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8 13:47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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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학

 

 

1.설교란 무엇인가?

1)선포 2)증거 3)강론(preach, 설득) 4)대화(설득보다는 강한 의미) *설교의 현대적 경향은 높은 곳(큰 사람, 의인)에서 낮은 곳(작은 사람, 죄인)

 

2.설교의 주(master)가 무엇이냐?

1)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계시 설교자의 권위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하는 인식을 주는데서 온다. -교인들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절대로 설교 시간에 말씀하지 말라. -문제 되었던 것은 4개월 전에는 이야기하지 말라(바울: 말씀에 붙들려 산다) - 인간의 감정을 하나님의 말씀화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2)설교는 항상 종교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윤리 강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서는 안 된다. 종교적 관계와 윤리적 관계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3)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성경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설교의 내 용과 성경의 문맥이 잘 맞아야 한다. 성경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오늘에 살려 한다. 가능한 본문을 떠나서는 안 된다(밥보다 고추장이 많으면 안 된다. 떡보다 고물이 많으면 안 된다. 고물 먹자고 떡 먹는 것 아니다.) 설교는 생활 현장에서 열매가 맺어져야 한다. 4)하나님과 사람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설교자(meaning) 현실 상황 point(성경을 이해-내 문제 우리문제로) 바르트: 한손엔 성경을 한손엔 신문을 - 설교자와 교인이 함께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괴테: 당신들의 의심스러운 것은 내게 말하지 말라.

내게도 의심이 많으니까? -설교자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렇습니다."라고 외쳐야 한다. 5)추상적인 것은 금물 항상 구체적인 말씀이어야 한다. 6)소망적, 적극적, 긍정적이어야 한다. 마틴 루터킹: 나는 꿈을 본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고, 한숨을 쉬면 환자는 절망한다.

 

3.Manner of preaching

 

설교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말씀의 소통을 위한 방편 이다. 설교자는 말씀에 붙들려 있다는 manner를 가져야 한다. 교인은 목사가 설교해 주는 더 이상의 하나님을 상상치 못한다. 교인은 목사의 영향을 받는다.목사는 경건한 manner가 있어야 한다. 목사는 저주권이 없다. 오직 사랑 긍휼히 여기는 권한 이외는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말씀이 설교자인 나로 성육신되어 교인들 가운데 거한다. 강단 등단 시 이제 나로부터 하나님이 말씀이 정해진다고 생각하고 언어의 부족을 고백해야 한다. 루터 : "하나님의 말씀이 나로 인해서 제한되어질 수 있다." 생각하는 것만큼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있는 것만큼 쓸 수 는 없는 것이다.

 

4. 설교의 목적

 

-목적을 향해서 직행하는 것이 좋다. 설교의 목적은 교인이 좋아하는 재로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는 고집스러운 면이 있어야 한다. 목적: 1)구원(죄로부터의 구원) 2)소생시키는 것 *구원이란?

1.죄, 사망, 불안, 절망. 고통으로부터 치유하는 것 즉 풀려나는 것 2. 죄, 절망, 불안, 고통으로부터 승리하는 것 3.사랑하는 것- 구원은 근본적으로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즉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 하나님의 자녀 된 자아의식을 갖는 것, 구원이란 의미가 있다. 설교는 구원받은 상태를 지속케 하는 것이며 구원의 깊이, 힘, 높은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설교의 목적은 심령 적으로 볼 때 소생시키고 위로하고, 문제 해결을 주고 생의 의미를 깨닫게 주어서 점점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설교의 특징을 말로 하는 것이다. 설교의 반복은 알도록, 결단 하도록, 감동을 준다. 설교는

1)지- 알게

2)정- 감동 이 있어야 한다.

3)의- 결단(설교는 2번 웃고, 2번 울고 또 당장에 결심이 서게 해야 한다.)

 

5.성경과 설교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에서 설교하지 않고 신학서적을 설교하는 경우가 있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그 시간 만큼은 책을 보지 말라. 설교는 반드시 성경에 의존하라. 목적이 구원에 있듯이 성경 외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주제에 맞게 하라. 즉 말하는 자는 자기체질, 인상에 맞아야 하고 듣는 사람에게도 맞아야 한다. 또 그 시대와 대상과도 맞아야 한다. (예: 다윗이 사울왕의 갑옷을 빌려 주었지만 어울리지 않음) 오늘 내게 주신 말씀으로 테마가 주어져야 한다. 항상 성경에 친숙하고 익숙해야 한다. 성경을 매일같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메모해 두어야 한다.

 

6. 설교의 요소(재료)

 

(1)성경 연구 1)설교 제목을 앞에 놓고 성경 연구 하는 것은 무효 2)초점이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 3)내 경험과 부딪칠 때 마다 깨닫게 된다. 4)독서-정신적 양식을 채워라 (2)독 서 인문 과학, 에세이, 문학, 철학등 폭넓은 지식을 습득 할 수 있어야 한다. (3)타인과의 접촉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타인과의 접촉이 필요 하다. 가능한 관계를 넓혀서 접촉해야 한다.( 교인, 사회인) 교인만 접촉하면 외골수가 된다. (4)자기와의 싸움 죄, 교만, 탐심, 음욕, 이성, 게으름, 나약함으로부터 싸워 이겨야 한다.

-설교란 교역자 자신의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5)명 상 기도하는 것과 명상하는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말이면서 들을 수 없다. 듣는 자세가 중요 명상은 창조력을 길러주고 호소력 있는 설교를 가능케 한다. - 설교는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 아니고 명상을 통해서 되새김질 되어 전해져야 한다. (6)타인에게 봉사 봉사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봉사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봉사를 통해 경험함으로써 깊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타인의 봉사를 희생이 합해져 명 설교가 될 수 있다.

 

7. 설교의 내용

 

설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하늘의 만나이다. 설교는 예언자로서 죄를 지적하는 것이며 왕으로서 심판, 비판하는 것이며, 제사장으로서 사죄해 주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 Law : Grace 설교는 처음에는 비판하고 뒤집어서 용서하고 구원함으로서 정해야 한다. 1/2 비판 ―1/2용서 은혜의 두 가지면( 어두운 면, 밝은 면) 이 있어야 한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 예수는 두 손이 있는데 왼손에는 율법, 오른 손에는 은혜가 있다." 먼저 율법으로 그 후에는 은혜로, 율법과 은혜는 항상 같은 입장에서 균형 있게 설명되어져야 한다. *목회자의 권위는 전문가적 권위와 희생적 권위가 있어야 한다.

 

8.설교의 3가지 측면

 

1)예수님의 말씀 2)예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상황 3)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소화했느냐? 다시 말해서 1) 거룩 2)전승 3)반응하나님의 말씀이 인간 역사 속에서 어떤 반사 작용을 일으켰느냐를 알고 전해야 한다. 문자적으로 받으면 안 된다. (예: 아브라함도 아들을 얻기 위하여 첩을 얻었는데 뭘...) 설교자는 항상 문자 속에 있는 배경과 말씀을 전하며 또 그 말씀을 나의 경험과 함께 섞어서 증거해야 한다. 무리한 해석은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두 측면에서 증거해야 한다.

 

9. 설교의 역사

 

(1)예언자의 설교 1)예언자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나비 : 메시지 (하나님의 말씀)를 운반하는 것, 선지자는 과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현재의 죄를 책망하고 앞으로 구원해 주는 것을 예언, 3차원(현재, 과거, 미래)식으로 전해야 한 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제사장은 인간의 말을 하나님께 전한다. 2)예언자는 하나님의 권리로 인간에게 전하는 것이다. 선지자의 3가지 고민이 있어야 한다. 1.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 2.백성들이 말씀을 듣는 것 3.동역 자들 때문에 오는 고민(거짓 선지자)이 있어야 한다. 3)예언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항상 말하고 있으며 율법과 은혜를 말하고 있다. 항상 앞에 있는 약속 즉 메시아를 말하고 있다. 예언자는 그 말속에 자기 경험이 내제해 있다. 즉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기 위해서 경험을 시킨다. (예: 예레미야 호세아등 생활 속에서 경험 했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 실천적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 (2)중간시대 1)회당: 회당의 목적 (일반시민이 모이는 공회당) 2)학교 3)교인이 모이는 회당 회당에서는 안식일 오전에는 예배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오후에는 교육을 했다. *예배순서 1.고백 2. 율법 낭독 3. 설교 4)예배서 낭독 (주로 아람어)

5)축도(민수기11: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회당은 모세를 소개한다.

(3)세례요한의 설교 1)그 시대 사람들을 불신하고 책망(독사의 자식..........) 2)임박한 심판(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3)회개를 촉구하는 내용(뒤에 메시야가 오기 때문에) 1),2),3)은 부흥사적 설교이다. 부흥사의 설교는 목회 설교와 다르다. 4)현실에 충실할 것을 가르침(눅3:7-14) 5)예언적 설교(오신 메시야를 증거) *세례요한의 겸손 :

1)그는 흥하여 하고 나는 쇠하여……. 2)신들메도........ 3)안드레 빌립을 예수께로 인도 사회학적으로 목사는 인기직이기 때문에 교만해지기 쉽다. 자기를 극복해야 한다.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낮추신다. (4)예수 그리스도의 설교 예수님은 삶 전체가 설교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1)권세(자기의 권세 목사는 예수님의 권세, 성경의 권위로 설교해야 한다. 2)죄를 심판하시기도 하셨고, 사하기도 하셨다. *예수님은 절대로 제사자은 책망을 안 하심 왜냐하면 제사장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직책이기에 (예, 미리암이 모세를 비판하다가 문둥병에 걸림)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절대로 저주하지 않음) 3)구원과 영생에 목표를 두심 심판의 말씀도 구원을 목표로 하고 말씀하심 4)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심(332) 5)해석이 독창적, 신선함 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6)생활과 직접 관련된 말씀 예: 부자 나사로의 이야기는 외경에 있는 것 -거짓을 통해서 진리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

예화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한다. 7)보는 대로 듣는 대로 모든 사건을 소재로 삼으심 예: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실제 사건 8)자기희생과 관련시키셨다. (5)사도들의 설교 1)예수님의 설교를 모방해서 구약을 많이 인용 2)구약의 예언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1.베드로의 설교 1)죄를 지적 2)성경 예언의 성취 3)그리스도와 저들의 관계를 지적(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 4)사죄와 구원의 길 5)부활의 증인 -마가복음의 별명이 베드로 복음, 베드로의 사건이 많이 기록됨,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

2. 스데반의 설교 1)구약 역사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적 예언을 찾음 2)출애굽 역사를 기독교 구원론으로 보았다. 3)그리스도는 구약의 중심이다. 구약은 신약을 위해 있는 것이다.(구약을 기독교화한 설교)

3. 바울의 설교 1)구약의 말씀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 2)구약 해석의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3)율법적 관계에서 복음을 설명(구약적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다) 4)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설교

4.교부들의 설교 1)철학적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설명

5. 종교개혁자들의 설교

▶루터의 설교 1)상징과 미사로 드리던 예배를 설교 중심으로 바꾸어 놓음 2)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많이 이용 3)믿음 중심의 설교 4)성령과 성경을 강조 5)설교의 원칙 ①문법적 지식 ②책의 시대와 환경을 고려 ③문맥에 조심 ④신앙과 조명이 있어야 한다. ⑤신앙과 조화가 있어야 한다. ⑥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6)설교자의 이상적 태도 ①발음이 좋아야 한다. ②학자인체 하지 말 것 ③ 웅변적이어야 한다. ④처녀들이 반할 만큼 외모가 아름다울 것 ⑤돈 받는 것은 조심할 것(신경 쓰지 말라) ⑥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이야기 하라 ▶칼빈의 설교 1)성경에 충실한 설교자 (루터는 로마서를 말구유의 아기로, 야고보서를 짚으로 봄 칼빈은 축자영감설에 의거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다.) 2)학자라기보다는 민중적 설교자 3)성령의 감화를 강조(설교준비를 하지만 원고는 강단에 안 가지고 올라감) 4)예배의 중심을 설교에 두었다. 5)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6)구약을 신약화 해서 보았다. 7)실생활에 까지 파고들었다.(가정, 경제, 정치, 왕등의 모든 문제를 취급)

 

10.설교자 입장

(1)설교자는 설교자인 동시에 청중이다. 목회가 먼저 되고 그리고 부흥사가 되어야 한다. 계속 듣는 자세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설교는 창작이 없다. (2)설교는 사람이며 신앙이다. 사람 그 자체, 그의 신앙 고백적 의미가 있어야 한다. 비쳐는 설교 하는데 몇 시간 걸렸습니까? 하는 질문에 40년이 걸렸다고 했다. -사람의 지식은 전달해도 지혜는 전달하지 못한다. 설교는 지혜를 전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말했느냐 보다는 누가 말했느냐에 관심을 가진다. (3)위신이 중요하다. (4)설교자는 질그릇 그 안에는 보화가 있어야 한다. 고후 4:7, 렘1:5, 고전 9:16, 갈1:7 (5)설교자는 하나님 집의 청지기 딤전 3:15 (6)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 -설교자가 설교하는 그 이상의 교인이 될 수 없다. (7)투철한 소명의식,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개인적인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교인들에게 느끼게 해야 한다.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장소와 시간을 알아야 한다. (8)설교자는 소명의식 가운데 대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9)소명에 응답하는 정열(자기희생의 권위)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바치고자 하는 정열이 있어야 한다. 자기희생 속에서 기쁨을 느껴야 한다. -1년을 성공하는 것은 설교로 2년 이상 성공하는 것은 인격으로 -목사가 기도 좀 하세요. 책 좀 보세요. 하는 말을 들으면 사표 내라. -골방, 서재, 사람 사귐을 잘하는 일이 목회 성공을 가져온다.

 

11. 설교의 분류

 

(1)본문 설교

(2)제목설교 (3)교리적 설교: 어떻게 믿느냐 (4)도덕적 설교: 어떻게 사느냐 균형이 맞아야 한다. (5)역사적 설교: 성서중의 역사를 취급, 인물 (6)경험적 설교: 선배들의 경험을 다룰 수 있다. (7)간증 설교: 목사 이외의 설교는 다 간증이다. (8)계절설교

(9)심방설교

(10)부흥설교

(11)목회설교 (12)전도 설교: 불신자를 대상 ☞ 낮에는 교리적, 설교, 저녁에는 강해적 설교 보통 설교는 7년 내에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절기설교는 3년 내에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심방설교의 본문은 400개 정도 가져야 한다.

 

12. 설교의 제목

(1)설교의 제목이 포함하는 의미 1)About:(방향)제목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 2)Limitation(한계)제한 한계를 말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한계와 제한을 결정 하는 것(제목에서) 3)Hint(암시)무엇에 대해서 말하겠다는 암시 4)요약 : 앞으로 말할 것을 한마디로 압축하는 것 5)포괄 (2)설교 제목이 결정에 있어서 주의 사항 1)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기를 원하는 가를 들어야 한다. 2)너무 어려우면 안 된다. 3)외래어를 쓰지 말라 4)무리한 문법을 쓰지 말고 익숙한 단어를 사용하라 5)25분 이내에 충분히 소화시켜서 전달할 수 있는 제목을 정하 라 6)설교는 단순한 강연이나 웅변이 아니다. 설교적인 제목을 정해야 한다. 7)신학적인 입장과 예배의 경건에 부합된 제목 예) 할례란 무엇인가?

 

13.제목의 분류

(1)불투명한 제목 예)부활의 혼 기도의 혼, 용서의 영, (2)명사로 끝나는 제목은 힘이 없을 수 있다. 예: 믿음의 현주소 네가 믿음이 있느냐? (3)복합적인 것 예: 신자의 경험 안에서 십자가, 죄의 기업, 자유의 노예 (4)성경 구절을 그대로 사용 (주의: 내용과 맞아야 한다.) 예: 범사에 감사하라,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깨어 기도하라. 어찌 의심하느냐, 사람을 낚는 어부 (5)수사학적인 제목(수식적인) (6)의문식 제목(주의: 설교 중에 충분히 대답을 해야 한다.) 예) 현대 청년에게 소망이 있느냐, 인생아 어디에 있느냐 (7)명령적, 호소적 예) 깨어 기도하라 일어나라 *설교 내용은 영감적이라도 설교 제목은 설교학적이라야 한다.

 

14.본문 해석에 있어서의 서론

해석은 성경을 "우리"와 관련시키는 것이다. 66권 중 1구절은 오늘 현실적인 것으로 전함 성경대로 라는 말은 성경대로가 아니라 문자적으로 받아서는 안 된다.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 의미를 전해 주는데 있어서 설교자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 의미가 현실화 안 될 때는 교인들의 생활이 이중화 한다. 말씀이 얼마나 현실 속에서 소화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1절을 안다는 것은 66권을 다 안다는 전제가 되어야 한다. 신학을 근본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15. 해석의 필요

(1)본문이 해석을 필요로 한다. (2) 2, 3천년의 이야기다. (3)네게 직접 관련시켜야 한다.

