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8 13:49

성찬과 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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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과 성례

 

백석대학교 교수 김 상구박사

 

제1장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장

성만찬 :‘죽음의 기념’인가, ‘부활의 경축’인가?

 

I. 머리말

 

서방 기독교 안에서 성만찬 예전의 전통적 정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희생제 분위기의 반영이었다. 따라서 성만찬을 중심적 위치에 둔 예전의 분위기도 참회와 반성을 주제로 하는 슬픔과 엄숙 일변도였다. 그러나 과연 성만찬의 정서가 시원적으로 마치 축제적인 분위기 일색이었다는 단일 주장에의 몰두가 전적으로 옳은 것인가? 그래서 슬픔과 반성의 참회적 분위기는 중세의 유물로써 젖혀 두어야 할 정서인가? 아니면, 기존의 로마교회와 개신교회가 경도 되었던 또 다른 정서만이 여전히 성만찬의 진면목으로서 이해되어져야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왜냐하면 비록 성만찬이 더 이상 상당수의 개신교회 안에서 중심적 위치가 아닌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성만찬이 담지 하는 상징은 구속사의 재현이면서 예배의 본질을 규정해 주었던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 신앙의 형성적인 태(胎)라고 할 수 있는 예배가 기독교 신앙의 영성에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II. 성만찬에서 구현되는 하나님나라

 

역사적으로 동서방 교회는 성만찬이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장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영성적 삶의 중심에 있던 성만찬의 실행은 떡과 포도주라는 지상적 요소를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천상적 요소로 바꾸었다. 곧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 나아가 하나님의 통치가 상징을 매개로 구현되었던 것이다.

이 하나님나라는 어린양과 혼인잔치를 벌이는 축제와 환희의 장이며, 완성의 극치를 지향하는 영역이지만 그러나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을 향하는 연속선상의 시작이요, 그 도정인 까닭에 실제상 복합적 정서를 반영하는 장이었다. 성만찬과 하나님나라의 의미상의 병행을 통해서 이점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A. 구 질서의 극복과 새 질서의 출현

 

성만찬은 곧 구 질서와 새 질서의 극한적 대비가 이루어지는 장이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의 대화중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의로운 삶과 그에 걸맞지 않은 죽음은 바로 불의하고 참담한 현실과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묵시문학적 대망 사이의 철저한 모순적 대비를 드러내고 있다. 두 제자들을 비롯한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대망하였었다. 그러나 의와 평화의 화신으로서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 예수는 부조리한 현실의 대표적 모델인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 의해 고난의 표상인 ‘십자가’에 넘겨진 것이다.(눅 24:19-21) 동시에 모든 이들의 희망도 무너졌다. 악한 현실과 다가올 하나님나라 사이에 극한 대비가 현실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순과 배반은 이미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통해서 극복되어지고 있음을 이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만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부활의 주였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질서는 제자들에게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었다. 급기야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6:25,26)’는 책망을 받기까지 한다. 그들이 새로운 현실의 도래를 깨닫게 되는 시간적 공간적 장은 바로 예수께서 성만찬을 시행하신 자리였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 성만찬을 받을 때, 눈이 닫혀 있던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눈을 떴다. 닫혀 있던 세계, 과거의 질서 속에 붙들려 있던 시야가 열리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관점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질서 안에 편입되어 있으면서 그 질서를 체감치 못하던, 그래서 ‘슬픈 빛을 띠고’ 걸어갔던, 더디 믿는 믿음의 제자들은 비로소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고 있다.

이 사건은 곧 하나님나라의 시작을 보여주는 정점으로서의 부활과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성만찬의 사건을 연관시켜주고 있다. 성만찬의 자리는 그러므로 이 부조리한 현실 속에 그리스도가 개입하시는, 그의 임재의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곧 하나님나라의 임재요, 그의 나라의 임재였다. 이 임재의 현실은 대상물인 떡과 잔을 우상화하리 만치 중요한 주제였다. 성만찬과 하나님나라는 기존의 질서의 극복 위에 새로운 질서의 구축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유비를 이룬다. 기존의 질서란 모순과 어그러짐이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때로는 정의의 하나님마저도 침묵하시는 듯한 부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이런 현실에 대한 전능자의 초자연적 개입을 통해서 돌연 그 존재의 실체를 드러낸다. 성만찬은 이런 하나님나라의 실체가 드러나는 장이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가 임하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새로운 질서는 무엇인가? 곧 수직적이며 수평적인 화해의 사건이다. 수직적이라 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말한다. 누구든 성만찬의 장에 나오는 자는 성결의 요구에 합해야 한다.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고전 11:27)는 먼저는 수찬자에게 개인적인 성결성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과 인간간의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죄의 씻음을 전제한다. 인간에 의해서 어그러지고 왜곡되어진 관계가 성만찬 안에서 갱신된다.

동시에 성만찬은 수평적인 화해의 사건이다. 기독교계 어떤 전통에서는 그래서 성만찬을 Communion 혹은 Holy Communion이라고 명명한다. 헬라어의 koinonia에서 나온 말이다. 친교, 연합, 나눔, 그리고 공동체라는 함의를 담고 있다. 성만찬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의 관계를 형성하는 자리이다. Willam R. Crockett는 H. de Lubac의 견해에 동조하며 고린도 전서 11장 27-29에 나온 ‘주의 몸’을 성별된 떡과 잔에만 국한시키지 않으려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은 또한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곧 바울과 어거스틴의 생각이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곧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살피지 않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수평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와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화해는 곧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평등적 관계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성만찬은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는 장이다. 구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어 가는 장이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바로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며 수평적으로는 교회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지체들과의 화해를 이루는 장이다.

 

B. 완성에의 대망과 그 시작

 

마태복음 13장의 하나님나라는 사람들 가운데 임하였으나 그 임재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는 힘으로가 아니었다. 땅에 떨어진 씨와 같은 모습이었다. 천국은 임하였지만 현재의 질서가 전복된 임재가 아니다. 추수 때까지 하나님나라의 자녀들과 악의 자녀들이 함께 자라는 현실이었다.(마 13:24-30, 36-43) 하나님나라가 인간에게 임하였으나 영광스러운 새 질서로서가 아니라 겨자씨같이 임한 천국이다. 그러나 그 미미함은 무시될 수 없는 시작이다. 후에 이것은 크게 자라서 다다를 완성의 시작이기 때문이다.(마 13:31-33) 하나님 통치의 역동적인 힘이 이 악한 세대에 침투하였기 때문에 이는 현실 속에서 영적인 통치가 실현되는 상황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의 은총이 경험되는 영역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나라를 함께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하나님 나라는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그 사귐이 완성되기까지 확장되어져야 하는, 여전히 완성을 남겨놓은 천국이다. 하나님나라가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전히 고난과 환란을 겪으며 악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행 14:22, 살후 1:5, 딤후 4:18) 이것은 곧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미래적 영역(마 25:31-46; 막 9:45,7; 막 10:17,30; 고전 6:9-10, 15:42-50; 갈 5:21; 엡 5:5)과 그 시작인 현재적 영역(마 12:28; 눅 16:16, 17:21)이 있음을 보여준다. 성만찬은 곧 parousia와 완성의 모습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자리이다. 그의 고난의 유익, 부활의 결실을 경험하게 되는 현실이지만 그러나 완전한 것을 대망하는 조건적인 상태이다. C. H. Dodd는 이런 이중적 현실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만찬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속에 들어오는 위기를 끊임없이 재현한다. 성만찬은 결코 이점을 초월하지 않는다. 매번의 성만찬에서 우리는 거기그가 배신당한 골고다에, 부활절 빈무덤 앞에, 또 그가 나타난 다락방에, 그리고 천사들과 더불어 천국의 모든 무리와 함께 그가 오시는 순간에 있다.

Edmund Schlink도 이런 이중적 영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의 만찬에서 우리는 이미 여기 지상에서 미래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며 만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의 재림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의 초림과 재림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만찬은 바로 그리스도가 임재 하는 자리이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매 실행마다 그 자체를 뛰어넘어 시간의 종언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지시하고 있다. 성만찬에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확신은 곧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다른 표현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나라와 성만찬은 두 개의 모순 된 현실이 공존하는 장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된 형태에서 완전한 통치로 인한 축제와 환의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현실에서는 여전히 그 완성의 도정에서 고난과 고통을 동반하는 과정인 것이다.

 

C. 슬픔과 경축의 혼재

 

적어도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속에서의 하나님나라는 슬픔과 경축이라는 두 가지 혼합된 정서를 여전히 담고 있다. 이미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와 다가올 완성의 형태로서의 하나님나라가 각각 현실과 대망의 형태로 존재한다. 전자의 하나님나라는 지상에서 ‘시작된’ 하나님나라로 비록 미래의 완성된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기’는 하나 여전히 고통과 절망과 환란이 있는, 그래서 그 분위기가 사뭇 진지하며, 엄숙하며 무거울 수도 있는 하나님나라이며 후자의 하나님나라는 완성적 형태로서의 승리와 기쁨, 축제의 영역이다. 오늘 우리가 성만찬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전자의 영역이다.

동방교회의 예전에 보면, 참여자가 지상의 교회에서 하나님나라로 진입하는 순서인 대입장(Entrance)을 거치는 동안 하나님나라가 동일한 공간에서, 차원(dimension)을 달리하여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Schumemann은 이렇게 설명한다. 성만찬중 제단으로 들어가는 ‘대입장’은 상징적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성례전의 진정한 차원이 드러나고 확립되는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행동이다. 은혜란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은혜 속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교회이다. 또한 은혜는 새로운 존재, 하나님나라, 곧 다가올 세상이다. 집례자가 제단에 나아가면서 교회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영원히 부르는 찬양을 영창한다. 여기서 천사들은 장식이나 영감을 위해 있지 않는다. 그들은 정확히 천국을 위해 서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누리는 하나님 나라는 기쁨이면서 인내이다. 축제이면서 슬픔이다. 환희이면서 고통이다. 웃음이 있으면서 눈물이 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고 하신 그 제자들의 삶 속에 여전히 실책에 통곡하고(눅 22:61-62), 좌절감에 어두워지고(눅 24:17), 두려움에 떠는(요 20:19) 현실이 존재한다. 하나님나라를 월권적으로 점하는 어둠의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완성을 향해 가는 길에 있는, 하나님나라임을 배반하는 요소들이 혼재하는 이율배반적 현실이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미 세례를 통해서 중생의 외적인 공지를 하였지만 그 중생이후의 삶을 완전한 성화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여전히 오늘이라는 세속적 시간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나라와 세상 사이를 자맥질한다. 그것은 우리들이 성만찬을 준비 없이도 자격 있는 모습으로 참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 성만찬이 표상하는 바가 바로 이점이다. 성만찬은 하나님나라에서 맛볼 축제적 식사를 지표하고 미리 맛보게 함에도 불구하고 이 식사에서 사람들은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동안 여전히 피할 수 없는 죄성으로 인해 참회와 뉘우침을 표출해야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갱신을 경험하는 자리이다.

성만찬에서의 하나님나라와의 이런 양면적인 특성은 성만찬의 정서와 분위기를 규정해 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런 전단계 없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쓰디쓴 준비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신학적 균형 없이 일방적으로 성만찬을 기쁨과 축제로만 규정하려는 섣부른 질주는 자칫 예배의 온전한 이해와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의 내용은 참회와 사죄라는 전단계후 천국을 ‘미리 맛보는’ 통전적 드라마여야 한다. 이것은 마치 구속사를 다시금 재요약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우리가 완전하게 누리게 될, 다가올 하나님나라와 성찬에서 미리 맛보아 지는 하나님나라와는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축제적이어야 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동시에 현실의 한계에서 오는 단속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고통과 어두움의 현실이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의 시련의 과정을 겪고난 후에 주어지는 일종의 차후적 결과인 것처럼, 성만찬의 축제적 결말은 참회적 분위기의 전단계를 전제하여야 한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예배모델에서 예배의 4중적 구조는, 도입(Entrance), 말씀(Word), 성만찬(Table), 파송(Sending Forth)의 네 장을 설정한다. 이중 도입부분을 위해 일부에선 축제적 분위기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 도입부분은 예배의 시작이면서 여전히 하나님나라에 나아가는 준비적 무드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참회의 예식이다. 성만찬은 기쁨으로 종결되기 위해 참회와 고백의 전단계를 겪어야 한다. 이 점은 상호 균형적인 비중을 지녀야 한다.

 

III. 성만찬에 깃든 두 가지 정서의 실제

 

오늘날 성만찬의 정서에 대한 이해는 극단에서 극단으로 옮겨간 느낌이다. 이미 진술한 대로 최소한 교회 일치적 접촉 이전의 과거의 성만찬은 죽음의 기념에서 오는 엄숙과 우울의 분위기였음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던 것이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 성만찬의 이해는 그에 대한 또 다른 극단으로 전치되어 버렸다. 이것은 종래의 성만찬의 분위기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과 갱신의 노력이 이번엔 또다시 다른 한쪽으로 기울만큼 균형을 잃은 격이 되어버린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세계교회들의 에큐메니칼한 합의의 산물인 리마예전(Lima liturgy)도 성만찬의 분위기를 즐거움 일색으로 채워버렸다. 마치 종래의 성만찬 및 그것을 둘러싼 예배의 분위기와는 다른 방향으로의 선회였다. 이들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은 성만찬의 분위기가 비록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의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축제적인 분위기로 일색 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새로운 경도는 앞서 논의한 대로 과연 예배의 전체적의 균형에 적절한 것인가를 밝힐 필요를 느끼게 한다. 이제 여기에서는 위와 같은 전이해를 가지고 이와 관련한 상반된 논의들을 비평적으로 고찰하고 실제 예전문서들과 그를 둘러싼 환경적 관행들을 증시적 자료로 살펴보고자 한다.

