와 이미지를 가지고 청중들이 그 분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그려주셨다. 예수님은 헤롯왕을 표현할 때에도 “헤롯은 교활하고 믿지 못할 사람이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여우”(눅 13:32)라고 이미지를 사용하셔서 은유적으로 말씀하셨다. 그 이외에도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그러므로 오늘의 설교자들은 우리들의 지성과 의지 그리고 감성을 포함한 전인을 향해 메시지를 전하신 주님의 모습 속에서 포스트모던 상황속에서 우리들의 나아갈 방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동안 머리로만 모든 것을 생각해 온 모던 시대의 설교는 이제 가슴(마음)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포스트모던 스타일로 바뀌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회중들은 각종 영상매체에 의하여 메시지를 받는데 익숙한 회중들이다. 그들은 시각적인 이미지에 의해서 메시지를 소화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설교자는 원래 성경의 저자들로부터 은유와 그림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롯하여 구약의 예언자들이, 시편기자들이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 감성을 포함한 전인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 다채로운 언어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이제 설교자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의 패러다임의 변화의 방향이고, 중요한 전략이다.

 

4. 관계가 살아있는 공동체를 세우는 교회

1) ‘개인’에서 ‘개인-공동체’로(From Individual to Communal)

인터넷에 의한 영향력을 생각할 때, 이 부분을 빼놓을 수 없다. 이제 인터넷은 단순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것에서 나아가 더욱 중요한 사회 매체가 되었다. 그리고 웹 세계에서 즐겨 사용되는 두 개의 단어는 ‘연결’(connected)과 ‘공동체’(community)이다. 유명한 경매 사이트를 봐도 개인이 물건만을 구입하는 차원이 아니라 웹상에서 서로가 연계를 형성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연결 공동체’(connexity) 사업을 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공동 공간’을 창조해내고 있다.

포스트모던인들은 사실상 종교를 지겹게 생각하면서 세상에 종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제도화된 종교 제국’이 요구하는 조건이나 규율에 복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신에 아주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인 경험을 하고 싶어 하며, 그 경험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거룩함과 삶의 변화를 맛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계의 문제는 포스트모던 문화의 중심에 놓여있으며, 오늘날 모든 것은 관계와 협력의 문제이다. 포스트모던의 핵심에는 신학적으로 읽어낼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나/우리, 또는 공동체 내에서 개인의 경험이 그것이다. 그럴수록, 포스트모던인들은 이웃과 도덕, 그리고 영적인 가치의 연결 구조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고 싶어 한다. EPIC에서의 ‘C’가 관계성을 의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교회는 관계성을 구현하고 관계를 맺는 중대한 의식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윗은 미래교회는 “관계가 살아 있는 공동체를 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포스트모던인들은 초현대성이 가져온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EPIC교회는 다음 네 가지 측면의 목회를 향상시켜야 한다고 스윗은 말한다.

첫째,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핵심인 관계성인데,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관계에서 오는 힘은 치유의 능력을 발휘한다. 포스트모던인들이 개인간의 관계, 창조물과의 관계, 교회와의 관계가 지니는 의미를 이해하도록 교회가 돕는다면,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는 관계는 어디에서나 발견될 것이다. 또한, 목회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인 설교(preaching), 가르침(teaching), 치유(healing) 가운데 목회자는 설교와 가르침 못지 않게 치유의 역할을 더 향상시켜야 한다. 그리고 치유는 올바르고 건강한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둘째, 교회가 분산되고 동시에 복합성을 띠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문화는 세계적인 초집중화와 지역적인 분산화라는 양면성을 띤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배 역시 전체 교회 안에서 통합되면서 각자의 방법으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작고 개별적인 셀 그룹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많은 교회가 셀 그룹을 두고 있는데, 각각의 그룹들은 예배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 드리는 초집중화된 예배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셋째, 이야기 하기(storytelling)인데, 이것이 바로 공동체를 창조해내는 힘이다. 이야기 하기(storytelling)는 경험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이며, 이것은 철저하게 종교적인 문제이다. 성경의 언어는 이야기이며, 사실상 복음에 관한 이야기는 떡과 포도주처럼 맛보고, 만지고, 보고, 냄새 맡고, 들을 수 있는 이미지로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 포스트모던인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맛보고, 만지고, 듣고, 냄새 맡고, 보기를 원한다. 디지털 문화에서 스토리텔링은 구도, 오디오, 비디오, 텔레비전, 영화, 멀티미디어, 시디롬, 인쇄, 그리고 이 모든 형식을 하나로 포괄하는 인터넷의 World Wide Web을 학습과 예배에 채택할 것이다.