 

16. 10가지 해석 원칙

(1)신앙과 경륜으로 대할 것 -성경은 보는 방향대로 다르다. 어느 각도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을 읽는 태도의 경건도 중요하다. (2)한 계통적 해석을 해야 한다. 큰 줄기를 찾아야 한다.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항상 주시는 말씀으로 보편적 해석 조직(신학)적 해석이 되어야 한다. 예)구약은 행함으로, 신약은 믿음으로 구원 성부, 성자, 성령의 시대 구분은 잘못된 해석이다 - 벧엘 성경공부는 구원론적인 체계가 있다. (3)주관적인 해석을 피하라 -차기 사상에다 성경을 인용하면 안 된다. 주일학교 선생: 동화부터 준비하고 성경 본문을 찾는다. 성경 그 자체가 무엇을 말하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객관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칼빈 "성경의 해석자는 성경 그 자체이다.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앞뒤로 20번 이상을 읽어야 한다. -교인들이 목사의 주관적 해석을 알면 목사의 설교를 인정 안 해준다. - 절대 자신이 없는 본문을 택하지 말라 (4)역사적 해석 도는 역사 신학적 해석 -그 당시 상황, 배경을 연구해야 한다. what :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To whom :누구에게 말하려고 하는가? To me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To whom 과 To me 이 매칭이 되어야 한다. -요한 웨슬레 " 오늘 예수님이 여기 계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말을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5)문맥, 맥락에 의한 해석 1)Context :당시의 주어진 내용을 해석 (6하 원칙에 의거해서) 2)The Text :성경 그 글자 자체

 

17.본문 선택의 원칙

(1)원칙적으로 Thema는 Text를 커버해야 한다. (2)한 본문에서 한 Thema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본문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포함하는 완전한 수사학적인 문장이라야 한다. (3)단편적인 본문도 사용할 수 있다. 예)범사에 감사하라 (4)본문의 적당한 길이는 완전한 문장이 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7-10절 전후가 좋다. (5)성경 본문은 Thema와 적당하게 부합되어야 한다. 제목의 특징이 본문의 내용을 뒷받침해야 한다. 설교자가 양심적일 것( Thema가 정말 본문에서 나왔느냐) (6)본문이 자연스럽게 말하고자 하는 Thema를 암시하고 있어야 한다. 예)

(1)너희 안에 천국- 삼중 천국- 바리새인 마음에 천국 (2)왼뺨을 치는 자에게 -부부싸움 이쪽도 쳐라- 반항 (3) "하나님의 온전함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심 (4)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이것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동정해서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이다. (7)문법적 해석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주어와 동사를 연결, 원어로 이해해야 한다. (8)실존적 해석 - 항상 오늘 여기에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해석 오늘의 말씀으로 전해져야만 한다. 예) 오늘의 부활 (9)성령의 감화 - 기록할 때 나타나셨던 성령이 오늘 감화되어야 한다. 설교가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감화 때문이다. -교인들이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로 받아들여질 때 열매가 맺어진다. (10)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18.본문 선택 시 주의 사항

(1)본문과 관련된 다른 성경을 찾아 비교 연구하라 (2)이미 설교한 본문들은 Rist를 만들어 두어라 -제목, 설교, 본문, 찬송 등 (3)설교 내용 중에 본문 그 자체를 자주 인용하라 -목사의 점수가 여기에서 좌우됨. 본문을 전문적으로 깊게 해석하라 (4)한 본문을 해석하는 입장을 되도록 떠나지 말라 결론도 되도록 본문에서 찾아라. (본문 한절을 읽고 끝내는 설교가 좋다) (5) 다른 본문 성경을 많이 인용하지 말라 (고추장 먹기 위해서 밥 먹느냐)

 

19.본문 취급에 의한 설교의 구분

1)본문 자체

2)본문의 테마

3)본문의 상황

4)설교자 자신의 정신적 상황이 설교의 성격을 규명한다. (1)제목설교 (2)본문설교 (3)주해 설교

 

20.제목설교

 

(1)정의 본문 자체의 내용을 포괄하기 보다는 설교자가 말하고자 하는 테마 제목에 치중하는 설교 -설교자의 말 가운데 있는 진리에 치중, 먼저 테마를 택하고 성경을 인용, 초대 교부 사도들의 설교 (2)장 점 1)수사학적(논리적) 완전성을 기할 수 있다. 설교의 초점을 맞추고 완벽한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다. 2) 전반적인 설명을 끝낼 수 있다. 3)폭넓은 사상을 발표할 수 있다. 4)다른 본문을 많이 인용할 수 있다. 5)어떠한 테마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다. (3)단점 1)비양심적일 수가 있다. 성경을 억지로 인용 2)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여기기 쉽다. - 설교자가 성경말씀을 등한히 여기면 교인들은 설교자를 등한히 여긴다. 3)영적운동이 부족하기 쉽다. - 웅변은 잘하는데 영력은 없다는 비평을 듣는다. 4)단조롭기 쉽다. (4) 주의 사항 1)본문을 가까이 하라 2)논리를 정연하게 전개(철두철미하게 수사학적이어야 한다.) 3)테마 외의 말을 하지 말라. 산만해진다. 4)제목과 테마를 잘 택하라 꼭 필요한 테마에만 제목설교를 하라

 

21.본문설교

 

본문 자체가 테마를 이루며 설교의 구분도 본문의 현저한 내용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나와야 한다. (1)본문 설교의 구분 1)일방적 의미에서의 본문 설교 2)본문 제목 설교(본문의 흐름 속에서 논리를 전개) 3)본문 추론 설교(본문 외의 방향으로 전개했다가 다시 본문에서 결론을 찾는 설교) (2)본문 설교시 주의 사항 1)본문을 잘 선정해야 한다. 2)무리 없이 잘 분석해야 한다. 무리 없이 구분해야 한다. 말의 과정과 순서를 알아야 한다. 3)본문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본문을 충분히 알아야 한다. 언어, 문맥, 문법에 익숙, 외국어 대조, 번역본 대조 4)본문의 중심에 흐르는 뜻(초점)을 알아야 한다. 예)탕자의 비유에서의 초점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다. 5)본문의 뜻을 흐리게 말고 테마와 논리를 찾아야 한다. (3)본문 설교의 특징 1)자연스럽게 쉽다.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 2)신선하게 구분해서 내용을 전개하면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 쉽다. 예)행 11:23 보았는가, 느꼈는가, 말했는가. 눅 9:23 자기를 부인 십자가, 나를 따르라 (4)본문 제목 설교 본문 안에서 독특한 테마를 발견하고 논문적 구분과 논리를 함께 전개하는 것. 테마를 머리 제목으로 정하고 자연스럽게 논리를 전개 예) 히2:3 정반합의 논리적 구성을 하면서 본문을 전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을 먼저 말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으로 말해 나간다. (5)본문 추론 설교 테마는 본문에서 나왔으나 논리를 본문 밖에서 전개 그리고 결론은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맺는다.

 

22. 주해 설교

(1)주해 설교 사실상 설교가 아니라 성경 공부이다. 그러나 교인들에게 순수한 학문으로서의 주해는 불가능하다. 주해는 불가능하다. 주해 설교는 논리 전개나 테마를 따로 두지 않는다. 어떤 설교든지 주해적 성격을 가졌다. 결론 대신에 요점을 강조해 준다. 주해 설교 주해 설교 주해 설교로 끝나야 한다. (2) 주해 설교의 방법 1)먼저 본문을 구분해야 한다. - 순서를 바로 정해야 한다. 2)올바른 단어 해석 3)문장의 구절과 구문을 잘 다듬어야 한다. 4)요절이 어디에 있는가? 좌우명(Key Word)을 택해야 한다. 5)본문을 짧게 잡아서는 안 된다. 완전한 문장을 택해야 한다. (3)주해 설교의 종류 1)성경 전권을 창세기부터 2)특정한 책을 택해서 집중적으로(루터는 로마서, 칼빈은 에베소서 이상근 박사는 요한 복음등) 3)성경 인물 중심 강해 4)특수한 제목을 가지고 (예수의 비유, 예수의 이적, 십계명 강해, 기독교 윤리, 예수의 격언, 신앙고백 강해등) 주석은 참고 하는 것이지 그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시대와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4)주해 설교의 장점 1)주해 설교가 가장 평범 2)성경 전체가 다소화 됨 3)성령의 역사를 바로 접하게 됨 4)교인들을 올바르게 양육하게 됨 5)교역자가 영력과 담력과 그리고 설교의 많은 테마를 얻게 됨 6)거룩한 진리 안에서 감화를 받게 됨 * 목사는 일단 주해 설교 권위자가 되어야 한다. 설교 원고는 3번 써라. (5)주해 설교를 잘하는 법 1)성경을 영감 된 책으로 믿고 경건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2)성경이 소중하다는 신학이 있어야 한다. 3)성경을 잘 구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4)논리적인 머리가 있어야 한다. 5)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6)깊은 연구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7)본문을 택하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심방을 통해서 성경의 어떤 말씀이 오늘의 청중에게 필요한가를 늘 관심 8)설교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힘 생기, 재미 적응성, 웅변적) -사람은 아는 것만큼 말하기 어렵다. 열을 알고 하나를 말하면 이해하기 쉽다. (6)주해 설교시 주의 사항 1)간단한 주해로부터 시작할 것 2)주일 예배를 위해서 준비하지 말고 항상 주해 설교를 준비 할 것 3)잘하는 사람을 모델로 택할 것 4)수사학을 겸할 것을 잊지 말 것 5)모든 성경의 흐르는 문맥을 다 알고 있어야 본문을 이해 할 수 있다. (배경과 역사) 6)조직 신학적 차원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23.설교의 구분

(1)서 론 1)서론의 정의 시의 전주, 책의 서문, 건물의 현관과 같다.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서론은 매력적이라야 한다. 청중과 설교자의 만남의 시간. 서론은 천천히 , 결론은 격하게 간판, 인상을 주는 곳, 말의 문을 여는 곳 관심이 통일되고 동등의 관계에서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2)서론의 목적 1.본문이나 테마에로 관심을 끌고 가는데 있다. 두부장사가 종치는 것과 같다. 내가먼저 청중에게 관심을 두어야 한다. 청중들의 관심이 없는 어떤 이야기도 설교의 서론은 될 수 없다. 2.설교자와 듣는 자가 서로 만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멘 할 수 있는 내용이라야 한다. 청중을 먼저 잘 이해하고 내가 말하려고 하는 전체적인 내용을 알고 매칭 시켜야 한다. 3)서론의 전개 방법 ㉠일반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본문으로 ㉡주해로부터 시작해서 본문으로 ㉢가장 뚜렷하게 제목을 끄집어내어서 시작 ㉣본문 중에 의문점을 끄집어 내에서 예)아나니아와 삽비라 왜 죽였나 무화가 나무가 왜 저주를 받아야 하나 4)서론의 성질 가)적절해야 한다. 절대로 본문과 테마를 직접 취급하지 말아라. 나)짧아야 한다. 길이는 5분 이내로(3분에서 5분) 다)자연스러워야 한다. 화려한 스타일을 피하라.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이야기는 피하라 모든 사람에게 경험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라. 라)복잡한 문장을 피하라 서론과 결론만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라 교인들은 듣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산뜻하고 생생한 그림으로 시작해야 한다. 마)덜 적극적이고 덜 긍정적이어야 한다. 최상급을 써서도 안 된다. 바)과장하지 말 것(시적인 문장을 쓰지 말라) 사)무리하게 하지 말고 쉽게 시작하라 거창한 명제를 던지지 말라 아)적당한 음성(분명하고, 깨끗하고, 조용한 협력적인 음성) 자)청중에게 관심이 될 만한 가치를 말해야 한다. 천박한 농담은 금물 너무 깊은 사색을 요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 구상을 볼 때는 서론 보다는 결론이 먼저다 (2)본론 1)본론의 구분 제1대지 - 1소지 2소지 3소지 제2대지 -1소지 2소지 3소지 2)설교 구분시 장점 가)설교자에게: 설교성의 조직이 가능 사색을 조직적으로 하는데 훈련 전체의 내용을 뚜렷하게 소화 역점(point)을 분명히 할 수 있다. 발전(전개)을 가능케 한다. 나름대로의 모델을 형성할 수 있다. 나)청중에게 ; 이억하기 좋다 이해하기 좋다 흥미를 준다. 결과가 좋다(많이 기억하면 실천하기가 어렵다.) 3)구분의 방법 가)구분들이 설교에 적절한가? 나)구분을 알리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 -첫째로... 마지막으로 라고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그러나 형제 관계의 구분은 알리는 것이 좋다 예)기독청년의 갈길 (1)믿음 (2)소망 (3)사랑 다)몇으로 구분하는 것이 좋으냐? 엄격한 규칙은 없으나 자연스럽게 구분 너무 많이 구분하지 말라 중세기부터 내려온 풍습은 3대지(3분설)― 삼위일체이기에 정(성경) 반(오늘) 합(나) 4)구분시 주의 사항 ㉠교인의 관심에 주의 할 것 ㉡중심을 잃지 말 것 ㉢테마를 깨끗하게 이해하라 ㉣분명해야 한다.(깨끗하게 구별해야 한다) 내용에서 구분되어야지 억지로 구분해서는 안 된다. 교인들의 마음에 멀미를 하게 하면 안 된다. ㉤발전 ㉥균형이 잡혀야 한다.(각 대지의 시간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불필요하게 뛰어든 가지가 없어야 한다. 구분마다 합당한 사명이 있어서 전개되어야 한다. 예화는 설교 준비한 다음에 집어넣어야 한다. 5)발전에 대한 논리 ㉠소극에서 적극적으로 ㉡타아에서 자아에로 (전체에서 개인에로)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옷 두벌 있는 자는 한 벌 주라)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절망적인 것에 소망적인 것으로 *성공적인 설교는 서론은 끌려야(호기심) 한다. : 감정에 호소 본론은 납득시켜야 한다. : 지성에 호소 결론은 결심이 서게 해야 한다. 의지에 호소 (3) 결론 1)결론의 정의 -결론은 설교의 생명이다. 결론은 우연지사가 아니고 필연적이다. 서론 본론에서 쌓은 결과이다. 본론이 엉망이면서 결론만 좋을 수 없다. 어디서 시작했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말로 끝내는 것도 중요하다. *목회는 새로운 사람을 모아 놓으려고 하지 말고 이미 앉아 있는 사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계속 새롭게 결단 하도록 해야 한다. 2)결론의 성격 ㉠요약 되풀이 (주의: 잘못하면 반복에 그친다. 같은 말로 하면 안 된다. 다시 전개하는 과정이 되기 쉽다) ㉡응용적인 요소 (구체적인 제시)적응적인 요소, 윤리적, 현실적 기억하도록 간단하게,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 자연스럽게 해야지 너무 많은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예)나단이 다윗왕 앞에서의 설교 ㉢호소와 간청을 포함해야 한다. 직선적으로 양심에 부딪쳐야 한다. 다분히 감정적이어야 한다. ㉣수사학적 (웅변적)이어야 한다. 구체적인 면에서 결단을 주는 내용 예)그러므로 이러이러해야 합니다. ㉤성경을 결론으로 맺을 경우 성경 요절로, 마지막 인상을 성경 자체에 두는 것이 좋다 ㉥소망적, 긍정적, 적극적이어야 한다. *끝으로, 결론으로, 라는 말을 쓰는 것보다 "그런고로"란 말이 좋다 3)결론의 양상 ㉠듣는 자 자신에게 관계되어야 한다. ㉡전 설교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서론에 문제를 제기했으면 해결을 주어야 한다. ㉣결론이 너무 길면 안 된다. 서론 보다는 짧아야 한다. 루터 "가장 열중할 때에 결론을 맺어라 그래야 다음에 또 교인이 온다." ㉤다양성 있게 폭넓은 방법으로 결론을 맺어야 한다. 끝나기 전에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라는 말은 하지 말라 ㉥결론을 말할 때는 목사는 교인을 보고 교인은 목사를 보아야 한다.

 

24.설교의 길이

 

길게 느끼지 않도록 하라(25-30) 설교 시간에 메이지 말고 다만 기다란 말은 듣지 말라 짧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다만 길다는 인상을 주지 말라.

 

25. 예화

 

(1)예화 사용의 장점 1)상상력을 동원하고 누구나 다 좋아한다. 2)머릿속에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인상을 주어 오래 기억된다. 3)설교 내용을 확고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4)생생하다. 실생활에 적응력을 준다. 실천의 길을 가르쳐 준다. 5)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성경이 예화적 방법을 취하고 있다. (2)예화의 요소 1)좋은 예화는 성경이다. (90% 좋다) 반복해도 좋다 2)매일의 실생활(목사는 관찰력이 좋아야 한다. 보편타당 하며 일반성이 있는 예화를 생활에서 찾아야 한다.) 3)역사(주의: 길어지게 않게 하라) 4)여행, 관광(주의: 내가 어디네 갔더니 라고는 말하지 말라) 다만 소재만 인용하라 5)자연 6)문학 7)과학 8)예술(미술......) (3)예화의 목적 설교자: 1)설교의 개념을 잘 정리해 준다. 2) 설교 구상을 간결하게 만들어 준다. 교 인 : 1)흥미와 주의를 끌게 한다. 2)진리를 생생하게 이해하게 한다. 3)결심하게 한다. 행동하게도 한다. (4)예화의 분류 1)단어(예: 곰 같이.......)많이 쓰면 시가 수필이 된다. 2)암시적 비유 3)직유(........ 처럼) 4)은유(간접적) 5)일화(일반적인 예화, 서술적 비유) (5)예화 사용 시 주의사항 1)주제에 맞아야 한다. (예화하기 의해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2)과장하지 말라 3)한 예화를 2분 이내에 끝내라 4)예화는 예화라는 것을 잊지 말라 (설교의 부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쉬는 시간이다.) 5)예화는 한번만 하라 (모든 경우에 그 예화가 맞는 것이 아니다.) 6)보편화 하지 말고 정확하게 하라 (보편화 되지 못한 예화는 "대단히 실례되는 말씀이지만은" 이란 말을 하고 사용하라) 7)자기 경험담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라 (말씀의 성경적 권위가 상실된다. 인격 평가 받기 쉽다) 8)적당하게 하라 (듣는 사람은 기억하지만 한 사람은 잊어버리다.) 9)비유나 예화는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가 하나이어야 한다. 10)어조나 화법도 달리해야 한다. (음성을 낮추어서 재미있고, 친절하게 하라) 11)예화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하얀 거짓말을 쓰지 말라, 진실이 구실이 되면 안 된다.) 12)100만분의 1이 있을까 말까 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 흥미는 있으나 실천성이 없다. (6)예화 사용의 요령 1)짧게 2)듣는 자의 경험과 흥미와 교육 정도에 맞아야 한다. 3)예화를 하면서 위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유나 희롱은 금물, 유머나 제스처가 지나치면 안 된다. 신중한 유머를 사용) 4)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책임을 져라 (정확성을 보장) 5)진실하게 말하라 (말을 만들어 내는 예화는 좋지 않다)

 

26.음성

 

(1)요령 1)훈련을 해야 한다. 훈련 없는 좋은 음성은 무표정한 얼굴과 같다. 훈련에 앞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좋은 음성은 오랜 습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2)긴장이 지나치면 말을 더듬는다. 왼손잡이 어린이를 오른손으로 먹으라면 말더듬이가 된다. 3)인공적인 것 보다는 자연적인, 건강한 음성 4)후두가 악지, 호흡 조절을 잘할 것, 후두에 힘을 주지 말 것 혀를 잘 조정 5)입술 모양을 거울을 보면서 훈련, 자연스럽게 6)골방에서 자기 음성을 들어보라 7)개성을 살려야 한다. 자기 음성을 듣고 자기 모양을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8)다른 사람 중에 자기 음성과 비슷한 사람을 약단 모방하는 것이 좋다 9)시간 조절을 잘 해야 한다.(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해야 한다.) 10)한 단어 한 단어에도 강약이 있어야 한다.(문장과 문장사이에도) 11)성경을 소리 내서 읽는 연습을 하라 12)3면경을 놓고 하라 (2)주의 사항 1)잘 들려야 한다. 2)발음이 잘 구분되어야 한다. 분명해야 한다. 특별히 모음이 분명해야 한다. 3)명랑해야 한다. 기분 좋은 음성 4)잘 훈련된 것이라 한다. (3)말의 속도 1)청중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타이밍에 내가 적중하도록 하라 2)속도를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3)쉼표를 설교 원고에 표시해서 연습하라. 4)자기가 빠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느리게 하고, 자기가 느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빠르게 하라

 

27. 제스처

 

(1) 원리 1)가능한 제스처는 미리 준비하라(훈련을 통해서 나와야 한다) 2)되는 대로하지 말라, 목표 없이 하지 말라 3)너무 많이 하지 말라 4)같은 제스처를 반복하지 말라 5)기본법에 익숙하다 6)제스처보다 말이 약간 앞서는 것이 좋다. 7)제스처는 꼭 해야 한다고 할 때만 해야 한다. 8)얼굴의 표정도 제스처다 인위적으로 조작한 듯하게 말라 (2)제스처의 필요성 1)설교는 입체적인 말씀이다. 온 인격을 통해서 말씀해야 한다. 2)설교자는 어느 정도 배우기가 있어야 한다. 3)목사는 제스처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4)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5)제스처가 없는 설교는 성공할 수 없다.