 

A. 두개의 상반된 전통에 대한 논의

 

성만찬의 분위기에 대한 논의는 단순한 정적 분위기에 대한 모종의 규명을 뛰어 넘는다. 이것은 개개 신자들의 영성의 문제와 연관되어진다. 만일 성만찬이 핵심에 들어있는 예배가 축제적인 결말에 앞서서 엄숙과 장중의 준비요소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곧바로 값싼 은혜론에 편승하는 신학의 태(胎)를 제공하는 격이 된다.

요한복음에는 만찬이 유월절 전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고 예수를 유월절 기간중 도살되는 양으로 제시한다. 다른 복음서들은 모두 만찬이 유월절 식사였다고 보여주고 있다.(막 14:12-25; 마 26:17-29; 눅 22:7-20; 요 13) 이들은 비록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으나 한 결 같이 유월절 양이 도살되는 니산 14일 오후 혹은 해가 떨어진 니산 15일 전야에 양을 희생으로 잡아 유월절을 기념하는 상황에서 예수께서 당신의 죽으심을 상징하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점은 바울의 고린도 전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거기에 더하여 그는 굳이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 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도록 당부하고 있다.(고전 11:23-26)

이점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은 여기 복음서에 나오는 성만찬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쉽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의 범주와 바울이 세운 교회들의 전통이 구분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전자는 예루살렘의 종교적인 친교(haburoth)의 식사로 보고 성만찬 중에 오실 주님을 대망하면서 떡을 떼고 잔을 마셨다는, 그래서 축제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고 그에 비해 후자는 바울계 교회들이 예수의 죽으심에 대한 기념이었기에 그 분위기가 엄숙하고 장중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중의 축제적인 성격만이 보다 초대교회적인 성만찬의 성격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또 이점은 오늘날 에큐메니칼한 성만찬 이해에서 대종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우선 두 가지 이유에서 재검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바울계 교회들의 실행과 예루살렘 교회들의 실행사이를 이원화 한다는 것이 타당치 않다는 점이다. 바울이 이방을 향한 선교에 주력했다는 오늘의 통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대적인 전통에서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려우며(행 22:3; 23:6) 유대는 그의 끊임없는 목회의 관심이었다(롬 9:1-3). 더구나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만난 예수는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는 ‘죽으심’을 연상시키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활의 영광이 휘황하여 바울을 실명케 한 모습이었다.(행 9:1-9) 둘째는, 어린양이 도살되는 유월절의 상황에서 그의 죽으심을 연상케 하는 만찬기사를 담은 마가와 마태복음의 전통이 곧바로 축제적인 전통에 분류될 수 있다고 하는 점이 납득되기 어려운 점이다. 예수께서는 다가올 그의 죽으심을 예견하시면서 함께 나누는 떡과 잔이 당신의 희생의 상징인 살과 피임을, 그리고 새로운 언약의 표징임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만찬에는 사실상 이 두 가지 정서, 즉 죽음의 기념과 부활의 기쁨이 병재 하고 있었다는 점에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성만찬이란 어떤 고정된 정서를 담으려하기 보다는 성만찬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가 시행되는 그 배경이 어떠하였느냐에 따라서 성만찬은 그 정서가 결정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B. 성만찬예전의 실제

 

초기 예전의 모습은 성만찬이 중심에 있었던 까닭에 여기서 성만찬예전이라는 말은 곧 예전을 통 털어 일컫는 표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내용을 살피면서 다루게 될 것은 예전 안에 있는 각각의 순서들과 또 필요하다면 그 순서들 중의 어떤 부분의 내용들, 곧 순서를 이루는 구성요소의 종류나 성만찬 기도, 지문 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들은 곧 성만찬 예식의 정서를 반영하는 종합적 자료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성경외의 문서들 중에서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Didache문서는 성경과 동시대적인 배경을 갖는다. 이 문서에서 성만찬 기도로 보여 지는 부분의 전체 분위기는 주로 떡과 잔에 대한 감사이다. 그런데 한군데 유념해야 할 것은 자세한 내용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감사기도성만찬기도로 추정되는를 마친 후 10장 6절에서 “거룩한 자는 나오게 하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회개케 하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성만찬이 단순한 축제적 분위기로만 일색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근거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내용은 14장 1절에서 매주일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먼저 죄를 고백하라’는 내용을 잊지 않고 있다. 이것은 성만찬기도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예식이 충분히 발전한 모습은 아닌 상태였기 때문에 고정된 참회문이 들어있지 않을 뿐, 성만찬의 참회적, 준비적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보여 진다.

A.D. 150년경의 문서인 져스틴 마터의 제1 변증론은 그 65장에서 학습교인들이 세례 받은 자와 분명히 구별되어 해산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곧 이어지는 66장에서의 성만찬 참여자들은 이미 세례를 받은 자들이다. Didache에서도 보았듯이 참여자의 자격은 세례를 받은 자여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들에게 다시금 그들의 죄에 대한 씻음을 재확인하는 전단계 절차를 밟는다는 것이다. 66장 1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음식을 ‘감사’라 부른다. 그리고 누구도 우리의 가르침의 진리성을 확신치 않고 죄의 용서와 거듭남을 위한 씻음으로 정결케 되지 않고는, 그리고 그리스도가 전해준 대로 살지 않으면 여기에 참여할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씻음은 세례를 말한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그리스도가 전해준 대로 살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을 붙여 세례 이후의 거룩한 삶의 여부를 문제시 한다. 이미 구도자들이 예배를 마치고 흩어진 상황에서 또다시 이를 언급하는 것은 성만찬에 임하면서 수찬자들이 전단계적으로 거쳐야 하는 참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과는 다소 대조적으로 A.D. 215년경 쓰여진 Hippolytus의 The Apostolic Tradition에 나온 성만찬기도는 당시의 성만찬기도를 엿보게 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만 전체적인 정서는 감사와 축제의 분위기이다. 한 예로,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당신께 떡과 잔을 드립니다. 또한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을 봉사하기에 합당케 하신 까닭에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뭇 자신감 있고 당당한 기도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히 감독의 안수 및 세례식에 이은 성만찬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무렵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은 길게는 3년의 교리학습과정을 받고 검증된 후에나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타의 주일들 중에 드리는 성만찬의 성격과 달리 방금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리였기에 수찬자들의 충분한 준비 여부를 문제시 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러 교부들의 글에서 재구성한 3세기 말엽에서 4세기 초의 예전에서는 특히 수찬중에 선창자(성가대지도자)들이 시편 43편과 34편을 부른다는 것이다. 특히 시편 43편은 성만찬에 임한 자의 참혹한 심정의 고백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시 43:1-3).

약 350-380년경에 사용되어졌던 Apostolic Constitutions에 들어있는 클레멘타인 예전에 보면, 특히 성만찬시 제단구별의식(Fencing of Table)이 있다. 즉, 신자 아닌 사람, 거리낌이 있는 사람, 혹은 위선에 빠진 사람들은 참여를 금하게 하는 경고의 언사가 주어지는 시간이다. 성만찬상에서 모두에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앞에 서야한다고 강조한다.

431년 시리아 동북부의 에뎃사에서 기원된 Addai and Mari예전을 보면, 이것의 특이점은 배찬시 주어지는 언사이다. 즉, “[이것은] 범죄함의 용서를 위한 주님의 몸[이라]”는 말과 “[이것은] 범죄함의 용서를 위한 소중한 피[니라]”고 한다는 점이다. 이곳이 상대적으로 유대적인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던 곳이란 점을 주목하면 유대-예루살렘 전통을 축제적인 부류의 성만찬으로 보는 견해를 수정하는 근거로 볼 수 있다. 명백히 성만찬의 성격이 참회와 용서의 제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Addai and Mari와 동일한 근원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성베드로의 세번째 성만찬기도(The Third Anaphora of St. Peter)’는 앞서의 문서보다 명백히 그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성만찬기도의 중간 무렵에서 선언하기를 “주여 우리는 당신이 가르쳐 주신대로 당신의 고난을 기념하나이다”라고 선언한 후 제정사를 낭독한다. 그리스도께 경배의 언사를 한후, 곧 바로 용서를 구한다.

당신의 진정한 생명을 통해서 생명을 주시며 당신의 영적인 속죄(expiation)를 통해서 우리를 깨끗케 하여 주시며 당신의 생명수여의 죽으심을 통해 생명을 얻게 허락하여 주소서...”

이어서 또 희생(떡과 잔)을 제단 앞에 드리면서 그로 인해 ‘죄책이 사해지고 죄가 용서받기’를 구한다. 또 그로 인해 영광스런 삼위일체와의 화해를 구하며, 그로 인해 혼이 순결케 되며 영이 성화되기를 구한다. 죄성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다시 후반에 가서 분위기는 사뭇 통렬한 참회의 분위기이다.

주 하나님이여, 이 시간, 나의 비참함, 죄성, 추악함 그리고 비천함을 기억하소서. 당신의 목전에서 의식 혹은 무의식중, 스스로 혹은 타의로 내가 죄를 지었으며 악을 행하였나이다. 주 하나님이여 당신의 은혜와 자비로 나를 사하시고 당신을 거스려 범한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성만찬이 당신의 죽음의 기념이 되게 하시며 우리 영혼의 화해를 위한 것이 되게 하옵소서.

이에 비해서 알렉산드리아에서 A.D.300-A.D.500사이에 사용된 마가의 예전에는 사죄, 용서, 죽음의 기념등에 대한 언급들이 비교적 드물게 발견이 되고 있고 오히려 중보적인 기도가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중보적인 기도는 곧 자격 있는 참여자의 뉘앙스를 깊게 풍겨준다는 점에서 성만찬의 정서는 승리나 축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 외 4세기 중엽이 넘어 이집트에 전해졌다고 보여 지는 St. Basil의 성만찬 기도나 Thumuis의 감독이었던 Sarapion에 의해 359년경에 쓰여진 성만찬기도는 거의 죽음의 기념에 대한 특별한 강조나 부각이 없는 모습으로 다소 예외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상의 여러 문서들을 종합적으로 관찰하면서 초대교회의 성만찬예전의 분위기는 어느 일면의 정서로 설명될 수 없는 흔적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 예식 중 성만찬 자체의 예식내용 안에도 이미 이런 정서가 병존하였음이 확인되는 바이지만 성만찬 예식을 예배의 중심에 놓고 점진적으로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예전의 전통적 패턴에서 볼 때 성만찬을 따로이 떼어 놓고 그것의 축제적 분위기만을 확대해서 보는 것은 통전적 이해일 수 없다. 따라서 성만찬은 부활의 경축이면서 그러나 여전히 통렬한 참회와 고백의 장이었다.

 

C. 성만찬 예전의 틀로서의 교회력

 

성만찬예전의 주제와 정서를 결정하는 또 다른 요소로서의 교회력이 중요한 관찰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까닭은 매번 드려지는 예전이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고난, 죽으심, 부활 및 성령강림과 교회의 존속이라는 파노라마를 배경으로 해서 거행되기 때문이었다. 곧 개개 예전과 그 핵으로서의 성만찬은 이 교회력상의 사건과 절기에 의해 정서가 규정되어졌다. 교회력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의 전 파노라마를 매년 주기로 지키는 틀로서 마치 성만찬의 여정을 보여주는 지도와 같은 것이었다. (성탄주기와 부활주기 도표)

 

IV. 나오는 말

 

역사가 오랜 예전적 교회들은 성만찬을 예배의 중심으로 지켜왔다. 또한 전체 예식은 성만찬과 통전적 일체였기에 예전의 모든 부분은 곧 성만찬의 일부이기도 했다. 이 성만찬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자리이다. 하나님 나라는 오늘, 여기서 ‘미리 맛보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완성적 실체로 안겨진 것이 아닌 완성의 미래로 나아가는 도정 위에 있는 현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만찬은 예배의 정서상 균형적이었다. 다시 말해 성만찬은 완성된 하나님나라로서 기쁨과 축제의 장이라고만 규정되거나 아직은 모순된 현실 속에서 시작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하나님나라이기에 슬픔과 고통의 자리가 대종일 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두 요소는 오히려 그 속에 혼재하여 있으며 또 공존의 필요를 지니고 있다. 세상에서는 여전히 넘어지고 쓰러짐이 있다. 그 고달픈 현실이 죽음의 기념 속에서 통절히 고백되며 갱신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승리의 보장이 있고 확신이 있다. 바로 이런 메시지와 그것을 담는 언어적 의식(ritual)과 행위적 의식(ceremony)이 성만찬에 들어 있는 것이다. 다만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인 무거움의 정서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원받은 인류의 부활을 연 첫 열매였듯이 성만찬은 슬픔과 장중에서만 머물지 않고 축제로 점진한다.