넷째, 봉사와 사회 개혁에 참여하는 예배를 만드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행동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하려면 교회는 연례행사인 선교 주일을 없애고 매일 매일을 선교의 날로 정하고 예배마다 선교 헌신 예배로 드려야 한다. 예배(worship service)라는 말 자체가 뜻하듯이 그것은 ‘경배’와 ‘봉사’라는 이중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2) 보이는 말씀인 성찬의 회복을 통한 공동체성의 회복

초기교회는 말씀과 성찬으로 이루어진 예배를 드렸다. 특별히 초기교회에서는 성찬을 “보이는 말씀”으로서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고, 초대교인들은 매주일 성찬에 참여함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그 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매주일을 "작은 부활주일"로 지키면서 주님에 대한 말씀을 귀로만 듣는 데서 더 나아가 성찬을 통해 주님을 뵙고 만날 수 있었기에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주님께 대한 소망과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지켜 나갈 수 있었다. 결국 초기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공동체가 함께 부활의 기쁨을 맞보는 자리요, 성찬을 통해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자리요, 성찬을 통해서 부활 신앙을 함께 입증하는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그런데 이성과 논리를 중시하던 근대 교회에 와서는 “보이는 말씀”인 성찬, 즉 함께 보고, 만지고, 느끼고, 듣고, 맛보는 이 신비의 영역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모든 것의 초점을 말로 들리는 말씀, 언어로 선포된 말씀에만 두었다. 그러다 보니 보이는 말씀인 성찬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보이는 말씀인 성찬을 잃어버림은 포스트모던인들에 있어서도 치명적이다. 모더니티의 영향 아래 있던 사람들은 개인주의와 이성과 논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공동체성과 영성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멀티 미디어와 인터넷의 물결 속에 있는 포스트모던인들 또한 고독한 개인들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21세기에 들어와 심지어는 가상교회(cyber-church)까지 등장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혼자 집에 앉아서 인터넷을 클릭함으로 말씀도 듣고, 헌금도 인터넷으로 송금을 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철저하게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깊은 유대감, 공동체적 삶에 굶주리고 있고, 영적인 삶에 굶주려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보이는 교회 안에서 보이는 말씀인 성찬의 회복은 필수적이다. 성찬은 교회 공동체가 반드시 한 자리에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는 자리이다. 가상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다. 가상교회는 그야말로 가상이지, 현실이 아니다. 거기에는 공동체가 없다. 철저하게 고독한 개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성육신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치명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성육신이 무엇인가? 성육신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살고, 호흡하고, 듣고, 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이 되신 것이다.(요 1:1,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 이것이 성육신이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공동체가 함께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분의 은혜의 사건에 동참한다. 성찬은 성육신 하신 주님의 몸과 피를 교회 공동체가 함께 먹고 마시면서, 그 사랑을 확인하고, 그 은혜를 맛보면서 주님과 하나 되고, 공동체가 주 안에서 하나 되는 감격적인 경험을 하는 자리이다. 가상교회와 이성과 논리 중심의 모던 교회(특별히 개신교회)는 바로 이 성육신의 경험을 함께 나누는 은총의 자리를 잃어버렸다. 따라서 공동체가 매주일 함께 모여 “보이는 말씀”인 성찬을 통해 “보고, 만지고, 느끼고, 듣고, 맛보는” 이 신비의 영역을 경험하는 것은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교회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3) 메타 네러티브(meta-narrative)로서의 예수 이야기 강조