 

28. 설교를 위한 기계장치

 

1)전축용 앰프 안 된다. 2)스피커의 방향을 잘 조절해야 한다. 말하는 자와 스피커가 일치해야 한다. 3)한 곳에서 들려져야 한다. 4)육성과 같은 음향으로 들려져야 한다. 5)육성과 같은 음질로 들려져야 한다. 6)마이크와 입과 거리는 8인치가 되어야 한다. 7)가까우면 바람소리가 들어간다. 설교는 설교학적으로 해야 한다. 설교는 설교학적으로 해야 한다.

 

 

 

설 교 학

 

백석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 교수 이 우제박사

 

 

 

 

설 교 학

백석대학교 교수 이 우제박사

 

부흥과 설교 : 부흥 시대의 설교를 통해 본 현대 설교학의 미래적인 진로

 

I. 서론

 

러시아 속담에 “과거에 안주하는 사람은 한쪽 눈을 잃은 것이지만, 과거를 잊어버린 사람은 두 눈을 다 잃은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과거 역사를 인식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따라서 현재를 온전한 시각을 상실한 채 한쪽 눈의 기능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두 눈 모두를 잃어버린 소경으로도 살아갈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를 그대로 모방하여 오늘에 재현하려는 사람들이 전자에 속한다면, 과거를 아예 망각이라는 강물에 떠내 보내는 사람들은 후자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렇게 우리들의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이 현재적 삶을 향한 진로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하여 가치 있는 교훈들을 오늘을 위한 바른 지침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온전한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과거에 귀를 기울어야만 한다. 현대 설교의 진로를 위하여 우리가 되돌아보아야 할 무수히 많은 역사적 유산들 중에 현재 초미의 관심거리로 논의되고 있는 주제는 아마도 생명력 있는 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되었던 시기의 설교일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설교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 신앙이 흥왕하던 때는 언제나 능력 있는 강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교회가 사탄의 권세를 부수고 영광스러운 승전가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두운 역사 가운데서 세례요한이 능력 있게 말씀을 전했을 때, 무리, 세리, 군병이 차례로 걸어 나아와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자신들의 갈 길을 물었던 것같이, 성경과 교회사는 능력 있는 말씀 사역은 세상의 돌아옴과 주의 백성들의 심령 속에 부흥의 불꽃이 따 오르게 하는 일에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강력한 부흥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설교를 뒤바꿔 놓았다. 무기력한 설교에서 생명을 살리고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설교가 회복된 것이다. 이러한 강력한 설교를 가능케 했던 오순절의 역사는 “제2의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목숨을 걸고 말씀의 우위성을 회복하려는 영적 부흥운동이었고, 영적 대각성 운동이었다. 모든 세기에 일어난 영적 부흥과 각성의 이정표가 되었던 종교 개혁은 17세기의 청교도 운동과 18세기의 휫필드, 웨슬리, 에드워즈를 중심이 된 영적 부흥 운동에 그 바톤을 넘겨주게 되었다. 그리고 간헐적이기는 해도 19, 20세기의 복음주의운동과 선교 운동을 통해 부흥의 횃불이 전달되었다. 놀라운 점은 이 부흥과 갱신의 근저에는 강력한 말씀사역이 존재하였고, 그로 인해 회중들의 삶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시대를 깨웠던 작고 큰 영적인 부흥과 각성의 시기의 설교정신과 형태가 점차로 세상문화의 기준을 따라가는 현대적 설교사역의 정황가운데 어떤 교훈을 제공하는가?

이 논문에서는 러시아 속담이 던져주는 권면에 유념하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과거를 망각하여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과거의 교훈과 연속성을 찾고자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굽이쳐 흐르는 역사의 골짜기마다 사용하셨던 부흥과 각성 시대의 설교자와 설교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의 특징을 요약하면 설교 본질에 대한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설교의 본질은 결코 바뀔 수 없기에 우리들이 행하는 설교는 본질에 충실했던 위대한 역사적 전통과의 연속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고려해야할 것은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맹목적으로 모방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안주함으로서 한쪽 눈의 기능을 잃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의 교훈에 대한 현재적인 적실성(relevance)을 심도 있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과거와의 불연속적인 측면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불연속성이라는 말이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구태의연한 답습을 넘어서 그것을 수정, 보화, 그리고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과거는 무비판적인 모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창조적인 선용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설교란 다름 아닌 각 시대의 회중을 향해 말을 걸어오는 행위이기 때문에, 불변적인 요소에 가변적인 요소를 조화시키는 통합적 관점의 새로운 형식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II. 위대한 유산으로써 영적 부흥과 설교의 본질 회복

 

우리는 지금 그동안 우리를 지탱시켜주었던 절대적 진리의 기반을 상실한 “터가 무너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절대 기준과 가치관이 무너진 시대는 자신의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는 상대적 가치관이 팽배하게 되는 시기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들이 행하는 설교사역의 분야에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점차로 현대 설교학은 “설교란 과연 무엇인가? 설교는 왜 하는가?” 라는 대한 물음보다는 “설교를 통해 어떻게 청중의 현실적인 필요나 현대적인 문제의 해답을 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과도하게 집중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설교를 값싼 싸구려 복음의 제시나 성경 본문과 교리를 상실하면서까지 과도하게 청중의 구미에 맞는 메시지로 전락시켜 버렸다. 신설교학(new homiletic)적 경향으로 대변되는 다양한 설교 이론들이 전통적인 설교 한계를 넘어가려는 대안들로 제시되었다.

현대의 무기력한 강단을 치유하기 위해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선한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시도가 우리의 설교적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창균 교수는 이러한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진단”으로 인한 “현상학적인 해답”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더 심각한 문제인 설교의 “존재론적인 위기”를 낳았다고 진단한다. 우리의 문제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청중들을 가장 심도 있게 변화시켰던 과거의 부흥과 각성 시대의 전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설교의 본질을 찾아내는 일이다. 위대한 영적 각성과 부흥이 펼쳐질 때마다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던 설교적 유산들을 통해 현재 우리들이 행하는 설교 사역의 방향성을 진단하고 놓쳐서는 안 되는 설교의 신학적 독특성을 점검해야만 한다. 특별히 과거와의 연속성의 측면에서 설교사역의 본질규명을 “하나님 영광을 추구하는 설교,” “사도적 케리그마를 회복하는 설교,” “복음의 능력 회복하는 설교”의 메시지로 나눠서 각각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세 가지 회복의 영역은 현대 설교학이 깊이 영향 받고 있는 3가지 세속 문화적 관점들, 구경꾼 중심주의적 태도, 소비자중심주의적 태도, 테크닉 중심적 태도에 대한 처방으로 제시되고 있다.

 

2-1 재미를 추구하는 설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설교의 목적 회복

 

부흥과 각성시대의 설교로부터 한국교회가 주의를 기울어야 할 첫 번째 교훈은 설교사역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적인 목적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적 설교란 단순히 현대 청중들과의 성공적인 대화의 길을 모색하는 의사소통 방법을 넘어서는 신적 커뮤니케이션의 측면, 즉 영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영적인 본성이 점검되지 않은 채 행해지는 단지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만드는 설교는 궁극적으로 회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상실하게 되는 설교답지 못한 설교이다. 설교가 세속적 강연이나 연설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현대 설교학적 경향에서 눈에 뜨게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본성을 강조하는 설교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현대의 설교학의 주된 관심은 인간 경험에 호소하는 설교를 만드는 일이다. 복음을 다시 새롭게 경험시키려는 시도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그것을 이뤄내는 방식에 있어서 과도하게 메시지의 모든 관심을 청중의 흥미와 재미에 호소하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성경을 오직 경험론적인 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함으로서 현대인의 기호에 우선순위를 두고 설교를 전개하게 만드는 우를 범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설교적 방향성이 갖고 있는 위험은 신학(theology)과 인간학(anthropology)의 사이의 균형 상실이다. 신학적 반성이 없는 세속적 인간학으로 떨어졌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을 건전한 성육신적 설교 신학의 관점으로 비판한다면, 현대 설교적 경향이 지나치게 인간적인 국면이나 실존적인 측면에 의존하다가 설교가 갖는 신적인 측면 혹은 성경적인 관점을 망각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이렇게 설교를 청중의 흥미 유발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시도는 그들의 설교학이 지나치게 현대 지배적인 서구 문화의 경향을 신학적 비판 없이 수용한 것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정신이 바로 “구경꾼”(spectator)문화를 따라가는 것이다. 현대인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늘 새로운 재밋거리를 찾아다니고 있다.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재미있는 일로 자신의 삶을 채워야 만족하는 “오락 욕구”에 중독되어 있다. 문화의 거울 노릇을 하는 텔레비전은 한마디로 이 시대의 형편이 어떠한지를 잘 대변하고 있다. 모든 프로그램이 흥미와 놀이 위주로 짜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텔레비전은 청중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쉼 없이 우리의 정신을 혼미케 하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우리를 흥분상태 가운데 온통 열광하도록 만든다. 어느 사람의 잘 정의하였듯이 텔레비전은 “눈으로 씹는 껌”이다. 재미라는 단물이 있을 때까지만 씹고 버리는 껌 말이다. 이런 찰나적인 재미에 노출된 현대인은 늘 오락 거리를 찾아다니는 “죽도록 즐기기” 경향으로 치달아 가게 된다. 이에 대해 데이비드 핸더슨의 말을 들어보자: “...이렇게 되면 계속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자극이 몰려오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휘몰아치는 줄거리를 따라잡기 위해 전개되는 이야기에 폭 빠져들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무언가 끊임없는 움직임, 무지막지하게 큰 소리, 계속하여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춤에 빠져서 사는 것을 좋아하게 되고, 또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현대 설교학은 심하게 말하면 바로 이 구경꾼 문화에 사는 청중을 사로잡는 메시지를 전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등장한다. 신설교학의 창시자인 크래독은 청중들에게 지루함을 주는 것은 죄라고 단정하면서, 지루함을 깨는 설교의 길을 제시하게 된다. 1971의 크래독이 귀납적 설교라는 이름으로 전통적인 설교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주장한 이래로 새로운 설교학은 탄력을 얻어 다양한 이론과 제목으로 확대되어가고 있지만 그 공통적인 전제는 구경꾼을 만족시키는 복음전달의 방식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대 설교학이 추구하는 설교의 목적은 세상문화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구경꾼을 즐겁게 하는 사역으로 전락해 버릴 위험이 있다. 구태의연한 태도를 변화하는 시대의 청중을 대하는 전통설교의 한계를 지적하려는 새로운 설교적 접근을 역설하는 그들의 순수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설교의 목적을 시청자의 관심을 사로잡기 원하는 프로그램 제작자의 목적과 일치시키려는 자세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어질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세상 문화에 무릎 꿇게 되는 설교의 굴욕이기 때문이다.

부흥과 각성시대의 설교는 설교의 목적이 회중을 즐겁게 하는 것 이상의 문제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증적으로 알게 해주는 성경과 교회역사의 아름다운 유산이다. 인간은 깊이 있는 삶을 망각케 하는 감각적인 쾌락이나 오락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재미는 우리 삶을 구성하는 일부이기는 해도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는 재미보다 하나님을 추구해 가는 것이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힌 즐거워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이 그러하다면, 설교의 중심주제와 목적도 역시 하나님 영광이어야 한다. 존 파이퍼의 주장처럼, “설교자의 목표는 바로 사람들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부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질문은 그렇다면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설교자가 인간에 대한 메시지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메시지를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부흥시대 설교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설교는 사변적이고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회개를 통한 회중의 회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현대 설교가 세상 문화의 정신을 따라 삶을 즐기는 사람을 더 즐겁게 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위대한 부흥 시대는 사람을 진정한 회심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세우고 또 다시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추구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단지 설교가 하나님을 언제나 언급하거나 모든 본문을 신 중심적인 관점으로 풀어간다는 차원에서 확보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설교자를 통하여 회중가운데 단회적으로 발생하는 “진정한 변화”로서의 회심의 역사와 또한 회중 가운데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지속적인 변화”로서의 회심의 역사로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그 좋은 실례가 바로 부흥 시대의 설교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설교를 포함한 자신의 모든 사역의 가장 큰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면서도 설교의 핵심을 회중의 “구원(회심)에 관한 설교”에 집중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회심을 통한 중생과 계속적인 영혼의 각성과 부흥을 통해 이뤄진다. 참된 회심을 통해 구원을 경험한 자로 지속적인 회심의 과정인 성화의 길을 걷게 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이끌리게 된다.

 

2-2 소비자 중심적 설교에서 케리그마적 설교의 내용 회복

부흥과 각성시대의 설교로부터 한국교회가 주의를 기울어야 할 두 번째 교훈은 설교사역에 있어서 사도적 케리그마 선포를 통한 설교 내용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설교란 단순히 현대 청중들을 위한 도덕적 강화나 윤리적 교화를 넘어서는 선포된 특별한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전하는 것이다. 사도들이 선포했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점검되지 않은 채 행해지는 단지 청중들의 생활을 교정하고 교육하는 설교는 좋은 충고(good advice)는 될 수 있어도 좋은 소식(good news)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죽음 가운데 있는 이들의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치유와 구원 그리고 영생의 메시지가 된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한 간수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절규하였을 때, 사도를 통해 제시된 대답은 바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긴박한 복음의 메시지이다.이렇게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여져서 소망이 없는 인생들에게 전해져야 하는 긴박한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다. 그리스도 외에는 인생의 참된 치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현대 설교학의 두드러진 경향은 바로 이러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이 사랑과 구속을 보여 주면서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를 믿도록 독려하는 복음 중심적 설교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점이다. 다드(C. H Dodd)는 현대 설교의 최대 위기를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기독교의 공중 선포”라고 정의되는 케리그마를 상실한 채 행해지는 단순한 인간적인 필요성에 호소하는 권면이나 교훈 그리고 설명으로 흐르는 것이라고 옳게 지적하고 있다. 현대의 설교학의 주된 관심은 청중의 상황과 그들의 느껴진 현실적 필요(felt need)에 대한 개인적이고 심리 치료적인 복음을 제시하는데 집착되어 있다. 물론 그들이 문제 해결식의 설교의 방식을 통해 나름대로 청중들의 상황에 대한 처방으로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문제는 그들이 제시하는 처방이 지극히 성경 내러티브의 핵심 인격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기보다는 청중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있다. 거기서 성경이 제시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의 메시지와 사도적 케리그마는 실종되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청중의 느껴진 필요에서 출발하여 그들의 욕구를 만족 시키는 설교는 “소비자”(consumer)로서 청중을 대하려는 우리시대의 소비자 중심주의적 견해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기업들은 온통 마케팅 전략으로 소비자의 구매를 촉진시키기 위한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 비즈니스 세계에서 소비자는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섬기고 받들어야져야 할 왕으로 여겨지고 있다. 소비자 문화는 새롭게 청중의 구미를 사로잡는 세련된 상품이 계속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게 만들어 더 많은 선택권을 구매자에게 제공해 준다. 이러한 소비자 중심주의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내게 꼭 맞는 것’을 찾아다니며,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진리로 여기는 삶의 태도를 갖는다.

현대 설교학은 어찌 보면 바로 이 소비자 문화에 사는 청중에게 호소하는 실용적이고 필요중심의 설교(need-oriented preaching)의 길을 제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마케팅 전략의 영향력 아래서, 복음은 생산품으로 여겨지고, 설교자는 생산자로 회중은 소비자로 취급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 가운데서 생산품과 생산자는 모두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 항상 중심에는 소비자들인 회중이 존재하게 된다. 소비자들인 회중은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경우에든지 옳다. 이러한 견해는 설교에 있어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무시했던 회중의 위상을 끌어올린 점과 기독교 신앙이 회중에게 던져주는 유익을 어느 정도 설명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고무적인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견해는 기독교의 복음의 메시지를 송두리째 왜곡 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의 복음은 소비자 문화의 시각에서 인식되는 것처럼 경쟁적인 종교 상품들 가운데 어는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복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결단의 요청이다. 회중이 우선이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 속에 담겨진 주님의 뜻이 최우선이다.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청중이 필요를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니라, 준엄한 명령이요 반드시 따라야 할 삶의 방식이다.

다양한 부흥과 각성 시대의 설교의 공동적인 특징은 바로 회중을 개인적인 선호도로 메시지를 구매할 수 있는 소비자로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회심이 필요한 개종자로 취급하고 있는 점이다. 회중들의 개종을 위해 필요한 메시지는 사용자에게 편리한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케리그마 선포에 있다. 왜냐하면 케리그마 설교의 목적이 다름 아닌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사도적 케리그마를 회복해야 한다는 논증에 대하여, 과연 1세기 이교도적인 상황 가운데 있는 사도적 케리그마 설교를 21세기의 설교를 위한 교훈으로 제시하는 것이 과연 타당 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을 작금의 한국 교회가 직면한 교회 밖 상황과 교회내의 상황의 위기 국면이라는 나눠 설명해 보기로 하자. 분명히 우리들이 직면한 세상의 외적인 상황은 1세기와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이 성경과 친숙하지 않은 후기 기독교 문화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점에서 1세기의 정황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톰슨의 주장대로, 환경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영적인 상태 면에서는 동일하거나 어쩌면 더 심각한 지경에 놓여 있기 때문에 한국 교회 강단은 다시 사도적 케리그마의 회복해야만 한다.또한 사도적 케리그마 설교가 교회내에서도 여전히 필요한 이유는 교회에 넘쳐나는 비 중생인과 중생한 기독교인들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을 중생자로 여기는 것은 지나친 낙관론이다. 회심하지 못한 채 교회에 출석하는 많은 비 중생인들이 있다. 이들에게 케리그마 설교가 절대적으로 요구되어진다. 비록 케리그마가 불신자를 회개케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필요하다. 흔히 “개심자들을 위한 윤리적 교훈”적 가르침을 케리그마와 구별되는 디다케로 표현하지만, 이 둘을 날카롭게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디다케는 하나님의 우아한 케리그마이다. 케리그마는 하나님의 기술된 디다케이다.” 이장의 주제와 관련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디다케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능을 감당하려면 사도적 케리그마의 내용이 토대가 되어야만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디다케도 케리그마에 기초를 두고 있다면 개심자들의 윤리적이고 성화적인 삶의 변화를 이루는 설교는 케리그마적 디다케 설교가 될 것이다.

 

2-3 테크닉에 의존하는 설교에서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 의존하는 설교의 능력 회복

부흥과 각성시대의 설교로부터 한국교회가 주의를 기울어야 할 세 번째 교훈은 설교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주권적 역사를 통한 설교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설교란 단순히 현대 청중들을 위한 설교자 개인의 인간적이거나 인위적인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부으심을 통한 사역이다. 성령의 능력 부으심이 전제되지 않고 전달되는 테크닉이나 방법론에 의존하는 설교에서는 설교자가 주체가 되고 성령이 설교자의 불완전을 통해 생긴 균열을 메워 주는 존재로 기능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은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설교할 것을 천명했던 바울의 정신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능력만이 말씀 선포 사역의 효력을 발생케 한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주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게 하신 누가복음 24:49와 그 결과로 주어진 사도행전 2장의 메시지이다. 제자들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3년 동안 제자 훈련 과정을 이수하였고,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사명이 복음을 지식으로 전달하는 것이었다면 충분한 자격을 갖춘 셈이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반드시 증인이 되려면 한 가지 선행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씀 하신다. 그것은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한 능력이 부어짐을 통해 어떤 결과가 생기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놀라운 것은 성령 강림 사건은 무기력하게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회색지대에 속한 신앙적 삶을 살던 베드로 사도를 능력 있는 말씀의 선포자로 세워놓은 점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전달되는 설교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어찌 할꼬 하면 갈 길을 묻는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을 뛰어넘어 재산을 함께 공유하는 참된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로 변화되어진다. 모두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 하는 말씀 때문에 생겨진 결과였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오늘날 조국 교회강단이 직면한 중대한 문제는 영적인 열정에 사로잡힌 능력 있는 설교가 자취를 감추고 대신에 방법론에 의존하는 설교가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점이다.