 

 

 

 

 

 

 

 

 

제2장‘성찬의 4중 행위(Four Actions)와 한국교회 예배의 내일

 

들어가는 말

 

한국 개신교회의 대다수는 그 동안 교파와 교단에 상관없이 내용과 형태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설교가 중심이 된 예배를 드려왔다. 이런 양태에 이렇다 할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많은 교회들이 전통적인 예배에 대한 관심이나 동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한 예배에 대한 관심을 확대해 가면서 예배의 다양성이 눈에 띄게 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 가운데는 전자와 같이 예배의 예전적인 측면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성찬의 위상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후자와 같이 현대적인 구미를 살려 예배에서 형식의 자유를 크게 허용하고 예술적 장르를 다양하게 활용하여 예배의 대중화를 시도하는 그룹들이 있다.

본고는 최근의 다양한 예배 신학적 동향에 대해 특정의 경향에만 긍정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가치중립적 입장에 서서 오히려 예배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이해를 정립하고 그 전범을 제시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이를 위하여 먼저 한국 예배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이어 특별히 성찬의 4중 행위에 대한 실제와 신학적 의미들을 탐구하면서 산발적이나마 한국교회 예배의 과거 혹은 현재의 모습들을 다루면서 그 바람직한 미래의 지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I. 세계교회와 한국교회 예배의 현주소

 

A. 예배의 예전성(禮典性)

 

예배의 예전성 회복에 대한 관심은 최근 예배개혁에 관한 논의의 중심적 화두가 되고 있다. 구미 개신교회들에 비해서 한국교회가 예배개혁에 대한 필요의 인식과 그에 상응하는 반응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그간의 개신교회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기초하여 예배의 예전성(liturgicality) 회복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가고 있는 형편이다. 예전성은 예배의 의식적(儀式的) 측면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교회력에 따른 예배, 상징적 행위나 사물건축물, 예복, 상징물 등을 포함해서의 사용, 말씀과 성만찬의 연계성, 그리고 전통적 예배본문들에 대한 의존정도 등에 의해서 예전성의 정도가 가늠될 수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말씀과 성만찬과의 관계는 논의의 핵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에 한국교회는 전통적 개신교회의 특성상 말씀과 성만찬이 분리된 양태의 예배가 지배적이었다.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한국교회 예배의 예전성의 여지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B. 예배의 신학적 바탕

 

한국교회의 예배의 갱신 논의 가운데 신학적 바탕의 건강성에 관한 지적이 적지 않게 있어 왔다. 이와 관련하여 아마도 ‘예배가 하나님이 베푸신 자리로서 그의 기선성(initiative) 혹은 주도권이 드러나고 있는가?’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에 있는가?’ 또 ‘예배에서 기독론적 전망은 견지되고 있는가?’ 따라서 ‘예배가 구속사건을 균형 있게 드러내고 있는가?’ 등의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예배에서 하나님의 기선성은 예배의 성립의 기초를 이룬다.

둘째, 예배는 인간이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서, 자신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자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중심성에 대한 올바른 관점은 예배의 성격과 설교의 방향에 중요한 지침이 된다. 인간 편에서, 상황 편에서 복음을 해석하고 예배에서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편에서 현실을 바라보고 그것의 변화를 모색하는, 예배의 중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예배의 신학적 균형의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학적 균형이란 구속사건에 대한 고른 반영이 이루어지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오늘날 실상 많은 이름의 예배들이 특정의 목적을 위해, 특정한 측면에만 강조를 두어 진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기복성 집회로 자주 표출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신앙적 회합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worship)란 의미로서의 예배라고 지칭될 수 있을는지 모르나 보다 정당한 의미의 예배는 전체 공동체가 모인 가운데 예배 신학적 관점에서 기독교적 가치들이 균형 있게 고루 갖추어진, 정체성이 분명한 예배를 가리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예배의 신학적 건강성을 지키는 한 방법으로서 기독론적 전망에 충실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중요하게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C. 예배 속에서의 회중(會衆)

 

예배 공동체인 회중(會衆)에 대해 두 가지 당위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다.

먼저 회중은 ‘함께’ 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오늘날 첨단정보화시대의 이기인 컴퓨터로 인해 많은 특혜를 누리고 살지만 동시에 사이버 공간에 형성되는 비 물리적 공간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나 그 유용성에 대한 과신으로 인해 인간의 만남이 온전하여지지 못하고 더불어 서로에 대한 연대와 책임을 상실해 갈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아직 한국교회에 이런 움직임이 미미하지만 마치 현재의 예배가 미래에는 사이버 예배로 대체(代替)할 수 있는 양 기대하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예배를 통해 일어나야 할 전인적 헌신과 성도간의 수평적 연대 및 책임을 깨뜨리는 위험한 가정이 될 것이다. 시대와 문명이 아무리 변하여도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예배는 신체적 참여(physical presence)가 동반되는 ‘함께 모이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함께 함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공동적 관심(common concerns)을 나누는 일은 기독교 예배의 중요한 바탕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곧 대 사회적 봉사의 영역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 없는 교회의 자세를 예배가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회중은 예배의 능동적 참여자라는 것이다. 앞서 예시한 예배신학자인 Robert Webber가 관찰한 성서상의 예배는 모든 참여자가 능동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회의 말씀중심의 예배는 자칫하면 설교자의 부각과 함께 회중의 주변화 및 무관심을 야기 시킬 수 있는 구조를 띄고 있다. Craig Erickson은 수동적 예배는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고 지적한 뒤 활동적 예배의 형태가 되려면 신자들의 참여가 충분하고도 의식될만한 수준에 이르게 하며 또 그것을 고무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예전적인 예배에서 흔히 등장하는 환호사(acclamations)사람들이 예배 중에 응답의 방법으로 외치는 고정형식, 응답, 시편가의 교송, 상징들의 사용, 교창(antiphone), 교회력에 따른 색깔(colors)의 사용, 제스쳐, 행동, 침묵 등을 사용하는 것이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II. 성찬의 4중 행위와 예배의 본질

 

한국교회의 예배의 현황에 대한 비평적 지적과 더불어 상응하는 대안들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러한 주제들에 대해 성찬, 그 중에서도 특히 4중 행위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대안들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성만찬의 사중행위는 개신교 성찬에서 오랫동안 구체적 형태로 지켜져 왔던 것은 아니었다. 공관복음서(막 14:22-26; 마 26:26-30; 눅 22:14-22)와 바울 서신(고전 11장 23-26)에 나타난 제정기사는 비록 각각의 순서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4가지 핵심적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그 내용은 떡을 취하고(take), 축사한 뒤(bless), 떼어(break), 주는(give) 행위이다. 이 네 가지 행위는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 예배 역사 안에서 봉헌예식(Offertory), 성찬기도(Eucharistic Prayer), 분병(Fraction), 수찬(Communion) 등의 네 가지 성만찬의 장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상호 보완적이며 깊이 연관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예배의 정신을 통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들 각각의 내용과 의미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오늘의 예배가 추구하는 갱신의 방향에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A. 성물의 봉헌 - 떡과 포도주를 취함

 

보통 설교부분이 끝나고 성찬이 시작되면서(성찬이 시행되는 경우를 전제하여) 첫 번째 행위는 떡과 포도주를 취하는(take) 일이다. 이 부분은 바로 집례자가 회중으로부터 성찬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봉헌물을 받는 순서이다. 바람직한 경우는 아니나 과거에는 성물(elements)들이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성찬상에 배열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경우에는 덮고 있던 성찬보를 조심스럽게 걷는 것이 성물을 들고 제단 앞으로 행진하여 나아가는 일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문서들에는 회중의 무리가 집례자에게 성물을 가져다 드리는 일종의 봉헌(Offertory)절차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상당수 이와 같이 성물을 헌금과 함께 헌금위원이나 성물운반자들을 통해 단까지 행진하여 나가 드리도록 한 뒤 이어서 집례자가 성물과 헌금을 분리하여 성물은 성찬상에, 그리고 헌금은 따로 놓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성만찬의 첫 번째 행위에서 오늘을 위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회중이 그들의 땀과 수고를 드려 생산한 수확물을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일이 상징적 행위인 성물운반 및 행진을 통해서 실행되는 것이 고전적인 모범이라는 점이다. 예배는 인간이 자신들의 노력과 삶을 투자하여 획득한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려서 인간의 소유 전체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 사람들이 드리는 소재의 근원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이 사실을 봉헌기도의 내용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나눔이 하나님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시적인, 혹은 불가시적인 모든 것의 주도권을 가지시고 예배를 통해 인간과 대화를 나누시는 것이다.

둘째, 여기서 드려지는 산물은 특정지역, 특정 예배자들에 따라 다른 것들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속한 삶의 터전에서 산출된 것들이기에 그렇다. 이것은 곧 개개 지역교회들의 문화적인 환경과 삶에 대해 예배는 다양성에 대한 포용적 입장을 지닐 필요를 시사한다. 오늘날 예배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문화의 옷을 입는 일에 대해 많은 공감이 확산되고 있다. 자신들이 속한 문화권에서 나온 상징물들한국의 경우로 예를 들자면, 밀로 만든 빵 대신에 쌀로 만든 떡은 그들의 신학과 예배의 독자성을 위해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다양성이 필연적인 지구촌 각 교회 공동체들이 각자 자신의 문화의 결과들에 대한 긍정이 없이는 자신에 대한 정체도 잃어버리기 쉽거니와 나 아닌 남을 향한 끝없는 종속성의 틀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셋째는 봉헌물의 종류는 예배가 사회적 영역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금전적 의미의 헌금과 기타 구제를 위한 물품이 성물과 함께 드려지고 있다. 초대교회 때부터 이웃에 대해 관심은 교회의 선교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부유한 자는 예배처소에 물건을 선물로 가져와 예배 목적을 위한 성물과 성직자의 삶에 필요한 것을 드릴뿐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의 생활을 지원하였다.

 

B. 성찬기도 - 감사를 드림

 

드려진 성물을 놓고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두 번째 행위는 오랫동안 성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real presence)가 일어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또 개신교 내 여러 진영들 간의 분열의 중심축에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임재양식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중요한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부분은 전체적으로 집례자가 행하는 기도로서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행적에 대한 찬미,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대한 기념, 성령의 초빙(Epiclesis)을 위한 기도, 영광송(doxology) 등이 포함되나 히브리적 전통(시편 148편)에서 발견되는 기도의 스타일로서 제정사(the words of institution)와 같은 내레이션이 삽입되고 있다. 흔히 이 부분은 초대교회의 성만찬의 명칭이 ‘감사’라는 의미의 헬라어, eucharistia에서 온 것임을 강조하면서 대감사(the Great Thanksgiving)라는 명칭으로 많이 불리어지고 있다.

성만찬의 두 번째 행위인 대감사기도 안에서도 역시 오늘의 예배신학적 지침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대감사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에 대한 내레이션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먼저 성부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섭리, 성자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성령 하나님의 내재적인 역사 등이 칭송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오늘에도 현재화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예배는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구적으로 이 사실이 늘 회상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위대한 행적과 그의 현재적인 역사를 반복적으로 재연하는 것은 곧 기독교 신앙의 건강한 형성을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며, 동시에 회중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힘이 되고 있다.

둘째는, 예배 안에서 내재적인 성령의 역사가 긍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따르면 성령은 곧 가장 중요한 사건의 주체로 기능하고 있다. 예배 안에서 초자연적이고 주체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개방된 태도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오늘의 개신교회의 성만찬 기도는 성변화의 대상을 성물로 보지 않고 회중에게 두고 있다는 변화가 목도된다. 과거 중세기와 오늘날의 일부 전통에서는 여전히 변화의 대상이 떡과 포도주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현대 예전의 모범이랄 수 있는 3세기초의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의 성령초빙기도에도 그 대상이 회중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셋째는, 회중이 능동적 참여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집례자는 과거와 달리 회중을 향하여 선다. 이것은 곧 회중이 예배의 참여자로 포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집례자가 홀로 주관하는 제사적 예배에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자로서 하나님이 베푸신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그 외에도 성만찬은 감사를 드리는 장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떡을 떼시며 감사했던 것처럼 집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감사(thanksgiving, eucharistia)를 드리는 것이지 결코 제사를 준비하는 사전적 절차가 아니다. 예배 또한 감사를 드리는 사건이지 우리의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는 장이 아닌 것을 시사한다.

 

C. 분병 - 떡을 뗌

 

이 행위는 대감사기도가 끝난 후, 떡을 떼는 순서이다. 소위 분병(Fraction, 聖體分割)이다. 떡은 상징적 행위로 한번만 떼며 회중들이 충분히 관찰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예식서들을 보면 이 부분에 그 의미를 반영하는 한 개 이상의 적절한 구절들을 삽입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미국 장로교회의 Book of Common Worship에서는 바울의 고전 10장 16-17의 말이 인용되는데 집례자는 사람들 앞에 떼지 않은 떡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라고 한 뒤 떡을 떼고 이어서 말한다.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은 그런 다음 성찬상에 놓여지고 주전자로부터 포도주를 잔에 채운 다음 그것을 회중들 앞에서 들면서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라고 한다. 이어서 떡과 잔을 들은 채 초청의 말을 잇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준다. Thomas Oden은 이 분병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부서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만이 아니다. 그의 심장, 곧 모든 인간의 고뇌 속에 상징적으로 참여하는 그의 심장이다. 떡과 포도주는 상징적으로 전체 그리스도(그의 몸과 영혼)을 상징한다. 고대사회의 생리학에서는 피는 탁월한 생명의 상징이었다. 유대인들의 제사에서 피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었다...하나님은 우리의 양식이 되셨다. 이러한 부서짐이 없이는 어떠한 영적인 양육(nurture)이나 먹임(feeding)이 가능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집례자는 예식에서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게 사람들 앞에서 이 떡을 부수는 일이 필요하다.