스윗은 이야기 하기(storytelling)가 바로 공동체를 창조해내는 힘이라고 했다. 이야기 하기는 경험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인데, 포스트모던인들은 경험을 이야기로 풀어냄으로써 공동체를 조직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던인들에게 있어서 이야기는 사고의 근본도구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 중에는 그 어떤 의미도 교훈도 주지 못하는 이야기들도 많다. 때로는 조작된 이야기들, 거짓된 이야기들도 많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는 어떤 이야기도 용납이 된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는 나쁜 이야기들도 상대에 따라서 아름답게 미화되기도 하고, 입장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 들여지기도 한다. 공동체를 파괴할 지도 모르는 이야기도 일단 거부되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 어떤 이야기도 다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을 보면 포스트모던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확실성이 없는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자신의 믿음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야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부담도 무척 크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결정을 내릴 것인가? 중심이 없는 이 세상에서, 절대적 진리는 없고 그 어떤 진리도 상대화 되는 세상에서, 무엇을 나침반으로 삼을 것인가? 사실 이런 면에서 포스트모던인들은 강팡질팡하고 있고, 그 속마음은 공허한 가운데 있기도 하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신앙과 진리에 맞추어 살고 있다. 이는 마치 성경의 사사시대의 사람들의 모습과도 같다.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생들이 아무런 기준도, 진리도 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도록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생들을 창조하실 때 참 진리를 추구하는 본성을 주셨다. 그리고 참 진리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 분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넣어 주셨다. 즉 우리에게 참 진리를 추구하는 본성을 주셨다. 우리는 포스트모던인들이 영성을 추구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그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포스트모던인들은 사실 내면 깊은 곳에서 참 진리의 이야기를 애타게 듣고 싶어 한다. 모든 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정말 참 진리는 없는 것인가? 그들은 이런 질문을 내면 깊은 곳에서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브라이언 멕라렌(Brian McLaren)은 우리가 포스트모던인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편견이 두 가지가 있음을 지적한다. 첫째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신봉자들은 절대적인 진실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편견이다. 그러나 멕라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엄밀히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신봉자들이 배격하는 것은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라, 절대적이 지식이라는 것이다. 즉 포스트모던인들이 의심하고 거부하는 것은 ‘절대적인 지식’일 뿐이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 편견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신봉하는 이들이 진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멕라렌은 이에 대해서도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어떤 주관적인 것이나 개인의 한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겠다는 것이지, 진리 자체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모든 것이 상대화되는 포스트모던 상황속에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참 진리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를 세워가고 지탱할 수 있는 참 진리의 이야기, 메타 내러티브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교회는 이 참 진리의 이야기, 메타 내러티브, 즉 하나님의 구속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담대하게 전해 줄 필요가 있다.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방황하며, 진실 된 이야기를 찾고 있는 그들에게 상대주의 세상에도 참 진리라는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친히 그들을 사랑하는 진리 자체이신 분(요 14:6)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해주어야 한다. 성경의 메타 내러티브, 즉 신실하신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이야기를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메타 내러티브, 즉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라는 이야기,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영생을 얻었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어야 한다. 분열과 혼돈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공동체와 참된 사랑의 이야기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설교는 더 이상 잡다한 인간의 이야기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기를 더욱 강력하게 전해야 한다. 그러기에 듀크(Duke)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인 찰스 캠벨(Charles Campbell)은 지난 40년의 “새로운 설교학운동”의 공과를 평가하면서, 예수 설교하기(Preaching Jesus)를 그렇게도 강조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강단에서 전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이야기, 그의 구속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로 그렇다. 모든 진리가 상대화되고, 어떤 사상도, 종교도 다 일리가 있게 받아들여지는 포스트모던 상황 속에서 정신세계가 무주공산이 된 이 시대에 우리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보다 더 강하게 세상의 어떤 이야기보다도 더 큰 이야기, meta-narrative인 예수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예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이야기를 중심으로 생명공동체가 탄생하고, 유지될 수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나가는 말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이하여 사람들의 생각은 과학적 합리주의부터 경험적 직관적 이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상대적 사고를 귀하게 여기고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포스트모더니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당신이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모두 당신 가슴속에 있는 것, 직관과 신앙을 중시하는 것, 진리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그 대신 경험을 갖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이런 변화는 모더니티에 물든 현대인들에게 커다란 위기를 가져다주고 있다. 더군다나 이런 포스트모던적 사고방식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주일마다 교회당을 채우는 교인들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와 설교자들은 커다란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문화는 결코 위기의 문화가 아니다. 위기가 한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안다. 그것은 바로 위험(危)과 기회(機)다. 위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mash-er'는 출산용 의자, 곧 고대 산모가 출산 때에 앉았던 의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생명을 탄생시키는 창조의 순간, 그것은 위기이자 엄청난 기회의 순간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포스트모던 상황이 바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오히려 이런 시대적인 상황과 변화를 잘 파악하고 오히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보다 확실하게 전하는 기회가 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너드 스윗이 제시하고 있는 EPIC 교회의 모델은 오늘의 설교자들과 목회자들에게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 있는 교회의 나아갈 몇 가지 방향을 통찰력있게 제시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설교자들이 우리의 설교사역을 한 번 점검해 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본 강의는 그 의미 있는 시도를 한 번 해 본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20, 22)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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