마치 이러한 현상은 부흥(revival)은 사라지고 부흥주의(revivalism)만 남아 있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흥은 무엇이고 부흥주의는 무엇인가? 마크 쇼는 에드워드가 말하는 부흥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한다: “진정한 부흥 이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에 대한 관념을 회복시키는 성령의 주권적인 기름 부으심이다.” 부흥에 대한 용어적 혼란을 피해야 할 것을 역설하면서 백금산 목사는 “부흥을 1) 교회 위에 2) 주권적으로 3) 성령을 부어주시는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첫째, 부흥의 일차적인 대상은 불신 세상이 아니라 교회이다. 부흥이 임하면 교회의 성도들은 다시 살아나 영적 생명력을 회복하게 된다.

둘째, 부흥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부흥회나 부흥을 위한 모임을 갖는 것과 부흥이 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부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하나님의 일이다.

셋째, 부흥의 내용은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심이다.이에 반해서 부흥 주의(revivalism)는 인간적인 방법론을 통하여 부흥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자세를 말한다. 부흥 주의의 모델을 제시한 사람은 찰스 피니 (Charles Finney)이다. 부흥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강조한 에드워드와는 달리, 찰스 피니는 부흥을 인간적인 노력의 소산물이며 치밀한 계획과 과정을 따르게 되면 맛볼 수 있는 경험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피니의 견해는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최소화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설교자의 방법론은 성령님의 주권적인 사역을 대치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간적인 테크닉에 의존하는 설교사역의 명백한 한계이다.

그렇다면 참된 부흥을 추구하기 위해서 한국 교회의 강단이 시급히 회복되어야할 것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찰스 피니의 인간중심적이고 테크닉 의존적인 입장을 배격하는 것이고,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영적인 긴박감을 가운데 신 중심적인 관점을 견지한 상태로 성령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을 갈망하는 설교를 전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점검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로 테크닉 의존적인 입장을 배격하는 것이 테크닉을 사용을 거절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이 쓸 수 있는 방법론은 중립적 가치를 갖는다.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비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례로 바울도 수사학 자체를 거절하지는 않는다. 수사학을 육신의 방법으로 의존하는 것을 거절할 뿐이다.

둘째로 성령 기름을 갈망하는 것이 신비한 체험 자체에 탐닉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령의 능력이 회복되는 설교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감정주의에 근거한 은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그 분이 능력으로 임하는 곳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지식과 풍성한 임재가 넘치게 된다. 이 사실을 로이드 존스는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함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행하시는 최상의 사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 하셨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러므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최상의 사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을 집중시키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100년 전 부흥이 임했던 모든 나라가 즐겨 불렀던 찬송가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부흥의 체험을 하는 곳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III. 위대한 유산으로써 영적 부흥과 설교 형식의 재고

 

지금까지 조국 교회가 성경과 교회 역사의 위대한 유산인 부흥과 각성 시대의 설교 정신을 본받아야 것을 살펴보았다. 한국 교회의 설교가 살아나려면 부흥시대와의 연속성의 측면에서 설교 본질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설교의 본질은 불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진정한 말씀 사역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시대의 상황은 늘 바뀌기 때문에 설교 형식은 늘 가변적이다. 예를 들어 부흥시대의 설교의 모체가 되고 있는 “청교도방식의 설교 스타일”을 그대로 오늘에 재현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우리시대의 설교의 방향성에 대하여 개탄하면서, 위대한 청교도 “리차드 백스터”의 설교적 지혜를 본받아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는 머레이 카필(Murray Capill) 조차도, 청교도 시대의 설교 스타일 혹은 설교 형식을 그대로 모방한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청중과 의사소통하는데 있어서 낭패를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에게 진실로 요구되는 것은 역사적 부흥 시대의 설교들에게 대한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과거의 정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정신과의 깊은 대화에 있다. 우리는 지금 숨 가쁘게 변화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이 호령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과거 유산의 위대한 정신을 밝혀주는 “설교 본질”에 대한 교훈은 흔들림 없이 오늘 것으로 수용하되, “설교 형식”은 언제나 시대를 살아가는 청중의 정황을 고려하여 보다 진일보한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있다. 과거와의 연속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과거와의 불연속적인 측면을 심도 있게 고려해야만 본문의 메시지를 우리 시대의 청중들의 삶의 자리에로 효과적이고 적실하게 연결시킬 수 있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부흥과 각성 시대에 전형이었던 과거 선포식 설교의 특징과 그것에 대한 현대 설교학의 도전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에 새로운 설교 형식이 줄 수 있는 공헌을 무엇인지를 논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통합적이고 절충적인 설교형식에 대한 필요성이다.

 

3-1 “선포식 설교”의 특성

선포식 설교는 전통적인 설교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다. 부흥과 각성 시대에도 거의 예외 없이 강력하게 복음을 선포하여 사람을 회심에 이르게 하고, 더 성숙한 삶을 향한 교훈으로 인도하는 설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어떤 비판이 가해진다고 해도 “선포식 설교”는 설교자들이 포기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유산이다. 절대적인 기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청중에게 어쩌면 분명한 삶의 기준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설교가 더욱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문제는 선포식 설교가 청중에게 영적인 척도를 제시하는 권세 있는 말씀으로 쓰여야지 그들을 억압하고 그들에게 권위를 내세우는 설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리에 대한 자신을 갖되 진리 전달에 있어서는 온유함과 겸손함을 가져야만 한다. 갈수록 하찮게 여겨지는 선포식 설교가 다시 한 번 더 우리 시대가운데 귀한 전통으로 살아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부흥과 각성 시대의 전형이 되었던 선포식 설교의 갱신을 위해서는 선포식 설교가 과연 무엇이고 어떤 설교의 구성과 전달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를 “이성적 논증으로 분명한 논지를 설명하는 강력한 삶의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로 정의하고 싶다. 이것을 보다 세분화해서 설명하면 선포식 설교는 1) 명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설교 2) 이성에 호소하는 설교 2) 강력한 삶의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선포식 설교는 명제적인(propositional) 특성을 가지고 있다. 명제적이라는 것은 설교자가 성경에서 얻어낸 해답 혹은 개념을 일방적으로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설교를 의미한다. 성경이 명제적인 진리를 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명제적 형식의 설교는 히브리적 사고에서 보다는 헬라적 사고를 통해 기독교적인 설교의 주류를 형성하는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계몽주의의 영향력으로 정착된 명제적 스타일은 먼저 본문에서 설교의 중심 명제가 될 수 있는 중심 주제를 선정하여 그 중심 주제를 지지하는 3-4개의 대지를 통해 설명하고 예증하면서 권하여 그것을 청중의 삶에 적용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이렇게 명제적 스타일은 연역적 논리전개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탕자의 비유를 설교할 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명제가 서론에서 제시하고 본론에서는 세 가지 대지로 하나님의 사랑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예증하게 적용하는 한 후 결론에 이르게 되는 설교이다. 이러한 설교는 연역법의 어원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무엇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것”(de ducere; lead from)으로 본문의 자료를 배열하는 것에 중심을 둔 형식을 취하게 된다.

둘째로 선포식 설교는 이성에 호소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중심 주제를 지지하는 세 가지 대지를 통한 논증을 전개해 연역적이고 명제적 설교로 나아가기 때문에, 설교는 자연스럽게 이성에 호소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 입문한 초신자에게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을 논증해 가려고 한다면, 선결조건은 “구속”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주는 것일 것이다. 선포식 설교가 인지적인 측면(cognitive aspect)을 중시하는 지식 전달형태로 나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과 깨달음이 없이는 힘 있게 진리를 따라 살 수 는 없다. 흔히 우리 시대가 느낌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성경에 대한 지식을 전제하고 설교를 전개해 나가거나 심지어 지식을 간과하려는 태도는 선포식 설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려하는 바이다. 선포식 설교를 회복을 꿈꾸는 설교자 마스터스(Masters)는 감정 호소하는 설교 스타일은 허구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천박한 설교라고 단죄하면서, 선포식 방식은 반드시 이성에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성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는 부흥 시대의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와 그의 강력한 추종자 로이드 존스에게서 분명히 확인된다. 에드워드가 비록 신앙의 정서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신앙의 정서는 반드시 지성에 기초하여야 한다. 지성의 관문을 통해서만이 정서는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지성의 고양을 위하여 이성과 논증을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본다. 로이드 존스도 진리는 먼저 인간 지성을 지나 감성과 의지로 나아가게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셋째로, 선포식 설교는 회중에게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촉구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선포식 설교는 직접 적인 전달 방식으로 청중에게 강력한 촉구를 선호한다. 부흥과 각성 시대에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직접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 스타일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들은 직접적인 선포방식으로 강력하게 회중을 죄에 대한 확신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스터스는 현대에 유행하는 흥미와 구도자 중심의 예배 분위기와 설교의 형태와는 달리, 선포식 설교를 주창하는 이들은 “성령께서 축복하신 직접적인 선포라는 방법은 영혼을 사로잡아 죄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유일한 방편”이라고 믿었다. 직접적인 선포를 통한 죄의 자각은 자신들의 비참을 위해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음을 확실하게 붙잡게 할 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1741년 6월 8일 노샘프톤의 앤필드 마을에서 행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 (Snners in the hnads of Angry God)설교는 바로 그 확실한 예증이 되고 있다. 에드워드는 현대인들이 거부하게 느끼는 지옥에 대한 실상을 경고적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음을 본다.

 

지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맹렬함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상에 있는 큰 무리들에 대해 훨씬 더 크게 분노하고 계십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러실 것입니다. 지금 지옥의 불 속에 있는 많은 이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보다 더 크게 분노하고 계실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모르고 평안하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붙잡은 손을 놓아 당장에 그들의 생명을 거두시지 않는 것은 그들의 악함을 생각하지 않거나 분개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그들을 향해 불타오르고 있으며, 저주는 잠들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무저갱이 준비되어 있고, 불이 이미 예비 되어 있으며, 용광로가 활활 타올라 뜨거워져 있어 그들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불꽃이 격노하게 거센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번쩍이는 칼이 뽑혀서 그들을 향해 내려질 준비가 되어 있으며, 무저갱이 그들 아래서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인 선포를 통해 회중을 주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설교에 충실 했던 부흥시대의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하나님에게 보내심을 받은 대사로 인식하고 있었다. 대사는 자기가 받은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이든지 사실 그대로를 가감 없이 외쳐야 하는 고지자 (crier)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정리하면 선포식 설교는 명제를 서론에서 제시하고 그 명제를 설명과 예화를 사용하여 논증하여 강력한 촉구로 귀결 짓는 설교의 방식이다. 설교자가 신적 권위를 가지고 회중을 삶의 진정한 변화를 꿈꾸는 선포식 설교의 영향력은 2000년 교회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선포식 설교는 무엇보다도 본문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회중에게 쉽게 적용할 수 있기에 성경의 어떤 주제나 교리를 명확하게 가르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3-1 선포식 설교에 대한 비판과 미완성의 도전

교회 역사가 입증한 선포식설교가 가지고 있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선포식 설교를 한계가 지적하는 움직임이 생겨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1970년대에 태동하게 된 귀납적 설교와 그 정신을 계승하는 네러티브 설교, 현상학적 설교, 그리고 이야기식 설교들로 대변되는 신설교학이다. 신설교학의 주창자들은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집중 공략하면서 새로운 설교 사역을 향한 당찬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에 대한 비판의 핵심골자는 선포식 설교가 갖는 성경의 성격에 대한 일방적 이해과 회중을 정당한 설교의 파트너로 고려하지 못한 실패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지성에 호소는 논증을 선호하는 선포식 설교는 주로 교훈적이고 교리적인 설득을 중시하는 설교 방식을 채택하기 때문에, 성경 본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스토리를 설교하는 경우에, 성경 스토리가 가지고 있는 역동성을 놓치게 된다. 지극히 본문을 파편화시켜서 청중을 향한 즉각적인 적용을 선호하기 때문에 스토리 해체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결코 사소한 문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 묵상가인 켄가이어는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고 묵상하는 방식의 한계를 이렇게 지적한다. “시로 보아야 할 성경을 우리는 원리 책자로 공부한다. 아름다움으로 보아야 할 성경을 우리는 신학 논문으로 공부한다. 낭만으로 보아야 할 성경을 우리는 성경 역사 기록으로 공부한다. 사랑으로 보아야 할 성경을 우리는 행동 규범으로 공부한다.”

새로운 설교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갖는 성경의 본질적 성격, 즉 성경 장르에 대한 몰이해 보다 더 심도 있게 지적하는 부분은 변화하는 시대의 청중에 대한 인식 부족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설교가 영상매체 시대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설교하기 때문에 낭패를 보고 있다고 진단한다. 비록 이러한 진단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이 벌어질 수 있겠지만, 그들이 이런 비판을 제기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전통적인 설교는 주로 본문의 내용에 치중하지 청중에 치중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주로 설교의 중심 주제를 만들어 그것을 전개해 나갈 때에 주로 본문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치중하고 있지 청중과의 연결되는 지점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약함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을 토마스 롱이 한 가지 예로 설명하고 있다.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에 서 있는 설교자가 시편 19편으로 제시하는 설교 아웃라인은 다음과 같다:

 

제목: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

I.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말씀 하신다 (19:1-6)

A. 삶의 조용한 과정에서

B. 세상의 우주적 경이에서

II.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해 말씀 하신다 (19:7-11)

A. 성경에서

B. 하나님의 사람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III. 하나님은 삶의 경험을 통해서 말씀 하신다 (19:12-14)

A. 실패와 죄의식에서

B. 좀더 신앙적이 되기 위한 굶주림에서

 

어떻게 보면 이러한 설교 개요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 롱(Thomas Long)은 이러한 설교는 단순한 논리적인 방식으로 정보를 짜 맞추는 본문의 자료 배열에 머물게 되지 청중을 설교에 참여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없다고 적절하게 지적한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이러한 청중의 참여나 기대감을 저하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전통적인 설교는 자칫하면 청중을 향한 메시지의 적실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 존 스타트의 표현대로 설교는 성경적 세계와 현대의 세계라는 두 개의 다리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바람직한 설교는 성경적이면서도 현대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성경적이어도 현대적이지 못하면 우리의 메시지는 회중을 향한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전통적인 설교에 대한 문제제기는 새로운 설교의 방식을 제언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들이 주로 주장하는 설교의 형식은 위에서 언급한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의 특징을 거절하는 극단적인 입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이 품고 있는 변화하는 시대를 향한 새로운 설교를 만들고자하는 의도가 선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론은 또 다른 일방적인 태도로 전락하게 된다. 극단은 또 다른 극단을 부르는 양극화 현상을 초래할 뿐 현명한 답이 될 수 없다. 오늘 많은 학자들이 그들의 도전을 우려 섞인 심정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설교를 거절하는 새로운 이론을 3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비명제적인 설교를 제시하여 명제적 설교를 낡은 것으로 거절한다. 선포식 설교와는 달리 새로운 설교학적 경향은 성경이 명제를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것이 우리 시대의 청중들에게 전달될 때 명제적으로 선포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현대인은 일방적인 선포를 선호하지 않는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의 느껴진 필요와 삶의 경험에 호소하는 설교가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형식에 대한 방향전환은 연역법을 거절하는 귀납적 논리 전개를 새로운 대안적 카드로 제시하기에 이르게 된다. 귀납적 논리는 구체적인 인간 경험과 필요라는 개별적인 이야기로부터 일반적인 답을 도출해 내는 형식이다. 라틴어 어원이 갖는 의미처럼, 귀납법은 “무엇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설교는 명제의 선포로 제시되기 보다는 설교자와 청중이 함께 답을 찾아가는 여정(journey)이 된다. 설교자는 답을 제시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독자에게 답을 찾게 하는 사람이다. 귀납적인 논리가 설교 구성에 있어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것은 진리의 말씀을 접근해 가는 다양한 전달의 길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나, 귀납적인 설교에 대한 배타적인 의존은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거나 지탱해 나가는데 현격한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확실한 명제가 제시되지 않은 채 추구되는 개인의 경험에 발맞춰가는 개별적인 회중 스스로의 결론을 도출케 하는 설교가 전통적인 설교를 대치해 버리게 될 때, 심각한 우려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선포를 통하여 세워지는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과 응집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점이다.

둘째로 이야기와 이미지를 중심으로 감성에 호소하는 설교를 제시하여 이성과 논리 중심의 설교를 낡은 것으로 거절 한다. 이야기와 이미지를 중시하는 경향은 현대 문화의 가장 지배적인 특징이다. 이야기와 이미지는 지식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느낌을 창조하는 것에 목표를 두게 된다.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여 신설교학은 성경을 접근할 때 사실 대조 기능(referencial function)으로 대변되는 정보적 측면보다는 시적기능(poetic function)으로 대변되는 심미적 측면에 우선순위를 둔다. 찰스캠벨이 이들이 성경의 장르는 무시한 채 전적으로 비유들에 집중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일방적으로 정서적 영역(affective domain)에 치중한 설교를 만들기를 원하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들의 주장은 이성에서 감성에 주안점을 두는 설교적 경향은 설교가 인지적 측면에 호소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전인적인 학습 영역(learning domains)에 호소해야 할 점을 인식케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기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엄연한 한계는 성경 장르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선포식 설교를 선호한 전통 설교에 대한 비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든 본문을 비유 스타일로 접근하려고 든다. 만약에 그들의 이론처럼, 이성적 설득이 사라지고 대신에 느낌과 감성에 호소하는 설교가 표준이 된다면, 기독교의 신앙을 공교하게 하는 믿음의 반영적인 영역(affective dimensions of faith)을 상실케 된다. 톰슨의 주장처럼, “믿음은 이해(understanding)를 추구하기 때문에, 설교는 항상 믿음 안에서 더 깊은 가르침을 위한 기회가 되어 왔다. 이야기, 상징, 그리고 메타포는 환기시키는(evocative) 기능을 감당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들은 반영(reflection)을 필요로 한다. 이야기가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시켜주지만,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응집력은 공동체 이야기에 대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셋째로, 간접적인 선포스타일로 직접적으로 회중의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를 낡은 것으로 거절한다. 새로운 설교학적 움직임의 저변에는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반발이 자리 잡고 있다. 과도하게 높여진 설교자의 권위에 대하여 도전하면서 그들은 권위 없는 자 처럼 설교할 것을 주장한다. “권위 없는 자로서 설교자는 더 이상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행하십시오.”라는 식의 직접적인 촉구를 해서는 안 되고, 오직 청중이 그런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설교를 구성해야 한다고 본다.