떡을 떼는 행위 속에서 나타나는 오늘의 예배 신학적 지침들은 어떤 것들인가?

첫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분병은 곧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건이요, 자기를 내어줌의 사건이다. 유대적 전통에서는 희생은 곧 피흘림을 수반하였다. 비록 동물을 잡아서 드리는 희생제물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혐오스러우나 희생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희생을 은유하였다. 회개와 화해의 가시적 표시로서 하나님께 가치 있는 어떤 것을 드림으로써 자신을 줌을 상징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죽는 것이며 속죄를 이루는 것이며 화해를 성취하는 것이다. 분병에 참여함으로써 신자들은 자신을 위해 대신 죽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참여한다. 이것은 곧 슬픔의 자리요 참회의 자리이다. 간혹 성만찬을 단순히 축제적 분위기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만일 이 분병, 곧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정서를 먼저 거치지 않는 축제성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정서는 예배에서 반드시 반영되어야 할 부분이다. 미국장로교회는 칼빈의 전통을 이어서 고백과 용서(confession and pardon)의 항목을 예배의 초두에 두고 있다. 또 미국 루터교회는 입례송이 있기 전에 고백과 용서(confession and forgiveness)의 의식을 선행하고 있다.

둘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오늘날 이 부분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과도하게 무시되려는 경향이 있다. 부활의 기쁨에 앞서서 고난에 참여하는 과정이 있다는 점이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곧 예전적 교회들의 예전갱신운동과 개신교회의 갱신운동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이다. 개신교에서의 예배정서에 비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오랜 전통을 지내오면서 미사의 중심이 희생 제사였기에 미사 전체가 장례식 분위기(funeral mood)에 지나치게 경도 되어 있다는 자체적 비판이 있어 왔다. 그러나 개신교회의 예배 분위기는 대체로 축제적 성격을 견지하는 편이다. 성찬식도 전체적으로는 이런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무거운 분위기의 찬송가가 선택될지라도 축제성의 회복을 강조하리만큼 장례식 분위기는 아니다.

셋째로, 이 분병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신자들이 동참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름에는 고난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예배는 위로와 환희뿐만이 아닌 십자가의 삶에 대한 다짐과 실천을 요청하는 자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D. 수찬 - 떡과 포도주를 나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고 받는 수찬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이루는 극적인 순간이다. 중세교회는 여기서 받게 되는 성물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살이며 피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그 결과 성만찬 신학의 초점이 대상화되는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개신교의 성만찬 신학은 앞서서 지적한 대로 성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성만찬 행위에 참여하는 회중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떡과 포도주를 받는 무리들은 여기서 다시금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진정한 임재를 맛보며 그와 더불어, 또 사람들과 교제(communion)를 나누게 된다.

교단 및 교파별로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는 수찬의 양태 속에도 중요한 성만찬 신학들이 내재하여 있다. 예를 들어 침례교, 장로교, 제자교회 등은 의자에 앉은 채 배찬을 담당한 평신도들에 의해서 각자에게 분배해주며 한국의 대부분 개신교회들도 이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공회, 루터교회, 감리교회들은 단(檀)에 설치된 난간(communion rail)으로 나아가서 계단에 무릎을 꾼 채 떡과 포도주를 받는다. 이들 중에서 어떤 교회들은 제 2차 바디칸 이후의 자세, 즉 서서 받는 자세를 취한다. 어느 곳에서는 무릎 꿇는 계단을 없앴다. 어떤 예에서는 예배자들은 서서 떡을 받은 다음 기도를 위해 난간에 무릎을 꿇도록 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체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성만찬 신학의 갱신을 통해 서서 떡을 받도록 하는 추세이다. 떡과 포도주를 받는 것은 부활의 주와 깊이 만남을 상징하며 일종의 미래를 향한 희망을 나타낸다. 성찬은 참회의 예식으로 끝나지 않고 감사와 소망으로 맺는 예식이다.

수찬은 예배의 절정을 시사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예배 신학적 의미들이 담겨져 있다.

첫째는, 수찬은 곧 부활에 동참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성만찬, 더 나아가서 예배 또한 부활의 주를 경축하는 중요한 장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원시교회 때부터 안식 후 첫날인 제 8일, 곧 주일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었다. 사순절 기간 속에 들어있는 6개의 주일마저도 원칙적으로는 사순절의 분위기에 종속되지 않고 여전히 부활을 경축하는 시기로 보았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수찬에서 상징되는 부활의 경축과 참여는 분병의 정서가 전제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둘째로, 수찬은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가리켜 준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활의 주와 더불어 나누게 되는 온전한 축제의 식사를 지시한다. 이러한 성만찬의 의미는 예배의 지향점을 드러내고 있다. 예배는 곧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완성을 대망하는 이중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의 잔치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있게 되는 혼인잔치와 잇대어 있는 소망의 잔치이다. 예배는 이와 같이 현실에 안주하도록 하지 않고 미래의 완성된 현실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하여야 한다.

 

III. 실제적 적용의 방법과 그 지향

 

전통적인 성찬예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행은 예배의 정신을 지켜 나가는 중요한 근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단순히 간결하게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성찬예배의 목적이 올바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성찬식은 앞서 논의한 대로 그 속에 담겨진 축적된 내용들이 상징적 행위와 사물을 통해서 얼마나 구현되느냐의 여부에 성패가 달려있다.

따라서 예배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는 성만찬의 4중 행위는 성찬의 비중의 회복과 더불어 더욱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4중 행위에서 나타난 예배의 정신은 그 적용의 과정에서 과연 어떤 실제적 문제들을 지니고 있으며 적용상의 어떤 방법적 혜안(慧眼)들이 요청되고 있는가?

 

A. 전통과 동시대적 요청

 

전통과 동시대적 요청은 기독교 예배가 끊임없는 긴장을 가지고 견지해야 할 중요한 두 기둥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은 곧 시대와 상황과 문화를 뛰어 넘어서 기독교의 본질적 메시지가 적용되면서 나타난 구체적 해석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오늘 우리의 신학적 전개를 위한 좋은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예배와 관련해서 전통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성서는 복음에 대한 신학적 진술을 기초로 하여 쓰여진 것이기에 예전적 내용이나 체계에 대한 자료들은 오히려 후대의 교회의 전통 속에 보존된 본문들에 의해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말은 성서 속에 나오는 예배의 단편적 기술들이 후대의 발전적 형태의 예배들과 본질적으로 상이한 점들을 갖고 있다거나 결여된 부분이 있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라 복음과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이 시대가 지나가면서 당대의 상황적 요청에 부응하여 발전적 형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것을 시사 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예배의 형태가 선험적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므로 동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표현방식의 변용이 필요할 수 있음을 시사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먼저 성만찬의 전통적인 형식과 의미에 대한 바른 회복이 필요하다. 오늘날 일부 개신교회에서 시행하는 대로 전통적 예문은 배제되어 있거나 거리가 먼, 성만찬의 실행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중세적 성례전주의의 다른 얼굴이 될 수 있다.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고 마시는 그 자체에 성찬의 의미를 두는 것은 곧 성물에 대한 마술적 효험을 기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상징적 행위와 더불어 복음을 수용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성만찬을 매주 시행해야만 된다든지, 성만찬이 설교보다 더 중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논의의 본질적 핵심은 아니다.

전통의 복원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에 이 성찬을 구현하는 방식으로서 창의성의 범위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인가? 목회자나 신학자가 성찬을 시행함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언어를 채택하고 사용하는 일이나 혹은 그의 개인적인 문학적 창의성을 사용하여 성례전적 행위의 내용을 독립적으로 바꾸는 일은 매우 신중성이 요구되는 일이다. 개인적인 창의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통의 복원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만 사용되는 언어의 동시대성, 기도의 목표가 되는 동시대적 주제들의 적절성, 풍성한 정보에 노출된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 맞는 간결성, 변화된 상징체계 등을 현실화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라고 여겨진다.

 

B. 사중행위의 의미와 적용

 

성만찬의 4중 행위는 예배가 지향해야 하는 정신들을 골고루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것들은 그 가운데서 어느 특정의 행위나 그 의미만이 강조되거나 또는 역으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예배의 정신에 고르게 반영되어야 하는 통전적 일부이다.

먼저, 성물의 봉헌은 곧 인간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성찬에 임하면서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을 드리고 그에게로 나아감을 필요로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헌신의 산물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화이지만 동시에 그 대화의 이니셔티브는 하나님께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예배의 정신의 근본적 배경에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주도적인 도움이 있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형태의 예배순서를 크게 네 개의 장, 도입(entrance) 혹은 모임(gathering)예배를 준비하는 부분, 말씀(word)성경봉독과 설교가 중심, 성찬(table)세례가 있을 때는 세례를 포함하는 성례전 부분, 파송(sending forth)예배자들을 세상으로 다시 보내는 장으로 구분할 때, 그 첫 장에 해당되는 도입, 혹은 모임 부분에 모두 ‘예배에의 부름’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예배로 부르심이라는 순서가 첫 요소, 혹은 중심요소로 들어가 있다. 하나님이 예배를 여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예배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경시하고 인간의 가치를 강조하게 된다. 예배는 인간이 지니는 한계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다.

다음으로, 성찬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감사이며 하나님이 그곳에 모인 자들을 위해 축복하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창조와 섭리를 행하시는 성부 하나님, 구속의 역사를 이루신 성자 하나님, 그 완성을 오늘의 현실에 구현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이 기도문 속에 들어 있다. 여기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의 역할이 분담된 가운데 그 역사가 골고루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곧 예배의 대상은 바로 삼위적(Trinitarian)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예배는 기독론적 전망을 견지하되 삼위일체가 예배의 대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성찬기도를 통한 축복의 수혜자는 대상물이 아닌, 모인 무리이다. 과거 성찬기도는 그 핵심이 성물의 성변화(consecration)에 국한되어 결과적으로 여러 모순을 남겼다. 그러나 개신교회의 성찬기도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찬미의 내레이션과 함께 그곳에 모인 자들의 변화를 통한 온전한 교제(communion)를 지향한다.

세 번째 행위인 분병은 곧 죽음과 희생의 사건에 대한 기념의 측면이 강하다. 이미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서 나온 대로 제정사는 곧 예수의 ‘죽음의 기념’이었다. 그러나 또한 부활 후의 성찬은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것이었다. 이 둘은 균형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지난 서방교회의 역사 속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이었다. 화체화된 예수의 죽음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에 예배 자체가 장황하고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가 지배했다. 성만찬의 4중 행위 중, 이 부분에 특별한 강조가 있었던 셈이다. 이 부분이 분명 예배의 주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음에는 이의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오늘에 와서 성만찬은, 혹은 넓게 말해서 예배는 기쁨과 축제의 잔치였다고 만 주장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견해가 될 수 있다. 이 부분은 결코 기쁨의 축제로서의 예배라는 이름으로 무시되거나 약화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이 또 예배의 전형적 의미인양 강조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찬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에의 참여를 의미한다. 이 부분은 분명 오늘날 기쁨을 잃어버린 예배, 축제성을 상실한 예배 등에 도전을 가하는 예배의 측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만이 지배적인 예배의 정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가 부활의 잔치로서 일찍부터 자리잡았지만 그 부활의 축제성은 종결로서 주어지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몸의 고난도 전제되지 않은 예배의 분위기가 시종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무가치성과 죄성의 극복을 위한 준비적 자세를 불필요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다 중요한 것으로서 그 중의 하나만 강조되고 다른 것이 배제되면 안될 것이다. 오늘날의 예배와 성찬은 이 네 가지의 고른 균형 속에서 특정 주제에 편중되지 않는 가운데 시행될 때, 예배의 목적을 올바로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성찬은 준비하고 희생의 과정을 거친 뒤, 축제적 분위기로 나아가는 일이 필요하다.

 

C. 본문과 상황의 관계

 

전통적 성만찬에 관한 내용과 형식에 대한 존중의 필요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논의가 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것을 개인이 속한 각각의 문화 속에서 실제 시행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문화적인 차이가 뒤따를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개신교 예배학자들 가운데 성물에 대해 너무 가벼운 것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현실성과 위엄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의 식탁에서 나눌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일반식사와는 거리가 먼 어떤 것을 성찬 상에서 먹으라고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예수께서 사용하지 않은 어떤 것을 채용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한다. 즉, 일반인들의 식사에 가까운 것의 사용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문화적인 변용을 위한 노력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인 편이다. 성만찬의 빵으로 사용되어온 자료(속칭, 카스테라)는 지금 구미에서도 낯선 것으로 기독교 예배전통을 따른 것도 아니거니와 우리에게도 실상은 낯선 것이었다. 우리 문화 안에서 오랜 역사를 통해 잔치의 음식이며 의식(儀式)의 매개였던 떡도 아닌 것으로서 성만찬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도,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취급되기 어려운 형태를 띠고 있다.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선교 2세기에 접어든지 오래지만 찬송가의 대다수가 외국 곡조에, 외국가사로 된 것을 번역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세계교회와 동일한 곡조와 내용의 찬송가를 부른다는 것도 교회일치의 차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우리에게 친숙하고 우리의 정서를 반영하는 곡조가 희소하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예배의 문화적 변용의 문제는 우리 신학의 세계 신학에 대한 독자성을 확보하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고 회복할 수 있으며 예배의 효율을 높이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중심적 상징행위인 성찬은, 그 중요성을 감안해 볼 때 상응하는 적절한 문화적 변용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라고 본다.

 

나가는 말

 

오늘날 예배의 개혁에 대한 움직임 가운데 예전성의 회복을 통한 개혁의 필요를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예배에서 성찬의 비중과 가치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함께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평가의 근저에는 성찬의 단순한 행위보다도 그 행위가 동반하는 예배 신학적 가치에 대한 평가가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성찬과 관련된 해묵은 교리적 논쟁에 더하여 또 하나의 추가된 주장의 제시가 아닌, 그 속에 녹아 있는 오늘을 향한 예배의 소중한 원리와 내용에 대한 재발견을 독려하는 말이다.

성만찬의 4중 행위의 올바른 이해와 실행은 자칫 황폐해지거나, 왜곡되거나, 균형을 잃거나, 심지어 방향마저 상실할 수 있는 오늘 우리의 예배를 위한 필요한 좌표가 될 수 있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3장 세례예식 모델

 

들어가는 말

 

오늘날 세례예식에 대한 논의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로는 20세기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유아세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통해 유아세례에 대한 찬반의 입장이 확연히 첨예화되면서 세례예식에 대한 예전적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한국 예배학계에서 세례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이에 관한 연구물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세례예식에 관한 연구는 미진한 상황이다. 또한 현장 목회자들이 세례예식서를 사용하는데 실제적인 어려움이 있다. 특별히 한국장로교회(보수교단)의 세례예식서에는 단순히 순서만 제공되어 있지, 그 순서에 대한 설명과 예문이 풍부하게 제공되어 있지 않아 예식서를 사용하는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세례예식을 할 때 세례의 성경적 의미를 구현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뿐 아니라 형식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세례 예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필자는 먼저 세례의 성경적인 의미와 고대교회 예배문헌인 디다케(Didache), 저스틴의 제일 변증서(Apologie I) 및 사도전승(Traditio Apostolica)에 나타난 세례예식을 살펴본 후, 한국교회에 소개되지 않았던 독일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세례예식을 개관하여 비교 분석하면서,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를 위한 세례예식 모델을 제안하고자 한다.

 

1. 고대 교회 예배문헌에 나타난 세례예식

 

세례는 고대교회로부터 실행되었을 뿐 아니라(행 8:26ff.; 10:1f.) 또 고대 그리스도인을 위한 결정적인 예배사건으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게오르그 크레트슈마르(Georg Kretschmar)는 “만일 사람들이 3세기 그리스도인에게 교회의 중심이 되는 예배 행위에 대해 물어본다면 그들은 주일 성만찬이 아니라, 세례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세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신앙적 삶의 토대였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개념적으로 세례의 선물(Taufgabe)을 언급하였는데, 이것을 그레트라인은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첫째,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깊은 관계로 인간을 인도한다.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 동참하는 것으로 설명한다(롬 6:4). 이처럼 그는 로마서 6장에서 세례의 관점을 종말론적 사건으로 강조하고 있다. 둘째, 죄 용서함의 선물(롬 6:2, 6-11; 행 2:38)이 세례로 나타난 것처럼, 세례는 하나님을 향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열어준다. 세례는 수세자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수여한다. 셋째, 이에 따라 세례는 또한 직접적으로 윤리적 명령과 연결된다(롬 6:11ff.). 왜냐하면 세례는 새로운 삶의 결단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케 하기 때문이다. 넷째, 세례는 수세자들을 새로운 공동체로 가입시키는 예식이다. 세례를 통해 전통적인 신분과 성의 차별은 공동체 안에서 사라지게 된다(갈 3:28). 모든 세례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기 때문이다(롬 12장; 고전 12장).

그러므로 세례의 신약성경적인 의미를 요약하자면, 세례의 선물은 죄 용서함, 성령을 선물로 받음, 새로운 삶의 결단, 그리고 공동체로의 편입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고대교회는 이런 세례의 의미를 세례예식을 통해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먼저, 필자는 여기서 중요한 고대교회 예배문헌인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다다케)』, 저스틴의 『제일 변증서』, 『사도전승』에 나타난 세례예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디다케(Didache)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 부제가 붙은 『디다케』(Didache)는 2세기 초기에 기록된 것으로 초대 기독교 예배의 연구를 위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디다케는 총 4부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1-6장은 '두 가지 길의 가르침'(Zwei-Wege-Lehre), 즉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에 관한 것으로 세례후보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것이다. 제2부 교회 예전은 7-10장에서 다루고 있고, 제3부 교회 규범은 11-15장에서 다루고 있다. 제4부 결론부분에서는 기독교 삶의 종말론적 배경을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 외에 가장 오래된 세례에 관한 지침은 『디다케』 7장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세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세례를 주라: 먼저 이 모든 점들을 설명한 후에, 흐르는 물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그러나 만약 흐르는 물이 없으면 다른 물속에서 세례를 주며, 찬 물이 없으면 따뜻한 물속에서 세례를 주라. 그런 물들이 없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머리에 세 번 물을 부어라. 세례를 거행하기 전에, 세례 베푸는 자와 세례 받을 자가 세례를 위하여 금식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라. 세례 받을 자에게 세례받기 이전 하루나 이틀을 금식할 것을 요청하라”

 

7장 세례예식에 이어 8장은 주간 금식과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그리고 9-10, 14장은 성찬식 기도문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디다케』에 나타난 세례예식의 구조는, 먼저 세례 예비 과정으로 두 가지 길(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가르쳤고, 경건의 과정으로 세례를 위해 세례 베푸는 자와 세례 받을 자에게 금식을 하게 했으며, 세례예식으로는 흐르는 물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성찬식에 참여하게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디다케에 나타난 세례예식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세례교육을 위한 세례준비, 세례의식 및 세례 후 의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2) 저스틴의 제일 변증서(Apologie I)

약 2세기경에 저스틴은 『제일 변증서』(Apologie I)에서 예배와 관련된 자료를 취급했다. 총 68장의 내용 중에 61-67장은 예배와 관련된 것이다. 61-64장은 세례식에 관해, 65-66장은 성찬식, 67장은 주일의 준수에 관한 것이다.

저스틴은 『제일 변증서』에서 죄의 용서와 거듭남의 성례로서 세례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빛을 비추임’ 또는 ‘계몽, 깨달음’이라는 용어를 통해 세례를 설명하였다. 특별히 그는 세례에 있어서 교회의 신앙을 받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세례 받을 사람들은 신앙교육을 받고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훈련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전체 공동체가 참여한 가운데 기도와 금식으로 이루어진 세례 준비 과정을 거칠 것을 강조하였지만, 이때까지는 체계화된 세례후보자가 되는 구조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저스틴의 『제일 변증서』 61장에는 세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질 때 어떻게 하나님께 우리를 바치는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나의 설명에서 빼놓는다면 부족하다고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가 가르치고 말한 것이 참되다고 믿고 따르며 자신들도 그렇게 따라서 살 수 있다고 약속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과거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간구하는 것을 배우며, 그 동안 우리도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금식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되어 우리들이 거듭났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즉 그들은 아버지이시고 모든 것(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김을 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길,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한번 태어난 사람이 그들의 어머니 자궁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모든 사람에게 명백해졌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방법으로 세례를 주는 이유이며 이것은 사도들에 의해 우리들에게 가르쳐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음 태어나는 것을 전적으로 알지 못했으며, 우리 부모의 상호 연합을 통해 유동적인 씨로부터 숙명적으로 태어났고, 사악하고 죄 많은 관습으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숙명과 무지의 자녀가 아니라 사려 깊은 선택과 지혜의 자녀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물로써 지난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해서는, 거듭나기 원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 위에, ‘아버지이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요청되어) 불립니다. 세례 받는 사람을 세례반(font)에 인도하는 사람은 이 이름만으로 하나님을 불립니다. 왜냐하면 입에 올릴 수 없을 만큼 신성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았고, 만약 어느 누군가 하나님의 이름이 말해질 수 있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단언한다면 그는 희망이 없는 미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씻음은 조명이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배운 사람은 지적으로 조명되었기(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조명된(빛을 비추인,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또한,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예언자들을 통해 예수에 관한 모든 것을 예언한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의식에 관한 지침에 이어 65-67장에서는 세례 받은 사람이 교회 공동체에 입회하여 성찬식에 참여하는 모습과 성찬의식 및 주일에 관한 준수를 설명하고 있다.

저스틴이 언급하고 있는 세례의식의 주요 과정으로는 첫째 신앙교육, 둘째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포함하는 일종의 시험(Test), 셋째 일정한 기간의 공동적인 기도와 금식, 넷째 물에 잠겨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 다섯째 세례 이후 성찬식 참여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세례예식에 관한 형태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3) 사도전승(Traditio Apostolica)

『사도전승』(Traditio Apostolica)은 일반적으로 약 215년 로마에서 쓰여 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총 4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대교회의 예배생활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담고 있는 문헌이다. 『사도전승』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부분(1-14장)은 안수에 대해, 둘째 부분(15-24장)은 세례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 부분(25-43장)은 그리스도인들이 준수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특별히 『사도전승』 15-21장에서는 상세히 세례 예비 과정과 세례예식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전 과정은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 세례 예비 과정(Katechumenat)

첫째, 세례받기를 원하는 자가 세례교육을 시키는 사람에게 인도되어 세례 피교육자로서 세워진다(15-17장). 이때 세례 피교육자는 지원한 동기, 신앙인으로서의 포괄적인 자격, 그리고 가족 사항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경우에 따라서 피교육자는 자신의 직업을 바꾸거나 혹은 생활습관의 결정적인 변화를 각오해야한다.

둘째, 교사(doctores)는 이들을 시험하는 대화 파트너였으며, 세례 예비 과정 동안 신앙교육자로서의 책임을 맡는다. 먼저 피교육자 스스로가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 구성원에 속한 보증인은 교사에게 그들을 소개한다. 터툴리안은 그들을 후원자(sponsores)라고 했으나, 이후에 일반적으로 대부(Paten)라고 칭했다.

셋째, 말씀을 듣는 기간이다(15-17장). 선제 조건이 긍정적으로 충족된다면 세례 예비 과정, 즉 신앙교육이 시작된다. 신앙교육의 내용과 목표는 교회의 신앙을 배울 뿐 아니라 동시에 신앙으로 사는 것을 배운다. 일반적으로 이 기간은 3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배움에 열성적인 사람은 기간에 좌우되지 말고 오직 생활에 따라 판단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넷째, 이 기간에 실행하는 예전의 모습이다(18-19장). 세례 예비 과정은 예배행위를 통해 강조된다. 각 신앙교육은 기도로 마친다. 먼저 세례예비자 자신이 기도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평화의 입맞춤과 함께 기도를 마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맞춤은 아직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육 후에는 교사가 세례후보자들 위에 안수한 다음 기도하고 그들을 보낸다. 이것은 성직자(Kleriker)가 가르칠 때나 평신도가 가르칠 때나 동일하게 실행한다.

(2) 직접적인 세례준비

첫째, 세례를 받는 이들을 위한 허락과 시험이 있다(20장). 세례예비자들이 교육기간 동안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았을 경우 교회로 받아드리는 가입예식은 세례예비자들과 함께 경축되어진다. 여기서 이미 세례예비자를 위해 자청했던 후견인들은 교육기간 동안에 있었던 그들의 생활에 대해 교사에게 다시 증언한다. 후견인은 인도한 예비자에 대해 계속 책임을 지고 도와주며 권고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둘째, 가입 경축에 대한 직접적인 준비는 복음을 듣게 하는 것이다(20장). 시험과정에 통과된 사람들은 가입 경축을 위해 선별된 자들이다. 그들은 이제 교회의 말씀예전에 참여할 수 있다.

셋째,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예전이 진행된다(20장). 시험에 선별된 다음부터는 매일 구마식(축귀)을 하는데, 그 때마다 그들 위에 안수한다. 세례일이 가까운 목요일에는 세례지원자는 목욕하며 자기를 깨끗이 한다.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금식을 하며 특히 토요일에는 기도, 무릎 꿇음, 안수 및 비숍을 통한 구마식(축귀)에 이어 그들의 얼굴에 숨을 내쉬고, 그들의 이마와 귀와 코에 (십자가) 표시를 한 다음 그들을 일어서게 한다. 그들은 밤새 깨어 있으면서 성경낭독과 가르침을 받는다.