그들은 권위적인 설교를 지양하고 오직 설교자와 청중이 원탁의 의자에 함께 둘러앉는 개념의 민주적인 설교(democratic sermon)를 이상적인 선포 스타일로 제시하고 있다. 그들이 주장이 갖는 강점은 설교자의 권위가 본문의 권위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 있는 일부 설교자들의 자세를 교정시켜주어 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의존해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간접적 선포가 주류가 될 때, 청중을 향해 권세를 가지고 말하거나 청중의 삶을 변화를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차원을 무시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향한 결단과 윤리적인 권면을 강하게 촉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직접적으로 선포하지 않는 설교는 주님의 분부를 간과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청중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권위를 상실한 설교가 될 수 있다. 성경은 내러티브 전통에서 조차도 이야기와 함께 그 이야기에 응답하라는 부르심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톰슨은 다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입증하고 있다:이야기 조차도 청중의 삶을 향한 요구와 뒤섞여져 있다. “출애굽기에서의 강력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내러티브는 십계명을 위한 기초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는 회개하라는 부르심을 위한 기초가 된다. (막 1:15). 바울 서신에서도 복음의 이야기는 그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요구를 함축하고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정리하면, 새로운 설교적 경향은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를 대치할 수 있는 대안이 되기에는 미완성의 도전에 불과하다. 전통적 설교의 한계를 넘어가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오류를 범하기도 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일방적 태도 때문에 또 다른 양극화 현상을 야기 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설교학적 시도는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청중을 위한 적실성 있는 선포의 방식으로 거듭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선포식 설교의 취약점으로 비판 받고 있는 청중과의 접촉점 혹은 청중을 참여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필자는 통합적 설교의 방식이라는 제목으로 연이어 논의할 것이다.

 

3-3 통합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선포식 설교

부흥과 각성 시대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다시 우리시대의 청중을 사로잡는 힘 있는 설교가 되려면, 본질의 회복뿐 아니라 형식의 회복도 절실히 요구되어진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마인드는 조화와 상호 통합의 정신이다. 본문 중심과 청중중심이 함께 어우러질 때, 연역적 논리와 귀납적 논리가 더불어 춤을 추게 될 때, 강력한 선포와 내러티브적 개방성이 상호적으로 공존하게 될 때,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새로운 부대에 담기게 될 때, 우리의 설교는 이 시대 청중을 위한 적실성 있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이런 양자가 함께 공존하는 설교의 형식을 고찰하기 전에 이와 같은 두 요소의 조화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성경적인 증거를 설교자 나단의 설교 형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범죄한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하는 나단의 환경은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에서의 주된 설교자의 이미지인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사명과 비슷한 긴박감과 진지함으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나단이 다윗을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세우려는 목표로 설교했다는 점에서도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와 맥을 같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런 목적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점이 밝혀질 때,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다시 우리 시대의 회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각성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형식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나단은 목숨을 건 위험한 설교를 명제를 제시하고 대지를 나누는 논리적으로 증명해 가는 방식으로 풀어가는 전통적인 선포식 방식으로 전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극적인 역전의 상황을 염두 해 두면서, 다윗의 죄에 대한 각성, 즉 회심과 변화의 촉구를 위해 반전플롯(reversal plot)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설교자 나단의 의도적인 구상에서 나온 설교 형태이다. 나단의 설교는 마치 신 설교학적이론의 대부 격인 “내러티브 설교”(narrative preaching)의 창시자 유진 로우리의 모호함에서 해답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해답을 지연시키는 형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나단의 설교는 크게 나누면 고대에 있을 법한 구체적인 예화인 비유로 시작하여 다윗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부분(1-6)과 강력한 죄에 대한 책망으로 다윗의 회개에 이르게 하는 부분(7-15a)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결국 나단이 비유를 통해 다윗의 반응을 유도해 내고, 대 반전을 기대하며 자신의 설교를 전개시켜간다는 점에서 현대적 관점으로 말하면 신 설교학적 정신을 수용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결론 부분에 이르러서는 다시 비유에서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한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직접적으로 다윗의 죄를 공격한다. 돌려서 말씀을 전하거나 간접적으로 느끼게 하지 않고 그는 직접적이고 직선적으로 말씀을 선하다는 점에서 결국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와 같은 정신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비록 나단의 설교가 현대 설교와 같이 분석할 수 있는 설교의 전문이 다 기록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특수한 역사적 정황 속에서 전개된 한 개인을 향한 설교이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적 설교의 유일한 모델로 제시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통합적이고 조화를 이루는 설교 형태에 대한 암시를 주기에는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를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통합적 정신을 구현하는 설교 형식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필자가 제시하고 싶은 설교의 방식은 청중을 심도 있게 고려하면서도 본문의 음성을 담아낼 수 있는 성육신적 모델이다. 기본적으로 성육신은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해 허리를 굽히신 사건이다. 성육신의 신비 가운데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가 함께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게 된다. 하늘에 속한 초월적 이야기가 땅으로 침투해 들어와 내재적 사건가 된다. 이렇게 성육신적인 균형 잡힌 만남을 추구하는 설교를 선교학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신학적 문화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학적 문화화란 신학으로 대변되는 본문의 정체성을 어느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구체적인 상황 속에 살아가는 청중을 향한 적실성 있는 메시지를 구체화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찰스 크래프트(Charles Kraft)는 이것을 “역동적 대등 문화 변혁”(dynamic-equivalence trans culturation)의 길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곧 텍스트의 번역 과정에 대한 선교학적이고 커뮤니케이션적인 용어이다. 만약 우리가 한국말 성경을 토고 원주민들의 언어로 번역해 주는 임무를 맡았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자세를 견지하게 될 것인가? 일단 본문이 가지고 있는 원어적 의미에 충실히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더 나아가 청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수신자 지향적으로 본문을 수신자의 언어 속으로 성육화(incarnate)시키게 될 것이다.이면에서 크래프트는 설교자의 임무가 다름 아닌 번역자의 임무임을 역설 한다: “설교자의 임무는....메시지를 바르고 유익하게 해석하여 청자들의 삶에 적용 시키고자 하는 설교자들의 임무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결국 용어가 어떻게 쓰이든지 간에 그 용어가 담고 있는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절대적인 진리를 구체적인 상황 속에 적절히 연관시키는 것이다. 이때 진리의 초문화적인 측면과 대안적 해답을 타협하지 않고 철저한 본문 중심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현재의 문화적 장애들을 넘어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하여 그것이 오늘을 사는 청중들에게 관련성이 있는 메시지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 부흥과 각성 시대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지금도 맹위를 떨치는 선포식 방식의 설교가 진정으로 회중을 고려하는 성육신적 메시지가 되기 위해서 필자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상황적 관점에서 시작하여 규범적 관점을 밝히고 실존적 관점에서 마치는 설교의 방식이다.

정종성 교수는 존 프레임 교수의 제안을 인용하여 이것을 설교의 삼각형 구조라고 칭한다.

첫째로, 상황적 국면을 위해서 언제나 설교를 듣는 회중의 구체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에서부터 설교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청중의 필요에 설교를 정초시키는 과정으로서 이 설교가 어떤 목적 혹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달되어야 하는 지를 분명히 설정하게 해준다.

둘째로 규범적 국면에서는 성경이 그 문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물어보게 된다. 우리의 상황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성경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즉 본문이 밝히고 있는 세상을 전복시킬 수 있는 대안적 음성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설교자의 주관적인 견해를 주님의 말씀으로 전하는 일을 파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석학적으로 건강함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과, 본문의 메시지가 청중에게 산만하게 전달되지 않도록 중심주제와 대지들을 명료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실존적 국면에서는 그 사람이 그 문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묻어야 한다. 설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데 있다. 이면에서 설교는 적용적이어야 한다. 흔히 우리는 설교의 적용을 설교의 끝부분에 간단히 덧붙이면 되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전체 설교가 적용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것이기에 적용이 곧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가 진행 되어져 가면서 적용을 점점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 되어야만 한다. 대지 설교에서 실존적인 국면이 분산되어 드러날 수 있지만, 그 실질적인 클라이맥스는 결론 부분에 도달해서이다. 이전의 실존적인 국면이 잘 다뤄졌다면 결론 부분에서 보다 강력한 선포를 통하여 삶의 변화를 촉구할 수 있게 된다.

정리하면 부흥과 각성 시대의 소중한 유산인 전통인 선포식 설교는 규범적 측면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상황적이고 실존적인 측면을 상대적으로 간과 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말씀의 뜻만 제대로 전하면 회중의 필요에 호소하는 설교를 만들 필요도 없고, 구체적인 적용을 설교자가 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친히 감당하신다는 나이브한 태도로 설교할 수 있다. 상황적 측면과 실존적 측면에 대한 보완이 절실하다. 또한 설교의 논리 전개 방식에 있어서도 귀납적 흐름에서 연역적 흐름으로 진행 나가는 혼합형 같은 것이 선포식 설교의 일방적 태도를 극복할 수 있는 한 제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IV. 결론

이상의 논의들을 통하여 우리는 부흥과 각성 시대의 설교가 현대 설교적 경향에 대하여 어떤 경종을 울려주는지를 살펴보았다. 신설교학의 강력한 태풍 가운데 영향을 받고 있는 현대 설교 사역은 지극히 세속 문화적인 관점을 신학적 반성 없이 수용하고 있다. 이처럼 신학적 관점이 상실된 채 행해지는 세상 문화적 관점의 설교는 기독교 메시지의 본질을 손상시키게 되었기에,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은 부흥과 각성 시대의 설교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죽기까지 재미를 즐기는 오락주의의 수용으로 점차 퇴색되어 가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설교가 회복되어야 한다. 또한 고객은 언제나 옳다는 소비자 중심주의 정신의 수용으로 퇴색되어가는 케리그마 설교의 회복이 시급하다. 마지막으로 최첨단 기술 문명의 수용으로 테크닉에 의존하는 문화를 추종함으로써 점차 퇴색하고 있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설교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렇게 부흥 시대의 정신을 따라 설교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절대적 우선순위이기는 하지만 이 시대에 청중을 변화시키는 설교적 지혜의 모든 것이 아니다. 상황이 끝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상황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채 추구되어지는 설교 갱신은 반쪽짜리 처방일 뿐이다.

참으로 성경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메시지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에 대한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청교도와 부흥 시대의 유산인 선포식 설교는 오늘까지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왔으며, 교회를 세워내는 주류에 속하는 설교 방식이었다. 하지만 급변하는 시대적 환경의 변화는 전통적 선포식 설교가 업그레이드될 필요성을 제안하고 있다. 새 술을 언제나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한다. 전통적 선포식 설교의 본문 중심성과 신설교학의 청중 중심성, 전통적 선포식 설교의 연역적 접근과 신설교학의 귀납적 접근이 퓨전 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아무쪼록 우리의 설교가 본질에 있어서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고, 형식에 있어서 새로운 설교 사역의 장점을 수용하여 성도를 각성시키는 도구로 쓰여 지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시대 가운데 주의 놀라운 부흥을 경험케 허락하시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하는 부흥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는다. 부흥이 없는 날에도 우리는 부흥 시대의 설교자들처럼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서서 관계를 새롭게 만들고, 세상을 깊게 파악하여 이 세상을 위한 메시지의 형식에 마련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을 것이다. 김 남준 목사의 다짐으로 이 논문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부흥이 오지 않아도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한 편의 설교로 수많은 죄인들을 거꾸러뜨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그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칠 때,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축복이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진리와 양심을 따라 가르칠 것입니다. 커다란 감동을 받고 그렇게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 없어도 우리는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도록 촉구할 것입니다....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울면서 그 일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부흥을 주시면 이룰 수 있는 위대한 결과와 그렇게 수고하여서야 얻을 수 있는 적은 성과 사이의 차이 때문에 우리는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다하여 애써도 변하되지 않는 교회와 세상 때문에, 좋으신 주님을 그렇게 초라하게 섬기는 처지 때문에 흐느끼면서 섬길 것입니다. 부흥을 주시도록 기도하면서.....

 

 

 

 

 

 

 

 

 

 

 

 

 

 

 

 

우리 시대를 위한 설교의 방향성 1:

포스트모더니즘 세계를 향한 적실한 설교의 방향성

(Relevant Homiletical Direction to a Postmodern World)

 

 

I. 우리시대의 설교적 정황으로써의 포스트모더니즘 이해의 필요성

 

낯선 타지를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업그레이드 된 최신형 지도(map)의 소중함을 알 것이다. 만약 2006년의 유럽의 도시들을 1960년대의 지도를 가지고 여행하려고 한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기치 못한 상황들로 인하여 여행의 흥은 깨어지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 청중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설교자가 모더니즘의 사고방식이나 형태로 말씀을 설교하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설교의 효력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암초가 될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주의 말씀처럼, 새 시대의 청중을 터치하는 새로운 형태의 말씀 전달의 방식이 요구되고 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라는 정신은 버릴 수 없는 진리의 한 면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동시에 청중의 눈높이에 맞춰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바울의 정신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진리 전달의 또 다른 한 면이다. 바울 자신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아래 있는 자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 된 것을 효과적인 복음사역의 전략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낯선 바울의 모습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울은 선이 굵은 사람이 아닌가? 바울은 왜 그렇게 상황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카멜레온(?)처럼 행동했을까? 그가 분명히 밝히는 이유가 있다.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함이다. 아무쪼록 몇몇 사람이라고 구원코자 함이다(고전 10:19, 22). 오늘 우리는 바울의 정신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 가운데 서 있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이 너무 시대의 정신을 과장해서 엄살을 떠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든지 상관없이 내 전통을 고수하겠다는 자세도 바른 자세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효과적인 말씀사역이 이뤄지면, 연속성 (continuity)과 변화 (change) 양자 모두에 주목해야만 한다. 케런 티에 (Karen Tye)는 월터 브르그만 (Walter Brueggemann)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바른 말씀 사역은 전통과의 연속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동시에 새로운 상황에 적절하고 적실하게 되어야 한다. “교육 (설교-필자 주)은 한편으로 비 적실성 가운데 화석화 되는 경향을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 소실되어져 상대화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연속성과 불연속성 모두에 주목해야만 한다.”

 

이것을 예수님의 한 비유로 설명해 보자.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가장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있다. (보충)그 비유를 많은 사람들이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 와야 할 기독교인들의 청기적인 삶에 대한 교훈으로 이해하고 있다. 말씀에 대한 순수성이나 열정만으로 설교는 완성될 수 없다. 지혜를 가지고 시대를 분별해야만 한다. 그러한 분별을 통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생명의 주를 경험하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시대를 호령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컴퓨터가 생활의 중심에 다가와 있는 시대에 컴맹으로는 도무지 살아남을 수 없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관이 대중매체를 통하여 현대인의 안방까지 침투해 들어온 이 시점에 반문화적인 태도로 말씀을 전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포스트모더니즘 세계를 향한 설교의 진로를 논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포스트모더니즘 마인드가 절대적인 복음 전해야 하는 이 시대의 설교자와 설교 사역에 야기 시키는 도전들을 3가지 살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도전들에 대한 응전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설교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모더니즘 마인드의 죽음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의 출현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포스트 (post)라는 접두사와 근대주의라는 뜻의 “모더니즘”(modernism)이 결합되어 생겨진 합성어이다. 포스트의 의미를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 포스트모더니즘을 바라보는 관점이 상이하겠지만,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간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즉 우리시대의 사상적인 변화의 본질로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모더니즘이라는 말로 대표되던 특정한 생활양식, 사유방식이 수정, 비판되고 나아가 극복, 재구성되는 것을 뜻한다. 이면에서 그것은 모던적 사고에 대한 거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더니즘적 사고의 전제들 아래서 시작되고 있음을 상기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동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의 정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져야만 한다.

 

1. 계몽주의 프로젝트로 “자신감의 문화”를 건설한 모더니즘 마인드

 

‘현재의’ ‘고대의 것이 아닌’이라는 뜻의 형용사인 라틴어 ‘모데르누스’ (modernus)의 영어식 표현인 ‘모던’ (modern)은 한시대가 이전 시대와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일종의 역사적 술어이다. 모더니즘이 구분하고 있는 시대는 신적계시가 진리의 척도로 여기던 전 근대(pre-modern)적인 마인드이다. 모더니즘은 신 중심적인 과거와의 결별을 선언함으로서 과거로부터의 완전한 극복을 지향하고 있다. 어디를 향한 극복인가? 그것은 바로 이성의 절대성을 향해 나아가는 전근대적 사유에 대한 극복이다. 이를 스탠리 그랜츠 (Stanley J. Grenz)는 계몽주의 프로젝트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서구사회에서 모더니즘의 태동을 인본주의적이고 이성적인 삶의 양식이 지배하는 시대인 계몽주의 (Enlightenment)탄생과 나란히 놓고 있다. 1680년에서 1780년 사이에 형성된 계몽주의 사상은 개인의 자아를 세상의 중심에 올려놓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중세에서 모던 세계로 넘어오면서 그전까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으로 절대시 되던 하나님의 자리는 인간 이성으로 대치되었다. 1780넌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이성이라고 주장한다. 칸트의 견해를 따른다면, 모더니즘은 다름 아닌 이성의 시대 (the Age of Reason)이다. 사람들은 진리의 척도를 성경과 전통, 교회의 신학에서 찾기보다는 이성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가운데 모더니즘의 정신이 함축되어져 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담하게 개인의 이성을 절대시하는 데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낙관론적 인본주의(optimistic humanism) 사상에 근거한 이성의 힘에 대한 숭배에 기인한 것이다. 자율적 이성의 능력을 믿던 모더니즘 정신 가운데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게 되었다. 그래서 모더니즘을 가리켜 “자신감의 문화”(a culture of confidence)라고 지칭하는 것은 과히 틀린 표현이 아니다. 모더니즘 시대가 이성의 능력을 절대시함으로서, 인간이 비판적인 정신과 함께 이성 (reason)을 잘 사용하기만 하면, 우주와 자연의 모든 것에 대한 비밀을 캐 낼 수 있다고 믿게 되었고, 자연 과학과 자연법에 대한 해결의 열쇠가 인간의 이성 활용에 있다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계몽주의가 심어준 인간 이성의 자율적인 능력은 진보적인 사고를 믿게 만들었다. 인간성 신뢰라는 낙관주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우주, 자연, 이성이 그 본성과 법칙성에 있어서 조화와 질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 법칙을 찾아내고, 자연 과학적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인간 진보를 약속하고,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게 만든다. 따라서 자연 과학적 지식이 인간의 개인적인 삶과 사회생활의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환상을 품게 만들어 주었다.이점에서 모더니즘의 환상은 인간 이성의 자율적 능력에 근거한 “유토피아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모더니즘 마인드가 우리들의 설교 사역에 끼친 공헌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학은 시대의 정신을 맹신적으로 추종하게 된다. 1970년에 태동한 “신설교학” (New homiletic)의 도전이 생겨지기 전까지 전통적인 설교는 합리적인 논리 증명식의 형태를 말씀 전달의 유일한 방식으로 이해했다. 크레이그 로스칼조(Craig Loscalzo)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현대 설교자들에게 신앙은 부지중에 합리주의와 동의어가 되었다...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단순히 데카르트의 자녀임을 깨닫게 된다.” (For modern pulpits, faith often became unwittingly a synonym for rationalism...we thought we were the children of Abraham but discovered we were merely the children of Descartes). 데카르트의 후예로서 행하는 설교의 모습이 어떤 한지를 로스칼조는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다. 모더니즘의 틀에 각인되어져 있는 설교자들은 말씀을 전할 때, “논리적인 태도로 먼저 전체를 설명하고, 그 다음 요점을 풀이하는 논증적 설교법에 젖어 있다. 모던시대의 설교는 간혹 하나님, 성경, 인생에 대하여 얘기 하며, 그러한 주제들을 현미경 밑에 놓은 표본처럼 다룬다. 합리주의에 젖어든 이러한 설교자들의 정신은 종료적 진실의 대화를 위한 유일한 매개자로서 사실적 지식에 집중하는 것이다.”