(3) 세례예전

첫째, 세례예전은 『사도전승』 21장에 묘사되어 있다. 세례예식은 수탉이 울 시각에 먼저 (가능한 깨끗하고 흐르는) 물에 기도하면서 시작한다. 후보자의 몸에 기름을 바르고 그가 물속에 들어가지 전에 후보자는 탈의(脫衣)한다. 옷을 벗고 탈의(脫衣)한 다음. 어린이, 남자, 여자(장신구를 하지 않는다)의 순서로 세례를 받는다.

둘째, 세례를 베풀기 위한 정해진 시간이 되면, 기름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구마식(축귀)을 한다. 이후 세례는 후보자의 신앙고백과 함께 베풀어지는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다.

 

“세례 받는 사람이 물속에서 잠기게 될 때 세례를 주는 사람이 세례 받는 자에게 손을 얹고 묻는다: 당신은 하나님, 능력의 아버지를 믿습니까?

세례 받는 자는 대답 한다: ‘나는 믿습니다.’

세례 주는 자가 받는 자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첫 번째 (물 속에 잠기게 하며) 세례를 준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성령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 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제 삼일에 일어나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시어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을 믿습니까?

세례 받는 자는 대답 한다: ‘나는 믿습니다.’

세례 주는 자가 받는 자에게 두 번째 세례를 준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당신은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몸의 부활을 믿습니까?

세례 받는 자가 ‘나는 믿습니다’고 대답하면 세례 주는 자는 세 번째 세례를 준다.”

 

신앙고백과 함께 세례를 받은 후 후보자는 물에서 나온다. 장로는 기름을 그에게 바르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성유를 바릅니다”라고 말한다. 이후 한 사람씩 몸을 닦고 옷을 입게 한다.

셋째, 세례 이후의 의식들은 계속해서 교회에서 이루어진다.

먼저 감독은 수세자들에게 안수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이들을 성령의 재생의 목욕을 통하여 죄사함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게 하신 주 하나님, 당신의 은총이 이들에게 내려 주시어 당신의 뜻에 따라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영광이 아버지 당신께 성령과 함께 성자께 성 교회 안에서 이제와 세세에 있어지어다. 아멘”

 

이후 감독은 자기 손에 성화된 기름을 붓고 수세자의 머리에 안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능하신 주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성유를 당신에게 바릅니다.”

 

그리고 이마에 십자 표시를 하고 입맞춤을 하면서 “주께서 당신과 함께”라고 말하면 표시를 받은 사람은 “또한 당신의 영과 함께”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각 사람들에게 한다. 이후 수세자들은 비로소 회중과 함께 기도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모든 예식을 받기 전에는 신도들과 함께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 후에 평화의 입맞춤을 한다.

넷째, 공동체의 기도와 함께 유카리스트 경축이 이루어진다. 이 경축은 교회 기도모임의 최상의 형태이다. 수세자는 유카리스트 경축에 처음으로 참여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감독은 빵을 떼기 전에 강론(Homilie)을 한다. 이후 빵, 포도주가 있는 잔, 물이 있는 잔 및 우유와 꿀이 있는 잔이 그들에게 건네주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히폴리투스 『사도전승』에 언급된 엄격한 세례교육과 상징을 통한 예전은 그 풍성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런 상징적 예전의 집행을 통해 직접적으로 세례의 의미와 중요성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세례 예비 과정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대한 심리적 입문서 외에 금식과 씻음과 같은 실제적인 행위를 포함했다. 후보자들은 이틀을 금식하고 철야를 한 이후, 아침에 강가로 발걸음을 옮겨 거기서 씻으며 기름을 바르고, 교회 안에서 마지막으로 평화의 입맞춤과 성만찬을 경험하였다. 세례는 이와 같이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날을 형성하는 사건이었다. 이 날은 죽음 가운데서도 위로를 줄 수 있었다.

구마식(축귀) 혹은 사탄을 거부하는 행동은 현대인들을 조금 놀라게 만든다. 그러나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타(他) 종교적인 환경으로 인해 신앙이 약해질 수 있는 위험을 잘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을 위협적인 것으로 인식하였고, 따라서 이에 반하는 자기들의 공동체를 구원의 장소로 인식한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이런 세례교육과 예식을 거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신학적, 역사적, 교육적, 예전적 한계로 인하여 실시하기에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교회에서 실시했던 세례교육과 예전은 한국교회에도 시사 한 바가 크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4) 이상의 고대교회의 중요한 세례문헌을 살펴볼 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2세기 이래 로마와 북아프리카에서 대체적으로 일치한 세례 프락시스(Praxis)를 거행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로의 가입을 위한 선제조건이었으며, 충분한 세례 준비시간을 가지고 있었다는 특징 및 가입의식의 신학적 의미와 구성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독일교회의 세례예식

 

1) 독일 루터교회 세례예식

첫째, VELKD(독일의 개신교 루터교회)는 1988년 새로이 세례예식서를 출판했다. 여기에서는 두 부분을 제시하고 있는데, “어린이 세례”와 “성인세례 혹은 나이든 어린이(청소년) 세례”이다. 또한 두 가지 “세례와 결혼예식”이 첨가되어 있다. 이와 함께 세례 연령에 따라 세례 프락시스(Praxis)를 거행할 수 있도록 분리하여 세례예식을 제시하고도 있다.

어린이 세례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의 두 가지 형식을 제공하고 있다. 첫 번째 형식은 전통적인 언어로 되어있다. 신앙고백 때에 (자녀의 신앙이 아닌) 부모의 신앙이 중요하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두 번째 형식은 매우 가정 지향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기억하게 하는 환영인사와 함께 시작한다.

 

“사랑하는 교회공동체와 사랑하는 〇〇〇의 부모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자녀가 교회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이제 이 아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위탁되며, 전(全)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이 됩니다.

(여기에서 각 가정의 특별한 상황을 짧게 설명한다, 예를 들어: ...)

여기에 있는 어린이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의 기적을 새롭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 어린이들은 지금 이미 한 인격체입니다. 어린이가 온전히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은사와 재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함께 그의 길을 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이 어린이와 그의 전(全) 삶을 위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합시다”(51f.).

 

부모와 대부의 신앙에 대한 질문은 생략되었고, 공동체 전체가 신앙고백(Credo)을 말한다. 부모와 대부는 자녀를 기독교적으로 양육하고자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여기에서는 고대 교회에서 행했던 악령에 대한 거부(구마식)를 하지 않는다.

또한 “세례수(洗禮水: 세례용 물)에 관한 숙고”와 함께 루터의 대홍수기도와의 연결이 새로운 것이다. 이러한 숙고는 네 가지 형태 안에서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요소의 표징적인 특징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성경적 동기들을 증거로 인용하다.

성인세례 혹은 어린이 세례(늦은 세례)를 위한 제안의 경우에는 새로운 출발점이 보다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여기에는 ‘세례의 핵심 요소’(세례 명령, 신앙고백, 세례문답, 물 행위, 세례 축복)는 필히 행해져야하며, 또한 성만찬 경축은 공동체로의 융합의 표징으로 세례와 함께 실행할 것을 추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례행위에 대한 지금까지의 전통과는 반대로, 짧은 인사말을 하도록 제안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세례 자체가 ‘설교’로서 이해되고 있다(111f.). 하지만 이 예식서에 따르면, 세례의 상징적 중요성이 단지 매우 적게 수용되었다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둘째, EKU(개신교 연합교회)는 2000년 그들의 세례예식서를 개정하여 『세례서』(Taufbuch)를 출간하였다. 여기에는 신학적 토대, 예전의 구성에 관한 질문, 그리고 목회적인 관점들이 상세히 묘사되었다. 세례서는 근본적으로 “초대, 연습 그리고 성숙의 체류지와 함께”(20)라는 세례과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대교회적 출발점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수세자의 연령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책임 있게 적용된 어린이세례의 경우 다음과 같은 세례과정이 있다. 세례 세미나, 세례 대화, 대부 임명 등과 같은 세례준비단계를 걸친 이후, 세례를 받는 주일날 부모와 대부(모)들은 ‘세례 성례전’을 위해 초대받는다. 계속해서 젊은 부모들을 위한 대화, 예배의 세례-회상(참회, 부활절 밤에서의 세례에 대한 기억, 함께 경험되는 세례) 그리고 견신자-부모 모임은 가정에서의 경건 실제를 위한 도움과 이를 실행하도록 제공하며, 영아로서 세례 받은 어린이는 가정에서의 경건 실제를 통해 점진적으로 신앙으로 자라게 한다.”(20)

 

세례서 초안에 따르면, 세례예식은 다양한 장소에서 실시된다. 예를 들어, “도입부분에서의 개회 -> 설교단과 독서대에서의 선포 -> 세례반에서의 세례 -> 제단에서의 파송이다”(세례서 초안 17). 이것은 2000년에 승인된 최종안에서 단지 가능한 것으로만 애매하게 언급하고 있어서(22), 감성적이며 경축적인 구성을 상호 관련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세례 회상을 통한 세례예식의 특징과 세례의 예전구성에 관한 노력은 성경적 관점에 적합한 세례 프락시스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여기서는 상황에 따라 풍성한 예전을 실행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특히 기름 바름(도유식), 에바다 의식, 세례촛불 그리고 세례예복(흰 가운)을 입히는 것은 가능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례서는 부록으로 “간구기도, 감사의 말씀, 어린이 축복”(144f.)에 대한 언급, “간구기도와 어린이 축복과 함께 감사의 말씀”(145-149)을 위한 서식 및 “어린이 출생에 대한 감사의 말씀과 간구기도”(150-152)를 위한 서식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세례예식서에서 세례가 독립적인 세례예배로 실행되지 않는 것은 고려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례가 단지 공동체 예배의 예전 안으로 ‘끼워 넣는’식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립적인 예전 행위로서의 세례의 적합한 구성을 어렵게 한 것이다.

 

2) 독일 개혁교회 세례예식

 

독일 개혁교회는 1999년 『개혁파 예식서』(Reformierte Liturgie)를 출간하였다. 여기에는 세 가지 주일 공(公) 예배순서, 어린이 세례예식과 성인 세례예식, 성찬예식, 기타 생애사와 관련된 예식 등을 제공하고 있다. 세례예식에는 어린이 세례예식, 스코틀랜드 교회의 어린이 세례예식 및 성인 세례예식과, 세례를 위한 기도문을 포함하고 있다.

개혁파 예식서에 따르면, 인간은 세례를 통해 기독교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그의 공동체에게 주었던 모든 약속에 관여한다. 세례는 개혁교회에서 일정한 연령층과 연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아를 포함한 어린이세례와 성인세례를 위한 예식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세례예식은 인간을 위해 죽으신 주님과 연결되며 동시에 공동체로의 가입의식이기에 그러한 예전집행이 분명히 나타나야 한다. 세례는 가정적 축제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모임 즉, 예배에 속한다. 동시에 각 세례행위는 이미 세례를 받았던 공동체 구성원을 위한 세례회상인 것이다. 그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9문답에서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하나의 희생제사가 개인적으로 당신을 위한 것임을 세례가 어떻게 상기시켜주고, 확신을 줍니까?” 이에 대한 답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외적인 씻음을 제정하셨고 이와 함께 마치 물이 몸에서 더러운 것을 씻듯이 그의 피와 성령님이 분명히 내 영혼의 정결치 못함을, 다른 말로 하면 나의 모든 죄를 씻으시리라는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례회상은 수세자들의 모임에 대해 연령에 적합한 참여를 배려할 때 잘 나타날 수 있다. 세례예식에 동참하는 것은 수세자 자신의 존재를 회상하는데 최상이다. 세례는 공동체예배 안에서 실행해야할 뿐 아니라 공동체예배 그 자체다. 만일 세례가 예배에서 실행된다면 성인과 어린이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어야하며 이를 통해 세례를 회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세례예식은 공동체예배에서 설교 전 혹은 설교 후에 실행할 수 있다. 세례를 설교 전에 실행한다면 직접적으로 도입찬송 이후 실행하게 된다. 세례기도는 도입기도 대신에 할 수 있으며, 세례제정의 말씀은 성경낭독을 대체한다. 신앙고백은 세례예식 안에서 한다. 주기도문은 세례행위와 연결될 경우 간구기도 이후 생략한다. 설교 후 찬송은 세례 이후 부른다. 세례예식을 시작하기 위한 세례선언은 세례의 의미를 진술하기 위해 세례예식이 시작하는 것을 알리는 것이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자유롭게 세례선언을 할 경우에는 예식서에 제시된 것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세례예식이 설교 이후에 실행한다면, 세례는 설교 후 찬송에 이어하면 될 것이다. 신앙고백은 세례예식 안에서 말하며, 세례 후 기도는 감사기도와 간구기도와 연결된다.

가시적인 말씀으로서의 세례는 개혁교회에서 말씀 설교자가 집례하게 되어 있다. 유아가 세례를 받을 때에는 어린이가 문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대부모)가 질문에 대답을 한다. 청소년과 성인의 경우에는 스스로 대답을 한다. 이에 대한 예문은 예식서에 제시되어 있다.

교회의 예전전통에는 세례의식을 발전시킨 의식들, 즉 기름 바름, 세례예복의 수여, 세례 초의 수여, 십자가 표지와 함께 하는 특징, 에바다 의식 등이 있다. 하지만 개혁파 세례예전에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물을 붓는 세례의 중심 행위가 손상될 위험 때문에 이와 유사한 행위를 포기했다. 그러나 세례를 집행할 때, 세례의 신학적 내용을 강조하거나 훼손하지 않는다면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개혁파 예식서에서는 고대 교회나 루터교회와는 다르게 세례의 상징적 행위를 크게 고려하지 않고 세례예식의 단순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세례의 상징적 행위를 지나치게 강조했던 중세교회 세례예식에 대한 반작용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개혁교회 세례예식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어린이 세례예식이다.

〔찬양〕 - 도입 - 제정의 말씀 - 기도 - 세례선언 - 〔찬양 혹은 시편〕 - 신앙고백 - 세례문답 - 세례행위 - 권면 - 〔회중과의 서약〕 - 기도.

둘째, 어린이 세례예식(스코틀랜드 교회)이다.

〔찬양〕 - 제정의 말씀 - 세례선언 - 신앙고백 - 기도 - 서약 - 세례행위 - 축복 - 부모와의 서약 - 회중과의 서약 - 기도 - 주기도문.

셋째, 성인 세례예식이다.

〔찬양〕 - 인사 - 제정의 말씀 - 기도 - 세례선언 - 〔악령에 대한 거부〕신앙고백 - 〔기도 혹은 세례반에서의 생각〕 - 세례문답 - 세례행위 - 권면 - 〔세례약속〕 - 회중에 대한 인사의 말 - 수세자에 대한 인사의 말 - 기도.

 

3) 독일교회 세례예식의 비교 분석

 

독일 개혁교회의 어린이 세례예식과 성인 세례예식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고대교회의 세례예식과 독일 루터교회와 비교해보면 매우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예전의 상징적 요소를 축소하여 발전시켰다. 루터교회 세례예식은 세례의 핵심 요소(세례 명령, 신앙고백, 세례문답, 물 행위, 세례 축복)는 필히 행하며, 또한 성만찬 경축은 공동체로의 융합의 표징으로 세례와 함께 실행할 것을 추천하고 있다. 그것은 고대 교회에서 실행했던 세례예식의 요소들을 수용 발전시킨 것이다. 그 예로 기름 바름(도유식), 에바다 의식, 세례 촛불 밝히기와 세례용 의복(흰 가운)을 입히는 것은 가능한 것으로서 제안하고 있다.

이와는 다르게 독일 개혁교회 세례예식은 한국장로교회 예식서(합동, 통합교단)와 유사하게 단순예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차이점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신앙고백이 세례예식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합동교단 세례예식에는 신앙고백의 순서가 없다. 물론 신앙고백은 공 예배순서에 제시되어 있으므로 예배 중에 하는 세례예식에는 이 순서를 두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전사적 연구를 통해서 보면, 신앙고백은 세례예식 중에 하는 것이 통례적이다. 그러므로 세례예식 중에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세례예식 중에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순서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통합교단의 경우, 세례예식에는 두 가지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다. 먼저, 주일 공예배시에 행하는 세례예식의 경우에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다. 이는 이미 합동교단 표준예식서처럼 예배 중에 신앙고백의 순서가 있기 때문에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찬양예배 또는 기타 예배 중에 실시하는 세례예식에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도록 제시되어 있다. 추측컨대 찬양예배 또는 기타 예배 중에 라는 의미는, 주일 저녁예배 혹은 세례예식이 중심 되는 예배를 의미한 것으로 보이므로, 세례예식을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에는 세례예식 중에 신앙고백을 하도록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통합교단 세례예식은 두 모델을 제공하여 목회현장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둘째, 악령에 대한 거부(구마식)의 순서는 개혁교회 성인세례 중에 필수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임의적인 요소로 제안하고 있다. 이 순서는 사도전승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장로교회(합동, 통합교단) 세례예식에는 없는 순서이다.

셋째, 세례반에서의 기도 순서 역시 독일 개혁교회 성인세례 중에 필수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임의적인 요소로 제안하고 있다. 독일교회에서는 세례반이 예배당 안에 있어서 이러한 순서를 갖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한국장로교회에서는 예배당 안에 세례반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순서를 실행하지 않는다.

넷째, 회중과의 서약 순서이다. 독일 개혁교회 어린이 세례예식의 경우 부모에게 서약을 받을 뿐 아니라 회중들에게도 서약을 받는다. 성인세례의 경우에도 회중에게 서약을 받는다. 그것은 세례가 공동체 일원이 되는 의식이므로 회중의 서약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합동교단의 세례예식에는 이 순서가 없으며, 통합교단의 경우, 주일 공(公) 예배 중에 실시하는 세례예식에는 이 순서가 없고 찬양예배 또는 기타 예배 중에 하는 세례예식에는 회중과의 서약과 회중의 응답 순서가 있다.

 

3. 한국교회를 위한 세례예식 모델

 

필자는 위에서 고대교회의 예배문헌에 나타난 세례예식과, 독일 루터교회와 특히 개혁교회 세례예식을 상세히 분석하면서 한국장로교회(합동, 통합교단) 세례예식과도 비교하였다. 루터교회의 경우, 고대 교회 세례예식으로 회귀하려는 흔적과 그들의 유산을 지키려는 세례예전의 긍정적인 면을 찾을 수 있었다. 아울러 독일 개혁교회는 중세교회의 세례예전에 대한 반작용으로 세례의 상징적, 심미적 요소들을 배제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부분적이지만 고대교회의 세례예전을 수용 발전시켰다. 따라서 필자는 개혁교회 전통에 서 있는 한국장로교회를 고려하면서, 고대교회의 세례 예전적인 유산을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비평적으로 재구성할 뿐 아니라, 또한 독일 루터교회와 특히 개혁교회의 세례예식을 참조하여 세례의 성경적, 신학적, 예전적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세례예식 모델을 제안하고자 한다. 여기서 또한 미국장로교회(PCUSA) 세례예식을 참조하였다.

 

1) 유아 세례예식의 실제

세례예식은 주일 공예배시에 성만찬과 함께 이루어지도록 구성하였다. 여기서 세례예식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설교 전에 실시하는 것과 설교 이후에 실시하는 경우이다.

설교 전에 실시할 경우는, 세례 -> 설교 -> 성만찬 순으로 이어진다. 둘째, 설교 후에 실시하는 경우에는, 설교 -> 세례 -> 성만찬 순으로 이어진다. 말씀부분과 성례부분이 함께 이루어지므로 설교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필자는 여기서 주일 공 예배 순서 전체, 즉 예배의 도입부분과 말씀부분 및 성만찬 순서를 제시하지 않고, 다만 세례예식만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 세례예식에는 유아세례를 받을 유아의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예식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를 들면 대표기도, 부모의 신앙 간증문 낭독, 그리고 찬양 순서를 담당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집례자는 보호자와 어린이를 미리 앞자리에 앉게 하고 예식에 따라서 진행한다)

 

* 인사

 

집례자가 어린이 이름의 뜻과 부모의 비전을 말한다(이에 관한 정보는 세례교육과정 중에 입수한다).

 

※ 찬양(모두가 익숙한 곡으로 혹은 세례교육 때 주제곡으로 선택한 것을 부름)

 

* 제정의 말씀

 

집례자 혹은 부모 중에서 다음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 식사(式辭)

 

세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녀됨을 약속하는 증표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의지나 선한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성령님을 통해 새롭게 거듭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베풀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례를 거행합니다.

우리의 삶도 죽음도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거행합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며 위로하시며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에 성령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거행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아직까지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보증하셨기에,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과 공동체에 속하게 될 것을 약속하심을 믿습니다.

세례는 하나님 언약의 증표입니다. 이 증표는 더 이상 폐지될 수 없습니다. 이 증표는 믿음이 불확실하게 될 때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을 다시금 확신하도록 해줄 것입니다.

 

* 신앙고백(혹은 신앙 고백문 낭독)

 

사도신경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혹은 이미 교육과정 중에 과제로 내주었던 신앙 고백문 중에서 낭독할 수 있습니다.

 

* 서약과 고백(부모와 회중에게)

 

개별적으로 아이의 부모와 회중에게 서약을 받는다.

유아세례는 부모의 신앙고백으로 자녀가 세례를 받을 뿐 아니라 공동체가 이 어린이의 신앙교육을 함께 책임을 지겠다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어린이가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신앙교육을 받으며 아울러 공동체로부터 신앙교육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의식임과 동시에 이에 대한 신앙적 교육 책임을 공동체도 함께 지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문 : ○○의 부모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 아이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기를 원하며 믿음으로 교회 안에서 자라나기를 원합니까?

답 :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문 : 여러분은 친히 경건의 본을 보이기를 힘쓰며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양육할 것을 서약합니까?

답 :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문 : 사랑하는 교우여러분에게 묻습니다.(큰 소리로 서약해주십시오)

이 어린이가 여러분을 신뢰할 수 있는 인생의 안내자로서 그의 길을 동행해주며, 이 어린이를 위해 기도하며 돌보아줄 것을 서약하십니까?

답: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 기도

 

가족(친인척과 구역식구)들이 앞으로 나아간다.

 

* 세례

 

집례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물을 찍어 어린이 머리 위에 얹어 세례를 베푼다. 이때 가능하다면 많은 물을 머리위에 부어주면 좋다. 그리고 물이 흐르는 것을 닦기 위해 미리 깨끗한 수건을 준비해두면 좋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의 자녀 ○○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멘.

 

※ 축복의 안수

 

여기서는 개별적으로 축복의 안수를 합니다. 아론의 축도와 또 다른 축복의 형태를 제시하였다. 선택하여 축복할 수 있다.

 

“〔주〕여호와는 네가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주〕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주〕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5).

 

세례촛불

 

목사(혹은 회중 대표자나 장로)가 세례 초에 불을 점화하고 부모(성인세례의 경우 수세자)에게 건네준다.

 

세례촛불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이 어린이를 동행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게 세례촛불을 건네주고자 합니다.

세례촛불은 ○○의 삶 가운데 어두움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한 상징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 축복송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보호자와 친인척들은 어린이를 안고 예배당을 순회하는 집례자 뒤를 따른다. 이때 교우들은 손을 들어 축복송을 부르면서 환영한다.

 

축복송이 끝나면 교우들이 준비한 선물을 건네준다.

 

* 공포

 

○○는 지금부터 ○○교회 유아세례교인이 된 것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라. 아멘.

 

* 기도

 

하나님,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 ○○ 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주께서 이 자녀들을 축복하여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이 자녀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기쁨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그의 삶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

환난과 두려움에서 지켜 주옵시고, 늘 기쁨과 자랑이 되게 축복하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주님의 가정들을 축복하사 늘 기쁨과 사랑 가운데 화목할 수 있도록 지켜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후의 순서로...

 

설교 전에 세례예식을 거행했다면 설교로 이어지며, 설교 이후에 세례예식이 거행된다면 성찬식으로 혹은 헌금 순서로 이어진다.

 

2) 성인 세례예식의 실제(주일예배 중)

 

성인 세례예식은 유아 세례예식과 유사하게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특별히 유아세례와의 차이점은 서약 부분인데, 이 순서의 내용은 각주로 처리하였다.

인사 - ※ 찬양 - 제정의 말씀 - 세례 식사(式辭) - 신앙고백(혹은 대표: 신앙고백문 낭독) - 서약 - ※ 기도 - 세례 - ※ 축복의 안수 - 세례촛불 - 축복송 - 공포 순으로 이어진다. 설교 이후 세례예식이 거행된다면 성만찬으로 이어진다.

 

나가는 말

 

한국교회에서 활발히 개진되고 있지 않은 세례예식 모델을 관한 한 예를 필자는 본 논문에서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성경적인 관점에 따른 세례이해를 살펴보았다. 죄 용서함이라는 세례의 선물, 성령을 선물로 받음, 새로운 삶의 결단 그리고 공동체로의 편입이 곧 그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실제로 고대교회의 세례예식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고대 교회 예배문헌인 디다케(Didache), 저스틴 제일 변증서(Apologie I) 그리고 히폴리투스 사도전승(Traditio Apostolica)에 나타난 세례예식을 통해 살펴보았다.

특히 사도전승에서 나타난 세례예식은 단순하며 형식적인 예식이 아니라 3년간의 세례교육을 통한 철저한 신앙고백 하에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실시한, 공동체 일원이 되는 예식이었다. 즉 세례교육은 엄격했으며, 세례예전은 상징을 통해 풍부하게 구성되었다. 사람들은 상징적 예전 집행을 통해 직접적으로 세례의 의미와 중요성을 경험할 수 있었다. 엄격한 세례를 주기 위해 세례 예비 과정을 두었다. 이 과정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대한 심리적 입문서 외에 금식과 씻음 같은 실제적인 행위를 포함했다. 세례후보자들은 세례를 받기 전 이틀 동안 금식하고 철야를 한 이후, 아침에 강가로 발걸음을 옮겨 거기서 씻으며 기름을 바르고, 교회 안에서 마지막으로 평화의 입맞춤 그리고 성만찬을 경험하였다. 이처럼 세례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날을 형성하는 사건이었다.