 

2.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붕괴 시킨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동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을까? 인간의 능력으로 바벨탑을 쌓으려던 타락한 인생들의 계획이 아스팔트위에 던져진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듯이, 이성을 도구로 하여 건설하고자 했던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붕괴되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한 국가들 간의 전쟁은 이성주의적 낙관론이 허무맹랑한 거짓에 불과하다는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식민지 통치의 종식들을 통하여 억압받는 민족들이 해방을 맞이하면서 독립한 국가와 민족의 독특성과 정체성을 고양시키는 운동이 활발하게 대두되면서 시대는 다원주의적 사고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더욱이 다원주의 사고를 가속화 시킨 것은 인류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적 사고에 익숙해지면서, 모든 가치를 경제로 해석하는 경제 논리에 지배를 받게 되면서 부터이다. 이러한 사고의 추세는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새로운 문화상품이 권위에 우선이 되면서, 점차로 현대의 문화 이론은 획일적인 사고나 문화를 지양하고 문화생활의 다양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여기서 획일적인 절대주의 보다는 다원주의 사고가 팽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들로 인하여 모더니즘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사상과 마인드에 그동안 굳게 지켰던 그들만의 영토를 내어주게 되었다.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서술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때는 1956년도에 위대한 역사가였던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에 의해서였다. “역사가의 종교 이해”라는 책에서 토인비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자포자기, 도피주의, 표류라고 보았으며, 또한 그 시대는 언어, 관습, 종교 등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아무 것이나 무차별 수용하는 초점 없는 혼합주의와 무비판적 관용의 시대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대중적 정신의 승리라고도 표현했다. 그 이후 1960년대는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 모더니티라는 말이 모더니즘에 대한 대안으로 흔히 우리 시대의 급진적인 변화의 핵심을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졌다. 1960년대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반이성적인 사고방식인 포스트모던이즘 사상은 근대의 이성주의적인 사고체계의 붕괴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운동이 본격적으로 예술, 건축, 사상의 영역에 나타나고, 광범위한 주목을 받게 된 시기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이다. 데리다 (Jacques Derrida), 리요타르 (J. Lyotard), 그리고 로티 (Richard Rothy) 같은 학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의 축을 이루는 거물급 학자들이다. 세부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공통점은 전통적 형이상학적 체계인 진리, 주체성, 초월적 이성을 배격하고 그 이성에 기초한 학문성과 문화 일반을 거절한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설교와 관련하여 모더니즘이 합리주의적(post-rational) 방식의 말씀 전달과 동일어로 사용되어졌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탈 합리적인 방식의 말씀 전달과 동의어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더니즘 마인드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 마인드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가져다주는 영향력은 사회 변동이나 혹은 세속 문화의 변화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도 (특히 설교학 영역에서) 중대한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부정적인 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설교 사역을 향한 심각한 도전을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현대 설교를 향해 던지는 심각한 도전장은 무엇인가? 이것을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풀어보기로 하자.

 

III.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적 특징이 현대 설교학에 부여한 도전 과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주요한 특징을 한두 가지 간략한 개념이나 이론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만큼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가지고 있는 사상적이고 문화적 그리고 철학적인 주장들이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 방대한 사상의 실체를 다 서술하고 정리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우리들의 설교 사역과 관련하여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의 대표적인 특징들을 몇 가지로 설명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우리의 설교 사역에 부여한 도전과제는 해체주의적 경향에 대한 극복이다.

해체 (deconstruction)라는 말은 구성 혹은 건설이라는 단어 construction에다 de- 라는 접두사를 혼합하여 만든 신조어로서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을 가장 잘 상징하는 단어이다. 물론 현재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이 신조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천편일률적으로 허무주의적인 파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구조물을 구성 원리로부터 해체한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철저하게 뜯어내는 작업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해체주의가 파괴하려고 했던 것은 근대적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성적 세계관의 잘못된 개념이다. 중세 세계관의 붕괴에 직면한 근대(modernism)이 이성이 중심이 되어 질서의 분열을 극복하려고 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는 근대의 이성적인 구성을 허무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해체주의가 궁극적으로 겨냥한 것은 형이상학인 실재론이다. 이 실재론의 주장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우리의 진리 체계 속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것은 실제로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언어와 사유에 선행하여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언어와 사유를 통해 적절히 파악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해체주의는 언어와 개념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실재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을 거절한다. 더욱이 해체주의는 하나님, 자아, 진리, 목적, 의미, 실재적 세계의 존재의 일체를 부정함으로 세계관을 파괴한다. 이 과정에서 모더니즘이 신봉하던, 실재에 대한 주장과 보편성 그리고 절대성의 개념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상대화 된다.

해체주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한 사람은 자크 데리다이다. 니체의 재해석자로서 데리다는 모더니즘과의 과격한 단절을 지향한 나머지 근대의 주요한 특징 이였던 로고스 중심주의 (logos-centrism)을 배격한다. 이것은 바로 이성과 음성이 담보하는 진리의 현전성을 편애해 온 서양철학의 진리관을 비판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언어의 토대에 존재의 임재 또는 본질을 찾을 수 있다는 가정을 부정하고, 언어가 고정된 실재에 연결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상을 철저히 거절한다.절대적인 규범이 없는 시대는 끝없는 회의와 의심의 해석학만이 존재하는 시대이다.

바른 성경적인 설교는 바로 하나님의 음성 혹은 로고스가 성경 안에 문자화되었다고 믿는 성경관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데리다의 사상에 근간을 이루고 있는 텍스트 이론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서의 성경이라는 책을 해체 시킬 위험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데리다의 관점으로 보면 더 이상 성경 안에는 보편적으로 일반화 되어왔던 체계 (소위 메타 내러티브)는 존재할 수 없고, 성경의 절대성을 지닌 가치와 진리성은 부정되어진다. 모든 진리의 주장들을 의혹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우리가 직면한 의심(doubt)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담대함과 확신을 선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 설교자들 앞에 부과된 중대한 과제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우리의 설교 사역에 부여하는 두 번째 과제는 거대담론의 거절로 터가 무너진 시대적 난국을 극복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설명하는 또 다른 표현은 거대 담론 (Meta-narrative)을 상실한 시대라는 것이다. 터가 무너진 시대이다. 베이드(Veith)는 "반기초주의"라는 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과거의 위대한 지적 체계들(예를 들면 플라토니즘, 기독교, 마르크시즘, 과학)등은 늘 뚜렷한 (합리적 이상, 하나님, 경제학, 경험론적 관찰 등의) 근본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반면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반 토대적이다. 그것은 그와 같은 모든 객관적 기반을 파괴해버리고 아무 근본도 남겨 두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에 접근해보면, ‘거대 담론들’ 특히 계몽으로 이루어진 근대적인 것이 어떻게 허물어 졌는지를 재인식 시켜주는 것이 그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뛰어난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도 동일한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중앙 통제적 내러티브에 대한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거부라는 점”임을 피력하고 있다.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의 일반적인 차이를 보면 이 점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목적 놀이

구상 우연

위계 질서 무질서

중앙화 분산화

선별 조합

 

위의 비교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모더니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통제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지배하고 통제하는데 어떤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터'의 무너짐의 비유는 우리 시대가 공통의 토대와 그 토대가 되는 공통의 담론을 상실한 채 오직 서로 아무런 연결성이 없는 파편화된 다양한 이야기를 추구하는 시대 가운데 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거대담론의 불신으로 정의한 사람은 리요타르(Lyotard)로서, 그에 의하면,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우리의 사회적 언어 게임들-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차용하면- 은 이 게임 속에 표명된 언설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거대 담론들을 더 이상 요청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면, 포스트모던 문화는 더 이상 그 어떤 형태의 합법화 (legitimation)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작 편의주의 (expediency)나 효율성 (performativity)으로 만족한다. 리요타르는 영원하고 보편타당한 거대 담론 대신에 다양한 언어유희가 존재한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거대담론을 고집하는 것이 사람들을 강압하는 억압적인 권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군사 독재정권 하에서 우리가 경험했듯이, 거대담론이 규범화 될 때, 사회와 문화는 전체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되고, 이 거대담론을 동의하지 않는 그룹을 박해하고자 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사회와 문화의 기초인 의사소통에는 거대 담론 같은 선험적 규범이 있어서는 안 되며 또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리요타르는 주장한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대담론의 거절은 하나님의 말씀의 거대 담론을 굳게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전파해야 하는 설교사역을 크게 도전하고 있다. 거대담론을 상실한 기독교는 세속적 담론들 가운데 일부거나 문화의 소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정통적인 기독교가 신봉하는 거대담론은 하나님 나라의 스토리 혹은 왕국 내러티브 (kingdom narrative)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 혹은 왕국의 주제는 성경을 하나로 연결하는 통합적인 주제이다. 한마디로 성경의 내러티브 플롯 (the narrative plot)은 창조되어지고, 타락하고 회복되어지고 마침내 영광스럽게 완성되어지는 하나님나라의 맥락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이 거대담론의 기초 위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선포는 우리가 사는 이 깨어진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쁜 소식되는 것이다. 이 왕국 내러티브는 신자들의 과거의 삶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해하는 한 틀이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이 하나님나라의 거대담론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이 거대담론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설교사역은 성도들을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성경적인 세계관 안에서 생각하고 살아가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우선순위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진리의 주장들을 의혹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우리가 직면한 의심(doubt)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담대함과 확신을 선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 설교자들 앞에 부과된 중대한 과제이다.

그러므로 거대 담론의 상실과 함께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지 못하는 시대를 향하여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어떻게 권력적이지 않으면서도 권위적으로 전할 수 있을지가 우리 시대 설교자들이 풀어야 할 중대한 도전 과제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우리의 설교 사역에 부여한 세 번째 과제는 극단적인 주관적인 진리를 추구하려는 경향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가 해체되고, 거대 담론을 통한 규범적 진리체계나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거절된 시대가 지극히 주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베이드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 모더니즘의 문제점을 인간 이성에만 무비판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을 비판하는 것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다는 그들의 주장에도 심각한 반대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경험론적이고 기술 중심적, 합리주의적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총체적 모더니즘은 곧은 진보, 절대 진리, 이상적 사회 질서의 합리적 계획, 지식과 생산의 표준화에 대한 믿음과 동일시 되어왔다. 계속해서 하비는 말한다.” 분열, 불확정성, 그리고 모든 획일적이라든지 ‘통합적’ (일반적인 어구를 써서 말하면) 논조에 대한 강한 불신 등이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의 뚜렷한 특징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하고 있는 주관적 진리 추구에 대한 경향성을 잘 표현하는 재미있는 야구 심판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세 종류의 심판의 판정은 각각의 시대의 주된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투구를 판정하게 될까?

근대 이전(pre-modern)심판이 말했다. “나는 투구에 따라 정확히 판단하지.”

근대 (modern)시대의 심판은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합니다.”

그러자 포스트모던(postmodern) 시대의 심판은 진정한 자신감에 차서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판단해 주기 전에는 투수의 투구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 예화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객관이 사라지고 주관이 지배하는 세대임을 강조하고 있다. 매일 쏟아지는 광고와 매스컴을 유의해서 살펴보라. 우리시대의 방향성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시대는 막무가내로 자기중심적 성향을 갖가지 형태로 강조하고 있다. 세상은 “네 방식대로 하라”는 소리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시대를 가리켜 나를 강조하는 세대 혹은 내 소유를 강조하는 세대라는 신종어로 지칭하기까지 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권 안에 자기도취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삶의 양식들을 제시할 수 있는 예는 수없이 많다. 현대에 각광받고 있는 심리학적 치료의 영역에서 무엇보다도 중시되는 것은 우리의 권리나 책임보다도 개인의 느낌이나 필요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심리학적 치료의 문화가 강조하는 것은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나의 필요이며,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나의 필요가 충족되었을 때는 행복하고, 결국 그 행복이란 것은 삶의 모든 의미를 좌우한다. 자신을 발견하라, 자신을 표현하라,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라. 그 밖에 무엇이 필요한가?” 개인의 영역 밖에 있는 객관적인 기준보다도 개인의 주관을 더 소중히 여기는 시대의 모습이다.

영화에서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소재는 바로 불의한 세상에 대하여 항거하고 악의 무리들을 무찌르는 개인의 활약상이다. 람보, 제임스 본드, 아놀드 슈왈츠네거, 실베스타 스탤론, 인디아나 존스....이들 모두는 이 시대가 허구로 만들어 낸 우리가 감탄하고 있는 개인들이다. 개인의 주관이 지배하는 시대의 모습이다.

또한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의 경영 방식에도 주관이 강조되는 시대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라는 것이 패스트푸드점의 광고이다 것이다. 이전에는 패스트푸드를 먹으려면 그들의 만들어 놓은 방식을 따라야 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메뉴를 원하든 원치 않던 사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을 골라서 햄버거를 사 먹을 수 있는 시대이다. 양파를 싫어하면 양파 없는 햄버거를, 피클을 원하지 않으면 피클 없는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 객관적인 진리가 사라지고 개인적인 주관이 지배하는 시대의 한 단면이다. 기독교 신앙의 세계 안에서도 이러한 개인의 취향을 강조하는 주관주의가 객관적인 진리 선포를 가로막고 있다. 신앙의 다양성을 찾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유일한 구원의 복음을 타협하는 다원성으로 나아가는 것은 기독교의 복음전파에 있어서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다. 통일성이나 객관성을 외면하는 상대주의 기후가 만연되어져 가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독선적인 태도라고 몰아가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설교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개인의 주관이 과도하게 강조되는 시대에 어떻게 “인생의 유일한 구원자는 주님입니다”라는 다소 편협하고(?) 객관적인 진리를 억압적이지 않으면서도 수용 가능하도록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설교자들에게 부과된 과제이다.

 

IV.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 대한 응전으로서 우리시대 설교의 방향성

 

지금까지 위에서 제시된 도전적 과제들을 통해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가치관이 설교 사역에 있어서 얼마나 위협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위기는 또 다른 기회이다. 토마스 오든의 지적처럼, “이 포스트모던 시대야 말로 교유한 정통 기독교가 회복을 이룰 호기”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우리가 제대로 응전할 수 만 있다면 말이다. 독일 월드컵을 준비하고 있는 축구 감독 아드보카트가 유럽팀과의 평가전에서 이런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얼마나 강한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이 얼마나 위협적인가가 아니라, 이 도전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 응전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청중을 하나님 앞으로 세우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설교학적 지혜는 어떤 것이 있을까? 몇 가지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획일화된 연역적인 접근에서 귀납적인 접근을 병행하여 설교하라.

그동안 우리의 설교의 주류를 주된 방식은 이성 중심의 합리성에 근거한 연역적 접근이었다. 연연적인 접근은 사람들의 이성과 지성에 호소할 목적으로 설교를 위해 선택된 본문을 명제적이고 교리적인 개념으로 바꾸어 전달하는 설교 방식을 따른다. 그래서 연역적인 접근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으로 본문을 변증해 가게 된다. 연역적 접근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과 이에 따른 보다 현대적인 논리전개를 가지고 설명해 보기로 하자.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제 1명제 모든 사람은 죽는다.

제 2명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결론: 그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죽는 다는 결론적인 추론은 제1명제와 제2명제의 논리적인 전개에 의해서 생겨진 것이다. 이것을 보다 현대적인 실례로 제시해 보자

제1명제 모든 빨간 사과는 달다.

제2명제 청송에서 생산된 이 사과는 빨간 사과이다.

결론: 그러므로 이 빨간 사과는 시큼하다.

 

이런 논리전개에서 제1명제는 다른 논리 전개의 전제 조건이 된다. 이러한 전제 조건을 설교의 서두에서 제시하는 연역적 논리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모더니즘적인 범주를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제1명제를 청중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하는 과정이 없다. 만약 청중이 제1명제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논리는 발전될 수 없는 것이다. 모더니즘 시대에서는 이 제1명제가 쉽게 받아들여졌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청중들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혹은 “그것은 당신의 결론이지 나의 결론은 아닙니다.”라고 대응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이미 주지했던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현대인들이 권위주의적인 지식이나 일방적인 전제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연역법은 답을 제시하고 시작하기에 청중의 흥미를 유발시킬 수 없는 긴장감을 창조하지 못하는 엄연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연역법과 정반대의 논리 전개로 구체적인 개인적 경험들로 시작하여 일반적인 명제를 도출해 내는 귀납법이 포스트모더니즘 청중에게 효과적인 설교가 될 가능성이 높다. 회중의 인생 경험과 본문을 동일시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여 성경적인 진리 혹은 원칙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순수한 귀납적 접근의 설교가 많은 준비와 고민을 요구하고, 한국적 청중이 귀납적인 논리보다는 선포적인 메시지를 선호하기 때문에, 귀납법을 연역적인 접근법에 통합하는 방식이 요구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서론을 귀납적으로 사용하고 본론을 연역적으로 구성해 가는 설교의 방식이 유익해 보인다.

 

둘째로, 정보 전달식의 스타일을 탈피하고 대화식 (이야기)식 스타일로 감동을 주는 설교를 하라.

전통적인 설교에서 말씀을 듣는 회중은 뭔가 설교자 보다 모자라거나 무지한 존재들로 여겨졌고 설교의 목적은 이러한 회중의 무지를 깨우쳐주고 계몽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졌다. 성도들이 미처 알지 못한 부분을 깨닫게 하여라. 이것은 전통적인 설교의 경향을 요약하는 집약적 슬로건이다. 이러한 이유로 전통적인 설교에서 설교 준비와 전달과정에 있어서 인지적 측면을 과도하게 의존하는 형태로 나아가게 되었다. 지식 혹은 정보를 주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과연 더 많은 정보가 주어지는 것으로 지적 변화되는가? 이다. 우리는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다. 수없이 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있다. 어느 때 보다도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컴퓨터에 앉아서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지식을 키보드를 누르는 순간 습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보로 지적을 과연 행복한가? 이들 정보로 인하여 지적들이 더 희망적이 되었는가? 이 정보 홍수의 시대의 현대인은 삶의 평안을 구가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정보는 우리의 뇌의 용량을 더 크게 하는데 기여했을지는 몰라도, 사람을 변화시킬 만한 능력은 없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전달 혹은 정보 나열 그 이상의 메시지이다. 마음을 터치하는 감동적인 삶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설교를 필요로 한다. 절대적인 터를 스스로 무너뜨린 현대인들은 마음이 공허하다. 공허를 달래기 위해 돈을 벌어보기도 하고, 쾌락에 탐닉되기도 하고 레저를 즐기기도 하지만, 여전히 허기는 계속되어진다. 이들에게 이 내적인 텅 빔을 채워줄 수 있는 감동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어디서 감동하는가? 나와 다른 이야기, 내가 이상적으로 꿈꾸는 이야기가 현실에서 보여 지고 들려지고 나눠질 때이다. 즉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나눠질 때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청중을 위한 설교는 지식화나 교리화 작업으로 전락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진리가 우리에게 처음 증가되었을 때 그 감동을 그대로를 재현 시키고, 현실화 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은 그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 가슴으로 파고드는 찡함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세상에서 사는 이야기보다 질적으로 월등히 다른 삶의 그림들이 보이고 느껴지고 경험되는 그 곳에 자신의 마음을 내어놓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교회 성장의 방편을 위한 설교가 아니라 영혼의 성숙을 지향하는 설교를 하라.