필자는 고대교회의 세례예식이 오늘날 어떻게 독일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에 의해 변형 발전되었는지를 비교 분석하였다. 루터교회 세례예식은 세례의 핵심 요소(세례 명령, 신앙고백, 세례문답, 물 행위, 세례 축복)를 실행하며, 또한 성만찬 경축은 공동체로의 융합의 표징으로 세례와 함께 실행할 것을 추천하고 있다. 그것은 고대교회에서 실행했던 세례예식의 요소들을 수용 발전시킨 것이다. 그 예로 기름 바름(도유식), 에바다 의식, 세례 촛불 밝히기와 세례용 의복(가운)을 양도하는 의식이 가능한 것으로서 제안하고 있다. 이에 반해 독일 개혁교회 세례예식은 그들의 신학적 토대 위에서 고대교회 세례예전을 부분적으로 수정 발전시켰지만, 대체로 단순예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한국장로교회(보수교단 합동교단과 통합교단) 세례예식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신앙고백이 세례예식 안에 있다.

둘째, 악령에 대한 거부(구마식)의 순서는 독일 개혁교회 성인세례 중에 필수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임의적인 요소로 제안하고 있다.

셋째, 세례반에서의 기도 순서인데, 이것도 독일 개혁교회 성인세례 중에 필수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임의적인 요소로 제안하고 있다.

넷째, 회중과의 서약 순서이다. 독일 개혁교회 어린이 세례예식의 경우 부모에게 서약을 받을 뿐 아니라 회중들에게도 서약을 받는다. 성인세례의 경우에도 회중에게 서약을 받는다. 그것은 세례가 공동체 일원이 되는 의식이므로 회중의 서약을 요구한 것이다.

필자는 고대교회의 세례예식과 함께 독일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세례예식을 비교 분석하면서 한국교회를 위한 세례예식 모델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고대교회의 세례예식과, 독일 루터교회와 특히 개혁교회 세례예식을 비평적으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필자의 바람이 있다면, 이러한 시도를 통해 한국교회를 위한 세례예전 모델이 다양하게 전개되기를 바란다.

 

 

제4장 세례의 성경적 관점

 

1.신약성경에 따른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세례 의미

 

1)세례의 보편성

오순절 사건 이후 초기의 교회 공동체에서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다. 베드로는 구원의 전제로 세례를 받을 것을 권하였고(행2:38), 사도바울은 모든 신자가 세례를 받은 것을 전제로 교회의 하나됨을 주장하였으며(고전12:13), 세례를 받은 이후에야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행8:12, 36; 9:18; 10:44이하 16:15, 33; 19:5; 롬6:3)

 

2)세례의 중요성

(1)전문 용어로써 사용된 baptizo는 신약성경에 77회 나타나고 있다. 사용된 빈도수 면에서는 복음서보다 오순절 사건 이후의 초대교회에서의 언급이 더 희박하다. 그러나 이는 세례가 초기 교회공동체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에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2)초기 교회 공동체에서의 세례의 중요성은 세례에 대한 신학 견해가 초기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비록 교리적인 체계성은 발견할 수 없지만 세례에 대한 신학적 견해에 대한 상호 문제제기가 거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2.세례의 역사적 근거

1)요한의 세례

(1)초대 기독교 세례와의 공통점

①물을 사용하였다.

②수동적으로 세례를 받았다.

③단회적이며 회심을 촉구한다.

 

(2)요한의 세례와 당시의 성인예식과의 차이점

①요한에 의한 단회성과 회심의 강조는 구약성경의 정결법(레11-15)과 구별됨

②유대교의 개종세례는 자(自)세례로서 요한이 행한 수동성 세례와 구별됨

③쿰란 공동체의 예전적 목욕은 반복행위로서 요한의 세례의 단회성과 구별됨

④세례종파와 요한의 세례는 전혀 관계가 없음

 

(3)요한의 세례와 기독교 세례와의 차이점

①기독교 세례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교회로의 수용예전을 묘사하는 반면 요한의 세례는 공동체 교육(입문)에 관련이 없다.

②요한의 세례에서는 성령의 수여에 관한 언급이 없다.

③기독교 세례는 공개적으로 처음부터 “예수 이름으로”베풀어졌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와 초대 기독교 공동체 사이에 관계가 있었으며 객관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확실하나, 요한의 세례가 위의 결정적인 차이 때문에 기독교 세례의 모형으로서 적합하지 않으며 기독교 세례의 기원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2)요한을 통한 예수의 세례

요한의 세례가 기독교 세례의 기원이 될 수 없는지에 대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①공간복음서(막1:9-11; 마3:13-17; 눅3:21f)에서 기독교 세례의 유래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세례를 받으신 행동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사명에 대한 순종의 의미였다.

②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과 오순절 이후의 세례 사이의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유일한 연결점이 될 수 있는요한복음 3:22-24의 기사에서 조차 예수님과 제자들의 세례를 주는 사역이 후대의 기독교 세례와도 다르며 요한의 세례와도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이 세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방향이 맞추어서 있으며 구원하시는 자에 대한 순종의 반응으로서의 세례의 의미가 있다.

 

3)예수의 세례의 활동(요3:22-24)

①한때 많은 학자들은 이 본문이 후대에 있었던 교회와 요한의 추종자들 간의 경쟁적 사역의 반영물이라고 여겼다. 즉 ‘예수 세례 활동 언급은 분명하게 세례자로서의 요한에 의한 예수의 우위권을 강조한 것 뿐’ 기독교 세례실제를 확증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②그러나 지금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을 요한복음 기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 전승의 잔존물로서 보며 이것을 요한의 세례와도 동일하지 않으며 후의 기독교 세례와도 동일하지 않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예수님에 대한 순종의 반응으로서의 특별한 세례로 본다.

③그러므로 예수의 세례활동에 근거한 초대 기독교외 세례 기원으로 적절하지 않다.

 

4)마태복음 28:19

①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으로 세례에 대하여 명령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초대 기독교 세례행위의 역사적 유래로 보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②이 문장의 첫 번째 분사는 주동사 ‘제자를 삼으라’(마쎄투사테)앞에 있는 ‘가라’(포루센테스)이다. 두 번째 분사가 ‘세례를 주라’(밥티존테스)이다. 이것의 기능은 추가적인 명령을 말하는 것이다. 즉 가라, 세례를 주라, 가르치라는 것은 종속적인 기능이며 이는 제자를 삼는 것에 대한 하나의 요소로 명령되고 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 전체를 통해 요한의 세례를 두 번 언급한 것 말고는 기독교 세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③핵심주제가 세례를 제정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임된 선교사역의 전체적인 입장의 목격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논제는 다른 복음서(눅24:36-49; 요20:19-23)의 예수의 현현의 보고에 관한 비교를 통해 더 강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기독교 세례는 이러한 전통에서 공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④따라서 세례의 직접적인 유래로는 근거가 희박하지만 예수님의 이 명령은 부활자의 명령이라는 점에서 초기 공동체에서의 기독교 세례의 실제에 대한 연결고리가 된다.

 

5)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①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기존의 세례에 대한 전반적인 변형이 있었으며 이것이 초기 기독교 세례의 실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강력한 증거들이 있다.

②앞에서 언급한 마28:19의 예수님의 명령은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분명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의 역사성 자체를 부인하지만 초대교회의 세례에 대한 관습은 이 말의 역사성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참조. 행2:38, 41; 8:12, 38; 9:18등등)

③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이후 부활 사건까지의 세례에 대한 긴 공백과 더불어 부활 사건 이후 요한의 세례가 ‘주의 이름으로’하는 기독교 세례로 큰 변화를 겪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권위로 인한 결정적인 무엇인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것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통해 설명될 수 있는 일반적인 세례실제를 초대 공동체에서 시작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④신약성경에서 묘사된 세례에 대한 이해와 적용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세례에 대한 실제에 대한 묘사는 초기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권위로 시행되는 세례의 실제에 대한 강한 공감대가 있었음을 암시하는데 이 이유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이다.

 

⑤세례의 유래와 관련해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부활 이전의 예수님의 세례에 대한 자기이해이다. 예수는 세례를 자신의 죽음에 대한 비유로 묘사하신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막10:38; 눅12:50). 복음서 기자들은 세례요한의 때로부터 예수 부활의 아침까지 물의 세례에 대한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았으며 다만 예수님의 죽음에 그 주의를 집중시켰다.

 

3.신약 성경에서의 세례 이해

 

1)신약 성경적 세례이해의 중심 : 그리스도 사건

(1)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①세례 행위를 하는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형식은 정확하게 지켜졌다.(행2:38; 8:16; 10:48; 19:5; 고전1:13이하)

②“…이름으로”의 표현양식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나타난 구원사건을 암시한다(Delling).

③이 표현양식의 사용을 통한 기독론이 초대 기독론의 핵심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가장 발달된 세례에 대한 신학을 나타내는 바울을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2)롬6:1-11에 따른 그리스도 사건과 세례 사건

①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이 세례의 핵심임을 알 수 있다. 이 본문의 주제는 세례가 아니라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변화이다. 즉 어떻게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는가?’이다.

②이 의문에 답하면서 바울은 세례자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4절이 분명히 밝히는 것처럼 세례는 우리를 그런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수단이 된다.

③종말론적 의미에서 세례와 그리스도 사건은 강력하게 결합되는데 세례는 그리스도 사건과 동일 선상에서 묘사되며, 그리스도 사건은 세례의 근거로서 이해된다.

 

(3)롬6장의 상응구절로서의 골2:11-13

①골2:11-13은 롬6장과 큰 차이를 보여주는데 로마서 6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미래형으로 묘사하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구별하는데 반하여 이 본문은 이 둘을 구별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세례 안에서 이미 일어난 것으로 간주된다.

②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문과 3;1-4을 연결할 때에는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인간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께 맡겨지게 되며 심지어 그리스도 사건 안으로 양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서 6장과 함께 이 본문이 죄에 대한 해방의 주제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 신약성경의 세례에 대한 바울의 틀을 더욱 견고하게 해준다.

 

(4)전체 신약성경에 있는 그리스도 사건과 세례

①기독교 세례에 대한 역사적 관점을 살펴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세례 표현 양식의 분석을 통해, 또 롬6장과 골 2장을 살펴볼 때에 나타난 그리스도 사건과 세례의 관계는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다수 발견할 수 있다(고전10:1-13; 고후1:22).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근본적 세례에 대한 관점으로 간주할 수 있다.

②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우리는 세례의 실제적인 작용에 대한 연구로 더 나아갈 수 있다.

 

(5)근본적인 신앙 성경적 세례관점

인간은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사건과 함께 분리할 수 없이 연결되며, 그리스도 사건에 근거한다.

 

 

2)그리스도 사건과 세례의 관점에 의한 세례의 실제적인 작용

 

(1)죄의 용서

①신약성경에서 죄 용서는 예수님에 의한 죄 용서로서 이것이 신자로서의 입문인 세례와 연결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행2:38; 10:43; 22:16; 롬6:6; 고전6:11; 골2:13; 엡5:26이하 벧전3:21; 벧후1:9; 히9:14; 딛3:3-6)

②세례는 죽음과 부활 사이에 실재하는 것으로 죄 용서를 받은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존재변화를 의미한다.

 

(2)성령의 수여와 새로운 삶의 세례선물

①신약성경에서 세례와 성령은 분리할 수 없이 깊이 연관되어 나타난다.(행1:5; 2:38; 9:17이하 19:44-48; 고전6:11; 12:13; 고후1:22)

②그리고 성령 수여는 새로운 삶의 동인이 된다. 즉 새로운 존재는 새로운 에토스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골2:11-13, 20; 엡4:5, 20-24, 30, 32; 5:1, 8, 14)

 

(3)기독교 공동체로의 편입

①초대 공동체의 성도들은 그들을 새로운 종교의 회원으로 이해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사실은 세례를 하나의“가입예식”으로 보는 관점은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

②신약성경에서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에 언급된 사도 바울의 세례에 대한 두 언급이 모두 세례가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라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전12:13; 엡4:5).

③세례는 인간을 죄 용서와 성령의 수여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며 세례를 받은 모든 개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된다.

 

4.결론

1)세례의 근거

기독교 세례는 그리스도 사건에 근거하며 인간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2)세례의 작용

인간의 죄는 세례를 통하여 용서된다. 그리고 성령께서 세례를 통하여 인간에게 임하시고 인간은 새로운 존재가 된다. 새로운 인간에게는 새로운 행동이 요구되며 이 새로운 인간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 편입된다.

 

5.함께 토의할 내용

1)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세례와 뗄 수 없는 것이라면 세례가 우리의 예배의 주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예배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2)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신비로운’것이라기보다는 ‘법적’이고 ‘실제적인’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발표된 세례의 작용들은 세례를 통해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세례는 형식이며 내용은 따로 있다고 주장해야 하는가?

 

3)발표된 세례의 기원에 대해 살펴볼 때에 세례를 베푸는 자의 자격을 목사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 있다.(요한과 예수님이 베푸신 세례가 세례의 기원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사도가 아닌 자들에게 세례를 위임한 사실을 볼 때에) 어떻게 생각하는가? 개혁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들의 입장은 어떠한가?

 

4)실천신학적인 생각을 해 볼 때에 발표된 결론을 통하여 우리의 세례 예전이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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