버트릭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제도적 교회의 성공 스토리를 전하는 사람들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지켜본 증인이다.”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구절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전통적인 설교의 주된 강조점은 주로 제도적 교회의 세 불리기를 위한 방편에 두고 있는 점이다. 숫자적인 성장이 잘못되었다거나 교회 생활을 위한 권면을 적용하는 설교를 해서는 안 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의 논리와 가치가 교회가 걸어가야 하는 진로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기보다는 세속적 목회의 비전이나 눈에 보이는 현격한 수적인 성장이 우선순위가 됨으로써, 말씀사역은 그것에 의해 이념화 되는 쪽으로 고려되고 있는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성장 중심의 안경으로 말씀을 바라봄으로서, 설교가 세속적 성공 신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는 경향성으로 흐르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된다. 성도들은 이와 같은 메시지에 실증을 느끼고 있다. 우리 시대의 청중의 심령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포괄적인 설교의 전망과 구태의연하지 않은 말씀의 적용이 요구되어진다. 그것은 바로 설교자들이 교회 성장에 대한 욕심 보다는 영혼을 살찌우는 성숙메시지를 갈망할 때 이뤄질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게 없어“ 이 시대의 청중들의 입에서 종종 터져 나오는 탄식이다. 기독교가 세상의 성공주의와 다른 것이 없고 오히려 세상보다 더 물질을 요구하고, 힘을 숭상하고, 건물에 애착을 갖고, 양적인 팽창을 사랑하는 태도와 그를 지지하는 설교를 추구하게 될 때 기독교의 측량할 수 없이 위대한 진리는 천박한 구호나 행동 강령 정도로 취급되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말씀으로 효과적으로 섬기기 위해서는 성숙으로 초대하는 설교로의 전환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구태의연하고 본문은 바뀌는데 적용은 언제나 동일한 교회 성장용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고 도전하는 쪽으로 우리의 설교가 나아가야만 한다. 특별히 이 성숙 혹은 성화의 메시지는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의 공유에로 나아가게 만들어야 한다. 거기서 인간의 존재의 지평이 확대되어 더블어사는 삶의 길을 보이고,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는 비전을 보일 때, 자신에게 갇힌 고독한 현대인들에게 기독교의 메시지는 매력 있는 진리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설교 사역이다.

 

넷째로, 양자택일(either-or)식의 접근에서 양자 종합(both-and)의 접근하는 자세로 설교 하라.

설교 사역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청중의 요구나 필요를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는가? 너무나 소중한 질문이다. 그러나 많은 설교자들이 이 질문에 대하여 종합적인 관점을 가지지 못하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식의 양자택일의 자세로 흐르고 있는 점은 참으로 안타깝다. 어는 사람들은 무조건 포스트모더니즘 청중의 기호에 맞는 메시지를 전해야 할 것을 촉구한다. 반대로, 다른 이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아니라 그들에게 요구되는 메시지를 시대의 흐름과 관계없이 전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자세는 설교 사역에 한 면만을 수용하고 다른 면을 거절하게 되는 한계를 낳는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대의 설교자들은 어떤 자세로 설교에 임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이에 대한 해답이 주님의 성육신 모델에 제시되어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신 사건은 너무도 귀중한 설교사역의 자세를 알려준다. 성육신은 우리 설교 사역에 있어서 두 가지 측면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 속에서 설교 사역은 양면성을 견지해 나아가야만 할 것을 촉구한다. 절대 불변의 진리를 전하면서도 청중의 눈높이와 맞추어지고, 수평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인간 존재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는 하나님이 세상에 파송 하신 전령자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동시에 깊은 사랑으로 회중의 지치고 상한 심령을 어루만지며 그들에게 나아가는 목회자이기도 해야 하고, 대안적 세계를 청중의 마음의 화랑에 심어주는 이야기꾼이 되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성육신적 말씀 사역은 우리의 말씀사역을 증언으로 설교자를 증인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증인 (witness)은 참된 권위를 자신이 말씀 안에서 분명히 목도한 것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신적인 측면을 갖게 자지고 동시에 그것을 회중들 속으로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는 점에도 인간적이고 혹은 인격적인 측면을 가지고 말씀을 증언하게 된다. 우리시대에 요구되는 설교는 바로 이 두 요소가 통합적으로 드러나는 조화 균형의 확보된 메시지이다.

 

V. 결론

 

지금까지 현대 설교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 마인드의 도전과 설교학적인 바람직한 응전의 자세가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비록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이 우리의 설교 사역을 가로막는 많은 문제들을 야기 시키고 있지만, 우리가 시대를 밝히 분별하고 하늘의 지혜를 따라 말씀을 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직면한 이 도전은 복음을 보다 분명히 전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서 작용하게 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정신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은 절대가 무너진 자리에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허망한 것들을 삶의 의미로 추구하고 있다. 롱페로우 앤더슨이 지은 “디즈니 속의 복음”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다.

“몇 년 전, 한 뛰어난 화폐 위조자가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자신이 이십 달러짜리 지폐를 완벽하게 위조하는데 성공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곧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조 기술에 대해 너무나 자신만만했기 때문에 자신이 위조한 지폐와 그 위조지폐의 원본이 되는 지폐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말해 보라고 요구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 어떤 차이도 발견할 수 없었는데, 바로 그게 문제였지. 당신은 딱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어. 당신이 위조한 지폐의 원본 지폐가 위조 지폐였거든!”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이와 같은 비극을 맞이하지 않은가? 위조된 것, 허망한 것, 대안이 될 수 없는 것, 진리와 맞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들의 희망과 생의 가치를 그것을 위해 투자하고 있고 있다. 그러므로 말씀 사역자로 부름 받은 우리는 이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참된 희망의 실체인 절대적인 진리를 전달해 주어야 한다. 저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한다. 이것은 물러설 수 없는 설교자들의 사명이다. 이일에 물러서게 된다면, 마지막 날에 우리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희망의 메시지, 이 절대적인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과 태도의 문제이다. 더 이상 억압적이거나 우월적 자세로 서 있는 모더니즘 스타일의 설교 방식으로는 안 된다. 오직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이 일들을 감당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경험한 바이지만, 상대를 설득하는데 결정적인 키는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 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자세로 그 메시지를 주는가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기독교의 절대성과 유일성에 관련된 메시지가 이 시대가 추구하는 경향과 같은 맥을 형성하지 않는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메시지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이 시대의 청중을 고려한 메시지를 전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마음을 이 거짓된 세상으로부터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현대인을 주님의 마음으로 환대(hospitality)할 수 있다면 그들은 분명히 돌아온 탕자처럼 감격할 것이다. 변화의 조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교회에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진리 혹은 설교 말씀에 대한 자신감 (confidence)을 회복하는 일이다.

Abstract

The aim of this paper is to suggest relevant homiletical direction to a postmodrern world. As theologian Diogenes Allen observes, our intellectual culture is at a major turning point. The foundations of the modern world are collapsing, and we are entering a post-modern world. If his judge is right, whatever our point of view about the postmodern era, we, as Christian ministers, cannot avoid the influence of postmodern mind. Thus, our crucial question to be raised is to find the way of preaching to maintaining the biblical message that has absolute authority while investigating fresh means of how to communicate Gods message. In order to answer this primary question, chapter II briefly explores the modern mind which will be a prerequisite condition to understand postmodern thinking. Chapter III examines the major characteristics of the postmodern era and its influence for new homiletical approaches. Finally, chapter IV focuses on the direction of preaching as challenge to postmodern thinking. Also in this chapter, special emphasis lies in the alternative directions of the ministry of the Word for our contemporary age.

 

우리 시대를 위한 설교의 방향성 2: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비전을 추구하는 창조적인 말씀 사역의 길

 

어는 사람의 멋진 표현처럼, 현대는 “미소 띤 허무주의” 정신이 주인 노릇하는 시대이다. “미소”와 “허무”라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단어들의 합성어로 정의되는 현대는 아이러니와 역설로 가득 찬 모순적 세상이다.

우리는 지금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영화 제목이 암시하듯, 명품족의 고상한 외모를 드러내면서도 내면적 공허를 경험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지금 단 1분도 재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게임과 오락에 중독되어 있으면서도 권태를 맛보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지금 역사 이래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문명의 이기와 풍요를 구가하면서도 심령 깊이 느껴지는 허기를 달래야 하는 공허한 몸짓으로 살아가고 있다. 수년 동안의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맞이하게 된 한국 사회는 필자에게 너무나 커다란 충격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땅으로 변해 있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허무의 끝자락에서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자살에 대한 소식이었다. 그것도 일가족 함께 죽음을 선택하는 집단 자살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다. 매스컴이 규명하고 있는 대부분의 자살의 원인은 실직이다. 생계의 수단이 되었던 삶의 터전인 직장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인지를 모르는바 아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빈곤의 시대에도 꿋꿋하게 견뎌 왔는데, 잠시 만나는 상대적 빈곤감 혹은 박탈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포기해야만 했을까? 세상이 왜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 그 원인이 전적으로 환경에 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필자가 이런 슬픈 뉴스를 들을 때 마다 던지게 되는 가슴 아픈 질문들이다. 어둡고 눈물 나는 환경은 모든 사람들에게 견디기 힘든 현실인 것이 분명하지만, 환경이 사람을 자살로 인도해 가는 극단적 허무의 주범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보다 중대한 원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잃어버린 꿈으로 인한 삶에 대한 비전 상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의 한복판에 몰아닥친 한파로 인하여 삶의 의미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서 비극이 찾아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졸업”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벤자민은 그의 어머니보다도 더 나이든 매력적인 여인 로빈스의 아내와 성관계를 갖는다. 침대에서 몇 주를 보내면서 벤자민은 그녀를 더 깊이 알고자 한다. 그가 대화를 시작한다. 우리 미술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기로 하죠. 그녀가 정색을 하고 싫다고 한다. 아랑곳하지 않고 벤자민은 계속 미술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고집한다. 마지못해 몇 마디의 대화가 진행되다가 끝내 대화가 중단되어진다. 그녀가 미술에 대해 흥미가 없음을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벤자민이 “당신은 어디에서 남편을 만났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화제를 돌린다. 그녀는 “대학에서요...그는 의과대학생이었고, 나는 그와 사귀는 과정에서 임신했지요. 그 때가 대학이 학년이었는데 우리는 마침내 결혼 했습니다.” 벤자민은 “그 때 전공은 무엇이었나요?” 묻는다. 그녀는 “미술이었죠”라고 대답한다.

꿈을 상실한 후에 무미건조한 권태 앞에서 탈출하고자 낯선 이방 청년과 불륜을 저지르는 여인의 삶은 미소 띤 허무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인간은 환경이 어두워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비전을 상실했기 때문에 절망하게 되는 존재라는 것이 이 영화가 던져주는 자극적인 메시지 가운데 하나이다. 비전을 잃은 모든 사람들은 생을 포기 하든지 서서히 생을 포기해 가게 된다.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과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비전을 구현하는 설교를 추구해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허망한 세상 나라의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제시하는 비전의 책이다. 성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광야에서도 노래하게 만드는 책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절망의 환경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희망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터가 무너진 시대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꿈을 제시하라고 우리를 설교자들로 세워주셨다. 세상 그 어디에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진정한 희망은 없고 오로지 허상의 그림자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세상에 희망의 실체를 전달하는 사역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설교자를 부르신 것이다. 우리 시대를 위한 설교자의 사명을 마치 삼상 17장의 골리앗의 도전 앞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윗이 감당했던 역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철옹성과 같아 보이는 거대한 벽 앞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와 삶으로 드러내주었던 설교자의 모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현대 설교 사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희미해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제가 선포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제시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김운용 교수는 이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신학계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했지만, 강단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는 깜빡거리는 희미한 불로 남아 있다. 여전히 반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주의 기도를 암송하지만 그 정확한 뜻과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읊조리고 있고, 별다른 감동이나 기대, 기다림도 없이 반복된다. 하나님 나라와 관계된 언어들과 하나님 목적에 대한 넘치는 경이감은 이미 상실 되었다. 이러한 현상과 함께 설교는 대신 늘 과거적인 사건에 얽매여 있게 된다. 버트릭은 이런 현상을, 오늘날의 설교는 마치 어떤 강박관념에 묶여 있듯이 ‘옛날 옛적에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인 성경의 역사’에 묶여 있는 상황으로 묘사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이 펼쳐 가시는 현재적인 사건이나 미래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감격이나 흥분을 잃어버린 채, 오직 과거의 사건에 집요하게 고착되어 있다. 그래서 오늘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현재적 역사하심이나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사건에 대해서 별로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이번 호의 주된 관심은 바로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써 그동안 희미해졌던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드러내는 설교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구체적으로 설교의 방향성을 제시하는데 있다. 즉 절망과 허무로 대변되는 세상 나라의 가치관을 도전하고, 허무의 몸짓으로 휘정거리고 있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허무와 절망의 벽을 뛰어넘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 혹은 소망을 제시하는 성경적인 설교의 정신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측면

복음서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 그리고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 나라’라는 표현은 113회 사용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72회가 예수 자신의 말씀 가운데 쓰여 지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 정초된 가르침과 선포사역에 집중하셨는지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가 다양한 사역을 이 땅위에서 펼치지만 궁극적으로 염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이다. 이점에서 설교자들이 수없이 많은 말씀을 다른 주제와 제목을 가지고 전파하고 가르치지만 그 모든 설교 사역에 초점에는 하나님 나라가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의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위에 정초되어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신학의 중심 이슈로 급부상했던 하나님의 나라의 신학의 공헌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단순히 미래에 죽어서 가게 될 피안의 장소로써의 천당으로 제한하는 좁은 이해를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장소의 영역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국한 되어서는 안 되는 통치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이 펼치시는 왕적 통치가 될 때, 이 주제는 구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전 성경의 중심 주제라는 점을 알게 된다. 비록 구약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된 하나님 나라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개념인, ‘하나님의 오심’, ‘주의 날’, ‘하나님의 왕권’은 풍성하게 소개되어져 있다. 천당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견해와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는 지역적이고 환경적인 나라 개념을 넘어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 즉, 왕적인 권세와 능력이 행사되는 모든 영역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들이 죽어 가게 될 다음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실체가 아니라, 주님의 통치를 받는 이 세상에서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실체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 국면뿐만 아니라 현재적인 국면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다.”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자신이 기적을 베풀게 되는 사역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설교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설교의 주제로 선포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단지 미래적 천국에 대한 소망의 언어를 제시하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고, 시공적인 개념을 넘어서는 현재적인 사건과 현상을 지향하는 말씀 선포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세윤 교수는 하나님 나라 선포가 주는 두 가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는데, 첫째는 하나님 나라는 역동적인 의미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려면 하나님 나라의 현장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의 백성을 전제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통치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사단의 뜻을 대치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위의 결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아담적 숙명이 전적으로 뒤 엎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담적인 숙명이 전적으로 뒤집어지는 것은 죄용서와 인간 자원 부족의 결핍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선포와 사역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개입하심의 사건이다. 우리는 주님이 역사 가운데 개입하실 때 마다 일대 변혁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을 목도 한다. 세상의 가치관과 운명이 뒤집혀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변혁적 사건은 교회의 말씀 선포로 이 미소 띤 허무주의 시대의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음성이 된다. 하나님 나라 복음과 비전은 단순히 세상 가운데 있는 수많은 문화의 소리나 다양한 담론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데 만족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곳에는 세상/사탄의 나라가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생들을 속박하고 지배하는 악의 통치를 종결하게 하여 새로운 통치 시대를 열게 된다. 그런 삶을 도전하고 마침내 그런 도전을 받아들여 살아가도록 만들어 놓는다. 말씀의 사역자로서 우리들이 품게 되는 비전이 있다면 그것은 세속적인 가치 체계에 도전하는 하나님 나라에 정초된 말씀 선포와 가르침을 통해 성도들을 사탄이 유혹하는 거짓된 삶의 길을 물리치게 하는 말씀의 사건화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 기독교의 복음이 이 시대의 현대인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을 분명히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구현하는 설교의 본질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비전을 추구하는 말씀 사역의 진로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점검해야 할 사항은 우리의 말씀사역에 본질이 엇인지를 분명히 규명하는 일이다. 설교의 본질에 대한 규명 없이 형태적인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것은 말씀 사역의 존재론적인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만다. 전통적인 설교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등장하는 현대의 신설교학 (new homiletic)의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설교의 본질에 대한 심도 있는 신학적 반성 없이 제시되는 현대 청중의 귀를 사로잡는 효력 있는 실용적 방법론의 추구는 설교가 무엇이고 설교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상실한 채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과도하게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윌리암 윌리몬은 이러한 설교적 경향의 심각성에 대하여 우려석인 목소리로 개탄하고 있다:

 

"오늘날의 설교학은 테크닉, 이미지, 이야기.. 관한 논의에 관심을 지녀왔고, 이 설교를 통해 어떤 종류의 사람들로 형성되어지는가 라는 정치적인 질문들에 관해서는 거의 어떠한 관심도 가져오지 않았다. 우리는 설교자의 역할이 청중에게 감동을 주는 데 있다고 가정해버린다. 은혜를 받았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말이다. 아! 미학적인 기술이 교회 설교의 정치적 목회적 기능을 대신해 버리고 있다."

 

후에 논의 하겠지만 윌리몬의 지적은 일방적인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 시대의 말씀 사역자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권고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설교가 기술적인 면과 오락 혹은 즐김의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으나, 형태의 새로움에 의존하는 말씀 사역을 논하게 될 때, 교인들의 즐거움에 호소하는 태도로 나아가게 되어 궁극적으로 진리를 전하기를 포기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심각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설교사역의 본질을 신학적으로 규명해 보는 것이다. 오늘 주제와 관련하여 이야기 한다면 설교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의 강력한 임재를 위한 방편이 되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신학의 도전은 말씀을 통해 청중의 급진적인 변화를 요청한다는 점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신학에 정초 되어진 말씀 사역은 두 세계, 즉 세속적인 가치관, 거짓된 세계관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세계관의 불가피한 충돌을 야기 시킨다. 이 충돌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제시하는 희망적이고 최종적인 가치관은 이 세상 나라가 제시하는 절망적이고 일시적인 가치를 극복하고 정복하게 만든다. 이렇게 대안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변혁성에 근거한 선포는 현 세상을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대안적인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입각한 설교 사역은 우리를 둘러싼 세속적 가치관의 실재를 폭로하고, 그 세계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의 찾아옴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설교자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입술로 신앙고백을 암송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들의 마음은 온통 일주일 동안 부딪친 세상의 가치관에 세뇌 되고, 세상의 거짓된 이념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설교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통해 드러난 참된 삶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독려하는데 있다. 이 과정에서 특별히 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의 중심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인생들이 세상을 통해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듣고 보고, 수용하고, 부러워했던 세계가 거짓된 세계요, 진실로 참된 세계는 바로 성경이 묘사하는 세계임을 알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제시하는 설교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 청중을 이 비전에 응답하게 함으로써, 왜곡된 세속적인 가치관을 붕괴시키는 현실 변혁적인 설교 사역이 가능케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중심이 되는 말씀 사역은 복음 전파에 대한 본질로서 두 가지를 근본적인 요소로 전제하도록 한다.

첫째는 우리가 이 세속적인 세계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이 세계는 우리의 설교를 죄와 타락의 요소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여기서 인생들의 모순상태를 알게 함으로서, 효과적인 말씀 사역을 위한 말씀 사역에 참여한 이들의 필요 (need)를 끄집어내도록 한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아직" 의 긴장 가운데 있는 인생들의 모순 상태는 4가지로 요약한다.

인간과 자연세계와의 모순 상태, 인간과 동료인간과의 모순 상태, 인간의 내적인 자기 모순 상태,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과 모순상태 가운데 설교에 적합한 부분을 제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 요소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인간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들어오도록 초대함으로써, 이 모순적인 상황을 총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길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온전하고 전인적인 회복을 인간에게 가져 온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이 세속을 끌고 가는 힘과 정신, 가치구조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빛 가운데서 평가 하도록 만든다. 이 세속 세계의 허상을 복음의 실상으로 밝히고, 대안적인 하나님 나라의 변혁의 길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비전이 중심에 놓여진 말씀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시각을 세상 가운데 제시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비전을 구현하는 삼 단계 설교 프로세스

설교사역의 본질에 대한 우선성은 설교 사역의 형식과 방법론도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두 부분을 대립적인 시각 안에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상호 충족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관점 안에서 양자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설교를 어느 그릇에 담느냐 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것이 내용물이 무엇인가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위에서 규명한 설교의 본질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를 비전을 구현하는 삼 단계 설교 프로세스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이 세상 나라의 지배권 아래 살아가는 청중의 어두움의 실재로서 갈등의 요소와 그 대안으로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의 선포 (변혁의 복음 선포),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위한 결단 (변혁적 복음이 요구하는 삶의 결단)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세상나라의 안에 사는 갈등의 요소를 제시하는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전파할 때, 그 복음은 진공 상태에 그냥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교회의 전파와 가르침은 언제나 사람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 면에서 말씀사역은 상황적 국면을 가져야하는 것이다. 복음의 희망이 진정한 희망으로 청중들에게 주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 나라 안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어두운 실체를 깊이 드러내 주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타락적 요소의 실재를 철저하게 규명해 가는 일 없이 대안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나 대안으로서 복음을 제시하게 될 때,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값싼 은혜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밝은 빛이 심령 안에 분명히 비춰지기 위해서는 청중의 어두움의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야 한다. 로마서가 바로 이러한 구조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찬란한 빛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를 선언하는 자리는 바로 인간의 죄의 심각성이 심도 있게 토론되어진 직후이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인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설교 사역은 새 창조, 새 공동체, 새로운 가치, 새로운 질서의 이미지들을 부여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님의 현존하시는 능력 안에서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복음 혹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부분이다. 이면에서 말씀 사역을 반드시 성경이 무엇이라고 증언하고 있는지에 대한 규범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규범적 국면을 규명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설교자의 임무가 단순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개념 전달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 상징의 기능과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청중을 설득하는 효력을 풍성하게 드러내는 것임을 명심하는 것이다. 즉 청중이 가지고 있는 사상 바꾸기만이 아니라 이미지 바꾸기가 요구되는 것이다. 거기서 본문은 청중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된다. 예를 들어 요한 계시록 11장에 변혁적 복음의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증인의 능력이 바로 세속적인 관점에서 추구하는 능력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세속적 능력의 그림들을 대조를 이루는 성경이 말하는 능력의 그림을 고난과 희생의 이미지 중심으로 스케치 할 수 있다. 두 증인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단계는 변혁의 복음을 결단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복음을 삶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마지막 남겨진 설교자의 임무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현장화 시키는 길이 될 것이다. 이 부분은 흔히 말하는 적용의 부분으로서 청중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도전하는 부분이다. 과연 하나님 나라의 빛 아래서 오늘 설교 말씀을 어떻게 실천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아래 주어진 아주 포괄적인 영역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개인으로서 나는 개인의 영역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개인으로서 나는 사회의 영역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공동체로서 우리는 개인의 영역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공동체로서 우리는 사회의 영역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면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설교는 반드시 실존적인 측면을 가져야만 한다. 설교가 들려지기 전과 설교가 들려지고 난 후에 청중의 어떤 부분에서 변화되기를 원하는지를 늘 염두 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위의 계시록 11장으로 설명한다면, 규범적 측면에서 제시한 십자가의 희생을 따라가는 능력의 길을 어떻게 개인의 삶, 가정의 삶, 교회의 삶, 그리고 사회의 삶에서 구체화시켜야 하는지를 제시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위의 모든 논의를 정리하면, 미소 띤 허무주의 가치관이 진리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우리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우리의 모순적인 문제들에 해답과 희망 그리고 대안이 되는 설교 사역을 필요로 한다. 그저 아무 목적도 방향도 없이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뚜렷한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비전 안에서 어두운 삶을 뚫고 오시는 주님 (복음)의 희망을 보여주는 설교 사역이 요구되어진다.

 

 

 

 

우리 시대를 위한 설교의 예제

설교 말씀: 사도행전 5:17-42

설교 제목: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부재 같은 현실을 만날 때..

 

 

문제 제기: 갈등의 포인트 or 문제제기

상반되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인한 의문점 제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때로 기적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와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신이 납니다. 역시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콧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기도 응답해 주신 내용들을 가득 적어 감사 헌금을 드리기도 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만드신 하나님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불러도 침묵하시는 듯 보이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낙담하게 됩니다. 기도의 응답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탄식하게 됩니다. 애가를 부르게 됩니다. 급기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못마땅해 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제가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면 다름 아닌 두 상반되는 모습으로 공존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됩니다. 목숨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역사와 예측을 뛰어넘는 인물을 히튼 카드로 꺼내셔서 그들을 구해주십니다. 강력한 임재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참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 듯 보였던 사도들이 다시 심한 고문을 당하는 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부재하시는 듯 느껴지게 만드는 현실을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상반되는 두 장면을 보면서 던지게 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이전의 강력한 능력을 보이시며 사도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들을 모진 고난과 능욕 받음의 자리로 내 몰아세우시는 것일까요?. 이 시간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뤄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서 처절한 부재 같은 현실을 만날 때.....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 편의상 기적적인 구출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의 모습을 먼저 다루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부재를 만날 때의 자세를 다음으로 다루겠습니다. 물론 제 강조점은 후자에 있습니다. 자 먼저 첫 번째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I. 기적적인 구출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의 모습

 

*두 차례의 기적적인 구출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17절에 보시면 복음을 전하다 사도들이 옥에 갇히게 됩니다. 적대자들이 사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더 교회가운데 위기가 몰아닥친 것입니다. 앞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교회가 내적으로 위기를 만나게 되었고, 여기서는 외적인 박해의 상황을 다시 큰 시련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하십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내시는 방식”으로 역사의 현장에 개입하십니다. 19절에 보시면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끌어냅니다. 사도들이 다시 성전에 서서 복음을 전합니다. 첫 번째 위기는 모면했지만,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세찬 공격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풀려난 그 다음날 새벽에 대제사장을 위시한 대적자들이 사도들이 도주한 것을 알아 되어 다시 잡아들입니다. 사도들을 심문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크게 대노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더 사도들을 없애고자 합니다.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어디에서 탈출구가 없어 보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들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등장하십니다. 이번에는 “주의 사자”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전혀 사도들을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 하나를 이 현장에 급파하십니다. 히든카드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바울의 스승이었던 바리새인 가말리엘입니다. 그가 드다와 갈릴리의 유다의 실례를 거론하면서, 사도들이 전하는 사상과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지만, 하나님께로 났으면 사도들을 무너뜨릴 수 없고 도리어 사도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대적하는 꼴이 될 것이라고 변론합니다. 그의 논증은 정확히 먹혀들어갔고 사도들은 죽음을 모면하게 됩니다. 두 차례에 걸쳐서 하나님은 처음에는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또 한 번은 주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사도들의 생명을 지키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도구들을 다 동원하여 구원하시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출이 주는 위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일하시고 계신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급히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사도들의 목숨을 건지시는 것일까요? 20절이 그 해답입니다.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아직 사도들이 감당해야 할 일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명의 말씀을 기다리는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대한 사명이 있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들었던 말처럼, 사명이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경우에도 지키십니다. 사명을 이루기까지 그 분은 어떤 방법을 동원하셔서라도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위협의 순간에도 사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담대함이요 또한 우리의 담대함입니다. 5장 29절에 보십시오. 사도들을 향해 왜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했는데 명령을 거절했는냐 했을 때, 베드로와 사도들의 대답이 이것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명으로 사는 사람이 세상을 향하여 이렇게 당당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담대할 수 있습니다. 누구 앞에서도 비굴하게 고개 숙이지 않습니다. 사명을 가진 자는 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으로 살 때만이 우리는 위협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진정으로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은 어떻게 사명으로 살 것인가로 모아져야 합니다. 본문에서 사명으로 사는 삶은 생명의 말씀을 전하며 사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충만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 내는 일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사명으로 산다는 것은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생명으로 산다는 것은 생존으로 사는 것을 넘어서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존 이상으로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생존하는 것 너머로 나아가 생명을 살아내고자 하면 하나님은 임하실 것입니다. 필요하면 초자연적인 역사를 이루셔서라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아니 생존을 넘어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데도 초자연적인 역사나 기적이 없으시다고 항의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생존을 넘어 생명으로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는 그것 자체가 이미 초자연적인 간섭과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라고요. 우리들은 원래 생존 이상을 꿈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것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사는 것 이상을 원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생들이 얼마나 끈질기게 생존을 고집하고 사는지를 알 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향한 꿈틀거림의 역사/그 변화가 얼마나 대단한 기적인지를 알게 됩니다.

 

II. 납득하기 힘든 부재 같은 상황:

 

*부재 같은 상황에 대한 묘사와 납득의 어려움:

이제 제가 진짜 강조 싶은 부분은 두 번째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의 현장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쉽게 “할렐루야” “아멘”을 연발하며 감격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대부분의 신자들이 기대하는 바가 바로 이런 능력 있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개입으로 악의 세력들이 사도들을 손끝하나 건들지 못하였다.”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간절히 기대하는 바입니다만 오늘 본문은 오히려 우리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40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가말리엘의 변론에 설득된 사람들이 사도들을 순순히 풀어줄 것 같았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냥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채찍질 하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금하며 놓아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채찍질은 단순히 겁주기 위해 몇 대 때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40에 하나 감하는 매를 맞았다는 뜻입니다. 하워드 마샬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이 40에 하나 감하는 매를 맞으면 많은 경우에 죽거나, 거의 반죽은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이 주장이 정확하다면, 채찍질 당했다는 것은 사도들에게 있어서 잠깐 동안 죽음의 시간을 경험되어지는 것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상황을 재현해 본다면 그들은 이 채찍을 맞으면서 수없이 실신하고 다시 깨어나는 과정을 반복했을 것입니다. 그 후유증은 어떨까요? 조그마한 상처만 생겨도 그 후유증은 오래 갑니다. 저도 이번에 몇 차례 병명을 밝힐 수 없는 병에 걸려서 수술했는데, 별거 아닌 수술인데도 몇 주 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사도들이 당한 고통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거의 생명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의 고문을 당한 것입니다. 이 매를 맞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고문의 흔적을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궂은 날이 되면 온몸이 쑤시는 현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 다시 이런 생각을 해보자고요. 공회 앞으로 끌려가면서 사도들은 과연 하나님을 향해 어떤 기대를 가졌을까요? 그 분에게 무슨 기도를 드렸을 까요? 혹 이전에 보여주셨던 또 한 번의 능력 있는 임재를 구하지 않았을까요? 만약 저 같으면 당연히 또 한 번의 기적적인 방식의 보호를 원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천사를 보내주십시오.” 만약 그 일이 불가능하다면, “주님! 이 고문의 현실을 피할 수 있게 해 줄 또 한명의 가말리엘을 보내주옵소서.” 그런데 이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예상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어디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시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어떤 초자연적인 기적도, 예측을 뛰어넘는 히든카드도 없습니다.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 맞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천둥소리도 없었고, “속히 멈추시오”라고 소리치는 힘 있는 자의 목소리도 없었습니다. 거의 초죽음의 상태에 이를 때까지 그들은 이렇다 할 만한 아무런 응답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온몸으로 처절한 고통을 맞이하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우리 모두가 크게 좌절하고 낙담하게 되는 지점입니다.

 

구체적인 실례 1)

월터스토프라는 사람은 기독교 철학 분야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학자요 경건한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찾아온 부재 같은 현실 속에서 그 역시 절규합니다. 그의 아들 에릭이 20살 때 산 등정을 하다가 목숨을 잃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 다음해까지의 1년 동안 자신의 마음 안에 일어난 솔직한 심정을 그의 책 “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라는 책에서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의 절망의 정점은 여기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어느 날 이렇게 절규합니다. 아들이 너무 그리워서 흐느끼면서 “하나님 차라리 천국과 제 아들을 바꾸라면 천국을 포기하고라도 제 아들을 살려내고 싶습니다.” 부재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구체적인 실례 2)

불의의 교통사고로 가족 가운데 세 사람의 여성-딸과 아내와 어머니를 잃어버린 제럴드 싯저는 사고가 나기 전날 에도 내가 가족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강력한 임재를 구했는데)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외면하셨습니까? 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실례 3)

우리도 하나님께 제일 섭섭한 부분이 이것입니다. 왜 그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 것일까? 내 자녀가 대학에 낙방할 때 하나님은 뭐하셨습니까? 남편이 실직할 때, 왜 하나님은 막아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내 가정이 깨어질 때, 왜 저의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으셨나요?

 

부재 같은 현실을 지나가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와 당부

그렇다면 부재 같은 현실 가운데서 신음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어 보입니다.

첫째, 40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부재 같아 보이는 현실도 하나님의 또 다른 하나님의 임재의 표현임을 명심케 하십니다. 채찍이 맞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들이 구출됩니다. 공회에서 살아서 걸어 나옵니다. 적대자들이 사도들에게 고통을 주기는 했지만 생명을 건들지는 못하고 풀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때로 하나님은 불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불속에서 건져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기적적인 방식으로 구출해주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일상의 방식이나 더 나아가 부재 같아 보이는 방식으로도 우리를 구해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도하심임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방식으로 인도 하실지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다니엘의 세친구가 했던 고백처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능히 풀무에 건지실 것을 믿는 것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믿음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신앙적 다짐입니다. 그 분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시든지 그 분은 신뢰할 만한 분이심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재 같은 현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진하게 만나야 하나님 없이 사는 진짜 부재를 만난 사람들을 주님께 이끌 수 있습니다. 41-42절에 보시면 부재 같은 현실을 잠시 만난 후에 다시 그들을 건져주신 하나님을 진하게 경험합니다. 그 경험을 통하여 사도들이 한층 더 성숙해 집니다. 41절에 보시면 그 상황을 아주 다르게 해석하는 관점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 이름으로 능욕 받은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합니다. 능욕 받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혜택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능욕의 자리에 이를 수 있는 복을 허락하심을 감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치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감사했던 것과 같습니다. 42절에서는 부재 같은 상황 속에서 만난 진한 주님을 마음에 품고 그들은 절뚝거리면서 가는 곳곳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놀라운 성숙한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 없는 처절한 부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사역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증거 제시

 

제가 추측해 보건데 그들의 복음 전도 사역은 이전보다도 더 강력한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큰 충격과 놀라움으로 반응했을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적적인 구출이나 현격한 승리의 모습으로 인하여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을 세상에서 보여준다고 해도 세상은 시기나 부러움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들의 마음을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자 보세요!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었는데도 세상이 전혀 미동치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으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승리의 현실을 부러워할 수 있어도 그것으로는 그들의 생애를 위탁하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삶의 길을 묻지는 않습니다. 오직 세상이 변화되는 길은 세상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말하면 부재 같은 현실 속에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세상이 만나게 되었을 때, 세상은 갈 길을 물어오게 됩니다. 그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바로 6장 1절입니다. 5장이 끝나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능욕의 자리에서 기뻐할 수 있는 사도들이 있었기에 위대한 변화의 역사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처음으로 그저 신자나 예수님 믿는 자들이 많아졌다고 말하지 않고, 제자가 더 많아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지 교회 안에 숫자가 증가했다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도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말합니다. 앞에는 이런 표현이 없습니다. 6장에서 처음으로 이런 표현이 쓰이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지요. 부재 같은 현실 속에서 진하게 만난 하나님으로 인하여 변화된 사도들이 하나님 없는 실질적인 부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설득한 것으로 가능했습니다.

 

결국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내신 부재 같은 현실은 우리를 향한 엄청난 배려인 셈입니다.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고 신적인 관점으로 현실을 보게 하고, 우리를 세상의 치유자로 세우시기 위한 배려인 셈입니다. 아무에게나 이 길을 걷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 과정을 지나가게 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재 같은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기적의 방식과 축복의 방식으로만 상대해 주십니다. 주님을 믿지만 그 사람들은 아직 손님의 수준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들을 진정한 파트너요 참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라고 판단하실 때, 부재같이 느껴지는 현실을 통하여 우리를 빚으시고, 그렇게 빚어진 우리들을 통하여 실제적인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부재의 땅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하나님 안에 있지만 부재 같은 현실로 인하여 절망하는 사람들에게로 파송하시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적용을 위한 실존의 터치:

a. 인생 여정을 통해 만나게 하는 부재 같은 현실로 인한 성숙한 모습들 제시

b. 인생 여정을 통해 만나게 하는 부재 같은 현실로 인한 치유자의 모습들 제시.

 

결론적인 마무리:

이것이 바로 사도들을 능욕을 받는 길로 인도하신 이유이고,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오게 하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그 암담한 현실들을 지나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실제적인 하나님 없는 부재의 현실을 사는 사람들을 어르마지는 역사의 통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만나고 있는 부재 같이 느껴지는 현실 속에서 우리를 여전히 바라보고 계시며, 그 부재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를 빚으시고 세상을 섬기는 사람으로 세우실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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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조직신학/구원론 관리자 2014.02.18 3159
20 장로교회란? 관리자 2014.02.18 3418
19 예식서 관리자 2014.02.18 3586
18 예배학 관리자 2014.02.18 3205
17 영적 리더십 관리자 2014.02.18 5030
16 역사신학 관리자 2014.02.18 3196
15 개혁주의와 언약신학 관리자 2014.02.18 3255
14 성찬과 성례 관리자 2014.02.18 4869
13 성령론 관리자 2014.02.18 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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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새로운 설교학 운동 관리자 2014.02.18 3073
10 사도신경 강해 관리자 2014.02.18 3135
9 목회 신학 관리자 2014.02.18 3299
8 내적 치유 사역 관리자 2014.02.18 3192
7 기도학2 관리자 2014.02.17 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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